세계삼한역사/지리

요코하마가 어딘가.

한부울 2018. 9. 24.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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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가 어딘가.

 

글쓴이:한부울

 

서문
포드회사의 개요
‘T 모델’과 ‘A 모델’ 그리고 고종어차
멕시코 역사
요코하마 역사
현 요코하마 모순 4가지
멕시코에는 왜 유명 자동차메이커가 없을까?
미국, 일본, 멕시코 국가존재유무
재퍼니스(Japanese)와 흰독수리 상징의 역사

1926년 포드회사 동아일보 광고로 본 일본

마무리

 

서문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실 또한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글쓴이의 신념이기도 하지만 자연 속에 역사, 진실속에 역사가 살아 있다는 믿음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서의 다섯 가지 경전인 모세 오경(Torah: תּוֹרָה)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사막의 유목민들이나 애굽의 히브리 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Canaan)"이라는 절대희망의 상징성은 땅이 비옥한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천혜의 비옥하고 사시사철 풍요로움이 끝이지 않는 그야말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환경조건이 그 땅에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 가나안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포함하는 지역, 혹은 요르단 강 서쪽 땅이라 하는 곳을 냉정하게 보면 전혀 성서와 맞지 않는 건조하고도 메마른 땅이 있을 뿐이다.

과연 성서는 희망만 주려 한 것인가.

분명 실제로"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나안이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물질이 풍부하고 아직도 무궁무진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어디라고 해야 할까?

북아메리카대륙이라고 쉽게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떠돌이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국가, 미국은 천상의 조건의 땅에서 부흥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생국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였으며 그렇게 선점한 경제권과 질서통제권은 이제 감히 다른 국가가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막강한 힘의 위력을 자타가 공인하고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넘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강대국으로 19452차 세계대전 후 75년이 가까워지도록 변함없이 세계 전지역을 막강한 힘으로 통제하고 추월을 불허하고 있는 것도 다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고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원에 대해 부족을 느끼지 않는 나라인 것은 틀림없다.

지난 역사에서 천혜(天惠)의 땅으로 존재했으며 꿀이 흐르는 대지 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해양세력들도 처음 신대륙에 발을 디디면서 했던 말이 북아메리카대륙은 천혜의 땅이며 꿀이 흐르는 대지라고 했으며 현재 글쓴이가 지리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형태적 자원이나 생물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생물학적인 자원에서 작은 분석이지만 결과는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은 자원이 풍부한 대지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8세기 중반부터 생성된 세계생물학체계 학명(學名)에서 느닷없이 재퍼니즈(Japanese)란 종명(種名)의 근원지 권역이 세계생물권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일본은 기존 역사대로 말하더라도 절대로 아시아 열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크다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째서 아시아 열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일본이 영어생물학 종명(種名)에서 그 근거지가 아열대, 열대, 온대를 포괄하고 있는지가 의문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변질된 서양판 일본의 역사모호성 때문이라는 결론이 이렇게 내려진다.

일본을 동양일본으로 만들고 열도일본에 들어앉힌 시기가 대체로 2차세계대전이 후라고 볼 수 있고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샌프란시스코화친조약이다.

일본이 동양권으로 들어가야 만이 서양사가 살아나고 서양우월성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동양과 서양 간에 연결되는 매개체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역사조건에서 존재한다.

본래 일본은 서양일본으로써 정체성은 서양이 되어 맞다.

표면적으로 동양일본이 1858년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国条約: Ansei Five-Power Treaties)이란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면서부터 유럽국민국가(Europe國民國家:nation-state)형태의 체제가 되었고 서구해양국가조직들의 발판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구성체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체제를 상대로 하는 무역길드형태의 서양무역연합체라는 것을 성립시켰다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 놀음이 그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미국(US)를 필두로, 영국(United Kingdom), 러시아(Russia), 네덜란드(Netherlands), 프랑스(France)인데 당시 이들 국가를 실제로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많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위 논제 속으로 하나하나씩 따지고 들어가 보도록 한다.

 

(1)Ford established a manufacturing facility in the port city of Yokohama in February 1925, where Model T vehicles were assembled using imported knock-down kits. The factory subsequently produced 10,000 Model A's up to 1936. Production ceased in 1940 as a result of political tensions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After World War II, Ford did not have a presence in Japan, as the Ford facility was appropria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until 1958 when property was returned as a possession of the Ford Motor Company and became a research and development location for Ford partner Mazda.

 

(2)1925 Formed Ford JAPAN TO IMPLEMENT AN ASSEMBLY LINE IN ASIA, assembling about 10,000 vchichles a year with imported components until th 1930s(operations there ceased due to Worlded War II but started again in the mid-1970s).

 

vehicle EN[viːəkl̩]US

차량(車輛) 사람이나 화물을 운반하는데 쓰이도록 설계된 갖가지 차 종류를 두루 일컫는 용어로써 자전거, 자동차, 모터사이클, 기차, 선박, 보트, 항공기를 가리킨다.

 

게시한 (1)번의 영어자료를 보면 19252월에 포드자동차(Ford Motor Company:1903-)가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하였고 모델 "T"차량을 부품들을 수입하여, 조립만을 하는 녹다운 킷(knock-down kits)의 방식으로 조립 생산하였으며 이후 1936년까지 10,000대의 모델A”를 생산하였으나 1940년에 일본(Japan)과 미국(United States)간의 정치적인 갈등에 의해 중단되었다. 2차세계대전후 포드공장시설은 포드자동차 회사에 반환되었으나 포드의 제휴회사 마쓰다(Mazda)를 위해 연구와 개발지원 하는 입장에서 1958년까지 일본정부(Japanese Government)에 의해 건물이 전유되었던 상황을 용인만하고 포드는 당시까지 일본에 없었다고 되어 있다.

때문에 포드는 요코하마에 사실상 1940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940년부터 생산 중단되었다고만 하였지 철수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또한 (2)번의 자료를 보면 (1)자료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부품 10,000대를 1930년대까지 조립하였고 1940년부터 가동이 중단된 상태로 지속되다가 1970년 중반에 다시 가동되었다고 하고 있으며 다른 자료에 보면 1974년에는 수입차 일본 판매 대리점 망을 구축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1979년부터는 마쓰다(Mazda)에 출자를 하고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었으며 2015년에 마쓰다 주식 전량을 매각하고 지분 관계를 끝냈다고 정리되고 있는데 이것은 현 아시아대륙 열도일본의 요코하마에 포드회사 부품조립생산공장을 설립했다는 이야기다.

 

(3)Ford was the first automaker to establish a manufacturing presence in Mexico, as early as 1925. Today there are Ford assembly plants in Hermosillo (Sonora State) and Cuautitlan (Distrito Federal), plus an engine plant in Chihuahua. In total, they have around 6,000 local employees. Historically, Hermosillo has been the home of passenger car production, and currently makes the Fusion, Mercury Milan and Lincoln NKZ models. The Distrito Federal base is the home of pick-up and light trucks (F-series, H215 and LFC models).

 

(3)번 자료를 보면 포드회사는 놀랍게도 지금의 열도 요코하마에 조립공장을 설립한 똑같은 년도 1925년 초(as early as)에 멕시코에서도 자동차 제조공장을 설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것은 멕시코에서 최초의 자동차 회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즉 요코하마에 19252월에 제조공장을 설치한 사실과 상당히 비교되고 있으며 오히려 요코하마 사실과 중복된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게 하는 자료이니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어“as early as”의 해석은 뒤에 숫자가 나와 몇 년 초()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와 다르게 이른 시기, 빨리, 일찌감치 등으로 주관적으로 쓰여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어 1925년 일찍 이른 시기라는 것은 어쩌면 일본열도 요코하마에 설립한 시기 2월과 동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멕시코에 자동차공장을 설립한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요코하마처럼 자세한 일자를 지정할 수 없었는지,  왜 몇 월, 몇 일이라 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을 낳게 하고 있다.

무엇을 감추기 위한 것일까?

그렇지만 오히려 요코하마 보다 사실상 멕시코의 자동차부품공장 설립사실은 매우 구체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멕시코의 소노라 주(Sonora State)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주도인 에르모시요(Hermosillo)와 멕시코 연방구(Distrito Federal) 멕시코시티(Mexico City)북부지역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에 포드 부품조립공장을 두었다고 하고 더하여 치와와주, 치와와(Chihuahua)에 엔진조립공장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지역 전체 약 6,000명의 현지 직원이 고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포드회사의 개요

 

                1925 Ford Model T Touring:1908-1927 (Engine:177 C.I.D. (2.9 L) 20 hp I4 )

 

경향신문 디지털뉴스팀 안광호 기자[자동차대백과]의 기사에 따르면 포드자동차회사(Ford Motor Company)1903616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Dearborn)에서 헨리 포드(Henry Ford:1863-1947)가 자본금 10만 달러와 노동자 12명으로 설립하였다는 사실과 부자들의 전유물인 자동차를 서민들의 생필품으로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1908년 비로소 모델 T”를 출시하고 1913년 첫 대량 생산 시스템인 컨베이어(conveyor)벨트를 따라 이동되고 작업자는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부품을 장착하게 되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저비용으로도 높은 품질관리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대량생산을 할 수 있게 하는 당시 혁신적인 펙토리 운영 시스템을 개발하고 도입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결국 자동차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하는 전설 같은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이 기사에 보면 컨베이어 벨트 조립라인은 부품 조립을 12시간30분에서 무려 2시간40분으로 단축하는 믿지 못할 결과물을 내놓았고 3분에 한 대씩 차를 생산하며 노동시간은 10분의 1 수준으로 단축시켰고, 원가절감으로 이어진 시스템 효과는 급기야 300달러($) 이하로 판매가 가능토록 했으며 생산공정의 개선으로 생긴 이익의 분배는 당시 하루 9시간에 2.34달러($)에 불과했던 임금을 8시간에 5달러($)로 증가시키는 혁신도 가능케 하였으며 당시의 포드회사 공장의 직원들의 임금수준은 동종업종에 비해 최소 2배가량 높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가격 경쟁력은 차 값이 대당 2000달러가 넘는 고가(高價)에서 서민들에게 모델 T’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850달러($)에 판매하였다고 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어쩌면 헨리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에 의해 신생국인 미국이 완성되었다고 하고 있을 정도로 근세기에 또 하나의 역사 변혁을 일으킨 본질이며 그러한 상황은 급기야 북아메리카대륙의 거대한 영토를 하루 생활권에 둘 수 있는 상황으로 곳곳에 연방행정권이 미치게 하고 단숨에 막혀있던 그들만의 역사 만들기에 대한 추진에 대단한 동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이와 같은 운송수단의 급격한 발전은 또 다른 역사조작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되었을 것을 의심해볼 수 있는 이야기다.

 

‘T 모델’과 ‘A 모델’그리고 고종어차

 

위키자료에 따르면 포드 모델 T’(Ford Model T)1908년부터 1927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제조 판매한 자동차로, "미국의 자동차 시대를 열다(put America on wheels)"라는 말처럼 대중화를 이끈 역사적인 자동차 모델이라 하였고 모델 T’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혁신적인 조립라인에 의한 원가절감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가격은 일반 노동자나 서민들이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낮아야 한다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판매 정책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고급 자동차는 2,000달러에서 3,000달러 정도에 판매되고 있었는데, ‘모델 T’의 가격은 850 달러에 불과했고 이어 1920년대에는 300달러까지 떨어졌다고 하였으며 1918년에는 미국 전체 자동차의 절반이 포드 모델 T’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헨리 포드는 1903년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면서 부터 지속적으로 자체 모델을 제작해 왔으며 포드 모델 A’ 부터 시작해서 19번째 모델인 포드 모델 S’까지 제작했고 포드 모델 S’는 이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포드 모델 N’의 후속 모델이었으며 지속적인 모델을 계속 제작하던 포드 자동차 회사는 마침내 1908927일 역사적인 모델 T’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피케트 공장(Piquette Plant)에서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27526일까지 18년 반 사이에 15,007,033대가 판매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1922년 링컨자동차회사(The Lincoln Motor Company)를 매입해 고가품인 링컨 컨티넨탈(Lincoln Continental)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1927년에는 ‘T 모델포드를 마지막으로 출시하는 한편 신형 모델 A’가 생산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차동차가 도입된 것은 1903년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북장로교 선교의사이자 조선왕실부 의사이고 미국공사였던 한국이름 안련(安連)이라고도 한 호러스 N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을 통해 들여온 칭경식(稱慶式) 의전용으로써 당시 알렌이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모델A' 4인승 무개차(無蓋車) 1대를 수입하였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1927년에 출시된 모델A’ 와는 다른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포드 자동차회사 설립이 1903616일이다.

 

포드회사의 최초 '모델A'를 보면 대당 가격은 $800~$900이고 엔진은 수평 장착형 8마력[Flat-2 1668 cc,8hp]이며 유성기어 변속기(Planetary Transmission)에는 2개의 전진 속도와 후진이 장착되었고 형태스타일 4인승 토노(rear-entry 4-seat tonneau)로써 차량무게는 약 562kg 로 기록되어 있.

최고속력은 45km/h 이며 1.8m의 휠베이스가 장착되었다고 하며 이 모델은 처음 붉은색(Red Color)만 공장 출고되었다는 특징이 있고 때문에 고종 어차(御車)가 는 붉은색 '모델A'형인 것으로 파악된다.

최초 출고사실은 시카고(Chicago)치과의사 인 독일계 어니스트 페니히(Ernest Pfennig)1903723'모델A'의 최초 소유자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가지는 것은 포드회사가 미국본토 디트로이트인데 그곳에서 처음 생산된 시기가 1903년 7월 23일이라는 사실에서 어떻게 아시아대륙 한반도 경성에 있었던 고종이 그와같이 마치 한반도에서 생산한 것처럼 빠르게 '모델A'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래 칭경식의 대한 내용을 고서에서 찾았다.

 

[승정원일기]고종 40년 계묘(1903) 313(무진, 양력 410)

칭경하는 예식은 가을쯤에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라는 조령

〈○〉 詔曰, 宮中, 際有痘疹之證, 各國使价之此時邀接, 竊有所難安, 稱慶禮式, 待秋間擇日擧行事, 分付, 養老宴與內外進宴日字以陰曆七月望念間, 更爲擇入, 太醫院都提調卿·少卿, 率醫官入侍, 太醫院都提調卿·少卿直宿, 移接泰寧門外行閣

조령을 내리기를,

궁중에 요즘 천연두(天然痘)의 증세가 있으니, 각국의 사신을 이러한 때에 영접하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다. 칭경(稱慶)하는 예식(禮式)은 가을쯤에 택일하여 거행하도록 분부하라.“양로연(養老宴)과 내진연(內進宴), 외진연(外進宴)의 날짜를 음력 7월 보름과 20일 사이로 다시 택하여 들이라.”, “태의원의 도제조, , 소경은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입시하라.”,“태의원의 도제조, , 소경은 직숙(直宿) 처소를 태령문(泰寧門) 바깥 행각(行閣)으로 이접(移接)하라.”하였다.

 

위 기록사실을 보면 칭경식이 음력으로 715일에서 20일 사이에 실시한 것으로 보이며 양력으로는 190396일부터 911일까지로 계산된다.

 

조선말기 특히 1903년에는 위 기록에서도 나타나지만 천연두가 궁중(宮中)에 발생하여 많은 의사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인지 알 수 없지만 진보된 의학기술이 축적된 서양의사, 양의들이 조선말기에 많이 등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때 선교사라고 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정치브로커(broker)였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에서 처음 밝힌 이야기지만 1881년은 대조선이 어쨌던 모한 세력에 의해 정부통제의 힘이 마감되고 해체된 해임을 밝혔다.

물론 상징적인 귀족들은 무사 했을 것이지만 기존 정부 각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그것을 친일파 각료들이라고 하여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억압주체가 일본제국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이라는 것이 틀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제국이란 명칭 뒤에 숨어 있는 강력한 힘의 세력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은 오늘날 우리 역사혼란을 증대시키는 요인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1885년에 개원한 제중원(濟衆院)은 조선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병원이다.
그런데 제중원 운영권을 미국북장로회(PCUSA)선교부로 이관하였는데 1894년에 이미 조선 정부는 일본인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의료 선교사 한국명 어비신(魚飛信)이라고도 하는 올리브 에비슨(Oliver R. Avison:1860-1956)의 요청을 수용하여 미국북장로회(PCUSA)에 제중원을 이관했다고 알려진다.

이 북장로회는 스코틀랜드의 교회와 장로교인들이 처음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던 식민지 시대에 기원하고 미국독립이후 새로운 국가의 장로들에게 국가적인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서 조직된 단체이다.

거의 국가형태를 갖추고 1868년 남북전쟁 때 노예제도 때문에 남북으로 분활되었다는 것을 볼 때 정치현황에 민감하게 움직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고 미국선교사협회(ABCFM: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와 1870년 재결합했다.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여기서도 왜 제중원을 미국북장로회로 이관시켰을까 하는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한반도 역사는 이 때 조선말기 억압주체가 분명 일본제국이라 했다.

당연히 억압주체가 일본제국이라면 일본제국과 관계된 이해관계자에게 이관해야 할 것인데 일본이 아니라 미국 그것도 북장로회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억압추체가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고종40년 1903년은 사서(史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거의 사실로 판단이 되고 있는 미국의 필라델피아 피터 브라운(Peter Brown)박사의 딸 에밀리 브라운(Emily Brown)양과 19038월 미국, 영국, 일본 외교관들이 보는 가운데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하는 년도이다.

 

물론 이 해에 고종 칭경식(稱慶式)도 있었다.

조선말기에 식민주의적 한국제국의 이권침탈에 안내 역할을 한 인물이며 고종의 수행비서관 겸 주한미국공사로 알려진 호러스 알렌(H. N. Allen)은 의전용 어차를 수입한 장본인이다.

이 어차는 '모델 A'형 4인승 무개차이다.

그런데 그는 이 해 61일부터 특별한(?)휴가를 얻어 서울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항해해 미국을 방문했다고 하며 그 기간을 6개월을 잡고 있고 그가 비로소 휴가를 마치고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312월초순 임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칭경식이 끝나고 난 후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알렌이 휴가를 시작하기 이전에 포드 첫 생산모델 모델A’를 어차로 구입해 놓고 휴가를 떠났다고 보면 61일전이니 시카고(Chicago)치과의사 인 독일계 어니스트 페니히(Ernest Pfennig)가 소유한 날짜(7.23)보다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는 알렌이 어니스트 페니히 일 가능성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어쨌거나 포드가 생산하는 최초 출고되는 모델A 를 어차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당시 상징적인 황제 고종에게 포드가 최초 출시된 자동차 '모델A' 를 제공하고 이것을 어차(御車)로 사용하도록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기서 자꾸 이야기 하지만 미국공사라고 알려진 '호러스 알렌' 이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특히 알렌이 한국에 잠입할 당시 국내법으로 불법종교인이기 때문에 당시 미국공관소속 의료책임자로 신분을 속이고 들어왔음도 알 수가 있다.

어쩌면 북장로회가 유대자본을 주도하거나 국제금융조직을 조정하여 적극적으로 선교사업을 추진했을 수도 있다.

때문에 비밀요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미국(국제금융조직)의 첩자일 가능성이 많고 또한 조선의 고종을 움직여 이권을 강탈했다는 의심을 받았던 인물이 알렌이다.

알렌은 의사이기 전에 미국기독교교회(Presbyterian Church in U.S)의 외국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소속의 선교사라고 알려지고 있는데 미국은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가라고 단정지을만한 근거가 없었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때문에 더하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선교는 정치브로커활동이었을 가능성도 솔직히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그들의 기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필요에 의해 장로교회, 유대자본, 국제금융조직등이 고종(高宗)을 예우하고 정치적으로 복종은 하지 않았더라도 그 권위를 어느정도 보장하려고 노력한 주체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1881년에 조선이 해체되었다는 사실과 조선의 모든 권한은 어떤 주체에게 위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각해볼 때 미국과 일본은 동일선상에서 조선을 상대했다고 볼 수 있고 적어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나는 통제조직이고 하나는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금융조직으로 체제 내부로 깊숙히 파고 들 수 있는 조직이며 그러한 미션(mission)을 위해 자본을 조달과 조정하는 임무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이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년도는 일본을 앞세워 러일전쟁이 발발시키고 러시아가 패한 1905년부터라고 판단할 수 있고 1887년부터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 재임:1913-1921)은 미국 행정학 성립의 기초가 된 논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stration)를 발표함에 따라 국가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점차 국가체제가 성숙해졌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이 윌슨은 미국대통령으로 1913년에 취임하여 한반도 역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민족자결주의선언을 한 장본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따져보면 이것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자결주의라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가 한 정책을 보면 연방정부의 힘을 강화하고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1910년에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를 침공하여 베라크루즈(Veracruz)를 무력 점령하여 당시 멕시코의 우에르타 정권(Victoriano Huerta,재임:1913-1914)을 몰락시켜버렸다는 사실이 있다.

당시 멕시코는 군웅활거시대였다.

개인적으로 카톨릭과 군주제 혐오가 있기 때문에 황제의 퇴위와 민주정부 수립을 내걸어 2차세계대전을 촉발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우드로 윌슨은 조선에게 독립을 주선한 것이 아니라 고종 지위를 강탈하고 완전하게 파괴시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자결주의를 주장한 것은 1차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에서 패전한 동맹국(同盟國)측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독립시킨 식민지에 대한 자결주의일뿐이고, 승전국인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함으로써 많은 괴리를 불러 일으켰다는 비난도 받는 인물이다.

우드로 윌슨대통령이 한 정책 중에 또 한 가지 특별한 것은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에서 밝히길 동아일보 창간지(1920.04.01)에 미국(米國)육군 상비병 유육(紐育)발전(發電)이라는 제목과 함께 미국은 육군 상비병원을 300,000()정하기로 국회에서 결의하였다고 보도한 사실이다.

이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교회와 국제금융조직을 위한 병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런 국가체제의 자신감은 조선(朝鮮)의 동양 한국계신문(동아, 조선, 매일신문)들의 정간조치를 해제시키고 발행을 허가 하였는데 모든 기사는 미국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고 비난 받았던 뉴욕월드(New York World)와 뉴욕저널(New York Journal)을 그대로 옮겨 번역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국제금융조직이 만든 미국기독교교회(Presbyterian Church in U.S)의 외국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의 소속인 알렌은 조선말기, 대한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고종의 약점을 잡고 조선내부에 파고들게 한 것은 이러한 조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상 이권들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알렌은 적극적으로 그의 저서에서 부정하고 있지만 어쩌면 고종과 결혼에 이르게 한 에밀리 브라운(Emily Brown)사건도 그의 영향권 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처음부터 의도하거나 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의 변명은 이 결혼식이 거행된 시기가 알렌이 휴가 기간에 벌어진 일이라 하여 이일과 무관하다고 하지만  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알렌이 이를 몰랐을 턱이 없다.

세기의 미국인 평민과 결혼식을 거행한 고종은 아마도 외교적으로 더 많은 것을 잃었을 수도 있다.

 

한반도 역사나 근대사를 바탕으로 보면 불과 $800 밖에 되지 않는 모델A’를 인수했던 한반도의 고종은 차 값 보다 수송비가 더 소요되었을 것인데 이것을 알렌이 책임졌다는 이야긴지 황실재정에서 충당하였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자료가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멕시코 역사

 

요코하마를 이야기하기 전 멕시코의 역사부터 보자.

현재 멕시코의 집권여당 제도혁명당(PRI: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과 야당 민주혁명당(PRD)은 둘 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에 가입되어 있고 여당은 1929~2000년 및 2012~2018, 77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독점적 통치에 각종 사회 모순이 축적되어 국민들은 정치적인 비판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관심도 부족하고 정부를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과거 스페인으로부터 300년간 지배받던 것을 비로소 1821년에 독립을 하였으며 그 이후 약 100년간 혁명가들의 군웅활거가 시작되었으며 크리스테로 전쟁(Cristero War or Cristero Rebellion:192629)으로 알바로 오브레곤 살리도(Álvaro Obregón Salido,1880-1928)가 암살되고 난 후부터 혁명가들에 의한 정치혼란이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수많은 혁명가에 의해 나라가 풍비박산이 난 형태와 특히 국가가 아닌 상태의 미국과 철저하게 엮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824년 설립된 코아우일라이테하스 주(Coahuila y Tejas)에는 헌법으로 미국 이주민의 정착을 인정하였고 코아우일라(Coahuila)성과 테하스(Tejas)성의 두 성()으로 나뉘었으며, 1835년에는 앵글로 색슨계(영국+독일혼혈)이주민이 반란을 일으켜 1836년에 멕시코령() 테하스는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을 했다.

이후, 미국이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하자, 1846년에는 텍사스를 둘러싸고 미국과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멕시코는 멕시코시티를 점령당하고, 1848년에 패배하면서 텍사스를 미국에 매각하였고 뉴멕시코주(), 캘리포니아주()등 광역의 땅을 미국에게 하릴없이 팔았다고 되어 있다.

결국 이때부터 멕시코는 리오 브라보 강(Rio Grande, Río Bravo del Norte)이북의 영토를 상실했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선조가 일구어 놓은 땅도 마구 팔아먹는 멕시코는 어떤 존재였는지가 뚜렷한 것이 없다.

미국자본의 용병으로 또는 현 미국의 전신으로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며 멕시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1910년 이후이다.

1910년은 우리에게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사실이 있는 해이다.

아무리 부패하여 재정에 핍박을 받았다고 하지만 단돈 몇 푼을 받고 엄청난 자원이 산재한 영토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질 수 있는 국가체제라고 그것은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국가를 어떤 국민이 믿을 수가 있을 것인지 판단할 문제이다.

그래서 그런지 멕시코는 본래 구심점이 없고 인종차별의 국가인 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거의 국가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북미권의 메스티소(Mestizo)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토착민의 인종적 혼혈인을 기반으로 한다.

이 혼혈 상황은 식민지 동화작용에 결과이다.

종족구성을 보면 메스티소(mestizo)60%, 인디오(원주민)30%, 멕시코출신 백인(Criollo)9%, 기타 1% 이며 하층인민인 물라토(mulatto), 삼보(Sambo)역시도 백인과 흑인,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이다.

유럽인들이란 좋게 이야기하면 해양세력들이며 나쁘게 말하면 바로 해적들이 아닌가.

또한 유럽대륙으로 들어가지 못한 유럽인과 아직도 남아 있을 법한 마야인(Maya)들 구성원들을 모두 합해 국민의 88.0%가 유럽인과 원주민사이의 혼혈인이라 하니 딱히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도 쉽게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원주민이 3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학살과 1521년 스페인 침공으로 인한 전염병에 의해 희생된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여간 본 블로그 글 "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5"에서 스페인의 침공이 있기 전 아메리카의 인구는 대략1억여 명이었으나 이 중 90%이상(90,000,000명)이 1518년 유행한 천연두란 역병으로 몰살했다고 밝힌 사실고 같다.

스페인어 명칭 '멕시코(México)'라는 이름은 본래 수도 멕시코 시에서 왔기 때문에 도시 명에 불과하며 발음도 우리가 아는 멕시코 보단 메히꼬(mejiko)’라고 발음해야 맞다.

즉 멕시코라고 국명으로 부르지만 확실하게 전통성이 있는 국가명칭이라고 볼 수 없다.

고서(古書)에는 멕시코를 묵서가국(墨西可國), 묵국(墨國)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멕시코란 국명과 동일하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본 블로그 글 "흑조(黑潮)의 진실이 주는 일본의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9"에서 글쓴이가 말하길 묵서가(墨西哥)의 묵()은 본디부터 검은(Black)’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의 합자(合字)이고 묵()'아궁이에 생기는 그을음' 본뜻이 있어 이 그을음을 현 멕시코 만()의 바닷물이 검은 색으로 변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흑조(黑潮)' 혹은 `검은 찐득이', ‘얼룩'으로 불리고 검은 물덩어리(水塊:water parcel)이라 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묵()이 멕시코 만이라 하면 묵에서 서쪽에 위치하니 묵서(墨西)가 된다고 볼 수 있고 가()는 문장 끝에 자주 쓰이는 조사의 하나이기 때문에 붙여 묵서가라 했다.

그렇다면 과연 묵서국이 멕시코가 확실한가.

확언 할 수 없다.

 

요코하마 역사

 

 

위 멕시코 지도를 보면 위 세 군데 지역은 포드자동차가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멕시코시티와 가까운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도와 가깝다는 사실 때문인데 요코하마도 도쿄와 가깝다.

쿠아우티틀란이란 어원은 나와틀족어(Nahuatl)나무들 사이란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도시와는 거리가 있는 이름이고 이 도시의 설립년도는 1861년이다.

반면 요코하마 촌은 단기간에 거류지, 부두, 공물을 상납한 세관 등 국제항으로써의 체재가 정돈되기 시작하여 185971일에 요코하마 항으로써 개항했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도시 설립년도는 서로 불과 2년 차이다.

이 요코하마 촌에서 1854331일 미()해군의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와 일본의 막부의 전권대신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사이에서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神奈川条約)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코하마 촌이라 하였지만 이곳의 진짜 이름이 가나가와(神奈川)이고 관동(関東かんとう)지방의 현()이며 가나가와정(神奈川町)은 동해도(東海道) 역참(여관)중에 하나라고 하였고 지금에는 요코하마시(横浜市)의 구()중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가나가와란 한문명칭에 우리는 천()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한문으로 신내천정(神奈川町)()의 하천 경계우리나라의 리()정도의 그런 의미이다.

네이버백과사전에서 촌()(나무 목)(마디 촌)이 합쳐진 글자로, 수호신으로 삼는 큰 나무()를 중심으로 질서 있게() 모여 산다는 데서 '마을'의 뜻이고 엄격하게 보면 나무사이의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란 어원과 비슷하다.

요코하마 촌()이 아니라 가나가와 촌이어야 맞고 바다나 강이 아니라 천() 즉 하천 정도의 경계를 가진 촌임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쿠아우티틀란에는 수많은 하천이 잘 정비되어 좌측에서 남북으로 흐르고 수로가 곳곳에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일본 근대사가 야단스럽게 포장하여 페리의 흑선(黑船)을 부각시키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태평양함대사령관 운운하던 미국(美國)과 일본수호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는 장소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쿠아우티틀란이 멕시코시티와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요코하마가 도쿄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과 동일하게 보인다.

 

 

 

요코하마 촌의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미국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당시에는 국교를 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태평양함대미국사령관이었던 매튜 캘브레이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지휘하는 외국 함선이 내항하고서부터라고 하고 있다.

태평양 항로의 거점이자 포경을 위한 공급 기지로서 일본의 항구를 이용하는 것을 바랐던 미국 해군의 외국 함선일행은 무추라번(六浦藩:Mutsuura) 고시바촌(小柴村:Koshiba-mura)에서 2개월 동안 정박하며 막부의 대응을 기다린 후에 요코하마 해로 들어갔으며 그 후 막부는 요코하마 촌의 응접소에서 외교교섭을 실시했다고 하였고 교섭의 결과 1854년에 요코하마 촌에서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하였다.

요코하마촌으로 들어가기 전 우라가(浦賀)뿐만아니라 무추라 번 고시반촌에서 2개월 동안 정박했다는 사실도 추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요코하마가 아니라 가나가와 촌(, )이었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현재 일본열도에서 위 지명들을 찾아보면 거의가 바다와 접해있는 명칭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2개월 동안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함선 내의 점검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내륙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경우에 수단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현재 요코하마의 지도를 보면 그때 동선 모두가 거의 같은 해역에서 머물 수 있는 지명들이 나열되었다는 사실은 신뢰를 할 수 없는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적어도 어떤 주 항구로 들어가 함선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작은 배를 이용하여 내륙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여 현 일본 열도의 지명이 될 수 없고 위치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코하마 촌은 막부가 설치한 공물을 상납한 세관을 경계로, 남쪽을 외국인 거류지(요코하마 거류지), 북쪽을 일본인 거주구로 하였다.

경계에는 관문이 놓여 관문으로부터 외국인 거류지 측을 간나이(関内), 이외를 간가이(関外)라고 불렀으며 외국인 거류지에는,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이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국의 외국 상관이 줄지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외국인 거류지 안에 형성된 중국인 상관을 기원으로 하며 일본인 거주지는 요코하마 정()이라고 이름 붙였고 188941일 시() 제도가 시행되는 것과 동시에 시()가 되어 요코하마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요코하마는 본래 다마 구릉(多摩丘陵) 임해부(臨海部)의 사주(砂洲)상에 자리한 한 촌이었다고 하며 다마 구릉이라는 것은 산보다 높지 않는 언덕이나 표고 100~180m의 높이의 구릉을 말하고 있는 것을 형태적으로 볼 때 근대 역사가 완성되고 난 후에 붙여진 지형임을 짐작이 가능하다.

 

현 요코하마 모순 4가지

 

현재 일본열도 가나가와현은 요코하마의 산업경제의 중심이 되어 임해매축지(臨海埋築地)에 제철·조선·자동차·기계·식품 등의 대단위 공장이 입지하고, 내륙부의 공업지화도 현저하여 호도가야(保土도즈카(戶塚오후나(大船)등지에 많은 공장이 들어섰다고 하고 있다.

공업제품의 출하액은 수송용 기기·식품·전기기기·화학제품·석유제품의 순이고, 비단 스카프는 생산규모는 적으나 전통공업으로 유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가나가와현에 아메리카 부두라는 뜻의 메리켕 하토바(メリケン波止場)’라는 대부두를 비롯하여 신항(新港)부두·야마시타(山下)부두 등을 중심으로 항만설비가 완비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1950년부터 한반도 전쟁 특수를 이용한 경제 재건시점인 60년대 이후에 시설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당연히 1945년 이전의 요코하마의 발전상황이 아니라는 부언이다.

위 메리켕이라고 하는 명칭은 미국을 나타내는 말인데 미리견(米利堅)이라는데 본래는 미리견(彌利堅)이다.

 

그렇다면 서두의 영어자료에서 설폈듯이 현 위치의 요코하마가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요코하마 포드자동차회사가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태평양전쟁 후 미국이 일본을 완전히 지배하는 입장에서 부동산이나 동산 모두가 포드회사의 재산이니 반환되어야 했고 포드회사가 요코하마 공장설립에 쓰였던 자금을 회수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본 요코하마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기존 설비에 대한 사용상황은 당시 미국하수인에 불과하던 일본정부에 의해 전유되었다고 한다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제로 열도 요코하마에는 포드 자동차부품제조회사가 설치한 부동산과 설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만약 존재하였다면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남아 있는 부동산과 설비들을 이용하여 포드회사가 왜 생산을 재개하지 못하였을까?

승전국인 미국(米國)이 일본을 지배하면서 자국의 포드회사에게 자동차 생산 재개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이야기다.

왜 미국정부는 포드자동차회사의 소유물을 관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미국정부의 도움아래 포드회사 입장에서는 아시아대륙을 겨냥하여 본격적으로 부품생산에 만족하지 않고 완성품을 생산하려 했을 것인데 이를 미국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당시 아시아동부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중공(中共)은 죽의 장막을 드리우고 자본시장을 막고 있었다 한다면 잠재적인 일본경제와 그외 아시아경제의 무궁한 잠재성장가능성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포드 완성차공장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문제는 과연 일본 열도 요코하마에 애초부터 포드 자동차 부품 공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열도 요코하마에 포드자동차 회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존 역사가 말하는 열도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投下)된 핵폭탄 2발의 정황도 믿을 수 없는 것일뿐더러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둘째) 현재도 그러하겠지만 국제정세가 불안하고 언제든지 투자금액을 한꺼번에 사장시킬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던 때 국가가 아닌 자동차회사가 나라 밖, 즉 국외 공장설립과 투자를 하고 그것에 따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선 정치적인 큰 모험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포드회사는 무엇보다도 큰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험신호를 충분히 받았을 것이지만 어디에도 설립 후 정세불안을 이유로 요코하마 공장 철수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물론 열도 일본 요코하마에 포드 부품 공장을 설립해야 한다는 판단을 할 때 이러한 모험도 고려되고 미래 아시아 자동차 시장을 염두에 두고 심사숙고 끝에 포드경영진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그럼에도 포드회사가 위험을 감수하고 19252월에 열도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고 한다면 그것에 상응한 경제이득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에 대한 아무것도 경제적인 해택이나 이익되는 징표가 나타나는 것이 없다.

일본 요코하마에 자동차공장을 설립해야 될 이유는 일본세격은 서구무역연합체 조직이므로 그 구성원들이 모두 서양인이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즉 포드회사는 유럽 공략의 일환이었다.

아시아열도에 당시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근대사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서양문물이 번성했다고 볼 수 있는 근가가 없다.

일단 지금의 열도는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지리적 환경적인 불리함이 분명히 존재하고 높은 운송비용 뿐만아니라 향후 리스크에 대한 위험을 충당할 수 있는 보험비용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한 비용을 감수하고도 포드이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이익이 보장되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일단 1925년이라면 미국소유의 파나마운하(Panama Canal)1914815일에 완공되었고 개통된 상태이기 때문에 남아메리카대륙 남단을 돌아가는 고운송비용은 면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파나마통과와 태평양횡단에 대한 운송비용문제는 포드회사경영진에겐 부담이 컸을 것이다.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넓고 긴 운송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해로로 곳곳에 기후도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상선이 수송동안의 위험은 엄청난 것이다.

근면한 일본인들의 생산성을 기대하여 그것을 노렸다고 하지만 포드회사가 부품에 대한 원가절감효과보다 외부적인 환경을 감내하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지 않음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미국 본토와 연결되고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멕시코 대륙 현지가 더 바람직한 것이며 경제논리를 따르더라도 포드회사에게 훨씬 유리했음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아시아의 열도 일본 요코하마에 포드회사가 자동차부품공장을 설립했을까.

 

(세째) 이러한 사례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시가지와 항만 시설 등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인 19455월에는 미 육군의 폭격으로 시가지의 42%가 파괴되었다고 하였던 곳이 바로 열도 요코하마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주지한 것처럼 포드자동차회사가 19252월에 열도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 하였다는 것은 또 무슨이야기란 말인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기가 정확하게 192391115832(일본 표준시)에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사가미만(相模灣)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라 했다.

 

                                                    [관동대지진과 가나가와현 지도]

 

위 사진을 보면 관동대지진 진앙지와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의 직선거리가 34.72km 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초토화된 피해발생지역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리다.

가나가와현은 바로 1858년 미 해군 함장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와 일본의 막부의 전권대신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가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체결한 장소이라고 하는데 지진이 발생하여 시가지와 항만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면 복구시간이 불과 15개월 남짓 흐른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포드자동차회사가 공장건립을 기초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란 이야기다.

한번이라 하겠지만 시가지 전체가 초토화된 지역에 재발가능성도 생각하지 않고 무엇때문에 엄청난 투자비를 쏟아부으며 공장을 설립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태평양을 건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리고 엄청난 후유증이 남을 수밖에 없는 지진이란 자연재해를 당한 요코하마에 포드자동차 어셈블리(assy)제조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은 실로 만화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네째) 정치적인 문제라고 하겠지만 미국에서 이렇듯 일본에게 투자하였지만 캘리포니아주()에는 일본 사람이나 일본의 문물, 사상, 언어, 정치 따위를 배척하는 배일(排日)사상이 엄청났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동양계 열도일본인만 일본이라고 하였다고 볼 수 없다.

동아일보 1921411일자를 보면 배일사상에서 당시 논평하길 다음과 같이 하였다.

일영동맹(日英同盟)은 미국(米國)에서 매우 평판이 좋지 못하며 영국이 무슨 이유로 이 동맹을 계속하는지를 미국인들은 의아해하는데 일영동맹은 순연한 방어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미국이 일본에 대하여 부정당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이 조약이 영국으로 인하여 미국에게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미국 내의 배일(排日)운동가가 생각하는 것은 일본이 크게 일영동맹을 신뢰하여 의지하기 때문에 가주(캘리포니아)에 있는 일본인대우개선에 대한 대담한 요구를 감히 미국에게 제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자료가 말하는 것처럼 불과 4년이 지난 후인 19252월에 포드자동차(Ford Motor Company:1903-)가 열도 일본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 하였다.

만약 요새 같으면 배일사상이 비등한 미국시민들의 여론을 역행한 포드회사의 자동차를 가만히 두었겠는가.

아마도 전국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요코하마와 멕시코의 비교

 

                                                [1846-1848 멕시칸 전쟁 지도]

 

그렇다면 이제부터 요코하마가 실제로 존재해야 할 위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자.

사실 미국이란 군사주체가 멕시코와 전쟁을 한 시기가 상당히 의심쩍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미국은 국가로써의 자체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한 시기로써 정식적인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위 멕시코전쟁(The Mexican War:1846-1848)의 지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한 위치가 캔자스주의 레번워스(Leavenworth, Kansas)와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즈(New Orileans, Louisiana), 텍사스주 남부 산 아토니오(San Antonio)와 코퍼스크리스티(Corpus Christi)에서 공격한 것이 보인다.

매우 산발적이고 미국이 존재했다고 하는 동부에서 출발한 군사 움직임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1858년 요코하마 가나가와현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는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0년 전에 끝난 멕시코전쟁에서도 참전했다는 사실을 자료에서 알 수가 있다.

위 지도에는 뉴올리언즈에서 출발한 함대(艦隊:fleet)가 마타모로스(Matamoros), 파누코 강의 북쪽 제방에 있는 탐피코(Tampico)와 남쪽해안에 있는 베라크루즈(Vera Cruiz)를 공격하고 있다.

흑해(黑海), 흑조(黑潮)라고 하는 멕시코 만(Gulf of Mexico)을 통해 당시 미군들이 들어갈 수 있는 멕시코 동해안 두 도시는 큰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라고 알려진다.

그렇게 유명했으니 미군(米軍)들이 그곳으로 진격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특히 위 지도에 붉은 화살표식의 멕시코 군들의 진로상황을 볼 수 있는데 매우 빈약하거나 보잘 것 없는 진영으로 그것도 모두 중앙에서만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아예 해안이나 경계북쪽, 또는 서부지역은 방어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멕시코만 연안 도시 마타모로스(Matamoros)에서 후퇴하여 멕시코 동북부에 있는 코아우일라 주의 주도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여 멕시코의 디트로이트로 불리는 살티요(Saltillo), 그리고 세드랄(Cedral), 산루이스포토시주의 주도 산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i)만 왔다갔다하였을 뿐 외곽지는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기껏 방어했다는 지역이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스주의 주도 할라파(Jalapa)정도이다.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파누코 강 하구에 있는 탐피코(Tampico)는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미군들이 자유롭게 움직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1840년대의 멕시코이니 이 전황(戰況)만으로도 당시의 멕시코란 국가체제를 어느정도인가를 알 수 있고 체제자체를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니면 실제로 체제는 다른 조직이 있었고 현재 미국과 멕시코는 그들의 국부적인 영역때문에 충돌이 있었던 것을 확대하여 만든 것이 아닌가도 한다.

멕시코전쟁은 많은 것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하마가 멕시코에 존재했다면 어디를 지정할 수 있을까?

현재 멕시코 내 포드회사가 존재하고 있는 곳을 보면 북쪽 소노라주(Sonora) 에르모시요(Hermosillo), 치와와주(chihuahua) 치와와(Chihuahua), 그리고 멕시코주(Mexico)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에는 현재도 포드회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3개주()에서 요코하마를 찾을 만하다.

이 세 개주에서 각 지정된 도시들을 자세히 보면 현재 일본 열도 요코하마처럼 직접적으로 바다와 접한 곳은 없다.

그러나 소노라주(Sonora)의 에르모시요(Hermosillo)는 캘리포니아 만(Gulf of California)과 연결된 소노라강(Sonora river)이 도시 사이로 흐르고 에르모시요에서 소노라강과 미겔강이 합류하는 하천이 도시사이로 흐른다.

때문에 의사이며 동물학자인 에드거 알렉산더 머언스(Edgar Alexander Mearns)가 수생 포유류 모피로 유명한 비버의 가장 남쪽 범위를 정하게 된 배경에서 1907년 비버(beaver 학명:Castor canadensis)를 이 소노라 강에서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어 이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다.

또 한 도시 치와와주(chihuahua)의 치와와는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과 연결된 리오 콘쵸스 강이 있다.

 

 

이 강의 지류 추비스카르(Rio Chuviscar)는 치와와와 하천으로 연결되며 일단 멕시코만으로부터 리오그란테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 콘쵸스 강으로 들어가고 다시 지류 추비스카르강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지리적 환경임을 알 수가 있다.

1964년 제작된 서부영화 리오 콘초스(Rio Conchos)의 무대가 바로 이 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이시기에 이 지역은 서부무법자들이 설쳐되던 곳이기 때문에 이들을 미군이라고 할 수 있는 배경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곳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바로 멕시코주(Mexico)의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다.

멕시코 만(Gulf of Mexico)과 연결된 판누코강(panuco river:Río de Canoas)이 주강으로써 멕시코 주(State of Mexico)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내륙으로 멕시코 벨리(골짜기)를 지나 투라 강(Rio Tula)을 타고 들어가면 쿠아우티틀란(Cuautitlan)마을과 마주친다.

그들이 함선을 판누코강 하구에 정박해 두고 외륜선이나 이동선을 타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이곳은 모든 환경적 요소를 감안할 때 요코하마의 가나가와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솔직히 멕시코전쟁은 명칭자체가 역사적이지 못한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가 전쟁을 하였다면 멕시코 전쟁이 아니라 미국과 멕시코 전쟁이라 해야 맞다.

당시 서부에는 서부개척자, 살인자, 범법자들이 우글거렸다고 보면 그들이 미국인이라 칭할 때 멕시코를 상대로 곳곳에서 이념이 아닌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여 충돌하였을 경우 그것이 기록이 전해져 이것을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한 것이라고 조작할 수 있는 여지는 상당하다.

미국인이 아니라 멕시코의 한 구성원들이 반란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엄밀하게 따진다면 미국과 멕시코는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보아야 옳지 않겠는가 한다.

 

멕시코에는 왜 유명 자동차메이커가 없을까?

 

그런데 잠시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멕시코에는 유명자동차메이커가 없을까?

서두의 (3)번 자료를 보면 포드회사는 지금의 열도 요코하마에 조립공장을 설립한 똑같은 년도 1925년 초(as early as)에 멕시코에서 자동차 제조공장을 설립하였다고 되어 있다.

더군다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인 뷰익(Buick Motor Company)1921년 멕시코에서 최초로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이라면 얼마든지 기술력을 쌓아 자국의 메이커가 적어도 몇개가 되어야 하지만 멕시코는 현재 트럭이나 사용차만 메이커가 있고 승용차는 자국의 메이커가 없이 전부 현지 OEM 공장뿐이다.

왜 자국메이커가 없을까?

 

멕시코인들의 구성원들을 보면 유럽인, 서양세력들의 유전성과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역사가 존재하고 대체적으로 의타심이 강해 결국 나태와 불만, 분쟁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종족간의 갈등과 인종차별적인 사회계층 분류가 자아 발전적이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 100년 동안 수많은 혁명가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형태가 지속되었듯이 현재는 마약전쟁으로 매일 주검이 생긴다.

선후와 원인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지만 빈민들은 거의가 하층계급으로 사회가 피부색이나 외모로 신분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출신 인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하류층은 본인의 노력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지고 이들 대부분은 성실한 생업보다는 한탕주의에 몰두한다고 알려진다.

경제관념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신용카드 발급 숫자가 2015년 기준으로 12천만 명()의 인구에 3천만 장 정도로 신용이 보편화되지 못한 상태임을 알 수가 있는데 사회가 받아들이면도 그렇지만 매우 저조한 것이 사실이다.

2014 년 기준으로 92백만 장 수준인 한국은 인구가 멕시코인구의 반도 안 되는 5천만 명()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비가 충분히 된다.

멕시코 엘리트들은 정부와 정치를 비난해야 지식인이라는 이상한 의식도 존재하고 정치나 언론 및 경제계에는 주로 백인들이 진출해 있고 상류층은 스스로를 북아메리카나 유럽사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고 있으며 경제 활동 인구 중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은 20% 미만이라는 사실에서 제도권 경제보다 지하 경제 규모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국민전체 융합자체가 힘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멕시코는 2017년 기준 가채매장량(Proved developed reserves) 764억배럴(bbl) 세계19위의 산유국이지만 경제는 세계에서 11위 대한민국과 비슷하게 12위권에 있으며 잠재성장수치도 우리보다 높거나 비슷하다는 사실은 인구나 자원을 생각할 때, 인적 물적 자원 활용 여지에 따라 발전가능성은 높지만 구조적으로 상당히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멕시코는 빈부격차가 심해서 멕시코시티를 기준점으로 북쪽은 유태인 백인들이 비교적 수준 높은 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인디오출신들이 많은데 세계 제일의 부호로 발표된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원주민이 공존하는 사회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글쓴이가 알기론 19세기중반까지 멕시코에는 유럽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북쪽지역이 그러한데 모든 산업발달은 북쪽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도 미국과 접경을 맞대고 있는 것도 있지만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산업계획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유럽인들은 미국본초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실제 유럽대륙으로 이동한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문제는 자동차산업에서 여느 나라보다 일찍 기술력을 확보하고 자력으로 자동차생산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다른 나라 메이커 OEM 생산방식을 택하며 지금까지 답보상태에서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와 국민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른다.

남의 나라를 평가한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역사성에 기인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래 지속된 사회주의정치는 의타심과 불신을 낳고 경제관념이 무디고 국가가 잘되건 못되건 무관심하며 나만 편하고 나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이기적인 경향에다 계층간 차별에 의한 자기발전에 적극적이지 못한 사회구조와 병행한 국민성에 기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멕시코가 요코하마일 가능성

 

그렇다면 포드회사가 분명히 국외(國外) 자동차제조회사를 만든 것은 사실이라면 그곳이 태평양을 건너지 않는 상태에서 운송에 리스크가 없는 안전한 육지로 통행이 가능한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극히 정당한 괴리가 없는 역사이다.

당시 유럽세력들이 상당히 밀집하여 존재하였던 중앙아메리카를 기반으로 하는 또 다른 자동차 시장을 포드회사가 노렸다면 (3)번 자료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연방구(Distrito Federal)의 멕시코시티(Mexico City)북쪽에 위치한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나 소노라 주(Sonora State)의 에르모시요(Hermosillo), 그리고 치와와주의 치와와(Chihuahua)에 엔진조립공장을 설립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요코하마를 멕시코라 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멕시코는 근원적으로 도시이름이라는 어원에서 이를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쓴이의 판단은 1차세계대전 후 근대사가 생성될 시점인 1920년경 우라가, 요코하마 또는 가나가와, 무추라번, 고시바촌 등 멕시코를 국가로 보았을 때부터 멕시코 내에 존재했을 도시들을 생각하게 한다는 이야기다.

멕시코에는 일본이란 서구무역연합체 조직의 흔적이 산재된 곳이다.

사실상 요코하마가 항구라는 등식은 포드회사가 태평양을 건너 수송해야 하는 위치적 당위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어쩌면 항구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태평양을 건너지 않고 북아메리카대륙 철도를 이용하여 육지에 포드계열 자동차제조회사가 설립이 되었다면 구태여 항구나 항만시설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에 더 보태진다.

리오 그란테강이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아니다.

항구나, 항만시설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큰 바다와 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1858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 곳의 이름을 보면 항구가 아니라 하천정도가 흐르는 작은 소()마을이었음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멕시코 내에 현재 자동차회사가 있는 쿠아우티틀란(Cuautitlan), 에르모시요(Hermosillo), 치와와(Chihuahua)가 모두 이와같은 대상에 포함된다 해야 맞다.

 

미국이란 국가와 일본이 존재하였고 2차세계대전(二次世界大戰)까지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로써 체제를 굳히기 시작한 국제금융조직이 점차 세계 지배쪽으로 무게추가 쏠리면서 모든 정책은 군사위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당시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 그리고 카리브해(Caribbean Sea)도서(島嶼)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길드형태의 서구무역연합세력)이 점차 북쪽으로 치고 올라갈 때 미국과 충돌이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형태의 정황을 어느정도 진단할 수가 있다.

이것은 본래 일찍부터 대조선이 일본세력에게 느끼던 갈등이기도 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에서 밝혔던 이야기지만 이미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내 존재하던 추축국이 이미 사라진 마당이다.

또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공영권을 강조하고 일호만협조(日華滿協助)를 강조한 관계가 사라진 것도 미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2차세계대전후 연합국에 의해 실체가 철저하게 제거되고 사라진 상태에서도 195198일에 연합국으로 선정된 48개국을 대동한 미국은 새삼스럽게 일본과의 다시 통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즉 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을 체결하면서 이상하게도 일본은 전쟁전의 일본이 아닌 동양권 내에 일본으로 둔갑하게 하고 변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일본은 2차세계대전 전의 미국 모습이라고 하면 과한 것인가.

 

미국은 일본을 왜 전쟁 전 체제를 유지하도록 만들었을까?

미국이 친일정책 뒤에 숨겨놓은 그 무엇을 우리는 찾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이 독일과 이탈리아는 붕괴시켜 잔재를 사라지게 만든 대신 일본을 살려두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동아시아대륙에서 미국 첨병역할을 하도록 만든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어쩌면 동양열도에 존재하는 일본은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米國)을 적극적으로 도와 미국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하던 잘 훈련된 세력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미국이란 국가가 태동하기 전까지의 역사사실을 끌어안을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하여 일본이라고 명칭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그리고 현 일본이 재퍼니즈(Japanese)라고 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재퍼니즈(Japanese)는 안세이5개국불평등조약(安政五国条約)을 맺은 세력으로써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그 구성원이다.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대등한 해양세력이었지만 일본이 등장하자 구름처럼 근대사에서 사라지고 세계역사에서 소리소문없이 물러나 버리고 북유럽 조그맣게 영토를 잡아 앉는다.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어느날 갑자기 일본으로 바뀐다는 사실 말고는 네덜란드가 소리 소문없이 그렇게 허망하게 추락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무엇이 사실인가.

네덜란드가 식민지배 한 인도네시아가 카리브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로 서양일본이 동양일본으로 둔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한반도에 정작 독립을 주도하는 인사들은 다 숙청되거나 암살되어 거의가 사라져 갔지만 미국에서 훈련받았던 파견된 세력은 미 군정 보호아래 정권을 잡았고 실세가 되었던 것처럼 일본열도에도 동일하게 친미세력들이 정치전면에 나섰고 그들은 새로운 일본이 아니라 과거 일본을 고집하며 그 체제를 유지코자 했던 것이 미국과 이해가 맞아지면서 지금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퍼즐은 오늘날 요코하마가 그것의 실체를 들어내고 있지 않는가.

 

미국, 일본, 멕시코 국가존재유무확인

 

미국인들의 주장처럼 멕시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패전한 멕시코는 미국에게 점령당하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까지 미국인들이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할만한 국가체제였는가는 의문은 수십번 재기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에서 살펴본 바대로 적으면 미국은 적어도 러시아제국 샹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무기감축선언이 있었던 18681129일까지 국가로써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이때 참가국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y), 바이에른(Bavaria), 벨기에(Belgium), 덴마크(Denmark), 프랑스(France), 브리튼왕국(United Kingdom(representing the British Empire), 그리스(Greece), 이태리(Italy), 네덜란드(the Netherlands), 포르투갈(Portugal), 프러시아(Prussia), 통일독일동맹(the North German Confederation(Greater Prussia)), 러시아(Russia), 스웨덴노르웨이(Sweden-Norway), 스위스(Switzerland), 오스만(the Ottoman Empire), 그리고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로 나타나 당시 미국이나 일본은 개최국으로부터 초대받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그 당시 세계 영향력이 있는 국가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첫째로 군사문제를 토의하는 자리이며 무기감축선언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기감축선언에 참가할 수 있는 국가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멕시코가 국가로써의 면목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증명이 되며 주최국 황제인 평화주의자 알렉산드르 2(Alexander II,1818-1881,1855-1881)의 초청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국가로써의 실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배운 근대사에서 이와 같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믿고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무지렁이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미국은 당시 1868년까지 국가로써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역사라고 하여도 비판과 검증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잘못된 사실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바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은 진실조차 눈을 가리고자 하는 어리석음이 존재한다.

 

미국은 1776년 독립되었고 그 이후 독립된 국가주체로써 자본주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근대사만 믿고 있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역사 개념을 정리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이란 주체는 자본주의의 결정체고 자본에 의한 궁극적인 체제를 갖추게 된 어쩌면 유대자본의 결정체라고 해도 외교, 군사, 정치, 문화, 통치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정식 국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당시 미국은 자본력을 가진 집단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오늘날 국제금융조직이라는데 이의를 달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이란 조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대공황 때라고 볼 수가 있다.

아니면 그것보다 좀 더 이른 1920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페리가 미시시피호란 이름의 흑선을 타고 일본에 도착한 것은 멕시코일 가능성이 많으며 멕시코인들이 서구무역연합체에 의해 구성된 용병의 녹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그린고(gringo)라 한 것은 주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본가동맹이며 이때부터 미국이라고 하는 조직체에 의해 멕시코 혁명기는 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즉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거듭 국력을 상승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

1859년까지의 일본은 네덜란드 즉 더치(Dutch)무역에 의한 독점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1858년 우라가(浦賀)에 흑선(黑船)이 들어오고서부터 유대자본가들의 자본이 일본재정을 지배했을 것이란 추측이 있고 이로 인해 유대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체제가 만들어졌으며 당시 하나의 체제주체였던 대조선(大朝鮮)을 상대로 무역행위를 하기 위하여 해양세력들을 규합한 것이 안세이5개국화친조약이며 이렇게 구성된 조직체가 현재 일본으로 나타나고 자체적으로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만든 것이 바로 난학(蘭学)이며 이것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완성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이 동양문화라고 볼 수 없다.

1858년 일본 막부정권으로부터 화친조약을 맺고 새로운 일본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내침과정에 사실상 우라가와 요코하마의 위치가 존재할 것 같은 멕시코 동부해안 탐피코(Tampico)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 멕시코주(Mexico)의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에서 비주류라고 판단되는 새로운 일본세력과 화친을 맺은 것이라고 전체적으로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재퍼니스(Japanese)와 흰독수리 상징의 역

 

 

Fine Japanese Large American Eagle and Stars and Stripes Silkwork Textile Picture, Circa 1885-1900.

The superb large silkwordk depicts a large eagle with wings spread wide with aj silver banner in its mouth with the motto.

E Pluribus Unum-above a shield-form Stars and Stripes with three American flags to each side with ten scattered silver stars above.

 

위의 사진은 자료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약 1885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일본의 대형독수리와 별, 그리고 줄무늬 실크섬유로 작업한 걸개 그림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지만 도대체 Fine Japanese Large American Eagle”란 문장은 역사적으로 혼랍스럽고 답답한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것일까?

눈을 의심해 보지만 실물인 것은 틀림없다.

포토샵한 것도 아니다.

미국 국기로써 상당히 오래된 비단 걸개인 것 같다.

우선 "Fine Japanese" 를 그대로 해석하면 훌륭한, 대단한 재퍼니스로 풀 수 있지만 실체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국기이며 미국상징인 흰독수리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백과사전을 보면 "American Eagle" 는 흰머리독수리로 미국을 상징하는 새라고 되어 있다.

흰머리수시(Bald eagle)라고도 하는데 1766년 린네가 명명한 학명 할리아이에투스 레우코케파루스(Haliaeetus leucocephalus)이며 할리아이에투스속()으로 분류 되는 바다수리(Sea eagle)중 하나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한문으로 백두해조(白頭海鵰)라 하고 그 외 별칭으로는 백두응(白頭鷹), 독두응(禿頭鷹), 독두조(禿頭鵰), 미주조(美洲鵰), 미주응(美洲鷹), 미국응(美國鷹), 미국국응(美國國鷹)으로 불린다.

이를 우리말로 흰쭉지참수리라 하고 이는 두 가지 아종(亞種)이 있으며 흰꼬리 독수리와 더불어 보호종()을 형성한다.

1782년 미국의회에서 미합중국의 국조(國鳥)’로 지정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각 공공기관에서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다. 흰머리수리는 미국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사이에서 신성한 동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흰머리수리의 털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머리와 옷 등에 장식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정리된다.

 

 

白頭鷹, 禿頭鷹, 禿頭鵰, 美洲鵰, 美洲鷹, 美國鷹, 美國國鷹

科學分類

動物界 Animalia

脊索動物門 Chordata

鳥綱 Aves

鷹形目 Accipitriformes

鷹科 Accipitridae

海鵰屬 Haliaeetus

白頭海鵰 H. leucocephalus

Haliaeetus leucocephalus(Linnaeus, 1766)

 

이 맹금류의 성년 것의 몸길이가 1m, 날개길이가 2m 이다.

종명 라틴어(Latin) 레우코케파루스(leucocephalus)의 어원을 보면 레우코(leuco/white)는 흰, 케팔루스(-cephalus/headed)는 머리라는 의미로 흰 머리를 뜻한다.

이것은 미시시피(Mississippi) 야생 생물로 알려지며 위 분포지도를 보더라도 북아메리카대륙이 원산지임을 알 수가 있다.

 

The superb large silkwordk depicts a large eagle with wings spread wide with aj silver banner in its mouth with the motto.

약 1885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비단 걸개인데 거대한 흰 독수리의 문양을 실크섬유질로 작업한 상징물임을 알 수 있지만 도대체 “fine Japanese”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아무리 다르게 생각해보 재퍼니스가 일본이라고 하지만 1885년부터 1900년은 물론이고 그 이전 이 걸개의 상징물을 제작할 1776년 부터 미국은 재퍼니스라는 이야기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미국이 재퍼니스라니...

 

위 영어자료를 풀어보면 최고의 큰 비단 천에 날개폭이 넓고 은색 깃발을 입에 물고 좌우(左右)에 배너를 붙인 큰 독수리를 묘사하고 있으며 배너의 "E Pluribus Unum"란 문구 위에 방패형태의 별과 줄무늬가 있고 그 위에 미국국기 세 개와 각 측면에 10개의 은색별이 흩어져 있다.

 

E Pluribus Unum, the motto of the United States: Latin for "Out of many, one" it refers to the Union formed by the separate states.

E Pluribus Unum was adopted as a national motto in 1776 and is now found on the Great Seal of the United States and on United States currency.

 

위 영어자료를 보면 미국의 모토인 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 라틴어로 "많은 것 중 하나(Out of Many, one)"라는 뜻의 이것은 각기 다른 주()들이 모여 형성된 연합(US)을 가리킨다.

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1776년에 국가적 모토로 채택되었고 현재 미국의 국새(Great Seal)와 미국 화폐에서 새겨져 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이 모토(motto)는 미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스위스 출신의 예술가 피에르 드 시미티에르(Pierre Du Simitiere,1737-1784)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의 격언 "하나는 모든 것으로 이뤄져 있고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나온다."로부터 영감을 얻어 고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방국가인 미국은 평등한 13개 주()가 모여 하나의 국가를 이뤘다는 건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1776년 건국 때부터 이 문구를 국가 인장(印章)에 넣어 왔고 현재는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가 모여 미국이 성립되었다는 의미로 쓰인다고 최종 정리된다.

그러나 이 모토를 제작한 시미티에르는 출신지역인 스위스를 떠난 후, 뉴욕과 필라델피아로 이주하기 전까지 10년 이상을 서인도지역(카리브해도서지역)에서 보냈다고 되어 있고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후 피에르 에우제네 두 시미테레(Pierre-Eugène du Simitière), 피에르 유진 두 시미티에르(Pierre Eugene du Simitiere) 또는 피에르 두 시미티에르(Pierre Du Simitiere)라는 이름의 철자를 썼다고 알려지는데 이렇게 많은 이름이 무엇 때문에 필요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인도지역인 카리브해 지역은 일본(서구무역연합체)의 근원지라 한 본 블로그를 참조할만하다 하겠다.

이 사람도 그 구성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1926년 포드회사 동아일보 광고로 본 일본

 

실제로 1926년 동아일보 광고에 등장하는 포드회사 앞에 일본은 정체는 무엇인가.

 

 

위는 동아일보 1926년 5월 15일자와 1926년 6월 9일자 "일본 포드자동차주식회사"의 "포드T" 광고이다.

이것은 분명 한반도 서울 경성에서 포드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한 광고인 것은 틀림없는데 당시 한반도가 열도일본인들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굳이 '미국포드자동차회사'라 하지 않고 '일본포드자동차회사'라고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물론 생각해보면 '미국 포드회사 본점'에서 일본에 별도 법인을 만들어 한반도에 판매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광고효과가 미국(米國)보다 일본을 앞세우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해서일까 한다.

 

위 오른쪽 광고는 팔각정을 배경으로 하는 싯가 2,870원(圓) 자동차와 왼쪽편에 은진미륵불상을 배경으로 하는 1,810원(圓)자동차광고이다.

이 모두가 한반도 역사배경을 하였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앞에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포드 "모델T"는 1908년부터 1927년까지 생산한 제품인데 1925 Ford "New Model" T 투도 세단(Tudor Sedan)이다.

가격은 동일한 가격인지 알 수 없지만 1926년에는 $360 로 가격이 책정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미국현지에서 판매가격과 낮은 가격으로 대비할 때 당시 원(圓)과 달러($)의 환율은 5:1 정도로 보인다.

 

좌측 광고내용을 보면 "개량 포드 덮개형(幌型)자동차는 5인이 편하게 타고 어떠한 나쁜조건의 도로라도 용이하게 주행할 수 있는 유쾌한 승용차이 올시다. 차체는 길고 도 넓으며 그리고 전체는 4촌반이 작고 좌석은 새롭게 고안한 것이고 걸어앉기가 실로 좋습니다. 가격은 아시아는 바와 같이 저렴하고 조종은 간단하고 또한 비용이 지극히 경제적이 되어 1년 동안 가장 만족하게 타실 수 있습니다."

가격 1,810원(圓)은 경성 또는 부산매도가라고 되어있다.

 

우측광고를 보면 포드쎄단은 조종이 확실한 자동차란 큰 제목아래

"개량된 포드쎄단은 외관이 미려하고 가장 유쾌하게 타실 수 있는 자동차올시다.

조종이 확실하고 주행이 안전함은 포드차의 특장이고 칠색이 화려한 차체와 널직 널직한 차실, 아우러진 장식은 사람의 눈을 끌고 비용이 경제됨과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일찍이 정평이 있는 바이올시다.

사각테두리 옆에 보면 포드쎄단(출입문은 4() 금 2,870(), 그리고 경성 또는 부산매도가" 라고 되어 있다.

같은 시기이니 쎄단은 약 1,000원()가량이 비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가격이야 환율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포드회사의 특약판매소가 경성에 있는 쎄일프레사 주식회사이다.

주소가 경성주첨정(京城 竹添町一丁目)75번지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행정주소로 현재 충정로일가(忠正路一街)이다.

그런데 맨 아래 "日本 -自動車株式會社"란 명칭은 상당히 곤욕스럽게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로 해석할 때 일본은 열도일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마무리

 

이제 마무리 하자.
이글에서 놀라운 것은 미국의 정체이다.
재퍼니스(Japanese)란 명칭을 그렇듯 꼭꼭 숨겨놓고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렇듯 쉽게 찾아낼 것이란 생각은 솔직히 하지 못했다.
왜 일본이 재퍼니스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많이 가졌지만 원체 꼭꼭 숨겨놓은 사실이라 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 재퍼니스를 동양열도일본인들에게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초창기 1776년의 미국은 재퍼니스를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 후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재퍼니스를 멀리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본 블로그 글 "구상나무(Abies koreana)로 본 소나무와 삼한역사 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9"
"에서 밝히길 본래 영어사전에 보면

Jap [dʒæp] a., n.
① (구어·경멸적) =JAPANESE.
② (j-) (미국속어) (야비한) 기습.♣pull a ∼ (미국속어) (숨었다가) 기습하다.
Jap [dʒæp] vt.
(j-) (미국속어) 숨어 기다리다, ┅을 기습하다.

모두 경멸적인 단어로 "Jap" 은 "japanese" 라고 되어 있다.
더군다나 미국속어로 야비한 기습, 숨었다가 기습하는 것을 빗대어 jap(잡)이라 하였고 숨어기다리다, 어디를 기습하는 것도  jap(잡)이라 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 재퍼니스(Japanese)가 일본이라면 일본이란 영어 어원은 당시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서세(영국인)들은 재퍼니스에게 상당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국인들은 영국이라고 하는 브리티시의 식민지의 구성원들이다.
그렇다면 브리티시인들에게 미국인들은 잡이라고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알 수가 있어진다.

아니면 줄여 네덜란드 디치라 하여도 이들도 미국인의 주요 구성인자들이다.

이러한 점을 뒤집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5년 8월 10일자 파리의 신문에 보면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알리는 신문 머리기사로, 신문에는 "잽은 떠났다"("Japs quit")라고 쓰여 있고 제이프스(Japes)는 잽과 원숭이의 합성어라 하여 일본인들을 경멸하였던 것이다.
"Let's Blast the Jap Clean Off the Map(잽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자), 
"Rap the Jap" (잽을 두들겨라),
"Kill the Jap"(잽을 죽여라)등의 슬로건이 널리 유행했다라고 알려진다.
이것은 동양계일본인들에게 미국인들이 취하던 극단적인 행동이다.

당시 미국은 영국의 지위를 누린 것인가.

영국이라고 하는 브리티시는 대조선인 것이 분명하다.

대조선의 지위를 미국이 가진 것이다.

 

                            

현재 멕시코 내에 위치하고 있는 자동차제조회사들을 보면 전부 외국인 메이커이다.

특이하게도 일본 자동차 메이커 니산(Nissan)자동차가 23.5%를 차지하여 기존 멕시코에 정착하고 있는 외국메이커 중 판매가 최고라고 위 도표에도 나타난다.

1959년에 닛산자동차가 멕시코에 진출하고 1961년 멕시코 법인을 설립한 이후 2008년까지 GM에 밀리다가 그 이후 Nissan은 멕시코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줄곧 지키고 있다.

그리고 토요다 6.7%, 혼다가 5.7%, 마츠다 4.2%의 판매점유율이 나타나는데 어쨌던 일본회사들이 멕시코시장에서는 판매가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글쓴이가 살펴본 어떤 현상에 결과라고 볼 수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기아(KIA)5.5%이고 현대(HYUNDAI3.5%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살펴보면 일본 열도의 자동차 산업은 마치 멕시코가 그들의 본토인 것처럼 미국을 추월하는 발전을 이룩한 것이 퍽 이채롭다.

사실상 태평양전쟁으로 초토화된 일본에게 한반도 전쟁으로 인한 군수지원 영향에 따른 경제해택은 실로 우리한반도처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들은 한국을 경멸하고 그들이 앞선 경제 상황을 앞세워 선진국이라고 으쓱이겠지만 출발은 똑 같았다는 사실이다.

일본열도이나 한반도인이나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가난하기는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혜택을 열도일본인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경제부흥을 이루었지만 한반도의 한국은 경제 부흥이 아니라 기존 남아 있던 것마저도 2차세계대전(二次世界大戰)보다 더 많은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하는 민족전쟁 화마에 의해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초토화되어 버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제로상태의 불행한사태를 한반도 한국인들은 도리없이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군다나 지금까지 일본에 비해 약 70년이 넘도록 남북 분단으로 인한 안보비용은 일본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담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60년대 경제에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지만 그 이전까지는 한반도 한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냉정시대에 따른 주위 정세 환경이 주요요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50년대부터 이룬 일본경제발전은 과히 어부지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의 피와 수많은 인명이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면에서 지금이라도 진실되게 반성해야 마땅하다.

일본은 한국전쟁 통에 군사물자를 지원하는 중공업이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경제대국인 미국(米國)의 전폭적인 지원이 3년이란 전쟁기간동안 가속화되었고 냉전시대를 맞이하여 중공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인들이 뛰어나 그런 결과를 맞이했다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

한반도 전쟁은 미국이 전략적으로 접근 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환경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미군의 전초군수기지 역할은 열도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기대하는 일본경제인이나 정치인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열도일본이 멕시코보다 자동차산업이 발달이 된 것은 냉전대립에 의한 정치적인 환경과 전략적인 입장에서도 미국에게 필요한 요건에서 일본보다 멕시코는 불리하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한간에 지난 이야기이지만 미국이 한국전쟁때 군수지원물자를 멕시코에서 공급할 것을 기획했다는 설도 없었던 것은 아닌듯 하다.

열도 일본인들이 미국과 대적한 태평양전쟁의 진정한 적수로써 고도의 기술력을 보유한 것이 사실이라면 열도 일본인들의 자동차산업의 발전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짜 일본인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는데 글쓴이는 방점을 찍는다.

그러한 급속한 고급 산업기술들은 한반도전쟁으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공여되고 전수된 것이다.

근대사는 그렇게 가르쳤다.

진짜 서양문물을 역사적으로 취한 일본인이 될 수 있도록 서방에서 도와야 한다는 사실과 상당한 고급 기술력을 미국(美國)이 공여했던 사실도 기존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 사실과 다르지 않다.

서양문물을 아시아에서 선도적으로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발전시켜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아시아인들에게 일본을 통해 보여줄 필요성이 충분했다고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열도 일본정치인들은 미국인들의 도움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길정도로 눈치를 많이 본다.

어쨌던 그런 덕분에 세계4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어 잘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이 자랑하던 전자산업은 이미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점령하여 소위 기술속국으로 추락한 것이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이 앞서 나갈 상황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더욱 이러한 기술역조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며 향후 통일이 되면 일본경제가 앞에서 알짱거릴 수만도 없을 것이다.

미국이 공여한 기술로 우주정거장에 미국, 유럽우주기술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이것도 미국의 적극적인 기술지원이 아니면 일본인들 한국인의 우주기술처지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주기술력이 서구와 대등한 위치까지 간 아시아중국은 미국기술을 수단과 방법을 동원 적극적으로 모사한 덕분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인류가 필요한 첨단 기술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열도일본은 과거 일본인척 하겠지만 그로인해 앞으로도 그러한 착각때문에 아시아 각국들에게 엄청난 갈등을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지난 시간동안 글을 많이 쓰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오랫만에 쓰는 글이라서 그런지 못내 아쉬움이 많다.

못다한 글은 다음 글로 넘기자.[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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