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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산지 과일 이동에서 밝혀진 역사
글쓴이:한부울
2020년 경자년이다.
경자년은 시작의 해이고 풍부, 풍만의 해이며 물질부분에서 부자의 해이기도 하다.
또한 20의 숫자가 나란히 있는 것에서 올해는 완성에 대한 희망도 크다.
숫자 '1' 이 체(體)가 되고 '2 '가 용사(用事)가되어 움직임 동(動)이라 할 때 완성의 숫자 '10' 이 2(둘)이니 끊임없는 움직임은 완성에 가깝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글쓴이가 생물학적 분석으로 기존역사와 차이가 있는 괴리(乖離)문제를 들여다보길 이미 근 10년이 다 된 것 같다.
그동안 캄캄했던 것들이 이제는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 같다는 위안이 오늘에 잡히는 것도 있다.
서양인들이 18, 19세기 세계생물학분류체계를 만들면서 일본 종(種)을 'JAPONICA'이라하고 사용시작한 것은 1753년이라고 알려진 것이며 린네 식물의 종을 발표한 시기보다 빠르다.
그러니 본래 자포니카를 사용한 시기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근대화를 받아들여 사회개혁이나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매우 자연이치적인 이야기가 되어야 맞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 L. 1753)라고 알고 있는 학명의 식물이 한 예이다.
현재 자포니카로 알려진 일본의 위치는 동아시아대륙 동쪽에 위치한 열도이다.
이것을 불변이다.
그렇지만 당시부터 자연생물학적판단은 일본의 자연적인 위치를 현재 열도지리환경보다 더 확대되어 나타나도록한 것은 그들도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후세들이 이렇게 조작하였겠지만 워낙 현대과학적인 시각에서 괴리차이를 크게 느끼게 하는 것이기에 글쓴이가 이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나서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현상들을 절대로 간과되어서도 안되고 이를 기피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우리는 당시에 서양과학자를 질타할 수 있겠지만 그들도 오늘날 상황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이처럼 무리하게 일본영역을 확대하여 생물학체계를 세울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식물체계를 세우기시작한 18세기시대 서양과학자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을까?
대표적으로 18세기의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을 1758년에 발표한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e:1707-1778)는 개신교 루터교부목사인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혈통에서 처음으로 정립된 성씨를 사용한사람이라고 알려진다.
그는 자신의 스웨덴 농가에서 자라나던 라임 나무의 라틴어인 "Linnaeus"을 성으로 삼았다고 알려진다.
린네는 그의 아버지에게 라틴어, 종교, 지질학을 배우고 중등교육 기관 김나지움(Gymnasium)에서 그리스어, 히브리어, 신학, 그리고 수학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예수회를 해체하기 전까지 예수회에서는 반체제학습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547년 최초의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고 논리학, 라틴어, 법학등 학문능력이 뛰어난 선교사들을 세계곳곳에 배치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린네 아버지도 이러한 교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예수회와 신교(루터교)가 동일한 것은 아니나 예수회가 군대적 규율에 기반하여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교조적이고 수직적인 형태를 가졌다는 것은 기존 반체제학습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반체제에 따른 행동들이 표출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듯 시대가 그들을 우월하게 만들며 그것들이 거역할 수 없는 대세라하면서 출세욕과 공명심으로 가득한 일부 기생학자들의 어긋난 저서활동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설령 그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시정하려해도 세력에 밀려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생물탐사는 상당한 경비 즉 자본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자금력이 뒤받침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이러한 서양학자들의 돌출된 활동을 간단하게 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각해보면 학문이란 정의와 선의만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하는 것도 비판이나 비평이 학문을 더 심도높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생물학분류체계를 세우면서 이러한 역사적인 비판과 비평이 존재하였는지 알 수 없다.
기존 체계가 그들에게 정복되고 난 후 정의의 역사성이나 도덕성과 상관없이 양심있는 후세학자들의 검증은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생물학체계를 봄에 있어 무조건 다 글쓴이가 하는 작업에 대한 공감을 유도해 낼 수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이치로 보는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이상한 여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생물학적 분석과 디옥시리보 핵산(deoxyribonucleic acid) DNA 를 분석한 근원적인 분포범위에 이격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할말이 산처럼 많다.
결국 자포니카라고 하는 일본이란 역사명칭은 그들 해양세력들을 대변하는 역사 상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 그들의 역사정체를 감출 수 있어야 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일본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들어 내지 않기 위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다른 곳으로 변이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이 아닌 아시아대륙에 집어넣고자 한 생물학체계는 그들을 난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야말로 혼돈 그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유럽대륙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서양역사가 아시아역사와 별도로 생성되고 나뉘면서 발생되는 문제로써 당연한 결과라 할 수밖에 없다.
유럽은 곧 자포니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은 이민자들의 영역이다.
세계각 해양세력들이 전부 한 곳으로 집합한다고 할 때 근원과 원산지는 그들의 원초적인 거주지를 포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를 지적하면 아메리카대륙전체가 신대륙이라는 명칭아래 모든 유럽역사 사실이 고스란히 빠졌다는 모순 그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세계생물학분류체계는 본래 아메리카대륙 남북에서 발전된 것이다.
이것이 19세기이후 전세계대륙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존재론적 측면으로 해석한다는 기독교의 창조론(創造論)이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1882)에 의해 1859년에 발표한 저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에서 진화론(進化論)으로 발전 되고 다시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이고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에 의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에 이른 것은 그들이 결코 가져서는 안될 우매한사상이었던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당위성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혼돈으로 빠져들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좁게보면 마치 한반도조선을 지배한 일제가 식민주의적 당위성을 열거하고 합리화시킨 제반논리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세계를 삼한역사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흐름은 그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어야 했다.기획적이고 계획적이라 해도 시작하기조차 힘든 실로 거대한 음모가 전제되지 않으면 거의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만큼 그들은 모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570년 포르투갈에 의해 나가사키가 개항되어 예수회가 점령하다시피하였고 그 이후 네덜란드(Captain:甲比丹,甲必丹,加比旦)가 남만무역을 위해 1609년에 히라도(平戶)에 무역상관의 설립하였던 17세기부터 시작된 서양인에 의해 확대 생산된 유럽화는 일본근원지를 만들게하고 그곳에 생물학 분류체계를 심게되었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지만 현재 동아시아 열도에 이와같은 생물학분류체계가 세워져졌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이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19세기이전역사를 모른다 하여도 또 다른 일본이 존재한 것처럼 확대시켜 놓은 것은 어찌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당장 자연 이치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 분포지에 대한 속명(屬名)과 종명(種名)이 이렇듯 난무하는데는 그들의 어리석음이 있다 할 것이다.
때문에 생물학 전체가 혼란을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 서양과학계는 지금이라도 이를 수정하도록 시정조치해야 마땅하다.
현재 일본열도는 서양우월주의가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 내팽겨친 후유증상(後遺症狀)의 표본 그 자체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일본 종(種)은 거의가 지형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또는 멕시코영역이나 특히 무수히 많은 카리브해(Caribbean Sea)도서(島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본 블로그에서 생물학적 분석에 바탕을 둔 수많은 글을 통해 심도 있게 이를 증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누이 이야기 했지만 일본역사전체에서 들어나는 것은 해양세력의 조직이며 해적집단의 이동이며 이것이 결국 19세기 중엽 서양무역(貿易:trade)연합세력으로 나타난 것임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어쩌면 동인도회사(西洋東印度會社)의 서양주체 주식회사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일본은 대부분 거주지가 고정되지 않고 유동성이 많고 또한 명확할 수가 없는 것이며 더군다나 게르만족의 독일과 더치(dutch)가 서로 섞여 있듯이 혼입된 것과 동경(東京)이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으로 뉴욕(New York), 런던(London)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홍콩(香港:Hong Kong)으로 잔상이 비춰진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7세기초 네덜란드가 일본에 처음상륙하였을 시기 1606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에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런던 회사(London Company), 플리머스회사(Plymouth Company)가 난립한 사실도 사실상 서양국가로 변하기 위한 단초였다.
그들에게 전통(傳統:tradition)이나 정통성(正統性:legitimacy)따위에 말은 실제로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여건에 맞춰'장사아치'란 형태말고 이야기 할 것이 없다.
그들에게 15세기이후부터 아랍역사와 중국역사가 왜 필요했을까?
완충장치다.
거르는 단계가 필요했고 그것들이 확대 재 생산되므로써 오늘날 삼한역사가 한반도에 쳐 박혀 볼 품 없이 재앙의 덩어리 판도라항아리가 되었던 것이다.
16세기 말엽부터 본래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그리고 카리브 해(海)의 무역제해권 다툼에서 포르투갈조직을 밀어내고 차지한 것은 네덜란드라고 하는 더치(Dutch)조직이며 이 조직이 오늘날 국가조직처럼 행세한 회사(會社)이고 이 더치(Dutch)의 무역회사들은 더욱 무역영역을 넓히면서 독점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1596년 본토(本土)암스테르담에서 원국회사(遠國會社)를 설립한 사실이나 1625년 맨해튼 남쪽 끝에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한 것이나 결코 이러한 명칭들은 본래 정통성이 있는 역사가 아니라는데 있고 역사위치 또한 한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지금의 유럽대륙에 존재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 위치를 역사적으로 고수한 것처럼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구가 소수이고 규모가 적어 유럽과 북아메리카대륙을 오가며 지배할 능력이 전혀없었다.
오히려 당시에 강력한 지배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체제 감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은신하기에 바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사실들은 이미 땅 속에 깊이 파묻어 버린 지가 오래된 이야기다.
그들 주체는 국가권력(國家權力)을 참칭(僭稱)한 무역회사일 뿐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들을 제어하던 하나의 체제 삼한세력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것이 진실 된 역사(歷史)이다.
1600년대 초반 아메리카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라고 알려지는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델라웨어(Delaware)주(州)를 뉴 네덜란드(Nieuw-Nederland:1614-1674)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업 활동에 필요한 지역으로 그들의 활동영역이었을 것이며 그들의 발자취를 처음 남긴 곳으로 족했을 것이지만 그러한 활동도 하나의 체제감시때문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역사무소 건물을 건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자치지역(自治地域)허가를 체제로부터 득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예는 아편전쟁(阿片戰爭:Opium War)후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해조계(上海租界)가 설치되면서 외국인 통치 특별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이 비유할 수 있고 특별구(特別區)에 영국, 미국, 프랑스가 각각 조계를 설치하고 ‘공공조계(公共租界)’와 ‘프랑스조계’로 재편되었다는 사실과 거의 같은 것이며 알다시피 상해 전 지역이 아니라 일부 지역만 할양(割讓)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처음 체제의 허락하에 활동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더한다면 그동안 축적한 자본으로 일부 토지를 매입하였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결코 주 전체를 장악하거나 지배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해양서양인들에게는 장사하기조차도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뉴 네덜란드(Nieuw-Nederland)가 애초 존재도 없었던 미국독립에 근거지가 된 사실과 네덜란드인 즉 더치인(Dutch people)들은 미국독립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1775-1783)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직접 참여한 사실에서 지금도 네덜란드인들이 미국사회에서 상당히 우대받는 역사 평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고할 때 미국인에 의해 얼마든지 꾸며지고 사실화나 미화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특이한 것은 해양세력들의 연합체가 일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든 거주근원이 모호하게 나타나며 여기저기 해양을 근거지로 본거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던 시절의 서양일본 주체들은 모두가 주식회사란 조직아래 움직였을 것이므로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시대에 따라 또는 그들의 발전기, 쇠퇴기에 따라 영역 변천이 심했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영구거류영역과 거주지, 정착지, 자치주까지 이것들이 19세기 혼란기에 그들의 국가형태, 영토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그들이 결코 인정치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과거 해양세력이었던 일본 영토는 카리브해(海) 도서(島嶼)지역에 넓게 퍼져 영역이 한곳에 고정되거나 고착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 결론적 판단이다.
물론 그들의 본거지는 지금의 카리브해(海:Caribbean Sea)가 틀림없지만 이들은 어디를 가나 그들의 거처가 곧 영역이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며 이것은 마치 식민주의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그들이 쫓겨다니면서도 지배의식이 강했다는 점이 있다.
이것을 단순히 어떤 한 국가로 보려는 노력은 그들에게 정체성으로 상당기간동안 스스로 도모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포니카라고 하는 일본의 위치는 어딜 말한 것인지를 파악하려 한다.
아래자료는 신중국 중국농업백과전서 자료이다.
중국농업백과전서(中国农业百科全书)를 통해 중국과수업발전사(中国果树业发展史)를 일편할 수 있는데 과일재배가 본격적으로 활성된 것은 송대(宋代:960-1279)부터라고 하고 있고 이것은 곧 고려(高麗:918-1392)때 부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여기서도 카리브해에 일본이 귀속되어 모든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잠시만 보면 알 수가 있다.
宋元明清至民国时期(公元960~1948年)
这一时期国内外农业文化交流进一步发展,果树品种交流和果品贸易进一步扩大,果树原有产区不断扩展,并形成了一些新的产区;传统果树栽培技术趋于完善,得到了总结和提高,出现了多种果树专著,并为中国果树业的现代化做了一些准备。
早在唐代日本遣唐使就由海路带回去中国的桃、梅、杏、枇杷、枣、银杏、柑橘、葡萄和石榴等多种果树;桃、李也在唐代传至印度。宋代海运远较唐时发达,国内外果树交流得到加强。10世纪中,林檎传入日本;13世纪枇杷传至印度。当时,东南沿海的福州和泉州是著名的水果产地,有荔枝、龙眼、佛手柑、香蕉、橄榄、杨桃、枇杷、金柑等名产。范成大的《桂海虞衡志》(12世纪)果志部分就记述了50多种南方果树。福建大量生产的果脯是对外贸易的传统货品;荔枝也外销,“东南舟行新罗(朝鲜)、日本、琉球、大食(阿拉伯帝国)之属,莫不爱好,重利以酬之。”1974年在泉州湾发掘出一艘南宋木构海船,发现有椰子壳、桃、李、杨梅、橄榄、荔枝的核和银杏种壳。据《东京梦华录》(1147年)等文献记述,宋代都市中出现了专门经营果品的行市,其中有南北干鲜果品、蜜饯等。银杏古树中国各地皆有,不乏千年以上的老树,其中以山东莒县浮来山定林寺的最大,树龄相传已在3000年以上,干周达15.7米。据此,银杏在中国栽培历史应相当久远,但直到宋代当时首都开封栽培后,才引起重视,其名称首见于元代王祯的《农书》。原产中国的杨桃、金柑、佛手柑等都是在宋代才普及。外来的扁桃、无花果也是在这一时期才在中原地区大量栽种,例如,无花果在明初朱的《救荒本草》(1368年)中列为救荒植物。番石榴也是在当时从国外引入的;而木菠萝则是从东南亚引进。
위 한어자료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다.
송원명청(宋元明淸)과 민국(民國)시기(960-1948)에 국내외 농업문화 교류와 과일 품종의 교류가 확대되어 과수의 생산지역이 확대되었고, 일부 새로운 산지가 형성되었으며, 전통 과수 재배기술이 완비되어서, 일부 과수의 현대화 준비와 전문 저서가 출현하였다.
당대(唐代)에 일찍이 일본(日本) 견당사(遣唐使)가 중국의 복숭아(桃), 살구(梅), 매실(杏), 비파(枇杷), 대추(枣), 은행(银杏), 감귤(柑橘), 포도(葡萄)와 석류(石榴) 등 많은 종류의 과수(果树)를 바닷길을 통해 가지고 갔다. 복숭아(桃)와 배(李)도 당대(唐代)에 인도(印度)로 전해졌다. 송조(宋朝)의 해운은 당조(唐朝)때에 비해 훨씬 발달하여, 국내외 과수 교류가 강화되었다. 10세기 일본(日本)에서 사과(林檎)가 들어왔고 13세기 인도(印度)로 부터 비파(枇杷)가 들어왔다.;당시 동남(東南)해안의 복주(福州)와 천주(泉州)는 유명한 과일 산지로, 여지(荔枝), 용안(龙眼), 베르가못(佛手柑:bergamot), 바나나(香蕉), 올리브(橄榄), 키위(杨桃), 비파(枇杷), 금감(金柑:Kumquat)등이 있었다.
범성대(范成大)의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12세기)과지(果志)부분에는 50여 종(種)의 남방과수(南方果树)들이 서술되어 있다. 복건(福建)대량 생산물로 과포(果脯)는 대외무역전통상품(对外贸易的传统货品), 여지(荔枝)도 해외 판매를 했다. 동남(東南)으로 주행하면 신라(朝鮮), 일본, 류구, 대식(大食:아라비아)에서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어 이익을 크게 남겼다. 1974년 천주만(泉州湾)에서 남송(南宋)목조 해선을 발굴했는데 야자껍질(椰子壳), 복숭아(桃), 자두(李), 양매(杨梅), 올리브(橄榄), 여지(荔枝)의 핵과 은행(银杏)종자껍데기가 발견되었다. 동경몽화록(东京梦华录,1147년)등의 문헌에 따르면 송대(宋代)도시에 과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시세(行市,가격)가 나타났는데, 그중에는 남북 말린과류(干鲜果品), 과일을 설탕에 재는 밀전(蜜餞)등이 있었다고 한다. 은행나무(银杏古树)는 중국 전역에 수 천 년 이상 된 고목이 적지 않은데, 이 중 산동성(山东) 쥐현(莒县) 부래산(浮来山) 정림사(定林寺)의 가장 크고, 수령이 3000년 이상 된 것으로 전해졌으며, 둘레길이(干周达)는 15.7m에 달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의 재배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는데, 송대(宋代)당시 수도 개봉(開封)재배 이후에야 비로소 중시되었고, 그 명칭은 원조(元朝) 왕정(王书)의 농서[农书]에서 처음 나왔다. 원산 중국산 키위(杨桃), 금감(金柑), 베르가모트(佛手柑)등은 모두 송대(宋代)에야 비로소 보급되었다. 외래(外来)의 편도(扁桃), 무화과(无花果)도 이 시기에야 중원지방에서 대량 재배하였는데, 예를 들면 무화과(无花果)는 명초, 주숙(朱橚)의 구황본초(救荒本草,1368)에서 구황식물로 지정되었다. 번석류(番石榴)도 당시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고, 목(木) 파인애플(菠萝)은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했다.[한부울]
위 자료에서 해운위주의 과수교류(海运为主的果树交流)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明清两代基本上处于统一安定的环境,东南沿海一带大小城镇的兴起,商品发展的刺激,果树栽培也有了新的发展。同时,国内外果树交流和果品贸易更加频繁。原产中国的杏、荔枝和柿,于17~18世纪从欧洲被转引至美洲,而美洲所产的热带果树也在此期由海路引种到中国。如杧果虽早在玄奘的《大唐西域记》等文献中就有记载,但正式引种是1561年从荷兰引到台湾;菠萝、番木瓜是17世纪从葡萄牙引至中国南方;番荔枝传至台湾是在1614年。这一时期中国传到日本的有无花果,核桃和中国樱桃。
명청(明清)두 세대는 기본적으로 통일적이고 안정된 환경에 처해 있으며, 동남연안(东南沿海) 일대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흥기하여 상품 발전의 자극이 되었고, 과수 재배에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아울러 국내외 과수 교류와 과일 무역은 더욱 빈번해졌다. 원산인 중국산 살구(杏)와 여지(荔枝), 감(柿)은 17~18세기 유럽(欧洲)에서 아메리카(美洲)로 전달되었으며, 아메리카(美洲)산 열대과수(热带果树)는 이번 기간에 해로에서 중국으로 인도되었다. 망고(杧果)는 일찍이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만 정식으로 인용된 것은 1561년 네덜란드(荷兰)에서 대만으로 전해졌고, 파인애플(菠萝), 파파야(番木瓜)는 17세기 포르투갈(葡萄牙)에서 중국 남방으로 인도 되었다. 슈가 애플(sugar apple) 번여지(番荔枝)가 대만에 전래된 시기는 1614년이고 이와같은 시기에 중국에서일본으로 전해진 것이 무화과(无花果), 호도(核桃), 중국앵두(中国樱桃)이다.[한부울]
明清两代原来的果树产区得到了迅速扩大,新的产区也不断形成。例如珠江三角洲成为柑橘、香蕉和荔枝产区,并不断扩大。《广东新语》(1700年)载:广州堤岸皆种荔枝、龙眼;广东定安县(现属海南省)出现栽植5万株槟榔的商品果园。品种数量也显著增加,如宽皮橘类的品种在历史文献中著录的共117个,其中明清两代文献中占74个。一些著名的地方品种也相继育成。山东莱阳茌梨,上海水蜜桃在明代已育成,并由此形成莱阳梨产区和以上海为中心的长江三角洲水蜜桃新产区;肥城佛桃出现于清代中叶,这些品种流传至国外后,对品种改良起了重要作用。早在明代,日本从中国浙江天台山带去广橘、乳橘、瓯柑等种子,在鹿儿岛播种,后来选出了无籽的柑橘,称为“温州蜜柑”。
명청(明清) 두 시대(代)의 원래 과수 산지가 빠르게 확대되었고, 새로운 산지도 끊임없이 형성되었다.예를 들어 주강삼각주(珠江三角洲)는 감귤(柑橘)과 바나나(香蕉), 여지(荔枝)의 산지가 되었고, 계속 확대되었다.《광동신어:广东新语》(1700년)에 재(载) : 광주제방(广州堤岸)에는 모두 여지(荔枝)와 용안(龙眼)이 심어져 있는데, 광동정안현(广东定安县:현 海南省)에 5만 그루(株)의 빈랑(槟榔)을 심은 상품 과수원이 생겨났다. 관피귤류(宽皮橘类)의 품종은 역사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총 117개이며, 이 중 명청 2대 문헌 중 74개를 차지한다. 몇몇 유명한 지방 품종도 잇따라 양성되었다. 산동래양장이(莱阳茌梨), 상해 중심지역인 장강삼각주(长江三角洲) 수밀도(水蜜桃) 신산지가 형성되었고, 비성도(肥城佛桃 亦称肥桃,又名佛桃)는 청대 중엽에 전해내려왔다. 일본은 일찍이 중국 명대 절강성 천태산(天台山)으로 가서, 광귤(广橘), 유귤(乳橘), 구감(瓯柑:tangerine)등의 종자를 가고시마(鹿儿岛)에 파종하고 그 이후 씨 없는 감귤을 생산해 온주밀감(温州蜜柑)이라 했다.[한부울]
위 지도그림은 한어자료에서 붉은 표식을 한 부분을 재해석하여 구도해 본 것이다.
송대(960-1279) 해외무역의 중심지이자 문화 중심지였던 동남(東南)해안 복건성(福建省)의 복주(福州)와 천주(泉州)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신라(新羅)와 일본(日本) 그리고 대식국(大食國:사라센:Saracens)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위 동아시아대륙 지형을 그대로 대입해보면 어디하나 맞아들어가는 것이 없다.
전혀 아닐 올시다이다.
일본의 위치가 대만 남쪽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든지 알 수가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대식국(大食國)인 사라센(Saracens)이 어디에 위치한 나라인가?
사라센인(Saracen)은 대체로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등지를 아우른 이슬람 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로써 원래 로마제국(羅馬帝國:Imperium Romanum:330-1453)말기에 시나이반도(Sinai Peninsula)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어(Σαρακηνός :Sarakinós)에서 유래 했는데 이 말은 아랍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Oriental)'이란 뜻의 شرقيين (사라킨)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하고 아라비아 페트레이아 혹은 디세르타(Arabia Petraea Deserta)라고 하는 암석의 아라비아: 고대 아라비아를 나눈 3구분의 하나로 아라비아 반도 서북쪽, 시리아 사막지대를 가리킨다고 되어 있지만 사막은 남아메리카대륙 서부 페루사막을 인용할 수 있다. 그들은 카이바르(Khaybar:Medina 북쪽의 오아시스) 주변과 유프라테스 강(Euphrates)까지 뻗어 있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알려진다.
남아메리카대륙 북부 동쪽에는 사막이 없을까?
아니다. 콜롬비아 타타코아 사막(Tatacoa desert)과 라과히라 사막(La Guajira Desert), 베네주엘라 코로 사막(Medanos de Coro)이 있다.
이러함에도 사라센이 동아시아대륙 남부 바다 한 중앙에 위치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솔직히 그 아래 필리핀(Philippines)이란 섬나라가 있을 뿐 거대한 이슬람제국이 존재할 곳이 없다
그리고 사라센의 어원에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중동(中東:Middle East)이란 위치도 맞지 않는다.
다만 일치할 수 있는 곳은 태양이 뜨는 지역이며 중(中)은 가운데 중(中)으로 아메리카대륙 중심부 중앙아메리카대륙 또는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에서 동쪽을 말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아메리카대륙에서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북부의 동쪽지역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대식국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랍계 이슬람교도(Arab Muslims)라는 말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작가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였다.
이것을 다시 풀어보면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그의 저서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에서 주장한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친 것일 뿐 실제로 역사가 차지하는 중요성과는 별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용어는 그렇게 생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위 신중국자료에서 주행(舟行)이라고 하였는데 주(舟)는 물 위를 떠있는 작은 나뭇잎 같은 조각배를 이르는 표현처럼 일엽편주(一葉片舟)라 한 것을 감안할 때 주(舟)는 주로 소형 배만 지칭한 것이다.
즉 대양을 함부로 떠 다닐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연결된 한정된 위치에서 상호간 교역수단으로 이용되었음도 알 수가 있다.
이런 소형배를 타고 중국에서 지금의 중동 대식국 즉 사라센(Arab:Saracen)까지 왕래했다는 것은 정말로 열도가 만든 만화같은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s://han0114.tistory.com/17050814 "에서 이미 허리케인으로 알아본 지명들을 보면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가 소엔틸리스제도, 석원도(石垣島)는 푸에르토리코로 밝혀지나 버진아일랜드가 포함될 수 있으며 필리핀이라 함도 푸에르토리코와 버진아일랜드 그리고 더하여 소엔틸리스제도까지를 대비해 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식민지환경을 감안해야 하고 오키나와(冲繩)를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를 말하는 것과 유구(琉球)역시 이와같은 범주에 있으며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까지를 확대하고 볼 수 있고 구주(九州)는 바하마와 터크스와 카이코스군도 그리고 쿠바를 말한 것이 아닌가 하며 동해도(東海道)는 쿠바본토 동해쪽으로 접하는 도로를 말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이라 함은 도미니카, 아이티, 쿠바, 바하마를 대비케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결코 바보가 될 수 없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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