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한부울 2016. 2. 1.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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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글쓴이:한부울

 

소제: 대한제국은 소위 서세가 규정하는 전범국인가.

 

미국인은 한반도인들에게 왜 그처럼 가혹한 것일까.

300년 간격으로 되풀이 되는 기유각서

루스벨트가의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

미국(米國)이란 국가는 최소한 1901까지 없었다.

유신회, 일진회, 광명회는 모두 동일한 일루미나티다.

미국과 일본은 하나의 체제로 동일한 것이다.

"COREA"는 미국의 적국(Alien enemies)

미서전쟁과 고려의 힘

미국의 히스테리

전범국과 대한제국

마무리

 

사실상 이 주제 만큼 우리 한반도인들에게 심리적으로 무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볍게 보아 주제넘게 한 소제의 글로 축소시켜 뜬금없이 마무리하려 했으니 이 어찌 글쓴이의 서툰 작법을 나무라지 않겠는가.

생각나는데로 글을 쓰다보니 정열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고 글이 길어 축소시켜 버린 탓에 내용의 정점이 없어져 글쓴이가 전하려는 역사사실의 진의가 바르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또한 깊은 반성과 함께 다시금 이글을 정리하고자 하니 넓은 아량으로 이글을 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미국인은 한반도인들에게 왜 그처럼 가혹한 것일까.

 

100년전에 존재하던 한(恨)이다.

이 문구가 소설의 한 장르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따져 볼때 이것은 픽션이 아니라 사실역사에서 찾아낸 우리역사에게 닥쳤던 위기 앞에 절박함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의 근본적인 역사사고가 그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인을 어떻게 보았던 것인가.

어쨌거나 삐뚤하게 보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어 위키자료를 보면 1941년의 진주만 기습 이후, 한국인 독립운동가 이승만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며, 합동 군사훈련을 제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사실과 끝내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나타나며 이후에도 이승만은 지속적으로 국무성을 방문했지만 결국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국가대 국가의 원수가 취할 행동이 아니다.

즉 그는 어떤 원초적인 감정에 골이 깊어 그것을 빙자하여 외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한 국가의 진보적인 성격을 가진 인사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기록에서 만나주지 않았다는 것은 첫째 이승만이란 인물이 그런 제안을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거나 실제로 하였다면 그가 사실상 권한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고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자료빈곤상 그것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설정을 바탕으로 개략적으로 풀어볼 수밖에 없다.

쉽게 생각한다면 그의 거절은 철저한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코리언(corean)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 " 소제-

7) 대한제국(COREA)을 증오한 미국(美國)에서 충분하게 이야기 한 것이지만 본 블로그에서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일인물이라고 알려지고 최초 험한의 대표적인 미국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우리입장에서 볼 때 수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무엇때문에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한국인들에게 가지고 있었을까 의문이 아닐 수가 없다.

어쨌던 그는 공개적으로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가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역사주체가 조선인가 아니면 대한제국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시리즈 대한제국편을 볼 수 있으면 한다.)한 것처럼 1905년 있었다고 하는 '태프트가쓰라밀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에게 대한제국이란 잘 차려진 밥상을 이 사람은 꺼리낌없이 그냥 던져준 인물이다.

과연 그가 실제로 밥상을 던져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글쓴이가 판단할 때 분명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있었던 조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또 하나의 코리아인 고려를 그가 농락할 처지였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없지 않다.

우리한반도인들 입장에서 볼때 그에게는 대한제국의 주권마저도 안중에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시 서양인들이 중국을 넘나들면서 힘의 조정을 하였다는 역사사건들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루스벨트가 가지고 있었던 대통령직은 금융력을 기반으로 하는 통제력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당시 대통령직에 대한 특수성이 없지 않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제왕 대통령제와 비교할 수 없는 직책인 것이다.

때문에 당시 루스벨트가 취한 모든 행동은 가장되었을 확률이 높고 또한 식민지사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게 과장, 확대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는 사실이다.

언뜻 생각할 때 참으로 루스벨트가 취한 월권행위가 한 민족의 역사를 농단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고 오해할 수 있기게 충분히 그를 비난하고 그야말로 역사적으로도 무책임하고 건방진 행위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나라를 구한답시고 당시 루스벨트에게 메달렸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철학이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당시 서양에서 미국만 존재한 것이 아닐 터인데도 기어코 미국루스벨트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애걸복걸하였다고 하니 안타까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대한민국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입지도 작용했겠지만 다분히 한반도 역사는 1945년 이후 역사가 지배했다고 할 때 정치적인 사실이 개입되었을 개연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따져 보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8"에서 실제로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동일인물이라면 1909년 기유각서 (己酉覺書)로부터 100년전에 존재하던 한(恨)때문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100년전에 있었던 사실로 돌아가보자.

 

300년 간격으로 되풀이 되는 기유각서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광해군 원년(1609)에 대조선국(大朝鮮國)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총체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일본세력들에게 노예조약인 기유조약(己酉條約)을 강요했다는 사실과 이때 임진난으로 피해를 막대하게 본 대조선은 재발을 막기위해 이런 방책을 시도한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물론 강압적으로 맺게 한 기유조약(己酉條約)이라 할지라도 해상세력들에게 더 이상 도발하지 말 것을 요구한 것이기에 당시 상황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더 자세히 보면 당시 남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근거지로 하고 있었던 엘비언(Albion) 즉 잉글랜드(일본)사람들에게 대조선에서는 대대적으로 감시하고 억압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며 문인(관표)이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하는 행위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벌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들은 절대로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서세 즉 미국인들에게는 한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보면서 박경리선생을 평생 의문스럽게한 일본이 가지고 있던 증오(憎惡)의 근원(根源)은 바로 이런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래전에 글쓴이가 주장한 적이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정확하게 300년이 지난 1909년에 놀랍게도 똑 같은 기유각서를 꺼꾸로 가공된 일본에 의해 강요되는데 이때는 처지가 뒤바뀌어 일본이 강요하고 조선이 그것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에서 글쓴이는 루스벨트가 이에 개입하였다고 본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대한국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1874-1926,재위:1907-1910)의 실권을 한낱 일본통감 소네아라스케(曾禰荒助)가 박탈한 사실과 그것으로 잉태한 것이 바로 기유각서(己酉覺書)라 하기 때문이다.

열도일본인들은 실제로 1910년까지 미국에서조차 노예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자료에서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어떻게 북아메리카대륙 전체를 다스렸던 대조선 다음의 대한국의 제왕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겠는가.

미국인이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파딩게일(farthingale)과 여송국여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7"에서 보면 1585년까지 스페인 식민지가 되어 있던 네덜란드(영토가 다를 수가 있음)가 독립전쟁을 시작한 시기는 1588년부터이며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의해 지배당하였지만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도움으로 독립한 형태를 취하고 그 이후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서세의 원조 포르투갈에 이어 황금기를 구가하였다고 하는 서양사의 주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다.

만약 일본을 현재 열도일본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인이었다고 하면 왜 수긍을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 네덜란드가 서양사에 편입되고 동양사에는 곧 열도일본이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하게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왜 세계사를 이렇게 정당하게 꾸며질수가 없었을까?

그것은 우월적인 서양사를 만들기 위해 근대사에서 서양사와 동양사가 분리되고 구분하면서부터 동양일본과 서양 네덜란드가 다르게 각색되었지만 실체는 같은 해양세력으로 하나 역사가 그들의 공동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를 통하여 충분히 습득한 사실이다.

때문에 네덜란드는 조선으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서세의 대표적인 한(恨)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스란히 미국 정치인들에게 전달된 것이 우리에게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먼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선조 내력을 보면 1650 년경에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뉴암스테르담의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Klaes van Rosenvelt)가 그의 조상임을 알 수 있고 이주한 시기가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뉴네덜란드(1664:New Netherland)를 세우던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이다.

어머니 마사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아일랜드인의 피가 섞인 혼혈여성으로 밝혀지고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인 위그노 신자(Huguenot)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확히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이은 23.4년 후에 미국대통령직에 재임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Sara Ann Delano:1854-1941)역시 프랑스계 위그노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작게 크게 위그노탄압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사라가 낳은 유일한 아이라고 알려지며 사라가 프랭클린의 유년기에 심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 알려지는 것은 훗날 프랭클린은 친구에게 자신이 살아 생전 가장 무서웠던 대상은 어머니였다고 고백한 사실에서도 심리적인 교육이 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유아기에 무엇이 나쁘다고 하면 아마도 그 사람의 일평생 그것이 하나의 굳어진 개념으로 가져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 교육이 사람인성을 자육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이 가미된 태양신을 섬기는 것으로 제천사상(天地神明)을 바탕으로 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을 신봉했던 대표적인 프랑스 왕인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는 1685년에 종교적인 자유를 허가하는 법안이었던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본격적으로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이때 위그노(Huguenot)교도 25-100만 명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던 사실과 그 일부가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루스벨트가의 대통령이었던 어머니들이 모두다 위그노신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린 루스벨트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였을까?

위그노탄압과 우리역사와 무슨관계인가 하는 사람이 없지 않겠지만 본 블로그에서 시리즈로 엮은 글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에서 프랑스왕은 곧 조선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당찮게 들리는 사람들은 아직 한반도 역사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국인 루스벨트 두 대통령은 이와같은 사실들에서 아무리 부정하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연결고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서양사에는 프랑스라고 하였지만 지배주체인 조선에 대한 원한이 큰 만큼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교육은 철두철미했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와같은 역사연결고리가 글쓴이의 눈에 뜨이는 것은 운명이라 할 정도로 섬뜩한 것이다.

위그노탄압이 1685년부터 1789년 프랑스혁명에 이를 때까지 거의 100 년간 그들은 탄압을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식민지역사에서 1910년부터 100년이란 2010년까지 계산되니 알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근원적인 갈등의 역사가 분명하게 있었다면 이를 서양사에 정상적으로 나타내고 한국인을 비난하고 있다면 충분히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근원도 없는 열도일본인들을 앞세워 그것을 믿고 자학의 역사를 감수하라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받고 있는 불리한 처분을 과거 프랑스가 아니라 조선이라고 세계사에 수정하고 난 후에 우리에게 불리한 처분을 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우리 국민성을 비추자면 전 국민이 현 독일인 처럼 자숙하고 반성하고 뉘우칠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열도일본인들은 이런 역사에 근처에도 없었기 때문에 천방지축 지멋대로 까불거린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진정한 역사를 어떻게 알겠는가.

어리석다는 것은 한반도인이나 열도일본인이나 별 차이날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사가 서양우월주의에 파묻혀 있지 않고 정당했더라도 이러한 인과응보는 우리가 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이 글을 시발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은 위그노전쟁(French Wars of Religion:1562-1598)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과도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고 네덜란드의 위그노 후손인 미국인들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이처럼 탄압받았던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한반도인들에게 가혹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의 끈으로 얽혀져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누가 뭐라해도 글쓴이의 명쾌한 판단이다.

 

루스벨트가의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루스벨트가의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는 충분하게 후세 역사가들 뿐만아니라 당사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가 집권하는 시기가 정확하게 영국에서 빅토리아시대(Victoria,1819-1901,재위:1837-1901)를 마감하는 시점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상징적으로 엘비온시대가 마감하고 명실공히 네덜란드인인 미국인스스로가 통치하기 시작하였다고 보지않을 수 없는 시기이다.

이때 가장 강력하게 대두된 것이 바로 몬로주의 정책이다.

범미주의의 이념적 기초가 되는 먼로주의(Monroeism:1823)라 하지만 옛 역사, 문화, 유색인종들은 다 배격하고 개신교를 중심으로 하는 백인중심으로 하는 개척자들만 남아 미국을 건설하겠다는 고립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바람에 아메리카대륙에서 제노사이드(集團殺害:genocide)살육 열풍이 대륙전체를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아마도 코리아의 주체 구성원들은 대량학살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낳고 있다.

한국전쟁도 안타깝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빅토리아여왕이 사망했다는 것은 인도(印度:India)를 멀찌감치 떼 놓는 것으로서 영국영향력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경제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이 이 보다 더 막강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브리티시의회전반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기유각서를 이야기했던 것을 참고한다면 사실상 조선(朝鮮)이 1881년에 해체된 후 적어도 이때까지 유명무실하게 권력자들은 연명했다고 판단되지만 이 1909년 기유각서(己酉覺書)를 계기로 더 이상 조선(朝鮮)은 세계역사주체라는 거대한 틀에서 사라지고 대신 미국(米國)에게 이양하면서 미국인들이 실제로 통치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텍시스주 이서지역은 대한제국으로 남아 있었을 공산이 크다.

그가 막강했다는 것은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있었을 고종(高宗)이 자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5년 7월에 루스벨트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을 기화로 동시에 대한제국 서울(京城)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미국정부 유명인사 10인의 일행에는 국무장관(Secretary of War)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857-1930)와 루스벨트의 큰 딸 앨리스(Alice Lee Roosevelt Longworth:1884-1980)와 약혼자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 III:1869-1931)의원도 포함되었다고 하며 1905년 9월 19일, 엘리스 일행을 태운 군함 오하이오 호가 제물포 항에 도착하고 고종이 직접 관광을 안내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이 오하이오호는 주 깃발이 일장기가 새겨진 오하이오주와 연결되고 대표적으로 물리학자·기상학자인 멘던홀(Thomas Corwin Mendenhall)경우를 보면 1878년 도쿄제국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는데, 이때 일본정부의 기상체계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는 등 일찍부터 친일세력들이 많았다는 사실과 어쩌면 이들 일행은 태평양을 횡당한 것이 아니라 오하이오주에서 오하이오강(Ohio River)을 거쳐 미시시피강으로 들어 갔던지 아니면 이리호(Lake Erie)에서 휴런호(Lake Huron)를 거쳐 미시간호(Lake Michigan)에서 시카코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우리는 제물포(濟物浦:Jemulpo)란 의미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당시 고종은 앨리스를 ‘미국의 공주’로 인식하여 극진하게 대접했다.

또 다른 세력을 고종입장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3일후 앨리스가 고종과 함께 명성황후 홍릉(洪陵)을 찾아 설치된 코끼리 석상에 올라타고 약혼자에게 사진을 찍기를 강요한 것으로 알려져 상당히 국제적으로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붉은바다거북과 귀부(龜趺)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6"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이것은 서양인들에게 잠재적으로 표출되는 오리엔탈문화 거부감이라 하였다.

조선황실에서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릉(陵)석상에 올라타는 것을 금기시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런 불손한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기사 1910년 한반도를 찾았다고 하는 뉴욕사진기자 윌리엄 W. 채핀 역시 거북상에 올라타고 사진을 찍었던 모습이 전하고 있다.

19세기 한반도를 찾았던 서양인들이 하나같이 이처럼 황실예절을 무시하였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역사상황에 맞춰 예단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것은 동양오리엔탈문화에 대한 도전이며 오만한 행위라는 것이다.

전함 메인급(Maine-class) 13,700톤급의 오하이오호(USS Ohio)는 샌프란시스코에 조선소 유니언 아이언 웍스(Union Iron Works)가 1899년 4월 22일 건조하고 1901년에 취역한 것으로 속력 18kn (21 mph;33 km/h)으로서 승무원 561명을 승선시킬 수 있는 경화장갑함(裝甲艦)이다.

물론 이 함선이 동아시아에 항해했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인, 특히 루스벨트가가 한국인에게 가졌던 증오는 상식을 넘는 것이며 부녀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짐작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러한 글의 전제는 한반도와 북아메리카대륙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황당한 사실을 당연시하면서 미국역사와 한반도역사 구도를 근본적으로 분리하고 볼 때 이러한 증오가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황하가 미시시피강이라고 한다면 옛 서양인들은 태평양으로 오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냉정하게 고립된 역사상식에 깨어야 한다는 말이다.

1905년 8월4일,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온 윤병구 목사와 함께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여름 백악관(루스벨트 자택)을 찾아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고 하고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회담을 앞둔 시점에 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 유지에 힘써달라’는 뜻을 전달했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그가 ‘고종(高宗)의 밀사였다’는 등 설이 있는 것과 다르게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하였고 “전신이 유신회(維新會)이었던 일진회(一進會)의 대변인”을 자처하였으며“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등 일본 쪽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음에도 미국루스벨트에게 매달려야 하는 형편이 무엇인지 우리가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어쨌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제정국가 러시아와 독일을 싫어했다는 사실과 그동안 본 블로그에서 밝혀본 이상한 행적의 이승만이 같은 제정국가체제인 대한국의 고종(高宗)을 부정하고 러시아를 싫어했다는 것은 거의 같은 정치적인 인식이라고 할 때 정확히 이것을 약분하면 이승만이 국적을 일본이어야 하는 입장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까지 합쳐 당시 일본이 루스벨트이어야 하고 이것을 미국(米國)이라 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당시 일본은 루스벨트의 통치력이 가능한 미국영역의 일부였을 것이리는 판단이다.

그곳은 멕시코라고 하는 영역 내에 어딜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일본지역을 미군특수전사령부의 군사훈련 '제이드헬름15 음모설(Jade Helm 15 conspiracy theories)‘이 전개될 수 있는 네바다(Nevada), 유타(Utah), 애리조나(Arizona), 콜로라도(Colorado), 뉴멕시코(New Mexico), 텍사스(Texas)와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보는 것은 과거 스페인식민지 지역으로서 이 지역을 일본이라는 주체와 공동으로 다스렸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1846-1847년 멕시코전쟁 전까지의 영역으로서 미국이 이를 비로소 스페인을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898년 미서전쟁(米西戰爭)이라는 구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도 알 수 있는데 비록 픽션같은 역사사실이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분기점의 역사로 충분히 각색될 수 있었던 바탕은 텍사스주를 차지하기 위해 성과를 어느정도 올렸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상황이 열도일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미국인들이 실제로 세계전체를 장악한 것도 아닌데도 이렇듯 거절을 당하였음에도 이승만의 루스벨트가에 대한 집착은 가히 본드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위키자료 설명을 보면 1941년 진주만 기습 이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에게 또 다시 한국인 독립운동가 이승만 등이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였으며 합동 군사훈련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미 알고 있었고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에 끝내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도저히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 억지 시추에이션(situation)이라 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대한제국과 전쟁중인 미국입장에서 이승만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쉽게 허락할 수 있는 요구조건이 아니다.

대동아공영권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고려군 주체가 현재 열도일본인인가 하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만주국을 흡수한 전쟁주체가 현재 열도일본인이 아니라 중국고려군인 대한제국이라 해야 맞다.

임정광복군을 보면 1942년 총사령부 간부 45명 중 73%에 해당하는 33명이 중국군 장교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태평양전쟁 말엽 광복군은 미국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전략에 따라 특수부대로 훈련받고 한반도 침투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왕의 무조건 항복선언에 의해 이가 무산되었다고 하였는데 열도일본인들의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개입한 루스벨트로서 아시아 전역을 영역으로 하는 대한제국가의 충돌이 거북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설령 고려군인 대한제국을 적대하는 이승만이 제의라 할지라도 미국에게 크게 부담스러웠다는 이야기다.

대한제국이라고 하였지만 이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현재 일본인들이 아닌 주체가 미국과 치열한 전쟁을 하기시작하면서 루스벨트에게 반감을 가지게 했을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느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엉뚱하게 이승만이 계속 국무성을 방문했지만 결국 만나주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은 한반도 정부설립과 이은 최고권력자로서 눈찍힘을 받게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米國)이란 국가는 최소한 1901까지 없었다.

 

 

 

위 기사는 동아일보 창간지이다.

그런데 이 창간지의 기사들은 대다수 미국이야기가 많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근대사는 없다.

모든 것들을 퍼즐처럼 끼워맞추어 보아야 한다.

1945년 미국군정청 이름이 무엇이던가.

1945~1948년까지의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라 하였다.

분명 조선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1897년 대한제국으로 변경된 상태에서 식민지가 이루어졌다면 "재한국미육군사령부군정청"이라고 해야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라진 국명 기어코 조선이라고 했다.

식민지 기간 중 유일한 정부가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그럼에도 한국을 사용하지 않고 조선을 사용했다.

이것은 패망한 일제가 끝까지 조선이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인 의도가 깊게 가미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1948년 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대 명칭은 조선이 아니라 대한 즉 한국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지만 이 보다 늦은 9월 9일에 북한에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미국이 한반도 역사적인 순서를 지키고자 했다면 1945년에 군정을 꾸릴 때 대한제국 즉 대한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는 것이 순서였지만 이를 거부하고 조선이라 했다는 것은 한국이란 국명에서 적잖은 스트레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이와같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아일보 창간지에 기사이다.

다 아시다시피 조선총독부가 허가하여 1920년 4월 1일에 송진우, 김성수, 유근 등의 의해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또는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기치 아래 창간되었다고 하는 날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창간지에 미국(米國)육군 상비병 유육(紐育)발전(發電)이라는 제목과 함께 미국은 육군 상비병원을 300,000명 정하기로 국회에서 결의하였다고 나타난다.

국가가 갖추어야 할 요소로 감옥, 군대, 법률을 꼽는데 군대를 뒤늦게 꾸렸다는 것은 미국국가 존립이 정상적이 않았다는 이야기다.

 

[원문]1886. corea:—military officers 11
코리아(조선):병편
By E. H. Parker, Esq.
The army is supposed to number 989,376 men, cavalry and infantry, to wit (using the previously-described alternative names of each province) :
from which it appears that Tung King and Kwan Peh have no armies.
hu si 湖西 139,229 명
hu nan 湖南 210,574 명
ling nan 嶺南 310,447 명
hai si 海西 153,828 명
kwan tung 關東 46,839 명
Of the above,
416,685 belong to the 京案 or Seul commands
572,691 belong to the 外案 or local commands

 

본 블로그 글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에서 보면 1886년에 코리아를 찾은 영국인 총영사대리(總領事代理) 에드워드 파커(Edward Harper Parker:1849-1926)의 글에서 나타나는 당시 코리아군사 수가 호서 139,229명, 호남 210,574명 영남 310,447명, 해서 153,828명, 관동 46,839명 등으로 자치군 수가 나타나고 군사의 총 수는 989,376명의 기병과 보병으로 추정된다하였으며 이는 앞서 설명된 각 지방의 군사 수 총합계 860,917명이 포함된 것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것에 분명한 것은 동경(경주)과 관북(함경도)지방에는 군대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혹 동경은 뉴욕이 아닌지 밝혀 볼 이야기다.
또한 전체 군사수를 말하는 것에서 보면 416,685명은 수도의 무관이 지휘하는 경안(京案)에 소속이라 하였고 572,691명은 지방의 무관이 지휘하는 외안(外案)에 소속돼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수치에서 약 40년이 지난 미국의 상비군병력이 기껏 300,000이라는 것은 경상도 병력밖에 되지 않는 수치임을 알 수가 있어 미국 실체가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미국(米國)이 그동안 상비군조차 없어 1920년 비로서 의회에 결의를 거쳐 군대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미국역사사실과 매우 동떨어지는 이야기다.

그런 뉴스를 동아일보는 창간호에 실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명색이 일제 피압박속에서 언론이 막혀 그 10년간 역할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금이 되었지만 창사기치와 맞게 민족의 표현기관이라는 이름의 창간호였다면 적어도 조선이나 코리아소식이 우선이었거나 아니면 한반도 역사에 충실하여 일제라고 알려진 일본인들의 소식을 전해야 하지만 놀랍게도 미국 뉴욕에서 발신되는 뉴스들이 넘쳐 난다.
그렇다면 이 미국(米國)이란 실체가 뉴욕금융가를 바탕으로 하는 세력군으로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에서 살펴보았듯이 1868년 11월 29-12월 11일까지 러시아제국 샹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무기감축선언이 있었고 이 때 초청된 나라가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y), 바이에른(Bavaria), 벨기에(Belgium), 덴마크(Denmark), 프랑스(France), 브리튼왕국(United Kingdom(representing the British Empire), 그리스(Greece), 이태리(Italy), 네덜란드(the Netherlands), 포르투갈(Portugal), 프러시아(Prussia), 통일독일동맹(the North German Confederation(Greater Prussia), 러시아(Russia), 스웨덴노르웨이(Sweden-Norway), 스위스(Switzerland), 오스만(the Ottoman Empire), 그리고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등 17개 나라인데 당시 내노라 하는 국가명단임을 알 수 있지만 미국(米國)과 일본(日本), 멕시코(墨西哥)가 빠진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개최국인 로마노프왕가의 아라사(愕羅斯)입장에서 애초부터 그나라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첫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군사회담을 할 정도로 주요국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확히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무기감축선언이 있을 때 1868년은 소위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성립된 시기로서 이 명치유신정권도 1853년 미국의 아시아함대사령관인 페리제독이 흑선(黑船)이라고 하는 기함 스팀프리킷함(steam frigate) 3,220(톤) 미시시피호(USS Mississippi)을 몰고 들어가 함포로 위협하고 개항과 개방을 이끌어낸 결과라고 근세사는 설명하지만 솔직하게 글쓴이가 보는 관점은 매우 다른 것인데 첫째 미시시피호는 연안용스팀선이라는 한계이다.

즉 이 스팀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연안용(for coast)이라 함은 바로 가까운 바다를 운용할 수 있는 함선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곳은 소위 멕시코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1847년에 멕시코전쟁(Mexican-American War)이 페리가 이끈 미시시피호가 참여하였고 타바스코주(Tabasco)비야에르모사(Villahermosa)에서 정박하다가 일본행을 앞두고 다시 버지니아주의 노퍽(Norfolk)에 돌아가 수리하고 1852년 11월 24일 출발하여, 마데이라 제도, 헬레나(Saint Helena), 케이프타운, 모리셔스 공화국, 실론을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고 마카오와 홍콩을 거쳐 1853년 5월 4일에 마침내 일본 우라가에 도착하였다고 하는 것들은 엉터리는 사실이다.

당시 위에서도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미국이란 나라의 존재가 매우 미약한 것이어서 태평양함대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때이다.

있었다면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대조선이나 고려를 괴롭힐 정도였을 것이다.
물론 당시 아라사(愕羅斯)도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가 밝혔기 때문에 현재 유럽대륙처럼 유럽의 각나라들도 전부 이웃과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일본은 멕시코 만에서 찾아야 할 국가라는 이야기다.

적어도 1898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려(COREA)라 판단되는 스페인(Spain)에게 미국은 적지 않게 적개심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고 스페인을 상대로 마침내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을 도발했다는 것은 새로운 신성세력으로 기존 강대국사에에 등장한 것이 된다.

미서전쟁이 조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여도 이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가진 자본으로 구축된 조직력을 그렇듯 약하게만 볼 수 없는 것이고 그가 결집력을 비로소 대고려(大高麗)를 상대로 펼쳐보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비로소 미서전쟁으로 세계사에 등장을 하였겠지만 단번에 모든 것을 미국이 원하는대로 정리되었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서양역사는 스페인을 북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유럽대륙으로 쫓아 낸 계기가 되었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 이 막강한 세력인 대고려(大高麗)는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과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대륙 서부와 북부 콜롬비아를 지속적으로 지배했다고 보여지는 것이기에 요지부동이란 말을 여기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파나마 운하이다.

미국이 바로 파나마운하 공사권을 통째로 취하기 위함이 주 목적이었던 것이다.

실제 이 파나마운하가 완성이 되면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며 어마어마한 이익을 창출 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기에 미국입장에서는 큰모험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공사는 처음 1880년에 프랑스(朝鮮)인에 의해 시행되었지만 엄청난 공사자금난으로 재정이 고갈되면서 포기한 것임을 알 수 있고 1881년부터 프랑스(朝鮮)을 손아귀에 넣은 미국자본가들은 루스벨트를 앞세워 미서전쟁으로 공사권을 취하고 1900년대 초에 본격적으로 시도되어 1914년 8월 15일에 완성한 파나마 운하는 명실공히 거대한 이익을 미국에 안겨다 주게 된 것은 틀림없다.

파나마운하가 완성되기전 샌프란시스코에 가기 위해 남아메리카 끝 드레이크 해협(Drake Passage)과 혼 곶(Cape Horn)을 경유하여 남아메리카 해안을 어쨌던 빙 돌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주요한 해운항로(海運航路)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고 태평양과 대서양의 두 대양 사이의 해상 무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선박이 뉴욕에서 이 파나마운하를 통해 샌프란시스코까지 항해하는데 거리가 9,500km 정도인데 반해 혼 곶으로 우회하면 거리가 그 두 배가 넘는 22,500km에 달한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만큼 실제로 선박회사나 고객들의 운송비용절감은 엄청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파나마운하는 해상운송회사 자본가들의 자본무한축적에 따른 꿈의 목표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당시 신생국가 미국의 목표였을 것이다.

현재 근대사에서는 스페인을 축출한 것이 먼로주의 한 방편이라 하고 있지만 유럽세력인 스페인이 아니라 신라임을 알 수 있고 그 뒤에 고려가 이를 합병한 것으로 한반도 역사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스페인을 서양사에서 앞세우고 있으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 역사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유럽세력을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쫓아낸다는 것이 먼로주의이다.

1823년 12월 2일에 미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1758-1831)가 주장한 먼로주의(Monroe Doctrine)는 사실상 미약한 미국의 존재성을 따져 볼 때 세계질서에 전혀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앞에서 언급처럼 미국은 국가로서의 확실한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어떤 나라도 간섭하지 말 것을 선언했다는 것은 그들의 소망일뿐 일종의 바램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당시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과 비로서 1900년 경 그들의 뜻이 먹혀들어가기 시작한 것이 빅토리아가 사망하고서 부터임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먼로 선언은 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유럽세력들을 궁극적으로 몰아내고자 하는 1차세계대전을 촉발케 한 것으로 작용했고 유럽대륙과 아세아대륙으로 미국인이 아닌 세력들은 모두 추방하고자 하는 정책에 기름을 부었던 것은 틀림없다.

결국 대조선인들을 추방하기 위해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이 1882년 5월 6일에 체스터 앨런 아서(Chester Alan Arthur1829-1886,재임:1881-1885)미국대통령에 의해 발효된 것이고 10년 후 다시 1892년 게리 법(Geary Act)에 의해 10년이 갱신되었다는 것은 대고려인들을 추방하기 위한 것으로 190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북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9"에서 밝혀 본 사실이지만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에 무산계급혁명에 자극받은 블랙벨트 사회주의자들이 넘쳐나는데 적색공포가 사회이슈가 되면서 또 한 번 추방령이 발효되었고 사회당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이른바 1917년부터 1920년까지를 제1차 적색공포(赤色恐怖)시대 또는 레드 스케어(Red Scare)라고 하는 것으로 동서양인 가릴 것 없이 적색분자들은 미국에서 발 붙일 곳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원칙이 무엇인가.

백색우월주의이고 서양우월주의 역사이며 개신교 독점체제이다.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 다른 역사가 섞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과 그들만의 역사가 존재하게 모든 지역을 청정지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던 결과적으로 1898년 미서전쟁은 스페인이란 역사명칭이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사라진다는 역사사실이 만들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미서전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양사에서는 이러한 사건들 모두에서 절대로 한국이라고 하지 않고 스페인이라고 하였건만 미국의 주요정치인이 한국을 싫어하고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연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조선을 그토록 증오했다는 것은 분명 조선(朝鮮)과 고려(高麗)의 역사가 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종이 대한국을 국명으로 사용하면서 자신감을 표했던 것도 이와같다고 풀어볼 수 있는 것이며 서양세력들 모두가 하나같이 코리아라 한 것은 곧 대한국(大韓國)이라는 명칭은 아메리카대륙전체를 통치적 주체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만소봉 대한국(大韓國)은 북아메리카대륙지배 명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9"에서 밝혔듯이 대한국 즉 코리아는 ‘하나의 체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곧 스페인(SPAIN) 또는 중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 "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였던 이야기다.

이것이 곧 서양인들이 말하는 명실공히 카타이라고 하는 중국(中國:China)이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에서 만국조천(萬國朝天)의 고려(高麗)라 하였고 미서전쟁(米西戰爭)과 일치하는 청일전쟁은 바로 미국이 일본용병을 사용하여 스페인에게 도전한 것으로 이는 고려가 만국조천으로서 존재한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뉴스페인(New Spain)을 신라(新羅)라고 풀어 볼 수 있다.

신라(新羅)가 아니라 신라(神羅)이고 신라(神羅)는 전통적인 왕조로서 신성로마제국으로서의 가치도 포함하고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은 전통적인 코리아땅이 맞고 적어도 1835년들어 10월에서 1836년 4월 약 6개월간 발생한 텍사스 혁명(Texas Revolution)으로 시작된 멕시코전쟁(Mexican-American War:1846-1848)이 일어나기 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 영역이라는 것은 바로 신라이며 코리아영역이고 대고려영역이라는 사실을 모두어 알수 있는 것이다.

 

유신회, 일진회, 광명회는 모두 동일한 일루미나티다.

 

개념적인 문제로 들어가 보자.

전항에서 살펴보았듯이 물론 자본가라고 하지만 상징적인 것으로서 역사주체가 미국(資本:capital)이라 할 때 추구하는 가치는 바로 자본무한축적에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자본축적이 그들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자본금융 조직인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조직 수장을 미국대통령이라 하였다 한들 틀릴 것이 없다.

그것의 영역은 뉴욕이다.

일단 전통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위 1868년에 개최된 무기감축선언에서 미국(美國)이 빠진 것이고 마찬가지로 미국(자본주의체제)의 용병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일본이나 멕시코 역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한반도구성원들은 대한제국이 존재한 사실과 무관하게 1904년 8월 18일 구 독립협회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곧 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회(維新會)에 가입하였던 부분을 당연시하고 유신회가 이틀 후 1904년 8월 20일에 일진회(一進會)로 개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지만 이것이 단순하게 친일조직이라고 하였을 뿐이지만 이것이 바로 일제이고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자본에 의해 그들은 충분히 조정될 수 있는 처지에 불과하였으니 하는 말이다.

이를 미국 상징이 된 자본주의조직체 알루미나티라고 하는 광조파나 광명회(光照派,光明會:Illuminati)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유신회 또는 일진회가 광조파나 광명회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는 세계삼한역사의 주근원지가 북아메리카대륙이었다는 근거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동양자료 역시 충분하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자료를 통하여 이와같은 사실을 얼마든지 유추할 수가 있을 것이다.

歐洲“啟蒙”一詞,源于神學中的光之比喻﹕“給黑暗以光明”、“恍然大悟”﹔或來自 氣象描寫中的感官體驗﹕“陽光通明”。漢語“文明”,本有光照之意,如光明、有文采。

광명회를 따져볼 때 위 한어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유럽의 개몽이란 단어는 원래 신학에서 빛을 비유한 것으로 암흑(黑暗)에서 광명(光明)을 받는 것이라 하고 ‘문득 모든 것을 깨우치다’에서 체험감각적으로 기상(氣象)을 묘사하는 것으로 나타나 그 빛으로 모든 것에 통달(通達)하고 지혜(智慧,知慧)가 밝게 된다는 것으로 한문으로 이것을 문명(文明)이라 하는 것이지만 광조(光照) 즉 ‘본래 빛이 두루 비치게 한다’는 뜻으로 광명(光明)과 같고 문채(文彩)가 있다.[번역:한부울]라고 풀이가 가능하다.

我們也許可以提出一種假設﹕從詞源上比較,“文”與“明”的組合與歐 洲思想史中的重要概念 enlightenment 〔英語﹕啟蒙〕、Aufklaerung 〔德語﹕啟蒙〕的相通之處, 也許是維新之士青睞“文明”的一個重要原因。

또한 이 자료는 가설에서 어원을 비교하면 문(文)과 명(明)은 같은 것으로 이 조합은 유럽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깨우침, 계몽주의(enlightenment), 독일어 계몽(Aufklaerung)이란 뜻에서 서로 유사하고 어쩌면 유신(維新)라 하는 것도 모든 연령대 인사들을 개혁, 개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문명(文明) 즉 빛으로 깨우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번역:한부울]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 [近現代中國“文明”,“文化”觀-論價值轉換及概念嬗變-方維規 참조]한어자료 두 문장에서 볼 때 문명(文明)은 유럽인들에게 광조(光照)와 광명(光明)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유신(維新)은 주요 인사들에게 진보적인 개혁을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문명, 광조, 광명, 유신은 한 테두리에 있는 단어들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기에 금융자본을 무기로 한 일루미나티가 이러한 의미를 이용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문과 명은 빛으로 깨우친다 하였으니 이것은 이집트의 라(Ra), 태양신(太陽神)이 기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과 기독교가 근원적으로 태양신을 섬긴다는 의미가 공존하는 바탕에서 서양세력 조직체들이 추구하는 사상역시 삼한역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는 최종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변화를 요구한 주체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집권하면서부터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간단하지만 개념적으로 일제와 미국의 관계를 보았다.

 

미국과 일본은 하나의 체제로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일본은 어떻게 같은 것인가.

이것에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미국과 일본은 하나의 체제에서는 동일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서로가 하나의 일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일체라는 것은 네덜란드로 통한다.

미국이 일본(JAPAN)이름을 적어도 1차세계대전 전까지 이를 가칭했다는 것은 좀 더 두고 볼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이승만의 과거 이상한 이동 행적을 바탕으로 살펴볼 때 이 혼란스러운 문제가 어느 정도 풀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문제는 체제이다.

1901년 빅토리아여왕이 사망할 때까지 하나의 체제를 미국완벽하게 구축했다고 볼 수가 없다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금융조직이 런던에 있었다는 것은 바로 엘비언들이 장악했다는 이야기로서 미국이 발 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본조직체가 군병을 만들고 스스로 어떤 문제를 해결키 위해 군사를 동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을 국가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본 블로그 글 "이승만 미(美)체류시절 자필 징집지원서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8"에서 밝혀 본 사실이지만 미국인을 아메리카라 하지 않고 "US"라고만 하였다.

특히 1차세계대전 막바지에 들어 미국(자본)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했다는 것은 자본으로 무기를 만들어 충돌세력들에게 공급하는 선에서 벗어나 그들이 만들 수 있는 무기로 미국영토를 장악하게 급선회하였다는 이야기다.

1차세계대전을 미국인들은 유럽인들만의 전쟁(European War)이라고 규정하고 북아메리카대륙이 포함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914년 9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1834-1919)은"'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이 전쟁을 설명한다.

유럽전쟁이었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 먼로주의(Monroe Doctrine)가 여론을 장악하고 팽배하게 만들었을까 의문을 가져도 괜찮다.

독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오스만과 불가리아등이 제일 강하게 등장하던 유럽인들에게 무기만을 팔아 자본을 축적한다는 본래의 계획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장악이 영원히 힘들어질 것이란 판단을 했을 것이다.

먼로주의는 본격적으로 유럽대륙으로 위험이 있는 유럽세력들을 한꺼번에 쫓아내려는 움직임이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유럽대륙은 전통적으로 대타타르 아라사(愕羅斯)영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계가 자리잡고 고려가 평정한 모습을 그릴 수가 있다.

그러자 미국자본은 시민권자를 빌미로 애국심을 고취시켜야 했고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남성들을 포함, 미 전역에서 약 2400만명이 카드에 자신의 개인정보를 수록했다고 알려지는 것으로 미국자본에 흠취된 세력들은 아마도 거부할 수 없었다고 보이고 이때 1918년 9월 12일, 44살 나이의 이승만이 자필한 1차세계대전 징집지원서가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에 공개되면서 당시 이 등록카드(Registration card)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다.

이 자료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가치가 큰 것인데 놀랍게도 국적을 묻는 곳에 이승만은"JAPAN"이라 기재한 사실에서 우리가 애국심으로 격분하지만 이것은 몇 가지 당시 정치적인 가능성을 내다 볼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15.If not a citizen of the U.S., of what nation are you a citizen or subject? Japan

구체적으로 보면 15번 문항에 “미국시민권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떤 나라의 국민 혹은 적(籍:subject)을 두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놀랍게도 이승만은 "일본(Japan)"이라 한 것이다.

왜 “JAPAN” 이라 했을까? 물음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가 특별하게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사실도 없기 때문에 국적법(nationality law)을 따른다면 분명 'COREA' 라고 해야 함에도 그는 적(籍:subject)을 “JAPAN” 이라 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의문이 지금까지 풀 수 없이 남아 있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의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면 풀리는 것이다.

동아일보가 일제의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앞에서 보니 동아일보는 미국의 기관지역할을 한 것으로서 즉 조선총독부는 세계금융중심지 뉴욕을 관리하던 미국(米國)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징집지원서 전반을 훑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이 지원서 질문에 U.S 라고만 하였지 “American”이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국의 국명은 “U.S.A” 가 아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당시 미국은 국가개념으로 지적하자면 허슬(hustle) ‘다급함’, ‘서두름’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때 당시 U.S 라 한 것은 알루미나티의 조직체, 북아메리카대륙 전체를 병합한의미로, UNITED COREA(大韓國)” 또는 대조선(大朝鮮)을 영어화한 것이 "UNITED STATE"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U.S. Citizen

10. Native born.(본토태생)

11. Naturalized.(귀화)

12. Citizen by Father’s Naturalization before Registrant’s majority.(등록전인 아버지 귀화인)

Alien적국 외국인(Alien enemies)

1918년 미국은 당시 미국시민 이외 귀화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 또는 적국인으로 취급했다.

13. Declarant.(귀화선언자)

14. Non-declarant.(no application made for Naturalization as yet) 미귀화자

15. If not a citizen of the U.S., of what nation are you a citizen or subject?(다른국적자)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라 하였다.

즉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하나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국적주의가 대두되면서부터 제나라 찾기가 시작되던 때 이었으니 북아메리카대륙전체가 혼란스럽게 좌우충돌이 계속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COREA(大韓國)’ 또는 ‘대조선(大朝鮮)’을 흉내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미국자본주의체제는 이런 어정쩡한 국가체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글쓴이의 최종 냉정한 판단이다.

이 징집지원서는 등록카드란 명칭과 같이 ‘현재 시티즌’과 ‘미래시티즌’, ‘잠재적 시티즌’을 확보하고 U.S.란 체제아래 남을 때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할 수 있게 하고 아니면 모두 쫓아내겠다는 이야기로 풀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외국인(Alien enemies)으로 구분되었고 스스로 적국이 아닌 "일본(JAPAN)"을 택했다는 것인데 추방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했다고 볼 수 있는 방점이 바로 친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승만이 “COREA”명칭을 기피한 것은 대한제국이 제정국가라는 사실에서 당시 “U.S”에서 제외된 적국으로 분류된 것이 틀림없다.

대한제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스스로 고종까지 부정하였고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추방을 피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단순하게 대한제국이 일본 식민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COREA"는 미국의 적국(Alien enemies)

 

미국은 "COREA" 라고 하지 않고 "KOREA"라고 한다.

이것은 적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렇다면 코리아(朝鮮)는 어떤 형태에서 미국(U.S)에게 적국(Alien enemies)으로 인식이 되었을까?

조선이 아니라 고려(高麗)이기 때문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는 일찍이 제정국가 러시아와 독일을 싫어했다는 것과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고종(高宗)을 부정하고 러시아를 싫어했다는 사실은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다.

다만 동양의 코리아(高麗:大韓帝國)과 조선(朝鮮)이 하나로 묶이면서 혼란을 더하고 있지만 위 상황을 대비해 볼 때 본래 독일(조선)과 러시아(고려)로 인식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루스벨트가(家)의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에서 이미 언급한 사실이지만 프랑스가 조선으로 대비된 것도 이와같은 것이며 조선 광해군에 의해 시행된 기유조약이 100년 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1874-1926,재위:1907-1910)에게 강압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도 그래서 기유각서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이미 밝혀졌던 사실이기 때문에 별 특별할 수는 없다.

미국역사에서 코리아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적 시각은 여러 가지 형태로 꾸준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는데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의 재임기간인 1905년에 고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국무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857-1930)에게 위임하여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논란이 많은 것이다.

미국은 이중풀레이를 한 것이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미국은 조선을 팔아 넘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열도일본인이 존재한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 조선총독부역할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지속적인 대한제국의 독립정부승인 요청을 거절하였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역사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이를 연결시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행위를 상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퇴임 후 1909년 3월,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당시 하나의 체제 대한국(大韓國)황제의 상징이었던 코끼리를 무단 사냥하고 깔고 앉아 신문에 사진으로 공개함으로서 자신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여론을 조성하고 재집권을 노렸다는 점등은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가 턱도 없는 헛소리를 하는가.

아마도 머지 않는 장래에 글쓴이가 주장하는 이 모든 사실이 어김없이 맞아 떨어질 것이다.

또 한사람의 루스벨트가 있다.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이다.

역시 대한제국독립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이승만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그의 어머니에 의해 충분하게 알고 있다는 이야기로서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끝내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하는 것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 이제부터 냉정해보자.

우리가 한반도에 고려와 조선이 꼼짝없이 영아신세를 면치 못한 처지에 있다는 것은 잠시 멈추고 어쩜 한반도 역사와 근세사가 입을 맞추듯 동일하게 맞춘 것은 일제식민지사이다.

일제식민지사를 보면 한반도에 존재한 어떤 삼한세력도 대륙을 넘을 수조차 생각할 수 없는 나약한 제왕들만 차례차례를 지키는 못나고 허약한 왕조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침략질도 한번도 하지 않고 노상 약한 민족으로 침략을 받았던 민족이 무슨 잘못이 있어 미국과 적대관계를 맺었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와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루스벨트가의 두 명의 대통령이 한국인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면 말같지 않는 궤변일 뿐이다.

서양인들이 한반도에 호떡집 난리가 난 것처럼 수많 키로의 항해 끝에 찾았다는 곳이 바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또는 은둔의 나라일뿐이다.

고요하다는 것은 분란스럽지 않다는 것이며 은둔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슨 연고로 미국인들과 근원적인 증오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지 한반도 역사만으로 원인을 찾기란 힘이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는가.


미서전쟁과 고려의 힘

 

그렇다.

그들이 증오스럽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가 아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에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있어 미국인들을 상당히 괴롭혔던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우리와 똑같이 생긴 동양인만을 생각하면 이러한 역사 찾기가 오류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을 축적한 미국이 자본가를 동원하여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유도한 것을 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이 분명 먼저 도발하였고 충돌을 야기 한 것으로 가능성이 있는 음모설을 동반하고 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스스로도 주장하였던 것처럼 이에 대한 모든 행위는 전통적인 프런티어(pioniersgeest)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한 사실이다.

전통적인 프런티어가 무엇인가?

남의 것을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탈취하고 착취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소위 일제(日帝)가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사실을 깔고 있는 조선침탈행위의 대명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정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충분하게 알았다.

메인호사건(destruction of the Maine)은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이란 대의를 깔고 여론화한 것으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보면 주된 목적이 바로 프랑스(조선)가 가지고 있는 파나마 운하 부설권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당시 스페인(고려)이 장악한 카리브해 해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동시에 카리브해연안국들에게 루스벨트 정권의 영향력을 높여 파마나운하를 사유화하겠다는 의도였다는 것을 읽을 수가 있다.

이것은 자본괴물로 변신한 미국의 자본패권주의가 가치를 책정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운하공사권은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스페인을 쫓아내기 위해 아니면 여론을 악화시키기 위해 아니면 자본세력들의 여론을 극대화하여 투자를 적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를 술수를 부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파나마를 관리하고 있었던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운하건설에 필요한 지역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사들이려던 계획이 콜롬비아 상원에서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배후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바로 고려이며 대한제국이었을 것이나 추측도 가능하다.

그 후 미서전쟁이라는 사건이후 파나마는 미국의 지원으로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이듬해 5월 4일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하건설공사를 정식으로 인계받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미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파運河第三閘門(운하제삼갑문) 建設案成立(건설안성립) 【워싱톤四日發同盟(사일발동맹)】去一日下院(거일일하원)을 通過(통과)하고 上院(상원)에廻付(회부)된 總額二億七千七百萬弗(총액이억칠천칠백만불)

파나마 총 공사비는 $277,000,000 이다.

마침내 미국이 주도하여 이 엄청난 난공사를 1914년 8월 15일에 비로서 완성시켰고 1999년 운하소유권이 미국 정부에서 파나마 정부로 이전되기 전까지 약 85년간 갑문을 지키며 미국정부가 거둬들인 통행료수입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미서전쟁사건은 바로 이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898년 1월 25일에 미국 장갑순양함 6,682톤의 메인호(USS Maine)가 쿠바 아바나항(港)에 입항하였고 한 달이 못된 시기 2월 15일에 정체불명의 폭발로 파괴되어 승조원 374명 중 26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스페인이 공격한 것이라고 미국언론들은 여론을 조장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미국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1843-1901)대통령을 비난하고 비판한 워싱턴주재 스페인대사 드 로메(Enrique Dupuy de Lome:1851-1904)의 편지를 황색언론이 입수하여 공개하면서부터 스페인의 소행으로 단정 짓는 보도기사가 난무한 것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황색언론은 뉴욕에 있던 <뉴욕월드>과 <뉴욕저널>이다.

이야기는 정확하다.

뉴욕을 관리하던 미국이 뉴욕에서 기사의 여론이 미국에게 유리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명분상‘쿠바인들의 고통을 끝장(마무리)내야 한다’는 구호를 앞세워 스페인과의 전쟁을 유발케 했다는 사실에서 이미 음모설이 팽창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전쟁을 본 블로그에서 수차례 심층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실제상황의 사진은 보이지 않고 전부 그림 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 전쟁은 현재 서태평양에 위치한 필리핀과 동시전쟁을 하였다고 하지만 전쟁일자와 시간을 맞추어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로 판명되면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데 글쓴이가 집중하는 것이다.

이 필리핀문제도 당시 미국에 의해 상당히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유명한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하면서 난데없이 일본의 연고가 전혀 없었을 필리핀을 미국이 식민지하는 대신 한반도 식민지배를 묵인하는 식의 참으로 얼토당토하지 않는 형태의 밀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이다.

알고보니 필리핀을 카리브해연안도서제국의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소앤틸리스제도의 신트마르턴(Sint Maarten)나 현재 미국영토가 되어 있는 푸에르토리코로 보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은 고려의 힘을 알기 위해 충돌전체를 소위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되었다고 하는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보아 대비해보았던 내용들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언론의 무절제한 부풀기가 있었고 흥미본위, 선정주의(煽情主義:sensationalism), 찌라시 즉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들의 도발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서태평양에 속한 필리핀을 본 블로그에서는 스페인부왕령식민지(Spanish east indies are part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였던 뉴텍사스(New Philippines)로 보고 한 판단이다.

1898년은 물론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도 훨씬 이전임에도 대서양에서 태평양을 오가며 동시전쟁을 치루었다는 것이 믿을 수 있는 음모설의 핵심이다.

단지 4개월간 충돌시간 만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고 하는 이 전쟁에서 어떻게 서태평양의 필리핀을 이라고 부풀어진 것만큼 찌라시를 근거로 역사를 날조한 것이다.

고려(高麗)라고 대비되는 스페인 역시 해군력은 당시 미국이 범접할 수 없는 실로 막강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본 블로그 글"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에서 살펴보았듯이 1894년 6월에서 1895년 4월까지 약 10개월간의 청일전쟁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군사력을 보면 당시 일본은 육군병력수가 17만4000여명이라 한 것도 조선(朝鮮) 지방 호남(湖南)병력 210,574 명보다 적은 숫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해군력에서도 작은 함선만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불과 4500톤급 미만에 순양함(Cruisers)11척과 어뢰정(魚雷艇:Torpedo boat) 22척만을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감히 고려(COREA)의 막강한 해군력에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코리아의 군사력은 실로 막강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본 블로글"[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에서 밝힌 에드워드 파커의 기록에서 보더라도 코리아의 군사총수가 경안과 외안의 군사와 각 지방 자치병력을 따로 분리되었다고 볼 때 합계 약 1850,000명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고려라고 하면 과연 미국은 하는 수없이 스스로 폭발시켜 고려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고려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미국에서는 미서전쟁에 대한 정리를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마침내 황색언론들에 의해 고무된 매킨리(McKinley)대통령은 1898년 4월 11일 억압받는 쿠바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무장개입을 승인하라고 의회에 촉구하고 나섰고 대(對)스페인 선전포고 안은 하원 311 대 6, 상원에서는 42 대 35로 통과되어 4월 25일, 스페인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으며 이 전쟁에서 미국은 큰 피해 없이 승리하게 된다는 결과의 기록이 전부이다.

상대 스페인이 그토록 허접한 세력이었던가?

천만에 말씀이다.

나침반을 발명하고 해양대국을 세웠던 신라(新羅)라고 한다면 절대로 허접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신라를 흡수한 고려라고 할 때 그리고 대한국인 코리아라고 한다면 그러한 비유는 헛소리에 불과 할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비판을 받아야 할 가증스러운 역사의 실체이다.

이러한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2세계대전을 승리로 마감하고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이유가 크다 할 것이다.

패자는 할말이 없다.

이런 속칭 야바이(やばい)수법이 그들이 말하는 프런티어정신(pioniersgeest)이라 하였으니 그들의 정신이 우리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은 네덜란드정신이고 결국 미국정신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서세들이 만들어 보관하는 근세기의 무슨 조약 무슨 협정 따위를 무조건 믿고 사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메인호를 기억하라!”라는 노래까지 나왔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스페인 아니 고려(대한제국)말살전쟁에 열을 올렸던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쿠바인들의 고통을 끝장내야 한다는 명분을 침략전쟁으로 덮어 놓은 것이다.

그래봤자, 쿠바를 미국인들이 그 이후에도 한참동안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최소한 1939년까지 대동아공영권에 속해 있었다는 것도 명확히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유대계 황색언론에 의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The Treaty of Paris of 1898)에서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모두의 지배권을 미국에게 전부 넘겨준다는 이상한 조약의 문서와 몇 장의 사진이 전부지만 이것이 오늘날 역사가 된 것도 사실이다.

서세가 주도한 근세기 역사에서 종전에 없었던 특이한 점은 “퍽”소리가 나는 충돌만 있었다 하면 마무리는 이상하게도 “파리조약”이란 이름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파리조약이 난무하였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동아시아에서의 충돌이나 아메리카대륙에서의 충돌, 유럽에서의 충돌 할 것 없이 마치 파리가 무슨 세계 천자가 있는 도시처럼 모든 것을 그곳에서 사건을 정리정돈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서 수도로 여겼던 것은 아닌지 밝혀보아야 할 문제이다.

솔직히 글쓴이가 보는 파리라고 해보았자 북아메라카대륙의 뉴올리언스, 또는 세인트루이스정도이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지배했다고 하는 루이지애나주(州State of Louisiana)와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수도 개성(開城)이라면 캔사스시티(Kansas city)를 염두에 둘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처럼 음속을 자랑하는 비행기를 당시에도 타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유럽의 파리는 정치인들의 북새통이 끊이질 않는 곳으로서 서세들의 신성도시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파리는 조선 경복궁이 있어야 할 도시일 뿐이다.

참으로 근세사는 요지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나폴레옹도 1814년 유럽 “파리”가 아니라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서 활동한 세력임에도 그렇듯 모두 유럽“파리”라고 하는 것도 모두가 한가지 서양우월역사 유럽사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는 미국영토매입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대신하여 가지고 있던 2,147,000㎢의 광대한 넓이의 루이지애나(Louisiana)땅을 카리브 해의 아이티 혁명(Haitian Revolution:1791-1804)을 진압하는데 골머리를 앓아 더 이상 커지는 미국으로부터 지키기가 힘든다는 사실 때문에 덜컥 매도하게 되었다는데 이것을 미국은 6,000만 프랑($11,250,000)에 기존 채무 변제하고 나머지 1800만 프랑($3,750,00)만 주고 헐값으로 매입했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프랑스라는 것은 조선(朝鮮)역사의 일부분이다.

조선을 프랑스라 하고 보니 프랑스가 대단한 역사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유럽인들의 시각일 것이다.

본 블로글 글 "다시보는 정조와 루이14세, 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6세"의 3편 시리즈에서 그만큼 밝혔다고 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1710년에 완성한 베르사유궁전(Chateau de Versailles)이라고 하는 경복궁(景福宮)이 그곳에 아주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을 근원으로 하는 수원성도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뉴올리언스는 속칭 신월성(新月城:The Crescent City)이라는 아사달과 이슬람성격의 도시이며 또한 프랑스 이민계 자손 크리올(Criole)문화가 있었던 곳으로서 듣기로는 이곳을 한 때 뉴 파리(New Paris)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쪽 편에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의 텍사스 오스틴(Austin)은 오스트리아라 할 수 있고 헝가리, 신라계의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의 게르만 독일, 이탈리아까지 그곳에 접지 붙어 있었을 확률도 높다.

이처럼 네덜란드 프런티어정신(pioniersgeest)으로 고려를 잠시 충격을 주고 중앙아메리카에 영향력을 확대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정해진 것처럼 해군차관보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며 금융자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면서 결국 파나마운하의 소유권마저 장악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이 1881년에 해체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은 많고도 많다.

파나마운하 공사시도와 1870년의 보불전쟁(普佛戰爭), 미국서부 공유지의 철도부설에 대한 투자가 너무 과중되면서 금융부채가 늘어났을 것이고 이 때문에 1873년부터 불황(Long Depression)이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버블공황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금융부채와 디플레이션에 의한 것이 주요원인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하나의 체제에서 무분별한 토목공사로 하여금 자금압박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서세 금융자본이 눈독들인 파나마운하가 필요했던 것은 늘어나는 운송비문제였고 사실상 당시 3000톤급 미만의 스팀범선을 이용하여 북아메리카대륙 서해안에서 태평양을 넘나는 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때인 만큼 이에 대한 타결 책으로 파나마운하가 절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900년 이후 만톤급의 대형선박이 건조되기 시작하였지만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은 감히 시도되지 못하다가 비로소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횡단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대서양 아틀란틱 운송라인(The Atlantic Transport Line)에 있었던 선박들이 곧장 태평양으로 들어갈 수 있는 파나마운하가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

결국 파나마운하(Panama Canal)는 대조선에 의해 1879년 굴착되었다고 하지만 1881년에 조선(朝鮮)이 해체됨과 함께 1889년에 사업자체가 붕괴되었고 그 이후 대조선을 장악한 세력들이 1894년부터 이것에 관할하면서 다시 시공되었지만 자금압박으로 지연되다가 이를 미국(금융자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부터 스페인(고려)과의 충돌을 의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파나마운하의 개통권과 소유권을 놓고 정치적을도 치열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1903년에 파나마에는 미국 유대자본이 지원한 분리 독립운동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어 콜롬비아라고 하였지만 고려(大韓帝國)로부터 독립시킬 목적으로 조정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생성된 파나마(Panama)를 상대로 헤이뷔 노바리야조약(Hay-Bunau-Varilla Treaty:1903.11.18.)이란 이름으로 체결하게 하면서 고려가 아닌 파나마를 상대로 독립을 보장하고 일시불로 1,000만달러($)를 지급하였고 또한 9년후 부터는 연간 25만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1904년에 비준하게 만들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1914년에 운하가 마침내 완공히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자본력을 앞세운 세력 일루미나티(illuminati)가 설립한 것으로 미국의 중앙은행이라고 알려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출범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미국이 이처럼 발광을 부렸더라도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대한제국은 어떻게든 기존영역에서 잔존했던 것은 틀림없다. 대동아공영권 자료를 보면 추측할 수 있는 지역이 남아메리카 대륙 베네수엘라 과나레(Venezuela Guanare)를 경계로 한 서부전역과 콜롬비아(Colombia)의 전역 에쿠아도르(Ecuador)까지의 영역, 중앙아메리카대륙전체에서 일본(japan)으로 행세한 멕시코를 제외한 엘살바도르(Elsalvador), 온두라스(Honduras),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rica), 파나마(Panama)가 최소한 고려영역으로 남아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미서전쟁은 미국(美國)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스페인(Spain)대신 강자로 군림하겠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받는 행위라는 것쯤은 알 수가 있다.

이때부터 미국파병(용병)이 본격화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고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쿠바(Cuba:1906-1909)에서 두 번째 점령식민통치(occupation)에 이어, 니카라과(Nicaragua)의 1912–1933 점령, 1914년 베라크루즈(Veracruz)점령, 아이티(Haiti)1915–1934점령, 도미니카 공화국(Dominican Republic)1916–1924점령, 재차 쿠바(Cuba)1917-1922점령 등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카리브해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스페인과의 힘 싸움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의 지배권을 미국이 확보한 것이라면 카리브해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상식적으로 그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니 만큼 지배권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지만 동아시아대륙 한반도에 대한제국과 서태평양의 필리핀을 미국의 영향권 내에 두려는 이유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한 중일전쟁 역시 만주를 침략한 곳으로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고 보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없다.

하지만 만주전쟁이 일어난 곳을 한사코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이라고 고집하는 것이라면 당시 미국입장에 제코가 석자인데 태평양을 넘어 다른 지역상황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란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이 당시 대동아지역을 전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숨길 수 없는 대동아공영권이다.

때문에 글쓴이는 대동아공영권을 중요하게 보았던 것이며 대동아공영권은 바로 고려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으로 나중에 대한제국으로 확대된 것임을 최종적으로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는 고려세력과 대한제국은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은 아직 밝혀야 할 부분이다.

이 영역들은 비록 스페인으로 가려져 있지만 실제로 고려 땅이며 영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신라를 이은 고려라고 판단되지만 이를 대한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때문에 한반도와 열도역시 대동아공영권에 들어가며 모두 고려 땅이다.

생각해보면 1898년 미서전쟁에서 또는 러일전쟁에서 일루미나티(illuminati)가 고용한 용병세력들이 주변에서 대포질 몇 차례 했다고 하여 승리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고려나 대한제국을 그들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글쓴이가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과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 "[3]1886년 코리아가 보유한 함선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5 "를 바탕으로 확신한 것인데 어쩌면 당시 미국해군력을 능가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대한제국이란 실체를 미국이 두려워 했을 것이란 짐작도 가능하다.

 

미국의 히스테리

 

그렇다면 이러한 증오가 미국에 의해 어떻게 표출되었을까?

어쨌던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에 대해 1905년까지 이런 식의 적개심을 가졌다는 것을 충분하지 않다 하더라도 확인했다고 볼 수 있었다.

미국역사를 보면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은 미국의 또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건은 미국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먼로주의에 의해 유럽세력인 스페인을 미국활동지역에서 쫓아냈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전함들은 청일전쟁 대 일본이 가지고 있는 함선 수준을 넘을 수가 없다.

글쓴이의 생각은 아마도 거대한 스페인을 농락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자본력이었고 자본을 이용한 대테러활동을 중심으로 스페인의 집중력을 흐려뜨려 힘을 잃게 했던 것이 틀림없다.

당시 미국역사만 보면 스페인 영역이 모두 미국영토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역사일뿐 연속성에서는 오히려 일부 카리브해 연안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스페인이 신라(新羅)였고 후에 고려(高麗)라고 하는 중국이라면 이러한 주체는 상당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조선을 이어 대한국이 바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할때 적어도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그대로 장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1차세계대전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럽전쟁이지만 주도는 처음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다.

물론 영국은 잉글랜드란 세력임을 알 수 있는데 일본과 늘 비교되는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있었던 허드슨베이회사가 그 전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당시까지 회사가 무기를 가지고 전쟁이 가능하던 시대이다.

육상전쟁보다 해상전쟁이 주를 이루었고 독일과 영국은 해상에 충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위 위치가 오대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서 세인트로렌스 강(Saint Lawrence River)을 통과하여 온타리오호와 이리호, 휴런호, 미시간호에 이어 시카코를 거쳐 일리노이강을 지나 미시시피강까지 충돌무대가 바로 그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게 보는 것이다.

이때 고려가 어떤 식으로 유럽세력에게 나타났는지는 아직 밝혀보아야 할 어려운 숙제이다.

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미국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조선을 장악한 미국과의 전쟁을 함으로서 모든 것을 원래대도 평정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글쓴이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의 자본주의체제가 상대적인 것이어서 대립될 수밖에 없었고 바로 독일의 체제가 제정주의에 이은 사회주의라고 할 때 어쨌던 자본을 무기로한 세력과의 상징성으로도 대립됨을 피할 수가 없다.

때문에 영국런던세력과 합해질 수 없었고 또한 뉴욕세력과도 융합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은 무기 팔기에만 열중하였기 때문에 어쨌던 미국을 끌어들여 힘을 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아무런 상관없는 멕시코를 독일이 끌어들이려 했을까?

이 멕시코를 과연 일본이라만 보아야 하는가에 답도 필요하다.

스페인의 고려를 멕시코라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확전을 기대한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만 한정하지 않고 남부 전역에서 확전을 기대한 것이라고 축약된다.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짐머만(Arthur Zimmerman:1864-1940)이 멕시코 외무장관에게 보낸 1917년 1월 16일자 전문에서 멕시코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중전략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잃어버린 땅의 주인은 멕시코가 아니다.

그럼에도 멕시코라 한 것인데 서양사를 인용한다더라도 수세기동안 스페인이 점령한 땅이다.

1차세계대전 동안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모두 독일계유대인이라는 점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독일인들을 싫어 했다.

독일계유대인이라는 것은 조선계 유대인으로 알루미나티 조직체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제정(帝政)러시아=즉 로마노프왕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귀납적으로 풀어보더라도 미국인들의 당시 대다수 여론은 유대인들이 지배했다는 사실이며 거의가 피지배적인 피해의식이 많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독일계유대인들이 독일과 로마노프왕조에게 반감을 가졌다는 여론들은 자본주의제국이 아닌 제정주의세력에게 반감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이때까지 대한제국이 연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곧 제정체제라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아일랜드계 및 독일계유대인과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들은 미국이 로마노프를 돕는 행위에서 이들은 상당히 반대한 모양이다.

물론 미국은 금융자본이다.

1차세계대전이 1914년 시작되어 전쟁종반기인 1917년 4월 6일에 비로소 373 대 50이란 의회투표결과로 윌슨의 선전포고를 승인했다고 나타난다.

결국 미국은 4월 6일 대(對)독일참전을 개시했고, 1917년 5월 8일 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통과시켰으며 최초의 미군이 6월 26일 프랑스에 상륙했다고 알려지는데 실제로 유럽대륙이 아니라 그곳은 루이지애나주(州State of Louisiana)의 세인트루이스이거나 뉴올리언즈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1차세계대전 종반에 오대호에서 충돌하던 것이 남하아여 미시시피강까지 전황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1898년 스페인을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등에서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스페인세력들을 모두 한꺼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고 보기가 힘든다.

그것은 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미국은 근세기 고려를 공격하면서 두 가지 구호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1898년에 메인호를 기억하라! "이고 하나는 50년이 지난 후 "1945년에 진주만을 기억하라! "이다.

이 두 구호의 대상이 다른 것 같지만 결코 다르지가 않다.

메인호가 도발한 곳도 멕시코만이며 진주만 공격도 멕시코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이 두 구호는 각각 '카더라'의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을 동원한 것으로 여론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뿌려(scatter leaflets)된 전쟁구호이고 의도되고 획일화된 전쟁광고 문구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898년의 것은 스페인을 상대로 한 구호이지만 1945년의 것은 열도일본을 상대로 한 구호로서 얼핏 보기에는 상대가 다른 것 같지만 실체는 모두 대한제국 즉 고려를 상대로 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국이 2차세계대전 후에 만약 잘못되었을 시 북아메리카대륙만을 보호하기 위한 전술적인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미국영토에 영향을 주지 않는 미국영토 보존을 위한 분산책이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두 구호가 부르짖는 것 뒤에는 바로 절박함과 음흉함이 존재한다.

하는 쿠바이고 하는 하와이다.

둘 다 섬이다.

물론 북아메리카대륙과는 거리가 떨어진 지역에서 충돌을 말하는 것이다.

각각 따져보자.

첫 번째 구호"1898년에 메인호를 기억하라! "는 미국이란 정체모를 세력이 당시 멕시코만을 배경으로하는 지역에서 영향력을 높이려 카타이 즉 중국이라고 하는 신라 또는 고려에게 도발한 사건으로서 1898년 쿠바의 아바나항(港)에 정박 중인 미국 장갑순양함 메인호(USS Maine)가 폭발하게 하여 화재로 많은 승무원이 사망한 사건으로 만들고 크게 여론화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물론 자본이 지배하던 황색언론들은 즉각 스페인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사실상 스페인은 신라이며 고려로서 미서전쟁(美西戰爭)이라고 하지만 서양사에서 숨긴 것이 훨씬 더 많은 충돌이다.

이것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험한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두 번째 구호 "1945년에 진주만을 기억하라! "는 1941년 12월 7일 "도라도라도라(虎虎虎:TORA)"란 암호로 열도일본인들이 미국을 상대로 도발한 진주만기습사건에 대한 구호이다.

호랑이는 적어도 코리아아 상징이지 일본 왜의 상징은 될 수 없다.

현재까지 열도일본인들이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급습함으로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것으로 인해 미국은 1차세계대전처럼 종반에 들어 기다렸다는 듯이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 돌입하게 되며 이를 연계하여 즉각적으로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는 시나리오가 만들어 진다는 것이지만 많은 것들이 태평양 쪽으로 기울려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본토내에 있는 도서들에서 기습공격이 자행되었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주도한 미국의 실권자가 루스벨트가의 또 다른 한 사람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루스벨트가(家)의 해묵은 증오가 연속적으로 존재하되 칼날을 분명치 않는 국가주체에게 겨냥한 것이다.

첫번째는 스페인이라고 하지만 두번째는 일본이라는 것은 맞지 않다.

그리고 두번째 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고 하는 지역적으로 한정시킨 전쟁이기 때문에 문제핵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아메리카대륙 내 즉 카리브해연안에서 벌어진 전쟁이기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에 미국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은 오직 일본열도과의 충돌로 엮어야 했고 북아메리카대륙을 훨씬 벗어난 태평양이란 한정된 공간영역을 만들어 북아메리카대륙과 상관없는 전쟁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하와이를 그 공격대상에 넣기 때문에 태평양 영역이 곧 미국영역이란 프레임을 깔 수 있는 대안이 되고 대동아공영권전체를 타격할 수 있었다는 전술적인 보탬도 생각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과의 전쟁을 촉발한 세력이 뒤치닥거리도 생각하지 않는체 공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진주만기습은 하와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글도 신중하게 발표를 기다리고 정리 중에 있다.

대동아공영권을 보면 미국이 개입한 전쟁지역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가 대부분 들어가고 중앙아메리카대륙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며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까지 전쟁범위에 넣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이야기다.

열도일본인들이 이처럼 넓은 지역에서 전쟁하였을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실제 전쟁실체는 어떤 세력일까?

또한 미국 입장에서 당시 쏘련제왕 스탈린은 별도의 전쟁 상대로 보아야 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대한제국이라고 하는 악라사(타타르)의 영토를 스탈린 세력들이 거침없이 점령하게 되는 것으로서 대동아공영권에서 동시에 일어난 전쟁임을 알 수 있어 만약 대한제국이 대동아공영권의 주인이라면 스탈린의 역할이 아마도 중요했을 것이란 판단이 작용한다.

 

전범국과 대한제국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설계한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다고 하는 비밀약정, 태프트-가쓰라 각서(Taft-Katsura Memorandum)가 상징하는 것처럼 또는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가 한반도인들이 자립할 수 있으려면 40년 동안 미국이나 소련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한 것처럼 그들은 한국인들을 한결같이 적국으로 또는 전범국으로 대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보면 러일전쟁을 한 러시아는 대한제국이며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대립한 세력 또한 대한제국이다.

아니 대한제국이라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어쨌던 코리아(COREA)이다.

코리아(COREA)가 일장기를 쓴다고 하여 이상할 것이 없다.

코리아(COREA)가 욱일기를 사용한다고 하여 거부감을 가질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민족역사를 옥에 가두고 열도일본이라는 꼭두각시를 세워 식민지역사를 남겨준 실체가 누군인가 밝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1939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한제국(COREA)을 미국은 한없이 증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필요이상으로 한국인을 질시하고 증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왜구로서의 공통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열도일본세력이 일제이고 전범국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는다.

본 블로그에서 단언코 노(No)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지금까지 줄기차게 글로 대신했지만 그래도 완벽할 수가 없다.

그렇다. 당장에 풀어질 것도 아니고 일단 체쳐두고 2차대전(第二次世界大戰:World War II)실제로 넘어가보자.

수많은 자료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독일의 패전이 임박한 1945년 4월30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고 나타난다.

이처럼 자살했다고도 하고 또는 아르헨티나로 자취를 감췄다고도 한다.

연합국에 의해 밝혀진 것은 없다.

무솔리니(Benito Mussolini:1883-1945)는 그보다 이틀 앞선 4월28일 이탈리아의 반파쇼 의용군에 체포되어 비참하게 처형됐다고 나온다.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연합국에 의해 체포되어 죄값을 치룬 상황은 없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을 가공인물인가.

대한제국의 강력한 상대국을 나타내지 않게 세웠던 인물들은 아닌가.

왜냐하면 신라라고 하는 신성로마제국과 연결되는 것은 고려인 것이 틀림없고 타타르가 유럽대륙을 점령한 사실, 그리고 제 삼한제국들의 역사가 유럽사로 변형된 것 말고도 온통 세계삼한역사 근원이 세계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전범국이면서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의 일원이던 일본왕 히로히토(昭和Hirohitoi:1901-1989)는 당시 45세였으니 젊기도 젊었지만 살아서 추악하게 패전을 맞았고, 결국 처벌되지 않고 승전국이 된 미국으로부터 전쟁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면죄되었다는 참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사실이 존재한다.

미국이 거추장스럽게 생각한 인물들은 모두 미국의 손에 처형되지 않는 기이한 형상이 있고 정작 살아 처벌할 수 있었던 일본열도왕은 살려주는 것이다.

열도일본왕은 책임이 없는가 묻을 때 현재 동아시아대륙 역사로는 분명한 전쟁책임이 있다.

그래서 열도일본정치인들은 전쟁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으니 또 다시 전쟁을 생각하며 반성도 없이 동아시아에서 도도하게 도발책동만을 일삼는다는 어처구니 상황도 작금에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 또다시 용서하고 봐줄 것인가.

그러다가 일본이 미국본토를 공격할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 매우 궁금해진다.

이것이 무슨 잣대에 의한 처벌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왜 죽어야 했는가?

아니면 히로히토는 왜 살려야만 했을까?

왜 히로히토는 전쟁책임의 추궁에서 벗어나 면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답은 하나다. 바로 이들 나라의 생사여탈지권(生死與奪之權)을 가진 미국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2 "에서 살펴보았듯이 과거 대항해시대 때는 생사여탈지권(生死與奪之權)을 코리아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네덜란드가 코리아에 상납한 당시 가장 크다고 하는 1000톤급의 함선 코리아호가 가지는 의미는 코리아가 그들의 활동자체를 막을 수 있는 것이기때문에 그들에게 큰 압박이었다.

히로히토는 법적으로 분명하게 패전국의 최고책임자였고 강제하여 군사를 동원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요즘 테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과격분자들처럼 가미가제(神風:kamikaze)자살특공대를 만들어 죽음으로 몰아 강제한 살상에 책임이 분명하게 있음에도 침략전쟁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고 스스로도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이며 이것에서 한편으로 평하길 히로히토는 미국이 세운 왕이라 할 정도라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미국은 일본왕이 필요했던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미국국민들을 근원적으로 제정국가를 싫어했다.

때문에 히로히도의 전쟁책임을 면죄한 사실에서 정당했는가에 물음이 없을 수가 없다.

이러한 불공평한 문제 때문에 열도일본철학자 아베 요시시게(安部能成)는 당시 시데하라내각(幣原内閣:1945-1946)의 문부대신으로서 “국민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웠던 천황 스스로가 책임이 없다고 하면 이는 모순이다”라고 한 사실에서도 일본인들마저 일본왕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주장한 것이라면 미국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면죄부를 준 것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일본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해관계란 무엇인가?

일본이 대한제국의 대역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특수한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또 다른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같은 것일게다.

대한제국 대신 열도일본인들이 대한제국행세를 도맡아 하겠다는 밀약일 수가 있는 것이다.

글쓴이가 이렇게 추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실제로 우리에겐 정말 궁금한 것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시 최고사령부의 사령관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1880-1964)은 이해관계라 하였으니 일왕과 무슨 밀약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왕의 카리스마와 상징성을 이용하여 점령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고자 했다는 핑계가 분명하게 있다.

대신 일본정부의 요구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전범국왕의 정부가 아니다.

미국이 세운 정부라고 하겠지만 그들이 일왕을 용서해달라고 하여 미국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다르게 면죄한다는 것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일왕제(日王制)를 유지하면서도 전쟁책임 추궁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서로 골치 아프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도쿄재판에 대한 미국정부의 의도에 따라 시데하라내각(幣原内閣:1945-1946)은 1945년 11월 5일 비밀리에 전쟁책임에 대한 각의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당연히“일왕은 대미교섭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을 뿐 아니라, 개전결정 및 작전계획을 수행하는데 헌법 운용상의 관례에 따라 통수부(統帥部) 및 정부의 결정을 재가(裁可)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쟁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결정을 그대로 맥아더가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재가하는 것 이외 직접적으로 살인을 하고 전쟁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전범국 3국에 대한 처분이 이처럼 일률적이지 못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맥아더가 1946년 1월 미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1890-1969)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황이 과거 10년간 일본정부의 결정에 크게 관여한 증거는 없다. 만약 천황제를 파괴하면 일본도 붕괴할 것이다. 일본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진다면 100만의 병력이 필요하다’라고 밝힘으로써 일왕의 면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일본이 붕괴할 것은 왜 맥아더가 걱정했을까?

게릴라가 무엇인가?

일개 장군이라는 작자가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구지 못한다는 어설픈 주장을 하고 있었으니 일본과 정말 전쟁을 치룬 장군이 맞는지 의문이 없지 않다.

일본과 전쟁을 치뤘고 일본군에게 자신의 수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을 것인데 어떻게 장군이라는 자가 일본 붕괴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의아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진주만공습을 잊지 말라”고 미국인들에게 홍보했다는 것은 무엇이며 루스벨트 스스로가 왜 이처럼 열도일본인들에게 관대하려고 애를 썼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영토분할문제도 소련에 의해 일본열도를 분할하자는 제의가 분명하게 있었지만 잘라 거절한 것이 바로 미국의 루스벨트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전범국인 열도일본대신 동네북처럼 애많은 한반도가 38도선으로 짤려 버리고 마는 처량한 신세에 빠져버린다.

참으로 불공평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들이 만든 식민지역사만을 참고하더라도 36년간 피지배속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한 한반도인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일본인 대신에 허리를  짤려버렸다는 것은 통탄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유는 40년간 미국과 소련에게 간접통치를 거친 후 자립할 수 있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주장 때문이다.

 

Korea: A Century of Change(공)저: Juergen Kleiner
Roosevelt estimated that Korea's apprenticeship would take approximately 40 years.

 

한국인들을 지배하면서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다 하는 열도일본은 그대로 보존하고 보호할 수밖에 없으며 한반도는 분단을 해도 괜찮다는 그야말로 어거지 같은 논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의니 뭐니 하지만 근본도 원칙도 없는 막가파의 짓이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한반도 구성원들은 전범국처럼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중국에게 속국으로 있었다는 것이 잘못인가?

아니면 일제에게 핍박당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던가?

한반도역사가 말한 것처럼 수 천 번의 침범만을 받았지 누구를 침범한 사실도 없는 순박한 한반도인들에게 해도 너무한 가혹한 처분이 아닌가?

왜? 왜? 왜?

한반도인들의 한결같은 절규이다.

 

마무리

 

글쓴이는 우리나라 한반도 근대사는 미군군정이 들어서면서부터인1945년 이후에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을 분명히 잘라 말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대동아공영권을 참고 하더라도 최소한 대한제국의 주류들이 한반도만을 영역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히 주장한다.

대타타르가 고려(高麗)라고 하면 차이니스타타르에는 한반도와 열도일본 역시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차이니스타타르의 주체가 누구인가.

바로 고려이다.

일본자료들을 살펴보면 고려를 존중하는대신 조선을 싫어한다.

때문에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나 열도일본에는 친미세력들이 옮겨온 것이 틀림없다.

한반도는 일본식민지로 일본열도는 핵폭탄을 맞고 미국에게 패한 종족으로 주홍글씨를 새겨야 했다.

무엇이 남는가.

열도일본인들이 미국이 차려놓은 근대사에 만족하고 있겠지만 그들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노예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1937년에 있었던 고려인 송환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대한제국의 8개연합국에서 악라사 영역으로 송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주체들이 아무런 연고가 없을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사실은 일종의 인구이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는 어떤 역사가 있었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거의 북아메리카대륙 역사를 한반도사로 둔갑시킨 것으로 족해야 하고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한국민이나 일본인이나 처량한 신세는 마찬가지다.

1920년대 미국에서 열도일본인들을 보는 관점에는 매우 경멸적인 것이고 거의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더라도 스스로 일제잔여세력이라고 하는 열도일본정치세력들은 미국에 잘 길들여진 정치깡패로서 미국과 영국 등 서양이익을 대변하게 하는 잘 훈련된 이질적인 종자라는 것쯤은 충분하게 알 수가 있다.

대신 한반도에는 당시 내로라하던 지식자들이 비전을 핑계로 쉽사리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맴돌았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주 땅에서 개장사 하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서글른 이야기지만 웃을 수만 없는 희극적인 이야기다.

2차세계대전후 냉전시대를 핑계삼아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앞세움으로서 그들의 영향력을 동아시아대륙에 세우려했던 것은 분명했다.

때문에 일본왕을 처벌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을 수도 있다.

경제권을 쥐고 모이 주듯이 하던 미국과 영국의 말을 일본이 듣지 않으면 안되겠금 일본역사 모든 것을 가지고 지배했다는 사실도 또한 짐작할 수가 있다.

물론 미국이 붕괴되면 일본이 대신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일본인들이 가지는 기대는 잠재적으로 크다고 볼 수 있다.

태평양만 지배한다면 그들이 치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평양전쟁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신중국이 일본태평양지배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할 때 추후 또 한 번의 중일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동아시아위기설 문제도 언제든지 폭발할 시한폭탄처럼 째깍째깍 도사리고 있다.

끝까지 주도는 서세들이 장악하고 조율한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근세기 만들어진 역사함정이다.

그러나 실제로 식민지상태에 있지 않았던 우리민족은 허상의 역사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허망함이 또한 존재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피해역사가 현실화되어 경험해보지 못한 참혹한 환경에 빠질 수도 있다.

팔다리 다 묶여진 상태에서 자주권조차 잃어버리는 황망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뒤늦게 모든 것을 깨달아 한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떡할텐가?

실제로 역사에서 지배국에게 핍박받는 것 보다 더 암울한 것은 잘못된 역사로 인해 노예근성을 키우고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한반도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미 이러한 노예근성 심기에 노출되어 심하게 정식적으로 함몰되어 이질화된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교육이 심오하다 할지라도 정신을 병들게 한 것은 쉽게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노예근성을 뼈 속 깊이 심기한 교육은 적어도 1945년부터 2015년이니 70년간이라 볼 때  위그노족들이 핍박받은 100년은 못될 망정 거의 같은 시간이 다가온다.

실제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반도역사가 없었던 것을 있었던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기간이 7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는 말과 같다.

이제 한반도 역사를 엉터리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혹자는 너무 과민한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겠으나 사회현실을 보면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역사가 엉터리인 것은 곧 현실적으로 정의와 도덕이 사라진 것과 같은 모습의 사회를 목격한다.

거짓이 난무하고 잘못이 판을 쳐도 누가 나서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구성원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핍박을 받는다고 피해의식이 강하다.

실제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식민지역사만으로 그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그것을 어떻게 나무라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불합리처분을 받아도 그것이 왜 불합리한 것인가를 따져볼 생각을 하지 않고 순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노예근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강박관념이 강해지고 트라우마가 많다는 것은 자의적인 것도 많다.

특히 역사에서 펙트에 대해 신경조차 이제 쓰지 않는다.

때문에 사회적 비판력도 현저히 감소될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에게 피해 없으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자신을 옴츠려들게 만든다.

자신도 없다. 더군다나 살기이 막막하여 희망도 없다.

무엇이 우릴 살릴 것인가.

답도 없다.

 

자기자신의 역사가 실제로 무엇인지도 모르는 열도일본 정치인들이 넘쳐난다.

오늘날 뉴스를 보면 한국인들은 거의 멘탈 붕괴에 빠질 수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적이었던 일본을 동반자라고 하면서 미국은 거의 한 몸처럼 생각함을 전 세계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대는 항상 변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일제가 만든 역사만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겐 그것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소외된 느낌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과거 적이 동지가 되고 동지였던 개체이 갑자기 등 뒤를 겨냥하는 꼴을 다반사로 여기기에는 우리가 식민지역사로 인해 앓고 있는 트라우마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미국은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선봉만이 아니라 과거 역사의 일제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고 냉철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한반도역사로 부터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부터 고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불필요한 상처를 많이 받았다.

1853년 1월에 부산 용당포(龍塘浦)라 함은 사바나항(Savannah)이라고까지 밝혔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여러분 생각을 묻지 않겠다.

한반도역사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겠느냐고 묻지 않겠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분단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답도 구하지 않겠다.

또 다른 1910년부터 일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미국 대통령과 엮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싶지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피카소그림을 단순히 노근리만을 한정하여 볼 것인가라고도 소리치고 싶다.

In the United States, at the end of World War II, there were 175 Branch Camps serving 511 Area Camps containing over 425,000 prisoners of war (mostly German). Over 127,000 United States citizens were imprisoned during World War II. Their crime? Being of Japanese ancestry. 

1942년부터 미국(美國)전역 10개의 캠프(Camp)에서 127,000명이상의 전쟁 재배치 센터 수용소(War Relocation Center)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잘 훈련된 일본열도정치인들은 이 속에서 생성한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대한제국의 구성원들은 이곳에 없었을까?

아마도 아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이 수용소에 있는 인적구성원들이 모두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계라고 알려지지만 수용소에 인원과 그 구성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수용소에서 열도와 한반도로 들어온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카리브해(Caribbean Sea)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혼란이 그속에 있을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을 보면 멕시코만을 중심으로 대한제국과 미국이 치열한 전쟁을 치우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한제국을 상대로 미국, 중화민국, 영국, 네덜란드[ABCD(America, Britain, China, Dutch)]의 공격을 막아내어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코리아(COREA)는 미국의 근원적인 증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한반도역사는 미국에 의해 이렇게 생성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의 거대한 몸집을 억지로 구부러뜨려 한반도에 들어맞게 만들었던 반도역사(半島歷史)는 미국의 작품이라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데오르기가 문제였는가.

이제 이쯤하여 지나가버리고 쪼그라든 역사에 일희일비하고 말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쪼그라들게 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독일은 2차세계대던으로 죄의식(guilty)을 가진다 한다. 하지만 일본은 부끄러움(shame)의 가진다 한다.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지는가?

참담함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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