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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일인물
글쓴이:한부울
[대한제국총편]
14). 한반도에 내려진 서세들의 불합리
15). 루즈벨트가의 악연
16).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일인물
17). 전범국과 대한제국
18). 마무리
14). 한반도에 내려진 불합리
그렇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한제국의 실체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서세에겐 위협이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참담한 모습이라고 한다면 바로 분단된 모습이다.
왜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분단이 되어야 했고 또한 피지배민족으로 존재했어야 했을까?
우리의 잘못이 아닌 타의에 의하여 동족이 분단된다는 것은 식민지역사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1945년 미국과 전쟁을 하여 패한 세력이 일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열도일본세력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반도인들은 일제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여겼지만 돌연 미국에 의한 분단조치는 한반도인들에게는 마치 죽은 시체에 다시 못박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일제식민지 고통을 겨우 이겨낸 한반도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미국이 왜 이런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분단은 그렇다치고 동족상잔이라는 한국전쟁은 왜 미국이 애초부터 막지 못했는가.
코리안학살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한국전쟁에서 500만명의 이상의 인명손실이 있었고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현재 인구개략적으로 환산하면 약 1,250만명이란 인명이 사라지게 만든 것이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는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남북이산가족이 1,000만명이라 하였으니 동족상잔이 아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만약 그 때 한반도가 통일을 이룩했다면 이런 처분을 한 미국을 우리가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때 만약 비록 동족상잔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통일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금 한반도인들의 경제사정이 어떻게 변했을까?
그래서 경제사정이 나아졌다고 해서 그들의 잘못을 덮을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글쓴이의 입장에서 하도 억울해서 한번 해 본 소리가 아니다.
아마도 196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들의 특별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나 패기(霸氣)로 볼 때 지금 열도일본인들의 경제력도 아마 뛰어 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반도인들이 그렇듯 뛰어난 경제력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할 수 없었던 것도 결국 미국이 아닌가 의심까지 된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한반도인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미국의 이러한 조치가 참으로 가혹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생각이다.
현재 안보비용이라고 하지만 경제면에서도 분단과 동시에 우리가 부담해야 할 금액은 엄청난 것이다.
만약 안보비용이 손실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산업경쟁력은 일본을 능가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반도역사사실에서 5000년의 유구한 역사 땅인 한반도에 수많은 유적과 사적이 있었을 터인데 미국은 그것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폭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한반도인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불분명한 소문이긴 하겠지만 일본경제부흥을 위해 미국이 한국전쟁을 유발시켰다고 하는 따위를 극단적으로 인정할 수 없겠지만 미국이 나서 직접세웠다 할 수 있는 자유민주국가 한반도 남한에 전쟁복구를 위한 적극적인 경제지원이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오죽했으면 박정희정권시대때 미국이 조금만 도와주어도 될 자금을 얻기 위해 같은 분단국신세에 있는 독일에게 광산, 간호원인력을 팔아 그 돈으로 경제부흥자금을 마련하였을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미국은 우리를 가난하도록 방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왜 이런 각박(刻薄)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가?
미국경제가 힘들었던 것인가?
미국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자본이 그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일게다.
마치 미국이 제정러시아를 지원하는데 못마땅한 여론이 들끊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대사수 반감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에게도 그러한 정서를 노출한 것이다.
분단국인 독일이 나서 그나마라도 도와주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가짜 열도일본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이미벌써 크게 예속되어 역사기록이 아니라 실제로 경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에서 식민지가 현실화 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은 혹시 한반도인들이 열도일본인들에게 예속되기를 노린 것이 아닐까?
근래들어서도 일본과 비교하여 정치적으로도 미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이 가지는 섭섭함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처음부터 일본우주산업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면서도 한반도는 분단을 이유로 로켓 비거리를 제한하고 로켓기술을 전수하기 꺼려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며 또한 오래 묵은 영토갈등인 독도문제와 동해문제, 또한 위안부문제들을 미국이 나서 도덕, 윤리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더 이상 열도일본인들이 괜한 트집잡기를 막았더라면 지금처럼 한국인들이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느끼지 않게 하였을 것이란 아쉬움이 없지 않다.
우방이라면서 열도일본인만을 위한 정책을 우선한 것에서 지금처럼 섭섭한 것이 없을 수가 없다.
이것들이 한국민들이 서운하고 섭섭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사실들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정말 어찌보면 앞에서 언급한 소설가 박경리선생이 이야기 하는 근원적인 증오가 기실 열도일본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치인들에게 싹처럼 존재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 미국인들은 근원적으로 한국인들을 경계한다.
글쓴이는 순수한 역사연구가이지 정치적인 관심은 비교적 공평하다.
미국 일반인들은 모르겠지만 미국핵심정책에 있는 지도자들은 한반도인에게 역사적으로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가 있다.
이것을 역사에서 기인한 증오에서부터 근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It is the evil things that we shall be fighting against – brute force, bad faith, injustice, oppression and persecution– and against them I am certain that the right will prevail.위 원문은 이렇다.
"우리는 사악한 세력과 맞서 싸울 것이다. 우리의 적은 폭력과 불신과 불의와 억압과 박해로서 정의가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말은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1939년 9월 3일 연합국 영국총리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1869-1940,재임:1937-1940)이 라디오방송에 나서 영국인들에게 연설을 한 끝마무리의 말이다.
곧 독일과 전쟁선전포고함에 있어 전쟁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전범국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열도일본은 전범국이 아닌가?
적어도 여기서는 영국이 잉글랜드라 할지라도 결코 일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일제는 미국밖에 없다.
미국과 태평양전쟁이 아니라 대동아전쟁을 한 세력의 정체를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동아전쟁을 치룬 당사국은 미국과 열도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도일본이 아닌 당사국은 과연 어떤 역사주체인가?
지금까지 밝혀본 사실에서 독일과 같은 일본은 애초부터 전범국처벌에서 대체로 온건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백보양보하여 반도역사를 바탕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도대체 우리 한반도인들이 무엇때문에 매번 열도일본인과 비교하여 미국인들에게 불합리한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그럴 근덕지가 없다.
무엇때문인가?
아마도 한반도인들은 그럴 때마다 거의 이유도 모르면서 매 맞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 뻔한데 글쓴이 기분이 꼭 그렇다.
소설가 박경리(朴景利:1926-2008)선생의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 증오(憎惡)의 근원(根源)에서 토로한 것은 열도일본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결코 미국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한반도인들이 가진 역사관 수준이다.
반도역사 상식으로서 미국과 증오의 근원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치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지 않는가.
왜 미국은 우리 한반도인들에게 불합리한 처분만을 내리기를 원할까.
한국인들의 생각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도역사를 바탕으로 할 때 절대 미국과 역사적으로도 원한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이같은 불공평한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역사에서 태평양전쟁을 한반도인들 주도한 것이 아니라면 미국인들이 왜 한반도인들을 경계하는 것일까?
열도일본인들이 천지도 분간 못하고 무모하게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은 근대사의 상식같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경계를 하더라도 한반도인 아니라 열도일본인을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수많은 한반도사람들을 열도일본인들이 강제동원하여 엉뚱한 전쟁에 밀어넣고 죽게 만들었으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또는 마루타 생체해부를 하여 조선인과 중국인 등 5천명 희생시킨 관동군 731부대(방역급수부대)만행은 물론이고 위안부를 강제동원하였으며 온갖 유적을 파괴하거나 탈취하여 그들의 침탈성을 낱낱이 보여주고 그들의 잔인성과 폭악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도대체 2차대전 승전국이었던 미국과 서세연합국들은 독일에게 내리는 처분의 10분지 1도 않되는 처분을 내리면서 같은 전범국인 일본에게 특혜를 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마치 열도일본인들은 미국이 키운 양자가 같은 대우이다.
어쨌던 미국이 열도일본인들을 귀여워서 잘 봐주었다 치고 도대체 한국인들은 왜 미국인들에게 미운오리가 되어야 했을까?
2차세계대전이 끝나 승전국이 된 미국과 서세연합세력들이 전범국인 일본열도를 분단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특혜이다.
36년간 열도일본으로부터 온갖 폭정과 그야말로 불신, 불의와 억압 그리고 박해가 따른 일제식민지 고통속에서 겨우벗어났다고 안도하던 한반도인들의 역사터전인 한반도 허리부터 잘라야 했던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수탈에 의한 가난까지 떠 안고 있었던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한반도인들에게 그것도 5000년이란 긴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며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한반도를 무슨 억화심정이 있어 38도선으로 갈라놓아야 했는지 그 의도가 진실로 궁금한 것이다.
분단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갈라놓은 그들이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애많은 한반도인들이 그러한 불합리한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한 것이다.
이 글 서두에 언급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미국의 이런 분단조치는 힘없는 나라에게 참으로 가혹한 처분이며 정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네빌 체임벌린이 주장한 것은 영국만의 주장으로서 서세들의 본심이 아닌 가식이란 말이다.
명색이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세계지도국으로서 세계경찰국을 자처한 미국이라면 적어도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야 했다.
세계지도국이라면 약자편에 서야 하고 정의편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1939년 네빌 체임벌린의 일갈처럼 적어도 연합국인 서세의 판단 중심은 약한 나라에게 폭력과 불신, 불의와 억압과 박해를 가하는 세력이 곧 그들의 적이라는 공언 마찬가지로 분단은 한반도인에게 내릴 것이 아니라 열도일본인에게 내려져야 할 처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1945.2.4-2.11)에서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도 열도일본의 허리를 잘라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는 한반도 허리를 잘라야 한다고 했다.
루스벨트는 왜 이런 판단을 한 것일까?
15).루스벨트가의 역사적 악연
미국인은 한반도인들에게 왜 그처럼 가혹한 것일까.
미국인은 왜 최소한 1941년 이후부터라도 한반도인들에게 관대할 수 없었을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신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의 한국어 위치자료를 보면 1941년의 진주만 기습 이후, 한국인 독립운동가 이승만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며, 합동 군사훈련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었으나,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그는 끝내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한다.
이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국무성을 방문했지만 결국 만나주지도 않았다.
본 블로그 글 "코리언(corean)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 " 소제-
7) 대한제국(COREA)을 증오한 미국(美國)에서 충분하게 이야기 한 것이지만 본 블로그에서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일인물이라고 알려지고 최초 험한의 대표적인 미국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역시 공개적으로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기록에서만 그렇다고 볼 수 없는 문제가 다분하게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시리즈 대한제국편을 볼 수 있으면 한다.)한 것처럼 1905년 있었다고 하는 '태프트가쓰라밀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에게 대한제국이란 잘 차려진 밥상을 이 사람은 꺼리낌없이 그냥 던져준 것과 마찬가지의 일을 했다고 알려지는 인물이다.
우리한반도인들 입장에서 볼때 그에게는 대한제국의 주권마저도 안중에 없었다는 것이 틀림없다.
이와같은 짓은 역사라 할지라도 그야말로 무책임하고 무도(無道)한 행위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인물에게 이승만 박사가 나라를 구한답시고 당시 만날 것을 애걸복걸하였다 하였으니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루스벨트는 이런 험한 사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떤 원천적인 미국인에게 주었던 증오나 원한이 우리 대한제국으로 부터 생성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험한 짓을 하였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솔직히 영문도 모르고 뺨맞는 격이다.
대조선의 마지막황제 고종이 미국과 이런 관계를 예상했는지 알 수 없지만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후인 다음해 1882년에 갑자기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맺는다는 기록이 온 문서에 등장하는 것도 이상한 이양기지만 이런 수호조약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미국은 우릴 가지고 놀았다.
당시 조선관리들이 그렇게도 어리숙했다란 말인가.
이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보면 1898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스페인이라는 역사명칭은 고려(高麗)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대한제국은 미국에게 큰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따진다면 조선을 미국이 보호해주고 대신 통상을 허락하는 것이다. 즉 조선은 미국금융자본(US, financial capital)을 이용하면서 조선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조선이 이를 허가했다는 내용임을 알 수가 있다.
이때 조선은 재정적인 압박이 심했다는 사실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금융자본(financial capital)은 바이에른 풍산홍씨(豊山洪氏)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만들어진 일루미나티(光明會,Bavarian Illuminati)라는 것이 문제이다.
금융자본은 은행자본과 산업자본과 결합하여 경제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자본형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사전에 정리된다.
우리는 미국이란 역사형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 먼저이다.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에서 살펴보았듯이 1868년 11월 29-12월 11일까지 러시아제국 샹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무기감축선언이 있었고 이 때 초청된 나라가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y), 바이에른(Bavaria), 벨기에(Belgium), 덴마크(Denmark), 프랑스(France), 브리튼왕국(United Kingdom(representing the British Empire), 그리스(Greece), 이태리(Italy), 네덜란드(the Netherlands), 포르투갈(Portugal), 프러시아(Prussia), 통일독일동맹(the North German Confederation(Greater Prussia)), 러시아(Russia), 스웨덴노르웨이(Sweden-Norway), 스위스(Switzerland), 오스만(the Ottoman Empire), 그리고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등 17개 나라인데 당시 미국(美國)이 빠진 것은 개최국인 로마노프왕가의 러시아가 초대하지도 않았고 주요국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당시 러시아도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가 밝혔다.
정확히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무기감축선언이 있을 때 1868년은 소위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성립된 시기로서 이 명치유신정권도 1853년 강력한 미국의 아시아함대사령관인 페리제독이 흑선(黑船)을 몰고 들어가 함포로 위협하고 개항과 개방을 이끌어낸 결과라고 근세사는 설명한다.
그런데 주요국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1898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스페인에게 미국은 적개심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고 스페인을 상대로 마침내 미서전쟁(美西戰爭 :Spanish-American War)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 아다시피 이 미서전쟁은 미국이 의도한 전쟁이다.
무엇으로부터 의도된 것일까?
자본무한축적이다.
스페인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끝까지 미국을 괴롭혔다면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정권을 잡았을 때 미국역사에서 스페인은 사라지고 없는 국가이름이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을 싫어하고 대한제국을 미워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어쨌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조선을 증오했다는 것은 조선과 고려를 서양세력들이 코리아라고 하였을 때 1881년에 해체된 조선이 아닌 또 다른 코리아 즉 고려(高麗)가 존재했다는 가설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즉 고려(高麗)는 근대사가 감춘 대한제국(COREA)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란 역사실체가 1941년 이후 온 세계를 장악한 미국(美國)에게 달가울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역사에서 우리의 정확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당시 자본금융 조직인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조직 수장을 미국대통령이라 했다고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위 1868년에 개최된 무기감축선언에서 미국(美國)은 빠진 것이다.
이상하게 한반도구성원들은 대한제국이 존재한 사실과 무관하게 1904년 8월 18일 구 독립협회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곧 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회(維新會)가 조직되었고 유신회는 1904년 8월 20일 일진회(一進會)로 개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알루미나티라고 하는 광조파 광명회(光照派,光明會:Illuminati)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까지 유추할 수가 있다.
歐洲“啟蒙”一詞,源于神學中的光之比喻﹕“給黑暗以光明”、“恍然大悟”﹔或來自 氣象描寫中的感官體驗﹕“陽光通明”。漢語“文明”,本有光照之意,如光明、有文采。
광명회를 따져볼 때 위 한어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유럽의 개몽이란 단어는 원래 신학에서 빛을 비유한 것으로 암흑(黑暗)에서 광명(光明)을 받는 것으로 문득 모든 것을 깨우치다는 것에서 체험감각적으로 기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나타나 그 빛으로 모든 것에 통달(通達)하고 지혜(智慧,知慧)가 밝게 된다는 것으로 한문으로 이것을 문명(文明)이라 하는 것이지만 광조(光照) 즉 본래 빛이 두루 비치게 한다는 뜻으로 광명(光明)과 같고 문채(文彩)가 있다.[번역:한부울]고 풀이가 된다.
我們也許可以提出一種假設﹕從詞源上比較,“文”與“明”的組合與歐 洲思想史中的重要概念 enlightenment 〔英語﹕啟蒙〕、Aufklaerung 〔德語﹕啟蒙〕的相通之處, 也許是維新之士青睞“文明”的一個重要原因。
또한 이 자료는 가설에서 어원을 비교하면 문(文)과 명(明)은 같은 것으로 이 조합은 유럽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나타나 깨우침, 계몽주의(enlightenment), 독일어 계몽(Aufklaerung)이란 뜻에서 서로 유사하고 어쩌면 유신(維新)이며 모든 연령대 인사들을 개혁, 개정하는 것으로 문명(文明) 즉 빛으로 깨우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번역:한부울]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위 [近現代中國“文明”,“文化”觀-論價值轉換及概念嬗變-方維規 참조]한어자료에서 볼 때 문명(文明)은 유럽인들에게 광조(光照)와 광명(光明)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유신(維新)은 주요 인사들에게 진보적인 개혁을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문명, 광조, 광명, 유신은 한 테두리에 있는 단어들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기에 금융자본을 무기로 한 일루미나티가 이러한 의미를 가진 조직체라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문과 명은 빛으로 깨우친다 하였으니 이것은 이집트의 라(Ra), 태양신(太陽神)을 말하는 것임을 알 때 삼한역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들의 의식변화를 요구한 주체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던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에 대해 1905년까지 이런 식의 적개심을 가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다.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으로 인해 스페인이 쫓겨 달아났다는 사실 또한 그대로 역사사건으로 인정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서세 그들만의 역사일 수도 있다.
스페인 영역이 모두 미국영토가 되었다고 생각되겠지만 적어도 스페인이 신라(新羅)였고 후에 고려(高麗)에 흡수되는 과정이 있었다면 이를 이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은 북아메리카대륙을 그대로 장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1차세계대전은 처음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독일이 미국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다.
아마도 독일은 미국의 자본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색깔은 사회주의성이다.
당시 자본주의 상대적인 것이 바로 사회주의라고 할 때 어쨌던 자본을 무기로한 세력과의 전쟁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북아메리카대륙 20세기초 1차세계대전 이후부터 남부에는 사회주의세력들이 꽉들어찼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1차세계대전은 남미브라질과 북부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독일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본 블로그의 글에서 알 수 있었던 이야기다.
잉글랜드는 북아메리카대륙의 독일 공격하고 독일은 미국의 자본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잉글랜드의 자금원이 미국이고 금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은 독일입장에서 보았을 때 분명 전쟁에 끌어들여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입장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 분명하다.
직접적인 적이 영국이라고 하지만 영국은 독일 존재한 곳에서 자본주의 세력을 키워야 했고 독일은 이를 반대하고 자본세력들을 축출하려고 노력했거나 융합될 수 없는 세력들을 분리시키고자 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이모든 것들은 상업주의가 팽배해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이해관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때문에 아무런 상관없는 멕시코를 독일이 끌어들이려 했을까?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짐머만(Arthur Zimmerman:1864-1940)이 멕시코 외무장관에게 보낸 1917년 1월 16일자 전문에서 멕시코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말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어째서 멕시코 땅이 될 수 있는가?
서양사를 인용한다더라도 수세기동안 스페인이 점령한 땅이다.
1차세계대전 동안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모두 독일계유대인이라는 점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제정(帝政)러시아=즉 로마노프왕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귀납적으로 풀어보면 미국인들의 당시 대다수 여론은 유대인들이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독일계유대인들이 대다수라고 볼 때 로마노프왕조에 반감을 가지는 여론들은 사실상 자본주의제국이 아닌 제정주의세력에게 반감을 가진 것이라고 할 때 이는 곧 대한제국이라는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아일랜드계 및 독일계유대인과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들은 미국이 로마노프 돕는 행위를 이들은 상당히 반대한 모양이다.
물론 미국은 금융자본이다.
1차세계대전이 1914년 시작되어 전쟁종반기인 1917년 4월 6일에 비로소 373 대 50이란 의회투표결과로 윌슨의 선전포고를 승인했다고 나타난다.
결국 미국은 4월 6일 대(對)독일 참전을 개시했으며, 1917년 5월 8일 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통과시켰으며 최초의 미군이 6월 26일 프랑스에 상륙했다고 알려진다.
그곳은 뉴올리언즈가 소속된 루이지애나주(州State of Louisiana)라고 판단되는 곳이다.
물론 미국이 1898년 스페인을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등에서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스페인세력들을 모두 한꺼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고 보기가 힘든다.
그것은 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반란세력인 멕시코와 함께 1차세계대전 참전이후, 미국의 가장 큰 현안은 유럽에서 갓 이주해 온 외국출신 이민자들을 어떻게 미국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자본주의에 의한 정체성과 사회주의에 의한 정체성, 제정주의에 의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북아메리카대륙 각곳에서 벌어졌다는 이야기다.
“당신은 100% 미국인인가? 그렇다면 입증하시오!(Are You 100% American? Prove It!)”라는 식으로 징병을 독려했고 미국정부는 전쟁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1917년 6월 방첩법(Espionage Act)을 만들어 입대를 거부하거나 타인의 입대를 제지할 경우 2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이때 1918년 이승만이 뜬금없이 미국을 위해 징병지원서를 작성하였고 문제에 자신의 국적을 재팬(japan)이라한 것이다.
이승만 역시 유신회(維新會)라 하였던 일진회(一進會)회원이었다.
대조선 내에 미국세력이나 고려세력이나 자본주의, 사회주의, 제정주의 갈등은 물론이고 국가개념 즉 내셔널적인 판단이 분명치 않았을 때 아마도 자유분방한 체제라고 판단할 수 있는 미국(美國)의 국적을 선호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국가개념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강하다.
만약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가가 아니라 독일인가 미국인가 분리하여 묻는다면 그가 일본이라고 하여 중립을 취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일루미나티의 자본금융조직체이기 때문에 국가를 칭할 수 없었다면 일본(Japan)이란 국가명을 차용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좁혀보면 멕시코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반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멕시코 땅에 있었던 코리안들은 재팬(japan)이라 했을 가능성이 많았지 않았게는가 한다.
이것을 식민지 운운하지만 명확한 답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멕시코, 쿠바같은 작은 일본이 아니라 거대한 일본은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대한제국을 미국이 싫어 했다는 것은 적어도 대한제국이 일제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을 끌어내릴 수 있는 파워의 제국이라면 미국의 여론을 지배하던 유대자본조직이란 판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디테일하게 들여다 보면 광조, 광명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일루미나티라는 실체가 국가로 변이되기 전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이승만과 같은 정치인들이 쉽게 갈아탈 수 있는 국적은 미국인들이 차용한 일본(Japan)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모든 권력을 자본이 통제하였을 것이다.
물질이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시대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국가개념이 아니라 사상이 더 중요시 여겨졌다고 할 때 사회주의 또는 제정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몰입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이 일본(Japan)이란 체제를 가짐으로서 일제라고 칭할 수 있는 조건 완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고 1909년 기유각서(己酉覺書)는 조선순종(純宗,1874-1926)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동양명칭으로는 일본제국이라고 하여 일본왕과 함께 서양사가 병용시켰을 가능성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순종왕은 일본 왕이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미국 왕이어야 맞다.
특히 이승만 자신이 고종특사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을 접견하면서도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 하여 일진회를 강조했다는 점도 일진회 역시 일루미나티(光明會:illuminati)의 한 부류에 소속되었을 것이란 의심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들이 만주(멕시코 및 애리조나, 텍사스)등지에서 활동하였던 코리안 정치인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을 가칭으로 사용한 것은 다분히 후에 만들어졌을 동양역사를 의식한 명칭사용이다.
이미 본 블로그 글 “태풍인가 허리케인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7, 브리티시와 미국(米國)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8 , 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4, 동경과 런던직통열차계획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3, 철도 궤(車軌)로 보는 러시아와 인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2”등에서 동아일보의 기사들의 주 생성무대가 북아메리카대륙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무선통신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에서 경성이 뉴욕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그에 따라 뉴욕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보았을 때 일제는 바로 미국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장문의 글을 썼던 중대한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서 미국이란 실체를 밝히려 이런 수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러분도 이제 끝없는 함정에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을 느꼈을 것이다.
굳게 잠겨져 밀봉되어 있었던 끝없는 궁금증을 아마도 이제사 풀 수가 있는 가능성을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멕시코용병세력이나 쿠바정치세력 등을 번갈아 사용하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이름했지만 이것들은 모두 자본처바르기에 불과하며 일루미나티의 활동으로서 당시 중앙아메리카대륙 전체를 자본주들 손아귀에 넣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에게 절박한 문제는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파나마운하를 완성시킬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뉴욕에서 센프란시스코까지 운항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경비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근세기 대한제국을 공격하면서 두 가지 구호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1898년에 메인호를 기억하라! "이고 하나는 50년이 지난 후 "1945년에 진주만을 기억하라! "이다.
이 두 구호의 대상이 다른 것 같지만 결코 다르지가 않다.
메인호가 도발한 곳도 멕시코만이며 진주만 공격도 멕시코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이 두 구호는 각각 '카더라'의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을 동원한 것으로 여론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뿌려(scatter leaflets)된 전쟁구호이고 의도되고 획일화된 전쟁광고 문구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898년의 것은 스페인을 상대로 한 구호이지만 1945년의 것은 열도일본을 상대로 한 구호로서 얼핏 보기에는 상대가 다른 것 같지만 실체는 모두 대한제국을 상대로 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국이 2차세계대전 후에 만약 잘못되었을 시 북아메리카대륙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미국영토에 영향을 주지 않는 미국영토 보존을 위한 분산책이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두 구호가 부르짖는 것 뒤에는 바로 절박함과 음흉함이 존재한다.
글쓴이는 이러한 구호 상대의 실체가 신라였던 고려(COREA)이며 후의 것은 바로 대한제국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각각 따져보자.
첫 번째 구호"1898년에 메인호를 기억하라! "는 미국이란 정체모를 세력이 당시 멕시코만을 배경으로하는 지역에서 영향력을 높이려 카타이 즉 중국이라고 하는 신라 또는 고려에게 도발한 사건으로서 1898년 쿠바의 아바나항(港)에 정박 중인 미국 장갑순양함 메인호(USS Maine)가 폭발하게 하여 화재로 많은 승무원이 사망한 사건으로 만들고 크게 여론화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물론 자본이 지배하던 황색언론들은 즉각 스페인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사실상 스페인은 신라이며 고려로서 미서전쟁(美西戰爭)이라고 하지만 서양사에서 숨긴 것이 훨씬 더 많은 충돌이다.
이것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험한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두 번째 구호 "1945년에 진주만을 기억하라! "는 1941년 12월 7일 "도라도라도라(虎虎虎:TORA)"란 암호로 열도일본인들이 미국을 상대로 도발한 진주만기습사건에 대한 구호이다.
현재까지 열도일본인들이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급습함으로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것으로 인해 미국은 1차세계대전처럼 종반에 들어 기다렸다는 듯이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 돌입하게 되며 이를 연계하여 즉각적으로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는 시나리오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도한 미국의 실권자가 루스벨트가의 또 다른 한 사람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루스벨트가(家)의 해묵은 증오가 연속적으로 칼날을 분명치 않는 국가주체에게 겨냥한 것이다.
첫번째는 스페인이라고 하지만 두번째는 일본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리고 두번째 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고 하는 지역적으로 한정시킨 전쟁이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아메리카대륙 내 즉 카리브해연안에서 벌어진 전쟁이기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에 미국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은 오직 일본열도과의 충돌로 엮어야 했고 북아메리카대륙을 훨씬 벗어난 태평양이란 한정된 공간영역을 만들어 북아메리카대륙과 상관없는 전쟁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하와이를 그 공격대상에 넣어기 때문에 태평양 영역이 곧 미국영역이란 프레임을 깔고 대동아공영권전체를 타격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맞다.
그러나 기실 진주만기습은 하와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지금 발표하기 위해 정리 중에 있다.
대동아공영권을 보면 미국이 개입한 전쟁지역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가 대부분 들어가고 중앙아메리카대륙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며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까지 전쟁범위에 넣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미국 입장에서 당시 쏘련제왕 스탈린은 별도 전쟁 상대로 보아야 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대한제국이라고 하는 악라사(타타르)의 영토를 스탈린 세력들이 거침없이 점령하게 되는 것으로서 대동아공영권에서 동시에 일어난 전쟁임을 알 수 있어 만약 대한제국이 대동아공영권의 주인이라면 스탈린도 공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이것들을 모두 개체들을 합해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한번 묻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1941년의 진주만 기습 이후, 한국인 독립운동가 이승만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고 합동 군사훈련을 제의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조선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국무성을 방문했지만 결국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무엇때문인가.
이승만과의 반 대한제국 연합전선은 당시 곤란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의 전쟁주체가 열도일본이 아니라 대한제국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의 해방후의 시련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가장 중요했다고 볼 수 있는 두 사건(메인호사건과 진주만사건)에 관계 한 미국대통령 모두가 공교롭게도"루스벨트(Roosevelt)"라는 이름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참으로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루스벨트가의 인물은 미국인들에게 실질적인 존경받던 대상의 상징이다.
미국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남서부 블랙힐스 산지 러시모아산 국립기념물(Mount Rushmore National Memorial)의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4명의 인물 중 한사람으로 공화당소속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가 바위에 박혀 있다.
본 블로그에서 블랙힐스(Black Hills) 어떤 곳이라 했던가?
글“아무르 강(Amur river)과 코(nose)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0”에서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 블랙힐스(Black Hills)는 사할린(Sakhalin)이 있었던 곳이라 하였으며 본 블로그 글 “하니 피크(Harney Peak)의 화재 감시탑(Fire Lookout Towe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1”에서는 참성단(塹星壇)과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와 이전에 마리산사고(摩利山史庫)가 있었을 것이란 주장을 하였던 곳이다.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을 하필 블랙힐스(Black Hills)에 설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글쓴이는 이에 대한 생각에는 매우 단호하다.
본래 지역은 전통적으로 미륵신앙을 담보하는 곳이며 삼한의 정령(精靈)의식이 행해지던 곳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성한 땅에 그들의 영웅들을 세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신앙의 땅에 네덜란드 출신의 기독교가 점령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은 시어도어 큰 바위 얼굴에 세겨진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삼한의 정기를 막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나이가 24세 차이가 나는 루스벨트가의 한사람은 성공회(聖公會: Anglicanism)신자이며 민주당출신으로 미국 역사상 최다4선을 자랑하는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로서 2차세계대전을 개전하고 마무리까지 하면서 미국이 팍스아메리카, 세계경찰국가로 등장하게 하는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거의 독재자라고 하여도 진배없는 인물로 1945년 1월 20일 4선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이것은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에도 위반한 것임을 알 수 있어 1944년 선거는 비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본토라고 하는 미국 땅에서도 이처럼 권력 욕이 넘쳐나도 도대체 시민의식이 강한 미국유권자 역시 순응했다는 것은 오늘날 개발도상국가에서 보는 직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정치사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과거와 미래를 좌지우지하던 루스벨트가는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루스벨트가는 1650년경에 네덜란드에서 뉴 암스테르담(뉴욕)으로 이주한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Claes van Rosenvelt)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두 대통령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적어도 일본과 대칭될 수 있는 네덜란드와 혈통적으로 엮어 있다는 사실과 동양사적으로도 하란(荷蘭)의 후손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마치 숙명적인 사실인 것처럼 인식된다.
과거 임진왜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1609년 네덜란드인이라고 판단되는 덕천가강에게 조선이 강요하여 노예조약이라고 하는 기유조약(己酉條約)을 체결한 것과 1909년 7월 12일에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인 이완용(李完用:1858-1926)과 일본의 제2대 한국 통감으로 발령받았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1849-1910)사이에 맺어진 기유각서(己酉覺書)는 100년이란 시간의 간격이 있지만 네덜란드인이 100년을 한을 품고 복수를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처지가 180도로 바뀌는 형국임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소설같은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마치 박경리(朴景利:1926-2008)선생의 유고집 ‘일본산고(日本散考), 증오(憎惡)의 근원(根源)"을 찾게 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보고 태프트가쓰라협약을 설계하였다고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네덜란드개혁교회신자로서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당시 해군부 차관보를 재임하고 있던 중에“미국에 좋은 모든 것은 다 프런티어(frontier)의 결과이며, 이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새로운 프런티어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한 사실은 결국 고려를 극복하겠다고 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프런티어라는 것은 이미 강탈과 침탈을 전제로 하는 위험한 사고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가 프런티어(frontier)라고 하는 말에서 일제의 상징을 어느정도 읽을 수 있고 미국인들이 서부개척이라고 하였지만 기존 사람이 살지 않고 역사가 미치지 않는 땅에서 금융자본을 뿌려 철도를 개설하고 그것으로 서부영토를 야금야금 점령해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척한다는 말로 좋게 이해가 그들에게 되겠지만 피해를 받는 측에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역사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엄연히 역사가 있는 곳에서도 개척이라 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며 기존 역사자체를 깡그리 무시하고 개척만 강조하면서 그로 인해 무고한 인명 손실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전혀 안중에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서부개척당시 중국인이라고 모호하게 명칭을 붙여 카타이 즉 고려인들을 학살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개척이 아니라 침략이고 침탈이며 학살인 것이다.
결국 미국인(white)들이 어떤 땅이라도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내웠던 것은 개척, 개발을 앞세우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기존 대대손손 토지를 일구고 가꾸던 역사터전을 파괴한 것이다.
이런 미국을 일본이라 한들 그리고 왜구라고 한들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그렇다, 그들은 네덜란드 혈손이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유도한 것을 보면 미국이 먼저 도발하여 충돌을 야기 한 것으로 스스로 이야기 하는 것에서도 프런티어의 상징성을 들먹인 것이다.
메인호사건이라고 하는 미서전쟁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보면 충분히 시발한 그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데 1898년 1월 25일에 미국 장갑순양함 6,682톤의 메인호(USS Maine)가 아바나항(港)에 입항하였고 한 달이 못된 시기 2월 15일에 정체불명의 폭발로 파괴되어 승조원 374명 중 26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종전에 미국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1843-1901)대통령을 비난하고“약해빠지고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가”로 비판한 워싱턴주재 스페인대사 드 로메(Enrique Dupuy de Lome:1851-1904)의 편지를 입수하여 황색언론에 공개한데 이어 메인호 폭발까지 스페인의 소행으로 단정 짓는 보도기사들이 황색언론 <뉴욕월드>과 <뉴욕저널>신문에 의해 서로 경쟁적으로 부풀려지면서 미국인의 다수인 유대인여론이 촉발되었고 ‘쿠바인들의 고통을 끝장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스페인과의 전쟁을 유발시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글쓴이는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에서 청일전쟁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흥미본위, 선정주의(煽情主義:sensationalism), 카더라의 찌라시,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들이 그들의 못된 프런티어정신에 입각한 역할을 충실히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이들 언론들을 이용하여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넘나드는 당시 상황으로는 도저히 불가한 동시전쟁을 만들었고 동아시아필리핀, 괌과 카리브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사이를 오고가며 전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다분히 카더라 식 보도의 역할이 광분하고 지대했음도 알 수가 있다.
물론 불가능한 이러한 전쟁사실이 근대사가 되었고 지금의 부동의 역사사실이 된 것이다.
도대체 이때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도 훨씬 이전임에도 어떻게 대서양과 태평양을 오가며 동시전쟁을 치루었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단지 4개월간 충돌시간만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고 하는 것은 전쟁이라고 부풀어진 것만큼 날로 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이야기다.
미국이 당시 가지고 있던 함선이 청일전쟁 당시 일본수준이라고 할 때 이와같은 도발책동에 대한 역사는 거의 허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에서 살펴보았듯이 1894년 6월에서 1895년 4월까지 약 10개월간의 청일전쟁에서 군사력을 보면 당시 일본은 육군병력수가 17만4000여명이라 한 것도 조선(朝鮮) 지방 호남(湖南)병력 210,574 명보다 적은 숫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해군력에서도 작은 함선만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불과 4500톤급 미만에 순양함(Cruisers)11척과 어뢰정(魚雷艇:Torpedo boat) 22척만을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황색언론들은 이에 고무되었고 매킨리(McKinley)는 1898년 4월 11일 억압받는 쿠바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무장개입을 승인하라고 의회에 촉구하고 나섰다 했으며 대(對)스페인 선전포고 안은 하원 311 대 6, 상원에서는 42 대 35로 통과되어 4월 25일, 스페인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이루어졌고 결국 이 전쟁에서 미국은 큰 피해 없이 승리하게 된다는 스토리를 낳은 것이다.
상대 스페인이 그토록 허접한 세력이었던가?
천만에 말씀이다.
나침반을 발명하고 해양대국을 세웠던 신라라고 한다면 허구인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신라를 흡수한 고려라고 할 때 그러한 비유는 헛소리에 불과 할 뿐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2세계대전을 승리로 마감하고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이유가 더 크다 할 것이다.
이런 속칭 야바이(やばい)수법이 그들이 말하는 프런티어정신(pioniersgeest)이라 하였으니 그들의 정신이 우리와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정신이 네덜란드정신이고 결국 미국정신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서세들이 만들어 보관하는 근세기의 무슨 조약 무슨 협정 따위를 무조건 믿고 사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메인호를 기억하라!”라는 노래까지 나왔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스페인 아니 고려(대한제국)말살전쟁에 열을 올렸던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쿠바인들의 고통을 끝장내야 한다는 명분을 침략전쟁으로 덮어 놓은 것이다.
그래봤자, 쿠바를 미국인들이 그 이후에도 한참동안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최소한 1939년까지 대동아공영권에 속해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유대계 황색언론에 의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The Treaty of Paris of 1898)에서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모두의 지배권을 미국에게 전부 넘겨준다는 이상한 조약의 문서와 몇 장의 사진이 전부지만 이것이 오늘날 역사가 된 것도 사실이다.
서세가 주도한 근세기 역사에서 종전에 없었던 특이한 점은 “퍽”소리가 나는 충돌만 있으면 이상하게도 “파리조약”이란 이름이 난무하였는데 동아시아에서의 충돌이나 아메리카대륙에서의 충돌, 유럽에서의 충돌 할 것 없이 마치 파리가 무슨 세계 천자가 있는 도시처럼 모든 것을 그곳에서 사건을 정리정돈하였던 것이다.
솔직히 글쓴이가 보는 파리라고 해보았자 북아메라카대륙의 뉴올리언스이다.
아니라면 최소한 프랑스가 지배했다고 하는 루이지애나주(州State of Louisiana),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수도 개성(開城)이라면 캔사스시티(Kansas city)도 염두에 둘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처럼 음속을 자랑하는 비행기를 당시에도 타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유럽의 파리는 정치인들의 북새통이 끊이질 않는 곳으로서 서세들의 신성도시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파리는 조선 경복궁이 있어야 할 도시일 뿐이다.
참으로 근세사는 요지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프랑스 나폴레옹도 1814년 유럽 “파리”가 아니라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서 활동한 세력임에도 그렇듯 모두 유럽“파리”라고 하는 것도 모두가 유럽사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는 미국영토매입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대신하여 가지고 있던 2,147,000㎢의 광대한 넓이의 루이지애나(Louisiana)땅을 카리브 해의 아이티 혁명(Haitian Revolution:1791-1804)을 진압하는데 골머리를 앓아 더 이상 커지는 미국으로부터 지키기가 힘든다는 사실 때문에 덜컥 매도하게 되는데 이것을 미국은 6,000만 프랑($11,250,000)에 기존 채무 변제하고 나머지 1800만 프랑($3,750,00)만 주고 헐값으로 매입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라는 것은 조선(朝鮮)역사의 일부분이다.
본 블로글 글 "다시보는 정조와 루이14세, 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6세"의 3편 시리즈에서 밝혔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1710년에 완성한 베르사유궁전(Chateau de Versailles)이라고 하는 경복궁(景福宮)이 그곳에 아주 없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물을 근원으로 하는 수원성도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뉴올리언스는 속칭 신월성(新月城:The Crescent City)이라는 아사달과 이슬람성격의 도시이며 또한 프랑스 이민계 자손 크리올(Criole)문화가 있었던 곳으로서 듣기로는 이곳을 한 때 뉴 파리(New Paris)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생각해보면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쪽 편에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의 텍사스 오스틴(Austin)은 오스트리아라 할 수 있고 헝가리, 신라계의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의 게르만 독일, 이탈리아까지 그곳에 접지 붙어 있었을 확률도 높다.
이처럼 네덜란드 프런티어정신(pioniersgeest)으로 고려를 잠시 충격을 주고 중앙아메리카에 영향력을 확대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정해진 것처럼 해군차관보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며 금융자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면서 결국 파나마운하의 소유권마저 장악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미서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나마운하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파나마운하를 처음 시공한 것은 프랑스라고 하였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대조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엄청난 자금력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태평양으로 관통할 수 있도록 시도하였을 것이다.
1870년의 보불전쟁(普佛戰爭)과 미국서부 공유지의 철도부설에 대한 투자가 너무 과중되면서 금융부채가 늘어났을 것이고 이 때문에 1873년부터 불황(Long Depression)이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버블공황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금융부채와 디플레이션에 의한 것이 주요원인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하나의 체제에서 무분별한 토목공사로 하여금 자금압박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서세 금융자본이 눈독들인 파나마운하가 필요했던 것은 늘어나는 운송비문제였고 사실상 당시 3000톤급 미만의 스팀범선을 이용하여 북아메리카대륙 서해안에서 태평양을 넘나는 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때인 만큼 이에 대한 타결 책으로 파나마운하가 절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900년 이후 만톤급의 대형선박이 건조되기 시작하였지만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은 감히 시도되지 못하다가 비로소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횡단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대서양 아틀란틱 운송라인(The Atlantic Transport Line)에 있었던 선박들이 곧장 태평양으로 들어갈 수 있는 파나마운하가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
결국 파나마운하(Panama Canal)는 대조선에 의해 1879년 굴착되었다고 하지만 1881년에 조선(朝鮮)이 해체됨과 함께 1889년에 사업자체가 붕괴되었고 그 이후 대조선을 장악한 세력들이 1894년부터 이것에 관할하면서 다시 시공되었지만 자금압박으로 지연되다가 이를 미국(금융자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부터 스페인(고려)과의 충돌을 의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파나마운하의 개통권과 소유권을 놓고 정치적을도 치열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1903년에 파나마에는 미국 유대자본이 지원한 분리 독립운동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어 콜롬비아라고 하였지만 고려(大韓帝國)로부터 독립시킬 목적으로 조정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생성된 파나마(Panama)를 상대로 헤이뷔 노바리야조약(Hay-Bunau-Varilla Treaty:1903.11.18.)이란 이름으로 체결하게 하면서 고려가 아닌 파나마를 상대로 독립을 보장하고 일시불로 1,000만달러($)를 지급하고 또한 9년후 부터는 연간 25만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1904년에 비준하게 만들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1914년에 운하가 마침내 완공히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자본력을 앞세운 세력 일루미나티(illuminati)가 설립한 것으로 미국의 중앙은행이라고 알려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출범한 시기와 일치한다.
이렇듯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대한제국은 어떻게든 기존영역에서 잔존했던 것은 틀림없다.
미국(美國)이 스페인상대로 한 전쟁은 중앙아메리카에 스페인(Spain)대신에 강자로 군림하겠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받는 행위라는 것쯤은 알 수가 있다.
이때부터 미국파병(용병)이 본격화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고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쿠바(Cuba:1906-1909)에서 두 번째 점령식민통치(occupation)에 이어, 니카라과(Nicaragua)의 1912–1933 점령, 1914년 베라크루즈(Veracruz)점령, 아이티(Haiti)1915–1934점령, 도미니카 공화국(Dominican Republic)1916–1924점령, 재차 쿠바(Cuba)1917-1922점령 등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제버릇 개 못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스페인과의 힘 싸움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의 지배권을 미국이 확보한 것이라면 카리브해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상식적으로 그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니 만큼 지배권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지만 동아시아대륙 한반도에 대한제국과 서태평양의 필리핀을 미국의 영향권 내에 두려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한 중일전쟁 역시 만주를 침략한 곳이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사코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이라고 고집하는 것이라면 당시 미국입장에 제코가 석자인데 태평양을 넘어 다른 지역상황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란 판단이 작용한다.
대한제국이 당시 대동아지역을 전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숨길 수 없는 대동아공영권이다.
때문에 글쓴이는 대동아공영권을 중요하게 보았던 것이며 대동아공영권은 바로 고려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으로 나중에 대한제국으로 확대된 것임을 최종적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는 고려세력과 대한제국은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은 아직 밝혀야 할 부분이다.
이 영역들은 비록 스페인으로 가려져 있지만 실제로 고려 땅이며 영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신라를 이은 고려라고 판단되지만 이를 대한제국이라고 할 수 잇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때문에 한반도와 열도역시 대동아공영권에 들어가며 모두 고려 땅임을 알 수가 있다.
생각해보면 1898년 미서전쟁에서 또는 러일전쟁에서 일루미나티(illuminati)가 고용한 용병세력들이 주변에서 대포질 몇 차례 했다고 하여 승리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고려나 대한제국을 그들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글쓴이가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과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를 바탕으로 확신한 것인데 어쩌면 당시 미국해군력을 능가했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되었고 대한제국이란 실체가 미국이 두려워 할 정도의 군사력을 가진 막강한 파워의 완전한 팍스(Pax)체제였다는 것을 알게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난 후 강화조건으로 1905년 9월 5일 뉴욕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이 이루지기 2개월 전인 7월에 그는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힘주어 부정하였다.
대한제국(COREA) 즉 고려(高麗)에 대한 지배권을 일본에 넘겨주겠다는 약속의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역사기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미래 역사를 짜 맞추기 한 측면이 많고 의도적으로 꾸며진 이야기란 것도 알 수가 있다.
그 만큼 미국이 자본주의제국을 완성시키려는데 상대적으로 견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디에 있었던 간에 대한제국의 영토를 일본에게 넘겨주겠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당연히 동아시아대륙의 한반도라고 여기겠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멕시코를 포함한 서부와 뉴멕시코전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거대한 영역으로서 미국이 주도된 남겨진 기록들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진실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될뿐이다.
마찬가지로 24살이 작은 루스벨트와 같은 성을 쓰는 또 한 사람의 미국대통령, 32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라는 인물은 1945년 테헤란회담 문제의 기록에서 다음같이 이야기 한다.
"'the simple, innocent people of Korea were delirious with joy at the prospect of their independence and hailed both the Allies as their liberators.
즉 단순하고 순진한 한국 사람들은...독일과 일본이 패했다고 금방이라도 독립이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비웃듯이 설명하는 당시상황을 우리가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언론플레이가 가미된 정치술수에 의한 역사 만들기가 바로 그렇게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The actual question before them was who would replace the Japanese in Korea?
2차세계대전이 끝날 시점에 1943년과 1945년의 이루어진 두 개의 회담에서 주제는 미국과 소련 정상이 생각하길 현실적으로 누가 한반도(Korea)에서 일본을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해야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가 아닌가.
36년간 식민지상태에서 그들이 집적거릴 생각이 없다면 독립해주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이다.
서로 집적 되려하였으니 이런 따위의 불필요한 용어가 필요한 것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누가 지배해주지 않으면 무슨 난리라도 낼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가당찮고 한편으로 얼마나 한반도 사람들이 바보같았으면 이런 언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가만히 놔두면 될 것을 왜 굳이 일본대신에 한반도를 누군가가 당연하게 맡아 지배해야 할 것처럼 이야기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 핵심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소위 신탁통치안(信託統治領:United Nations Trust Territories)이라는 것으로 테헤란회담(Tehran Conference:1943.11.28.-12.01)과 얄타회담(Yalta Conference:1945.02.04-02.11)에서의 미국과 소련(蘇聯:Soviet Union:1922-1991)사이에 주요한 의제였다는 사실이다.
마치 전범국을 소련과 미국이 나누어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리는 것이다.
At Teheran Conference, Roosevelt stated that the Koreans need some period of apprenticeship before full independence might be attained, perhaps 40 years. Stalin concurred with Roosevelt.[Robert E. Sherwood(1948.p.777)]
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이다.
한반도인들을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선 40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괴변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숙정기간이라 했다.
숙정기간이라니, 1만년의 유구한 역사가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
그들의 역사가 무엇이 그렇듯 특별하기에 1만년의 유구한 역사의 자존에 이처럼 쓰레기처럼 취급하는 상처를 주는 이 따위의 말을 늘어놓을 수가 있는 것인지 그들은 한반도인들을 2차세계대전을 끝으로 완전하게 노예로 취급한 것이다.
아무것도 잘못을 하지 않는 순박한 한국인들이 왜 이같은 불리한 처분을 받아야 하는가.
반도역사가 기록한 그대로 따지더라도 5000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역사와 전통 문화가 그들에게 뒤떨어질 이유가 없음에도 무슨 잣대로 자치능력이 없다고 하고 그들이 40년간 지배하고 통치해야 한다고 고집하는지 당시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희한하게 들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위 기록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극작가이며 비평가이면서 전시에는 대통령실 정보관으로 재임한 로버트 셔우드(Robert Emmet Sherwood:1896-1955)가 당시 테헤란회담에서 발췌한 것으로서 당시 미국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한국인의 독립조건으로 약 40년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담보한 것이다.
소련(蘇聯)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은 이에 대한 별다른 이야기 없이 그냥 동의를 표했다고 나타난다.
도대체 이러한 식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가만히 두면 나라도 못 꾸릴 것 같은 그야말로 미개인으로 취급을 하는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한반도인에게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있어 이런 말을 했을까?
40년 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이 없다고 하여 일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하였고”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해방이 되어 이제 살만하다고 느끼는 한반도인들에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약 40년간의 수습기간(apprenticeship)”이 필요하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리를 하고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은 글쓴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성만 두고 보면 제3라 할지라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처사인 것이다.
만약 그가 냉정시대를 이야기 했다든지 아니면 한국인들이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다든지 하였다면 그나마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Congressional committee to Investigate Chinese Immigration, 1877, denies that Chinese have adequate “brain capacity” for self-government.
위 원문에서도 알 수 있지만 1877년 중국인 이민을 위해 조사하던 미의회위원회들은 중국인들은 자치정부를 위한 적당한 두뇌 용적이 부족하다(또는 중국인들은 자율 정부 구성에 필요한 동기를 제공할 두뇌의 용적이 부족하다)는 등의 의견으로 거부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동양문화를 지배한 주체에게 모두 이 같은 진단을 내린다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국인이 캘리포니아주에서 1880년경 30만명으로 증가하여 주 인구의 10분의 1을 차지하였다는 이유를 달고 있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고 나그네가 주인을 내쫓는 경우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세계삼한역사관점이다.
미 의회는 1882년 '중국인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을 만들어 중국인들의 노동이민을 금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중국인에게 한 “두뇌용역”이란 비하하는 소리와 한반도 구성원에게 자립하려면 40년 기간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거의 동일하게 들리지 않는가.
두뇌 용적이 부족하다는 것은 무슨 막 되먹은 소리인가?
다분히 증오적인 것이다.
왜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민의 자치권을 보장하길 꺼려했을까?
이것은 독립이란 용어와는 상관이 없는 자치권(autonomies) 즉 자주성(自主性)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무엇 때문에?
거의 전범국으로서 독일만큼의 수위의 처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 한국인들은 전범국이 받아야 할 처분을 똑같이 받았던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미국대통령의 발언은 개인 생각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주 감정적이며 나름대로의 원한에 쌓여있는 듯한 발언임을 숨길 수가 없다.
1609년 기유조약과 대비되는 1909년에 기유각서가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명색이 세계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자의 입에서 이같은 발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루스벨트가문(Roosevelts)은 1650년경에 네덜란드에서 뉴 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으로 이주한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Claes van Rosenvelt)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에서 역사관뿐만아니라 세사관(世史觀)에서도 우리와 상당히 이질적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에서 왜(倭), 왜구(倭寇), 화(和)라고 통칭하던 세력들이 최종 박경리 선생이 말한 증오의 원한 관계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1854-1941)는 프랑스왕정탄압에 대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칼뱅파(派)교도 위그노(Huguenot)로서 프랭클린 자신이 살아생전 가장 무서웠던 대상은 어머니였다고 고백한 사실에서도 그녀로부터 하나의 체제였던 대조선이나 “고려(COREA)”에 대한 부정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시 네덜란드 개혁교회신자이며 초기에 영국정당의 휘그당(Whig Party)에서 활약을 하였다는 사실과 네덜란드는 하란(荷蘭)의 화(和)즉 세계삼한역사적으로 이야기 할 때 일본계(日本係)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어머니가 위그노라는 것은 프랑스 즉 "하나의 체제"에서의 조선(朝鮮)이라고 할 때 상당한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글쓴이는 루스벨트가(家)와의 역사적 악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16).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일인물
본 블로그 글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은 없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1”에서 충분히 살펴보았지만 이 밀약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태프트와 가쓰라의 임기와 생몰년도가 중복된다는 점을 앞에서 이야기 하였고 동일인물을 나누기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제(日帝)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전제할 때 특이한 점을 찾아보면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1858-1919)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는 거의 생몰년대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
두 사람 다 결국 조선총독부의 총독으로 나타난다.
시어도어루스벨트와 데라우치가 같은 동일인물 선상에 있다는 것은 첫째 공교롭게도 그들이 대한제국에 깊이 관련된 인물로 나타나면서 같은 년도(1919)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이하며 1919년 사망하는 것도 시어도어는 자고 있는데 부인이 와서 똥배를 탁 쳤는데 죽었다 하였으니 죽음에 의문점이 많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역사연속적인 면에서도 볼 때 시어도어가 1909년 3월 4일에 미국대통령임기를 마치고 난후 약 10개월 동안 아프리카와 유럽을 여행하였고 돌아온 시기가 1910년 1월 이었으며 4~5개월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행적에서 데라우치가 그해 1910년 5월 30일 부터 그해 8월 29일까지 제3대 조선통감(統監府)으로 있었다는 사실과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연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해 10월 1일 일본제국의 제1대 조선총독(朝鮮總督府)으로 취임한다는 것에서 볼 때 하나의 인물의 이동시간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미국대통령 직에서 퇴임하고 난 후 조선총독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데라우치는 1898년 육군 교육총감으로 임명되었던 반면에 시어도어는 1898년 미서전쟁이 선포되자 돌연 국방부 해군담당 차관보 직을 사퇴하고 '러프라이더 연대'(Rough Rider)라는 별명을 가진 민병대 제1의용기병대를 조직했다는 것은 유대자본이 만든 용병들을 통솔하는 직책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교육총감이나 용병을 가르치는 것이 다를 수가 없다.
1916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고 교섭을 추진했지만 실패하였던 루스벨트는 1918년 윌슨이 제1차 세계 대전을 종결시키기 위한 단안으로 국제연맹안을 발표하자 시어도어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는 것이 알려진다.
대통령 재직 시절부터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조직을 지지했던 루스벨트가 윌슨의 국제연맹안에는 완강히 반대했다는 것도 모순이 없지 않다.
데아우치는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볼셰비키 혁명(十月革命:Bolshevik Revolution)이 발발하자 이에 개입하여 백위대를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원정군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것은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와 미국, 영국 등의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무기와 돈을 지원한 사실과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제국들은 볼셰비키의 확장을 두려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볼셰비키들이 설쳤다는 사실이다.
이글도 다음 글로 준비중이다.
물론 로마노프왕가가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던 이들 자본주의국가들이 나섰다는 것도 이상하다.
러시아 자본가 군대이자 느슨한 반(反)볼셰비키 연합체인 하얀군대 간의 적백내전(赤白內戰:1917-1922)에서 일본군 7만 2천여명의 병력은 결국 전멸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둘 다 독특한 별명이 있는데 루스벨트는 "테디 베어(teddy bear)”라는 곰 봉제인형의 별명이 있는 반면에 데라우치는 머리 부분이 뾰족한 불상처럼 생겨 그로테스크(Grotesque)한 모양의 나상(羅象)을 말하는 빌리켄(billiken)이라는 별명이 있다 하는 것을 볼 때 이것까지 같아 동일인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별병을 붙이고 그것을 그 사람의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문화는 동양열도 일본문화가 아니다.
이것들은 미국인임에도 일본어로 이름을 만들어 마치 실제한 인물인 것처럼 조작한 것이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이 곧 일제(日帝)라는 것을 다사한번 확인한다.
결국 이것을 볼 때 미국(美國)이 조선(朝鮮)을 식민지하였다는 사실은 거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매우 간단한 이야기다.
세계삼한역사를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들거나 없어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똑같은 파워를 가진 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힘과 힘의 대결에서 상대보다 강해야 승리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열도일본이 미국보다 더 강했고 미국에게 승리했다면 열도일본이 일제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은 하찮게 깨져버렸고 깩 소리도 못할 정도로 치욕적인 항복을 했던 사실에서 절대 대한제국을 식민지할 형편에 있었던 것은 못된다는 것을 불 보듯 알 수가 있다.
일제(日帝)는 유신이라는 의미를 함께 하는 일진이며 문명(文明)이라 하는 광조(光照) 즉 본래 빛이 두루 비치게 한다는 뜻으로 광명(光明)이라는 뜻을 가진 알루미나티(Illuminati)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바로 미국(美國)이란 결론이다.
현재 열도일본은 미국에게 대리전쟁을 한 처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을 위해 대신 어머어마한 업보(業報)를 대신 감수하고 있을 뿐이다.
1846년과 1848년 멕시코미국전쟁(Mexican-American War)을 시작으로 자발적으로 합병서명을 했다고 하는 텍사스합병(Texas Annexation:1845)사실, 오리건 컨트리(Oregon Country:1846)조약에 의한 영국으로부터의 할양받았다는 사실, 멕시코에서 양도한 할양지역(Mexicon cession:1848)과, 멕시코로부터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1853)이 있었던 사실등은 전부 1850년 이전에 확보한 것이라고 근대사 기록에 나타나지만 이 넓은 지역을 미국이 그 시기에 모두 단숨에 확보했다고 확신할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때문에 미국은 이 지역들을 대한제국으로부터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1939년부터 유럽전쟁에 편승하여 대한제국과 일전을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7).전범국과 대한제국
본 블로그 글은 대한제국을 밝히기 위해 참으로 머나먼 길을 달려왔다.
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설계한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다고 하는 비밀약정, 태프트-가쓰라 각서(Taft-Katsura Memorandum)가 상징하는 것처럼 또는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가 한반도인들이 자립할 수 있으려면 40년 동안 미국이나 소련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한 것처럼 그들은 한국인들을 한결같이 적국으로 또는 전범국으로 대했다는 사실이다.
1939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한제국(COREA)을 한없이 증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필요이상으로 한국인을 질시하고 증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열도일본세력이 일제이고 전범국이 맞는가 질문을 한다.
본 블로그에서 단언코 노(No)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지금까지 줄기차게 글로 대신했다.
그렇다면 이제 2차대전(第二次世界大戰:World War II)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자료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독일의 패전이 임박한 1945년 4월30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고 나타난다.
무솔리니(Benito Mussolini:1883-1945)는 그보다 이틀 앞선 4월28일 이탈리아의 반파쇼 의용군에 체포되어 비참하게 처형됐다고 나온다.
그러나 같은 전범국이면서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의 일원이던 일본왕 히로히토(昭和Hirohitoi:1901-1989)는 당시 45세였으니 젊기도 젊었지만 살아서 추악하게 패전을 맞았고, 결국 처벌되지 않고 승전국이 된 미국으로부터 전쟁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었다는 이해가 불가능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래서 열도일본정치인들은 전쟁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으니 또 다시 전쟁을 생각하며 반성도 없이 동아시아에서 도도하게 도발책동만을 일삼는다.
이것이 공평한 처사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왜 죽어야 했는가?
아니면 히로히토는 왜 살려야만 했을까?
왜 히로히토는 전쟁책임의 추궁에서 벗어나 면제될 수 있었는가?
답은 하나다. 바로 이들 나라의 생사여탈지권(生死與奪之權)을 가진 미국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2 "에서 살펴보았듯이 과거 대항해시대 때는 생사여탈지권(生死與奪之權)을 코리아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네덜란드가 코리아에 상납한 이 코리아호가 가지는 의미는 그들의 활동자체를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히로히토는 법적으로 분명하게 패전국의 최고책임자였고 강제하여 군사를 동원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요즘 테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과격분자들처럼 가미가제(神風:kamikaze)자살특공대를 만들어 죽음으로 몰아 강제한 살상에 책임이 분명하게 있음에도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히로히토는 미국이 세운 왕과 같다.
때문에 면제한 사실에서 정당했는가에 물음이 있을 수가 없다.
미국이 결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공평한 문제 때문에 열도일본철학자 아베 요시시게(安部能成)는 당시 시데하라내각(幣原内閣:1945-1946)의 문부대신으로서 “국민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웠던 천황 스스로가 책임이 없다고 하면 이는 모순이다”라고 한 사실에서도 일본인들마저 일본왕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한 것이라면 미국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면죄부를 준 것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일본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해관계란 무엇인가?
아마도 또 다른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같은 것일게다.
대한제국 대신 열도일본인들이 대한제국행세를 도맡아 하겠다는 밀약일 수가 있는 것이다.
글쓴이가 이렇게 추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실제로 우리에겐 정말 궁금한 것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시 최고사령부의 사령관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1880-1964)은 이해관계라 하였으니 일왕과 무슨 밀약이 있었을까?
일왕의 카리스마와 상징성을 이용하여 점령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고자 했다는 핑계가 분명하게 있다.
대신 일본정부요구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상식이하이다.
일왕제(日王制)를 유지하면서도 전쟁책임 추궁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서로 골치 아프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도쿄재판에 대한 미국정부의 의도에 따라 시데하라내각(幣原内閣:1945-1946)은 1945년 11월 5일 비밀리에 전쟁책임에 대한 각의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당연히“일왕은 대미교섭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을 뿐 아니라, 개전결정 및 작전계획을 수행하는데 헌법 운용상의 관례에 따라 통수부(統帥部) 및 정부의 결정을 재가(裁可)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쟁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결정을 그대로 맥아더가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재가하는 것 이외 직접적으로 살인을 하고 전쟁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전범국 3국에 대한 처분이 이처럼 일률적이지 못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맥아더가 1946년 1월 미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1890-1969)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황이 과거 10년간 일본정부의 결정에 크게 관여한 증거는 없다. 만약 천황제를 파괴하면 일본도 붕괴할 것이다. 일본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진다면 100만의 병력이 필요하다’라고 밝힘으로써 일왕의 면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일본이 붕괴할 것은 왜 맥아더가 걱정했을까?
게릴라가 무엇인가?
일개 장군이라는 작자가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구지 못한다는 어설픈 주장을 하고 있었으니 일본과 정말 전쟁을 치룬 장군이 맞는지 의문이 없지 않다.
일본과 전쟁을 치뤘고 일본군에게 자신의 수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을 것인데 어떻게 장군이라는 자가 일본 붕괴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의아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진주만공습을 잊지 말라”고 미국인들에게 홍보했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이처럼 열도일본인들에게 관대하려고 애를 썼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영토분할문제도 소련에 의해 일본열도를 분할하자는 제의가 분명하게 있었지만 잘라 거절한 것이 바로 미국이다.
[일본열도분할계획:Proposed postwar Japan occupation zones]
그런데 난데없이 전범국인 열도일본대신 동네북처럼 애많은 한반도가 38도선으로 짤려 버리고 마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처량한 신세에 한반도 구성원들이 멘붕에 빠져버린다.
참으로 불공평한 이야기가 아닌가.
36년간 피지배속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한 한반도인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이 허리를 짤려버린 것이다.
이유는 40년간 통치 후 자립할 수 있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주장 때문이다.
한국인들을 지배하면서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다 하는 열도일본은 그대로 보존하고 보호할 수밖에 없으며 한반도는 분단을 해도 괜찮다는 그야말로 어거지 같은 논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의니 뭐니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한반도역사를 따르면 한반도 구성원들은 전범국이 분명 아니다.
중국에게 속국으로 있었다는 것이 잘못인가?
아니면 일제에게 핍박당한 역사가 잘못이던가?
한반도역사가 말한 것처럼 수 천 번의 침범만을 받았지 누구를 침범한 사실도 없는 순박한 한반도인들에게 해도 너무한 가혹한 처분이 아닌가?
왜? 왜? 왜인가?
18). 마무리
글쓴이는 우리나라 한반도 근대사는 미군군정이 들어서면서부터인1945년 이후에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을 분명히 잘라 말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최소한 대한제국의 주류들이 한반도만을 영역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히 주장한다.
대타타르가 고려(高麗)라고 하면 차이니스타타르에는 한반도와 열도일본 역시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때문에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나 열도일본에는 친미세력들이 옮겨온 것이다.
한반도는 일본식민지 민으로 일본열도는 핵폭탄을 맞고 미국에게 패한 종족으로 주홍글씨를 새겨야 했다.
1937년에 있었던 고려인 송환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대한제국의 8개연합국에서 악라사 영역으로 송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반도에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고 한반도에 역사는 없었다고 해야 맞으며 거의 북아메리카대륙사를 한반도사로 둔갑시킨 것인데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민이나 일본인이나 처량한 신세는 마찬가지다.
그렇더라도 스스로 일제잔여세력이라고 하는 열도일본정치세력들은 미국에 잘 길들여진 정치깡패로서 미국과 영국 등 서양이익을 대변하게 하는 잘 훈련된 이질적인 종자라는 것쯤은 알 수가 있다.
대신 한반도에는 당시 내로라하던 지식자들은 비전을 핑계로 쉽사리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맴돌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만주 땅에서 개장사 하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웃을 수만 없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2차세계대전후 냉전시대를 핑계삼아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앞세움으로서 그들의 영향력을 동아시아대륙에 세우려했던 것은 분명했다.
경제권을 쥐고 모이 주듯이 하던 미국과 영국의 말을 일본이 듣지 않으면 안되겠금 일본역사 모든 것을 가지고 지배했다는 사실도 또한 알 수가 있다.
물론 미국이 붕괴되면 일본이 대신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일본이 가지는 기대는 클 것이다.
태평양만 지배한다면 참으로 태평양전쟁이 현실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중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할 때 추후 또 한 번의 중일전쟁이 없다고 할 수 없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끝까지 주도는 서세들이 장악하고 조율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근세기 만들어진 역사틀이다.
그러나 실제로 식민지상태에 있지 않았던 우리민족은 허상의 역사 사실로 인해 참혹하게 묶여진 상태에서 자주권조차 잃어버리는 황망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를 어떡할텐가?
실제로 역사에서 지배국에게 핍박받는 것 보다 더 암울한 것은 잘못된 역사로 인해 노예근성을 키우는 것이다.
한반도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미 이러한 노예근성심기에 노출되어 심하게 이질화된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교육이 심오하다 할지라도 정신을 병들게 한 것은 쉽게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노예근성을 뼈 속 깊이 심기 교육은 적어도 1945년부터 2015년이니 70년간이니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실제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반도역사가 없었던 것을 있었던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기간이 7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는 말과 같다.
이제 한반도 역사를 엉터리가 하는 사람은 아마도 미쳤다고 손가락 받기가 더 쉬워졌다.
혹자는 너무 과민한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겠으나 사회현실을 보면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정의와 도덕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거짓이 난무하고 잘못이 판을 쳐도 누가 나서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구성원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핍박을 받는다고 피해의식이 강하다.
때문에 불합리처분을 받아도 그것이 왜 불합리한 것인가를 따져볼 생각을 하지 않고 순응한다.
이것이 곧 노예근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강박관념이 강해지고 트라우마만 키우는 신세가 되었다.
펙트에 대해 신경조차 이제 쓰지 않는다.
때문에 사회적 비판력도 줄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에게 피해 없으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자신을 옴츠려들게 만든다.
자신도 없다.
희망도 없다.
안하무인이던 아베신조(安倍晋三)일본총리가 올해 4월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앞두고 있던 디데이 날은 전범왕 히로히토 일본국왕 생일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미국보수단체들이 연설일자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적이 있다.
4월 2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연설에서 2차 세계대전에 대해 '깊은 회한'을 느낀다면서도 '식민지 지배와 침략', '사죄' 등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아베총리의 이러한 ‘과거사 외면’을 두고 워싱턴 내 분위기는 심상치 않고 의회와 언론사, 시민단체가 힘을 합쳐 과거사 ‘압박’에 나섰으며 이에 앞서 뉴욕 타임스(NYT)는 지난 20일 사설을 통해 아베 총리의 역사외면을 정면 비판하였다는 사실들을 알 수가 있었다.
열도일본인들도 바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양심적인 정치인들도 이러한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열도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일본정치인들을 심각하게 미국정치관계가 긴장했던 것이다.
식민지제국의 상징이 되어버린 일제와 아시아각국의 침략한 범죄의 원성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는데 미국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뉴스를 보면 한국인들은 거의 멘탈 붕괴에 빠질 수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적이었던 일본을 동반자라고 하면서 미국은 거의 한 몸처럼 생각함을 전 세계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대는 항상 변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일제가 만든 역사만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겐 그것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다..
과거 적이 동지가 되고 동지였던 개체들이 갑자기 등 뒤를 겨냥하는 꼴을 다반사로 여기기에는 우리가 식민지역사로 인해 앓고 있는 트라우마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미국은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선봉만이 아니라 과거 역사의 일제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고 아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산산이 조각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역사로 부터 탈출해야 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불필요한 상처를 많이 받았다.
1853년 1월에 부산 용당포(龍塘浦)라 함은 사바나항(Savannah)이라고까지 밝혔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알지 않는가?
한반도역사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분단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또 다른 1910년부터 일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미국 대통령과 엮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피카소그림을 단순히 노근리만을 한정하여 볼 것인가?
In the United States, at the end of World War II, there were 175 Branch Camps serving 511 Area Camps containing over 425,000 prisoners of war (mostly German). Over 127,000 United States citizens were imprisoned during World War II. Their crime? Being of Japanese ancestry.
미국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서 주로 독일인 425,000명을 포로로 하여 511개 지역캠프를 연결하는 175개 지점캠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42년 2월 루스벨트는 군대에 서부해안(태평양 연안)에 살고 있던 남녀노소를 불문한 일본계 미국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일본계 미국인들 127,000명은 2차세계대전동안 투옥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을 전쟁 재배치 센터 수용소(WRA)이라 하고 억류라는 표현을 하였으며 강제이주를 못하게 구금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1942년부터 미국(美國)전역 10개의 캠프(Camp)에서 127,000명이상의 전쟁 재배치 센터 수용소(War Relocation Center)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에서 과연 미국은 속이고 있는 것은 없을까 의문이 없지 않다.
잘 훈련된 일본열도정치인들은 이속에서 생성한 것일게다.
대한제국의 구성원들은 독일인 수용소에 있었거나 이곳에도 있었을 가능성도 재기해본다.
이 수용소에 있는 인적구성원들이 모두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계라고 알려지지만 수용소에 인원과 그 구성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수용소에서 열도와 한반도로 들어온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카리브해(Caribbean Sea)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혼란이다.
대동아공영권을 보면 멕시코만을 중심으로 대한제국과 미국이 치열한 전쟁을 치우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제국은 상대로 미국, 중화민국, 영국, 네덜란드[ABCD(America, Britain, China, Dutch)]의 공격을 막아내어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코리아(COREA)는 미국의 근원적인 미운털이 될 수밖에 없다.
반도역사는 미국에 의해 이렇게 생성된 것이다.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의 거대한 몸집을 억지로 구부러뜨려 한반도에 들어맞게 만들었던 반도역사(半島歷史)는 미국의 작품이다.
이제 이쯤하여 쪼그라든 역사에 일희일비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독일은 죄의식(guilty)을 가진다 한다. 하지만 일본은 부끄러움(shame)의 문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지는가?
참담함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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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블로그 친구 가입해주시고 물심양면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존경하는 "여러선생님"의 덕분으로 짧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총체적인 글을 최종 마치게 되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블랙벨트, 서해안과 진주만에 대해 이야기 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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