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동물

붉은바다거북과 귀부(龜趺)의 진실

한부울 2016. 1. 2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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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바다거북 귀부(龜趺)의 진실


글쓴이:한부울


1.코리아인(COREAN)과 고려(신라)

2.귀부(龜趺)와 신라(新羅)

3.한반도 유적의 몰골들

4.잡다한 다른 귀부들

5.서양인들의 오리엔탈문화 거부감

6.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건넜다는 곳은 미시시피강

7.붉은바다거북

8.정리


1.코리아인(COREAN)과 고려(신라)




지금은 구글에서 많이 삭제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불과 5년전만 하더라도 “COREA”를 검색하면 여러 가지의 삽화나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과 상당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어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누가 정리하는지 알 수 없어도 점차 상식에 맞춰 놀랄만한 사진들은 눈에 띠지 않지만 그래도 세부적으로 파헤쳐 들어가게 되면 가끔 놀랄만한 정보가 눈에 띄인다.

코리아 또는 코리아인에 대한 우리가 아니라 서양인들이 과거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분명하게 꼭 집어 “이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이상하게 복합적으로 여기저기 나타났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글쓴이는 이것을 세계삼한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하노버(HANOVER)의 역사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2"에서 말했듯이 코리아(COREA)는 대한국(大韓國)과 같은 것으로 즉 포괄적인 국가 명이라는 이야기다.

이 명칭에는 세계역사복합적인 문제를 다 수용했던 것으로 세계모든 역사, 문화, 인종, 종교문제를 포괄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코리안이라고 하면 어떤가.

백인, 흑인, 황인 모두 한 개체군으로 포함될 수 있는 역사터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늘 상 글쓴이가 주장하는 것이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다문족, 다문화국가가 아니면 이를 수용할 수가 없다는 이치이다.

오늘날 세계질서를 관장하고 있고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도 이와같다.

물론 코리아란 영어명칭 내에는 우리가 말하는 조선이나 고려가 들어갔다고 보아야 옳고 고구려. 신라, 백제까지 그 범주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근세기말엽 서양인들은 동양인인 한반도인에게 "KOREA" 란 명칭부여가 모든 것을 쪼글라 들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C"가 "K" 로 스펠링하나가 바뀌었지만 역사는 세계역사에서 한반도 역사로 오그라들었다는 이야기다.

일찍이 코리아를 방문한 서양인들 중에 아래에 이야기 하겠지만 잉글랜드 출신 이사벨라가 1894년 코리아를 처음방문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아마도 이때부터 한반도 코리아 또는 동양인 한국인 코리아로 변하게 하는 시도였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아니 본래 방문자가 설령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추후 여러가지 번역책이 난무하면서 편향되게 꾸며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특히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이러한 여러가지 의혹을 낳게 하는 단체이다.

이사벨라 역시 여성으로서는 최초 이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서 코리아를 방문했다고 알려진다.

위 두 그림은 폴 자쿨레(Paul Jacoulet:1896-1960)의 작품으로서 "투계도(鬪鷄圖:Cockfight)"와 "세 한국인(Three young Korean men)"이라는 제목의 판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각양각색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 또한 모두 코리안이다.


               

                                           [Longevite. Moppo, Coree:Paul Jacoulet:]


그가 실제로 코리안을 그린 위 판화를 보면 황인종이라고 짙은 색을 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를 더욱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폴 자쿨레는 프랑스화가로서 3세 때인 1899년에 아버지가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의 교편을 잡으며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생애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냈고 그의 작품은 일본의 다색 목판화인 네덜란드화가 고흐의 "탕기(Tanguy) 할아버지"작품의 배경으로도 쓰였던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풍의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활동을 하였다고 알려지는데 이 네덜란드가 일본일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서양인들의 생각은 당시 “COREA”라고 하는 피플들의 정체가 이처럼 매우 혼란스러운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위 앞 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코리언이 강한 색깔의 흑인이 아닐지라도 본 블로그 글"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말했듯이 악라사라고 하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의 사람들은 얼굴이 검고 코가 높다는 것을 일단 알 수가 있었고 얼굴이 검다는 것은 기어코 아프리카 흑인(黑人:Negroid)이 아니라 할지라도 현재 중앙아시아, 인도아대륙에 있는 인도사람들은 검은얼굴들이 많다는 사실과 연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세명의 코리안에서 백인도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도 이미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에서 코카소이드 백인이 망건을 쓰고 있는 모습을 충분히 설명한 바가 있다.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가 528톤짜리 사마랑호(H.M.S.Samarang)를 이끌고 1845년 여름 제주[Quelpart Island (Jeju-do)]를 방문했을 때 그의 저서(Edward Belcher's 1848 book)에 기록된 삽화 역시 이러한 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외 이러한 사실의 증빙은 수도 없이 많다.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코리안(COREAN)의 이 그림들은 인종을 뛰어 넘는 포괄적인 상징성이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은 분명아님에도 코리안이라고 했다는 것을 우리가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삼한역사를 알고자 하면 첫째 한반도 역사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역사사실에서 기어코 우리의 모습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대한국(大韓國) 코리아는 세계 다문민족, 다문화국가였기 때문이다.


2.귀부(龜趺)와 신라(神羅)


우리는 묘지에 설치된 비석을 구분하는데 귀부와 이수라는 용어가 쓰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귀부(龜趺)란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碑石)의 받침돌 석상(石像)을 말하는 것인데 역사적으로는 신라(新羅) 초기(初期)부터 쓰기 시작(始作)한 것으로 그 대표적(代表的)인 것은 탑골공원의 대원각사 터의 비석이고, 경주(慶州) 서악(西岳)의 무열왕(武烈王)의 비 등(等)을 들 수 있다고 백과사전은 정리한다.

일반적으로 귀부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비신 위에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螭首)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용(龍)의 모습 외에 해태(海駝)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는 것인데 초기에는 신령스러움을 강조한 반면 시대가 흐름에 따라 형태적인 모양이나 고전의 멋을 부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국보 제25호의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귀부와 이수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된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실제로 태종무열왕릉비가 그렇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진단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하는 것도 사실상 따지고 보면 우물안에 개구리식 평가이다.

자기만족인 것이다.

그것도 한반도 역사로 포장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초라함이 배어있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12세기경부터 귀부 형태의 비석받침이 갑자기 대석(臺石)형태로 바뀌면서 귀부는 차츰 사라진다 하였고 따라서 조선시대의 귀부는 극소수라는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하지만 많이 퇴화되고 도식화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때문에 귀부형태의 비석이 실존한다면 적어도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정말 그러한지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의 귀부를 세세히 한번 살펴보자.

 

                   [국보 제25호(1962년 12월 20일 지정)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에 있는 신라 중기(7세기)에 건립된 신라 태종무열왕의 능비(陵碑)이다.

귀부(龜跌)의 길이 380cm, 너비 249cm, 높이 103cm, 이수 높이 106cm 기록되고 한반도에서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고 알려진다.

귀부는 장방형의 기석(基石)위에 얹혀 있고 이수는 6룡(龍)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윤곽을 이루는데, 웅장한 구(龜)자세는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고 되어 있으며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다 한 것이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위 비석은 이수가깨어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인가 통째로 빠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이 빠졌을까?

정작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비신이라고 하는 비석이 빠져 버린 것이다.

이 비신에 아마도 태종무열왕의 모든 역사약력이 적혀 있었을 것인데 이를 빼버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속일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왜 빼 버렸을까?

도저히 신라를 한반도에서 설명하기가 곤란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남아 있다는 유물들이 거의 이런 온전치 못한 불구상태의 유물 뿐이다.

위 국보25호라고 지정은 하였지만 1962년 국보로 지정하기 위해 다급히 제작한 모습 여기저기에서 알 수 있는데 첫째 의문은 왜 무덤도 없는 허허벌판에 이 위대한 귀부가 방치되었어야 했었는가이다.

글쓴이는 이를 어디서 옮긴 것이라고 판단한다.

세계고고학발굴이 시작된 것은 영국인들에 의해 1913년부터 이집트무덤을 발굴하기 시작하연서부터 였고 1922년 투탄카멘(Tutankhamon)의 무덤을 발견하는 계기로 이집트역사는 갑자기 영국 학자들에 의하여 2000년을 훌쩍 뛰어넘게 되었고 유럽에서는 이 지역을 인류문명의 기원지로 여기게 되면서 유럽대륙과 연계하여 유럽사를 앞당기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이런 저런 이유로 선사시대인 BC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환상열석유적(環狀列石遺跡)인 스톤헨지(stonehenge)가 놀랍게도 "1954 stonehenge being built" 1954년 현재 위치로 대대적인 이동공사가 진행된 사진이 찍혀 세상에 밝혀졌다는 것은 유럽사가 완성되기 위해 당시 무엇이든 그들이 못할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작업들이 영국당시 비밀경찰까지 동원된 사실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때 태종무열왕릉비가 역시 이런 계획의 일환으로 이동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난데없는 것을 가져다가 꾸몄을 지도 알 수가 없다.

태종무열왕릉비 역시 이미 비신이 사라지고 그 위에 이수가 어색하게 틈도 맞지 않는 상태로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역사긍지를 느끼기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이수마저 온전하지 않고 그것조차 깨어지고 부서져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螭首)가 태종무열왕을 대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거의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이다.

한반도 역사는 천년의 역사를 아무렇게나 이야기는 하지만 하나의 국가가 천년을 이어 지속되었다는 것은 세계사에도 일찍어 없었던 유일무일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에 갇혀 천년의 역사가치를 가늠하기가 힘들고 보이는 유적, 유물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초라하기가 그지 없다.

신라는 대한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삼한(三韓)을 통일하였던 국가로서 삼한을 통일했다는 것은 세계 역사를 통일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말하면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역사가 당시 세계사(世界史)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통일신라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동로마(東羅馬)로 각인된다.

동로마가 어딘가.

동로마(東羅馬)를 서양인들은 비잔티움제국(Byzantium Empire)이라고 하며 이를 라마제국(羅馬帝國)이라 한다.

이 라마제국(羅馬帝國)과 맞먹을 동양제국은 바로 당(唐,618-907)이다.

당나라 다음에는 바로 정확하게 고려(高麗)와 연결되는 송나라(宋,960-1279)가 있다.

글쓴이가 역사 찾기 하면서 정립한 사실에서 지금까지 가장 가치가 있다는 것은 바로 고려(高麗)를 코리아(COREA)라고 오래전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불리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 고려가 바로 당(唐), 송(宋), 요(遼), 금(金), 원(元), 명(明), 청(淸)의 정복왕조들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는 사실이다.

곧 카타이(Catay)다.

이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에서 해동역사 예문지(藝文志) 경적(經籍) 총론(總論)에 남송(南宋)작가 장단의(張端義)가 쓴 귀이록(貴耳錄)을 인용한 글을 보면“선화(宣和) 연간에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이서(異書)가 아주 많아서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서책이 모두 있어서, 몇 천 가(家), 몇 천 집(集)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것은 곧 고려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정복왕조들을 다 수용하는 체제의 주체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남송에 없었던 서책들이 고려에 있었을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것뿐만아니라 시대적으로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라고 하는 종이를 고려가 마음대로 제작하고 최고의 질이 좋은 종이를 풍부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고려종이가 아니면 함부로 귀한 서책을 포장을 하지 않았을 정도라는 것은 이를 증명케 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 하랴.

신라가 나침판을 만들었고 그것을 신라 라(羅)를 붙여 나침판이라 했다는 것을 이미 잘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옛부터 한당(韓唐)을 카라(から)라 하였고. 당토(唐土)라 하였는데 옛날의 중국을 일컫던 말이며 한(韓)도 카라라 하였다.

이것이 역사열등의식이 가득한 서양인들에 의해 유럽사 신성로마제국(神聖羅馬帝國:Sacrum Romanum Imperium:962-1806)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것이 유럽사만들기다.

신성로마제국이 무엇인가.

곧 신라(神羅)이다.

우리가 아는 신라와 음은 같지만 표의 가 하느님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라 하여 다르다.

신라(神羅)를 지금까지 독일제1제국(962-1806)이라 한다.

제1제국이라는 것은 하나의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고대신라(BC57-935)가 고려에 합병되고 난 후 부터 1806년까지 신라(神羅)로 명맥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서양인들이 만든 한반도 역사에서는 이 신라가 새신(新)자를 붙여 신라(新羅)로 쪼그라들게 만든 것이니 이 어찌 가증스럽다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반도 역사는 서양인들이 버린 쓰레기통이라고 글쓴이는 말하는 것이다.

이슬람문화역사가 유럽사로 둔갑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것은 신성로마제국을 따로 떼 내기 위해서다.

이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하는 진정한 태종무열왕능비(太宗武烈王陵碑)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여러분
께서는 상상이 가시는가.?

귀부에 나타나는 거북을 처음 신령스럽게 본 것은 바로 사산왕조 페르시아 사람들이었다.

옛 페르시아인들은 귀갑(龜甲)을 귀히 여기면서 거금으로 구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령스러운 거북껍질은 이미 용이 되어 날아갔다고 받아들이며 빈 껍질에는 24개 늑골이 있고 그 안에는 야광진주가 가득하여 캄캄한 밤에도 주위를 대낮같이 밝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빛의 신(神),라(羅)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왕릉 천마총에서 발견 되는 거북등무늬는 사산조페르시아 예술의 영향을 받아 거북등무늬 내부에 금수문(禽獸文)을 채용하는 변화를 가져온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것조차 속이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한반도에 남아 흉내를 내고 있는 릉의 귀부역시 신(神),라(羅)의 신령스러움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다면 페르시아까지 수용할 수 있는 세계를 정복한 제국의 묘장제도(墓葬制度)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릉(陵)앞에 용린(龍鱗), 용수(龍首), 구갑(龜甲), 묘갈(墓碣)등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석물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것은 이러한 묘장제도의 변형임을 알 수가 있다.

삼국사기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604-661,재위:654-661)은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라고 알려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 몸 위의 머릿돌에는 이무기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고 설명된다.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본 블로그 글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2"에서 통일신라전성기가 정확히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661-750)와 연결되고,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皇龍寺)의 종(鍾)을 주조한 경덕왕(景德王, ?-765,재위:742-765)은 전국을 9주 5소경(九州五小京)으로 나누고 당 제도로 개편할 때인 정복왕조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750-1258)가 그대로 세습되어 나타나며 이 과정에서 시아파가 칼리파의 권위를 부정하고 분파하여, 수니파만이 칼리파를 따르게 되었다는 이슬람사가 존재하고 있다.

이 아바스왕조를 정복한 몽골제국의 정체가 어떻게 되는가.

바로 고려이다.

이를 유럽사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개혁을 추진한 경덕왕 10년(751)에는 불국사(佛國寺)가 완공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지만 이 불국사의 실체가 현재 경주에 있는 불국사일 것이라고 보진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이때 불교(佛敎)와 동일하게 볼 수 있는 배화교(拜火教)라고도 하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와 이슬람의 칼리프가 태동된 역사를 공히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 의해 이슬람과 기독교가 태동한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통일신라의 역사적인 로정(路程)을 보면 이슬람 사산왕조(Sassanid Empire,224–651)시대가 끝나고 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때 무함마드(Mohammed, Muhammad, Mahomet,571-632)가 나타나 이어 정교일치의 최고 통치자 전통 칼리프가 생성되었는데 1대.아부 바크르(Abu Bakr:632-634), 2대.우마르1세(Umar ibn al-Khattab, (Umar І:634-644), 3대.우스만 이븐 아판(Uthman ibn Affan:644-656), 4대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656-661)이다.

이 중에서 진지왕 손자이며 김용춘(金龍春,578-647) 아들인 무열왕(武烈王) 태종(太宗,재위:654-661)춘추(春秋)는 정확하게 4대 칼리프와 일치하고 바로 602년에 신라(新羅) 금성(金城)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경주(慶州)라 하는 곳이다.

그러나 금성(金城)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메카의 본래 위치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과연 세계역사라 할 수 있는 아랍역사를 장악한 메카가 있었던 곳이 이렇듯 메마른 땅이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다.

메카가 현재 유럽 땅 중앙에 심어졌을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이다.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ī ibn Abī Ṭālib, 598-661:재위656-661)는 3대 칼리프 아부 타리브의 아들로, 무함마드의 유일한 자녀 ‘성모(聖母)마리아’ 파티마(Fāṭimah)의 남편이었다고 알려진다.

물론 이 ‘파니마’의 칭호가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나 가톨릭 신자들은 파티마의 성모에게 바탕을 둔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카톨릭은 파니마와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그녀를 이슬람인들이 찬양하는 호칭을 보면 진실한 여성, 축복받은 여성, 정숙한 여성, 만족스러운 여성(Satisfied Woman), 천사의 음성, 눈부신 빛의 여성, 세계 여성의 지도자 등이다.

아랍의 모든 것은 이때는 글로벌화 한 것이다.

어쨌던 이런 사실을 보면 이슬람과 기독교의 혼입 속에서 혼란은 현재로서 도저히 정리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김춘추 즉 무열왕이 생존했을 때는 하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따져보면 하나이다.

파니마의 남편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이슬람의 초기 지도자로서 수니파(Sunni)에서는 그를 이슬람의 네 번째 정통 칼리파로 여기지만, 시아파(Shi'a)는 첫 번째 지도자 이맘(Imām)이자 첫 번째 정통 칼리파로 간주한다.

그만큼 시아파에서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요사이 같으면 사우디아라비아(수니파)와 이란(시아파)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신라가 사산왕조와 여러 가지 사건에서 정확하게 비교된다는 사실과 함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역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의 태생차이가 약 6년이 나고 졸(卒)한 년도는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글쓴이가 이를 확신하였던 것을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2 "글로 나타냈고 이어 "사산왕조(Sassanid Empire)의 두여제와 신라(新羅)의 두여왕?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8"에서 더욱 자신감을 가졌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샤 푸란도흐트(Buran or Poran)를 선덕여왕(善德女王)으로 아자르미도흐트(Azarmidokht)를 진덕여왕(眞德女王)으로 본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무열왕의 첫 번째 정궁부인(正宮夫人)을 보라궁주 설씨(寶羅宮主薛氏)라고 한다.

이 보라궁주 설씨는 요절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아마도 파티마의 실체를 감추려 했던 것이 아닌가 판단할 수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이슬람 무함마드를 이은 첫 번째 전통 칼리프가 바로 “태종무열왕”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가장 빨리 무함마드 즉 마호메트(mahomet)의 가르침에 귀의하면서 예언자의 최대 협력자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인 3대 칼리프가 살해되자 칼리프에 곧 바로 선출되었는데, 무함마드의 반대세력인 메카(Makkah Al Mukarrammah)의 유력자와 우마이야(Umayyad)가(家)의 무아위야(Muawiyah)에 의해 쫓겨 도읍을 메카 북쪽의 메디나(Medina)에서 이라크 나자프 주의 도시 쿠파(Kūfah)로 옮겼다고 나타난다.

유럽 이탈리아 로마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 밀라노나 베니스정도가 될 것이다.

사실 서유럽의 중세 말 유럽 대학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고전을 다시 번역해서 교재로 쓸 정도였다 하였으니 지배력에 의한 문화전달임을 알 수 있고 솔직히 현재 서로마의 존폐성이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아바스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사실 또는 유추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사에서도 7세기 후반 이베리아반도에는 우마이야왕조와 이은 아바스왕조 등 아랍세력들에 의해 800년간 지배를 당하였다고 기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축소하였다고 가정할 때 실제로 근세기까지 아랍영역으로 존재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유럽을 아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후 알리는 제국통일을 위하여 무아위야와 항쟁과 타협을 했으나, 661년 정정(政情)불안을 개탄하는 이슬람교도에게 암살을 당하여 쿠파(Kūfah)의 회교 사원에서 쓰러졌다는 것이 이슬람 역사이고 알리 및 그의 자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시아파라고 알려진다.

결국 이러한 사실에서 퍼즐을 맞춰보면 한반도 역사에서는 무열왕이 삼한을 굴복시키고 바로 통일신라를 구축했던 제왕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과 알리(Ali ibn Abi Talib:656-661)가 아랍제국을 통일한 사실이 거의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3.한반도 유적의 몰골들


먼저 서양인들에게 잘 알려진 십층석탑을 보자.

탑골공원에 있었다고 하는 원각사(圓覺寺)는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왔던 사찰로서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고,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었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다가 효령대군의 건의에 의해 중창하였다는 것으로서 세조 13년(1467년)사월초파일에 10층 석탑이 사지 내 마침내 완공되자 연등회(燃燈會)를 베풀고 낙성하였다고 알려지는데 이 10층석탑을 원각사지 10층석탑이라 불리는 것으로 국보 제2호(1962년 12월 20일 지정)이다.



                   

또 십층 석탑으로 알려진 하나는 국보 제86호(1962년 12월 20일 지정)로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시기의 강융(姜融)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는 경천사에 세운 석탑이라고 알려진다.

경천사10층 석탑의 기록을 보면 개항기 일본의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顕:1843-1939)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일제 강점기가 끝나기 전에 돌려주어 경복궁에 버려져 있었다고 하는 것을 1960년에 다시 세우고, 1995년에 복원하였다고 나타난다.

쓸모없어 버리고 주워 다시 복원시켜 놓고 이것이 오늘날 또 하나의 십층 석탑이며 한반도 유적의 몰골이다.

쓰레기도 아니고 버리기는 왜 버렸다고 표현하거나 설명을 할까.

그만큼 한반도 유물들을 스스로 낙하시킨 것이며 이는 저도 그도 아닌 그저 평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학자들의 심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좌측 사진은 1904년에 촬영한 경천사 10층 석탑이고 우측은 대원각사 10층 석탑인데 문제는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전면에 장식된 불상의 조각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호)과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이 흡사할 뿐만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공통정이 무엇인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르다는 것인가.

그저 애매하게 설명되고 그것에 대해 어느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한반도 역사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현재 국보 제2호(1962년 12월 20일 지정)된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은 7층석탑]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1467년(세조 13년)에 세워진 이 석탑은 인물과 화초 무늬 따위가 양각되어 있는 3층의 기단과 7층의 탑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정상인데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고 알려진다.

복구한 시기가 미군정시대이다.

그런데 7층 석탑이 놓여 있는 경성 산세(山勢)들을 보면 전혀 현 서울의 지형 모습이 아니다.

결국 ‘경천사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비슷하고 같은 것이겠지만 어떤 이유인지 한반도 역사에서는 이를 분리코자 한 것이 틀림없다.

경천사는 고려에 있어야 할 사원이고 원각사는 조선에 있어야 사원이라면 한반도에 코리아를 묶었던 상황에서 똑같은 석탑을 둘 수 없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려가 코리아 영역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결국 중국문화와 연결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고자 한 것에서 이러한 같은 석탑이 한반도에 존재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서세의 시각에서는 고려와 중국은 분리되어야 했고 고려는 조선에 의해 사라져야 할 역사로서 존재하여야 했다면 한반도에 같이 가져와 하나가 불필요하게 여겼을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고려는 분명 오늘날 청(淸)으로 남는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따진다면 청(淸)은 앨비언(Albion)들이 만든 브리티시(Great Britain)로 나타난다.

즉 1922년에 완성시킨 세계사평전을 감안하면 잉글랜드가 곧 중국이라는 의미이다.


다음은 귀부(龜趺)이다.

앞에서 태종무열왕의 능의 귀부를 보았다.

이제 보물 제3호 원각사지(址)에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를 한번보자.


                   [보물 제3호(1963년 1월 21일 지정)원각사지(址)에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보물 제3호 원각사지(址)에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는 조선 성종2년인 1471년에 세워졌으며 전체높이 4.7m, 비신너비 13m라 알려진다.

이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가 바로 거북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의 머릿돌을 장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보물 제3호의 전체 모양을 가만히 보면 위 비석과 아래 귀부가 분리된 상태에서 귀부는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고 위 비석을 나중에 조립한 것임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즉 아래 귀부는 잘 청소된 것 처럼 흰 빛이 나는 반면에 이수가 있는 비신은 오래된 비석 모양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위 대원각사비를 촬영한 가장 오래된 퇴색된 사진을 보면 기와집에 걸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사벨라가 그린 삽화역시 이와같은 배경임을 알 수 있는데 약 15년이 지난 1910년 코리아를 찾은 사진사 채핀이 걸터 앉은 대원각사비는 주택가에 버려진 것을 잘 정돈하여 새로 단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적어도 이사벨라가 찾았던 시대보다 많이 정비가된 것이라고 보이지만 채핀이 방문했다고 하는 1910년은 다 아시다시피 한일병합년도이다.

사실상 북서부의 환경은 특히 동양인들에게 호의적이 아니었다.

서양인들이 개판을 칠 수 있는 시대환경 그것이다.
그렇게 볼 때 채핀이 건방을 떤 것도 같은 환경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고려가 있었던 경성 역시 서양인들의 볼썽사나운 난동으로 고려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임을 알 수가 있다.

1882년에 중국인추방법이 발효되면서부터 노골적으로 자행된 백인테러에 의해 북아메리카 서북부에 중국인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많은 린치사건, 폭행사건, 강간, 강탈사건 등 비일비재하게 합법적인 테러가 발생한 상황이라면 고려 구성원 중에 특히 동양인들은 최고로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보물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는 대원각사비를 보면 비신은 1894년 이사벨라가 찾았던 시기의 모양과 별 다를 것이 없지만 귀부는 어딘가 모르게 맞지 않고 새롭게 마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혹 아래 비신이 조선총독부에 사진처럼 같은 것이 아니고 1962년 비슷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4.잡다한 다른 귀부들



고달사지원종대사혜진탑비귀부이수(高達寺址元宗大師慧眞塔碑龜趺螭首, 비,비탑碑塔)-보물 제6호 외


귀부에는 그 밖에 잡다한 것들이 많지만 성종대왕태실비(成宗大王 胎室碑)의 귀부(龜趺)와 비신(碑身)과 고선사지 귀부, 각연사 석조귀부, 승선군 묘에 남아 있는 귀부만 있고 비신이나 이수가 사라지고 없다.

형상들도 참으로 처참하다.

목이 없는 것, 부서지고 깨어져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여길 정도이다.

형편 이러하니 어떻게 한반도에 옳은 유적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성덕왕릉비귀부(聖德王陵龜趺)(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6호)


성덕왕릉 정면의 논 한가운데 비석 받침돌인 귀부 한 기가 있는데 성덕왕릉 귀부란 명칭으로 경북 유형문화재 96호 지정되어 있다.

이것을 어찌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옛부터 지속적으로 관리가 된 상황이라면 이런 몰골은 아닐 것이다.

귀부의 머리도 없어지고 몸통도 여기 저기 깨어져 있지만 그냥 방치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5.서양인들의 오리엔탈문화 거부감


이사벨라가 코리아를 처음 찾았던 시기가 1894년이었다면 세계삼한역사 상식으로 1881년 조선이 해체된 상태이기 때문에 언뜻 생각해 볼 때 나라가 서양인들에게 통치권을 빼앗긴 상태가 되어 전혀 행정이 미치지 않았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조선(朝鮮)이 아니라 코리아(COREA)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조선(朝鮮)은 비록 자본세력인 서양인들에게 그렇게 농락을 당했다고 하겠지만 고려(高麗)가 온전했다는 것은 본 블로그 글 여기저기서 근거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열거하면 “한우로 본 코리아 북미서부”, “채핀가(家)의 코리아 행선지 고찰”, “올드 코리아(Old Corea)와 만불동”, “코라이(高麗 CORAY)의 해상무기”, “흰 매(海東青 gyrfalcon)”,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코리아서해안(西海岸:West Coast of Corea)의 위치발견”, 경성을 동부로 보았지만 뉴욕과 상대될 수 있는 지역 킹 카운티의 시애틀에서 가까운 고도를 찾아야 하는, “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리즈로 올린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3]1886년 코리아가 보유한 함선들”에서 확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한다면"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청각(靑角)이 알려주는 서해(西海)8도와 채널제도(Channel Islands)”, “순천(順天)과 해남(海南)은 남해바다 가운데 있다?”, 와 여기서 더욱 확신하게 한 것은 어멀리 켐프가 코리아를 방문한 시기인 1904년에서 1909년까지의 기행문인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가 방문한 코리아"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에서 결정적으로 이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Korea and her Neighbours삽화]


당시 세계목화5위생산국은 아무곳에서나 할 수없는 것이다.

이 와중에 특히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문화 거부감은 어떤 식으로 표출된 것일까.

글쓴이가 보는 시각에서 위 어린아이들이 대원각사지비에 함부로 올라가 포즈를 취한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아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사진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Lucy Bird)제목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 실려 있는 삽화이다.

고려가 엄연히 존재하는 때 어린아이들이 함부로 어른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귀부(龜趺)위에 올라갈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저렇듯 삽화의 모델노릇을 했었다는 것은 순진한 아이들을 꾀어 그렇게 포즈를 취하게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채핀이 한국인 여인들이 머리에 짐을 이고 짧은 저고리 덕분에 가슴이 들어나는 것을 악의적으로 퐐영하여 그것을 미개한 것으로 왜곡하고 코리안들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한 짓이나 크게 보았을 때 다를 바가 없다.

서양인들의 안하무인격의 무절제한 행동들은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에서 지적한 사실이지만 1905년 7월에 루스벨트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을 기화로 동시에 미국정부 유명인사 10인의 일행에는 국무장관(Secretary of War)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857-1930)와 루스벨트의 큰 딸 앨리스(Alice Lee Roosevelt Longworth:1884-1980)와 약혼자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 III:1869-1931)가 포함되어 대한제국 경성(京城)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고종은 앨리스를 ‘미국의 공주’로 극진하게 대접했었으나 명성황후 홍릉(洪陵)을 찾아 설치된 코끼리 석상에 올라타고 약혼자에게 사진을 찍기를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본 블로그 글 "채핀가(家)의 코리아 행선지 고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4"의 글에서 도 지적하였던 것처럼 이 1910년에 코리아를 방문한 뉴욕 내서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Society)사진작가인 윌리엄 위스너 채핀(William Wisner Chapin)이란 인물역시 마찬가지로 당시 대원각사비의 귀부위에 걸터앉아 사진을 촬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기를 싸고 고려황실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일삼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려의 위대한 상징성을 짓뭉개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은 나쁘게 보면 도발한 것이다.

그 밖에 당시 고려(高麗)라는 중국의 상징성들을 깨뜨리기 위해 각종 언론과 서책을 수없이 이용하였다는 시기로서 위 삽화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을 일부러 올려놓고 포즈를 취하게 하였다는 것은 많은 사실을 왜곡코자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서양인들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동양오리엔탈문화의 열등의식에 의한 거부감이었을 것이다.


6.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건넜다는 곳은 미시시피강


코리아에 방문했다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Lucy Bird,1831-1904)에 대해살펴보면 여러가지 근세기에 코리아의 숨겨진 역사가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것을 느끼고 당시 코리아 실체의 역사가 그녀의 글 속에 수수께끼처럼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녀는 잉글랜드 노스요크셔주(州) 버러브리지(Boroughbridge)출신으로 1892년 왕실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 되었고 이러한 자격으로 64세의 나이에 코리아를 방문하였다는 작가인데 1894년 2월 한국을 방문한 이후 4년 동안 4차례에 걸쳐 코리아를 현지답사하면서 120년 전의 코리아 사회를 속속들이 체험하였다는 인물이다.

물론 이 여인이 찾았던 코리아는 한반도가 아니다.

그녀의 저서 1898년 출판한 제목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과 1899년에 출판한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The Yangtze Valley and Beyond,1899)”에서, 이 두 책의 다른 점을 냉철하게 분석한 재야학자 최두환 선생은 그녀가 조선을 전적으로 여행하였음에도 이를 나누어 마치 조선과 중국이 다른 것처럼 기술하고 대륙조선을 왜곡한 사실을 알리려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최두환 선생입장에서 현재 동아시아대륙, 중앙아시아에 조선(朝鮮)이 존재한 사실 즉 대륙조선의 역사 틀을 증명코자 심층분석한 것이지만 이와 다르게 글쓴이가 주장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근원적으로 황하(黃河)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상중류로, 양자강(揚子江)을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하류라고 보고 양자강(揚子江)을 가로지른다는 말은 ‘양쪽사이에 기다란 막대나 줄을 가로 놓거나 꽂다’라고 쓰이는 것과 가로지르다를 영어로 "cross·cut"라 하므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하류를 사이에 세로로 흐르는 것을 두고 가로질러 건너갔다는 표현이 합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근대사에서 우리가 혼란스럽게 여기는 것은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고집스럽게 서양인들에게 계속 사용되었을 것이란 착각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조선이란 명칭은 한반도 역사를 만드는데 이용된 것일뿐 1881년에 어찌되었거나 해체된 이후부터 서양사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명칭으로 취급되어 그 이후에 코리아에 들락거렸던 서양인들은 코리아라고 하였지 절대 조선이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조선을 은연중에 코리아라 했을 것이란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조선은 서세의 식민지상태에 빠져 팔다리 모든 것이 절단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조선은 지속적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역사에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우리 스스로가 크게 착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한국인 스스로가 대한국이라 했음에도 지속적으로 조선이라고 하니 "COREA"는 더 이상 붙일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코리아는 고려란 사실이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그러함에도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 역사에는 조선(朝鮮)과 고려(高麗)을 묶고, 이를 “COEREA”로 명명하니 자연스럽게 한반도 역사가 완성된 것이니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때문에 서양세력들은 고려임에도 별도 중국(中國)이 존재한 것처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려(高麗)는 사라진 왕조처럼 처리되었지만 이는 유럽사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 불가리아등에서 나타나고 러시아제국이라고 불리는 로마노프왕조와 통일독일 프로이센(Prussia)등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고려가 고스란히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만든 동양중국 역시 역사책으로만 존재하게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정리할 수 있다.

근세기 하나의 체제였던 "COREA"는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조선(朝鮮)의 전통적인 지배영역으로서 역사를 추구했지만 1881년 자본력을 앞세운 서양세력들에 의해 고스란히 장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다만 서쪽에는 중국(카타이)이라고 하는 고려(高麗)가 존재했음에도 서양인들은 의도적으로 조선과 고려를 합해 코리아(COREA)라고 합칭(合稱)하고 한반도에 묶어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 만큼 역사 폭을 의도적으로 좁혀 놓은 것이다.

동아시아대륙 양자강은 본래 흐름방향이 동류하는 것으로서 상류 서(西)쪽에서 하류 동(東)쪽으로 ‘가로로 흐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을 ‘가로지른다’라고 해석하기는 곤란하다.

즉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양자강을 내내 배로 항해하다가 볼 일 다 보았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이야기다.

역사를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언어 구사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뿐만아니라 서양인들이 발설할 수 없는 미시시피강에 대한 표현을 삼가하고 오직 양자강이라 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에게 얼마나 근대사에 접근하기가 힘든 것임도 알 수가 있다.

‘가로지른다 한 것’은 한쪽에서 강을 가로질러 건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사벨라가 코리아를 찾았던 1894년경은 이미 조선(朝鮮)이 해체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코리아(COREA)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高麗)를 말한 것이므로 중국(中國) 카타이(Catay)라 할 수 있고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서부(西部)전체가 코리아이며 중국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7.귀부의 생물학적 판단(붉은바다거북)


마지막으로 이제 귀부의 생물학적 판단을 하여 실제로 귀부가 어디에서 서식지가 근원인지 밝혀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한반도와 별도로 귀부를 대하는 신중국상황은 어떠할까?

귀부(龜趺)를 비희라고 하는데 패하(霸下), 전하(填下), 용의 아홉자 중에 첫째(龍生九子之一)로 나타나 고서와 다르지 않다.

귀부의 동물을 옛 전설에 나오는 거북과 비슷한 동물로, 설명하고 비석(碑石)의 대좌(臺座)에 많이 조각되어 있다고 나타나며 이를 비희(贔屭)[bìxì]라고 설명하고 있다.

A dragon-headed bixi with a stele in memory of the Qianlong Emperor's rebuilding of the Marco Polo Bridge, Beijing, c. 1785

위 자료에는 건륭황제가 1785년에 베이징 마르코 폴로 다리를 개축하면서 용(龍)의 머리를 갖춘 비희의 유물이 남아 있다고 알려지는 것이 전부이며 하필 신중국에서 거짓말 역사사기꾼 마르코 폴로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야기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서 재물보([才物譜]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비희(贔屭)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구체적인데“주휴(蟕蠵)의 족속으로 우리나라의 동남해(東南海)에 크기가 산악과 같고, 발이 사람 발과 같으며, 등 위는 온통 굴산을 이룬 거북이 바로 이 종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동남해(東南海)가 어딘가.

물론 한반도 동남해라고 생각해서는 한반도 역사를 답습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후한(後漢) 장형(張衡)이 지은 서경부[西京賦]에는 황하의 물줄기가 화산(華山)에 가로막혀 휘돌아 갈 수밖에 없자, 황하의 신인 거령(巨靈)이 손을 들어 산의 머리를 쳐서 둘로 쪼갠 다음에 그 사이로 직진해서 흘러가게 했다는 거령비희(巨靈贔屭)의 전설도 있다.

황하가 다름이 아니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미시시피 강(江)이라 볼 수밖에 없어 이 강이 들어간다는 곳은 곧 멕시코 만이다.

이를 글쓴이는 코리아 해라고 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신중국에서는 이 비희를 이상하게 이야기 한다.

바로 아래 사진을 보면 해태와 비슷한 모양의 동물을 비희라고 하는 것이다.

맞지 않는 이야기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1경전류 2 소학, 자서(字書)편에‘贔屭’음은 피희(避戲)인데 힘을 쓰는 모양이다 하였다.

즉 비석을 짊어질 정도로 힘을 쓴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성호사설 제6권 만물문(萬物門) 용생구자(龍生九子)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용(龍)이 새끼 아홉을 낳는데 용은 되지 않고 각기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라는 말에서 홍치(弘治)연간에 어떤 각신(閣臣)이 나기(羅玘)와 유적(劉績)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데 “아홉 중 첫째는 이름이 비히(贔屭)로서, 형상은 거북과 흡사하고 무거운 짐을 좋아했는데, 지금 비석(碑石)밑에 받침돌이 바로 그 유상이라”한 것이다.

그러니 신중국에서 비희를 해태처럼 생긴 동물을 말하는 것은 고사서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박물지일편(博物志逸篇)에는,“비희(贔屭)는 성질이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하므로 비석을 지게 하였고, 이무기와 범, 이호(螭虎)는 모양이 용(龍)같이 생기고 성질이 문채를 좋아하므로 비문 위에 세운다.”하였다.

이는 귀부 즉 비희가 대개 무거운 짐을 좋아한다는 것으로써 이른 말인데, 어떤 이는 이르기를, “거북과 자라가 비록 다 같은 수족(水族)이고 개충(介蟲)일지라도 이 오(鼇)란 자라는 바다 속에 있는 대별(大鼈)인데 영귀(靈龜)와는 다른 것이다.”고 부첨하였다.

자라가 거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묘지 앞에 조상(彫像)된 귀부는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하므로 비석을 지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반드시 귀부에는 상징적으로 무거운 비신(碑身)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주휴(蟕蠵)라고도 하는 비희(贔屭)를 생물학적 근거를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찾아보니 바로 붉은 바다거북이다.



형상이 똑같다.

조선총독부가 보관하고 있던 귀부와 아래 실제 붉은바다거북이 일치한다.

붉은바다거북(학명:Caretta caretta)은 붉은바다거북속에 속하는 유일한 바다거북이다.

분류학적으로 보면 거북목(龟鳖目:Testudines), 바다거북과(海龟科:Cheloniidae), 붉은바다거북속(蠵龟屬:Caretta Rafinesque), 붉은 거북(蠵龟:C. caretta)종(種)으로 분류된다.

Caretta is a Latin version of the French word “caret” which means turtle, tortoise, or sea turtle

속명은 거북을 뜻하는 "caret"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화 함에 따라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붉은바다거북은 보고된 바에 의하면 364킬로그램까지 자랄 수가 있으며, 몸길이는 1.1미터 정도되는 것으로 성질이 다소 난폭한 편이며 육식성이라 하고 수명이 거의 30년이나 된다 한 것이다.

등딱지의 색은 적갈색이며, 살은 갈황색으로 설명되고 있다.


蠵龟(学名:Caretta caretta)是海龟科的一种海龟,又称红蠵龟,分布于温带和热带海域、

科學分類

界: 动物界 Animalia

門: 脊索动物门 Chordata

綱: 爬行纲 Reptilia

目: 龟鳖目 Testudines

科: 海龟科 Cheloniidae

屬: 蠵龟属 Caretta Rafinesque, 1814

種: 蠵龟 C. caretta

二名法

Caretta caretta(Linnaeus, 1758)


딱딱한 등딱지를 가지고 있는 거북이 가운데 가장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는 붉은바다거북은 평균적으로 80~200 kg에 길이는 70~95 cm에 이르고 가장 크다고 알려진 것은 무게가 545kg에 길이는 213cm에 이른다 하니 참으로 거대한 거북임에 틀림없다.

붉은바다거북은 알을 낳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뭍으로 올라오는 경우가 없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그래서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수컷들은 일평생을 외해나 연안부근에서 지내게 되고 알에서 갓 부화한 새끼 붉은바다거북이들은 해초가 밀집된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낸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특히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파악하려면 우선 생물학적 근원지 파악이 중요하다.

살펴본 결과 자료에 대서양의 북서쪽에 서식하는 개체군이 있다는 사실과 이을 살펴보면 나이에 따라 선호하는 서식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알려지고 정리된 사실이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어쩜 이처럼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이빨이 딱딱 맞아 떨어질까.

신기할 정도이다.

이 붉은바다거북은 나이가 어릴수록 상대적으로 얕고 연안에 가까운 곳에서 더 자주 발견되었기 때문에 해안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도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대한민국 연안에서도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특별하게 조사된 것이 아니고 동중국해나 동해에서도 서식한다고 보고되고 있다는 정도이지 실제로 개체군을 보았다고 하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생물학자들입장에서 동남해에 난다 하였으니 당연히 한반도 동남해에 찾을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 붉은바다거북 개체군이 서식하는 곳은 바로 대서양 북서쪽이라는 사실이다.

대서양북서쪽에서 이동할 수 있는 곳은 따스한 쪽으로 움직임을 알 수 있고 아래 미국자료 Caretta caretta (PointMap)에서 붉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물론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이며 더 나아가 멕시코만까지 확대할 수가 있다.


                                                   Caretta caretta (PointMap)

                      [Caretta carettaNatureServe(United States and Canada.)]


때문에 글쓴이는 사서 재물보([才物譜]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비희(贔屭)를 설명하는 사실에서 우리나라의 동남해(東南海)라는 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이었을 가능성을 매우매우 높게 보고 일치한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신중국 한약자료에 이 비희의 효능으로 보신유간(補腎柔肝)이라 하여 신(腎)을 보하고 간음(肝陰)이 허한 것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 하였고 자음잠양(滋陰潛陽) 즉 음기(陰氣)를 기르고 양기(陽氣)를 잠기게 하는 효능 또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주치병증으로 화상(火傷)을 말하고 있는 것도 참고자료가 된다.


8.정리


참으로 놀라운 이런 역사가 삼한역사에 버젓이 존재하였음에도 한반도 역사는 어떠한가.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실체들이 그야말로 초라한 모습 그 자체라는 사실에서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부서지고 깨어지고 눈알이 파이고 비신이 놓일 자리 잡다한 것들이 박혀있고 머리가 날아가고 목이 절단되고 이런 파괴된 상황에서 더 이상 유적 유물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물, 유적이 아니라 개판이다.

기독교사람들이 단군 신상의 목을 절단시키는 무도한 짓과 거의 같은 아류가 한반도에서 판을 쳤던 것임에도 그것을 역사라고 하고 그것을 유물이라 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한반도에는 아예 역사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다면 미군군정 이후의 정치역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삼한역사를 죄다 안고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것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큰 죄악이다.

눈을 반듯하게 뜨고 보라.

유적이라 하여 귀히여기는 것이 무엇이 있던가.

그냥 헛 치례에 불과 할 뿐이다.

역사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유물, 유적현장에서 행태적 역사반동이 계속되었음은 물론이고 지금도 끊임없이 유물과 유적을 본래 있었던 것처럼 찾아 이렇게 저렇게 맞추어 적지 않는 논문들을 학자들이 발표하지만 한반도에 맞게 만들어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의한 옛 삼한역사와 비교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사와 비교하면 우물안 개구리신세의 미세한 몸짓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사가 아닌 헛된 사실만을 고집하는 쓸모없는 깡통역사가 한반도 전체를 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통치했다고 하였으니 얼마든지 일제가 숨겨놓고 갔다한들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 사전에 숨겨놓고 시간 대 별로 찾아 유물유적이라고 하면 한반도 역사 생성과 궤를 맞추기에 바쁜 것이다.

만약 엉뚱한 것이 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맞추면 그만이다.

사실 한반도에는 식민지역사가 존재하는 한 고고학(考古學)의 의미란 없다.

뻔한 이런 행태가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까.

역사발전보다 우리의 역사를 어디에다 맞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점점 더 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조차도 구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 문외한(門外漢)들을 끝없이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삼한 신라(新羅)가 신라(神羅)라는 글쓴이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반도 역사를 고집한다면 세계삼한역사를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삼한역사는 세계역사로서 그냥 존재하게 하고 한반도에서 시작된 미군정시대부터 새롭게 역사를 써야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만이 역사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다.

우리가 이슬람 역사와 신라 역사를 비교하고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일치점을 찾는 것과는 달리 한반도 역사는 한반도 자체의 역사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창조물인 것처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까지고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역사가 주는 한계에 막혀있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다.

독창적이 무엇인가.

역사가 어떻게 독창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인가.

창조 역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최초 인류역사라는 단어 이외 사용해서 안되는 것이다.

이 창조적인 것을 마치 철학적인 개념처럼 만들고 근원의 역사와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심고자 하는 술책이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의 설계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열도일본사학자들인가.

열도일본사학자들도 한반도사학자들과 또 개, 처지는 마찬가지다.

신중국사학자들이라고 다를 것인가.

아니다.

세계역사체계를 장악한 서양세력의 사학자들이지 다른 세력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만든 한반도 독창적인 역사가 모화사상을 낳고, 사대주의를 낳고, 식민사관을 낳을 뿐 결국 역사가 주는 자존보다 우리에게 피해역사와 부끄러운 역사, 굴욕의 역사, 참담한 역사만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으니 이것을 어찌 밑바닥 역사라 하지 않겠는가.

독창적, 개똥같은 소리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가 이토록 피해역사가 난무하던가.

열도일본인들의 특징은 어쩌면 순리를 잘 따르는 종족이라는 장점이다.

스스로도 그들의 역사가 근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미국의 도움을 받아 없는 역사를 있게 하고 온통 근대사에 일본인들이 특히 동아시아에서 특별나게 활동을 한 짜깁기 역사를 그들의 역사라고 우길줄도 알고 얼굴에 부끄럽겠지만 철면피를 깔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족이라는데 장점을 이야기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조직이 믿으라면 한사코 믿는 습관도 몸에 배여 있다.

누가 만들었던지 간에 그들에게 유리하니 만들어놓은 현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충분히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일본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이를 배우고 이어 받을 터인데 반면 세계역사를 창달하고 인류사를 지배한 우리의 역사가 버젓이 존재하였음에도 어리석은 것들이 존재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작태가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지배했다는 어리석음이 있는 한, 또한 기껏 받아들인 역사가 자존과 긍지가 아니라 족보도 없는 식민지역사와 노예역사라고 하는 사실을 비정상이라 생각하지 않는 한 일본인들에게 비아냥은 물론이고 이제 멸시를 받게 될 것이 뻔한 이치이다..

이 어찌 앞날을 크게 걱정하지 않겠는가.

옛 조상들은 역사문화 모든 것에서 우월했고 사실상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이었으니 그만큼 자존이 강했기에 일본인들을 왜구라 하고 손아래 놓고 부리고 다스렸지만 우리 후대인들은 역으로 열도일본인들을 아마도 머리 위에 두고 공경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들은 역사 근본이 없을 망정 근세사가 우리보다 우월하고 그 우월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양국가가 취하는 역사 교육방침이 천양지차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식민지 역사자체를 소각장에 넣어 불태워버리고 그 공간에 세계삼한역사를 끌어넣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열도일본인들은 날이 갈수록 자존과 긍지가 넘쳐날 것인 반면에 한반도에서 자라나는 후대 청소년, 청년들은 이 식민지역사와 노예 역사망령 때문에 평생 자학과 강박의 역사를 부등켜 안고 현재 선대인 우리보다 더 큰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할 것이 뻔하다는 사실에 뜬금없이 오늘도 잠 못 이룬다.

본 블로그 글 “유적과 사적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모조세트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954 ”에서 '근대건축도면집'을 통해 공개한 창경궁 평면도에서 보면 신설지(新設池)라 하여 새롭게 못을 판다는 의미의 도면을 그려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여태 없었던 새로운 못을 만든다는 것으로서 아마도 한반도에서 새롭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도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반도 역사의 현실 주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글 전반에서 보았듯이 귀부의 몰골상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의 역사처지가 참으로 캄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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