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세계삼한역사연구의 가시적인 효과

한부울 2016. 10. 2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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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삼한역사연구의 가시적인 효과


글쓴이:한부울


아래는 연합뉴스[16.09.29. 12:11,조재영 김기훈 기자]보도의 기사 내용이다. 


서기 1333년 로마 교황이 고려 제27대 충숙왕에게 보내는 서한의 필사본이 바티칸 수장고에서 발견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우광훈 감독)제작팀은 지난해 8월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이 서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29일 밝혔다.

1333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이 발행되기 44년 전이다.

이는 1377년 직지가 인쇄되기도 전에 이미 고려와 유럽 간 교류가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양측 간 교류가 내내 지속됐을 것임을 전제한다면 고려의 금속활자가 1455년 활판 인쇄에 성공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성립케 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다큐 제작팀은 동양의 금속활자가 유럽으로 흘러간 흔적을 찾던 중 이 자료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라틴어로 된 이 편지는 교황 요한 22세가 쓴 것으로 '존경하는 고려인들의 국왕께'로 시작된다.

이 편지의 전달 임무는 당시 니콜라스라는 사제가 맡았는데, 그는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 사라져, 편지가 최종적으로 충숙왕에게 전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교황청은 편지를 씀과 동시에 이를 기록, 보관하기 위해 필사본을 남겼고 이 필사본은 여러 필사본을 모은 서한집에 들어있다.

특히 편지 내용은 당시 교황청 사제들이 고려에 직접 건너갔다는 점도 시사한다. 편지에는 "왕께서 그곳(고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대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는 1594년 임진왜란 때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반도에 온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록돼 있다.

이 다큐를 만든 우광훈 감독은 "이 편지의 발견은 유럽인과 한국의 교류사를 261년 앞당겨 다시 서술해야 할 역사적 사건임은 물론이고 한국 교회사를 수정해야 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제작진은 "바티칸 비밀 수장고에는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고 서한 필사본도 양피지로 만들어져 700년 가까이 지났지만, 보관 상태가 양호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전북 전주에 본부를 둔 세계종교평화협의회도 지난 6월 말 바티칸기록원에서 고문서 담당 엔리코 플라이아니 박사를 만나 요한 22세가 고려왕에게 보내는 라틴어 서신을 확인하고 두 장짜리 사본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세계종교평화협의회 관계자는 "지난달 바티칸기록원으로부터 우편으로 서신의 사본을 전달받았다"라며 "서신 내용은 현재 번역 중이며 앞으로 교황청과 협의를 통해 서신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다큐 제작진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동서양 교류를 통해 고려의 금속활자로부터 힌트를 얻었거나 기술 이전이 된 흔적을 찾기 위해 유럽 5개국, 7개 도시를 탐방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촬영 분량만 총 400시간으로, 200여명의 학자와 전문가, 시민의 인터뷰 등을 담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최근 후반 작업을 마쳤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감독한 정지영 감독이 제작을 총지휘했다.

제작진은 이 작품을 국제 다큐멘터리에 출품하는 한편 내년 상반기 국내 극장개봉을 추진할 예정이다.


2012년 1월 22일(일요일)에 작성한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에서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 설계, 활자 대량 생산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사실로 단순하게 인정되고 있지만 그의 진정한 업적을 세부적으로 따져 들어가 보면 활자설계, 활자대량생산이란 기술과 적극적으로 유성잉크, 목판인쇄기 사용을 결합시켰다는 제작과정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활자 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면서 활자 제작 방식으로 주조(鑄造)를 채용하였다는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역사 지식에서 빠져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분명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금속기술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  골(Gaul)은 바로 고구려 고로(高盧)와도 연결된다고 하면서 이 갈리아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이란 사실을 더하여 여러가지로 삼한 역사와 연계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어쩌면 갈리아(Gallia), 골(Gaul)과 가우리(Caule, Cauly)와 연결되고 나중에는 코레, 코라이(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로 이어지는 연관성을 제기해 보았던 것이다.

켈트족(Celts)의 거주지이었던 마인츠(Mainz)는 1254년에 강력한 라인(Rhine)지방 도시 연맹의 중심지 상업도시로 발전하였고 1440년에는 여기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태어났던 곳으로서 특히 독일을 무대로 신교(改新敎:Protestant)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 30년전쟁(Thirty Years' War:1618-1648)중 스웨덴과 프랑스에 점령되었던 굴곡이 많은 도시이며 1792년에는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중 재점령했다고 알려지는 도시이다.
구텐베르크가 1450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인쇄한 라틴어로 "번역된 출판"이라는 의미의 불가타(Vulgata)성경은 왠지 고려불경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하였고 동양한어로 불경이라면 서양어 특히 라틴어로는 마자린성경(Mazarin)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두 성서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란 추측까지 한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1453년경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신약 성서를 인쇄하였는데, 이 책에서 나타난 우수한 인쇄 품질로 그는 호평을 받았다 하였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발명품으로 존재한 것을 언급하였고 기록이 사라지고 없어 확인 할 수 없다 하여도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의 태생 자체가 고려시대의 금속 활자 탄생과정과 연계되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글에서 조심스럽게 개진 한 것이다.

고려가 기록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금속활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고려인이 아닌 구텐베르크가 현재 모든 자료에서 철저하게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는 의문점으로도 제시하였다.

단 이 글에서 오해소지가 있겠지만 불경이라는 것과 성경이라는 것을 같이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섣불리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고도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거대한 한 개의 역사를 두 개로 나누면서 고려와 독일로 분리 한 것이고 종교까지 분리한 것이라고 감히 내다 볼 수 있다 하였다.

고려가 당시 유럽연합국이었다면 실제 지방자치제에 의한 독립적인 왕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독일도 그 구성원으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현재 나타나는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금속활자가 주는 가치와 역사흐름의 영향력이라고 하여 직간접적으로 동서양이 분리될 수 있는 기반이었던 프랑스혁명의 시발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금속활자의 가치를 볼 때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나 불가타(Vulgata)성경이나 마찬가지로 대량으로 인쇄하여, 성직자와 지식인들만 읽을 수 있었던 경(經)과 성서를 대중화시켰다는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고 당시 불란서성경이라고 할 수있는 불경(佛經)이나 성서(聖書:Bible)를 비롯한 책들은 전부 손으로 쓴 필사본이라 수량이 적어서 가격이 매우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어 대중화가 못되었지만, 활판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쉽게 책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들 수 있다 하였다.

이치적으로 따져 고려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의 기존 기득권세력과의 충돌시 가장 변화의 가치를 이를 이용하여 대중화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가치를 노리고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제작하였을 것이란 추리가 가능하다고도 하였다.

때문에 중세기의 종교전쟁, 또는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역사를 나눔에 있어 시기적인 문제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일텐데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만 볼 때 고려는 1377년이고 독일은 1453년이란 차이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위 기사를 보면 1333년 로마 교황이 고려 제27대 충숙왕에게 보내는 서한의 필사본이 바티칸 수장고에서 발견됐다는 주장에서 이미 종교지도자들은 기계화된 것이 아닌 금속활자를 사용한 것이 라 보인다.
어쨌던 이 금속활자 발명은 고려나 유럽 모두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인데 서양인들이 차지한 유럽쪽에는 이에 대한 세세한 역사에서 확연하게 나타나지만 현 고려가 존재했다고 하는 한반도에는 그저 한반도 역사의 기록으로 모퉁이에 매우 초라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 다르다는 점도 강조한 것이다.

물론 금속활자발명은 당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으며 또한  프랑스혁명을 성공시킨 열쇠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처럼 본 블로그에서 실행하는 세계삼한역사찾기에 이은 지속된 연구의 결과가 위 기사보도처럼 문화계에서 이미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눈을 넓혀 고려연합이라는 광주리에 유럽사와 구텐베르크를 넣을 수는 없었을까?

고려연합이라는 국가 속에 카톨릭이란 종교조직을 넣고 볼 수는 없었을까.

그러한 역사계가 아닐지라도 사회문화적인 눈은 언제쯤 뜨이는 것일까?

그렇더라도 한반도 역사의 질곡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듯 발전하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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