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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와 자명종(問辰鍾:鬧鐘)으로 본 역사
글쓴이:한부울
1. 소화기(消火器)서양역사와 삼한역사와의 간격
2. 자명종(自鳴鐘)역사가 주는 불편함
3. 정리
1. 소화기(消火器)서양역사와 삼한역사와의 간격
a. 소화기의 손잡이를 잡고 화재 현장으로 가져간다.
b. 바람을 등진 채 호스를 화점으로 향하게 한다.
c.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안전핀을 뽑는다.
d. 호스를 왼손으로 잡고 호스 끝을 화재 쪽으로 향하게 한다.
e. 불의 아래쪽에서 마당의 비를 쓸듯이 뿌린다.
위는 현대 청정소화기로 알려지고 있는 할로겐간 화합물(interhalogen compounds:HCFC-123)소화기까지 등장한 시대의 우리가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소화기(消火器:fire extinguisher)에 대한 사용법을 간단하게 게시한 것이다.
소화기라는 것은 과학적인 발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문명이기(文明利器)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반도 역사를 감안하면 조선시대 때 소화기의 역사에서 서양보다 한참 뒤처졌을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혹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과연 소화기란 개념이라도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일까 궁금하여 따져 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조선시대 사회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화재를 대비한 구화조건이 완벽하며 놀라울 정도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시기적으로 따진다면 최초의 소화기가 1723년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 암브로스 고드 프리(Ambrose Godfrey)에 의해 특허가 주어졌을 때 보다 훨씬 빠른 1530년 중종(中宗:25)의 명에 의해 이행·윤은보·신공제 등이 펴낸 관찬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선이 이를 선행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야 옳다.
그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금제(禁制)】편
“○ 금화(禁火)하는 공사 각처에는 모두 저수하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방목토가(防木土架)와 구화기계(救火器械)를 준비하여 둔다.”하고 있다.
금화(禁火)편에 보면 “병조ㆍ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와 5부(部)의 당직 숙직하는 관원들이 순행하면서 금화한다. 궁궐 안에 화재가 나면 큰 종을 치든가 대신 호각[螺]을 부는데 궁궐에 있는 자는 뛰어가서 구원하되, 장병[將卒]은 당직 장소를 떠나지 않으며, 번에 나간 장병들은 각기 본위(本衛)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은 각각 그 조방(朝房)에 모이며 여러 관청의 인원과 공장(工匠)들과 5부 방리의 사람들과 번에 나간 별감과 각 차비인(差備人)들은 모두 궐문 밖으로 가서 대령한다. ○ 여러 관청을 모두 5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구화패(救火牌)를 주는데, 그 부 안에서 불이 나면, 병조ㆍ형조ㆍ한성부ㆍ의금부ㆍ금화사의 관원들이 부속(部屬)의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구원한다. ○ 의금부에서는 망화인 나장(望火人羅將)을 정하며, 여마(輿馬)·구목 및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사복시(司僕寺) 또는 군기시(軍器寺)의 종은 항상 종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이궁(離宮)이나 관청에서 불이 나면 종을 치며 사가(私家)가 연소(延燒)되어도 종을 친다. ○ 바람이 어지럽게 불면 금화사(禁火司)에서 방리(坊里) 각 호에 목탁을 흔들면서 순찰 경계한다.”라고 되어 있다.
公私各處 並開貯水坎 置防火土架救火器械
또한 “공사 각처에 모두 물을 저장하는 구덩이를 파고 화재를 방지하는 흙더미와 구화기계를 비치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화재가 났을 경우 관원들이 불을 끄는 작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지급한 증명패(證明牌) 혹은 구화패(救火牌)는 화재를 틈 타 도적들이 약탈을 자행할 우려가 있으므로, 불을 끄는 관원에게 구화패를 지급함으로써 신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금화조건(禁火條件)이라 함은 조선시대 특히 한성(漢城)의 부내(府內)나 각 궁궐의 화재를 예방하고 화재가 났을 때 효율적으로 불을 끄기 위해, 평소 미리 대비하여 관리들이나 군대, 백성들의 진화(鎭火)에 대한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 조직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화재는 조심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그 금화조건을 아래에 나열합니다 하여 첫째 구화(救火)하는 사다리인 제자(梯子) 및 저수기(貯水器)·급수구(汲水具)는 공조(工曹)로 하여금 적당하게 만들어 궐내의 각처에 적당한 곳에 두고 저수(貯水)하여, 번(番)을 든 지킴이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 뜻하지 않은 근심을 대비하고, 급수인(汲水人)은 형조(刑曹)로 하여금 정하게 하며, 둘째 만일 궐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장루자(掌漏者)는 불을 끌 때까지 종을 칠 것이며, 입직별감(入直別監)·소친시(小親侍)·방패(防牌)·근장(近仗)·사옹(司饔)·각색장(各色掌)·내시(內侍)·다방(茶房)·행수(行首)·견룡(牽龍)들은 불을 끄며, 그 밖의 군사들은 직소를 떠나지 아니하고 각기 그들의 소임을 지킬 것이며, 굳게 각 문을 지키고 승명하는 자 외에는 출입을 허락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증명패(證明牌), 구화패(救火牌)를 구화인들에게 지급하는 것이나 출입을 막는 것은 화재로 인해 귀중품의 도난을 막으려 했던 것이므로 사고 후도 생각한 것이다.
이미 중종 1530년경에 불 끄는 사다리인 제자(梯子) 및 물을 저장하는 기구 저수기(貯水器)·물을 뿌리는 급수구(汲水具) 등을 만들어 사전에 예방하면서 구화 즉 소방조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세계 제일이 아니겠는가 한다.
그 뒤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은 국조보감, 그리고 승정원일기에 수총(水銃), 수총기(水銃器), 수총거(水銃車)을 사용한 기록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 수총(水銃)을 한국고전번역원 주석에서 소화기(消火器)의 일종이라 하였다.
이제부터 조선이 사용한 소화기의 기록들을 한번보자.
(1)조선왕조실록 경종 3년 계묘(1723) 5월 25일(계묘)
관상감에서 서양국의 수총기를 만들 것을 계청하다
○觀象監啓請製西洋國水銃器, 上從之。 本監官員許遠, 入往燕中得來, 乃救火災者也。 仍令各軍門造置, 地部以經用匱乏, 請待年豐, 上亦許之。
관상감(觀象監)에서 서양국(西洋國)의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본감(本監)의 관원(官員)인 허원(許遠)이 연중(燕中)에 들어 갔다가 가져온 것으로 화재(火災)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어 각 군문(軍門)에 영을 내려 만들어서 비치하도록 하였는데, 지부(地部)에서 경비가 바닥이 났다며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만들자고 청하니, 임금이 역시 허락하였다.
(2)국조보감 제56권 / 경종조
3년(계묘, 1723)
○ 8월. 문신종(問辰鐘)과 수총(水銃)을 제조하도록 명하였다. 이 두 기기는 모두 서양에서 새로 만든 것인데, 종은 밤낮의 시각을 알려주는 것으로 흐리거나 비가 올 때라도 추측하기 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청(淸) 나라가 진하사(陳賀使)를 인하여 우리 나라로 보낸 것이다. 총은 물을 끌어 아래에서 위로 올려주는 것으로 불을 끄는 데 편리한 것이다. 이것도 관상감 관원이 중국에서 얻어 가져온 것이다. 아울러 관상감에 내려 견본대로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3)승정원일기 602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 10월 12일 병자 17/37 기사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수총(水銃) 1본(本)을 만들어 들인다는 호조의 계
○ 又以戶曹言啓曰, 頃因觀象監啓下牒呈, 彼中覓來水銃, 徐待秋成擧行事, 草記蒙允矣, 一本, 自本曹, 今始造成內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또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지난번에 관상감에 계하한 첩정으로 인하여 저들이 요구하는 수총(水銃)을 추수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가 거행하도록 초기(草記)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1본(本)을 본조에서 이제 만들어 궐내로 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위(1) 부터 (3)사서기록은 1723년을 동시에 같은 기록으로 보이고 1725년 승정원일기까지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같다.
먼저 (1)기록을 보면 관상감(觀象監)에서 서양국(西洋國)의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다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계청이라는 것은 임금께 아뢰어 청(請)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때는 1723년이고 관상감(觀象監)이라는 곳은 조선시대 때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曆數), 점산(占算), 측후(測候), 각루(刻漏)등의 수리천문과학을 담당하던 관청(官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서양국(西洋國)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수총기를 만들 수 있는 재원들이 집합된 곳으로써 임금께 만들 것을 청했다는 이야기다.
조선에서 이러했다면 서양국(西洋國)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살펴보았다.
The first fire extinguisher of which there is any record was patented in England in 1723 by Ambrose Godfrey, a celebrated chemist at that time. It consisted of a cask of fire-extinguishing liquid containing a pewter chamber of gunpowder. This was connected with a system of fuses which were ignited, exploding the gunpowder and scattering the solution. This device was probably used to a limited extent, as Bradley's Weekly Messenger for November 7, 1729, refers to its efficiency in stopping a fire in London.
In 1723, in England, the first fire extinguisher was patented by chemist, Ambrose Godfrey. It used a fire-extinguishing liquid and gunpowder.(수류탄형 소화기:Un estintore in vetro tipo “bomba a mano)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소화기는 1723년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 암브로스 고드 프리(Ambrose Godfrey)에 의해 특허가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화약의 땜납 챔버(chamber)를 포함하는 소화액통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점화 된 화염시스템과 연결되어 화약을 폭발시켜 소화액을 분산시키는 장치이며 이 장치는 1729년 11월 7일 브레들리 위클리(Bradley's Weekly)에 의해 런던에서 화재를 막을 수 있는 효능에 대한 것만 알리기 때문에 아마도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고 있다.
1723년이라면 조선시대 수리천문과학 관청인 관상감에서 임금에게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청하는 시기와 똑 같은 년도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양국에서 최초로 소화기를 발명했다는 똑 같은 년도에 조선 관청에서 이와같은 소화기를 만들 것을 임금께 청한 것이다.
이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소화기란 문명기기에 대해 공유했다고 보아야 옳다.
이와 동시에 의문스럽게 하는 것은 조선사서기록에서 왜 영국이라고 하지 않고 서양국이라고 하였을까 하는 물음이다.
분명 영어 자료에는 영국 유명한 화학자에 의해 개발된 소화액통점화시스템의 장치가 분명함에도 영국이라고 하지 않고 서양국(西洋國)이라고 그냥 막연하게 지칭하고 기록했을까 하는 의문이 대단히 크게 부각된다.
무엇 때문에 그 잘난 영국(英國)을 영국(英國)이라고 조선실록에서는 칭하지 않았을까?
무엇을 알리기가 두려워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후세 편집자들의 장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시기에 영국이라 함은 당시 하노버 왕가의 시조(始祖) 조지1세(George I,1660-1727,재위:1714-1727)때이며 1720년경에 잉글랜드 즉 영국회사의 시장점유율은 네덜란드에게 압도당했을 때이므로 당시 영국의 힘이 빠졌을 때이다.
그리고 이시기는 영국이란 주체가 역사전면에 나설 수 없었을때이지 않는가 한다.
조선은 경종(景宗,1688-1724,재위:1720-1724)때이다.
이 경종을 본 블로그 글 "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에서 도팽 루이(le Grand Dauphin, 1661-1711)과 대비한 적이 있다.
즉 부르몽가의 대비였던 것이다.
루이15세는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8),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7년전쟁(1756-1763)까지 전쟁에 휩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반면에 조선 영조는 정미환국(丁未換局,1727), 이인좌난(李麟佐亂,1728)이 있어 이 역시도 평탄치 못했음도 알 수가 있었다.
특히 숙종 부터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서 볼 때 소론(少論)은 프랑스가 되고 노론(老論)은 프랑스와 반대세력이 된다고 하였고 그래서 숙종이후 소론은 늘 노론에게 밀린다고 풀이 했다.
노론이 경종을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과 즉위 후 신사옥사에 의한 모친 장희빈의 왕비책봉문제와의 갈등, 신임사화(辛壬士禍) 또는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즉위 1년 후인 1721년부터 다음 해 1722년까지 당파인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 대리청정과 치세와 독살설 등이다.
물론 이것들은 왕위계승전쟁과 비슷하다.
잉글랜드 조지1세 역시 선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54세의 나이에 영국 왕에 올랐고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으며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알려진다.
그는 점차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됐고도, 1721년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에게 전권을 줘 각의를 주재하게 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Primius inter pares, the first in equals)이라는 개념이 생겼으며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지며 이 조지1세 역시 1727년 6월 11일 당뇨 합병증의 원인으로 서거한다.
개략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경종과 조지1세의 재위기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서거과정도 갑작스럽게 맞이한다는 사실, 그리고 중요한 하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중에 하나가 하노버 선제후국이라는 사실과 1714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가 영국 왕 조지 1세(George I)로 즉위해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이루었다는 사실들은 동부사건으로 치부되는 면이 많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상속 문제가 컸던 것 같다.
이시기에 하노버왕가와 부르몽왕가에 대한 위상정도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부르몽 왕가루이14세부터 16세까지)위세는 컸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솔직히 한성부가 런던이라 하지 않더라도 런던과 한성부는 거의 가깝게 동서(東西)에서 공존하고 한성부 서쪽에 런던이라는 영국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크다.
이를 생각하면 황당함, 오묘함이 그 자체이다.
만약 이런 정보 유통이 가능했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대단한 국가체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당시 영국도 조선 권내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자. 소위 산업혁명 이후 통신 정보가 아무리 빨라도 유럽과 동아시아대륙 항해거리가 거의 30,000km가 넘는데 영국의 소식을 같은 동 시간에 바로 소식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문명기기 발명품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거의 같은 공간과 시간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서양국이라는 주체가 새로운 과학 문명이기를 발견하고 발표가 되면서 동시에 조선이 그 정보를 알아 임금에게 동일하게 만들 것을 청하고 요구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인 간격을 현 동아시아대륙 극동이라는 프레임과 유럽대륙이란 공간 사이에는 도저히 설명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계삼한역사관을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쉽게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首個現代滅火器由英國人佐治·孟比(George Manby)於1816年發明。當時的設計是使用銅罐,內藏壓縮空氣及3加侖(約7公升)碳酸鉀溶液。19世紀末起開始使用碳酸—硫酸滅火器。內藏的滅火劑主要為碳酸氫鈉(即小蘇打)溶液,另一小容器內則為硫酸。使用時將小容器打破,兩者混合後產生二氧化碳的壓力將溶液推出。
그 이후 소화기 발달은 계속되는데 위 신중국 자료에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처음 현대에 사용되는 소화기와 비슷한 장비를 개발한 사람은 1816년 영국의 군인 조지 만비 대령이었는데, 그의 소화기는 3 갤런짜리 구리용기에 진주회(眞珠灰:탄산칼륨(Potassium Carbonate,K2CO3)를 담고 공기를 압축해 넣은 형태였고 그 소화기에는 아랫부분에는 탄산칼륨이 있었으며 윗부분에는 압력공기가 있었기에 탄산칼슘을 뿌릴 수 있었다고 설명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은세계삼한역사관점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 한 것이다.
그 이외 얼마나 놀라운 과학적 발달을 이루었는지 아래 경세유표의 기록을 알 수가 있는데 참고하기에 그만이다.
Em 1881 Almon M. Granger patent, the United States gives America, or fire extinguisher based on sodium bicarbonate and sulfuric acid
경세유표 제2권 / 동관 공조(冬官工曹) 제6
사관지속(事官之屬)
이용감(利用監) : 제조 중대부 1인, 첨정 상사 2인, 별제(別提) 중사 2인, 학관(學官) 하사 4인.
서리 2인 조례 8인.
提調及僉正二人。以精於數理者擇差。其別提二人。以有目巧手巧者爲之。其學官四人。就司譯院觀象監。極選其精於數理。嫺於官話者。各取二人。歲入北京。或行貨以購其法。或厚價以購其器。凡安炕燒甓造車造器鍊鐵鍊銅燔瓦塼瓷。以至引重起重解木解石轉磨轉碓取水代耕風磑輪激之法。虹吸鶴飮之制。諸凡農器織器兵器火器風扇水銃。以至天文曆法所需儀器測器。凡係實用之器。無不傅學。歸而獻之於本監。本監聚巧匠。按法試造。其有成效者。提調及工曹判書。考工課最。或授以牧官察訪。或授以縣令郡守。其有大功者。陞之爲南北漢副使。或錄用其子孫。則不出十年。必有成績而國富兵強。不復見笑於天下矣。
제조 및 첨정 2자리는 수리에 밝고 익숙한 자를 택해서 차임(差任)하고, 별제 2자리는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자를 시키며, 학관(學官) 4자리는 사역원(司譯院)과 관상감(觀象監)에서 수리에 정통하고 관화(官話)에 익숙한 사람 각각 2명을 엄선하여 해마다 북경에 들여보내어, 돈을 사용하여 그 방법을 구하거나 또는 넉넉한 값으로 그 기구를 매입할 것이다. 무릇 구들 놓기, 벽돌 굽기, 수레 만들기, 그릇 만들기, 쇠 불리기, 구리 불리기, 기와ㆍ벽돌ㆍ자기(磁器) 굽기에서 무거운 것을 끌어당기기, 무거운 물건 들어올리기, 나무 켜기, 돌 켜기, 멧돌ㆍ방아ㆍ물방아 찧기, 바람으로 멧돌돌리는 법과 홍흡(虹吸)ㆍ학음(鶴飮) 따위 제도와 모든 농기구ㆍ직기ㆍ병기ㆍ화기ㆍ풍선ㆍ물총[水銃]에서 천문역법에 소용되는 의기(儀器)ㆍ측기(測器) 등 실용에 관계되는 모든 기구는 전습(傳習)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여 돌아와서 본감(本監)에 바치면 본감에서는 솜씨 있는 공장을 모으고 그 법을 상고하여 시험삼아 제조한다. 그리하여 성과가 있는 자는, 제조와 공조 판서가 만든 것을 고찰하고 으뜸으로 된 자는 감목관(監牧官)이나 찰방(察訪)을 제수하거나 또는 현령이나 군수를 제수한다. 그리고 큰 공이 있는 자는 승격(陞格)해서 남ㆍ북한 부사(南北漢副使)로 삼으며, 그 자손을 녹용(錄用)한다.
위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국정(國政)에 관한 일체, 행정 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토지제도·부세제도의 개혁에 대해 논한 책, 정약용이 1808년(순조 8년) 유배지 강진군에서 짓기 시작하여 1817년(순조 17년) 집필을 끝냈다.
이와 같이 하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며,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도 강해져서 다시는 천하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참으로 조선은 미래를 위해서도 과학을 연구하고 문명이기들을 재빨리 제조하면서 사회전반에 걸쳐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 자명종(自鳴鐘)역사가 주는 불편함
두 번째로 볼 문명이기는 자명종이다.
자명종(自鳴鐘) 또는 알람시계(alarm)는 사람이 지정한 날짜 및 시간에 소리가 울리도록 만든 시계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1723년(AD)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만들게 함과 동시에 그해 10월에는 서양국(西洋國)의 문신종(問辰鍾)을 관상감(觀象監)에 내려 새로 만들게 하였으며 이것은 진하사(進賀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돌아올 때에 청(淸)나라 임금이 우리나라에 보낸 것이라 하였다.
새로만들게 했다는 것은 기존 자명종도 있었지만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 제조케 했다고 이해해야 맞다.
문신종(問辰鍾)이라 함은 일종의 탁상시계로 누르면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는 동양명칭의 기기이다.
참 이상하지 않는가.
서양국과 가까이에 접하고 있을 것 같은 청나라는 도대체 그 실체가 무엇인가.
위 글에서 문신종을 청나라가 서양국에서 받아 다시 조선에 주었다면 청나라와 서양국은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닌가.
또한 서양국을 청나라고 한들 이상할 것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77년과 1801년 등 몇 차례에 걸쳐 일본 사신들이 조선에 일본 자명종을 선물한 기록이 보인다고 하였지만 이미 자명종(自鳴鐘)은 아래 자료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17세기 1631년에 명나라에서 들여왔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동양사에서는 이야기 하는 명나라의 정체가 의심되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631년(인조 9) 7월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로 갔다가 서양사람 육약한(陸若漢)에게서 선물로 받아왔다는 기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자명종 전래에 관한 기사라 하였고 이 시계는 전래 당시에는 시제(時制)가 맞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었던 것 같으며 당시에 쓰고 있던 시제는 1일이 100각이었지만, 서양법에 따른 이 시계에 적용되는 시제는 96각이었던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서양인이라는 것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동양사에서 자세히 따져보면 동양사이기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곧잘 서양인이라는 표현이 난무한다.
이 사실에도 어색하기가 그지 없는 이야기다.
또한 김육(金堉)의 잠곡필담(潛谷筆談)에 “서양 사람이 만든 자명종을 정두원이 북경에서 가져왔으나 그 운용의 묘를 몰랐고, 그 시각이 상합(相合)됨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1636년에 김육이 명나라에 가서 자명종을 보았으나 그 기계의 원리와 운용의 묘를 몰랐다는 것으로 보아 그 사용방법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라고 되어 있다.
쉽게 구조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 <잠곡필담>에 의하면 “효종 때에 밀양사람 유여발(劉與發)이 일본상인이 가지고 온 자명종에 대하여 연구한 끝에 그 구조를 터득하였는데 기계가 돌아가면 매시 종(種)을 친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여발은 우리나라에서 자명종의 원리를 처음으로 체득한 사람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자명종을 제작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1669년(현종10)10월에 천문학교수 송이영(宋以頴)이 자명종을 만들었다는 현종실록의 기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17세기인 1631년에 명나라에서 들여왔다고 되어 있다는 사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715년(숙종14) 4월 관상감 관원 허원(許遠)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자명종을 본떠서 새로운 자명종을 만들었다는데 이것으로 보아서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기계시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외 자료에서도 조선(朝鮮)에서도 앞서 기술한 것처럼 1669년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頴)등이 보다 복잡한 자명종을 만들었다는 것은 명나라에서 만든 것 보다 더 세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723년에는 청나라에서 가져온 자명종을 복제해 문신종(問辰鍾)을 만들었다 했으며, 1731년에는 최천약(崔天若)이 자명종을 만들었다고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759년에 홍대용은 나경적(羅景績:1690-1762)이 만든 자명종 후종(候鐘)을 자신의 천문대 농수각(籠水閣)에 설치했고 또 친구였던 황윤석과 함께 1772년 2월에는 염영서(廉永瑞)라는 사람이 만든 자명종을 구경하러 갔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였다.
그리고 1759년에 만든 후종(候鐘)은 자명종이라고 하고 있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한자 후(候)는 기후나 계절 또는 5일간의 날씨를 말하는 것이라 할 때 오늘날 날씨예보의 성격이 큰 것이며 후종(候鐘)을 제작하여 천문과 과학을 연구하였다는 것은 천문시계(Astronomical clock)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기술이 점점 발달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 상황이 이렇다 하면 실제로 서양국에서는 어떠했는지를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In China, a striking clock was devised by the Buddhist monk and inventor Yi Xing (683–727). The Chinese engineers Zhang Sixun and Su Song integrated striking clock mechanisms in astronomical clocks in the 10th and 11th centuries, respectively. A striking clock outside of China was the water-powered clock tower near the Umayyad Mosque in Damascus, Syria, which struck once every hour. It was constructed by the Arab engineer al-Kaysarani in 1154. In 1235, an early monumental water-powered alarm clock that "announced the appointed hours of prayer and the time both by day and by night" was completed in the entrance hall of the Mustansiriya Madrasah in Baghdad.
중국에서는 불교승려이자 발명가인 장수(张遂)가 시계를 고안했고 중국 기술자인 장사훈(張思訓:Zhang Sixun)과 소송(蘇頌,Su Song:1020-1101)은 10세기와 11세기의 천문시계에서 눈에 띄는 시계 메커니즘을 통합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중국 밖에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부근의 수력시계탑으로 한 시간에 한 번 종을 쳤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1154년 아랍 기술자 알 카이 사라니(Al-Kaysarani)에 의해 세워졌다 하였으니 아랍인들의 문명기기 발달은 대단한 것이었음도 알 수가 있다.
또한 1235년에 기도시간이 정해진 시간을 밤낮으로 알려주는 수력에 의한 알람시계(water-powered alarm clock)는 바그다드에 있는 무스탄시리아 마드라샤에 있다고 한다.
From the 14th century, some clock towers in Western Europe were also capable of chiming at a fixed time every day; the earliest of these was described by the Florentine writer Dante Alighieri in 1319.The most famous original striking clock tower still standing is possibly the one in St Mark's Clocktower in St Mark's Square, Venice. The St Mark's Clock was assembled in 1493, by the famous clockmaker Gian Carlo Rainieri from Reggio Emilia, where his father Gian Paolo Rainieri had already constructed another famous device in 1481. In 1497, Simone Campanato moulded the great bell (h. 1,56 m., diameter m. 1,27), which was put on the top of the tower where it was alternatively beaten by the Due Mori(Two Moors), two bronze statues (h. 2,60) handling a hammer.
14 세기부터 서유럽의 시계탑 중 일부는 매일 고정 된 시간에 종이 울렸다. 이 중 가장 초기의 것은 피렌체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에 의해 1319년에 묘사 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여전히 가장 유명한 원래 인상적인 시계탑은 아마도 베니스의 세인트 마크 광장의 세인트 마크 시계탑(St Mark's Clocktower)이 그것이라 하였는데 아래에 나타난다.
이 시계는 1493년에 이탈리아 북부도시 레지오 에밀리아(Reggio Emilia)의 유명한 시계 제작자 지안 카를로 레이 니 에리(Gian Carlo Rainieri)에 의해 조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지안 파올로 레이니에리(Gian Paolo Rainieri)는 1481년에 또 다른 유명한 장치를 이미 만들었다 하고 1497년 시몬느 캄파 나토(Simone Campanato)는 탑 꼭대기에 놓인 큰 종(높이 1.56m, 직경1.27m)주조성형하였으며 두에 모리(두 무어흑인)가 망치를 휘두르는 두 개의 청동상(h.2,60)을 놓았다고 했다.
모양은 아래와 같다.
[그림비교]Horologivm Venetiarvm In Platea Divi Marci-Francisco de Holanda(Álbum dos Desenhos das Antigualhas)The clocktower in c. 1538-40, as drawn by Francisco de Holanda
위 그림에서 잠시 비판할 것이 있다.
이탈리아인 시몬느 캄파 나토(Simone Campanato)가 1497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북쪽에 있는 시계탑을 설치한 원본 그림과 현재 사진을 비교해 보면 완전히 다른 건물처럼 보이는 것인데 이것은 본래 유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는 광경들이다.
위 그림3가지를 비교 원본과 다른 것을 체크해 보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결론에 이른다.
현 유럽 유물들이 전부 이렇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길 권유하고 싶다.
An early prototype of the alarm clock was invented by the Greeks around 250 BC. The Greeks built a water clock where the raising waters would both keep time and eventually hit a mechanical bird that triggered an alarming whistle.
알람 시계의 초기 프로토 타입(원형)은 기원전 250 년경 그리스인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말해지고 그리스인들은 물을 길러서 물을 길러주고 결국 기계적인 새를 치면 놀라운 호각이 울렸다고 한다.
User-settable mechanical alarm clocks date back at least to 15th-century Europe. These early alarm clocks had a ring of holes in the clock dial and were set by placing a pin in the appropriate hole.
하여튼 위 영어자료에는 사용자가 설정할 수 있는 기계식 자명종 시계는 적어도 15세기 유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 초기 자명종은 시계 다이얼에 구멍이 뚫어 구멍에 핀을 꽂아 넣었다고 되어 있다.
Another mechanical alarm clock was created by Levi Hutchins, of New Hampshire in the United States, in 1787. This device he made only for himself however, and it only rang at 4 AM, in order to wake him for his job.
다음에 나타나는 자료는 15세기유럽시대때 자명종 발명사실들을 빼버린 듯한 것이 나타나 다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아래 같은 사실이 발견되고 찾아진다.
첫 기계적 자명종이 1787년에 미국 뉴햄프셔 주(New Hampshire) 콘코드(Concord)출신인 레비 허친스(Levi Hutchins:1761-1855)가 발명하였다는 것은 공히 나타나는 사실이다.
이 장치는 그에게 맞춰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를 깨우고 일을 시작하게 만들기 위해 새벽 네 시에만 종이 울리게 하였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견이 있는데 영국시계제작자들은 18세기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들어 1787년에 최초 자명종을 발명했다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 보다 더 이른 시기에 자명종 발명사실들은 독일과 영국에서 선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미국이 최초가 아니라 독일과 영국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유럽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것에 대표적인 것이 15세기에 뉘른 베르그(Nuremberg)에서 만들어진 청동 종으로 된 독일 철 벽시계라고 하며 오픈 프레임 워크 구조로 19 인치(inch)높이의 시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1500년대의 알람시계로는 미국 역사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The Clockwork Universe: German Clocks and Automata 1550-1650"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도 왜 미국박물관에 소장되고 있을까?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과 대입하면 자명종(自鳴鐘)이 17세기 1631년에 명나라에서 들여왔다고 하는 기록에서 위 사실에 맞출 때 역사 개연성을 얻을 수가 있다.
사실상 이러한 반론이 없었다면 조선이 기술한 도입한 시기와 서양국의 기술이 처음 들어난 시기가 일치하지 않아 최초란 공백에서 역사상호관계 결정을 유보해야 한다고 망설려지는 상황이었으니 다행히 명확해 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일과 영국을 명조(明朝)라고 해서야 욕을 먹을 소리가 아닌가.
본 블로그에서 최근 글에서도 밝혔지만 유럽국가들은 근세기에 생성된 명칭임을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랄 뿐이다.
어쨌던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 후 프랑스의 발명가 안토니 레디어(Antoine Redier:1817-1892)는 1847년에 처음으로 수정이 가능한 기계적 자명종에 대한 특허를 제출하여 득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alarm clock. alarm clock inventor Antoine Redier
그렇다면 조선에 자명종 기술이 들어 온 시기는 대체로 17세기로 나타나지만 조선사서에서 서양국을 독일인지 또는 영국인지 명확하게 기술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분명하게 세계삼한역사관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당시 중국이라고 하는 명조(明朝)는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 할 수 있으며 합스부르크왕가(1438-1740)를 중심으로 한 주체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과학자들이 천문기계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조선과학자라 함은 기어코 동양인만을 한정시켜 볼 수 없다는 상황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은 경종(景宗,1688-1724,재위:1720-1724)과 또한 대입되고 연결되는 이야기다.
그 시기는 오늘날 동아시아대륙 역사가 그러하듯이 1644년에 멸망한 명조(明朝)에도 혼란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대입할 수 있고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대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30년 전쟁(1618∼1648)이라고 하는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 벌어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시기이다.
물론 자명종이란 특수한 기술을 전수받았던 곳은 다름 아닌 페르시아 아랍권역으로써 서양국인 유럽이 아니라 아랍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자명종이 발달한 것은 아랍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 역시 신성로마제국과 연결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근대사 한반도 한국판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개국(開國)이전에 이미 국산화한 자명종을 보급하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한 체 일본으로부터 불평등 조약,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면서 개국(開國:1876)을 맞이했다고 매몰차게 몰고 있다.
이 자료는 또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1898년에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1901년과 1902년에는 자명종 광고가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는 자명종이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 역사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소화기(消火器)서양역사와 삼한역사와의 이상한 간격을 알아보았고 또한 조선이 받아들이는 자명종(自鳴鐘)역사가 주는 불편함도 함께 알아보았다.
주요한 것은 당시 조선은 서양국과 가까운 곳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조선과 서양국이 왜 근접하여 서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을까 하는 답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안된다.
기존 역사사실을 대입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왜 조선과 서양국은 서로 과학 기술을 공유하며 공생공존하려 했을까?
하나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 밖에 서쪽에 있는 도시에 사는 서양인들이라고 할 때 그들의 소속은 하나의 체제속에 존재해야 했던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들의 기술이 조선에서 필요할 때 즉시 공급하고 그것에 대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은 많은 문물을 공개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체제였으며 상대적으로도 공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공급하고 공유하려 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그것에 인종이나 문화, 종교 따위에 편견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고 해야 맞다.
많은 조선인들은 세계문화국으로써 부끄럽지 않기 위해 가슴을 열고 연구하고 지식을 구하였으며 그것을 조선사회 발달에 총력을 기우렸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수도 한성부는 대단한 도시였다.
모든 구화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개시하여 알았지만 철저한 사회 위기 시스템을 세세하게 갖춘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스스로가 하는 자학의 역사는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은 것이 올바른 것이며 더 나아가 정신건강에도 좋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좋은 역사를 열도일본인처럼 분에 넘치게 만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올바르게 보아야 하는 원칙만으로도 이렇듯 어느 민족에게도 부족하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무일한 역사문명국으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장 소화기와 자명종을 선정하여 세세하게 살펴보았지만 모든 역사의 흐름은 우리의 역사가 주도를 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가 있었으며 몰라서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사실들을 우리는 명쾌하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 보다 더 무엇을 우리가 요구하겠는가.
우리가 역사를 몰라 자학하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역사를 탓해서야 되겠는가.
바로 알면 이렇듯 도저히 자학할 수 없는 빛나는 세계의 역사 그 자체임을 어찌 글쓴이만 알고 말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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