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정조론으로 본 서구와 일본역사의 동질성

한부울 2018. 2. 18.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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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론으로 본 서구와 일본역사의 동질성


글쓴이:한부울


1)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굴레
2) 서세 식민주의와 생물학체계의 역할
3) 서구세력 등장과 일본역할

4) 서세 대리국의 정조론
5) 일본과 친일성향의 생물학자

6) 유럽역사와 조선의 운명
7) 미국(米國)과 정조론

8) 정리


1)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굴레


뉴욕시 록펠러 센터의 GE 빌딩(GE Building)에 본사를 두고 1926년부터 라디오방송을 시작하여 1938년 TV 방송을 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방송사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의 한 해설자가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중계에서 일본선수단이 들어오자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강점했던 국가지만, 모든 한국인은 발전 과정에 있어 일본이 문화 및 기술, 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라는 되먹지 못한 이야기를 하여 한국인들의 대다수의 가슴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 같은 발언은 뉴라이트 개념인사들이 떠벌리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발언은 열도일본인들을 옹호한 것이라 하기보다 미국외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가 주도한 동양 일본서구화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18세기말부터의 산업혁명과 이은 서양선진문화기술경제까지 일본을 통해 전수된 사실을 말하고 싶다는 서양지식인들의 기본 사고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어쩜 미국지도자 대부분이 이와같은 생각을 공통적으로 할 것이란 판단을 한다.

결국 이 발언 속에는 그들이 주도한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으며 자본제국주의에서 나올 수 있는 나름대로 정제된 발언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계올림픽을 조심스럽게 치루고 있는 주인 잔치 상에 재를 뿌리는 망언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쌓기에 충분했다.

한국인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NBC 는 해설자 조슈아 쿠퍼 라모(Joshua Cooper Ramo:1968-)를 퇴출했다고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이러한 조치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배운대로 술회한 것인데 자신은 퍽 억울해 할 것 같다.

이 사람은 유대 자본의 단체 국제컨설팅 회사 키신저협회의 공동 최고경영자이자 부회장이며 다국적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와 미국의 운송 업체 페덱스(FedEx)의 이사직을 가지고 있는 저명한 인물이다.

정말 아무데나 눈치없이 떠벌리는 사리분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무지한 사람은 아니란 말이다.

또한 미래 미지의 권력과 부(富)를 깨울 새로운 본능을 제안하는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The Seventh Sense : Power, Fortune, and Survival In the age of networks>의 저작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충분히 옳고 그름의 판단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어 어쩜 계산된 발언일 수 있고 최근 북한문제와 위안부문제로 우리정부와 정치적 갈등이 있는 열도일본 우익분자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서양역사관 자체가 그러한 발언을 쉬 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고는 아마도 그가 매우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밝혀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쨌던 간에 한반도 식민지 역사는 비록 타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반도 한국인들이 쉬 빠져 나올 수 없는 암흑같은 늪이고 깊고 깊은 함정이며 우리 후손들도 싫으나 좋으나 언제까지나 도리 없이 가지고 가야할 짐덩어리고 치욕이며 멍에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열도일본인들에게 받은 모열감이나 치욕들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식민지역사는 굴레가 되어 우리 스스로 도저히 없앨 수 없는 트라우마이고 가슴앓이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한반도 식민사관은 우리 대에서 마무리하지 못한체 또 다시 후손들에게까지 짐을 물려 줘야 할 고통스러운 것이 틀림없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잊을 만하면 매번 이런 모욕적인 망언들을 한반도 인 전체가 아무런 항의도 못한체 숙명처럼 듣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진정 알려하지 않고 모른다고 해서야 어떻게 구렁텅이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겠는가.


2) 서세 식민주의와 생물학체계의 역할


위 식민지발언을 아무렇게 할 수 있는 서구인들의 심리는 우월심리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동양사람이니까, 아시안이니까 아무렇게나 말을 던져도 될성 싶은 것이다.

서구세력이라 함은 하나의 체제에서 피지배 민족 중에, 바스크(Vasco)귀족 가문 출신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anctus Ignatius de Loyola,1491-1556)가 만든 예수회를 기반으로 15세기부터 준동한 해양세력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정확하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들 조상은 해적이고 범죄자일뿐이다.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 없음에도 근대사가 그들을 자랑스럽도록 만든 것에 불과하다.

당시 그들의 기록에는 마치 세상이 무법천지처럼 묘사하였지만 세계 다양한 문화와 종교들을 융합하고 들어나지 않게 은유하며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윤리와 덕을 표방하는 정치로 세계를 통치하던 '하나의 체제'가 존재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러한 체제에 반한 비주류집단이며 관리가 느슨하고 허술한 외곽지 또는 도서(島嶼)를 찾아 주로 그들의 자본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일삼던 무리들로써 이를 서양제국이라 하지만 서구세력이라고 하는 것이 맞고 이들은 오늘날 유럽연합체제형태를 갖추고자 한 세력으로써 나름대로 예수회가 주창하는 교리를 기본으로 조직적 활동을 하던 세력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서구세력들이 만든 근대사 전체가 허구라고 하는 주장은 동양인이 아니라 러시아 수학자 입에서 나온 말이다.

러시아의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 저서에서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고,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음모라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예수회가 파견한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탐험가로 지리학자연구자로, 생물학자, 그리고 지도연구가로, 좀 더 적극적인 예수회 선교사로 곳곳에 드나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솔직히 근대사를 무한정 신뢰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들을 미화하고 본질과 다르게 치장하였던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사건과 다른 이야기가 우리의 상식이 되었다고 본다.

어쨌거나 예수회가 주도하는 서세들이 끝내 망가뜨려 놓은, 비록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의 체제"가 당시 관리하는 규정이나 규칙들에 의해 자유로울 수 없었음이 분명하여 신분으로 위장했어야 했고 각 지역들을 마음대로 활동하기에는 제약들이 많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때문에 그 제약을 벗어나려 애를 썼고 그들 구성원들은 거의 해적신분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그들이 선구자처럼 또는 스스로 탐험가, 연구가으로 둔갑해가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국제법도 그렇지만 엄격하기는 더했을 당시의 해적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도적이고 범죄자이다.

그들이 숨어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뿌리를 내리려 했던 것으로 약탈과 침탈, 노략질, 모자라면 살인까지 기본적인 행위로 삼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561년 교황비오4세(Pope Pius IV)의 승인에 의해 창설된 '성 스테파노 기사단(Order of Saint Stephen)'은 어떤가.
이교도라 하여 이슬람 상선을 끊임없이 약탈하였고 레반트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했다.

그들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라고 하고 있지만 해적시대이고 식민약탈시대였다.
수많은 상선들을 대상으로 멕시코만과 카리브해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은 1650년부터 1725년까지를 해적의 황금시대(Golden Age of Piracy)를 맞이했고 이 때 영국 엘리자베스1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있었다는 것은 서구세력들이 해적질만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1655년 카리브해 섬들 가운데 동쪽 끝에 있는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는 잉글랜드의 인간 쓰레기들이 모두 카리브해로 모였다라는 말이 나올정도였다 하였으니 충분히 알만한 이야기다.

또한 웃기는 이야기는 바로 사략선이야기다.

사략선(私掠船:privateer)이라하면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 개인이 무장시킨 선박을 뜻하는데 근세기 유럽국가(?)들은 상비해군력을 보충하기 위해 사략선에 교전자격을 부여했다고 알려지지만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이 사략선들은 영국의 무역로를 무너뜨렸고 쌀, 소금같은 화물을 물론이고 상아와 황금도 약탈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영국은 무역회사일 가능성이 높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이 독립한 후에도 해적질은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미국독립이란 개념자체를  의심스럽게 하는 이야기지만 비로소 남북통일이 된 뒤 사회가 안정화되자 해적들이 급격히 사라졌다 한다.

이런 사실을 부인하겠지만 남북전쟁이전까지 해적들은 거의 미국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부터 미국이란 나라가 서서히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미에 이야기 하겠지만 이 시기는 바로 조선(朝鮮)에 대한 침략모의가 시작된 정조론(征朝論)이 가시화된 시기이다. 

그들 나름대로는 해적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있고 그러한 처지가 정당했다고 거품을 물겠지만 죄없는 엄청난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면 역사에 대해 반성을 해야 마땅하고 지금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우월감에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무조건 배를 타고 나가면 자유롭고 해양을 누비며 무역과 상업행위를 하면서 불법을 자행하고 그런식에 방법으로 끊임없이 자본축적을 하였으며 지배체제의 관리가 못 미치는 지역에서 은신처등을 마련하고 현지인에게는 철저하게 약탈을 일삼으며 잔인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들을 정상인으로 취급하거나 그러한 행위를 역사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근대사는 이들을 전부 귀족처럼 또는 영웅처럼 미화하고 상징화했다는 사실은 재고되어야 마땅한 이야기다.


글쓴이가 그동안 근대사 전반에 걸쳐 보는 과정에 가장 관심있게 탐구해본 것은 바로 생물학체계이다.

이것은 역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편에 생물데이타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삼한조선에서도 그 만한 생물학체계를 갖추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오늘날 생물학체계를 보면 아마도 당시 조선에서 그만한 생물학체계가 존재했었다 하여도 가치 있는 자료들은 모두가 빼앗겼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지만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다.

왜 서구세력들처럼 체계적인 활동을 통해 완벽하게 기초를 세움으로써 세계 모든 자연생태와 현상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할 수는 없었을까?

만약 그런 노력을 끊임없이 했었더라면 위대한 역사가 연기처럼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서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장악하여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예수회에서는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데 선교사들은 대부분 교육과정을 통해 논리학, 라틴어, 그리스어, 비유럽어, 과학, 예술, 고전번역, 철학, 법학 등의 학식이 풍부한 지식인들이었고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며 특히 유럽에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했으며 검증할 수 없는 것이지만 1556년에 예수회는 3개의 대륙에 74개의 대학네트워크를 이미 운영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근세기에 강력한 힘을 갖게 한 서세는 바로 예수회의 치밀한 준비때문이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지리지에 각종생물 서식지와 데이타가 나타나지만 세세하지 못한 부분에 항상 불만이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왜 서양 생물학체계처럼 세세하고 완벽을 기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본래의 역사기록이 아니라는데 더욱더 확신하게 만들 뿐이다.

역사가 그들에 의해 농단당하지 않았서야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서구세력들에 의해 구축된 생물학체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역사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혼란스러움까지 극복해야 하는 이중 어려움이 있다는 점도 없지 않다.

우리는 현재처럼 생물학체계가 완성된 것은 바로 생물학의 아버지란 닉네임을 가진 린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시기가 1758년에 자료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세종지리지가 1454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체제가 반드시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이 만들어지고 세종지리지에 각지역 생물명칭과 서식지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어떤 식의 체계가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지만 체계라고 하기엔 현재 기록은 보잘 것이 없다.

겨우 겨우 이름정도, 서식지나 분포지정도, 자세하지 못한 설명 등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큼만 기록된 사실이 여간 답답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세종지리지에 나타나는 것 보다 좀 더 세밀한 자료가 있었을 법하지만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런 것을 보면 비록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의 기억 프로그램(UNESCO Memory-of-the-World Programme/Program)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주는 역사연구가치는 솔직히 한반도란 한계에 맞춰 볼 수밖에 없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다.

서구세력들이 구축한 생물학체계는 세계전체 영역을 다루면서 기존 서식기원지까지 마음대로 조작, 변형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으니 무엇을 더 비교하겠는가.

때문에 세계를 지배한 하나의 체제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턱 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생물학체계를 이야기하며 할 이야기가 많다.

사실상 서양생물학자에 의해 생물학체계가 구축된 1758년은 산업혁명시기와 이어져 있어 세계 경제계와 과학계를 휘어잡고 있던 서세들에게는 흰 백지에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매우 쉬운 일이었고 역사 게임은 끝난 것과 같은 것이다.

기존체제가 존재했더라도 산업혁명으로 인해 물질이 풍부하게 되자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물질욕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염려하며 위기의식을 느끼던 기존 체제의 관리자들은 미래가 불안했지만 오히려 잿밥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자본과 물질 파고에는 어떤 방책도 속수무책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기존체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은 손 뒤집기 보다 쉽웠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들을 친일파라 하고 매국노라 하지만 국가관이 투철했다고 해도 목숨을 내놓고 대적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간사성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시장경제체제가 발달이 되어 자본력의 힘이 어느정도인지 실제로 경험해본 우리가 더 잘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그래도 목숨이 다 할 때까지 국가를 지키고 역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천하의 이치일 것이다.

농사만 짓고 수공업정도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던 사람들이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사회에 소비재가 충만하면서 각종 편의기구까지 등장하여 쾌락과 소유욕을 자극하는 자본이 주는 힘과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기다가 자본은 신문을 지배하며 여론을 부추길 수 있었고 여론이 극대화되는 분위기에 기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자 급기야 제정체제(帝政體制)에 대한 권태감과 체제의 부정요소들이 낱낱이 들어나 사회에 이슈로 부각되면서 제정(帝政)의 치부가 들어나고 이에 자극받은 민중들이 극단적으로 반감을 표출하게 만들면서 험악한 사회분위기 만연할 때 최고 권력자는 무력을 동원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재정이 부족한 제정정부가 나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야 맞다.

체제흔들기 위한 여론은 개혁이나 혁신이란 이름으로 기존 체제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들면서 자본이 쉽게 사회저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사실과 자본주 농간은 어디든지 개입하고 사주하여 체제자체가 힘을 쓸 수 없도록 만든 것도 분명하게 존재하던 때이다.

산업혁명의 파고와 그에 따른 개혁이나 혁신이란 욕구는 하나의 체제가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은 1858년 일본사회가 서구세력들에 의해 혼란스럽게 변한 것과 똑 같다 할 수 있다.

서구의 식민주의는 이러한 약점을 찾아 잠입하고 무단으로 개입하였으며 뒤에서 사주까지하였다면 기존 체제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아마도 조선도 이런 과정으로 체제가 흔들리고 나중에 체제 해체까지 수모를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세의 식민주의는 어쨌거나 첫째가 기존 체제의 전복이 목표였다.

영국의 박물학자이며 우생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프랜시스 골튼(Francis Galton)의 사촌인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1882)이 1859년에 발표한 저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으로 말미암아 기존 근원종까지 생물체계를 다시 정리하게 만들었고 이를 연계한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이고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은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여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의 식민지주의를 합리화하였으며 그것에 끝나지 않고 체제 전복에 이어 사회구성원들 종교개종까지 하길 강요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이런 과정에 선교사가 개입한 것은 바로 예수회가 개입한 증거이다.

예를 들어 16세기부터 기존 역사가 존재한 영역에 함부로 들이 닥쳐 온갖 만행을 일삼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같은 유럽세력들은 결국 남아메리카 잉카 문화(Inca文化)을 점령하고 폐쇄까지 시켰으며 그들이 실시한 식민지주의 교육으로, 군사력에 의한 무단지배와 병행하여 기존 정령신앙(精靈信仰)을 무력화하고 그들의 그리스도교도로 개종시키기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했다는 사실에서 그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그 다음 단계는 근거지의 생물학체계까지 건드려 마무리짓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그들이 지나간 곳에 기존 역사 체제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사실은 지금 우리가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3) 서구세력 등장과 일본역할


그렇다면 실제로 자본력을 가진 서구세력들이 기존체제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들의 역사를 재창조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근대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엄연히 세상은 서세들이 원하는대로 동양과 서양이 구분되어 정확하게 2등분이 아니면 균형이 맞아야 하지만 근대사는 세상 전체가 서양인의 위주로 서술되고 편집되었다는 것을 바보가 아니면 금방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들이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근대사에서 한반도에 서양선박이 들락거렸던 19세기초엽부터라고 판단되며 1816년 영국군함 알세스트호(Frigate Alceste)가 충청도 마량진에 입항하여 동태를 살피고 1832년 영국상선 암허스트호(Lord Amherst)가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할 때 부터이고 정확하게는 1840년 아편전쟁부터라고 할 수가 있다. 

앞에서 러시아의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가 말하길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라 한 것처럼 중국과 유럽의 역사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과 유럽의 역사는 거의 만들어낸 것으로써 하나의 체제를 각 민족, 각 종족으로 억지로 분리시켜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려가 거대한 국가라면 그것은 동서양 하나가 되는 국가이거나 현재 서구문명문화가 근거하는 로마, 그리스역사를 기초로한 연합체제 국가로써 조선이 계승권을 승계받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고려가 조선에게 중국이란 명칭을 승계했다해서 절대로 망한 국가체제가 아니라 서양세력들이 감추고 있지만 포괄적 서세가 적대한 서양귀족과 왕족계보들이 소속된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0세기초엽부터 미국(米國)에서는 'COREA' 와 'KOREA' 명칭 사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신문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COREA" 사용을 금지하고 "KOREA" 를 사용하기를 종용한 사실은 "COREA" 명칭아래 그들도 속해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정리를 하자면 "COREA" 는 다민족 대륙명칭"이며 "KOREA 는 단일민족 한반도"명칭이라고 정리할 수있다.

만약 세계삼한역사연구가 사실대로라면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 전체가 "COREA" 라 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 주장은 "COREA" 가 프랑스어로"COREE"라 할 때 이미 포괄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역시 이 COREE 란 명칭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서양인들은 이 "COREA"란 명칭으로 인해 혼란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태극문양을 즐거이 상징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를 글쓴이는 고려(高麗)라고 하는 것이다.

고려(高麗)는 유럽역사의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神聖羅馬帝國:962-1806)부터 연결됨을 본 블로그 글"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에서 최종 확인바가 있다.

다시 돌아가자.

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추악하고 비열한 서구세력들의 도발행위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극에 달하는데 시작은 1차아편전쟁이고 2차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연대 1858년에 발생한 해적선 에로호사건(The Arrow Incident)이며 이것을 빌미로 영국, 프랑스가 연합하여 청조(淸朝)를 압박하면서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일으켰고 결과적으로 1858년 러시아, 미국(米國), 영국, 프랑스와 청(淸)정부사이에 맺어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비준하게 만들었으며 영국과 프랑스 연합조직은 천단(天壇), 이화원(颐和园), 원명원(圆明园)등에서 주요 문화재를 약탈하고 이를 소각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베이징(北京, Beijing)자금성에 입성하여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을 강제적으로 맺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왜 천단, 이화원, 원명원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바로 미래까지 북경을 노출 시키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혼다세오사무로(本多淺治郞 著)의 일본역사강의(日本歷史講義)의 목차(目次)에 보면 朝鮮北部と支那との關係 조선북부와 시나와의 관계, 朝鮮南都と我との關係  조선남부와 일본과의 관계, 支那朝鮮の交通 시나조선의 교통, 목차(目次)에 구분되어있다.
이러한 명칭이 주는 사실에서 볼 때 위에 조선 북부에 지나(청조선)이 있다 한 사실이고 남부에 일본이 있다 한 것이데 조선 북부에 북경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 내에는 그들이 실토한 것처럼 경비가 심해 서양인들이 함부로 왕래가 불가능하지만 북부지역에 무역거래소를 열고 그곳에 서양인들이 많이 들락거렸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곳을 1883년 청조와 조선간에 상민(商民)무역 통상조약 중강통상장정(中江通商章程)의 장소로 알려져 있고 역시 서양인들이 중국이라고 하는 곳으로써 조선특별시 봉성(奉省)이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존 역사를 사라지게 만드는 가장 적합한 수단은 유적이나 유물들을 태워 없애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를 보면 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전란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고 하는 문장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게 해야만이 새롭게 재창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역사가 다 그 모양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역사만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싶은 조선영역과 북경이 그러한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북경은 중국 성도라고 알려지지만 사실상 고려(COREA)의 관할지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공교롭게도 애로호사건 다음해 1859년은 다윈의 종(種)의기원이 발표된 해이며 이것은 서구의 식민주의가 태동할 때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란 저서는 그들에게 상징성과 마찬가지다.

이때부터 서구세력들은 온천지를 소유화하기 위해 준동을 하였고 그들의 무기인 자본력으로 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또 다른 자본을 축적할 수있는 기대감이 충만하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어떤 거대한 체제가 있어 그것을 전복시키고 해체시키는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그짓을 계속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제국주의에 의한 도발은 계속되었고 최종 목표는 우리가 예상하는 조선(朝鮮)임을 알 수 있는데 제1차 아편전쟁(第一次鴉片戰爭:1839-1842)으로부터 조선 신미양요(辛未洋擾:1871)까지의 서구세력들이 개입된 사건 정황은 정말로 치밀하였으며 기존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체계적으로 그들이 하나하나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서세가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자신감을 얻었던 것은 바로 애로호사건에 의한 1858년에 체결된 천진조약(天津條約)이다.

천진은 인천이란 의혹도 있으나 인천과 제물포(濟物浦:Jemulpo/Chemulpo)는 다른 지명일 가능성도 높아 아직 더 찾아야 한다.

제물포는 보스톤이란 추측도 본 블로그에서 밝혀 보았지만 탐구과정에서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선 노력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한계를 절실하게 경험했으며 좀 더 서세들이 활동한 것처럼 적극적이지 않으면 어느것도 밝힐 수 없다는 사실도 느꼈던 바가 있다.

때문에 역사찾기에는 지금환경으론 한계가 분명하게 있다.


당시 만다린이라고 알려진 중국공관들은 사실상 중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해야 했던 서양인들의 일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며 서양인들은 청조(淸朝)를 중국이라 하면서 압박하였던 것은 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 강했다.

청조라 하였지만 조선 중앙정부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오히려 만다린을 서양인들이 코리언 만다린(corean mandarins)라고 했지 청 만다린((Qing mandarins)이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고 청조를 청정부(Qing Dynasty)라 하였지 청제국(Qing Empire)이라 하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게 있다.

또한 일본인들은 지나조선(支那朝鮮)이라고 한 호칭에서도 우리는 바르게 이 혼란스러움을 극복해야 한다.

例へば支那朝鮮の政府が古風の専制にして法律の恃む可きものあらざれば、...支那朝鮮の士人が惑溺深くして科學の何ものたるを知らざれば、[脱亜論]
위의 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원문 문장을 발췌한 것인데 "지나조선의 정부..." 또는 "지나조선의 선비..." 등의 문구가 발견된다.

일본인들이 지나조선(支那朝鮮)이라 한 것은 바로 조선내에 청정부를 말한 것임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서양인들에 의해 청조가 중국처럼 만들어진 것도 사실상 그들의 계략이 숨어있는 것으로 조선의 위치를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다.

청조를 압박한 나라를 살펴보면 러시아, 미국(米國), 영국, 프랑스인데 1858년 일본에게 불평등조약을 요구한 서세5개국 중 네덜란드만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네덜란드는 바로 일본연합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조선영역내에 존재하였던 일본을 그들이 접수하고 이어 청정부까지 손안에 넣으려 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의 소제<일본정부가 발행한 네덜란드어 화폐>에서도 설명했지만
네덜란드가 1641년부터 1859년까지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 독점적으로 허용한 무역상관(商館)을 설립할 때부터의 역사과정의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왜 네덜란드만 허용했다고 할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4년 후 1602년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가 설립되면서 식민지화했다고 하지만 자바(Java)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면 일본정부가 네덜란드 화폐를 발행한 이유나 사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인데 네덜란드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글쓴이가 이를 파헤치기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것 같지만 이미 결론은 네덜란드가 일본이거나 일본을 가장한 서세무역연합체라는 사실이 거의 확인 되었다고 본다.

조선(朝鮮)을 점령하기 위해 먼저 네덜란드라 인식되는 서구대리국무역상업연합체(西歐商業聯合體) 또는 일본무역연합체 명칭으로 만들어야 했고 서구(西歐) 5개국이 깊숙하게 개입한 상태에서의 일본(日本)은 1858년부터 시작된 왕권복고(王政復古)와 명치유신(明治维新)이란 역사 사건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이미 아시아를 탈피하고 서구로 들어간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구실을 찾았다고 볼 수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일본 구성원들 스스로가 유럽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오히려 구성원들은 서구인일 가능성도 높다.

일본이 끝까지 독립적으로 국가를 영위한 것처럼 하고 있지만 글쓴이의 판단은 그렇지 않다.

서구자본력이 어떤 식으로든지 투입된다고 할 때 상식적으로 자본을 지원받는 입장에서는 크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당시 일본 내 거주하던 네덜란드인이라 할지라도 일본은 사형으로 처벌했다고 알려지는 것도 동양열도일본인들이 할 수 없는 것이며 서구인들이 구성원으로 상당하게 일본을 점유하고 서구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일본인들의 정체성이 딱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유럽인들의 충실한 개나 사냥꾼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으며 서구인들에게 완전 귀속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동양열도인들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역사 딜레마(dilemma)가 분명하게 존재한 것이다.

만약 특별하게 민족, 혹은 국민정체성에 구애되지 않았던 체제였고 일본(日本)은 삼한역사(三韓歷史)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역사성과 그 구성원들이 이미 서구쪽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볼 때 동양역사의 일본이 아닌 서구역사의 모태가 될 수밖에 없는 체제 환경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크다.

일본에게 1858년 수호통상조약을 요구한 5개국의 서구인들은 조선을 상대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역할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일본을 앞세워야 했던 당시 국제상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란 판단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서구세력들은 일본이란 가면을 쓰고 서구 친정체제를 만들었고 그 마수를 조선을 전복시키는 방법 또는 수단 방편으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1858년 이전의 일본과 이후의 일본(日本)이 다르다는 것은 여러면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근대사를 바탕으로 진행과정을 맞춰보면 1854년에 우라가(浦賀)에 들어닥친 미국(米國)의 페리함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미일화친조약(米日和親條約)을 맺었고 그로부터 4년뒤 1858년에 미국(米國)을 포함하여 서구세력 5개국으로부터 불평등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나약했던 일본이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조선(朝鮮)을 상대로 위협했다거나 도발했다는 것은 당시 힘의 원리상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선두로 한 서양연합체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조선이 아니었던가.

일본 스스로가 강화도사건을 촉발시킨 부분에는 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감행했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며 1854년에 들어닥힌 신생국 미국(米國)으로 인해 힘이 강해진 상태라고 하겠지만 등뒤에서 미국(米國)을 포함한 서양연합체가 일본을 조정했거나 도발을 유도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서구자본세력들의 대리국(對理國)이라 칭하는 것이다.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 또는 운양호사건(雲楊號事件)이라 하는 내용을 간단하게 보면 1875년 9월 20 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있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초지진(草芝鎭)에 함포공격을 가했고,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永宗鎭)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에게 공격하여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혀놓고 퇴각한 사건이라 했다.

1871년 신생국이지만 서구세력 중에 군사력이 강했다고 보는 미국도 신미양요를 일으켰지만 본전도 못찾고 결국 달아났던 사례가 있다.

1866년에 예수교 천주교를 탄압했다고 침입한 병인양요(丙寅洋擾)의 프랑스는 어떤가.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擾)라는 것은 큰 전쟁이나 난이 아니라 그냥 어지럽게 한다는 소요이다.

그런데 그로 부터 불과 4년후 미국에게 불평등조약을 맺기까지한 일본이 프랑스와 미국(米國)도 못한 짓을 일본 스스로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아주 이치에 맞지도 않는 헛소리에 불과하게 들리는 것이다.

힘의 균형과 도발이 그저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하여 그것이 사실처럼 인정되는 것은 곤란하다.

더군다나 사실과 이치를 바탕으로 하는 역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자에 언급한 2차 아편전쟁에서 1858년 애로호사건처럼 해적선에 꽂은 영국깃발을 조선 청정부(清政府)군인들이 손상시켰다고 시비을 건 것처럼 이 사건도 이와 똑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에 의한 강화도사건은 강화도를 목표로 한 1871년 신미양요와 판박이다.

즉 이것은 일본, 미국(米國) 따로 나눌 것도 없는 한 세력이 4년을 간격을 두고 도발한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858년으로부터 약 18년 경과 후를 비교할 때 조선(朝鮮)이란 체제의 아우라 가리개에서 적어도 임진왜란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발방지를 한 것이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인데 그로부터 근 250여년을 조선의 보호받았던 일본이 1858년 서구5개국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갑자기 전환하여 서세앞잡이가된 것은 이해하지만 독자적으로 조선을 겁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1868년 프랑스가 도발한 병인양요(丙寅洋擾)나, 1871년에 미국(米國)이 도발한 신묘양요(辛未洋擾)는 조선을 이겨내지 못한 도발로 끝이 난 것이다.

그렇다면 4년후 이들의 연속되는 협공에 조선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또는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맺었다는 것은 이미 내부적으로도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지경에 이른 것이고 조선내부나 일본의 권력 중심부에 순수한 조선인이나 일본인들이 존재했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더 크다.

서구세력들의 힘을 빌려 왕정복고와 동시에 유신체제를 완성하였다는 것은 스스로가 개혁이나 혁신을 통하여 체제유지를 했다는 차원이 아니다.

서구세력들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자본이며 자본을 빌려 재정부족에 막았다든지 아니면 급하게 개발경제로 인프라를 구축 때문에 자금이 필요했다든지 어느쪽이라도 서세의 높은 이식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것에 반대급부를 제공하기 위해 체제자체가 위험을 부담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결정권을 서세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 뻔하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일본은 유럽국민국가(Europe, 國民國家:nation-state)체제처럼 서구국가조직들이 모여 만든 연합체제에 완전하게 귀속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역사상황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당시 조선 가까이에 일본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고 조선으로부터 정치적 간섭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일본이라면 더욱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근대사에서 이를 속이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세력들에게 1858년부터 식민지가 되었고 조선침략의 발판으로 삼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일본도 쿠바처럼 조선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끝내 일본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米國)이 쿠바에 상륙한 역사는 1898년 이전에는 나타내지 않고 미서전쟁(米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이라는 상황을 통해 쿠바를 점령한 것이 기록의 전부로 역사가 비슷하다.

쿠바를 식민지화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연속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서구 유대 자본력이 침투하거나 지원을 받게 되면 폭등하는 이식(利息)은 기본이고 받아먹는 즉시 즉사하는 독약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독립을 원하던 반체제에서 서구의 자본을 두려워할 턱이 없다.

이를 최종정리하면 서구5개국의 불평등조약을 맺은 1858년 이후의 일본은 오늘날 유럽역사의 모태로 발전한 것이며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연합조직체가 바로 한반도 식민지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4) 서구 대리국의 정조론(征朝論)


이 연합체의 행보는 이후 어김없이 정확하게 꼭 지점으로 다가서는데 1870년대 일본에서 등장했다고 하는 조선(朝鮮)에 대한 침략모의가 정조론(征朝論)이다.

이 정조론이 생성되고 난 후 1년만인 1871년에 미국에 의해 신묘양요가 발생한다.

이어 일본이 아니라 서구연합세력이라고 판단되는 힘에 의해 1875년 강화도사건이 발생하며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1882년 5월 22일에 서세의 우두버리격인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고 1882년 8월 30일 임오군란을 핑계로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리고 결국 1881년을 마지막으로 조선체제가 해체국면을 맞이 하게 된다.

그리나 조선체제자체가 해체는 되었지만 왕정은 유지되었다고 보여지고 그것 때문에 다시 1885년 1월 9일 조선의 한성부에서 일본과 맺은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되는데 이것은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이 쿠데타를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후속책임을 적반하장으로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피해액을 요구하고 맺은 조약이다.

김옥균도 서세연합세력의 앞잡일 가능성이 매우 짙게 나타난다.

김옥균(金玉均)일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의 개화당이 일으킨 정변이며 이 개화당의 다른 명칭으로 독립당, 일본당, 혁신당이라 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일본의 사주를 받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일본은 서세의 대리국 또는 연합체성격으로 봐야 혼란이 없다.

김옥균이라는 이름은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라고 하여 얻은 이름인데 글쓴이는 이를 백인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며 김옥균이란 이름은 한반도 역사가 편찬 되면서 명명한 것이 아닌가도 의심된다.

그리고 본 블로그 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한반도 역사 지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6"란 글에서도 말했지만 1884년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미국종교로 알려진 감리교(監理敎)는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선교가 이루어졌고 고종가까이에 접근이 가능한 것을 노려 고종의 윤허까지 요청한 사실과 그가 소속된 명칭이 일본당이라는 것은 무슨 말을 할지라도 역사의 어두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든 인물임에 틀림없다.

왜 조선체제가 해체되었는데 한성조약을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조선체제가 해체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한성에 고종황제만을 고립시킨체 권력을 한정시키고있었다고 보여지고 최종 골치아픈 고종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이 모든 사건들은 결국 실행을 가능한 철저한 기획아래 진쟁한 것이며 1870년에 등장한 정조론이 축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1858년부터 정조론을 주도한 서세의 리더격인 미국(米國)이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조론의 최초계획은 일본을 점령한 1858년 서구5개국의 발상이어야 하고 그것은 그들이 넘어서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조선을 붕괴시키는 것이었으며 당시까지 조선(朝鮮)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정조론은 조선(朝鮮)은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써 유일(cho·sen) 또는 하나의 체제(One regime)를 무너뜨리기 위한 백서(白書:whitepaper)라고 볼 수가 있다.

조선이 유일체제 지배국이었던 이유는 기존 동아시아역사사실과 다르게 1644년에 고려(高麗) 중앙정부라고 판단되는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청(淸)나라가 정복왕조의 중앙정부를 장악할 수가 없었다고 보이며 소위 4이(四夷)의 천자의 나라 중국(中國)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체제국은 바로 조선(朝鮮)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골드러시(gold rush)와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6 "에서 세세하게 밝혔던 것으로써 실제로 1866년의 미국(米國) 상선(商船)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사건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지만 1871년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한 것은 서구세력의 지속되는 기획된 것으로써 의도적인 도발이며 정조론(征朝論)의 시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정확히 조선(朝鮮)은 10년을 겨우 버티고 중심 세력으로부터 물러나는 치욕을 맞이한 것임을 알 수있는데 미국인 역사가 월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의 저서 "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고대기원(Era)편에서 모던조선(Modern cho-sen)의 연대를 1392년부터 1881년이라고 단정을 한 사실에서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가 이 연대를 누구보다도 확신한다는 것은 바로 미국이 정점(頂點)에 있다 할 것이다.


5) 일본과 친일성향의 생물학자


서구세력의 활동은 일본 역사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유럽역사를 기준으로 냉정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다음편에 이야기 할 "호랑이" 글 초두에서 말할 예정인 친일성향의 서양생물학자란 존재를 파악하는 일이다.

지칭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들에 의해 이상한 생물학체계가 만들어진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반드시 사전에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일본이란 국가를 동아시아에 배치해 두어야 했고 이것을 위해 거대한 음모가 작용한 것으로 파악되며 어떤 큰 외압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생물학체계변형이라 할 수밖에 없다.

현재 열도일본의 생태환경이 대다수 냉대와 온대, 그리고 소규모 범위의 아열대기후인 것에 반해 18세기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생물학기초를 세울 때부터 일본(Japanese)에 대한 생물학표본범위가 엄청나게 넓었음을 알 수 있고 왠지 모르지만 세계생물학계에서 일본생물표본에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중요한 생물분류체계를 보면 일본학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 독일생물학자들이 일본을 다녀가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당시 본을 다녀가지 않으면 유명해질 수 없었다는 상황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혹 일본을 방문하지 않더래도 방분한 생물학자들에게 생물표본을 공여받거나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일본은 세계생물표본채집집합장소로 오인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일본은 세계생물학 표본 근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론적으로 현대 일본열도 자연환경을 보면 이런 일이 가능 할 수가 없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한자를 중심으로 한 일본이란 국명을 호칭하지만 영어 "Japanese" 라 하는 발음이 이상하게도 동남아시아의 자바(Javanese)의 호칭과 비슷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자바니스(Javanese)와 재퍼니스(Japanese)가 스펠링에서 v, 와 p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발음상에는 수많은 명칭이 있다.


P

p

 ㅂ과 ㅍ의 중간음

V

v

영어의 V 발음과 동일


동양에서 소리내는 음이 'V'와 'P'가 다르지 않다 하였고 'V'와 'P'는 같다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와어(Djawa, Jawa) 원음인 자와(Jawa)의 “Wa” 발음이 무슨 원리에 의해 “Pa”로 변화되었는지 음운학적 근거를 제시하라는 분도 있지만 사실상 본 블로그에서 이미 이 사실을 거론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의 화(和:Wa)를 일본인들이 자기 상징처럼 사용하는 것이나 본 블로그 글 "1.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에서 말했듯이 잉글랜드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인 왜(倭:Wa)와 웨기(Waggie)가 된다는 사실 등에서 자연스럽게 변형이 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일본을 지칭하는 서양인들의 명칭이 확실하지 않지만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가 시팡구(Cipangu)라 한 것을 보면 'p' 발음이 서양인에 의해 상당히 강해지고 있으며 음운에서 '와'가 '바'가 된다든지 '파'로 강하게 변형되는 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The early Mandarin or possibly Wu Chinese (呉語) word for Japan was recorded by Marco Polo as Cipangu. In modern Shanghainese, a Wu dialect, the pronunciation of characters 日本 'Japan' is Zeppen [zəpən];

만다린이나 소주(蘇州)의 방언 오어(呉語)에서 마르코 폴로의 시팡구(Cipangu)라 기록하였고 오어(呉語)방언인 상해(上海)현대어는 일본을 저펀'Zeppen[zəpən]'이라 발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대체로 'p' 발음이 강하다.

여기서 본 블로그가 발견한 일본과 쿠바의 위치가 동일한 사실에 비추어 쿠바(Cuba)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의미, 쿠바는 캐리비언 섬에 살던 원주민을 타이노(Taino)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 하였고 옥토가 풍부한 곳(cubao), 또는 큰 장소(coabana)의 의미가 있다 하였다.

At Cubanacan, that is, in the interior of the island, near Jagua and Trinidad, where the

auriferous sands have been washed by the waters as far as the limestone soil.
두번째의미, 쿠바나칸에서 유래되었고 쿠바나칸은 석회석 토질이 물에 씻겨 금을 함유한 모래를 가진

곳으로 자구와(Jagua)와 트리니다드(Trinidad)근처 섬 내부에 있는 명칭이라 하였다.

Cuba:The name is derived from the Taino word ciba meaning stone, mountain, cave. This word is probably the origin of the name for the Cibao mountain range in the neighboring Santo

Domingo island.

쿠바의 명칭은 돌, 산, 동굴(stone, mountain, cave)의미인 타이노어(Taino) 시바(ciba)에서 파생하였고 아마도 인근 산토 도밍고 섬에 있는 시바오 산맥(Cibao mountain range)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진다.

즉 쿠바(Cuba)시바(Ciba)는 시팡구(Cipangu)와 대입되고 자구와(Jagua)와 자와(jawa)나 자바(java)나 자파(japa) 어느 것이든 연결이 가능하다.

오히려 일본이란 위치가 동아시아 열도보다도 카리브해 쿠바와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다.

물론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 "에서 명확하게 밝혀본 결과에서도 1926년 당시 일본(日本:Japanese)이 위치한 곳이 바로 서인도제도라고 불리었던 쿠바를 중심으로 카리브해(日本海)의 각 도서(島嶼)와 멕시코동부(東部)까지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만약 자바(Java)가 서인도제도에 존재한 지명이라면 자바가 결코 일본이 아니라는 주장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쿠바와 자바 섬의 형태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서(東西) 인도제도(印度諸島:Indies)를 서양지리학자들이 근세기에 의도적으로 나누고 구분하였던 것은 하나의 체제 역사를 분리, 분해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본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가 발견한 동인도제도가 서인도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곳에 황금이 난다는 시팡구(Cipangu)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다.


좀 특이한 예로써 바이러스 생성위치에 관한 것을 보면 바이러스가 생물학분류체계에 속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여름철이 되면 지금도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일본뇌염바이러스(日本脳炎:Japanese encephalitis virus)는 열대기후의 풍토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온다습하고 미개발 지역이 많은 열대지방에서 많이 발생하는 병이라서 열대병(熱帶病, tropical disease)에 속한다라고 되어 있는 것에 반해 알다시피 일본이 속한 동아시아 열도가 이 바이러스의 표본지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맞지 않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일본풍토병 리케차(Japanese river fever)가 그런 것인데 본 블로그 글 "일본풍토병 리케차(Japanese river feve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7"에서 밝혔지만  리케차(rickettisia)는 발진티푸스(發疹-typhus)의 병원체로서 로키산열(Rocky Mt. spotted fever)환자의 혈액 속에서 이 병원체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현대 일본과학자들도 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풍토병이라고 알려진 일본홍반열(日本紅斑熱:Japanese spotted fever or oriental spotted fever)이 현재 열도(列島)에서 발병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앞에서 서구세력의 엄청난 능력을 살펴보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맞다.

바이러스입자는 표본을 수집하거나 채집하는 곳의 위치명을 속명이나 종명에 두는 것이 맞는데 하필 열도일본이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일본 뇌염 자료를 보면 아시아에서 주로 발생한다고 했지만 바이러스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진화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하였으며 가끔 서태평양근처 미국영토에서 발생되는 풍토성 전염병이라 하였는데 이런 풍토병들은 본래 해적들의 은신처라고 할 수 있는 곳인 대서양에 무수히 많은 섬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1930년에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대항해 백신을 만든 것도 일본이라 하였는데 열도에서 발생한 환자가 없는데 무엇때문에 백신을 만들었을까?

정말 모를 일이 아닌가.

식물표본에 일본학명이 붙은 것들도 보면 일본바나나(Japanese Banana, Japanese Fibre Banana)가 그렇고, 일본시나몬(Japanese cinnamon)이 그렇다.

현재 열도의 기후와 맞지않는 하나같이 열대식물이라는 사실이다.

열도일본을 세계 전체 생태계로 취급한 사실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현재 열도일본 기후를 감안하지 않는 비상식적이 수준의 세계생물학분류체계가 엄청난 수의 종들이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본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은 당시 생물학자들이 현재 열도일본에서 생물표본들을 수집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은 본 블로그에서 이미 수많은 생물들의 근원지 파악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열도일본과 기후환경, 생태환경에서 생물분류체계와 이런 차이가 현저히 들어나는 것은 역사모순 만큼 뒤틀림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당시 생물학자들이 열대기후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엉터리 학자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결국 생물학 아버지로 알려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e:1707-1778)로부터 시작되는 근대생물학체계는 이런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가장 요인으로 부가되는 것은 바로 2차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기존 역사위치와 전혀 다르게 위치변경이 존재하였을 것이란 반증이다.

역사를 비교할 때 신뢰할 수 없는 자료들이 현재 전세계에 판을 친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일본생물학분류체계를 바로 고쳐져야 한다.

현재 동아시아 열도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닌 어떤 곳에서 그 많은 채본을 하였는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로인해 수많은 유명하고 존경받아야만 하는 생물학자들이 형편없는 사기꾼으로 매도당하지 않게 지금이라도 세계생물학계는 이를 재고하고 수정해야 마땅하며 왜 그런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솔직하게 밝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이야기다.

생물학자 본인들이야 말로 근세기에 벌어진 이상한 역사판짜기로 인하여 자신들의 명성이 손상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18세기 때 역사가 이렇듯 뒤틀림이 발생할 것이란 예측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친일성향의 생물학자라고 글쓴이가 구분하는 것도 사실상 무리가 많다.

글쓴이가 판단할 때 서구무역상업연합체 성격의 정치단체가 생성될 시기인 1858년을 깃점으로 진실된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친일성향의 생물학자로 구분하였지만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역사를 바로잡고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지금 그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세밀하게 구분을 하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라틴어 주격에서 japonicus(남성격), japonica(여성격), japonicum(중성격)의 학명을 사용하며 명명한 생물학자들을 보면 '일본의 린네'란 별칭을 가지고 있던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 네덜란드의 동물, 조류 학자인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1778-1858), 일본생물학의 전문가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1796-1866), 독일식물학자인 요제프 게르하르트 주카리니(Joseph Gerhard Zuccarini:1797-1848), 자연사 박물관의 동물 관리자 독일인 헤르만 슈레겔(Hermann Schlegel:1804-1884), 네덜란드 출신 박물학자 마틴 후튠(Maarten Houttuyn:1720-1798)등이다.

19세기에 활동한 친일성향의 생물학자들은 대다수가 네덜란드와 독일인이며 인도유럽어족(語族) 서게르만어파(語派)종족으로 게르만계네덜란드(German-Dutch)로 구분지울 수 있다.


6) 유럽역사와 조선의 운


이들에 의해 일본은 대리국으로써 명실공히 식민지 제국으로 발돋음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 했다는 역사는 현재 열도일본은 물론이고 당시 서양세력들에게도 큰 선물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생각해보면 그러한 식민지란 역사적, 정치적 구속으로 인해 부수적으로 그들에게 안겨지는 전리품은 지대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세계사학자들은 유럽상업자본(商業資本:commercial capital)은 식민지 착취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이것은 자본괴물인 로스차일드(Rothschild)를 만들었고 로스차일드 시오니즘 동맹체(Zionism alliance frame:同盟體)가 만들어진 과정에서도 이와같은 식민지 착취에 대한 의혹이 짙다.

자본이 괴물이 아니라 자본을 시장경제 이외 부정적인 곳, 또는 자본에 취약한 곳을 찾아 집중적으로 투자하거나 운영하는 사람들을 자본괴물이라 한다.

늘 이러한 곳에 유대자본이 버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운영하는 자본은 결국 하나의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효율적인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다.

조선(朝鮮)이 자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재정결핍이 제일 컸을 것이지만 주요 원인으로는 자본에 의한 민중들의 권태감과 새로운 체제의 기대감에 따른 혼란된 심리적 상황이 더 크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자본파고에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것으로 풀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 한 것은 자본이 여론을 지배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여론을 부정적으로 몰아갔다는 사실, 서구세력들의 치밀하고 냉정한 조선(朝鮮)체제 흔들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강력했던 제정체제가 한순간에 힘을 읽는다는 것은 프랑스혁명이 잘 말해주고 있다.

본 블로그 글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은 없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1"에서 밝혔던 이야기지만 소설가 박경리(朴景利:1926-2008)선생의 유고집 ‘일본산고(日本散考), 증오(憎惡)의 근원(根源)'에서 일본의 그토록 잔인한 식민정책중심부에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옛날 지독한 반체제가 일본으로 건너갔나 보다." 하였고 “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잔인무도한 그들 조상인가 보다 하고 뇌까린 적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혹 박경리선생은 세계삼한역사관을 조금이라도 눈치채었을까?

언제인지는 확실 않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에게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증오의 대한 근원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처럼 마치 역사적으로 숙명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음을 알 수가 있다.

작가의 이러한 예측은 거의 맞아 떨어진다.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이전 옛 조선(三韓朝鮮)이 오늘날 유럽을 형성하고 있는 서양세력들을 기본적으로 체제유지를 위해 과하게 핍박하였고 “왜(倭)”라 하며 천시하였던 역사가 존재했을 것이란 짐작은 되지만 어떤 식의 극단적 차별행위가 행해졌는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서양역사를 보다보면 짐작이 가능한 것인데 유럽프랑스역사에서 구신(舊新)종교대립이라고 하는 위그족의 탄압이 이와 같은 성격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바시(Wassy)학살과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olomew)로 시작된 위그노전쟁 혹은 프랑스 종교전쟁(French Wars of Religion:1562-1598)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카톨릭과 개신교간에 종교 갈등에서 발발된 것이라지만 충돌기간도 거의 40년 정도이며 사상자만도 작게는 2,000,000명, 많게는 4,000,000명라 하였으니 종교적인 문제로 이와 같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임진왜란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입장에서 보면 위그노 전쟁이 아니라 내란, 반란(反亂)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조선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과 시기적으로 크게 겹치는데 마찬가지로 위그족들의 반란(反亂)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이다.

임진왜란에서 사상자 수가 50만명(萬名)정도라고 하지만 한반도 역사가 10/1축소되었다고 보면 거의 피해상황이 근사치로 접근되고 조선 전국토가 유린 당했다 하며 농경지 1/3이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등은 피해상황이 적지 않음을 알리고 있다.

프랑스역사자료는 위그족 피해상황을 나타냈고 임진왜란 상황은 조선의 피해상황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에서 왜구(倭寇:wi:we)라 한 사실과 네덜란드를 일본인들이 화(和:Wa)라 한 사실, 그리고 잉그랜드의 방언에서 왜(倭:Wa)와 웨기(Waggie)라 한 사실 등에서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 있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위그노(Huguenot)라 하면 프랑스개신교(French Protestants)라 알려져 모두가 체제입장에서는 좋지 않게 보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와같은 칭호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임진왜란이 평정되고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條)의 송사조약(送使條約)을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있는 반면 프랑스에서도 느무르(Nemours)조약보다 더 가혹한 조항이 있어 그것을 1588년 앙리 3세가 발표한 11개의 조항으로 된 연맹조약라 하는데 상당히 비교가 되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 에서 밝히길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의 선조 내력에서 1650년경에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1625-1645)의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Klaes van Rosenvelt)가 그의 조상임을 알 수 있고 이주한 시기는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뉴 네덜란드(1664:New Netherland)를 세우던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라 했으며 어머니 마사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아일랜드인의 피가 섞인 혼혈여성으로 밝혀지며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인 위그노 신자(Huguenot)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얄타회담(Yalta Conference:1945.2.4-2.11)에서 결정적으로 한반도 분단 형국을 맞이하게 한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는 1882년 대조선이 해체되던 시기에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Sara Ann Delano:1854-1941)역시 프랑스계 위그노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문제는 그들이 보잘 것 없는 한국을 판단하는 정치의식이 거의 같다는데 놀란다.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만난 테헤란회의(1843.11.26-12.3)에서 한국을 40년 동안 도제관리가 필요하다고 한 사실이 있다.

원문에 보면 “apprenticeship”라 하였는데 견습기간(見習期間) 또는 이를 도제(徒弟)라 하고 18세기말부터 진행된 산업혁명 이후 공장제 생산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공장소유주가 도제를 고용해 훈련시키는 제도로써 노동일지를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공식적 관찰결과를 적게 되는 생산제도의 한 방편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독립을 시키되 40년간 도제처럼 그들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일본식민지 암흑같은 생활 36년을 어렵게 마쳤다고 생각한 한국인들에게 또 다시 40년을 도제 즉 견습국으로 미국의 관리하에 두어야 했으니 일제식민지와 또 다를 바가 없는 참으로 암울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루스벨트 주장대로 남북한은 각각 서구세력의 통치를 받았는데 북한은 소련 스탈린에게 남한은 미국에 의해 1945년부터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란 제도아래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루스벨트가(家)의 두 대통령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내린 처분들은 그야말로 극약처분 바로 그것이다.

이 두 대통령은 똑 같이 한국인은 자치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선을 긋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민족상잔이란 전쟁으로 인하여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고 그것마저도 분단이 되면서 암울했던 시대에 미국은 전범국인 일본처럼 경제원조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립하여 현재 세계경제대국이 된 사실을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당시 한반도 역사가 말하듯 보잘 것 없는 문맹율도 높고 부패가 만연한 관리와 뛰어나지도 않고 나약하게 남의 나라 침략만 받고 살았던 그래서 늘 속국민이었던 한국인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박경리 선생이 지적하고 의문을 가졌듯이 일본이란 식민주의에 몰입된 서구세력들이 지난 위그족 즉 왜구(倭寇:wi:we)시대의 핍박받은 앙갚음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낳게 하는 것이다.

두 루스벨트 대통령은 뿌리부터 위그노였다는 사실이 자꾸 켕긴다.


7) 미국(米國)은 정조론과 무관한가.


그렇다면 미국(米國)은 정조론과 정말로 무관한가.

정조론(征朝論)을 완성한 미국(米國)은 1945년 비로소 세계를 장악하고 세계질서를 손아귀에 넣은 후 한반도에 일본식민사관을 만들어야 했을 때 실제로 하나의 체제로 존재한 조선(朝鮮)역사를 손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작업에는 전자에서 언급한 위그노 즉 왜구라는 시대에서 저변에 깔려있는 원한의 역사에 대한 강박과 심리적 압박이 지배했을 것이란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다.

아마도 현재 한반도인들이 내면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강박과 트라우마 정도가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열도일본이 독자적으로 이런 역할을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서구세력제국들은 대리국가 형태에 불과한 열도일본을 조선과 상대적인 강한 일본을 만들고 조선과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에 심으면서 최종 그들의 원하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야 한다.

그 덕에 한반도 사람들은 영원히 그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역사의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이미 1858년에 구상된 역사프레임속에 갇혀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있는 곳에 일본을 심어 역사의 라이벌 또는 숙명적인 관계로 삼는 것은 그들에게 손해가 될 것이 없다.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면 항상 일본 뒤에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면 된다.

현재도 그러한 양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한반도인들만 모르뿐이다.

언제든지 감쪽같이 껍데기만 벗어던지면 되고 골치 아픈 역사굴레에서 빠져나오는 것까지 치밀하게 계산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유럽대륙에는 역사적으로 동질성의 서구세력들만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양새는 역사연속성이나 지속성이 아니라 근세기에 물리적으로 조정하고 정리한 느낌이 크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러시아의 수학자 포멘코의 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증거이다.

서로가 같은 역사이면서 다른 것 같이 꾸며서도 결국 동질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현재도 유럽연합체를 근거로 “하나의 제국”을 모방하려고 하는 상황을 볼 수 있으며 어쩌면 근대사 전체에서 유럽제국과 일본역사의 밀월 관계는 아마도 영원히 가지고 가야할 비밀이 아닌가 한다.

역사가 진실성을 가진 것 보다 근대사가 가지는 것은 어떤 축을 중심으로 개연성을 파악하는게 더 정확하다.

이런 과정을 좀 더 세세하게 설명을 하면 17세기부터 불어 닥친 유럽역사 주요사건들에서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있는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산업혁명이 나열될 수가 있으며 이 주요사건은 어떤 연관성이 긴밀하게 있고 굵은 선을 연결하듯 하나의 축으로 이어져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보는 듯하다.

1534년에 에스파냐(España)군인 출신이며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1491-1556)에 의하여 설립된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이를 총체적으로 지휘 조정한 느낌이 있고 이 조직을 바탕으로 기독교국가 연합체제를 치밀하게 구상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원대한 목표를 위해 예수회에서 장기적으로 수많은 특출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키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마침내 그들에게 닥쳐온 중세 르네상스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각처에서 예수회가 양성한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중세기의 르네상스(Renaissance, Rinascimento)는 프랑스어로 “Au printemps, c’est la renaissance de la nature”라 하여 “재탄생”이란 의미와 같이 문예부흥과 학예부흥을 통하여 과학토대가 마련되면서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것이기에 그들에겐 황금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바탕들은 근세기에 역사판짜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학분야 세계생물학계와 지리학계를 휘어잡을 수 있는 동력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세계전역에 걸쳐 지도를 만들고 그리고 편집하여 배포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거대한 역사성에서 찾을 때 한꺼번에 지울 수도 없는 고대역사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접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세계전역에 존재하던 역사성을 서서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것은 가능하겠금 산업혁명은 그들 편이었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에서 밝혔듯이 금속활자를 처음 사용한 예는 고려(高麗) 고종21년(1234)이며 고려금속활자(高麗金屬活字)가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1398-1468)에 의해 인쇄기로 탄생되면서 문예부흥과 학예부흥을 촉진시켰다 하였으며 이 인쇄기로 인하여 정보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다고 알려진 것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종교혁명과정과도 밀접한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 국민국가(國民國家,Nation state)개념과 경제적 형태로서의 자본제적 시장경제체제는 전통적인 절대왕정체제(Absolute monarchy) 혹은 제정체제(帝政體制)를 붕괴시키게 되며 서양세력이 소유한 자본에 의해 절대왕권이 속박되고 끝내 왕정체제가 해체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이 시장경제체제는 그들이 판다하기에 고약한 절대왕권을 극복했겠지만 또 다른 거대한 자본괴물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인류사에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상대적이지만 지배력의 기울기는 평형을 이룬다고 보아야 맞다.

역사가들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상대적으로 통일 된 국가와 정체성의 조기출현에 주목한다 하였지만 상업을 주관하는 주식회사가 국가라는 등식으로 근대사 전반에 걸쳐 인식되어 나타난다는 것도 정상이라 할 수없다.

주식회사가 마치 국가처럼 근대사가 확대시키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만약 절대체제가 있는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것으로 국가조직처럼 행위한다면 절대체제관리들이 그들을 그냥 두고 보았겠는가.

반역단체조직이라고 아마도 씨를 말려 버렸을 것이다.

절대로 행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짓이라는 것은 주식회사 통째로 날라 갈 수 있는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의 절대적인 왕정체제(Absolute monarchy)가 존재하였고 일부 유럽왕국들이 존재하였겠지만 이를 국가완전체로 본다는 것은 넌센스(Nonsense)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왕국들은 일본과 합체된 국가조직체로 곳곳에 나타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체제를 상대하기가 개개 유럽왕가와 그들의 회사들의 힘이 부족했을 것이란 판단이 있고 그들은 어차피 봉건제도의 봉건주(封建主)로써 체제의 감시를 피해만 해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본이 있다 하여 토지를 마음대로 매입할 수 없었던 때가 아닌가.

이것들이 일본연합체로 합체되면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이라 하였고 밝은 정치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뜻인데 유신(維新)은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03)시집, 시경(詩經)대아(大雅)의 문왕(文王)편에 “주(周)나라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문왕(文王)이 나와 나라를 혁신시켰다”에서 나온 문언에서 보며 개혁이고 혁신한다는 뜻이다.

자본주 조직체 일루미나티(Illuminati) 또는 광명회(光明會)가 라틴어로 ‘계몽하다’ 혹은 ‘밝히다’라는 뜻의 “illuminatus”의 복수형 인 것도 자본으로 세상을 밝히겠다는 목적을 볼 수가 있다.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 나라가 있었다면 새롭게 혁신하고 개혁하겠다는 뜻인데 기존 막부정권을 있었다고 하지만 서구세력들에 의해 나라가 또는 자치체제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일본이되 기존 네덜란드 세력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유신정권이 들어서고 바로 탈아입구(脫亞論)주창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지배력을 가진 조선(朝鮮)의 통치력이 자체적으로 크게 약화되었거나 혹은 그들에 의해 약화되어 이미 세계질서의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진 것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서구세력의 자신감에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당시의 일본정치상황을 들여다보면 1858년에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제국들이 전부 모여드는 형태가 되었고 표면적으로 일본(Japanese)이란 국명을 내 걸고는 있지만 사실상 서구세력들의 거대한 무역 상업적 동맹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세력들에 의해 체결된 조약들은 대부분 불평등 조약(不平等條約:Unequal treaty)이다.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런 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역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부정부패와 재정결핍에서 오는 제약과 압박이 있었을 것이고 일본은 서구자본이 절실하게 필요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조선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서구세려들을 끌어들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근대일본역사에서 보면 페리에 의한 1854년 미일화친조약(米日和親條約)에 이어 1858년에 경제 확대를 위한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맺게 되는데 미국(米國),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5개국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서구자본력의 합체 의미라 할 수 있고 일본입장에서야 굴욕적인 통상조약이라 하지만 오히려 적극적이거나 지배력을 서구세력들에게 넘겨주는 시점으로 이를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カ国条約)이라 한다.

이미 안전하게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막부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데 이를 ‘안세이[安政]의 대옥(大獄)’이라 한다.

서구세력들은 기존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일본역사가 어떻든 간에 일본은 서구세력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넘겨준 것이다.

이것은 조약의 형식을 빌었지만 일본이란 국명을 앞세워 이 5개 국가가 상업적으로 단합하고 연합하였으며 2년 뒤 포르투갈(1860), 1년 후 프로이센(1861), 5년 후 벨기에(1866), 이탈리아(1866), 덴마크(1866), 또 2년 후 스페인(1868), 스웨덴(1868), 노르웨이(1868), 마지막으로 1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1869)까지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총 유럽 국가들을 망라한 상태의 경제연합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절대 개개별로 국가라 할 수 없는 체제 귀족이나 봉건공작 또는 왕실가족, 하나의 주식회사 형태일 것이며 기실 조선(朝鮮)과 조선 중앙정부(만다린)로부터 국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日本)을 앞세운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근대사는 기존 상식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들의 거대한 자본을 축으로 세계경제질서를 장악하려 하였던 것은 그들의 힘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며 결국 영국금융을 지배하고 영국국가 만큼 거대해진 유대자본가 나탄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1777–1836)가 탄생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 인물은 세계금융을 지배한 세력이며 후발주자 미국(米國)으로 볼 때 이 위치에 있는 자본주가 바로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1837-1913)이다.

모건은 미국의 상징처럼 여러 포스트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엉클 샘(Uncle Sam:US)으로 상징된다.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국제금융은 모건에 의해 미국으로 넘어간다.

금융의 힘은 어지간한 국가는 매치고 내던질 수 있는 힘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돌이켜 볼 때 현재 열도일본에서는 1858년에 서구세력들의 이 같은 조치를 굴욕적인 통상조약이라 하고 있지만 이때부터 조선(朝鮮)에 예속된 도쿠가와 막부정권(德川幕府)시대보다 훨씬 힘이 강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구세력들이 연합한 국민국가체제가 바로 신생국가이며 이러한 국가조직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명실 공히 조선(朝鮮)과 대등하게 경제규모를 바탕으로 상대가 가능했다는 자신감을 찾을 수가 있다.

때문에 노골적으로 스스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Greater Japanese Empire)이라 칭하면서 역사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1868년 4월 6일에 왕정복고를 완성한 후 덴노(てんのう:天皇)가 통치 원칙을 공포한 5개 조항의 어세문(五箇条の御誓文:Charter Oath, The Oath in Five Articles)을 보면 1조(条), 널리 회의를 일으켜 제반 문제를 공론에 따라 결정한다. 2조(条), 상하 합심하여 활발하게 경륜을 편다. 3조(条), 문무백관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뜻을 이루고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한다. 4조(条), 구래(舊來)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천하의 공도를 따른다. 5조(条), 지식을 세계에 구하고 호국(護国)의 기반을 굳건히 다진다 라고 하면서 대외 공표하였다는 것은 선포적인 의미가 있으며 1조(条)부터 4조(条)까지 서구 국민국가체제를 말하고 있으며 마지막 5조는 서구선진문물을 취해 호국을 하겠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팔굉일우(八紘一宇)라 하여 극에 달해 나타나는데 “팔방의 멀고 넓은 범위 즉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이 된다” にほんしょき의 「六合くにのうちを兼ねて都を開き、八紘あめのしたを掩おほひて宇いへにせむ(The World Under one Roof)하였고 이는 얼굴이 가려진 유럽연합체제 즉 일본의 침략 논리를 뒷받침하는 주요 개념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으며 “세계가 한 지붕 밑에 있다”하여 서세들의 식민주의 의식을 완성시켜 이를 현실화하고 역사화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체제의 본 모습은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더 이상 열도일본이라 하지 말자.

 

8) 정리

 

NBC의 해설자 조슈아 쿠퍼 라모(Joshua Cooper Ramo)의 역사관이 이토록 노골적인 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제 역사 가면을 벗고 세계질서와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은 솔직해졌으면 한다.

그리고 이제 꼴같잖은 역사를 가진 열도일본을 의식하지 않는 바른 역사관이 필요할 시점이다.

우리가 받아들였다는 선진문명을 운운하는 조슈아 쿠퍼 라모나 뉴라이트들의 주장은 한반도만의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는 올바른 역사지식이 필요하다.

인류태고적 역사를 잇고 역사선민이 된 한반도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거대한 하나의 체제가 18세기 말까지 세계를 통치하고 지배한 역사가 워낙 번창하고 찬란했던 것이기에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던 해양세력들이 이를 축소시켜 한반도에 국한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우리 스스로를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유도하는 거짓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오죽하면 열도일본 역사가들은 고치는 역사가 그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열도일본 정치인들은 기존 역사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습성을 분별 없이 나타내고 있다.

스스로 서양인들이 만든 역사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중하고 스스로 뉘우치는 듯한 독일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당당한 것 같고 뻔뻔스럽게 도발하는 열도일본 정치인들을 보면 향후 근대사의 인류운명을 가르는 거대한 전쟁의 당사자인 것이 맞는지 그리고 전쟁패배자로써의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본질적인 역사실체가 맞는지 의구심이 넘쳐난다.

왜 독일 정치인과 열도일본 정치인들의 자신들 일그러진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지 근원적인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그래도 인류를 전쟁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린 자체를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무엇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 조차 지난 역사를 알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인식불가능한 이상한 행태를 보이고 있을 수 없는 골통을 부린다는 사실이다.

무엇때문에 이런 현상이 대두될까?

혹 그들도 지난 역사를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그들과 무관한 역사란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서양연합군과 전쟁을 하였다는 자부심만이 그들의 뇌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엉터리 같은 역사를 잉태하게 하고 만들어낸 서양연합세력들의 잘못이다.

열도일본인들은 서양연합세력들이 벗어나려고 만든 역사 위에서 깨춤을 출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대신 이러한 역사피해는 동양하고도 아시아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벗어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역사란 이름속에 정신적 장애가 되어 트라우마가 되었고 무겁다고 금방 내려놓을 수조차 없는 납덩이 같은 멍에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아닌 중국이 대륙을 차지하고 아시아를 위협하고 있고 유럽이 아닌 유럽이 아랍을 상대로 또 다른 종교전쟁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들은 아직도 역사는 산업혁명 이후 생성된 진행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태고적 인류역사를 책임질 마지막 선민으로써 자존을 지켜 올바른 역사속에 다시 토대를 놓으려 한다면 그래서 이런 혼돈된 역사로부터 절대로 추하지 않게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일본이란 가면을 앞세우고 역사를 농단한 세력이 사라지게 한 진실의 역사를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우리가 먼저 알아 잘못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역사사실에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어디에도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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