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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桓國)의 강역(疆域)

한부울 2014. 5. 1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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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桓國)의 강역(疆域)

 

글쓴이:한부울

 

서두
반도역사의 태동

일제 습성적인 조작질의 답습
환단고기와 계연수
불의 발견과 또 다른 인류이동경로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조선에서 만든 세계최초의 권총
결말

 

서두

 

우리의 삼한역사는 일만년(萬年:10,000)의 역사라고 한다.

이것은 환인께서 세우신 환국 7세 역년 3301년을 시작으로 환웅(桓雄)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BC3898-BC2333) 18세의 역년 1517년을 더하고 또한 단군 고조선 47세의 역년 2,333년과 서기 역사 2014년까지 도합 9,165년의 역사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만년이란 역사사실말고도 더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원동중 삼성기 전 하편(三聖記 全 下扁)과 환국본기(桓國本紀)에 따르면 환국(桓國)은 7세에 전하여 존속기간이 역년 3301년간(年間)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63,182년간(年間)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놀랍게도 서양사에서 볼 수 있는 고고학 지질시대를 말하는 것으로서 약 258만년에서 1만년까지로 정하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즉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범위에 들어가는 년간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인류시원(人類始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현대처럼 수치가 정확하게 나타나면 좋겠지만 만년전부터 전해지는 사서(史書)만을 통하여 이렇게라도 수치적으로 따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며 현대 지질과학이 보는 것과 별 차이를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어차피 현대에서도 258만년에서 1만년까지라는 엄청난 범위를 나타내 정확한 수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삼성기에서 말하는 63,182년이라는 력년 또는 년간은 훨씬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삼한역사는 찬란하고 뿌리깊은 만년(萬年:10,000)이란 역사 이외 인류시원과도 연결될 수 있는 엄청난 역사임을 알 수가 있다.

 

반도역사의 태동

 

그러나 이러한 세계삼한역사는 우리에게 어쩌면 과분한 역사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제가 만든 반도역사를 우리의 역사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위서(僞書)와 위작(僞作)이란
딱지가 붙어 버렸다는 사실에서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역사취급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본래의 주인이 강도에게 걷어차인 꼴이다.
세계 어느나라 역사에서 식민지사를 그대로 자기나라의 역사로 인정하고 그것을 역사라고 알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이 분열되고 제각각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은 반도역사로 인한 폐해가 결정적이다.
일제가 만든 역사이기 때문에 자존이 없을 뿐만아니라 온통역사가 피해의식만 키우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 반도역사 교육으로 결국 탄생한 것은 존재자체도 알 수 없는 노예근성을 가진 친일사학자와 그 하수인, 추종자들뿐이다.
이미 그들이 한반도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정작 세계삼한역사는 찬밥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반도역사는 일제가 만든 엉터리 역사이지만 세계삼한역사는 우리의 정의로운 역사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모든 나라와 연관 지어질 역사가 바로 삼한역사이며 근세기에 자본력을 앞세운 서양세력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조각 조각 나누어지지 않았고 본래 대로만 존재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사(世界史:world history)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거대하고 위대한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도역사에 비해서 너무 거대하고 또는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한반도인들은 불편하단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다.
받으려 엄두가 나지 않으며 손사례만 칠 수밖에 없단다.
이것은 한심하게도 100년간 일제가 만든 반도역사의 교육으로 인하여 피해의식만 쌓여 민족혼이 없거나 한없이 쪼그라들어 자기 것도 식별할 수없는 역사판단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설령 세계삼한역사 우리의 역사라 하더라도 이제는 이미 한반도인들에게 반도역사가 상식이 되고 지식이 되었기때문에 머리속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을 어쨌던 인정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없을 수가 없다.
참으로 기 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 만큼 한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도역사에 나타나듯이 1910년 일제가 분명히 강압적으로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였고 그래서 강압에 의해 우리민족이 자의적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36년간 피지배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모든 구성원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과정에서 일제가 얼마나 심각한 못된 짓을 자행했을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역사문제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기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거의 우리가 본래 역사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악의적인 조작질이 있었을 것이란 사실은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고 그들이 조선인들에게 자행한 악질적인 행위사실만으로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다.
현재까지도 가까이에서 늘상 행구질하고 괴롭히고 있는 지질적인 일본 민족성을 보고서도 일제가 만든 반도역사를 역사로 인정한다는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할 때도 바보천치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어찌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한반도인 답다고 할 수 있는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일본이란 역사는 전부 허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역사를 바탕으로 따진다 하여도 최소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사건 명칭에서 보듯이 거대한 조선내에 있었던 왜(倭)가 벌렸던 난(亂)임을 금방알 수 있다.
왜(倭)란 이름으로 당시 조선으로부터 나라취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을 어지럽히고 위협하는 세력으로서 경계대상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서에서 나타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 늘 상 조선으로부터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는 것도 사실이며 그들의 도발역시 그러한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반란(亂)의 원인으로보면 제왕의 폭정과 탄압으로 인한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 있을 때 반란을 생각할 수 있지만 왜는 근원적으로 조선의 조정을 흔들어 약화시키려는 목적에서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그리고 그들만을 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기를 들었던 것이기 때문에 정벌의 대상인 란(亂)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조선 역시 내부적으로 들여다 보면 왜는 이질적인 것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매우 골치아픈 대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볼 때 당시 왜(倭)가 가질 수밖에 없는 나름대로의 원성도 적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가 있고 그들에게 내려지는 차별적인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자료에서 보면 당시 왜들은 이것을 한처럼 여겼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란(亂)이란 성격을 놓고 영역적인 문제까지 들여다 볼 때 지금 열도가 정말 본래의 왜(倭)라고 칭한 일본인들의 거주지였다면 열도 역시 조선영역이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자체가 신기할 정도여서 하는 말이다.
그것은 일그러진 그들의 역사개념에서 나온 것이며 저질적인 습성에서 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이것의 이치는 매우 간단하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근세기 동아시아대륙사에서 열도 일본을 말하려치면 1868년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내세운 명치정권(明治時代)이 들어서기전 즉 도쿠가와정권인 에도시대(江戸時代:1603-1868)까지는 대조선내에 네덜란드인의 거주지가 틀림 없으며 그 이전 풍신수길정권은 잉글랜드 또는 포르투갈인들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동양사와 서양사가 나뉘어지면서 파생된 근거가 모호한 별종적 역사일 뿐이다.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인들은 철저한 장사꾼 집단으로서 대조선관할내에서 존재하였던 세력이었다는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풀어 보았을 때 매우 타당한 이야기로 결론지었던 바가 있다.

그냥 동양일본이라는 역사판으로는 도저히 이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결국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JAPAN=JAPAM" 에 대칭되는 한자명칭이라지만 이것을 증명할 근거또한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근세기에 서양인들도부터 "JAPAN" 이라고 호칭된 것 사실이겠지만 이것과 동양명칭 일본(日本)과 무조건 같다라고 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일본이라는 동양명칭은 삼한제국이나 대조선에서 관리하던 집단이었다는 것에서 볼 때 적어도 명치정권까지는 제대로 된 역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오직 이문과 이윤만을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장사하던 장사꾼으로서의 조직에서 존했을 뿐이지 결코 국가로서 존재할 가치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도 없는 미개한 왜(倭)인들이 번듯한 역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근세기 신흥자본주로 등장한 부르주아(bourgeois)세력과 어울려 동질성을 확인 것이 주효했을 것이고 왜가 곧 "japan" 인데 근세기들어 서양인들은 이 이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스스로는 유럽인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그러니 "japan"는 동양일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명칭이다.
어쩌면 당시 하나의 통치권력이고 세력이었던 대조선 삼한주체들로 부터 엄청난 제약을 받았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동변상련(同病相憐)의 공통점을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처럼 동서양개념이 아닌 하나의 부류로서의 "japan"이란 존재 명칭은 동양개념만 남아 일본이란 명칭과 함께 열도에 넣어졌다고 볼 수가 있다.
때문에 현재 "Japan" 이란 명칭과 동아시아대륙사에 등장하는 일본이 결코 같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동양일본군벌세력들은 서양세력들이 가지고 있던"JAPAN" 을 기꺼이 그들의 가슴에 달았고 하나의 역사에서 나뉘어진 동양역사에서 또한 일본(日本)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라 근세기 역사판짜기의 복잡한 메카니즘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복잡한 근세기 역사판짜기의 메카니즘에 의해 일제에 의해 태동한 것이 바로 반도역사이다.

본래 삼한영역이었던 아메리카대륙 중앙에 위치하던 세력인 후금(喉衿) 즉 만주(滿洲)세력들을 서양세력들이 가운데 있다고 하여 중국이라 하면서 시작된 것이고 그 구성원들을 동아시아대륙으로 이동시키면서 20세기 중엽 2차세계대전이 서세의 승리로 완전히 굳어지자 동아시아대륙이 본래의 가운데 중국에서 정치적인 중국 땅으로 정해지면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대륙에서 역사창조와 역사판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차 주장한바가 있다.

여기서 동아시아대륙사를 필두로 중앙아시아대륙사, 러시아사, 한반도사, 열도사가 만들어진 것이며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사도 자동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당시 일제는 한반도에 무조건 삼한역사를 심을 수밖에 없었고 반도역사가 생성되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결국 동양일본군벌세력이었던 일제가 일본역사를 열도에 만들고 안착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과 함께 세계삼한역사를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동시에 한반도에 36년이란 식민기간과 함께 가당찮은 역사 조작질과 농단을 벌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주장이 한편에서는 가설로 단정하겠지만 이런 가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곳곳에서 밝혀지고 있는 반도역사의 치명적인 모순에 있다는 것이고 또한 본 블로그가 파악하고 있는 생물학적 판단사실에서도 한반도 지형적 논리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세계삼한역사사실과의 괴리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보다 더한 것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다수의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러한 모순과 괴리로부터 잉태된 것이란 사실을 현 사학계가 반성하고 느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제 습성적인 조작질의 답습

 

한반도 사학계에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성이 있다.

일찍이 강압시대에 일제가 조선편수회를 만들어 역사농단을 벌일때 과연 어느 역사학자가 제도권에 있어 그것을 몸으로 막았던 사람이 있었던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남의 나라로 인하여 처절하게 찢겨지는 고통을 목격하고서도 못본척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비겁자나 겁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이것은 조선이 망하기 전에도 제도권역사학자들은 아예 전무했고 다만 일제어용학자들만 득실거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역사학자가 없었다는 것은 결국 삼한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애초부터 한반도에 삼한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제 하수인과 충복들은 전부 하나같이 일제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일제역사만을 알았을 뿐이며 일제어용학자라고 해보았자 일제가 요구하는대로 움직여야 하는 거의가 허수아비였을 가능성이 많다.

아쉬운 것은 실제로 상황이 이렇게 심각했다면 해방후 마땅히 건국구성원들이 한반도에 반드시 세계삼한역사 전통을 이으려 했을 것이고 일제의 기나긴 어둠의 늪으로부터 벗어나 나라를 반듯하게 세우려 했을 것인데 어찌하여 프랑스처럼 일제에 협조한 세력들은 모두 매국노로 낙인 찍어 더 이상 매국사학자로 인해 역사가 지금처럼 엉망진창이 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인간 청소를 하였거나 사학계에는 얼씬도 할 수 없도록 엄단의 조치를 취하지 못했던 것일까에 대한 점을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게 한다.

 

이들 매국사학자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은 일제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수탈한 사료등을 세부적으로 조사하는 등 직접적으로 관여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수사관(修史官)으로서 창씨개명한 신석호(申奭鎬:寺谷修三,1904-1981)가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강단사학계의 거두 이병도(李丙燾:1896-1989)가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명확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이들을 옹호하는 자료를 보면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해방후 일제가 없애려던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유리원판을 소각 직전에 빼돌려 일제의 침략상을 밝히는데 기여했다라고 하지만 세계삼한역사 시각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성도 없었고 필요이상으로 일제침략상을 들어내게 하여 또 다른 일제영향력을 도모했던 것이 아닌가 하며 이런 행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의도로 보는 것 중에 예를 들어 유물이 무엇이 있었다거나 어디에 유물을 묻어 두었다거나 언제언제 발굴해라는 지시와 아마도 좌표까지 그려졌을 것이고 향후 지침서로서 사용하도록 했을 것이란 판단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반인들이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물론 한반도역사에 적합한 유물이니 거짓 유물이며 일제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유물심기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병도는 대표적으로 조선사 편수회에 있을 때 한국사를 왜곡하면서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으며 해방후 그의 편력이 눈부신데 국방부전사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위원, 문교부장관등을 거치며 반도역사를 완성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역사가 꺼리낌이 없이 완성된 것은 일제 하수인인 친일사학자들의 적극적인 농간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반도역사는 매국노들의 밥상머리에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어 더욱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만약 드골정권의 프랑스라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실에서 어떤 조치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들의 알량한 생명조차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역사조작질로 어떻게 분탕을 쳤는가 당시 상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한일합방 뒤 한반도에서 약 20만(萬)권의 사서(史書)를 강탈하여 철저하게 소각하였고 1925년 조선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통하여 1937년까지 약 97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朝鮮史)35편>, <사료총서(史料叢書)102편>, <사료복본(史料復本) 1,623책>, <사료집진(史料集眞)3질(帙)>을 편찬하였다는 것은 이때 수많은 사서(史書)들을 엉터리로 조작질한 사실이 있겠지만 그들은 공개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위에 나열된 것은 실제 조작질한 것 이외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되는 것만 열거한 것이다.

20만(萬)권의 사서(史書)라 하였는데 이렇게 많은 사서가 왜 한반도에 존재했을까?

20만권 사서중에 한문사서는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도 한문사서 보다 상위의 언어인 산스크리스트어 사서와 라틴어사서가 주종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싶다.

한반도가 본래 삼한의 역사터전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본래의 삼한영역에서 각기 자발적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열도일본군벌세력들에 의해 유도되어 이동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 아무것도 모르고 삼한영역에서 지니고 있던 사서들을 이동하면서 한반도에 가지고 들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압수된 이들 사서들의 내용을 보면 우리들은 아연실색, 기절초풍할 것들일게다.

바로 대조선과 연관된 사서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사서들을 일제가 전부 수거하고 소각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본래삼한영역을 감추려고 한 짓임을 알 수가 있다.

일제가 사서를 소각하는 짓이나 강탈한 짓과 별도로 조선편수회는 본격적으로 한반도사서를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볼 수 있으나 분명히 어떤 작업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판단하건데 당시 조선편수회가 주동이 되어 고려세력이 무너지는 시점 1923년이후인 1925년부터 1945년 동안 20년간 한 작업한 것은 한반도 사서를 만드는 일과 그 이전에는 없었던 사서를 새롭게 만들었을 확률이 높고 현재까지 한반도에 남겨져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사서들을 이 때 조선편수회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기획적으로 세세하게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문서들을 체계적으로 완성시켰다는 것도 예측할 수가 있다.

일제가 패망이후 열도로 피신하고서도 끝까지 한반도 역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영향력이나 세부적으로도 관계되는 보조사서나 식동물의 편람(便覽)등 한반도 역사와 관계될 수 있는 자료심기에 혈안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고 그들은 패망이란 참담함과는 별개로 한반도 역사관리에 지속적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예를 들어 1910년경 강탈한 사서(史書)중 가치가 인정되는 것은 열도 왕실창고 정창원(正倉院)에 비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패망때까지 완성되지 못한 사적들은 열도로 가져가서 작업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2006년 조선왕조실록 중 나중에 환수받은 오대산사고 74책 중 나머지 47책이 그런 유형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고종실록(高宗實錄)과 순종실록(純宗實錄)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일부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이 두 실록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것이라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일제의 농간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가 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은 일제식민지 기간인 1927년 4월 1일부터 1935년 3월 31일까지 편찬되고 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 마저도 1970년 탐구당(探求堂)에서 상·중·하 3권으로 영인 축쇄한 것이라 하였으니 서적 따위의 원본을 사진으로 복사하여 인쇄하는 것을 영인(影印)이라 하고 축쇄(縮刷)는 책이나 그림을 원래의 것보다 크기만 줄여서 인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크기만 줄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이 조선편수회가 조작질한 사실과 별도로 앞에서 언급한 한반도에 곳곳에 유물심기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엄청난 역사조작행위가 해방후에도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가 완성되지 못하면 일본역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철저하게 한반도 사학자들을 키웠으며 해방후에도 한국의 정치권을 좌지우지 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지원아래 정치적으로 이들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관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놀라운 것은 일제 하수인 일세대 매국사학자들이 죄값도 치루지 않은체 죽고난 후에도 그러한 농간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고 2세대 하수인과 추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형태를 낳았으며 결국 엉터리 역사는 한반도 역사로 굳어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제 망령을 그대로 껴안고 존재하고 있는 열도 사학계의 부끄러운 실상이다.

한반도 사학자들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사학계 사학자들의 습관성, 관습적인 조작질을 보면 충격 그 자체이다.

본 블로그에 올린 한겨레와 연합뉴스등에서 보도된 일본에서 일어난 역사조작 사건들을 시기별로 열거하여 올린"일본은 역사조작국 그러나 자랑스러워하라, 조작해서라도! http://blog.daum.net/han0114/17046171"에서 보면 정말 일본이란 국가가 역사개념이 저질이라는 사실을 금방알 수가 있으며 역사는 고쳐지지 않는다는 정의가 없다.

제 멋대로 조작하면 막을 수가 없고 얼마든지 조작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음을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으로 어떻게 저렇게까지 역사개념이 엉망인가 한마디로 충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우리나라 신문보도이니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는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고 순진하지만 그것이 맞는 이치이다.

그러나 일제의 망령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일본 사학계는 역사고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습관성이며 몸에 배인 못된 습성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이제 역사라고 하면 역사가 될 수밖에 없는 영향력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위 보도기사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일본에서는 사학자는 필요하다면 조작질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때문에 그들은 잘못이라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 또한 큰 죄의식도 없다.

그들 과거 선배나 스승들이 전수한 기술이며 그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웠던 도둑질이다.

현재 남의 영역이 되어버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이러한 토대에서 발생된 습성임을 안다면 그들입장에서는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열도 일본은 신화를 역사로 바꾸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독특한 국가집단이다.

이병도는 고조선은 신화라고 하면서 그것이 역사일 수 없다고 했다.

반대로 일본신화는 일본사기에 버젓이 올라가 있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그들의 천황제가 신화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기원전(B.C) 660년 재위된 초대왕 신무(神武)로부터 줄곳 천황이라고 하면서 이어가고 있는 해괴한 역사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상적이라면 그 동안 세대가 몇 번 쯤 끊겨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전혀 끊김이 없이 장장 2,600여년을 지속적으로 대를 연결하고 있고 현재까지 이어진다고 강변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사이(不可思議)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국왕 아키히토(明仁)를 125대 천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할 정도이고 그들만의 국가집단에서 발호될 수 있는 독특한 독불심리에 의한 것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하든 그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인데 아무도 말릴 국가가 동아시아에는 없다.

하기사 수족같은 친일사학자들을 한반도에 엄청나게 심어두었으니 조작질 본산에서 한 짓을 친일사학자들이 비판하거나 욕할 수 없을 것은 뻔하다.

일제의 영향력은 직접적으로 조작질을 시행한 한반도뿐만아니라 동아시아대륙사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며 아마도 동아시아대륙전체가 일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위 사실들은 일제가 36년간 한반도를 통치하면서 어떤 식으로 역사를 조작하였는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더우기 미국 출신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은 역사 조작질에서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다'라고 격한 표현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짤라 말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무엇이든 인공적으로 꾸며내길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로 ‘호벤(方便)’ 즉 '편의' 또는 '방편'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였고 이것은 일본인 스스로가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오래된 관습에 젖은 것이라고 할 때 한반도 반도역사가 얼마나 이와같은 어처구니에 노출되었으며 망쳐졌겠는가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란 시간이 넘게 흘렀다.

10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 세기가 지나는 긴 시간동안 일제의 조작질로 만들어진 엉터리 역사인 반도역사가 지속적으로 교육을 통하여 한반도인에게 철저하게 세뇌(洗腦:brainwashing)되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것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포기상태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안타까움이 같이한다는 사실이다.

100년의 엉터리 역사교육은 우리의 역사가 아님에도 그것을 역사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젠 세계삼한역사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으며 오히려 낮설다.

세계사 이전 역사가 존재했는지 조차도 모르고 세계사가 삼한역사란 사실조차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반도역사만이 우리의 역사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실제와 다른 비록 엉터리 역사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반복적 교육을 통하면 지금 한반도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속한 한반도인을 참으로 불행한 민족이고 불쌍한 민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제가 강점한 사실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고통도 있었음에도 서양세력으로부터 동정은 커녕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도발을 한 일제보다도 더 가혹한 처분을 받은 분단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던 기막힌 상황은 지금도 반도역사사실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혼란이다.

이러한 이해불가는 올바른 역사를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난맥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을 가지게 된다면 이러한 불리한 상황도 무엇때문이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이란 사실을 어느정도 이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한반도가 분단 된 것은 근세기 벌어진 역사사실에서 또한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죄값일뿐이다.

어쩜 기존 기득권의 주체였던 대조선이 1881년 해체되고 난 후 벌어진 새로운 질서에서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 주체로서의 책임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속 편한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환단고기와 계연수

 

환단고기는 배척될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할 역사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실려있는 내용을 보면 민족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단군조선의 건국과 그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상편에 승려 안함로(安含老:578-640)의 삼성기가 있고, 하편에 고려사람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가 실려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어 이암(李嵒)이 1363년 저술한 단군세기(檀君世紀)는 47대 1,096년에 걸친 단군조선의 편년사가 펼쳐져 있으며 그 다음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저술하고 이맥(李陌)이 편찬했다고 하는 북부여기(北夫餘紀)와 나머지 하나는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太白逸史)가 있는데 우주의 생성을 주로 다룬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환인이 다스렸다는 환국의 역사를 적은 환국본기(桓國本紀), 환웅의 치세를 서술한 신시본기(神市本紀), 단군왕검이 나누었다는 삼한(三韓)중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는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攷)등과 단군신화와 관련된 경전교리(經典敎理)에 관한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고구려·발해·고려의 역사 가운데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대외관계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그리고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사전에 세밀하게 적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 사학계는 이것을 위서 또는 위작이라고 한다.

 

감히 한반도 사학계가 이렇게 거대하고 훌륭한 역사, 민족전체가 지극히 자랑스러워 해야 할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위서(僞書)라거나 위작(僞作)이란 딱지를 붙여 우리와 거리를 멀게 하겠다는 수작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설령 환단고기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반도역사에 찌드는 것보다 백배났다.

반도역사는 우리 대한민국에게는 바이러스같은 역사이기때문에 지금당장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고 싶다.

반도역사는 일제가 만들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작질한 결과물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정사(正史)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강압시대 그들이 역사서를 20만권이나 불태워버렸고 그들이 도둑질한 역사가 있는데 어떻게 정사를 말할 수가 있는가?

반도역사는 만들어 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반도역사를 추종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한반도 사학계는 정신차려야 할 대상이지 뻔뻔스럽게 환단고기를 위서니 위작이니 할 자격이 없다.

 

조선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무엇하던 곳이며 "시코쿠 주조(寺谷修三)"란 일본이름을 가진 신석호(申奭鎬)와 한반도 사학계 거두로 행세했던 이병도(李丙燾)가 조선편수회에서 어떠한 일을 저질렀는지 명명백백 낱낱이 들어난 사실에서 그들은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자가 아니라 엉터리 역사위에 올라선 집단이고 조직일 뿐이다.

 

그들은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을 환빠라고 한다.

물론 나도 그들이 말하는 환빠에 속하기 때문에 세계삼한역사연구를 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오그라진 반도역사만 알고 있던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세계삼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만으로도 환단고기를 사랑할 수가 있다.

 

비록 이유립(李裕岦:1907-1986)이 계연수로부터 이 환단고기를 전해받아 1975년까지 보관해 오던 원본을 어떻게 유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유실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이유립이 기억만을 되살려 원본을 복원했다는 사실이 있어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유립은 강화도 태백교의 교주로서 친일적인 인물이라는 점이 있기때문에 단적으로 믿기 힘드는 것도 사실이다.

1979년에 엇갈리는 출판에서도 원본을 소지 하였던 이유립(李裕岦)은 친일성향이 있다는 설처럼 그가 복원한 원본을 황국사학을 주장하던 일본사학자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에게 넘겼다는 사실 또한 의혹을 짙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환단고기가 말하는 세계삼한역사의 근원까지 무시될 필요가 없다고 짤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하면서 느끼던 것 중에 하나가 이 책의 근간은 범어(梵語)라고도 하는 산스크리트(Sanskrit)로 기록된 것이 실제 원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문이 아닌 라틴어로도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냉정하게 볼 때 환단고기에 대해서 여러가지 제기되는 문제점과 의혹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반도역사는 사라져야 할 역사이며 최소한 나에게는 소설일 뿐이다.

정사라고 할 만한 근거도 없고 실체가 조작질에 의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내가 처음 환단고기를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6년전 1988년경으로 1986년 출간된 임승국(林承國)교수님의 번역본에서부터 시작한다.

반도역사만 알고 있었던 차에 이 책에서 전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약 10년 뒤 1998년 출간된 이일봉선생이 지은 "실증한단고기"까지 접하고 보니 확실히 무엇인가 잡히는게 있었는데 바로 세계삼한역사일 가능성이었다.

그 때 받았던 충격과 머리속으로 들어오는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들은 도저히 반도역사 상식으로는 담을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생각해보면 가히 당시 심장이 팽창하는 듯하고 알 수 없는 희열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줄을 그어가며 정독한 기억이 있다.

이러한 기억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또다른 국가관과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자료에 보면 이 책이 등장하게 된 시점을 1911년이라고 하였으니 1910년에 일제가 눈알을 시뻘겋게 굴리며 한반도에서 사서(史書)강탈 작전이 광적으로 진행될 때이므로 시기적으로 상당히 급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더욱 사실성이 보인다.

이러한 일제가 난동질하며 엄중한 위급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여러지인들에게 전수받아 보관하고 있던 사서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4권의 책을 하나로 묶어 집필한 사람이 바로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독립지사(獨立志士)라고 알려진 계연수(桂延壽:1864-1920)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묶어 집필한 후 1911년에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한 이암의 후손인 독립지사(獨立志士) 이기(李沂)의 감수교열(校閱)까지 받아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筆寫)한 뒤 초간본 30권을 인쇄했다는 책이 바로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이 때 독립지사라 함은 실제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세력이겠는가도 생각해본다.

아니면 1919년 인도에서 벌어진 삼한복원운동의 일원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던 한반도 사학계와 그 추종자들은 이렇듯 어렵게 태어난 환단고기가 무엇때문에 바로 발표하지 못하고 70년이나 지난 후 1979년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시비 아닌 시비를 걸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10년 이후부터 솔직히 해방까지 상식적으로 공개할 수 없었을 것이 뻔하고 해방후부터 1979년까지 친일성향의 정권이 있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자유스럽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에 대한 시비를 하는 사학계는 친일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니 일제강압정치가 그들에게 대수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며 1979년 11월을 택한 시기가  환단고기가 세상에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굴곡진 현대정치사와 전혀 무관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여기서 환단고기를 탄생케 한 계연수란 인물에 대해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잠시 생각해 본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계연수는 황해도(풍해도) 수안계씨(遂安桂氏)라고 하지만 정작 한반도 수안계씨족보(遂安桂氏族譜)에는 계연수란 이름이 없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계연수(桂延壽)는 한반도사람이 아니라 대조선인일 가능성이 높게 보는 것은 확장적 민족주의(Expansionsit Nationalism)관념으로 생각해 볼수가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으로 볼 때 수완군(遂安郡)은 황해도(黃海道) 또는 풍해도(豐海道)임을 알 수 있는데 본 블로그의 글 "대승(戴勝)후투티(hoopoe)로 본 조선열수(朝鮮洌水)의 위치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7"에서 순암선생문집 제10권"~ 관서지도(關西地圖)를 가지고 맞추어 보면 대동강의 근원이 과연 셋이 있는데, 하나는 황해도의 수안군(遂安郡)에서 나오는데..." 문장의 수안군은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강 상류지역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이 계연수란 이름의 정체를 굳이 따진다면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닌 확장적 민족주의 대조선인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가장 일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역사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막시밀리안 카를 에밀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Max Weber:1864-1920)가 아닐까 하는데 몰두하였던 역사연구와 생몰년(生歿年)이 똑 같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당장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확장적 민족주의에서 볼 때 대조선인으로서 역사학자, 생물학자, 물리학자등 학문적인 인재들은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추측을 낳고 그런 상황은 삼한역사말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는 것도 무시될 수가 없다.

 

불의 발견과 또 다른 인류이동경로

 

세계삼한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사실 중에 하나가 환국을 세우신 환인께서 바로 불을 세상에서 처음 발견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교화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로 환단고기의 삼성기에서 나타나는 기록을 전제한 것인데 본 블로그의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의 흑수백산은 삼한역사의 터전(불의 발견)편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였던 바가 있고 아래에 내용을 병기했다.

[三聖紀全 上篇]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고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며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 씨(氏:세습관명)라고 하면서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하였으니 환인은 일곱 대를 전하였지만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는 기록이다. 또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長生

우리 환국이 세워질 때 시베리아에 하늘을 홀로 변화시키며 최고 오래된 한분의 신(神)이 있었다.

그 신(神)은 광명이 우주를 비추게 하며 생물이 권리를 얻게 하였고 만물을 창생하였다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들 수가 있다.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고..."문장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한 불의 발견 기록이며 인류에게 처음 교화를 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더욱이 최고 오래된 한분의 신(神)인 환인께서는 광명이 우주를 비추게 하며 생물이 권리를 얻게 하였고 만물을 창생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곧 '제네시스' 창세기(創世記:Genesis)로서 인류의 시원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록을 보고서도 감흥이 없다면 세계삼한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인류가 처음 불을 발견한 것에서 서양역사에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불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upright man)가 살았던 142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서양학자들은 말하는데 이것에 주요 이유로 케냐의 체소완자(Chesowanja)에서 짐승의 뼈가 박힌'뗀석기' 즉 올도완 석기(Oldowan culture)가, 불에 탄 진흙과 함께 나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어 대략 150만 년 전인 이전에 히말라야산맥(Himalayas)을 넘어 아시아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도 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오래된 것임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에 구체적인 사료의 기술은 환단고기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방사능동위원소(radioactive nuclide) "탄소(C)14" 조성비(組成比)를 측정하는 방식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放射性炭素年代測定法:Radiocarbon dating)에 의해 구분되는 것으로 약 258만년에서 1만년까지를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즉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라 하고 그것을 다시 후기 타란토절(Tarantian), 중기 이오니아절(Ionian), 전기 칼라브리아절(Calabrian), 전기 젤라절(Gelasian)라 하는데 이 중에서 타란토절(Tarantian)을 126,000년 부터 11,700년까지라 한 것에서 볼 때 불을 발견했다는 환국력년이 63,182년이라는 력년은 이 타란토절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아시아까지 진출한 사실과 같이 묶을 수 있고 또한 불의 발견과 함께 인류시원까지 묶을 수 있는 명확한 수치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아에 있다고 하는 히말라야산맥의 정확한 위치가 본 블로그의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 남북으로 걸쳐져 있는 백산(白山) 산맥군을 말하는 것이라고 밝혔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아시아 히말리야는 근세기에 만들어진 지명일 가능성이다.

이것은 실제로 어마어마한 추증이다.

그곳 알래스카 데날리 국립공원(Denali National Park)에 '대산(大山)'이란 뜻의 데날리(Denali) 또는 매킨리 산(Mount McKinley:6,144 m)이 있다는 것까지 확인하였던 바로서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산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는 백산(白山)을 말하는 것이며 '히마라야'가 드라비다어(Dravidian) '히마라이'로 읽어지고 '히' 역시 '희다(白)'의 '히'이며 '산(山)' 역시 드라비다어(Dravidian)로 '마리, 마라이'라고 하였으니 '히마리' 히마라이''히마라야'로 나타나 모두 '백산(白山)'을 뜻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아시아히말라야'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의 산맥군이 바로 '히말라야'란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근대사는 아시아대륙 히말리야만을 정의하고 북아메리카대륙은 아예 모든 가능성에 완전히 배제하여 빼버렸다는 모순이 있다 것이다.

만약 히말리야가 아시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라고 할 때 인류 최초 이동경로가 달라 질 수 있다는 문제까지 생긴다.

 

인류의 최초 이동경로를 보아도 매우 모순된 이야기가 있다.

기존 고대사학자들은 인류원인인 호모에렉투스를 17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阿弗里加:Africa), 아시아(亞細亞:Asia), 시베리아(Siberia:Seber:斯白力), 인도네시아(印度尼西亞:Indonesia)등에 걸쳐서 생존하였다고 하였으나 왠지 모르지만 아메리카대륙만은 빼버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대륙에만 치중한 것 같은 의혹이 없지 않다.

 

그러나 과연 인류가 처음 아프리카 동중부에서 생성되어 이동경로를 북쪽유럽쪽과 동쪽아시아쪽으로만 한정시켰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대륙에서 유럽쪽이나 아시아쪽으로 이동하는데는 인류가 가장 힘들어 했던 장애가 있다.

처음 인류가 추위보다는 매우 건조하고 매마른 무더운 열대기후를 이겨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이 러한 기후조건을 최대의 장애요인으로 인식되었다면 북아프리카 대륙 가로걸쳐 매마른 땅 즉 사막이 가로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인류원인이 생기기 전 250만 년 전에 생겨난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Sahara Desert:940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는 처음 열대우림에 생활했음을 다윈의 진화론에서 볼 수가 있다.

지금도 구글위성을 살펴보더라도 북아프리카는 거의가 사막천지이다.

사하라사막(Sahara Desert)이 250만 년 전에 생겨났다는 것은 인류이동이 시작된 시점 150만년전이라 할 때 사막이 생긴 이후 인류가 움직인 것으로 100만년이 더 흐른 이후이고 본래 인류탄생지가 아프리카대륙 중동부지역 캐냐라고 한다면 오히려 서부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사막이 가로막고 있어 북쪽으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사막을 넘어 이동하는 경로보다는 훨씬 더 인류에게 유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인식하는 친화적인 환경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가 이동하였다면 바다 항로로도 가능한 것으로서 일찍부터 돛단배를 사용했다고 본다면 사막이 있는 북쪽행로보단 오히려 아프리카대륙 초원 열대사바나(Aw)기후가 있는 서중부지역이 유리한 것이며 바다 건너 같은 사바나지역인 남아메리카대륙 중북부(中北部)지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기상학자인 알프레트 베게너(Alfred Wegener:1880-1930)의 대륙이동설(大陸移動說:Continental drift theory)에서 페름기(Permian Period)라고 하는 2억 2천 5백만년전에는 지구의 전 대륙이 거의 붙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판게아(Pangaea)상태에서 남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붙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라면 남아메리카 중북부에서 아프리카대륙 서중부지역이 근원적으로 이어졌다는 개념에서 친화적인 환경이 지배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때문에 본 블로그의 글 "코끼리(象, Elephantidae, elephant)가 남미에 없는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6"에서도 남아메리카대륙에 코끼리(象, Elephantidae, elephant)가 절멸했다는 것에서도 본래 없었던 것을 일축하고 아마도 근세기에 대량으로 학살을 자행하여 절멸시켰다는 것과 인위적으로 이동시켰을 가능성을 같이 보아 같은 이론으로 코끼리(象, Elephantidae, elephant)이동경로를 개진한바가 있었다.

 

문제는 가장 자연스러워야 할 인류이동경로가 아프리카대륙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사하라사막이라는 지형적 장애가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결국 가까운 것 같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반도로 거쳐 유럽으로 인류가 퍼져나갔다는 것과 아시아대륙으로 넘어 들어갔을 솔류트레문화가설(Solutrean Hypothesis)은 이러한 관점에서 제고 되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동 가설로서 대륙교가설(Land Bridge Hypthesis)이 있는데 대륙과 대륙사이에 놓여 있는 바다, 해협을 마치 다리 건너듯이 넘어 이동하였다는 설을 말하는 것으로서 비록 남대서양이 다리까지라고 할 순 없지만 태평양처럼 넓은 바다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건널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본다면 실제로 자바원인이나 북경원인은 아시아를 기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대륙을 기원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주요 핵심이다.

최초로 직립보행(直立步行)을 하였다고 한 자바원인(Java man)이 근세기에 갑자기 생성된 것은 1891년 당시 네덜란드의 군의관이었으며 진화론자(進化論:evolutinary theory)인 외젠 뒤부아(Eugène Dubois)가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에 근무하면서 우연히 섬의 한 곳에서 유인원의 화석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두개골 덮개와 한 개의 넓적다리뼈, 그리고 몇 개의 이빨을 1년의 간격을 두고 약 15 미터가 떨어진 두 개의 지점에서 각각 발견하고 이를 ‘자바원인’즉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발표함으로서 생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사람은 마치 그것을 미리 알기나 한 것처럼 초능력을 발휘하여 그렇게 멀지 않는 15m 간격에서 거의 유인원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화석을 발견했다는 것은 근세사의 수많은 모순을 말하고 있는 듯한 소설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이 자바원인은 처음 학계에 발표될 때부터 그 정확한 정체에 관하여 학자들간에 서로 의견이 분분했던 화석이었다는 사실이 있으며 이를 발견한 외젠 뒤부아(Eugène Dubois)자신조차도 나중에 이 화석은 영국의 동물학자 존 에드워드 그레이(John Edward Gray:1800-1875)에 의해 1870년 명명된 학명 긴팔원숭이과(Hylobatidae)의 것이라고 자신의 처음 발표를 부인할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가 발표한 화석의 출처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아시아 자바가 아니라 아메리카대륙 카리브연안의 자바섬을 찾아야 하는 것이 정확한 결론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근대사는 끝까지 카리브연안에서 이것들이 발견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모순을 잉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선상에서 긴팔원숭이과(Hylobatidae)의 분포지도 아시아의 인도 북부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보르네오 섬, 자와 섬(Java Islands)등의 열대 아열대우림에 분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변할 수가 없다.

사실이 이러할 때 인류이동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긴팔원숭이과의 화석이 직립원인으로 기억되면서 교과서와 박물관의 전시를 통하여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쳐지고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역사에서 이야기 했듯이 엉터리 교육이 가져다 주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결국 네덜란드가 당시 식민지했다고 하는 자바섬의 위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더 앞으로 나아가 인류시원을 밝히는 문제에서 인류 이동방향이 처음부터 매우 잘못 설정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50만년전 인류 대이동 행로문제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 아프리카대륙 서중부지역에서 남아메리카대륙 중북부지역으로 그렇게 넓지 않는 바다를 건너 이동하였을 가능성을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도 필연적으로 아메리카대륙에 귀착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인류의 대이동행로이고 방향이라면 자연스럽게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는 다리를 넘어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결국 아메리카대륙이 인류문화의 시원이 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근대사는 한사코 아메리카대륙을 인류문화의 시원으로 보지 않는다.

아메리카대륙에서의 진보된 인류문화는 근세기에 콜럼버스를 포함한 항해시대의 항해자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정리하고 못을 박고 있다.

이것이 바로 솔류트레문화가설(Solutrean Hypothesis)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바원인(Java man)이나 북경원인(北京原人:peking man)은 솔류트레문화가설(Solutrean Hypothesis)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영국 생물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1882)이 1871년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에서 말한 인류의 조상이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直立步行)을 하게 된 이유가 기후의 변화로 열대우림이 줄어들고 넓은 열대 초원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추측한 사실에서 보더라도 아프리카대륙 서중부와 남아메리카대륙 북중부의 기후가 넓은 초원의 기후인 열대 사바나기후(Tropical Savanna)임을 감안할 때 똑같은 가설임을 알게 한다.

때문에 근세기에 동인도제도라는 것도 이와같은 모순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동남아시아를 동인도제도라고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근원적으로 의혹을 가지게 한다.

 

 

 

그렇다면 150만년전 인류이동방향의 역방향이 성립이 된다.

북아메리카대륙이 아시아가 될 수 있으며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 위치한 백산 산맥군이 히말라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근본적으로 근대사가 서양위주로 편중된 역사임을 감안할 때 그것이 모순이라면 이와같은 사실에서 또 다른 인류대이동 경로 환경을 따져 볼 수 있는 토양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한다.

아시아대륙의 히말라야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에 위치하는 히말라야 할 때 세계삼한역사는 더욱 정확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환국력년이 63,182년이라는 사실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과 이것이 구석기시대 126,000년 부터 11,700년까지의 타란토절(Tarantian)과 일치한다는 사실도 무시될 수 없다.

또한 환단고기에서 말한 인류시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의 발견과도 자연스럽게 일치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래에 이야기 할 환국의 실존가능성까지 높게 하는 강역(疆域)까지 일치한다면 기존 서양사가 고집하는 사실만으로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이 모든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

혹 그렇다면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인류원인이 17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 아시아, 시베리아, 인도네시아등에 걸쳐서 생존하였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아메리카대륙을 중심으로 하는 지명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재고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지금도 본 블로그에서 수많은 생물학적 근거로 확인하고 있는 중에 있다.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메리카대륙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중요한 대륙이다.

이렇다면 환단고기 삼성기(三聖紀)에 기록되어 있는 환국(桓國)의 12연방국의 강역은 어디일까?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제석천(帝釋天:indra) 환인(桓因)께서 개국한 환국의 12연방국가(聯邦國家)는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또는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이라 하였으며 이 연방국가의 영토(領土)가 자그마치 남북(南北)이 5만 리(五萬里:≒20,000km)고 동서(東西)가 2만여리(二萬里:≒7,800km)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글어스로 대륙간 거리를 재어보는 방법을 택한다.

비록 앞에서 말한 반도역사로 인한 암울함은 이루다 말할 수 없도록 비참하지만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간 연결되어 있는 인터넷으로 고급정보뿐만아니라 모든 지식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축복이 서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내려진 것이 아닌가도 한다.

이것에 더 하여 서양인들이 집중적으로 세계사를 만들기 위해 배포한 오래된 지형삽화나 그림, 짤라진 지도 등으로 현재 세계 곳곳의 지형과 비교하면서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발명된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영웅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라고 할지라도 나는 신으로 모실 수가 있다.

그것이 발달된 과학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세계삼한역사찾기로 보았을 때 사라진 역사를 명확하게 복원시킬 수 있는 방법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신의 창조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기대한다.

비록 이 신 같은 창조물이 아직 발명이 안된 마당이지만 희망적으로 보는 것은 이미 나 스스로가 정말로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계연수선생께서 이러한 환경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을 한 것일까?

설령 환단고기에서 말한 환국 강역의 거리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이렇듯 인터넷환경이 없었다면 실측을 할 수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국이 있었다면 어떤 대륙에 존재하였을까 하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아시아대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나는 아메리카대륙일 가능성을 높게 본다.

구글 위성을 재어보았다.

 

 

 

위 두 그림 사진은 자세 보자.

아시아대륙에서 동서와 남북을 측정한 것이다.

동서길이가 아시아대륙 베링해 극단지점인 웰렌(Uelen)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벨라루스의 카라산티카(krasatinka)까지의 거리가 8,000km로 나타난다.
그러나 유럽과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환국 동서영역이 불확실한 점에서 자신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동서보다 남북에서 나타나는데 아시아대륙에서 남북길이를 재어 20.000km가 되려면 러시아 북해의 극단 볼셰비크섬(vilkitsky)에서 뉴질랜드 땅끝 더니든(Dunedin)까지 17,000km의 거리밖에 재어볼 수가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본래 환단고기에 기록된 강역의 거리측정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거의 한계도 있지만 남북 거리 측정에서 육지로 연결된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러나 아래 두 그림사진을 보면 아메리카대륙을 기준으로 할 때 아시아대륙에서 느끼던 부족함이 없어지는 것을 알 수 있고 좀 더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위 첫째 그림사진에서 남북(南北) 5만 리(五萬里:≒20,000km)를 측정해보니 북쪽 베링해 북단 알래스카(Alaska)의 프린스오브웨일스곶(Cape Prince of Wales)에서 남아메리카대륙 혼곶 가까이"불의 섬" 티에라델푸에고제도(Tierra del Fuego)까지의 거리가 구글지도로 약 18,000 km 정도가 된다.

비록 약 2,000km 가 부족하지만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시아대륙은 뉴질랜드까지 바다를 수없이 뛰어 넘을 수밖에 없는 거리를 재어야 했지만 아메리카대륙에서는 온통 육지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정확성에 대한 신뢰성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아시아대륙보다는 아메리카대륙이 더 가능성이 있는 강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둘 째 그림사진 동서(東西)가 2만여리(二萬里:≒7,800km)라는 것에서도 북아메리카대륙 알래스카의 프린스오브웨일즈 곶에서 동쪽 최단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Newfoundland and Labrador)의 세인트존스(St. John's)까지가 약 7,600 km 로 나타난다.

거의 일치하는 숫자이다.

아시아대륙에서는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구분이 불가능하였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의 동단과 서단은 육지로 구분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것에 세계삼한역사 기록을 더 한다면 "천해(天海)의 동(東)쪽 땅이며 파내류(波奈留)의 나라"라고 하였다는 것에서도 천해(天海)가 곧 북해(北海)임을 알 수 있고 북아메리카대륙의 북부를 가로 막고 있는 큰 바다이며 파내류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파내류(波乃留)를 파미르고원이라고 하지만 아시아대륙의 파미르고원을 말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고원이라고 하지만 고원이 아니라 초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본 블로그의 글 "인더스(Indus)는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25"에서

山海經
海內經第十八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之

위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을 보면 동해지내(東海之內)와 북해지우(北海之隅) 즉 대동양이라고도 하는 동해의 안쪽과 북해(北海)의 귀퉁이에 나라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분명 조선(朝鮮)과 천독(天毒)이 있었다는 사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대륙사에서는 북해(北海)를 근거도 없이 시베리아호수라 하고 있는데 귀퉁이라는 말이 무색하며 본 블로그에서 시베리아가 있을 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한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을 무언인 기록으로 세세하게 환단고기는 잊어버릴까 한자한자 절박하게 우리에게 알리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은 환빠니 무엇이니하여 모른체하는 것을 넘어 위서이니 위작이니 하는 것도 부족하여 아예 우리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기막힌 풍토에 젖어 있다는 사실에서 비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삼한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일제가 뿌려놓은 자학적인 노예근성의 발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듯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만년(萬年:10,000)의 삼한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혹 배반의 무리들이 있어 그것을 잠시 숨기고 감출 수는 있겠지만 하늘이 말하는 천리이기에 가증스러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에서 만든 세계최초의 권총

 

세계삼한역사가 왜 위대한가?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본 블로그의 글 "믿을 수 없는 근대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7"에서 논했듯이 엉터리 없이 일제가 임진왜란을 만든 것은 궁극적으로 몹쓸 일본 역사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남의 역사를 고치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근세기에 신흥세력인 거대한 자본력을 가진 서세가 세계지배권을 차지하면서부터 시작한 것은 바로 하나의 역사에서 동양사와 서양사로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풍부한 자본력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사들였고 그것으로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동양은 아시아대륙이라는 설정과 서양은 유럽대륙이란 설정이 정해지면서 하나의 역사가 아시아대륙에서 동아시아대륙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유럽에서는 서양사가 만들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동아시아대륙사가 아시아대륙역사의 바탕으로 역사판짜기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고 그 주체세력은 바로 일제에 의한 것이다.

한반도에는 삼한과 조선역사를 만들고 열도에는 근거도 없이 그들의 일본역사가 생성되게 한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역사 주체인 거대한 대조선을 동양사에 집어넣고 보잘 것 없게 작은 나라로 만들었고 아예 서양사에는 자취도 찾아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들어나고 있는 모순들이며 왜곡된 형태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문제들인 것이다.

일제는 강점기를 통하여 한반도에 거대한 대조선을 꾸겨 넣고 세계삼한역사를 꾸겨 넣기 시작하였다. 

중앙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하는 후금과 만주족을 중국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 중국의 속국으로 한반도 조선을 만들었다.

한반도 조선을 나약하게 만들면서 역사적으로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까지 덧 씌워 열도에는 대몽골제국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신화 같은 역사가 기획적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일본역사라고 하였다.

이것과 함께 왜구침략사가 동시에 인위적으로 생성된다.

 

가령 애초부터 한반도에는 삼한역사(三韓歷史)의 한문사서(漢文史書)가 없었고 때문에 관리할 사서(史書)가 전무했다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대조선의 역사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등 근세기 내로라 하던 인재들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의 실증은 본 블로그에서 수많은 생물학적 판단을 하면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었던 맹점이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조선말에는 그 흔하디 흔한 지식인들이 만들어진 인물 이외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있었다고 한다면 조선말기에 실학자(實學者)란 미명으로 팔방미인들만 사서를 차지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지식인들이라면 그것은 조작된 지식인들이다.

실학자가 감내 할 수 없는 역사사실과 현격한 과학적 차이에 의한 괴리가 분명하게 있다는 점을 곳곳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반도역사에서는 실학자가 만능이 되어야 하겠지만 만능이 필요없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막힌 상태에서 이글을 읽는 당신이 직접 일제라면 한반도역사, 일본역사, 그리고 동아시아대륙역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일제가 되어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특별한 인재가 없으니 반대세력이 없어 일제에게 거추장 스러울 것이 없다.

일제가 목적한 일본역사만들기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때까지 보관하고 있던 사서들은 이미 벌써 온통 불에 타 없어지고 사라졌다고 핑계될 가장적절한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임진왜란이란 가상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곳곳 시대별로 난이나 전쟁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이란 사건 장에서 주인공이 된 왜구가 감히 조선을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일제가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왜구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은 한반도 조선이 나약한 것도 있지만 국가로서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고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나타내 역사를 대하는 사람들이 피해의식이나 강박관념, 노예근성까지 자연스럽게 유발될 수 있도록 처참한 역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결점을 가진 역사란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최대한으로 왜곡하고 사실을 조작질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변명이 불가능하게 나락끝으로 내몰 수 있다면 그렇게 함으로서 역사를 접하거나 배우는 쪽에서 완전하게 수긍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 하나만 들고 넘어가겠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구의 주무기가 새총이란 뜻의 조총(鳥銃)이었다고 한다.

즉 새를 잡는 총이지 사람잡는 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용어이다.

반도역사에서는 이것을 풀이하길 하늘을 날으는 새를 쏘아 맞혀서 떨어뜨릴 수 있다(能中飛鳥)는 뜻으로 해석한 것인데 실제로 조총은 가볍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명나라에서는 화승총(火繩銃:matchlock)이라고 하였으나 반도역사는 똑같이 조총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도 근원적으로 하나의 역사란 것을 전제하면 반도역사에 말하는 조총이라는 것은 원시적인 전장식 화기 아르케부스(Arquebus)에 가깝고 개량형 전장식 화기 머스킷(Musket)은 오히려 조선에서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조총이 아르케부스가 맞던 아니던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반도역사가 본래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사실에서 역사학자라 할지라도 구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왜구의 소화기 조총이 신무기라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을 뿐만아니라 머스킷이란 명칭 근원이 프랑스어 무스켓(mousquet)에서 나온 것으로 라틴어 무스카(musca)의 비행 또는 참새 매(sparrow hawk)에서 나왔다고 하니 반도역사는 이것을 본 땄다는것도 알 수가 있다.

특히 반도역사가 절대적인 신뢰성을 잃어버린 것은 그 내용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양사에 비해 애매모호한 역사기록이 거의 대부분이고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가 생물학적 판단하는데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는 것을 토로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조총도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왜구가 이 조총을 습득할 수 있었던 역사를 보면 16세기 포르투갈의 모험가 핀투(Fernao Mendez Pinto)가 1542년경에 폭풍우를 만나 일본의 규슈 남쪽에 있는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하였고 이 섬의 영주에게 포르투갈제 화승총(아르케부스)을 바쳤다는데 부터 시작된다.

거의 매번 이야기 하고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지금의 열도 섬 종자도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 섬이 있었다면 카리브연한에서 찾아야 할 섬이다.

그러나 당시 마카오에 체류하였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1532–1597)가 쓴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서는 당시 왜구가 가질 수 있는 화승총 즉 화포가 남자 한 사람이 어깨에 지고 운반하기엔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이 이야기가 맞던 아니던 간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즉 조총은 가볍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전혀 소총 따위 같은 것이 없었다고 알려진 당시 조선에서 1579년에 제작된 승자총통(勝字銃筒)이란 소화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총은 자료마다 각기 다르게 풀이하고 있지만 기존 세종때 만든 소총의 단점을 개량하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였으니 기존 소총보다 진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총의 부리를 길게 하여 사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였다는 것으로서 나타나며 사거리가 600보라 하였으니 거의 700-800m 거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료마다 다르지만 일본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 밖에 되질 않는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일본역사가 아닌 반도역사가 오히려 우리 것을 낮추고 보잘 것 없게 만들기에 바빴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얼마나 조작질을 세세한 곳까지 침투하였는지 알 수가 있다.

왜구는 조총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군사는 변변한 소화기도 없이 구식 칼이나 창, 그리고 활정도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정은 반도역사가 아니면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유럽조총기술보다 일본조총제조기술이 뛰어났다고 하고 있는 어처구니가 전 역사책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 역사책이 정말 우리역사책이 맞는지 의심이 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가 벗어나지만 근대사의 조선말기 조선여인들의 차림새에서 젖무덤을 그대로 내보이는 자세를 취한 사진들이 여기저기 떠 돌아다니는 것을 보더라도 일제가 유도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세계삼한역사 주인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조작질과 각색의 달인들인 서세와 일제골수분자들이 무조건 대조선의 이미지를 깍아내리려 광분하였던 결과라고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하기사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서세의 정체가 유럽이 본거지라고 할지라도 유럽이나 일본은 같은 역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유럽총이 어디에 있었고 일본총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따진다는 것은 지극히 불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마상에서 사용하는 권총:세계삼한역사연구자료]

 

우리가 충분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성이 있는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에서 세종때 세계에서 최초의 권총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6월 27일(을유)
세총통·피령전 등의 군기를 평안도에 보내다
○乙酉/傳旨平安道都節制使:
前啓: “體探人雖齎體小銃筒, 倉卒之間, 未易放射, 不須造作。” 然以軍器監所造細銃筒試之, 齎持放射, 竝擧便易。 雖不合於體探人之用, 對敵相戰, 馬上多齎, 各自放射, 甚爲便益。 危急之際, 雖兒童婦女, 可執以放, 故今送細銃筒一百五十、皮翎箭一千、鐵箭一千五百, 隨宜用之。 皮翎箭則可依樣作造
평안도 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전일에 아뢰기를, ‘정탐꾼은 비록 몸이 작은 총통(銃筒)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창졸간에 쉽게 쏘지 못하니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고 하였으나, 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細銃筒)으로 시험하니 지니기와 쏘기에 모두 편리하였다. 비록 정탐꾼이 쓰기에 합당하지 못할지라도 적과 서로 마주하여 싸울 적에는 말[馬] 위에서 많이 가지고 각자가 쏘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며, 위급할 즈음에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가지고 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세총통 1백 50개와 피령전(皮翎箭) 1천 개, 철전(鐵箭) 1천 5백 개를 보내니, 마땅한 대로 쓰고, 피령전은 모방하여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위 사료를 보면 조선에는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던 세총통(細銃筒)이라 하여 세종14년(1432)에 창제된 휴대 총통으로 크기가 아주 작아서 마상에서 쏘기에 적합할 정도이며, 그 유지와 조작도 쉬워서 아녀자와 어린이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 사실이다.

이것은 16세기에 거의 유럽에서 사용되던 피스톨(拳銃:Handgun, Pistol)과 같다.

서양사료에 화승식 격발 방식을 설명한 최초의 문헌은 1475년의 것이며 그보다 40여년 전에는 용두의 개념도 출현해 있었다고 하였고 특히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삼한제국으로 알려진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1299-1923)보병대의 약10만명의 정예군인인 예니체리(Janissaries:New Soldier)군단은 144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화승총을 채택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종14년이라면 거의 같은 시기이며 오히려 더 빠른 시기이다.
또한 피스톨(pistol)의 중세(1550-1570)프랑스어 삐스톨레(pistolet)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Pistoia(designed to be fired from horseback:)즉 "말에서 발사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소형 총"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놀랍게도 조선이 이 총을 개발할 때 여진족을 물리치기위한 것도 있지만 말 위에서 쏘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유럽기록에 동양과 서양이 분리되면서 조선의 기록을 들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조선에서 제일먼저 피스톨을 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조차 잘 믿으려 하지 않고 잘 믿지 못한다.

반도역사가 워낙 피해의식이나 강박관념, 노예근성만을 키우도록 폐해를 주었기 때문에 이런 기막힌 심리가 나올 밖에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래 그림 사진은 삼한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판정되는 합스부르크왕가의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1500-1558,재위:1519-1558)의 2연발식 바퀴식 방아쇠 권총임을 알 수 있는데 세종14년인 1432년때보다 한참 뒤에 권총(hand gun)임을 알 수가 있고 그 아래 그림에서는 한층 더 발달된 모양을 하고 있지만 30년전쟁(1618-1648)때 그림의 권총이라고 할 때 일찍이 조선이 개발한 권총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모양은 엇비슷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1500-1558,재위:1519-1558)의 2연발식 바퀴식 방아쇠 권총[세계삼한역사연구:자료 한부울]

 

                                 [30년전쟁(1618-1648)때 권총:세계삼한역사연구자료]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임진왜란 성격이 짙은 네덜란드 공화국(Dutch Republic:1581-1795)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시기가 1581년부터 1648년까지의 전쟁을 꼽을 수가 있어 하나의 역사에서 나뉘어진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런 사건들에서 동양사를 주관한 일제가 임진왜란을 각색하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때 비로소 유럽에서 머스켓이 본격적으로 사용될 때이다.

 

위에 조총이라는 무기가 언뜻 반도역사만을 알고 있는 한반도인에게 퍽 공포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의미가 없다.

즉 조작질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거짓 사실을 창조하고 그것도 모잘라 엉뚱하게 유럽사를 빌려오는 조작질까지 서슴치 않았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날조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목적한 바는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조선이란 나라 자체를 약하게 만들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역사근원적으로 본래 나약하고 의존적인 국가임을 부각하는 것이었으며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인들의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뿌리깊은 당파싸움에 의한 정치적인 분열상과 대신들의 전통적인 부정과 부패성 그리고 제왕의 편협적인 유교사상에 의한 폭정들을 기정사실화하여 꾸민 것이 반도역사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반도역사의 필요성을 구지 따진다면 일제가 나서 도탄에 빠진 조선백성을 구한다는 논리를 세우는 엉뚱함이 있었고 결국 썩을 대로 썩어빠진 조선을 굴복시키고 식민지 시키는 것은 그들의 뜻이 아닌 조선백성들의 뜻이라는 사실을 날조하였으며 그들이 저지른 모든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킬 수 있는 조건에 부합될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뻔뻔함을 들어내는 철면피같은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말

 

우리는 여기서 냉정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한반도 사학계 뿌리 깊은 친일사학자들의 하수인들이 위에 언급한 일제를 대변하는 것으로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한, 그들이 기득권세력으로 살아남는 한 캄캄한 어두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울하기만 한 한반도 역사 환경은 언제까지고 암흑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삼한역사라는 사고의 틀을 가진 다는 자체가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환단고기를 믿었기 때문이며 세계삼한역사관은 혼탁한 이 시대에 없어서 안될 주요한 우리민족의 혼이며 희망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반도역사에 심하게 찌들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삼한역사에 대한 남다른 철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일게다.

반도역사만 생각하면 진저리 치다가 선잠에서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우리 한반도인이 아니고서는 알 턱이 없다.

하루빨리 벗어나고 픈 마음이 있다고 하여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족쇄에 발이 묶여 벗어날 수가 없는 형편이지만 그렇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릴 없이 세월만 보낼 수는 없다.

우리민족은 참으로 불쌍한 민족이다.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그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학이다.

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은 태생적으로 불행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우리의 역사속에는 자랑(pride), 자존(自尊), 존엄(尊嚴), 자부심(自負心), 긍지(矜持), 자긍심(自矜心), 우월감(優越感)이란 품격있는 단어가 분명하게 그것도 무수히 많은 사서들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충복과 그 하수인들의 의해 철저하게 난도질을 당한 이유때문에 그러한 자랑스러움에 대한 것은 씨알조차도 찾아 볼 수가 없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반도역사이다.

온통 오욕(汚辱), 수치(羞恥), 모욕(侮辱), 굴욕(屈辱), 치욕(恥辱), 혐오(嫌惡), 핍박(逼迫)과 학대(虐待)같은 자학적인 단어, 피해의식의 단어만 생성되게 하여 환단고기가 기록한 위대한 역사의 자존과 혼은 찾을 수조차 없을 뿐만아니라 우리의 참역사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반도역사에 찌들은 우리들은 허구한날 자학하고 피해의식을 쌓으며 필요이상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구성원들은 방심하거나 잘못하면 또 식민지신세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인식하게 한 반도역사에서 뚜렷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수없이 부귀영화를 누린 일제충복처럼, 하수인처럼 시의적절 잘 행동하여 자기만 호의호식할 수 있는 노예근성까지 키우는 것이다.

늘상 핍박받는 역사만이 우리의 역사라고 가르치는 현실을 어린 청소년들은 머리로 정화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이 걱정이다.

나이가 좀 더 먹어 자기 삶이 힘들어지면 또 삶의 관문을 통과 해야하기 때문에 반도역사가 잘못된 역사라 할지라도 외우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지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어린 학생들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나에게 묻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여도 단호하게 반도역사배우기를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 특별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들에게 삶이 있기 때문에 반도역사를 거부하는 것이 삶을 망치는 일이라고 할 때 섣불리 권장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참으로 잘못된 역사때문에 겪어야 하는 사회갈등역시 심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된 역사라 할지라도 언제까지고 지속적으로 암기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지식으로 상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몹쓸 현실이 분명하게 있다.

이것이 오늘날 벗어던질 수도 없는 대한민국이 가진 멍에이기도 하다.

 

교육은 100년 대계(百年大計)라고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진실의 역사가 아니라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반도역사로 백년대계를 또 다시 만들다간 미래 역시 과거 100년과 마찬가지의 추악하고 더럽고 오욕과 치욕으로 점철된 자학이 난무하는 역사가 우리 후손들을 맞이 할 것이 뻔하다.

작금의 벌어지고 있는 어지러운 사건들을 접할 때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없는 극악무도한 것들이 줄을 잇고 있다.

거의 말세에서 볼 수 있는 혼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두 중심점을 잃고 병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제각각 자기 이득과 이윤,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관과 역사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실을 자주 쉽게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믿음의 철학이 없고 정의가 사라졌으며 관료들이 부정하며 자리지키기에 바쁘다는 것도 쉽게 목도(目睹)되는 것도 사실이다.

서글픈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은 능력없는 낙오자의 지름길로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어린 청소년들에게 본이 될 것이 없다.

이미 되 돌릴 수 없는 상처이다.

모두 지켜야 할 책임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찾아진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비굴하고 추악한 반도역사를 그토록 많은 세월동안 외우고 머리속에 각인시켜놓은 결과 결국 작금에 사회각계 각층에서 일제가 심어놓고 뿌려놓은 노예근성이 차지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고 있다.

반도역사가 주는 스트레스때문에 화병이 된지 오래이고 모두가 피해의식과 자학심리에 빠져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이 병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다는 사실도 따지고 보면 거짓 역사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면서 생긴 정신적인 트라우마(trauma)를 키운 것으로서 아들, 딸, 손자들에게 전이 될 수밖에 없는 고질병이다.

이것을 어찌 오욕(汚辱)의 첨탑(尖塔)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잘못된 역사로 인한 불필요한 자기 혼란은 안된다.

환단고기에서 환국의 강역이 아메리카대륙 전역임을 알았다.

인류시원도 따진다면 삼한역사로부터 출발한다.

이 얼마나 거대하고 위대하며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다른 세세한 것은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만이라도 우리의 참역사라고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오욕의 첨탑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역사를 조작질로 지워놓고 그 위에 세워진 허상이라 사실만 알면 된다.

이 허상을 부숴버리고 티끌로 만들어 바람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할 명제가 우리들에게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반도역사로 인한 폐해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더 이상 비굴할 필요가 없기때문에 이제는 당당해질 수 있어야 한다.

피해의식도 강박관념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어두운 생각은 버리고 그저 자랑스러워해야만 한다.

부끄러운 반도역사가 아닌 세계인들이 부러워할 위대한 세계삼한역사가 우리에게 있으니 도대체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인가?

다만 우리가 우리의 것을 부정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허튼 수작에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제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환단고기의 근원을 믿어야 하며 캐캐묵은 저항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확장적 민족주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동감해야 한다.

세계삼한인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할 수 있는가?

좀 더 과감하게 세계인들에게 환단고기가 기록한 이러한 역사사실을 당당하게 자랑할 방법도 강구하고 부족한 것은 더욱 연구하며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역사, 추악한 역사, 식민지역사를 미래 자손들에게 남겨둘 수는 없다.

오직 세계삼한역사만을 남겨야 한다.

식민지역사는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 순서이다.

무한의 자신감만이 반도역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지름길임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제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스스로 탄복해서 발설한 말 "보라! 실로 조선(朝鮮)은 위대했고 찬란(燦爛)했으며 찬영(燦榮)했다"는 이 한문장의 말은 바로 우리역사의 참모습을 보고 그 스스로 탄복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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