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19세기말 역사가 말하는 상해

한부울 2025. 2. 3. 22:02

글쓴이:한부울

들어가며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구성원 만의 글일까?

이러한 의문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한글이 가지고 있는 범용적 가치와 매우 과학적으로 개발된 언어생성과정에서 그러한 스캐일자체가 작은 영토, 매우 역사적으로 의도적, 더 나아가 기획적이다시피 한정된 영역인 한반도만의 글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글의 글로벌화된 상황까지 따져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확신케 하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 한글은 배우기가 쉽다. 매우 범용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폭이 넓다. 그리고 타 언어들의 수용력이 강하다.

세계 어떤 인종과도 관계없이 누구나 배워쓸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문맹퇴치에 가장 효율적인 글자가 바로 한글이라는 사실이 전세계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늘날 AI가 가장 선호한 문자가 바로 한글이라는 사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러한 점을 증명하고 있기때문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일찍부터 알려졌고 한 때 몽골 키릴문자를 한글로 대체하려 했고 청조(淸朝)말기 원세개(袁世凱)가 한글을 차용하려했으며 중국공산당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가 도입을 시도했으며 일본 메이지시대 정치가들이 한글을 심도있게 연구했다는 사실과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한글을 차용하려 했었다는 이야기도 알려진 이야기다.

한글이 생성된 시기를 따져보면 서양사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15세기는 분명 문화적 발전의 시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글쓴이가 판단컨데 15세기는 해양세력 즉 서양문화가 처음으로 하나의 체제였던 세상에 알려졌을 때라고 보며 그것을 현재 르네상스시대라 하고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란 명칭이 고스란히 서양문화 즉 해양세력들의 등장과도 연결되는 것이기에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질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의 핵심이라는 헤게모니 역시 문화부활 재탄생등으로 상징되는데 그것은 기독교역사가 바탕이 된 로마시대 고대 그리스시대를 연결하는 것으로 그들만의 역사창출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고대그리스, 로마시대의 종교 기원이 기독교라고 우기는 것도 문제지만 실제로 세계삼한역사관점은 오히려 태양신이 주도한 것으로 들어나기 때문에 순수한 종교생성과정이 완전히 흐트려졌다는 사실도 안타까운이야기다.

같은 시대에 문화발전의 도화선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 금속활자인쇄술이 등장한 시대였다는 것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가 발명한 금속활자의 기원을 따진다면 그 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양적으로 대량의 인쇄가 가능했고 인쇄술의 대중화의 성공의 길을 가게 한 금속활자의 태동은 서양문화와 그 위에 존재했을 하나의 체제 문화가 혼합이 되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인식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서양역사 주장만이 그 시대를 지배한 것처럼 각인되었다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럼에도 당 시대 문화를 주도했다고 보여지는 금속활자발명은 분명 하나의 체제 문화부흥시기란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신구교의 종교전쟁을 유발하고 서양인들이 자랑하는 르네상스가 존재하게 했으며 이어 대항해시대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s://han0114.tistory.com/17050475"에서 말한 고려가 발명한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란 사실은 이미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 부통령이었고 2000년 대선에서 조지W 부시와 치열한 경쟁을 치뤘던 엘 고어(Albert Arnold Gore Jr:1948~)가 확실하게 정리해준 사실이다.

그가 인정한 것처럼 이때 고려의 문화가 세계적인 것이었다면 대를 이은 조선이 행한 문화발전은 세계적이지 않고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라고 한정짓는 사실자체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물론이고 서양사 스스로의 큰 모순에 빠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양사가 르네상스를 유럽역사에 속하고 전통적인 것으로 보겠지만 사실은 하나의 체제에서의 문화인 것이 틀림없다.

우주를 창조해낸 태양신을 근본으로 한 세계삼한역사의 주 종교가 마치 기독교문화가 근원인 것처럼 조작한 것도 러시아학자에 의해 포르투갈 폐족이 된 귀족출신이었던 예수회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1491-1556)의 역사조작의 일환임이 밝혀진 사실이다.

이것은 본 블로그에서 누누이 언급한 사실이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고려시대때 종이 제조술이다.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s://han0114.tistory.com/17050647 "에서 언급했지만 고려의 종이가 송, 요, 금, 원나라에 보내졌다는 사실은 그 만큼 종이 제조술이 월등하여 우수한 제품을 생산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지식을 부흥시킨다는 르네상스 시대에서 분명히 그 중심에는 종이제조술과 인쇄술발달이 크게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며 르네상스가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라고 하는 것처럼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조한 시기와도 정확하게 겹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가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일반대중들에게 사용가능한 글이 필요한 시기였고 그로인한 문화부흥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일 것이 틀림없다.

즉 만인에게 글이 필요한 시기에 한자, 라틴어따위가 대중이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통치자가 꿰뚫고 긴 시간동안 글 창제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한글이 태동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세계삼한역사의 우수성이다.

설복성의 여행기

1894年5月25日 晚,他离开巴黎,径往马赛,登上了归国的轮船。7月1日傍晚终于抵达上海。由于薛福成本来就疾病缠身,一路上又饱受红海的酷热和闽洋台风之苦,弄得困顿不堪,所以一到上海就缠绵病榻,7月20日,他忽然感染了流行性疫病,如同雪上加霜,深夜便猝然与世长辞,终年57岁。

위 한어자료는 청조(淸朝)말기의 영국주재 외교관 설복성(薛福成:1838-1894)의 이야기로써 설복성이 제3차 영국-버어마 전쟁(第三次英緬戰爭)이후 버어마(Burma)를 청나라 권역에서 영국에 떼주기 위한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인데 1894년 런던에서 중국, 영국, 운남, 버어마 간 중영전면상무조관[中英滇緬商務條款]을 체결한 자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양무론(洋務論)과 변법론(變法論)을 주창한 영국첩자 이었던 이홍장(李鴻章)의 수하이며 빙계분(馮桂芬)·마건충(馬建忠)이란 자들과 같은 범주에 있었다.

이자는 특히 조선말기 역사에도 관여한 인물로 대원군납치계획을 수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설복성의 이야기로 돌아가 위 한어자료를 풀어보면 1894년 5월 25일 밤 파리(Pari)를 떠나 마르세유(Marseille)로 이동해 귀국선에 올랐고 약 38일 후 동년 7월 1일 저녁 드디어 상해(上海)에 도착했다라고 나온다. 설복성은 가뜩이나 지병에 시달리다 홍해(紅海)의 폭염과 민양 태풍(闽洋台风)으로 곤욕을 치르고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시름시름 앓던 중 7월 20일 갑자기 유행성 역병(疫病)에 걸려 설상가상으로 밤늦게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다.

위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홍해 폭염과 민양태풍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다.

그리고 1894년 당시 상해가 어디에 있었어야 하는지, 그외 영국과 프랑스, 더 나아가 프랑스 파리와 마르세유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등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우리는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광동과 멕시코만 그리고 페르시아만

일찍이 본 블로그 글 "중국 원산지 과일 이동에서 밝혀진 역사 https://han0114.tistory.com/17050848"에서 광동(廣東)의 만(灣)을 멕시코만(Gulf of Mexico)으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카리브해 도서해안들을 모두 신라영역으로 보았던 사실이 있었다.

본래 신라영역은 오랜역사를 통해 아랍지역과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곳에는 신라(新羅:Silla), 일본, 그리고 고려때 사라센제국(Saracen)인 대식국(大食國)이 존재했었다고 파악했는데 사라센인은 근세기에 회자된 십자군에 대항한 아라비아 회교도로 나타나고 있으며 시리아에서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는 사막 지역의 유목민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을 유럽인들에 의해 중동(中東, Middle East)이라는 이름으로 서아시아로 설정 되어 있다.

인도는 태양신을 섬기는 나라임에도 인도 역시 서아시아에 속해있다는 사실이다.

서아시아는 유럽인 중심역사에서 지중해, 에게해, 흑해 반도와 아프리카 시나이 반도를 모두 접하는 길목이며 현재 중동의 일부로 분류되고도 있다.

중동을 초기에는 이 지역의 중심부 전체를 근동이라 했는데 지중해로부터 페르시아 만까지 걸쳐 있는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을 가리켰다.

이러한 것들은 유럽인들의 역사가 중심이 되고 그들의 의해 역사가 재편되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랍역사가 유럽역사 보다 더 깊은 역사성이 자리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어쨌던 이같은 지역 재편 양상은 멀게는 19세기라고 알려지는데 데일리 익스프레스 기자인 피터홉커크(Peter Hopkirk:1930-2014)저서 그레이트게임(The Great game)에서 영국이 첩보기관을 동원하면서까지 중동지역을 관할하거나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는데 이 책의 요점은 영국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의 각축전으로 그려져 있으며 서양평론가들은 이책의 내용의 들을 허구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논픽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9세기초부터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1769-1821)은 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1세(Alexander I:1777-1825)와 동맹을 맺으면서 공격하려 했다고 알려진다.

이 당시 영국은 지금의 인도아대륙 즉 인도를 적극적으로 지키려했고 중동을 점령하려 했으며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야금야금 점령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중동이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바뀌기 시작하였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이집트 주둔 영국군 부대를 중동육군지휘부라고 했다.

이때 비로소 중동이란 명칭이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는 신라, 일본, 대식국이 존재한 곳, 인도가 존재했던 곳이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 북쪽지역이라 하였듯이 현재 중동은 건조지역인 사막이 존재한다는 것이 특별한데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부터 남아메리카대륙에 까지 사막지역은 광범위하게 이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캘리포니아(California)의 크레이트베이슨사막, 모하비사막, 소노라사막, 콜로라도사막이 있고 텍사스(Texas)의 치와와사막있으며 남아메리카대륙 베네주엘라(Venezuela)의 라과히라사막, 볼리비아(Bolivia)의 살바도르달리 사막, 칠레(Chile)의 아타카마사막, 파타고니아사막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암염층(Salt Dome)과 로마 실체 https://han0114.tistory.com/17050866"에서도 지중해(地中海:Mediterranean Sea)를 카리브해 연안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을 했고 2020년 본 블로그 글 "잠두(蠶豆) 누에콩과 지중해https://han0114.tistory.com/17050851 "에서 말하길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풍푸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강의 사이의 역사적으로 전략적인 지점이 있을 수가 있다고 했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현재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Ormuz)서쪽에 있는 페르시아만으로 유입되는 곳으로 따지면 인류최초의 거대한 문명이 존재했다고 하기엔 영역 폭이 너무 좁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페르시아만을 바로 지금의 멕시코만(Gulf of Mexico)이라고 할 때 이곳이 바로 지중해문명의 터전이 아니었는가가 의심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메소(MESO) 란 의미는 중간, 중앙, 중위라는 뜻인데 여태까지 고대 그리스어 '메소포타미아(Μεσοποταμια)'는 '메소'(Μεσο)는 중간, '포타'(ποτα)는 강, '미아'(μια)는 도시를 의미의 합성어로 '두 강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라 하였지만 The Ancient Greek word μία (\(mia\)) means "one" or "first". It can also mean "other". 미아(μία)의 의미는 "하나", 또는 "첫번째",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현재 페르시아만으로 흐르는 두 개의 강만을 범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자체가 더 광범위한 지역을 묘사하거나 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전개되며, 요르단강 유역은 사해(死海)의 염분농도가 높고 가장 낮은 지역이라고 하고 있지만 현재 사해(死海)의 표면적이 1,050㎢로써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내륙호 그레이트솔트 호(Great Salt Lake)의 표면적이 4배가 더 넓은 4,700㎢ 임을 강안 할 때 사실상 염분이 높은 사해(死海) 역시 북아메리카대륙 유타주의 그레이트솔트 호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기에 이처럼 현재 역사가 말하는 모든 지형이 알게모르게 뒤틀려 있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황금곰(金熊:Golden Bears)과 함길도(咸吉道) https://han0114.tistory.com/17050710 "에서 말하길 과연 역사지명 시리안(Syrian)이 현재 아시아대륙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면서 그 서단(西端)이 지중해 동안(東岸)에 임해 있고, 남서부는 높은 산맥으로 레바논과 접하며 북서부에도 해안선과 평행인 산맥과 계곡이 있으며 그 동쪽 일부가 사막의 서쪽 끝이 되면서 사막의 북동부에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강, 유프라테스강(江)의 상류가 남동방향으로 시리아 동부를 가로지르고 흐르고 있는 시리아(Syria)가 실제 역사 위치에 정확히 일치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이 있다 하였다.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에서 여러 가지 자료로 분석해 본 결과 이 지명들에 기존 역사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무엇보다도 명확하다는 것은 일본인(해양세력)들이 1785년 마테오리치(Matteo Ricci,1552-1610)가 만든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보고 재각한 것으로 알려지는 1844년에 제작된 구만국산해여지전도(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 1844)에 현재 중동지역의 홍해(紅海)가 서홍해(西紅海)란 사실과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https://han0114.tistory.com/17050515 에서도 놀랍게도 동홍해(東紅海)는 바로 캘리포니아만(Gulf of California)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던 바가 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스페인어(Spanish)로 빨강, 주홍을 의미하는 콜로라도(Colorado)가 존재하고 있으며 유세비오 키노(Eusebio Francisco Kino:1645-1711)가 탐험한 곳이 콜로라도 강 하류 삼각주에 붉은 황토색을 들어 이를 The name Rio Colorado ("Red River")라고 이름했다고 하였으니 흘러드는 캘리포니아만을 홍해라 했을 것이 틀림없다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천문이고 지형 방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역사의 시발점은 해가 지는 서쪽이 아니라 일출 태양신을 숭앙하게 하는 동쪽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리(天理)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혜가 있고 조직을 갖춘 인류 들이 가장 따뜻한 곳, 즉 해가 뜨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태양신을 숭앙하는 나라가 맞다면 더더욱 이집트가 있을 곳도 이러한 이치를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제국(Persia帝國)의 남서쪽에 있었던 인도(印度) 역시 남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리안족이 들어온 인도 북서부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유역과 함께 세계 3대 문명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강 유역 문명이 꽃피었던 곳이라고 현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지만 현격한 지형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되새겨볼 때 실제 이러한 구도의 하나 일체의 중앙이라 하는 포타미아(ποταμια)는 바로 북쪽의 리오그란데강과 넓게는 남쪽의 아마존강까지 범위를 넓혀 보아야 한다는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참고로 나일강은 6,853km고, 아마존강은 그보다 139km가 더 긴 6,992km라는 사실인데 19세기말 20세기초 판짜기시기때 서양역사학자들은 이를 노렸을 가능성이 크고 불교 시원인 인도와 이집트는 아마존강 존재했어야 했다.

본래 인더스강(Indus江)은 인도문명과 결부되는 것으로 본 블로그 글 "인더스(Indus)는 어딘가? https://han0114.tistory.com/17050625"에서 밝히길 미시시피강을 옛부터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아버지강(父河:The Father of Waters), 물의 수원(水原:The Gathering of Waters)으로 지칭되었다 했으며, 거대한 진흙(The Big Muddy)이 있는 곳, 큰 강(大河:Big River), 오래된 강(老人河:Old Man River), 위대한 강(偉大之河:The Great River), 나라의 몸(國家之體:Body of a Nation)이라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옛부터 아메리카대륙 전체가 서양인들에게 인도(印度:India)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게 나타나는 사실이다.

때문에 미국을 포함한 서세들은 결국 인도 즉 인디아(indo)란 명칭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었고 그들의 언어를 인도유럽어족이라 하여 인도를 집어넣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https://han0114.tistory.com/17050755 "에서 1667년 런던[London]에서 인쇄한 것으로 지도제작자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이 그렸다고 하는 지도에 보면 중국바다와 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 하였던 곳이 바로 미시시피강임을 알 수 있었다.

인류의 주된 문명은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사실을 근세기에 서양학자들에 의해 전 세계대륙으로 흩어놓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에 하나의 예를 더 들면 본 블로그 글 "금련화(金蓮花)와 석가(釋迦)탄생지 인도(印度)는 어딘가. https://han0114.tistory.com/17050855"에서 석가께서 탄생하신 룸비니(Lumbinī)를 네팔(Lumbini in Nepal)남부 테라이(Tarai)지방이 있는 히말이아산맥이 아니라 남아메리카대륙 서부 안데스산맥을 기준으로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바로 석가의 상징인 금련화의 원산지며 중천축국(中天竺國) 가비라(迦毘羅:kapila-vastu)가 그곳에 있었음을 판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역사, 세계사가 말하는 지명과 위치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복건성의 복건(福建)을 한자음(漢字音)으로 할 때 복어처럼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형상을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이 유별나게 목 울대처럼 튀어나온 곳으로 중앙아메리카대륙의 온두라스(Honduras)와 니카라과(Nicaragua)지역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도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s://han0114.tistory.com/17050814 "에서 본 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의 하나인 쿠바(Cuba)와 근거리인 섬 자마이카(Jamaica)를 마주보고 있는 지형적인 상황을 들 수가 있다.

이곳을 전통적으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하나 민(閩)이라고 하며 복건성(福建省)은 간략히 "민(闽)"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뱀, 곤충" 이란 뜻을 가지며 옛날 이곳에 뱀을 숭상하던 "민족(閩族)"이 살고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중앙아메리카의 숲에는 포유류 동물이 드문 대신 도마뱀과 뱀 종류, 파충류가 흔하며 조류와 곤충류가 아주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민강[闽姜(閩姜)]이라 하여 복건성에서 생산되는 생강이 유명한데 본 블로그 글 "생강(生薑) Ginger-새앙. 새양https://han0114.tistory.com/17045653 "에서 고온다습한 열대와 아열대에 난다하여 일치하고 있으며 생강(生薑)뿐만아니라, 울금(鬱金), 계피(桂皮:肉桂)역시 아열대, 열대기후에 나는 식물들이 모두 이곳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본 블로그에서 밝힌 사실은 생강(生薑)의 근원지가 현 중국 광동성이나 복건성이 아니라 중앙아메리카대륙 멕시코(Mexico), 벨리즈(Belize), 과테말라(Guatemala), 온두라스(Honduras), 니카라과(Nicaragua), 파나마(Panama), 그리고 카리브해(Caribbean) 도서에 넓게 퍼져 있으며 남아메리카대륙의 에콰도르(Ecuador), 콜롬비아(Colombia) 그리고 프랑스령 기아나(French Guiana)에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DNA 분석지도에서 지금 복건성이 있는 곳에는 생강원산지에 대한 표식조차 없고 근거를 찾을 수 조차 없다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새로운 역사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의 근원이 자연과학에 근거한 역사가 아니며 본래 역사와 전혀다른 19세기에 시작되어 2차세계대전 끝으로 정리가 완료된 서세의 판짜기 결과물임을 진단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연속성을 기준할 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카리브해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메리카대륙은 역사적으로 요충(要衝), 요로(要路), 요지(要地)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고 해양세력연합 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의 충(冲)이 바로 이러한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물질이 풍부하고 풍요로운 인간들의 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해양세력들은 어쩔 수 없이 밀려들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지금 열도일본을 생각해볼 때 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이란 명칭자체가 참으로 기이한 것이 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일본은 중앙아메리카대륙 도서지역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상기의 소제 "홍해와 민양태풍" 편에서 홍해 위치파악을 자세히 설명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다음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민양태풍이다.

위에서 요충, 요로, 요지를 말했다.

본 블로그에서 한결같이 글쓴이가 주장한 것과 같이 특히 청나라 즉 청조가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후금(後金)을 본래 후금(喉衿)인데 그 뜻이 목구멍과 옷깃이라는 의미로 바로 요충지(要冲, 要地)라는 말이라 했다.

이 요충지를 군벌들이 점령하고 호령했던 것이다.

바로 본 블로그 글 "망강남(望江南:Senna occidentalis)으로 본 강남(江南) https://han0114.tistory.com/17050640 "과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634"에서 밝혔던 바이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위치한 과테말라(Gwatemalla), 벨리즈(Belize), 온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El Salvador),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 Rica), 파나마(Panama)가 속해 있는 육교처럼 좁다랗게 길게 뻗어 이어진 중앙아메리카가 바로 요충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민양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

복건(福建)이란 의미에서 배가 복어(福魚)처럼 불룩한 땅이란 사실과 정통적으로 본 블로그가 밝혀본 바로는 옛 중국은 중앙아메리카대륙을 거점으로 한다는 사실과 중앙아메리카대륙의 온두라스(Honduras)와 니카라과(Nicaragua)지역 형태에서 볼 때 위 형상과 비슷하며 위 한어자료에 나타나는 민양태풍(闽洋台风)이라 함은 바로 불룩한 지역의 앞바다를 지칭한 것으로써 아시아대륙에서 일반적으로 7월부터 10월에 발생하는 태풍이 아니라 계절을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발생했던 허리케인이라는 사실에서 위 한어기록시기인 1894년 허리케인(Hurricane)이 발생한 사실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그곳은 바로 카리브해(Caribbean Sea)를 말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고 더군다나 아시아대륙 현 복건성 아래 바다를 남지나해(南支那海)라고 하지 민양(閩洋)이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있다.

그리고 한어 민(閩)에 대해서도 앞에서 충분히 이야기 했다.

무엇보다도 태풍 즉 허리케인발생에 대한 자료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당시 기상 자료를 찾아보면 1894년에는 카리브해지역에서 허리케인이 7개가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이해 첫 허리케인으로서 빠르면 6월4일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6월 6일 초 쿠바(Cuba)와 자메이카(Jamaica) 사이에 열대성 폭풍이 형성 되어 서쪽으로 이동하여 6월 9일 유카탄해협(유카탄반도 북동쪽 끝 근처)을 통해 사라질 때까지 약한 상태[65km /h(40mph)]를 유지했다고 나타난다.

[1894 Atlantic tropical storm1 track 그림]

이제 유럽해양세력들이 어디에 있었는가이다.

영국, 프랑스가 있었던 곳을 찾아야 한다.

재론할 것도 없이 유럽대륙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귀국하면서 지중해로 들어가 아시아로 갔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엉터리라는 것이다.

프랑스는 카리브해 도서 중 리워드 제도(Leeward Islands), 혹은 윈드워드 제도(Windward Islands) 또는 프랑스령 기아아나, 그리고 프랑스령 카리브해(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 해양세력들의 본거지라고 판단하면 금방 추측이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면적이 가장 넓은 과들루프(Guadeloupe)와 마르티니크(Martinique)인데 설복성이 파리에서 도착한 항구 마르세유는 마르티니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피에르 벨랭 데상부크 (Pierre Belain d' Esnambuc)가 1635년 마르티니크 섬에 최초의 영구적인 프랑스 식민지 인 생피에르(Saint-Pierre)를 설립하였고 이곳에 프랑스 정착지를 건설하였으며 서인도회사의 시발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나 서인도회사나 모두 조직적인 것이어서 국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야 맞다.

또 하나의 지역을 주목해야 할 것은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지역인데 카리브해제도 와도 근접한 곳이다.

그곳에는 "강의 나라"라고 하는 기이아나(Guiana)가 있는데 네델란드가 17세초에 최초로 식민지개척을 하였고 그 이후 영국과 경쟁을 하다가 18세기초에 영국에게 패하면서 북부지역 영역을 넘겨주었고 1831년, 영국은 기아나 지역을 하나의 식민지로 통합하고, 영국 기아나로 통칭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역시 1600대 후반부터 기아나의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식민지하였다.

해양세력들의 거점지가 되었고 그들의 주요한 근원지로 파악이 된다는 점이다.

본 블로그 글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801"에서 말한 것이지만 조선왕조실록 순조(純祖)32卷, 32年(1832)에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영길이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한 것에서 볼 때 영길이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운남성과 버마를 공격할 때와 맞물려 있는 혼란기에 이때 참고로 기록에는 3200만명이 희생된 회민반란사건(1867-1873)이 있었고 평범한 제국의 침략행위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버어마에 존재한 유전쟁탈전쟁으로 판단되는 영면전쟁이 18세기말엽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설복성이 움직일때 시기가 제3차전쟁(1885)이후 이기 때문에 그가 청조를 대신하여 영길이국과 회담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는 점이다.

영길이국의 경계(境界)가 되는 주변 변두리의 땅에서 가까운 곳에 곤련(昆連)이 있다 한 사실에서 이 곤련은 바로 운남성(雲南省)이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19세기 때 브라질과 영국이 연결된다는 점이다.

영국은 브라질의 철도, 항만, 은행 등의 인프라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는 것은 펙터이다.

실제로 영국 자본으로 건설된 철도망은 브라질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져지는데 이 정도의 인프라같으면 브라질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유럽대륙에 유럽국가들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해양세력들이 남아메리카대륙을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었지만 왜 그러지 못하고 유럽으로 고스란히 들어가야 했는지도 우리는 밝혀야 할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설복성의 정확한 귀향길을 한번 살펴보자.

여기서 글쓴이는 어렵게 설복성의 간단한 여행기록이지만 핵심적인 요지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동년에 발생하였다고 판단되는 홍해의 폭염피해와 민양태풍으로 인한 고충을 상세한 자료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1894년 5월 25일 밤 파리(Pari)를 떠나 마르세유(Marseille)로 이동해 귀국선에 올랐고 약 38일 후 동년 7월 1일 저녁 드디어 상해(上海)에 도착했다란 기록과 설복성이 가뜩이나 지병에 시달리는데 홍해(紅海)의 폭염과 민양 태풍(闽洋台风)으로 곤욕을 치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글쓴이의 추리는 이렇다.

영길이국(영국)의 런던에서 회담을 마치고 프랑스파리를 거쳐 가이아나에서 프랑스 증기선을 타고 마르티니크에 도착하여 파나마로 들어가는 기항 마르티니크의 포르드프랑스(Fort-de-France)에서 파나마행 기선을 갈아타고 파마마 콜론(Colón)에 도착하여 횡단철도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파나마운하가 개통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파마나 횡단철도(Panama Railroad)를 이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나마시티(Panama City)에서 북상하는 증기선의 일반적인 행로는 아카풀코(Acapulco)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는데 만약 캘리포니아만으로 들어가는 경우 라파스(La Paz)나 마사틀란(Mazatlán) 같은 항구를 거치게 되며 바로 홍해에서 발생되는 폭염곤욕을 그대로 받게 된다. 특히 캘리포니아만과 멕시코 서해안 지역은 여름(6월~9월)에 극심한 더위와 습도를 경험할 수밖에 없고 기온이 40°C 이상 오르는 경우도 많다고 기록에 나온다.

더군다나 이때 발생하는 허리케인의 피해도 볼 수 있다고 알려진다.

실제로 허리케인피해는 카리브해에서 발생한 첫번째 허리케인으로 인해 1894년 6월4일 생성되고 6월 9일 소멸될 때 까지 귀향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설령 일반적인 행로인 캘리포니아만을 들어가지 않더라도 일정 부분 무더운 날씨에 노출될 수 있으며 19세기 말의 증기선은 냉방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승객들은 무더운 객실과 갑판에서 더위를 견뎌야 했을 것이고 만약 항로가 캘리포니아만과 가까운 해역을 지나간다면, 낮 동안의 더위는 상당히 극심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추측된다.

분명 설복성은 홍해의 폭염피해와 민양태풍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1894년 그의 항로에 이 두가지 핵심적인 사건이 모두 극심하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가 그러한 기후환경속에서 신체적으로 힘들었고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역병까지 걸려 결국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든 그가 겪은 38일의 여행은 그가 사망하게 된 원인되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가 있다.

결국 그가 도착한 상해가 지금 어딜 말하는지 여러분들께서 상상하고도 남는다.

바로 샌프란시스코이다.

나가며

설복성의 여행기록에서 나타나는 민양(閩洋)이라는 양(洋)과 현재 신중국대륙 남쪽바다 즉 남지나해를 구분하여 바다 해(海)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양(洋)은 해(海)보다 더 큰 바다의 규모를 말한다.

오래전부터 큰 바다라고 하는 양(洋)을 붙여 사용했다는 사실은 현재 남지나해보다 해저가 깊고 넓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곳에 해저깊이가 YUCTAN BASIN 4,352m, CAYMA BASIN 7,686m 이다.

그 아래 COLOMBIAN BASIN 도 4,263m 이다.

카리브해에 존재하는 해저깊이 엄청나다.

반면 현재 남지나해라고 하는 곳, 대만과 대륙 사이에는 그냥 대륙붕이다.

바로 이 차이를 말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동아시아대륙 역사 모든 기존 역사를 부정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냉정하게 판단할 때 기존 역사에서 말하고 있는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지명들은 어느 시점에서 고스란히 어떤 곳에서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맞으며 지금의 위치는 본래 중국의 위치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게 하는 것들이다.

근대사를 보면 현 동아시아대륙 남부 복건성의 항구도시를 바로 아모이(Amoy), 하문(廈門)이라 했는데 이곳은 명조(明朝)말, 청조(淸朝)초, 정성공(鄭成功)이 지붕을 길게 아래로 달아낸 문이 있다고 한 섬, 하문도(廈門島)와 금(金)으로 만든 문이 있는 섬, 금문도(金門島)를 거점으로 청군과 싸웠다고 하는 곳이다.

지금 현재 지정하고 있는 하문도와 금문도를 보면 청조 군사의 쫓겨 도망갔다고 하는 곳이지만 육지와 거의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실로 절박한 정성군(鄭成功)이 피신할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너무 단조롭고 뻔한 지형물이 존재할 뿐이다.

기록에는 당시 이곳에 에도막부(江戸幕府), 류큐왕국, 대만, 안남(安南), 교지(交趾), 시암(Siam), 루손 등을 연결하는 남만무역이 활발했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다.

청조는 정성공에 대해 처음에는 회유적인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광동, 복건, 절강 등 연안에 피해가 있자 1655년 이후 결국 해안 주민들을 내륙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해금정책으로 바다까지 봉쇄하였음도 알 수가 있다.

바로 카리브해의 지형상황을 놓고 보면 당시 복잡한 상황들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때문에 당시 청조군사에게 쫓긴 남명(南明,1644-1664)의 잔존세력이 피신할 큰 섬이라면 여러 크고 작은 섬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고 적의 쫓겨 숨을 곳이 무수히 많은 카리브해 수많은 도서군들이다.

카리브해에서 당시 정성공이 피신했다고 하는 하문도와 금문도의 정확한 위치와 현재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 섬들 속에 분명 존재할 것이란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너무 오래간만에 올리는 글이다.

이글에서 돌출되는 결과에 글쓴이 스스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이것은 기존 역사를 완전히 뒤집는 이야기이지만 본 블로그가 지금까지 분석하고 연구한 끈질긴 집념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솔직히 이글은 이미 수년전에 작성해 놓은 글이다.

그러나 정리를 해서 글을 올리는 과정이 심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기존 글쓰던 블로그 환경이 일시에 변한 것도 있지만 글쓴이의 글을 쓰고 나면 몇일안가서 글과 그림이 출처도 밝히지 않고 그대로 도용된다는 점에서 평소에 매우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때문에 어떤 결과물을 돌출해서 글을 올리기가 너무나도 불편하고 싫었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찾기란 주제는 어느 한사람 전용물이 아니라 누구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은 글쓴이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권하는 바다.

그래야 만이 소수가 아닌 여러연구자가 역사찾기를 함께하여 그나마 시간을 단축시키고 노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다해 핵심사실을 밝혀내고 연구한 끝에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기 때문에 글쓰는 사람에 입장에서 그 글을 사용할 때 최소한의 예의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고 저작권에 대한 작게나마 존중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블로그 사용자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음에 들어 보관하거나 완성된 글을 이용하여 더 좋은 내용으로 글을 다시 쓰려고 할 때 참고하여 사용하라고 올리는 글이기에 원본을 링크하거나 자연스럽게 출처를 밝히면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분이 있다.

그러한 분들에게 느끼는 것은 중요한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사실이며 그런 느낌이 너무나도 싫은 것이다.

그러한 블로그 운영자는 지금부터라도 저작권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고 남의 글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이런 행위가 계속반복되고 심하다고 판단되면 안타깝지만 법적인 문제도 고려해 볼 생각이다.

마무리하면서 이러한 결과물이 돌출하기까지 해온 분석의 근원은 분명 세계삼한역사가 하나의 체제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 이러한 결과에 아직까지 여러 가변성이 있다고 하겠지만 명확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근세기 역사는 서양사에 맞춰 이치에 맞지않고 진실에 의하지 않는 점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이다.

서양사를 기반으로 한 기존역사를 부정할 수없게 만든 수많은 자료들이 비록 견고하게 둘러쌓여진 방벽처럼 막고 있지만 그래도 이러한 자연이치와 역사연속성 진실 앞에서는 허점이나 허술한 곳도 많다.

다만 우리가 온마음을 다해 열정을 잃지 않는다면 오늘도 내일도 그러한 곳을 찾아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더 좋은 결과, 가치있는 역사찾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다.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