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한부울 2019. 10. 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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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글쓴이: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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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조선의 입장
일본은 재무, 영국은 왕실
일장기는  토마스 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 선척기다.
청조는 고려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려했다.
삼태극과 세계사상
청조와 하노버왕가 동질성
레드크로스 깃발과 만주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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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글쓴이에게 묻는 것이 있다.
바로 조선의 깃발은 어떤 것인지 밝혀달라는 것이다.
그러한 요구에 글쓴이도 난감하다.
그러고 보니 조선(朝鮮)은 왕실 상징 깃발이라고 하는 어기(御旗)와 제일태극도(第一太極圖)정도가 현재까지 알려져 있을 뿐 조선국의 국기라 하여 특별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하지만 조선에서 국기가 없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로 조선은 어떤 상징형상만 가지더라도 세계 모든 국가 또는 회사들이 알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물론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의 시각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들어난 사실만으로도 충분하게 이러한 추측을 할 수가 있다.

현재 국기라는 것은 앞선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언급하고 정리하였지만 애초 서양인들이 주창하던 국기(國旗)라는 것은 국가주의(國家主義:statism), 또는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내셔날리즘(nationalism)에 대한 것은 분명 아니다.

상인함선깃발(merchant ensign) 또는 상인 깃발(merchant flag)이라고 하여 해양세력의 무역사무소가 차려진 곳의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깃발로써 또는 그러한 곳에 스스로의 신분을 나타내며 그 지역을 거점으로하는 회사 또는 특별한 상업가문을 나타내는 표식으로써 상선기(商船旗) 또는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라 하여 선박에 게양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와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관세제도로 볼 수 있는 세관관리의 한 방편으로 거대한 지배체제를 가진 하나의 통일된 체제에서 위계적이고 체계적인 항해질서를 관리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는 것은 두 말할필요가 없다.

서양해양세력들은 거의가 자유자본주의를 표방하던 무역회사들이다.

그리고 이런 세력들은 초창에 독점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영업을 하던 대상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때문에 관리입장과 무역을 하고자 하는 세력간의 간접적으로 충돌도 많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복잡해지는 상방의 상행위 거래관계에서 최소의 질서가 필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들을 정치적인 용어로 말하면 미나키즘(minarchism)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의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관을 가지고 군사, 치안, 법률 등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또는 야경국가(夜警國家:Night-watchman state)로써의 관리라 할 수 있고 작은 시, 읍에서 생성된 회사조직들을 최소한의 관리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바로 이 체제가 대조선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하나의 체제 세계통치국의 면모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때문에 시민 깃발 또는 민간인의 선상 깃발(船旗)이라 하여 "시빌엔사인(civil ensign)" 이라고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시빌(civil)은 '문명화된 시민'이라는 뜻으로 여러관청이 있는 큰 도시로 해석할 수 있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진보, 발전된 도시국가를 뜻하는 것인데 부르주아적인 상업 성격이 강하다.

당시 국기(國旗)라 한 것은 현재 국기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있다.

국기이니 뭐니 하지만 당시는 세계통치국이었던 조선(朝鮮)이 거대한 무역시장을 가지고 이런 세력들을 상대했다고 보기때문이다.

본 블로그 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 "에서 살펴보았지만 코리아를 1904년에서 1909년까지 방문한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 :1860-1939)는 한국이 세계에서 5번째 면화생산국이라고 하였고 당시에도 육지와 바다 교통의 새로운 인프라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무역 개방되면 급속한 발전을 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였다.

목화만 이런 규모일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반도 역사를 보면 이양선들이 19세기초부터 들락거리며 개방을 요구하였다던지 또는 조선을 미개한 국가로 묘사했다던지 또는 쇄국정책을 빗대어 조선정부를 형편없는 국민의 언론자체를 막는 독재적인 정치형태를 설명하며 열을 올렸던 이유가 다 여기에 있었다고 보인다.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기존의 세계부유한 자원이 산재되어 있는 영토를 가진 하나의 체제가 지금까지 세계역사를 지배하고 모든 문화, 종교, 경제까지 통괄하거나 통치하고 있었다고 할 때 그러한 엄격함에 의해 그들이 자유롭게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무슨짓을 도모했겠는가.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무도한 해적선과 같은 선박들이 해안곳곳에 들어닥쳐 양민에게 피해를 주면서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할 때 조선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접근할 수 없도록 국내법을 적용하여 무력으로 막는 수밖에 없다.

선박들의 입출항의 절차문제, 내부규정에 의한 항로질서정립, 규정된 항만사용권리제한 등의 문제점에서 각 선박들에게 각자 사전 절차를 통한 등록이나 허가를 받게하거나 규약을 지키게 함으로써 해관질서를 도모케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때문에 허가나 등록된 선박에는 깃발을 게양토록하여 조선의 해관관리가 용이하고 식별이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정례화(定例化)된 표식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보아야 맞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고 있는 1897년 대한제국건립부터 특히 작성된 편자미상(編者未詳)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 각국기도(各國旗圖)에는 대한제국을 포함한 40개 국가의 국기(國旗)를 담고 있다고 나타난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초기의 조선을 출입할 수 있는 해양국가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사를 등록한 기도(旗圖)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1882년에 최초로 워싱턴 미국 해군성(United States. Navy Dept. Bureau of Equipment)이 50여 개국의 각종 왕기(王旗), 군함기, 상선(商船)기, 국적기, 신호기, 해군삼각기, 함대기(艦隊旗) 등의 다양한 국기를 모아 펴낸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란 제목의 책은 이와 성질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어쩌면 1881년 조선이 안타깝게 해체되고 난 후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를 나중에 편집하여 재빠르게 도감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도감속에 태극기(太極旗)가 실려 있다 하여 그것을 원형이라고 하거나 1882년 박영효(朴泳孝)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과정을 기록한 사화기략(使和記略)에 의하여 그해 9월 박영효(朴泳孝)는 선상에서 태극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를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旗)를 만들어 그 달 25일부터 사용하였으며, 10월 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고종에 의해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는 사실을 두고 태극기는 조선국기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통용하였다고 하는 것에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생성된 태극기라고 하기 때문에 삼한조선의 세계통치국으로써의 정통성이 부족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은 해양국가라고 할 수 없고 그렇게 분류되지 않기 때문이다.


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터넷 기학 학회(Flags of the World : FOTW)자료를 보면 조선(朝鮮:KOREA)에서 등대선에 사용하던 깃발을 볼 수가 있고 지금의 기독교국가들의 깃발을 보듯이 상당히 색채와 디자인이 서양국기와 거의 비슷한 형태인 것을 알 수 있고 붉은십자기 즉 레드크로스 변형의 도안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일반적인 깃발형태라고 할 때 조선관리들의 보편적인 인식이 쉽사리 붉은십자기를 생각할 수가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이런 도안의 깃발들이 모두가 조선영해 연안 무역으로 인해 빈번하게 왕래하는 서양선박을 관리하기 위한 항로표식(航路標識:Beacon)이란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좌측편의 도안을 보면 거의가 레드크로스(Red Cross)와 거의 흡사한 도안인데 일면 성 안드레아 십자기(St Andrew's Cross)라고도 부르며 파란색 바탕에 X 자 모양(The Saltire)의 하얀색 십자가인 스코틀랜드깃발을 연상하게 하고 겹쳐지는 또 하나의 십자가에서 아래 작대기가 빠진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Tau Cross' 를 꺼꾸로 뒤집은 것과 같다.

이러한 해관표식을 조선내에서 사용했다는 시기가 서양세력들이 호시탐탐 조선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하던 때와 겹쳐지는 1871년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반도 역사와는 기본 괘(卦)를 달리하는 것이다.
당시 서양세력 즉 한반도를 방문하던 선교사, 여행가, 지리학자등이 주장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위 조선 내 항구연안 관리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써 아래 상황들은 과연 한반도 조선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좌측편의 깃발은 조선연안(朝鮮沿岸)에는 선박(船舶:vessel)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난해한 지형조건을 알릴 필요가 있어 등선(燈船:Light ship)이라는 배를 세워두는 것으로써 무역선박들이 왕래하는 항로(航路)에 등대를 세우기 곤란(困難)한 하구(河口), 천해(淺海), 암초(暗礁)가 있을 곳에 정박(碇泊:渟泊)하여 두고, 그 선상(船上)에 높이 등화(燈火)를 걸어 놓고 항로(航路)를 알리어 주는 것이라 하였다.

붉은 십자기를 연상하게 하는 레드크로스(Red Cross)와 같은 깃발을 조선에서 항로길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이다.

우측편 깃발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흘러 1883년(고종 20)에 사용하던 해관선척기(海關船隻旗:customs vessels used in korea)로 해관은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로써 외국배가 항구(港口)에 설치(設置)한 관문(關門) 즉 해관(海關)을 통행할 때 반드시 그들의 선박(船舶)에 게양하게 한 깃발임을 알 수 있는데 엑스 자가 붉은 색에서 검은 색으로 변했다.

이러한 선척기는 첫째 조선해안에 나타나는 위험스럽다 할 수 있는 괴선박, 또는 해적선을 구분하기 위해 조선해관에서 허가한 배들만 통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의 깃발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다시금 조선관리체계를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엄격했던 반면에 여러가지 깃발의 모양이 현대적이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즉 조선은 어기나 옛 궁중에서 사용한 깃발들이 동양적이고 묵화적인 반면에 이렇게 진보된 도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현재 이것들이 서양국기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적잖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870년대 조선의 입장


18세기말엽에 발생한 프랑스혁명은 도시국가로써 그 바탕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19세기들면서부터 이러한 형태의 국가는 서양사에 의해 당연히 부풀려졌고 마치 당시 무수히 많은 국가들이 난립한 것처럼 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급격하게 생성된 내셔날리즘에 의한 독립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면서부터 특히 조선체제에 포함되었다고 보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해양세력들의 혼혈인 크리올(Criole)들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크게 활발하게 확대했다는 사실과 19세기초부터 기존 제정체제에 환멸을 느낀 대중들에 의해 이런식의 분리심리에 의한 무수히 작은 국가 즉 시민국가들이 생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잡다한 상선기(商船旗) 또는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가 필요했을 것이란 논리가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논리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소수의 국가민족집단, 시민집단, 회사조직, 상업카르텔조직 이런 것들이 세력화되면서 서로 경쟁 또는 대립으로 나타나고 각각의 독창성을 나타내려 할 때 각각의 상징적인 깃발이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세기때 선적기의 상황을 보면 다양한 종류의 깃발이 상당히 많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서양해양세력의 동향인데 이때 일본에서는 미국 양키가 주도한 안세이불평등조약(安政五カ国条約,Ansei Five-Power Treaties:1858)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난 후 일본은 해양무역연합세력의 거점으로 나타났다.

일본이란 국명은 생성됨이 삼한역사의 백제로부터 기인한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상 스페인 몰락한 귀족이었던 바스크(Basques)가 핵심이다.

오히려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고 하던 중세 유럽 때부터 내려온 귀족 가문들의 시초는 대부분 로마를 약탈하던 이민족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도 이들과 비교해볼 만 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남방에서 반(班)을 반(盤)으로 번(番)으로 바꿔 불렀다고 하고 이것을 남반, 남번, 남만이라고 한 사실과 서양몰락한 귀족들에게 교황이 'Dux'라는 칭호를 내렸고 이것이 오늘날 공작을 의미하는 'Duke'가 되었다는 사실과 이들이 부르주아 생성과 어울리는데 성터주변을 파서 해자를 만든 후에 파낸 흙을 해자를 따라 쌓은 후에 그 위에 목책이나 석벽을 올린 일종의 토성(土城)저택에서 안전하게 살았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이러한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1876)을 요구하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전문(前文)과 총 12관(款)의 조항(條項)에서 명확한 것은 조선해관을 통해 이루어지던 관세무역행정을 그들이 장악하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조약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굳이 일본과 조선은 상호 평등한 자격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하였고 현 외교부(外交部)격인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일본정부가 마음대로 접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한 그들의 언어를 문서에 사용하도록 하였고 제5조에서는 별도로 정하는 두개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 국민의 왕래, 통상을 허가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것에 더하여 일본선박이 태풍 또는 연료, 식품 결여로 불가항력일 경우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 기항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 표류 선원을 보호하여 송환하도록 요구하고 조선해안을 측량도록 허용하게 하면서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島地)를 편제하게 하여 그들이 언제든지 조선의 해항(海港)이나 요새(要塞)를 침략하도록 사전조치하였음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 조약조문들은 역사조작이 발생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진의가 불투명하지만 어쨌든 조건상 갑이 조선이었고 을이 일본이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특이하게 볼 것은 어쨌거나 조선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할 때 양국 관리들은 간섭·제한·금지할 수 없게 하였으며 일본 영사파견권리와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여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허락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조문은 마치 조선이 일본과 크다란 전쟁으로 하여 패배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1876년에는 어떤 거대한 전쟁이 국제적으로 발생하였을까?

생각해보면 1876년 이전 전쟁은 바로 1870년(AD) 프로이센-프랑스전쟁(Franco-Prussian War)이 존재한다. 

1874년(AD) 강화도 연안 포대 축조 완성. 일본의 ‘정한설(征韓說)’로 각 군영(軍營)에 엄중경계령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일본세력은 다름아닌 경제력(상징적 영국과 미국)이다.

절대왕권이 상처를 받았고 뒤이어 경제력이 몰수 당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즉 강화도조약은 일본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정한론(征韓論)과 정조론(征朝論)을 주창한 결과로써 경제력이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계통치국이었던 대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표식이다.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유럽종주권을 독일 프로이센 황제에게 빼앗긴 것과 같은 것이다.

독일유대인 상업가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는 그의 저서 '금단의 땅(A Forbidden Land, 1880)'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조선은 온 세상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천연자원이 풍부하다라고 한 사실을 읽으면 바로 조선은 세계최혜(最惠) 자원보고(資源寶庫)의 땅을 가진 국가체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을 통째로 빼앗아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임을 여러 문장속에서 그 진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원이 절대적으로 빈약하였다는 한반도 역사와는 근본이 다른 이야기이다.

식민사관학자들의 자원이 빈약설은 최악의 헛소리인 것이다.

조선의 엄청난 자원의 소유권이 1876년부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을 조선에서는 크게 염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조선의 해관관리 깃발 위 2종을 사용한 시기를 인터넷 기학 학회(Flags of the World : FOTW)자료는 1871년이라 하였는데 일본세력이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한 시기도 같으며 1870년 일본 외무서기가 헬타호(號)를 타고 부산에 입항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관리들에 의해 거절당하고 물러간 후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청조(淸朝)에 협조를 얻어 대신 그해 청일통상조약(淸日通商條約)체결되면서 결국 최혜국 대우와 협정관세율을 서로 인정한다는 협약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꿩대신 닭이다.

5년전 1866년(조선 고종 3년) 8월 21일에 평양 군민(軍民)들이 대동강을 거슬러 무단으로 침입한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응징하여 불 태워버린 사건을 핑계로 조선원정으로 표현되는 한국군사작전(Korean Campaign 1871)또는 1871년 미한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으로 명명된 1871년 6월 1일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였다.

미국은 프랑스 신부 리델을 길잡이로 삼아 5척의 군함과 1,200여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고 강화도 앞 물치도에 함대를 정박시킨 미군은, 6월 10일 초지진을 공격하였다.

초반공격에 조선군이 패퇴하였지만 김선필(金善弼:1807-1883)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정비를 한 후 재차공격하여 초지진에 주둔한 미군을 공격하였고 미군들은 사방이 포위된 진지를 버리고 퇴각하였다.

그리고 염하(鹽河)를 항해하며 다수의 전함이 암초에 부딪혀 피해를 입었고 물치도(勿淄島)로 퇴각하였으며 20일 동안 포로 석방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사실상 이 충돌은 미국이 조선에게 패한 전쟁이라고 한다면 결국 경제력으로 제압하여 한 사실이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아마도 1870년 일본 외무서기 하나부사(花房義質)가 헬타호(號)를 타고 부산에 입항하여 통상을 요구한 사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조선의 자원과 보물들을 탐내던 장사꾼들은 양사방으로 침범해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유대계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과 같은 부류의 잡범들도 많았을 것이고 조선이 그토록 서양인들을 경계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음이고 조선을 침범한 것들이 해적선집단이나 불법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세력으로 단정하여 입국이나 입항을 금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때문에 동시에 겹쳐지는 보불전쟁(普佛戰爭)이라고 하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전쟁은 대조선 북부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는데 프랑스는 먼저 1870년 7월 14일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고, 7월 19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프랑스군은 마르스라투르 전투(Battle of Mars-La-Tour:1870.08.16)와 그라블로트 전투(Battle of Gravelotte:1870.08.18)에서 참패해 괴멸되었으며 스당 전투(Battle of Sedan:1870. 9. 1)에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고, 제3공화국(French Third Republic)의 초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1797–1877)가 1871년 2월 26일에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때1870년부터 1940년까지 69년간 프랑스에서 존속한 가장 안정적이었던 공화정 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 조선에서는 병인박해(丙寅迫害)라고 하는 사건들이 전개되며 1866년부터 1871년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합친 것과 같다.
조선으로부터 통상요구가 거절되고 난 후 여진족(女眞族) 앵글로(Anglo)계의 청조(淸朝)와 해양무역연합세력인 일본간에 통상조약이 조선의 뜻과 무관하게 이루어졌다고 보이지만 조선(朝鮮)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단면이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청이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 통치국으로써 체제의 주체이며 청조(淸朝)는 조선정부역할을 하면서 서양해양세력들과 무역교섭권에 깊숙하게 관여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보아온 상황들을 종합할 때 무역관례를 들어 서양세력들이 조선에게 깃발을 요구하였을리가 만무하고 그들이 요구하였다 하더라도 조선은 기존정통성을 훼손하는 국기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적인 이야기다.

선척기가 시작된 것은 무역이 활성화되면서부터이고 각 선박들이 조선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부터 각각의 선박의 출처여부를 파악하여 입항을 철저하게 관리 한 것으로써 선척기를 게양하도록 했다는 것은 조선영역에서는 조선관리의 감시체제가 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은 재무, 영국은 왕실


고종실록 12권, 고종 12년 8월 22일 丙戌 1번째기사 1875년 조선개국(開國) 484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영종진 난지도에서 정박하다
영종 첨사(永宗僉使) 이민덕(李敏德)이, ‘이양선(異樣船)이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가 항로를 측량할 때이다.】
二十二日。 永宗僉使李敏德以"異樣船蘭芝島留碇"啓。 【日本軍艦雲揚號, 航路測量時】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사에 찌들어버린 현대역사학자들은 조선에서 당시 국기에 대한 개념이 무지했기때문에 발단된 해프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위 고종실록 12권에도 나타나지만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이 '운요호(雲揚號)사건'을 일으켜 강화도를 포격하면서 영종도에서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한 후 적반하장으로 보상을 요구하였고 그들은"처음부터 운요호에 일본국기(일장기)를 게양했는데 왜 포격을 가했는가" 라고 트집을 잡았다는 말을 해석하여 당시 조선은 국기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고 말하고 뿐만아니라 조선정부는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고 아주 대놓고 조선인들을 바보취급 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역사관은 우리를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주장하는 최초의 국기사용의 역사와 이러한 국기란 개념을 서양사만을 바탕으로 이를 마치 사실처럼 전제하고 있는 것에서 우선은 재고할 필요성이 있고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 즉 사회, 경제적 문제를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정치체제의 국가 통제주의(statism)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1850년 이전까지는 국가주의(國家)란 개념이 희박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도 이야기 했듯이상선기(商船旗)를 영어로 시빌 엔사인 "civil ensign" 즉 '시민의 선상 깃발(船旗)'이라는 의미인데 이 시빌(civil)은 '문명화된 시민'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도시국가를 뜻하는 것이다.즉 해양세력의 무역사무소가 차려진 곳의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깃발인데 이를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또는 엔사인(Ensign)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것이 오늘날 국가의 국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단언컨데 태극기가 생성되던 시기와 이유와 전혀 상관없이 대조선(大朝鮮)이 해체된 싯점 1881년 이전까지는 절대로 한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 국기(國旗)라는 개념자체가 성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1882년에 워싱턴 미국 해군성(United States. Navy Dept. Bureau of Equipment)이 50여 개국의 각종 왕기(王旗), 군함기, 상선(商船)기, 국적기, 신호기, 해군삼각기, 함대기 등의 다양한 국기를 모아 펴낸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란 제목의 책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대조선을 관리하기 시작한 당시 경제권을 가진 조직체가 이를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국기라 하여 채집하고 도서로 펴낸 것은 시초라고 보는 것이다.

A medieval ship flag captured from a Danish ship by Lübeck forces in 1427 showed the arms of Denmark, Sweden, Norway and Pomerania. The original flag was destroyed in World War II during a British attack on Lübeck, but a 19th-century copy remains in Frederiksborg Palace, Denmark. The saint accompanying the Virgin Mary and infant Christ is Saint James the Greater, identified by his scallop shell emblem.

1427년 뤼베크군(Lübeck forces)에 의해 덴마크 배(Danish ship)에서 노획된 중세(AD1000~1450) 선박의 깃발은 덴마크Denmark), 스웨덴(Sweden), 노르웨이(Norway), 포메라니아(Pomerania)의 문장(紋章)을 보여주었는데 이 깃발원본은 2차 세계대전때 영국의 뤼베크(Lübeck)공격때 훼손되었고 대신 19세기에 만들어진 사본은 덴마크 프레데리크스보르궁전(Frederiksborg Palace)에 남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이것 역시 한반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폭격운운 따위로 증거가 인멸된 상태이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여튼 서양사에서는 어쨌던 다수의 선박깃발을 국기개념으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대조선으로부터 1882년에 자료들을 서양세력들이 장악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 미국해군성이 만들었다고 하는 세계 해상국가들의 각종 깃발도감은 거대한 제정국가체제에서 획득한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선박깃발 자료들을 보면 영국왕립해군(Royal Navy)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세계표준화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영국해군에서는 제독이 직사각형 계급깃발을 달았고, 함대제독은 연합 깃발(Union Flag)을 달았으며, 해군장성은 성 조지 십자가(St George's Cross)를 게양한다는 사실과 영국상선해군(商船海兵)현재 사용하고 있는 깃발은 한쪽 구석에 영국 국기(Union Jack)가 그려져 있는 빨간 기(The Red Ensign)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위계깃발(Rank flags)로는 선박의 깃발(Ensigns), 배의 선두깃발(Jacks), 구분기호(Distinguishing marks), 좁고 기다란 삼각기(Pennants), 선주기(社旗, 船主旗:House flag), 사설신호(Private signal)등이 전부 이 영국왕립해군의 방식을 따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853년 일본 강호시대때 양키고래잡이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 Perry)가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일본이 1876년에 강화도를 침략한 윤요호가 제시한 깃발은 어떤 것일까?

위 고종실록에도 이양선(異樣船)이라고 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관리들은 얼마든지 일본선적기를 식별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이양선이라는 것은 이상한 모양의 배라는 뜻으로, 조선말기에 조선연해에 출현했던 외국의 선박을 이르던 것이라 정의한 것처럼 조선 가까이에 존재하던 일본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보면 고종실록(高宗實錄)은 일제강점기 이씨왕조직(일제가 폄하한 명칭)이란 기관인 이왕직(李王職)의 주관 하에 고종45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편낸 정통성이 없는 역사서라는 것을 알 때 사실상 실록자체 기록만으로는 정확하게 진단을 하기가 힘드는 것이다.

1876년 2월 27일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이 있었던 년도이지만 세계사적으로 보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1708-1873)를 해체 헌납시키고 인도(印度)를 영국의 직할령으로 전환하면서 1876년 5월 1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여제(Empress of India)”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이런 조치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난 후 정확하게 2달 후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판단할 때 운요호사건을 일으킨 선박자체가 아마도 영국왕실의 사주를 받은 영국동인도회사의 소속 무장한 상선으로써 해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짓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이때 브리튼(British)에서는 유대인출신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가 1876년 1월 1일에서 1876년 12월 31일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청정을 수행하였고 빅토리아여왕에게 인도여제라는 칭호와 왕관을 수여한 인물이 버티고 있었으며 1875년에는 수에즈 운하(Suez Canal)의 주식 매입을 반대하는 외무부 권고를 무시하고 의회가 거래를 승인하기 전에 로스차일드가(Lionel Rothschild:家,1808-1879)로부터 400만 파운드를 빌려 수에즈운하 주식 17만주를 매입하면서 1876년에 이집트를 보호국(保護國)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집트와 인도는 영국에 직할령으로 성립되던 시기가 또한 일치한다.

이것은 상당한 역사흐름의 무엇인가 이상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1875년 5월과 6월 인도 봄베이(Mumbai) 데칸(Deccan)에서의 폭동이 발생하는 것과 1875년 4월 24일 세금에 고통 받던 울산(蔚山)농민들이 아전의 횡포에 항거, 폭동을 일으킨 사실이 있고, 1873년 아나톨리아에서 극심한 가뭄과 1874년 홍수가 일어나 기근에 의한 오스만제국의 심장부에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시켰고 농업생산부족은 필요한 세금 징수가 어렵게 되면서 1875년 10월 오스만 정부는 파산을 선언하고 발칸을 포함한 외딴 지방에 세금을 인상해야 했다.

1875년 7월 당시 오스만제국의 지방이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의 개신교에 대한 종교적 박해와 세무행정의 부당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으로 인해 발칸전지역을 지배하던 튀르크군벌 오스만제국의 비정규군은 1876년 4월 개신교 불가리아 약 10만명의 폭동자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의 묶음은 명확히 하나의 사건이다.


일장기는  토마스 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 선척기다.


실제로 근대사에서 당시 강화도를 침입한 윤요호의 깃발이 일본기라고 주장하였지만 이 일본기는

한반도와 열도역사인 것처럼 그렇게 꾸민 것이다.



위 그림에서 설명으로 덧붙이자면 위 일장기와 비슷한 깃발은 창업주 토마스 윌슨(Thomas Wilson)이 창업한 토마스 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Thomas Wilson & Sons Co Ltd)의 선척기임을 알 수가 있다.

즉 이 문양은 일본 국기의 문양이 처음부터 어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일본의 상선기(商船旗:Civil ensign, merchant ensign or merchant flag)의 일장기(日章旗)는 1870년(明治 3년)제정된 태정관 포고(太政官布告) 제57호 상선규칙(商船規則)에 따라 정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토마스 윌슨선박회사의 선척기가 최소 1825년에서 1859년까지 먼저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이 회사는 한 때 포경기지 였던 킹스턴 어폰 헐(Kingston upon Hull)항구를 근거지로 1825년까지 창업주는 첫 증기선을 소유했고, 1841년, 1850년에 장남 데이빗, 이어 찰스와 아서를 그의 파트너로 사업에 참여시켜 토마스 윌슨엔 손스 주식회사(Thomas Wilson & Sons Co Ltd)라 하였으며 1859년까지 무역화물은 고래 뼈(bones), 철(iron), 참나무 껍질(oak bark), 상용목재(deal timber)를 포함하여 많은 발트 항구로 운송하였다.

그렇지만 이 발트항구가 지금의 북유럽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대서양을 두고 동북부지역인 캐나다 허드슨베이지역임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1869년 토마스 윌슨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찰스와 아서가 뒤를 이었고 프랑코-프러시아 전쟁(Franco-Prussian war:1870)이 끝난 후 트리에스테(Trieste)에 아드리아기지(Adriatic Base)를 두고 베네치아(Venice)및 흑해까지 영역을 확대했고 1875년에 북미로의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뉴욕 행 헐(Hull)호가 개통되었다고 하였다. 몇 척의 배가 유실되었지만 1876년에는 43대의 기선이 있었고 알려지고 1878년 헐(Hull)에 있는 41개 해운사 중 6척 이상의 선박을 가진 곳은 5곳에 불과했다 하여 상당히 많은 선척의 회사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지중해에 이탈리아에 위치하는 베네치아는 본 블로그 글 "빈랑으로 본 대만과 베네주엘라의 미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0 "에서 밝히길 베네주엘라의 해안도시 리틀베니스(Little Venice)에서 베네치아를 찾아야한다고 한 적이 있다.

때문에 지중해라는 것은 지금의 멕시코만을 포함한 카리브해지역임을 할 수가 있어 강화도를 침범한 윤요호는 1875년부터 북미항로를 서비스하기 시작한 이후에 영국이 아닌 일본이 북아메리키대륙에 있는 강화도를 침범하였다는 사실과 윤요호에 일장기를 게양한 사실에서도 바로 토마스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의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체제로 세계를 통치하던 대조선은 국기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조선에서는 일본의 선척기가 어떤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국가가 아닌 해양운송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죄다 알 수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제발 조선(朝鮮)에서 국가 개념도 몰랐다고 하지 말길 바란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빅토리아시대라 할 때가 바로 코리아시대(Corean Era)라고도 했다.

1890년에 영국인들이 말한“COREAN” 시대(Era)라고 한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8 "에서 밝히길 1890년 주한 영국대사관 초석(礎石)에 기록된 내용에서 당시 시기를 "The 499th of the Corean Era"코리안시대 499주년이라 표기를 하였다는 사실에서 보면 분명 이때가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의 통치시대라 하여 빅토리아시대(Victorian era)라고 하는 때와 겹친다.

조선의 통제권 혹은 상징성이 유대인출신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에 의해 빅토리아여왕으로 넘어간 사실을 알 수 있고 미국인 역사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가 조선(朝鮮)이 해체되었다고 하는 1881년 이후부터는 아마도 조선의 실제적인 권리를 장악한 브리티시(British)해양세력들에 의해 모든 통상무역 관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사실상 조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일본이라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지만 대조선의 통치권이 필요한 세력은 바로 브리티시 영국이라 할 때 일본과 영국은 상호보완관계에 있었던 역사실체가 아니었는가 한다.

이것을 알기 쉽게 풀어보면 바로 양키(Yankee)와 앵글로(Anglo)이다.

물론 조선이 거대한 국가체제로써 세계통치국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들은 철저하게 비밀로 하여 각자 유럽제국들에 의해 분배가되었고 각자 것이 되어버렸다.

다만 우리가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대조선의 상제(上帝)라고도 하던 황제성상(皇帝聖上)권위에 대한 신수설(神授說)을 바탕으로 하는 용(龍:dragon)의 상징성과 해치(獬豸) 또는 고려견(高麗犬)이라고 하는 사자(獅子:lion)형상을 포함한 삼한 천자국(天子國)의 정통성(正統性)이 끝까지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어기(御旗)와 8개의 거대한 한국을 관할하던 태극팔괘도(太極八卦圖) 또는 제일태극도(第一太極圖)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청조는 고려태극기 국기로 사용하려했다.






청나라는 조선이 자국 속국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조선국기라 하지 못하고 고려국기라 하였을까?

고려(高麗)가 조선(朝鮮)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인가?

굳이 1392년에 사라진 고려(高麗)를 명칭하면서 조선(朝鮮)이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선(朝鮮)이 대청국(大淸國)의 종속국(從屬國)이라고 한다면 고려속국이 아니라 조선속국이라 해야 하지 않는가.

청은 왜 조선이라 하지 못하고 고려를 부기해야 했을까.

이러한 형태는 만약 고려와 조선이 분리되어 1881년 까지 존재하고 있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문제는 서양국가 어느 누구도 청나라 하지 않고 청정부라 했다는 사실이다.

청은 조선의 정부인가 아니면 고려의 정부인가.

지금까지 글에서 조선은 세계통치국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다른 국가들처럼 국기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청정부도 마찬가지로 국기라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아래 자료에서 알 수가 있다.

军旗是一个国家军队的标志,是一支军队的荣誉所在。清政府时中国并没有现代意义上的国旗、军旗,直到1881年9月在英国定购的“扬威”、“超勇”两艘巡洋舰回国后,为和国际接轨李鸿章经清廷批准制定了军旗、国旗的质地、章色。万年国旗为羽纱质地,正黄色,用羽纱镶嵌青色五爪飞龙,龙头向上,分为大小四号,头号横长1丈5尺6寸,宽1丈6寸5分;二号横长1丈3尺9寸,宽9尺5寸;三号横长1丈1尺5寸,宽7尺6寸;四号横长9尺6寸,宽6尺三寸。军旗提督用五色长方旗,诸将用三色长方旗,上角饰以锚形。

위 글을 풀어보면 "清政府时中国并没有现代意义上的国旗、军旗" 청조(淸朝) 역시 현대적인 의미의 국기(國旗), 군기(軍旗)가 없었다고 했다.

다만 1881년 9월 영국에 주문한 '양위(扬威)', '초용(超勇) 명칭의 순양함(Cruiser:巡洋艦)두 척이 귀국할 때까지, 국제접궤(외교가)인 이홍장(李鸿章)관리하에 청나라 정부(清廷)가 군기를 제정 비준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조선이나 청조(청정부)는 별도의 국기를 1881년까지 공통적으로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시기에 이홍장(李鸿章)은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소위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자유자재로 우군과 적군이 없이 변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역사기록에 나타난다.

서양세력들을 등에 업은 이홍장(李鸿章)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휘하인 양무파(洋務派)관료들을 지배하고 사적군벌을 양상하며 북양수사(北洋水師)라고도 하는 북양해군(北洋海軍)를 창설하였다.

함대를 사들이고 하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이홍장은 유대자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1644년 명조(明朝)를 멸망케하고 세워진 청조(淸朝)를 서양해양세력들은 청정부(Qing Government)라고 지칭하였고 또 다른 명칭으로는 청군벌(清軍閥) 또는 북양해군(北洋海軍), 북양정부(北洋政府)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사적 무장력을 가지는 군벌(軍閥)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서양제국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권한을 확대코저 하는 것이며 제국주의의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거나 민중에 대한 수탈적 방법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강화된 지방분권적 경향과 정통적 권위를 갖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부재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바로 대조선이 힘을 잃고 와해될 때이며 이때 우후죽순처럼 각자의 국가만들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갑오전쟁(甲午戰爭)이 발발하여 그 이듬해 북양함대가 압록강해전(Battle of the Yalu River)으로 전멸당하고 정여창(丁汝昌:1836-1895)제독이 자살하면서 끝내 패배하면서 이홍장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하관조약(下關条約)을 맺고 북경조약으로 산동반도를 일본에 내어주었던 상황에서 청조의 대표격인 이홍장(李鴻章1823-1901)은 난데없이 1896년 영국을 방문하고 당시 영국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鎻章:Royal Victorian Order)을 수여 받았다는 사실에서 보면 이홍장은 청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영국을 위해 일했고 때문에 수훈훈장을 영국여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그의 행동에 많은 의문점을 남기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훗날 중국인들은 이홍장을 반역자라고 낙인을 찍는다.

공교롭게도 동양인에게 수여가 최초라고 알려진 빅토리아훈장은 이때 처음 제정하였다.

처음 제정한 훈장을 그것도 동양인 이홍장에게 공훈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러나 신중국 자료에는 이를 황가기사훈장(皇家騎士勳章)이라고 명칭하고 있는 것은 빅토리아여왕의 자격문제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고려가 황실이라는 사실은 이것으로 증명된다.

실제로 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 "에서 고려(高麗)의 야간(夜) 큰 전쟁에서 우진(牛陣:소를 이용한 대진)으로 승리한 전도(高麗月夜大戦牛陣得勝全圖:Victory with cattle during the night in Korea war)를 볼 수 있었고 조선군(朝鮮軍)은 각 군영제를 5군영(五軍營)로서 전영(前營), 후영(後營), 중영(中營). 좌영(左營), 우영(右營)의 다섯 영(營)으로 나누거나 또는 지방에 따라 중영(中營)을 뺀 4영군기(四營軍器)로 하거나 아니면 좌영(左營), 우영(右營), 중영(中營) 등 3개 진영으로 나누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어 위 삽화그림에 좌영과 우영의 깃발이 보이는 것은 바로 조선 군영제라는 것도 알 수가 있었고 고려가 조선병영을 이끌고 전쟁을 하였고 청은 고려임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즉 청일전쟁이 아니라 갑오전쟁이라 한 것은 바로 고려를 상대으로한 서양일본과의 전쟁임을 풀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부흥이란 기치를 내걸며 순문(孫文:1866-1925)등에 의해 국민당 전신인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 바로 본격적으로 앵글로계인 만주족을 축출하고 중화회복운동을 하였고 이를 동조한 세력들은 마침내 신중국을 만들기 시작하여 1894년에는 청일전쟁(동학혁명)시작되어 1895년 3월에 종결되고 난 후 청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였으며 그해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시해사건이 발생하면서 불안해진 고종(高宗)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하던때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에서 박견(狛犬)으로 본 고려(高麗)는 당(唐)이고 중국(中國)이라하였다.

중국천자의 가문을 황가(皇家)라고 하였다면 당연히 고려 또는 상속한 조선왕가가 로얄(황실)이 되어야 하지만 잉글랜드의 하노버왕가(Hanover)나 빅토리아의 시가쪽 왕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Sachsen-Coburg und Gotha)를 본가로하는 빅토리아 여왕이 결코 황가(皇家)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아래 임금이 둘이 될 수 없듯이 동서양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속에서 천자 즉 세계통치자의 황가(皇家)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잉글랜드가 이러한 삼한 정통성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서양일본 천황제(天皇制)로 보완하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본 블로그 글 "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8 "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1910년 한일병합은 정한론(征韓論)의 완성이며 일본제국 관직명에서 특이하게 훈독(訓讀)을 사용하였고 옛 중국이라고 하는 수당(隨·唐)에서 사용하였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 사실과 당명(唐名)과 중국의 품계제 위계(位階)를 가졌다는 것은 스스로 중국체계를 갖춘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었다.

현재 유럽서양세력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국이면서 패전국인 일본천황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유지시킨 이유가 바로 이러한 부족한 정통성의 문제를 없앨 수가 없었던 것이고 또한 브리티시(British)라는 조선체제를 그대로 전통유럽왕실계보로 보존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심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반도역사학자들이 말하길 "고종은 왕가(王家)를 대한제국을 건립하면서 황가(皇家)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국가(國家)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질 때 대단한 모욕과 같은 반인륜적인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본 블로그 글 "1890년에 영국인들이 말한 'COREAN 시대(Era)'라고 한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8 "에서 광서제(光緖帝)는 겨우 4살 되는 나이에 재위하여 1880년 9살 되는 해까지 황제자리에 있었지만 거의 친정은 할 수 없었으며 즉위 1874년부터 1881년까지는 적모(嫡母)인 동태후(東太后)가 섭정하였고 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부터 1889년까지는 큰어머니이자 이모이기도 한 서태후(西太后)가 섭정을 하여 신중국을 동태후(東太后)라고 한 것으로써 서양을 서태후(西太后)라 한 것이라면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볼 때 서태후는 즉 빅토리아여왕이 1881년부터 집권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던 영국대사관이 만든 이 초석(礎石)에는 그러한 모든 시대를 중국시대, 혹은 빅토리아시대라 한 것이 아니라 코리아시대(Corean Era)라 하였다.

또한 청조(淸朝:1616-1912)를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煕)로 바뀌는 1662년부터 따로 볼 필요가 있는데 금(金), 청(淸)이 신라(新羅)를 잇고자 한 것처럼 바로 파사국(波斯國) 즉 페르시아의 전통풍습을 고집한 청조는 대조선 서쪽에서 일어난 강씨국(康氏國)이라 하여 아랍계임을 알 수가 있다.

고려의 군사들이 터본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볼 때 페르시아기풍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본 블로그 글 "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1 "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면에서 활동한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 's Bay Company:1670-1869)가 지목이 될 수밖에 없으며 1670년에 설립이 되었다는 사실과 시기적으로도 일치하며 이들의 실체가 바로 청교도(淸敎徒:Puritan)세력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청조(淸朝)는 1662년부터 또 다른 세력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손문이 이질적으로 적대시하여 만줒족을 축출해야 중화주의가 세워진다는 원칙과 관계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먼저 게시한 그림에서 대청국기 즉 청조국기라고 하는 형태를 한번보자.

위 그림에서 보듯이 황룡(黃龍)이 아니라 바탕만 황색이고 다섯개의 발톱이 새겨진 청룡(青龍)의 깃발이다.

왜 청나라의 국기는 푸른 용, 청룡(青龍)이 그려져 있을까?

북양군벌의 수군수사(水軍水師)의 깃발을 보면 북양수사전국장령기(北洋水師全軍嬇(將)領旗),  북양수사분군장령기(北洋水師分軍嬇(將)領旗),  선척기 상기(商旗)정도가 있을 뿐인데 특히 수군수사(水軍水師)깃발에서 새겨진 글에서 원문에는 장수 장(將)이 아니라 한자 궤(嬇)가 붙어 있으며 여자 녀(女)자에 귀할 귀(貴)자의 파자가 되어 전서(篆書)를 보면 재물을 두 손으로 잡아당기는 모양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는 귀한 신분이나 재물을 가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자희(慈禧)서태후(1835-1908)가 지휘하는 북양수군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충분히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 Alexandrina Victoria;1819 -1901,재위:1837-1901)과 대비될 수 있는 사실이다.

물론 나중에 동양의 빅토리아가 방해가된다 생각한 서양세력들이 정리가 필요했을 때 서태후는 팽당하는데 에드먼드.T.백하우스(Edmund Trelawny Backhouse:1873–1944)의 저서에서 서태후(西太后·1835-1908)의 죽음은 이질이나 노환이 아닌 측근인 군벌 원세개(袁世凱:1859-1916)의 총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양지배하는 역사에서 사용가치가 없는 존재를 측근을 이용하여 제거한 것이다.

청나라 국기가 황룡이 아니라 청룡이라는 사실에서도 본 블로그 서두에 게시한 조선문장(朝鮮紋章)에는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황룡이 도안되어 있고 이것을 조선임금 어의(御衣)에 새겨 사용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오히려 조선이 황룡(黃龍)을 사용하는 천자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동양의 청조(淸朝)는 페르시아세력과 앵글로계 만주족 즉 동서양의 두 개의 실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1662년부터 세력화한 잉글랜드에 의해 조정되었거나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

1660년 왕정복고(Restoration)에 따라 찰스 2세(Chalres II,1630-1685,재위:1660-1685)가 귀국하여 이듬해 즉위하였다.

결국 해양세력인 만주족 청(淸)은 서양세력들에 의해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한번 정리하고 보아야 할 것은 명조(明朝)가 건주여진(建洲女眞)출신 노추(奴酋)누르가치(奴兒哈赤)에게 멸망하던 시기는 1620년 순수, 순결주의[Word origin of 'puritan'C16: from Late Latin pūritās purity]청교도(清教徒:puritan)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하던 찰스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의 탄압을 피해 아메리카대륙에 상륙하던 시기와도 일치하여 본래 청조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청(清)이라는 한자는 해양세력의 체제 명이고 교황(敎皇:Pope)중심이 아닌 순수, 깨끗함을 앞세운 복음중심의 청교도(淸敎徒:Puritans)는 엘비온(Albion)과 연결되며 이 잉글랜드세력은 청(淸)을 조선(朝鮮)의 중앙정부 노릇을 하게 만든 세력으로 이 잉글랜드 왕조가 인도(印度)와 브리티시를 묶으며 빅토리아여왕을 등장시켜 세계통치국이었던 대조선의 왕권을 장악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이후 하는 수 없이 조선을 승계한 대한제국과 분리된 만주국(滿洲國)의 전신으로 빅토리아계 러시아왕조와 밀접한 관계가 이어지고 대한제국과 연계된 상태에서 러일전쟁은 이러한 틀을 완전히 깨버리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은 하나라고 볼 수 있고 일본 즉 서양연합세력에게 패한 러시아는 대한제국으로부터 물러나 결국 모든 권한이 서양연합세력에게 넘어가 버렸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마건충: "내가 생각하건데, 귀국의 국기는 백성을 상징하는 백색 바탕에 신하를 상징하는 청색 구름과 임금을 상징하는 붉은 용을 그리되, 우리 청국기의 용 발톱이 5개이니, 4개로 구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청나라의 국기에 그려진 용의 발톱은 5개이며, 조선을 속국으로 보는 의미에서 4개의 발톱을 그릴 것을 권했다.) [태극기역사]


이것은 소위 한반도역사의 청나라 속국이어야 하는 전제로 엮어놓은 허구이다.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四神) 중 하나로 동쪽을 담당하는 신을 청룡이니 청룡은 동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권위의 상징인 용 문양은 계급 봉건사회에서 황제를 나타내기에 사용자체를 제한했다하지만, 많은 사람이 용 문양을 좋아해 신분에 따라 발톱의 개수를 달리해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알려지는 것도 사실 한반도 역사가 생성된 것과 같은 것이다.
황제는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 태자나 제후국 왕은 4개 발톱인 사조룡(四爪龍), 민간에서는 삼조룡(三爪龍)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조룡이 그려진 조선임금의 곤룡포(袞龍袍)는 중국 황제가 내려주는 것을 예로 여겼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꿰맞추려하는 헛소리다.

전자에서 거론했지만 대청국기라는 위 그림을 보면 룡기(龍旗, The Dragon flag)라 했지만 청룡이다.

황룡기가 아니다.

상기 그림을 보면 위의 것은 룡 발톱이 4(1872)개이고 아래 것은 5(1890)개로 청국기가 다르다.

오히려 1872년에 그려진 청국기에는 발톱이 4개가 그려진 것을 감안할 때 위 논리가 전혀 맞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청조가 처음 국기를 제작하였다고 하는 것은 1881년이다.

청룡의 삼각깃발이 아닌 고려국기가 청조국기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태극기 상식과는 완전히 괘를 달리하는 것이지만 고려는 동국연합(同君連合)성격이 강한 중원체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조선(朝鮮)에서는 이를 중앙조정(中央朝廷)이라고 했다.

때문에 위 사진에서 대청국속(大淸國屬)이라는 것은 일제가 첨부시켜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동양역사의 삼한천자의 정통성으로 받아들이는 상징 드레곤 즉 용(龍)을 황실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은 청조선[清(支那)朝鮮]뿐만아니라 잉글랜드 브리티시(British)역시 용(龍:Dragon)을 사용한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본 블로그 글 "방울뱀(Rattlesnake, 響尾蛇)으로 본 마지막 대조선(大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2 "에서 밝혔듯이 미국독립전쟁이전 발행한 일간지 The Massachusetts Spy, or Thomas's Boston Journal Newspaper 에 실린 미국의 방울뱀과 영국의 드라곤의 대립관계까지 설명을 하였다.

미국의 방울뱀은 원주민들의 풍이족(風夷族)의 관습이 그래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잉글랜드의 왕가 상징은 고려개(高麗犬), 사자(獅)이다.

그러나 브리티시 상징은 분명히 드레곤이다.

고려왕실의 상징을 그대로 이어 사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자이다.

태극(太極)은 삼한의 정통성과 고려를 연결해주는 상징임이 틀림없고 만주(滿洲) 여진족인 청조(淸朝)가 태극기를 사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일제가 이를 조작했다고 본다면 청조가 태극기를 사용한 고려국기(高麗國旗)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고려는 스코틀랜드와 정확히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 "에서 이미 풀어본 사실이다.

잉글랜드왕가는 북유럽 노르만, 플랜태저, 랑카스터, 요크까지 혼존하다가 비로서 튜더왕가에서 1603년에 대가 끊기고, 1707년에 대가 또 한 번 더 끊겨 동군연합(同君聯合:personal union)이란 이름아래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란 체제가 생성되었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코리아체제와 같은 것이다.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이라 했지만 이것은 코리아연합(United Corea)체제가 더 무게가 있는 명칭이라 여겨지는 것으로 그레이트브리튼은 연합, 연방국가체제라는 것으로써 바로 코리아연합, 연방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본래 유럽역사는 조선역사보다 고려역사를 더 많이 포함시켜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들어 인도유럽어족의 한 일파인 켈트어파를 쓰는 아리아족을 가리키는 켈트족(Celts)과 연결되면서 프랑스 북부지방 골족(gol)과 갈리아(Gallia)와 이어지는 고로(高盧:골)는 고구려민족임을 알 수가 있고 프랑크왕국 분열되고 난 후 고려태조 왕건재위와 일치하는 군트람(Guntram the Rich:920-973)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성립은 신라(神羅)에서 고려(高麗)로 이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기때문이다.


삼태극과 세계사상


조선시대(朝鮮王朝)의 어기(御旗)를 분명 삼태극이라 한다.
이것은 시킴(Sikkim)왕국의 상징이며 티벳(Tibet)의 국기에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자료에 따르면 삼태극 사상이 한국인의 사유체계(思惟體系)의 중심을 이룬 것은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사상을 통해 태동한 민족의 시원과도 관련이 있고 기독교 카톨릭의 삼위일체(三位一體:Τριάδος )와도 연결되며 삼국시대 무렵, 음악, 미술, 건축 등 각종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음양 태극이 등장하기 이전, 당조(唐朝)시대까지 삼태극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천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이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한서(漢書卷二十一上)의 율력지(律曆志第一上)에 보면

天之中數五,地之中數六,而二者為合。六為虛,五為聲,周流於六虛。虛者,爻律夫陰陽,登降運行,列為十二,而律呂和矣。太極元氣,函三為一。極,中也。元,始也。
"하늘에서 중앙이 5 이고 땅의 중앙은 6 이라 이 둘이 합하니 6 은 빈것이며 5 는 소리이라 돌고 흐름은 6 이 빈것이네. 빈것은 괘로 다스리니 음양이며 오르고 내림의 움직임이 늘어세운 12 이 율려와 같다.
태극의 본래 원기는 3 을 담아 1 가 되는 것인데 끝과 중앙을 말하며 처음 시작이다." 즉 "태극원기는 셋을 담아 하나가 된다(太極元氣, 函三爲-)"는 것은 태극의 하나가 움직이 시작되면 삼태극 관념이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송대(宋代)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래로 음양 2기(氣)만을 포함하는 음양태극 관념으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태극의 본래 원리는 삼태극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삼태극을 불선에서는 우선(右旋) 또는 희선(喜旋)이라 하는 것으로 난디아바타라(Nandy-avatara)라고 하여 원이나 각을 중심에서 선을 그리면서 하나의 통일된 질서를 형성하는 형상이며 이를 "기쁨(Nandy)"의 "신(神:avatara)"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삼태극은 다르마의 수레 세바퀴(法輪), 뱀·멧돼지·새를 묘사하거나 무상(無常)·무아(無我)·열반(涅槃)를 뜻하고 규율·명상·지혜를 의미하거나 부처(成佛)·달마(法)·승가(僧迦) 뜻하며 본질(근저)·자연·원기(에너지)를 뜻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바탕(Ground)·과정(Path)·결실(Fruit )을 나타낸다 하였다.

여진족은 앵글로계통의 서양왕조라 해도 과언아니기 때문에 빅토리아여왕과도 연결되어야 한다.

그외 삼태극과 궤를 같이하는 서양문양들을 보면 미노안(Minoan)시대의 시칠리아의 트리스켈리온, 켈트 트리스겔리, 켈트족의 나선형 삼위일체, 미케네 문명의 그릇, 리키아의 동전, 팜필리아의 금화, 그리고 피시디아와 같은 많은 고대 문명에서 나타나는 켈트 족의 트리스켈리온(Triskelion), 영국 잉글랜드 남서부의 데번(Devon)교회당 세 마리 토끼(Three hares), 삼족오(三足烏:Three-legged crow), 원형을 그리며 도는 모양 토모에(Tomoe), 몰타(Malta)의 거석 신전의 삼엽형(三葉形:Trefoil)도형, 고대 그리스의 정족(鼎足), 삼발이(三脚臺:Tripod)삼각대를 장식, 고대 파간(Pagan) 켈트족의 이미지에서 개조된 종교적 상징, 노르웨이의 상징인 발크누트과 비슷한 3개의 타원(호(弧))으로 만든 도형 트리퀘트라(Triquetra), 그외 아즈텍 스와스티카(Aztec swastika), 바슈키르어(투르크 어족:Bashkirs symbol )의 태양과 다산의 상징, 이탈리아 볼세나, 에트루리아(Etruscan)장식등에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은 삼한 삼태극과 고려연합이 그대로 이어짐을 알 수가 있다.

고려를 치나스타나(Chinasthâna) 또는 치니스탄(震旦;Chinistan)이라고 했다는 것은 삼한(三韓)조선(朝鮮)을 다르게 표현한 명칭으로 진단(震壇) 또는 진역(震域), 진국(震國), 진단(震旦)이라 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동방(東邦)중심의 역사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대대학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1898년의 통상약장유찬(通商約章類纂)에는 대청국기[大淸國旗]와 북양수사전군궤령기[北洋水師全軍嬇領旗],  북양수사분군궤령기[北洋水師分軍嬇領旗], 상기[商旗]를  싣고  있고,  그  바로  뒤에  태극기를 대청속 고려국기‘大淸屬 高麗國旗’라고 한 사실에서 이 고려국기(高麗國旗)가 과연 조선(朝鮮)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고려를 나타내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속(屬)을 속국(屬國)이란 개념으로 볼 수 없고 동등하거나 고려(高麗)가 청(大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하게 고려(高麗)가 아닌 조선(朝鮮)의 태극기를 청나라 사신 마건충(馬建忠:1845-1900)이 대신 도안하여 그려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선국기를 청나라 정치인이었던 마건충이가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마건충이가 태극을 중시했다는 사실은 여기저기 묻어나는 것이며 청조가 신라와 고려(高麗)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마건충이 고려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명확한 것은 세계통치국이었던 당시 조선은 국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때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청조(淸朝)가 만주족이라고 하여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노르만족, 앵글로계 유럽인들의 중심의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 적이 있던 것처럼 브리티시의 왕가가 근저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북양수사 청군벌(清軍閥)의 대표격인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1896년 브리티시를 방문하고 당시 빅토리아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 받았다는 사실등이 이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마건충이 태극(太極)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켈트족(Celts)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뿐만아니라 삼태극(三太極)의 문양이 범 세계적으로 강하게 퍼져 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청조와 하노버왕가 동질성


본 블로그 글 "하노버(HANOVER)의 역사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2 "의 청교도(淸敎徒:Puritans)와 청(清)나라, 후금의 만남이란 소제에서 청교도혁명이라 하거나 또는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1642-1651)이라고도 하는 충돌에서 1차(1642-1646), 2차(1648-1649), 3차(1649-1651)의 결과가 찰스1세(1600-1649,재위:1625-1649)의 처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마치 조선의 병자호란 때 제16대 임금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수모당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때부터 잉글랜드왕가는 스코틀랜드왕가에 피신상태에 있었다는 과정과 또한 일맥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때부터 만주족인 홍타이지(皇太極)숭덕제(崇德帝,1592-1643,재위1626-1643)가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하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하노버왕가는 청(淸)으로도 분장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태극기 조차 청나라가 사용했을 가능성을 더한다.
국가의 국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제 갖 태어난 국가입니다. 앞으로 이런 국기를 가질 테니까 잘 보아주세요. 하는 의미말고는 당시상황에서 크게 볼 의미가 없는 것이다.
유럽국가들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럽국가들은 근세기에 생성된 회사체제의 국가들로써 각 회사가 근거하던 도시국가체제인 것이 확실하고 그 도시에는 시민국기라고 하는 도시상징기가 존재했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국기는 선적기가 변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근세기 서양국기들은 거의가 이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에 의한 것으로 선척은 바다를 운행하는 거대한 배를 이른 것이며 상선(商船)등에 꽂아 식별을 하던 것들이 오늘날 국기가 된 경우가 많다.
이를 상선기(商船旗)라고도 하는 것이다.
본래 선척기라 함은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로써 엔사인(Ensign)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시민이라고 하는 국민국가를 표식하는 것으로 해양세력의 무역사무소가 차려진 곳의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깃발이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국가라고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밝혔듯이 해양세력들이 깃발을 함선에 달고 해양을 누비고 다녔다는 것은 첫째 해적으로 보지 않도록하는 장치이며 세계통치국인 조선제정체제가 인정하는 무역회사의 소속 함선인가를 나타내는 식별표 같은 것이며 그것을 통해 통관과 무역관리의 수단과 방법이 정해지게 하는 중요한 알림표식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고 본 블로그에서 주장했다.
그러니 19세기에 난립하던 국기들은 모두 이와같은 성질의 선척기 또는 상선기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것은 지금의 유럽국가 어디어디를 비교하여 선적기와 국기를 동일하게 확대시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위 본 블로그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조선은 해양세력들을 통제하는 제정체제였기 때문에 이들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통관, 즉 해안을 출입하려고 한다면 반듯이 선척이나 상선인 함선에 표식기를 꽂아 조선관리들이 선박정체를 식별이 가능하도록 통고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한국(COREA)이라고 하는 조선(朝鮮)은 적어도 1881년까지 세계산업의 중심지였다고 판단되며 때문에 온갖 함선들이 이런 식별표시를 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근세기에 서양해양세력들이 조선 주위를 그렇게 배회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펙트이다.
서양해양세력들은 조선 수많은 해안도시에 직접 들어가 상행위를 하고 싶었지만 체제를 문란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고 하여 아주 극소수의 해안 항구만 개방하고 그곳에서만 서양해양세력들이 상행위를 하겠금 제한했다는 것도 체제를 보호할 목적인 것이지만 현재 서양역사나 한반도 역사는 조선이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문을 안으로 걸어잠궈 쇄국하고 서양해양세력들을 일방적으로 막았다고 불평하지만 사실상 무질서한 서양해양세력들의 난립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이란 거대한 땅을 생각해보라.
그곳에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서양해양세력들이 기를 사고 달려들려고 했을 것이 뻔하지 않는가.
왜 한반도만 쳐다보고 당시 상황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가.
조선의 해관(海關)은 적어도 아편전쟁이후 일부를 풀어준 것으로써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이며 오늘날의 세관과 마찬가지이고 무조건 조선의 해안에 출입하려고 하는 선척이나 상선 선박에 그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표식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하니 엄밀하게 따진다면 조선에서 조선항구를 통행하는 모든 선박은 선척기를 부착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특성에 맞게 선척기, 즉 상선기를 만들어 꽂아 조선관리의 허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어야 근대사가 말하는 국기의 생성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조치는 일본이란 거대한 해상무역연합체가 위협으로 느끼거나 압박감을 가졌다면 그들에 의해 국기가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때문에 대조선의 역사가 그들에 의해 해체가 되고 역사뒤안길로 사라지게 하면서 국기마저 후진국 생성과정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에서는 한결같이 1881년을 기준으로 대조선이 해체된 것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의 힘이 많이 쇠락한 상태로 황실이 풍지박산되었을 확률이 높다.
즉 1881년 황실권한이 대폭 제한되어 조선황실의 제정상태가 마침내 제기능을 할 수 없을 만치 어려운 상태에서 만약 서양해양세력들의 자본으로 대체되었다고 하면 그 이후 상황은 우리가 충분하게 상상할 수 있는 역사가 될 수 있다.

결국 청조는 조선을 속국으로 역사화된 동양왕조이다.

그러나 청조는 잉글랜드의 하노버왕가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으로써 결국 조선을 하노버왕가의 속국으로 만들어 인도제국을 통째로 먹어버리고 인도황제권한을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여왕인 빅토리아여왕인 것처럼 역사전체를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전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브리티시(British)의 유대인출신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가 1876년 1월 1일에서 1876년 12월 31일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청정을 수행하면서 신장 152㎝의 영국여왕 빅토리아(Queen Victoria:1819-1901)에게 인도여제(印度女帝:Queen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Empress of India)라는 칭호와 왕관을 수여한 사실과 연결된다.

이것은 청조(淸朝)말기 2대 황제를 섭정하며 국정을 농락했던 '중국의 마지막 여황제' 서태후(西太后:1835-1908)와도 관계가 있고 그녀의 죽음은 이질이나 노환이 아닌 측근인 군부 실력자 원세개(袁世凱)의 총격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던 이러한 극단적인 의혹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은 청조(淸朝)말기의 주요관리들이 브리티시 즉 잉글랜드 왕가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레드크로스 깃발과 만주국(청)


그렇다면 조선(朝鮮)이 가지고 있어야 할 국기를 밝힌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즉 조선은 브리티시 상징처럼 드레곤 즉 용의 상징성에다 발톱이 5개와 황룡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중반부터 독립국가, 민족국가들이 난립하기 시작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모두 "COREA"란 원래 하나의 체제에서 담벼락으로 갈라놓듯이 갈라진 국가라는 것을 타고르 시에서부터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했던 사실이다.
즉 타고르가 자신의 고국 즉 조국을 "COREA"라 한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본 블로그 글 "시성(詩聖)타고르의 정신적 지주(支柱)는?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1 "에서 말했듯이 그곳은 분리되지 않았던 체제 COREA 이며 그리고 시성(詩聖)타고르의 정신적 지주(支柱)라고 하던 바로 "COREA" 이다.

얼마나 많은 선박들이 코리아 해안에 들락거렸기에 외국선박을 관리하는 선박이 별도로 필요할 정도였고 선박들을 개별적으로 식별하기 위한 깃발까지 고안하여 게양하고 운행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적잖게 놀란다.

이와같은 것은 코리아가 세계 선박을 상대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때 엄청났던 실제 상황을 여실히 알 수 있는 기록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반도역사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던 그림들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사실에서 생소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이 깃발그림들이 사이트‘1871-1945 Version’에서 발견된 것에서 1871년이라는 시기를 볼 때 유태인계 상인 독일인 오페르트가 아직 한반도인지 알 수 없는 코리아(Corea), 즉 현재까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조선(朝鮮)이란 영역에 발을 디뎠을 시기 1866년 에서 불과 5년 정도 차이가 날 뿐임을 알 수 있어 그렇다면 위 그림의 깃발들은 오페르트가 조선을 방문할 시점에도 조선연안에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오페르트가 조선을 방문하고 그린 삽화에 이 깃발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라는 이야기다.

당시 코리아 영역 주요 항구 근처에 들락거리던 배를 감시하거나 유도하기 위한 함선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함선에 꽂은 깃발들이 위 그림 모양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직적인 것은 근대사를 관찰하는데 상식이다.

오페르트가 조선을 방문한 시기를 나열하면 처음 18663월 영국인 모리슨(Morrison, James)과 함께 로나(Rona)호로 충청도 해미(海美)에 접근하였던 사실, 5개월 후 18668월 영국상선 엠퍼러(Emperor)호를 타고 접근한 사실, 2년 후 18685월 영국 상선 차이나(China)호를 타고 접근한 사실로 꼽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오페르트가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A Forbidden Land, 1880>이라는 제목의 책은 186682차로 엠퍼러(Emperor)호를 타고 조선을 방문할 때 기록이기 때문에 정확한 년도는 1866년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어 이미 조선에서 위 깃발들을 사용할 때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책 서두에 등장하는 삽화인데 “The steamer at Anchor 'EMPEROR‘ at Kang-Wha Island, Kang-Kiang river, W.C. of COREA.”이란 하단 설명이 붙어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첫째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십자 깃발을 꽂은 스팀기선(steamer汽船)   외륜기선(外輪汽船)이 그려져 있다.

물론 뒤 풍경에 관한 것은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우리는 위 그림삽화에 등장하는 이 목재 스팀(steamer)선 외륜기선(外輪汽船)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외륜기선(外輪汽船)의 최초발명자는 스코틀랜드인 제임스와츠(James Watt:1736-1819)이고 세계 최초의 기선에 의한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1765-1815)인데 풀턴에 의해 진수되었으며 마침내 1807년 허드슨강(Hudson river:490km)에서 뉴욕(New-York)과 올버니(Albany)간을 정기 항행을 하였던 배가 아래 그림의 클러먼트호(Clermont)이다.

 

              

그런데 강화도 앞에 정박해 있던 배가 목재스팀선으로 이 클러먼트호(Clermont)와 같은 종류의 배란 사실이다. 이 배의 길이는 42m, 4.3m, 흘수선 2m, 엔진은 20마력이었고, 시험항해 중에 4.5노트의 속도를 냈다고 한다.

이후 1816년에 증기선 엘리즈 호는 도버해협을 횡단했다 하였고 1818년 증기선 사바나호(Savannah)는 대서양을 건넜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 21m, 배수량 70, 기관 14마력 속력6노트인 소형 기선 엘리제(Steam ship Élise)호는 1816년에 영국의 뉴헤이븐(Newhaven)을 출항하여 난항 끝에 17시간을 항해하여 프랑스의 르아브르(Le Havre)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영국해협(English Channel)을 횡단한 기선이 되었다.

배수량 320 길이 98 ft(30m)이고 기관 90마력인 사바나(Savannah)호는 1819년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항구에서 출발하여 영국 리버풀을 목적지로 하여 대서양을 항해하는데 2911시간 만에 목적지에 닿았다고 한다.

그것도 열대성바람과 해류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연기를 뿜는 스모크스텍(smokestack)이 점점 더 작아지고 휠이 하나 두개씩 붙여졌지만 장거리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그런지 설명에서 보면 이 기선의 평균 수명은 4~5년 정도로 짧고 이는 배가 약하게 만들어졌거나 유지가 허술하기 때문일 것이라 하며, 유목(流木)이나 다른 장애물과 충돌하여 가라앉기도 하고, 과열도 인해 보일러가 폭발하는 경우도 자주발생하였기 때문에 속력을 많이 낼 수 없었고 애초부터 거대한 대양을 항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1810년에서 1850년까지 기선사고로 약 4,000명 정도가 사망했었다는 것은 이 기선이 주는 구조적으로 취약함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기선(스팀선)의 형편이 1866년까지 크게 개선 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이것과 대비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8668월에 있었던 미국 상선(商船) 목재 스팀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평양에 나타났다가 군민(軍民)들에 의해 응징되어 불 태워진 사건이다.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의 사진을 보면 구조적으로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규모가 기존 소형 선박보다는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배수량이 614톤이고 길이가 388.1미터 (127피트 4인치)이며 승무원이 150 명이나 되었다는 것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양을 넘나들 수 있는 배가 아니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크기규모가 늘어났다는 것은 1810년대 기선보다 훨씬 강화된 엔진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 만은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하더라도 미국뉴욕이나 또는 조지아주에서 남아메리카대륙 혼곶을 휘돌아 동아시아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대한 태평양을 가로 질러 횡단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거의 불가능한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는 첫째는 탑승하는 사람들의 공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폭풍이나 해풍, 추위더위에 대한 기후문제뿐만아니라 우선적으로 배 자체의 신뢰성이 떨어져 누가 감히 보험을 여기에 투자할 자가 있을 것이며 실제로 지구 한바퀴를 돌아 가야하는 지겹고도 험한 항로길에 안심하고 탑승할 승객이 과연 몇이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이 이야기는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 "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이 스팀은 애추부터 북아메리카대륙 연안용으로 만든 것이다.
때문에 대양을 횡단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이 배의 또한 결함으로 알려진 것은 배를 타고 승객들이 갑판으로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연기가 갑판전체를 휘감고 있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 태평양을 횡단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며 어떻게 운행이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좁고 좁은 공간에서 견딜수가 있겠는가.

적어도 철로 만든 배가 등장하면서 어지간한 암초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선체와 고속엔진으로 발전하기 전 까지 절대로 동아시아대륙으로 서세가 진입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조선이 해체되던 시점 1881년까지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동아시아대륙으로 넘나들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때문에 근세기에 동아시아대륙이라고 하는 위치에 서세들이 감히 목선이나 목재 기선으로 한반도에 접근하였다는 사실 모두가 거짓임에 틀림이 없다 해야 맞다.

그리고 당시 어떠한 자료에도 이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적이 없음도 강조하고 싶다.

태평양을 횡단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오페르트의 기행문이다.

그가 실제로 코리아에 방문하기 위하여 이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반도역사에 마취된 사람말고는 없다.

그의 저서에는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엠퍼러(Emperor)호를 타고 18668월 조선을 방문하고 난 후 프랑스함장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는 군함 3척을 이끌고 같은 해 918일부터 101일까지 서울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정찰과 수로탐사를 한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프랑스는 다시 10월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면서 군함 7, 함재대포10, 총병력 1,000,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신부(Ridel,李福明:1830-1884)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과 최인서(崔仁瑞) 및 심순녀(沈順汝)3명을 앞세우고 강화도를 침략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데 이것 역시 한반도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신중국, 한반도, 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대륙에 1881년 이전 시기에 서세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렸다는 것을 확인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크지만 그렇다고 하여 엉터리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여기저기 그려 오려 붙인 삽화, 그림 따위가 있으나 그것에 의존할 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해적들이 남긴 항해일지 따위가 있다 하더라로 도덕질, 파괴, 살인을 일삼던 무리들의 기록을 역사증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삽화, 그림, 지도, 항해일지, 기행문일체가 근대사 전체를 움직이거나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좀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이 프랑스 함장 로즈에대해서도 의문점이 산재되어 있다.

그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앞세운 군함7척중 하나인 그에리어(Guerriere)는 소형구축함(Frigate)으로 1,092 tons, 승무원 350을 승선할 수 있는 것으로 1812년에 목숨을 다한 배라는 사실과 이 그에리어는 5등 프리게이트(fifth-rate frigate)로 분류된 것으로 취급이 쉽고 또한 화력을 겸비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보다 대형함대의 적을 헛점을 찌를 수 있고 반면 이 프리케이트 보다 소형의 적에 대해서는 화력으로 압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만들어진 함선으로서 경비나 교전국 해운을 혼란시키는데 사용되었다는 배이다.

또한 로즈는 프랑스 멕시코 개입전쟁(French-Mexican War:1861-1867)이 일어나던 싯점에 멕시코에서 복무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런데 난데 없이 극동사령관이라고 하여 요코하마에 근무했다고 하니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 아닐 수 없다.

본 블로그 글 "요코하마가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3 "에서 요코하마를 멕시코라 했을 가능성에서 멕시코는 근원적으로 도시이름이라는 어원에서 이를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 하나는 오페르트가 타고 온 엠퍼러(Emperor)호가 영국 상선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영국배를 표시하기 위해 배의 전면에 레드 크로스, 붉은 십자가가 꽂혀 있는 것을 삽화에서 목격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영국 함선부류의 기록에는 이 엠퍼러호가 등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똑 같은 증기선에서  똑같은 이름인 엠퍼러호가 다른 삽화에 그려져 있는데 바로 프랑스 배이다.



위 삽화 그림의 하단 설명을 보면 분명 도버에 도착한 것을 시민들이 나와 환영을 하는 모습인데 이것에는 프랑스 국기가 달려있고 아래단 설명으로 이는 엠퍼러호(Emperor) 와 엠프레스호(Empress)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때문에, 어찌하여 똑 같은 증기선에 똑 같은 이름이 영국상선에 엠페러라고 하고 프랑스 상선에도 엠퍼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배를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절대로 같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다.

배가 특정지역이 아니면 건조가 불가능한데 이러한 정보가 손바닥보듯 알려진 상태에서 이름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삽화 두 그림 중 하나가 잘못그려졌다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영국, 프랑스란 국명이 근세기에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을 다 포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라는 역사주체임을 알 수 있고 조선 영역에서 만들어진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절대로 같은 이름을 같은 종의 배에다 붙이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제일 위 그림에서 지적한 강화도 앞에 정박한 스팀선(steamer) 외륜기선(外輪汽船)

엠퍼러(The steamer at Anchor 'EMPEROR)에 꽂혀 있는 깃발은 조선의 깃발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 앞 깃발 사이트에서 보듯이 형태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1871년부터라고 하였으니 그 이전에도 흰바탕에 붉은 흡사한 십자선을 그려놓은 깃발을 등대 역할의 작은 배, 등대선 깃발용으로 또는 출입국관리해군선박에 꽂는 깃발용으로 그리고 코리아(朝鮮:Corea or Korea) 령내에서의 항로표식(航路標識:Beacon)을 제어 관리하는 선박에 꽂는 깃발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에서 이러한 형태적인 것에 기본은 래드 크로스라는 것을 추측하고 예상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레드 크로스 깃발, 즉 붉은 십자가 깃발(Red Cross flag)은 서양 특히 잉글랜드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사실이 지금 밝혀지고 있


 

나가기


이제 이 긴 글을 정리하자.

위 그림에서도 잉글랜드의 래드 크로스 깃발이 서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만주국 군기(滿洲國軍旗:manchurian army red cross flag)가 래드 크로스 깃발과 거의 같다.

만주국이 어딘가.

바로 손문이 축출하고 중화를 다시 세우겠다고 하던 만주국이다.

손문은 한족이니 북방 민족을 오랑캐라 하여 무시해서 그런 기치를 내걸었을까?

아니다.

계통적으로 동양역사와는 결이 다른 종족이라는 말이다.

이 만주국을 지금 동아시아대륙 동북삼성이라고 생각하면 반도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

만주는 아열대지방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본 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 "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에서 주창했듯이 중원(中原)이라고 하는 곳도 멕시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곳에서 강남(江南)과 망강남(望江南)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길다란 목구멍 처럼 보이는 곳에 후금(喉衿)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이 후금 즉 목구멍을 만주(滿洲)라고 하였던 사실도 이제 알아 볼 만한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만주국은 바로 중앙아메리카연합 영역이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곳에서 사용하던 만주군(滿洲軍) 깃발이라고 하니 이 영역들은 모두 삼한영역에 들어가는 것으로 주체는 분명 코리아이고 코리아 깃발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바로 상징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깃발 자체가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당시 이 깃발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고 보이고 모든 선박에 당연히 이러한 표식을 즐거이 달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한이 해체되고 난 후 근세기 역사를 틀어 쥔 서세들은 그들 입맛에 맞는 깃발들을 차용하여 제것 처럼 만든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러한 역사가 존재한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근세기에 일본제국이 만주국을 괴뢰정권으로 만들어 지금의 동북삼성에 깔아 놓은 역사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일제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실체는 없는 것은 일본역사가 일본사기(史記)로 존재하는 것 같아도 실체가 없는 것과 동일하다 할 것이다.

이 실체들은 모두 서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창고에 존재하는 것들일게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래드 크로스 깃발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물론 빙산의 일각인 내용이라고 하겠지만 만약 본 블로그의 주장들이 사실로 들어난다면 감히 단언컨데 근세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동아시아 역사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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