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광물

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

한부울 2014. 7. 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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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

 

글쓴이:한부울

 

어르쇠와 오르쇠

흑룡강북편의 몽고종락

라선정벌과 북벌론의 정리

조선의 모피산업 발달

날조된 치욕의 역사

결어

 

어르쇠와 오르쇠

 

서유문(徐有聞:1762-1822)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의 기미년(1799, 정조 23) 2월[1일-6일]의 기행문에서 “아라사(愕羅斯)는 한어(漢語)로 ‘어르쇠’라 하는데 ‘어르쇠’는 흑룡강(黑龍江)북편 몽고(蒙古)의 종락(種落)을 말하는 것이니, 크기가 특별하게 크고 극히 흉악한 인물인지라 이러므로 대비달자(大鼻㺚子)라 일컬었다.”하였다.

위 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라사(愕羅斯)를 어르쇠라고 하며 흑룡강 북편에 거주하는 몽고종락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을 "대비달자"라 하였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Russia)가 아라사(愕羅斯)라고 지금 말하니 그들을 우리가“어르쇠”라고 하였다는 것이며 또한“몽고인”으로 큰 코의 해달과 같은 짐승(㺚子)종자라고 하는“대비달자”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당시 몽고인이며 아라사라고 하는 종족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어떠한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삼한제국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해달(㺚)과 같은 짐승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해달에서 특징적으로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하는 것이나 본질이 뛰어난 사냥꾼이자 사납다고 하기 때문에 좋지 않는 뜻으로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일 궁금한 것이 "어르쇠"란 용어이다.

어르쇠는 순수한 우리말인 것 같은데 위 기록에는 한어(漢語)라고 하였다.

한어(漢語)가 순수한 우리말인가?

여하튼 어르쇠가 무엇인지 알아 볼 필요성이 있다.

어르쇠가 무엇일까?

어르쇠는 "거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거울을 옛날에는 구리나 돌을 매끄럽게 갈아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래 옛날 부터 거울은 흑요석(黑曜石), 또는 오석(烏石), 십승석(十勝石)이라고 하는 암석으로부터 구하는 것으로 화산에서 규장질(珪長質:felsic)의 용암이 분출되어 결정이 형성되기 전에 식었을 때 만들어지는 암석이라 하였고 이것이 자연적인 유리의 일종이라고 하며 규소(硅素:Silicon)가 많이 함유된 용암은 점성이 높아 원자의 확산이 억제되며 이로 인해 급속히 식을 경우 결정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흑요석(黑曜石)을 형성하게 된다는 설명이 사전에 나와 있다.

또한 흑요석(黑曜石)을 “검게 빛나는 암석”이라 하여 모양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영어로는 옵시디언(Obsidian:SiO2+MgO.Fe3O4)이라고 하는데 이 어원은 로마시대 관리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Major,23-79)의 “프리니우스의 자연사(Pliny’s Natural History)”에서 ‘유리질 화산암’이란 의미의 옵시디아누스(Obsidianus)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였다.

흑요석은 석기시대(石器時代)부터 칼·화살촉·도끼·부싯돌과 같은 여러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며 현대에서도 심장수술에 흑요석 메스(mes)가 이용되는데 잘 연마된 흑요석은 두께가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3정도(3 Nanometer)에 불과한 아주 예리한 칼날이 된다 하고 있는 것이다.

암석 형체가 그만큼 예리하고 날카롭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천문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되는데 가로 122.8cm, 세로 200.9cm의 흑요석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암석의 특성이 조가비꼴, 패각상(貝殼狀)으로 쉽게 쪼개지고 가열하면 팽창하는 성질이 뚜렷하므로 내화원료(耐火原料)등 공업용원료로 이용된다 하였다.

산지(産地)로는 용암이 흐르(stream of lava)는 무늬를 가진 암석인 유문암(流紋岩:rhyolite)이 분출한 곳에 나타나는데 세계적으로는 아르메니아(Armenia), 캐나다(Canada), 칠레(Chile), 그리스(Greece), 아이슬랜드(Iceland), 아르헨티나(Argentina), 이탈리아(Italia), 케냐(Kenya), 멕시코(Mexico), 뉴질랜드(New Zealand), 페루(Peru), 스코틀랜드(Scotland), 미국(America) 등이다.

특히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에서 잘 알려진 곳으로는 캐스케이드산맥(Cascade Range:길이1100km)의 뉴베리 국립 화산기념지(Newberry National Volcanic Monument), 메디신레이크화산(Medicine Lake Volcano), 시에라네바다산맥(Seirra Nevada Mountains)의 이뇨화구(Inyo Craters), 엘로스톤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가까이 몬타나(Montana)주 가디너(Gardiner)에 옵시디언 절벽(Obsidian Cliff)인데 이 중에 가장 흑요석(黑曜石)산지로 유명한 곳이 바로 흑요석절벽 또는 옵시디언절벽(Obsidian Cliff:黑曜石崖:14.5km2)이라고 하는데 이 위치에서 12000년전(12,000 years ago)에 흑요석(黑曜石)을 캐내었다고 영어자료에 나온다.

이 흑요석의 주요산지가 바로 12,000년전에 흑요석을 채취하였던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산지 중 옐로스톤국립공원의 옵시디언 절벽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이 주위에 몽고종락이 있었던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흑요석의 역사기록을 보면 "Examples of obsidian mirrors found in Anatolia have been dated to around 6000 BC." 소아시아 동양이라는 의미의 아나톨리아에서 약 기원전 6000년 흑요석(黑曜石)거울의 실형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도 그리스어로 ‘태양이 솟는 곳’, 일출, ‘해오름’을 의미하는 아나톨리아(Anatolia)지명 역시 이곳에 존재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어(漢語)로 ‘어르쇠’라 한 것은 유리를 만들 수 있는 흑요석(黑曜石)을 채취하기 위해 절벽을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오르쇠’라 할 수 있고 이것을 다시 어르쇠라 하였다면 ‘오르’는 ‘오름’과 같고 돌쇠, 상쇠와 같이 ‘쇠’는 ‘남’을 낮잡아 이르는 말 즉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때 산을 타거나 절벽을 오르는 사람을 낮게 칭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아라사, 즉 대비달자라고 하는 러시아인들이 절벽가까이에 거주하면서 거울이 되는 흑요석을 찾아 절벽을 오르는 사람이라고 하여 이들을 자연스럽게 "어르쇠" 또는 "오르쇠" 로 칭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라고 알려진 대비달자라고 하는 아라사(愕羅斯)는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몬태나(Montana)주의 가디너(Gardiner)마을 옵시디언 절벽(Obsidian Cliff)에서 흑요석(黑曜石)을 채취하던 종족이며 그곳 주위에 몽고종락(蒙古種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흑룡강북편의 몽고종락

 

 

이러한 사실을 밑 받침하는 것이 바로 압록강이라고 하는 흑룡강(黑龍江)을 정체를 밝혔다는 사실에 있다.

분명 서유문(徐有聞:1762-1822)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 몽고(蒙古)의 종락(種落)은 이 흑룡강 북편에 있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어르쇠가 있는 곳은 아라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추리가 가능한 것이다.

위에서 어르쇠가 무엇인지 알아보았고 흑요석을 채취하는 종족을 우리말로 "어르쇠"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종락을 "몽고인종락"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엘로스톤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근처에 몬태나(Montana)주 가디너(Gardiner)마을에 옵시디언 절벽(Obsidian Cliff)을 중심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에 더하여 본 블로그의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란 글에서 5. 흑룡강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라는 소제목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결과로서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근원적으로 흑룡강(黑龍江)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흑룡(黑龍)이란 지명과 북방의 거대한 산맥을 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흑룡강(黑龍江)은 압록강(鴨綠江)과 더불어 동일한 강으로도 알려져 있었다는 기록과 함께 동류(東流) 즉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 사실을 보태어 황하(黄河)와 같은 말이라고 까지 세밀하게 살펴본 이야기들이다.

때문에 로키산맥을 발원지라고 하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포괄적으로 흑룡강이라고 결론을 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 몽고(蒙古)의 종락(種落)은 이 흑룡강 북편에 있었다고 한 사실과 크게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갖게 하는 것이다.

 

라선정벌과 북벌론의 정리

 

그렇다면 잠시 우리는 효종(孝宗,1619-1659,재위:1649-1659)때의 라선정벌과 북벌론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한반도란 개념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러시아(Russia)라고 알려진 아라사(愕羅斯) 즉 코사크(Cossacks)세력은 유리를 만드는 암석 흑요석을 채취하는 "어르쇠"이고 이들이 거주하던 곳을 몽고종락이라고 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강(Missouri river)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북방지역에 포괄적으로 존재한 세력으로 우리나라 사서에 거의 북인(北人)이라고 칭하던 세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북벌론을 이야기 하려면 또 하나의 세력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청(淸)나라고 알고 있는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서 서양세력의 대표급인 영국청교도(淸敎徒)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세력들이 17세기때 동북방지역에 난입하여 우리나라 사서에는 여진(女眞)으로 칭하던 세력임을 알 수가 있다.

여진(女眞)과 만주(滿洲)는 잘 맞아 떨어진다.

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이란 글 소제목"중앙아메리카대륙과 일치하는 지형"에서 만주(滿洲)는 곧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奴酋:奴児哈赤1559-1626)가 세운 곳으로 후금(後金)이라 하는 것도 목구멍과 옷깃이란 요해처(要害處)를 나타내는 후금(喉衿)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영어로 "내로우넥(Narrow Neck) 좁은 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 중앙아메리카대륙의 테우안테펙지협(Tehuan-tepec地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진과 서양세력은 공식처럼 붙어다니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메사츄세츠(Massachusetts)의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한 청교도(淸敎徒:Puritan)들을 말하는 것이다.

청교도라고 하면 해적이라고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영국의 청교도들이 들이닥친 바다를 대동양(大東洋)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해(東海)라고 하고 근세기 아시아지도에서 동아시아대륙 동쪽바다를 청해(淸海)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 한 가지는 청교도혁명이라 하고 또는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1642-1651)이라고도 하는 충돌은 1차 (1642-1646), 2차 (1648-1649), 3차 (1649-1651)의 결과로 찰스1세(1600-1649,재위:1625-1649)가 처형되는데 마치 조선의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595-1649,재위:1623-1649)을 보는 듯한 것도 이치는 같다.

또한 명청교체 시기라 하여 명나라(明朝1368-1644)가 후금에 의해 공격을 받아 공식적으로 멸망한 때가 1644년이란 사실과 모두 교묘하게 중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을 통치하던 조선대왕 효종 입장에서 동북면에는 청교도세력들이 서북면에는 코사크세력들이 마구 설쳐 되었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이것을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당연하게 정벌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효종(孝宗)때 코사크(Cossacks)군사세력들을 상대로 1654년, 1658년에 걸쳐 나선정벌(羅禪征伐)이 있었고 동시에 북벌론(北伐論)이 거론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몽고인라고 볼 수 있는 대비달자 아라사(愕羅斯)가 코사크(Cossacks)가 확실한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북방지역의 러시아 남부에 있었다던 코사크(Cossacks)군사집단은 터키(투르크)-슬라브민족 출신이라 하였고 러시아의 토종인 키예프 루시(Kievan Rus)까지 공격한 종족인 것을 알 수가 있으나 그들이 정확하게 내셔날리즘적이 않고 다만 장사꾼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으로 보았을 때 이러나 저러나 골치아픈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북벌론(北伐論)자체가 북방(동북면과 서북면)에 무단침입하여 조선의 이익을 훼손하던 세력들을 말하는 것으로 일망타진으로 정벌케하여 완전하게 토벌하겠다는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모피산업과 러일전쟁까지 이어지는 글을 한 번 더 올릴 예정이지만 간단하게 서술하면 문제가 발생된 것은 서양세력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행위가 도를 넘어 니것 내것이 없을 정도로 문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때 우세한 무기를 앞세워 조선을 압박하고 그들이 조선 북방의 야생동물들을 남획(濫獲)하면서 그들이 다 차지하여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삼한의 전통적인 모피산업근간을 위협하는 것이기에 이들의 독점적 상행위는 물론이고 북방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의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려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이것에 대한 조선이 크게 갈등케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반도역사는 이와같은 심각한 상황을 일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지금까지 북벌론을 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이 때 조선에서 모피들이 부족현상이 생기면서 모피가격이 상승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는 기록들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아마도 심각하게 국가적으로 대처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면에서 활동한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 's Bay Company:1670-1869)가 지목이 될 수밖에 없으며 1670년에 설립이 되었다는 사실과 시기적으로도 일치하며 이들의 실체가 바로 청교도(淸敎徒:Puritan)세력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과 이러한 근원적인 것을 숨기고 반도역사를 꾸미면서 청(淸)나라라고 만들고 조선을 지배하던 상국(上國)처럼 조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청나라는 중국이 아닌 것이다.

만약 청(淸:Qing)나라가 중국이라면 바로 청교도(淸敎徒:Puritan)의 잉글랜드(England)가 아닌 드라곤(Dragon)으로 한 상징으로 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이나,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800-1922)이 중국(中國)이랄 수밖에 없다.

특히 효종때는 모피산업이 본격적으로 서양세력들의 주 타겟(Target) 업종이 되어 그들 나름대로 시장개척을 하기 시작하였던 때였고 북아메리카대륙에 모피가 될 수 있는 개체 즉 야생동물들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포획하기 위해 무단으로 침입하여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던 조선과 갈등을 키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한 그 때 상황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우수한 화력을 동원하여 나선정벌이라고 칭하는 코사크 토벌이 가능했다고 보여진다는 것은 한반도조선이 가졌다는 허약한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으로 조선정부는 북벌론을 시작으로 동북면의 청교도세력과 서북면의 코사크세력들 모두를 정벌코자 했을 것이 틀림없으며 이 북벌론은 숙종(肅宗,1661-1720,재위:1674-1720)때에도 윤휴(尹鑴,1617-1680)와 허적(許積,1610-1680)에 의해 계획되었지만 청나라의 정세변화라는 이유로 포기 되었다고 반도역사는 말하고 있다.

 

조선의 모피산업 발달

 

김용만의 한국생활사를 다시 보면 조선(朝鮮)에서는 왕(王)부터 천민(賤民)에 이르기까지 가죽 옷을 입었다고 하고 있다.

그만큼 모피공급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1221년 몽골에서는 고려(高麗)에게 수달피 2만개를 요구한 바가 있었지만 고려(高麗)는 그것을 딱 잘라 겨우 1천개 정도만을 보냈다는 기록을 보면 아무래도 고려(高麗)에서 산출되는 수달피를 가지고 몽골인들이 무역 상행위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려에는 수달피가 많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똑 같은 자료에 보면 1088년에 요(遼:契丹國)나라가 고려(高麗)에 양(羊) 2천 마리를 보내왔다는 기록과 금(金)나라에서도 1154년과 1169년에 걸쳐 양(羊) 2천 마리를 보내온 기록이 있으며 이 밖에도 여러 차례 요(遼), 몽골등에서 고려(高麗)로 양(羊)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식용이외 피복이나 모피산업의 원재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가공된 것이 아닌 동물들을 직접 수입하여 재차 가공했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그 만큼 고려가 피복 또는 모피가공기술이 뛰어나 여러나라들이 고려의 산업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고려에서 재 가공되어 부가가치를 높였다고 볼 수가 있다.

때문에 피복산업이나 모피산업 중심에는 당시 고려(高麗)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모피를 의류로 이용하기는 BC1000년경 중국(中國)에서의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중국이란 명칭은 애매모호하게 처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동아시아대륙의 현재 신중국을 칭하기까지 과정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있고 실제로 가우리 가운데 중자를 쓰는 삼한의 고려가 되어야 맞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8세기에 중국(中國)은 모피사용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였고, 모피의 감식도 우수하였다고 하는것도 고려와 조선을 포함한 삼한제국이 곧 중국이란 이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16세기 항해시대 이전 시기에 모피산업이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모피기술이 발달된 곳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삼한제국이라는 것을 아래 글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전통적으로 삼한에서 본래 모피기술이 보전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용만의 한국생활사에 보면 기원전 7세기경 제(齊)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고조선(古朝鮮)의 특산물인 무늬가 있는 문피(文皮)를 사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고조선(古朝鮮)이 모피무역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 역시 추위가 매서운 지역인 탓에 모피생산을 활발하게 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무용총(舞踊塚)벽화의 수렵도에는 말을 타면서 호랑이와 사슴에게 활시위를 당기는 무사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화살촉 대신 요란한 소리를 내고 짐승을 놀라게 하여 기절케 하는 명적(鳴鏑)을 달아 모피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냥했음도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그 만큼 모피상품관리에 철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발해(渤海) 또한 후당(後唐:923-936)에 선물하거나 거란(契丹)등에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산출되는 비버(beaver)라고 판단되는 초피(貂皮)등을 수출하였고 신라(新羅)는 가죽제품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전문적인 장인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가 있으며 8∼9세기경 신라(新羅)를 방문한 아라비아상인들이 초피(貂皮)를 구입해 간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모피무역이 성행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몽골이 모피용인 수달(해달)을 잡기 위해 많은 몽골인들을 고려(高麗)에 파견했다고 한 사실도 본 블로그 글 “해달(海獺:Sea otter)로 본 함경도 http://blog.daum.net/han0114/17049995”에서 충분하게 살펴본 이야기다.

그만큼 수달(해달)이 고려 영역에서 많이 산출되었다는 사실과 러시아들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이 수달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서나 자료들에서 볼 때 야생동물수렵과 도살(屠殺)로부터 가죽을 벗기는 작업의 박피(剝皮), 나무통에 물을 채우고 가죽을 하루 이틀 담가두는 작업인 생려(生戾), 칼로 털을 제거하는 전타(銓打), 기름기를 제거하는 탈지(脫脂), 동물의 배설물등을 활용해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작업 제유(製鞣), 그리고 건조하는 작업과 최종 건조된 가죽 문지르기 작업인 무두질까지의 작업 전 과정이 세세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모피산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기술이 절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모피 제작 과정은 많은 시간과 공력이 요구되는 전문 수공예 작업인 탓에 비용이 많이 들고 권위와 신분이 높지 않으면 접할 수 없는 위신재(威身財)로, 국가 간의 빼놓을 수 없는 무역품이며, 부유층의 사치품으로서의 의복이었던 점을 감안 할 때 이것에 의한 시시각각 돌발되는 경제적인 파동과 그에 따른 쟁탈전은 가히 대단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의 동북면과 서북면은 모피쟁탈전으로 극에 달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날조된 치욕의 역사

 

대비달자가 아라사이고 어르쇠는 북아메리카대륙 몬태나주의 흑요석절벽에서 흑요석을 채취하던 아라사를 칭하는 말이라는 사실까지 이제 확실하게 알았다.

또한 청(淸:Qing)나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청교도세력(淸敎徒:Puritan)으로서 굳이 따진다면 잉글랜드공화국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 보태 밝힐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세계삼한역사관이 진일보한 것이다.

사실상 영국이 아니라 잉글랜드(England)라고 하는 정체가 딱 집어 이렇다 하기가 정말 곤란했다.

동양사에서 청(淸)나라라고 하는 역사명칭이 등장하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역사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근세기에 역사가 동서양으로 분리되면서 필연적으로 생성될 수밖에 없었던 굴곡의 역사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서양세력들은 청교도가 생성되던 그때까지 단언코 뚜렷한 역사가 없었던 상태에서 갑자기 청교도혁명이란 사건을 만들고 그것이 실제 발생한 것처럼 포장하여 역사로 둔갑시켰다는 것이 주요 키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서양역사의 틀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면서도 미심쩍게 한 것은 쿠데타와 같은 3차에 걸친 잉글랜드내전(English Civil War,1642-1651)을 통하여 그들의 전매특허 공화국(共和制:republic)이 건설되었다는 논리가 적용될 수 없음에도 그것만이 용인 된 것처럼 만들고 있다는 것이 현재 도저히 풀 수 없는 오류역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이 하면 쿠데타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인가?

쿠데타(Coup d'état)라는 것은 비합법적인 무력(잘 훈련된 용병까지 포함)에 의한 군사적인 수단으로 ‘stroke of state’, ‘blow of state’ 국가나 정부에 대한 공격(치기, 때리기)으로 정권을 빼앗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잉글랜드내전이 이와 같은 쿠데타라 하지 않고 기만적으로 민의에 의한 혁명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1688년에 발생한 무혈혁명이라고 하는 명예혁명(名譽革命)도 그렇고, 자본이란 괴물을 탄생시킨 산업혁명(産業革命:1760-1830)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실체가 뚜렷하지 않는 공백기간이 거의 200년이나 되는데 이시기는 근대사가 생성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고 이것들을 뭉뚱그려 그들 역사가 결코 아닐 수 있는 대영제국(大英帝國:British Empire)이라는 거창한 간판 안에 포함시켜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0-1922)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날조된 치욕의 역사에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몇가지 단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대체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이 무엇인가?

중화(中華)라는 자체가 본래 삼한을 가르키는 것으로 가우리(中)고려(華)라는 뜻으로서 천하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소중화 즉 작은 중화라는 것을 삼한제국에 사용할 수가 없다.

또 삼전도(三田渡)치욕 또는 굴욕이라고 하여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말하는데 이것은 동양인들에게는 하나의 예(禮)에 불과한 용어이지만 해적출신인 서양인들에게 늘 물기가 있는 갑판 등에서 무릎을 꿇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하는 자체가 거부감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서양인들에게 무릎을 꿇어라 요구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북벌론을 주창하던 효종이 서양세력들을 체포하고 무릎을 꾾게 하였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치욕일 것이다.

요사이 병자호란시대를 배경삼아 조선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가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도두례하는 꼴을 메스미디어 기구에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행태가 참으로 가당찮고 그야말로 반도역사만 알고 있는 어줍잖은 연출가들이 극의 효과를 위해 거짓의 역사사실만을 가지고 도가 넘는 묘사에 장난을 치고 있다고 느낄 정도인 것은 날조된 치욕의 역사가 주는 병폐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전에 보면 옛날, 신불(神佛)에 참배할 때나 나이가 많은 연장자(年長者)에게 새해인사를 할 때의 정중한 예로서,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것을 일궤삼고(一跪三叩)라 하였다.

용어자체도 반도역사가 해석하고 있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가 아니라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라고 해야 맞고 궤(跪)를 배(拜)로 바꾼 의도가 불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叩)는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지극한 공경의 예(禮)로 그냥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임에도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치욕과 굴욕스럽게 하는 냥 머리를 땅에 극단적으로 박는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연출하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삼전도(三田渡)치욕, 굴욕의 역사는 어찌보면 우리 스스로가 피해의식을 만들며 자학의 역사를 부풀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삼전도(三田渡)치욕, 굴욕이라고 하면서도 일제가 떡하니 서울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를 세웠음에도 지금까지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자라나는 청소년과 국민들에게 치욕의 역사, 굴욕의 역사를 현장 실습하듯 지속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반도역사를 추종하는 나부랭이들이 애족과 애국심이 결여된 상태에서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난데없이 청교도세력들을 조선(朝鮮)의 상국(上國)인냥 청(淸)나라를 만들고 청나라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라선정벌(羅禪征伐)에 참여했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엮었지만 당시 만리(萬里)의 북아메리카대륙을 강점하고 백만대군(百萬大軍)을 보유한 조선(朝鮮)이라면 이와같은 이야기는 거짓역사가 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삼한역사를 흠집내려고 하는 소설같은 것이 아닐 수가 없다.

고려 북방 정벌군의 원수(元帥)윤관(尹瓘,1040-1111)이 1107년에 17만병의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한 뒤, 북방 동북면(東北面)에 9성(城)을 쌓았다는 것을 시작으로 동북면에 영토관리가 집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부터 서양세력들이 동북면을 시시때때로 침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조선 초기에도 최윤덕(崔閏德,1376-1445)이 동북면에 4군 설치하였고, 6진(六鎭)을 개척한 김종서(金宗瑞,1383-1453)가 있었으며 세조역시 동북면에 신숙주(申叔舟,1417-1475)를 보내 여진(女眞)을 지속적으로 정벌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조선 북방 동북면에 어떤 세력들이 침범하였기에 삼한의 대왕들이 이처럼 군사정책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였을까?

바로 세계삼한역사에 도전하던 해적출신의 서양세력들인 것이다.

서양세력들이 자본력을 구축한 가장 핵심적인 것을 지적하라면 바로 17세기 이후부터 북아메리카대륙 북방 모피산업을 독점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결어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이 역사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을 영토로 하여 중화(中華)의 위치에서 존재 하였지만 17세가 들어서면서부터 전통적인 산업인 모피산업까지 서양세력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 아라사(愕羅斯)는 한어(漢語)로 ‘어르쇠’를 말한다 하여 이 어르쇠들이 흑룡강(黑龍江)북편에 거주하던 몽고(蒙古)종락(種落)의 주민들이 과연 누구일까 궁금하였는데 이 “어르쇠”가 바로 로키산맥을 발원지라고 하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 북편지역에 사는 종족으로서 엘로스톤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근처 몬태나(Montana)주 가디너(Gardiner)마을에 옵시디언 절벽(Obsidian Cliff)에서 산출되는 거울을 만들 수 있는 흑요석(黑曜石)을 채취하던 세력임을 알 수 있었고 바로 근세기에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 출몰한 러시아세력임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 서북면(西北面)방면에 지속적으로 침입하던 정체를 억지로 정하자면 선비족(鮮卑族)으로서 몽고계 거란(契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라사(愕羅斯)라면 몰라도 러시아라고 하는 것은 근대사가 만든 역사판짜기에서 러시아란 이름이 이상하게 생성된 문제일 것이란 생각이 강하다.

또한 동북면(東北面)에는 17세기부터 청교도(淸敎徒:Puritan)세력들이 난립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조선(朝鮮)은 초기에 고려와 다른 위치에서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초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세종14년(1432)에 편찬되었다는 사실이 있고 그로부터 약 50년 후인 성종(成宗, 1457-1495,재위:1469-1495) 12년(1481)에 다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완성시켰다고 하였다.

50년만에 신증동국지리지(新增東國地理志)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영토적으로 해석하면 50년간 수많은 영역을 새롭게 확보하고 그곳에 도호부설치와 새로운 지명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을 영토로 하는 강한 조선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반도역사는 어쨌거나 한반도(韓半島)를 기반으로 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이란 틀을 만들어야 하였으며 그것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삼한 호칭인 호(胡)를 오랑캐라고 하면서 청나라로 둔갑시키는 배륜(背倫)을 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란 허구의 난리를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가 삼한(三韓)의 전통적인 예(禮)임에도 해적출신들인 서양세력들이 꺼려하였다고 나쁘게 몰고 청교도를 청(淸)나라로 만들면서 자기모순에 빠져 버린 것이다.

북벌론(北伐論)을 이야기 하면서 조선대왕이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결국 앙갚음의 역사로 발전시켰고 그것을 치욕역사라고 만들어 지금까지 대한민국 한복판에 떡하니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만들어 일제하수인들은 끊임없이 일제 노예근성까지 심으려 하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명청(明淸)교체라는 역사가 있기는 한 것인가?

삼전도굴욕역사를 한편으론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한 것은 정축년에 영국청교도의 공격을 받아 조선 북방에 있는 성(城)하나 버리고 그 아래 다른 성(城)으로 옮겼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지만 조선 왕이 마치 성(城)갇혀 있다가 마지못해 나와 항복하는 것처럼 역사스토리를 짜 맞추는 것은 시궁창 같은 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세계전쟁리스트를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병자호란 따위의 전쟁은 존재자체가 없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 설정에서 바라볼 때 1910년부터 생성된 식민지역사라고 하는 것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열도 일본이라고 하는 일제(日帝)가 만든 역사로서 그들의 침탈역사는 마치 그들이 삼한전체역사를 정복하여 다 먹어치운 것처럼 처리한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기막힌 소설같은 짜집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 일제(日帝)망령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들이 갈수록 자만과 우월에 빠지게 만드는 우를 지금까지 우리가 범했고 마치 그러한 역사들이 사실인 것처럼 재생산하여 분별없이 만들어 늘 상 우리의 역사는 한 때라 지만 피지배민족으로 한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운명론까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도 절대 온당치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바다.

이제 이 같은 잘못된 역사 상식으로부터 벗어나 거대하고 훌륭한 세계삼한역사의 상속인으로 치욕적이니 않고 굴욕적이지 않는 떳떳한 역사주체로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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