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광물

석유(石油:petroleum)로 본 새로운 역사

한부울 2017. 3. 3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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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石油:petroleum)로 본 새로운 역사

 

글쓴이:한부울

 

1)석유에 들어가며

2)충청도와 북아메리카대륙 중심부 초원지역

3)수천리(數千里)라는 산술적 의미

4)맹화유(猛火油)란 정체

5)맹화유와 그리스의 불

6)신라는 비잔티움이다.

7)나아가며

 

 

                                  

 

 

 

1)석유에 들어가며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나라 역사사실에서 놀랍게도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중국사서기록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놀랍다고 하기 보단 오히려 충격적인 사실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것은 실제로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석유가 단 한 방울로 나오지 않는 엄연한 사실을 현재 우리가 직접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사학자들이 역사가 어떠니 저떠니 하지만 한반도에 석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한 사실이다.

실제로 점차 들어나는 역사기록처럼 석유가 난다는 사실이 우리역사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옛 우리나라의 영토는 석유생산지 이었음이 틀림없다.

과연 그러한 역사영토가 한반도였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실을 한반도 지형상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재 한반도사람들이 신봉하는 한반도식민지역사 어디에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며 기존 강단역사학자 누구도 이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용기있게 나서 명확하게 말할 사한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명실공히 역사가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꿀먹은 벙어리 신세는 하나같다. 

이처럼 한반도 지형사정과 맞지 않는 이러한 역사모순들은 한반도 역사가 안고 있는 대표적인 병폐이며 설령 이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어긋난 사실자체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도 큰 괴리감으로 다가갈 것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명색이 해방 전까지의 기록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기에 무시되어야 하지만 그것도 역사라고 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해방 후 각종 지하산물기록과 산업통계 분석자료 등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정보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

한반도에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허접한 유전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어야 하지만 전무하다는 것은 역사기록과 실제현실자체가 이처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세계 어느 역사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것을 기괴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남아 있는 세계삼한역사의 자취이며 흔적인 사서 기록들을 무시하고 모른 척하고 말 것인가.

비록 잡아당겨 끊어질 썩은 새끼줄이라 할지라도 강박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당겨보지 않을 수가 없다.

본문에 들어가서 세부적으로 말하겠지만 이에 대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역사기록들을 보면 하나둘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남송조(南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이가 쓴 작몽록(昨夢錄)과 명조(明朝) 남해인(南海人) 황충(黃衷)의 해어(海語), 그리고 호북기주인(湖北蕲州人)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들의 공통적인 기록에서 보면 “맹화유(猛火油)가 고려의 동쪽 수천 리(里)밖에서 나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이다.”란 기록이 명확히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의 가슴을 흥분속에 뛰게 하지만 정비례하여 의문은 산처럼 쌓인다.

비록 간단한 한 개 문장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이 문장 속에는 고려가 석유생산지라는 것 이외 휘발성, 가연성이 높은 나프타(naphtha)가 생산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추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록자체가 단순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유럽역사에 등장하는 비잔틴제국의 필살기 무기로 알려진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떠올리게 만들고 또한 송나라의 무기로 알려진 맹화유(猛火油)를 담은 맹화유궤(猛火油櫃)를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의 불은 유럽서양인들의 역사이기 때문에 상상이 어렵다고 치고 그렇다면 같은 동양사인 송나라의 맹화유궤는 고려라고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고려냄새가 진동을 한다.

왜냐하면 송나라때 사람 강여지(康與之)이가 쓴 작몽록(昨夢錄)에 분명 맹화유가 소문에 고려 동쪽 수천리 밖에서 난다 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화유로 무기를 만든 송나라 땅이 아니라 고려 땅에 이 맹화유가 난다 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고려와 송나라를 다르게 볼 수가 없다.

지금까지 성분분석을 토대로 말하고 있는 실제사실들을 종합할 때 특히 고려에서 났다고 하는 이 맹화유(猛火油)는 맹렬하게 불이 붙는 기름이라는 의미로 매우 깨뜻한 정제유(精製油)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즉 휘발성과 가연성이 높은 질 좋은 나프타(naphtha)라는 의미이다.

물론 한반도식민지 역사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추리조차 어색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사대사상(事大思想)이나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중국사서(中國史書)에서 고려에 맹화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확한 기록에 대해 기존 강단사학자들은 왜 입을 닫고 있는 것일까?

찾을 수 없어 몰라서일까.

굳이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중국사서까지 들먹여 스스로를 곤란하게 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

어줍지 않는 지위나 신분 때문에 그들만의 일제식민지사를 보호해야 하는 가당찮은 의식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며 역사기득권 챙기기와 밥그릇 챙기기에 따른 공익보단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입을 봉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석유기록을 한반도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래서 결론이 돌출되어야 했다면 기존 한반도 역사는 그야말로 천하에 불필요한 것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땅에 묻어야 하는 쓰레기로 전락할 가능성을 아마도 크게 두려워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한반도식민지역사는 애초부터 진실과 진리와 담을 쌓은 것이다.

이것들은 실제로 역사농단으로 이어진 것이니 부연할 것이 없다.

형편이 이러하니 재야학자들은 이를 밝히기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고 기껏 대입한다는 것이 아시아의 신(新)중국 대륙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또 하나의 한계를 돌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대륙조선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륙영토에 대입하는 것도 구체적으로 들어 가보면 이것 역시 의문투성라 할 수밖에 없다.

신중국대륙에 존재하는 유전들은 전부 1949년 이후 모택동(毛澤東1893-1976)정부가 들어선 후 채굴된 것이라는 사실에서 적어도 역사연속성과 지속성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게 하며 그와 더불어

예를 들어 대륙조선사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집약하면 고려동쪽이라 하니 현 신중국대륙 동쪽을 고집하게 되고 이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실제로 신중국대륙에서 유전 발굴 역사가 전부 1950년대 이후라는 점이다.

1950년대 말에 발견되어 1958년에 시추하기 시작한 동부3성(省)부근의 대경유전(大慶油田:5,562(年萬噸))과, 그리고 1961년에 발견된 산동승리유전(山東勝利油田:3355.19(年萬噸)), 1958년에 발견한 수증기공법의 요하유전(遼河油田:1550(年萬噸)),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석뇌유(石腦油)편에 숙주(肅州), 부주(鄜州), 연주(延州), 연장(延長)과 비교할 수 있는 감숙성 부근의 장경유전(長慶油田:2000(年萬噸))도 중공정부가 들어선 후 1950년에 발견하고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빨라야 1950년대이다.

이것이 소위 진실 펙트(fact)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 것은 고려시대와 같은 송조(宋朝)때 이미 이러한 사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고려기록에는 없는 것이 송조기록에 남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가 없다.

왜 고려사를 고려사절요만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까?

무수히많은 전장과 난리 통에 소각당해야 했다면 전장과 난리가 삼한인들에게만 존재한 것일까?

마찬가지로 많은 전쟁과 난리가 존재하였던 다른 나라 역사는 그대로 손상이 되지 않고 있는데 유독 유별나게 삼한역사기록만 화마나 전장의 피해를 입었다고 이해해야만 할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무엇인가.

고려역사를 대충 절단하고 무엇에 맞게 꾸민 것이다.

때문에 정작 고려자체 역사에 남아 있어야 할 기록들이 송나라라고 하는 송조(宋朝)역사라 하여 그곳에 심어둔 것 뿐이다.

이를 무엇으로 반박하려는가.

동시에 송조가 동아시아대륙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위 주요유전들이 오래전부터 유전 또는 유정의 흔적이나 증거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서야 이루어진 유전발견들은 지금까지 정사라고 우기고 있는 중국사와도 현재지형에 맞지 않는 아주 생뚱맞은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글쓴이가 주장하는 세계삼한역사가 바탕이 되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적 접근이다.

반면 동아시아와는 다르게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지역인 뉴 햄프셔(New Hampshire) 하노버(Hanover)에서 유대인 어머니 밑에 태어나고 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던 비셀(George Bissell:1821-1884)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최초 석유를 발견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는 이를 발견하고 곧바로 연료사용으로 발전시켰다.

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휴양(休養)차 갔다가 석유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의 인근 하천지명이 ‘기름 냇물’의 뜻을 가진 ‘오일 크리크(oil creek)’로 오래전부터 불리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는 석유가 오래전부터 존재한 것에 대한 확신과 본격적으로 이를 생산할 수 있다는 힌트를 얻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대인들의 상업성 피는 속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역사지명도 그렇지만 모든 역사의 근원은 역사지속성과 연속성은 원초적인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매우 당연한 이치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

글쓴이가 역사의 원천을 알고자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원리도 이와 같은 자연이치이다.

때문에 이러한 근거들은 석유근원지의 규명에 대단히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지명인 오일 크리크(oil creek)를 굳이 오늘날 동양역사언어로 남길 수 있엇다면 한문(漢文)으로 유천(油川)또는 화천(火川)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하였지만 우리나라의 사서에 기름내천을 의미하는 유천이란 단어자체를 애초부터 찾을 수 없었고 한반도 맞춤역사의 기록이라 할 때 실제로 그런 지명이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화천이란 지명(地名)이 남아 있는데 연풍현(延豐縣) 이화천(伊火川), 공주목(公州牧) 곡화천(曲火川), 아산현(牙山縣) 봉화천(烽火川)등 모두 충청도(忠淸道)에 있는 지명임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어조사가 붙어 이곳이 불의 천(川)을 뜻하는 이화천(伊火川), 구불구불한 내천에 불이 붙은 곡화천(曲火川), 봉화처럼 한 봉화천(烽火川)들은 모두 불이 붙어 흐르는 내천의 의미가 있다.

이 지명들은 북아메리카대륙 오일 크리크(oil creek)와 대입할 수 있다고 감히 단정한다.

기름내천, 유천(油川)은 언제나 검은 기름띠가 떠다녔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라는 설명이 존재하고 지형상황으로도 보면 당시 이 펜실바니아주(Pennsylvania)의 오일 크리크(oil creek:75.2 km)처럼 남쪽에 있는 앨러게이니 강(Allegheny River:523km)에 합류되어 다시 서남(西南)으로 흘러 거대한 오하이오 강으로 합류되면서 기름에 불이 붙어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수십키로(km)에 걸쳐 불꽃으로 덮이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니 실로 이 지명(地名)이 주는 내력은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석유의 존재가 유대인으로부터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존재성은 미미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부족했을 것이다.

때문에 석유의 중요성만큼 가치성이 떨어져 역사기록에 명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고 판단되는 것은 이때까지 석유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상황까지 가질 못했던 것은 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들이 석유를 약용으로 쓰고 있었다는 기록이 동양사와 같고 당시 구토제나 피부에 종기가 났을 때 석유를 데운 후 헝겊으로 적셔서 환부에 바르는 것으로 치료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인류가 석유를 사용한 것은 기원전 약 3200년경으로 중동지역이 메소포타니아, 페르시아 등지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나 극히 소량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수십키로(km)에 걸쳐 불꽃으로 덮이는 장관은 석유보다 소금이 더 경제성이 있었기 때문에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소금제조업자들이 염수(鹽水)를 찾다가 석유를 발견하였고 이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기름이 수면에 뜨는 원리를 이용하여 저수조(貯水槽:water storage tank)의 상부에 모아두었다가 근처의 강으로 흘려보내면서 하천에 불이 붙어 장관을 이룬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서양인들이 말하는 최초 산업용 석유발견의 역사이니 사람에게 유용하게 와 닿은 것은 실제로 그리 오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2)충청도와 북아메리카대륙 중심부 초원지역

 

앞에서 한문(漢文)으로 유천(油川)또는 화천(火川)이란 지명(地名)이 연풍현(延豐縣) 이화천(伊火川), 공주목(公州牧) 곡화천(曲火川), 아산현(牙山縣) 봉화천(烽火川)등 모두 충청도(忠淸道)에 있는 지명이라 한 사실에서도 결국 충청도는 어떤 거대한 영역에서의 중앙(中央), 중심(中心)지역임이 분명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지리지에 등장하는 화천(火川)지명들이 충청도에 고스란히 모여 있는 곳은 사실상 북아메리카대륙 중앙부이며 대초원지역으로 비록 영어지명으로 오일크리크라 하고 있지만 원천적인 것은 위 화천이라 지명과 곧바로 일치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장이 억지소리인가.

이미 본 블로그 글"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6" 의 소제'4.충청도(忠淸道)참 의미'에서 분명히 언급한 내용을 간단하게 보면 본래 충청도(忠淸道)란 명칭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에서 연유한 이름이라 하였지만 글쓴이의 해석은 충(忠)자는 파자로 심방변(忄(=心, 㣺)이라 중세기 프랑스어 "core"와 같은 마음, 심장을 나타내며 음(音)을 나타내는 中(중)은 역시 가운데를 뜻하기 때문에 이것을 합(合)하여 정확하게 가우리(Gauri, Caule)와 현대영어 축인 코레(core)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모두 가운데 축, 중심(中心)을 말하고 있다고 갈파한 사실에서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골(Gauls)과도 연유된다.

충(忠)은 곧 중국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가운데나라’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이 주장한 ‘가우리’가 바로 고려(高麗)를 뜻한다는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여기에 더 할 것은 라틴의미와 중세영어등의 의미도 같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청(淸)은 삼수변(氵(=水, 氺)의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맑다"란 뜻이 강하고 물 수를 뺀 청(青)은 생(生)과 물감을 들이는 원료 단(丹)이 합(合)하여 이루어진 단어로 "맑고 푸르다"는 의미가 강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물의 수원(水原:The Gathering of Waters)이라고 하는 지역 허드슨베이에서 오대호사이지역에서 흘러내리는 미시시피강이 되듯이 오대호의 빙하수를 가득 머금고 있는 수원(水原)으로서 맑고 푸르다는 의미가 강하며 그 수원이 스며드는 초(草), 풀과 싹이 융성한 대초원을 이루는 지대를 곧 청(淸)이니 충청은 16세기 서양인들이 태평양 거대한바다라고 착각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심으로 한 수원 지역을 통칭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본 블로그 글 “가평(嘉平)은 시카고(Chicago)이고 풍성(風城) 또는 지성(芝城)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8” 에서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 즉 풍성(風城)이라는 "Windy City"라는 별명이 있다 한 것과 같이 경기도 가평을 시카고(Chicago)라 한 적이 있으며 또한 춘전시(春田市)는 영어로 스프링필드(Springfield)라 하는데 이는 대초원의 상징적인 명칭이라 할 때 미국 일리노이주(Illinois州)의 주도가 스프링필드이며 미주리주(Missouri州)에도 있다 한 것이다.

전부 대평원지대이다.

 

    

 

                                        [Midwestern and Great Plains States]

 

 

대초원(Great Plains)은 중북부의 저평한 구조평야(構造平野:structural plain) 또는 침식평야로 중부에서 서부까지 이어지는 대초원(大草原)지대를 말함을 알 수 있는데 북아메리카대륙 중앙부 대초원지역인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 서부에 노스다코타(North Dakota),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미네소타(Minnesota), 네브라스카(Nebraska), 아이오아(Iowa), 캔사스(Kansas), 미조리(Missouri)등이 있고 동부에는 위스콘신(Wisconsin), 미시간(Michigan), 일리노이(Illinois), 인디아나(Indiana), 오하이오(Ohio)가 있다.

이곳을 충청도(忠淸道)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수천리(數千里)라는 산술적 의미

 

이제 본격적으로 중국사서가 말하고 있는 석유실체에 대해 알아보자.

서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석유가 고려(高麗)에서 났다고 하는 기록들은 중국사서(中國史書)란 점도 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동아시아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하는 충격적인 이야기이기에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한 기록들을 열거해보면 대표적으로 남송조(南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生卒年不詳)의 작몽록(昨夢錄)이 있고 명조(明朝) 남해인(南海人) 황충(黃衷:1474-1553)의 해어(海語)가 있으며, 그리고 호북 기주인(湖北蕲州人) 이시진(李時珍: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고 서두에서 이야기 했다.

아래는 청나라 진원룡(陳元龍)의 격치경원(格致鏡原) 50권[卷五十(日用器物類二)]油[附膏], 기름 고약 편에 나오는 송조(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의 작몽록(昨夢錄)을 먼저 살펴보자.

 

 

 

格致鏡原 卷五十(日用器物類二)

○油[附膏]

昨夢錄 南宋 康與之

西北邊城防城庫皆掘地作大池,縱橫丈餘以蓄猛火油,不閱月池上皆赤黃。又別為池而徙焉,不如是則火自屋柱延燒矣。猛火油者,聞出于高麗之東數千里,曰初出之時,因盛夏曰力烘,石極熱則出液,他物遇之即為火,惟真璃璃器可貯之。中山府治西有大陂池,郡人呼為海子,餘猶記郡師就之以按水戰試猛火油。池之別岸為虜人營壘,用油者以油涓滴自火焰中,過則烈焰遽發,頃刻虜營淨盡,油之餘力入水,藻荇俱盡,魚鱉遇之皆死。

서북변 방성고에 땅 전체를 가로세로 한 장(丈:3.33m)남짓 파 큰 못을 만들어 맹화유(猛火油)를 저장하였는데 한 달을 보내지 못해서 그 못의 흙이 모두 적황색(赤黃色)으로 변하였다. 다시 못 을 파서 옮겼으나 아니한 만 못하였으니 집 기둥까지 불길이 번져 타들어갔다. 맹화유는 소문에 고려 동쪽 수천리 밖에서 난다 하였는데 태양이 처음 나오는, 한창 더운 여름 태양열(太陽熱)이 내리 쬘 때 돌이 뜨겁게 달궈지면 액(液)이 나오면서 다른 물질과 닿고 불이 붙으므로 진짜 유리그릇에만 담을 수 있다.

중산부(中山府)서쪽에 거대한 연못(大陴池,大埤池,池上大埤)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해자(海子)라고 부른다. 여기서 군사(郡師)가 물을 막아 전투할 때 맹화유를 사용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못가 언덕에 포로 영루가 있었는데 사용하던 기름 방울에 불꽃이 일어 맹렬한 화염되었고 눈 깜박할 동안 병영이 깨끗이 타버렸다. 남은 불씨가 물속에 들어가 수초들이 말라버렸으며 물고기와 자라가 전부 죽어버렸다.[한부울 정리]

 

이 기록에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문장이 있다.

바로 “猛火油者,聞出于高麗之東數千里” 맹화유는 소문에 고려 동쪽 수천 리 밖에서 난다” 는 기록이다.

도대체“고려 동쪽 수 천리 밖”이라는 문장을 어떻게 풀어야만 할까?

현 한반도 지형사정으로는 도저히 이 문언을 속 시원하게 풀 수가 없다.

한편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모습과 다른 한국인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우리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아예 석유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이을 접하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며 이를 쉽사리 납득할 수가 없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위 중국사서가 말하는 고려에서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당시 고려의 동쪽 수천리란 위치는 도대체 어디가 될까?

근대산업혁명의 주요자원 역할을 한 인류의 또 하나의 자원, 철에 대해 이미 심층적으로 분석한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지하자원 개발문제에서 동아시아대륙과는 근원적으로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던 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와 함께 충청도(忠淸道)의 참 의미도 밝혔던 글"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6"에서 현대 산업발달을 이룩하게 한 주요 지하자원의 근원지가 다른 곳이 아니라 아메리카대륙이란 사실이 명명백백 밝히며 알렸던 사실이 본 블로그 글 곳곳에 존재한다.

기존 역사가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사실에서 우리가 東아시아대륙사(大陸史)를 냉정하게 보아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931년 국민당 일원인 장려화(臧勵龢)등에 의해 급조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등장이 키포인들이고 이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유럽사만들기에 혈안이 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신중국 만들기에 일환으로 전개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이것을 토대로 기존 중국사라 하여 집체하고 24사(史)가 편찬되었고 이를 마치 정사(正史)처럼 만든 것은 이런 서양세력에 의해 추진된 신중국 만들기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서 이것에 의해 현 한반도사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부연해도 부정할 수 없는 원칙과 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동양역사가 생성되어야 했던 것은 이러한 하나의 역사를 분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임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아래 이야기 하겠지만 고려연합체에서 존재하던 하나의 교회가 사분오분되는 것과 같다.

이 같은 일련의 일은 곧 유럽서양사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과 동일한 프레임 위에 놓고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중국사서가 말하는 고려 석유의 정확한 위치분석은 한반도의 지형적인 한계를 이미 벗어나 도저히 검증이 불가한 것이다.

때문에 이 한 줄의 문장“猛火油者, 聞出於高麗之東數千里”을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풀어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 대다수의 번역문을 보면 “소문에 맹화유라는 것은 고려 동쪽 수 천리 밖에서 난다”라는 해석이 대다수이었다.

그러나 글쓴이의 해석은 “맹화유라는 것은 듣기에 고려(高麗)의 동쪽 수 천리(數千里)에서 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고려 동쪽에는 넓은 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가 있는 사실이다.

물론 한반도 영토로는 대입자체가 불가하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밖”이라는 자립 명사가 한문 원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동시에 한반도란 좁은 영역에서 수 천리 밖이란 말이 온전하게 성립이 될 수 없는 이상한 표현을 바르게 고쳐 풀이 한 것이다.

결코 원문에 밖이란 단어가 삽입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거리가 아니라 범위나 폭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동쪽 수 천리범위에서 맹화유가 나고 생산되었다는 말이 됨을 알 수 있어 석유가 고려 동쪽 수천리 범위에 포진하여 곳곳에 난다는 말로 해석되어야 이 기록이 바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중국사서에 기록된 원문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밖이란 한문“外, 城外, 外地, 外邊”따위의 한자어는 눈을 까집고 봐도 찾을 수가 없는 매우 단순한 표현이다.

때문에 무작정 한반도지형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고 하여서도 안된다.

결코 웃을 수도 없지만 한반도 지형에서 기존 번역문을 대입하고 밖이란 사실을 풀어보면 한반도에 존재한 고려(高麗)라는 나라를 실제로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는 난맥상에 빠진다.

이를 수치적으로 따져 보자면 수천리라고 하는 것은 적게는 2000(里)에서 많게는 4000(里)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각각 킬로미터(km)로 환산하면 800km에서 1600km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일방적으로 적용 가능한 가로, 폭으로 따지자면 작게는 황해도 장언군 서쪽 귀퉁이에서 강원도 고성군 동쪽 해변까지의 거리가 317km 임을 알 수 있고 더 많게는 서단 신의주(新義州)에서 여러해살이풀 학명 고려조릿대(Sasa coreana Nakai)가 자생한다고 하는 신의대보호구인 함경도 화대군 목진리 운만대 해안까지의 동단 최대거리가 480km(1,222리(里))가 됨을 알 수 있어 폭이 겨우 천리를 넘고 있을 뿐이다.

천리가 아니라 수천리라 하였으니 천리를 조금 넘는 한반도의 가로 공간은 수천리라 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러한 수치 대입이 불가한 것은 한반도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는 사실임이 더 이상 변명이 필요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반도 지형 적용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서 가당찮다는 것이다.

짧게 적용하면 동쪽으로 벗어나 동해 바다 한가운데가 될 수밖에 없고 멀게 적용한다 하여도 4000리(1,600km)밖이면 동으로 열도를 넘어 서태평양 해저8,412m깊이의 일본해구(日本海溝:Japan Trench)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교는 부질없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짓이다.

어디까지나 한반도지형을 기준으로 풀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결과 앞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결국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당시 고려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분명 고려(高麗)땅에 육지 유전(油田)이나 유정(油井)이 존재했다고 중국사서에서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만 한반도 지형상황은 도무지 이를 소화시킬 수가 없음이다.

역사가 이런 지경이니 참으로 기괴함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위 원문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대로 설명하게 되면 수 천리라 함은 멀리 나아가는 거리가 아니라 고려(高麗)내의 영역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범위나 석유가 나오는 폭 또는 넓이 형태임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려 동쪽 거리가 아니라 넓이이고 범위라는 이야기다.

고려 땅 동쪽 수 천리(里)에 맹화유(猛火油)가 틀림없이 생산되었다고 한 것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인 것이 틀림없고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 기록을 대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 본 블로그 글 수많은 분석에 따른 세계삼한역사의 근원지인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석유매장지를 대입할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석유매장지 범위지도]

 

북아메리카대륙 석유매장지 범위지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석유매장지 범위 길이가 놀랍게도 수천리(數千里)임을 알 수가 있다.

고려 땅 동쪽에 수 천리를 범위로 하여 길게 가로나, 또는 세로의 넓은 지역으로 퍼져 맹화유가 곳곳에 났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석유가 한곳에만 나는 것이 아니라 수 천리를 범위로 곳곳에 맹화유가 났다고 풀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4)맹화유(猛火油)란 정체

 

특히 13세기 무렵 송조(宋朝)기록에는 이 맹화유(猛火油)가 많이 보인다.

당시 맹화유(猛火油)라는 석유는 이름처럼 사납거나 맹렬하게 타오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할 때 정유기술이 없었던 시절이니 본래 생성적으로 화력이 상당히 거셌거나 발화가 쉽게 될 수 있는 매우 깨끗한 정제된 석유를 생각할 수가 있다.

원유(原油)는 불순물도 포함하고 있으며 유전산지(油田産地)에 따라 성상(性狀)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유정(油井)에서도 유층(油層)의 깊이에 따라 성상이 변한다고 알려진다.

때문에 현재 정제시설로 정제한 것보다 자연스럽게 기화되는 성상자체가 특이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기화(氣化)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외부에서 일정량의 예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점은 태양 열기에 뜨거워진 암석 또는 바위에 자연 발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맹화유는 아마도 양질의 원유로 정제가 어느 정도 자연에서 완성된 상태에서 인간들에게 발견된 것이 아닌가 하며 이러한 원유가 곳곳에 난다고 할 때 이어지는 문장처럼 “소문에는 고려 동쪽 수 천리(東數千里)밖(x)이 아니라 동쪽 수 천리 곳곳에 난다”라고 풀어 볼 수 있으며 곳곳에서 화염이 붙어 열기를 뿜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우리가 상상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충청도에 화천(火川)지명 역시 불이 붙어 끝없이 흐르는 하천의 뜨거운 광경을 그릴 수가 있다.

 

 

 

이러한 광경들은 오늘날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 근방 무수히 많은 유정(油井:oil well)과 펜실베이니아주의 타이타스빌 근처에 있는 오일크리크(Oil Creek)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글쓴이는 그곳들은 본 블로그에서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나라 발해(渤海:698-926)가 존재한 땅이라고 갈파했다.

본 블로그 글 "붕어(鯽魚:carassin, carrushens)와 발해(渤海)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4"에서 염주(鹽州)는 디트로이트의 도시 소금광산이라 했고 또한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발해국(渤海國)영역 내에 존재한 미타호(湄沱湖)가 한 카호(興凱湖:Khanka Lake)라 하였고 한카오는 동북연해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 생산 비율이 미국전체에서 약 70~80%를 차지하고 있는 슈피리어호(Lake Superior)나 호수형태가 월금(月琴)같다하여 금(金)나라때는 북금해(北琴海)라 칭했다는 모양과 비슷한 미시간 호(Lake Michigan)를 대입한 것에서 발해가 그곳에 존재했었다면 고려가 그곳에 못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발해 때 염주라고도 판단할 수 있는 미시간 주(Michigan)의 디트로이트(Detroit)는 조선행정구도의 충청도 북부인 셈이다.

전자에서 이야기 했지만 충청도는 대륙의 중심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약 송조기록에 고려 동쪽이라 한곳을 따져보면 고려의 수도 개성(開城)이 캔사스시티(Kansas city)라 할 때 그곳에 중국정부가 있었다고 보면 송조라 할 수 있어 펜실베이니아주 석유분포지는 고려 동쪽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위 지도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일 크리크 지역에서 펜실베이니아까지 석유생산지(Petroleum fields)범위가 약 800km(2,037里)를 이것을 수천리(數千里)라고 한들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서두에서 맹화유는 휘발성과 가연성이 높은 나프타(naphtha)라 하였던 것처럼 실제로 오일크리크(oil creek:75.2 km)는 남쪽에 있는 앨러게이니 강(Allegheny River:523km)으로 들어가면서 기름에 불이 붙어 수십키로(km)에 걸쳐 불꽃으로 덮이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고 있지 않는가.

물에서도 잘 꺼지지 않는 성분의 결과이다.

전자에 게시한 청나라 진원룡(陳元龍)의 격치경원(格致鏡原)에 기록된 송조(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의 작몽록(昨夢錄)에 적시된 내용을 보면 처음 솟아나는 맹화유를 저장하기 위해 못을 파고 그 속에 저장하였으나 얼마지 않아 흙이 적황색으로 변했다는 것은 맹화유가 자연스럽게 침전이 되었다는 사실이며 다시 옮겼을 때는 어느 정도 정체된 상태로 어떤 물질만 결합되어도 쉽게 불꽃이 일어 거세게 타올랐다는 사실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이어지는 내용도 보면 역법(曆法)에서 정오(正午)를 일초(日初)라 하였으니 “정오 태양이 뜰 때 또는 한 여름처럼 태양이 강열하게 내리 쬘 때 돌에 매우 심한 열이 가해지며 액체가 흘러나면서 다른 물질과 결합하고 동시에 불꽃이 되는데 오직 진짜 유리그릇에만 담을 수 있다”한 것은 맹화유의 휘발성을 적절히 표현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COil Lamp Receptacle, Lamp, Hurricane Glass, Glass Globe, ca. 1880. Porcelain; glass, Oil lamp and receptacle]

 

실제로 물에서도 잘 꺼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강렬한 상태의 휘발유가 아니었는가 한다.

석유(石油)를 고려에서 맹화유(猛火油)라 한 것은 의미로 보아도 매우 활성화된 기름이다.

이 밖에 석유를 강목[綱目]에서 석유(石油), 웅황유(雄黃油), 류황유(硫黃油)라 하였고 십유[拾遺]에서는 석칠(石漆)이라 하였음을 알 수가 있으나 석칠(石漆)은 아스팔트라고 하는 역청(瀝靑:bitumen, asphalt)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맹화유는 가장 질 좋은 원유(原油)이었을 것이며 현대 산업발달에 한 몫을 차지했던 것이 틀림없다.

양질의 원유가 나온 곳이 바로 고려(高麗)땅이었다.

本草綱目

石腦油 [编辑](宋《嘉 》)

【校正】並入《拾遺》石漆。

【釋名】石油(《綱目》)、石漆(《拾遺》)、猛火油、雄黃油、硫黃油(《綱目》)。

時珍曰︰石油所出不一,出陝之肅州、鄜州、延州、延長,廣之南雄,以及緬甸者,自石岩流出,與泉水相雜,汪汪而出,肥如肉汁。土人以草挹入缶中,黑色頗似淳漆,作雄硫氣。土人多以燃燈甚明,得水愈熾,不可入食。其煙甚濃,沈存中宦西時,掃其煤作墨,光黑如漆,勝於松煙。張華《博物志》載︰延壽縣南山石泉注為溝,其水有脂,挹取著器中,始黃後黑如凝膏,燃之極明,謂之石漆。段成式《酉陽雜俎》載︰高奴縣有石脂水,膩浮水上如漆,采以膏車及燃燈。康譽之《昨夢錄》載︰猛火油出高麗東,日烘石熱所出液也,惟真琉璃器可貯之。入水涓滴,烈焰遽發;餘力入水,魚鱉皆死。邊人用以御敵。此數說,皆石腦油也。國朝正德末年,嘉州開鹽井,偶得油水,可以照夜,其光加倍。沃之以水則焰彌甚,撲之以灰則滅。作雄硫氣,土人呼為雄黃油,亦曰硫黃油。近複開出數井,官司主之。此亦石油,但出於井爾。蓋皆地產雄、硫、石脂諸石,源脈相通,故有此物。王冰謂龍火得濕而焰,遇水而燔,光焰詣天,物窮方止,正是此類,皆陰火也。

[번역]이시진은 석유 생산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곳으로 섬서성의 숙주, 부주, 연주, 연장, 광동성의 남웅, 그 외 면전(緬甸)에서 난다. 석암(石巖)으로부터 흘러나오는데, 샘물과 서로 뒤섞여 솟아나오며, 미끄럽기가 고기 기름과 같다. 그 지방 사람들(土人)이 풀에 적셔서 배가 불룩하고 목 좁은 아가리가 있는 질그릇 속에 보관한다. 색이 검어서 자못 옻칠(漆)과 같으며 석유(石油:雄黃油)를 만든다. 그곳 사람들(土人)이 대부분 이것으로 등불을 밝히는데, 아주 밝다. 물과 만나면 더욱 맹렬하게 타며, 먹을 수가 없다. 그 연기가 아주 짙어서 심존중(沈存中)이 환서(宦西)때 그을음을 긁어모아 먹(墨)을 만드는데, 광택이 나면서도 옻처럼 검어 송연묵(松烟墨)보다 낫다 하였다.

3세기 진(晉)나라 사람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에 '연수현 남산의 샘물이 흐르는 도랑 물위에 기름이 뜨고 그것을 퍼내어 그릇에 담으면 처음엔 누렇다가 나중에 검게 되면서 고약처럼 굳어진다. 불을 붙이면 매우 밝아 이것을 석칠(石漆)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조(唐朝) 제주(齊州) 임치(臨淄)사람 단성식(段成式:803-863)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고노현(高奴縣)에 석지수(石脂水)가 있는데 물위에 기름이 뜨는 것이 칠(漆)같아 이것을 채취하여 수레에 바르고 연등을 켠다.”라 하였다.

강여지(康與之)의 작몽록(昨夢錄)에 "맹화유(猛火油)는 고려의 동쪽 수천 리 밖에서 나는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이다. 이것은 오직 진짜 유리로 만든 그릇으로만 저장할 수가 있다. 물에 들어가면 물방울이 일어나면서 세차게 불꽃이 일어 발화하며 타고 남은 불꽃이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가 모두 죽는다. 변방 사람들이 적을 막는데도 쓰는 등 이와같은 다수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석뇌유(石腦油)"라 하였다.

우리 조(명나라) 정덕(正德) 말년에 가주에서 바닷가 웅덩이를 파다가 우연히 이 기름물을 발견하였다. 밤에 밝혀보니 그 빛이 보통의 등보다 배는 밝았다. 거기에 물을 끼얹으면 화염은 더욱 심해지지만 재를 뿌리면 끌 수 있다.

웅류기를 띄므로 원민들은 그것을 '웅황유' 또는 '유황유' 라고 부른다.

근래에 또 몇 군데의 웅덩이를 파고 있는데 관에서 이를 주관하고 있다. 이것도 석유지만 우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땅 속에서 생성된 웅황, 유황, 석지 등 각종 암석들의 원맥이 상통하여 이 물질이 만들어진 것이다.

왕빙(당나라 때 <황제내경>을 주석한 인물)이 '용화(龍火)는 습해지면 불붙기 시작하고 물을 만나면 불타서 광염이 하늘에 치솟고 그 물질이 다해야 비로소 멎는다'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류다. 모두 음화(陰火)에 속한다.

황충(黃衷)의 해어(海語)

猛火

油猛火油樹津也一名泥油出佛打泥國大類樟腦苐能腐人肌肉燃置水中光燄愈熾蠻夷以制火器其烽甚烈帆檣樓櫓連延不止雖魚鼈遇者無不燋爍也一云出髙麗之東盛夏日初出時烘日極熱則液出他物遇之即為火此未必然恐出樹津者是也

황충(黃衷)의 해어(海語)에도 맹화유(猛火油)고려의 동쪽 수천 리 밖에서 나는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라 하였다.

 

5)맹화유와 그리스의 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석유역사를 가늠할 때 19세기 중엽 이전만 하더라도 석유가 그다지 알려지거나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필요성에 의한 경제성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기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역사 기원성에 가치가 있다하겠지만 오히려 역사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던 것은 석유보단 소금이었고 무엇보다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요소적 물품으로 취급되어 확보쟁탈전은 인류기원부터 수많은 전쟁을 유발시켰으며 근세기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면에서도 필요성에 의한 가치를 말한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소금은 육류나 기타 식료품의 저장 수단으로 사용되고 또는 가죽의 보존이나 부드럽게 만드는데 필수불가결한 물품이었기 때문에 수천 년 전 고대 중국에서부터 지속되면서 끊임없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1"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금이 인간이나 동물에게 필수적인 식품임을 알려주는 기록들은 널려 있을 정도로 많이 발견된다.

옛사람들에게 소금의 가치는 거의 신(神)적인 존재와 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종교적으로도 위치가 확실하게 정착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가 있다.

불교는 물론이고 위키 자료를 보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서약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안식일 빵에 소금을 더한다고 하였으며 카톨릭(Catholic)에서는 성수 축복에서 소금을 넣는 관습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고 부활성야라고도 하는 파스카 성야(Easter Vigil)의 성수 축복에도 소금을 넣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석유는 그렇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필요하게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볼 때 석유의 역사 가치는 근세기 이전 상황에서 논하기가 쉽지 않다.

비로소 경제성의 가치를 확인한 것은 공교롭게도 유대인 상업가들에 의해 밝혀지고 시작된 것으로서 1859년 처음으로 그들의 의해 유전이 발견되었고 산업화한 것으로 북아메리카대륙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는 바로 근세기 석유탄생의 상징적인 의미로 남게 된 것이다.

이곳은 바로 고려의 동쪽영역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중국이라고 하는 송조(宋朝)가 존재한 곳이 추측컨데 캔자스시티(Kansas City)일 가능성이 높다고 앞에서 말했다.

왜냐하면 중국이라는 의미가 현재 상태에 이른 것은 적어도 1930년 이후라고 보기 때문이며 중국이란 실체를 시경(詩經) 대아(大雅) 민영(民勞)편 모전(毛詩故訓傳)를 인용하면 경사(京師)라고 하였으니 천자가 거주하던 중앙 정부가 있던 도시정도로 정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블로그 글 "멜론(甜瓜:melon)은 조선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최상품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6"에서 세이트 루이스(St. Louis)에서 약 400km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캔자스시티(Kansas city)가 있는데 이곳을 개성(開城)이라 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개경에 송조 천제가 거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곳 동쪽에 펜실베이니아가 위치한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야기는 신중국(新中國)이 차지하고 있는 현 동아시아대륙에서 대규모 유전개발이 된 시기가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전 개발된 1859년보다 한참 늦은 1950년대 이후라는 사실은 산술적인 의미를 떠나 근원과 시발이라는 역사성이 동아시아대륙이 한참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모순정도를 유럽사만큼이나 가지고 있는 동양사를 생각 할 때 글쓴이가 도저히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석유역사에서 중국자료에서 분명 언급한 사실들은 세계에서 가장 최초의 유정(油井:Oil well)을 발견되었다 하였고 구체적으로 347년에 약 240m의 깊이에서 대나무에 날을 달아 굴착했으며 그 과정에서 생산된 석유(石油)는 오히려 소금(鹽:salt)생산을 위한 소금물을 끓이는 에너지에 사용했다고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현 신중국(新中國)대륙에서의 발견된 유전상황과는 시기적인 문제에서 너무나도 동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지금까지 생물 근원지를 밝힘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역사의 근원에 의한 연결성과 지속성을 바탕으로 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세계사를 돌아볼 때 과연 중국(中國)이 동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했다면 유전발견이나 근대산업의 활성화가 북아메리카대륙보다 빨라야 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며 이러한 대입은 뿌리가 없는 모래성과 같은 것을 강압적으로 믿으라 하는 것과 진배없다고 보기 때문에 원천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더하여 현실적으로도 북아메리카대륙보다 현저히 경제적으로 낙후된 것이 사실이었고 19세기부터 동아시아대륙은 미개발지역으로 알려져 서양세력들에게 먹이 감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것을 현 북아메리카대륙의 경제력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문화적으로 앞선 고려나 송조(宋朝)가 동아시아대륙에 존재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송조(宋朝)의 무기로 알려진 맹화유(猛火油)를 담은 맹화유궤(猛火油櫃)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만 할까?

정말로 신중국 땅이 되어버린 동아시아(東亞細亞大陸)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더불어 고려에서 났다고 하는 맹화유(猛火油)와 송조의 맹화유궤(猛火油櫃)는 어떤 관계설정이 가능할까?

아니면 글쓴이가 예측하는 것처럼 송나라의 맹화유궤(猛火油櫃)란 무기는 송조(宋朝)가 만든 것이지 송(宋)나라가 아니라 주체는 고려(高麗)인 것은 아닐까?

이른바 송 고려(宋高麗)가 바로 그것이다.

고려 목종(穆宗)때 설치된 군기감(軍器監)은 고려시대 때 병기(兵器), 기치(旗幟), 융장(戎仗) 등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청이라고 분명하게 백과사전에 나온다.

군기감(軍器監)은 고려 목종때 처음 설치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민부(民部)에 병합되었다고 하며 반면 송나라 때 병기를 제조하는 군기감(軍器監)이 존재한 사실과 그 조직산하에서 마침내 고려에서 생산되는 맹화유를 이용하여 맹화유작(猛火油作)기관을 설치하고 무기로 제조한 것이 바로 맹화유궤(猛火油櫃)이라는 사실이다.

맹화유를 이용한 무기를 만든 기관을 별도로 명화유작이라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 맹화유궤가 만들어진 시기를 송나라가 태생한 960년이후라고 하여 그리스 불(Greek fire)이 사용된 시점(AD673, 674)과 괴리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글쓴이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고려와 송조가 똑같이 군기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분명 맹화유는 고려 땅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료로 특수한 발화물질을 생산하였고 이것이 나프타형태의 강력한 화염방사기(火焰放射器:flame thrower)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무기는 중앙정부에서 관리하고 철저하게 보안으로 비밀화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결론은 비잔티움제국의 그리스 불(Greek fire)은 곧 고려 화염방사기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프타(naphtha)라고 알려진 맹화유(猛火油)가 고려(高麗)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함대가 아랍 함대를 공격할 때 사용한 '그리스의 불'은 그리스의 통일이 아니라 신라를 제어하고 비로소 통일고려를 잉태케 한 강력한 무기로 존재한 것이 틀림없다.

고려의 중앙정부인 송조(宋朝)의 지시로 강력한 무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은 바로 고려(高麗)동쪽에서 생산된 맹화유(猛火油)를 원료로 무기 제작한 것임을 최종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북송(北宋:960-1127)시기에 맹화유작(猛火油作)이라는 기관을 설치해서 석유를 정제하여 사용했고 군사용으로도 응용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나 고려에서도 병기를 제조하는 정부기관인 군기감(軍器監)에 맹화유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맹화유작이라는 기관을 두었다고 알려지는 것은 위 언급한 사실들과 합치되는 이야기다.

맹화유(猛火油)를 사용한 화염방사기 같은 무기를 ‘맹화유를 담는 궤짝’이라고 알려지지만 성벽에 달라붙어 기어오르는 병을 물리칠 때나 수상전에서 적의 배를 불사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실감이 나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것에 의해 고려가 강력한 무기국으로 천하의 연합체제가 가능하에 하였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

만약 고려 이전 신라(新羅:BC57-AD935)가 “그리스 불”을 개발하고 고려가 이를 취했다면 인용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동로마(東羅馬)라고 하는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 Byzantine Empire)의 필살기로 알려지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υγρόν πυρ)을 동양사 한문으로는 이를 희랍화(希腊火), 라마화(羅馬火), 해양지화(海洋之火), 류동지화(流動之火), 액체화염(液體火焰), 인조지화(人造之火), 방비지화(防備之火)등으로 불리지만 핵심은 맹화유와 같은 휘발성과 가연성을 가지 액체 탄화수소 혼합물로 만들어진 원료가 주도한 것이 사실이다.

이 화기를 만드는 비법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일급비밀로 간주되어 워낙에 비밀이 철통같이 잘 유지되었던 탓에 현재까지도 그 정확한 성분을 알지 못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덧붙이고 있는 것은 동서양 구분을 하기 위한 과도한 조치가 아닌가 하며 비슷한 무기를 중국이라고 하는 송나라에서 맹화유궤(猛火油櫃)를 만들었다고 하면서도 제작자나 이력 등이 구체적이 않고 맹화유작이란 기관만을 내세웠지만 반면 비잔티움제국의 “그리스 불”은 유대지방(Syria)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출신, 시리아 망명자이며 건축가이자 화학기술자인 칼리키누스(Kallinikos)라고 했다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언듯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는데 당시 신라(新羅)사람들의 한문식(漢文式)이름을 라틴어로 풀어보면 어떨까?

아마 흥미가 있을 것이다.

비잔티움제국이 신라라는 사실은 이미 본 블로그에서 많은 글을 남렸지만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본 블로그 글 "밀라노(Milano, Milan)는 신라(新羅)의 성시(聖市)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67"에서 신라 서란전(瑞蘭殿)을 당시 밀라노의 상징적인 건물 밀라노대성당(Milan Cathedral)이나 바실리카(Basilica)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 적이 있다.

그와 함께 바로 신라와 비잔티움의 지배자들에 대한 일체성을 말한 적도 있다.

신라 소성왕의 어머니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가 이레네 아테네이아라고 판단하였던 것인데 이레네 황후는 비잔티움제국 이레네 아테네이아(797-802)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771-797,재위:780-797)섭정을 하였으며 그 후 이레네는 결국 아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붙잡아 오는데 성공하고 8월 15일 오후 3시 황궁에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의 두 눈알을 뽑아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공교롭게도 신라 소성왕(昭聖王:798-800)의 어머니 성목태후(聖穆太后)도 799년 8월에 태후로 추봉되었으며 아들 소성왕이 즉위 2년만인 800년에 죽는다.

신라는 그해 상스럽지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는 것인데 4월에 하리케인 폭풍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려 보냈으며, 서란전(瑞蘭殿)에 쳤던 발(簾)이 날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였으며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 하였다.

요사이 현대정치사도 그렇지만 역사 기록자인 사서들이 권력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사건 그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 자연재해를 인용한 경우라면 비잔티움제국 이레네 황후처럼 극악한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것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6)신라는 비잔티움이다.

 

전자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약간의 시차가 있다하겠지만 권력에 눈이 먼 극성스러운 모후의 극악한 정치참여는 자식을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동로마(東羅馬)의 콘스탄티누스6세(Constantine VI:771-797,재위:780-797)와 신라의 소성왕(昭聖王:798-800)이 모후에 의해 살해당하는 결과를 기록에서 똑같이 볼 수가 있다.

물론 소성왕의 몰(歿)시기가 동일한 상황을 추측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양 별도의 역사기록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일한 사건에 의한 동일한 인물임을 부정하기가 힘든 그야말로 삼한역사가 유럽사로 그대로 옮겨간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로마(東羅馬)와 신라(新羅)는 같은 하나의 역사주체라 하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이후 신라가 고려에 통합되고 난 후 동로마(東羅馬)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高麗)와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본 블로그 글 "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494"이란 글에서 밝혔듯이 글쓴이는 동경의 반란(高麗東京叛亂) 또는 경주민란은 고려19대 명종(明宗,1131-1202,재위:1170-1197)시기 때인 1190년부터 약15년에 걸쳐 1205년까지 이어졌고 경상도 지방에서 발생한 이 민란(民亂)중심지가 고려의 동경(東京), 곧 경주(慶州)였다는 사실에서 바로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이었다는 사실과 반란의 민중들이 부르짖었던 기치가 신라 재흥(再興)이었으므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고려가 장악한 시대였으므로 신라(新羅)를 복고(復古)시키고자 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신라라는 의미를 우리가 명확하게 풀이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바로 새로운 태양신(新羅)이다.

새로운 태양신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당시 고려는 연합체제의 형태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글 "엉겅퀴(Cirsium:薊)와 스코틀랜드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6"에서 밝혀듯이 엉겅퀴의 대부분이 북아메리카대륙을 근원지로 하였다는 사실과 결국 스코틀랜드와 연결되며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에서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Saint Andrew's Cross)문양은 공통적으로 스코틀랜드의 함선에 게양한 해군 깃발로 사용한 사실과 러시아의 로마노프왕가의 문양과 같다고 한 주장에서 러시아의 역사 기원인 키예프루시(Kievan Rus:882–1283)가 또한 연결되어야 하며 고려 태동과 맞물려 있는 시기 968년부터 키예프루시와 비잔티움제국 즉 동로마가 충돌하면서 동로마의 영토가 크게 넓혀졌다는 사실과 함께 보면 동(東)으로는 아르메니아, 서(西)로는 남부 이탈리아,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지역을 병합했으며, 소아시아 남부 안티오케이아(Antiovceia)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키는 등 거대한 연합국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당시 고려가 연합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아랍지역에서 술탄국(sultanate)인 룸 셀주크(Sultanate of Rûm:1077–1307)가 고려와 또한 연결된다고 본 블로그에서 말한 적이 있다.

당시로 보았을 때 고려는 어마어마한 제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래 고려는 코라이 등의 연합형태의 국가 이름이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상황을 유심히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고려 연합체제에서 주 종교를 보면 키예프 루시의 영향을 받은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Eastern Orthodox Church)가 존재하였고 때문에 1054년 하나의 교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중심으로 한 네 개의 교회 연합과 로마교회가 분리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교회에서 다양한 종교를 허용한 것이다.

이 하나의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원시불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윤회사상을 가진 조로아스터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동경민란과 연결하여 유럽역사를 보면 이 민란의 축을 고려민란이 발생한 시기와 거의 동일한 1202년부터 시작하여 1204년까지 발생한 제4차 십자군(十字軍)으로 규정하였고 마찬가지로 복고운동의 결산인 “라틴제국”을 세운다는 기록으로 십자군에 의한 기독교를 발판으로 하는 유럽역사생성을 정확하게 합리화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결국 종교관을 바탕으로 삼한역사로 풀어보면 원수정(元首政:Principatus)이 지배한 서로마(BC27-476)역시 신라(新羅)라는 이야기로 이해되어야 하며 ‘라틴제국’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고려(高麗)와 신라(新羅)가 적대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신라의 문화를 고스란히 침해하지 않은채 고려(高麗)는 하나의 교회로 통합하는 종교를 중시했던 것이 아닌가도 여겨지는 것이다.

고려연합체제에서 신라인들은 구(舊)종교, 즉 원시불교라고 할 수 있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복고 움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고려연합체제는 서로마와 다른 체제에 동로마(東羅馬)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체제가 다른 국가로 변모한 것은 키예프 루시와 충돌 때부터임을 알 수가 있고 키예프 루시는 러시아의 로마노프왕가(House of Romanov:1613-1917)의 근원이며 아라사(愕羅斯)로 대타타르(大韃靼:Great Tartary)로 연결되지만 그 이전 북부지방에서 남하한 켈트(Celts)족의 스코틀랜드역사와도 병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서로마(西羅馬)는 새로운 태양의 신을 말하는 신라(新羅)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태양신을 숭상하는 신라(神羅)이거나 또는 구 백제(百濟)세력이거나 비기독교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마치 이런 세력들로부터 십자군이 생성된 것처럼 말하지만 역사연속성으로 볼 때 십자군은 유럽사와 기독교역사로 의도적으로 변형시켜 나타난 서양인의 역사, 즉 유럽역사의 줄기라고 여겨지는 한계가 없지 않다.

현재 기독 카톨릭(로마 카톨릭)은 여러 가지 음모설이 존재하지만 기존 역사사실과 다른 무엇인가 서양역사에 옮겨져 진위가 상실되면서 역사 끼워 넣기가 가능하게 한 것으로서 깊이 들어가 보면 오리엔트문화의 어떤 결정적인 역사사실을 은폐하거나 삭제하여 본질을 전혀 알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의구심은 글쓴이만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에서 한 주장한 사실과 일맥하는 것으로써 예수회의 유럽사 만들기 일환에 의한 중대한 핵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카톨릭의 예수회가 고려연합체제로 비친 비잔티움제국 시기때 하나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었던 종교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회가 생성될 때인 1540년에 스페인 신도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1491-1556)가 주동이 되었고 또한 에스파냐 신도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1506-1552)가 보조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한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그것이라고 하는데 하필 십자군 구성원인 프랑크족이라는 사실이 저변에 깔여 있다.

또한 당시 비잔티움제국(Byzantine Empire:330-1453)이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정교(Greek Orthodox Church)와 로마카톨릭이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리스정교가 지향하던 삼위일체교리와 주일성수교리와는 다르게 성모신앙과 성상(聖象)을 받드는 사실에서 같은 기본적으로 기독교란 범주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교리자체가 상당한 서로 벗어나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또한 예수회를 건립한 주요 신도 두 사람의 국적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스페인과 에스파냐가 동일한 국가나 혹은 조직이 아닐 것이란 판단에서 또 다른 역사배경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인데 실제로 스페인과 에스파냐는 별개의 국가나 조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를 통해 밝혔던 바가 있다.

이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출신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을 스페인인이라고 하고 카스티야 연합왕국(Corona de Castilla)출신인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1475-1519)를 에스파냐인이라고 하는 사실과도 같다.

이들은 백제출신이라고 추측한다.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며 오늘날 스페인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에서 밝힌 것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패퇴시키고 난 후 신라에서 일부잔존세력들에게 거주지를 확보해주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십자군이 부르짖던 라틴제국이라 함은 본래 BC1000년경에 남하하여 이탈리아반도에 침입한 인도유럽어족 중의 이탈리아인 일파인 라틴인을 구성원으로 하는 것으로서 로마(Rome)동남방에 위치한 알바롱가(Alba Longa)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행정적 언어로 라티움어(Latium)를 사용하던 세력을 말하고 당시 십자군으로 구성된 프랑크인과 서부 에우로파(Europa)는 비잔티움이라고 하는 동로마에서 로마니아제국(Imperium Romaniae:1204-1261)을 건립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통일신라 후 대연합국인 고려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십자군에 편성된 주 세력인 프랑크족(Franks)은 5세기때부터 고대로마가 지배한 땅을 차지하였고 오늘날 프랑스의 모태로 발전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상하게도 본 블로그 전반적인 글에서 남부 월국(月國)과 상관하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17세기 때인 숙종(肅宗,1661-1720재위:1674-1720)이후부터 조선 왕족(朝鮮王族)과 정확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도 본 블로그 글"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등 3편의 루이시리즈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오늘날 유럽연합이라고 하는 에우로파(Europa)는 그리스신화에서 페니키아(Phoenicia)왕녀를 제우스가 겁탈하려고 하자 피해 소로 변해서 도망간 곳이 지중해를 건넜다고 하고 지금의 시리아(Syria)연안의 고대 국가로 설명되는데 삼한역사의 백제를 연상케 한다.

포르투갈은 1415년 지브롤터해협(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아프리카 북부극단 세우타(Ceuta)를 정복하였고 아프리카대륙서부에서는 15세기~16세기에 걸쳐 포르투갈 사람들의 본격적인 탐험지역으로 알려졌다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도 했다.

이러한 동서역사의 판도 판단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신라부흥이라고 하였지만 구 신라세력들은 백제를 흡수한 형태이기 때문에 백제세력들도 함께 했을 것이란 가정 또한 생긴다.

이것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포르투갈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누어지는 지형적인 방향위치에서 보자면 오늘날 그리스 영토가 과연 비잔티움이라고 하는 동로마(東羅馬)제국이 존재한 것이 사실일까?

지형적으로 맞지 않는 형태이다.

그리고 서양문화의 보루가 될 수 없는 위치임에도 근동이라 하여 오리엔탈문화의 중심적 지역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서양사의 부끄러운 민낯이 고스란히 들어나는 역사라 할 수밖에 없다.

근세기에 서양인들의 히스테리적 열등사고는 바로 오리엔탈문화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19세기부터 생성된 서양인들에 의해 마구잡이식으로 오리엔탈 문화가 거침없이 파괴되었고 서양우월역사 유럽사로 무작위로 편입되면서 세계사를 근원적으로 변형을 초래했던 것이 사실이다.

동로마는 오리엔탈문화의 결정판이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문화가 판을 친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려에서 생산된 맹화유기록과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7)마무리

 

 

수많은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하지만 석유로 보는 세계삼한역사관점의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줄일 수밖에 없다.

과거 삼한역사의 시발이라 할 수 있는 고구려때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384-392)이 실행한 수용 종교는 조로아스터교(拜火教:Zoroastrianism)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는 마니교(摩尼教;Manichaeism)이며 백제의 네스토리우스교(景敎:Nestorian)를 수용했다고 본 블로그에서 밝혔다.

네스토리우스교(景敎:Nestorian)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결합된 2개의 인격이라고 주장했고 '동방의 교회' 또는 '페르시아 교회'가 대표적인 네스토리우스 교파라고 백과사전에 정리되어 있다.

이것들은 하나의 교회라는 범주내에 존재했을 종교분리의 결과이다.

인류가 복잡하지 않는 세상을 갈구했을때는 하나의 체제, 하나의 교회는 당연한 이야기다.

오늘날 수많은 국가가 분리되고 인종과 문화가 분열되면서 종교역시 분열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문화적 바탕은 바로 오리엔탈 문화가 되어야 맞다.

코라이(korai)는 그리스(Greece)에서 수많은 지명이름으로 남아 있다.

코라이는 연합형태의 이름이다.

즉 오늘날 COREA 란 명칭도 근원적으로 보자면 연합, 연방체제의 국가명이다.

이것을 유럽인들은 가로채고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왜"새로운 로마(Nova Roma)라 하여 한자어로 신라마(新羅馬)로 번역될 수밖에 없었을까.

새로운 태양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왜 로마(Rome:羅馬)라 했을까?

자료를 보면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

전부 성경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 이외 별 다른 것이 없다.

예수교의 세력(strength, vigor)을 나타내고 거대하다(colossale)란 뜻도 있다.

차라리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배회하다, 방랑하다란 뜻인 롬(Roam)이나 룸(Rûm)은 아랍어로 로마를 뜻하는 것을 볼 때 로마는 아랍의 문화성격이 짙다.

또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키예프루시같은 전통 슬라브족(Slaves)들은 "짜리그라드(Tsargrad)" 즉 "황제의 도시(皇帝之城)"라 하였고 바이킹(维京人)은 노르웨이고어(Miklagarð)로 "위대한 성(偉大之城)"이라 하였으며 그 외 도시들의 여왕(Queen of Cities), 거대한 도시(the Great City)등으로 불리었다.

대연합국의 도시로서 상징을 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이를 우리는 동경이나 경주로 볼 수 있다.

아랍 투르크인들이 붙였다고 하는 이스탄불(Istanbul:伊斯坦堡)은 상징적인 의미보다 "저 도시, 도시에서, 도시로"등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일단 주인이 아니다.

또 한 가지는 호천(胡天)이라 단어가 있다.

호는 신라와 고려가 연결되는 단어이다.

호는 삼한과 관계되는 단어이다.

전자에서 언급한 고려연합체제에서 하나의 교회라 했던 것은 원시불교일 가능성을 말했다.

바로 이 호천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광명(光明)의 신(神)이라 한 것이다.

미국 상징이 된 자본주의조직체 알루미나티라고 하는 광조파나 광명회(光照派,光明會:Illuminati)를 생각하게 하는데 유럽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나타나는 깨우침,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바로 그것이다.

광명의 신으로는 켈트 신화에 나타나는 싸움의 명수 루 라바다(Lugh Lámhfhada)가 있으며 그리스신화의 아폴론(Apollon)이 있고 이를 바로 태양신(太陽神)이라 하였다.

고려때 역사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불전(佛典)에 근거하는 제석신(帝釋神)이라 하여 환인(桓因)이 있으며 힌두교의 수리야(Surya)와 아디트야(Āditya)가 존재하고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태양신 샤마쉬(Shamash)가 있으며 수메르 신화의 태양신 우투(Utu)가 있다.

그리고 이집트 신화에 나타나는 태양신이 바로 라(羅:Ra, Rah, Ré)가 중심에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서양종교의 모태라고 알려지고 마즈다교(Mazdaism) 혹은 배화교(拜火敎)라 하며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시대적 범위가 넓어 모든 종교의 기원이라 알려지고 특히 이 종교는 동방이라고 하는 지금의 중동 박트리아 지방에서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의해 세워진 종교라고 설명된다.

물론 오늘날 중동개념과 근동개념은 상당히 변질된 것이라고 볼 때 우리는 지형적 위치문제에서 이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종교를 인도이란어파에 속한 아베스타어(Avestan)로는 ‘자라투스트라’라 하고 독일어로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라 하며 독일철학자 니체(F. W. Nietzsche:1844-1900)의 고전 철학소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에서 풍자적으로 도덕이 오류라고 인식하면서 ‘신(神)은 죽었다’고 탄식한 최초의 인간이름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로아스터교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종교역사에서 근원적인 깊이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니체는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가 말하는 윤회전생(輪廻轉生) 즉 영겁회귀(永效廻歸)로 순환되는 삶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고, 그 순환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나찌(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1933-1945)의 심볼과 불교의 만(卍), 십자(十)모양의 문양 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조로아스터교의 4대 원소(elements)인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근거한 것이며 호(胡)의 입구(口) 위에 십자(十)도 완성의 근원을 일깨우는 것과 원리와 같은 이론으로서 곧 인간 육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때 인류가 갈망하고 갈구한 근원적인 것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고로 호천(胡天)은 삼한역사종교의 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하나의 교회로 고려연합체제에서 존재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서재영 불광연구원은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같은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관점으로 자연을 바라봤다라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조로아스터교를 시발로 하는 불교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와 다를 가능성이 없는 것인가.

하나의 종교를 서양기운이 있다 하여 동양종교로 맞추려 애써 감추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 호천은 모든 종교의 뿌리인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고려에서 생산되었다고 하는 맹화유의 실제 근원지는 어딜까를 밝히는 일이다.

위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석뇌유(石腦油)편 번역에서 당조(唐朝) 제주(齊州) 임치(臨淄)사람 단성식(段成式:803-863)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고노현(高奴縣)에 석지수(石脂水)가 있는데 물위에 기름이 뜨는 것이 칠(漆)같아 이것을 채취하여 수레에 바르고 연등을 켠다.”는 기록에서 고노현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역사명은 글쓴이가 세계삼한역사관을 통해 바로 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 골(Gaul)은 바로 고구려 고로(高盧)와도 연결된다고 하면서 이 갈리아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이란 사실을 본 블로그 글 "세계삼한역사연구의 가시적인 효과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5"에서 최종정리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장수 아틸라가 유럽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고 로마까지 쇠퇴하게 만들었던 훈족과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켈트족은 게르만에 쫓겨 이동한 유민으로 볼 수 있고 이 골은 고로(高盧)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이 고로(高盧)가 석유생산지로 알려진 고노(高奴)와 같다.

북아메리마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프랑스인들이 세웠다고 하는 도시 골은 강유역 멀지 않는 곳에 지금도 존재한다.

본 블로그 2011년에 올린 글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
http://blog.daum.net/han0114/17050378"에서 골의 위치를 신중국 역사를 인용하면서 현 유럽대륙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동아시아대륙사에 의한 것이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고구려(高句麗)시기 때 북프랑스지방에 고로(高盧)가 태동했다는 사실은 곧 골(Gaul, Gol)을 말하는 것이라 우리는 접근을 해야만 한다.

그곳은 프랑스인 시에르 드 라살(René-Robert Cavelier, Sieur de La Salle)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 이서(以西)의 유역일대를 프랑스령이라고 감히 선언한 1718년부터 프랑스 지명으로 불리었고 프랑스란 국명이 붙어 서양역사에 포함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특히 그 지역사람들이 꿩의 꽁지 털을 묶어서 그 기름을 채취하여 항아리에 담을 정도로 석유가 넘쳐나는 곳임도 알 수가 있다.

그 부근들은 전부 고려 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수천리(數千里)라는 산술적 의미로 따져본 "북아메리카대륙 석유매장지 범위지도"에 표시된 지역이라 할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과 대비하면 충청도의 화천(火川)이 붙은 지명이며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 근방 무수히 많은 유정(油井:oil well)과 펜실베이니아주의 타이타스빌 근처에 있는 오일크리크(Oil Creek)가 바로 그러한 역사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과연 이곳은 현 서양역사가 말한데로 서양인들만의 땅일까?

온바른 역사성은 고려연합체제의 영토라 해야 맞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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