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광물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한부울 2016. 10. 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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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글쓴이:한부울


철(Fe)의 근원
히타이트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에 있었다.
철 기원지의 고찰
철령(鐵嶺)과 철원(鐵原)
철강산업 모순의 역사추적
산업혁명의 진실
철도산업와 자본주의
마무리(뉴잉글랜드와 생여진)


철(Fe)의 근원


백과사전에서 철(鐵)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철은 지구를 이루는 가장 주요한 원소로 지구 중량의 32.07%를 차지하며 사람의 몸에는 모두 합하여 3~4g의 작은 못 1개 정도가 되는 소량의 철이 들어 있는데, 철은 혈액 내의 산소 운반을 담당하는 빨간색소인 헴(heme)과 단백질인 글로빈(globin)의 화합물헤모글로빈(hemoglobin)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미네랄 무기질(無機質:minerals)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그 만큼 철은 혈액에 녹아 있듯이 인류에게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동시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원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철의 생산 근원지가 서양인들의 얄팍한 이기심으로 기존역사를 어떤 식으로든지 파괴하려고만 하던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근세기의 혼돈을 통해 철저하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철은 바로 산업혁명을 주도한 주요한 원소로서 무한 가치의 자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1900년부터라고 하여도 너나 내나 할 것 없이 1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철저한 서양교육을 습득한 동양, 서양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지금까지 철생산기원을 이야기 할 때 근동(近東:Near East)을 이야기하고 로마를 생각하게 하였으며 유럽사를 인식하고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월한 역사, 백인만의 역사, 기독교만의 역사가 존재하였고 유럽서양인들의 역사 근원과 바탕이 근세기 동안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의 역사를 끈으로 어떻게든 만들어져 버젓이 존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철의 기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실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본 블로그에 여러번 이야기 한 적이 있다.

The 5 Books In the Book of Mormon Making Claims of Iron In Ancient America.
모르몬교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로서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근세기와 현대에 걸쳐 성황된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 종교의 성서와 함께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이 기록에서 역사사실에 대한(historical account)주장은 고대아메리카인디언들이 철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사기즉 날조된 것이라고 폄하했다는 사실들을 알 수가 있다.

즉 서양인들의 주장에 궤를 달리하면 즉시 사기처럼 취급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서양역사학자 누구라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직접적으로 당시 시대를 정확하게 살았던 것이 아님에도 그러한 주장에 상당한 히스테리를 부린다.

지난 과거 역사를 탐구할 때 각자 기존 나름대로 취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러한 역사를 예측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한계가 있음에도 서양역사학자들은 주제넘게 3차원, 4차원 공간마저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기적인 종교관에서 나타나는 골통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A 2,000-year-old mine has been discovered high in mountains in Peru. The find offers proof that an ancient people in the Andes mined hematite iron ore centuries before the Inca Empire, archaeologists say.


               

                                 [Mina Primavera Nasca ochre mine found in Peru]


그러나 미국 인디애나(Indiana)주 웨스트라파예트(West Lafayette)에 위치하는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소속 인류학자 케빈 본(Kevin J. Vaughn)에 의해 페루남부에 있는 도시 나스카(Nasca) 산(mountain)에서 2000년 된 오랜 철광산(2,000-year-old mine, Ancient Iron Ore Mine)에서 적철석(赤鐵石:hematite)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모르몬교의 주장을 뒤받침하는 것이다.

솔직히 역사를 이치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오래된 적철광의 광산은 서양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동 어디에라도 존재해야 맞다.

그러나 놀랍게도 서양인들이 극구부정하는 남아메리카대륙 페루 안데스산맥에서 인류가 철을 가장 일찍이 사용했다고 하는 증거인 적철광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볍게 바라 볼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 틀림없다.


적철석이라 함은 '피'를 뜻하는 그리스어(Greek language)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광물이 적색을 띠기 때문이며 높은 철함량(70%)과 풍부한 철 산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철광석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적철석의 가장 중요한 광상(鑛床:ore deposit)은 퇴적 기원으로, 또한 북아메리카의 슈피리어 호(Superior湖)지역과 같은 퇴적광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된다고 알려지고 연간 약 7,500만(톤)규모라는 사실도 우리는 간과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

또 아메리카대륙에 다른 중요한 광상은 브라질 중동부의 고원 '광물이 있는 넓은 평야'라는 의미를 가진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 베네수엘라(Venezuela)의 중남부 고원 세로볼리바르(Cerro Bolivar), 캐나다의 래브라도 (Labrador)와 퀘벡(Quebec)에 있는데 모두 변성된 퇴적암에서 산출되는 것이기에 원천적으로 철의 기원은 아메리카대륙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철기시대부터 시작한 인류역사를 생각하면 철은 차라리 인류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이렇듯 혼미를 거듭하게 만들고 있다.


철기시대!

바로 철기시대(鐵器時代)는 고고학에서는 선사시대(先史時代)를 분류하는 세 단계 중 마지막 단계로서 인류역사의 태반으로 알려져 있으며 금속제련을 통하여 구리를 제련하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BC3300-BC600)를 끝으로 기원전1200년경에서 기원후 586년 혹은 700년경까지 철을 주로 사용하여 도구나 무기를 만들던 시대를 말하고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태동했다는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서양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철기시대를 기원전400년에서 기원후 400년까지로 보고 있어 기원전 1200년부터 시작된 고대근동(古代近東:Ancient Near East)이나 인도(India), 유럽(Europe)보다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도 현재 한반도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한반도 학자들은 이를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독보적인 철기문화를 이야기 하는 이중성도 존재한다.

기원전 12세기 그리스와 고대 중동지역(메소포타미아 지역), 기원전 11세기 인도(印度), 기원전 8세기(중유럽)와 6세기(남유럽)에 걸친 코스대로 유럽지역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유럽중부로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지고 로마제국과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서부터 기원전 30년 로마의 이집트 병합시기까지 헬레니즘(Hellenism)시대 혹은 북유럽 초기 중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475년)시기에 즈음하여 막을 내린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인 것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럽사는 철기시대를 껴안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철제품을 만들 때 최고로 정교한 금속가공법 개발되었던 시대라고도 칭할 수 있으며 쇠의 단단함과 높은 용해온도, 그리고 구리보다 저렴한 생산비용을 가지는 풍요한 철광자원을 바탕으로 철은 청동기를 몰아내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금속으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때문에 도시국가가 생성되면서 이로 말미암아 명실공히 인류부흥기가 시작되었고 이러한 철의 의한 발전은 18세기말 산업혁명으로 만개를 한 것이다.

그러나 철의 근원적인 역사에서 이렇듯 유럽중심적인 개념은 결국 역사적인 오류를 낳고 말았는데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등 유럽인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식민지화 된 지역 중에는 철기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예외적인 원칙이 세워져 버젓이 근대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글쓴이가 판단할 때 교묘하게 그들의 유럽사를 독보적으로 만들기 위해 아메리카대륙 문화상황을 원천적으로 빼버렸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히타이트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에 있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철기문화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어딜까?

지금까지 발견된 적철광의 오래된 광상이 있는 곳을 범위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인류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을 도구로 사용하는 철기시대로 진입하는데 가장 큰 획을 그은 것은 고대국가 히타이트(Hittite Empire:BC1600~BC1178 )로 알려진다.

인류가 최초로 만든 철기는 쇠를 녹여 만든 것이 아니라, 쇠와 탄소함유량이 극히 적고 불순물이 섞여 있는 스폰지 형태의 덩어리를 달군 다음 해머로 단조해서 만든 것인데 이를 해면철제조법(海綿鐵製造法)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방법으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은 히타이트인들이 처음으로 창안한 것이다.

고대 터키 아나톨리아(Anatolia)지방에는 철광석이 풍부하게 분포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히타이트 제국이 현재 근동에 있었다고 할 수 없는 세계삼한역사관점이 존재한다.

본 블로그 글 “황금곰(金熊:Golden Bears)과 함길도(咸吉道)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0”의 소제 “[2]부-시리아와 이집트의 위치 이중성”에서 기원전 722년에서 720년 사이 이스라엘 왕국을 함락시킨 앗시리아라고도 하는 시리안(Syrian)과 이집트(Egypt)역시 적어도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와 동홍해(東紅海)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더 나아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위치도 솔직히 현 근동(近東)에 존재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더 많다.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근세기 영국인들의 장난에 의해 근동(近東)이라는 말이 생성된 가장 큰 이유는 이집트문명을 유럽역사에 포함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가 없다.

때문에 서양인들의 주장은 근동이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의 인더스강(Indus River)서쪽에서 지중해연안까지 펼쳐져 있는 지역이라 하였고 현재 이란(Iran),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시리아(Syria), 고대의 가나안이 살던 팔레스타인(Palestine), 아르메니아(Armernia), 소아시아(Anatolia) 및 아라비아(Arabia)와 이집트(Egypt)를 그 속에 과감하게 집어넣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를 유럽사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근동(近東)은 아나톨리아와 레반트(Levant), 메소포타미아 등 유럽과 가까운 서(西)아시아 지역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다.

또한 본 블로그글 본 블로그 글 "종려(棕櫚), 야자나무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49487" 에서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는 종려나무를 신성한 나무(神木:Divine Tree)라고 여겼다고 하는 사실과 앗시리아(亞述:Assyria)에서는 태양신 사마쉬(桓因, 蘇利耶:Shamash)를 부채 모양의 나무관 윗 쪽에 종려나무날개를 단 원반 모양의 형태로 묘사했다고 한 사실, 그리고 이집트(埃及:Egypt)에서는 손바닥 모양의 잎이 달린 종려나무 가지가 '장수', 혹은 '영원한 삶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장례식 행렬 때에는 종려나무가지를 손에 들었다는 것에서 종려나무의 근원지인 중앙아메리카대륙이 근원적으로 메소포타미아가 존재해야 할 곳임을 밝혔던 사실들을 모두 종합해 볼 때 의구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틀림없다.

이에 더하여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에서 멕시코만(灣)을 한 때 페르시아만(灣)이라고 한 사실도 밝혔다.

또한 놀랍게도 멕시코 만을 로마시대 때는 지금의 중동에 있어야 할 "카스피해"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을 일반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것에 대해 카스피해에 관한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이 정도 글쓴이의 탐구를 솔직히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당장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100년이 넘게 지속된 서양교육에 의해 세뇌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히타이트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걸쳐 있던 고대 제국이었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철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고 기원전 15세기경에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에 인간이 만든 철기가 등장하지만, 히타이트의 하티(Hatti)에서는 이미 기원전 18세기경에 사용한 철기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빠른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원전 2333년을 고조선 건국년대란 점을 감안할 때 기원전 18세기라는 것은 그 중심기간에 들어갈 뿐이다.

히타이트 제국 초기에 철은 금보다 5배, 은보다는 40배나 값진 물건이었기 때문에 무기나 도구를 만들 때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도 자본주의 사상이 만든 아이러니한 주장이다.

철로 무기나 도구를 만든 것은 기원전 14세기경이며, 기원전 12세기경에 와서야 철제 단검이 등장했다고 알려진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아주 광폭하고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이집트인들은 히타인트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유럽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이집트가 객관적으로 약소국가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문 철(鐵)의 의미 역시 잔인하고 난폭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투탕카멘 시대를 전후해서 철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투탕카멘 무덤에 있는 철제단검은 히타이트에서 만든 것으로 봐야 타당하다고 한다.

기원전 1300년경 이집트의 강력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Ramses II,재위:BC1279-BC1213)는 히타이트 왕에게 철을 보내 줄 것을 부탁했지만, 히타이트 왕은 냉정하게 거절했고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이집트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1295–1272 BCE)는 기원전 1274년, 오늘날 시리아 근처에서 고대 중동 지역의 최대 격전 가운데 하나인 카데슈전투(Battle of Kadesh)가 발생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무승부로 끝난 전투였고 16년 뒤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던 것으로 근세사는 정리하고 있다.

이집트에 철기가 전래된 것은 기원전 12세기(1200년경)람세스 3세(Ramses III,재위:BC1187-BC1156)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다고 알려지는 이집트 역사는 너무 시대적으로 광범위하게 포괄적인 것이 문제라고 여러글에서 지적한 사실이다.

이렇게 포괄된 역사존재 속에는 분명 삼한역사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추측을 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8"에서 밝히길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Ptolemaic dynasty:BC306~BC30)에 살았던 이집트의 역사학자 마네토(Manetho)가 기원전 30년 로마공화정(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BC508-BC27)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과거 3천년의 기간을 30개 왕조시대로 구분했다고 알려지면서부터 역사연속성이 무리하게 꾸며지거나 엮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 히타이트제국을 멸망케 한 초기에 아시리아(Assyria)라는 말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티그리스강(Tigris江)상류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며, 고대 도시이자 수도였던 아수르(Assur)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놀랍게도 단군이 태동한 기원전 23세기에 맞춰 기원전 25세기 또는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605년까지 존재한 강성하였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아수르가 수메르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도시국가라 사실에서 수메르가 환단고기에서 12연방국가 중 하나라는 주장도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세계삼한 역사가 그 이집트의 3천년이나 아수르의 2천년 역사속에서 충분히 존재하였거나 녹아들 수 있는 시대적 공간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

히타이트는 세계삼한역사 속에서 멸망한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철 기원지의 고찰



철의 기원지를 밝히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문명 4대발상지는 정확할까?

본 블로그 글 "옥수수(玉米, 玉蜀黍, 粟米, 番黍:Indian corn)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5 "에서 미국 시카고 필드 박물관의 조너선 하스(Jonathan Haas)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약 5천년 전 지금의 페루(Peru)해안지역에서 옥수수가 활발하게 재배, 가공되어 주식으로 이용됐던 것으로 밝혔으며 당시 상황에서도 그렇듯 복잡하고 중앙집권적인 고대 안데스 문명(Andean civilization)을 일으킨 원동력에 관한 큰 숙제가 풀렸다고 발표한 사실을 사이언스 데일리와 BBC 뉴스가 보도했다는 사실은 기존 인류문명근원지를 의심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기사는 기원 전 3000년에 문화의 꽃을 피웠던 페루의 노르테 치코(Norte Chico) 아열대지역에서 주민들의 주식은 옥수수였음이 밝혀졌음을 밝히면서 이는 "남미의 초기 문화 역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인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농업에 기반을 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던바가 있다.
이것을 카랄/카랄-수페(Caral-Supe)문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주장은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인 BC 3000년께 황하(黃河)유역문명과 BC 3000∼2500년 사이의 인더스강 유역문명(Indus civilization), BC 3000년께 나일강유역의 이집트문명(Egyptian civilization),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을 나누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

이러한 주장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이 4대문명발상지는 근세기에 서양인들에 의해 주도되어 의도적으로 분리되게 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유럽사를 만들기 위함이다.

때문에 서양인들의 엉터리같은 분리주의사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볼 때 분명 최초 인류발상지는 세계전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북, 남아메리카대륙, 중앙아메리카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미국 인디애나(Indiana)주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의 인류학자 케빈 본(Kevin J. Vaughn)이 밝힌 페루남부에 있는 도시 나스카산(Nasca mountain)의 2000년 된 오랜 철광산(2,000-year-old mine, Ancient Iron Ore Mine)은 철의 시원광원이라 할 수 있는 적철석(赤鐵石:hematite)임이 밝혀진 사실과 동일한 사한이다.

600 마일(1,000km)에 걸쳐 칠레 북부 바다 가장자리와 안데스산맥 사이에 끼어 자리 잡고 있는 아타카마사막(Atacama desert)을 북쪽으로 하는 노르테치코문명은 현재 리마(Lima) 북쪽 다섯개의 강, 찬카이강(Chancay River), 우아우라강(Huaura River), 수페강(Supe River), 포르탈레자 강(Fortaleza River), 파티빌카강(Pativilca River)계곡에 걸쳐 다양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페루(Peru) 북중부 해안 노르테치코 지방에 있던 30여개 도시로 이루어진 콜롬부스 이전 고대 문명이라 한 것이다.

이것을 서양인들은 타완틴수유(Quechua:Tawantinsuyu)라 하여 콜럼버스 이전의 시대(Pre-Columbian era)의 불과 100년을 지탱한 잉카제국(Inca Empire:1438-1533)이라고 축소시켜 연결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코끼리(象, Elephantidae, elephant)가 남미에 없는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6"를 바탕으로 한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의 소제목 (불의 발견과 또 다른 인류이동경로)에서 글쓴이가 주장하길 본래 인류이동경로가 현재 서양학자가 주장하고 있는 정례화된 경로와 다를 수 있다고 한 적도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줄기차게 일률적으로 글쓴이가 밝히고 있는 사실과도 철저하게 관계가 있으며 동시에 인류전반적인 즉 자연에 의한 흐름의 역사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인류문명지 조차도 서양인들이 조작에 의하여 변질된 것이라면 철기시대 시원 따위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30여개도시국가로 이루어진 카랄/카랄-수페 문명이라고 하는 노르테 치고(Norte Chico)문명이 고작 콜롬부스이전 잉카라고 하는 것은 역사 흐름연속성의 이치에 맞이 않는다는 이야기다.

현대사회에서는 하잘 것 없는 식품이지만 본래 옥수수는 인류생존과 연결된 귀한 작물이었고 때문에 인류역사와 밀접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철광의 원천인 적광석이 근원적으로 존재하던 곳의 역사는 기필코 철기시대의 시원이라는 상징성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의구심은 서두에서 언급한 사실에서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등 유럽인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식민지화 된 지역 중에는 철기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예외적인 문제가 존재하기에 이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 

히타이트가 지금의 중동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Norte Chico (Small North, Near North)


철령(鐵嶺)과 철원(鐵原)


늘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오래전부터 불리었던 역사지명은 매우 축소된 것으로 깊이 보면 한반도사가 주장하듯이 그렇듯 단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본 블로그에서 이 지명에 관계되는 사실들을 풀어헤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우리가 왜 철령(鐵嶺)과 철원(鐵原)이라는 지명에 그처럼 의문을 갖게 되는가 하면 분명 한문 개체글자는 물질근원을 말하는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며 금속 철(鐵)이 붙어 그것을 역사화하고 있지만 정작 이 지명이 붙어 있는 위치는 본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못마땅한 것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를 유럽지역보다 현저하게 늦춰 후진형태의 궁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족쇄를 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적으로 한반도는 이러한 족쇄를 벗어날 수 없는 위치에 묶여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하겠지만 실제 삼한역사를 따져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찾아 알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역사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안착하고 있는 역사지형위치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릴 진실의 역사 앞에서 스스로 곤욕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원전(BC)300년경부터라 하고 삼국이 정립된 서기(AD)300년경까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도 한반도 지형적인 위치라면 수긍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역사지명은 한반도가 아님을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러한 모순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냥 안주하고자 할 분만아니라 역사지명은 분명 우리에게 진실을 찾을 것을 명령하지만 실상우리는 식민사관에 빠져 개의치 않는 다는 심각성이 분명하게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철기시대는 삼한역사를 밟고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원칙이 존재한다.

때문에 철령이나 철원이라는 지명이 용기있게 존재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철기 제품이 유럽으로 도입된 것은 소아시아에서 기원전 900~1000년 전으로 추측되는 유럽철기시대에서 말하길 그 근원이 러시아 북카프카스(코커서스)지역에서의 철기가 기원전 900년에서 800년경의 코반문화, 체르노고로프카와 보로체르카스크 문화와 함께 타르코 키메르족(Cimmerians)의 이주를 통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의 할슈타트 문화(Hallstatt culture)로 확산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사실도 따져보면 세계삼한역사와 밀접하다는 사실이다.

중부유럽문화인 할슈타트 문화(Hallstatt culture)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철기시대초기인 기원전 900년까지 꽃피우던 것으로서 사실상 옛 고구려역사에서 광개토왕정벌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 2011년 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50402 "에서 밝힌바가 있다.

또한 남미 아마존지역(Amazon Conservation)은 오래전부터 할슈타트문화에 영향을 주었던 이 키메르족과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남미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도 유심히 관해야할 문제이다.
키메르족은 기원전 7세기에 러시아 남부(코커서스)에서 소아시아로 이동해 온 종족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것은 역이동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사는 뒤죽박죽이다.


문제는 한반도지형상 철기시대가 현저히 늦어질 수밖에 없는 위치임에도 왜 철기시대를 상징하는 철원이나 철령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아무리 한반도사학자들이 부정을 하더라도 이 지명에 대한 의미는 속일 수가 없다.

철령과 철원이 있었던 역시지명에는 반드시 철(Fe)이 생산되는 상징이라 아니라 원칙이 존재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생산되는 철은 세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우리의 치부만큼 잘 알고 있다.

한반도 지형사정을 볼 것 같으면 철 생산지도 아닌 곳에 그냥 이름만 붙여 놓은 것과 같다 할 수밖에 없다.

철령이나 철원이 붙어 있는 지명 주위에 강력한 철 생산 근원지가 존재해야 한다.

현재 철령은 북한 땅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이 령(嶺)의 높이가 고작 685m 이며 고개의 북쪽을 관북지방(關北地方)을 말하고 동쪽을 관동지방(關東地方)이라 한다고 설명되고 있지만 구분이 그렇듯 쉽지 않다.

사실상 동북지역의 생여진(生女眞)이라는 실체는 바로 고대영어를 사용하던 세력이라 했다.

이곳이 북아메리카대륙이라면 뉴잉글랜드(New England)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같다는 것을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을 인정하는 분들에게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철령이라는 지명문제는 한반도와는 격이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인데 특히 이 령(嶺)을 일명 ‘고개’라고 하고 ‘재’, ‘티’, ‘치’, ‘개’ 등으로 불리어 진다는 것도 축소된 의미가 상당하다.

본래의 령(嶺)은 깊다, 깊숙하다라는 의미가 강하며 연속(連續)한 산(山), 잇닿아 뻗어 있는 산줄기를 말하기 때문에 큰 산맥(山脈)을 의미하는 것임도 알 수가 있다.

정확하게 이곳을 북아메리카대륙 애팔래치아산맥이라 하여도 모든 조건상황은 더할나위 없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본래 고려(高麗)라는 뜻이 포괄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고려가 한자 명칭에서 한반도 역사화되면서 작은 나라로 전락한 예와 같다.

그렇다면 한반도역사를 근거하는 모든 역사사실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축소된 형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쉽게 추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학자들은 철령을 마치 현 태백산맥의 한낱 고개인 것처럼 기만한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대륙의 신중국(新中國)지명에서 보더라도 철령이란 지명의 의미는 한반도 처럼 작은 고개가 결코 아니다.

신중국대륙 중부로 흐르는 양자강이라고 하는 장강(長江)과 남부 광동성의 성주 광주(廣州)로 흘러드는 주강(珠江:Pearl River)유역을 분수령으로 하면서 강서성(江西省)과 호남성(湖南省),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사이에 위치하는 대유령(大庾嶺:1000m), 월성령(越城嶺:2,142m), 기전령(騎田嶺:2009m), 맹저령(萌渚嶺:1730m), 도방령(都龐嶺800-1200m)을 합해 오령(五嶺)이라고 하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남령(南嶺)이라고 한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南岭(南岭山脉;五岭、五岭山脉),由越城岭、都庞岭、萌渚岭、骑田岭、大庾岭五座山组成,故又称“五岭”。



이와같은 것은 결코 령(嶺)은 고개 따위로 치부될 수 없는 지명이다.

또한 놀라운 것은 옛 중국에서는 영남(嶺南)이라는 말이 결코 오늘날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고개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다.

중국남부의 오령(五嶺) 즉 남령(南嶺)남쪽을 말하는 것으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그 범위가 참으로 방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령을 한반도 보다는 크게 말하고 있는 신중국역사라 할지라도 북아메리카대륙 보다 축소된 사실에서 피할 수가 없다.

남령(南岭)이남을 영남(嶺南)이라고 한 지역설정에서 전체 대륙면적을 살필 때 영남이라 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너무 협소하게 설정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륙역사를 재야학자 일부에서는 현 동아시아대륙 신중국대륙(新中國大陸)이라고도 하는데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래봤자 1931년 국민당일원인 장려화(臧勵龢)등에 의해 급조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지형사정이나 마찬가지로 지명의 본래 의미를 찾을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솔직히 호남성(湖南省)과 비교하더라도 영남(嶺南)이란 의미가 축소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중국이 말한 오령(五岭)이나 영남(嶺南)은 삼한역사에서 말하는 령이나 한반도에서 지명한 철원, 철령 등 이것들은 하나의 체제에서 하나의 지명으로 족해야 함에도 신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중국과 삼한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이렇듯 상대적으로 똑같은 지명이 있어야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글자를 조금씩 바꿔 붙어놓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분리한 단면들이다.

그래서 인지 알 수 없지만 한쪽은 남령이라 하고 한쪽은 철령이라 한 것만 다르다.

대신 그 남쪽 모두가 영남이 되어야 하지만 어자피 지형 나눔이 어설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신중국(新中國)에 표시된 오령이라 할지라도 산맥이라 하기에는 여러면에서 부족함이 없지 않다.


한반도 역사지명오류문제에서 한가지 더 지적한다면 한반도 철령(鐵嶺)을 중심으로 북쪽을 ‘관북지방(關北地方)’이라 한 사실에서도 그곳이 분명 고려 후기 몽골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명조의 안변 (安邊) 철령위(鐵嶺衛)가 설치 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여야 하지만 그럴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철령(鐵嶺)동쪽을 ‘관동지방(關東地方)’이라 하였다는 것에서도 관동(關東)이라는 지명이 얼마나 축소되었는가를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사실상 관동지방이라는 것에서는 인구밀집도를 짐작케 하는데 본래 역사인구동향을 살펴볼 때 절대적으로 동부지방에 인구 밀집도가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인데 따져보자면 열도일본에서 관동지역에 도쿄를 넣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열도는 그나마 지명원칙을 지켰으나 한반도는 그렇지가 못하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체제가 있었을 북아메리카대륙 애팔레치아산맥 동부 전체가 1776년 미국독립국 형태에서 13개주를 포괄하는 것과 같고 인구밀집도가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전체 인구와 비교케 하는 것으로 경제지역으로서의 역사 본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제력이 높으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이 살려고 하고 거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반도 철령 동쪽에 그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대도시가 전혀 없다.

한반도 역사의 큰 맹점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는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역사환경이 인가사와 긴밀하고 밀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반도 동해안을 보라.

인구밀집도가 높아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한반도 황해도는 어떤가.

이곳을 철령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보편적으로 관서지방(關西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우습게도 이를 해서(海西)라고도 하면서 이중적으로 불리는데 결코 관서라고 붙일 근덕지가 없다.

황해도를 해서라는 것은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관서지방을 거쳐 중국 대륙으로 가는 길목이라 하였다.

한반도 지형은 세로로 길게 뻩어있기 때문에 관서라거나 해서 지명은 거의 서해안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가.

중국대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한 것도 좀 이상하지만 딱이 관서나 해서라고 지정할 곳이 못된다.

엄연히 해서 바닷길이었음에도 길목이라 한 것은 한반도 역사에서 최고로 헛튼 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길목이라 전제 한 것에서 생각 해 볼 때 한정된 지형이거나 상식적으로 길목을 그릴 수 있는 지형형태를 한반도 황해도에 접목하기에는 곤란한 것이다.

신중국대륙에서 지정한 영남과 관동, 관서지명의 범위들도 한반도 사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들도 알 수 있는데 뒤죽박죽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한반도 역사에서 관북지방을 직할지(直轄地)로 명(明)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였는데 명나라가 만약 일본에 위치한 것이라면 몰라도 명나라가 현 신중국대륙에 있었다면 오히려 철령 북부가 아니라 황해도에 직할지를 설치하려고 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치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전혀 없다.

철령위가 있었다고 판단되는 원산지역을 보자.

현재 상황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만약 철령(鐵嶺)을 남령이라고도 하였던 오령(五嶺)이라 하였다면 중국에서 말하는 철령 남쪽을 영남(嶺南)이라 한 사실과 견주어 볼 때 한반도의 상황은 위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너무나도 지역할당이 빈약하고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철령 남쪽을 영남이라는 것은 강원도(江原道)전역이 그곳에 포함되거나 이어질 뿐이다.

때문에 철령(鐵嶺)이라 함은 다섯 개의 령이라 하여 오령(五嶺)대신에 축소하여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남령이라 하였음도 알 수 있으나 남령이라 할 지형이 마땅치 않아 적극적으로 지명을 나타낼 수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단순한 고개나, 재 따위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철(鐵:Iron)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근세기 한반도에 지명 붙이기 작업에서도 어용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상당한 고충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솔직히 역사가 아니라 코메디같은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


철원(鐵原)어떨까?

철원은 한반도 행정구역상 현재 강원도 북서부에 있는 군(郡)으로 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이거나 백제때의 모을동비(毛乙冬非) 또는 철원군(鐵圓郡)이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년(757)에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가 904년(효공왕 8)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고친 궁예는 905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에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침으로써 이곳은 후삼국 시대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되며 918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즉위하고 이듬해에 송악(松岳, 開城)으로 도읍을 옮김에 따라 동주(東州)라 하였는데 현재 한반도 위치로 보았을 때 동쪽 땅이라고 하는 동주(東州)라고 명명하기가 어중간한 위치가 된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남의 땅을 쳐서 빼앗아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라 하고 1434년(세종 16)에 기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태종 13년 계사에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할하여 경기에 이속(移屬)하였다는 것은 상당한 가치의 철(鐵)생산을 염두에 두고 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바로 철이 당시 도시의 가치를 상승시켰을 것이다.

철원이라는 지명에서 원을 둥근 원(圓)을 쓰거나 혹은 언덕, 벌판, 근본을 나타내는 원(原)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철이 생산되는 지역을 크게 나타내고자 하는 지명인 것이 틀림없다.

후삼국시대때 당(唐)나라의 상인인 왕창근(王昌瑾)이 오래된 거울을 얻었는데, 거기에 쓰여 있기를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 가운데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흑금 동쪽에 그림자를 드러내리라.[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影黑金東]는 일설에서 이를 해석하길 “청목은 소나무이므로, 송악군(松岳郡) 사람으로서 용(龍)으로 이름한 자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임으로 왕건을 이르고 흑금(黑金)은 쇠[鐵]이니 지금의 철원(鐵原)으로, 이는 궁예가 이곳에서 일어나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징험이라고 한 사실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이긴자의 역사가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나 왜 굳이 당나라 사람이 이런 언급을 했을까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당나라는 곧 신라인이기 때문에 신라인은 지배주체가 될 고려와 후삼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철원은 굳이 위의 전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오래전부터 철(黑金) 즉 쇠가 나는 지역임을 지명에서 명확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현 한반도 철원군은 관개 시설이 잘 갖추어져 강원도내 제1의 쌀 생산지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은 희극이다.

한반도 철원에서 사실적으로 자원을 보면 금성 부근의 유화철광, 중정석, 망간이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유화철광은 산골자연동(自然銅)이라는 것으로 이황화철(FeS2) 또는 산화철을 함유하는 것으로 철이 46.6%, 유황이 53.4%를 차지하는 사철등에 이용된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70%함유량을 가진 적철광보다 못한 것이다.

다시말해 철을 제조할 수 있는 함철광물인 적철광(赤鐵鑛,Hematite: Fe2O3), 자철광(磁鐵鑛,Magnetite: Fe3O4), 능철석(菱鐵石, siderite), 갈철광(褐鐵鑛,Limonite: Fe2O3.nH2O)등이지만 이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하다면 한반도 철령과 철원은 이름값도 못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남한의 철 광산은 신예미 광산(강원도 정선)이 유일하며, 현재 남한 수요의 대부분을 호주, 브라질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역사를 얼마든지 추단할 수가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 고로(용광로)를 사용하여 철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덩이로 된 광석(鑛石), 괴광(塊鑛)의 적철광이 주로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적철광의 광상, 광원이 없는 한반도에서 철원이나 철령이란 역사지명을 사용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적철석(赤鐵石, hematite:Fe2O3), 적철광(赤鐵鑛)

αιμα(blood)

Ochra rubra=Red stone-ochre 붉은 빛의 황토(黃土).

Reference List:Wallerius (1747): 259-266.

Latin synonym of:Hematite

Name:From the Greek Αιματίτης = Blood-stone.

Greek name for:Hematite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 (325 B.C.)]

The System of Mineralogy of James Dwight Dana and Edward Salisbury Dana Yale University 1837-1892, Volume I: Elements, Sulfides, Sulfosalts, Oxides.


한반도에서 그나마 자원이 있다는 북한 철 광산의 단점은 철 품위가 낮은 자철광(Fe 30% 내외)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역사적인 문제에서도 시사한바가 큰 것이다.

그러나 사서(史書)에서는 강원도 강릉대도호부를 본래 예(濊)의 고국(古國)이라 하여 이를 철국(鐵國)이라고도 하고, 예국(橤國)이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 만큼 강원도(江原道)는 옛부터 철국(鐵國)이라 할 정도로 철의 생산지로 유명했음을 분명하게 역사기록은 밝히고 있다.



일찍이 고려 예종 3년(1108)에 성을 쌓아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를 두었다고 하는 공험진(公嶮鎭)은 다 아다시피 고려 예종(睿宗1079-1122,재위:1105-1122)때 윤관(尹瓘)등에 의해 생여진(生女眞)이라 하는 동북여진(東北女眞)을 축출하고 개척한 지역에 쌓은 9성(九城)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한반도 역사에서는 공험진을 북쪽 소하강(蘇下江)강변에 있다고 하고 조선시대의 모든 관찬문서와 지리지 등은 공험진의 소재를 두만강 북쪽 700리(里:275km)에 두어 항상 선춘령(先春嶺)과 함께 기록하거나 주기한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동북(東北)으로 흘렀다는 소하강(蘇下江)의 실체지명과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 지금까지 신중국, 한반도, 열도의 동양학자들의 연구가 그렇게 빈번하였음에도 이 지명에 대한 확실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아시아역사는 본래 역사라고 말할 수 없는 정도로 혼란상태에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본래의 역사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만들어진 역사에 꿰맞추려 한것이니 이처럼 모든 문제에서 일치않는 이상문제가 빈번한 것이다.

왜 이런 중대한 지명사실규명에서 엉거주춤 구렁이 담 넘어 가듯해야만 할까?

기존 역사와 일치않을 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찾아 밝혀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없다.

아마도 그것은 한반도역사와 동아시아 역사의 한계라 할 것이다.

공험진이란 지명 단어를 살펴보면 험준한 해상방어기지라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한반도 두만강에서 700리 북쪽이라 하였기 때문에 700리를 270킬로미터로 환산하여 구글 위성으로 재어보면 북쪽에는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카 호(興凱湖,:Khanka Lake)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을 공험진(公嶮鎭)이라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공험진은 해상에 들어오는 적을 막으려 세운 해상방어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한카호는 상당히 해안과 멀어 그러한 실제적인 군사방어진지로 합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自汉代起就有東北的游牧民族的居住的紀錄,歷史上曾經為渤海國(当时称为湄沱湖)遼、金、元和清的領土清代時當地屬吉林將軍管轄地。兴凯湖在唐代称为湄沱湖,因湖形如“月琴”,故金代有“北琴海”之称,清代改为兴凯湖。"兴凯"是满语,意为"水从高处往低处流"之意

위 이 한카호를 설명한 신중국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발해국(渤海國)영역내에 존재한 사실과 당시에는 미타호(湄沱湖)라 하였고 당나라까지 호수형태가 월금"月琴”같다하여 이 이름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금(金)나라때는 북금해“北琴海”라 칭하였고 청(淸)나라때는 흥개호(興凱湖)라 하였는데 만주어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매우 물의 흐름 이치를 단순하게 보았지만 자연의 이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녹아있는 지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균수심 4∼5m의 담수호(淡水湖:freshwater lake)라 하지만 습지대인 한개호가 스스로가 과연 물의 흐름을 이야기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동사강목 제5상 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

경술년 흥덕왕 5년(830, 당 문종 태화 4)에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나라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太白山)의 토끼와 남해의 곤포(昆布), 책성(柵城)의 콩자반, 부여의 사슴, 막힐(鄚頡)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위성(位城)의 철(鐵), 노성(盧城)의 벼[稻], 미타(湄沱)의 도미[䱶]등이다. 과일에는 구도(九都)의 오얏과 낙유(樂游)의 배[梨]가 있다. 그 나머지의 풍속은 대략 고려와 거란과 비슷하다라고 한 사실에서 발해 위성(位城)이란 곳에서 철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 동아시아 근대사는 발해를 현재 한카호를 중심으로 동북만 연해주영역을 만들고 있지만 어디에도 세계적으로 들어나는 철 생산지역이 아니다.

도대체가 이상하지 않는가.


해동역사 제27권

물산지(物産志) 2

어류(魚類)

붕어[鯽]

○ 발해의 풍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미타호(湄沱湖)의 붕어이다. 《신당서》

○ 조선의 붕어는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것도 있다. 《조선부 주》

위 해동역사를 보더라도 발해의 풍속에서 실제로 미타(湄沱)의 한자 의미는 미(湄)는 강기슭. 강변. 물가이며 타(沱)는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포구, 물갈래(강물이나 냇물 따위가 갈라져서 흐르는 가닥)등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카호가 발해에 속하고 그곳에 붕어가 유명하며 위성에는 철 생산이 유명했다는 사실과 현실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즉 그곳은 강기슭이나 강변, 물가,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포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 해상방어진지인 공험진(公嶮鎭)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난감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미타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호수가 아니라 포구이며 공험진 역시 해상방위진지이기 때문에 해안가까이에 설치될 지명이다. 

때문에 공험진을 찾으려니 한카호가 나타나지만 종합해 볼 때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적어도 발해의 미타(湄沱)라고 하는 지명은 바다나 강 같은 것으로 강줄기가 나무 가지처럼 얽히고설키는 늪 같은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배가 왕래할 수 있는 포구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하는 지명이다.

그러나 실제로 미타호라는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한반도역사나 지금의 신중국역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밝힐 수 있을까.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이다.

위 신당서(新唐書)의 발해전에서 보았듯이 발해에서 귀한 물품 중에 ‘위성(位城)의 철(鐵)’이란 기록이 있다.

도대체 위성(位城)은 어디에 존재할까?

이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철강산업 모순의 역사추적


철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철강산업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 철강산업은 “산업의 쌀”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른 산업에 대한 연관효과가 지대하여 자동차, 가전, 조선, 건설, 기계 등과 같은 전방위 산업의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철의 역사만 놓고 보면 이상하게 본래 근원지라고 알려진 소아시아와 중동보다 아메리카대륙 쪽이 가깝고 타당하다.

서양학자들의 주장에서 볼 때 전혀 철의 근원지가 될 수 없고 철기시대와 동떨어지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서 오히려 철강산업이 시작되었고 산업발전을 지속했다는 상황을 재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남미 페루의 노르테치코문명 혹은 카랄/카랄-수페(Caral-Supe)문명을 재고하지 않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突不燃不生煙
이덕무(李德懋)의 열상방언(洌上方言)에서 굴뚝에 불을 지피지 않으면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말과 같이 결과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철강산업이 발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철기시대와 무관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미 미국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인류학과 교수 케빈 본(Kevin J. Vaughn)에 의해 기존 철기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서 2000년 된 오랜 철광산(2,000-year-old mine, Ancient Iron Ore Mine)을 페루 남부에 있는 도시 나스카 산(Nasca mountain)에서 적철석(赤鐵石:hematite)을 발견하고 이를 시초라고 하였다는 뉴스기사는 기존 철기시대 역사를 재고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철기시대를 감안하지 않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기존 주장을 역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철의 라틴어원을 가지고 있는 적철석(赤鐵石:hematite)의 근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특히 높은 철함량(70%)때문에 가장 중요한 철광석이라고 알려는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적철석의 가장 중요한 광상(鑛床:ore deposit)은 퇴적 기원으로, 북아메리카의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지역과 같은 퇴적광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연간 약 7,500만t)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 다른 중요한 광상은 브라질 중동부의 고원 '광물이 있는 넓은 평야'라는 의미를 가진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와 또한 베네수엘라(Venezuela)의 중남부 고원 세로볼리바르(Cerro Bolivar), 캐나다의 래브라도 (Labrador)와 퀘벡(Quebec)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대 히타이트(Hittite)의 정확한 위치도 위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슈피리어호를 중심으로 고기 빅산지에서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끝까지 서양학자들은 소아시아와 중동을 이야기 하는 것은 정말 무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즉 북아메리카대륙의 변성된 퇴적암 중에서 특히 많이 산출된다는 특징이 있다.

퇴적암은 지구에 대기와 바다가 만들어진 후에 생성되었다고 추정한다.

철기시대부터 시작한 인류역사를 생각할 때 철은 차라리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케빈 본(Kevin J. Vaughn)이 칠레에서 적철석을 찾은 것은 이 철의 기원과 연결될 수 있는 철의 시원을 찾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현재 세계사는 아메리카대륙 보다 철의 기원을 아시아대륙으로 지정하고 기원전 12세기 그리스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중동지역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인도는 중유럽과 같은 기원전 8세기와 6세기에 걸쳐 유럽지역으로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였으며 로마제국과 헬레니즘 혹은 북유럽 초기 중세기 즈음에 철기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것에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라고 정리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 혼란스러운 것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편협적인 문제도 지적되고 있는 것은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등은 유럽인들에 의하여 개척되었고 식민지화 된 지역이기 때문에 아예 철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괴변도 참으로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망발인 것이다.

그들이 차지한 영역은 철기시대가 없다는 주장은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철기문화발달의 기원을 진단할 수 있는 것은 퇴적암의 적철석(赤鐵石:hematite)이라고 본다면 공교롭게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인들이 식민지한 지역인 슈피리어호(Lake Superior)와 캐나다 동북부지역에서 광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서양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모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의 슈피리어호는 철의 기원과 매우 밀접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철기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아시아대륙 중동(中東:Middle East)에는 메소포타미아문명지에 근접한 북부에 흑해(黑海:Black Sea)와 내해(內海)라고도 하는 카스피 해(裏海:Caspian Sea)가 있는 구도에서도 북아메리카대륙 슈피리어호와 동일하게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근세기에도 그곳으로부터 철강산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중동지역은 그렇지 않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그곳에서 남진하는 러시아를 상대하여 그레이트 게임을 지루었다고 할 당시 19세기초기에 인구밀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던 곳이다.

본래 인류문화가 발생한 땅에서 무엇때문에 인구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겠는가.

기존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아나톨리아(Anatolia)반도를 근거로 하는 고대 히타이트(Hittite:BC18세기경-BC1180, BC8세기) 또는 히타이트 제국의 위치 역시 아시아대륙 중동 흑해와 카스피해 남쪽에 위치하는 방향구도 역시 동일하게 볼 수밖에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판단이 될 수 있는 주장이다.

인류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을 도구로 사용하는 철기시대로 진입하는데 가장 큰 획을 이룬 고대국가는 히타이트(Hittite)였다는 사실과 히타이트 제국은 하티(Hatti)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걸쳐 있던 고대 제국으로서 주위 철강석이 많아 아주 오래 전부터 철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철기는 쇠와 불순물이 섞여 있는 스폰지 형태의 덩어리를 달군 다음 해머로 단조해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도구를 만드는 방법은 히타이트인들이 처음으로 창안했다고 알려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지역인 북아메리카대륙을 충분히 철의 기원으로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근세기에 최초의 철강회사가 이곳에 설립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자원이 고갈되었다고 하면 오래된 거대한 광산의 자취라도 존재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사실에서도 결코 큰 단절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지역이 과연 그러한가.

또 하나 서양인들의 주장에서 보면 현재 중동지역이라고 하는 비옥한 반월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역시 BC1600년경부터 1200년경까지 히타이트가 지배했고 BC1300년경 당시 히타이트제국은 쇠를 녹여 금속을 추출하는 야금(冶金:metallurgy)기술을 독점했으나 BC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남부해안을 따라 밀려들어온 해양사람들에 의해 멸망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해양사람들은 누굴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비정상적인 논법의 역사 뒤에는 바로 서양 유럽사가 은밀하게 숨어 있다.

본 블로그 글 "압록강 자치(Korea taimen)는 갈색송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7"에서 유럽대륙 발칸지역인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를 근거로 해야하는 오흐리드송어(野鱒:Ohrid trout)가 오히려 북아메리카대륙 미네소타(Minnesota), 와이오밍(Wyoming), 콜로라도(Cologado), 몬타나에 복잡하게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도 유럽발칸반도 제국(諸國)과 아타톨리나반도제국(諸國)들이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 남쪽에 위치한 것임을 자연과학적, 또는 생물학적으로 밝혔다는 사실도 참고 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철강은 근대 산업사회의 전환기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며 또한 산업혁명의 토대를 이루는 핵심요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철기문화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현대문명으로 꼴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들어 섬나라 잉글랜드라고 하는 영국(英國)에서 산업혁명이라는 공업화 개혁이 시작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기계의 눈부신 발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요약되는 이 산업혁명은 먼저 면직물 공업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렇게 시작된 기계의 개량과 발명은 모든 산업 분야에 급속히 퍼져나가 천지개벽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와 동시에 증기기관의 개량에 따른 동력 혁명이 일어났고, 더 나아가 제철업으로 이어지고, 석탄산업, 기계공업도 이렇듯 자연 순차적으로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709년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1678-1717)가 고안한 코크스를 이용한 용선법은 양질의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 토양을 만들었고, 1740년대에는 벤저민 헌츠먼(Benjamin Huntsman:1704-1776)이 도가니 제강법을 창안해 종전보다 우수한 강철을 짧은 시간에 싼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산업화인 것이다.

1784년에 헨리 코트(Henry Cort:1741-1800)가 개발한 새로운 압연기술과 정련기술은 영국의 제철 산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지며 또 이즈음 철 생산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대기압 증기기관을 비롯한 새로운 동력기관이 탄생하였고 그 가운데에서 제임스 와트(James Watt:1736-1819)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운송기술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는 것은 어느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당시 증기기관차는 그 자체가 철을 상징하는 대명사였다고 하였으니 부족하지 않다.

이렇게 되자 철도가 가는 곳마다 철교가 생겼으며, 철도 건설 붐은 레일의 대량 수요를 창출하였으며 19세기 철강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 영국은 철과 석탄의 시대를 맞이했는데 이 시기부터는 철(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바탕이 되었으며 국가의 국력을 좌우할 만큼 한 국가에 있어 철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으로서 즉 목탄에 의존하던 제철 산업이 석탄을 연료로 하는 제철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산업혁명의 극대화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현 잉글랜드 섬이라고 하기엔 무엇인가 찜찜한 것이 사실이다.

지구상에는 철의 매장량이 77경 5천조톤 이상이라고 추정되어지고 있다.

물론 현 잉글랜드 섬에서 철이 생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1800년대의 연간 세계 철의 생산량은 50만톤에도 미치지 못하였지만 19세기 말에는 6~7배가 증가된 약 350만톤이 되었으며 현재 2000년에는 연간 약 8억-9억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을 정도로 철의 산출은 높아만 간다.

19세기와 비교할 때 지구상에 뭍여 있는 철은 다대하다고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14, 15세기에 수차송풍(水車送風)에 의 한 고로법이 출현하고 나서 용융선철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수차라 함은 바로 물레방아로서 성종19년(1488)에 최부(崔溥)가 물레방아라고만 알고 있는 수차(水車)를 만들었고 윤판(輪板)을 녹나무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인 다른가. 같다.

철을 제련하는 방법은 처음에는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 덩어리 위에 장작을 태워서 얻은 열로 녹이는 단순한 방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그러던 것이 유럽인들에 의해 14세기 초에 처음으로 목탄을 사용하는 용광로로 이용하여 선철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18세기에 비로소 목탄 대신에 코크스(Cokes) 즉 석탄을 사용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 현 근세사의 이야기다.

석탄을 사용하여 선철을 연하게 하는 교련법(Puddle Process)이 1784년 영국의 헨리 코트(Henry Cort)에 의해 발명되고 난 후 1856년에 영국의 베세머(Henry Bessemer:1813-1898)는 용해된 선철에서 강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전로(Converter)를 개발하였고 1864년에는 영국인 지멘스(Wilhelm Siemens:1823-1883, Friedrich Siemens:1826-1904)형제가 평로제강법을 특허로 얻은 것을 프랑스인 마틴(Pierre Martin:1824-1915)이 이를 더욱 발전시켜 19세기 후반에 1,600℃이상의 고온에서 정련된 강철(鋼鐵:steel)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근대적 제련법의 기반이 확립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제련 기술이 고려와 조선에서는 없었을까?

아니다.

위 수차를 발명한 시기가 유럽인들이 수차발명시기와 거의 같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임신(1392,홍무 25) 9월21일 (기해)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대사헌 남재南在:1351-1419)의 상서문 一, 前朝之季, 下令各道, 鍊鐵作兵器久矣, 聞西北面鍊鐵倍舊, 而軍器之數不加多。 願令都評議使司, 移文都巡問使, 每季月呈報, 考其一月所鍊鐵物, 所作軍器之數, 申聞勸懲。
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미 고려의 말기에 각도에 영을 내려서 쇠를 제련하여 병기(兵器)를 만들게 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였고 서북면에서는 쇠를 제련하는 것이 예전보다 배나 되는데도 군기의 수량은 더 많지 않다고 하면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도순문사(都巡問使)에게 공문을 보내어 매철ㆍ매달마다 정보(呈報)하게 하고, 그 한 달에 제련한 철물(鐵物)로써 제작한 군기의 수량을 상고하여 신문(申聞)하게 하여, 잘한 사람은 권장하고 잘못한 사람은 징벌하게 하라고 임금에게 상소한 내용이 있다.

이 역시 유럽인들의 고로사용과 시대적으로 거의 같거나 빠르다.

또한 조선 세종시기에 과학자로 알려진 장영실(蔣英實)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서(史書)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은(銀)의 제련은 신대륙발견과 같은 시기인 15세기 말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납[鉛:Pb]광석을 사용하여 은(銀)을 제련(製鍊), 분리하는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을 일찍부터 사용하였으며 이 제련기술은 16세기부터 조선정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시행되었고 이것이 바로 현재 통용되는 회취법(灰吹法)과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이렇게 제련된 단천(端川)의 은(銀)은 당시 중국(고려)은(銀)이나 일본(멕시코)은(銀)보다 순도가 훨씬 높았다고 하는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산업혁명의 진실


사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유럽인들의 신분이 완전히 탈바꿈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들의 일천한 신분인 해적에서 해양사람으로 변천하고 대항해시대를 거론하는 선진문명인으로 신분이 상승하고 뒤바뀐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 고려(高麗)라는 실체이다.

고려는 동양아시아인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문명인들의 집합이라고 봄이 옳다.

글쓴이는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하고 있지만 절대로 동양인인 한반도인만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면 세계라는 명칭을 스스로 부여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高麗)를 이끈 핵심세력이 반드시 백인 서양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확고함도 있다.

고려의 금속활자발명과 종이발명에 대한 이야기를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 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에서 밝혔던 바가 있다.

고려를 중국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근대산업문명역사 변천에서 가끔 기존역사에 마취되어 진의를 분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엉터리 지식에 의해 각인되어 마치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하고 있는 것은 산업혁명이 서양인들의 전유물로 비춰게 한다는 사실이다.

서양인들은 유럽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입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절대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독립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1775-1783)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상대로 치러진 것이 아니라 만약 동양문화주체인 조선(朝鮮) 즉 코리아(COREA:US)와 대결로 기록하게 했다면 현재 미국역사는 화이트(White)즉 서양위주의 역사로 만들어질 수가 있었을 것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고려가 금속활자를 처음 발명을 했다는 사실은 서양인들도 공히 인정하는 바다.

금속활자 발명은 종이 발명에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금속활자는 서양인 신분을 탈바꿈하게 한 도구 신문을 탄생하게 하였다.

어떤가.

바로 서양인들의 전유물이 된 기록이란 역사의 시초가 종이와 금속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를 고려라고 하지 않았을 만정 유나이트 고려(高麗聯邦)임에는 틀림없다.

마치 고려는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그레이트 브리튼이고 조선이 여기서 분리된 것과 같다.

어쨌던 서양사에는 조선을 미국(美國:US)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시대적으로 고려가 조선의 상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당시 조선(朝鮮)을 프랑스화 하였던 것으로서 고려는 그대로 존속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이다.

영국이라는 틀은 무척 거대했다.

여러가지 역사성에서 복합적인 문제가 모두 영국화되었다.

동양문화역사까지 포괄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시리즈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글을 보더라도 분명 조선(朝鮮)은 프랑스(FRANCH)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들은 세계사에서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의 뒤섞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고려금속활자발명에 의한 인쇄술발달은 역으로 왕권 전제정치(專制政治:despotism)의 끝을 보게 했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고려가 퇴보하고 조선이 부각된 것이다.

이것은 백인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쇄술발달은 기계산업 발달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프랑스혁명(1789-1794)은 산업혁명(産業革命)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 부르몽왕실(House of Bourbon)의 비밀스러움이 수많은 종이 찌라시에 담아 적나라하게 노출되게 한 것이 바로 이 인쇄술 발달이 가져다 준 것임이 틀림없고 루이16세가 성불능자로 알려지거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요부로 그려진 그림들이 세상에 급속하게 퍼져나가 일시에 왕실의 위엄이 크게 실추되었다는 사실 등은 산업발달과 함께 나타나는 변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대중들은 기존 왕실에 대한 존경심보다 반감이 높아지게 되고 왕실을 보는 여론들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왕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대중적 비판 도마 위에 올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전제정치의 끝을 보게 만든 핵심이다.

이에 더하여 갑자기 제왕보다 더 힘이 강해진 자본앞에서 재정고갈에 대한 책임은 노출된 제왕에게 모든 활살이 쏟아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이러한 원인들이 프랑스혁명을 촉발시키고 반 작용하였다고 분명하게 근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숙종, 영조, 정조시대에서 기존 한반도사는 물론 소중화 사상에서 나온 문화가 배경이 되었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 발전과 함께 질서의 변혁이 이루어지고 경세적(經世的)인 측면과 봉건수취체제의 변혁이 특징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이러한 인쇄물들은 어쨌거나 종전에 볼 수 없었던 고속능 금속인쇄기에 의해 인쇄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서양사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금속으로 이루어진 인쇄기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굳이 1795년경 영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실도 어찌 보면 영국을 산업혁명에 상징화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금속활자를 누가 발명을 했는가.

고려(高麗)라는 역사주체를 서양인들이 배제하고 싶겠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로 심장(core)에 새겨져 있다.

고려는 하나의 체제를 구가하는 “COREA”라는 사실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타고르가 부르짖던 고국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COREA”는 스코틀랜드이어야 하고 로마노프왕가일 수 있으며 또한 스페인이라고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런 왕가들이 현재 국가가 되어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는 사실에서 복잡한 문제가 있다.

특이한 것인 유럽왕실이 국가로 나눠져 있지만 따져들어가보면 왕족들이 전부 먼 친척뻘이다.

영국의 왕가의 계보가 끊겼을 때 스코틀랜드왕가가 대신 이어갔다는 것은 서양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삼한역사 사실들이 전부 백인계 영국화(西洋化)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사실상 잉글랜드가 영국(英國)이라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

신세계(新世界)와 신대륙(新大陸)역사를 전제하면서 1776년 태동했다고 하는 기독교와 백색인종만의 미국역사는 근세기에 급속하게 변질된 것이다.

하나의 역사를 동양사와 서양사로 이분한 것은 명확하게 유럽사를 만들기 위함이다.

동양사(東洋史)는 아시아대륙을 근거로 신중국과 한반도조선, 열도일본구도로 만들고 그 구도에서 마저도 삼한역사는 절대로 한반도 북쪽 압록강을 한계선으로 제한하고 영토를 넓힐 수 없도록 강제하면서 한반도역사에 가두어버렸고 대신 대항해시대부터 숙명적으로 열도주체들은 일본(日本)이란 아시아 국명을 사용을 허가하면서 그들의 민망스러웠던 민낯의 역사를 대신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인들은 수학적 확률에 의한 한쪽의 이득과 다른 쪽의 손실을 더하면 제로(0)가 되는 제로섬게임(zero-sum game)방식을 세계사에 적용하면서 5천년 유구한 역사라 하지만 조공역사(朝貢歷史)로 떡칠하게 하였고 본래부터의 찬란한 자주성과 자립성을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반도를 한계로 하는 왜구침탈역사를 만들면서 일본식민지를 정당화, 사실화하였고 노예근성을 심기에 혈안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서세만의 우월역사 유럽사를 만들기 위한 삼한역사 빼기 작업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세계삼한역사이며 이 공간을 서세가 차지하는 제로게임의 핵심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이다.

솔직히 오늘날 영국역사는 유럽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들은 오리엔탈문화를 세계역사가 아닌 아시아대륙에 한정시키고 아시아역사화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영국경제학자이며 역사가인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1852~1883)가 프랑스혁명 후 100년이 흐른 시점인 1894년에 그의 저서 “18세기 영국에서의 산업혁명<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글에서 영국을 강조하였지만 스스로 영국 만들기의 일환에서 나타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실제로 프랑스학자들에 의해 가장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가 있다.

이에 대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사실이다.

산업혁명의 파고가 마치 서양인들에 의해 18세기 말엽부터 조선(朝鮮)중심부로 들어간 것처럼 만들지만 실제로 그들이 거주한 곳이나 아시아 조선이라고 지칭한 곳은 아메리카대륙 동부(東部)에서 서부(西部)로 옮겼을 뿐이지 결코 그들이 이동한 곳은 현 아시아대륙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세계삼한역사가 존재하는 하나의 체제, 중심부로 들어간 세력일 뿐이다.

과거 특히 본 블로그 글에서 18세기때 서양인들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국 땅으로 가는 태평양(太平洋)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로"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이란 글이다.

그만큼 낙후된 지도상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1667년에 지도제작자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이 그린 버지니아지도에 분명하게 중국바다와 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 하고 그것을 지금의 미시시피강(江)으로 표시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밝혔다.

결국 그들의 활동지역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이다.

서양인들은 이 미시시피강(江)을 거대한 바다(海)라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당시 수많은 이양선(異樣船)들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출몰했다고 조작한 것은 이와같은 것이며 그러한 이상한 역사착오가 현재 돌이킬 수도 없는 한반도역사로 둔갑했다는 사실을 이제 기억하고 명심해야만 한다.

다시말하지만 한반도 역사는 서양인들의 우월한 유럽사를 만들기 위해 엮어놓은 축소된 역사이다.

때문에 결론적으로 산업혁명이라는 것은 최소한 서세(西勢)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체제라고 하면 기존 토지가 불변성 하드 자본(immutability Hard capital)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한 농업과 수공업, 상업으로 이어지는 산업이 주류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계발달에 의한 산업혁명(産業革命)이 발생하면서 유동성 소프트 자본(liquidity soft capital)인 공업과 기계를 사용하는 제조업 위주의 경제로 변화하는 과정은 종전에 생각 할 수도 없는 이문(利文)과 이문에서 생성되는 이자(利子)라는 개념에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서세들은 이용하였고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富)의 원천이 한정된 토지(土地)가 갖는 가치보다 그 토지를 헐값으로 매입하고 매장된 천연자원의 사용할 수 있는 무한의 권한을 확보함에 따라 기계를 이용한 상품(商品)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이윤(利潤)과 이식(利息)을 창출하고 거대한 부(富)를 축적한 자본주(資本主)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자본주들의 과거 제정왕권의 왕을 대신하는 구조로 사회권력구조가 변천되고 이것을 보호하는 법과 질서가 생성되면서 이는 새로운 제국주의 개념이 싹터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과거 제정왕권을 자본을 무기로 하면서 권력을 강탈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거대한 자본주의 출현은 안타깝지만 하나의 체제로서 굳건했던 세계삼한역사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모든 권한을 위축되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자본에 의한 물질만능주의는 과거나 현재나 이기심을 자극하고 자기 것에 집착하게 만들면서 계층 간의 갈등, 집단 간의 갈등, 인종, 종교, 지역갈등 등 평소에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부분에서 이기주의 형태나 나타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이 당시 국가관이나 역사관을 흩어 놓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며 결국 하나의 체제에서 사회 각 계층 간 통합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부각되면서 체제의 소속감을 위축시키고 정신적 통합을 방해했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분열된 사회상황에서 그것에 대한 어두운 단면을 충분하게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철도산업와 자본주의


전기 했듯이 실제로 철강산업이 발달한 곳은 영국 잉글랜드섬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해야 맞다.

그것은 현대 산업발달의 근원지가 어딘지 분명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이야기하고 각종 기계발달을 염두에 두는 것에서 현 잉글랜드 섬은 경제를 활성화하기에는 거대한 대서양이 가로 막아 운송문제와 이동문제로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잉글랜드 섬에서 증기동력발달이 시초하여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이전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말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어디쯤 영국인들이 활동한 모든 역사를 잉글랜드 섬으로 가지고 들어갔을뿐이다.

철강산업(鐵鋼產業)발달의 요인은 두 말할 것이 철의 수요가 급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19세기 중반부터 바로 철도산업이 활성화된 이유를 찾을 수 있고 동시에 선박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것을 위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국제금융조직체들이 만들어졌고 그것에 의해 남북전쟁이 기획적으로 발발했다는 오해소지가 적지 않다.

무기산업(武器産業)발달은 이러한 것들을 한꺼번에 완성시켜버린 것이다.

때문에 산업혁명은 지금의 잉글랜드 영국에서 발단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이었다는 말을 되집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증거는 아래 아래 그림<북미 철 생사관 석탄 생산도>에서 뉴잉글랜드 내에 철 생산지가 폴리머스와 필라델리파에 표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곳은 뉴잉글랜드 지명 내에 속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잉글랜드가 오늘란 섬나라 잉글랜드로 탈바꿈한 것이다.


철도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생성된 바로 골드러시(gold rush)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골드러시가 잉글랜드 섬에서 시작된 것은 결코아니다.

본 블로그 글 “골드러시(gold rush)와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6 “에서 밝혔듯이 북미대륙에서 처음으로 금(金:gold)이 발견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처음 1820년 말 영국인들의 개척지인 조지아주(Georgia)달로네가(Dahlonega)근처에서 금(金)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후 금(金)을 채굴하기위하여 토착인을 쫓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였고 그것을 위해 가변성의 미국정부는 1830년에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강행하였다는 사실과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gold rush)는 본격적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무한정 인구이동을 발생시켰다는 사실등을 알 수가 있다.

당연히 이를 위한 운송수단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대륙횡단철도(大陸橫斷鐵道)와 바다로 항해가 가능한 철로 만든 선박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 "에서 살펴보았듯이 골드러시가 발생하면서 이 서부의 소식이나 금(金)을 이송하는 수단으로 우편수송선이 인기가 있었고 1848년 윌리엄 헨리 애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1807-1875)에 의해 초보적인 스팀선인 1,000톤급 규모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을 건조하면서 그것으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를 설립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운항로를 파나마(panama)와 오리건(Oregon)사이로 정하면서 우편배달과 기물 또는 금(金)을 수송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현재 한반도인들이 착가하는 것은 이 외륜선을 마구 대양을 넘고 횡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선박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 외륜선은 연안용에 불과하고 강을 횡단하는 규모일뿐인 것이다.

그러자 금광소문이 동부에 이르고 육로보다 서부로 들어갈 수 있는 운송방법을 찾으면서 처음 파나마(Panama City)에서 콜론(Colon)까지의 파나마철도가 필요하였고 결국 1850년대 건설을 시작하여 1855년 1월 28일에 완성한 러시아궤(1,524mm)의 파나마 철도(Panama Railroad)가 부설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 러시아궤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와 중앙아메리카 시설된 철도에서 주도된 것은 당시 러시아라고 불리어지는 로마노프왕가 즉 유나이트 고려(United Corea)가 주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동부에서 연안수송선을 이용하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마침내 캘리포니아(California)주의 세크라멘토(Sacramento)에서 네브래스카(Nebraska)주의 오마하(Omaha)를 잇는 길이 2,826km의 첫 대륙횡단철도가 1863년에 시작하여 6년간의 공사를 거쳐 1869년 완공되었다.

그렇게 되자 연안수송선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는 높은 수익이 반감되면서 새로운 해운사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서부에서 불어되는 골드러시는 많은 화이트를 이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185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속화폐유통량이 1860년에는 2억5,300만 달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자본은 미국연방국채의 46%, 주채권58%, 미국철도채권26%를 잠식하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영토에서 생산되는 금(金)을 보유한 원인으로 작용하다.

이때부터 영국자본이 바로 국제금융재벌이 되어 이 모든 자본구조를 좌지우지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유대인 금융재벌가인 로스차일드(제임스 로스차일드 아들)이며 그는 18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남부와 북부를 충돌하도록 진두지휘했다고도 알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잉글랜드는 로스차일드의 개인소유의 섬처럼 인식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비롯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을 터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고 영국자본이 이 골드러시를 지배했다고 알려진다.

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국제금융이란 조직은 분명 영국자본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영국의 정체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영국의 본거지를 자꾸 잉글랜드 섬이라고 하니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국제금융과 영국자본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대륙 횡단 철도 노선을 둘러싼 북부와 남부의 오랜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남북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북부 노선의 채택으로 해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당시 미국정부는 철도 부설 부지로 엄청난 면적의 소유가 분명치 않는 모호한 국유지(國有地)를 철도회사에 주는 방식으로 도왔다고 하였으며 더군다나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나서 막대한 액수의 보조금과 융자금까지 철도회사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으로 자본을 무기로 한 영토 착취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래 영토 소유권을 가진 역사주체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인가. 아니다.

이 당시 철도회사들이 철도건설을 이유로 공여 받은 땅은 미네소타(Minnesota:225,181km²)주와 워싱턴(Washington:184,827km²)주 전체면적의 4분의1, 위스콘신(Wisconsin:169,639km²)과 캔자스(Kansas:213,096km²)주의 5분의1, 캘리포니아(California:423,970km²)의 8분의1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반도 전체 면적이(220,847km²)이라 할 때 실로 어마어마한 넓이의 영토를 철도회사들이 좌지우지 했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것에 더하여 착취한 땅에서 바로 매장된 금(金:gold)과 각종광석, 석탄, 삼림자원 등을 얼마든지 환금할 수 있는 자원이기 때문에 결국 전부 어부지리로 얻어 채굴하거나 탈취하여 철도로 이송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은 것이니 일개 회사가 아니라 거대한 자본제국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당시 어수한 경제환경인 것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수치의 계산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늘 의문스럽게 생각하던 삼한역사실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거나 순식간에 통째로 분해되어버린 것 같은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고 조선 말기에 지속된 경제 불황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엄청난 재정압박이 동반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2016-03-02 서울신문]인터넷판에 따르면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가 펴낸 ‘조선 후기 왕실재정과 서울상업’(소명출판)이란 제목의 글에서 18세기 말부터 갑오개혁(1894년)을 거쳐 20세기 초까지 120년 동안 내수사와 궁방(왕실 조달기관)중 수진궁 등 1사 7궁이 작성한 회계지출장부 초본(草本)등을 데이터베이스(DB)화해 분석한 결과 왕실재정규모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상에 밝혔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으로서 조선말기 왕실은 정부재정의 20~30%를 차지하는 재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채무 불이행상태로서‘거대한 빚쟁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고 있다.

당시 미국(US)정부의 1895년 재정수입(Government Revenue in the US)을 보면 연방세수(Federal Revenue) $401.7(million)백만불, 주(州)세수(State Revenue) $134.0(million)백만불, 지방세수(Local Revenue) $603.0(million)백만불을 총합한 세수입 ‘$1,138.7’으로 나타나 11억3천8백7십만불($)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300조억원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경제구모라 할 수 있다고 풀이된다.

오늘날 대한민국 1년 예산과 막먹는 것이다.

이것의 20%가 왕실재정이라 할 때 당시 화폐기준으로 $227.54(million)가 되며 현재 위 뉴스기사내용에서 대한민국 예산을 기준으로 조선왕실재정규모를 60조원가량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이러한 사실들이 매우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재정규모임에 틀림없다.

당시 조선이 미국정부재정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1895년 기준으로 현재 달러가치상승과 오늘날 달러와 원화환율을 적용해야 번거러움이 있어 생략한다.



그렇다면 당시 최소한 미국연방정부차원에서 코리아란 개념을 우리가 알 필요성이 있다.

위 전투깃발은 시대적으로 위 상황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소위 미국남북전쟁 동안 북부(Union’s)의 북대서양 봉쇄 소함대 함장이며 메릴랜드 출신인 존 로저스(John Rodgers)의 소유로서 로저스 소중대(Rodgers’ squadron)가 1861년 버지니아의 제임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서 그의 철갑선에 남부 동맹 군인(Confederate soldiers)들의 포탄 공격이 가해질 때 사용하던 깃발이라 하였으나 또 한편으론 현재 한반도 역사에 맞춰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시기에 북군 해병대가 한반도 강화도 공격 때 사용하던 깃발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당시 “US”란 체제에서 북군이나 남군 모두가 코리아(COREA)란 명칭을 사용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바로 위 그림사진처럼 US 국기에 코리아(COREA)가 새겨진 현실적인 내용을 먼저 풀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생각해보면 미해병대가 신미양요에 한반도 강화도에 출현하여 공격할 때 사용한 깃발이라고 더 이상확대해석을 막고 있지만 국기에 새겨진 13개 별표식과 사이 공간에 촘촘하게 새겨진 코리아란 명칭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위 국기 13개의 별과 같이 13주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코리아 왕실이 미국연방재정지원을 받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서 역설적으로 “COREA” 영토 내에서 자원이 될 만한 땅들은 모두 서양인들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이윤문제와 이익문제에서 서양인들이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고 할 때 당시 서양세력들이 개입한 사건들은 모두 자본경제이치에 부합하는 원인이 제공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어 남북전쟁 역시 어떤 국가주의적 충돌이 아니라 남북첨예한 경제논리에 의해 충돌이 야기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자본주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1890년에 휘그당(공화당)출신인 존 셔먼(John Sherman,1823-1900)에 의해 제정된 연방법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에서 들어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부당한 거래 제한을 금지’와 ‘부당한 독점을 금지’를 강제하는 법으로서 수평적 거래 제한(horizontal restraint) 또는 수평적 카르텔(horizontal cartel)이라 하여 상품가의 합의, 시장분할, 생산량제한, 또는 공동보이콧 등으로 공모행위를 정부차원에서 금지하는 것이니 만큼 고려연방정부가 이에 대한 출구찾기에 많은 고심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법의 전반적인 요점은 자본주에 의한‘독점력’(monopoly power)에 제동을 걸고 독점력 자체가 불법이라는 기준을 마련했다는 의미가 큰 것으로 처벌을 보면 법인이라면 1,000만 달러 이하의 벌금, 개인의 경우에는 35만 달러 이하의 벌금 또는 3년 이하의 징역과 같은 강력한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한 것은 그만큼 독점력을 당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위험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누가 위험을 느꼈을까?

자본주의에 물든 서양인이었을까?

아니다.

오늘날 한반도 경제사정도 이와 같은 것으로 재벌지배구조가 독점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재벌특혜와 순화출자를 허용하고 있는 것도 옛 시장형태와 다르지 않고 세습경영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재벌이 주는 사회전반적인 반작용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를 새삼느끼게 하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그나마 보편적인 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자본주를 동원한 서양재벌들의 막후 로비활동을 감안할 때 이러한 법을 제정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물론 재벌과 지주들이 이 법에 반발했다고 알려지지만 이 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대통령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이란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이 법으로 거대한 자본주인 당시 석유왕 록펠러(Rockefeller, John Davison:1839~1937), US스틸사의 모태인 카네기철강회사를 설립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1835-1919), 그리고 금융황제 모건(J. P. Morgan:1837-1913)을 적극적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의 정치성을 보았을 때 역사주체가 받았을 불리함이 어느정도였을 것인지가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8"에서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당시 거대한 자본주 중 존 피어폰 모건(John Pierpont Morgan:1837-1913)의 예를 자료에서 빌리면 북군에게 카빈소총을 1정당 3.5달러에 사들여 다시 북군에게 1정당 22달러에 되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알려지니 그에게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나 국가관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개성상인이 이와같을 것인지에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미 재벌이라 함은 국가관을 그들에 기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당시 루스벨트 재임기간인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동양사와 서양사 모두에게 이와같은 상황에 빠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발생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어쨌던 당시 미국사회(US)체제에서 이 같은 재벌제한법이 있었다는 것은 완전한 자본주의체제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금융자본 (US, financial capital)은 그 만큼 당시 재벌에 의한 독점적 공모가 비일비재하였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따져보면 이와같은 불합리가 횡횡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미개척지가 많았던 만큼 영토와 영토 간에 이동 수단이 없었던 시대와 달리 그것들을 상호 연결시킬 수 있는 확실한 이동수단이 존재한다할 때 경제논리로 토지의 가치가 상승될 것이 뻔하다.

노동자들이 선로를 닦으면 바로 기관차가 자재와 이주민을 실어 날랐을 것이 뻔하고 기관차정비공장과 터미널, 음식점과 호텔이 생겼으며 이러한 이동수단을 이용하여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은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지역철도를 연장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철로 옆에는 최첨단 통신수단인 전신주가 가설되어 이동수단발달은 물론이고 통신수단까지 몰라보게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토지가격이 상승하는 부분의 가치는 기존 토지소유자가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당시 미국정부가 할양한 토지는 선후가치가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에 의해 상승된 가치만큼 미국정부는 세금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고 재정이 급기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었을 것이며 재정고갈에 애를 먹던 하나의 주체도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1년 사이 격변기간에 살펴보아야 할 것은 동서양 역사관계이다.

첫째로 의문스러운 것은 1860년 분명 북경조약(北京條約:Convention of Peking or First Convention of Peking)을 체결케 한 영불연합국이 북경을 점령했다고 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나 철종이 1860년에 경희궁으로 천궁하게 된다는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같이 볼 수 있는 문제임에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질 않는다.

북경이 어디에 있었던 간에 지배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었던 충분한 조건이다.

이러한 현상을 예상치 못한 기존 토지소유주들은 미국정부가 주는 보상금만으로 만족해야 했고 자본체제에 따른 토지매매원칙에서 자연스럽게 기존토지들은 철도회사에게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시에 소유자가 교체된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

후에 미국의회가 주도된 미국정부는 거둬들이 세금으로 다시 철도회사소유주들에게 영토를 환원 받는 수준에서 서부 개척시대를 용인한 것이라고 할 수밖애 없다.

결국 상황이 이러하다면 솔직히 기존 영토개념이라는 것은 아무런 권리행사의 방어책이 없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환원 받은 토지에서 각종 광석자원들을 확보하고 더욱 재정규모를 증대시켰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19 세기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이 영토를 취하는 것에서 보면 거의가 그냥 넘겨주고 넘겨받는 식의 할양(割讓)방법을 취하였다는 사실에서 상당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이러한 구조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미국역사는 남북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전쟁 또한 각종 무기를 생산하고 철도를 이용하여 각종 무기를 이동시켰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남부가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자, 미국(US;united states)의회는 1862년에 유니언 퍼시픽 회사(Union Pacific Railway)와 센트럴 퍼시픽 회사(Central Pacific Railroad)의 설립을 인가하였고 유니언은 네브래스카의 오마하(Omaha)로부터 서쪽으로 공사를 계속해 나가게 하고, 센트럴 퍼시픽회사는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Sacramento)로부터 동쪽으로 공사를 해 나가도록 하였으며 두 회사는 남북전쟁이 끝난 지 4년이 지난 1869년에 유타의 프로몬토리 포인트(Promontory Point)에서 만남으로써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었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남북전쟁 전까지의 미국철도 총 길이는 약 30,000마일(48,280km)에 달하게 되었지만 1900년에는 거의 20만 마일(321,868km)에 이르면서 세계 철도의 40%를 차지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지구둘레의 길이가 40,075km 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지구둘레 길이의 8배가 넘는 철도를 개설하고 그것에 소요되는 철강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엄청난 철로가 필요한 철강이 얼마나 소요되었겠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철로를 달리는 기관차를 생산하기 위한 철강은 또한 얼마나 소요되었겠는가.

참으로 어마어마한 산업규모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철강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련(製鍊smelting)이라 하였다.

제련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광석을 녹는점 이상의 온도로 가열해야 하는 수단과 연료가 필요했을 것인데 미국에서 철강산업이 발전하는 주요한 원인으로서 첫째 원석(原石)을 확보할 수 있는 광산(鑛山:mine)이 가까이에 석탄이 있었다는 사실과 제련(製鍊)공정을 원활하게 하는 연로 즉 석탄산업(石炭産業:coal Industry) 또한 철강산업지역과 맞물려 공동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석탄산업 발달 역시 미국에서 가장 초기부터 발달된 곳은 바로 애팔레치아산맥 중북부이다.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오령(五岭)을 버지니아주 동부에 위치하는 로어노크벨리(Roanoke Valley), 뉴리버밸리(New river Valley), 홀스턴리버벨리(Holston river Valley), 테네시벨리(Tennessee Valley), 쿠사벨리(Coosa Valley)라고 보는 것은 무리일까?



마무리(뉴잉글랜드와 생여진)



뉴잉글랜드는 위 지도에 보듯이 매사추세츠 주, 코네티컷 주, 로드아일랜드 주, 버몬트 주, 메인 주, 뉴햄프셔 주의 6개 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령이라고 할 수있는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 Mountains) 동북부이다.
바로 석탄(石炭:coal)생산지인 애팔래치아이다.

서남부에 있었던 숙여진(熟女眞)과 동북부에 있었던 생여진(生女眞)은 바로 고대 잉글랜드(앵글족) 또는 게르만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숙여진은 오래전부터 거주했다는 명칭이며 생여진은 그후 새롭게 생성된 여진이라는 말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뉴잉글랜드가 생여진(生女眞)이라 하였다.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6"에서 여진어는 고대 영어라고 하였다.

고대영어는 게르만어와 맥을 같이한다.

2012년 본 블로그 글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는 화부(華府)와 미경(美京), 화성돈(華盛頓)으로 불렸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2"에서 북아메리카 미국 북동부지역에 있는 메인주(State of Maine)의 머리모양이 한반도 두만강 쪽 북부를 보면 닮은꼴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실제로 그곳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의 북부고원지대라 할 때 그 곳은 뉴잉글랜드라고 하는 지명과 함께 여진족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아마도 동부해안은 유럽인(해적)들의 출몰이 잦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곳 어디에 윤관(尹瓘:1040-1111)의 동북 9성(東北九城)이 세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판단과 주장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본래 여진족이라는 개념도 여진어가 거란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영어가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고 영어 또는 프랑스어를 포함한 북게르만어를 사용하던 세력들이라고 감히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며 본 블로그 글 "흰 매(海東青 gyrfalcon)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5 "에서 요나라가 여진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고려(高麗)가 여진족을 동원하여 요(遼)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한바가 있기 때문에 동북 9성(東北九城)에 들어가는 공험진(公嶮鎭)역시 한반도 함경북도 모양과 닯은 꼴인 애팔래치아산맥 북부고원 메인주(Maine) 어디쯤에서 찾아야 할 것임을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 생산된 철이 섬나라 잉글랜드가 되어 철생산을 주도했다고 알려진다는 것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위 그림 <미네소타 주 철 생산지>에서 생산되던 철 생산 비율이 미국전체에서 약 70~80%를 차지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철생산량과 이송상황을 알 수 있는 위 그림을 보면 주요광산이 (1)메사비산지(Mesabi range), (2)마켓산지(Marquette range), (3)메모미니산지(Menominee range), (4)고기빅산지(Gogebic range), (5)버밀리온산지(Vermillion range) 등이다.
(1)메사비산지(Mesabi range)는 미국 제1의 철광산지이며 홍적세(世)의 대륙빙하에 의한 빙하호(湖)가 많이 있다. 광산은 메사비 ·버밀리언 등지를 비롯하여 매우 많으며, 철 함유량 55%의 적철광 광층의 두께가 최대 150m에 달한다. 1887년에 광맥이 발견되었으며, 1892년부터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2)마켓산지(Marquette range)는 1846년 부근의 산지에서 철광상(鐵鑛床)이 발견된 후로 철광석과 목재를 선적하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1849년 우스터라는 촌락이 들어서고 이후 자크 마르케트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1859년 읍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가 급속히 복구되어 1871년 시가 되었다.(3)메모미니산지(Menominee range)는 1796년 이곳에 모피교역소가 설립되었다. 제재업은 1832년 시작되어 1890년대 최고전성기를 맞았고 1930년에 끝났다.(4)고기빅산지
(Gogebic range)는 철광과 키위노 구리광이 있으며 니켈과 은도 많이 산출, 1883년 인근에 있는 고기빅산지에서 거대한 철광석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급속히 발전, 미국 철광 생산량의 75%를 차지하며, 고기빅은 이 지대 총산출량의 3.5%를 차지한다. 예전에는 주로 고품질의 적철석(赤鐵石)을 산출되었다. (5)버밀리온산지(Vermillion range)는 1835년 버밀리언 요새가 원주민과의 교역소로서 설립되었는데, 1859년 인근에 영구 거주지가 세워졌다. 1881년 홍수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마지막 광산은 1964년에 닫았다. 지명은 강변의 흙이 주홍빛(vermillion)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고 여기서 생산되는 천연안료는 중국에서 BC 3000년경에 이미 알려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철의 이송방향이 전부 뉴잉글랜드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철기 문화는 한나라 시대 이전 것으로 보이는 주조 철기가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기원전 3-4세기 무렵부터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다.

그러나 고대 중국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 것은 바로 ‘철기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즉 ‘철기’의 ‘철(鐵)’ 자는 금(金)과 동이의 이(夷)를 합쳐 만든 글자라는 사실이다.

철은 동쪽에 살고 있는 동이족이 생산했다는 말과 같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후고려에서 이를 흑금(黑金)이라 한 사실도 검다, 검은 빛이 있고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히타이트(Hittite)민족이 잔인하고 난폭하다는 것도 철(鐵)에 의미에 포함된 것이다.

철의 의한 금속주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무기를 제조하여 전투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 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중국은 신중국으로 오인될 수가 있다.

고려시대보타 조선시대가 철의 제련기술이 발달되는 것은 당연하다.

유명한 ‘만리장성’도 중국 진나라 때 중국이 동이족과 흉노족의 공격을 의식해 쌓았다는 사실도 철기 제조 기술을 지닌 동이족이 중국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현재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중앙아메리카대륙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반도의 철기문화는 가야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데,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은 통치 기반을 갖추면서 벼농사 등 농업과 수산업을 비롯해 제철업을 일으켜 백성들이 풍족하게 생활하게 하였는 기록과 김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왕들은 양산, 동래, 마산, 진해 등지의 철광과 낙동강에서 나는 사철을 이용하여 철을 생산해 쇠도끼, 쇠창, 쇠화살촉, 쇠침, 철칼, 철 낚시바늘, 쇠갑옷을 만들어 완전한 철기시대를 열었다고 알려진다.

‘삼국지 변진조’에 보이는 마한, 예, 왜와 대방 등이 가야를 찾아와 철을 수입해 갔고 돈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이미 당시에 철 수출국으로 자리잡은 가야의 철 생산능력과 국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야를 어디로 볼 것인가는 앞으로 연구할 대상이지만 현재까지 미루어짐작하는 것은 바로 남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경북 고령군 지산동의 가야 시대 고분에서 발굴된 철제 투구와 갑옷을 봐도 철을 다루는 가야 사람들의 수준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반도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을 한반도에 국한한 것이다.

또한 신라는 진한에 소속된 사로국에서 출발한 작은 나라였으나 풍부한 철광석과 철 생산시설을 바탕으로 7세기 삼국을 통일한다고 되어 있다.

철의 왕국인 가야를 합병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있는 저력은 한반도 신라에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철기 문화의 발달이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황룡사 장륙존상‘을 들고 ’장륙존상‘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진흥왕이 왕권의 위엄과 야철기술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고 만든 무게가 무려 21톤이나 나가는 동양 최대의 철불로 당시 인도, 중국, 동남아 국가 등도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고 여러 번 애를 썼으나 모두 실패하고 신라만 성공했다 하였다.

장륙존상(丈六尊像)도 따지고면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皇龍寺)전체가 소실되면서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과 함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기는 한지만 본질은 우리에게 머나먼 이야기다.

그러나 사라지고 있던 없던 간에 당시 신라의 제철 기술이 동양 최고 수준이었다는 것을 자타가 증명하고 있으니 그것은 철강산업의 근원적인 역사를 증명해 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계삼한역사에서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생활용기나 무기 등으로 철기의 사용 범위가 확대되자 신라에서는 철기를 소유하는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하는 등 사회계층의 분화가 일어났고, 철기를 다루는 신라의 장인들은 철저한 골품제의 벽을 뚫고 어렵지 않게 4~5 두품의 신분을 확보하기도 하였다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철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철강산업을 계획적으로 육성하고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국력이 강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한반도 역사는 한반도의 주인으로 만족해야만 한다고 선을 긋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이에 대한 유적과 유물보다도 더 많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들은 우리에게 바른 역사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서 글을 맺는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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