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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트(Stilts)는 삼한인(COREA)들의 전통놀이
글쓴이:한부울
1. 개요
2. 한반도 사서(史書)기록과 한성부
3. 중국사서(史書)기록
4. 서양에서 말하는 스틸트(Stilts)대마놀이
5. 코리아와 삼한고려에 대한 인식
6. 서커스와 코리아 기예단
7. 서양인들이 보았던 COREA 와 마무리
1.개요
스틸트(Stilts)가 무엇인가.
스틸트(Stilt)의 "s" 가 붙은 것은 한 쌍을 말하고 그것을 우리말로 대말타기 또는 죽마(竹馬)라 하는데 형상은 사람이 발을 딛딜 수 있도록 하는 받침대가 달린 대나무로 만든 막대이고 한 쌍의 막대를 죽마(竹馬)라 하며 단어에 "s" 가 붙어 스틸츠(Stilts)로 발음된다.
또한 스틸트(Stilt)는 수상건물의 지면과 수면 위로 떠받치는 기둥 즉 지주(支柱)를 말하기도 한다.
이 죽마(竹馬)는 근대에 들어 a circus performer on stilts 서커스(circus)의 한 종목이 되었다.
먼저 스틸트란 무엇인가에 대해 본 블로그 "스페인 독감과 역사 재해석 https://han0114.tistory.com/17050854 의 소제 '6. 스페인 독감과 세계삼한역사'편에서 잠시 알아보았던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이 스틸트를 "죽마(竹馬)", "대말타기", 혹은 "죽마장대말타기"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불교신앙의 대상인 석탑(石塔), 범종(梵鐘), 불상(佛像), 사찰(寺刹)에 대한 기록 권3, 탑상편(塔像篇)에 보면 “대말 타고 잎 피리 불며 놀던 아기, 하루아침에 어여쁜 두 눈 잃을 줄이야.”라고 읊조린 시가 있다.
고구려 고분인 강서(江西) 수산리(修山里)나 팔청리(八淸里) 고분벽화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죽마놀이가 대중적으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백과사전에서도 말하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목은집(牧隱集)이나 조선시대 임제(林悌:1549-1587)의 글에서도 ‘죽마’를 인용한 기록이 나오는데 “옛 고향에 왔으나 죽마 타고 함께 놀던 동무들 간 곳 모르고, 반갑게 맞아주는 이 하나도 없다.”라는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죽마놀이가 전승했음도 알 수 있다.
이 '죽마놀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나타난 어린아이들이 놀이인데 평안도 대동군(大同郡) 팔청리(八淸里)의 고구려(高句麗) 벽화고분(壁畵古墳)과 남포(南浦) 수산리(修山里)의 고구려(高句麗) 벽화고분(壁畵古墳)에, 높은 대말(竹馬)을 타고 걷는 모습까지 보인다.
[사진]고구려 팔청리 무덤과 수산리 무덤 벽화에, 높은 대말을 타고 걷는 모습
[네이버 지식백과-대말타기:김광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특히 팔청리 고분에는 키만한 장대에 발을 묶고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허리를 조금 구부린 채 가슴을 펴고, 옆으로 내뻗은 팔 끝의 손을 위로 세웠으며, 다른 팔은 반으로 접었다.
수산리(修山里) 벽화의 주인공도 두 팔을 벌려 춤을 춘다.
그 아래의 죽방울을 죽방울채로 감아서 이리저리 돌리며 노는 "죽방울 돌리기"와 수레바퀴 돌리기의 묘기도 볼거리 하였으며 이것은 흔히 일정한 거리 다녀오기를 겨루지만, 뒤로 걷기, 껑충껑충 뛰기, 밀어 넘어뜨리기 따위도 벌이며, 편을 갈라 이어달리기도 하고 올라타기하면서 노래도 부른다고 하였다.
이것들은 아래 중국사서편에 고교(高蹻)라 하는 것이고 한반도 사서에는 이를 죽족(竹足)이라 하였다는 것에서 전체가 비슷한 형태로 전승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2. 한반도 사서(史書)기록과 한성부
아래는 우리나라 사서(史書)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순조3년(1803)4월 12일 병자 2번째기사에서
순조실록 5권, 순조 3년 4월 12일 병자 2번째기사 1803년 청 가경(嘉慶) 8년
[영의정 이병모가 현도(縣道)를 통해 자신의 결백을 상소하다]에서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지방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변(世變)이 겹쳐 발생하고 간흉배(奸凶輩)들이 나왔으나, 정후겸(鄭厚謙)이 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은 세상에서 모두 알고 있는 바인데, 어찌 신의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홍국영(洪國榮)·서유린(徐有隣)·서유방(徐有防)·윤행임(尹行恁)이 혹 처음에는 나라의 편, 국변(國邊)이 되었고 혹은 죽마(竹馬)의 고우(故友)와 각료(閣僚)의 구의(舊誼: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정)로서 신이 모두 서로 친하게 지냈었습니다."란 기록이 있다.
때는 정조사후 어린 세자가 즉위하고 정순황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정조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를 숙청하는 과정에 있었던 시기에 영의정 이병모(李秉模:1742-1806)가 거론한 벽파 정후겸(鄭厚謙:1749-1776)은 영조때 세손(世孫:정조)을 보호하는 홍국영(洪國榮)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데 광분한 사람으로써 정조가 즉위(1776)하자 그를 유배하고 가시울타리 천극(栫棘)하여 사사(賜死)되게 하였는데 영의정 이병모(李秉模:1742-1806)는 그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홍국영(洪國榮:1748-1781)·서유린(徐有隣:1738-1802)·서유방(徐有防:1741-1798)·윤행임(尹行恁:1762-1801)이 각료(閣僚)의 구의(舊誼)가 있고 죽마고우라고 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상소 즉 상주문(上奏文)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도 죽마고우라는 사회적공통관념에 의한 것으로써 이러한 전통관습은 사회전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미가 상당히 강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 한성부(漢城府)에는 이런 글도 있다.
【산천】 ○ 성임(成任:1421-1484)의 시에, “태평한 기상 일천 집에 넘치는데, 일천 집 성곽이 붉은 노을보다 밝았어라. 거리 메운 대말[竹馬] 달리며 호령하는데, 일만의 금련화(金蓮花)늘어진 꽃송이 다투어 구경하네. 밝은 별인양 찬란하니 밤이 대낮 같고, 높은 장대 구름 속에 드니 원숭이도 못 오르리. 좋은 말안장을 맞대고 구경하기 절반도 못 되는데, 새벽 화살이 금문(金門)의 누수 끝내기 재촉하네.” 하였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트로페올륨(Tropaeolum)(屬) 금련화 분포지도]
[금련화-트로페올륨(Tropaeolum)]
조선초기 형조판서, 공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던 성임의 시에 수도 한성부(漢城府) 산천 풍경을 기록한 내용이다. 얼마전 본 블로그에 올린 "금련화(金蓮花)와 석가(釋迦)탄생지 인도(印度) https://han0114.tistory.com/17050855"글에서 금련화가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이 원산지라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 한성부에 일만(一萬)그루의 금련화(金蓮花)가 늘어진 꽃송이를 다투어 구경하고 밝은 별인양 찬란하니 밤이 대낮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한성부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할 때 한성부(漢城府)의 위치는 금련화 원산지 지도에를 그대로 옮기면 적어도 아메리카대륙 동부 메사추세츠와 코네티컷, 그리고 뉴욕주 범위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어진다.
위 게시한 특별한 지도사진을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에서 보스톤 근교 입스위치(Ipswich)가 찍이고, 코네티컷(Connecticut)의 주도 하트퍼드(Hartford) 남쪽 로키 힐(Rocky Hill)에 찍이며, 또 뉴헤이번(New Haven) 북쪽에도 찍히고, 뉴욕시(New Yort City) 맨해튼 섬(Manhattan Island)에서 마운트버넌 (Mount Vernon)에도 찍힌다.
그곳 한성부 거리에 메운 대말[竹馬]달리며 호령하고 일만(一萬)그루의 늘어진 금련화(金蓮花)꽃송이를 다투어 구경했다 하고 있으니 이 엄청난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정말 가슴이 뿌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 일성록(日省錄) 정조 21년 정사(1797)2월 6일(정축)
개성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홍서오(洪敍五)의 상언에 대해 회계하되 이치를 따져 급히 장계하였다.
○ 개성 유수의 장계에,
....개성이 더욱 심해서 길가에는 죽마(竹馬)를 타고 놀면서 초립(草笠)을 쓴 어린아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작년 10월에 향사회(鄕射會)를 열어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렇게 일찍 장가보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으로 효유(曉諭)하고 이어서 대전통편(大典通編)가운데 혼인의 연한(年限)을 둔 조항으로써 봄가을 강신(講信)하는 교재로 삼았더니 백성들이 어길 마음이 없는 듯합니다.
(2) 삼탄집(三灘集) 제4권 / 시(詩)
연산으로 가는 도중에 읊다〔連山途中〕
路繞山間與水濱 산 사이와 물가 따라 구불구불 길 나 있고
風吹滿袖馬蹄塵 소매 가득 바람 불고 말굽에선 먼지 이네
途邊侯吏靑衫弊 길가에서 맞는 아전 푸른 도포 해졌으며
垣角窺妹皓袂新 담 가에서 몰래 보는 여인 소매 새하얗네
竹驥爭迎眞戲事 죽마 타고 맞이한 건 진정 장난이거니와
甘棠勿翦有何人 감당나무 못 베게 할 어떤 사람 있으려나
鬢毛欲雪猶羈束 귀밑머리 반백인데 아직도 몸 매였으니
怪殺淸狂賀季眞 하계진의 청광 정말 괴이하고 괴이하네
위 (1)편 조선후기 1760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일성록(日省錄) 정조21년(1797)기사에 보면 개성유수(開城留守) 장계에도 초립을 쓴 어린아이들이 죽마(竹馬)타는 모습의 기록이 있고 (2) 1517년 조선전기 문신 이승소(李承召:1422-1484)의 시가(詩歌)를 간행한 시문집 삼탄집에서도 竹驥爭迎 죽마가 앞다투어 맞이하는...식의 글을 볼 수가 있다.
위 사서에 나타나는 기록들 처럼 조선(朝鮮)에서 죽마를 타고 관리를 환영하는 모양세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삼한전통민속놀이의 근간임을 알 수가 있고 아래 후한서 기록에서도 이를 그대로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후한서<後漢書 卷31 郭伋列傳>에서 곽급(郭伋)이 동한(東漢:20-220)의 주(州) 병주(幷州)에 있으면서 은혜로운 정사를 폈는데, 순시를 하다가 서하(西河)의 미직(美稷)에 도착하자, 어린아이 수백 명이 각자 죽마를 타고 길가에서 절을 하면서 맞이하여 환영한데서 유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3. 중국사서(史書)기록
백과사전에서 정의하길 어렸을 때부터의 친한 벗이라 하여 죽마고우(竹馬故友), 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죽마구의(竹馬舊誼)란 말은 본래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친한 친구를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
이것은 중국 진(晉)나라 때의 인물인 은호(殷浩)가 전쟁에서 대패(大敗)한 책임을 묻는 환온(桓溫)의 상소문에 나오는 표현인데 죽마놀이는 당조(唐朝)의 덕연(德延)이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위해 고안하였다는 기록이 <잠확거유서(潛確居類書)>에 나오는데 이처럼 고대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죽마놀이가 남자아이들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는 것이며 본래 당조(唐朝)라 하면 세계삼한역사학적으로 고려(高麗)를 일컫는 역사명칭 임을 제고할 때 바로 이러한 죽마놀이는 고려의 전통놀이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것에서 어린이의 걸터타기(竹馬)와 어른의 올라타기인 고족(高足) 그리고 연희로 펼치는 고교(高蹻)가 있다고 알려지고 특히 고교(高蹻)는 2개의 대나무로 만든 장대에 적당한 높이의 발걸이를 끼워 놓은 것을 타고, 그 윗부분을 잡고서 걷거나 뛰는 전통 민속놀이로서, 한국에서는 죽족(竹足)이라 한다고 자료에서 설명하고 있다.
올라타기에 대한 첫 기록은 고대 도가(道家)의 한 사람인 열자(列子:禦寇)가 BC 400년경에 만든 서책에서 이 '나무다리걷기'의 기록에서 근거한 것이다.
나무다리걷기는 재주부리는 사람 연희자(演戱者)들이 두 개의 긴 장대를 종아리에 묶고 걷기, 뛰기, 춤추기, 방울받기, 손으로 땅바닥을 짚거나 짚고 넘는 땅재주 등 다양한 기예를 보여주는 전통연희라는 것이다.
原文】宋有兰子者,以技干宋元。宋元召而使见。其技以双枝,长倍其身,属其胫,并趋并驰,弄七剑迭而跃之,五剑常在空中。元君大惊,文赐金帛。
위 열자(列子)설부편(說符篇)원문을 참고하면 "송(宋朝)에는 난자(蘭子)라는 자의 기예가 으뜸이었다. 원군(元君)은 그를 불러 사견하였다. 기예는 두가지(雙枝)가 있었는데 키보다 길이가 배가 되는 장대를 정강이(胫)에 붙이고 빨리 걷거나 달리면서 일곱자루의 칼을 가지고 번갈아 뛰어오르고, 다섯 자루의 검이 항상 공중에 떠 있도록 하였다. 원군(元君)이 크게 놀라 황금과 비단을 내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한대[漢]에 장교기(長蹻伎)로 불렸으며, 시대에 따라 고각(高脚), 장교(長蹻), 답취(踏橇)라고도 하였다.
1m쯤 되는 두 개의 막대기에 다리를 각각 잡아맨 까닭에, 막대기를 손으로 잡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두 손에 악기나 소도구를 들고 연극을 펼치고 또 죽마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빨리 움직이면서 여러 가지 곡예도 벌이는데 공중제비(땅재주)가 그 중 하나라고 했다.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의 설명을 보면 5~6세기에는 이를 교기(蹺伎)라고 적었다. 다리 길이는 60cm에서 15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흔히 12m쯤 되는 것을 가장 많이 쓰였다.
또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나온 <천만궁제례회권(天萬宮祭禮繪卷)>에 죽마를 탄 사람이 두 마리의 당사자(唐獅子)뒤를 따르는 장면이 있다. 모 심는 습속을 전악(田樂)의 일부로 꾸며 넣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예능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8세기의 궁중에서 이어 내려왔으며, 당시에는 산악예(散樂藝)의 하나로 손꼽혔다고 말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고구려(高句麗) 고분벽화의 재주꾼들은 모두 두 손을 놓은 자세로 재주를 부린다고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4. 서양에서 말하는 스틸트(Stilts)대마놀이
북아메리카대륙의 캔자스주 아칸소 강(Arkansas River)근처에서 살던 위치타(Wichita)족과 캘리포니아 남동부에서 네바다(Nevada)중부 및 동부, 유타(Utah)북서부를 지나 아이다호(Idaho)남부와 와이오밍(Wyoming)서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인디언 쇼쇼니(Shoshoni)족 어린이들도 죽마(Stilts)를 즐겼고 죽마는 13m쯤 되며 버드나무로 만든다 했다.
이를 새의 신(神) 야코카흐무트(Yaccocahmut)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타며, 높은 죽마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다음 같은 자료를 참고 할 수 있다.
They are mentioned as existing among the Maya by Bishop Landa, who refers to a dance on high stilts in honor of the bird deity Yaccocahmut.
새의 신 야코카흐무트 영혼을 기리기 위해 높은 스틸트(죽마)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주목하였고 이와같은 행위는 마야족(Maya)가운데 존재한다고 언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은 자료는 미국의 민족작가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1858-1929)의 저서 "북미 인디언의 게임(Games of the North American Indians: Games of skill, 2권:Stewart Culin)"에 나타난다.
[Stile-walking:Maya indians, Yucatan:from pl.XXI. Codex Troano.]
현재 올드 오라비(Old Oraibi), 우리말로 '늙은 오빠'라고 할 수 있는 오라비 촌은 아리조나주(Arizona州) 북동부에 있는 나바조 군(Navajo County)의 '호랑이 가죽'이라는 '호피 촌(Hopi village)'을 말하는데 이 호피(Hopi)인디언은 호기아(Hokia)라 부르며, 길이 14m 쯤 되는 두 개의 사시나무(cottonwood poles)의 가지가 벌어진 부분에 천을 감아 타고 다녔다고 했다.
Pair of stilts(figure 958), hokia, two cottonwood poles, 54. 1/2 (inches) in length, with a crotch wrapped with colored rags. Collected by the writer in 1901. Thery are used by boys.
자 그러면 지금부터 유럽사람들의 스틸트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스틸트(Stilts)가 무엇인지 영영사전을 보면
1.건물을 지면·수면 위로 떠받치는 기둥이나 말뚝
2.벽돌 등을 굽는 가마속에 도자기를 받히는 작고 평평한 삼각 지지대
3.검고 하얀 깃털과 길고 가느다란 불그스름한 다리를 가진 긴 부리를 가진 섭금류(涉禽類)의 새(학·백로:wading bird) 및 강변·바닷가에 사는 새(도요새·물떼새류: shorebirds)
4.건물 등을 지상의 위나 물 밖으로 붙일 때 사용하는 여러 개의 긴 기둥이나 말뚝
5.발 받침대가 있는 두 개의 장대에서 땅 위에 서거나 걸을 수 있게 하는 것, 대말, 죽마(竹馬)
즉 5번째 대말, 죽마를 지금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다.
Origin of stilt
Middle English stilte ; see stel-in Indo-European roots.
in the sense: crutch, handle of a plough: related to Low German stilte pole, Norwegian stilta
스텔인(stel-in)은 일반적으로 1.couple, pair, 2.group, set, collection, 3.(informal) a couple (of), a few 등으로 '한 쌍'을 나타내며 1.throw a stone at, 2.pelt 《a person》 with stones, 3.pelt at '돌을 던지다'란 동사의미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쌍이라는 것은 죽마자체가 두 개의 막대기로 구성되었으니 하는 어원이 아닌가도 한다.
백과사전에서는 스틸릿은 사람이나 구조물이 땅 위 높은 곳에 설 수 있게 해주는 기둥의 뜻을 말하고 있다.
백과사전을 보면 저지대 사람들이 원래 강이나 저습지를 건너는데 사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알려지고 오락의 수단으로서 저습지 또는 범람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사용해왔다는 설명이며 이전에 상브르 강(Sambre river)과 뫼즈 강(Meuse River)의 범람으로 피해를 입은 벨기에 나뮈르(Namur)시는 여러 세기 동안 죽마를 탄 사람들로 유명했다 하고 시민뿐 아니라 군인들도 죽마를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죽마는 일반적으로 길며 상반부를 겨드랑이에 끼고 죽마는 다리를 끈으로 묶지 않는다 하였다.
유럽역사가 주장하는 고고학적 유적과 문헌에서는 기원전 6세기까지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에서 죽마보행(stiltwalking)이 일상적으로 행해졌음을 알리고 있으며 스틸트 워커(stilt walker)를 고대 그리스어는 κωλοβαθριστής (kōlobathristēs), from κωλόβαθρον (kōlobathron), "stilt", a compound of κῶλον (kōlon), "limb, leg, arm" and βάθρον (bathron), "base, pedestal" 이라 하여 스틸트로 걷는 사람, 또는 스틸트, 신체부분에서 팔, 다리를 나타내고 그리고 받침대, 혹은 지지대로 뜻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스틸트(stilt) 사용의 유럽전통은 벨기에(Belgium)에서 1411년부터 남부의 주 나무르(Namur)에서 이 스틸트 위에서 전투 연습하였고 이것을 에카세르(Echasseur)라고 하며 스틸트를 타고 콧소래를 부르며 상대팀끼리 어깨와 팔꿈치를 이용하여 거칠게 난타하며 전투하면서 서로 밀치고, 찌르고, 막고, 넘어뜨리는 스포츠라 하였다.
또한 습지 또는 침수 지역의 주민들은 늪에서 일하기 위해서나 불어난 강물을 건너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고 프랑스 서남부의 주도(主都) 랑드(Landes)지역의 양치기들은 시야를 넓히기 위해 돌무더기에 스틸트로 서서 양떼를 구경하곤 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양떼를 지키기위해 매일같이 눅눅한 땅을 횡단하곤 했다 한다.
대체적으로 근세기에 유럽, 미국에서의 스틸트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860년 9월 14일: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스틸트를 타고 가로지르기가 있었다.
프랑스 곡예사 샤를 블롱댕(Charles Blondin)은 줄(tightrope)타기로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를 건넜다.
'위대한 금발'의 별명을 가진 샤를 블롱댕, 장 프랑수아 그라벨(Jean François Gravelet:1824-1897)은 나이아가라에서 줄타기 곡예사(funambulists)로 가잘 알려진 사람이며 또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줄타기 곡예사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는 또한 '대담무쌍한 철사 워커'로도 알려졌으며, 그가 사용한 밧줄이 마닐라 삼(麻:Manila hemp)으로 만든 밧줄이라 하여 "마닐라의 왕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밧줄을 어디에 장착하느냐에 따라, 밧줄의 길이는 274.32 m(900 feet) 또는 365.7m(1200 feet)로 측정되었는데 현재 레인보우 대교(Rainbow Bridge)의 위치 근처에 길이 340m(1,100 feet),줄 지름 8.3cm(3.25 inch), 물 위 49m(160 feet)의 줄을 설치하고 그는 1859년 6월 30일 부터 여러 번 건넜고, 한 번은 외바퀴 손수레(wheelbarrow)를 타고, 또 한 번은 사람(자신의 메니저)을 등에 업고, 또 한 번은 스틸트(목마)을 타고 건넜으며 마지막으로 줄을 타고 건널 때 웨일스왕자(Prince of Wales) 앨버트 에드워드(Albert Edward)가 나이아가라로 찾아와 구경했다고 한다.[The Grapic Magazine:1891]
1891년에는 실뱅 도르농(Sylvain Dornon)이 파리에서 빌노(1,830 miles/2,945 km)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50일 구간을 하루에 58.9 km(36.6miles/a day)씩 혹은 58일 구간 하루에 50.7 km(31.55miles/a day)을 걸었다고 하였다.
1892년 프랑스 바욘(Bayonne)사람 엠 게리사인(M. Garisoain)은 프랑스 남서부 비아리츠(Biarritz)의 마지막 8 km(4.97 miles)를 42분 11.4 km/h(7.1mph)로 주파했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속보 기록경주였다.
1894년 프랑스에서 평균시속 7km/h(4.4 mph)로 439.3km(273 mile)경주를 벌였다.
1917년 미국 펜실베니아 해리스버그(Harrisburg, Pennsylvania)에서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까지 파나마태평양 박람회(Panama-Pacific Exposition)에 스틸트로 걸어 도착하였던 F. E. 윌버트(F. E. Wilvert)는 장대 높이가 3.25m(10 feet 8 inch)로 되어 있다.
1927년 영국 노퍽(Norfolk)의 그레이트 야머스(Great Yarmouth)의 해리 옐딩(Harry Yelding/Harry Sloan)는 스틸트 높이 기록 6.7m(22 feet)이며 1956년 기네스 슈퍼레티브(The Guinness Book of Superlatives)에 가장 높은 스틸트 기록으로 등재되었다.
이상에서 보면 유럽사회에서 이 스틸트장대놀이가 전통적으로 관습에 묻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놀이를 합스부르크가(家)의 상속자 카를 5세(Charles Quint:1516-1556,재위:1506-1556), 부르봉가(家)의 루이14세(Louis XIV,1638-1715,재위:1643-1715), 로마노프가(家)의 루스차르국건립자 표트르1세(Pierre le Grand de Russie,1682-1725,재위:1721-172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가 이놀이를 즐겨했다고 알려진다.
5. 코리아와 삼한고려에 대한 인식
삼한(三韓)의 의미가 치환되었다고 하지만 세계삼한역사의 주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이며 이 역사주체들은 전 세계역사를 아우르면서 인류역사전체에 영향을 끼쳤던 세계사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삼한(三韓)의 의미가 어느정도인지 알아보자.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s://han0114.tistory.com/17050716 "에서 말하길 여진족추장 대금(大金:1115-1234)시조라고 하는 완안함보(完顔函普:941-960)를 우리는 김함보(金函普)라 하고 신라(新羅)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에는 완안(完顔)이 만주어로 왕기얀(Wanggiyan)이라 하고 이를 한어로 번역하면 '왕(王)'을 뜻한다 하였으니 왕함보(王函普)가 된다는 의미이고 김(金)을 왕(王)이라 한 것은 신라의 김씨(金氏)왕조나 고려의 왕씨(王氏)왕조가 동일하다는 근거에 따른 것이다.
이를 정통성으로 풀어보면 당(唐)은 신라(新羅) 천자국의 조대명(朝代名)이기 때문에 고려(髙麗)가 쇠락한 신라(新羅)를 흡수합병한 것은 삼한정통성에 의한 조대명 전통천자국계보를 계승하기 위함이라고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때문에 금조는 신라의 후손이지만 바로 고려의 후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금조는 신라를 따르려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당(唐)의 조대명을 잇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옛부터 한당(韓唐)을 카라(から)라 하였고 한(韓, 漢)도 카라(から)라 하였다는 사실에서 보면 한(韓)은 삼한을 가르키는 것으로 삼한을 '카라'라 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런던화재와 에도화재 https://han0114.tistory.com/17050853 "에서 일본에서 삼한(三韓)을 카라(から)라고 하고 통일삼한을 "唐"이라고 하였으며 옛부터 한당(韓唐)이라 하면서 카라(から)라 하였고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神)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神)인 ‘카라카미(韓神)’라 하면서 제사를 모시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아랍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유럽사에 적용하면 고려의 제왕들 중에 우(禑王), 창(昌王), 공양왕(恭讓王)만 빼놓고 모두 대왕(大王)이라 했다.
이 대왕이 무엇인가.
본 블로그 글 "대한제국과 오스만제국 https://han0114.tistory.com/17050389 "에서도 언급한 이야기지만 바로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셈어의 기원(Semitic origin)이라 하였고 아케메네스왕조(Achaemenes:B.C.500-B.C.330) 또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Sassanid Empire:226-651)에서 왕 중의 왕(king of king)을 샤한샤(shāhanshāh) 또는 의 파디샤(Padishah)라 하였던 사실과 인도아대륙 전체를 지배하던 델리술탄왕조(Sultan of Delhi Sultanate:1206-1526)에서 술탄 중에 술탄(Sultan-es-selatin:Sultan of Sultans)이라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한자권(漢字圈)에서 말하는 천자국(天子國)의 위상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로마(羅馬:Rome)시대때도 이와같은 의미의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바로 카이사르(Caesar)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호칭이 있었음에도 아랍역사에서는 칼리프제도가 있어 속세 제왕들을 종교적으로 다스렸고 유럽역사에는 교황이 있어 제왕들을 다스렸다고 나타나는데 동양한자권역사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빠져 있다.
오스만제국의 경우는 칼리프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술탄 중의 술탄' 즉 '샤한샤'가 이 이를 겸하였다는 사실도 중하게 보지 않으면 안된다.
본 블로그 글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https://han0114.tistory.com/17050392"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정통칼리파시대(The Rightly Guided Caliphs:632-661)에서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재위:654-661)과 문무왕(文武王,재위:661-681)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ī ibn Abī Ṭālib,598-661:재위656-661)와 무아위야 1세(Muawiyah I ibn Abi Sufyan:661–680)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했다.
즉 이슬람의 천자(天子)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슬람 즉 아랍역사는 바로 러시아수학자이며 신역사학자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주장한 사실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한자권의 중국이나 중동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것으로 카토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 1491-1556)가 만든 예수회에 의해 만들어진 음모라고 주장한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회가 깊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쩌면 서양 기독교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교황(敎皇:papa:pope)은 칼리프를 모방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예수회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만든 역사가 아랍역사 그리고 중국역사라는 정황이 이를 충분히 답해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무열왕과 문무왕이 칼리파란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신라(新羅)는 천자국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으며 그러한 신라가 쇠락하여 고려가 흡수합병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고려 제왕 모두가 샤한샤, 술탄 중에 술탄 바로 대왕(大王)칭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역사가 아랍역사 사이에 끼어들게 한 기독교왕국 마케도니아(Macedonians)의 알렉산드로스3세대왕(Alexander III Magnus, B.C.356-B.C.323)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를 서양사에서는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점령시대(B.C.330-B.C.250)라 하였다.
그러나 서양역사는 그냥 'Great '라고만 했지 감히 왕중의 왕, 대왕'Great King' 이라고 하지 못했다.
즉 서양기독교역사가 아닌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拜火教)의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역사 사이에 끼어넣고 마치 역사전체가 기독교왕조가 존재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세계적으로 삼한역사에서 고려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고려는 정통삼한천자국의 계승권을 가진상태로 말이다.
그래서 고려제왕계보를 보면 왕씨의 본가 즉 로얄페밀리왕가(Royal Family House)의 명칭이 개성왕가(開城王家)라 할 수 있는데 이 왕가의 출신은 고려태조 왕건(王建:877-943:재위:901-943)으로부터 1392년 조선에 흡수될 때까지 전체 34명의 제왕 중에 절반인 17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즉 나머지 17명의 제왕은 비개성가, 넌페밀리계(non-family)이다.
그 제왕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목종(穆宗), 현종(顯宗),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순종(順宗),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우왕(禑王), 창왕(昌王), 마지막 왕 34대 공양왕(恭讓王)이 그렇고 앞에 충자가 붙은 제왕으로 충열왕(忠烈王),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충정왕(忠定王)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려와 비교가 되는 신성로마제국(神聖羅馬帝國:962-1806)도 오토왕조(Ottonen:919-1024)로부터 잘리어왕가(Salian), 주플린부르크 가문(House of Süpplinburger), 호엔슈타우펜 왕조(Hohenstaufen:1138-1208)등 초기에 수많은 왕가와 왕족페밀리들이 넘나들고 이리저리 바뀌는 형상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정상적으로 추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였던 소위 대공위시대(Interregnum:공백기간)인 1254년부터 1273년까지 더욱 그 형태가 혼란스럽게 바뀌는데 이때 점차 합스부르크왕가(House of Habsburg:1438-1806)가 비로소 터를잡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시기는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군전쟁(Crusades war:1096-1254)이 마무리되던 시점이고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제국(Latin Empire,1204-1261)과 동양의 몽골제국(1206-1259)제국도 운명을 다할 때임을 알 수가 있다.
묘하게도 이 시기에 고려에도 마치 대공위시대와 흡사하였는데 고려 23대 고종(高宗)은 제위 동안 거의 식물체제였다.
원(元)에 의해 간섭을 받아 충헌(忠憲:安孝大王:1213-1259)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하고 1196년부터 23년 동안 최충헌(崔忠獻)이 실권을 장악했으며, 최우(崔怡)가 30년, 최항(崔沆) 8년, 1258년 최의(崔竩)까지 온통 4대에 걸쳐 62년이란 긴 시간동안 무신정권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고려 최씨 무신정권은 징기스칸 몽골정권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49425"에서 몽골은 무신시대와 동일선상에 놓고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으며 원(元)이 대명국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북방민족은 정통성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대명 구실은 할 수 없었다고 보면 어쨌거나 무신정권에 의해 허수아비였지만 충헌의 시호를 가진 안효대왕 23대 고종(高宗)이 조대명(朝代名)을 취해 천자(天子) 즉 칼리파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는 당시 서양역사학자들에게 그대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고려라 함은 "COREA"란 명칭과 함께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조선이 산업혁명과 서양세력들의 준동에 의해 순식간에 바람 앞에 등잔신세가 되었을 무렵 1878년 5월 뉴욕에서 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COREA 란 국명이 되었고 그 이후 유럽인과 미국인들에 의해 신문, 잡지, 도서를 이용한 대중적 계몽에서 'COREA' 가 'KOREA' 로 바꿔 대중들의 인식변화를 시켰음을 알 수가 있다.
인도(印度)는 고려 칼피파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후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를 흡수케 하고 인도시성인 라빈드라나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고국인 고려가 바로 무굴제국이어야 하며 무굴제국을 점령한 동인도회사는 잉글랜드란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해양해적세력으로 나중에 잉글랜드왕족 가문이 동인도회사를 접수함과 동시에 고려의 정통성을 가로채 인도여제(印度女帝)가 되는 역사가 생성된다.
물론 세계삼한역사의 상징이었던 'COREA'명칭이 사라짐과 동시에 서양인들에 의해 삼한역사는 크게 위축이 되었을 뿐만아니라 전반적으로 왜소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계몽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삼한역사가 축소되어야 한다는 서양인들의 절대적 관념에 의한 인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표적으로 영국 유대인계 윌리엄 하인만(William Heinemann:1863-1920)소유였던 런던출판(Publisher London)에서 브리티시(the British)의 화가 겸 탐험가, 작가, 인류학자였던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1865-1924)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 고려와 조선(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1895)"이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된 것인데 여기서 고려와 조선을 하나의 체제로 만들어 버린다.
이를 보면 1895년 까지 코리아(Corea)가 암묵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고려가 조선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는 점도 서양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것 같다.
또 특히 독일 유대인 장사꾼이며 요즘같았으면 사기꾼이란 소리를 들었을 만한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a:1832-1903)가 쓴 금단의 나라 코리아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1880)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쿠빌라이의 이야기는 고려 24대 대왕 원종(元宗)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그는 코리아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렸고 코리아는 온 세상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쿠빌라이 칸의 대몽고제국 이래로 가장 눈부신 동양 문명을 일구었다는 주장했다는 사실은 고려 이후 대조선시대가 말 그대로 굉장한 문명이 발달하게 끔 만들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코 고려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거대한 국가체제를 완성시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잉글랜드 작가 새비지 랜도어처럼 오페르트는 조선이라 하지 않았고 코리아라고 했다.
다만 그 이후 한국어 번역본에서 코리아를 조선(朝鮮)이라 한 것이다.
1880년 오직 개방만을 요구하던 오페르트의 책에서는 "굳게 닫힌(잠근) 또는 폐쇄된 땅"이라고 하다가 1895년에는 새비지 랜도어는 "고요한 아침의 땅"으로 뒤 바뀐다.
전자에서 말하고자 하는 당시 서양인의 심리는 폐쇄된 코리아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여 개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는 사실이고 후자는 문명, 문화적으로 그들보다 뒤 처진 측면을 중점적으로 다뤄 스스로 서양인들의 우월감을 나타내려는 강한 심리적 상황이라고 정리 할 수가 있다.
그렇더라도 "고요한 아침의 땅"이라는 말은 고요한"해뜨는 나라"라는 말과 같다고 해석된다.
즉 "아침의 땅"이라 한 조양(朝陽) 또는 조광(朝光)과 같은 뜻이다.
물론 서양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제목을 정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4.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s://han0114.tistory.com/17050747"
에서 태고적부터 전통적으로 동방(東方)이라 불리었던 "아침의 땅"은 삼한역사에서 이를 아사달(阿斯達)이라 하였으며 이것을 조양(朝陽) 또는 조광(朝光)이라 하였고 더 나아가 동방국가를 동국(東國), 대동(大東), 해동(海東)이라 하여 조일광선(朝日光鮮)이란 의미의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만들어 그 중심에 자리잡고 고고하게 존재한 상태였다고 해야 맞다.
조(朝)와 일(日)은 '아침'과 '태양'이며 '광(光)'과 '선(鮮)'은 '빛남'이라고 했다.
조일광선에 나올 수 있는 단어가 조일(朝日), 조광(朝光), 조선(朝鮮), 일광(日光), 일선(日鮮)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천자가 태양에 제사 지내는 것, 천자가 정무를 보는 청정(聽政)하는 날을 조일(朝日)이라 하는 것, 조광(朝光)을 아침의 빛, 태양의 빛이며 조선(朝鮮) 역시 '아침의 빛'이라 읽을 수 있고 '일광(日光)'은 '태양의 빛'이고, '일선(日鮮)'도 '태양과 빛'이니 모두가 태양신(太陽神)과 일치된다.
태양신(太陽神)은 모든 종교에 으뜸이라 해야 맞다.
때문에 기독교의 나라 중심도시 워싱턴 D.C 정 중앙위치에 태양신앙(羅:Ra)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 168m의 오벨리스크(obelisk) 워싱턴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이 서 있지 않는가.
6.서커스와 코리아 기예단
위에서 이야기 한 것은 왜 고려(髙麗)가 'COREA' 어야 하며 그러한 고려를 통한 삼한의 정통성이 왜 서양인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점을 알기 위해 긴 글을 할애했다.
이러한 중요성은 비록 역사가 축소되어 Korea 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1900년까지 서양인들에게 고려(髙麗:corea)에 대한 의식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커스(Circus,曲馬團)역사의 기원은 훨씬 더 먼 고대로마(Ancient Rome:B.C.753–B.C.509)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서커스 공연은 기원전 1세기경 가이우스 율리우스(Gaius Iulius:B.C.100-B.C.44)시저의 통치시절때 고대로마의 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서 열렸다고 알려지고 15만 석 규모의 이 거대한 구조물은 후에 경마나 전차경주를 펼쳤던 그리스 타원형 경기장(hippodrome)의 모델이 되었지만 현재는 터만 남아 공원으로 쓰이고 있다고 말해진다.
서기 4세기경에 건설된 이 경기장의 길이는 오늘날 축구 경기장의 7배나 되었다고 알려진다.
미국에서는 1793년 필라델피아에서 최초의 서커스 공연이 있었다.
최고의 묘기는 저글링, 공중그네, 줄타기, 장대에 올라타서 걷는 스틸츠(stilts)였다.
이 스틸츠, 죽마곡예가 그때부터 서커스 한 종목으로 인정받았던 사실이다.
때문에 이 스틸츠는 서양인들에게도 대체적으로 잘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
1860년에 프랑스 곡예사 샤를 블롱댕(Charles Blondin)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줄을 연결하고 그 위에 스틸트를 타고 가로지르기를 했었던 것은 그 한 참 후에 일이다.
스코틀랜드인 존 빌 리케트(John Bill Ricketts)는 미국에 최초의 현대 서커스를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그는 1780년대 런던에서 휴즈 로얄 서커스(Hughes Royal Circus)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으며, 1792년 영국을 떠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첫 서커스를 설립했던 사람이다.
필라델피아는 유럽사를 근거로 하더라도 서양인들의 역사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이 있다.
미국 최초의 서커스 건물은 1793년 4월 3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개장되었고, 그곳에서 리케트는 미국 최초의 완전한 서커스 공연을 열었으며 공교롭게도 미국초대대통령 조지워싱톤(George Washington)이 그 시즌 후반에 그곳의 공연에 참석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서커스 중요혁신가 중 한사람인 루이 술리에르(Louis Soullier)는 1866년 여행에서 돌아와 유럽 서커스에 중국 곡예(Chinese acrobatics)를 소개한 최초의 서커스 소유주였고, 자크 투르니에르(Jacques Tourniaire)는 이 공연 예술을 랑가(Ranga)에게 처음 소개한 것이었는데, 이 예술이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1870년대에는 서커스 유람단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코끼리를 앞세운 형형색색의 마차가 서커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마을을 누비며 다니곤 했다.
19세기초부터 서커스엔 다양한 곡예, 체조(gymnastics)에는 텀블링(tumbling), 쇠틀에 넓은 그물망이 스프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위에 올라가 점프를 할 수 있는 운동구 트램펄린(trampoline)이 있고, 공중행위에는 공중그네(trapeze), 공중 천 휘말기(aerial silk), 수직으로 밧줄메달리기(corde lisse)가 있으며 비트는 연체곡예(contortion), 스틸트(stilts), 공 같은 물건을 세 개 이상 들고 공중으로 던져 가며 다양한 묘기 저글링(Juggling)등이다.
대담한 스턴트행위(Daredevil stunt acts)에는 인간대포알(human cannonball), 펠트(felt)로 된 둥근 원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모자를 만들어내는 기예 사포그라피(chapeaugraphy), 불먹기(fire eating), 내뿜기(breathing), 춤(dancing), 칼던지기(knife throwing), 마술쇼(magic shows), 칼 삼키기(sword swallowing), 괴력사차력(strongman) 그것이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말하는 코리아 기예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시한 2장의 그림사진은 1902년 리비히 육류 추출물 회사(Liebig Extract of Meat Company)의 리비히회사(Liebig社)의 광고엽서인데 주로 이 회사에서 광고엽서를 만든 시기가 189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까지라 알려진다.
위(上)는 코리아(En Coree)에서 여성들이 하는 스포츠라 하여 '죽마타고 장애물 점프하기'추격전 장애물 점프하는 모습과 아래(下) 는 고려사자춤(danse du Lion de Coree) 즉, 당사자(唐獅子)춤이라고 판단되는 춤을 일본인 남녀노소 스스로가 즐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그림인데 자세한 설명에는 일본 아이들이 사물 뒤에 숨거나 엄마에게 달라붙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반면에 더 용감한 또래들은 이 거대한 야수(사자형상)과 같이 춤을 추고 장난을 치는 모습이라 했다.
이 춤은 북청탈춤(北靑獅子:Bukcheong talchum)이라 하거나 북청사자놀음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전승 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이다.
북청(北靑)은 여진족출신인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이지란(李之蘭:佟豆蘭:1331-1402)의 고향으로써 당시 고려(高麗)가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밖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윤관(尹瓘:1040-1111)이 17만 대군으로 함흥평야 일대를 공격하여 여진족을 축출하고 지금의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에 걸치는 땅에 이른바 동북 9성을 설치하였다하였으니 함경도는 여진족땅임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북청의 청(靑)은 청조의 청(淸)과 다르지 않다.
북청탈춤은 근세기에 들면서 자본주의사회에 나눔의 실천을 종용한 놀이로써 부유한 집에 들러 복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아주는 풍습에 의한 놀이인데 이 북청사자춤은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음력14일 밤에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며 춤꾼들은 지방의 고유한 공동집회장소, 도회지에서 분위기를 돋우고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횃불을 앞세우고 여러 마을들로부터 사자행렬이 북청읍으로 모여들면서 행렬이 끝난 후 큰 마당에서는 본격적으로 사자놀이 경연이 벌어진다.
나중에 이 지역의 부유한 가정의 집을 방문하면서 집 정원으로 가서 춤을 추고, 안방으로 들어가 춤추고 밥을 먹고 부엌으로 가서 다시 안뜰로 돌아오고 다시 나서 그 그러한 경로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춤을 추는데 때때로 어린 아이들은 사자가면의 머리카락을 잡아 이를 잡으면 아이들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말한다.
위 두 종의 엽서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근세기 세계적으로 1792년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첫 서커스를 설립했고 1793년에서 그곳에서 최초의 서커스 공연이 있었다고 하였다
서커스가 1870년대에는 확고하게 자릴 잡았다고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COREA 의 독립적인 서커스 단이 존재했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COREA 영역에서 벌어진 것이라면 그것들이 전부 COREA 기교 또는 기예단에 어떤 식으로든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란 추측은 없지않다.
위 그림을 보면 코리아(COREA)여성들이 하는 스포츠라 하여 '죽마타고 장애물 점프하기' 또는 추격전 장애물 점프하는 모습의 그림은 스틸트 자체가 고려의 전통적인 풍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림이다.
더 나아가 본 블로그 글 "스페인 독감과 역사 재해석 https://han0114.tistory.com/17050854"에서 중국 공연자들은 죽마장대발 놀이로 프랑스 에타플스(Etaples)의 야외 극장에서 노동군단원들과 영국군을 위문하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본래 죽마장대놀이는 전통적 고려(Corea)문화이었기 때문에 중국공연자는 고려인(COREAN)이라 해야 하며 고려(高麗)노동자와 영국군인을 위문하기 위한 장면 임을 추측할 수 있다 하였다.
또 아래 그림에서 일본인들이 즐겨하는 북청사자놀이는 한국전통연희사전에 의하면 일본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에 나온 '천만궁제례회권(天萬宮祭禮繪卷)'에 죽마를 탄 사람이 두 마리의 당사자(唐獅子) 뒤를 따르는 장면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고려사자탈춤을 말한 것이며 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612 "에서 일본인이 만든 박견사전(狛犬事典:上杉千鄕著)에 실린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의 박견(狛犬,こまいぬ)사진은 일본에서 박(狛)이라 하고 이것을 고려(高麗)라 한다는 사실을 일본사전에 분명히 밝힌 것이며 덧붙여 한반도 고대의 국명인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를 박(狛)이란 명사(名詞)에 붙인 것이고 이것은 고려(高麗)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한 사실을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인들은 사자상을 고려사자상으로 알고 있었고 이것을 당사자(唐獅子)라 했음도 알 수가 있다.
조선사람을 "漢人" 또는 "唐人"이라고 불리었다는 사실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카라비토(唐人·漢人)로 칭했던 사실과 동일하며 고려를 흡수한 조선이 일본에 제공한 문화가 거의다 중국문화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적용하면 결국 고려문화가 중국문화인 것이다.
7. 서양인들이 보는 COREA 와 마무리
친일행적의 김활란이 1950년에 창간한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에는 이런 글이 보인다.
The truth in advertisements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using colorful images of Korea became a popular method employed by some companies to advertise their goods. Often these images were whimsical creations of artists and their imagination. (by Robert D. Neff)
근대 역사학자인 칼럼니스트 미국인 로버트 네프(Robert D, Neff)의 글인데 특히 그는 조선역사에 밝아 1894년 이후의 역사상황을 그렸던 그의 저서가 바로"서양의 눈을 통한 한국(Korea Through Western Eyes)"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역시 19세기 말엽부터'COREA' 가 아니라 'KOREA' 라고 바꿔 불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계몽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윗의 짤막한 글은 "광고의 진실"이라는 제목아래 바로 세계육류가공시장에서 유명했던 리비히 육류 추출물 회사(Liebig Extract of Meat Company)가 만든 그림엽서 "고려여인들이 죽마를 타고 장애물 점프하는 모습" 등 당시 리비히회사(Liebig's)가 'COREA'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그림들을 보고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한국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일부회사들이 그들의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사용한 인기 있는 방법이 되었다'라고 하면서 '종종 이러한 이미지들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의 기발한 창조물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사람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역사편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야심작 "서양의 눈을 통한 한국"이라는 제목은 이미 그가 가진 편협한 편견을 들어내는 것이 사실이며 그와 같은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한국역사는 사실과 다른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저변에 깔고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자체가 축소되고 왜곡될 수 있는 소지가 존재한다 보는 것이다.
글쓴이는 한국인의 입장이고 그것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는 역사사실을 연구하는 처지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을 뿐더러 그와 이미 같은 한국역사를 본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각차이가 천길과 만길의 차이가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역사와 현격한 차이가 있는 리비히회사의 광고그림일지라도 그것을 그리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이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식의 논리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실제로 19세기말엽까지 세계삼한정통성의 상징이었던 고려(高麗)의 서양 명칭인 코리아(COREA:COREE)가 어떤 식으로 세계사에 영향을 주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 한반도 역사에 꿰맞추려 한 사람 중에 한사람으로 그의 편견은 결코 우리 역사에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컬럼리스트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다.
오늘날 한반도 역사가 존재하기까지 이런 미국인들이 우리주위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들은 한반도 역사만들기에 이처럼 광분했고 수없이 왜곡된 사실을 되뇌었을 것이며 각자 맡은 바대로 많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 그의 주장을 빌리면 리비히회사가 19세기후반과 20세기 초에 한국(COREA:COREE)의 다채로운 또는 흥미진진한 이미지(colorful images)를 사용하는 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소규모의 일부회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육류추출업체이다.
이러한 업체가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사용한 인기 있는 방법이 되었다 라고 한 것은 그 만큼 한국 즉 'COREA' 의 모든 풍습이 세계인들에게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이미 알게 모르게 'COREA'가 어떤 역사인지 서양지식인들은 거의가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다채롭기도 하였겠지만 흥미진진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In January 1903, Emperor Gojong married Emily Brown, the daughter of an American missionary, making her the first American empress in the world.
1903년 1월 고종황제는 미국인 선교사의 딸 에밀리 브라운과 결혼하여 세계 최초의 미국 황후가 되었다고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Boston Sunday Post)에 보도된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고종황제(Emperor Gojong)와 필라델피아 출신 미국여성 에닐리 브라운(Emily Brown)과 결혼에 대한 사실이 충격적으로 보도되어 그야말로 당시 미국인으로써는 유일한 여인이 조선황제와 결혼하게 된 사실은 오늘날 영국왕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바라보는 세계인들의 시선과 흡사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바로 세계최초의 미국인 황후가 탄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인들의 특별한 황실의 대한 선망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미국인들에게는 이 사건이 최상의 흥미꺼리였고 대단한 뉴스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미국동부사회에서 꽤 유명한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가 특종을 낸 것이다.
이 사건은 분명 오보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이 나중에 조선을 완전히 접수하고 세계를 호령하려던 했던 세력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어쨌던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려 애를 썼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그들 어용신문들은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이 참말 보다 생생하게 행세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것 이다. 미국 몇 신문이 한 미국 아가씨가 한국 황후가 됐다는 가십 기사를 실어 한국에 사는 미국인들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찌 이 광대놀음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말이다.
미국여성과 혼인하던 해 1903년은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즉위 40주년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본 블로그 글 "요코하마가 어딘가. https://han0114.tistory.com/17050823"에서 밝혔지만 미국공사였던 한국이름 안련(安連:Allen)을 통해 칭경식(稱慶式)포드의 빨간색 '모델A' 4인승 무개차(無蓋車) 1대를 수입하였다고 알려졌다.
이것은 고종이 에밀리에게 주는 선물용이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수많은 반론들이 들끓었지만 이미 사실인 문제로 남았다가 조선(朝鮮)이 실제로 완전히 사라진 시점인 1931년 11월 29일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는 다시 1903년에 기사가 오보라는 식으로 사실을 덮어버렸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여하튼 20세기초까지 미국인들이 바라보던 'COREA'의 위상은 엄청나고 흥미진진했으며 대단했다는 사실이기에 '리비히'같은 당시 굴지의 국제유명회사가 상품광고에 'COREA'의 문화를 담고자 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어 위 미국인 컬럼리스트 로버트 네프(Robert D, Neff)의 주장은 모두 헛된 것임도 알 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서양인들이 'COREA', 'COREE' 라고 하는 것은 세계 천자국의 정통성을 승계한 고려(高麗)를 지칭했고 그것을 인지했기때문이다.
그러한 역사사실을 마침내 찾아내고 우리의 고전 속어인 '죽마고우'를 생각케 하는 '스틸트'를 통해 과거 역사를 상세하게 추적해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결코 자학역사 속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현재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전 세계가 참혹한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코로나바이러스를 대처하는 모든 방식에서 우리나라가 세계모범국이며 바이러스가 만연하는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첨단기술과 뛰어난 인력을 보유한 국가로써 칭찬을 마다 하지 않다는 사실이 고무적인 것이며 세계유일의 분단국이며 영토의 허리가 잘려 마치 섬과 같은 한반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게 거는 세계인의 남다른 기대심리와 온갖 찬사가 끊이질 않는 다는 것은 사라진 역사를 또 한번 생각케 하는 계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기분좋은 기를 살려 이제부터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정통세계천자국의 면모를 찾아 새로운 코리아의 위상을 만들고 과거 역사에 의해 절대로 비굴해지지 않는 진정한 세계지도국으로의 참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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