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잡다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한부울 2014. 11. 2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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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글쓴이:한부울

 

소제: 신라나막신과 네덜란드 나막신(Patten), 일본의 게다(下駄:Geta)

 

오리엔탈문화의 시원
열도군도의 인도와 그렇지 않았던 일본
네덜란드의 정체
일본정부가 발행한 네덜란드어 화폐
네덜란드 카리브해가 본거지
네덜란드(和蘭)와 일본(和人)
나막신(clogs)과 게타(geta)
마무리

 

오리엔탈문화의 시원

 

콜럼버스의 탐험기는 절대로 착각이 아니며 오류도 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세가 만든 근세사는 콜럼버스가 착각을 하였으며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현재 서양인들에 의해 정해진 지명중에 가장 의심이 되는 지명이 바로 인디즈(lndies)이다.

인디즈(lndies)는 인도제국(印度諸國)을 말하고 인도(India)·인도차이나(indo-china)·동인도제도(East indies)를 총칭하는 옛 이름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현재는 아시아의 동인도제도(East indies)와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로 나눠지는데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실체가 분명하지 않는 것이다.

15세기말 이태리 출신 비주류의 해적신분으로서 지리학에 대해서 상식이 풍부하지 못했다던 콜롬버스가 어쨌던 인도(印度:India)를 찾기 위해 비주류임에도 불구하고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이사벨 1세(Isabella I of Castile, 1451-1504,재위1474-1504)를 만나 에스파냐(Espana)출발하였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몇가지 우리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밝혀 알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가 인지한 동양의 인도(印度)라는 곳이 아메리카대륙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북아메리카대륙에는 그가 만나고 싶어하던 쿠빌라이 칸(Kublai Khan 1215-1294, 재위1260-1294)이 있었다는 사실과 쿠빌라이 칸이 곧 그가 말한 크레이트 칸(Great Khan)인가 하는 점, 그리고 황금과 향료의 나라 지팡구(Cipangu)가 카리브해에 있었다는 점과 지팡구가 일본(日本)인가 하는 점, 마지막으로 서인도라고 한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범위의 인지관계등이다.

위 의문점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 매우 중요한 핵심과제들인데 콜럼버스가 동양에 존재하는 인도(印度:India)를 한사코 찾았다는 사실과 마르코폴로가 이야기 한 크레이트 칸(Great Khan)을 동경했다는 사실들은 불명확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갈망했다고 하는 두 주제를 동양과 서양이 아닌 하나의 역사로 본다면 단번에 풀릴이야기다.

그리고 콜럼버스 탐험기를 서세가 착각이며 오류라고 이야기 하지만 오류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콜럼버스가 비록 학식을 많이 갖추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해적출신이라면 듣던 풍월이 있어 그가 알고 있는 상식이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콜럼버스는 서세가 말한 것처럼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아시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이 붙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착각이라 말 할 수 있어도 적어도 인도가 아메리카라는 사실은 오류가 아니다.

지금 인도가 아시아의 인도아대륙이라는 설정은 의도적으로 콜럼버스를 무식했다고 몰아 가지만 그것은 본질을 숨기고 감추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어 콜럼버스의 듣던 풍월은 정확했다는 것이다.

 

위에 제시한 의문점들을 지금 여기서 한꺼번에 다 따져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하나의 의문점인 서인도라고 한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범위의 인지관계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하여 서인도제도(West Indies)라고 하였다는 것을 근세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카리브해(Caribbean Sea)전체 제도를 말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가 에스파냐(Espana)를  출발하여 1492년 10월 12일에 도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 현재의 바하마제도(Bahamas諸島) 와틀링섬(Watling Island)에 마침내 도착하고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Hispaniola)에 도달하여, 이곳을 거대한 인도(印度:India)의 일부(一部)라고 생각하였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켰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야 정확한 답이 구해진다.

그의 말처럼 그가 도착한 곳은 인도의 일부(一部)였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그는 당시 인도전체에서 자기들이 도착한 곳이 인도(印度) 서(西)쪽임을 알았고 그래서 서인도(西印度)제도라 하였으며 나머지 인도(印度:India) 동(東)쪽 섬들은 아직 탐험하지 못해 후일로 미루었고 그래서 1504년까지 4번의 항해 끝에 비로소 인도열도(印度列島) 또는 군도(群島), 제도(諸島)전체를 탐험할 수 있었다고 정리가 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근세사의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좀처럼 풀 수 없도록 서세들이 스스로 착각, 오류라고 봉해버린 것은 바로 인도를 멀리 아시아 대륙으로 보내버려야 하는 난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인도란 명칭을 아시아대륙에 보내기 위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엉뚱한 인물이 필요하였고 콜럼버스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동, 서양을 따로 떼 놓고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아메리카대륙이 동양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로 오리엔탈문화역사가 꽃피우던 곳이라는 사실은 추호도 변하지 않을 진리와도 같은 것이다.

오늘날 지형조건도 맞지 않게 동남, 서남아시아를 동인도제도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아메리카대륙에 있었던 삼한역사를 아시아존(ASIA-ZONE)으로 옮겨놓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의 오리엔탈(Oriental) 역사문화(historical culture)가 바로 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아메리카대륙이 서세역사의 보루로서의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오리엔탈문화역사 본거지를 다른 곳에 심어야 한다는 논리와도 같다.

근세기의 양대대전은 동서양 역사문화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 하나의 역사를 담보로 하던 기득권 세력과 비주류로서 신흥 해적출신들 간에 도저히 비켜 갈 수 없는 전쟁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현재 서인도제도는 본래대로 한다면 그냥 인도제도가 되어야 하고 서쪽 쿠바의 하바나(Havana)지역이 서인도, 그리고 윈드워드제도(Windward lslands)를 동인도라고 해야 본래 인류역사 근원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열도군도의 인도와 그렇지 않았던 일본

 

현재는 동인도제도(East indies)는 인도·인도네시아·말레이제도를 포함하는 아시아의 서, 동남부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인도(India)를 넣고, 파키스탄(Pakistan), 방글라데시(Bangladesh), 미얀마(Myanmar), 네팔(Nepal), 부탄(Bhutan), 스리랑카(Sri Lanka), 몰디브(Maldives), 인도네시아(Indonesia), 태국(Thailand), 캄보디아(Cambodia), 라오스(Laos), 베트남(Vietnam), 브루나이(Brunei), 싱가포르(Singapore), 필리핀(Philippines), 동티모르(East Timor) 그리고 말레이시아(Malaysia)까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드(grid)의 세로축 경선(meridian)으로 나누는 동경(東經:east longitude)에서 가로축 위선(緯線:Circle of latitude)으로 나누는 북회귀선(北回歸線:tropic of cancer)과 적도(赤道:equator)사이에 들어가는 군체들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동경80°에서 120°사이에 있다 하지만 반대로 서경60°에서 85°사이에는 서인도제도가 있다.

이 동경과 서경범위는 생물군과 기후지형적으로도 일치하는 영역이다.

자연환경적으로도 분간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개체군들을 동인디즈(East Indies)라 하거나 혹은 동인도(East India)라고 통칭한다.

실제로 서양해적세력들은 17세기 그들이 말하는 대항해시대에서 황금시대를 구가 할 때 서인도제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관찰한 결과이다.

그런데도 서인도를 관할하던 회사는 그 존재가 아주 미미할 정도로 보잘 것 없게 나타난다.

1621년에 설립된 네덜란드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는 자금부족으로 1790년에 해산하였고 1664년에 설립한 프랑스 서인도 회사(French West India Company)역시 캐나다의 아카디아(Acadia:Nova Scotia州), 대소(大小) 앤틸리스 제도(Antilles),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Cayenne), 아마존에서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Orinoco)에 이르는 남미의 영지를 임대하였으나 1674년 허가가 취소되면서 해체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그 외 덴마크(Danish;1659–1776)와 스웨덴(Swedish:1787–1805)회사가 있었다는 설명뿐이다.

실제로 서양해양세력들이 주 활동무대가 분명히 서인도(西印度:West Indies)임에도 네덜란드 뿐만아니라 힘께나 쓰던 서세 모든 나라들은 동인도(East India)만을 식민지로 삼았다고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식으로 그들은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까?

바로 오리엔탈문명이 산재된 인도영역인 서인도제도에 근거한 그들의 흔적을 지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희한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게르만계네덜란드(German-Dutch)식물학자(botanist)인 칼 루드비히 브룸(Karl Ludwig von Blume:1796-1862)의 저서“일본과 인도군도의 난화주요품종(Collection des Orchidées les plus remarquables de l'Archipel Indien et du Japon:1858-1859)이란 제목에서 “de l'Archipel Indien et du Japon”의 문장을 보면 인도열도 또는 군도“l'archipel Indien”란 단어 앞에 'de'가 붙어 있으며 일본“Japon” 앞에는 'du'가 붙어 있다.

일본이름 앞에 붙어야 할 군도(群島),열도(列島), 무더기, 무리, 다도해(多島海)란 뜻의 아키펠(Archipel)이란 단어가 인도에 떡하니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l'(le,la)은 정관사의 생략형임을 알 것이다.

현재 프랑스어로 일본열도를 "Archipel Japonais" 라고 하고 있으니 단번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그렇다, 게르만계네덜란드의 식물학자 “칼 루드비히 브룸”이 책을 펴낼 시점 1858년-1859년까지만 하더라도 인도(印度:Indien)를 열도나 군도로 또는 다도해로 지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디즈(Indies)에 들어가 있는 인도(印度:Indien)가 대륙 아니라 셀 수도 없는 군도(群島)로 존재하였고 오히려 일본(Japon)은 열도(列島)가 아니라 하나나 둘 정도 아마도 셀 수 있을 정도의 섬(島)으로 존재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印度:Indien)는 인도가 아니며 현재 아시아의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은 근세기에 옮겨진 지명임을 알게 한다.

그와 동시에 네덜란드 인디즈(Netherlands Indies)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도 이것을 아주 무시할 수 없었는지 지금도 카리브해를 대앤틸리스 제도(Greater Antilles)와 소앤틸리스 제도(Lesser Antilles)로 나누고 있으며 이것을 글쓴이는 대앤틸리스는 서인도, 소앤틸리스는 동인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래야만이 오리엔탈문화의 시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네덜란드의 정체

 

본 블로그 글 “두충(杜沖)의 모순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6 ”에서 두충나무를 살펴보면서 나막신에 대한 것을 잠시 했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나막신으로 연결되고 있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를 파헤치치지 않을 수가 없고 다시 나막신을 살펴본다.

어쨌거나 갈수록 세계삼한역사관의 신념은 굳건해지는데 반해 취약할 수밖에 없는 오서독스(orthodoxy)한 물증들이 부족한데 가끔 강박관념적인 갈증에 목이 타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그 만큼 감내해야 할 역사가 녹녹잖고 밝힘이 힘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네덜란드(Netherlands)는 홀랜드(Holland), 화란(和蘭), 하란(荷蘭), 니덕란(尼德蘭), 홍모인(紅毛人), 저지국가(低地國家)와 그리고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더치(Dutch)라고 불리는 나라이다.

우리는 서세라고 하면 첫째 비주류라는 것이고 둘째 늘 돛을 단 배를 타고 부를 찾아 여기저기 헤메는 종족 삼한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던 해구(海寇), 왜구(倭寇), 그리고 소위 해적(海賊)이라는 사실이고 이들은 고려말에서 조선초 걸쳐 삼한해안지역에 끊임없이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부류이며 고려말에서 조선까지 극심하였다는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다.

이것들을 원류로 하여 근세기에 거대한 자본을 축적한 무리들로 나타나 권력을 장악하고 각 지역연고와 가문의 배경으로 마치 오랜 된 역사가 존재하는 냥 하나의 역사 주체인 삼한과 크게 대적한 괴물로 등장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서세(西勢)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흐름의 역사로 볼 때 서세(西勢)는 오리엔트문화를 증오하거나 배척하는 세력이며 이것을 서세의 문화권으로 바꿔치기하는데 혈안이 된 세력들이라 할 수가 있다.

이 서세(西勢)란 무리 속에 주축세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의 역사”틀에서 존재하였고 절대왕정(絶對王政)의 15세기에서 산업혁명이전 18세기후반까지 중상주의(重商主義)경제정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산계급으로서 소위 "하나의 역사"를 파괴시키고 분리하여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들이며 또한 시민혁명의 주체가 된 부르주아(bourgeois)라고 하는 세력이다.

즉 서세(西勢)는 근세기에 물질자본을 안고 태동한 부르주아라 할 수 있다.

15세기에 맨 먼저 등장한 서세는 포르투갈이고 그 다음이 네덜란드이며 그 이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정체가 모호한 세력 잉글랜드가 등장하게 된다.

이때 네덜란드는 더치공화국(Dutch Republic:1581–1795)이라는 이름을 달고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의 역사아래 비주류였던 서세를 역사적으로 국가나 나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해야 마땅하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이들 서세들을 나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목적에 의한 연고나 종족을 중심으로 하는 특수한 조직으로서 각자 가문과 집안을 매개체로 하여 점차 집단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들이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주류로 바뀌었을 때 전부 한 지방 또는 고을(州)의 씨족 가문의 신흥귀족으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우리 삼한역사관계에서 기이한 인연을 가진 나라로 나타나고 근세기에 일본과 함께 참으로 어거지 같은 사연으로 연결되어 애증이 있는 나라중에 하나이다.

1627년에 우리에게 박연(朴淵/朴燕)이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의 선원 얀 얀츠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1595-?)가 제주도에 표류한 사건이 그렇고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한 핸드릭 하멜(Hendrick Hamel:1630-1692)이 그렇다.

따지고 보면 모두 당시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이고 해구이며 왜구일 뿐이지만 근세사가 서세를 선진문명사회의 인물로 그렸고 이를 서양역사문화로 만들면서 문화역사적으로 동양역사보다 우월하게 포장한 것은 물론이고 선진사회로 인지된 부분에서 우리모두가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가 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때문에 정작 그들의 불온한 당시 신분은 온데간데 없어졌으며 오히려 조선사회가 가해자가 되버려 야만인으로 취급되면서 후진적인 모습만이 부각된 면이 많다.

하멜표류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이 한사코 현재 한반도제주도에 모두 표류했다고 하지만 현재 한반도 해류가 그것을 답해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자연이치가 이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란 점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동아시아 열도에는 일본, 유럽해안지역에는 네덜란드 식으로 갖다붙여놓고 오늘날 그것이 바른 역사라고 하고 있으니 황망할 따름인 것이다.

 

일본정부가 발행한 네덜란드어 화폐

 

Netherlands Indies De Japansche Regeering 1 Gulden ND (1942)

 

Netherlands Indies 10Guld Japanese Invasion Money- Netherlands 10 Gulden

 

네덜란드의 정체를 밝히는데 위 화폐그림은 논점을 어느정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물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화폐의 실물확인이 어렵지만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으로는 매우혼란스러운 것이다.

위 화폐설명에 네덜란드 인디즈의 일본정부(Netherlands Indies De Japansche Regeering)에서 발행한 화폐1휠든(gulden)으로서 이것의 가치는 100센트(Cents)로 1달러(Dollar)의 가치가 있는 화폐임을 알 수가 있다.

소위 태평양전쟁(1942-1945)이라는 사건 속에서 1942년에 일본정부(Japansche Regeering)가 네덜란드 인디즈(Netherlands Indies)에서 발행한 네덜란드어 화폐라는 것인데 즉 일본군이 점령한 인디즈(Indies)에서 사용된 군용수표(軍用手票)와 성격이 또 다른 화폐라 할 수 있다.

언뜻 들어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서 독자적인 화폐로 관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전쟁점령지, 그리고 전쟁 중인 시기에 일본정부가 굳이 네덜란드어로 화폐를 발행했다는 사실에서 여러가지 의문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전쟁 승리도 보장되지 않는 지역에 화폐를 발행한다?

이것도 이상하지만 왜 일본어의 화폐가 아닌 네덜란드어의 화폐인가 하는 점이다.

네덜란드어로 야폰세이 리헤이링(Japansche Regeering)하여 일본정부가 만든 화폐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1942년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난 후 서구의 영향을 없애기 위해서 네덜란드어와 영어의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일본어 사용을 장려하였다는 자료가 버젓이 남아 있다.

앞에서 보았지만 일본이 점령하였다고 하는 곳이나 네덜란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모두 인디즈(Indies)에 포함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이 화폐의 실상은 우리가 추측하고 있는 상식적인 문제와 다르다는 것이다.

인디즈는 오래전부터 네덜란드 식민지이었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과 네덜란드어로 소통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본정부가 1942년부터 군사적으로 점령하였다면 어렵게 네덜란드어로 일본정부가 새롭게 화폐를 발행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무엇때문에 화폐를 발행했을까?

일본이란 나라자체가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의혹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 유래없이 기원전 660년부터 시작한 제왕(Emperors)의 대 이음이 장장 125 연대를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흔한이야기 아니며 그것을 년수로 따진다면 2,674년동안 한번도 제왕이 대를 끊지 않고 계속 연결되었다고 하니 기너스북에 기재가 되어야 마땅한 이야기다.

참으로 희한한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더욱 특이한 집단의 역사라는 것을 알지만 이를 비판없이 그대로 인정하는 바보같은 족속들은 친일사학자들이 넘쳐나는 한반도역사학계뿐일 것이다.

현재일본(Modern Japan)역사에서 일본제국(日本帝国:The Empire of Japan,1868-1945)이라고 정하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이 분명치 않으며 그들이 각종문서에 근세기 그들의 행적을 빌어 대일본(大日本)이라 하고 있지만 영어권에서 "Great Japan" 또는 "Great Empire of Japan"이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 화폐 아랫단에 "大日本帝國政府"라고 하였지만 로마 라틴어가 한자(漢字)라는 설을 감안하여 한자가 근세기에 서양각종문서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한다치면 일본제국은 또 다른 역사관점에서 보아야 할 대상이지 현재 동아시아 동양계 열도 일본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 화폐만 가지고 따진다면 오히려 사라진 명칭 더치(Dutch)라고 하는 네덜란드가 일본제국이어야 합당한 이야기다.

과연 더치가 일본제국인가?

위 화폐에서 일본정부라 한 것은 정부조직위에 어떤 체제 즉 근세기 역사에서 들어낼 수 없는 존재가 주체라 할 수 있으나 현재 짐작가능한 것은 네덜란드라고 하였지만 더치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Japanese occupation Burma 10 rupees(1942-1944)

 

Japanese Government during the occupation of Malaya, North Borneo, Sarawak and Brunei(1944)

 

Japanese Government(Philippines) 500 Pesos(1944)

 

Map of the Dutch East Indies showing its territorial expansion from 1800 to its fullest extent prior to Japanese occupation in 1942. (네덜란드 령 동인도의 지도는 1800년부터 일제점령기 1942 년 이전까지 최대 영토 확장범위)

 

앞에 화폐가 네덜란드어로 발행되었다는 사실에서 반 할 수 있는 물증으로 위 세 가지의 화폐를 올려보았다.

똑 같이 일본정부가 발행한 화폐이다.

대신 네덜란드어가 아닌 영어로 된 화폐인데 1942년 같은 시대에 위 세 가지의 화폐가 발행된 지역은 물론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점령했다고 하는 지역이며 이곳에서 마찬가지로 일본정부가 발행한 화폐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먼저 화폐처럼 네덜란드어가 아니고 영어이다.

여기서 또 의문점은 왜 일본어로 화폐를 만들 수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위 화폐 그림아래 설명을 보면 버어마(Burma), 말레이 반도(Malaya), 북부보르네오(North Borneo), 사라와크(Sarawak), 브루나이(Brunei), 그리고 필리핀(Philippines)까지 화폐 발행지를 알 수가 있다.

이들 나라들 중에 사라와크와 브루나이는 위 네덜란드 영역지도를 보더라도 분명 네덜란드 인디즈(Netherlands Indies)영역에 들어간다.

그럼에도 네덜란드어가 아닌 영어로 화폐가 별도로 만들어 졌다고 하는 것은 같은 일본정부의 점령지 관할이라는 점, 그리고 지배권역이라는 점에서 설명이 불가능하다.

일본정부가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분명 연합군과 대치하여 전시상태에 있었다면 경제활동이 부자유스러울 때인데 군표도 아닌 실제 자국언어가 아닌 네덜란드 화폐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은 그곳 환경이 네덜란드 문화가 뿌리 깊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절대로 식민지권이라는 이유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이 화폐가 발행된 지역은 카리브해권역이 되어야 맞고 그곳에는 뿌리 깊은 네덜란드 원주민들이 거주했다는 이야기로 집약될 수가 있다.

같은 인디즈라고 하면서 그리고 일본제국이 점령한 지배권역이라고 하면서 이처럼 네덜란드어 화폐와 영어화폐가 동시에 발행되는 상황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동양계 일본인들이 점령한 곳에 지배국인 일본어화폐조차 만들어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일본제국이라고 하고 일본정부라 하는 주체가 정말 현재 열도의 일본이 맞는지 의문스러운 것이며 일본어가 영어나 네덜란드어 그리고 한자(漢字)보다도 그들의 점령지에서 홀대받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네덜란드 카리브해가 본거지

 

청장관전서 제65권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 이국(異國)편에 보면“홍모국(紅毛國)이라고도 하는 아란타(阿蘭陀)사람들은 살갗이 희고 머리털이 붉고 코가 높고 눈이 둥글며, 늘 개처럼 한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며, 아름답게 꾸민 모직(毛織)옷을 많이 입는다고 했으며 먼 나라와 무역하기를 좋아하여, 교류파(咬吧)에 관(官)을 두고 일본과 그 밖의 여러 나라에 상선을 보내는데, 10년마다 한 번 회계(會計)하였던 모양으로 그 차관(次官)은 해마다 6~7월에 나가사끼(長崎)에 와서 이듬해 봄에 에도(江戶)에 나아가 연시(年始)와 교대(交代)의 예(禮)를 올리고, 다시 6~7월에 오는 사람과 교대하여 가는데, 그 사람을 가비단(加比丹)이라 하는데 카리브해(加勒比海)의 사람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사서에는 네덜란드가 실제로 어디에 있었다고 나타날까?

위는 이덕무(李德懋)의 저술인데 1795년(정조19) 내탕금(內帑金)을 받아 아들 광규가 편집, 간행하였다고 하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청령국지2(蜻蛉國志二) 이국편이란 짧은문장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가 있다.

이글에서 네덜란드인을 홍모인(紅毛人)이라 하여 홍모국(紅毛國)임을 알 수 있고 아란타(阿蘭陀)역시 네덜란드를 칭하는 명칭임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은 살갗이 희고 머리털이 붉고 코가 높고 눈이 둥근 백인(白人)이 틀림없다.

또한 연시(年始), 연하, 새해인사와 교대(交代) 또는 복명(復命)하는 예(禮)를 에도(江戶)에 가서 올렸다는 것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있었던 에도(江戶:Edo)에 이 백인들의 상전(上典)이 있었던 곳이란 말이다.

즉 에도(江戶)라는 곳을 도쿄(東京)라고 하지만 결코 열도 동양계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아닌 서세의 상전(上典)들이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글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로 네덜란드인들의 본거지가 카리브해, 가비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모직 옷을 입고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며 머리칼이 붉고 살갗이 흰 백인(白人)들은 에도(江戶)에 가서 예(禮)를 올리고 난 후 1년마다 교대하여 되돌아가는 곳이 바로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West Indies)라고 하는 카리브해(Caribbean Sea)이기 때문에 이 백인들은 카리브해(Caribbean Sea)를 본거지로 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가 있고 적어도 홍모인 또는 아란타라고 하는 네덜란드인들은 카리브해가 본거지라는 것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때문에 1627년, 1653년 각각 제주도에 표류한 박연이나 하멜 역시 카리브해를 본거지로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본 블로그가 그 동안 피력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서의 제주가 북아메리카대륙과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였을 것이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이에 더하여 현재 네덜란드령으로 나타나는 카리브해의 군도 퀴라소(Curaçao), 신트마르턴(Sint Maarten), 아루바(Aruba), 보네르(Bonaire), 사바(Saba), 신트외스타티위스(Sint Eustatius)등은 식민지 관할 령으로 감추고 있지만 네덜란드 본거지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순일편(旬一編)

청령국(蜻蛉國)

이덕무(李德懋)의 일본기(日本紀)에, “청령은 옛 일본국의 명칭이다. 주(周)나라 유왕(幽王) 때 협야(挾野)라는 자가 화주(和州)의 무방산(畝傍山) 동남쪽 추원(樞原)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풍추진주(豐秋津洲)라 하였다. 일본사람들은 잠자리[蜻蛉]를 추진(秋津)이라고 하는데, 그 지형이 잠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때 처음 중국과 교통하였다. 사서(史書)에서는 왜노(倭奴), 또는 야마(野馬)라고 하였다. 당나라 함평(咸平)연간에 해가 뜨는 곳과 가깝다고 하여 국호를 ‘일본’이라 고쳤다.”하였다.

古くは日本の国土を指して秋津島(あきつしま)とする異名があり、

옛날에는 일본의 국토를 가리켜 秋津島(잠자리 섬)라 하는 이명이다.

倭の国を蜻蛉島(あきつしま)と」呼

왜국을 蜻蛉島(잠자리 섬)라 하였다.

 

또한 위는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수록류(隨錄類)를 모아 엮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보면 일본이 근원한 지형을 잠자리를 닮았다고 하여 청령(蜻蛉)이라 하거나 추진도(秋津島) 또는 청령도(蜻蛉島)라 한 이 청령국(蜻蛉國)도 카리브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된다.

글쓴이의 판단에서 바로 잠자리 형태지형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일 가능성이 높고 쿠바(Cuba)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까지를 배제 할 수 없으며 이것들을 현대들어 일본이라 하지 않고 대앤틸리스 제도(Greater Antilles)라든가 또는 작은 의미의 서인도제도로 불리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이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섬은 콜럼버스착각지도에 지팡구(Cipangu)로도 지목된 지형이고 위치이다.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원문)

一. 禁標定界之外 毋論大小事 欄出犯越者 論以一罪事

1. 금표(禁標)한 정계(定界) 밖으로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함부로 뛰쳐나와 범월(犯越)하는 사람은 사형(死刑)으로 논단(論斷)할 것.

一. 路浮稅 現捉之後 與者受者 同施一罪事

1. 노부세(路浮稅 : 倭債)는 현장에서 잡은 뒤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을 똑같이 사형으로 다스릴 것.

一. 開市日 潛入各房 密相買賣者 彼此各施一罪事

1. 장이 서는 날(開市日) 방마다에 몰래 들어가서 비밀로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은 각각 사형으로 다스릴 것.

一. 五日雜物入給時 色子庫子小通事等 和人切勿扶曳毆打事

1. 닷새마다 잡물(雜物)을 들여놓을 때 색리(色吏), 고자(庫子), 소통사(小通事) 등은 화인(和人 : 일본인)들을 절대로 끌어내어 때리지 말 것.

一. 彼此犯罪之人 俱於館外 施刑事

1. 서로의 범죄인은 모두 관문(館門)밖에서 형을 집행할 것.

1683년(숙종9)癸亥 八月 日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살펴본 결과에 의하면 왜관도 북아메라카대륙 멕시코만과 접한 미시시피주에 있었다고 관찰된바가 있었다.

위는 1607년(선조40년) 부산의 두모포(豆毛浦)에 왜관을 설치, 대마도 관인(官人)과 상주(常住)하는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이 거주하게 되고 또한 일본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조선과 일본상인들의 접촉도 많아지면서 동시에 국금(國禁)이 무시되고, 밀무역(密貿易)·잡상행위 등 여러가지 폐단이 따르게 되어 조선조정(朝鮮朝廷)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683년(숙종39년)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이 돌아올 때 동래부사(東萊府使) 남익훈(南益熏:1640-1693)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교섭관계를 위임받고 있던 대마도주와의 전문(全文)5개조(條)에 달하는 약조(約條)를 체결한 것으로 왜관(倭館)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禁制條項) 다섯가지를 새긴 비석으로 약조제찰비라 말한다.

그런데 위 5가지의 약조를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실로 어지러운 질서를 잡기위해 엄중한 문구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和人切勿扶曳毆打事” 즉 화인(和人)들을 절대로 끌어내어 때리지 말라 한 것이다.

아마 그 때는 화인(和人)들이 조선관인에게 잡히면 소위 요새말로 작살이 난 것처럼 보인다.

이 화인(和人)이 실제로 누구냐는 것인데 현재 번역원에서는 일본인이라고 첨가하고 있지만 이 일본인이 현재 열도 일본인인가 아니면 카리브해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가비단(加比丹)인가 하는 문제가 있고 이 가비단이 활동하는 지역 내에 청령국(蜻蛉國)이 있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네덜란드(和蘭)와 일본(和人)

 

그렇다면 실제로 네덜란드와 일본인을 같이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백인과 동양인을 같이 볼 수 없겠지만 하나의 역사 속에서는 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이 두 국가명이 같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함이다.

다 아다시피 네덜란드는 화란(和蘭)이라 한다.

그것 이외 알려진 바로는 네덜란드(Netherlands)는 홀랜드(Holland), 하란(荷蘭), 니덕란(尼德蘭), 홍모인(紅毛人), 저지국가(低地國家)와 그리고 더치(Dutch)등으로 나타난다.

현재 열도 일본(日本)을 화(和)라고도 하고 스스로 화인(和人)이라고도 한다.

일본 옷인 기모노를 화복(和服)이라고도 하였으며 주로 기모노를 입은 일본여성들은 저급하게 생긴 나막신 게타(下駄)를 신는다고 되어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최초 율령국가 대화(大和) 즉 '야마토(やまと)'라고 하여 대화(大和)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더하여 화(和)를 일본이란 나라이름의 대명사라 하거나 또한 지금의 일본 지명(地名)까지 말하고 있다.

화(和)는 한자에도 와, 과 로 연결시키는 접속사이다.

이것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작거나 크거나 네덜란드와 무엇인가 엮여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 열도일본인들은 화(和)사상(思想)을 이야기하면서 평화(平和), 조화(調和), 화목(和睦)까지를 이야기한다.

마치 그들이 평화의 사자인 것처럼 용빼를 떠는 것이 웃습다.

열도 일본인들은 이제 과거 조잡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 여유가 붙었다는 것일게다.

이러한 여유는 동양사가 한문으로 만들어지면서부터, 아니면 하나의 역사틀 속에서 이미 화란(和蘭)이라 한 것을 네덜란드라고 한데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네덜란드와 일본은 근세기 역사에서 여러 가지로 비슷하게 섞여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섞이거나 엮임의 현상은 일본만의 일방적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으며 근세기 역사에서는 오히려 네덜란드 역사가 먼저 일본역사를 인용한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란 근세기 역사적 존재라 함은 동남아시아의 인디즈(Indies)가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이 인디즈를 통하여 동아시아 대륙사에서 열도 일본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1588년 네덜란드가 해외진출을 시작하여 소위 황금시대를 구가 했던 17세기에 유한회사, 연합동인도회사(VOC: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설립하였고 누구의 방해도 없이 세계제일의 무역국이 되었다는 것은 서인도제도가 아니라 동인도제도를 영역에 넣고 네덜란드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한가지는 유럽대륙에 있었던 네덜란드로부터 동아시아까지 항해하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울 수가 없었다면 그 중간에 기착점이라 하여 만들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때문에 네덜란드 상인들은 세계 어느지역에도 갔다고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남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등에 방대한 식민지와 함께 1625년에는 북미대륙 뉴욕에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 명명하여 식민도시까지 건설하였다 하였으며 그외 오세아니아, 뉴질랜드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당시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던 동아시아의 열도 일본에까지 진출하여 나가사키에 상관(商館)을 설치하고 데지마(出島)에서 계속 무역을 하였다 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동아시아가까이에 코리아란 지명과 중국이란 역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 때문에 일본에는 양학(洋學)과 비슷한 난학(蘭學)이란 네덜란드 문화까지 심어진 것이라고 근세사는 세심한데까지 배려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은 서술들은 조선관계역사와 비교할 때 매우 편파적이라 할 수 있고 또는 공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는 불평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미 그들은 정해진바대로 열도일본을 선진국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서세의 세심한 배려덕분에 근본도 없었던 일본이란 역사가 신성처럼 갑자기 1868년 명치란 이름으로 등장하였고 이때부터 일본이 동아시아대륙사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도 일본은 네덜란드 덕분으로 쇄국정책을 일삼던 에도 막부가 멸망하고 왕정복고가 되어 신흥국으로 발돋움하는 시기였던 반면에 조선에서는 이때 재정이 열악함에도 난데없이 경복궁을 재건한다고 당백전(當百錢)을 풀어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몰아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할 때라 하였다.

극과 극이다.

사실상 네덜란드가 연결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일본은 자본력을 축적하거나 서양문화발달을 흡수하면서 오늘날 강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과정이 완벽하게 그려진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가 일본과 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북미대륙까지 뻗쳤던 그들의 행동반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인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에서 활동한 상황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고 완전히 쏙 빠져버렸다는 이상한 행로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황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서세들의 본거지는 카리브해이다.

17세기에 중앙아메리카대륙연안과 카리브해는 그야말로 해적신분인 서세들에게 활동본거지로 적합한 곳으로서 은신처, 피난처 등 지형적인 조건이 딱 알맞았기 때문에 오늘날 서세라고 하는 세력들은 모두 이곳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처지였음에도 그들의 근거지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왕국(England)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1533-1603,재위:1558-1603)의 비호까지 받았던 해적왕 잉글랜드인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5-1596)가 활동한 지역이 오늘날 단향산(檀香山)이라 할 수 있는 버뮤다(Bermuda)를 주위로 카리브(Caribbean)까지의 영역을 말하고 있고 당시 해상제국인 스페인과 치열한 전쟁을 했다는 사실까지 말하고 있지만 절대로 카리브해가 그들의 본거지라고 기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세들의 관심은 오직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역사진실을 통째로 숨기고 있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 하였기 때문에 난학(蘭學)이라고 하였으며 난학은 화사상(和思想)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쨌던 네덜란드와 일본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본은 네덜란드의 식민지라 하지 않는다.

이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나막신(clogs)과 게타(geta)

 

일본과 네덜란드를 지금까지 알아보았다.

나막신과 게타는 삶의 도구로서 일상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막신을 백과사전에 보면 나무를 파서 만든 신이라 하여 격지·목극(木屐)·각색(脚濇)·목리(木履)·목혜(木鞋)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에 나막신으로 통칭되었고 어문학적으로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라 하였으나 지방에 따라 나막개·나모께·나무신·목신·남신·나막개짝·토막신·껏두기·미엉·남박신·나묵신·나묵개·나맥신·나목신·나목개 등 다양하게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나막신은 주로 비올 때 진땅에서 신을 수 있도록 가벼운 나무를 사용하여 높은 굽이 붙어 있는 신발이라는 통념이 생긴 것이다.

이 나막신이 쓰임에서 유럽에서는 배수가 잘 되지 않는 도시에 오물이 넘쳐나 긴 옷을 입고 활보하던 귀족들에게 곤욕스러운 것인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굽은 높은 신발을 신게 되었고 때문에 나막신을 신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나막신은 주로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신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왜나막신(倭Patten)이라고 하는 게타(下駄)가 있고 네덜란드인들이 신는 나막신 크록스(clogs) 또는 크롬펜(Klompen)이다.

일본인들이 신는 게타(下駄)의 하단에 '이(歯)'라고 하는 나무굽 두 개를 대고, 윗 판에는 세 개의 구멍을 내어 '콧실(鼻緒)'이라고 불리는 끈을 묶어 맨발 혹은 일본버선을 착용한 채로, 엄지와 검지 발가락사이에 끼우고는 신는 것으로 되어 있다.

네널란드의 나막신은 나무를 깍아 발이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크록스(clogs)에 대한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는다고 한다.
유럽북부와 남부에 있었던 켈트족과 게르만족에 의해 기원되었을 것이란 가능성을 말하고 있을뿐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나막신이 발견된 것은 1230년과 1280년, 네덜란드의 클롬펜(Klompen)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암스테르담(Amsterdam)과  로테르담(Rotterdam)에서 발견되었다.

가죽구두와 고무와 헝겊으로 만들어진 편한 신발이 등장함에 따라 2차세계대전 이후부터 사라진 나막신은 현재는 네덜란드에서는 전통소품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옛날에는 가죽신발을 부유층만 신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막신을 서민층에서 신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자는 자루같이 불룩한 검은색 바지에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여자는 풍부하게 퍼진 검은 드레스에 가슴부분에 정교하게 수를 놓은 레이스 장식이 있는 옷을 입고 신발은 주로 나무신을 신으며 흰색 모자를 쓰는 것은 마치 일본여인들이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는 것과 좀 어색하다 싶은 것은 다르지가 않다.

현재의 네덜란드 지방에 거주하던 게르만어를 쓰는 사람들은 1250년경부터 자신들을 네덜란더(Nederlanders)라 자칭하였고 네덜란드어로 네더“Neder”는 '낮은(low)' '바다가까이 바다(near the sea)'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대가 낮고 바다가까이 거주하는 자신들의 지리적 특성을 묘사 한 용어로서[낮은(neder) + 땅/국가(Land)]로 정리되는 것이다.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은 나막신을 신는 것은 전통적으로 낮은 지형에 쓰임새가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나라에는 배수를 하기 위한 풍차가 유명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교양영어사전에서 보면 네덜란드(Netherlands)라는 국명은 국토의 20퍼센트가 바다수면 아래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전제하고 영어로 직역하면 'Low Country(낮은나라)'라는 뜻이며 홀란드(Holland)는 네덜란드 한 지역의 국한된 이름이지만 영어로 “숲이 많은 땅(wooded land)”이라는 뜻의 명칭과 대비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매우 그리고 신중하게 살펴볼 이야기다.

즉 숲이 많다는 것은 우림(雨林)지역이라고 할 수 있고 연중 강우량이 많으면서 습윤하게 유지되며 수목의 생육이 좋아 울창한 밀림이 조성된 숲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토가 낮다는 의미보다 비가 많이 내리는 땅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1934년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Dutch)'란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경쟁국가 잉글랜드의 영어에서 부정적인 어감으로 사용된다고 하여 1934년 그해부터 네덜란드정부는 영어문서 작성에서 '더치(Dutch)'란 용어를 '네덜란드(Netherlands)'로 바꾸어 사용하도록 훈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수백년 동안 이어오던 전통국가의 명칭을 경쟁국가가 사용하는 언어 "영어"에서 부정적으로 쓰인다고 하여 어느날 갑자기 공무원들에게 훈령을 내려 고쳐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인가?

이것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네덜란드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나라명칭보다 영어를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지대가 낮고 바다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그들의 국명인 더치와 관계없이 1934년에 네덜란드로 불리었을 환경이었단 말이다.

즉 지금의 네덜란드 땅으로 1934년에 옮겨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다.

그 이전에는 아마도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인 열대우림지역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더치공화국(Dutch Republic:1581–1795)의 "더치"가 영어에서 그토록 부정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전에 찾아보니 “열등하고 미흡한 것(an epithet of inferiority)”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17세기에 군사적으로 상업경쟁에서 미움을 샀던 영국과 여타 국가들이 시샘을 하면서 생긴 감정들이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자격지심인가?

남이 그렇다 하더라도 정체성의 문제이지 그렇다고 하여 국명을 바꿔버리면 남아날 국가명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이치에 맞는 소리인가?

또한 독일을 의미했던 도이치(Deutsch)에서 좀 더 열등했던 저급 '도이치'가 오늘날 더치(Dutch)라 하였고 본래 게르만족의 고어(古語)에서는 “Dutch”가 민족(民族)을 “Deutsch”는 국민(國民)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였던 것을 보면 거의 같은 용어이며 더치(Dutch)는 프로토-게르​​만어(Proto-Germanic)에서의 국가/사람(national/popular)을 뜻하던 '토이도(theudo)'에서 내려온 단어로 게르만족을 뜻하는 튜튼(Teuton:Germanic or Celtic tribe)이란 단어와도 같은 어원이라고 하여 같은 게르만인임을 나타내던 명칭이다.

더치(Dutch)와 도이치(Deutsch)는 같은 어원에서 파생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대다수를 차지하는 네덜란드인종도 독일게르만과 가까운 게르만계로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언어, 문화, 생활의 유사성도 큰 편이라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독일이 패전하자 호엔촐레른가(House of Hohenzollern)의 아버지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House of Saxe-Coburg and Gotha)의 어머니사이에 태어난  당시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2세(Wilhelm II,1859-1941,재위:1888-1918)가 네덜란드로 망명하였고 당시 네덜란드는 망명한 독일황제를 비호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1차세계대전에서 구세력의 일원이었던 것은 더치(Dutch Republic:1581–1795)이다.

1934년부터의 네덜란드는 정체성이 없었던 나라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히틀러의 나치독일(Nazi Germany)이 제2차 세계대전때 네덜란드를 침공한 것은 다 이런 이유때문이며 독일에 의해 우의가 깨져 버린 것 같지만 실상은 1차세계대전이후 정체성이 변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던 독일과 네덜란드는 게르만으로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 사진은 1860년 프로이센왕국(Kingdom of Prussia:1701-1918) 고려(COREA)의 원정탐험대가 에도(Yedo:江戶)에 진주하는 모습의 그림이라는데 이 시기에 프로이센(Prussia:普魯士,普魯西)은 1864년에 덴마크와의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전쟁, 1870년 프랑스전쟁(普佛戰爭)등이 있었던 때이다.

그렇다면 이 때 그림이라면 늘 상 이와같은 모습의 프로이센이 진주한 곳은 전쟁위기와 상응한 지역임을 알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서세의 상전이 있었던 에도(Yedo:江戶)역시 그러한 환경을 피할 수 없었던 도시임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이 현재 동아시아 열도 일본인가?

1934년부터 네덜란드는 더 이상 더치(Dutch)가 아니며 더치역사도 계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들의 역사 정체성이 그때부터 모호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유럽대륙에 있는 현재 네덜란드의 위치는 실제로 낮은 지역이 틀림없다.

옛날에는 간척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낮은 땅은 항상 바다물이 들어와서 질척거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네덜란드도 낮지만 유럽북부지역 해안지대는 거의가 낮은 해안지대이다.

그렇다고 하여 풍차의 필요성을 몰랐던 것은 아닐터인데 유독 네덜란드에 풍차가 많다는 것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나막신은 아직도 남아 네덜란드의 주요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오랫동안 이 나막신을 신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며 사람들이 이러한 관습에서 길들여진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연에 의한 관습이나 전통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인류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것은 특별하게 없다.

풍차(風車:windmill)는 낮은 곳에 있는 물을 퍼올리는데 사용되었고 국토가 해면(海面)보다 낮아 배수(排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늘 상 바닷물이 빠져나간 지대는 질척할 수밖에 없었고 나막신을 신게 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열대몬순기후나 열대우림기후에서 비가 많이 내려 신는 것과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1934년 현지로 옮겨 네덜란드란 이름을 형성할 때 지대가 낮은 그렇다고 하여 비가 많이 오지 않기 때문에 유럽에서 신는 나막신을 신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주로 유럽대륙에서 신는 나막신은 나물르 통째로 파 만든 나막신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경산 임당동 유적 출토 신라시대 나막신.[연합뉴스]

 

                                             네덜란드 나막신(荷蘭木鞋:Klompen)

 

나막신 유물이 신라시대 목제 유물이 한백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경기 안성시 죽주산성에서 확인한 A6 집수시설에서 발견됐다[연합뉴스]

 

           독일 라이프치히 소재 그라시 민속박물관 컬렉션에서 찾았다는 조선나막신[연합뉴스]

 

네덜란드의 나막신 모양이 놀랍게도 경기 안성시 죽주산성에서 확인한 A6 집수시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신라시대(新羅時代)나막신과 똑같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풍차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지대가 낮아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신라는 과연 무엇 때문에 네덜란드와 똑 같은 나막신이 필요하였을까?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한반도 경상도 땅에 풍차가 있었던가?

한반도 동해안이 지대가 낮아 배수가 안되어 땅이 늘 상 질척했던가?

서양 네덜란드와 동아시아 신라(新羅)의 나막신이 거의 하나의 모양처럼 똑같다면 양쪽 쓰임새도 거의 비슷해야 하거늘 서양과 동양의 역사기술 자체가 이렇듯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문제이며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도 어느 한쪽 이야기는 진실의 역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 라이프치히 소재 그라시 민속박물관에서 찾았다고 하는 조선나막신도 창이 높아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신는 신발로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나막신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신발모양을 하고 있는 신이기 때문에 비가 억수같이 내려 신발안쪽으로 물이 들어가면 그야말로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하기사 모든 신발이 다 그렇지만 이때는 발바닥과 따로 놀아 신발이 신발이 아닌게 된다.

그러나 게타(下駄)는 나무판에 끈만 연결하였을 뿐 겉이 싸여지지 않아 열대몬순 또는 열대우림의 습한 기후가 지속되는 상태에서 우기가 길어 늘 상 마른 땅에서 생활할 수 없는 질척거리는 진 땅을 밟아야 하는 경우를 대비한 그야말로 원초적인 나무신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나무 통째로 만든 나막신과 일본인들이 신는 게타에서 형태적인 차이가 나는 것은 기후와 지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계층별 차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예를 들어 서민들은 게타형태의 신을 신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도 상위계층의 사람들은 수례나 가마를 이용하였기때문에 게타보다는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위 나무 통째로 만든 나막신은 거의가 도시에서 신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서민들이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에서 겉이 싸여진 나막신을 신었을 경우 물이 나무신 안으로 들어와 발바닥이 미끄럽고 힘이 들어가 나중에는 걸을 수가 없게 될 것이 뻔하다.

또한 물기가 내부에 들어 차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살갗이 물러지게 되며 신에 닿은 부위는 상처가 나고 습한 기후 탓에 상처가 심하게 덧나 농(膿)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하여 열대우림기후일 경우는 건기가 짧아 나무신을 햇볕에 말릴 수가 없다.

열대 우림기후나 열대 몬순기후에서는 아예 신을 신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곳에는 통나무로 만든 나막신이 아니라 바로 게타(下駄)가 적합하고 제격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도시와 시골, 귀족과 서민들의 이처럼 다른 나막신을 신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두충(杜沖)의 모순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6”에서 말했듯이 현재 열도 일본인들은 이 게타(下駄)를 지금은 따뜻한 지방보다 추운지방 쪽에서 더 많이 찾고 아름다운 외형을 자랑하는 동북지방의 오동나무로 만든 것은 고급으로 여겨지며 일본여자들이 게타(下駄)를 신는데 화복(和服)이라고 하는 기모노에 게타를 신어 맵시를 부리는 것으로 변질 시켜놓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신었다고 하는 게타(下駄)의 본래 쓰임새는 열대몬순, 우림기후에서 마음편하게 신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현재 일본인들은 마치 지금 열도에서 오래 전부터 게타(下駄)를 신었다고 강조하고 싶어 중국 신화집과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상상의 생물형상과 비슷하게 빼긴 텐구신화(天狗神話)까지 들먹이고 그들의 고대 역사적인 면을 이 게타(下駄)로도 부각하고자 노력하지만 실제는 그들이 거주하던 곳에 기후가 열대우림이나 몬순기후로서 매우 습하고 스콜(Squall)같은 많은 비가 내려 땅이 진땅이 되었을 때 서민들이 장애없이 편하게 신을 수 있도록 사용하던 것이란 것을 속일 수가 없다.

그들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역사라 꾸며놓고자 하지만 더욱 가당찮은 것은 이 텐구(天狗)가 등장하는 아래 그림에 보면 동양 오리엔트문화사상에서 신물(神物)이나 신성한 동물로 비유되고 있고 인도에서는 인드라(帝釋天:Indra)가 탔다고 하는 코끼리(象:Elephantidae, elephant)를 잡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도 동양사상을 무시하고 서양사상을 숭앙하는 못된 습성적인, 이율배반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들역시 정체성이 모호하기는 현재 네덜란드인과 진배없다고 할 수 있다. 

열대지방에 있었을 코끼리가 열도에 존재하였다고 믿게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희박한 것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열대우림기후지역(Tropical rainforest climate:Af)

                                  열대몬순기후지역(Tropical monsoon climate:Am)

 

마무리

 

독립, 해방이 우리들에게 절실했던 것처럼 당시 서세들에게도 인도(印度)란 명칭과 오리엔탈문화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택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지명단어 인도(印度)는 그들에게 압박이거나 억압이었을 것이다.
인도(印度)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동서양을 분리시키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인도(印度)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메리카대륙이 자유스럽게 되는 것이며 오리엔탈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여겨 인도(印度)지우기는 서세(西勢)내셔날리스트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것이 서세가 만든 모순덩어리의 서양사가 만들어진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막신과 연관되는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을 여러각도에서 바라보고 역사 연관성과 근세사에서 얼마나 굴절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가감없이 따져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서두에서 오리엔트역사문화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카대륙 전체가 인도(印度:lndia)였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었다.

지금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이러한 모든 사실들이 진실이다.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언(Indian)으로 통칭했다는 것은 이와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이고 물론 인도라 한 것은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한 곳의 원주민을 인디오(Indio)라고 명명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하지만 인도라 했기 때문에 인도라 하였을 것이며 콩심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그곳은 인도(印度:lndia)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담보할 수 있는 삼한역사명칭은 이와 또 다른 문제 속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오리엔탈의 상징적으로서 대표성이 있는 인도(印度:lndia)명칭은 아메리카대륙에서 더 이상 흔적과 자취가 남지 않도록 깔끔하게 청소하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이고 그들에게 서양역사세우기에 장애가 될 거치장스러움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동양오리엔탈문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명칭은 서세들이 만든 서양역사에서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대륙과 전혀 상관없는 거리에 남겨놓았어야 했던 것이 동양(오리엔탈문화와 역사)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바로 서세 해양세력들의 식민지영역이란 틀속이다.

때문에 근세사를 만들면서 동양오리엔탈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명칭의 행방은 마치 서양역사 창조와 연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위해 대항해시대의 시초와 맞물려 있는 유렵대륙이태리출신 콜럼버스를 이용하기 위해 신대륙탐험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의 말을 빌어 그럴 듯한 물증으로 만들고 그의 주장처럼 서인도(西印度)가 있었으니 동인도(東印度)제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암시를 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상식을 빌리면 서인도(西印度)와 동인도(東印度)개념은 아주 단순하다.

카리브해 전체를 볼 수 있었던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결국 그들이 카리브해 전체를 지형적으로 가늠하거나 세밀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4차에 걸친 탐험끝에 얻어진 것이며 비로소 확신을 하게 된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해진다.

1812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주(州), 오하이오강(江)에 있는 피츠버그(Pittsburgh)로부터 남하하여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증기선은 미시시피 강을 탐험하는 첫 배였다는 사실은 그때

까지 미시시피강을 서세들이 함부로 들락거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되며 당시 서세들이 얼마나 지리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사정에서 어두었던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1682년에 프랑스의 탐험가 카브리에 드 라살(Rene-Robert Cavelier de La Salle:1643-1687)이 오대호 지역으로부터 미시시피 강으로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미시시피강 유역을 프랑스령으로 삼았다 것은 한마디로 서세의 역사일뿐이다.

 

그들이 왜 증기선이라고 하였지만 1812년에 처음 미시시피강을 탐험했다고 하겠는가?

그 이전에 마음대로 그곳을 활보할 수 없게 만든 역사주체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때문에 카리브해 전체를 놓고 동(東)과 서(西)를 그때서야 구분할 수 있었으며 나중에 가서야 서인도와 동인도제도라 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근세기에 서인도제도는 서세의 본거지라는 취약점을 감추고 숨기기 위해 그리고 인도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 서인도제도와 똑 같은 지형, 기후조건 환경조건과 생물학적근거까지 고려하여 같은 위도선상에서 찾은 곳이 바로 지금의 아시아 서남과 동남지역이라고 할 수 있고 그곳의 열대몬순기후지역과 우림지역을 동인도(東印度)라 만들고 대항해시대의 산물인 것처럼, 서세의 제물로만들어 식민지영역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확실한 근세기에 발생한 양대전쟁 승리의 전리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세가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우월한 서양사를 가지는 것이며 오리엔탈문화역사를 조각조각분리시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역사를 동양과 서양의 분리역사가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서세의 출현은 참으로 인류에 불행이라 할 수가 있다.

하나의 역사에서 분리되면서 분쟁을 낳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두차례의 인류가 큰 전쟁을 치루어 혼줄이 났었다.

인류를 잉태하고 이끌었던 "하나의 역사"를 그들의 한낱 거품같은 욕심으로 산산이 조각내었으며 수백개의 국명을 붙여 분리시키고 하나의 역사는 존립할 수없게 사라지게 하고 말았다.

산술적으로도 하나가 둘이되고 둘이 넷이 되었고 다시 넷을 여덟이 되면 아무리 거대한 힘이라도 분산되는 효과가 나타나 자연소멸이 가능하다.

자본논리로도 기하학적 이윤과 이식의 산술이 적용되면서 그들의 더 많은 더 거대한 자본축적이 가능해졌고 오늘날 풍부한 물질문명과 어우러져 마침내 역사에서도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세가 동서양 분리역사를 만들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인도(印度:India)명칭앞에 프랑스어로 "de l'Archipel Indien"열도와 군도란 단어를 붙여 놓았던 흔적과 자국은 지울 수도 없는 것이다.

서세들이 남긴 생물표본기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확고한 혐의를 쉽사리 부인할 수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인도아대륙에 열도와 군도가 있을 수 있는가.

네덜란드가 카리브해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던 가비단(加比丹)종족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이런 종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1942년 동양계 열도 일본정부가 발행했다고 하는 화폐는 현재 서남, 동남아시아의 인디즈에서 발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우리는 알게 된 것이다.

상식적으로 카리브해에 있어야 할 네덜란드 종족의 언어로 동남아 인디즈를 점령한 일본정부가 화폐를 발행했다고 하는 자체가 엉터리라 할 수밖에 없다.

가비단의 종족의 언어인 네덜란드어로 일본정부라고 인쇄하고 발행한 화폐는 결코 카리브해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카리브해의 인디즈에서 일본정부라는 주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주체가 점령한 관할지에서 네덜란드어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다는 것은 화폐를 발행한 실체와 그 화폐언어 주체가 같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어로 일본정부라 한 실체는 결코 지금의 동양계 열도일본세력이라고 할 수가 없다.

현재 열도일본인들이 무엇무엇을 했다고 기록한 것에서 따져 들어가 보면 그들이 직접그린 조잡스럽게 그림들이 전부 한 몫이나 하는 것처럼 넘쳐나고 있다.

사진도 아닌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역사라고 우기고 믿으라고 하니 우리가 바보인가?

나막신으로 알아본 네덜란드와 일본은 관습적인 면에서도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동양역사로 하나는 서양역사에 들어 갈 뿐 모두 하나의 역사로 볼 때 동일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나막신이나 게타는 분명 열대우림지역 또는 열대몬순기후에서 사용하던 신발이었음을 알 수 있고 각기 형태가 다른 것은 계층간 문제가 있을 뿐이며 근세기에 네덜란드와 일본은 열대우림지역에 있었을 공산이 크게 나타난다.

아래 열대우림기후지역(Tropical rainforest climate:Af)표를 보면 파란색칠이 카리브해 제도에서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에만 칠해져 있다.
바로 네덜란드 또는 일본의 본거지 또는 근거지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가비단이라 사실이 이를 확실하게 입증한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일본정부가 될 수 있고, 아니면 사라진 이름 더치제국의 일본정부라 할 수 있으며 똑 같은 처지의 사라진 대한제국의 일본정부가 될 수 있는 가설이 생긴다.

분명 태평양전쟁이 실제했다면 옛 구세력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강자가 등장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그지역 역사에서 뿌리 깊게 힘을 키우고 진실의 역사가 밑바탕이 되어 원주민들이 지배력을 인정할 수 있는 조건의 강자가 되어야 한다.

난데없이 떠돌이 범선을 타고 깃대만 꽂으면 식민지가 된다는 근세기 발상들은 역사가 될 수 없다.

열도 일본인들이 이처럼 날뛰게 된 것은 서세의 이러한 엉뚱함이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열도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가 일천하고 더군다나 동아시아대륙역사가 또한 일천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의 엉터리같은 역사만 믿고 안하무인이다.

1차세계대전의 주축은 독일이라기 보단 게르만이라고 해야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제국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이 제국들은 모두 하나같이 해상국의 해군력이 실로 막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해군력이 온데간데가 없이 사라진다.

해상을 지배하는 것은 곧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비록 패전하고 와해되었다고 하지만 대한제국 즉 코리아세력은 이들세력과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을 여러각도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태평양전쟁은 아시아에 오래전부터 어떤 주체에 의해 점거된 상태로 아시아 전 지역에 포진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1939년부터 서세들이 연합군을 만들고 이와 대적하여 이미 그곳을 점거하고 있던 지금까지 미상의 알 수 없는 주축세력과 전쟁을 치루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주축세력들이 사라지고 난 후 각지역에서 비로소 현재가 인식하는 독립이 분리되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특히 인디즈에 속해 있던 동남아시아국가들의 독립년도가 거의 1945년-1949년이다.

한반도는 1945년이지만 나머지 국가들은 그 보다 더 시일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역시 1946년에 시작된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승리함으로써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라오스(1949), 미얀마(1948), 베트남(1945), 스리랑카(1948), 인도(1947), 인도네시아(1945), 캄보디아(1953), 파키스탄(1947)등이다.

유독 이시기에 독립이 많다는 것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대륙 상황과 대비되는 것이다.

하나의 역사는 끝까지 아시아지역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아시아전역을 통치하던 세력이 현재 일본이라는 세력인가에 대한 회의가 없지 않다.

앞에서 어원으로도 더치와 도이치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더치'와 같은 어원인 '두이츠(duits)'가 자신들과 다른 '독일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하였다.

한가지 네덜란드의 인디즈라는 영역적인 문제가 위태롭게 나타나는 것은 네덜란드의 인디즈(Indies)가 끝까지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인도(東印度:East India)란 지명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지만 따지고 볼 때 1799년에 동인도회사를 영국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영역을 넘겨준 것이나 다름이 없고 그것은 이미 빼앗긴 영역이다.

그럼에도 그지역을 1942년에 점령한 일본정부가 다시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아 그곳에서 발행한 화폐를 굳이 네덜란드어로 만들어야 했다는 것은 상황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이야기다.

1799년부터 영국에게 밀려 식민지 관할만 영위했다고 하지만 이미 영국에게 동인도회사도 빼앗긴 상태에서 네덜란드 이름의 회사는 완전히 해산하였고 더군다나 카리브해에 있었을 네덜란드 국가 마저도 1793년 2월 1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당하면서 1810년에는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는 사실이 있음에도 이렇듯 끝까지 아시아권의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 인디즈(Netherlands Indies)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세기에 서세가 역사판짜기 하는 과정에서 동인도제도 심기를 망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 집어 볼 수 있는 것은 가비단이었던 네덜란드는 아마도 뉴올리언스(New Orleans)와도 근거지 문제에서 엮일 가능성이 높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를 아메리카파리, 신월성(新月城:The Crescent City)즉 "초승달 도시"라고 한다.

미시시피강을 19세기때 프랑스세력들이 활동한 지역이라고 하고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간에 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한다.

그곳을 프랑스가 점령하여 빼앗다는 사실도 무시될 수가 없다.

물론 뉴올리언스는 현재 네덜란드처럼 도시 대부분의 지역이 해수면 보다 낮고 저습한 삼각주로 형성되어 나막신이 필요하였던 곳이다.

나막신이 여성 하이힐(high-heeled shoes)의 기원으로 뉴올리언스에서 여성 하이힐의 시초역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까지가 그렇다.

2차세계대전은 유럽에서는 독일,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과 대치하고 결전을 하는 도식이다.

이러한 설정은 두 세력들이 모두 패전으로 인하여 본래의 주체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한계때문에 서세의 서양사가 주장하는 것들의 진의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두 세력이 패전으로 인해 엄청난 것들이 숨겨지거나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1938년에 더치(Dutch)란 국명에서 네덜란드로 이름이 바뀐 뒤 네덜란드의 정부가 바로 일본(Jopon, Japan)일 수 있고 일본정부(Japansche Regeering)라 할 수 있는 가설은 그 두 개체가 부정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더치(Dutch)의 부정적인 내용들을 찾아보면 서로 짜고 치는 경매(Dutch auction), 술자리에서 맺은 계약(Dutch bargain), 술김에 내는 용기(Dutch courage), 횡설수설(Double Dutch), 곤드레만드레 취하기(as drunk as a Dutchman), 더치식 항복(Dutch defense), 콘돔(Dutch cap), 더 이상 나쁘지 않은 것만도 다행(Dutch comfort)이라며 약올리기, 섹스파트너(Dutch wife)등을 부정적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국가적인 의미는 전혀 없고 사회적인 이슈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왜(倭)역시 왜소하거나 작은 것을 의미하지만 삼한역사적인 면에서는 부정적인 것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왜(倭)를 서양사적으로는 어떤게 인용되었을 것인가 상상하기가 힘든다.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이것을 자폰이라고 생각하면 더치(Dutch)만큼 자폰(Jopon, Japan)도 영어 표현상 좋지 않는 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영어사전에 japan n.를 찾으면 옻칠(漆); 칠기; 일본제 도자기[비단]로 나타나고 타동사,japan vt. (-nn-)은┅에 옻칠을 하다; 검은 칠을 하다, 검은 윤을 내다 등으로 쓰여 무엇인가 숨기고 은폐하고 솔직하지 못하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대화, 구어(口語)로서 경멸적인 용어로 쓰인 것은 영어에서는 젭이라 "Jap [dʒæp]" a., n. 이라고 하는데 "자페니스 JAPANESE"가 그렇고 "야비한 기습"과 연결된 미국속어 "pull a jap"은, "숨었다가 기습하다"로 표현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인들은 자폰‘japan’을 젭‘JAP’ 이라고 호칭하면서 경멸, 비하(卑下)적으로 쓴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때문에 더치(Dutch)에 못지 않거나 더 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사라진 명칭 더치(Dutch)와 자폰(Jopon, Japan)은 같은 궤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쨌던 일본과 네덜란드의 동질성을 여러가지에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정부(Japansche Regeering)라는 명칭사용은 네덜란드인들이 네덜란드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사용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즉 동양계 열도 일본이 아니라 네덜란드(Netherlands) 또는 더치(Dutch)에서 일본(Jopon, Japan)이 1934년까지 그들 본거지에 존속했고 그 이후 이렇게 저렇게 변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아마도 동양과 서양이 갈라지면서 1945년까지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네덜란드 인디즈 영역에서 발행된 화폐는 일본(日本)이란 한문과 함께“Jopon, Japan”등을 사용했던 더치(Dutch)계가 발행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어쨌던 네덜란드나 홀란드는 1934년 이후에 생성된 이름이지만 더치공화국(Dutch Republic:1581–1795)이란 더치(Dutch)용어는 뭔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현재 네덜란드인들이 현재근거지를 삼으면서 스스로 버린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부정적인 의미라고 하지만 역사가 바뀌지 않았다면 부정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다시말하지만 기존 오래전부터 자국 국민들에게 불리던 나라 국명을 이웃나라가 경멸한다고 하여 바꾼다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북미권 영어를 자기나라 말처럼 쉽게 한다고 자료에서 본 적이 있다.

혹 네덜란드인들은 게르만족이라고 하지만 게르만족과 또 다른 영어를 사용하던 민족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1934년부터 더치란 용어의 정체성이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The Dutch East Indies(or Netherlands East Indies; Dutch: Nederlands-Indië; Indonesian: Hindia Belanda)

더치동인도(Dutch East Indies)는 네덜란드 동인도(Netherlands East Indies), 더치(Dutch), 네덜란드 인디(Nederlands-Indië), 인도네시안(Indonesian), 힌디아 벌란다(Hindia Belanda:1930-1941)등으로도 불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 모든 명칭에 인도(印度:Indies, Hindia)가 들어간다는 것은 네덜란드가 아닌 더치는 인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생각할 수 있고, 아메리카대륙 인도(印度)역사영역과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Dutch"와 “Jopon, Japan”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부정적인 것은 서세의 입장이라 할 수밖에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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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중인 텐구(天狗)를 잡은 코끼리[위키]

 

왜나막신(倭Patten) 게다(하태:下駄:Geta)

          in the Arnolfini Portrait of 1434, these pattens have been put off inside the house.

 

Huge pattens worn by two 18th century Turkish women, pastel by Jean-Étienne Liotard, who visited Turkey in 1738

 

 

네덜란드 전통의 통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과 채색 후 각종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두 종류가 있다.

 

 


현대 일본에서는 일식 복장을 입는 경우가 적어졌기 때문에, 왜나막신 역시 신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그때까지 90% 이상이 자갈길이었던 일본 시가지의 각 도로에도 급격한 아스팔트 포장이 깔린 것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있다. 1995년 이후, 젊은 여성이 "귀엽다. 소리도 좋다"라는 이유로 왜나막신을 평시에 신는 경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가벼운 복장과 함께 신는 여름 유행도 있다. 그러한 까닭으로, 왜나막신의 원목 부족 현상도 발생하였다. 또한 유카타 유행과 발맞추어, 왜나막신의 인기 역시 회복하는 추세이다. 중년의 여성이 샌들 대신 왜나막신을 신는 것 역시 종종 보인다. 온천 등지의 여관에서는 유카타와 왜나막신을 구비해두고 있어, 노천탕에 갈 경우 여관에서 이를 빌려 착용하고 나가게 된다.[위키사전]


대(台)

이(歯) - 일반적으로 두 개의 굽이다. 이가 하나인 외굽 왜나막신(一本下駄)은 일본의 전통 괴물인 텐구(天狗)가 신거나 산에서 수행할 때 신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모양(舟形)이라고 하는 이가 없는 것 역시 존재한다.

콧실(鼻緒)

 

네덜란드 나막신

 

 

 

전통의상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남자는 자루같이 불룩한 검은색 바지에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여자는 풍부하게 퍼진 검은 드레스에 가슴부분에 정교하게 수를 놓은 레이스 장식이 있는 옷을 입는다. 신발은 주로 나무신을 신으며 흰색 모자를 쓴다.

이러한 차림은 볼렌담(Volendam) 지방과 마르켄(Marken)지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의복은 18세기 이후에 발달 했는데 18세기 에는 머리에다는 금속 고리가 발달 했고, 19세기에는 축제 때 입는 의상으로 머리장식에 주름을 다는 것이 유행 했다. 이는 브라반트(Brabant)지방에서 유행한 것이다, 여자들의 옷차림은 머리에 매는 스카프와 치마위에 덧입는 형태가 지방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Marken.

 

                                                                  Volen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