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한부울 2015. 5. 2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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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

 

글쓴이:한부울

 

세도정치(유대자본생성)와 잉글랜드
리치먼드는 금성(金星)

버지니아의 서쪽에는 중국바다와 인디즈가 있었다.
산수유와 경주(항주.臨安)
마무리(버지니아에 잉글랜드정부가 있었다.)

 

세도정치(유대자본생성)와 잉글랜드

 

잉글랜드(England)의 별칭은 앨비언(Albion.)으로 하고 버지니아를 뉴앨비언(New Albion)이라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고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야 한다.
영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이란 주권 국가의 명칭에 잉글랜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역사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헌법상으로는 잉글랜드보다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이 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세들은 백과사전에서 잉글랜드가 때때로 그 기관들을 포괄하거나 신설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언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 그레이트 브리튼에 잉글랜드를 포함할 수 없었던 것이며 잉글랜드와 포함할 수 없었던 어떤 역사주체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글쓴이는 역사상 감쪽같인 사라진 하나의 체제의 명칭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가지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방울뱀(Rattlesnake, 響尾蛇)으로 본 마지막 대조선(大朝鮮) https://han0114.tistory.com/17050522 "에서 말했듯이 감쪽같이 서세에 의해 사라진 "하나의 체제"가 대조선이 맞다면 틀림없이 대브리튼은 대조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부터 전제하고 시작하고 싶다.

It became a largely historical term until revived in the mid 16th century
브리튼은 라틴어(Brit(t)annia)로서 16 세기 중반에 부활한 역사적 용어라고 하는데 앵글족 잉글랜드(영국이국)가 16세기에 나라 구실도 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브리튼을 라틴어에서 영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영국이 동양열도일본 역사와 혼입되고 있다는 사실은 동양역사학적으로 볼 때 매우 불행한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 동양사가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국이라고 하는 것은 1832년 영길이국표선기(附英吉利國漂船記)에 의한 것으로서 본래 앵글족인 잉글랜드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영국인지에 대한 의문은 아마도 세계삼한역사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잉글랜드란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을 사실상 그 진의를 가름조차 할 수 없지만 그들이 활동하던 무대로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허드슨베이지역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라 할 수 있으며 특히 버지니아가 강하게 나타나고, 중앙아메리카의 목구멍 넥의 지역, 그리고 영길이국표선기가 말하는 남아메리카대륙 브라질을 포함한 북동부로 나타남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영국은 미국독립전쟁 당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으로 불리며 그들 왕족이 고집하는 사자가 정식문양이어야 하지만 왠지 1774년 미국독립신문에는 동양풍이족이 쓰던 드라곤(Dragon)으로 한 상징이미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것은 동양오리엔탈 역사 하나의 체제인 대조선을 대칭한 것을 알 수 있고 근세기에는 바로 빅토리아시대와도 정확하게 연결된다 할 수 있다.

서양세력들이 그나마 국가 구실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1864년 이후부터라고 본다.

서양세력이란 함은 본 블로그에서 정의하길 하나의체제에서 기름처럼 떠 돌던 세력을 말하며 늘 해적신분에서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던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시작과 동시에 대조선 붕당(朋黨)의 하나로서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1714-1901)가 안동김씨와 엮인다는 사실은 역시 본 블로그 2012.04.18 16:20에 올린 "미합중국(美合衆國)과 삼한(三韓) https://han0114.tistory.com/17050500"  뒤 이은"[1]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2]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3]다시보는 정조와 루이16세" 에서 정조를 깃점으로 프랑스의 붓꽃(Fleur-de-lys)문장을 사용하던 부르몽왕가(House of Bourbon)에 이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붕당외 요소가 분명하게 있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붕당이란 것이 반도역사가 주장하는 관리들의 단순한 자중지란(自中之亂)에 이어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맞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다.

이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전자적 한계라 하고 이에 따른 얄타회담에서 미국인들이 말하는 자치성의 결여를 믿을 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인들은 모래 알같다라는 자학이다.

과연 반도역사에서 그토록 대조선 붕괴의 원인을 붕당(朋黨)이라 하여 몰아 붙인 이 붕당을 관리들의 이전투구 아귀다툼 난장판 당파싸움 인자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그 의미의 대한 명확한 풀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문으로 붕당의 붕(朋)은 벗, 동무, 친구를 의미하고 특히 마음을 같이 하다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절대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만 볼 수가 없다.

또한 붕(朋)은 두개 월(月)자의 파자를 가지고 화폐단위에 기초가 되는 조가비(貝殼) 2개, 또는 5개를 뜻하는 것이라 했으니 이것이 재화집합(財貨集合)이라 보아 자본(資本)화가 된다는 것이며 자본세력이 각 당리에 따라 합쳐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어 유대자본이나 유대세력의 생성과 관련이 깊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2차세계대전을 끝으로 일제는 교묘하게 엮어 한반도에 엉뚱한 역사를 심으면서 이전투구화 한 것으로 나타낸 것이니 아주 폐악적으로 이용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조선말기에 나라가 흔들린 이유 중에 하나가 세도정치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먼저 정조(正祖,1752-1800,재위:1776-1800)를 옹립한 일루미나티(光明會,Bavarian Illuminati)와 연결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바이에른 풍산홍씨(豊山洪氏) 홍국영(洪國榮:1748-1781)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정조때 풍산홍씨를 업은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득세가 있어 자본세력들이 준동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어 19세기초 순조때 이르러 세도벌열(勢道閥閱)들의 각축과 함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면서 정치·경제·외교·문화와 행정까지도 협의에서 결정하는 비변사(備邊司)를 장악한 노론시파(老論時派)의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조순(金祖淳:1765-1832)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세도정치체제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과연 자본세력과 결탁되지 않았겠는가 의심을 하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영국과 똑같이 1834년~1860까지 반 프리메이슨 정당으로 휘그당이 존재했다.

하지만 영국의 양당제에서 정당인 휘그당(Whig Party)과 토리당에서 근원적으로 볼 때 휘그당의 "휘그(Whig)"는 스코틀랜드어의 "whiggamor"에서 유래되어 "모반자"라든지 "말 도둑"란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반대당 역시 "토리(Tory)"라 하는 것도 아일랜드어에서 "불량", "도적"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모두 정권탈취세력들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안동김씨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1789-1857)는 헌종(憲宗)과 철종(哲宗)을 섭정하였으며 다시 조만영(趙萬永,1776-1846)에 의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도정치가 신정왕후(神貞王后:1809-1890)까지 이어지며 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보위를 마무리한 것을 보면 결국 조선왕족직계보까지 세도정치가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철종대에서 단절되는 비운은 이에 의한 것이 틀림없고 그 주 원인은 자본세력들에 의해 자중지란 바로 그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정확히 이 시기가 대조선의 운명을 쇠락길로 접어들게 만들고 반대로 서양세력들은 분기탱천시기로서 세력분기점으로 나타나는 갈래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바로 1864년이다.

그 후 계보가 다시 세도에 의해 방계로 이어지고 이상하게도 신정왕후를 이은 흥선대원군에서 부계가 아니라 모계로 이어지는 여흥민씨(黃驪,驪興閔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계속되면서 결국 파행을 맞이한 것이라고 풀어 볼 수 있지만 방계로 이어지는 것은 또한 안동김씨라고 판단되는 빅토리아시대와도 정확히 연결되는 것이 사실이다.

글쓴이는 이것을 바로 붕당 즉 유대자본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때부터 모든 정치는 아마도 유대자본에 놀아난 것이 틀림없다.

무굴제국(Mughal Empire, Gurkani:1526-1857)이 붕괴되고 마지막황제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II:1775-1857,재위:1837-1857)가 영국에 의해 구금되어 버마에서 임종을 맞게 됨으로서 인도가 영국에 완전히 귀속되어 식민지상태에 놓여진다는 것이 바로 빅토리아시대(Victoria,1819-1901,재위:1876-1901)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빅토리아여왕 역시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1784-1865)이 실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정작 친정할 수 있었던 것은 1864년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하고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이 정국을 장악한 시기 1864년부터 1873년까지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정확한 것은 이하응이 청나라에 구금되어 행세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본래 모반자, 말도둑, 불량, 도적때들 유대자본세력이 움직이는 정치세력들에 의해 꼼짝할 수 없었던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의 처지가 빅토리아와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김조순이 장악한 비변사는 사실상 성종(成宗,1457-1495,재위:1469-1495)때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여진(女眞)과 왜구(倭寇)를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 하였고 바로 일본이라 할 수 있는 서양해적 무리들이 끊임없이 대조선 북쪽과 남쪽영역에 침입하였기 때문에 이를 퇴치하기 위한 기구임을 알 수가 있다.

김조순이 이것을 장악하자 본래 서세들을 견제하는 것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변사 역시 1864년까지만 운영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비변사는 하나의 체제인 대조선에서 서양인을 잡는 행정기구라고 보면 맞고 여진이라 함은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s://han0114.tistory.com/17050716 "에서 풀어보았듯이 영어를 쓰는 왜구라고 보면 거의 정확한 풀이가 될 것이다.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s://han0114.tistory.com/17050732"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조선에서 선수(船首:bow)에 충각(衝角)을 장착한 귀선(龜船)을 건조하였는데 이 귀선들이 남쪽바다에서 출몰하는 왜적선들을 충돌하여 침몰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왜적선을 상대한 시기가 이미 태종(太宗) 13年(1413)부터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해적들은 끊임없이 대조선강역 주위를 맴돌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이야기다.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본관이 경주인 경순왕(敬順王,金傅?-978,재위:927-935)의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파생된 씨족으로 경순왕의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것이며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월성김씨(月城金氏)라고도 하고 김알지(金閼智:AC65-?)를 시조로 한다.

참고로 본 블로그에서 신월성(新月城 :The Crescent City)은 프랑스이민계 자손 크리올(Criole)이 무더기로 거주한 뉴올리언즈(New Orleans)라고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버지니아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또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라(新羅)의 다른 명칭 사로(斯盧), 사라(斯羅), 서나(徐那),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伐), 서라(徐羅),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등도 근본적인 의미와 어원을 풀어보면 곧 동방샛별, 새벽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동쪽에 경주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조선이 흔들린 이유중에 또 하나가 청나라 총리대신 이홍장(李鴻章:1823-1901)의 간계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를 반도역사는 하고 있다.

사실상 청나라 라는 것은 미서전쟁의 스페인을 말하며 라틴제국과 정확히 합체되는 고려를 뜻하는 것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로마노프왕와 정확히 연결된다.

대한제국의 북양군벌(北洋軍閥)의 이홍장(李鴻章)은 1896년 영국을 방문하고 당시 영국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Royal Victorian Order)을 수여받기까지 하였는데 그 이유가 가당찮게도 영국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영국에 의해 1.2차 아편전쟁이 발생되어 청나라자체가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청나라의 최고관리가 적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으로부터 최고의 훈장을 받는다는 상황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서 참으로 해괴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문제에서 현재 신중국으로부터 이홍장은 반역자라고 낙인찍혀버린 이유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이홍장이 실제로 존재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없지 않다.

때문에 글쓴이는 영국에서 청정부(Qing Government)라는 것은 곧 잉글랜드라는 이야기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이홍장(李鴻章:1823-1901)은 빅토리아(Victoria,1819-1901,재위 :1876-1901)여왕의 사망년도와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긴밀하게 엮이고 있다.

또한 어긋하는 것은 빅토리아여제란 정체성에서도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이라 하여 1874년 영국의 총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하게 된 유대인출신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총리가 여왕의 공식적인 칭호에 '인도여제(Empress of India)'라는 칭호를 덧붙이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이것이 미국에서 벌어진 이야긴지 영국에서 벌어진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흥선대원군과 긴밀하게 엮이는 것으로서 대원군이 1873년에 은둔함과 동시에 명성황후의 등장과 빅토리아여제 탄생이 겹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또한 빅토리아여제가 탄생하는 시대의 주위 상황들을 보면 본 블로그에서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순조(純祖32年,1832)의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에서 이미 잉글랜드인들이 아메리카 즉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영국지방을 세웠다 한 사실과 같이 읽을 수 있는 것은 남아메리카대륙의 무굴제국(Mughal Empire, Gurkani:1526-1857)이 잉글랜드 수중으로 떨어진 사실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빅토리아여왕이 인도여제(Empress of India)호칭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유대인 총리가 무리하게 급조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1877년 1월 1일부터 비로소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의 여제 빅토리아 폐하'로 불리게 되었으며 상징적으로 109 캐럿짜리 빛의 산(Mountain of Light)이라고 하는 가장 오래된(最古)인도산 다이아몬드 코이누르(Kohinoor)를 인도제국 왕관에 박아넣었다고 되어 있다.

이 인도산 다이아몬드 역사에서도 본 블로그 글 "조선에서 찬석(鑽石, Diamond金剛石)이 났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457"에서 말하길 다이아몬드(金剛石:Diamond)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인도(印度:India)의 드라비다족(族)부터이고 적어도 약 3,000년 전부터 발견되어져 왔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이후 수세기 동안 인도(天竺, 身毒)는 세계유일의 다이아몬드 주 원산지로서 알려졌다는 사실과 인도골콘다(Golconda)지역 강바닥에서 다이아몬드를 처음 발견했다는 사실을 종합할 때 그리고 무굴제국이 브라질을 포함한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서 최후까지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감안하면 결국 1725년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상(鑛床:mineral deposit)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도 다이아몬드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며 당시 영국은 브라질을 포함한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있었던 세력임도 알 수가 있다.

근세기에 서세에 의해 브라질로 통칭되었을뿐이지 결국 인도(天竺, 身毒, Indies)라는 것이다.

브라질이 인도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결국 인도가 남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고 그곳은 고대로부터 산출된 다이아몬드 원산지라 할 수 있기때문에 역사성이 공존했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가 있는 일이다.

때문에 인도여제가 된 빅토리아여왕 왕관에 상징적으로 가장 오래된(最古)인도산 다이아몬드 코이누르(Kohinoor)를 박아 넣은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인도를 차지하는 것은 명실공히 세계를 장악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유대자본에 의해 상징적 로얄페밀리만들기에 의한 것이란 생각도 떨칠 수가 없다.

또 빅토리아여제 로얄페밀리만들기란 의문이 드는 것 중에 하나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Victoria Adelaide Mary Louise,1840-1901)가 독일황제와 프로이센국왕인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1831-1888,재위:1888-1888 99일간즉위)와 결혼하였고 그의 아들 빌헬름 2세(Wilhelm II,1859-1941,재위:1888-1918)가 분국들을 통일하여 독일제국(1871-1918)을 건국하면서 딸인 빅토리아가 황후와 동시에 모후가 되자 어머니인 빅토리아여왕보다 딸의 격이 높아지게 되어 잉글랜드여왕에게 인도황위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것은 실제로 인도여제가 아니라 급조된 인도여제 만들기란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잉글랜드의 빅토리아여왕은 근세기에 유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로얄 상징성에 불과하며 마치 청조의 서태후와 같고 또한 대조선말기의 신정황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비운의 명성황후와도 비견할 수가 있다.

빅토리아여왕의 임종시기가 1901년 1월 22일이고 그의 장녀 빅토리아황후의 임종시기가 같은 해인 1901년 8월 5일로서 사망시기 년도가 같다.

그러나 최종 이것들을 정리하자면 하나의 체제 대조선에서 1864년 이후부터 정부의 역할들을 서양세력들이 장악한 상태에서 청과 잉글랜드가 동서양 따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리치먼드는 금성(金星)

 

버지니아(Virginia)주는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워싱턴디씨(Washington, D.C)가 속해 있는 컬럼비아 특별구(特別區)를 북쪽에 접하고 남북전쟁 당시 아메리카연합국(南部盟邦,CSA)의 수도였던 리치먼드(Richmond)를 주도로 하면서 올드 도미니언(Old Dominion)이란 별칭의 주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양자료에 따르면 잉글랜드인들이 버지니아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이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 의한 것으로 하고 그 시기가 기껏 1577년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을 올드 도미니언이라 한다는 것은 역사성과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다.

수천년의 역사가 살아숨쉬며 고대역사유적이 산적한 곳을 본래 고도(古都)라 하여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올드케피탈(Old Capital), 또는 올드 도미니언(Old Dominion)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불과 현재를 기준으로 따져서도 500년도 채 되지 않는 그들의 발자취가 있다 하여 올드 도미니언이라하는 것은 그들만의 역사설정이라 할 수밖에 없다.

올드 도미니언(Old Dominion)이라 한 것은 어쩌면 서양세력들의 무도한 발자취와는 관계 없이 본래 하나의 체제에서 고고한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고도였다는 사실로 풀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어쨌던 영국인들이 버지니아를 올드 도미니언(Old Dominion)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영국 청교도혁명(1642-1651)에 의해 생성된 권력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에게 쫓겨 프랑스로 달아난 차일스2세(Chalres II,1630-1685,재위:1660-1685)가 북아메리카대륙의 버지니아를 자기 영토로 삼아 편입했다고 하여 올드 도미니언이라 했다는 것은 솔직히 자기 앞가림도 할 수 없었던 처지에서 식민지가 타당한 이야긴지 이는 정상적인 역사라고 할 수가 없다.

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s://han0114.tistory.com/13203353"에서 말하길 동아시아대륙역사의 청(淸:Qing)이라는 명칭도 근세기 역사판짜기에서 청교도혁명과 결부시킨 것으로 나타나 청(淸:Qing)은 청교도의 청이라 했으며 이것이 근대사에서 영국정부노릇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하나의 기독교적인 명칭이라 하였다.

 

북아메리카대륙 영국의 청교도들이 들이닥친 바다가 동해(東海)이고 청해(淸海)이기 때문에 청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차일스2세를 강희제(康熙帝,1654-1722,재위:1661-1722)라 보는 것이고 이 세력들은 지금의 멕시코라고 판단되는 만주(滿洲)라고 하는 중앙아메리카대륙 목구멍 형태의 지형적 특성을 가진 후금(後金, 喉衿)에서 청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그곳은 잉글랜드(일본세력)의 근거지가 있었던 곳으로서 장미전쟁(薔薇戰爭:1455-1485)과 오닌의 난(應仁-亂:1467-1477)이 있었던 곳이라고도 하였다.

근세사에서 크리스토퍼란 이름은 서세들에게는 그야말로 개척자의 대명사처럼 사용했고 또한 기독교적인 상징적인 이름인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국가이름보다는 기독교를 앞세웠다는 것은 하나의 특징적인 것이다.

1492년에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컬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가 그렇고 1607년 크리스토퍼 뉴포트(Christopher Newport)가 이끈 영국의 탐험대가 처음 리치먼드(Richmond)를 탐험했다는 사실 또한 그와 같기 때문이다.

버지니아(Virginia)라는 의미를 찾아보면 잉글랜드여왕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1533-1603,재위:1558-1603)를 가르키는 지명으로 나타나고 처녀여왕, 즉 버진퀸(Virgin Queen)이라 하면서부터 시작된 이름이라 하였다.

이 버지니아에 대한 설명자료는 신대륙이라 하여 서양자료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니 객관적으로 비교할 것이 없다.

엘리자베스1세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라 하고 44년이란 긴 시간동안 장기 집권한 여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에서도 절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를 일으켜 세워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만들고 영국 동인도 회사(英國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1600-1708,1708-1873)까지 설립하여 부흥의 깃털을 마련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이라고 판단되는 멕시코 혁명가 오악사카(Oaxaca)출신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Mori)가 35년간 집권하여 멕시코를 세웠다는 사실과 열도일본 명치왕이 44년간 집권하여 오늘날 열도일본을 세웠다는 사실과 흡사함을 알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을 마치 유럽에 있는 영국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처럼 설정한 역사사실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이 후진세력이라고 해놓고 난데없이 버지니아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식민지하였다 하면서도 영국동인도회사가 설립은 굳이 아시아대륙 인도아대륙이라고 하고 있으니 솔직히 그들 능력으로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오기도 힘든 것인데 하물며 인도아대륙이라니 이것이 말이 된다는 소리인가?

그들이 멋대로 만든 역사가 이처럼 해괴해질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하였다면 같은 시기이기때문에 수만키로를 항해할 필요도 없이 동인도회사는 지금의 버지니아에서 가까운 곳에 설립되었다고 해야 맞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 우월성 도취되어 간단한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고 서양역사만들기에만 집착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동인도가 어디에 있어야 할 명칭인가에 대한 것은 이미 본 블로그 "3.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s://han0114.tistory.com//17050745 소제 10)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허구와 대한제국"에서 스페인의 동인도가 북아메리카대륙의 스페인부왕령(Spanish east indies are part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을 가르켰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던 바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주장은 사실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럽국가 중에 가장 후진국이었다던 잉글랜드가 어떻게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어야 한다.

영국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서양과 거리를 비교해도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스페인, 포루투갈, 프랑스같은 유럽국가들은 왜 버지니아에 당도할 수 없었을까?

왜 그들은 버지니아나 그 주위에서 같은 시기에 충돌한 역사사실이 전무한 것일까?

왜 잉글랜드 만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차지해야 하는가?

여러가지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맹점으로서 세계사가 완전히 엉터리라는 본질이 될 수밖에 없는 의혹들이다.

글쓴이는 당시 해적신분의 서양인들은 하나의 체제 아래에서 솔직히 인간 취급도 받을 수 없었던 신분적 위치에 있었다고 감히 단언하는 것이다.

특히 해적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잉글랜드가 나라취급조차 받을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지금의 유럽대륙에 영국이 있었다는 상식은 저 멀리 유럽대륙으로 던져 버리고 기억에서 삭제할 이야기며 그들이 당시 활동한 지역은 중아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라 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도 후진국이라 한 것은 자기들 처지도 위험으로부터 제대로 간수할 수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주장하고 현재 세계사가 말하듯이 인류사가 태초부터 동서양사로 분리되었다고 보았을 때 잉글랜드가 16세기에 후진국이었다는 사실을 동양사에서 말했다면 아마 그들은 극구 부인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서양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에서 하나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이러한 비판적 요소가 그들에 의해 파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잉글랜드가 후진국이었다는 사실은 국가개념이 없었고 해적들의 단순한 조직체로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 형편에서 무슨 여력으로 대서양을 횡당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거대한 함선을 만들고 지금의 영국땅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까지 도달할 때까지의 로정도 당시 상황으로보았을 때 쉬운 것이 아니다.

후진국이라 함은 스스로도 경제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의 자립도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함선을 건조하는 경비도 문제지만 함선을 이끌 수 있는 인력과 향후 식민지에 투입해야 할 군사물리적자원과 인적자원 그것에 부가비용까지 이것들을 갖추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그들이 식민지 운운하던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동부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인류사가 최고 절정을 이루며 하나의 체제로 하여 큰 발전을 도모했고 모든 구성원들이 제대로 진보된 문화적인 삶을 향유하던 곳임을 단언할 수가 있다.

그것을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주도하면서 세계사전체를 바꾸었고 그렇게 꾸며진 서양사가 북아메리카대륙의 역사자체를 말살시켜 버린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후일 골치아플 것을 두려워 아예 역사가 없는 신대륙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15세기때부터 늘상 침범하던 그곳엔 해적신분이었던 그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체제의 강력한 지배자가 있었고 또한 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역사문화주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추측할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이(四夷)를 관할하던 하나의 체제였던 대조선국(大朝鮮國)이란 거대한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를 통해서 이미 명확하게 밝혀 이제는 확인한 상태에 있는 것을 여러분께서도 잘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체제의 강력한 견제와 철저한 경계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는데 유럽에서도 가장 후진국이었다고 하는 잉글랜드인들이 무슨 재주로 대조선국이 관할하던 버지니아에 감히 식민지를 하였다는 것인지 쉽게 받아들일 수 없고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역사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잉글랜드 소속의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가 그의 활동년대를 보아도 조선해변에 들끊던 해적신분의 해구 또는 왜구와 똑 같다.

버지니아에 발을 처음 내디뎠다고 하던 시기 1577년이라 하였으니 이때 대조선에서는 이들을 이미 성종때부터 경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6세기부터 따진다고 하더라도 대조선국에서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일으킨 왜구들을 섬멸하고 삼포를 단호하게 폐하였으나 그들이 다시 간청하여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었다 했다.

임신약조란 그들에게는 아마 노예조약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에 불만을 쌓았을 것이 뻔하고 1544년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을 일으키자 다시 조선 정부에서는 1512년에 맺은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완전하게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아예 금하였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자 현재와 마찬가지로 세계최강 미국이 이란을 무역제제를 가하여 힘들게 하는 것처럼 대조선은 서양왜구 해적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황폐해지도록 만들었을 것이 뻔하지 않는가.

이에 살기위해 다시 간청하였을 것이고 정미약조(丁未約條)를 맺게 되었지만 이 역시 노예조약이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복되는 불신을 서양왜구들이 조선인들에게 심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명칭은 바다를 기반으로 하는 해적신분에 있던 다양한 종족들을 그들 나름대로 통솔하고 가솔을 포함하여 부양하거나 지배하던 세력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물론 자본축적에 목적을 둔 것이다.

이런 식의 반복되는 갈등에 의해 1555년에 또 다시 을묘왜변(乙卯倭變)을 일으켰으며 그들이 지속적으로 분란을 만들자 대조선에서는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를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적극적으로 이들을 제하고 완전하게 토벌하게하면서,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까지도 전부 밖으로 내쫓아 삼포왜인의 준동을 일체 막았다 했으며 아예 관리들과 접촉을 할 수 없도록 침입한 왜구의 진공(進貢)자체를 막아 대조선 영역에 접근자체를 금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삼포왜란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체제와 자치구형성을 요구하는 해적집단간의 갈등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1554년부터 대조선에서는 비변사(備邊司)를 두어 왜구가 침입하면 항시 대비할 수 있도록 상시 동원체제를 구축하고 이 제도를 빅토리아 시대가 열리게 되던 1864년까지 유지했다는 것도 알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잉글랜드 소속 해적왕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하나의 체제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 도시라고 알려진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만들수 있었다는 것인지 참으로 해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비변사가 행정기구에서 사라진 시점인 1864년부터서야 비로소 서양인들이 인간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풀어볼 수 있지만 이런 조치가 내려진 시기가 민란시대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 남북 전쟁(美國南北戰爭:1861-1864)이 끝나던 시기이고 태평천국(太平天國,1851-1864)을 이끌던 이수성이 살해되고 마무리된 시기이며 폴란드에서의 반란이 끝나던 시기이고 그리스혁명이 일어나 오토왕이 추방되고 덴마크 출신의 게오르기오스가 즉위하던 시기임을 알 수가 있다.

세계적으로 공히 1864년이 마치 분기점 같은 것이다.

바로 하나의 체제에서 급격하게 체제반발을 일으키며 대혼란이 야기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도역사 기록에 충청˙전라˙경상도 곳곳에서 잇단 민란이 일어났고 1863년에 금위영(禁衛營)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철종일가족전체가 떼죽음을 당했다던 시기이며 대조선 직계보가 단절되고 방계로 넘어가던 시대이다.

유럽사는 근세기에 만들어진 역사이며 아랍역사의 뿌리를 연결한 역사라는 것이 본 블로그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서양인들이 구축한 역사는 마치 주인(主人)이 객(客)으로 전락하고 염치없는 객(客)이 주인이 되는 기막힌 형태의 것으로서 이것은 2차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미국이 취한 전리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큰 전쟁에서 승리하면 꼭 이런 전리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원칙이 생성된 것이다.

이와같은 원칙은 미래 인류사에게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이란 역사자체가 워낙 보잘 것이 없었기때문이겠지만 미국은 서양로얄세력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로얄세력을 창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계삼한역사를 침범하게 되고 그것은 제로게임방식에 의한 것처럼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능하다면 하나의 체제를 사라지게 만들고 대신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시켜 독립적 역사인 것처럼 세계사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때문에 신대륙역사가 필요했고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대륙역사는 세계삼한역사를 거부했겠지만 뿌리가 유럽로얄세력들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므로 사라지는대신 조각조각 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유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잉글랜드 로얄체제와 하나의 체제에서 존재한 귀족성씨가 혼입되는 형태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버지니아 역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개척이 아니라 침략이다.

서양인들이 침략행위에 대해 온갖 수식어를 붙이고 있지만 결국 잉글랜드인들이 말하는 개척이라는 것은 프런티어정신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해적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을 마구 잡아가거나 재물을 빼앗아 가는 노략질을 개척이라고 한 것이니 침략이고 침탈인 것이다.

인류사를 종합할 때 아무리 무력을 앞세워 영토를 점령했다 해도 실패와 성공이 반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이 침략만 했다고 하면 거의가 식민지라는 용어가 떡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역사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신대륙이란 구도속에서 나타나는 형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대조선에서 왜구들에게 취한 정책을 보면 우리가 보아도 섬뜩할 정도이다.

그들이 북아메리카대륙 어떤 곳이라도 역사가 필요하면 프런티어정신을 말하지만 결코 침략했다고 모든 곳을 식민지화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때로는 치열한 반발이 있을 수 있고 그 반발을 수백년을 지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의 땅을 차지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수월했다.

이상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의 큰 전쟁에서 승리하므로서 모든 것을 그냥 통째로 공여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침략하였다 해도 성공할 수도 있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유동성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 영토문제이며 명확하게 따진다면 잉글랜드의 이러한 영토식민지 역사는 사실의 역사가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잉글랜드라 할지라도 남의 땅을 침범하고 침략하는 것은 국가대 국가가 아니라 해적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조선에서는 그들을 집단적으로 주거지를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침략을 했다 하지만 노략질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잉글랜드는 심하게 말하자면 당시 정식적인 국가수준의 체제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때문에 절대로 고정된 주거지를 쉽게 확보할 수 없었다는 문제점이 그들에게 고통스러웠던 것이 틀림없다.

해적들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소설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전설에서 홍길동이 봉건사회제도에 반란을 일으키고 활빈당을 만들어 빈민을 구제하다 체제의 감시를 피해 어떤 섬으로 숨어들어 율도국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사실의 역사가 아니다.

이런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서양인들이 인간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유대자본에 의한 것이며 근세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 15세기초부터 계산하면 거의 50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물질과 탐욕으로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고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근본이라면 이러한 기틀을 그들이 애초부터 만들 수 있는 입장과 환경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늘 상 기득권체제로부터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며 위험스러운 존재로 눈에 가시같은 제거 대상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그존 기득권 세력들의 눈을 피해 대양 가운데 크고 작은 도서(島嶼) 깊숙한 곳에 아지트를 만들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였다는 것을 여러자료에서도 충분하게 알 수 있다.

본 블로그 글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s://han0114.tistory.com/13203353에서 영국의 공무원이며 저술가로 알려진 찰스 헨리 에덴(Charles Henry Eden:1839-1900)의 여행기 중 1880년에 출간된 <중국, 역사와 기술:Historical and Descriptive; with an Appendix on Corea>에서 당시 코리아를 설명한 것을 보면 "코리아지협"의 남쪽으로 수많은 섬이 있으며 가파른 절벽(steep), 낭떨어지기(bluff:high cliff)처럼 돌출된 곶()과 해적 정크선(junks)들이 숨을 수 있는 작은 만()이 수도 없이 많다 한 사실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크선들이 숨을 수 있는 장소가 코리아해협에는 수도 없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해적들 부지기수가 코리아 연안에 깊숙하게 숨어 활동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1차려몽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750"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버지니아(Virginia)에 바로 중국의 경사(京師)라고도 하는 항주(杭州) 킨사이(Quinsay)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의 교토(京都)를 경사(京師)라 하는 사실과 같으며 주로 중국문서에 남경(南京)을 떠나 북쪽으로 와서 '경사'에 정착했다고 되어있는 것에서 남경은 중앙아메리카대륙의 도시라고 할 때 북쪽으로 와서 경사라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일 가능성이 높다.

경사는 보통 오래된 궁성이 있는 곳을 말하기도 하지만 모택동전서(毛傳)에 "中國은 京師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며 일반상식적으로 천자 거주지(天子之所居也)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백리 이내의 땅을 기(畿)라고 하였고 중심인 왕성이 있는 지역을 경사(京師)라 하였던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곳을 마르코폴로는 경사라하였고 킨사이라 하였던 것이다.

버지니아에는 북쪽으로 거대도시(metropolitan area) 워싱턴(Washington)이 붙어 있다.

또한 제임스강 허리에 리치먼드(Richmond)가 있는데 이를 항주라 하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킨사이(Kinsai 또는 Quinsay)라 하였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이 리치먼드가 남북전쟁시 남군 수도였다는 점도 상기되어야 할 이야기라 하겠지만 이런 곳을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가 식민지 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가당찮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버지니아지도의 서쪽에는 중국바다와 인디즈가 있었다.

 

                                        1667 [London]John Overton(1640-1713)

 

 

 

우리가 상단에 보는 지도는 인터넷 상에 찾아 볼 수있는 버지니아 지도이다.

1667년 런던[London]에서 인쇄한 것으로 지도제작자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이 그렸다고 한다.

이 지도에서 우리가 의문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중국바다와 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는 지명의 기록이며 어쨌던 이 지도가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따져보면 버지니아(Virginia) 서쪽편에 중국바다와 인디즈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인디즈는 서인도제도(West indies), 인도(India)와 인도지나(印度支那:Indo-China)라고 알려지지만 이것은 대고려의 영역인 라틴제국의 스페인부왕령(Spanish east indies are part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 (Pacific Ocean) just beyond the mountains of Virginia.

지도제작자가 기록한 것을 보면 버지니어산(애팔레치아산:appalachia)을 넘어 아시아대륙 태평양의 중국바다와 곧바로 연결하고 더 나아가 인도(印度亞大陸)를 말하는 것을 보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뜬 구름 같은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태평양이 어디길래 이런 허튼소리를 남발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며 서세라 할지라도 태평양 명칭이 언제생성된 것이길래 태평양을 운운할까 지도제작 시기마저 의심이 될 수밖에 없다.

어쨌던 우월한 역사를 만들고자 하였겠지만 서세들이 중국과 인도지명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가능한한 멀리떨어지게 하고픈 조급한 마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동양오리엔탈 지명이 어쨌던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의욕이 넘친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가 파악한 바로는 위 지도 아랫 단(端)에 오리엔스"oriens" 라 한 것은 바로 "해가 뜨는 곳" 즉 동쪽(東:orientalis)을 가르키는 것을 알 수 있어 대동양 즉 "아틀랜틱 오션"을 말하고 있으며 지도 상단(端)에 옥시덴스"occidens" 는 "해가 지는 곳" 서쪽(西:occidentalis)을 가르키는 것임을 알 수 있어 바로 미시피강유역을 통칭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도를 시계반대 방향으로 90도 회전하면 될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지도 아래 게시한 현재 북아메리카대륙 지도를 놓고 볼 때 버지니아(Virginia)서쪽을 가로막고 있는 버지니어산은 바로 애팔레치아산맥(appalachia)을 말하는 것이며 그 산맥을 넘어 바로 서쪽 전체를 뒤 덮고 있는 미시시피강 유역을 '중국바다'라 했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중국바다를 고려바다라고 인식하게 맞다.

왜냐하면 멕시코만을 코리아만이라 한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존 오버톤(John Overton)이 1667년에 그린 위 지도를 보고 일부에서는 "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 한 중국바다와 인디즈를 지도를 방향 그대로 보아 북쪽 오대호(五大湖:Great Lakes)로 비견하는 오류가 있었던 것도 목격되지만 당시 서양인들의 눈에는 애팔레치아산맥을 넘어 미시시피강유역의 면적이 2,981,076㎢ 달해 수치상 오대호유역면적 753,919㎢ 의 4배가량 더 넓어 충분하게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강(江)을 바다(海)로 인식한 경우는 중국고서나 우리나라 고서(古書)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바다(中國海:The Sea of China)는 바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유역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그 주위를 분명 인디즈(Indies)라 명칭했다는 것은 본 블로그 글 "대승(戴勝)후투티(hoopoe)로 본 조선열수(朝鮮洌水)의 위치 https://han0114.tistory.com/17050677
인더스(Indus)는 어딘가? https://han0114.tistory.com/17050625
"에서 살펴본 지명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믿을 수 없는 근대사 https://han0114.tistory.com/17050697에서 밝혀 본 사실을 토대로 다시 본다면 분명 동아시아대륙사에 이용된 가공인물 풍신수길(豊臣秀吉:1537-1598)은 잉글랜드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와 동일인물로 추증한 것과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1577년에 버지니아를 “Q.Eliza”이라고 불렀다 하여 이것이 버지니아 지명의 시초가 된 것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에서 버지니아가 잉글랜드라는 사실과 함께 일본가공역사가 똑같이 병용되었다는 사실을 일리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것은 북아메리카 동부와 동아시아대륙 동부를 위치적으로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풍신수길에 빗대지 않아도 그는 이미 서세기록에서 해적왕으로 알려져 있고 그렇다면 그는 개척자가 아니라 해적신분을 가졌던 인물임을 쉽게 알 수 있어 정확하게 왜구수괴 풍신수길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의 행적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것으로 해적신분에 맞게 남의 땅을 함부로 쳐들어가 닥치는대로 노략질과 살인, 강간, 강도행위를 습관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저급한 종족이었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도록 일치한다.

후진국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으며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버지니아에 쳐들어가 식민지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곳은 그들말처럼 특별한 역사문화가 없은 미개한 인디언원주민만이 존재하던 곳이 분명 아니다.

그곳을 서세들은 신대륙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우리가 알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신대륙이 아니었다고 하면 기존 어떤 역사주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밝혀 알려야 했기에 그것이 서세들에게 엄청 부담스러웠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오린엔탈 문명을 그들이 부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다.

그들이 미개척의 땅을 개척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땅을 그들이 함부로 침략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상황에서 벗어나자면 도리없이 역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땅, 신대륙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1577년에 "밝다의 땅" 북위37도 해상에 도착한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개척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체제에게 도전한 반란일뿐이다.

이것을 임진왜란이라고 우리들은 알고 있는 사건이다.

한반도역사에서 임진왜란을 기술한 것을 보면 왜구수괴 풍신수길이 조선남해를 공격하여 일단 서전을 그들이 유리하게 만들었으나 단합된 연합체제의 다양한 군사들에 의해 일망타진되었고 하나의 체제의 영역에서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킨 수괴들은 모두 대조선 요구에 의해 척살, 참살, 교살등의 방법으로 처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최종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일본행정부자체를 거주지를 한정하여 관리한 것으로 본다면 자치구 성격의 짙은 것이다.

대조선은 차기실력자인 에도막부(江戶幕府) 1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을 덕천가강(徳川家康:1543-1616)으로 삼았고 그에게 전권을 주어 전범자인 풍신수길과 일당들을 잡아들이도록 했을 것이 틀림없다.

대조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와 그의 일당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와같은 상황을 근거로 가공의 인물인 풍신수길의 실제인물은 바로 잉글랜드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라고 하는 것이다.

해적조직은 마피아조직과 비슷한 것으로 직계가족들은 조직책임하에 부양되거나 대신 철저하게 통제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은 무조건 즉결처형이 가능한 그들 제도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아무리 포악함과 잔인함 그리고 천하무적으로 날고 뛰는 세력이라 할지라도 가족구성원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그들의 행동의 부자유스러운 인질이 되어 본의던 아니던 간에 구속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해적을 감당할 수 있었던 조직체의 성격이다.

이들 가족들을 하나의 체제(대조선)에서 집단적으로 한 곳에 거주하게 하여 그들을 관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러한 그들의 자취를 프론티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근대사에서 버지니아를 개척했다고 한 존 롤프(John Rolfe:1585-1622)가 일본 열도인물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1579-1632,재위1605-1623)와 동일인물로 나타나고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칭호를 물려받았다고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통적으로 대조선에서 일본인들에게 자치성을 보장하면서 정이대장군을 임명하는 것이다.

도쿠가와부터 시작된 관율이라고 보면 맞다.

그곳을 열도일본인들은 강호(江戸)라 하였고 이것을 그들은 수도라 하였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어 버지니아에 속하는 어느 지역을 경사(京師)라 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한 곳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77년 이곳을 침범하여 개척하였고 그 이후 존 롤프가 정착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바로 경사 외곽지를 자치지역으로 조선에서 허가하여 정착할 수 있겠금 하였을 수도 있다.

강호시대(江戸時代:1603-1868)가 시작된 것은 바로 임진왜란을 종결짓고 난 후부터인 것을 알 수 있고 일본역사는 이를 막부(幕府)라 한 것이다.

버지니아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들이 수도 없이 많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사실이지만 막부의 최고지도자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은 바로 "하나의 체제" 주체인 대조선이 임명하는 관직이라 보아야 맞다.

엘리자베스1세가 집권한 시대만 하더라도 유럽국가중 가장 후진국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만큼 그들을 지배하였을 지라도 식민지하였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기술인 것이다.

당시 광해군 원년(1609)에 대조선국(大朝鮮國)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총체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일본세력들에게 기유조약(己酉條約)을 강요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기유조약을 보면 왜란을 일으킨 구일본세력들을 최대한으로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제한을 시켰다는 것으로서 주요내용을 보면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을 명령했고, 왜란중에 왕릉을 발굴한 범릉적(犯陵賊)을 압송해올 것을 요구하였으며, ③ 납치한사람들 즉 피로인(被擄人)을 송환할 것 등 3대조건을 대조선이 제시하였고 새로운 일본세력들은 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대조선이 요구한 모든 것을 그들이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물론 사태 중요성을 감안하면 이 조약에 의해 풍신수길(豊臣秀吉)처단도 조약문구외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열도일본 역사(歷史)에서는 풍신수길이 갑자기 자연사한 것처럼 만들고 그의 무덤이 어딘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잉글랜드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시신 역시 부하들에게 납관에 밀봉되게 하여 아무도 모르게 카리브해 어디쯤에 수장되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철저하게 숨기는 것도 동일하다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비밀스럽게 조치한다 하더라도 기유조약을 강요한 대조선관리들이 내란을 일으킨 범죄자를 처단하지 않고 새로운 일본세력들을 공히 인정해 주었을리가 만무하다.

어쨌던 이때 대조선에 의해 강압적으로 맺게 한 기유조약(己酉條約)을 더 자세히 보면 잉글랜드(일본)사람들에게 대조선에서 문인(관표)이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하는 행위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벌한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들은 절대로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아마 생각해보면 이러한 기억들이 서세들에게는 한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박경리선생을 평생 의문스럽게한 일본이 가진 증오(憎惡)의 근원(根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결국 일본으로 가장한 잉글랜드(England)는 북아메리카대륙 복판에서 미국을 시켜 복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1909년 대한제국을 상대로 기유각서를 맺게 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 역사기록으로 한을 가진 서양인들이 대한제국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따져보면 1609년에 맺은 기유조약에 반하여 정확하게 300년이 흐른 후 1909년에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게 하는 것인데 내용은 순종(純宗:1874-1926,재위:1907-1910)임금의 실권을 일본통감 소네아라스케(曾禰荒助)가 박탈하는 것으로서 정확하게 300년 전의 일을 복수하고 이를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치졸한 역사를 그들은 기어코 우월한 역사라 우기고 있는 것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처음 개척한 땅이 바로 지금의 버지니아(Virginia)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 식민지개척자 존 롤프(John Rolfe:1585-1622)1612년에 담배를 처음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며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 거주하던 인디언들로부터 담배재배방법을 습득하여 인디언을 쫓아내고 담뱃재배산업을 독점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은 그들의 비열한 역사가 무엇이든 침탈하고 갈취하는 역사임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 하더라도 그들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를 열도일본인들이 철저하게 습득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담배(南草, 西草, 煙草, Nicotiana:Tobacco) https://han0114.tistory.com/17049492 "에서 알아보았듯이 대조선의 연초산업은 세계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버지니아의 서양담배산업은 대조선 담배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배역사에서 근세기를 살펴보면 에스파냐는 1513년에 아메리카대륙의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만들면서 원주민의 파이프 끽연을 발견했다고 하여 그곳 원주민들이 이미 담배재배를 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본격적인 담배의 재배는 1535년에 쿠바섬에서 시작되어서 1550년대에는 유럽 에스파냐 연안의 마을이나 공원에서 관상용식물로서 재배되었고 잎말음담배를 끽연하는 식민지가 많았던 결과로 에스파냐에서도 원시적인 잎말음담배의 끽연 풍습이 있었으나, 다른나라에는 이 풍습이 별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나라는 것은 유럽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 유럽대륙에 당시 서양인들이 없었다는 이야기며 에스파냐 역시 유럽대륙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풀이는 우리가 이미 역사찾기가 어느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한반도에는 임진왜란 이후 기유조약을 맺은 광해군(光海君,1575-1641,재위:1608-1623)때에 담배가 유입된 것으로 짐작(?)정도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상 한국의 배역사는 한반도를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때문에 담배가 조선으로 전해진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버지니아에 전해진 담배재배상황과 같다고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담배뿐만아니라 1740년경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Virginia)에서 잉글랜드인에 의해 처음 목화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중앙아메리카를 중국(만주, 청)이라고 한다면 여기를 화중(華中화남(華南)이라 하는 곳으로 11세기경부터 중요한 작물로서 인정받았다고 하는 것은 콜럼버스가 카리브해 도서 음밀한 곳을 찾아 오기 이전부터 중남미·서인도제도 일대에서 목화가 집중적으로 재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본 블로그 글"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49956"에서 밝혀듯이 스코틀랜드인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가 1911년에 코리아를 방문하면서 목격한 사실에서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생산국이라 하였으며 또한 육지와 바다 교통의 새로운 시설이 있어 무역 개방되면 급속한 발전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는 것은 목화재배지도 광대하였겠지만 무역할 수 있는 기반시설 인프라역시 세계적이라 한 것을 알 수 있다.

남아메리카의 목화는 페루에서 BC1500년경부터 이용되었다 하였고, 미국에서는 영국이 파나마에서 재배한 인도의 목화를 1740년경 버지니아지방으로 전해지면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역사는 모조리 다 빼버리고 잉글랜드의 초라한 역사만을 부각시킨 역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잉글랜드는 왜 버지니아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로얄페밀리의 상징성을 연결시키려고 하는 욕구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 Perry:1794-1858)가 하필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1600-1708,1708-1873)의 동인도함대사령관에 취임하며 1852년 11월 영국여왕의 친서가 아니라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지금도 조선소(造船所)가 있는 버지니아주(Commonwealth of Virginia) 노퍽(Norfolk)에서 프리깃함 3220 톤급의 미시시피호(USS Mississippi:1841)를 기선으로 한 4척의 함대가 출항했고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카나리아제도, 아프리카남단 케이프타운, 말레카의 싱가포르, 동아시아대륙 홍콩, 상하이, 유구(류큐:오키나와), 오가사와라제도를 경유하여 자그마치 직선거리로 35,000km를 약 8개월간 항해 끝으로 1853년 7월 8일에 열도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했다는 사실에서 만약 그것의 항로가 정확하고 그것들이 모든 사실이라면 과연 그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듯 위험을 감수하며 달려 갔을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한게 아닐 수 없다.

단지 일본을 개방하기 위한 수고라고 하기에는 실속이 없는 엄청난 도박이며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서 역사사실만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 될 뿐이다.

정말 열도일본에 미국함선이 도착했을 가능성은 거의 1% 이다.

열도일본으로 출발하기전에 기항이 본래 버지니아 주(Virginia)노퍽(Norfolk)이라는 점도 미국, 버지니아(잉글랜드) 또는 일본 삼각관계를 정확하게 엮는 것이어서 매우 의미 심장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게 한다.

글쓴이는 여기서 감히 말하건데 노퍽(Norfolk)에서 출발하여 도착한 우라가(浦賀)는 중앙아메리카 동부 해안 멕시코 땅이 될 수밖에 없다.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방했다고 하는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Oriental Development Company)가 존재한다 하였다.

둘러치나 메치나이다.

 

산수유와 경주(항주.臨安)

 

리치먼드(Richmond)의 의미는 옛독일어로 강력한 보호자"powerful protector"로 나타나고 또한 옛프랑스어로는 "rich hill" 풍요한 언덕이라고 풀이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는 것은 잉글랜드가 보호자가 되고 싶은 것이며 또한 광산(mine)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또한 이 도시의 별칭으로 강도(江都:The River City)라 하였고 또는 남부수도Capital of the South)로 불리며 신조(모토)로 별을 향해 나아간다(Sic Itur Ad Astra)라고 한 것을 보면 동방별(金星)을 '샛별'이라하는 것에서 동쪽 하늘에 뜨는 계명성(啓明星)을 의식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리치먼드를 금성(金星)이라 하였을 가능성을 읽을 수가 있다.

 

반면 버지니아 주화(state flower)가 산수유(山茱萸:dog wood)이고 주새(state bird)는 홍관조(cardianl)이며 주산업종은 담배, 양돈, 양계등이 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주(州)의 모토(motto)는 폭군엔 항상 대항한다(Sic simper tyrannies-Thus always to Tyrants)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상 신대륙이라는 서양사를 근거하는 것이라면 상당히 모순된 신조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면 신대륙이라고 하던 북아메리카대륙에는 폭군이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앞에서 충분하게 설명했지만 잉글랜드가 해적들을 통제하던 조직체일 뿐이지 국가라고 볼 수 없고 버지니아를 통제할 만큼 여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그곳을 해적들이 노략질 한 이력을 말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군주국으로서 국가체제를 가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잉글랜드 엘리자베스1세가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시켜 지원하는 척하면서 남의 땅을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그 수입을 나눠가지는 것이 아닌 이상 그들이 군주국으로 행세할 명분이 없다.

즉 잉글랜드를 군주국을 만들고 찰스2세를 군왕이라고 하였겠지만 이미 청교도혁명에 의해 폭군이 사라졌다고 정의된 마당에 식민지 운운하는 것이나 더군다나 폭정이라는 것은 세계사 본질을 훼손하려는 불편한 도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아래 버지니아 문장의 그림에서 그들은 선(善:定義)의 여신이 폭군(?)을 제하고 있는 문양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해석하면 기존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하나의 체제, 대조선이 그들 해적과 그의 가솔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고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압제라고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말하는 잉글랜드 엘리자베스1세(virginia)가 군주국이라고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녀가 대조선을 제압하는 문양이라고 여겨질 뿐임을 어찌하겠는가.

 

 

 

본 블로그 글 "산수유(山茱萸 Cornus officinalis)-Korean dogwood (한국인의 산수유나무) https://han0114.tistory.com/17049712"에서 말하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지리지에 경상도 경주는 산수유(山茱萸 Cornus officinalis)와 구기자(枸杞子:Wolfberry, Lycium barbarum L)가 풍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증보다 76년 앞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도 경주를 산수유 자생지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세종실록지리는 변질된 기록이라고 보아야 맞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교정세종실록지리지(校正世宗實錄地理志)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는 것은 모든 지리지를 한반도에 맞췄다는 이야기며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이 1945년 9월 21일 미 군정(美軍政)에 의해 최종폐지되었다는 것은 임무를 완수했기때문에 더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처음부터 일제가 한 것처럼 꾸몄지만 시작과 종결 모두 미군정에서 관할 한 것이다.

우리 한반도인들을 만만하게 보는 이유가 있다.

자기 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운명을 달리한 것인지도 모르는 바보천치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서양문화라면 그저 그들의 똥이라도 받아 먹을 태세를 갖추는 것이었으니 어찌 이런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유학파들이 다 말아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학은 본래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기위한 것이지만 외려 나라를 좀먹게 한 것임을 역사에서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역사는 보잘 것 없어야 하고 서세의 역사는 우월해야 했으니 이것을 노예근성이 아니고 무엇이며 역사열등의식에 진저리를 치던 일본인들마저 우리를 무시하는 이유를 우리가 냉정하게 판단하고 지금이라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된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지도자들 정신상태가 모두 서양교육에 마취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고 엉터리같은 노예역사, 패배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알기 때문에 열도일본인들에게 끝없는 노림감이 되고 조롱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절대 선조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미국이 대한제국을 누르고 세계를 제패하고 난 후에 결과는 우리에게 암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우릴 발가벗겨놓고 특별하게 만든 것을 한반도인에게 선물한 것인데 바로 한반도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을 열도일본인들이 만들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일본에 포함된 역사가 얼마나 혼돈속에 가려져 있는 것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산수유(山茱萸)를 한국인의 산수유나무로 알려진다.

그 이유는 산수유를 영어로 "Korean Dogwood"라고 하며 학명은 "Cornus coreana or Swida coreana"로 나타난다.

이것을 우리 한반도 유학파 지식인들은 단순하게 볼 뿐이다.

"Korean Dogwood"란 식물에는 전통적인 세계삼한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 역사가 보잘것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도저히 알 수가 없기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생물학계에서 분류한 것만 보더라도 이 식물에 한해 얼마나 혼란을 시키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산수유는 특히 아속(亞屬:Subgenus)4가지로 나누고 산수유아속(山茱萸亞屬:Cornus)4종에서도 본래 산수유종을 빠뜨려 놓고 제각각 따로 놀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천악산수유(川鄂山茱萸:Cornus chinensis)를 중국종이라 하고 유럽종을 대과산수유(大果山茱萸:Cornus mas)하였으며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산수유(山茱萸:Cornus officinalis)를 일본종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흑실산수유(黑實山茱萸:Cornus sessilis)라고하여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를 원산지로 기록하고 있다.

흑실이라는 것은 검은 열매를 말하는 것인데 오래 될 수록 색깔이 짙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말채나무 벤타미디아속(四照花亞屬:Benthamidia)에는 미국산수유 화수목(花水木:Cornus florida)넣고 있는데 이것은 진종이다.

정작 코리안산수유라고 하는 것은 래목아속(棶木亞屬:Swida)이라 하여 그 속 20~30종(種:Species) 에 넣어 어지럽게 만들고 그중에 조선래목(朝鮮棶木:Cornus coreana:Swida coreana)이라 하여 산수유라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지만 이것조차 열도일본인지 막연하게 원산지가 나타날 뿐이다.

 

지금까지 글쓴이가 관찰한바에 따르면 단도직입적으로 "Korean Dogwood"라 하는 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대대로 불리던 산수유를 서양인들이 붙여 놓은 이름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가수가 만든 곡에 나타나는 제목에서 놀랍게도 한국산수유를 발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한반도에 방문한 흔적이 없는 사람이다.

휴스톤(Houston, Texas)태생으로 베네수엘라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가수 디벤드라 반하트(Devendra Banhart:1981~)는 그의 2005년작 절름발이 까마귀(Cripple Crow)란 엘범에 수록된 코리안 산수유(Korean dogwood)란 곡이 들어 있다.

그 가사 내용을 보면 참으로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타고르 시를 접하는 느낌이다.

그는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생활하였는데 그가 인도 힌두 태양신(indra)세례명까지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오리엔탈문명을 신봉하는 가수이며 아티스트란 것을 알 수가 있다.

 

 

 

Red oak, Sugar

And Korean Dogwood, Korean Dogwood

Vibes turn to rubbed rum

Lit by mission moonlight Kangas on that hillside.

You are my life

And you baffle me some like vanilla's maple.

Inca Cornflower

You're my baby's blue eyes (생략)

산수유(山茱萸 Cornus officinalis)-Korean dogwood https://han0114.tistory.com/17049712 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음.

 

위는 노래가사의 일부이다.

노래가사 전체에서 들어나는 시적(詩的)이며 은유적인 표현을 감안하더라도 북아메리카 원산지라고 하는 붉은

참나무(

Red oak)와  호놀룰루(Honolulu)라고 판단하는 버뮤다(Bermuda)에 자생식물 사탕수수(Sugar)를 한국산수유(

Korean dogwood)와 같은 의미로 읊었다는 사실과 본 블로그 글 "향초(香草)라는 바닐라(vanilla)는 고려의 산물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49383" 에서 언급한 바닐라 단풍(vanilla's maple)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한국산수유(Korean dogwood)를 반복하여 강조했다는 것도 참으로 신기하다 할 수밖에 없다.곡 제목도 그렇지만 노래전반에 있는 무게가 주는 의미에서 코리안 도그우드(Korean dogwood)를 반복한 것은 단순한 음율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잉카제국(inca)과 고려꽃의 의미인 수레국화(cornflower)와도 세계삼한역사관점에는 어색하지 않음에도 그가 이렇게 읊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 즉 오리엔탈문명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수레국화의 푸른 빛을 그의 아기의 푸른 눈과 비교하였다는 것은 유전적인 의미까지 내포된 것이라고 풀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Kangas를 갠지스(恒河:Ganges)라고 하고 힌두어 "गंगा" Ganga는 "강(가)변(江邊)"이라 읽을 수 있어 Lit by mission moonlight Kangas on that hillside. 월광이 찾아드는 강변언덕의 빛은 나의 삶이라고 표현한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종교적 갈증을 말하는 것이며 이와같은 표현들은 고려(corea)가 인도, 힌두, 그리고 원시불교간에 근원적으로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아메리카대륙전체가 바로 고려(corea)와 연관된 역사 땅임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이 곡을 만들때부터 한반도에 코리아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임에도 그가 산수유 명칭이 코리안 산수유(Korean dogwood)라는 것을 어떻게든 알았다는 이야기다.

한반도 코리아를 의식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명칭임을 그대로 읽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대체 미국가수 디벤드라 반하트(Devendra Banhart)가 말한 산수유는 원산지를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일본산수유라는 학명 Cornus officinalis 일까?

아무리 원산지를 검색해도 꼭꼭숨겨놓아 산수유라고 할 수 있는 토종을 찾기가 힘든다.

그렇다면 "Korean dogwood" 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먼저 역으로 버지니아 주화(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2차세계대전에서 전리품을 받아든 미국인들에 의해 변질된 것이라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산수유는 정상적으로 찾기 힘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이 산수유는 식물학분류체계적으로 심하게 꼬아놓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버지니아의 주화는 바로 학명 Cornus florida L. 를 말함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것을 "American Dogwood" 라한다.

즉 앞에서 보았듯이 말채나무 벤타미디아속(四照花亞屬:Benthamidia)의 미국산수유 화수목(花水木:Cornus florida)이라는 것이다.

학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원종취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학명 Cornus L(Cornus florida L.)에서 린네가 학명자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 미국산수유를 역사적으로 보면 1918년 주화(州花)로 채택되었다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늦은 시기인 1956년일 수 있다는 사실이 덧붙여 있으며 이것은 한반도에서 정리가 끝난 시기로 미군정이 어느정도 한반도에 정리되었다고 판단하에 그렇게 정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있다.

꽃은 대체로 초록색을 띤 흰색꽃임을 알 수 있고 가끔 노란색 꽃도 있다고 하지만 대체적으로 일단 꽃의 색깔은 흰색이다.

즉 지금 일본산수유라고 하는 개나리 같은 노란색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붉은 딸기류같은 열매가 맺는데 잎들이 겨울동안 떨어지기 전까지 짙은 붉은색으로 변형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산수유의 어원으로 들어가면 본래 단검이나 꼬쟁이(from the use of the very hard wood for making dags or daggers)같은 것을 만들기에 좋은 매우 강질의 나무(very hard, strong wood)이기 때문에 직조기의 북, 화살, 핸들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앞선 이름은 채찍질나무(whipple-tree)라 하였고 이것이 1548년 개나무(dog-tree)가 되고 1614년까지는 말채나무라 지칭되었으며 이후 사냥개의 나무(hound's tree)로 불리면서 그 열매를 "사냥개딸기(houndberries)로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거의 산수유의 어원과 일치한다.

 

아시다시피 현재 동아시아대륙에서 모든 자료에 산수유(山茱萸)라는 것은 학명 "Cornus officinalis"을 말하고 이것은 대조선의 식물을 정리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학명부여자  Siebold & Zucc. 지볼트(1796 –1866)와 주카리니(1797-1848)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분류학계에서는 "Japanese Cornelian-cherry" 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일본서양산수유로 별칭에서조차 일본과 유럽을 한데 묶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유럽종(Cornus mas)인 것처럼 하지만 유럽종은 린네가 명명한 학명을 따로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특징적인 것은 앞에서 말한 개나리(forsythia)와 비슷한 노란색 꽃임을 알 수가 있기 때문에 본래 산수유의 꽃의 색이 흰색이라는 것과 완전히 배치된 색깔이다.

그러나 이것을 아예 "Asiatic dogwood"라고 해버린 것이니 한반도에서 산수유는 이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일게다.

때문에 일본산수유는 이렇게 만들었지만 정작 조선산수유와 중국산수유가 빠졌다.

늦은 시기인 1908년에 독일식물학자 완게린(W.L.Wangerin:1884-1938)에 의해 다시 분류되어야 했고 산수유과에는 그는 코르누스 차이넨시스(Cornus chinensis)와 코르누스 코리아나(Cornus coreana)로 분류하여 비로소 동아시아대륙에 안착시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역기서 잠시 도발적인 이야기를 한번하자.

우리 한반도 식물체계를 완성시켰다고 하는 조선총독부 어용학자 나카이 다케노신(Nakai Takenoshin:1882-1952)가 과연 일본인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입장에서 당연하게 아닐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구인가?

체코 미국 생물학자 휴고 일티스(Hugo Iltis:1882-1952)의심한다.

그는 버지니아 프레드릭스버그(Fredericksburg)에서 운명하였는데 생몰이 똑같고 생물학자란 점이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나카이의 얼굴이 어떤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계속 파헤쳐 볼 것이다.

 

杭萸肉:为产于浙江杭州一带者

한어자료에 보면 산수유편에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일대에서 생장하는 산수유를 항수육(杭萸肉)라고 할 정도로 지역특성을 말하고 있다.

이것과 버니지나가 일치한다.

어쨌거나 항주(杭州)는 고도로서 907년~978년까지 고려초기 5대10국시대 오월국(吳越國)의 수도 임안(臨安)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어 고도인 것은 분명하다.

 

 

                                           [Cornus florida:Flowering Dogwood]

 

                                             [Cornus florida:Flowering Dogwood]

 

버지니아의 주화(州花)가 산수유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생물학적 역사이야기다.

 

 

 

 

 

 

결정적으로 산수유원종 원산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은 버지니아의 주화 학명 "Cornus florida L." 1900년 이전 DNA를 분석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의 분포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버지니아주를 가르키고 보존상태(conservation status)를 매우 안정적(secure)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곧 원산지란 의미이다.

대륙지형적으로 따진다면 절강성 항주라고 할 수 있는 버지니아주 가운데 있었다고 생각되는 도시를 지정한다면 금성이나 동경이라 해야 맞다.
그러나 베트남 북부 홍하(紅河:송코이강)의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있는 도시 하노이를 서세동점시기에 바로 통킹(東京:Tonkin/Tongkin/Tongking)이라 하였다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 본질의 역사를 감추고 아시아대륙으로 옮기고자 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高麗太祖王建改稱為慶州、東京
고려태조 왕건때 경주를 동경이라고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임안이라고 하는 도시라고 판단되며 이것은 킨사이로서 항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마무리(버지니아에 잉글랜드정부가 있었다.)

 

버지니아를 주제로 글을 쓰다보니 이렇듯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으로 글의 분량을 줄이기 위해 가능하면 내용을 함축적으로 가려 글을 썼다.

우리에게 버지니아의 지역특수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몇가지의 상식적인 이야기가 있어 마무리겸 나열해본다.

첫째 미국대통령 중에서 초창기의 대통령들이 거의 버지니아출신이라는 특이한 사실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재위:1789-1797), 3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재위:1801-1809), 4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1751-1836,재위:1809-1817), 5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1758-1831,재위:1817-1825), 9대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1773-1841,재위:1841-1841), 10대 존 타일러(John Tyler:1790-1862,재위:1841-1845), 12대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1784-1850, 재위:1849-1850)가 모두 버지니아출신들이다.

특히 9대 윌리엄 헨리 해리슨, 10대 존 타일러, 12대 재커리 테일러는 휘그당(Whig Party)소속이라는 점이 또한 특이한데 이 정당은 왕의 특권에 반대하는 영국 정당에서 따온 것으로 반프리메이슨 운동가들도 참여한 정당이라는 점이다.

따져보면 미국건국초창기에 반프리메이슨세력이 정치적으로 강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글쓴이는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는 것은 왜 잉글랜드가 영국과 엉켜 붙어 지들 앞가림도 할 수 없으면서 지속적으로 미국정치사에 깊숙하게 개입하거나 지배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나타나는 지가 실제로 궁금한 것이다.

여기에서 과연 미국이란 나라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재위:1913-1921)역시 버지니아출신이다.

만약 버지니아가 영국 즉 잉글랜드라 한다면 결국 1924년까지 미국이란 국가의 정치는 영국이란 이름으로 지속되었으며 그것을 잉글랜드라고 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동시에 미국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그들의 역사범위가 줄어들 수박에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버지니아는 잉글랜드가 맞는가?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게 하는 사건이 바로

1907년에 웨스트 버지니아의 머농거(Monongah)에서 발생한 광산대참사(Mining Disaster)에 대한 주제넘다고 생각되게 하는 잉글랜드의 처신이다.

1907년이라면 이미 미국이 독자적인 정부를 만들고 이끌어가던 시기라는 것은 거의 상식처럼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석탄(石炭, coal)을 당시 서양인들은 블랙다이아몬드(Black Diamond)라고 하였다.

페어몬트석탄회사(Fairmont Coal Company)의 광산(Mines) No 6No 8 에서 1907126일 오전 1030분에 폭발하였을 때 머농거(Monongah)에서 8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동을 느꼈다 하였고 순식간에 레일과 건물, 포장도로까지 파괴되면서 358곳의 광산 지하의 시설손실과 기술자를 잃게 된 것이다.

이 참사로 숨진사람은 이탈리아인 171명, 미국인 85명(11명의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을 포함), 헝가리인 52명, 러시아인 31명, 오스트리아인 15명, 터키인 5명, 기타 2명 361명의 희생자를 발생시켰고 이 사고로 인해 대략 250명의 미망인과 1,000명의 고아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실상 북아메리카대륙에는 이탈리아, 러시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도 있었으며 터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유럽에 있어야 할 영국에서 머농거광산대참사가 일어난 바로 다음해인 1908에 탄광노동자의 8시간 노동법을 확정하게 된다.[참조:http://www.legislation.gov.uk/ukpga/Edw7/8/57]

이것은 참사가 광산노동자의 심각한 노동환경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하에 근로시간을 존중하는 법을 제정하고 확정한 것이다.

물론 악화된 여론을 달래려 한 것이다.

오히려 미국정부가 나서 할 짓을 영국이 주제넘게 나서 법제화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이야긴가.

이것은 미국은 허수아비란 소리이다.

잉글랜드가 광산노동법을 법체화한 것은 우연이라 할 것인가?

생각 해보면 여러곳에서 이와같은 사실을 글쓴이가 관측할 수 있었던 사실이며 어쨌던 미국은 북아메리카대륙 어떤 지역에서도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고 이를 영국이 대신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인가?

바로 유대금융자본의 그자체이며 산업경제를 관할하는 체제, 시스템일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루어 두었던 "대한제국 마지막 편"을 마무리할 원칙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

 

서두에서 잉글랜드(England)의 별칭은 앨비언(Albion)으로 하고 버지니아를 뉴앨비언(New Albion)이라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하였다.
앨비언(Albion)이란 어원은 13세기 라틴어와 캘드어(Celtic)에서 기원한 것이라 하며 흰색의 절벽들의 광경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유럽지중해에서 생긴 명칭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하얀 땅(Weissland)이라는 뜻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 https://han0114.tistory.com/17050739
"에서 말한 것을 인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한이 중요하기때문이다.
이글에서 포르투갈은 아마도 백제(百濟)의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

흰색의 빛(光)과 깊은 관계가 있는 태양신을 믿는다는 뜻의 백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는 포르투갈인들은 해변가에 흰 색의 집을 짓고 살았다는 사실에서 1502년 1월에 포르투갈인 탐험가 가스파르 지 레무스(Gaspar de Lemos)가 브라질 남부 구아나바라 만(Baía da Guanabara)입구(湾口)에 도착하고 그 해안에서 벽을 희게 바른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였다는 사실들을 연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흰색 땅이라 하니 얼음과 빙하를 말하는 것 같다.
물론 태고적에 흰색을 주로 만설로 뒤덮인 백산을 숭상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사상일 것이다.
하지만 흰색은 빛이다.
즉 태양이라는 것이며 태양신을 섬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문제이다.
앨비언은 적어도 지중해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면 그곳은 남아메리카대륙 영길이국사람들이 세를 갖춘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라할 수 있고 브라질을 지리적으로 지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앨비언이라는 것은 남아메리카대륙을 근원지로 하는 명칭이라고 해석되어야 맞는 역사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잉글랜드가 1577년 이전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부터 먼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하나의 체제에서 세도정치가 어떤 형태로 일관했는지 분명하게 살펴보았다.
조선말기에 세도정치라고 하였지만 기실 유대인들이 실세로 등장하면서 유대자본으로 정치를 쥐락펴락했다는 것도 어느정도 짐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실상 빅토리아여왕만 보더라도 유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여제이고 꾸며진 서양제왕임을 알 수가 있고 미국역사가 필요한 것은 바로 서양로얄페밀리의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무리가 되더라도 이런 역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로얄상징성이 미국에겐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동양왕실도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열도일본왕실이다.
때문에 아마도 두개의 황실은 급조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청나라가 영국의 정부노릇을 한 것이나 만주정권이 서양의 허수아비정권이라는 사실 또한 우리가 근세사를 짐작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버지니아가 영국 즉 잉글랜드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최소한 1864년까지 대조선에 의해 그들은 끽소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핍박을 받았던 세력이다.
때문에 버지니아주 모토가 "폭군엔 항상 대항한다"라는 것과 또한 "선(善:定義)의 여신이 폭군을 제하고 있는 문장(紋章)"이란 것은 대조선을 상대로 그린 그들의 한이 서린 상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그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내색하겠는가?

사실상 버지니아 고지도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애팔래치아산맥을 버지니아산이라고 하였고 그 넘어는 바로 중국바다가 있었으며 그곳에는 인디즈가 존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북아메리카대륙은 동양역사 오리엔탈문명이 뿌리깊이 존재하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세계사를 완전하게 반전(反轉)시키는 상황을 북아메리카대륙 전역에서 연출한 것이다.
미시시피강을 중국바다라고 하였다는 것은 그동안 본 블로그 글 "대승(戴勝)후투티(hoopoe)로 본 조선열수(朝鮮洌水)의 위치"에서 주장한 조선열수(朝鮮洌水)가 그것이고 습수(隰水)와 선수(汕水)가 그것이다.
그곳에 대동강(大同江) 또는 여강(驪江)이라 했을 것을 짐작한다.
또한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본 블로그 글 "인더스(Indus)는 어딘가?"에서 1877년의 인도(印度)의 인더스강(Indus river)하류가 ‘신드(shind)’지역이라고 한 사실과 함께 인더스강(Indus river)을 지방 말에 따라 '힌두스(Hindus)', '신독(身毒)’, ‘신두스(Sindus)’, ‘신드(Sind)’라고 한 사실과 이것이 India <Indos <Indus <Hindus <Hind 로 이어지며 한자로 印度 <天毒 <身毒으로 표기되었다는 점과  아울러 身毒=天竺=Sind=Hind, Sindus=Hindus=Indus=印度 라고 정리하고 그곳을 망기(mangi)라 했다는 점을 우리가 충분하게 떠 올릴 수 있는 역사로서 정립될 수 있다는 자심감 또한 얻게 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결국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지리지에서 말한 경주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도 말한 경주는 하나같이 산수유가 생장되었다는 사실이며 경주는 산수유 자생지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본 사실을 종합적으로 바탕으로 한다면 경주는 과연 어디어야 하는가?

섣불리 계획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 기존 고대도시들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감안할 때 특정적으로 지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버지니아 주의 한 주요한 도시로 보아야 역사와 일치하는 것이며 산수유의 원산지와도 일치하는 것이 된다.

본 블로그 글 "대한제국과 일본(Japan)이란 실체 https://han0114.tistory.com/17050752 의 소제
2) 1차려몽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에서 송원고려시대때 세계 제1의 무역항 자이톤(Zaiton)이 플로리다 마이에미(Miami)란 사실과 인도지나반도의 동남부에 있었다고하는 점성(占城:Champa)이 루이지에나주(Louisiana)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경사(京師)라 하는 킨사이(Quinsay)를 항주(杭州)라 했다면 그곳에 항주육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경주가 있었을 것임을 총체적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그리고 또하나 북평(北平), 대도(大都:Great Capital) 캄발루크(Cambaluc)가 틀림없이 워싱톤(Washington, D.C)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상당히 세계삼한역사관점을 넓혀놓고 있으며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산수유로 본 경주위치인식 또한 역사찾기의 한개의 큰 분기점으로서 여기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한가지더 부언하자면 미국은 적어도 1908년까지 국가 구실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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