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광물

조선에서 다이아몬드(鑽石, Diamond金剛石)이 났다.

한부울 2011. 12. 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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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다이아몬드(鑽石, Diamond金剛石)이 났다.

 

글쓴이:한부울

 

브라질 홍목과 소목-Caesalpinia echinata(巴西紅木, 巴西蘇木, Brazilwood, Pau-Brasil, Pau de Pernambuco and Ibirapitanga)

 

 

찬석(鑽石)은 금강석(金剛石)이라고 하고 다이아몬드(鑽石, Diamond,學名金剛石)라 했다.

 

찬석(鑽石)은

钻 뚫다-찬

石 돌-석

즉 돌을 뚫을 수 있는 돌이다.

 

찬석(鑽石)이란 명명을 보면 현재처럼 보석이란 의미에 글자가 아니다.

아마도 이 명명은 17세기말 베네치아(Venetian)의 빈센트 페루지(Vincent Peruzzi)에 의하여 브릴리언트 컷(double-cut brilliants)의 연마방법이 발명되기 전에는 별다르게 가치를 두지 않고 또 다른 돌을 파내는 도구의 명칭 정도로 만족했다고 보여 진다.

이 명칭으로 볼 때 대륙조선시대에는 바로 금강석(金剛石)원석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명칭이다.

사실 지금처럼 다이아몬드가 귀하게 대접받는다는 사실에서 보면 보석으로서의 희귀성 가치인데 찬석(鑽石)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요가 많고 공급이 부족한 현대의 가치성을 그대로 비교하기는 무리가 따른다고 해야 맞다.

그러나 로마 시대때 유럽에 수입되어 왕후귀족만이 지닐 수 있는 귀중한 보석으로 취급되었다고 하고 중세에는 주로 호신부(護身符)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권력중심부에서 는 금전적 가치보다는 대단한 부적, 신앙적인 의미가 더 큰 것이 아닌가 한다.

고대에는 주로 왕과 같은 권력자의 위상과시와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들이 보호의 의미로 착용하였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을 더한다.

이러한 의미는 본 블로그가 앞에서 말한 터키석(Turquoise)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터키석(Turquoise)이나 다이아몬드 생산과 수요적인 것에서 보면 유럽보다는 아메리카에 집중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어진다.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왕에게만 알리는 가장 값비싼 옥’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처음에 연마용제였던 것 같고 인도(天竺, 身毒)에서 수입되고부터는 장식, 호부의 뜻이 가해져 애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도(天竺, 身毒)는 신앙적인 중심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는 신앙과 결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유럽에서 신기하게 다이아몬드 소유로 희생되었다고 하는 모든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그러나 유럽에 수입되었다고 하는 인도(天竺, 身毒)가 지금의 인도인가는 분명치 않고 오히려 생산적인 면을 따져보면 남아메리카일 가능성이 더 많다.

다이아몬드 산지가 남아메리카에 널려있으니 하는 말이다.

또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다이아몬드가 존중되어서 원시불교 불사리에 이용되거나 불상의 눈과 백호에 상감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중대한 종교적인 상징성이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다이아몬드는 주요하게 인증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주요하게 취급된 곳이 원류이어야 하고 중동의 다이아몬드 애호도 15세기를 앞서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당시 선진문명에서 금전적, 자본적인 가치 보단 종교적 신앙적인 것에 중심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원시불교이다. 

다이아몬드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인도의 드라비다족(族)으로 적어도 약 3,000년 전부터 발견되어져 왔다고 보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 인도(天竺, 身毒)는 세계 유일의 주 원산지였다 한다.

인도 골콘다(Golconda)지역 강바닥에서 다이아몬드를 처음 발견했다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보석으로서의 가치는 루비나 에메랄드보다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메리카 브라질에서 1725년에 다이아몬드 광상이 발견되기까지는 인도(印度, India)(?)가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출국이었다는데 이 인도(印度)가 천축(天竺), 신독(身毒)이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앞에서 주지한 사실이다.

브라질이란 명칭은 근세기에 명칭이라고 보았을 때 고대 브라질 영역이 아마도 원시불교의 근원인 천축(天竺), 신독(身毒), 인도(印度)란 명칭 내에 들어가 포괄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틀림없이 당시 로마 유럽에 수입되는 다이아몬드는 극소량이었다고 보았을 때 다이아몬드는 왕후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규제했다는 사실에서 그 종교적, 신앙적인 신빙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다시 다이아몬드 역사로 돌아가서 보면

다이아몬드(diamond)의 어원은 unconquerable(정복하기 힘들다, 정복할 수 없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다마스(adamas)에서 나왔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금강석(金剛石)이라고 하는데 이 말도 금강불괴(金剛不壞), 즉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는 돌이라는 뜻의 의미이다.

바로 찬석이다.

다이아몬드란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다이아몬드가 생산되는 곳은 거대한 제국으로서 신앙적, 종교적인 것이 워낙 강해 정복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볼 수 있는 어원이다.

그곳엔 분명 엄청난 신앙적인 힘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이아몬드를 지구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지하 75-120mile (120~193 km)사이의 지구표면아래 상대적으로 얇은 대역인 암류권(岩流圈)의 잘 녹은 암석에서 형성하는데 땅속 깊숙하게 묻혀있던 다이아몬드는 지각의 변동과 화산폭발에 의해 지표면으로 밀어 올려지고 이 과정에서 지표면 가까이에 돌출된 다이아몬드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 계곡에 흘러 광상(鑛床, ore deposit)을 형성한다 했다.

이것을 다이아몬드라 하고 금강석(金剛石)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18세기 초라 했지만 그 보다 훨씬 앞설 수 있는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상이 발견되기까지는 인도(?)가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출국이었다는데 사실을 더 확인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근세기에 인도를 지금의 인도 위치에 두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을 조작할 수 있는 환경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브라질에서 나는 다이아몬드와 인도에서 나는 다이아몬드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후부터 각 나라 왕족들이 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가치로서 귀한 만큼 고가에 가격이 형성이 되고 수요가 많게 되자 각 나라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산출지를 찾아 나섰다고 볼 수 있다.

귀하지 않으면 무엇때문에 서양인들이 애써 광상을 찾아나서겠는가?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상이 발견된 것은 1725년이라고 하고 그 이후 1866년에 가서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규모의 다이아몬드 광상(鑛床)이 발견되고 근대적 채굴법이 채택되고 나서부터 다이아몬드는 대중화되었다고 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엔 자연적으로 돌출된 것만 수집 또는 채집했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브라질의 산출량은 연간 1백만 캐럿 이하이다.

주요산지로는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 바이아(Bahia), 마투그로수(Mato Grosso)인데 브라질의 3대 산지이다.

 

 

 

예로부터 인도(印度)에는 골콘다(Golkonda)광산에서 산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계 다이아몬드의 0.04%만을 공급하고 있다한다.

다이아몬드는 인도에서 적어도 약 3,000년 전부터 발견되어져 왔다고 보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 인도는 세계 유일의 주 원산지였기 때문에 고갈되었다는 가정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도 근세기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인도산 다이아몬드의 대부분 산출량의 88%가 보석용 품질이라 하였다.

브라질의 광산 역시 모두가 보석으로 간주되는 충적 광산이며 하상이나 강위의 지대, 그리고 그 위의 언덕 꼭대기나 고지대에 널리 산재되어 있다고 한다. 산출되는 다이아몬드의 55%가 보석용이며,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의 약 1%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인도와 브라질을 합해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의 약 1%를 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브라질의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어로 Brasil 이며, 공식적인 영어 표기는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이다. 포르투갈어로 "Brasil"라고 표기하지만, 영어로는"Brazil"라고 표기를 한다. 그러나 수도 브라질리아는 영어로 z를 사용하지 않고, Brasília로 표기된다. 국호 브라질은 파우 브라질 나무(Pau-Brasil)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 땅은 1500년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Pedro Álvares Cabral, 1468-1520)이 내항했을 당시는 남미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 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베라크루즈(Veracruz, 진정한 십자가) 섬"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곧 마누엘 1세 시대에 "산타 크루즈(Santa cruz, 성 십자가)의 땅"으로 개명되었다.

 

Caesalpinia echinata(巴西紅木, 巴西蘇木, Brazilwood, Pau-Brasil, Pau de Pernambuco and Ibirapitanga)

 

 

 

 

When Portuguese explorers found these trees on the coast of South America, they used the name pau-brasil to describe them. Pau is Portuguese for "stick" (or, by metonymy, "wood" in general), and brasil is said to have come from brasa, Portuguese for "ember", meaning "emberlike".

 

포르투갈어로는 이 나무를 파우 브라질(pau brazil, 巴西紅木, 巴西蘇木)이라 하는데,'파우'는 막대기라는 뜻이고 '브라질'은 잉걸불(장작불이 다 타고 연기가 나지 않는 숯불)을 가리키는 '브라사'(brasa)에서 나왔다고 한다. 페르남부쿠 지방에서 많이 난다고 해서 파우 페르남부쿠라고도 부른다.

브라질나무에서 얻는 붉은색(Natural Red 24) 염료인 브라질린(brazilin)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기를 얻던 최고급 물질이었다. 이 염료는 고급 직물의 염색에도 쓰이고 화가의 물감이나 붉은 잉크에도 들어갔다.[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豆目 Fabales

科: 豆科 Fabaceae

亞科: 蘇木亞科 Cæsalpinioideae

屬: 蘇木屬 Cæsalpinia

種: 巴西蘇木 C. echinata

二名法

Cæsalpinia echinata Lam.

장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슈발리에 드 라마르크 (Jean-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1744-1829) 는 프랑스의 생물학자이다. 체계적인 학설로써 최초로 진화론을 제시한 사람이다.

 

 

그러나 너무 기독교적인 이름에 반발하여, 포르투갈인들이 이 지역에서 유럽에서 염료로 사용되던 brazilwood 닮은 나무를 발견하여, 염료로 사용하면서 이 나무를 포르투갈어로 "빨간 나무"를 의미하는 "브라질"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브라질 나무가 포르투갈에 수출이 활발하게 된 16세기에 이 지역을 브라질로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브라질이란 명칭은 역사성이 상당히 결여된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다이아몬드 산출된 지역이 과연 브라질인가 아니면 지금의 인도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어쩌면 적색염료의 원료로 쓰이는 브라질나무인 ‘홍목’, 빨간 나무가 나는 곳이 인도이고 천축이며 신독일 가능성이 높다 할 것이다.

다시 지적하면 다이아몬드로 고대부터 유명한 인도가 진정 천축이고 신독이라면 원시불교가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해야 되는데 원시불교가 있어야 할 지금의 인도는 불교신자가 고작 0.77% 이다.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로 약 12억 1천만 193,422명(2011)의 불교 신자가 0.77% 이니 930만명 정도이다.
힌두교 80.46%
무슬림 13.43%
기독교 2.34%

오히려 기독교신자보다 현저히 작은 신자 구도이다.

이것은 바꾸어 이야기하면 원시불교가 존재한 곳이 절대 아니라는 확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재는 다이아몬드 인도의 산출량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여기에 포함한다.

서양인들이 직접 발견한 남아프리카의 킴벌리(Kimberley)지방이 세계 최대의 광산으로 유명하다.

킴벌리(Kimberley)는 1867년에 발견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통해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다이아몬드 채굴의 중심지이다. 1871년 부근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오렌지 자유국의 영토였다. 1871년 이곳을 침입한 영국의 압력으로 케이프 식민지에 편입되었다.

 

아래 보면 조선사서 청령국지가 있는데 이 글을 보면 차라리 일본이라는 주체는 동양인 보다는 서양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왜구니 일본이니 하는 것은 지금 열도의 일본이 아니라는 말이다.

백제가 전통적으로 해상강국이라 했다.

그 역사가 계속되었다고 보았을 때 현재 그 해상강국을 그대로 이었다는 나라는 바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이라 해야 맞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연속성이다.

지금의 일본이 백제를 이어 받았다고 하면 역사의 연속성을 깨뜨리는 일이다.

지금 지진으로 분석한 곳을 보면 고구려는 그리스, 백제는 남아프리카와 지중해, 신라는 지중해와 중동 등을 나나내고 있으며 고려는 지중해는 물론이고 중동 북아프리카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조선 역시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가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을 이었다고 하여도 별 이상하게 없다.

마치 지금의 일본이 해상강국을 이어 받은 것처럼 인식하게 하고 있는 동양사가 잘못된 것이고 일본서기가 백제의 역사를 이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도 사실과 다른 엉터리라 할 수 있으며 분명 일본과 왜구는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 후기 때의 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쓴 저술총서 청장관전서 제65권에 나오는 정령국(蜻蛉國)은 바로 서양의 실체라는 생각이 강하다.

마치 지금의 열도 일본을 방문한 것처럼 기술하고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지만 실제 일본과 왜구는 정령국(蜻蛉國)이라 한다면 이는 서양제국들을 포괄한 명칭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이국(異國)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 지도를 보면 동남해(東南海)가 분명 지금의 남아메리카 해역을 말한다.

이것을 보면 정령국도 일본도 왜구도 전부 남아메리카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도(India, 印度)에 대해 언급 할 것은 영어로는 India. 印度는 음차식 표현인데 공교롭게도 지금의 인도는 독립기념일이 8월15일이라 한국의 광복절과 의미도 같고 날짜도 같다.

단지 연도(한국은 1945년, 인도는 1947년)만 다를 뿐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모르겠다고?

그럼 무엇을 아는가?

일제가 만들어 준 반도사만 알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조선은 찬석(鑽石)이라고 하는 다이아몬드(鑽石, Diamond,學名金剛石)가 나던 곳이 분명하고 바로 인도이며 천축이고 신독이어야 한다.

그곳은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아메리카에 있어야 맞고 정령국도 일본도 그곳에 있어야 맞다.

그곳에 그들 곁에 있어야 할 동남해가 있기 때문이다.

부상도 그곳에서 찾아야 맞다.

이러한 사실이 근세기에 모두 엎어진 것이다.

 

 

정령(蜻蛉, 蜻蛉)

물잠자리. [잠자리목 잠자리과].

蜻잠자리-청

蛉 잠자리-령

 

(1)鑽石紀功 찬석으로 공적을 기록하다

李廷馨(이정형)(1549-1607)의 시문집 년보(年譜)에

鑽石紀功。久而不忘云。

찬석으로 공을 새겨 영구히 잊지 않을 것이다.

위의 글에서는 기념비를 찬석으로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鑽石埋辭 빗돌을 새겨 묻으니

조선중기의 문신·학자인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시문집 고봉집 제3권 비명(碑銘)에 보면 이 또한 찬석으로 묘비를 깎아 새겨 장공(張公)이란 사람의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금강석은 금강찬(金剛鑽)이라고도 하는데, 물 밑에서 생겨서 석종유(石鍾乳) 같기도 하고, 또는 자석영(紫石英) 같기도 하다. 이는 자서(字書)에 나타나 있다. 하였으니

조선 후기의 학자 성호 이익익(李瀷·1681-1763)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 맥치(貘齒)에

석종유(石鍾乳)는 Stalactite(종유석)돌 고드름이라 하고 동굴의 천장이나 벽에 매달려 있는 동굴 침전물이다.

자석영(紫石英)은 텍토규산염(tectosilicate) 광물인 석영의 변종으로서 연한 자줏빛이 나고, 투명하며 색이 짙고 아름다운 것은 보석이 되는데 자수정이라고도 한다. 주산지는 우랄산지·한국·브라질·우루과이·미국·인도·스리랑카 등인데, 대체로 한국·브라질에 아름다운 것이 많다.[네이버백과사전]

(4)금강석(金剛石)하내(河內 가와지)에서 나는데 옥돌을 간다.

조선 후기 때의 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 청령국지2(蜻蛉國志二)

물산(物産)편에 보면

金剛石。出河州。鑽諸玉石。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는 하주(河州)라 하였으니 강을 끼고 있는 곳에서 난다 하였고 옥석을 연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남아메리카 아마존강 일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싶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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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석(鑽石)

다이아몬드(鑽石, Diamond,學名金剛石)

係碳其中一隻同素異形體,亦都係地球上硬度最高、光澤絕倫嘅天然礦石物料。佢硬、透明兼且光色散度高,高質素嘅會用嚟整珠寶,質素低啲嘅可以響工業上用嚟做切割。

鑽石係四月嘅「誕生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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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退堂集卷之十四

年譜

萬曆庚子先生五十二歲春二月。除江原道觀察使。時兵戈甫定。飢荒連仍。又値國恤。需索多門。而先生簡易爲治。至誠論開。民雖貧瘠。各自盡心。上供之役。不以爲怨。及其後先生之遆敀也。鑽石紀功。久而不忘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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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집 제3권

[비명(碑銘)]

고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판윤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지훈련원사(漢城府判尹兼五衛都摠府都摠管知訓鍊院事) 하원군(河源君) 증시공무(贈諡恭武) 장공(張公) 묘지명

(전문생략)

공이 별세하자 고양(高陽)의 관산리(館山里)에 장례하니 선영의 뒤를 따랐으며, 두 부인도 함께 봉분하였다. 태상(太常)에서는 공의 시호를 공무(恭武)라 하였다. 공의 평생 덕업은 마땅히 국사에 기재될 것이니, 지금은 우선 그 대강을 뽑아 묘지(墓誌)로 만들어 땅에 묻으며 또 명문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건강하고 용감한 무신이 / 矯矯虎臣

태평한 세상을 만났네 / 逢世之夷

뛰어난 도략을 가지고 있었으나 / 龍鞱豹略

시행하지 못하였네 / 有鬱莫施

그 나머지를 미루어 / 推其緖餘

군직을 시험하였는데 / 歷試軍司

은혜가 진실하고 위엄이 베풀어져 / 惠孚威宣

무공이 실추되지 않았네 / 功以不隳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함은 / 克忠克孝

공의 타고난 자질에 근본하였네 / 本之天資

인자하고 겸손하니 / 惻怛謙恭

평소의 행적을 보매 결함이 하나도 없어라 / 視履靡虧

온화하게 관청에 있었고 / 誾誾在公

엄숙하게 사사로운 일을 처리하였네 / 斬斬涖私

사십여 년 동안 / 四十餘年

국가를 도왔는데 / 邦國是毗

병으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 / 引病而家

복록을 끝까지 보존하였네 / 允保福綏

별세하여서는 남은 재물이 없었으니 / 歿無餘財

그 덕이 더욱 드높네 / 厥德益彌

관산의 언덕에 / 館山之原

빗돌을 새겨 묻으니 / 鑽石埋辭

신명에 질정하여 / 用質神明

후세에 알리노라 / 以告來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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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星湖僿說) 제5권

조선 후기의 학자 성호 이익익(李瀷·1681-1763)의 대표적 저술

만물문(萬物門)

맥치(貘齒)

부혁(傅奕)이 영양각(羚羊角)으로 금강석(金剛石)을 부수었는데, 세상에서는 그가 달리(達理)한 때문이라고 전한다.

금강석은 금강찬(金剛鑽)이라고도 하는데, 물 밑에서 생겨서 석종유(石鍾乳) 같기도 하고, 또는 자석영(紫石英) 같기도 하다. 이는 자서(字書)에 나타나 있다.

소송(蘇頌)이 이르기를, “당(唐) 나라 시대에는 맥(貘)을 그림으로 그려서 병풍을 만들었다. 맥이란 짐승은 이가 가장 단단해서 쇠망치로 치면 쇠망치가 모두 부서지고 불에 넣어도 타지 않기 때문에 이 맥치(貘齒)를 얻어 가지고 불골(佛骨)이라고 속인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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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65권

조선 후기 때의 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쓴 저술총서. ‘청장관’은 그의 호이다. 아들 광규(光葵)가 편집하고, 이완수가 교정한 것으로 모두 33책 71권이다.

청나라를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

 

물산(物産)

靑莊館全書卷之六十五[蜻蛉國志]

物産

聖武時。陸奧小田郡。貢黃金。因改年。爲天平。感寶。今金山。處處有之。奧州及佐渡。爲盛。蝦夷島出沙金。所謂麩金也。銀。攝州多田。爲最。銅。攝州多田。羽。州秋田。爲最。丹。泉州堺長吉。爲最。鐵。雲州播州。爲最。珊瑚。淺紅色鮮明者。産于阿媽港者。上也。深赤者。號血玉。下品也。水晶。加賀之産。爲最。石油。出於越後村上近處山麓黑川村。與泉水相雜。土人以草。挹入缶中。取之燃燈。江州栗本郡。産燃土。掘山野取之。土塊黑色。以代薪。金剛石。出河州。鑽諸玉石。砥石。淡白色。參州名倉之産。爲最。硫黃。信州之産。爲最。

광물(礦物)

성무(聖武) 때에 육오(陸奧 무쓰)의 소전군(小田郡 오다고오리)에서 황금을 공상(貢上)함에 따라 연호를 천평감보(天平感寶)라 고쳤으며, 지금은 금이 나는 산이 곳곳에 있는데 육오 및 좌도(佐渡 사도)에서 많이 나며, 하이도(蝦夷島 에소시마)에서 사금(沙金)이 나는데 이른바 부금(麩金 사금)이다. 은(銀)은 섭진(攝津 셋쓰)의 다전(多田 다다)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동(銅)은 섭진의 다전과 출우(出羽 데와)의 추전(秋田 아끼다)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단(丹 주사(朱砂))은 화천(和泉 이즈미)의 계(堺 사까이)ㆍ장길(長吉 나가요시)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철(鐵)은 출운(出雲 이즈모)과 파마(播磨 하리마)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산호(珊瑚)는 아마항(阿媽港 아마가시끼[尼崎])에서 나는 옅은 홍색이 선명한 것이 상품이며, 짙은 적색의 것은 혈옥(血玉 지다마[血珠])이라 부르는데 하품이다. 수정(水晶)은 가하(加賀 가가)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석유(石油)가 월후(越後 에찌고)의 촌상(村上 무라가미) 근처 산기슭에서 샘물에 섞여 나는데, 그 고장 사람들이 풀[草]로 떠서 항아리에 담아 두고 등유(燈油)로 쓴다. 근강(近江 오우마)의 율본군(栗本郡 구리모도 고오리)에서 연토(燃土 석탄)가 나므로 산과 들을 파서 채취하는데, 흙덩이가 흑색이며 땔나무를 대신한다. 금강석(金剛石)하내(河內, 가와지)에서 나는데 옥돌을 간다. 지석(砥石 숫돌)은 삼하(三河 마가와)의 명창(名倉 나구라)에서 나는 담백색(淡白色)의 것이 가장 좋고, 유황(硫黃)은 신농(信濃 시나노)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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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다이아몬드(鑽石, 金剛石)와 얽힌 마(魔)의 역사가 대륙조선의 붕괴인가?

 

상시(Sancy), 리전트(Regent diamond), 블루 호프(Hope Diamond), 피렌체 다이아몬드(Florentine Diamond)
위 4대 다이아몬드에 마치 마(魔)가 끼였다는 식으로 얽힌 전설에서 루이16세마리 앙투와네트프랑스혁명 전쟁(French Revolutionary Wars, 1792-1802)으로 인하여 결국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실을 부각한 것인데 위 4대 다이아몬드 모두가 어느날 갑자기 붕괴되고마는 거대한
제국 즉 결코 지금의 프랑스라고 할 수 없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제국의 종말 사연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퍽 인상적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대륙조선의 유럽지구 권위가 무너지고 일시에 붕괴되는 현상을 보는 듯 한 것이다.
이 때 프랑스혁명군을 상대로 일어난 세력들이 온 유럽의 나라들이란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영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왕당파, 스페인, 포르투갈 왕국, 사르데냐 왕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이탈리아 소국, 오스만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인데 이 중에 고려연합 후신이라고 여겨지는 오스만제국도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다이아몬드가 대조선의 권위와 위상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래서 이와같이 무너진 것이라면 이 4개의 다이아몬드가 오늘날까지 남아 은밀하게 상징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루이16세(Louis XVI, 1754-1793)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왕이다. 선량했던 그는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나약하여 의지와 추진력이 부족하였고 당시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였다.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퇴위당한 후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로 인해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라는 별명이 붙었다.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1793)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태어났으며, 결혼 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독일어: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이며, 결혼한 후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프랑스어: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D'Autriche-Lorraine)이다. 그녀가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그녀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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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다이아몬드

 

상시(Sancy)

 

 

복숭아씨 모양을 하고 있는 55캐럿의 맑은 은백색 다이아몬드다

1570년경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인 상시가 프랑스로 가져왔다.

니콜라스 할레이 세이그놀 드 상시라는 사람이 1570년대에 터키 프랑스 대사로 근무할 당시 콘스탄틴노플에게 다이아몬드를 구입했고 이것이 상시 다이아몬드(Sancy Diamond)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후 엘리자베스여왕 1세에게 판매되어 영국 왕실의 소유가 된다.

왕 제임스1세를 거쳐 그의 아들 찰스1세로 이어지고 찰스1세는 크롬웰과 청교도와의 싸움에서 진후 1649년 참수 당한다.

찰스 2세의 서거이후 즉위한 제임스 2세는 카톨릭을 부활하고 전제정치를 강화하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입헌 군주제가 수립된다.

1688년 제임스 2세는 영국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는데 이때 상시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간다.

1689년 프랑스 루이 14세의 원조로 아일랜드에 상륙한 제임스 2세는 재기를 꿈꾸며 군사력을 동원했지만 다음해 보인강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프랑스로 돌아가 상제르망에서 병사한다.

영국왕실에서 프랑스왕실로 옮겨지게 된 상시다이아몬드는 루이15세가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왕관에 장식되었으며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프랑스 왕실에서 보유하였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는 처형을 당하게 된다.

1792년 프랑스왕실에 도둑이 들어 블루호프 다이아몬드와 함께 사라진 후 1828년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후 러시아 왕자 데비도프에게 판매되어 1900년까지 러시아 왕실 소유로 보관되었고 그때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러시아 페테르부르그 동궁광장에서 일어난 노동자 학살사건이 발단이 되어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고 이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을 비롯하여 귀족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살아남은 귀족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동자로 살게 된다.

1867년 상시 다이아몬드는 파리전시장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고 1906년 월리엄 윌도프 아스톨이 낸시 랭그혼과 그의 아들의 결혼선물로 구입하여 소유하게 된다.

그가 죽은 후 영국 부인 낸시 애스터의 소유가 되었고 그녀는 1962년 루브르 박물관에 빌려주었고 이후 10세기 동안 프랑스에 있게 된다.

1964년 그녀의 죽음 후 영국 정부는 국가의 보물로 선포했으나 프랑스정부에 팔렸다는 소문이 있다.

 

리전트(Regent diamond)

 

 

유럽에서 제일로 큰 다이아몬드로 140.5캐럿 이다.

영국 피트가 인도에서 구입하였고 프랑스에서 '리전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다이아몬드는 루이 15세의 왕관에 박혀 그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의 칼자루에 장식되었고,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습니다.

1701년 인도의 크리스나 강변 파티알 광산에서 일하던 노예에 의하여 410캐럿의 원석이 발견 되었다.

노예는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도망을 치게 되고 영국의 한 선장에게 자신이 자유롭게 살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면 다이아몬드 가격의 절반을 주기로 약속하고 배에 타게 된다.

배는 봄베이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선장은 노예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다이아몬드를 차지하여 참전드 라는 상인에게 5천 달러를 받고 판 후 그때부터 선장은 노예의 환영에 시달려

방탄한 생활을 하다가 돈을 전부 탕진하고 자살한다.

다이아를 구입했던 보석상 참천드는 당시 마드라스의 총독 토마스 피트에게 10만 달러에 팔아 넘겼다.

1702년 토마스 피트는 그의 아들 로버트에게 이 다이아몬드를 유럽으로 가지고 가서 커트하도록 지시했고 돌은 영국의 보석상 해리스라는 사람에게 맡겨져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140.50 캐럿에 브릴리언트 컷으로 연마하게 되고 길이가 27mm, 높이가 19mm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브릴리언트 형태의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이후 이 보석은 총독의 이름을 따 피트 다이아몬드로 명명 되었다.

커팅 비용도 약 25,000달러가 들었으며 그 원석을 커팅하면서 생긴 작은 다이아몬드 원석 조각들 역시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로 세공되었으며 커팅비용은 35,000달러 이상이 들었다고한다.

이 작은 돌 가운데 로즈커트의 몇 개는 러시아의 피터 대왕에 판매가 되었다.

1717년 루이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하던 오를레앙 공작 필립2세가 루이15세에게 선물하기 위해 당시로서 최고가인 50만 달러에 피트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면서 프랑스왕실 소유가 되면서 리전트 다이아몬드로 불리우게 된다.

1722년 루이15세의 대관식 왕관 밴드 바로 위 정면에 박히게 되고 루이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여왕은 이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머리 장식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770년 루이16세 역시 대관식에 리전트 다이아몬드를 왕관 장식용으로 사용하였고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도 리전트 다이아몬드로 만든 검정 벨벳 모자를 사용했다.

프랑스 혁명을 맞이하게 된 리전트 다이아몬드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와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1792년 파리에 있는 왕가의 보물 창고 보석 대부분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리전트 다이아몬드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다행히 어느 집 처마에서 잃어버린 보물의 일부가 발견되었고 리전트 다이아몬드도 발견되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총재 정부는 전쟁을 위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베를린의 은행가 트레스코프에게 담보로 4백만 프랑을 차입하게 된다.

1년 후, 빚을 청산 한 후 다시 찾아오지만 또 다시 네덜란드의 은행가 반데르베르겜에게 담보로 차입하게된다.

1800년 나폴레옹은 모든 담보금을 지불하게 되고 권력과 함께 리전트 다이아몬드를 갖게 된다

나폴레옹은 이 리전트 다이아몬드를 칼자루 끝에 장식용으로 달고 다녔다고한다.

나폴레옹 1세는 러시아 원정실패로 엘바섬에 유배되었고 다시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영국에 항복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리전트 다이아몬드를 구입한 프랑스왕실은 영국과의 7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영국에 내어주고 바닥난 재정으로 허덕였으며 이는 프랑스혁명까지 이어져 왕실의 몰락을 가져왔다.

나폴레옹 역시 영국을 중심으로 한 대프랑스동맹과의 60차례가 넘는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였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중인 리전트 다이아몬드 1940년 독일의 나치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였을 때 많은 프랑스 예술품과 보석들이 도난을 당했지만 리전트 다이아몬드는 어느 집 벽돌에 숨겨진 채로 프랑스에 남을 수 있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국보로 지정되어 루브르 박물관 아폴로 관에 전시 되어있다.

 

블루 호프(Hope Diamond)는 지금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블루호프는 옛날 인도에서 황무지를 경작하던 농부의 호미에 부딪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이아몬드는 피렌체 다이아몬드와 함께 주인을 해치는 저주의 다이아몬드로 알려져 있다.

채광 후에 인도를 침입한 페르시아 군대가 빼앗아갔다.

다이아몬드를 빼앗은 인도 총독이 페르시아 왕에게 이것을 바쳤으나 총독은 도둑들에게 살해당하고 왕도 반란으로 인해 암살되었다.

500년 후에 한 힌두교 승려가 보석을 훔쳐냈으나 발각되어 체포된 뒤 고문을 당해 죽었다.

17세기 인도에서 프랑스 보석상 장 밥티스트 타베르니에가 구입하여 태양왕 루이14세에게 팔았고 그 보답으로 루이14세는 그에게 남작 작위를 내렸으나 타베르니에는 여행 중 이리들에게 잡아먹혔다.

루이14세 역시 천연두로 사망했다.

루이14세 때 국무장관 니콜라 푸케가 무도회에 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나갔다가 횡령죄로 체포되어 죽었다.

세 명의 프랑스왕족이 이 다이아몬드 때문에 죽었다.

이 다이아몬드를 늘 지니고 다니던 랑바르 공주는 도둑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뒤를 이은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보석상 자크 셀로가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미쳐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러시아의 이반 카니토프스키 공은 파리의 애첩에게 주었다가 애첩은 자살했고 나중에 자신도 자살했다.

어떤 네덜란드의 보석 세공업자가 현재와 같이 44.5 캐럿으로 깎았으나 아들이 이 보석을 훔쳐가자 자살했다.

1830년 경매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아일랜드의 부유한 은행가 헨리 토마스 호프가 9만 달러에 사 '호프 다이아몬드' 라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토마스 호프는 경마를 하다 떨어져 죽었고 부인과 정부도 1900년 파산했다.

1908년 오스만제국의 황제 압둘 하미드 2세가 40만 달러에 사들여 아내 수비야에게 주었으나 나중에 아내를 찔러 죽였고 1년 후에 자신도 황제자리에서 폐위되었다.

1911년 미국에서 대 사업가 네드 맥린이 15만 4000달러를 주고 사들였으나 40년 동안 아들 빈센트 맥린이 자동차에 치여 죽었고 맥린은 파산하여 정신병원에서 사망했으며 딸은 1946년 약물과용으로 죽었고 아내는 마약중독자가 되었다.

이후 해리 윈스턴만이 저주를 피했는데 그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돈을 주고 기증했다.

 

피렌체 다이아몬드(Florentine Diamond)

 

 

2000년 전에 인도에서 최초로 발견

16세기 인도 바자야 나가르에서 포르투갈 군대에 빼앗겼다.

19세기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대공에게 넘어갔으며

15년 후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오스트리아 황제의 왕관에 장식되었다.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소유되어 이때부터 피렌체 다이아몬드라 불리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의 혼수품으로 프랑스에 넘어갔으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2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17년 뒤인 1809년 나폴레옹의 부인 마리 루이즈의 소유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가 죽음을 당했다.

토스카나 대공의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이 생겼고

오스트리아 황후 시씨의 목걸이에 장식되었으나 189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살해되었다.

1922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하게 되고, 다이아몬드도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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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Diamond, 金鋼石)역사

 

모든 보석 중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 다이아몬드이다.

다이아몬드는 보석으로 뿐만 아니라 물체로서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돌이다.

순수한 탄소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단단할 수 있는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노랑색, 핑크색, 푸른색, 초록색 등이 있고 매우 드물지만 약간 붉은 색도 있고 검은색(Black)도 있다.

중세에는 돌의 외부 면(face)들만 연마 가공했다.

그들은 면들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 방법은 인도사람들에게는 아주 일반적이었다.

 

1919년, Tolkowsky는 다이어몬드의 이상적인 비율(proportion)을 발표했다.

이 연마가공은 58 개의 패시트 들을 만들었다. 테이블(table), 테이블과 환상부(girdle)사이에 32패시트(facet)들, 환상부와 큘릿(culet)사이에 24패시트들.

이 연마가공은 현대의 연마가공의 기초로 간주된다.

1925년, Johnson과 Roesch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다른 연마가공의 비율을 발표했다.

이 연마가공은 아이디얼 브릴리언트(ideal brilliant, 이상적인 다각원형)이라고 한다.

1939년, Eppler는 Tolkowsky의 것과 근접한 파인 프랙티스(fine practice, 미세한 실습)이라는 연마가공을 발명했다.

1951년, Parker는 아주 큰 테이블을 지녀야 하는 특성을 지닌 새로운 연마가공을 발명했다.

1963년, 74패시트(facet)들을 지닌 프린시스(princess, 정방형) 연마가공을 발명했다.

1965년, 146패시트(facet)들을 지닌 하이 라이즈(high lights) 연마가공을 발명했다.

1966년, Tillander는 Scandinavia의 표준(Scandinavian standard)의 기준을 발표했다.

이 학명은 현대의 연마가공에 대한 기초로서 사용된다.

1970년, 144 패시트(facet)들을 지닌 로열144(royal 144) 연마가공을 발명했다.

1978년 IDC(international Diamond Council)은 다이어몬드에서 반사가 가장 잘되는 표준들을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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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안트 커트(Brilliant Cut)

 

 

탄생과 유래

다이아몬드에 대한 역사와 유래는 너무나 많다.

 

대략 기원 전 800년에 인도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2500년 동안 이 나라에서만 채굴 되었다.

14 세기에 와서 유럽에서 연마술이 발달되면서 현재의 연마 개념이 적립된 것이다.

1725 년 브라질에서 발견된 후 1888년 남아프리카에서 대 규모로 발견된다.

당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캐러 이 나라로 꾸역꾸역 모여 들었는데,

Sidney Sheldon의 Master of the Game에 이 때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일독할 것을 권한다.

De Beers는 이 무렵에 벌써 창설되어 있었는데, 지금 까지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다이아몬드는 처음에는 왕족이나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으나, 차츰 대중화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신혼 색시에게 주는 혼수품으로 빠질 수 없는 품목이 되었다.

 

산지

호주의 Argyle 광산이 가 세계 최대 산지가 되었다.

이 광산에서는 공업용도 많이 생산되지만, 희귀한 핑크색, 붉은색 팬시 다이아몬드도 채굴된다.

남아프리카의 채굴량은 줄었지만 아프리카는 여전히 질 좋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다이아몬드 대륙이다. 세계 20대 다이아몬드 중 10개가 아프리카에서 발굴되었다.

지금은 러시아 에서도 발견되고, 캐나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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