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식물

청일전쟁시기 대동강(大同江)은 어딘가?

한부울 2014. 12. 1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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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시기 대동강(大同江)은 어딘가?

 

글쓴이:한부울

 

북애자(北崖子)의 예언
화인(和人:日本人)이 그린 삽화에서 평양성강변에 그려진 야자나무
야자나무와 환국(桓國)
대동강(大同江)의 수계(水系)는 남해를 가르킨다.
마무리정리

 

북애자(北崖子)의 예언

 

한어(漢語)사전에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처럼 전쟁이라 하지 않고 그냥 갑오지역(甲午之役)이라 하여 어려운 일이나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임진지역(壬辰之役)이라 한 것과 같다.

세계삼한의 예언자이며 철학자이고, 역사학자인 북애자(北崖子)는 1675년에 그가 편찬한 규원사화(揆園史話) 마지막 구절에 후일 조선의 불행(今朝鮮之不幸)을 탄식하며 말하길 "오호라 환인(桓因:帝釋天:Śakra:因陀羅:Indra)이여! 오호라 환인(桓因)이여! 지금의 한 조각 진역(震域)과 한 줄기 유민(遺民)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장차 어찌될 것인가! "라고 전체의 글을 마치고 있다.

당시 상황을 보면 1671년부터 기근이 시작되어 민란이 계속되었으며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났고 왜구라는 서세들이 조선을 대항하는 식의 충돌이 곳곳에서 발생하였으며 이를 수습하기에 급급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직접적으로는 1674년에 현종이 졸하여 숙종이 즉위하면서 갑자기 북한산성을 수리하고 축조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때부터 북애자는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글은 마치 현재 반도역사를 껴안고 있는 우리들을 한조각 진역으로 보거나 한 줄기 유민으로 보았다고 생각할 때 약 330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까지 그가 예견했다는 것으로서 참으로 원견탁식(遠見卓識)한 위인이라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미 그는 예언가답게 1675년 숙종(肅宗1661-1720,재위:1674-1720) 2년에 조선의 앞길을 정확하게 예리하게 감지한 것이다.

그의 글 중에 이러한 글이 있다.

夫勝朝以後累百年間事,誰肯赧顔而過問哉!降至壬辰之役而八域魚肉,丙子之禍而州里蕭然。况今世之人,溺於虛文, 閒於衰弱...棄其道而咀宋儒之餘唾,貶其君而比外邦之臣僕。

무릇 고려조(前朝)이후 수백년간의 일을 그 누가 기꺼이 나서서 얼굴을 붉히며 물어 오겠는가?

임진사건(役)의 어려움에 팔역(八域)이 마구 짓밟이게 되었고 병자의 재앙(재난, 사고)에는 고을촌락들이 한적할 수밖에 없었다는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사건은 나라가 약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 강한나라의 3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 하여 이렇게 당한 사실에서 감히 부끄러워서 언급조차 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풀이 할 수가 있다.

지금 반도역사는 이 두 사건에서 우리가 지지리도 못나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스스로 자학하게 만들고 그것에 의해 피해의식과 그로인한 강박관념을 필요이상 받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도 얼마나 잘못된 이야긴지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어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헛된 글(虛文)에 빠져 하릴없이 쇠약해지고 자신의 도는 버리고 송(宋) 유생의 보잘 것 없는 의견이나 말을 곱씹으며, 자신들의 임금을 깎아(貶) 말하여 외국 신하(外邦之臣)의 몸종(僕)에 비교된다고 탄식한 것에서 볼 때 당시 상황이 이처럼 그가 자조(自嘲)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허문(虛文)이라는 것도 자기글을 멀리하는 버릇이 여전한 것처럼 아마도 너도 나도 자본력에 굴복하여 요사이 영어바람이 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세의 글(프랑스어, 영어)에 빠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을 것이다.

强國之要有三;一曰「地廣而物博」,二曰「人衆而合」,三曰「恒守其性而不失其長」。
그러면서 그는 강한 나라의 요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였고 그 첫 번째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그 두 번째가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夫朝鮮之地,北連大荒,則凍天氷地,斷我後退之路;西接蒙古,而萬里流沙,斷我左展之臂;西南隣漢土,而無泰岳峻峙‧長江大河之限,則其勢易於進攻,難於防守;東南阻大海,而無前進一步之土。
그러나 조선은 다행스럽게도 이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된다 하였고 그 이유로 "조선의 땅은 북으로 대황(大荒:툰드라)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流沙)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漢土)과 인접하여 있으나 그것을 막을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長江大河)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렵다고 하여 걱정하는 것이고,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라 하였던 것으로서 늘 상 한(漢)과 왜(倭:西歲:日本國)가 호시탐탐하던 것을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조선의 영역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현재 우리가 알 턱이 없다.

본 블로그 글에서 이에 대한 것을 "조선강역(朝鮮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6"이란 제목으로 살펴본 결과 바로 그대로 엎어 놓은 듯 하다는 것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을 기반으로 하는 영역적 기록이라는 사실도 이미 충격적으로 밝혀었던 이야기다.
若我常强而無衰,則可抑漢士而郡其地,斥倭寇而鎖其海,可號令天下,囊括宇內也。若我勢一弱,則敵騎長驅,蹂躙闔國,虜掠吏民,焚燒閭里。此所謂得地利而不全者也。
그가 끝으로 정리하길 만약 우리가 항상 강하여 쇠퇴함이 없으면 곧 한(漢)선비(漢士)들을 눌러 그 땅에 군림하고 왜구(倭寇)배척하여 그 바다를 봉쇄할 것이니, 가히 천하를 호령하며 세상(宇内)을 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를 수 있을 것이라 하면서 만약 우리의 기세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곧 바로 적의 병사가 멀리로부터 말을 몰고 와서 온 나라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고을을 불사를 것이니, 이러함이 지리적인 이익은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예가 바로 임진지역(壬辰之役)과 병자지화(丙子之禍)란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임진지역이나 병자지화는 자만하여 발생한 것을 부끄러울 지언정 보잘 것 없이 본래부터 약해빠져 발생하였다고 보는 지금의 한반도인 처럼 자학할 일이 아니라는 것에서 자만하지말고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반성을 요구하는 글이다.

舍大猷而謀小欲,擲公戰而圖私益,蠹公室而循其家,漁細民以肥其腹,而以區區零瑣之事,懱懱然醉中談夢‧蝸角爭勝。
하지만 정작 조선인들은 큰 계책은 버리고 작은 욕심만을 꾀하며, 공동을 위한 싸움은 내팽개치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도모하며, 조정을 좀먹어 이로하여 가문을 다독거리며, 가난한 백성들을 약탈하여 자신들의 배를 살찌우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져다 희믈그레한 눈매로 취중에 꿈 얘기하듯 하면서 쓸데없는 승부나 다투고 있는 형태를 실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後世若有强鄰者,代淸而興則,必脅其主而誘其臣,郡其地而隸其民矣。
그의 탁월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오늘날 현실이 되었다는 것처럼 만약 후세에 강한 이웃이 있어 청(淸)를 이어서 한(漢)땅에서 일어난다면, 곧 반드시 우리의 임금(主)을 협박하고 신하(臣)를 꼬여 이 땅에 군림하며 이 백성들을 노예(奴隸) 부릴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희한하게 이것이 현실이 되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한(漢)멕시코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의 뉴스페인(New Spain)지역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지만 바로 서세(西勢)이다.

이 서세(西勢)를 걱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에 말대로 오늘날까지 한치에 오차도 없이 난국이 진행된 것이다.

이처럼 그의 예언은 자로 잰 듯 이렇게 일치한다는 것은 그의 원견탁식(遠見卓識)이라 으로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다.

한토(漢土)에 청(淸)세력 보다 더 힘센 세력은 서세(西勢)였고 이 서세가 삼한역사를 붕괴시킨 것이다.

물론 북애자(北崖子)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지금 한반도인들 역시 왜구의 노예신세를 면할 수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마 당시에 북애자(北崖子)는 비록 조선이 북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지만 지리적으로 완전하지 않았다고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세계삼한역사의 실체이다.

그러나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한반도인들은 거의 일백년 가까이 노예사인 반도역사에 찌들어버려 과거 적어도 1922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한 세계삼한역사를 가졌던 민족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우리는 역사가 없는 민족이나 다름이 없다.

처럼 훌륭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까 두려워했던 세력이 바로 일제였고 그 하수인 친일학자들이 이를 끝까지 감추고 정당화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동양인이 아닐 성 싶은 계연수(桂延壽)의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출연과 함께 반도역사에 대한 모순적인 상황에서 의심을 가지기 시작한 여러 재야학자들의 피나는 노력 끝에 참으로 놀라운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인데 바로 세계삼한역사란 실체이다.

부족한 여건에서도 근원을 바탕으로 한 생물학적 판단을 근거로 하나하나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으며 지금도 시시각각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서 너도 나도 세계삼한역사가 무엇인지 점차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수가 있겠다.

 

화인(和人:日本人)이 그린 삽화에서 평양성강변에 그려진 야자나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위 삽화그림은 명치시대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가 춘재년창(春斎年昌:1887-1894)이 1894년 9월 갑오지역(甲午之役)이라고도 하는 청일전쟁(淸日戰爭:First Sino-Japanese War:1894.7.25-1895)에서 일본군이 대동강 도하준비(我陸軍大同江ヲ渡リ清軍之本営ヲ攻撃ス:The Japanese army prepares to cross the Taedong River)란 제목의 소위 우키요에 화풍의 삽화이다.

당시 이때 그린 똑 같은 삽화그림을 보면 스스로를 일본이라 하지 않고 그냥 아군이라고만 하였다.

아군(我軍)과 적군(敵軍)이란 용어는 포괄적인 것이어서 지금은 일본(日本:Japan)이라고 알려져 있는 국명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9월이라 하였으니 전쟁시작하고 난 후 약 한 두 달 흐른 뒤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한반도 기후로서 여름이 분명하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서 여름이라 하듯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놀라운 것은 바로 야자나무가 떡 하니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따지기 전에 도대체 한반도에 웬 야자나무가 그려져 있을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인위적인 식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형태의 세 그루 나무가 생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 중국자료에는 온통 청 상대의 적을 왜(倭:日本國)라 하였기 때문에 왜(倭)라 칭하는데 이 왜(倭)가 평양성을 점령하기 위해 대동강을 도하하려는 상황으로서 도하하기 전 군사들이 모여 있는 강변 언덕 위에 놀랍게도 종려(棕櫚)라는 야자나무가 세 그루 그려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역사사실의 무대가 한반도 대동강(大同江)임에도 열대기후나 아열대기후에서 자랄 야자나무가 그려져 있다는 점은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위 대동강삽화 종려나무[확대]

 

본 블로그 글 “종려(棕櫚), 야자나무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49487 ”에서 분명하게 알아보았었다.

야자나무는 아열대기후나 열대기후에서 생장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놈의 야자나무가 연유도 없이 한반도 대동강에서 자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위 그림의 대동강은 한반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가들은 전부 헛거만 보고 그리는 사람들인가?

명색이 종군화가인데 사실만 보고 그렸을 것이다.

문제는 반도역사라 할 수밖에 없는데 대동강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대혼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역사의 기본 사실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 오늘날 반도역사이다.

그렇다면 위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가 춘재년창(春斎年昌)이 그린 삽화가 정말 종려나무가 맞는지를 먼저 확인할 일이다.

그래서 그림을 확대가지 해 보았다.

위 삽화그림에 나타나는 모양의 종려나무 즉 야자나무의 형태를 모든 종(種)에서 찾아보았다.

위 모양형태의 종려나무는 종려과(棕榈科:Palmae)의 자규속(刺葵屬:Phoenix)에 속하는 대추야자(Date Palm)학명“Phoenix dactylifera”와 실버야자(Silver Date Palm)혹은 설탕야자(Sugar Date Palm)라고도 하는 학명 "Phoenix sylvestris"일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한다.

두 개의 종(種)이 똑같은 형태의 야자나무이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에는 학명 "포이닉스 덱티리페라(Phoenix dactylifera)" 를 현재 대추야자(海枣)라고 하고 높이 20~30m 정도 자라며 잎의 길이가 50cm정도로 꼭대기에 빽빽하게 모여 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좀 더 형태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위 그림에 보다시피 잎이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할 수 있지만 다른 자료에는 우산의 모습이라고 특징짓는다.

이것을 한어자료에는 신라(新羅)의 상징인 한자 해(海)를 붙여 해조(海枣)라고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야조(椰枣), 파사조(波斯枣), 이라크밀조(伊拉克蜜枣), 무루자(無漏子), 번조(番枣), 해종(海棕), 선조(仙枣)등으로 불리어 마치 서남아시아인 것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중동을 근원으로 못을 박지만 DNA 분석을 토대로 한 아래 분포지도에는 주로 북미남부에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대륙 북부까지 분포지가 나타남을 알 수가 있다.

 

대추야자(海枣)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

綱: 单子叶植物纲 Liliopsida

目: 棕榈目 Arecales

科: 棕榈科 Palmae

屬: 刺葵属 Phoenix

 

Phoenix dactylifera L.(Date Palm) 

 

대추야자(학명: Phoenix dactylifera) 종려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이다. . 海枣(学名:Phoenix dactylifera),又名椰枣、波斯枣、伊拉克蜜枣、无漏子、番枣、海棕、仙枣

 

나머지 하나는 "하와이야자나무"라고 하여 주로 섬을 근원으로 하는 것으로서 학명 "포이닉스 실베스트리스(Phoenix sylvestris)"는 다른이름으로 실버대추야자(银海枣:Silver Date Palm) 혹은 설탕야자나무(Sugar Date Palm)라고 하며 임자규(林刺葵), 야해조(海枣)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원산지는 파키스탄 (巴基斯坦), 인도(印度), 미얀마(緬甸) 등 동남아시아를 나타내지만 아래 DNA 분석에 의한 분포지도는 하와이, 카나리아제도, 서인도제도 등 주로 아메리카대륙의 인근 섬에 노란 점이 표식되어 있으며 인도아대륙 미얀마 그리고 말레이까지 주로 아세아를 지정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그렇더라도 한반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Phoenix sylvestris (L.) Roxb.1832(Silvester Palm)  

 

특히 포이닉스 덱티리페라(Phoenix dactylifera)라고 하는 대추야자는 야자나무과의 늘푸른 큰키나무라고 알려져 있고 성경에 등장하는 종려나무가 바로 이 대추야자로 알려져 있으며 원산지는 서부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말하고 있으나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분포지도는 오히려 아메리카대륙을 중심으로 하는 것임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서부 아시아와 북아프리카라고 추측하거나 이집트를 원산이라 하지만 특징적으로 나무의 높이가 20∼25m로서 끝에 회록색의 커다란 우상복엽(羽狀複葉:pinnately compound leaf)깃꼴겹 잎이 뭉쳐나며 우산처럼 퍼지며 사막지대의 물 근처에서는 자연생처럼 자란다 하여 "오아시스나무"라고도 하기때문에 고대인들을 먹여 살린 ‘생명의 나무’라고 알려져 있고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Euphrates river)과 티그리스강(Tigris river)유역에 무성했다는 것은 "문명 중에 문명의 땅(land of the civilized kings)" 또는 "인류가 탄생한 태고적 땅(native land)"이란 의미의 역사왕국 수메르(Sumer:기원전7000년)와 연결되고 있어 삼한 태고적 국가인 태양의 나라이며 제석천이 세운"환국(桓國:기원전:7197-3898)"의 역사사실과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이 나무는 높이30m에 뿌리를 깊숙이 박고 건조, 폭서(暴暑), 모래먼지 즉 사진(砂塵)에 강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만약 평양성 가까이에 흐르는 대동강에 이 야자나무가 생장한 것이라면 그곳은 건조하고 무더운기후의 모래먼지가 계속되던 곳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요동정벌, 4대불가론으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할 때 그 이유중 하나가 時方暑雨弩弓解膠大軍疾疫其不可 "더위(暑)와 우기(雨季)때문에 노궁(弩弓:Crossbow)아교질이 녹아 풀어지거나 거대한 군사(大軍)가 유행병에 걸릴 수 있기에 불가하다"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한반도기후와 전혀맞지 않게 조선영역에서 만주(滿洲)로 향할수록 기이하게도 기후가 더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 이 대목에서 궁금하지 않았던 한반도인들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반도역사이야기는 참으로 희한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처럼 이상하리만치 희한한 역사책을 접하게 된 우리 한반도인들은 한없이 불행하다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이런식으로 역사책을 꾸밀 수 있었는지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서쪽으로 진행하는 이성계가 주장한 불가론이 맞으려면 야자나무가 생장하는 건조, 폭서(暴暑), 모래먼지가 날리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건조지역인 텍사스주, 레드강(Red river)범위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그곳에 있는 평양에서 거병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앞에서 역사학자인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기록에서 조선 땅 서남(西南)으로는 한나라 땅(漢土)과 인접하여 있고 있기 때문에 이성계가 이동한 기록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서남쪽으로 이동하면 뉴스페인지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서남쪽이 되며 이성계가 이곳을 큰나라라 하였던 것이다.

1388년 5월7일에 좌우군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둔을 쳤는데 장마를 걱정하는 것을 기후적으로보면 계절풍을 의심하게 한다.

이 부분에서도 나중에 압록강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면 더욱 신뢰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중앙아메리카에서의 진짜 계절풍적 순환은 북위 5~12° 사이의 태평양에 면한 작은 영역에서 계절풍(季節風:monsoon)이 발생하면서 우기(雨期:rainy season)는 북쪽보다 남쪽에서 일찍 시작되며 대개 5월에 시작하고 북쪽으로 갈수록 멕시코 남부에서는 6월말에 우기가 시작되어 이성계 군사가 남쪽 끝까지 간다면 우기가 11월초까지 거의 4개월간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성계가 무엇때문에 기후와 질병에 그렇게도 걱정하였는지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5"란 글에서 멕시코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에서 전염병인 천연두(天然痘:Smallpox)가 창궐하여 스페인의 침공이 있기 전 아메리카의 인구는 대략 1억여 명이었으나 1507년부터 시작하여 약 50년동안 이 중 90%이상 약 90,000,000명이 이 질병에 의해 몰살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에 이미 1억명의 인구가 밀집했다는 것과 인구가 밀집되어 세계 모든 질병들이 들끓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당시 1억명이란 숫자는 작은 나라가 분명이 아니다.

4대불가론 중에 가장 먼저 언급하는"以小逆大其不可" 즉 이성계가 공격해야 하는 지역을 왜 큰 나라고 했는지 알 수가 있고 또한 사람이 많은 만큼 전염병도 무수히 발생한 지역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북애자(北崖子)는 일찍이 조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장점의 넓은 영토를 보전 하려면 한(漢)선비(漢士)들을 눌러 그 땅에 군림하고 왜구(倭寇)를 배척하여 그 바다를 봉쇄할 것이니, 가히 천하를 호령하며 세상(宇内)을 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를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논리의 이야기는 이미 본 블로그 글"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란 글에서 충분하게 설명한 것이다.

때문에 이성계가 공격하려는 땅의 위상은 대단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성계 위화도회군은 한반도역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거짓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할 수가 있다.

 

야자나무와 환국(桓國)

 

평양성(平壤城)동쪽으로 흐르는 대동강변에 야자나무가 있다는 것은 태양을 의미하는 식물인 만큼 역사근원적인 문제가 반드시 태양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와 "황금곰(金熊:Golden Bears)과 함길도(咸吉道)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0 "에서 소제2부 "시리아와 이집트의 위치 이중성"이란 글에서 역사지명 시리안(Syrian)과 이집트(Egypt) 역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의 지명 동홍해(東紅海)와 관계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역사지명 위치에서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할 역사명칭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사람들이 황혼 또는 해지는 서쪽(dusk)등을 나타내는 에렙(Ereb)이라고 하는 곳, 즉 아랍(Alab)은 바로 서부 캘리포니아와 동홍해(東紅海)가 있었던 위치를 두고 한 말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동홍해가 있었고 서홍해가 있었다.

이것은 어찌보면 동홍해와 서홍해를 같은 나라가 지배했었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실제로 역사 근원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분명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땅에서, 두 강사이에 이 야자나무가 무성했다는 사실이 있고 북아메리카대륙과 연결된 중앙아메리카를 포함한 영역전체를 놓고 이러한 역사지명을 찾아야 할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중앙아메리카는 15세기말엽부터 대단히 많은 인구가 밀집된 상태로 존재했었다.

현재 1700년 이전의 인구 데이타(Historical Population Data)는 외국 어느자료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그 이전 인구데이타에서 설왕설래하는 것에서 대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1500년 경 명조(明)인구가 1억명정도였다는 사실과 중앙아메리카 인구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실제 지명의 위치한 본래의 인구가 이 데이타 통계와 다르겠지만 명조(明)와 중앙아메리카대륙 인구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역사사실에서도 대비되는 것이다.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소위 인구가 이렇게 밀집되었다는 것은 사람살기가 좋았다는 것이며 모든 문명이기(利器:convenience)들이 산재된 곳이라 할 수가 있다.

현재 중앙아메리카는 마야문명(Maya:BC전후-AD1000년)이나 아즈텍문명(Aztec:1248-1521)으로 알려져 그것 이상 알 수 없지만 인구가 밀집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그 이전 문명 역사가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더 다양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그곳에는 근원적으로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수메르문명의 행방도 연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란 의미의 "웅 상 기가(ùĝ saĝ gíg-ga)"라고 하여 당시 오리엔탈문명인(Orient civilization people)들이 머리카락이 검었다는 사실과 함께 동질성을 내다 볼 수 있는 것이다.

sullivan Gaelic: Black eyes Suileabhan, Sully.
변광현(邊光賢)교수의 글을 빌리면 설리번(Sullivan)이란 이름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의 '존귀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서 설리(Sully)는 서리로서 쌀(米)과 같은 어원이며, 반(Van, Vaughn, 본)은 작은사람(little people), 즉 쥬니어(junior)와 같은 의미의 이세(二世)를 뜻하여 설리번은 '작은 서리', 즉 '존귀한 서리'의 아들(son)이란 의미가 된다면서 스코틀랜드와 북유럽에서는 이런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이 찾아오면 행운(Lucky)이 온다는 믿음이 전해진다라고 한 것을 보면 동서양 인종에 관계 없이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에 대한 좋은믿음이 옛 고대인들에게 공유된 것이라고 보여지는 면이다.

이것은 어쨌거나 검은머리, 더 나아가 검은눈동자의 수메르인들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수메르인의 땅은 키엔기르(Ki-en-ĝir)라고 하여 "수메르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이라 하였다는데 바로 메소포타미아 중부지역에 살았던 아카드인(Akkad)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그곳 남부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수메르인이라 하였다는 사실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남부지역이 수메르말을 사용하는 "수메르문명"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잉카(印加帝國:Inca civilization,1438-1533)라고만 생각하면 안될 것이다.

수메르문명이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서양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할 이야기다.

실제로 인류문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수메르문명이 이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와 일치한다는 것은 서양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인류시원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제석천이 세운"환국(桓國:기원전:7197-3898) 삼한역사와도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류 시원인 고대인들에게 태양을 향한 신앙심은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해돋는 땅(east, sunrise-land), 라틴어로 오리엔스(Oriens)라 하며 즉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에 있는 나라‘동방(東方)’이라고 하는 오리엔트문명은 당시 인류에게는 황금같은시기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이러한 동양문화에 열등의식을 가진 것이 바로 지금의 서세들이 주장하는 못된 것들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찾기에 본질이다.

태양이 뜨는 동방(東方), 동양(東洋)은 오리엔탈문명을 구가 하던 곳이 틀림없다.

근세기 말까지 세계 모든 공식문서에 사용된 한문용어 조양(朝陽) 또는 조광(朝光), 동국(東國), 대동(大東), 해동(海東), 조일광선(朝日光鮮)이란 의미의 조선(朝鮮)이란 국호 역시 태양과 밀접한 것이며  단군께서 다스리는 땅, 단주(亶洲)또한 단(亶)의 아래 부분이 파자에서 단[旦]은 바로 "해뜨는 땅"자임을 알 수가 있기때문에 더욱 그렇다.

근원적으로 태양이 가장 먼저 뜨는 곳은 조선이라는 국호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틀문명의 시원과도 연계될 수 있는 삼한역사라는 것이며 그곳에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신선(神仙)의 나라"君子不死之國"이란 애칭을 받으며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야자나무와 기인된 향가문학예술원의 글을 빌리자면 고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는 종려나무를 신성한 나무(神木:Divine Tree)라고 여겼다고 하는 사실과 앗시리아(亞述:Assyria)에서는 태양신 사마쉬(桓因, 蘇利耶:Shamash)를 부채 모양의 나무관 윗쪽에 종려나무날개를 단 원반 모양의 형태로 묘사했다고 하였으며 이집트(埃及:Egypt)에서는 손바닥 모양의 잎이 달린 종려나무 가지가 '장수', 혹은 '영원한 삶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장례식 행렬 때에는 종려나무가지를 손에 들었다 것이다.

이 모두가 태양의 땅(sunrise-land)과 관계되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서양학자들은 이 "태양의 땅"을 말하면서 이집트(Egypt)를 그곳에 두기 위해서 수메르지역의 위치를 이라크 남부(southern Iraq)로 지정하고 있기에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주장인가를 알게 한다.

그곳이 태양이 가장 먼저 뜨는 땅이라 하고 있으나 한심스럽기는 동아시아에서 열도일본인들이 태양의 나라라고 하며 욱일(旭日)을 고집하는 짓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욱일(旭日)은 개나 소나 아무나 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욱(旭) 아홉 구'九' 파자에서 알 수 있듯이 구주(九州) 즉 천하를 다스려야 자격이 있는 것이다.

누구나 이처럼 자기 역사를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말 별스럽게도 우리나라 반도역사는 세계삼한역사를 가졌던 민족임에도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못난 민족임을 나타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어찌 참다운 민족역사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재 이라크가 있는 곳을 중동(中東:Middle East)이라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가장 동쪽을 나타내는 해뜨는 동방을 주장하려는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근세기에 서세중심주의 빠져 있던 영국내셔날리스트 학자들에 의해 근동(近東)이라 하면서부터 사작된 용어라지만 "해뜨는 땅"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물론 현재 아시아대륙이란 명칭역시 유럽까지 포함한 그야말로 순수한 대륙명칭이어야 한다.

거듭말하지만 동방(東方)이나 동양(東洋)이라 하는 것은 태양을 근원으로 하는 역사가 존재하는 땅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태양의 근원이 존재하는 땅은 아시아대륙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동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오직 인구가 폭발적으로 밀집되어 있던 곳을 통제할 수 있었던 곳"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은 부동의 원칙이며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검증을 마친 변할 수 없는 천리(天理)라 할 수 있다.

 

대동강(大同江)의 수계(水系)는 남해를 가르킨다.

 

[세종지리지]

평안도(平安道)【부(府) 동쪽에 있다.】

大川曰大同江, 卽古之浿江,【《文獻通考》曰: “平壤城東北, 有魯陽山, 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 有葦山, 南臨浿水。”】 又云王城江。【載中祀。】 其源有二, 其一出自熙川郡加莫洞, 繞妙香山, 東歷德川、价川、順川、殷山、成川、慈山, 至于江東。 其一, 出自陽德縣北文音山, 經谷山、遂安、祥原、三登, 至于江東, 至此二派合流, 入于平壤府境抱流城東, 爲大同江。 行九里爲亇屯津, 古名九津溺水,【載小祀。】 皆有舟楫濟人。 過江西至龍岡縣南, 入海。

대천(大川)은 대동강(大同江)이니, 곧 옛 패강(浿江)이다.【《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 동북쪽에 노양산(魯陽山)이 있고,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으며, 서남쪽 20리에 위산(葦山)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臨)한다.”고 하였다. 】또 왕성강(王城江)은【중사(中祀)에 실리어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희천군(熙川郡) 가막동(加莫洞)에서 시작하여 묘향산(妙香山) 동쪽을 둘러서 덕천(德川)·개천(价川)·순천(順川)·은산(殷山)·성천(成川)·자산(慈山)을 지나 강동(江東)에 이르고, 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북쪽 문음산(文音山)에서 시작하여 곡산(谷山)·수안(遂安)·상원(祥原)·삼등(三登)을 지나 강동(江東)에 이르러서, 두 갈래의 물이 합류(合流)하여 평양부(平壤府) 지경으로 들어가서 성(城) 동쪽을 안고 흘러 대동강(大同江)이 되고, 9리를 더 가서 마둔진(亇屯津)이 되었으니, 옛 이름은 구진 익수(九津溺水)이다.【소사(小祀)에 실리어 있다. 】모두 배가 있어서 사람을 건네준다. 강서(江西)를 지나 용강현(龍岡縣) 남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강(大同江)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라 한다.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군(寧遠郡)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또 꺾여 서쪽으로 흘러 덕천군(德川郡) 경계에 이르러 삼탄(三灘)과 합류하여 남으로 흘러 개천군(价川郡) 경계에 이르러 순천강(順川江)이 되고, 순천군(順天郡)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고, 자산군(慈山郡)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禹家淵)이 된다. 여기서부터 동으로 흘러 강동군(江東郡)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되며,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북쪽 문음산(文音山)에서 나와 서남으로 흘러 성천부(成川府) 경계에 이르러 비류강(沸流江)이 되고 또 꺾여 남으로 흘러 강동현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부성(府城) 동북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부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이 되고, 또 대동강이 된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내려가 평양강과 합류하여 중화형(中和縣)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용강현(龍岡縣) 동쪽에 이르러 급수문(急水門)을 나가 바다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도대체 야자나무가 있었다는 대동강은 정말 한반도가 아니면 어디라는 말인가?

우리나라 양대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공히 대동강(大同江)은 부(府) 동쪽에 있으며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두 사서가 공히 일치한다.

그러나 사서(史書) 양대 지리지(地理志)가 설명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우리가 대동강 실체를 판단하게 하는 바로 최후 강(大同江)하류에서 바다(海)로 들어간다는 설명의 부분을 신중하게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 실제 대동강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판단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종지리지는 過江西至龍岡縣南, 入海 라 하여 강서(江西)를 지나 용강현(龍岡縣) 남쪽(南)에 도달하여 입해(入海)한다 하였다.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중요한 단서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현재 한반도의 대동강은 서(西)로 흐르는 형태의 강이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강동(江東)과 강서(江西)라는 포괄적인 지명이 주는 무게이다.

한반도지명에서 강서(江西)가 있다는 것은 강동(江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서 강(大同江)을 중심으로 강서와 강동을 나누고 그 가운데를 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현재 한반도 지도를 보면 강서와 강동의 위치가 고을 이름정도로 끝이고 위치가 거의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거나 마지못해 방향만 표시했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한반도 지명은 강서와 강동을 왜 구분하고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나중에 또 한번 더 이야기 하고자 한다.

어쨌거나 동서로 나눈 것이니 만큼 강(大同江)은 가로(橫)가 아니라 세로(縱)로 흐르는 강임을 알 수가 있다.

강이 흐르는 것에서 가로(橫)는 동이나 서로 흐를 수가 있지만 세로(縱)는 북이나 남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두 사서에서 이야기 하는 대동강 지형상황에서 세로로 흐르는 강이라는 사실은 다음 글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먼저 세종지리지가 말하는 대동강 하류에서 용강현(龍岡縣)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부분이다.

이것을 번역한 한국번역원은 용강현(龍岡縣) 남쪽(南)에 도달(至)하여 입해(入海)한다라고 번역하고 있기때문에 현 한반도 지형처럼 용강현을 북쪽에 놓고 보면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현 한반도 대동강과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과 다른 해석이 분명하게 있게 하는데 過江西至龍岡縣南, 入海 무엇때문에 용강현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는 입해의 매우 주요한 의미를 외면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南, 入海는 남해와 입해(南海와 入海)에서 해(海)가 중복사용되는 것을 생략한 것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至龍岡縣 이미 용강현에 도착하고 바로 남쪽을 통해 입해(入海)한다라고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세로(縱)로 흐르고 있었다는 상황이 그대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물론 용강현이 바다에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은 신증[新增]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곳의 기록은 바다가 용강현(龍岡縣)의 서쪽에 있다 하였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고을이 있을 것 같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세종 9년(1427)8월10일 기록을 보면 평안도의 선천(宣川)·용강(龍岡)·철산(鐵山)에 바다의 조수(潮水)가 창일하여 바닷가의 토지를 함몰(陷沒)시켰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다.

즉 조수가 난입하여 용강을 비롯한 바닷가의 고을들이 바닷물에 침식케 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지형의 대동강]

 

위 한반도 지형에서 용강이 있는 곳을 보면 산이 서쪽에서 세로방향으로 길게 막고 있어 바다물에 의해 침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이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지대가 높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현재 한반도 지명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조수로 인해 바닷가에 있던 선천(宣川)·용강(龍岡)·철산(鐵山)이 침식되었다면 정작 용강보다 더 바닷가에 가깝게 앉아 있는 남포(南浦:옛지명 삼화(三和))는 세종지리지기록에서 빠져버린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것들은 현재 한반도 지형과 주요 지리지가 전혀 맞지 않는 심대한 모순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

 

위 1706년(숙종 32)에 이이명(李頤命:1658-1722)이 그린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에는 철산(鐵山)과 삼화(三和)가 바닷가에 있고 선천(宣川)과 용강(龍岡)은 오히려 육지로 들어가 있다.

이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 역시 두 지리사서 기록과 일치하지 않고 있으며 

현 한반도 지형형태와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현재 글쓴이가 지적하지 않는 것을 여러분들이 직접찾아보아도 무엇이 어긋나는지 금방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아래 관서도(輿地圖:關西圖)는 지형형태가 한반도 지형과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여지도는 우리나라의 각 군현(郡縣)을 그린 지도로 편찬 연대와 제작자는 알 수 없으며, 채색필사본이다. 여지도(輿地圖:關西圖)[향고도님 http://blog.daum.net/sabul358, 참조]

 

위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에서 굳이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세종지리지에 기록된 조수피해지역인 선천(宣川)·철산(鐵山)·용강(龍岡)을 이야기 하면서 왜 그림상 가장 바닷가에 있다고 판단되는 함종(咸從)이 빠졌을까?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역시 세종지리지와는 맞지 않는 지도이다.

한반도 지형을 비슷하게 그려놓은 관서도인 여지도(輿地圖:關西圖)에 바닷가 용강(龍岡)부근 뿐만아니라 삼화 등 곳곳에 산이 배치되어 있다거나 한반도 지형과 비슷하게 흉내만 낸 것으로 대동강을 아주 간결하게 처리한 부분들은 편찬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저기 지명(地名)만 보일 뿐 서세의 지도와 비교할 때 매우 조잡하다고 느껴지며 이것은 한반도 역사를 만들기 위한 지명 심기 일환의 지도라고 볼 수밖에 없게 한다.

물론 이런 지도들오 인해 한반도 지명이 쉽게 굳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세종지리지와 다르게 爲梨津江至龍岡縣東出急水門入海 이라 하여 대동강의 옛 이름인 이진강(梨津江:배나무나루)을 말하고 있고 대동강 하류부분에서도 용강현에 이르러 세종지리지처럼 至龍岡縣南 (南)에서 바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 아니라 용강현 동(東)쪽으로 나아가(出)가 붙어 곧장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세종지리지에는 없는 급수문(急水門)이 있어 그곳을 통해 바다(海)로 들어간다라고 한국번역원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급수문은 바다 입구에 보통 있다.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서는 용강현에서 남쪽바다에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 있었지만 신증에서는 용강현 동쪽을 지나 급수문을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한 것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서해로 들어간다거나 황해로 들어간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사서기록자인 사관(史官)들은 일부러 후세에게 이것을 해석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 수수께끼 놀음하였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무엇때문에 이렇듯 애매모호하게 기록을 남겼을지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종지리지에서 보았듯이 용강현 남쪽바다로 입해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신증에서도 서해인지 남해인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대동강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세로로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용강(龍岡)가까이에서 동쪽편에서 흘러 나아가 급수문(急水門) 통해 바다로 곧장 들어간다는 것은 세로로 흘러 급수문을 통과하면 곧장 남해로 들어간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데로 들어갈 곳이 없다.

바로 남해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대동강 하류라고 하는 곳, 용강의 지형형태를 보면 대동강이 평양 동쪽을 지나며 수직 세로(縱)로 흐르다가 갑자기 황주(黃州)부근에서 곶처럼 티어나온 지점에서 135도 가량 급하게 꺾여 서쪽으로 흘러 비로서 서해로 들어가는 형국인데 만약 두 사서 지리지에 이러한 꺾인 폭이 큰 지형형태를 기록했다면 아마도 이쯤에서 꺾일 절(折)자가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기록은 아다시피 찾을 수도 없고 오직 한반도 지형에 맞게 서쪽으로 향해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에는 아무런 언급조차 없는 참으로 이상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분명해야 하는 강의 하류, 끝부분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기록이 이처럼 애매모호하게 처리된 이유가 무엇일까?

솔직히 우리사서 양대 지리지가 다르고 대동강을 그린 고지도마다 다르고 또한 한반도 지형이 다르다는 사실들을 아는 것이 오늘 어제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대혼란에서 늘 상 역사찾기에 나선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들이다.

 

어쨌거나 반도역사 만들기한 세력들은 한반도 지형에 맞출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이 한계에서 왜곡된 사실들을 감추기 위해 명확해야 할 지명들을 어물쩡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을 말할 수 있으며 현재 바다 이름 서해(西海)나 황해(黃海)같은 지명조차도 마음놓고 사용할 수가 없었을 상황이 당시에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은 역사판짜기에 혈안이 되어 유동변화가 심대했던 근세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대륙사를 만들기 시작한 시점에서 어떤 언어의 원본역사서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용 한문역사서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부분에서 아무리 역사찾기가 이루어진다 하여도 물론 서세가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실체를 밝히기가 어려운 것이며 이 원본 역사서가 과연 어떤 문자로 쓰여져 있었던 것인지는 아마도 1.2차 같은 세계역사전쟁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 이상 영원토록 우리가 알 수 없을 지도 모를 이야기다.

 

여기서 잠시 글쓴이의 판단을 언급하면 본래 대동강이라 함은 패강(浿江)이라 하여 삼수변(⺡)과 조개 패(貝), 파자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상형문자 형태를 보면 사다리모양을 한 물 수(⺡)에서 찾을 수 있고 조개 패(貝)는 강이 바다로 곧장 들어간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거대한 두 개의 강이 똑같은 남쪽 방향으로 흐르되 떨어져 나란히 사다리모양의 형상을 한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형태가까이에 대동강이라고 하는 패강(浿江)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때문이다.

패강은 대동강으로 패수는 평양강으로 불렀다는 것도 모두 이러한 형태적인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며 본래 대동강은 대동강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세로(縱)로 흐르는 강임을 알 수 있다.

대동강 하류 바닷가 용강현의 동쪽을 곧바로 지나 남해로 들어가기 전 급수문을 통해 바다로 들어갔을 것이다.

 

마무리정리

소제:관서(關西)지역의 강들은

모두 남쪽바다로 들어간다.

압록강과 페코스 강 (Pecos River)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동강(大同江) 수계(水系)

 

이미 대동강 하류 상황을 점검한 결과 결론은 나왔다.대동강 하류가 접한 곳은 바로 남해(南海)란 사실이다.이 결론을 마무리짓기 위해 최종 정리가 필요하고 좀 더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다시 세밀하게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본 블로그가 만든 "대동강(大同江) 수계(水系)표"를 근거로 한 크게 4가지의 주요 포인트를 집어 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 문제는 대동강 발원지가 희천군(熙川郡) 가막동(加莫洞)에서 시작하여 묘향산(妙香山) 동쪽을 둘러서 덕천(德川)·개천(价川)·순천(順川)·은산(殷山)·성천(成川)·자산(慈山)을 지나 강동(江東)에 이르고, 또 하나의 발원지는 양덕현(陽德縣) 북쪽 문음산(文音山)에서 시작하여 곡산(谷山)·수안(遂安)·상원(祥原)·삼등(三登)을 지나 강동(江東)이르러 두 갈래의 물이 합류(合流)한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여기서도 이상한 것은 한국브리태니커사전 대동강수계표에 자세히 보면 본 수원지 기록된 성천(成川)이 강동에 합류하기 전 나머지 수원지 지류인 비류강으로 들어간 지명임을 알게 한다.이것은 세종지리지와 전혀 맞지 않는 문제가 발견된다.또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덕천(德川)·개천(价川)·순천(順川)·성천(成川) 같은 천(川)은 본류로 들어가는 지류(支流:stream)가 아니라 강의 일부가 될 수 있는 하천(河川), 내 같은 것으로 영어로 크리크(Creek)라 하는 것이다.그러나 한반도 대동강은 이 들을 마치 지류처럼 만들어 전부 강(江)이라고 명명한 부분은 반드시 지적받아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대동강 찾기에 필요한 유용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두번째 문제는 평양성(平壤城) 또는 평양부(平壤府)로 들어가기 전 합류지점을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서는 강동(江東)이라 하였고 신증에서는 잡파탄(雜派灘)이라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이 있다.그리고 두 갈래 합류된 강이 평양부(平壤府)지경으로 들어가서 세종지리지에서는 성(城)동쪽을 안고 흘러(抱流) 대동강(大同江)이 된다고 하였으나 신증은 서진강(西津江)에서 성 동북에 이르러 마탄(馬灘)과 또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에서부터 대동강이 된다 하였다.

 

                                               [한국브리태니커사전:대동강수계]

 

즉 대동강은 바로 이 지점 즉 강동현 부터 비로소 대동강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는 두 갈래의 물이 강동에서 합류하여 평양성을 안고 흘러 대동강이 된다 하였고 이에 상황으로 볼 때 서쪽에서 흘러 평양성 동북을 안고(抱流)동쪽 흐르는다는 것은 일단 굴곡되면서 꺾여 남쪽으로 흐르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하지만 이 안고 흐른다는 표현은 한반도 대동강 평양지형에는 전혀 맞지않는 문구이다.신증[新增]에서 여기 합류지점을 강동현(江東縣)에 이어 잡파탄(雜派灘)이라 하였는데 이 잡파탄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잡(雜)은 뒤섞이다이며 파(派)는 지류를 말하며 탄(灘)은 모래톱, 개펄, 또는 여울이라고 하고 영어로 "bund"라고 하는데 힌디어(Hindi)에서 나온 것으로 상하이(shanghai) 황포강(黃浦江)동쪽으로 꺽이는 좌안을 황포탄(黃浦灘)이라 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영어자료에서 말하고 있다.제방, 뚝 An embankment or dike
[Hindi band, from Persian, from Middle Persian, from Avestan(아베스타어)*banda-, from Old Iranian; see bhendh- in Indo-European roots.]
그렇다면 평양성 부근 대동강 합류지점에는 잡파탄(雜派灘), 마탄(馬灘), 백은탄(白銀灘)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탄(灘)은 모래톱이나 여울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강이 급하게 꺾이다 보면 모래 퇴적물이 쌓이는 퇴적지형(堆積地形)이 있게 마련이고 물이 많은 때 이러한 곳에서 급류가 발생하는데 보통 여울(Riffle)이라 한다.큰 강이 꺽여 흐르는 곳에 지형을 말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어쨌거나 평양성을 안고 도는 대동강은 형태를 한반도 지형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이러한 탄(灘)을 지나기 때문에 모래톱이 쌓여 이때부터 생성된 명칭이 일통지[一統志]에서 패수(浿水)와 대통하(大通河)라 했던 것이다.여기에서 거대한 또 다른 강과 통할 수 있는 상황임을 알게 하는 명칭이다.현재 학자들은 패수(浿水)를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또는 청천강(淸川江)이라고도 하며 대동강(大同江)을 패강(浿江)이라 한다.

 

세번째로 따져보아야 할 것은 세종지리지가 말하는 대동강이 시작된 곳에서부터 9리를 더 가서 마둔진(亇屯津)이 있고 이것을 옛 이름으로 구진 익수(九津溺水)라 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소사()에 기록된 것이라 하였다.소사()는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봄·가을 중간달에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이 구진익수가 명산대천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로이 알 수가 있다.이처럼 아름다운 곳이라면 어째서 몰랐을까?왜 한반도 대동강 어디쯤에 이 구진익수(九津溺水)라는 곳의 지명이 나타나지 않을까?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마둔진(亇屯津)이라 하였으니 이름대로 풀어보면 망치(亇)모양의 언덕이나 구릉이거나 병영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으며 구진익수라는 것은 아홉곳의 나룻터가 있어야 하는 물이 깊은 익수(溺水)이니 배가 사람을 건네준다고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거대한 호수임을 알 수가 있다.대동강 시작지점에서 약 9리 남쪽으로 흘러가면 이러한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이곳을 대동강 하류의 옛이름이라 하고 양각도에서 이암도 아래 벽지도에 이르는 단순히 구간만을 말하는 것이다.이곳을 현재도 명산대천이라고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한반도에는 이 명산대천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을뿐만아니라 분단의 아픔으로 있었던 것인지 없었던 것인지도 파악할 수 없는 기가막힌 처지에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대동강 수계에 나타나는 포괄적인 지명 강서(江西)와 강동(江東)에서 이곳 가운데를 세로 즉 종(縱)으로 지나 신증[新增]에는 평양강(平壤江)과 다시 합류한다 하였고 중화현(中和縣)에 이르러 대동강의 옛 지명인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용강현(龍岡縣) 동쪽에 이르러 급수문(急水門)을 나가 바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이 평양강은 이상하게 세종지리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또한 세종지리지에는 급수문도 나타나지 않는다.대동강 시작지점에서 부터 세로(縱)흘러다는 기록은 있지만 어디에도 다시 꺾여(折)흐른다는 문구가 없기때문에 결국 계속 세로(縱)로 흘러 갑수문을 통해 남쪽바다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먼저 신증[新增]에만 나타나는 평양강(平壤江)은 무엇인지 알아보자.(文獻通考)曰: “平壤城東北, 有魯陽山, 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 有葦山, 南臨浿水。
남송(南宋)제도에 관한기록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 동북쪽에 노양산(魯陽山)이 있고,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으며, 서남쪽 20리에 위산(葦山)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臨)한다.”고 하였다.
이 평양성(平壤城)남쪽으로 흐르는 평양강(平壤江)을 패수(浿水)라 했던 것이다.패수(浿水)를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또는 청천강(淸川江)이라 하는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중요한 것은 대동강 시작지점부터 남쪽으로 흘러 평양강과 합류하여 중화현(中和縣)에 이르렀다는 것에서 대동강이 남쪽으로 흘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 강역의 주요 강들은 모두 강 하류가 남쪽바다와 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형태적으로 이것을 패수(浿水)라 했는지 모를 일이다.

南流爲鴨綠江北流爲松花江爲混同江東北流爲蘇下江爲速平江東流爲豆滿江

위 문장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발췌한 원문기록이다.놀랍게도 압록강(鴨綠江)이 남쪽(南流)으로 흘렀다는 사실을 또한 부정할 수가 없게 하는 기록이라는데서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인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압록강 바깥이 점점 더 더워지는 요동(遼東)이라 하였으니 적어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남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지형이어야 맞고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페코스 강 (Pecos River)일 수밖에 없다.이것은 앞서 글쓴이의 "이성계 위화도 회군에 대한 설명"과 본 블로그 글 "조선강역(朝鮮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6"에서 이미 주장하였던 사실이다.이렇게 보면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를 합한 한수(漢水) 또는 혹 여강(驪江)라고도 한 조선열수(朝鮮洌水)를 기준으로 하여 관서(關西)지역의 강들은 모두 남쪽바다로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물론 본 블로그 글 "대승(戴勝)후투티(hoopoe)로 본 조선열수(朝鮮洌水)의 위치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7"에서 위대한강(The Great River), 아버지강(父河:The Father of Waters), 또는 황하(黄河:The Big Muddy)라고도 하는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조선열수로 보았던 것에서 이 역시 남쪽 바다로 들어간 것이다.대동강이 평양성을 안고돌아 동쪽으로 흐르는 지점부터 대동강이라 하였고 그것이 세로로 흐른다고 보았을 때 평양성 남쪽을 지나는 평양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대동강과 합류했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가 있다.여기서 조선열수(朝鮮洌水) 거대한 강이라면 이 강과 이어지는 일통지[一統志]가 말한 대통하(大通河)가 패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따져 볼 것은 바로 이 급수문(急水門)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보면 급수문(急水門)은 지형과 조수(潮水)의 차이 때문에 물살이 빨라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으며 한어자료를 보면 이전에 도랑 또는 인공수로를 말하는 것으로 해수면에 비해 수로가 좁아 물살이 급한곳을 주로 말하는 것인데 영어로는 "gate of fast moving water"또는 "Throat Gates"라고 하였다.

東典考卷之十

地理 摠地理山川

與平壤江合平壤江源出順安法弘山經普通門外來合流至中和西爲梨津江與江西九林川合至龍岡東東出急水門

 

작자미상의 동전고(東典考)에도 "龍岡東東出急水門" 용강동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급수문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아래 또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松都誌卷之二
疆域
沿革
開城府卽高麗舊都也新羅 松嶽郡本高句麗 扶蘇상권0942-3
至禮成江江居兩山間束以石峽湍激而下所謂急水門最爲險惡又大明一統志急水門在開城南海中宛如巫峽

정창순(鄭昌順)이 정조6년(1782)에 편찬한 위 송도지[松都誌]에 보면 "예성강 강변마을 모든 산들을 묶어 놓은 듯 바위협곡들로 인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급하게 흐르는 강 아래에 소위 급수문은 최고로 험악하다 하였고 또 대명일통지에서는 급수문을 개성 남쪽 바다가운데 있으며 마치 무협같다"하였다는 사실이다.

급수문은 주로 바다로 통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바다 입구을 말하는 것임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개성 예성강 급수문이 남해가운데(南海中)있다 한 사실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일까?

개성으로 통하는 예성강 급수문이 남해가운데 있다는 것은 한반도 지형으로서는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도저히 맞출 수도 없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미 조선강역(朝鮮疆域) 남해(南海)를 지목한 것은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가 서세를 혼내주는 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과 "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을 시작하면서부터 짐작한 결과이기는 하다.

 

이 모든 것들은 조선강역(朝鮮疆域)에 있어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漢土)과 인접하여 있으나 그것을 막을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長江大河)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렵다고 하여 걱정하는 것과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라 하였던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들이다.

 

대동강만 중점으로 살폈기에 세세하게 살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은 다음에 다시 논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대동강이란 실체를 두고 결론과 문제점을 동시에 놓고 세세하게 풀어보고 알아본 결과 모두가 충격적인 사실뿐임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앞서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가의 삽화그림에서 그려진 대동강(大同江)에서 열대기후나 아열대기후에서 생장될 수밖에 없는 야자나무 즉 종려나무가 그려진 것은 절대로 한반도 대동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미 이 그림으로 인해 한반도 대동강의 실체를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부터 대동강을 한반도에서 찾아야 하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대동강의 수계를 분석한 결과 많은 것을 새롭게 알았고 구진익수(九津溺水)가 소사(小祀)에 나올 정도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이었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대동강은 서해나 황해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좀 더 나아갈때 옛 관서지역(關西地方)의 주요강들은 모두 남해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결코 헛소리가 아닌 펙트라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충격적인 것은 바로 "해동역사 제65권, 왜적(倭賊)을 막은 데 대한 시말(始末)5"이란 해동역사원문을 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平壤西北鴨浿二江. 俱南通海

평양(平壤)서북쪽의 압록강(鴨綠江)과 대동강 혹은 예성강(浿江) 두 강은, 모두 남쪽으로 바다와 통해 있다는 사실까지이다.

북애자께서 강점이라고 하던 조선강역이었던 것이다.

북애자(北崖子)께서 서남지역의 한토(漢土)에 청(淸)대신할 세력을 걱정했다.

그곳은 바로 뉴스페인이라고 불리던 서세의 지역이다.

이성계가 그곳을 공격하기전 많은 걱정을 하였던 곳이다.

그곳에 만주(滿洲)있었고 그곳에 명청(淸)이 있었으며 후금(喉衿:後金)이라는 목구멍과 옷깃이란 요해처(要害處)였으며 그곳을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 가히 천하를 호령하며 세상(宇内)을 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를 수 있었다는 곳이다.

이제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대동강이 있었던 그곳은 조선강역의 남해바다를 정확하게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남해가 어디냐고?

바로 멕시코 만(灣:Gulf of Mexico)이라는 곳이다.

그렇다면 대동강, 예성강, 압록강은 전부 남쪽바다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 놀라운 사실의 상황은 세계삼한역사연구에서 한 획을 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 전혀 부족함을 느낄 수가 없다는 자신감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닐터...[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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