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조선(朝鮮)은 세계통치국

한부울 2019. 8. 1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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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은 세계통치국

 

글쓴이:한부울

 

1. 들어가기
2. 근세사가 주는 의혹들
3. 한반도 역사가 무엇인가.
4. 삼한통합과 그 종주국

5. 조대(朝代)와 조정(朝廷)
6. 기록으로 본 만리지국의 조선강역
7. 나가기

 

1.들어가기

 

2005년 글쓴이가 본격적으로 세계삼한역사연구 블로그에서 글을 시작하면서부터 따지면 거의 15년이란 세월이 흘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나름대로 글 중에는 지극히 아끼는 글도 많다 하겠지만 제일 가치를 느끼고 보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삼한역사라는 연구 구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이탈하지 않고 끊김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는데 가장 뿌듯함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자신있게 하던 주장이 가다보면 뒤틀릴 수가 있어 때로는 조정과 수정이 필요하였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맥을 짚고 예상한대로 끈기있게 진전할 수 있었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러한 구도가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게 뒤받침한 것은 물론 완벽하지 않겠지만 생물학적판단과 지리학적판단, 기후학적판단을 바탕으로 한등 자연과학적으로 그것을 세세히 증명하고 기존 사서와 차이점등을 밝혀 맞추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큰 핵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하지만 삼한의 우두머리 조선은 세계통치국이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에 사실상 넘쳐난다고 해도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벌어지고 있는 건방진 열도왜구정치모리배들의 의한 무도한 경제침략과 철면피 친일파들에 의해 잘못알려진 조선이 난자당한다는 안타까움과 100주기를 맞이하는 광복절에 대한 작은 헌작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을 시작하도록 한다.

본 블로그 글을 하나하나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게시된 글 속에 조선이 세계통치국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간단하게 본 블로그에서 밝힌 글들을 예시하면서 다시 한번 훑어보자.

본 블로그 글 "4.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s://han0114.tistory.com/17050747 "에서 태고적부터 전통적으로 동방이라 불리었고 삼한역사에서 아사달(阿斯達)이라 하였으며 "아침의 땅"이라 하였고 이것을 조양(朝陽) 또는 조광(朝光)이라 하였으며 동방국가를 동국(東國), 대동(大東), 해동(海東)이라 하여 상징한 것으로써 조일광선(朝日光鮮)이란 의미의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만들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게 했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 글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는 화부(華府)와 미경(美京), 화성돈(華盛頓)으로 불렸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542 "에서 말하길 지금의 세계경찰국 미국 워싱턴DC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os)워싱턴기념탑이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바로 고대이집트 왕조가 태양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기념비 방첨탑(方尖塔)이 주는 태양신(羅:Ra)을 숭배하는 상징의 의미라는 사실이다.

이 한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본 블로그 글 "기니피그(guinea pig)가 가리키는 천축(天竺)은 인도(indies)https://han0114.tistory.com/17050620
"에서 천축(天竺)에 대한 한어자료를 보면 <사기대완전>에 인도(印度)는 최초에 신독(身毒)이라고 하였고 <산해경>에는 서방에 천독국(天毒国)이 있다 하였으며 <漢書>에 동남쪽으로 따라가면 신독국(身毒国)이 있었다고 하여 수천리가 그들의 도시이라 하였고 <후한서서역전>에는 천축국(天竺国)은 일명 신독(身毒)이라고 하여 당나라 초기에 천축(天竺)이라 칭하였다라고 하였다. 천축은 페르시아어 힌두(Hindu)라 음역한 것이며 페르시아인들은 신두(Sindhu) 또는 힌도(Hindu), 그리스인들은 힌두(Hindu), 인두(Indu)라 하여 모두 인도(印度)가 되었다는 것인데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天竺)을 말하고(古謂天毒即天竺), 곽박은 조선천독(朝鮮天毒)이라 하여 천독(天毒)이 천축국(天竺國)이니 서방천독국과 동방신독국이 모두 조선이라는 이야기다.

그것뿐인가. 중천축국(中天竺國)이 삼만리(地方三萬里 )라는 것은 다섯(오)천축국을 다스리는 나라가 중(中)천축국(中天竺國)이라는 뜻이며 천축국은 동천축국, 서천축국, 남천축국, 북천축국, 중천축국을 합하여 삼만리(地方三萬里)였고 수십나라(數十國)가 있으며 모두 왕을 두어 나라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신독국(身毒國)이라 했다.

즉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중앙정부가 다스리는 국가체제로 조선은 바로 인도이며 천독이고 3만리영토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역사사실만으로 조선을 감히 비하는 모든 벌레같은 잡배들의 입을 봉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식을 알면 무엇하나 엉터리지식만을 가지고 똥이 가득한 머리로 세상을 보려하니 옳게 보일 수가 없다.

즉 중천독국은 옛 중원왕조가 세운 도읍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곳은 경사라고 칭했다.

당후(唐虞) 즉 요순(堯舜)까지는 이런 호칭이 없다가 하(夏)부터 각호칭이 있었다 하여 춘추공양전(公羊傳)에서 '경사(京師)란 무엇인가' 하니 '천자가 거하는 곳이다' 하였고 또 '경(京)은 크다' 하였으며 '사(師)는 땅이라' 하였으니 천자가 거(居)하는 곳이니 필연적으로 땅이 컸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신라는 천자를 가진 나라인가.

간단하지 않는가. 정복왕조라 하여 스스로 천자라 칭했다던 금(大金:1115-1234)시조 완안함보(完顔函普:941-960)가 신라가 부모의 나라라 한 것이나 청(淸)역시 황제들이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신라(新羅)를 잇고자 한 금(金), 청(淸)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자연스럽게 천자의 나라임을 알 수가 있다.

신라 명칭에서도 보면 신로(新盧)-사라(斯羅)-사로(斯盧)-시라(尸羅)-시나(sina), 시노(Sino)-변형 지나(支那)로 나타남도 알 수가 있으며 일본인들이 청을 지나조선이라 한 사실을 풀어보면 신라조선과 같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그리스(Greece)를 희랍(希腊[Xīlà])이라 한데서 '실라', '시라'라 발음하였고 이것이 한문문서가 통일되고 있는 시점에서 신라(新羅)인데 신라는 로마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s://han0114.tistory.com/17050727 "에서 천자(天子) 즉 황제가 있었던 곳을 시노(Sino)라고 하였을 것이고 이것을 지금까지 청(淸:Qing)이라 한 것이라 할 때 이 시노(Sino)는 프랑스어로 시노 sin(o), 라틴어로 시나, 시노, 시나이(sina-sino-sinai)등으로 발음되어 지나[支那(しな)], 시나[sina(シナ)]로 읽혔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서세들이 시노(sino)라고 부르는 것은 라틴어 시나(sina)에서 출발한 것으로 중국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고 대신 일본인들은 시나(sina)라 하여 한문 지나(支那)라고 표시하지만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진단(震旦) 즉 옛날 인도인이 중국을 치나스타나(Chinasthâna) 또는 치니스탄(Chinistan)에서 나온 china, chini 등에서 보아야 하고 진단(振旦), 진단(眞旦)과 같이 쓰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지나"라고 하는 일본인들은 본래의 의미를 낮춰부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나'를 '지나'라 하였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일본서기의 신라를 정벌했다고 하는 삼한정벌설도 신라 즉 중국을 주요타깃으로 하는 대한강박에 대한 조작역사임을 알 수가 있다.

설명이 군더더기 없이 매우 샤프하지 않는가.

고려는 어떤가.

고려(高麗)가 천자국(天子國)이었다는 사실이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유럽왕실의 상징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612"에서 박견(狛犬)을 고려견(高麗犬), 당사자(唐獅子)라고도 하고 원형은 사자이며 옛 중국에서는 전한시대(前漢時代)부터 궁궐(宮闕)이나 묘실(廟室)앞에 수호신으로 석조 사자상(獅子像)을 안치한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사자가 고려의 상징이거나 천자의 상징임을 알 수가 있고 사자(獅子)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며 동서고금 가리지 않고 왕권(王權)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면 이는 세계삼한역사관점과 같은 논리다.

또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재위 918~943) 상(像)에서 황제의 조현복(朝見服)인 강사포(絳紗袍)에 쓰던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는 사실과 임진왜란시기에 명조선의 황제가 고려황제 즉 조선천자라는 주장도 있다.

조선은 어떤가.

본 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634" 이라한 글에서 소위 정복왕조라는 청조가 명이 존재하는 강남을 섬멸하면 조선은 자기 주머니속에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였으니 조선천자를 무너뜨리면 자연스럽게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반도에 조선이 있는데 신중국 양자강에 있는 강남을 점령한다고 조선을 정복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역사가 이야기다.

예를 들면 신중국을 조선영토라 할 때 강남은 조선정부가 아닌가.

그러니 조선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니 조선이 힘을 잃고 그들의 주머니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

성종4년(1473)에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면서 대조선황제폐하(大朝鮮皇帝陛下)라 하면서 신성한 모든 물이 조선(朝宗)을 따른다는 부상지수조종(扶桑之水朝宗) 즉 만수조종(萬水朝宗)이라 했다는 사실, 또 성종 5년(成宗 5年: 1474)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이 특별히 종무승을 보내 토의를 바치면서 황제폐하라 했던 사실, 중종 17년(1522) 세견선 허용에 관한 일본 사신의 상소문 에서 우리 성문신무(聖文神武)하신 금상황제 폐하(今上皇帝陞下)라 했다는 사실 등은 이러한 사실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본 블로그 글 "삼한(朝鮮)은 만방의 우두머리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49382"에서 성종 25년(1494) 유구국왕(琉球國王) 즉 중산부주(中山府主)가 조선국왕도 아닌 일개 예조대신(禮曺大人)에게 전하는 글을 보면이다. “유구국(琉球國) 중산부주(中山府主)는 조선국(朝鮮國) 예조대인족하(禮曹大人足下)에게 받들어 올립니다. 대체로 삼한(三韓)은 만방(萬邦)의 우두머리이니, 많은 백성들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덕택(德澤)은 사이(四夷)에게 두루 미치며, 인풍(仁風)은 이의(二儀)와 같으니, 크도다 만복(萬福)이 진중(珍重)함이여! "라고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s://han0114.tistory.com/17050727
 "에서 보면 일본이 '시나'라 한 것은 청나라를 말한다고 하였지만 위에서 신라(新羅)를 '시나'라 사실과 때문에 신라조선(新羅朝鮮)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1894년 5월(양력6월)이라고 적혀 있고 만국조천(萬國朝天)이 적힌 삽화를 그대로 인용하면 즉 세계 각국의 공사가 황제에 배알(世界各国の公使が皇帝に拝謁す)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만국조천은 누구겠는가.

또한 본 블로그 글 "다시 찾아보는 금단의 땅 코리아(A Forbidden Land Voyage to the Corea) https://han0114.tistory.com/17050536 "에서 유태인 장사꾼 함부르크(Hamburg)출신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이 본 조선(朝鮮)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The land of milk and honey)"이라고 표현한 사실도 있다.

 

2. 근세사가 주는 의혹들

 

 

 

 

실제로 우리역사실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 기록들만으로는 충분히 않다.

한반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외부세력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의한 전란 통에 화재로 인해 소각당하고 때론 약탈당했다고 하는 역사기술은 어디를 보아도 넘쳐난다.
근대사에서도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해군에 의해 역사기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의궤(儀軌)와 도서(圖書)가 약탈당할 때 가져가지 못한 나머지 사서(史書)는 무엇인지도 밝히지 못하는 상태에서 불타 없어졌다고 하며 더더욱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제(日帝)에 의해 병합되던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자그마치 근 1년(年)간 고문서와 고지도 등 50여종(種) 200,000권(卷)이 서울 남산에서 소각되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볼 때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213-BC206)로서 일제(서양상업연합)들이 두려워할만한 우리의 역사가 근원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렇게 수많은 도서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고 한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바른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놀라 자빠질 정도의 진실의 역사가 묻혀버린 것이 되며 지금 현재 글쓴이가 밝히고자 노력하는 일연의 핵심사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란 판단의 증거들이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란 추측만 할 뿐이다.

실제로 1년간 소각했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서들이 통째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고 그러한 구도 속에 현재 우리가 만난고 접하고 있는 역사가 창조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바보가 아니면 추정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러한 추단을 더 확실하게 하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하게 한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의해 어떤 역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한반도 역사라 할 때 이런 역사를 어떻게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과연 우리나라 역사가 단일체제인가, 다원적체제인가 하는 국가체제성격조차 판단할 수도 없도록 한 것은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규모자체를 알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어 역사전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7년 한겨례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워싱턴특파원이 메트로폴리탄 한국실 관람을 하고 난 소감을 말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중국관과 일본관에 비해 한숨 섞인 초라함을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사무라이 전시관까지 갖춘 널찍한 일본관 입구 통로에 옹색하게 자리잡은 한국실은 ㄱ자형 유리로 막은 벽면에 갓과 한복, 북한 화가가 그린 한국화 등 20여점이 전시물의 전부였다."라고 말하며 빈약한 한국실의 전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미국뿐만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슴아픈 이야기다.
생각해보라. 실제로 들어날 수 있는 역사를 깡그리 없애버린 그들이다.

세계3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치있는 국보급의 한국유물이나 진귀한 역사물품들을 그들 스스로가 제대로 알리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고 본다.

이와같은 행위가 미국인들에의해 중국이나, 일본보다 약소국이니 차별한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판단이다.
왜 그들이 스스로 숨겨진 역사사실을 왜 억지로 밝히겠는가.

또 생각해보니 어제 날짜 2019.08.14 자 국내신문등에서 19세기 프랑스 리옹 태생 사업가 에밀 기메(1836-1918)가 설립한 아시아 전역에서 출토된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기메 박물관(Musée Guimét)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 궁중 장식품으로 추정되는 반화(盤花) 2점과 목조여래좌상에서 직물로 짠 수정 염주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뉴스가 눈에 띄였다.

이 반화는 글쓴이가 보아도 정교한 공예작품임을 알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 없는 유물이며 반화 수반에는 금가루로 뒤덮인 고목이 꽂혔고, 뻗어 나간 가지에는 얇은 나무판을 오려 초록빛으로 물들인 잎들이 달렸으며 고목 주위에는 옥(玉)을 깎아 만든 난초와 콜라겐덩어리 교질(膠質:colloids)로 만든 꽃이 보인다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하니 우리나라에는 없는 삼한유물들이 유럽박물관과 미국박물관에서는 넘쳐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들이 우리 역사의 본래모습임에도 낯설어하는 웃지못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3. 한반도 역사가 무엇인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미국땅 전체를 한반도에 밀어넣고 궤 맞춘 것이다.

북만주까지 뻗어나간 고조선까지 이야기 한다면 남북아메리카대륙,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대륙을 전체를 끼워넣은 것과 같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러니 역사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요즘 시국에서 보면 한반도 역사의 이러한 불편한 오류가 낳은 폐해는 너무 심각하게 사회전반에 걸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는 것도 우리는 눈만 뜨면 목격하게 된다.

사회를 이끌 지도자나 지식인, 정치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변형 된 기형적인 형태로 나타나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든다.

이들은 친일파라고 하는 인사들로써 과거 부끄러운 것도 알고 창피스러운 것도 알아 가능하면 대중앞에 나서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 불문율처럼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저런 친일파들이 국민을 기만하는 것을 밥먹듯이 하고 너덜너덜하게 넝마게 되어버린 이데올르기를 이용하여 갈등을 부추기며 노골적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민족을 협박하고 핍박까지 하고 있는 작태는 실로 구역질이 난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이에 더하여 찌꺼지 같은 열도정치모리배를 추종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헛소리 망언을 옹호하며 국민들의 아픈 정서를 마구 헤집어놓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들은 일제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자기민족을 부끄럽게 여기고 하찮게 여기며 왜구시민이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때문에 일제를 추종하는 것을 넘어 또 다시 일제식민지 역사를 반복케 하려는 이완용이 같은 자들임을 금새 알 수가 있다.

이들이 소위 서양문물에 취해 허접을 떨던 왜구분신들이며 정체성까지 팔아먹고 민족을 구렁텅이속으로 몰아넣는 개돼지 같은 종자들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들이 설치는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볼 때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글쓴이는 애국자라 할 수없다.

하지만 역사를 통째로 서양일본세력들에게 빼앗겼다는 아픔만은 안다.

그리고 반드시 빼앗긴 역사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목숨까지 받칠 각오가 되어 있다.

빼앗긴 역사를 찾을 수 있는 국가가 어딘가.

바로 대한민국이 아니겠는가.

만약 외부의 적 특히 왜구로부터 실제로 대한민국이 무력 공격을 받아 국가가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이들 철면피 친일파들은 반드시 총부리를 우리나라  쪽으로 돌릴 역적분자들이며 어떤 식으로 든지 왜구쪽에 붙어 우릴 내부적으로 혼란을 불러 일으켜 쓰러뜨리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힘들게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찾기 이전에 이들을 경계하고 위험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글쓴이의 판단은 실제로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농단하고 빼앗은 일제는 지금도 존재하고 그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열도왜구정치모리배들임을 알  때 이들을 반드시 제거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한반도와 열도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조작된 역사가 실제존재한 것이 되고 그것들이 후세에 사실화하고 정당화하여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왜구노예신세가 된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까지 거대한 음모자가 지켜보고 있다면 우리입장에서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지만 제대로 노려 완성시키려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솔직히 역사전쟁은 우리 자손들의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왜소하게 만들 의도로 친일역사학자들은 반도역사, 이씨조선역사 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반도역사가 어떤 것인지 한번보자.

 

비록 5000년이란 긴역사를 가졌다고 하지만 한반도 역사가 흐르는 동안 언감생심(焉敢生心) 압록강 이북 대륙으로 진출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고 중국(中國)을 대국(大國)이라 하여 사대(事大)하면서 대대손손 때 맞추어 요구하는 조공(朝貢)도 마다 할 수 없었고 모든 문물과 문화는 수입하여 모방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종속국(從屬國)마냥 대국에게 제대로 항거 한번 못하는 나약한 임금과 줏대없는 신하들만 세공(歲貢)을 축내면서 그것도 모자라 나라 안에서는 시시때때로 파벌을 만들고 당파(黨派)싸움에 날 저무는 줄 모르는 부패한 관리들이 나라의 근간마저 해치며 오직 가난에 찌든 어리석은 백성들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백성이 무식하여 나라일에 무관심하면서 오늘날 굴욕적인 한반도 식민지역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고 친일학자들은 이렇게 당위성까지 이야기한다.

이러한 구도에 맞게 현재까지 우리에게 남겨져 정사라고 하는 역사사서 대표적으로 1145년 검은얼굴의 김부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본래 고려사를 없애버리고 고려역사를 조선시대사람인 김종서가 편찬했다고 하여 대충 절단하여 만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되어 세계유일무일한 왕조실록이라고 자랑하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그 외 선대(先代)의 시문에 대한 비평과 시화를 엮어 편찬한 시화집 등 잡서(雜書)들은 하나같이 위 구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 모여 바로 한반도 역사를 만들고 이것을 우리의 식민지역사라고 버젓이 가르치며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학 석사, 박사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안타까운 현실의 역사상황은 어찌 일반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대다수 한반도인들은 늘 상 우리의 역사는 조공(朝貢)의 역사이며 사대주의(事大主義),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만연한 역사이고 어느때도 침략을 받지 않는 날이 없는 피해역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면 일제가 한반도 역사를 우리에게 던져줄 때 우선은 일제 식민지정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했겠지만 영원히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없도록 만들고 더하여 피해역사 위해 뿌리깊은 노예근성까지 생성케 하면서 그들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고자 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한반도 인들이 이런 피해역사가 숙명적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것도 일제(日帝)가 뿌려놓은 치밀한 계획아래 소위 100교육지계라 하여 미래까지 계산하고 실행에 옮겼을 것이란고 판단된다.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반도에는 수많은 변형된 기형적인 친일파들이 기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반도 역사바탕아래 그들의 이질적인 지식자들의 출몰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진실된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서양문물에 몰입되어 알고 있는 그들의 이론 철칙 즉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Social Darwinism)에서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을 철저하게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왜구가 우리보다 힘이 강했으니 강한 편에 서겠다는 이야기다.

이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당연히 우리나라는 세계제1등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4. 삼한통합과 그 종주국

 

서문에서 이야기했다.

삼한을 통합한 신라가 근원도 없는 왜구에게 점령당할 군번인가.

소위 친일역사학자들은 이를 추종한다.

조선(朝鮮)은 중국(中國)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고 열도일본서기(日本書記:720)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소위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설(三韓征伐說)을 굳게 믿고 특히 한반도 경상도쪽에 쏠려 있는 신라(新羅)를 쳐서 점령했다고 헛소리까지 하면서 결국 삼한(三韓)은 왜구 종속국이라고 짖어된다.

이런 헛소리때문에 서문에서 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게 역사냐 쓰레기냐.

그것에 더하여 친일학자들은 일제식민지 기간동안 조선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던 것을 고깃국에 쌀밥을 먹게했다고 떠벌리고 있는 것도 마치 지금의 열도왜구정치모리배들이 하는 소리와 똑같다.

본래 조선인들은 헐벗고 굶주렸기 때문에 밥도 많이 먹고 일제가 조선인들을 먹여살렸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몇가지만 생각해보자.

일본인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조선과 대한제국을 왜 그토록 정벌코저 했을까.

중국 속국이 된 것이 그냥 미워서?

지금 왜구정신병자들처럼 혐한(嫌韓)을 그들의 전문인 성희(性戲)처럼 하고 싶어서?

다시 한번따져보자. 자원도 없고 산악이 70%차지하여 농사짓을 곳도 없는 한지(閑地)또는 휴간지(休墾地)와 같은 한반도가 무엇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 기어코 정벌하려했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중국의 속국이니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것이라면 곧 바로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고 대륙으로 치고 들어가 점령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반도는 그들 차지가 되는데도 그들은 기어코 조선과 대한제국을 정벌하려 한다고 떠벌렸다.

무엇때문에?

16세기 임진왜란이 발생한 시점까지 외국 즉 서양인들은 한반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 때 조선이나 대한제국을 정벌하고자 한 세력은 지금의 열도를 근거로 한 종자들이 아니란 말이다.

왜구들이 정조론이나 정한론을 떠벌린 것은 한반도와 열도 지형구도를 삼한 말한다면 그들은 정신이상자 아니면 전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중이 떠중이라는 이야기다.

일본은 해상무역을 본업으로 삼는 장사꾼이다.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없으면 이런 노림수를 처음부터 불필요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법칙이나 가치성에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얼빠진 인사들이 주워담는 것은 전부 거짓말만 주워담고 아는 것이 고작 거짓 역사사실 밖에 없으니 그런 소리를 한다하겠지만 역사를 보는 눈이 그 정도라면 더 이상 대중앞에서 잘난척하고 떠 벌리지 말하야 한다.

장사꾼이 왜 쓸데없이 감정적으로 일을 그리치겠는가.

서문에도 알기싶게 언급한 것처럼 신라가 그들을 포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은 깡그리 뭉게버리고 일제(日帝)가 만든 한반도 지형에 맞게 헛소리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알기는 알되 제대로 모르는 반풍수라는 소릴 들을 수밖에 없다.

신라가 중국이니 마니보다도 김부식이가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삼한을 선진문물을 보유한 선진국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지만 그조차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국을 모계로 하다기에 자주성이나 주체성을 상실한 이야기임은 더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체제내 혼란이 가중될 때 언제나 통합에 이르게 하는 삼한의 뛰어난 선견지명과 그에 따른 선진문물을 서양일본으로 전수하였다고 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5세기경 신라(新羅:AD57-AC935)는 오카야마(岡山, Okayama)에 제방과 성()을 쌓는 축제술(築堤術)을 전수했고 더하여 신라인 목수 저명부(猪名部)가 배만드는 조선술(造船術)을 전수한 역사는 그들이 고마워해야 할 역사가 아닌가.

이런 문물 전수가 왜 그들에게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지 다음의 설명을 보자.

그들이 나무가지 울타리의 담을 삼아 경계를 하다가 적으로부터 침략에 대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성을 쌓는 기술을 전수한 것은 그들에게 최대한 방어력을 갖출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존속성의 문제가 아닌가.

물론 한반도 역사나 일본서기에서 축제술이라 하니 단순하게 제방쌓은 기술이라 하여 하찮게 여기지만 실제로 그들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성을 쌓게 하고 전쟁에 대비케 하였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역사가치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삼한(三韓)주위만을 배회하고 쓸데없이 노략질하지말고 스스로 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해상거래행위를 하도록 배만드는 기술을 전수한 것은 신라가 어줍잖아 이런 기술을 전수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왜구들을 계몽시키는 차원이며 선진문명을 전수하는 중국이라는 천자의 나라 신라가 할 의무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를 만들게 하여 신라를 침략하게 할 정도로 신라인들이 바보란 말인가.

말 같지도 않은 잡소리만 해되고 있으니 한반도 역사학자들은 반성을 해도 많이 해야 한다.

삼한정벌설이라는 것은 애초 근거도 없은 그들만의 역사 만들기에서 동원된 허구이이고 조작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신라의 배려에 의해 15세기부터 해양을 누빌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유민들에게 통합한 신라나 승계한 고려가 땅을 떼어내어 백제유민들이 생활할 수 있겠금 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모른다.

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https://han0114.tistory.com/17050776 "에서 밝혔지만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新羅,B.C57~A.D935) 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오늘날 에스파니야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떼 주었다고 한 사실과 페르난도는 고려시대의 송조(宋,960-1279) 영종(英宗,재위:1063-1067)과 동일한 계보라고 밝힌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에스파니아를 송나라와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은 남송이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여송(呂宋)이었고 이 여송을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백제유민이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의 국가를 가지지 못했던 유민으로써 바스크족이라고 한다.

그들이 삼한에게 적개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16세기에 절정이 되게 한 신구종교전쟁, 종교적인 갈등의 문제가 확대되면서 기존 보수종교와 충돌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왜구가 누군인가

바로 서양일본해양세력들이며 엄격하게 따진다면 백제유민들이다.

그들은 하나의 체제인 삼한통일국가체제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세상을 갈구했고 경찰경비나 제재(制裁:sanction)가 덜한 알려지지 않는 도서(島嶼)나 거친바다 해양 떠 있는 배에서 그들의 삶은 지켜졌다고 알려진다.

이들을 우리는 해적이라고 한다.

현재 열도왜구들은 서양인들이 이렇게 저렇게 조작한 역사 위에 앉아 노닥거릴 수 있다지만 그들은 이런 역사조차도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밖에 없는 역사좀비신세 말고는 더 언급할 것이 없는 종족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엉터리 역사만을 믿고 끝없이 왜구 엉터리 지식자가 양산되는 역사속임수는 체바뀌돌듯하면서 속으로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곪아가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종속국이란 프레임은 우리 역사에게 큰 멍에를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

신역사개념으로 간단하게 따져보더라도 이러한 허구의 사실은 금방 탄로가 난다.

러시아 수학자 겸 신역사연구자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주장한 중국(中國)이나 아랍(ALAB)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 사실에서 중국역사는 물론 아랍이나 유럽역사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중국이나 유럽 즉 아랍역사를 맹신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본 블로그에서 몇번이고 말하고는 것이지만 유럽역사는 아랍역사를 타고 생성된 것이다.

이것은 백제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1540년 바스크(Vasco)귀족 가문 출신인 로욜라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1491-1556)에 의해 생성된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하나의 체제 삼한역사를 농단하기 위해 유럽역사 만들기 위한 전초적인 바탕깔기 작업에 일환으로써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다.

그렇다면 식민지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朝鮮)이 중국에 종속국이라고 하는 사실은 명백한 거짓주장이 아닌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국의 속국이라는 주장은 어떤 근거로 하는 말인가.

물론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삼한정벌설도 그런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므로 삼한이 일본 종속국이라는 따위는 설명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같은 주장이며 오직 로욜라 이냐시오 같은 음모자들에게 삼한을 대칭한 일본역사가 존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날조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역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연결되며 귀족과 다이묘를 호위하던 무사계급집단임을 알 수가 있다.

일본역사에서 발생되었다고 하는 정조론이란 따위의 주장은 그들이 가진 열등의식에 대한 발로이며 이를 해소할 곳을 찾던 중 피해의식의 원인이라고 믿던 조선(朝鮮)의 역사를 축소시켜 모든 화살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5. 조대(朝代)와 조정(朝廷)

 

신중국자료를 보면 중문의 조(朝)는 '아침'이라는 의미와 '금일'이라는 의미가 있다 했다.
정치적으로 정권을 잡은 자의 정권이라는 뜻과 왕조가 말하는 한 개의 황실가족, 본래의 의미로 파생된 뜻인데 반대되는 자는 야(野)라 하였다.  

臣前蒙陛下問及本朝所以享國百年、天下無事之故。等皆屬之。東漢末年之前,只有被視為正統之天下共主才敢稱朝。

위 글을 해석하면 "신하들 앞에서 몽고폐하(蒙皇)가 묻길 본조는 군주(제후:享國百年)가 재위(在位)한 백년이다. 천하가 무사함이 오래되었다. 이러함은 동한말년(東漢:25-220)전과 같아 오로지 정통성으로 천하가 함께 높이는 주인을 보고 조(朝)라 칭해야 한다."라고 했다.

조(朝)를 취할려면 정통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朝代」則指某「劃時代政權」執政之時代,可用做劃分該歷史時代之稱呼,可以是一個或多個政權之集合。例如,「魏晉南北朝」明顯不是一個政權,而是由三國、晉朝、南北朝等「子朝代」組成的複合詞,而南北朝又分南朝與北朝,各自皆自稱正統,南朝的宋、齊、梁、陳則各別都是以「朝」為劃分標準。春秋和戰國則不是朝代,而是東周朝的兩個時期,因為當時諸侯多名義上奉周天子為共主。
또 조대(朝代)를 말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권이 집권하는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한 개 또는 여러개의 정권을 아우를 수 있는 역사시대를 칭할 수 있다 하였으며 예를들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는 분명히 하나의 정권이 아니라 삼국, 위, 진, 남북조등 자조대(子朝代)로 이루어진 복합어인 반면에 남북조는 남조와 북조로 나누어져 각각 정통성을 자칭하며 남조는 송(宋:420-479) 제(齊:479-502)
양(梁:502-557), 진(陳:557-589)은 각각 조(朝)를 기준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은 조대(朝代)가 아니며 이것은 동주조(東周朝:BC770-BC256)는 두 개의 시기이며 당시 제후들이 주천자(周天子)를 명목상 공주(共主) 즉 주변의 나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로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인독일계, 중국학자이며 역사학자인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魏復古:Karl August Wittfogel,1896-1988)은 하나는 한족이 세운 조대(朝代)를 중원왕조(中原王朝)라 하고, 다른 하나는 사방의 북방민족인 소수민족이 세운 조대(朝代)는 또 침투 왕조(滲透王朝)와 정복 왕조(征服王朝)로 나뉜다고 하였다.

사실상 이사람은 漢族向為少數民族,早已被眾蕃包圍消滅 한족(漢族)이 주변의 여러 번(蕃)에 포위되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고 四千六百年歷史當中漢族被蕃族統治四千兩百年 "4,600년 역사에서 한족이 번족의 통치를 받은 것이 4,200년이라 하여 한족이 통치한 시간은 겨우 400년이다"라한 사실도 무시한 것이다.

근원적으로 한을 종족이나 국가명이 아니다.

한(漢)이란 글자가 옥편에는 국명(國名)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오로지 물이름(水名)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한은 한수(漢水)라 하는 것으로 한수는 바로 조선의 한강(漢江)을 말한다.

그에 주장대로 중원왕조에는 화하왕조(華夏王朝)라 하는, 진(秦), 한(漢), 당(唐), 송(宋), 명(明)이며 정복왕조(征服王朝)는 요조(遼朝), 원조(元朝), 금조(金朝), 청조(清朝), 침투 왕조(滲透王朝)는 동한(東漢:25-220)말부터 서진(西秦:385-431)시기까지 흉노(匈奴), 갈(羯), 강(羌), 저(氐)와 선비 (鮮卑)등의 종족은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에 있는 요새로부터 이동하여 서진(西晉:265-316)말년 팔왕의 난(八王之亂:291-306)을 타고 중원에 국가와 조대(朝代)를 건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조대들은 실제로 스스로 도읍을 정하고 그들이 천자인 것처럼 하지만 신중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이라고 하는 천자가 따로 존재했다고 할 때 통치자는 바로 삼한연합체에서 지명한 조대이기 때문에 그곳에 천자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명나라가 도읍을 둔 남경을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강남의 중심지 남경의 정치, 군사적 지위로 강남의 돈과 양식을 통제했다고 한다.

때문에 도읍지는 모든 왕조가 그런 것처럼 중앙정부가 들어서는 곳이다.

마땅히 조선천독(朝鮮天毒)이 중천축국(中天竺國)을 지배하는 것처럼 도읍지에 삼한연합체제가 존재했다고 해야 맞다.

중원황조라고 하는 당(唐朝代)은 신라통치국체제이고 송(宋朝代)은 고려가 통치국이었으며 명(明朝代)은 만리지국 고려와 병립한 조선체제라고 할 때 모두 삼한통치지배체제임을 알 수가 있다.

최두환선생의 글에서 보면 "한고조의 아들이 '영(盈)'이며 그가 한(漢)나라의 제2대 황제 '혜제(惠帝)'인데 이 혜제는 어려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고 그 어머니는 한고조 류방의 아내가 바로 '려후(呂后)'이다. 려후의 노력은 혜제를 조선왕(朝鮮王), 즉 그 원문은 "King of Tchaossien"으로 만들었다 하여 혜제가 조선왕이 되었으니[漢]=[朝鮮]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며 '漢'은 '漢朝鮮'이라 했다.

즉 신중국 학자들이 중원왕조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한(漢)나라? 한조(漢朝代)의 혜제가 조선왕(朝鮮王)이 되고자 그의 어머니가 노력하여 결국 조선왕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중원왕조는 직접통치구역을 정하고 책봉(册封:봉작(封爵행위)을 하며, 굴레(羁縻) 즉 속박하여 제후국을 세우며, 토사(土司) 세습족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스리는 것으로써 변강(邊疆), 이것을 중화조공체계(中華朝貢體系)라 하여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

때문에 19세기에 일본내에서 정조론(征朝論)이 생성되었을 때 스스로 조정(朝廷)을 공격하는 것이라 하여 그들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반대하였고 정조론 거론자체를 거북스러웠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조선(朝鮮)을 정벌한다는 주장자체가 정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불경(不敬)스럽다는 이야기다.

이런 사실을 철면피 친일파들의 굳어진 뇌를 열어 반드시 새겨넣어야 할 역사다.

아다시피 1931년 국민당 소속 장려화(臧勵龢)등이 편찬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조대명(朝代名)이란 단어가 매우 많이 나타난다.

위 신중국자료에 몽골황제가 스스로 후국이라 한 것처럼 현(縣)·군(郡)·부(府)가 나라[國]였고 제후의 나라 후국[侯國]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오히려 이것은 유럽의 도시국가체제를 설명하는 것이 되며 즉 만몽(滿蒙) 정복왕조는 그 지배자(统治者)자신을 중심으로 한 다원적 세계(多元世界)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어쨌던 조대(朝代)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정치체제에서 일원(一元)사회가 아니라 다원(多元)사회체제임을 알 수가 있고 이것은 바로 다인종, 다언어, 다종교, 다민족문화까지 포괄한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반도 역사에서 우리나라를 배달민족이니 단일민족이니 하는 따위는 역사를 축소시키고 왜소하게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삼한이 강한 것은 절대 단일, 일원, 단원적인 체제가 아닌 다원적체제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영토와 거대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유럽역사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지만 그들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봉건주(封建主)나 영주들이 모두 하나의 역사로 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써 영지(領地)를 받은 귀족도 후작이라고 하지만 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https://han0114.tistory.com/17050796"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후국(侯國)이라 하는 것은 주군(主君)을 후(侯)라 칭(稱)하는 유럽, 즉 구라파의 작은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곳의 작위를 받는 귀족이라 하였으니 수많은 소국들은 하나의 체제 아래 공존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다.

하여 삼한(三韓)의 한(韓)이 바로 만소봉(萬所封)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한자(漢字) 한 자의 조대명(朝代名)은 중앙정부 조정(朝廷)이며 삼한천자가 대치(代置)한 또는 조치(朝置)한 조명(朝名)으로 풀이되어야 하며 곧 중원왕조, 침투왕조, 정복왕조라 칭하던 周, 殷, 商, 夏, 晉, 漢, 隋, 唐, 金, 遼, 元, 明, 淸 은 부족, 부락연맹의 명칭, 지금까지 창건자가 본래 사용하던 왕이 봉하여 내려 준 봉호(封號) 또는 작위(爵位), 창건자의 본래 정권통치하던 지역 명칭, 원래 종족(宗族)관계, 성(姓)과 본(本)이 같은 겨레붙이(같은 조상에서 태어난 자손), 그리고 좋은 속뜻을 담고 있거나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명칭등을 사용하게 했음도 알 수가 있다.

조정(朝廷)은 바로 삼한천자가 통치하는 중앙정부이다.

그렇다면 조선행정구조와 중앙정부행정구조는 어떻게 다른가.

헌납(獻納)이란 관직은 조선시대 임금의 처사에 대해 충고하며 사회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건의하는 일을 맡은 관청의 관직으로 고려시대 헌납(獻納)과 같은데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소속으로 정5품 (正五品)관직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명대(明代)관직에서 육과급사중(六科給事中)이라는 것이 있어 도찰원(都察院)소속으로 조선과 마찬가지로 황제를 보좌하여 조칙을 처리하고 6과(科)사무를 관장하였는데  6과(科)를 나누고 각 과(科)에 도금사중(都給事中)한 명씩 두었고 품계가 정7품(正七品)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품계가 같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이 급사중은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특권을 인정받아 실제적으로는 권한이 컸다고 알려진다.

조선임금이나 황제를 가깝게 보좌하고 보필하는 직무가 같은 헌납과 육과도급사중에서 이상하게도 품계가 2품 차이가 난다.

여기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중국이란 개념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본 블로그 글 "당리화(棠梨花)와 압록강 https://han0114.tistory.com/17049507"에서 말하길 황제가 있는 명조(明朝)와는 달리 조선(朝鮮)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관직인 재상(宰相)을 두었는데 즉 상(相)은 정1품(正一品) 삼의정(三議政)이며, 재(宰)는 정3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상으로서 마찬가지로 임금을 보필하여 국무를 처리하던 관직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한반도 역사에서 중국이라고 하는 명조가 오히려 조선보다 품계가 아래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모든 행정적인 우위는 명이 아니라 조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삼한조선 황제를 섬긴다고 하여 그것을 사대주의라고 하면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명의 품계가 18위 품계인데 반해 조선시대 제24위의 품계(品階)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6품계가 더 많다.

품계가 더 많다는 것은 권위가 작다고 할 수 없고 업무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이 존재했다면 18품계에 비해 조선이 24위 품계를 가졌다는데 이의를 걸고 수정을 요구하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동월의 품계를 과(科)의 정7품(正七品)수장인 도급사중(都給事中)으로 보면 부사로 따라간 왕창(王敞)은 6부 중 공과(工科)의 종7품(從7品)인 우급사중(右給事中)신분임을 알 수 있어 비록 황제의 선생으로서 시강(侍講)한 사실이 있다지만 아무래도 조선 헌납에 비해 품계(品階)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같은 임금과 황제를 보조하는 직책에서 이런 품계차이는 실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한어자료에도 과(科)의 정7품(正七品)이 6부의 문서를 검토했다고 하고 각 부의 정책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에 비해 하급 품계라는 것은 많은 것을 의심케 하는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정리를 해야 하는 것은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중국(中國)은 바로 조정(朝廷)을 뜻하는 것으로써 허가업무를 처리하는 관직이 몰려 있거나 해외 모든 무역거래 사무를 총괄하는 곳이라고 풀어 볼 수 있다.

그곳을 서양해양세력들은 무역거래의 편의성을 들어 중국(中國)이라 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에 더하여 역사에 능통한 모택동이 쓴 모전(毛傳)에도 "中國은 京師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오늘날 거대하게 커져버린 신중국 생성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19세기초 잉글랜드(England)가 청정부(Qing Government)라고 호칭한 사실도 청조대 즉 조정(朝廷)를 뜻하며 정치적으로 중앙업무의 관계되는 현대 정부(government)개념 즉 행정관리 만다린(滿大人:मंत्री, mantri)들이 거주하는 지역개념으로 보아야 옳고 조(朝)라 불린 조선(朝鮮)품계 아래였던 것은 조선 행정업무체계 내에 속해 둔 것이 아닌가도 한다.

 

6. 기록으로 본 만리지국의 조선강역

  

삼한역사기록을 먼저보자.

 

기언(記言) 35권 외편 / 동사(東事) 4

高麗幷有三韓地分爲關內中原河南江南嶺南嶺東山南海陽朔方浿西十道後改楊廣慶尙全羅交州西海東界北界我太宗十三年定京圻慶尙全羅忠淸江原咸吉平安黃海八道縣因革不同山川界別邑里區分百里不同俗千里不同謠南方多鳥北方多獸風氣使然也山峽之俗樸騃機利之民儇急習性然也東方偏薄之氣噪擾無常心大體皆然

고려가 삼한 땅을 모두 차지하여 관내(關內), 중원(中原), 하남(河南), 강남(江南), 영남(嶺南), 영동(嶺東), 산남(山南), 해양(海陽), 삭방(朔方), 패서(浿西) 10개 도()로 나누었다가 뒤에 양광(楊廣), 경상(慶尙), 전라(全羅), 교주(交州), 서해(西海), 동계(東界), 북계(北界)로 고쳤으며, 우리 조선 태종 13(1413)에 경기(京圻), 경상(慶尙), 전라(全羅), 충청(忠淸), 강원(江原), 함길(咸吉), 평안(平安), 황해(黃海) 8도(八道)로 정하였다. (), (), ()의 변천하여 온 과정은 같지 않다.

특히 위 관내, 중원, 하남, 강남이라는 지명을 보면 현재 중국지명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조선시대부터 두었다고 하는 경기(京圻)이다.

이 기(圻)는 땅의 경계, 지계(地界)라 하는 의미로 왕도 즉 경사가 있는 주위로 오백리 이내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시대때는 없는 행정관할 명칭임을 알 수가 있는데 즉 고황제(高皇帝) 즉 고려황제가 있는 곳을 구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어보면 산천의 경계가 뚜렷하고 읍리구분이 되며, 백리마다 같은 풍속이 없고 천리마다 노래소리가 다르다. 남방에는 많은 새가 있으며 북방에는 많은 짐승이 있다. 예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나 습관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산과 골짜기가 속되어 순박하고 어리석고 이기에 재빠른 사람은 습성이 그러하며 동방이 풍기얇고 박한 것은 소란스러워도 마음에 두지 않기에 대체로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위 기록은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시문집 기언집의 동사편인데 '高麗幷有三韓地' 고려가 삼한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는 기록에 나타나는 이야기다.

특히 고려는 삼한(三韓)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을 전부 합쳐 통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산천의 경계가 뚜렷하고 읍리구분이 되며, 백리(百里)마다 같은 풍속이 없고 천리(千里)마다 노래소리가 다르다고 한 것을 오늘날 한반도로 해석한다면 역사공부를 다시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바로 하나의 민족이 거주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족, 그리고 다문화적인 것으로써 언어와 종교가 다른 다원적 사회체제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세계전체를 통일한 삼한의 통치국 고려(高麗)를 서양역사에서는 일찍부터 코리아(COREA)라고 하였던 것에서도 보면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https://han0114.tistory.com/17050771" 에서 밝혔듯이 7세기 독일계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시도르(Isidore:560-636)에 의해 저술된 어원백과사전(Ethymologiarum sive originum)에 갈리시아인(Galician)들이 켈트(Celts)혈통의 갈리아와 같은 흰 피부색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본 블로그 글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 https://han0114.tistory.com/17050378"에서 주장하였듯이 갈리아(Gallia) 골(Gaul)은 바로 고구려, 고로(高盧)라 한 사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백인이라고 알려진 갈리시안이나 포르투갈인이“CORREA”란 가문명(家門名)을 쓰면서까지 어쨌던 전통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생각할 때 중요한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리고 전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주(州), 군(郡), 현(縣)을 제후의 나라 후국[侯國]이라 하고 후국(侯國)이라 하는 것은 주군(主君)을 후(侯)라 칭(稱)하는 유럽, 즉 구라파의 작은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였다는 감안 할 때 (), (), ()의 변천하여 온 과정은 같지 않다는 것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이야기다.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Marco Polo,1254-1324)1271년부터 1295년까지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수록했다는 동방견문록 [東方見聞錄]에서 이 "COREA" 이름이 발견된 것은 16세기초까지 스페인을 통일한 카스티야 왕국의 핵심부 즉 성지(城地)라는 뜻의 카스티야(Castilla)왕국(Kingdom of Castile:10651230)이 있었던 곳이라 하였다.

때문에 서양해양역사에서도 주류였고 스페인 핵심역사의 카스티야역사에 "코레아(COREA)"가 차지하는 비중은 의미가 클 수밖에 없고 다문화적인 핵심적인 이야기가 의심을 가질 수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카스티야 자료에서 말하기를 “Corea”라는 성은 아주 오래 되었으며 이들이 신대륙에 건너간 것도 1534년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난 후이며 스페인의 ‘COREA’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본격적으로 정착한 시기는 19세기때라고 하지만 모든 자료에서 이미 그 이전부터 “COREA” 이름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북아메리카대륙 정착문제도 그 이전 시기에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영어자료에 보면 "CORIA 페밀리명"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서기1100년 이전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것이 가문(페밀리)이름으로의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기에 이루어졌으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시작한 것은 1500~1600년 사이로 알려지는 것으로 이 시기는 신대륙발견(1492~1504)과 연결되고 있으며 "CORIA 페밀리명"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처음 정착한 것도 이 시기라는 사실이다. 

즉 고려의 유민들 속에는 여러 민족이 있었고 이들은 바다를 통해 이리저리로 이동이 가능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래 게시한 수산집(修山集)14 의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의 설명내용을 먼저 보자.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는 우리의 강역에 대한 지리학적 변론(辯論)에 관한 글로, 고대 옛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희망이 담겨 있다. 삼한(三韓)의 지계(地界)를 획정하여 설명한 삼한지방변[三韓地方辨], 단군(檀君)이래의 옛 지명(地名)들을 현재의 위치로 비정하여 설명한 동방지명의변[東方地名之辨], 명(明)나라 때 조선(朝鮮)을 지방 삼천리(地方 三千里)가 아니라 육천리(六千里)라고 한 것이 옳다고 논변한 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 세조 때 명나라의 청병(請兵)에 응해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웠던 어유소(魚有沼)가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인 이곳을 우리나라에 떼어달라고 요청하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해 하며 쓴 의여어유소장군서[擬與魚有沼將軍書], 세종 때 육진(六鎭)을 개척한 김종서(金宗瑞)가 두만강(頭滿江)이 아니라 선춘령(先春嶺)까지를 국경으로 삼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해 하며 쓴 의여금공종서서[擬與金公宗瑞書]등과 권2에 서문(序文)이 실린 수경[水經]이다. 만필(漫筆)은 성몽정(成夢井),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왕수인(王守仁), 명(明) 태조(太祖), 명(明) 영종(英宗) 등에 대한 짤막한 인물평, 자경(自警)의 뜻이 담긴 글, 중국에의 불교(佛敎)유입을 논한 글 등이다. 또 정주(程朱)가 부식(扶植)시킨 정학(正學)을 육(陸)ㆍ왕(王)의 무리가 어지럽혔고 이에 경도되는 오당(吾黨)의 인사들이 있음을 애석해 한 글도 있어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인 시각을 살펴볼 수 있으니, 저자의 학문이 양주음왕(陽朱陰王)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일면으로도 보인다. 끝에 인시도심도(人心道心圖)와 도설(圖說)이 실려 있는데 도표를 위해 목판(木板)으로 인쇄되어 있다.

 

수산집(修山集)卷之十四

東國輿地雜記

1 三韓地方辨

2 東方地名之辨

3 朝鮮地方說

4 擬與魚有沼將軍書

5 擬與金公宗瑞書

6 擬丁卯後與執政書

7 水經

 

修山集卷之十四 / 東國輿地雜記(7항중)

3.朝鮮地方說

中原廣袤歷代史皆從邊角言之如唐之東西以遼東安西言南北以雲中交趾言若從正東正西言則當言沂海秦鳳正南正北則當言幽州廣州皆不滿萬里矣我東地方正東正西乃以寧海豐川正北正南乃以江界海南言皆不滿三千里皇朝萬曆年間十三省科道疏言朝鮮大國地方六千里東人皆以爲華人未諳外國地界然東人自不知而華人乃知之何者盖自義州楊下口至江界府一千八十里自江界至古茂昌四百五十里至咸鏡道三水府二百二十五里至甲山府六十里自甲山府至虗項嶺二百九十里虗項至茂山府二百二十里茂山至富寧府七十五里富寧至東海八十三里統而言之則東西廣爲二千五百二十八里穩城爲極北自豆滿江至京城爲二千一百六里海南爲極南自南海上至京城爲一千七十三里統而言之則南北袤爲三千一百七十九里而我國廣袤合爲五千七百七里擧大數則可以言六千里地方而又况自海南越海九百里至濟州州南至海又一百二十里則並水陸路爲四千一百九十九里所謂六千里又不足言矣然則科道所論果不爲無據而向所謂東人自不知者不其然乎

 

자 그럼 한번 세밀하게 들어가 보자.

[東國輿地雜記:해석]중원은 넓디넓고 역대사 모두가 가장자리(귀퉁이) 변각(邊角)이라 하였다.

이 귀퉁이라 한 묘사는 많은 혼란을 부추긴다.

 

 

 

수학적으로 보면 가장자리(edge)는 둘레나 끝에 해당되는 부분, 어떤 사물의 바깥쪽 경계에 가까운 부분을 말한다고 되어 있고 2차원 도형의 둘레는 도형의 가장자리또는 경계의 길이를 말하고 보통 둘레는 각 변의 길이를 모두 더해서 계산하고 단순한 폐곡선(閉曲線)의 둘레는 그 길이로 측정한다라고 정리되어 있다.

어찌되었거나 가장자리라 하는 변각(邊角)은 바깥쪽의 경계를 말하는 것인데 폐곡선을 그리면 처음과 끝이 열려있지 않고 맞닿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약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라면 그 대륙 구석구석을 귀퉁이로 보고 폐곡선을 그리는 선의 길이 전체를 변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귀퉁이라는 변각이 말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대륙전체를 말하는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긴가.

 

본격적으로 조선지방이 육천리라는 사실을 알아볼 차례이다.

[東國輿地雜記:해석]()과 같이 동서(東西)가 요동(遼東)에서 안서(安西)라 하였고 남북(南北)은 운중(雲中:평안북도 운산(雲山)의 옛 이름)과 교지(交趾:宋朝时始称安南)라 하였으며 만약 정동과 정서를 말한다면 곧 당연히 기해(沂海)와 태봉(秦鳳)이며 정남과 정북은 유주(幽州)와 광주(廣州)인데 모두 합해 만리(萬里)가 못된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만리(萬里)라 한다.

한반도에서 무슨 놈의 만리란 말인가.

북아메리카대륙 동서길이가 만리(萬里)이다.

문제는 영토가 당()과 같아 동서가 요동(遼東)에서 안서(安西)라 하였다.

(唐:618-907)은 전자에서 우리가 공부했듯이 삼한천자가 명명한 조정(중앙정부)을 대신한 조대명(朝代名)이라 한 사실이다.

조대명의 당은 어떤체제의 중앙정부인가.

바로 신라(新羅:Silla,BC57-AC935)이다.

일본에서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한당(韓唐)이라 했다.

한(韓)은 황(皇)인데, 황은 대(大)며, 대는 일(一)인데 우리가 대한이라 하는 것은 크고 또 크다는 의미이다.

한(韓)을 만소봉(萬所封)이라 한 것은 만군데나 봉했다는 뜻이다.

봉은 흙을 수북히 모아 나무를 심은 모양이라 나무를 심어서 국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토(領土)의 뜻이며 이는 천자가 사방오백리, 천리의 직할지 이외의 만군데(萬所)토지를 나누어주고 제후를 세우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한(韓)은 천지사방(天地四方)에 해가 비추이고 가죽(韋)옷을 입은 사람이 서있는 형상이라 했고 고대(古代)에 가죽옷을 입은 사람은 군인 이었거나 사냥에 종사하는 부류의 민족, 유목민의 후예일 것으로 생각했다.
당(唐)은 길, 도로(道路), 통로(通路)를 말하고 크다, 넓다 의미도 있다.

대한히 포괄적인 국명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에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요동(遼東)사이에 거리가 얼마인가.

위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충재어봐도 4,000km, 10,185.리(里)이다.

()을 동아시아역사에서 수(隋:581-619)와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907-979)사이에 존재했던 중국의 왕조라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오래 존속한 신라와 고려(高麗:918-1392)는 그것의 잣대에서 빠진 것은 한반도 역사만들기에 일환임을 알 수가 있다.

 

 

 

남북은 어떤가.

위 지도를 보면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에서 북쪽 운중(雲中:평안북도 운산(雲山)의 옛 이름)과 남쪽의 교지(交趾:宋朝时始称安南)라 하는데 조선지방에서 남북은 운중과 교지라 했다.

도대체 먼저 교지(交趾)가 어딘가.

지금의 베트남 북부 통킹(Tonkin), 하노이 지방이며 옛날에는 남월(南越)이라 한 곳이라고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프랑크족들의 본거지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해안지역이다.

북부지역의 운중(雲中)은 평안도 운산(雲山)이라고도 하며 현재는 동아시아대륙 내몽골지역의 운중도호부(雲中都護府)로 지정되어 있다.

지명의 운중이나 운산은 거대한 수원을 바탕으로 하는 늪지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구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내몽골지역은 그야말로 건조지대이며 안개가 피어 오를 정도의 수원지역이 전혀아니기 때문에 운중이나 운산 지명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동아시아대륙역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운중도호부와 남월 교지와의 거리가 약 2,600 km, 6,620.리(里)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조선지방이 육천리라 하는 것과 동일한 해석이다.

위 게시한 변각(邊角)지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영역으로 북쪽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중남부 푸에블라 주 남서부의 마타모로스(Matamoros)까지의 길이 2,552 km와 거의 비슷한 거리임을 알 수가 있어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東國輿地雜記:해석]황조(皇朝) 만력년간(萬曆年間) 6과 급사(六科給事) 감찰어사가 소()하길 조선은 대국(朝鮮大國)이며 지방 육천리(六千里)라 하였는데 동쪽사람(東人)들은 모든 화인(華人)들이 외국지계에 어둡다고 여겼으나 오히려 동쪽사람들이 모르고 화인(華人)들이 주장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인데 왜 그럴까? 되묻고 있다.

즉 동쪽사람은 조선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러나 만리인가 육천리인가 하는 물음이라면 솔직히 육천리라고 주장하는 화인(華人)보다 만약 만리라고 주장하는 동인(조선인)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친다.

六科,中國古代朝廷的中央機構之一,即吏科、戶科、禮科、兵科、刑科與工科。在明朝,在體制上即為監察約制吏部、戶部、禮部、兵部、刑部、工部各部會的制衡機構。

위 문장에서도 보면 조대명(朝代名)인 명(明) 조정(朝廷)에서 6과(吏科, 戶科, 禮科, 兵科, 刑科與工科) 정칠품(正七品) 급사(給事)는 감찰업무를 관장하는 관리며 조선은 대국[皇朝萬曆年間十三省科道疏言朝鮮大國]이라 하면서 지방 육천리라 하였다는 것은 바로 남북의 길이가 6000리(里)를 말하는 것이므로 어쨌던 명조관리가 조선지방의 거리를 6000리()라 정리한다는 것 자체만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상식(3000)과 절대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동쪽사람의 동인(東人)은 누굴말하고 화인(華人)은 어떤 민족을 지칭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성된다.

사실 당시에 살아보지 않았던 글쓴이 입장에서 여기저기 기록만을 근거로 이를 현실역사로 받아들이면서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래 게시한 김창집의 시귀에서 보면 동귀(東歸)라 하였는데 보통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해석이 되지만 이를 일반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임을 알기에 계주도중(薊州途中)이란 제목과 마찬가지로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계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즉 만리고려 나그네가 고향으로 간다고 한 사실에서 동쪽에 있는 중국의 수도 연경과 계주는 만리고려 소속의 것으로 인식되며 곧 중국인 즉 화인은 고려인이 아닌가 하는 사실까지 와 닿는다.

우리가 흔히들 동국조선(東國朝鮮)이라 하는데 이는 또 거대한 만리조선을 축소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으로 조선은 동국으로 구도화했다는 의심 또한 많다.

명조(明朝)의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睠彼東國 朝家外藩” 살펴보건데 저편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라고 한 사실도 그렇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동국이란 표현도 그렇다.

그렇지만 본 블로그 글 본 블로그 글 "만리조선(萬里朝鮮) 제비노정기와 제비(家燕 : Barn Swallow)
https://han0114.tistory.com/17049629 "와  연(燕)나라와 제비(barn swallow) https://han0114.tistory.com/17050800 "에서 연경(燕京)이 있다는 연(燕)나라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연경도 동쪽이며 조선도 동쪽이다.

화인이라고 구분될 수 있는 구도가 없다.

화인(華人)은 보통 한반도 역사나 동아시아역사에서 중국인(中國人), 또는 한인(漢人)이라고 풀이하는데 빛나다, 꽃피다, 아름답다, 화려하다 등의 의미말고 희다(白)와 흰가루(白粉)의 뜻이 있어 만약 사람을 말할 것 같으면 얼굴이 하얀, 백인(白人:Caucasian)을 나타내는 단어일 가능성도 있다.

영조(英祖)시대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 하여 화인록(華人錄)에 기록하여 우대한 사실과 고종 18년(1881)승정원일기에 보면 어머니가 풍산홍씨(게르만)인 우부승지 정원하(鄭元夏,1855-1925)가 이르기를 황성(皇城)에 와서 머무르는 양인, 왜인 그리고 화인과 뒤섞여 살고 있고 보이는 양관(洋館)이 곳곳에서 웅장하고 화려하여, 높은 누대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 형세를 알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동서양인, 왜인(서양해양세력), 화인(華人)과 구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1881년부터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실상 조선왕조실록정본(朝鮮王朝實錄正本)에서 빠진 고종실록(高宗實錄)은 철저하게 수정, 교정된 것으로 서양일본역사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사실상 화인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쪽사람을 동국조선인으로 한정하고 화인(華人)을 중국인이라고 하면 고려인은 갈 곳이 없어진다.

고려는 이미 망한 나라고 하는 사람은 신중국 프레임에 사로잡혀 역사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다.

고려인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많은 것을 숨겨 찾아 볼 수 없는 처지의 한반도역사이지만 그래도 만리고려(萬里高麗) 혹은 만리조선(萬里朝鮮)이란 기록은 흔치 않게 가끔씩 다른 기록에 묻혀 나타난다.

전자에 주지한 과 마찬가지로 본 블로그 글 "만리조선(萬里朝鮮) 제비노정기와 제비(家燕 : Barn Swallow) 연(燕)나라와 제비(barn swallow) "에서 북아메리카대륙에서만 서식하는 제비종"[2]Hirundo rustica erythrogaster"를 흥부가의 제비주인공으로 하여 월동지인 남아메리카대륙[winter:월동]에서 중앙아메리카를 지나 멕시코 거치고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정확하게 대입해 볼 수 있다라고 한 사실에서도 만리조선(萬里朝鮮)과 그 지역을 어디로 지정하는지도 찾아 볼 수 있었고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노가재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시문 초고본 노가재집(老稼齋集) 연행훈지록(燕行塤篪錄)의 계주로 가는 도중(薊州途中)이라는 글 속에도 만리고려(萬里高麗)란 단어가 숨어 있지만 사실상 고려라고 하는 연경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도 알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리고려(萬里高麗)와 만리조선萬里朝鮮)의 만리(萬里)영토 공통분모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동아시아역사나 한반도역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거대한 삼한역사 사실이 꼭꼭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老稼齋集卷之五 / 燕行塤箎錄
薊州途中
萬里高麗客。東歸柳可鞭。燕鴻已滿野。薊樹自生烟。累却除詩卷。狂應費酒錢。山川與店舍。所過亦依然。

 

위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연행훈지록(燕行塤箎錄)편 계주(薊州)로 가는 길에서 란 시귀를 풀어보면 만리고려(萬里高麗)나그네가 고향 산천을 찾아가니(東歸) 버드나무가 채찍질하고 연홍이 들판에 가득하다. 엉겅퀴나무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힘들여 쓴 시권(詩卷)을 주고 미친듯 술값을 지불하니 산천이 주막집이다. 이 지나침은 어떻게 할꼬.

이 시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쪽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만리고려인은 대체로 어떤 규범에 구애됨이 없이 매우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연려실기술 제1권 /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개국 정도(開國定都) 임신년(1392) 가을 7월 16일 병신일에 태조가 송경(松京)에서 즉위하였다
成石璘作詩送行曰 성석린(成石璘:1338-1423)이 시를 지어 송별하기를
知子知臣睿鑑明 아들을 알아주고 신하를 알아주신 임금의 지감(知鑑)이 밝으시니
畏天誠意爲生成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우리 백성 위함이라
皆言萬里朝鮮慶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리 밖 조선의 경사가 
在此炎霖跋涉行 더위 장마 무릅쓰는 이번 걸음에 있다 하네

 

또 위는 조선을 세우고 도시를 정한(開國定都)다는 시국인 1392년 가을 7월 16일 고려말 신하 성석린(成石璘:1338-1423)이 시귀를 지어 보낸 내용을 보면 "소문에 만리조선에 경사가 났다 하여 더위와 장마를 무릅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다" 라고 읊고 있다.

물론 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내용과 조금 다르고 전해지는 의미 또한 다르지만 글쓴이가 보기엔 고려 신하 성석린은 진정하여 조선의 개국을 축하하고 성원을 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그려볼 수가 있는데 조선이라고 하여 특별히 배척할 것이 없다는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인데 이를 삼한인 입장에서 반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는 판단하기 따라 다른 것이다.

실제로 고려가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공생공존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조 1년 을해(1455)7월 5일(무인)

민심 수습ㆍ제도정비ㆍ강명ㆍ예법 등에 관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문

吾東方世居遼水之東, 號爲萬里之國。 三面阻海, 一面負山, 區域自分, 風氣亦殊。 檀君以來設官置州, 自爲聲敎, 前朝太祖作信書敎國人, 衣冠、言語悉遵本俗。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역시 달라서 단군(檀君) 이래 관아(官衙)와 주군(州郡)을 설치하고 독자적인 성위(聲威)와 교화(敎化)를 펴 왔으며, 전조(前朝)의 태조(太祖)는 신서(信書)를 지어 국민을 가르쳤는데, 의관(衣冠)과 언어(言語)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만리조선인 대국은 어떤 다문화적인 요소가 있었을까?

세조 즉위년의 기록에도 풍토와 기후가 달라 의관과 언어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의관은 관원이 입던 요새 말로 모자를 겸한 정장차림이다.

이것은 한반도처럼 같은 종족, 같은 민족, 같은 습속을 가진 것이 아니라 종족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며 습속이나 풍속이 모두달라 언어 역시 다름을 알 수 있고 세조는 의관과 언어를 모두 본국 즉 조선의 풍속으로 준수하도록 통제하였다고 풀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한반도에는 본래부터 수많은 언어와 종족, 민족, 각 지방마다 다른 풍속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체계가 이루어졌어야 맞다.

풍속과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한반도처럼 좁은 지역에 지방사투리가 많다고 하는 개념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영토 조건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리지국(萬里之國)이어야 한다.

과연 한반도 지형이 그러한가?

그래서 아래 14가지의 지형척도가 나타나는 구들 지도를 게시하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한반도 지형과 修山集卷之十四 /東國輿地雜記(7항중)3항.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기록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알아보자.

 

[東國輿地雜記:해석]

기록에는 ①의주(義州) 양하구(楊下口)에서 강계부(江界府)까지 1,080()라 하였는데 실제로 한반도 지형에서 이 지명간에 길이를 척도해보니 498리로 기록과 약 500리()가 부족하다. 즉 196km 가 모자라는 것이다.

이 하나만의 사실만 보더라도 한반도 지형은 위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기록에는 ②강계에서 옛 무창(古茂昌)까지가 450()이인데 반대로 837리()로 오히려 한반도 지형의 길이가 387리()가 더 많다.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기록에 강계에서 ③함경도 삼수부(三水府)까지가 225()이라 하였는데 한반도 지형을 제어보니 318리()이다. 한반도 지형이 93리() 더 길어 역시 맞지 않는다. 

 

 

 

기록에 강계에서④갑산부(甲山府)까지가 60()이다.

그러나 한반도 지형상 거리는 374리이다. 길어도 314리()즉 123km 나 길다.

 

 

 

기록에는 ⑤갑산부에서 허항령(虛項嶺)까지 290()이다. 그러나 한반도 지형 길이는 119리()이다. 차이가 171리() 46km 거리가 부족하다.

 

 

 

기록에는⑥허항(虗項)에서 무산부(茂山府)까지가 220()이다.

한반도지형상 거리는 307리이다. 오히려 한반도 지형길이가 87리(), 34km가 더 길다. 

 

 

 

기록에는 ⑦무산에서 부령부(富寧府)까지가 75()이다. 한반도 지형은 115리이다. 역시 한반도 지형이 40리(), 15km 더 길다.

 

 

 

기록에는 ⑧부령에서 동해(東海)까지가 83()이다. 반면 한반도 지형상 62리()가 되어 21리()가 부족하다. 맞지 않는다. 

 

 

 

기록에는 ⑨총 즉 동서의 넓이(廣爲)2,528(), 993km이다.

광무(廣袤)는 넓이, 면적이라고 하지만 기록에는 계산상 길이()가 맞다.

한반도 지형에서 동서길이가 가장 길다고 하는 북부지역을 제어보니 1,336리, 즉 525km 이다. 그래도 기록에서 말한 동서의 합계길이가 자그마치 468km가 부족하다.

이 거리는 현재 서울과 부산간 거리(약400km)보다 더 긴 거리이다.

그러니 이 기록만 가지고 보더라도 한반도 지형은 아닌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 동서길이가 적잖게 넓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미국 서북부 시카코(Chicago)가 기준이 되는 일리노이(Illinois)와 인디아나(Indiana)의 주 경계선 러셀빌(Russellville)과 메릴랜드의 주도 아나폴리스(Annapolis)간의 길이를 구글조 재어보면  959.41km (2,443리)이다. 즉 기록에서 나타나는 동서길이 2,528(), 993km 보다 부족한 거리다.

미국동부지역 동서 간의 거리와 맞먹는 것임을 알수가 있다.

 

 

 

기록에서 ⑩온성(穩城)은 극북(極北)이 되고 두만강(豆滿江)부터 경성(京城)까지가 2,106()라 하였지만 한반도 지형으로 쟁어보면 1670리이다. 부족한 길이가 436(), 171km이다.

 

 

 

기록에는 ⑪해남(海南)이 극남(極南)이 되며, 남해상(南海) ()에서 경성(京城)까지가 1,073(),421km 라 하였는데 한반도 지형을 재어보면 332.91km, 848 ()이다. 약 88km 가 부족하다.

 

 

 

그래서  ⑩+⑪ 하니 기록에서는 ⑫총 남북의 넓이는 3,179(), 1,248 km 이라 하고 있고 실제로 한반도 지형에서 재어보니 1131km, 2, 882리(里)이다. 결국 차이 나는 길이는 297(里), 117km 생겨 어쨌거나 한반도 지형이 부족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방을 넓이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은 그냥 광무(廣袤)라고만 하였지 보(步) 또는 평(坪)이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수치가 전부 리(里)로 통합되어 있어 수치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다.

 

 

 

而我國廣袤合爲五千七百七里。擧大數則可以言六千里地方。

우리나라의 넓이(廣袤)는 합하여 5,707()가 되니 대강 6천리(六千里)정도의 지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하였는데 이것에 모순은 동서길이와 남북길이를 그냥 곱하지도 않고 합쳐버린 것이다.

계산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전자에서 주지했듯이 광무의 본래 의미는 넓이의 뜻이지만 이 기록에서 넓이 계산상 모순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넓이가 아니라 길이로 이해해야 맞다.

때문에 이 기록에서 서두에 말한 것처럼 如唐之東西以遼東安西言。南北以雲中交趾言。당과 같아 안서와 요동이 동서가 되어야 하고 남북의 운중과 교지가 되어야 하는 것은 言朝鮮大國。地方六千里。조선이 대국이며 운중과 교지간의 길이가 육천리이므로 이것을 조선지방설로 가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최종 아래 상황과 관계없이 결론을 내리면 동서길이가 만리(萬里)이고 남북길이가 육천리(六千里)되는 강역을 적어도 명(明) 조정(朝廷)때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지 않고 기록은 바다 넘어까지 기술하고 있는데 ⑭해남(海南)에서 바다를 건너(越海) 900()에 제주(濟州)가 있다 하였다.

900리가 얼마나 먼 거리인가.

353km 이다.

현재 한반도 지형상 거리를 재어보면 306 리() 즉 3분지 1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어마무시한 차이가 틀림없다.

어떻게 반만년의 역사에서 단절의 역사가 한번도 없었던  국가에서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단적으로 자연지형적인 변형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괴리 차이가 생긴 것일까?

 

 

 

주남(州南)에서 바다까지 또한 120()이니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아울러 4, 199()이니 소위 6천리(六千里)는 또한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6과 급사(六科給事) 감찰어사가 말한 것은 그렇듯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니니 소위 동쪽사람이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않는가 하고 마지막으로 묻고 있지만 전혀 아닐 올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조선의 지방이 6000리()이고 여기에 제주까지 900리()를 보태고 제주에서 다시 바다까지 길이 120리를 보태면 약 7000() 즉 2,749km 가 된다.

 

7. 나가기

 

들어가기 부터 삼한체제를 이끌어온 신라, 고려, 조선은 과연 세계통치국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위해 무섭게 달려왔다.

결과는 실로 놀라운 사실로 나타난다.

실제로 세계통치국이 되려면 역사가 정통성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원이 풍부한 영토가 넓고 거대해야 하다는 것은 첫째조건일 것이다.

그곳은 유대계 더치인 오페르트(Opperta)가 말한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위 제일 먼저 게시한 북아메리카대륙 변각의 지도를 보면 동서(東西)의 길이 즉 대서양해안과 태평양해안간의 거리가 4,105km, 10,452리(里)가 되고 있고 놀라운 사실을 밝혀주는 수산집(修山集)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7항중) 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에서 보면 동서길이 안서(安西)와 요동(遼東)간의 거리 4,057km, 10,331리(里)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남북(南北)거리 또한 조선지방설에서 운중도호부와 남월 교지와의 거리가 약 2,600 km, 6,620 리(里)라 하여 실제로 북아메리카대륙인 미국영역, 북쪽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중남부 푸에블라 주 남서부의 마타모로스(Matamoros)까지의 길이 2,552 km와 거의 비슷한 거리임을 알 수가 있어 조선지방설에서 말하고 있는 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영토임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본 블로그에서 사실상 이런 해답을 얻기위해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이렇듯 생각지도 않는 기록에서 이와같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수산지 동국여지잡기 조선지방설에서 이야기 하는 운중(雲中)도호부 또는 평안도 운산(雲山)의 옛 지명이라고 하는 곳은 안개같은 구름이 늘 덮혀져 있는 늪지대로 넓이규모로 따진다면 한반도가 220,748 km² 이니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 대초원웅덩이늪지대(Prairie Pothole Region)이라 하는 곳의 넓이가 715,000 km²이다.

한반도의 거의 3배가 넘는다.

이곳은 캐나다 3개주 서스캐처원(Saskatchewan), 매니토바(Manitoba), 앨버타(Alberta)주이고 미국 5개주는 미네소타(Minnesota), 아이오와(Iowa), 노스사우스 다코타(North and South Dakota), 몬태나(Montana)주가 포함되고 대초원 및 중초원의 깊은 웅덩이로 알려진 수천개의 얕은 습지를 포함한 지역으로 1만년전 끝난 위스콘신 빙하(Wisconsin glaciation)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조건의 늪지대가 한반도 평안도 운중(雲中), 운산(雲山)의 옛 지명에 있을리가 없다.

우리 조선의 영토가 이렇듯 어마어마하다.

조선의 강역이 이것 뿐만아니다.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1469) 6월 29일

臣竊惟本國, 表裏山河, 幅員幾於萬里, 戶數百萬, 兵一百萬, 堯與竝立, 周不爲臣, 元魏通好, 馮燕納款, 隋六師大敗, 而唐賓之, 遼隻輪不返, 而宋事之, 金稱父母之鄕, 元爲甥舅之國。 我大明高皇帝亦謂三韓, 非下下之國。

여기서는 만리지국이라 하였지만 본 블로그 글 "산양호(山羊湖)는 고트레이크(goat lake)이다.https://han0114.tistory.com/17050611  "에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1469) 6월 29일 긴담장(長墻)을 세우는 논의 속에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고 했던 조선초기 문신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상소문을 보면 본국 즉 삼한(三韓)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영토가 기만리(幾於萬里)이며 군세가 일백만(1,000,000)이란 대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만리(幾萬里)라 하는 것은 적어도 '一(일)만리(萬里)'는 넘는 것이다.

이 '기만리'라는 것은 곽박이 조선천독(朝鮮天毒)은 5 천축국을 거느리고 중천축국(中天竺國)이 되어 지방삼만리(地方三萬里)를 통치하였다는 사실과도 같다.

이 얼마나 거대한 나라인가.

계속풀어보면 요(堯)와 병립하고, 주(周)에 신하가 되지 않았으며 원(元)과 위(魏)와 서로 왕래하면 친분을 쌓았으며 풍연(馮燕) 또는 풍이(馮夷) 하백(河伯)에게 정성을 바쳤고 수(隋)의 육사(六師)를 괴멸하였고 당(唐)을 물리쳤고 거란(契丹)족의 요(遼:907-1125)는 우리 고려에게 대패하여 처참할 지경이었으며 송(宋)은 우릴 섬겼고 금(金)은 우리나라를 부모의 고향이라고 하였고 원(元)과 백숙(伯叔)형과 아우지 간이 되었다는 것은 천자대국을 백구(伯舅)라고 높여 불렀고 작은 나라는 숙구(叔舅)라고 불렀는데 본래 큰 나라에 딸을 주는 것이 통례인 것을 감안하면 딸을 받은 사위 고려가 대국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소제 "조대(朝代)와 조정(朝廷)편"에서 당시 제후들이 주천자(周天子)를 명목상 공주(共主) 즉 주변의 나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로 받들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주천자(周天子:BC1046-BC256)가 통치자였다는 사실과 삼한은 그럼에도 신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동등한 입장임을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한반도 역사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인 것이 틀림없다.

벗어던질 수만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은 근원적으로 조선역사를 보는 시각적인 문제를 먼저 개선하고 우리스스로 올바른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역사사실을 우리는 함껏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철면피 친일파들이 양산된 것도 엄밀하게 따진다면 우리 두의 역사인식이 무지한 탓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지까지 바른 역사를 몰랐다는 자성도 있어야 마땅하다.

조선은 분명 한반도에 갇혀있었던 작은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만리지국이었으며 과거 삼한역사로 치면 3만리 강역을 가지고 있던 나라이다.

풍부한 자원과 넓은 토지에 사시사철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과 풍요를 만끽할 수 있는 그야말로 화려금수강산 바로 그것이다.

이런 환경조건이라면 조선이 세계통치국이었다고 어찌 믿지 않겠는가.

아메리카대륙의 오늘날 미국 영토 전역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사실을 우리는 이 글에서 두 눈으로 명확하게 목격했고 또한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7항중) 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에서 밝혀 알 수 있었듯이 기록과 한반도 지형간의 거리까지 낱낱이 재어보고 대조해 본 결과, 한반도 지형과는 역사기록이 너무나도 딴판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비로서 한반도가 우리의 본거지가 아님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라도 엄청난 역사자산을 취득한 것이 된다.

이 얼마나 경탄스러운 이야긴가.

이 귀중한 기록이 비록 만력연간(萬曆年間:1567-1620) 즉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고 반란수괴를 효수하면서 반란을 깨끗하게 평정하고 난 후라고 판단되지만 그 때 분명 한반도가 아니었음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조선에서는 1623년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즉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4년뒤 1627년에는 여진족의 반란인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이은 1636년 병자노란(丙子虜亂)까지 발생하였고 중원왕조는 결국 여진족에게 점령되면서 고려황제 명 조대는 1644년에 망한다고 나타난다.

이때까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 명고려와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신라후손이라고 하는 만주족에 의해 명고려가 망했지만 신라후손들은 조선을 어버이 나라라고 하여 극진하게 대우를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를 다시 유럽사에 대입하면 곧  위그노전쟁(1562-1598)과 더치독립전쟁(1568-1648,) 그리고 30년전쟁(1618-1648)이라고 하는 개신교 종교전쟁 즉 구신종교간의 충돌이 자그마치 83년이란 기간을 소비했다.

이시기에 역사전체로 보았을 때 종교전쟁으로 거의 80년을 넘게 소비했다는 것은 동아시아역사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진실로 조선의 역사, 즉 세계삼한역사를 보려면 동양사(東洋史)와 서양사(西洋史)가 합체된 세계사(世界史:world history)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삼한이 본래 3만리지국, 고려, 조선이 만리지국으로 존재할 때 세계사건들은 모두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배경이고 하나의 역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어진다.
조선말기에 특히 고종실록에는 조선(朝鮮)에서 서양세력들을 양이(洋夷)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대양(大洋)의 양(洋)을 사용하는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이라 할 때 양이를 구분한다는 것도 어렵다.

양이는 동양에서는 없었을까?

그렇다면 양이(洋夷)를 서양세력이라고 했던 순간부터 채울 수 없는 역사 공간적 모순이 생김을 알 수가 있다.

서양세력이나 동양세력은 모두가 하나의 체제속에 존재한 역사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말한바와 같다.
그러나 동양은 빼버리고 서양해양세력을 양이라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현재 우리가 혼란을 느끼고 있는 문제는 본래 하나의 역사에서 분열로 제 각기 성질이 다르게 나누어졌고 역사 본질을 잃어버리고 기본이 되는 역사 실체가 사라진 상태에서 역사조각들을 정확하게 퍼즐로 맞출 수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양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구분에서 아시아인계만을 별도로 떼어서 그것만을 동양이라 하고 있다는 것도 모순이라는 것이다.
즉 동양은 아시아라는 등식이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마찬가지로 서양유럽인들도 유럽대륙에 누군가에 의해 그대로 밀어넣은 것 같다.
이러한 역사구도에서 따져볼 때 동서양 구분없이 애초부터 아시아계 몽골리안 만이 아닌 다른 타 인종 특히 미국계백인(white), 아프리카흑인, 유럽인 코카소이드(Caucasian), 검은피부를 가진 아리안계까지도 서로 부딪치며 다중공동체 생활을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인도아대륙 남부 지역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어족(Dravidian languages)에 속하는 7400만여명이 사용하는 타밀족(Tamil)의 언어가 한글 음과 거의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산스크리티어에 영향을 받았다던지 아니면 중기타밀어가 어쩌면 조선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다중공동체에서 서로 부딪히며 생활한 배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다.

아무리 맞춰보아도 한반도와 인도아대륙 남동부에 치우친 타밀족의 공통점을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글음과 똑 같다는 것은 한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검은피부라 할지라도 아시안계우리나라 황인종과 같은 다중공동체라는 것은 조선이 다원적 사회였기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조선이 위대하다는 것은 다원적인사회체제를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근 500년을 넘게 통치력을 발휘하며 문화부흥과 선진문명을 이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역사환경이라면 과연 유럽 즉 서양인들만이 독단적으로 서구화(西歐化:Westernization=Europeanization)를 이루었다고 당연시하는 것도 사실상 역사 흐름상 모순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조선역사가 서구화의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 누가 믿을 것인가.

듣기는 좋은 소리이지만 공감을 얻기엔 아직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마무리 짓자.

조선이 세계통치국이었다는 사실에서 여러가지 할 이야기가 많지만 우선적으로 유럽르네상스운동과 종교개혁운동, 각종 시민운동, 그리고 우리가 잘아는 프랑스혁명, 그리고 산업혁명까지 굴직굴직한 사건들이 모두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서구화가 유럽인들의 독점물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날 갑자기 하나의 체제를 지탱하던 이러한 주요 인적자원과 그것을 리더하던 주체들은 설령 애국심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작아질대로 작아진, 좁아질대로 좁아진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하여 힘이 빠진 조선이 이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처지를 생각하게 한다.
조선을 어느덧 대신하여 태동한 새로운 통치체제 속에 스스로 안전하게 녹아들 수밖에 없었고 전향과 귀화라는 새로운 페러다임 속에서 기존 조선인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아닌가.
그것은 근세기에 집중적으로 발칸분열이 이루어지던 19세기말엽과 20세기초에 그리고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1차세계대전이 사람들을 황폐화시키며 전향을 촉진시켰을 것이고 거대한 전쟁속에서 공포속에 안정을 바라는 심리와 새롭게 정의된 국가의 개념들 사이에서 일소 갈등을 하였겠지만 하나의 체제 정체성이 무너져 버린 상태에서 그것을 고집할 조선인이 얼마나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던 한 때 세계를 통치하던 조선이라 할지라도 자연섭리를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며 그렇듯 거대한 국가는 다원적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했으므로 조선은 분명 거대한 통치국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듯 혼란기에 역사가 다른 민족과 다양한 인종, 그리고 다종교가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며 배타적이었다면 기존 환경에서 그들은 최후까지 얼마나 융합할 수 있었을 것인가.

본 블로그 글 "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https://han0114.tistory.com/17050838 "에서 밝혀본 것은 바로 조선은 단일사회체제가 아니라 다원적체제라고 하였고 일제어용학자들이 조선인들에게 정상적인 붉은 피가 아닌 특이한 검푸른 피가 흘러 식민지시대를 촉발하게 한 원인으로 유전적으로 분열과, 시기심, 질투하는 심리가 강하다고 한 것은 우리민족 한반도 구성원을 욕보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도 열도인과 친일파들은 우리 한반도 사람들을 은근히 그런식으로 비하를 한다.

그래서 그와같은 심리적인 현상은 한반도에 갇혀 단일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조선인이 아니라 다원적체제에서 다문화적인 환경에 있었던 만리지국 조선인일때 각 인종간, 각 종교간,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를때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 했다.

때문에 다원적사회를 통치한다는 것은 그렇듯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은 근 500년을 그렇게 통치했다.
반면 연방(聯邦:Union)이나 연합(聯合:Unite), 합중국(合衆國)이 주는 의미는 대체로 다원(多元:multiple), 다종(多種), 다양(多樣)한 개체들이 소속된 국가주체구성에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국가체제는 제어하기는 힘들어도 합체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초강대국을 자랑하는 미국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수많은 이절적인 점들이 서로 충돌하고 반목하며 갈등하게 만들었고 종국에 가서는 분열하고 말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세계통치국인 조선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서구문화가 아니고 조선체제에서 벌어진 사건들인 만큼 통치자가 가질 수 있는 고통은 우리 상상이상이었다고 생각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조선은 그냥 사라진게 아니다.

세계역사 근대사에서 발생한 모든 힘든 사건들을 한데 모아 그것이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생각해보라.

어느 국가체제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에 통치철학은 동양문화의 핵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드시 통치자는 정통성과 함께 도덕적인 통치자에 의해 배타적이 아니어야 하며 내부적으로 포용, 배려하는 정책과 반목세력들을 평등, 공평하게 하면서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인심을 달래고 그래도 반하는 세력에겐 참혹하고 엄격한 제재(制裁)가 필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본 결과는 실제로 놀라운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영토를 기반으로 하던 만리지국 조선은 과연 어떤 식으로 500년이란 긴 세월동안통치했고 다원적체제를 어떻게 융합이 가능하게 했을까?

궁금해지지 않는가.
바로 단군께서 일찍이 교화하신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다스려 깨우치게 하는 재세이화(在世理化), 통치자는 하늘의 본성을 깨우쳐 밝게하고자 하는 성통광명(性通光明)의 정신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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