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다시 찾아보는 금단의 땅 코리아(A Forbidden Land Voyage to the Corea)

한부울 2012. 8. 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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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보는 금단의 땅 코리아(A Forbidden Land Voyage to the Corea)

 

글쓴이:한부울

 

근세기에 조선을 왔다가 갔다고 하는 서양사람들의 기록을 접할 때 첫째 그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정치색을 띤 부류의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고 그들이 기록한 원본과 별개로 해아릴 수 없을 만치 등장한 번역한 책 역시 그러한 현상을 더욱 더 확대시킬 뿐이지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존경심을 전혀 묻어나오지 않고 비하하고 폄하하려 드는 이야기로서 당시 특정 부류에게 가십거린 흥미거리를 제공하는 것 이외 특별하게 가치를 둘만한 것은 없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있다.

특히 일본인의 이름으로 번역 된 서양사람들의 기행문은 마치 역사책을 읽은 것처럼 변질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지금까지 보아 온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덩달아 우리나라 번역자들도 같은 길을 걷는데 해방후에 등장하는 모든 서양사람들 기행문 번역 역시 일본인들이 만든 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은 계속된다.

결국 이러한 기행문을 이용하여 한반도 역사가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우리에게 자존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다.

때문에 서양인들의 기행문이라고 하는 것들은 진실의 역사를 접하는데 독약과 마찬가지의 실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볼 때 서세와 일제가 이러한 부류의 책을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 그들은 앞장서서 이러한 기록들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조정, 지휘하였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이들의 책에서 실제 진실의 역사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 기행문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될 부분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록에서 들어나고 있는 실제 지명들 그리고 위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현재 한반도 지형조건과는 판이하게 다른 부분들을 발췌 세밀하게 분석하는데에 그나마 쓸모가 있다 할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조금이나마 그들이 기행한 곳이 실제 한반도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 하는 점이 시급하고 당시 조선 땅에 대한 얼마간의 세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본 글에서도 종전에 한번 이글을 접하고 오페르트의 행적에서 사실과 다른 여러가지 의혹들이 산재되어 의심스럽게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그것은 미진했다고 여겨진다.

 

특히 오페르트의 기행문인 이 금단의 땅 코리아 여행기(A Forbidden Land Voyage to the Corea)는 이러한 점에서 그나마 부족한 부분을 만회하고 좀 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갈증을 해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음도 알기 때문에 1차 올렸던 부분이 미진한 것을 찾아 보완하고자 하고 오페르트가 기록한 책 원본에 나타나는 중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영문 번역자로부터 정확한 번역을 얻어 그것을 기초로 하여 과거 독일인 오페르트가 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에서 약 십여년 이전 당시 조선의 실제 풍경기록과 삽화로 그가 갔던 위치와 장소를 명확하게 가늠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먼저 이 책을 쓴 유태인 계통 독일 함부르크(Hamburg) 출신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에 대해 알아보면 그는 장사꾼이며 탐험가로서 1851년 중국(中國), 상해(Shanghai, 上海)에서 장사하다가 영국인 휘탈(Whitall, James)과 결탁해서 조선의 개항을 시도했다는 것인데 오페르트가 개인적으로 나서 조선을 개항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도 참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고 이러한 의도가 주는 또 다른 목적을 의심케 하는 것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보면 또 1866년 3월 영국인 모리슨(Morrison, James) 함장의 로나(Rona)호로 아산만에 있는 충청도 해미(海美)로 갔으나 한강(Han river)하구를 찾지 못해서 돌아갔고 같은 해 8월 다시 엠퍼리어(Emperor)호를 타고 다시 아산만(牙山灣)에서 당시 천주교 박해로 잠행 중이던 프랑스인 리델(Ridel) 신부의 구조요청에 따라서 이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강화도로 가서 지방 관리들과 통상교섭을 벌이지만 성과가 없었으며 2년 뒤 병인사옥(丙寅邪獄)을 피해서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인 신부 페롱(Feron)과 결탁해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였고 시신과 부장품을 담보로 대원군과 통상에 대한 거래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페롱 신부, 미국인 젠킨스(Jenkins)와 도굴단을 구성해서 1868년 5월 영국상선(?조선상선)차이나(China)호를 타고 조선 해역에 도착한 뒤 예인선 그레타(Greta)로 충남 아산만(牙山灣) 덕산(德山)군에 무단으로 상륙하여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1788-1836)묘를 도굴하려고 했지만 묘곽이 견고해서 실패 했으며 또 다시 철수하는 도중에 인천 영종진(永宗鎭)에 상륙해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분쟁을 일으키고 실패 한다고 모든 자료에서 적고 있다.

1866년 3월 영국인 모리슨(Morrison, James)과 접근

1866년 8월 엠퍼리어(Emperor)호를 타고 접근

1868년 5월 영국상선 차이나(China)호를 타고 접근

그가 조선에 들락거렸다는 시실만을 놓고 볼 대 제집드나들듯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통상이 급하지만 신부라는 중책에 있는 프랑스인 페롱이 도굴단에 합세하여 도굴을 실제로 감행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 없는 망나니같은 짓으로 어쨌거나 도적과 마찬가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의 저서

패쇄 된 나라 한국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 금단의 땅<A Forbidden Land, 1880>등이다. 저서《Ein Verschlossenes Land:Reisen nach Korea:금단의 나라:조선기행:1886》은 영어로 번역되어《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두산백과]다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위 저서 중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이라는 책은 위 1866년 8월 2차로 조선을 방문할 때 기록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오페르트는 그의 한국 경험을 원래 독어로 저술해 출판했다 하고, 그의 책은 후에 영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한다. 오페르트는 자신의 마지막 조선방문을 마친 뒤 12년 만에 기행문을 출간했는데 오페르트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이 책은 오페르트가 1879년에 집필을 완료한 책으로 자신의 체험과 중국에 체류하면서 수집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출판했다.

이 책은 모두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하멜 표류기>와 함께 외국인이 쓴 한국의 역사 자료로 중요하다고 하고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부 근세기 조선을 한반도에 안치시키고 일본을 열도에 만들기 위한 역사새판짜기의 들러리 책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을 뿐 역사적 가치로는 별로 따질 것이 없다 할 것이다.

 

여기 나오는 기록 중에 중요한 몇가지를 이야기 한다면

첫째 오페르트가 상해의 장사를 하면서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에 이틀만에 당도하였다는데 그가 출발한 상해가 지금 동아시아대륙 중국 양쯔강(揚子江)하구에 있는 후두(扈瀆)라고도 하는 상해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상해가 지금의 상해가 아니라는 것은 조선이 지금의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1868년 5월 영국상선 차이나(China)호를 타고 조선 해역에 도착한 뒤...라고 나오는데 이 영국상선이라고 하면서 차이나호라는 것은 영국이 차이나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많은 이야기고 영국이 중국이 아니라면 조선이 중국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또 하나 이 글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오페르트가 2차 조선을 기행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얻은 정보를 곧바로 프랑스 아시아 함대 로즈 제독에게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는 바람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를 프랑스가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오페르트는 간첩질을 한 장본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다.

본 블로그에서 프랑스 왕 루이14세부터 16세까지 조선의 숙종, 영조, 정조와 똑같은 정치적상황과 동일인물이라고 분명히 제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조선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왜란이나 양요는 같은 성질의 것으로서 나라대 나라의 전쟁이 분명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국가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난이고 소요사태인 것이다.

신미양요라고 하는 소요사태만을 보고 어찌 당시 프랑스란 나라가 존재했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이후에 벌어진 신미양요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따진다면 프랑스나 미국은 대조선내에 있는 세력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상황과 지금 들어나는 역사판짜기의 실체를 들여다 볼 때 오페르트의 자신 생각과 상관없이 후세 이 책을 이용하도록 하여 첩자로 만들고 불순분자로 만들어 마치 조선을 괴롭힌 사람으로서 적대관계를 만들고 당시 조선의 빈약한 부분만을 골라 그것을 사실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중대한 인물로 변형시켰거나 조선을 한반도에 안착시키기 위한 역사 음모에 가담시키는 인물로 악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대조선입장에서 볼 때 오페르트는 범죄자이고 수배자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가 조선을 많이 사모했다는 사실을 그의 책 내용에서도 알 수가 있어 장사꾼이기도 하지만 양면에서 갈등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이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와 <하멜 표류기>가 어떻게 우리나라 역사 즉 반도역사라고 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해체된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집어 넣고자 했던 계획에 일환으로서 이와같은 말도 안되는 기획을 하였다고 볼 수 있고 하멜이나 오페르트를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끌어들여 이용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때문에 이와같은 기행문들이 역사로 인정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거대한 세계삼한역사를 가진 우리가 어찌하여 변변한 역사 자료 하나 없이 이처럼 도둘이나 일삼던 장사꾼이며 하멜과 같은 해적에게 역사자료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서글픔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반도사의 저급한 생성과정이 얼마나 궁색했던 것인가를 알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하나 특이한 것은 이 책에서 조선의 고유문자인 한글, 훈민정음인 28자인 기본자를 영문발음을 기재하여 외국에 알려준 책이라 하고 당시 조선인의 복식과 모자 등 삽화가 다수 실려 있으며 서울과 강화도 등이 접지사진이 여러 점이 별첨으로 실려 있다 하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증을 그가 남겨 놓았다는 것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겠지만 세계삼한 역사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긍정적인 것 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때문에 비록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가 남긴 중요한 자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장에서 좀 더 상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왜 오페르트가 언어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파악해 볼 문제임이 틀림이 없다.

어쩌면 당시 조선어는 세계공용어였을 수도 있다고 보이며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조선에서 공용어로 사용하기 위해 지금의 한글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내다 볼 수 있고 당시 한글은 세계를 통치하기 위한 세계범용어로 고안되었을 가능성도 내다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만약 조선이 해체가 되지 않았다면 한글이 세계공용어가 되었을 수도 있는 문제라고 본다.

동시에 대중적인 한글과 그 외 지배계층에서 사용한 글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어느정도 감지 할 수가 있는데 라틴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영어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당시 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그 때부터 한글이외 공용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고 조선이 1881년 해체되고 난 후 1887년 최초로 발표한 세계 공용어 “희망하는 사람”이란 뜻인 에스페란토(Esperanto)를 창안한 폴란드 안과 의사 자멘호프(Ludoviko Lazaro Zamenhof, 1859-1917)가 착안한 것에서도 그가 길을 걸으며 우연히 러시아어(?)로 된 두 개의 간판을 보고 해결책을 생각해냈다고 하는데 두 개의 간판 швейцарская(경비실), кондитерская(과자가게)에는 공통적으로 рская(장소 뜻)라는 접미사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나의 어근만 외우면 접미사를 써서 다양한 단어를 파생해 낼 수 있도록 구상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어가 기본이 된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상 러시아어라는 실체는 대조선이 사용한 언어라고 판단되고 러시아어라고 현재 기록에는 명시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 1799설립)라고 지칭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나라로 지칭되었다는 사실은 근세기 이후에 일로서 크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러시아어 또는 고려어라고 할 수 있는 대조선내에 있었던 것으로서 대조선의 언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그 때까지 조선의 언어가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 다원적인 사회에서 싫거나 좋거나 세계 공용어로 전 세계적가 조선어를 사용했을 것이란 가정이 생긴다.

실제 조선어가 위 여러 언어가운데 어떤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판단 할 수 없다.

물론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후부터 영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어 영국과 미국이 등장하면서 대조선어는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오페르트의 기행문에서 가장 특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조선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land of milk and honey)"으로 그렸다는 사실이고 "조선은 온 세상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쿠빌라이 칸의 대몽고제국 이래로 가장 눈부신 동양문명을 일구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 서양인들이 아시아전 대륙을 지배하였다는 타타르(Tatar)를 이르는 것이다.

콜롬버스의 16세기 착각 지도를 보면 타타리아(Tartaria)의 영토는 지금의 시베리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대륙 전체와 태평양을 육지로 보았으니 합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북아메리카대륙 부부를 포괄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북아메리카 서중부는 카타이(Catai)가 지배한 것으로 나오고 북아메리카 남부는 망기(Mangi, 蠻, mong) 라고 하여 몽고(蒙古)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페르트가 들락거린 조선은 애초부터 한반도가 아님을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느낄 수 있는 것은 오페르트가 한 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찾았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Canaan: 현재는 이집트와 소아시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지중해 동해안지방)을 나타내는 대표적 표현(士師記, 4:14~24)인데 이러한 표현을 그가 찾은 조선의 땅에다 묘사했다는 사실도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퍽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캘리포니아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한 점도 간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본 블로그가 세계삼한역사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결코 한반도가 아님을 확고하게 판단하는 많은 것들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서양인이라고 자칭하는 서세와 그들의 따름이, 앞잡이, 동양인 딸랑이, 일제가 꾸민 음모에서 설혹 오페르트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며 그의 이야기를 입맛에 맞게 흥미위주로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기록하였다거나 그래서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꾸며 희대의 역사음모꾼들 검은 자본의 노예 짓을 하여 그들의 철저한 도구로서 이용당하였다고 한다면 역시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그러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분명 오페르트가 처음 독일어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19세기에 들어 누군가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 알려졌다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조선이 해체되던 시점과 맞물려 있어 사실적인 표현에서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표면적으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절대 부족하다는 미국(?)에서 이런 기행문을 발표했다는 것에서도 의심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와 함께〈뉴욕 타임즈〉는 번역된 영어본을 "일관성 있고 믿을 수 있는 최초의 기술"이라는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에서 당시 영어로 실제 역사사실을 다르게 묘사 번역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오페르트가 조선(朝鮮)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고 "쿠빌라이이후 가장 눈부신 동양문명을 일구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사실에 가깝게 기록 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오페르트의 이러한 표현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계 조선인이 위와 같이 표현한데 적극적으로 비평하고 비난하고 나섰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 한국인 모박사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오페르트 기록에서 성경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는 "조선의 상업적 가치를 극도로 미화, 과장시킨 오페르트의 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하며 조선이라는 땅에 관한 당시 미국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하니 바로 그가 당달이며 썩어 자빠질 반도사의 최면 걸려 혼수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그가 바로 반도사를 만든 주축으로서 망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본 블로거가 보기에는 그가 더 바보고 천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하나 미국인들의 무지라는 것에서도 독일인 오페르트도 독일계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밴더빌트 대학교 박사라는 모 한국인도 따지고 보면 한국계미국인인 것이다.

미국인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오페르트가 비록 프랑스에 정보를 제공하여 도움을 주는 간첩으로서 또는 조선에 들어가 무단으로 대원군의 조상 무덤을 파 도굴하려고 하였던 범죄자라고 하지만 넓고 넓은 대조선의 영토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는 사실에서 물질탐욕에 젖어있던 장사아치의 속성에 걸맞게 솔직담백하게 표현하고 기술하였다는 점에서 애증마저 들게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1880년도에 펴냈다고 하는 저서 금단의 땅<A Forbidden Land, 1880>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집문당에서 신복룡 번역으로 나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반도역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뻔한 내용이다.

 

어쨌던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는 분명 당시 조선(朝鮮:1392-1881)이라고 하였던 한국(corea)에 왔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기행한 조선 즉 코리아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져야 한다.

 

물론 기대도 할 것도 많겠지만 그렇다고 맹신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냉정하게 분석할 뿐이다.

당시 기득권 세력의 중심이었던 대조선에게 적대시 했다고 판단되는 신진세력들이 규합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보았을 때 오페르트가 편집한 장소가 신세력들의 근거지 또는 발언지라고 보이는 뉴욕이고 뉴욕기관지 <뉴욕 타임즈>에서 오페르트의 책을 “일관성 있고 믿을 수 있는 최초의 기술”이라고 평가 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의심을 더 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오페르트가 말한 것처럼 당시 조선(朝鮮:corea)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했고 조선은 온 세상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쿠빌라이 칸의 대몽고제국 이래로 가장 눈부신 동양문명(東洋文明:Oriental civilization, 동양은 아메리카까지 포함)을 일구었다는 주장을 믿어 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자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페르트 책에 나오는 원본의 페이지 수에 따라 그리고 그가 특별하게 삽입한 삽화나 기록을 중심으로 내정하게 볼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인터넷으로 찾은 금단의 땅<A Forbidden Land, 1880>의 원본에 나타나는 특별한 기록(記錄, document)과 삽화(揷畵, illustration)를 기준으로 하나하나 분석에 들어가고자 한다.[2편으로 계속]

 

(1)원본 181p 에 기록과 삽화(First landing in Caroline bay, west coast of Corea)

(2)원본 241p 에 기록과 삽화(Beacon-Hill islands. Entrance of Kang-kiang river)

(3)원본 242p 에 기록과 삽화(Olga island. Mouth of Kang-kiang river)

(4)원본 242p 에 기록과 삽화(Gertrude island Entrance of Kang-kiang river)

(5)원본 249p 에 기록과 삽화(Table or tower mount)

(6)원본 250p 에 기록과 삽화(Old dismantled Fort. Banks of the Kang-kiang river)

(7)원본 251p 에 기록과 삽화(Two-tree Hill, island of Kangwha.)

(8)원본 268p 에 기록과 삽화(Cocks-comb mountain)

(9)원본 269p 에 기록과 삽화(Funnel or sugar-loaf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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