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는 화부(華府)와 미경(美京), 화성돈(華盛頓)으로 불렸다.

한부울 2012. 8. 1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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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는 화부(華府)와 미경(美京), 화성돈(華盛頓)으로 불렸다.

 

글쓴이:한부울

 

서두
강화라는 지명
오벨리스크와 이집트
4방향 방어지형
샹그리-라(Shangri-La)
결어

 

서두

 

8월15일 광복절을 앞두고 여러가지 상념에 쌓인다.

진정한 광복이 우리에게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역사가 일제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했듯이 우리의 생각 역시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존재한다. 아직도 일제 망령이 설쳐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우리는 광복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진정한 광복은 바로 잃어버리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사라진 역사를 되찾아 우리 모두가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이 완성되는 날 비로서 광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다.

 

금일 인터넷신문 뉴시스 이예슬 2012.08.13 12:25 보도 일부에 따르면 13일 모습을 드러낸 애국가 음반에는 애국가 2종과 무궁화가가 수록돼 있다. 애국가 2곡 중 한 곡은 안익태(1906~1965)가 작곡한 현 애국가의 곡조이다. 나머지 한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에 맞춰 부른 '구(舊) 애국가'다.

현재의 애국가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나성(LA)한인청년연합승리창가대'가 합창했고, 구 애국가는 재미 성악가 이용준(1911~1965)이 독창했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않았다. 애국가는 고종의 명령을 받은 윤치호(1864~1945)가 1904년 또는 1907년에 노랫말을 썼다. 영국 해군함이 아시아를 순방하다가 조선 제물포에 입항하면서 국가연주를 위한 악보를 요청했다. 그런 것 없던 때이므로 고종은 당시 외부협판(외무부 차관) 윤치호에게 애국가 작사 칙령을 내렸다.

 

위 기사를 보면 참 이상한 느낌이 적지않다.

독립기념관에서 애국가 작사한 사람을 밝히지 않는다?

알고 있음에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밝히지 못하는가?

혹 애국가에 관여한 모두가 조선사람이 아닌 미국사람이라서 그런 망설임을 보이 것은 아닐까?

미국인이 아니라면 대조선 내에 있었던 각종 다른 인종 중에 유럽인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과거 대조선의 백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현재 근세사를 바탕으로 할 때 쉽사리 밝힐 수가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희망적이라는 사실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삼한역사의 자취가 점차 자꾸 들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화라는 지명

 

워싱턴D.C:(한어자료)

華盛頓哥倫比亞特區(英文:Washington, D.C.)係美國嘅首都兼聯邦區域。個名嘅兩部分反映佢嘅雙重身份,華盛頓市(Washington)係首都名,而哥倫比亞特區(District of Columbia,縮寫:D.C.)就係聯邦直接管轄嘅區域。華裔美國人成日叫佢做華府或者美京

華府或者美京

依據一項1871年的立法,前述三區於1878年合并为「华盛顿市」,由聯邦管轄的特區及華盛頓市地方政府從此轄區重疊,因此常合稱「華府」。

除美国聯邦政府机关外,华府还是許多国际组织总部的所在地,1888年华盛顿纪念碑开放[위키]

 

위는 워싱턴D.C 를 풀이한 한어자료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의 영어이름은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라 한다.

이를 줄여 Washington D.C.라고 한다.

여기에 1878년에 이름지었다고 보이는 화성돈(華盛頓)이란 명칭도 보인다.

북아메리카 서부에 위치한 "Washington 주"와 구별하기 위한 것도 있고 특별히 "컬럼비아 지역"이라는 뜻의 D.C 를 붙인 것이라고 하며 미국수도이기 때문에 특별시의 의미도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 워싱턴D.C.가 한문으로 “華府” 이고 “美京” 이라 하였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이 화부(華府)는 강화부(江華府)에서 강(江)자만 빠졌을 뿐이지 한문이 똑같고 그 지명이 주는 의미와 역사성이 상당히 같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1천 7백 여개의 작은 소화(小華)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예기(禮記)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추어 볼 때 광역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명칭은 놀라운 사실이 틀림 없으며 세계삼한역사적으로 볼 때도 여태까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서서히 정체가 들어나는 나고 있다는 사실임을 견지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아래 지도를 한번보자.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하나는 한반도 북한 땅 두만강을 경계로 돌출, 튀어 나온 부분을 이미지 케첩한 것이고 하나는 애팔래치아산맥 북쪽 끝 부분 즉 북아메리카 미국 북동부지역에 있는 메인주(State of Maine)의 머리모양을 이미지로 케첩한 것이다.

돌출 된 모양만 본다면 신기하게도 똑같다.

분명 같지 않는가? 같다고 느껴지는 것은 내눈이 잘못된 것인가?

너무 지나친 기대겠지만 이것 역시 삼한 역사가 북아메리카 그것도 동부에 기인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부터 “華府” 이라 하고 “美京" 이라고 하는 워싱턴D.C 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화부라 한 것이나 미경이라는 것은 한성과 다른 수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먼저 화부가 비슷한 것이 아니라 일치한다는 개념에서 강화부라고 볼 때 강화도라고 알려진 강화부(江華府)는 이칭 또는 별칭으로 심도(沁都), 심부(沁府), 강도(江都)라고 하여 알려지고 있어 모두 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것에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별칭들이 강화부란 지명에 고전번역자들이 첨가하고 있을 뿐 실제 역사사실과는 거리가 있고 실례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고전번역자들은 어쨌거나 일제역사교육을 받았던 사학자들 중심이라고 할 때 반도역사를 벗어나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고 볼 수 있기때문에 반도역사 틀에 맞게 현재 번역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일뿐이지 어느 사서에서도 이렇다 할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니 강화부(江華府)와 관계없이 심도(沁都), 심부(沁府), 강도(江都)는 같은 이름에서 별칭이 아니라 어쩜 강화부내 별도로 존재한 지명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하고 때문에 강화부를 지칭한 별칭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심(沁)은 물속에 넣다. 담그다. 란 뜻을 가지고 있고  심하(沁河). 심수(沁水)등으로 지명 표기되기 때문에 모두 강과 관련된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화부가 아니라 반도역사에 마취된 나머지 강화(江華)란 단어에 익숙한데 여기서 느끼는 것은 어쨌거나 근본적으로 강(江)과 깊게 연관되는 지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강이라 할지라도 무엇인가 평범한 강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강하다.

어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특이하고 특별한, 그리고 복잡한 강 따위가 도시와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고 또 한가지 생각하게 하는 것은 도시가 강에 포위가 되어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원초적으로 강화는 바다(海)와는 무관함을 알 수 있는 지명이라해야 맞다.

그런데 현 한반도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섬(島)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서를 관찰함에 있어 볼 때 강화도라고 하여 강화(江華), (島)라고 나오는 사서는 일제가 관리한 사서 이외 기록에서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일제가 관리한 사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왕조실록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애초 강화부는 섬이 아닌 것이다.

단순하게 섬(島)이란 등식만을 그려놓고 과거 지난 행적을 감안할 때 몽고항전에서 고려 고종이 어떻게 30년간 특별하게 제약없이 그곳에서 통치를 할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도저히 현재의 강화도 섬이 아닐 가능성이 100%라는 생각이 강하게 한다.

만약 섬이라면 지금 한반도 강화도처럼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적어도 제주도 정도나 동 아프리카에 있는 마다카스카르 정도가 되어 함부로 외부적이 접근 할 수 없는 특별한 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그렇게 단순하게 본다는 것은 실지 어리석은 꼼수가 숨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島)이 아니라 섬처럼 사방 공격으로부터 최대한 분리 될 수 있는 지형, 공간영역이 안전하게 존재 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하고 또한 확실한 요새들이 곳곳을 막아 감히 적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도저히 접근 할 수 없는 그리고 애초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원천적인 방어지역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때문에 난공불락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저한 방어개념속에서 완벽하게 기존 지형을 보호,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워싱턴 D.C 를 중심으로 하는 영역적, 지형적인 환경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현 강화도가 고려 고종(高宗, 1192-1259,재위1213-1259)이 정확하게 28년이라고 했으니 인간 한 세대 기간인 그렇게 긴 시간동안 전란을 피신해 있었던 강화(江華)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본래 취지이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재야학자들 다수가 그렇게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정말 고려왕(高麗王)고종(高宗)이 이곳 강화도에 1232년 천도(遷都)하여 28년간 몽골에 항쟁하였다는 곳이 맞다면 아무리 전란과 파괴행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그와 걸 맞게 그러한 흔적이 곳곳에서 지금까지 흔하게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강화도는 과거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 말고는 특별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현 반도사가 가진 맹점이고 문제인 것이다.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강화부(江華府)가 기필코 현 한반도 강화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 군사 방어적인 지형 조건이 반드시 갖추어 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선적으로 강화도란 현 지역 섬 전체를 안전하게 감싸고 있는 형태의 험준한 산악조건이나 사방에 있어 급격한 낭떨어지가 있는 천혜요새가 될 수 있는 지형적인 요소가 불충분하다는 사실과 더 나아가 그러한 지형조건은 아예 찾을 수 없도록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인가 과거 있었던 것을 불도저로 완전히 밀어버린 것 같은 조그마한 야산들과 허허벌판 말고는 이야기 할 것이 없다.

천혜(天惠)는 고사하고 요새(要塞:port)라고 칭 할 정도의 특별한 성채(城砦)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인지 할 때마다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다.

어떤 강력한 구식 군사행동에서 나올 수 있는 큰 무리가 이동하고 그 무리가 주둔하여 어떤 거대한 물리적인 힘에 의한 공격에 대한 방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말이며 적이나 아군이 마땅히 안전하게 숨을 곳이 없을 정도로 섬 전체가 허허벌판이라는것이 거의 실망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성과 육지를 분리하는 해자(海子)라고 하여 강화해협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강 폭이 좁은 곳은 1km 남짓 넓은 곳은 약 2km 정도일뿐이다.

그러나 가까운 예로 양자강의 남변에 있는 주요도시 남경을 북쪽에서 강을 넘어들어오는 적을 막는데 필요한 해자가 평균 강 넓이가 4-5km 이고 가장 넓은 곳은 15km나 되는 양자강과 비교하여도 너무 턱(터무니)도 없는 해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 한 세대 기간 28년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고려 고종이 정상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이야기다.

대륙조선관을 믿을 때만 하더라도 늘 상 반도역사에서 전란을 피해 달아 나는 곳이 강화도라면 적어도 양자강 강변이나, 기슭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많이도 했었다.

우리는 한반도의 반도사만 볼 것이 아니라 세계사를 보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혜(天惠)의 요새(要塞)가 어떤 것인지 우린 솔직히 알 필요성이 있다.

천혜의 요새를 찾아 예를 들어 많겠지만 하늘과 맞 닿은 듯한 히브리어로 요새라고 하는 마사다(Masada)처럼 소금기를 가득 품은 사해의 바람은 해발 450m에 우뚝 솟아 오른 요새를 감싸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든지 프랑스 퐁펠요새(Fort de la Pompelle)같은 곳이라 든가 아니면 아래 사진의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요새처럼 그럴싸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하 땅굴 요새가 이어져 최후 뻗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겠지만 강화도 성채가 있는 곳에는 퐁펠요새같은 지하 갱도 자체가 없다.

반드시 요새(Fortification)라고 한다면 적어도 난공불락(難攻不落, a fortress blessed with natural barriers for defense)이란 단어가 충족이 될 수 있는 험준한 지형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

 

여기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설명을 할  본 주제인 워싱턴D.C를 중심으로한 지형적인 면을 우리는 감안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워싱턴D.C 한가운데로 흐르는 포토맥강 주위에는 지금도 수많은 요새들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것 또한 참고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내가 알기로는 강화(江華)란 곳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주요한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난 역사에서는 최후보루상징으로서 때론 오욕의 상징이기도 한 곳이다.

그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성이 있는 지명이기 때문에 수많은 침탈의 역사 정면에서 버티었고 수많은 전쟁과 내란을 흡수하며 줄곳 감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극한상황에서 또한 피신, 방어지역으로 절대적인 역할을 해내게 하며 긴요하게 이용되었던 곳이라면 이러한 온갖 풍파, 전쟁에 의한 흔적 또는 자연스럽게 생성된 잔해들이 땅이나 바다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지만 일제시대뿐만아니라 해방후 지금까지 간척(干拓)사업이나 개간(開墾)사업이 속속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강화도 땅, 해저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자취를 발견하거나 찾아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실제 강화라는 역사 지명은 애초부터 가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장소를 옮겨 “華府” 라 하고 “美京" 이라고 지칭했다는 워싱턴D.C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워싱턴D.C 가운데로 흐르는 포토맥강(Potomac River)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실제 강(江)자가 붙을 만한 규모의 지류가 복잡하게 얽혀 흐르는 강으로서 미국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南北戰爭:1861-1865)때 실제로 승패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주요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또한 교전 역시 참혹했다는 내용은 미국 남북전쟁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단번에 무엇인가 중요한 역사적인 지역임을 알게 하는 것이고 또한 많은 풍파를 겪은 요새 밀집지역이란 점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남북전쟁만 있었겠는가?

그 이전에 수많은 전쟁들이 그곳에서 벌어졌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서양사에서 콜롬버스가 등장하던 1492년 이전 역사는 북아메리카대륙 어디에도 역사자체가 없다고 하였으니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수많은 요새를 영토개념이 없는 인디언들이 만들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오래 전 요새는 분명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역사주체가 축조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이라 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곳에 과거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성이다.

영토개념이 없는 원주민 인디언만 존재했다? 나는 그러한 역사를 믿지 않는다.

그 만큼 중요한 위치에 워싱톤이 화부(華府)나 미경(美京)으로 존재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미경(美京)을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정부 수도라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리치몬드(Richmond, Virginia)도 남부군 수도라면 이도시를 또한 미경(美京)이라고 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포토맥강 주위에 실제 수많은 요새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알만한 이야기가 된다.

 

 

포토맥강(Potomac River) 위 사진을 보더라도 굉장하다.

버지니아 주의 하이타운(Hightown)과 웨스트버지니아 주(State of West Virginia)의 페어팩스 스톤 (Fairfax Stone)에서 발원하여 대서양 연안의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여 작은 만과 섬이 많다고 하는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로 흘러들어가는 강으로서 총 길이는 대략 665km가 되며 포토맥이라는 지명은 파타워메크(Patawomec)에서 유래한 지칭이라 하고 이 강은 미국 역사와 관련이 깊어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은 워싱턴 D.C 아래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에서 태어나 강을 탐사하면서 일생을 거의 이곳에서 보냈다 하며 이 강(江)에서 자유무역을 추구한 그는 페낭(Penang)이라고도 하는 조지타운(Georgetown)에서 컴벌랜드(Cumberland)간의 체서피크-오하이오 운하(Chesapeake and Ohio Canal)를 건설하였고 그래서 인지 그는 “포토맥(Potomac)운하의 성공을 위하여!”라고 하면서 자주 건배사로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만큼 조지워싱턴의 애정이 묻어나는 강이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게 인식한 것이다.

이 포토맥강 일대는 버지니아(Virginia)주에 충성한 리(Robert E. Lee)장군이 남군을 이끌고 포토맥강(Potomac River)을 두 번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첫 번째는 안티탐(Antietam)운하에서 패하고 두 번째는 게티스버그(Gettysburg)에서 패하여 결국 북군을 이기지 못하고 완패하고 말았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워싱턴D.C는 분명 강(江)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모두 가져 매우특별하거나 특이 할 정도로 지류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 분명 지명에서도 그러한 모양의 도시를 그릴 수 있게 실제로 무한의 가치를 가진 강으로 손색이 없다 할 수 있다.

때문에 강도(江都)라고 하거나 강(江)은 생략하고 화부(華府)로 지칭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워싱턴이 화부(華府)가 되면서 강도(江都)는 다른 도시에 지칭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고 미경(美京)역시 말 그대로 아름다울 미(美)를 붙인 것이어서 미국(美國)이라고 하는 한문지칭이 여기서 생겼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때문에 미경이라는 지명에는 현재 미국의 수도(首都)의 의미가 강함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화도에 천도한 수도라는 개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북군 수도의 의미인 미경이라고 부르기 전에 지명은 분명 화부(華府) 또는 강화부로 불렸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벚꽃이 만발한 워싱턴 기념탑]

 

오벨리스크와 이집트

 

그리고 워싱턴D.C으로 흐르는 포토맥강 이외 역사적으로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오벨리스크를 상상하게 하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이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 왕조때 태양신앙(羅, Ra)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 오벨리스크(obelisk)를 본떠 만든 것으로서 백악관 인근에 168m의 높이로 솟아 있는 석조탑이다.

이것은 1884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며 탑의 주위에는 미국 50개 주를 상징하는 국기가 둘려져 있는 것이 현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특징으로 존재한다.

 

                    

    [Sketch of the proposed Washington Monument by architect Robert Mills circa 1836]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자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심을 소유한 인물이었다는 것이고 그는 영국의 통치에서 미국을 자유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만한 여러가지 선례를 세웠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점에서 워싱턴 기념탑은 민중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케 하는 것이며 조지 워싱턴은 이 탑을 상징하는 것만큼 미국에서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명이자 미국을 세운 진정한 아버지를 뜻하고 대중들이 사의를 표하고 기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다.

이러한 표현은 마치 동양역사를 보는 듯하게 한다.

아무리 숨기려 하지만 무엇인가 신적인 존재를 부각시킨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기념탑은 1833년에 존 마샬(John Marshall, 1755-1835)과 전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이 국립 워싱턴 기념탑 협회를 창설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기념탑의 설계 공모전이 열렸으며 그 때 설계는 둥근 도리스식[Doric style] 주랑(柱廊, Stoa)위에 오벨리스크와 말을 탄 워싱턴의 조각상이 올라간 로버트 밀스(Robert Mills, 1781-1855)가 공들인 신 고전주의풍 설계가 선정되었다 한다.

하지만 그의 설계안은 오늘날의 워싱턴 기념탑과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그의 디자인에는 비용이 많이 소요되어 비용을 줄이는 면에서 우선적으로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작업이 먼저 진행되었다 한다.

이 과정은 들어난 사실과 다른 어떤 우리가 알면 안되는 사실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갑자기 남북전쟁(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1861-1865)이 일어나 자금 부족으로 건축은 연기되었고 밀스가 1855년 사망하고 4년이 지난 1859년 시점까지 이 기념탑은 완공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1884에 완공되었다는데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바로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3년째 되는 시점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아마도 대조선을 해체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오벨리스크를 본 떴다고 하는 워싱턴 기념탑은 실체가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말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명백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집트에 있었던 오벨리스크와 워싱턴 기념탑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은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크기도 다르고 세워졌다는 년도도 비교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별 의심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현 이집트 지역에 오벨리스크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증명이 될까?

피라미드이다.

이 피라미드는 갑자기 생성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os)는 이집트의 제18왕조 제3대왕 투트모세 1세(Thutmose I, 재위 BC1525-BC1512)때 세워진 23.2 m, 143 t 규모의 오벨리스크와 하트솁수트 여왕(Queen Hatshepsut, 재위BC1501-BC1480)의 29.6 m, 325 t 규모의 오벨리스크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모두 워싱턴 168m 규모와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때문에 워싱턴에서 이런 현저하게 높은 탑을 세워야만 했을까?

민주주의를 앞세운 기독교 나라에서 무엇을 위한 탑인지에 대한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형태적으로 워싱턴 탑도 똑같은 뾰쪽한 탑으로서 고대이집트 왕조에서 태양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기념비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할 때 이러한 형태를 취한 미국은 본래 어떤 의도에 의한 것인지 사뭇 궁금한 것이고 상징적인 것에서 보더라도 태양신을 가깝게 두고자 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높게 세운 다는 것은 태양신을 더 절실하게 원한 것이라고 해석 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초대대통령인 워싱턴을 태양신처럼 섬겼다는 것인가?

여기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본래 워싱턴에 수많은 오벨리스크가 남아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고대 오벨리스크들은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은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 있는 제12왕조의 세누세르 1세(Senusret I, BC1971-BC1926)가 건립한 것으로 높이 20.7 m라고 한다.

어쩜 앞에 말한 23.2m, 29.6m, 그리고 20.7m 이니 거의 30m 가 한계인 것 같다.

고대 오벨리스크 방첨탑이 세워진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는 태양신앙(羅:Ra)의 중심지 도시라고 하며 고대 그리스어로 ‘태양의 폴리스’라는 뜻을 가졌을 정도라 하였다.

최대의 것은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 이후로 제왕(諸王)이 명문(銘文)을 4면에 새긴, 애스원(産)의 화강석제의 오벨리스크 카르나크(Karnak)의 아몬 대신전(Amon Temple)앞에 세웠다는 것인데 그 규모 또한 알 수 없다는 것이고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이 탑이 유럽으로 반출되어 사라지거나 없어졌다는 내용에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사라진 오벨리스크의 높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금증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무엇때문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168m 라는 뾰쪽탑을 세워야 했을까?

규모를 알 수 없지만 왜 최대의 것이 유럽으로 반출 되어야만 했을까?

이집트라고 하지만 본래 이집트라는 곳은 아메리카대륙 어디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본래 제일 높은 오벨리스크를 유럽으로 이송하여 없어졌다 하였는데 이야기가 빙빙 돌았지만 결국 이것이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탑이 아닐까 하는 최대 궁금증이다.

왜냐하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이집트를 옮겨놓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조치가 필요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유럽은 근세기에 만들어진 명칭이기 때문에 근대사에 나올 뿐이지 실체 역사는 없다해야 맞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Cleopatra's Needle)이라 불리는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재위BC1504-BC1450)의 것은 19세기에 워싱턴 D.C.과 런던으로 각각 가져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가져 갔다고 하지만 가져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스완의 채석장에 남아 있는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길이 41.7 m라고 하였으니 30m 미만이 한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168m 석조 오벨리스크 탑도 당시에 못 만들 이유가 없었다고 볼 때 이 오벨리스크의 최대규모에 것의 행방에 대해서 강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워싱턴에 세워진 168m 오벨리스크의 본질은 무엇일까?

현재 워싱턴D.C에 세워진 기념탑의 실체가 의심스럽고 왜 기독교 국가에서 태양을 숭배하는 탑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또한 본래 이집트가 아닌 워싱턴D.C에 168m 최고의 높이의 오벨리스크를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그 연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기때문에 의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근세기에 유럽으로 반출되었다는 것과 워싱턴 그리고 런던(유럽 런던이 아님)으로 가져간 이유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떤 형태에 있었고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발전하였는가 따위는 지금도 명확하게 알 수가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쨌던 이집트에서 처음 세워졌다고 하는 오벨리스크(규모 30m 정도)와 지금 현재 워싱턴에 세워진 오베리스크의 규모(168m)면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당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식민지상태에서 독립하고 오래지 않아 태양을 숭배하는 이와 같은 거대한 탑을 만들고 세운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정서상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 할 때 당시 미국인들은 기독교가 아닌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양의 신을 섬기던 본토 이집트인들 보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미국인들이 태양신을 더욱 가깝게 섬기고자 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서스쿼해나 강(Susquehanna River)]

   


                                         [정방형예측도: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4방향 방어지형

 

이 정도로 워싱턴의 역사적인 위치문제를 그만 따지고 워싱턴이 가지고 있는 방어적인 개념의 지형도를 살펴보자.

왜냐하면 강도(江都)라고 할 정도의 군사적인 방어가치성을 보려 함이다.

위 지도는 내가 만들어 본 것인지 보시다 시피 워싱턴D.C 를 중심으로 4방향 주위를 정방형(正方形)으로 한 방어적 지형의 특성들을 고스란히 펼쳐 놓은 것 같이 하나의 거대한 형틀에 짜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 워싱턴D.C 정북(正北)쪽으로는 서스쿼해나 강(Susquehanna River)이 가로막고 있다.

이 강은 떡 보아도 워싱턴 북부를 방어하고 있는 주요강으로서 미국 북동부를 가로 흐르는 길이 715km로, 유역은 뉴욕 주, 펜실베이니아 주, 메릴랜드 주에 걸쳐 면적은 71,225km² 이나 되면서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인데 이 강역시 지류가 복잡하기는 포토맥강(Potomac River)에 못지 않다.

 

둘째로는 바로 근세기 이전에는 대동양(大東洋)이라고 하여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보았을 때 동해가 될 수 있으며 현재는 대서양(大西洋)이라고 하는 대해를 동쪽으로 두었다는 사실에서 대양을 앞에두고 보위 하듯하며 이 방향에서 주요도시로는 워싱턴D.C 동북쪽으로 약 50km에 미국해군사관학교(美國海軍士官學校, United States Naval Academy)가 있는 아나폴리스(Annapolis)란 도시가 있고 또 하나는 아나폴리스(Annapolis)에서 서북쪽 36km에 패탭스코 강 (Patapsco River)하류에 위치하며 굴곡이 심한 해안선이 있는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의 깊숙한 곳, 대서양에서 약 300㎞ 들어간 곳, 일명 해항(海港)이라고 하는 볼티모어(Baltimore)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아나폴리스와 볼티모어 두 도시가 워싱턴을 대서양으로부터 보호하듯 둘러 싸고 있는 형태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볼티모어(Baltimore)는 내륙으로 한참 들어가는 만 어귀에 위치하는데 1729년에 인디언으로부터 이 토지를 매입하여 조선(造船)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것역시 참 이상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미국 근대사를 보면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이후부터 미국이 확보하는 영토는 전쟁으로 차지 한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매입하거나 거저 할량 받았다는 것이 유일하고 독특한 설명이다.

어째서 피를 흘리지 않고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메리카인디언들은 애초부터 영토개념이 없는 한심한 부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기가 살던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종족이 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지 그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태어나고 수십년 살고 있는 고향에서 어떤한 이유도 없이 강제적인 것이 아님에도 그냥 순순히 내 줄 수 있는 바보같은 인간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되 물어 볼 이야기다.

우리나라 근세기 말 조선인들이 영토개념이 없어 현재 동아시아대륙 연해주와 녹둔도를 러시아에 넘겨주게 된 것이라고 하는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와 거의 같은 것이다.

특히 아나폴리스(Annapolis)는 우리나라 역사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는 도시로 들어나는데 미국 메릴랜드(Maryland)주 중부에 있고 주의 주도로서 우리와는 신미양요(1871)로 연결되고 그들이 당시 노획한 장수기'수(帥)'자가 쓰인 가로 세로 4.5, 또는 5m의 대형 깃발 수자기가 이 도시에 있는 애나폴리스(Annapolis)해군사관학교(United States Naval Academy)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추리도: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그래서 1871년 신미양요를 상상하여 위 그림을 그려보았는데 충돌지역을 한반도 강화도가 아닌 노란 선의 지점을 그려 상상하여 그려 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반도 강화도에서 노획한 전시물을 거의 140년이 흘러 강화부와 맥을 같이 하는 곳이라고 판단되는 도시에 보관되었다는 역사적사실에서 숙명적인 만남을 맞게 된 것이다.

아나폴리스(Annapolis)는 역사적인 매력을 주는 도시라는데 레드하우스 즉 붉은 벽돌로 세운 스테이트 하우스(State House)가 그곳에 있고 이 건물은 아직도 주 의회에 의하여 활발히 쓰이는 오래된 주의사당이라고 하며 특히 아나폴리스는 1783년 11월 26일부터 1784년 6월 3일까지 미국의 수도였다는 사실도 함께 주지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 부첨한다.

 

Annapolis-nickname(s): "America's Sailing Capital", "Sailing Capital of the World", "Naptown" Nickname for Indianapolis-Indy, The Circle City

 

셋째로는 워싱턴D.C를 서쪽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여진 애팔래치아(Appalachian Mountain)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광의적인 지역적 방어개념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은 고기습곡산지(古期褶曲山地)로서 고생대에 형성되어 장기간에 걸친 침식을 받은 지형인데 지층이나 지각의 일부가 횡압력을 받아 형성된 산지 습곡산지(褶曲山地)로서 이와 비슷한 지형으로서 아시아에 우랄산맥(Ural Mountains)이라 한다.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은 총연장 2,600km이며, 평균 높이는 1,000m 내외이고 가장 높은 곳은 2,037 m의 노스캐롤라이나 주 미첼산(Mount Mitchell:2,037 m)이다.

마치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을 법한 산맥으로 인식되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워싱턴D.C 정남(南)쪽을 지키는 듯한 제임스 강(James River)과 그 강을 남쪽으로 물고 있는 도시, 영어로 "river of city" 즉 강도(江都)라고 할 수 있는 버지니아(virginia)주도인 리치먼드(Richmond)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실제로 한어자료를 보면 이 도시를 강도(江都)라고 하고 영어의 뜻도 강도(江都)인데 워싱턴D.C 에서 남쪽으로 약1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이 도시는 버지니아주의 동쪽 피드먼트 대지(臺地)와 해안평야의 경계에 있는 제임스강(江)의 폭포선 도시에 포함되기도 한다.

 

                          

 

폭포선도시(瀑布線都市)는 대서양 연안과 애팔래치아 산맥의 중간 지대에 산맥의 산기슭 대지와 해안 평야가 접하는 곳에 여러 개의 폭포가 생성되어 횡적 배열을 이루는 지대에 있는 도시를 말한다.

이 도시는 1607년 크리스토퍼 뉴포트(Christopher Newport)가 이끈 영국의 탐험대가 처음 탐험하였다 하고 1644년 찰스요새가 설치되었으며 1645년에 모피, 피혁, 담배를 위한 교역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윌리엄 메이오(William Mayo) 대령이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1780년에 임시로 주도가 되었다가 1782년 5월에 시가 되면서 공식으로 주도가 되었다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영국이 여기에 머물렀던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 도시의 지명에서 제임스강이 현재 영국 템스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템스강변에 있는 리치먼드어폰템스(Richmond upon Thames)에서 딴 것이라고 하며, 지금도 두 도시는 자매도시로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그럴 법한 이야기지만 런던은 미국 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제임스강(James River)은 원래 버지니아주 인디언추장의 이름을 따 파우하탄강(Powhatan River)이라고 하였다는데 뜻이 파우와우 힐(Powwow hill) 즉 "회담하는 주술언덕" 이라는 뜻이다.

강의 길이 545km로서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발원한 다음 2037m의 미첼산(Mount Mitchell)이 있는 블루리지산맥(Blue Ridge)과 해안평야를 동서로 횡단하여 흐르다가 체서피크만(灣)으로 들어가고 상류에는 담배의 대산지인 린치버그(Lynchburg)가 있으며, 주도(州都)인 리치먼드까지는 대형선박의 항행이 가능하여 석탄, 석유, 농산물 등이 적재된다 하였으니 강의 넓이와 깊이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리치먼드(Richmond)는 이러한 제임스 강(James River)을 배수진으로 하는 도시로서 방어적인 도시로 인정되며 남북전쟁 때 북군을 상대로 한 남군 수도였다고 하는 큰 상징성과 함께 도시의 무게를 느낄 수 있으며 남쪽에서 올라갈 때 배수진이 되겠지만 북쪽으로 부터 방어적인 개념의 도시하고는 거리가 먼 느낌이 없지 않다.

우리역사에서 강화부(江華府)를 또한 강도(江都)라고 하였으니 이 강도가 워싱턴D.C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리치먼드(Richmond)를 말하는 것인지는 아직 더 확인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이상으로 실제로 하나의 도시가 아닌 전체가 강화부(江華府)란 명칭이라고 볼 때 방어적인 개념에서 보면 북쪽으로 서스쿼해나 강(Susquehanna River), 동쪽으로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 남쪽으로 제임스 강(James River), 서쪽으로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의 정방형의 지형을 그릴 수가 있다.

 

샹그리-라(Shangri-La)

 

마지막으로 이글의 종말에서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것은 바로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로부터 서북쪽 약 90km 떨어진 곳에 캐톡틴산(Catoctin moutian:573m)정상수목지대에는 캠프데이비드(Camp David)가 있다. 그런데 이곳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단목신인(檀木神人)은 우리나라 군장(君長)의 비조(鼻祖)이라 하였는데 그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제단이 심도(沁都) 30리쯤의 해변에 있다고 했고 큰 돌을 쌓아 하나의 높은 단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왠지 캠프데이비드(Camp David)은 마치 단군신전이 있었을 법한 곳으로서 그곳에 또한 북한산성과 금강산이 있다고 판단되는 애팔래치아(Appalachian Mountain)산맥을 서북쪽 배경으로한 그곳에는 미국 대통령의 전용별장이 있다.

이 캠프데이비드의 이상한 이력에 관해서 잠시 보고 가자.

미국32대 대통령을 역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 재임:1933-1945)는 영국의 작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1900-1954)이 쓴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수평선(Lost Horizon,1933)"에 나온 완벽한 산(山)에 있었다던 왕국(王國)의 이름을 따 "샹그리-라(Shangri-La)"라고 처음에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이렇게 불렸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런 이름을 붙였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1945년 해리 트루먼(Harry Shippe Truman,1884-1972,재임:1945-1953)대통령이 샹그리-라를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만들면서 1953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1890-1969, 재임:1950-1961)대통령이 그의 손자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의 이름을 따 "캠프데이비드"라고 불렀다 한다.

 

                     

 

이 샹그리-라(Shangri-La)는 본 블로그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주시는 "샴발라고구려님"의 별명이기도 한데 이 샴발라는 극락세계(極樂世界)또는 천국(天國)를 뜻하고 불교어원인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 행복을 가지고 키우는 곳이라고 하며 또한 무릉도원(桃源鄕)이라고 하였다.

원시불교인 티베트 불교의 전설에서 내륙아시아(亞細亞?)의 어디엔가 있다고 전해지는 가공의 왕국으로서 샴발라(Shambhala)라는 지명은 티베트불교의 가장 고귀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시륜(時輪)탄트라, 즉 "시계 바퀴의 교의"라고도 하는 칼라차크라 탄트라(Kalacakra-tantra)가르침이 있다는 곳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부처는 샴발라의 다와상포'Dawa Sangpo'왕의 요청으로  칼라차크라(Kalachakra)탄트라를 가르쳤다고 말해지고 가르침은 또한 거기에 보존된다고 한다.

샴발라는 모든 주민들이 개화된 카라파(Kalapa)라 불린 수도에 의해 중심이 된 실제로는 불교의 극락정토가 있다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제임스 힐튼(James Hilton,1900-1954)은 그의 소설 잃어버린 수평선(Lost Horizon,1933)에서 샹그리-라(Shangri-La, Shanguri Ra, 尼旺宗, 心中的日月)라고 하여 히말라야 설산 너머의 불가사의한 왕국이 있는 것처럼 그려졌던 것이다.

이 소설도 결국 근대사를 완성시키는데 지대한 공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샴발라 왕국 역시 태양신앙(羅:Ra)과 연계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태양신을 오래 전부터 섬기는 신앙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워싱턴D.C 에 솟아 있는 168m 오벨리스크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근세기에 실제 탐사를 한 상황을 여러곳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1933년 소설이 발표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면서, 비슷한 유사 전설들이 생겨 나오는 가운데 이 샹그리-라(Shangri-La)라고 하는 곳에 특히 제3제국의 총통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가 크게 관심을 가짐으로서 독일의 파시즘 정당인 나찌(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1933-1945)가 직접 지휘하며 고대 북유럽 게르만(nordic)의 기원을 찾는 일과 관련하여 샴발라 즉 샹그릴라(Shangri-La)를 찾으려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맞춰 1938년 독일 유명한 사냥꾼이면서 동물학자이고 조류학을 전공한 에른스트 섀퍼(Ernst Schäfer:1910-1992)를 단장으로 한 티베트(Tibet)탐사팀이 세차례나 조사단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샹그리-라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 불교의 땅 티베트 어느 곳이라고 하는 설은 분분하였지만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신중국에서는 가공의 티벳 땅을 만들었지만 실제로 샹그리라는 없음을 현지인들이 실토한 마당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티벳은 티벳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실제 티벳은 옛 서양지도를 토대로 본블로그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 있다는 것만 밝혀내고 있다.

현재 캠프 데이비드의 샹그리-라 설과 맞지 않는다.

하지만 히틀러도 북유럽인종(nordic)의 우월성을 찾기 위해 샹그리-라(Shangri-La,)를 찾아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아시아대륙이 아닌 아세아(亞細亞)에 있었다는 티베트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던지 간에 서양인들은 어느정도 알고 있엇던 것이 틀림없이 보인다.

다만 근세사가 진실을 덮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북유럽인종을 찾겠다고 지금 현재 아시아대륙이라고 명명된 티베트를 찾았다는 것은 맞지 않으며 알다시피 아시아 티베트는 몽골로이드(Mongoloid)의 황색인종이 있는 곳으로서 그곳이 과연 아세아(亞細亞)인지 모호하다는 말이다.

왜 북유럽인종이 아시아대륙 몽골 황색인종과 연결하려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티벳에는 당연히 몽골황색인종이 아닌 북유럽인종이어야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 수 있고 신체적 특징인 금발, 푸른 눈, 블론드(Blond)모발을 한 인종에서 나올 법한 흰 피부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유럽인들이 동아시아대륙 티벳을 찾아 그들의 인종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쇼다.

아니 근원적으로 생각해보면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이 샹그리-라를 찾았던 곳은 어쩌면 동아시아대륙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지금의 티베트는 만들어진 지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논리이다.

블론드(Blond)현상에 따라 피부에 자극이 덜한 햇빛이 적은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시베리아 즉 사백력을 말하는 것이다.

히말리아는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의 북서쪽 흑룡이 있는 백산 줄기를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즉 지금의 히말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곳은 북극과 가까운 곳이다.

결국 이 전설의 왕국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사실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면 샹 그리라(Shangri-La)가 있었던 티베트(Tibet)는 흰산, 백산, 설산, 히말리아에서 얼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밝혔던 바로서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애팔래치안(Appalachian Mountain)산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캠프데이비드(Camp David)가 과거 샹 그리라(Shangri-La)라 했던 의문은 계속 남는다.

 

결어

 

이상으로 워싱턴D.C 를 중심으로하는 동서남북 4방향에서 방어적인 지형적 역할을 하는 것을

화부(華府), 미경(美京), 강화부(江華府)란 지명을 놓고 워싱턴D.C, 리치먼드와 함께 우리는 세세하게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그것을 총체적으로 지도까지 표시하면서 또 위에 첨부한 그림[정방형예측도]도 그려보았다.

그렇게 그려본 결과 4방향이 주는 방어선은 분명해진다.

점선을 표시한 정방형의 지역은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 땅이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 전체를 어쩌면 강화부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였다.

전체를 강화부라고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점선 내에 있는 어느 특정 지역을 강화부라고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고 본다.

강화부가 어딘지 확실하게 풀 수만 있다면 우리의 역사를 찾는 일도 그렇게 어렵지만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안타깝지만 글을 마치면서 끝으로 첨가 해 볼 것이 있는데 워싱턴D.C 가 있는 포토맥 강에는 줄무늬 농어(striped bass)가 많다 하였다.

그런데 한강(漢江) 역시 농어(濃魚)로 유명했다 한다.

워싱턴D.C 는 일본인들이 선물을 하여 벚꽃으로 유명하단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8년 임술(1682,강희 21) 8월12일(정해)기록에서 보면

○江華府梨樹花如方春。

강화부(江華府)에서 배나무 꽃이 한봄처럼 피었다고 한 사실도 이 글 전체를 종합해 보았을 때 워싱턴디씨 풍경이 그려지기 때문에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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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부(江華府) 이칭 또는 별칭이라 하여 강도(江都), 심부(沁府), 심도(沁都)라 번역하였지만 실제 원문에는 이러한 조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모두 별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치 강화부에 교동현(喬桐縣)이 있는 것 같지 하였지만 강화와 교동은 별개로서의 위치가 확보되었다고 볼 때 충분히 독립적 지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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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현(喬桐縣)

본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인데,【일명(一名) 대운도(戴雲島)이다.】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혈구군(穴口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그대로 따라서 강화현(江華縣) 임내(任內)로 삼았다가, 명종(明宗)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안동고기(安東古記)》에 이르기를, “옛 고림(高林), 또는 송가도(松家島)라.”고 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4년 을해에 비로소 만호(萬戶)를 두고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현(縣)이 바다 가운데 있으니, 바로 강화부(江華府)의 서북쪽이요, 연안부(延安府)의 동남쪽이 되며, 동서가 22리, 남북이 29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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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摩利山)은 강화부(江華府) 남쪽에 있다.

정포 만호(井浦萬戶)는 강화부(江華府) 서쪽에 있다.【쾌선 11척, 무군선 10척이요, 강화(江華)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2백 46명이며, 각관 좌·우령 선군이 9백 2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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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39년 계사(1713,강희 52) 7월27일(임신)

경기·강원 일대에 큰 바람이 불다

개성부(開城府)·강화부(江華府)와 강원도 여러 고을에 큰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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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년 을사(1725,옹정 3)11월21일 (을묘)

강화부(江華府)에서 천둥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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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4년 경자(1780,건륭 45)4월28일(병자)

제주의 암말을 봉진(封進)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 사복시(司僕寺)가 아뢰기를,

“형조 판서 구선복(具善復)이 상소하여 군마(軍馬)가 잔약해진 폐단을 갖추 아뢰고, 이어 제주에서 봉진하는 것 가운데에서 암말을 봉진하도록 하여 북시(北市)에서 얻은 종마(種馬)와 함께 수백 필에 한하여 강화 목장(江華牧場)에서 기를 것을 청하였는데, 본시(本寺)로 하여금 하나로 귀결지어 복주(覆奏)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각 목장의 말 종자가 근래 매우 노둔하여 실로 전구(戰具)를 갖추어 군용(軍容)을 씩씩하게 할 방도가 없습니다. 장신(將臣)이 논한 것이 진실로 합당하니, 먼저 이런 뜻으로 여러 목장에 신칙하여 반드시 체구가 크고 걸음이 씩씩한 것을 올려 보내게 하여 전처럼 그럭저럭 충당하는 폐단을 없게해야 합니다.

심도(沁都)는 본디 좋은 말이 생산된다고 일컬어지는데 그 이유는 목장이 넓고 물과 풀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에 차례로 감축되어 혹 본부(本府)에 보내기도 하고 교동(喬桐)에 보내기도 하며, 진보(鎭堡)를 설치하기도 하고 백성의 경작을 허가하기도 하여, 지금 남은 것은 두세 개의 작은 섬에 지나지 않고, 한 섬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4, 5십 필의 말 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비록 장신의 말처럼 다시 더 방목하려 하여도 목장을 넓히기 전에는 쉽사리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암말은 바다를 건네 보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법을 만든 뜻이 있는데, 이제 만약 봉진하는 길을 연다면 사마(私馬)가 섞여 나와서 폐단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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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4년 경자(1780,건륭 45)8월9일(을묘)

격포(格浦)를 승격시켜 첨사(僉使)를 두는 문제를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 영의정 김상철이 아뢰기를,

“전에 부사직 윤면동(尹冕東)의 상소로 인하여 격포를 승격시켜 첨사를 두는 문제에 대해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방금 완백(完伯) 서유린(徐有隣)의 장계를 보니, ‘격포는 실로 해문(海門)의 목구멍이나 마찬가지이고 심도(沁都)의 방어 역할을 합니다....

격포는 볼티모어나 아나폴리스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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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9권 의(議)

통색(通塞)에 대한 의

臣伏惟人才之難得也久矣。盡一國之精英而拔擢之。猶懼不足。況棄其八九哉。盡一國之生靈而培養之。猶懼不興。況廢其八九哉。小民其棄者也。中人其棄者也。我國醫譯律歷書畫算數者爲中人。西關北關。其棄者也。海西松京沁都。其棄者也。關東湖南之半。其棄者也。庶孼其棄者也。北人南人。其不棄而猶棄者也。其不棄之者。唯閥閱數十家已矣。而其中因事見棄者亦多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인재를 얻기 어렵게 된 지가 오랩니다. 온 나라의 훌륭한 영재(英才)를 뽑아 발탁하더라도 부족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8~9할을 버린단 말입니까. 온 나라의 백성들을 다 모아 배양(培養)하더라도 진흥시키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중의 8~9할을 버린단 말입니까. 소민(小民)이 그 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중인이 그 중에 버림받은 자입니다. 우리나라의 의원(醫員)ㆍ역관(譯官)ㆍ율학(律學)ㆍ역원(曆員)ㆍ서화원(書畫員)ㆍ산수원(算數員)인 자가 중인이다. 서관(西關 평안도(平安道))과 북관(北關 함경도(咸鏡道)) 사람이 그 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해서(海西 황해도(黃海道))ㆍ송경(松京 개성(開城))ㆍ심도(沁都) 번역자:강화(江華)) 사람이 그 중에 버림받은 자입니다. 관동(關東)과 호남(湖南)의 절반이 그 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서얼(庶孼)이 그 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은 버린 것은 아니나 버린 것과 같으며, 그 중에 버리지 않은 자는 오직 문벌 좋은 집 수십 가호뿐입니다. 이 가운데에도 사건으로 인해서 버림을 당한 자가 또한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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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29권 춘명일사(春明逸史)

희곡(希谷)의 작문

연천(淵泉) 홍공 석주(洪公奭周)는 문단의 거장(巨匠)인데도 작문할 적마다 고심하였다. 일찍이 문익공(文翼公) 이지연(李止淵)이 글을 빨리 짓는 것을 보고는 매우 부러워하면서 말하기를, “그의 재능은 내가 미칠 수가 없다.” 하였다.

서양의 배가 처음 홍주(洪州)에 들어왔을 때에, 이공(李公)이 탄식하기를, “영국(英國)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해칠 뿐만 아니니, 우리 집안도 그 화를 당하겠다.” 하였는데, 병인년 난리에 공의 조카인 이인기(李寅夔)가 심도(沁都)의 진무사(鎭撫使)로서 성이 함락되어 죄를 받았으니, 그의 말이 과연 증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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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29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우리나라의 고적(古蹟)

단목신인(檀木神人)은 우리나라 군장(君長)의 비조(鼻祖)이다. 그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제단이 심도(沁都) 30리쯤의 해변에 있으니, 큰 돌을 쌓아 하나의 높은 단을 만들었다. 위는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높이는 백 장(丈)은 된다. 사천 년을 지나면서 돌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될 수 있었겠는가. 올라가 눈을 돌리면 중국의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등 여러 곳을 뚜렷하게 살필 수가 있다. 단(壇)의 이름은 참성(塹星)이고, 그 아래에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참(塹)구덩이, 해자:오밸리스크와 비슷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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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31권

순일편(旬一編)

방어의 요새지

서울에서 가까운 요새 세 곳이 바로 심도(沁都), 남한산성, 북한산성이다. 심도는 성을 쌓은 뒤로 습지(濕地)의 험난한 장점을 잃었고, 또 양인(洋人)이 정박하여 염탐할 우려가 있다. 다만 두 곳의 산성이 있는데, 산성은 매양 험준한 곳에 있으면서 곁으로 대로(大路)와 통하여 식량을 운송할 수 있고 우물과 땅이 모두 많은 뒤에야 어느 정도 쓸 만한 것이 된다. 북한산성은 산이 대부분 돌로 되어 있어 한 조각도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없으니, 참으로 영구히 믿을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남한산성은 토양은 조금 좋으나 지하수의 물줄기가 매우 멀다. 동문 밖이 대로와 통하여 식량을 운송할 길이 충분히 있으나, 우리가 아는 것은 저들도 안다. 동문을 막아 버리면 남쪽으로 통하는 길도 따라서 막히고, 통할 수 있는 것은 서문뿐이다. 성안에 쌓아 둔 양식으로 어떻게 달을 계산하고 해를 계산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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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84권

군서표기(羣書標記) 6 ○ 명찬(命撰) 2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 60권 사본 ○ [기미년(1799, 정조23) 편찬]

첫머리에 경도(京都), 그 다음에 화성(華城), 개성(開城), 남한(南漢), 심도(沁都)를 싣고, 각각 그 강역(疆域)과 거리 및 궁(宮)과 전(殿)의 제도ㆍ위치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삼보황도(三輔黃圖)》의 예를 본뜬 것이다. 다음은 경기(京畿), 호서(湖西), 영남(嶺南), 호남(湖南), 관동(關東), 해서(海西), 관서(關西), 관북(關北) 지역 각각의 지명(地名)ㆍ연혁(沿革)ㆍ산천(山川)ㆍ관액(關阨)ㆍ인물(人物)ㆍ전부(田賦)ㆍ명승(名勝)의 제영(題詠) 등을 실었으니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의 예를 본뜬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리서(地理書)로는 서거정(徐居正)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있는데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을 본받은 것이기 때문에 명승고적의 시(詩), 부(賦), 서(序), 기(記)를 매우 많이 찾아서 싣고 있다. 하지만 산천의 도로와 거리, 관액의 험요(險要)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소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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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沁)① 밸 심

(향기·액체 따위가) 스며들다. 파고들다. 침투하다.

돋다. 스며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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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 제3권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예(郡縣分隸)

沁州府。領一郡。〇一郡曰喬桐。〇沁州府行宮大使。兼京畿水軍節度使。有判官一員。以治民事。〇喬桐郡守。兼京畿水軍節制使。〇臣謹案。江華喬桐。官制屢變。而江華旣非京邑。留守之名所不宜也。西路水軍。別無所須。三道統禦使。亦贅矣。今以沁州大使。兼水軍節度。緩急可用。不必使喬桐爲重任也。

심주부(心州府)는 1군을 거느린다.

1군은 교동(喬桐)이다.

심주부 행궁대사(行宮大使)는 경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며, 판관(判官) 한 자리가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교동군수는 경기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강화(江華)교동에는 관제가 여러번 변했으나, 강화가 이미 경읍(京邑)이 아니니 유수라는 명칭은 마땅치 않다. 그리고 서로 수군(西路水軍)과 특별히 상관되는 바가 없으니,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라는 것도 또한 군더더기이다. 이제 심주 대사가 수군 절도사를 겸하도록 하여 급한 변고에 쓸 수 있으니 반드시 교동에게 중임(重任)을 맡도록 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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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8년 을미(1595,만력 23) 9월24일 (계사)

공물 작미·훈련 도감 군사의 요미·변방 방어 등에 대한 좌의정 김응남의 차자·

本道出身武士, 則旣已下送, 但慮兵力寡弱, 抵當無策。 臣之愚意, 如京中砲手、海西武士, 抄擇其精銳者若干, 不可不爲之添防也。 安州、定州, 亦是內地至要之邑, 當極選能將兵秩高有智慮之人, 急速差遣, 以待不虞之變, 恐亦宜當。 且江華一府, 距京城僅百里, 而西連黃海, 南接兩湖, 獨以一面, 通于東北, 有控制八方之勢, 誠所謂天府之地, 要害之處也。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서울의 포수와 해서(海西)의 무사 중에서 정예한 자 약간을 뽑아서 방어에 첨가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사료됩니다. 안주·정주도 내지의 지극히 요긴한 고을이니, 군사를 잘 거느리고 품계가 높으며 지려(智慮)가 있는 사람을 엄선하여 급속히 차견(差遣)해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또 강화부(江華府)는 경성에서 겨우 1백 리 거리로서 서쪽으로는 황해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호서·호남과 이어져 있으며, 다만 일면만이 동북(東北)으로 통하여 8방을 견제하는 형세가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천부(天府)의 땅이고 요해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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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8년 임술(1682,강희 21) 8월12일 (정해)

강화부에 배꽃이 피다

江華府梨樹花如方春。

강화부(江華府)에서 배나무 꽃이 한봄처럼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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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0년 갑자(1684,강희 23)3월11일 (정축)

개성 유수 이선이 과조·군역·은전·정표 등에 관해 상소하다

강도(江都)의 형세는 한 나라의 목구멍같이 되어 팔방을 제어하므로, 한 번 포위되면 식량의 지원이 끊어지는 육지의 산성(山城) 같은 것이 아닙니다마는, 그 둘레가 너무 크니, 과조를 엄하게 세워서 병민(兵民)을 단속하고 또 경기의 연강(沿江)한 고을들의 수령(守令)을 시켜 그 병민을 거느리고 힘을 같이하여 지키게 해야 하겠으며, 또한 관서(關西)의 자모성(慈母城)에서 하듯이 미리 신지(信地)를 정하여 각각 성채(城砦)가 있고 집을 짓고 창고를 두어야 지킬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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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39년 계사(1713) 10월 5일 (기묘)

강화부·개성부에 큰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다

강화부(江華府)·개성부(開城府)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천둥하는 것이 한여름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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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년 무술(1778,건륭 43) 윤 6월24일 (임오)

수어청과 총융청 양영을 합치는 것에 대한 대신들의 헌의②

대저 총융청의 관할(管轄)을 수어사(守禦使)에게 합치어 기보의 육군(陸軍)을 통할하며 남한 산성을 보리(保釐)해 가도록 하고, 삼도(三道)의 통어(統禦)를 강화부(江華府)에 소속시켜 삼도의 수군(水軍)을 통할하며 심도(沁都)를 보리해 가도록 한다면 은연중 경도(京都)의 좌우 장성(左右長城)이 되어져 위급할 때에 힘을 얻게 되어, 군제(軍制) 배치가 이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강화와 심도는 절대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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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141221&ctg=1000&cloc=joongang|article|outside_home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망해버린 한국의 잃어버린 공관, 102년 만에

위는 중앙일보[2012.08.27 11:06]기사이다.

 

사진 오른 쪽 위에

“大朝鮮 駐箚 美國 華盛頓 公使館(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 이라고 써있다.

 

1891년 11월 서리공사 이채연은 매매계약서를 체결했다.

“본 부동산은 2만5000달러로 조선공사에 매도하며…”로 시작하는 서류는 워싱턴 시정부 문서철에 남아 있다. 서류에는 내역(지하 1층에 지상 3층, 대지 70평, 연면적 165평)이 기록돼 있다. 지은 지 14년 됐다. 대한제국의 유일한 해외 상주공관은 그렇게 설치됐다.

 

1891년 2만5000달러=그때 이후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적용하면 현재 가격으로 127만 달러 수준이다(정부의 비공식 추정).

 

2012년 8월에 건물을 다시 샀다. 망국 102년 만이다. 정부의 구입자금은 350만 달러(약 39억5000만원). 워싱턴 공사관은 빼앗긴 주권의 상징이다. 주권 회복의 피곤하고 긴 여정은 완결됐다

 

건물(주소=15 Logan Circle NW Washington D.C.) 관련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National Archives) 자료, 사진이 들어 있다. 서클 한복판에 조그만 공원이 있다. 공원 한복판에 존 로건의 동상이 서 있다. 로건은 19세기 중순 미국 내전(남북전쟁) 때 북군 장군이다. 워싱턴 중심가는 남북전쟁 공훈 서열대로 동상이 서 있다

 

서클 주변은 30여 채 비슷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3~4층 타운 하우스들이다. 100~120년 된 빅토리아풍의 아담하고 예쁜 적갈색 건물들이다. 깔끔한 고풍의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

 

사진 오른 쪽 위에

“大朝鮮 駐箚 美國 華盛頓 公使館(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 이라고 써있다.

이 글자가 주는 의미에 대해 단정을 짓고 믿으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1881년 조선이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본 근거지가 워싱턴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거 조선 건물을 누구에게 다시 매입하였다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정을 지울 수 없는 이유도 많다.

 

 

 

 

 

15 Logan Circle NW Washington D.C

워싱턴의 13번가(街), 로드아일랜드·버몬트 애비뉴가 만나는 원형의 순환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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