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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산(檀香山)은 버뮤다(Bermuda)이다.
글쓴이:한부울
소제:호놀룰루(Honolulu)가 단향산(檀香山)이 아니라 버뮤다(Bermuda)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근세사의 단면을 볼 수가 있다.
이제야 근세사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았다.
바로 미국과 일본이 나눠먹기란 도식이 성립된 사실이다.
그것은 근세사가 날조되는 시발이고 기초다짐이었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이 글의 결론은 결국 최소한 1889(고종26년)년 당시까지 고종이 있었던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만을 밝히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독일인 오페르트가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가 발생되던 시점에 코리아를 방문하였다고 한 사실에서도 그가 방문한 코리아는 분명 한반도가 아니라 다른 곳임을 명백하게 확인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이라고 하는 종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1945년 패망과 함께 하와이를 영역으로 하는 것을 지금의 열도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호놀룰루라고 하는 하와이는 전통적으로 일본종족들이 생활한 곳이라고 본다.
그것을 다시 찾으려 시도한 것이 1941년 12월 7일 아침 진주만(Pearl Harbor, 眞珠灣)공격이다.
결국 하와이는 잃었지만 그들은 지금의 열도와 그 주변 바다 그리고 오키나와, 센카쿠(釣魚台群島 Senkaku Islands)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1945년 8월 핵폭탄 공격을 받고 패망한 일본인들을 보고 하와이를 차지한 미국인들은 "떠났다(Quit)"고 하는 문구를 들고 환호하였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5년 8월 10일자 파리의 신문에 보면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알리는 신문 머리기사로, 신문에는 "잽은 떠났다"("Japs quit")라고 쓰여 있다.]
檀香山,音譯火奴魯魯(英文:Honolulu),係美國夏威夷州最大城市同首府。喺夏威夷語中,火奴魯魯意指「屏蔽之灣」或「屏蔽之地」。因為早期本地盛產檀香木,而且大量運返中國,唐人叫佢做檀香山。
위의 한어자료에 나오는 호놀룰루(Honolulu)의 설명인데 호놀룰루(Honolulu)를 단향산(檀香山)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곳에는 단향(檀香)이 많이 자생하거나 산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단향(檀香)은 백단향(白檀香)과 자단향(紫檀香)이 있는데 백단향과 자단향은 본초학적으로 성미와 효능이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식물분류학적으로도 다른 식물이라 한다.
백단향(白檀香)은 단향과 학명(Santalum album L.)에 속하는 식물이고 질이 비교적 딱딱하고 색이 엷은 것이라 하여 백단향(白檀香)이라 한것이다.
또한 자단향(紫檀香)은 자단(紫檀)이라고도 하는데 영명으로는 Pterocarpus santalinus – Red Sandalwood, Red Sanders "붉은 단"이라고 하는 자단(紫檀), 자단향(紫檀香)은 식물학적으로 두과(荳科 Fabaceae) Pterocar indicus willd 에 속하는 일명 두침향(荳沈香)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단향(檀香)이라 함은 백단향(白檀香)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세종지리지에 보면 이 백단향(白檀香)이 질이 좋아 내전(內殿)에 들이도록 했다 한다.
이 백단향이 태평양 중앙에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많이 자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단향(檀香)은 한약으로 성미가 신온(辛溫)하고 이기(理氣), 산한(散寒), 지통(止痛)하는 효능을 갖고 있으며 한응기체(寒凝氣滯)하여 발생하는 위(胃)나 복부(腹部)의 동통이나 또는 토사곽란에 의한 복통(腹痛), 산통(疝痛)에 쓰이며 식욕부진에도 이용하여 기체혈어(氣滯血瘀)에 의한 협심증(狹心症)에 쓴다 하였다.
이 백단향(白檀香)은 조선에서도 많이 자생되었다고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고 있다.
세종지리지
백단향(白檀香) :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 경상도(慶尙道), 강릉대도호부 정선군(旌善郡)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백단향(白檀香) :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라 하여 조선영역의 경기, 충청, 경상도, 강원도에서 토산으로 자생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인들이 토산물인 이 단향(白檀香, Sandal Wood)을 조선에 늘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수없이 올라와 있다.
세종 5년 계묘(1423,영락 21) 1월12일
일본국의 사람이 와서 토산물, 백단향(白檀香) 10근 외 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영락 21) 10월27일
일향(日向)·대우(大隅)·살마주 태수 수리대부장작(薩摩州太守修理大夫匠作)인 원구풍(源久豐)과 〈그의〉 아들 원귀구(源貴久)가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 백단향(白檀香) 50근 외 바치다.
세종 9년 정미(1427,선덕 2)1월13일
좌위문 대랑(左衛門大郞)이 그 아들을 시켜 조현(朝見)하고 인하여 백단향(白檀香) 2근 외 다수를 바치다.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2월25일
일본 살마주(薩摩州) 등원 희구(藤原熙久)가 사람을 보내어 백단향(白檀香) 50근 외 바치다.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2월25일
일본 살마주(薩摩州) 등원 희구(藤原熙久)가 사람을 보내어 백단향(白檀香) 50근 외 를 바치다.
早期本地盛產檀香木
위 한어자료에 나오는 기록을 보더라도 이 백단향이 호눌룰루에서 일찍부터 많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를 단향산(檀香山)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향(檀香) 인도단향(Indian sandalwood)의 영어 학명의 자료(1)를 한번보자.
(1)Santalum album or Indian sandalwood
is a small tropical tree, the most commonly known source of sandalwood
It is a hemiparasitic tree, native to semi-arid areas of the Indian subcontinent.
It is now planted in India, China, Sri Lanka, Indonesia, Malaysia, the Philippines and Northwestern Australia.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檀香目 Santalales
科: 檀香科 Santalaceae
屬: 檀香属 Santalum
種: 檀香树 S. album
二名法
Santalum album L.
檀香树(学名:Santalum album),又名檀树(《毛诗》、《本草》)、真檀(《本草纲目》)、白旃檀(《楞严经》),简称檀香,
原产地为印度,
后随佛教来到中国
위 자료에서 보듯이 단향(檀香)의 대표적인 학명은 린네가 붙인 Santalum album L. 이다.
특히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반(半)기생 생물이라고 하였으며 주요원산지가 인도(India), 스리랑카(Sri Lanka), 호주(Australia)라 했고 동인도(東印度)라 하는 인도아(亞)대륙(Indian subcontinent) 즉 지금의 인도대륙을 지정하고 있다.
그리고 한어자료에는 이것을 단향나무(檀香树) 즉 단나무(檀树) 또는 진단(真檀), 백전단(白旃檀), 단향(檀香)이라 간단하게 불리었으며 원산지가 역시 지금의 인도(印度)라고 하였고 중국에는 불교가 전해지면서 전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천동지변(天動地變)할 새로운 사실이 바로 미국자료 Discover life 사이트의 분포지도를 보면 들어나는데 바로 이 학명의 주 원산지 지도에서 지금 태평양 중앙에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는 전혀 노란 점이 표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물론 이는 단향(檀香)이 전혀 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단향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는 미국생물학자들이 보는 명확한 사실이란 이야기다.
다시말해 현재 태평양 중앙에 있는 하와이에 있는 호놀룰루는 단양산(檀香山)이 아니라는 것이다.
Bermuda Santalum album L.(Sandal Wood)
(2)Missouri Botanical Garden database
ID_parent MO02335204
Scientific Name Santalum album
Authors L.
Country Bermuda 버뮤다
MAP decimal latitude_longitude from gazetteer 32.3_-64.8
Date Sep 1913
Senior collector BROWN
Collectors Stewardson Brown, N.L. Britton & E.J. Wortley
collection number 1678
Herbarium MO
위 자료역시 미국자료 Discover life 에 나오는 것인데 지도분포지에 버뮤다에 찍힌 노란점을 누르면 나타나는 데이터이다.
(2)의 내용을 보면 단향(檀香, Santalum album)의 원산지가 호놀룰루(Honolulu)가 아니라 바로 버뮤다(Bermuda)란 사실을 확실하게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호놀룰루라고하는 단양산(檀香山)은 하왕이가 아닌 다른 곳 즉 버뮤다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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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 함께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한어자료에 호놀룰루의 뜻은 火奴魯魯意指「屏蔽之灣」或「屏蔽之地」즉 병폐(摒蔽, 가리다, 둘러막다, 방비하다)의 만(灣) 또는 땅(地)이라 했다.
마치 무엇으로 카텐으로 가리다든가 둘러 막거나 방비한다 했으니 섬 모양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태평양 중앙에 있는 하와이 섬 호놀룰루를 자세히 뜯어보면 병폐(摒蔽)라고 하는 가리다, 둘러막다, 방비하다 란 뜻과 전혀 어울리지 않고 특별하지 않는 매우 평범한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큰 섬 네개와 작은 섬개가 일렬로 쭉 늘어서 있다는 것과 호놀룰루가 있는 섬을 보아도 사각의 섬이 특별할 것이 없다.
오히려 지금 태평양 하와이 호놀룰루섬과 비교하여 대서양 버뮤다의 섬 모양을 보면 영어자료에 나타나듯이 갈고리(hook, gaff, 撓鉤) 형태를 취하고 있어 실제 하와이 언어(言語)의 뜻인 병폐(摒蔽)의 만, 또는 병폐의 땅과 매우 어울리고 흡사한 모양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보면 갈고리 형태이기도 하지만 분명 만과 땅을 가리거나 둘러막거나 방비하는 형태임을 한눈에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바로 근세기 서세(西勢)에 의해 인위적으로 수많은 지명(地名)을 이동시켰다고 본다면 그 이전 명칭은 분명 버뮤다(Bermuda)를 호놀룰루(Honolulu)라 했을 것이고 갈고리 모양과도 같은 형태의 병폐(摒蔽)의 만 또는 병폐(摒蔽)의 땅으로 지칭하는 호놀룰루라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함께 들어나는 기가막힌 우리 사서의 기록 승정원일기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3)승정원일기
고종 26년 기축(1889, 광서15) 7월 24일(무진)맑음
좌목 : 흥복전에서 미국 주재 전권대신 박정양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김춘희 등이 입시하였다
○ 사경(四更).
상이 이르기를,
“연로(沿路)에 단향산(檀香山)이 있다고 하던데, 이는 어떤 곳인가?”
하니, 박정양이 아뢰기를,
“이는 하와이에 딸린 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와이는 작은 나라이다. 다녀오는 길에 과연 지났을 터인데, 그 땅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박정양이 아뢰기를,
“하와이는 태평양(太平洋) 가운데 여러 섬이 모여 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유구국(琉毬國)이나 우리나라의 제주(濟州)에 비교해 크지 않습니다. 신이 미국에 갈 때 배가 그 나라의 국경에 정박했었는데 밤이 깊어서 내릴 수 없었고 이튿날 새벽에 바로 출발했기 때문에 비록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항구(港口)와 국도(國都)가 서로 접해 있는데 매우 조잔(凋殘)했습니다. 듣자니 40여 년 전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백성들이 많이 손상되었으므로 근년에 구라파와 아시아의 각 주(洲)에서 백성들을 모집하여 겨우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위는 때가 고종(高宗 26년,1889)7월이라 했고 미국주재 전권대신 박정양(朴定陽, 1841-1904)은 대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1887년(고종 24년) 미국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연말에 청나라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1908 재임:1885-1889)에게 신임장을 제정(提呈)(present one´s credentials)하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고 그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미국 특파 전권대사직을 사직하고 1889년 귀국하여 임금 고종을 알현(謁見)하던 장면이다.
이 시점은 세계삼한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대조선이 해체된 시점이니 매우 어수선한 시기인 것이다.
이 기록의 내용을 풀어 보면
내전(內殿)인 흥복전(興福殿)에서 미국 주재 전권대신 박정양(朴定陽)을 소견하면서 임금이 이르길 “연로(沿路)에 단향산(檀香山)이 있다고 하던데, 이는 어떤 곳인가?”하고 물었다.
즉 임금이 단향산(檀香山)이라 함은 바로 호놀룰루(Honolulu)는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자 미국 주재 전권대신 박정양(朴定陽)은
“이는 하와이에 딸린 섬입니다.”
“하와이는 태평양(太平洋) 가운데 여러 섬이 모여 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유구국(琉毬國)이나 우리나라의 제주(濟州)에 비교해 크지 않습니다. 신이 미국에 갈 때 배가 그 나라의 국경에 정박했었는데 밤이 깊어서 내릴 수 없었고 이튿날 새벽에 바로 출발했기 때문에 비록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항구(港口)와 국도(國都)가 서로 접해 있는데 매우 조잔(凋殘)했습니다. 듣자니 40여 년 전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백성들이 많이 손상되었으므로 근년에 구라파와 아시아의 각 주(洲)에서 백성들을 모집하여 겨우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라고 응답하였다.
조잔(凋殘)은 부서지다, 쇠잔해지다, 시들다 란 뜻이다.
사실 승정원일기 자체의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승정원일기는 근대사에 맞게 편집된 대목이 곳곳에 보이는 기록인데 실제상황이 아닌 근대사와 일치하도록 일제병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우려야 할 대목은 호놀룰루가 박정양이 미국으로 가는데 바로 연로(沿路) 중간 태평양에 있는 하와이 소속 섬이라 하였으니 지금 지도에 나타나는 태평양 내에 있는 호놀룰루가 맞다.
그러나 미국생물자료 분포지도에 의해 단향산이 있을 곳은 태평양에 있는 호놀룰루가 아니라 대서양 북아메리카 대륙 남부에서 600마일(965km)떨어진 버뮤다(Bermuda)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위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박정양과 대화하는 고종 임금이 있을 곳은 한반도가 아닌 버뮤다를 거칠 수 있는 제3장소, 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역시 조선의 지배권력이 있었던 위치가 지금우리가 아는 사실과 180도 사실이 달라진다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또 한 가지 기록을 살펴 볼 것은 박정양이 이야기하길 단향산(檀香山)에는 40여년전이라 했으니 1849-1850년 정도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백성들이 많이 손상되었으므로 근년에 구라파와 아시아의 각 주(洲)에서 백성들을 모집하여 겨우 모양새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또한 매우 충격적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박정양이 이야기 한 연로(沿路)에 단향산(檀香山)이 있다고 하던 지금 태평양의 하와이 호놀룰루가 아니라하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천연두가 그 시기에 실제로 발생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 아니라 근세기에 지금 호놀룰루는 인위적으로 인구를 이동시켰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 지는 것이니 만큼 원천적으로 호놀룰루라고 할 수 없다는 단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 호놀룰루가 버뮤다(Bermuda)인데 근세기에 지금의 태평양 중앙에 위치하는 하와이 섬으로 지명을 뒤 바꿀 수밖에 없는 어떠한 일이 있어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조작하고 꾸몄다면 그래서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거나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이라면 그곳에 기존 다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나 또는 아시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또는 강제적으로 지금 호놀룰루로 이동시켰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세기에 서양세력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또는 강제적으로 인구를 이동시켰다고 하는 설(舌)로만 전해지던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정황인 것이다.
(4)필라델피아 영사
상이 이르기를,
“필라델피아 영사(領事) 데이비스[戴肥時;Davis]와는 종종 만나 보았는가? 그리고 그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니, 박정양이 아뢰기를,
“거리가 조금 멀어서 종종 만나 보지는 못하였고, 그는 상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뉴욕 영사 프레이저[厚禮節;Frazer]도 상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4)항 경우에도 승정원일기 (3)번과 연결되는 기록인데 임금 고종(高宗, 1852-1919,재위:1863-1907)이 말하기를
“필라델피아 영사(領事) 데이비스[戴肥時;Davis]와는 종종 만나 보았는가?
하였다는 것은 이 박정양이 조선을 떠나 간곳이 바로 필라델피아와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전권대사이니 워싱턴DC(Washington)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Philadelphia)까지의 거리는 북동쪽으로 약197km 이고 다시 직선 선상에서 필라델피아에서 뉴욕(New York)까지의 거리가 129km 이다.
다 합해 서울에서 대구(大邱)거리(310km)정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멀지 않는 길이기에 가끔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더불어 뉴욕에 있는 조선주미영사 프레이저 역시 그렇게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미국전권대사직을 사임하기 1889년 이전까지 박정양이 활동한 곳은 바로 미국 애팔래치아산맥(alachian Mountains)의 동쪽 기슭 펜실베이니아주(Philadelphia 州)의 필라델피아와 뉴욕 그리고 워싱턴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朝鮮) 고종(高宗)이 있었어야 할 위치[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바탕으로 본 블로그가 그려본 위 지도를 한번보자.
현 역사가 주장하는 대로 조선이 한반도라 하여 박정양이 한반도를 출발하였을 것이고 미국으로 가자 치면 반드시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를 중간 기착지로 하였을 것이며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거나 아니면 호놀룰루에서 남미 남단으로 휘돌아 다시 북상하여 북아메리카 워싱턴으로 들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예상 할 수 있다.
만약 육지로 간다고 할 때 켈리포니아 세크라멘토(Secramento)에서 다시 대륙횡단철도(大陸橫斷鐵道, Transcontinental railroad)로 오하마를 경유하여 어렵게 워싱턴으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경로를 일단 예상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지로선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대륙횡단철도(大陸橫斷鐵道, Transcontinental railroad)가 1900년 이후에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고 보았을 때 그가 한반도 조선에서 워싱턴으로 들어갈 수 있는 행로는 쉽지 않았을 것이란 예상을 할 수가 있으며 남아메리카 남단을 휘돌아 북상하여 북아메리카 동부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엄청 어려운 행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행로 설정은 지극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미국인 영사를 두고 뉴욕에도 미국인 영사를 두면서 워싱턴수도에 전권대사까지 둘 정도라면 왕래가 이렇게 힘들 순 없는 것이다.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 도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여러가지 기록을 보았을 때 미국과 조선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1889년이라면 신미양요가 있었던 시점에서 18년 정도 흐른 시점이다.
위 설정이 아닌 세계삼한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행로로 치자면 즉 호놀룰루가 대서양 북아메리카 대륙 남부에서 600마일(965km)떨어진 버뮤다(Bermuda)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경로라야만이 빈번하게 미국과 접촉이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버뮤다(Bermuda)가 단향산(檀香山)이고 박정양이 뱃길에 들렀던 연로(沿路)라면 분명 조선(朝鮮) 고종이 있었을 서울(한양)은 한반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를 깃점으로 서쪽 방향에 있어야 하고 가장 가능한 곳이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아 순조(純祖, 1790-1834,재위:1800-1834)때 안동김씨(安東金氏:구안동, 신안동) 시파(時派)세력이라고 판단되는 영국(英國) 런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감히 추측할 수 있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영국에서 출발하여 버뮤다를 거쳐 워싱턴으로 들어가는 길은 매우 합리적이고 임금이 박정양에게 연로(沿路)라는 용어를 쉽게 쓸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놀라운 사실인가?
나는 여기서 한 발자욱 더 나아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미국전권대사라는 것은 일개 조그만 나라에서 둘 수 있는 관직명이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미국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영역에서 모든 나라를 영향권에 넣고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직책이라고 보이며 조선이 비록 1881년에 해체 되었을 망정 그러한 권력을 조선을 대신하고 있을 때 그러한 권력에서 나올 수 있는 직책으로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권을 누릴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것은 대조선과 마찬가지의 영향력을 가진 세력권에서 그것이 만약 고종이라면 임금을 대신할 수 있는 대사라는 위치에 있는 관직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양은 당시 대조선의 권한을 안동김씨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영국이라고 보았을 때 영국의 미주대사, 혼 라이오넬 색빌 웨스트(Hon. Lionel Sackville-West, 1827-1908,재임1881–1888)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할 것이다.
또 하나는 현재 경향신문에서 발견한 것인데
(5)집수 고종시대사 3집(경향신문)
년월일 1888년(戊子, 1888, 淸 德宗 光諸 14年, 日本 明治 21年) 6月 12日(壬辰)
기사제목 「아메리카」人 「알·엣츠·데이비스」
「아메리카」人 「알·엣츠·데이비스」(戴肥時)에게 代辦通商事務(名譽領事)의 任을 特授하여 「필라델피아」에 駐箚케 하다.
[출전]
舊韓國外交文書 第10卷 美案 553號 高宗 25年 6月 15日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高宗 25年 6月 14日[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 총영사집이라는데 한반도 조선에 있는 관청보다 더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위 기사는 박정양과 고종이 대면하기 1년 전 상황을 기사화 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 조선말엽이라고 하지만 위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주미영사(領事)로서 필라델피아영사를 맡긴 위인이 아메리카인 알 엣츠 데이비스(戴肥時,Davis)라는 사람이라는 이야긴데 1년 후 승정원일기 고종26년(1889) 고종과 박정양의 대화에서 보면 고종(高宗)이 이 사람의 동태를 자세히 알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뉴욕 영사(領事) 프레이저 역시 아메리카인 데이비스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역시 그렇다고 박정양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정리하고 볼 것은 당시 조선에서 필라델피아주재와 뉴욕주재에 임명해야 할 영사가 필요하여 인사를 해야 함에 있어 조선인은 마땅한 사람이 없어 아메리카인을 썼다는 내용이다.
참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은 당시 우리가 반도역사에 심취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런식의 기록은 곤란하다 할 것이다.
당시 조선인을 다 미개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이런 도식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식에 맞지 않는 조악한 기록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조선에서 미국에 영사할 사람 즉 마땅한 인재 하나 없어 조선의 주미 영사를 미국인을 쓴다든지, 영국인을 쓴다든지, 독일인을 쓴다는 것인지 매우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조선에는 문명인이 하나도 없고 전부 미개인만 사는 것처럼 스스로 비하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말기에 우수한 과학자, 언어학자, 문학가, 음악가,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도 없었겠는가?
주요한 기록은 다 삭제해 버려 없어졌지만 그렇더라도 남아 있는 것을 한번 자세히보라.
없는 것이 아니다.
위와같이 미국인, 영국인, 독일인을 외교관으로 썼다는 것은 대조선이 과거 그랬던 것처럼, 지금 미국처럼 미국계, 영국계, 독일계라고 왜 생각을 못하는지 알 수가 없어 하는 말이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조선시대 붕당(朋黨)은 당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081
이들은 동양인을 한정한 한반도 조선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던 세력으로서 대조선의 다문화, 다인종적인 인사(人事)조치라는 것을 분명코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모든 우리의 구성원들이 역사적으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삼한역사 철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한반도 조선이라 하여 작은 역사, 초라한 역사가 아닌 세계를 지배하던 대조선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정치적 구도에 의한 임명제도이고 인사조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인사조치가 있었곳이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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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횡단철도(大陸橫斷鐵道, Transcontinental railroad)는 미국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첫 대륙횡단철도는 6년간의 공사를 거쳐 1869년 완공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세크라멘토(Secramento)에서 네브래스카 주(State of Nebraska)의 .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6270km)과 연결되는 미주리 강 (Missouri River, 4130km) 서안에 위치하는 오마하(Omaha)를 잇는 길이 2826킬로미터(1756마일)의 철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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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놀룰루(Honolulu, capital of Hawaii, Hawaiian capital)
미국 하와이주(州) 오아후섬 남동부에 있는 하와이주의 주도(州都).
호놀룰루(Honolulu)는 하와이어로'보호받는 곳(place of shelter)'또는'보호받는 만(sheltered bay)'을 의미한다고 했다.
호놀룰루(Honolulu)는 미국의 50번째 주인 하와이 주의 주도(州都)이다.
177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 이 발견했을 당시에는 원주민만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1816년 시제(市制)가 시행되고 19세기에는 포경기지(捕鯨基地)로서 발전하면서 동시에 태평양상의 섬의 도시라는 특이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항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태평양의 십자로(Crossroads)로서의 기능을 하였는데 1900년 진주만(眞珠灣: Pearl Harbor)에 해군주요기지가 설치되고부터 군사 관련산업이 관광산업과 더불어 호놀룰루시의 경제적 기초를 이루었다.
파인애플·설탕 산업 등도 중요하다.
이 섬은 아열대 기후인 데다가 오아후섬(Oahu Island)의 다이아몬드헤드(Diamond Head)언덕에서 알라와이 운하(Ala Wai Canal)까지 약 4.23Km에 이르는 지역을 와이키키 해변(Waikii Beach)라 하여 경승지로 하고 세계의 낙원도시’라는 별명을 가진다.
18,19세기1794년 영국의 선원 윌리엄 브라운 선장이 항구에 항해를 할 때, 호놀룰루는 폴리네시아인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배들도 항구를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호놀룰루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1800년대 동안에 호놀룰루는 백단 재목 거래의 중심지로, 후에 태평양에서 고래잡이의 기지로 번창하였다.
1820년에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호놀룰루에 왔다. 그들은 많은 학교들과 개신교 교회들을 지어, 하와이 원주민들을 개신교 신자로 개종시켰다.
19세기 후반에는 농부들이 파인애플과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일본,조선에서 이민온 노동자들이 파인애플, 사탕수수 농장과 식품 공장에 일하러 들어왔다. 1896년에 호놀룰루는 약 30,0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와이 왕국의 초대 국왕 카메하메하 1세(Kamehameha I,1758-1819)가 호놀룰루에서 1803년부터 1811년까지 살았다. 1845년에 하와이 왕국의 정식 수도가 되었으며, 1900년에 하와이가 미국 영토가 되었을 때 수도로 남아있었다. 1907년에 하와이 시와 군청이 설립되었고,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되었을 때, 주도가 되었다.
20세기1900년대 초반에는 미국 정부가 진주만에 해군 기지를 세웠고, 오아후 섬에 육군 기지 몇개를 세우기도 했다. 군사 근무와 함께 호놀룰루의 인구가 1920년에 약 95,000명으로, 1930년에는 137,000명으로 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다.
호놀룰루는 연합국의 일본군에 대항할 큰 기지가 되었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는 호놀룰루에 중요한 사회, 경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 일본과 다른 아시아의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은 도시에서 정치와 상업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아시아계의 주민들이 호놀룰루의 정부와 산업의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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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버뮤다(Bermuda)
북대서양에 위치해 수백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영국령의 섬
미국 해안에서 약 600마일 떨어져 있으며, 수도는 해밀턴(Hamilton)이다.
7개의 큰 섬과 138개의 산호섬을 포함한 18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이 사는 섬은 20여 개에 불과하다.
주도(主島, Main Island)는 세인트조지, 세인트데이비드, 서머싯 등 7개의 큰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지리학상으로 하나의 섬으로 취급하여 그레이트버뮤다(Great Bermuda)로 불린다.
버뮤다 제도(諸島, Bermuda Island)는 1505년 에스파냐인(Spanish navigator) 선장 후안 드 베르무데스(Juan de Bermúdez:?-1570)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어졌다. 1684년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1609년 영국인 G.소머즈 일행이 이곳에 정착할 때까지는 무인도로 있었다가, 1684년 영국령이 되었다. 1797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육군 주둔지와 해군기지로 이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영 양국의 정상회담이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1834년까지 노예제도가 성행하였다. 버뮤다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는 남부 항구들로 건너가려는 밀항자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으며, 1919~1933년 금주법 실시 당시에는 미국으로 럼주를 밀반입하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또한 1941~1995년까지 미국 해군 및 공군 기지로 사용되었다.
버뮤다제도와 플로리다, 푸에르토리코를 잇는 삼각형의 해역을 버뮤다삼각지대(Bermuda Triangle, 三角地帶) 또는 마의 삼각지대(Devil's Triangle)라고 하는데 이 해역은 비행기나 배의 사고가 잦아 '마의 바다'라고 불리며, 세계 미스테리로 여겨졌지만 이는 우연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버뮤다 제도는 북대서양 서쪽에 있는 영국령 자치 식민지로, 갈고리 모양으로 산재한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7개의 큰 섬과 150여 개의 작은 섬들, 그리고 바위들이 38km에 걸쳐 갈고리 모양으로 흩어져있는데, 이 중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20개에 불과하다.
섬의 주위에는 해안과 평행으로 산호초가 펼쳐지고, 각 섬은 너비 400m에서 3km의 크기에 평탄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도 중앙부에 있는 주도(主島) 메인섬(그레이트버뮤다 섬)은 너비 약 2km, 길이 24km의 길쭉한 섬이며, 중앙에 수도인 해밀턴(Hamilton)이 위치한다. 메인 섬은 실제로는 7개의 큰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지리적으로 단일한 섬으로 취급되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버뮤다 제도의 총 면적은 53.1㎢이다. 수도는 해밀턴으로, 1815년에 세인트조지 (St. George)에서 해밀턴(Hamilton)으로 옮겨졌다. 버뮤다는 군사적으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아일랜드섬에는 영국의 해군기지, 세인트데이비드섬과 해밀턴섬 서부에는 미국의 해·공군 기지가 있다.
버뮤다는 아열대성 기후 특성이 강하며, 온화하고 습한 특징을 보인다. 멕시코만류의 영향으로 겨울 기온이 17℃, 여름 기온이 26℃이고 연평균 기온이 22℃ 정도로 온난한 기후와 1년 내내 고루 내리는 적당한 강우량 때문에 열대식물이 무성하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강풍이 분다.
버뮤다는 흑인인구가 가장 많으며(54.8%), 그 다음으로 백인 34.1%, 혼혈 6.4%, 기타 인종 4.3% 등으로 이루어졌다(2000년). 공용어는 영어이고 포르투갈어도 사용한다. 종교는 성공회(23%)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카톨릭(15%),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교회 (11%), 그외 개신교 (18%) 등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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