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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嘉平)은 시카고(Chicago)이고 풍성(風城) 또는 지성(芝城)이다.
글쓴이:한부울
춘전시(春田市)는 영어로 스프링필드(Springfield)이다.
이것은 가평이 고려 현종 9년에 춘천에 예속될 때 춘천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천(川)이 전(田)으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느낌은 같다.
천이 밭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니 다르다 할 수 없다.
사암선생(思菴先生)文集卷之一박순(朴淳:1523-1589)
1648년(인조 26) 박순의 자손들이 편집·간행했고, 1857년(철종 8) 중간되었다.
[동호:세계삼한역사연구]
[위지도는 구글 위성지도인데 춘전시라는 것이 보인다. 세계삼한역사연구]
七言絶句
嘉平館。
次成天使韻。가평관(嘉平館)에서 이에 (中國:高麗)사신이 운(韻)을 떼길
夾街松影拂雲平。좁은 거리 소나무의 그림자를 털어내듯 구름처럼 평(平)하고
洞裏官居久著名。동네 안에 관리가 거하는 곳은 오래되고 유명하다 하네.
水碧沙明環十里。물이 맑고 모래가 반사되는 반짝이는 빛이 10리를 비추니
不知何似閬風城。芝城. 이름이 풍성(风城), 지성(芝城)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네.
위 시귀는 사암문집에 있는 가평관을 읊은 칠언절구이다.
박순(朴淳,1523-1589)은 위 사암문집을 펴낸 조선 중기문신이고, 학자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명종 (明宗, 1534-1567,재위1545-1567)때 우의정, 좌의정에 이어 선조(宣祖, 1552-1608,재위1567-1608)때 영의정으로 14년간 재직했던 인물이다.
동서(東西)당쟁 속에서 이이(李珥:1536-1584), 성혼(成渾1535-1598)을 편들다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은거했으며 본관 충주(忠州)이고 자 화숙(和叔), 호 사암(思菴)이다.
사암선생 문집은 정식으로 번역되지 못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를 풀어보니 가평관에 머문 고려사신이 읊은 칠언구절 시(詩)를 기록한 것으로서 그곳 고을, 동네 이름이 풍성(風城) 과 지성(芝城)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천사(天使)라 했으니 중국사신이라 할 수 있으나 삼한역사관으로 보았을 때 조선에서 지칭할 때 고려사신을 중국사신이라 하였다고 볼 수 있으니 고려사신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사신이 조선 땅 가평관(嘉平館)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감회에 젖어 읊은 시(詩)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시 끝머리에 이 가평관이 있은 곳 고을 또는 동네를 풍성(風城) 또는 지성(芝城)이라고 한 것을 몰랐다고 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가평관이 있었던 곳은 풍성(風城)이고 지성(芝城)이라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바로 한어자료를 보면 시카고(芝加哥, Chicago)를 풍성, 지성이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常见的别名包括:“第二城”,“风城”,“芝城”等。风之城、
즉 옛날 별명으로 : 제2성((第二城),풍성(风城),지성(芝城)등으로 불리었고 풍지성((风之城)즉 바람의 성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다.
역시 한어자료와 다르지 않게 영어자료에도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 즉 풍성(風城)이라는 "Windy City"라는 별명이 있다 하였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3가지의 설명이 있는데 첫째는 시카고의 날씨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인데 시카고는 미시간 호와 가까이 있어 그러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고 두 번째는 엑스포와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고, 세 번째는 미국 오하이오주(州) 신시내티(Cincinnati)와의 경쟁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설명은 관심이 덜하다.
그러나 첫번째 설명 즉 미시간호수 주변에 있었으니 캐나다 빙하가 녹아 부는 바람이 호수를 타고 시카고로 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얼마나 바람이 심했으면 풍성(風城)이라고 하였겠는가?
이 시카고 역시 19세기 이전 역사는 변변한 것이 없다.
미국 도시가 대부분 다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으로 "Windy City"라는 별명이 언급된 것은 1858년 미국의 일리노이 주 시카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요 일간신문으로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을 통해서였다한다.
19세기 초에는 시카고강의 하구부에 있는 시골(!)이었으나, 중서부의 개척이 진전됨에 따라 오대호의 수운을 배경으로 곡물이나 가축류의 일대 집산지가 되고, 산업자본주의 발달기에 이들 농산물이나 가축의 가공을 비롯하여 농기구, 기계, 화학, 인쇄, 출판 등의 공업이 발전하면서 현재 철도는 대륙횡단 철도(1900년완공)의 태반을 비롯하여 23개의 철도가 시카고에 기점을 가지며, 도로는 미국 각지로 발달하고, 오대호 수운은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 부근을 흐르는 세인트 로렌스강(Saint Lawrence river)의 물길을 대규모로 개발하여 외항선이 대서양에서 오대호까지 직접 항행할 수 있게 이어놓은 수로로서 길이가 약 3,800km나 되는 세인트로렌스 수로(水路)(Saint Lawrence Seaway)의 개통으로 대서양과 직결되어 1만 t급의 외항선이 입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교통상의 좋은 입지조건으로 시카고는 19세기부터 각종 박람회, 국제회의 등의 개최지로서 알려져 왔다.
이 시카고를 지형적으로 보면 미시간호(Michigan Lake:湖)로 흘러드는 시카고강(cichago 江)의 하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湖)안에서 내륙으로 수십km 들어가면 호(湖)안에 병행하는 빙하시대의 종퇴석구(終堆石丘, end moraine, terminal moraine)가 활모양으로 이어진다 하였고
시카고의 배후지(背後地, hinterland)는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동부에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유역 중부에 이르는 온대내륙에 넓게 발달한 초원이 있다 하였다,
동서길이 약 1,000km, 남북길이 약 2,000km인 프레리(prairie)라고 부르는 중북부의 저평한 구조평야(構造平野, structural plain) 또는 침식평야로 서부까지 이어지는 대초원(大草原)지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가평이라는 지명과 매우 어울린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조평야라 함은 퇴적된 지층이 오랜 시간동안 지각변동을 받지 않고 수평지층상태를 유지하여 낮은 고도에 평탄한 지형을 이룬 평야를 말하는데 시카고 주변은 낙엽침엽수가 많으며 백인이 이민하기 전에는 40% 이상이 삼림으로 뒤덮인 곳으로 그 사이에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하며 기후는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이 -3.3℃, 가장 더운 7월 평균기온이 24.3℃로 한국의 서울과 비슷한 날씨이나 서울보다 대륙성이 강하고, 특히 겨울은 캐나다의 극북(極北)에서 남하하는 한랭기단을 막아낼 수 있는 지형적 장벽이 없으므로 기온이 하강-25℃까지 기온이 내려가며 반대로 여름에는 내륙의 건조열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38℃ 이상의 고온으로 상승할 때도 있다 한다. 이런 기후로 인한 바람이 강하여 풍성(風城)이라고 하는 영어‘윈디시티(Windy City)’라고도 부른다는 두산백과의 설명이며 이 도시의 특징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설명에서 보면 바로 숨길 수 없는 대평원(大平原)과 대초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가평(嘉平)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아래는 한반도에 가평(嘉平)이라는 지명이 사라졌음을 이야기 한 글이다.
소설가 황천우씨가 가평저널에 기고한 글[사라진 지명 가평-2012년 04월 02일 (월) 16:34:50]을 보면 우리가 새겨야 할 이야기가 나온다.
가평의 여러 제반 정황을 종합하여 고려해볼 때 현재 한문지명 加平은 왠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옛 인명이나 지명 등은 대체로 그 사람이나 지역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거나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한문지명 加平은 의미는 물론 특성마저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먼저 平(평)에 대해 살펴보자. 平은 ‘평평하다’란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라 혹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나 고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평에 ‘더하다’라는 뜻의 ‘加’가 앞에 사용되고 있다.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이를 부연하기 위해 평자가 들어간 지명을 살펴보자.
물산이 풍부한 마을이라 해서 富平(부평)이고,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이라 하여 淸平(청평)이다. 쑥이 많은 마을이라 해서 蓬坪(봉평)이고, 모래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沙平(사평, 전남 순천의 옛 지명)이다. 이처럼 지명은 그 지역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는 가평현에 대한 기록이다.
“본래 고구려의 근평군인데 신라가 가평군(嘉平郡)으로 고쳤고, 조종현은 본래 고구려의 심천현인데 신라가 준수로 고쳐서 가평군(嘉平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가 조종으로 고치어 현종 9년에 가평(嘉平)과 함께 모두 춘천 임내에 붙였으며, 본조 태조 5년에 비로소 가평감무(加平監務)를 두고, 인하여 조종현을 이에 붙이었다. 그 뒤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상기의 글에 따르면 가평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고구려시대다. 고구려가 가평에 주둔했었다고 하면 광개토왕시절로 가평을 근평 혹은 병평으로 불렀고, 이어 신라의 경덕왕이 점령하면서 ‘嘉平’으로 고쳤다고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실려 있다.
“嘉平郡本高句麗斤平郡。景德王改名
가평군은 본래 고구려 때 근평군으로 신라 경덕왕 때 개명되었다.“
윗글에서처럼 아름다울 ‘嘉’ 즉 ‘아름다운 고을’의 嘉平이라 하면 의미나 특성상 가평의 이미지와 바로 연결된다.
그런데 嘉平이라 했던 것이 아름다울 嘉자의 뜻을 지닌 ‘악기 이름 ?(주)’는 사라지고 음가만 지닌 加자로 바뀌고 만다. 가평이 고려 현종 9년에 춘천에 예속되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5년에 감무를 설치하면서 ‘嘉平’이 느닷없이 ‘加平’으로 변했으며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상의 글에서 보듯이 현재 한반도에 가평(加平)은 후세에 만들어진 지명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소위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말이다.
지형 역시 한반도 가평(加平)을 진실로 한번보자.
그러면 알 것이다.
가평(嘉平)이라고 지명이 붙으려면 적어도 북아메리카의 대평원과 대초원을 끼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넓고 넓은 뜻을 나타내는 평원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아름다울 가(嘉)를 붙여 표현했겠는가?
가평 가(嘉)의 뜻을 사전에서 보면
1. 아름답다
2. 기리다
3. 경사스럽다(慶事)
4. 칭찬하다(稱讚)
5. 기뻐하다
6. 즐기다
7. 맛좋다
이다.
모두 하나같이 좋은 뜻의 한자이다. 이러한 뜻의 한자를 원래 가평지명에다 붙였던 것이다.
그냥 한반도의 지명 가평(加平)의 단순히 더할 가(加)는 분명히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가(嘉)를 고려(高麗)라는 려(麗:고울 려)와 비견된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다.
그래서 이를 가평(嘉平) 또는 가산(嘉山)이라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로 려평(麗平)과 려산(麗山)이라 하여 고려의 평원 또는 고려의 산이라 한들 어찌 잘못되었다 하겠는가?
고려의 사신들이 오는 가평관이 있는 그곳은 대초원이 있고 대평원이 있는 이곳이 바로 풍성(風城) 의 땅이며 또는 지성(芝城)의 땅 임을 어찌 우리가 모른다고 할 것인가?
그곳이 놀랍게도 시카고(Cichago)란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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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52권
평안도(平安道)
가산군(嘉山郡)
동쪽은 박천군(博川郡)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같은 군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정주(定州) 경계까지 25리, 북쪽은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36리이다.
【누정】 적개정(敵愾亭) 대령강 위에 있다.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지나다가 지어준 이름이다. 첨허정(瞻虛亭) 가평관(嘉平館) 서쪽 1리에 있다. 『신증』 신정(新亭)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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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고 제1권
연계기정(燕薊紀程) ○ 무자년(1828, 순조 28) 11월 11일
눈. 박천(博川) 대정강(大定江) 40리를 가서 나루를 건너고, 군수는 장언급(張彦汲) 가산(嘉山) 30리를 가 가평관(嘉平館)에서 잤다. 군수는 서유민(徐有民)
청천강은 안주성 밖에 있는데, 관서 지방에서 청남(淸南)이니 청북이니 하는 일컬음은 이 청천강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강물이 반쯤 얼어 수십 리를 돌아서 상류에서 나룻배로 건넜다. 누각이 있는데 범성각(泛星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때마침, 함박눈이 펄펄 날리고 북풍이 윙윙 불어대니 북과 피리 소리가 바람에 날리고 사람은 들레고 말은 큰소리로 울어대었다. 내가 말 타는 옷차림으로 말안장에 걸터앉아 넒은 들판에서 손가락질하며 돌아보고 있노라니 불현듯이 국경으로 출정하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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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2년 병자(1456,경태 7) 11월16일 (임오)
한명회가 수령의 추핵·노비의 정속·둔전의 일 등에 대해 단자를 아뢰다
1.평안도(平安道) 큰 길 여러 관(館)이 생양관(生陽館)은 중화(中和)이고, 안정관(安定館)은 순안(順安)이고, 숙녕관(肅寧館)은 숙천(肅川)이고, 안흥관(安興館)은 안주(安州)이고, 가평관(嘉平館)은 가산(嘉山)인데, 모두 그 읍(邑)의 객사(客舍)를 쓰고 따로 관우(館宇)를 세우지 않았다가 사객(使客)이 내왕할 때를 당하여 여러 읍으로 하여금 공력(功力)을 나누어 수치(修治)하기 때문에, 소재읍(所在邑)에서 마음을 써서 간수(看守)하지 않았다가 다시 사객의 행차가 있으면 무리로 모여서 역사하여 여러 날을 두고 수치하여, 그 폐단이 무궁합니다. 소재읍에서 수치하는 것과 전과 같이 여러 읍에서 나누어 수치하는 편부(便否)를 본도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물어서 아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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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 주에, “신안관은 정주(定州)에 있으며, 앞에 누(樓)가 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신안관은 부(府) 안에 있다.- 다시 70리를 가면 가평관(嘉平館)에 이른다. -살펴보건대, 가평관은 가산군(嘉山郡)에서 동쪽으로 3리 되는 곳에 있다.- 다시 50리를 가면 안흥관(安興館)에 이른다. -《조선부》 주에, “안흥관은 안주(安州)의 성안에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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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6년 계사(1593,만력 21) 2월17일 (임인)
가평관 서헌에 이어하다
○上移御嘉平館西軒
상이 가평관(嘉平館) 서헌(西軒)에 이어(移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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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6년 계사(1593,만력 21) 2월18일 (계묘)
상이 안주에 머물다
○癸卯/上發嘉平館, 次安州。
상이 가평관(嘉平館)을 출발하여 안주(安州)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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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정 제1권
출성(出城) ○ 계해년(1803, 순조 3) 11월[1일-22일]7일(무술)
갰다 흐렸다 함. 박천(博川) 나루 40리를 가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가산(嘉山) 30리를 가서 가평관(嘉平館)에 묵었다. 파발 편에 가서를 올리고 또 두 차례의 글을 받았다.
청천강(淸川江)
강은 안주 군영의 성 북쪽에 있다. 서도(西道)의 길에서 청남(淸南)과 청북(淸北)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강을 한계로 한 것이며 또는 살수(薩水)라고도 부른다. 세간에 전해지기는, “한대(漢代)의 공수(龔遂)가 청천강을 건넜는데 그 물을 떠서 맛보고 말하기를, ‘상류에는 틀림없이 보살(菩薩)이 있을 것이다.’라고 해서, 그 말에 따라 강물의 이름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역사책에 공수가 동쪽에 왔다는 글이 없고, 또 서한(西漢) 시대에 어찌 보살이라는 명칭이 있었겠는가. 틀림없이 제해(齊諧)의 설일 것이다. 강이 완전하게 결빙하지 않아 상류로 해서 구불구불 건넜다. 관에서 운행하는 짚을 이은 배가 있는데 ‘범성각(泛星閣)’, ‘승산정(勝山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얼음 위를 걷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하여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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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정 제4권
돌아오는 길[復路] ○ 갑자년(1804, 순조 4) 3월17일(병오)
雨。嘉山六十里嘉平館午餐。博川四十里大定江秣馬。安州四十里安興館宿。
비. 가산(嘉山)까지 60리를 가서 가평관(嘉平館)에서 점심을 먹고, 박천(博川)까지 40리를 가서 대정강(大定江)에서 말을 먹이고, 안주(安州)까지 40리를 가서 안흥관(安興館)에서 잤다.
박천강에서[博川江]
대정강(大定江)이 가산(嘉山)과 박천 사이에 있는데 바다 조수가 드나들어 배가 몰려들므로, 강가 백성들이 대부분 부요하고, 박천 원 역시 오로지 이곳의 생리(生利)에 힘입게 된다.
여기서부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전진하여 영변부(寧邊府) 지경을 지나며 바라보니 약산(藥山)이 서남쪽에 서려 있는데, 소나무의 푸른 그늘이 아물아물 아득하고 구름과 안개가 날리며 모여,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팔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청천강에 이르자 해가 벌써 넘어갔으므로 횃불을 들고 안녕성(安寧城) 동문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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