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

한부울 2012. 7. 26.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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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altai)가 어딘가?

 

글쓴이:한부울

 

록키산맥이 알타이가 되어야 하고 그 알타이 내에 백두산과 태백산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크게 보아야 대목에는 첫째 언어군문제가 있고 둘째로는 알타이가 신라와 연결되고 그 매개는 금이라는 사실이며 세째는 위의 사실에 근거한 지형적인 문제를 따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성급한 결론일 수 있지만 혼란스럽게 여기며 읽는 사람들의 사고를 정돈할 필요성이 있어 먼저 결론을 내린다면 알타이의 위치는 지금 알타이산맥보단 로키산맥(Rocky Mountains)이 더 합당한 것이라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하면 여러가지 종합적인 면을 따져서도 그렇다고보지만 아래 열거하는 역사적 근원(根源)이나 그에 따른 동기(動機)들이 현재 알타이산맥은 삼한역사를 기본으로 할 때 매우 부족하다고 여기는 입장에 있으며 오히려 이러한 역사관계가 지형적 관계 그리고 동기부분에서 나타나는 조건들이 로키산맥이 더 근접하고 이치적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럼 본 블로그가 생각하는 근원과 동기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먼저 언어학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알타이(altai)라고 하면 무조건 우리나라 언어와 연관시켜 생각한다.

알타이어족이라고 붙인 것은 일제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언어가 우랄알타이어족(Ural-Altaic languages)군(群)이라고 하기 시작한 것은 1844년부터이다.

 

그러나 이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군은 상당히 불명확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알타이란 위치와 언어가 생각보다 많은 허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소 한반도와 우랄알타이란 지역적인 문제에서도 반도사를 기준으로 할 때 그 역사가 담보되지 않는 심각한 거리적인 한계가 있고 그로 인한 이해관점에서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알타이란 명칭의 원류를  찾다 보면 우리가 나름대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민족의 삼한역사가 반도사가 지정한 것처럼 한반도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역사가 기어코 한반도 역사이라면 알타이와 우랄과 관계가 없어 연관을 시킨다는 자체가 가당찮은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언어가 아무리 같은 고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구이동과 결부되는 역사와 무관하다는 것은 그 사실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많은 세계언어학자들이 현재 알타이산맥을 기준으로 하는 알타이어족의 생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반도사를 아무리 뜯어 보아도 러시아 북부에 위치한 우랄산맥과는 아무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반도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라면 이 알타이와 우랄이란 명칭은 현재 위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분명 존재한 지명이고 명칭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우랄산맥(Ural Mountains)은 러시아대륙을 동서로 양분하는 분계선으로 동유럽러시아를 시베리아전역과 구분을 할 수 있는 산맥으로서 러시아 북부지역을 세로로 갈라 남에서 북으로 뻗어 있는 산맥이며 길이 총 2,000km이다.

알타이산맥(Atai Mountains)은 러시아 영역으로서 중앙아시아에서 북동아시아에 가로로 걸쳐 있는 산맥을 주봉으로 하여 말하는 것이며 몽골지역내에 알타이 서부를 기준으로 가로로 내려 뻗고 있는 산맥인데 그것을 몽골리안알타이산맥으로부르며 길이는 우랄과 비슷한 2,000km이고 매장광물로 납, 아연, 주석, 금, 백금 등이다.

그러니 고비사막 서북부에서 러시아(서시베리아)와 몽골, 카자흐스탄, 중국에 접해 있는 산맥인 것이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두 거대한 산맥을 기준으로하거나 배경으로 하여 우랄알타이어족(Ural-Altaic languages)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현재 위치적으로 보았을 때도 알타이와 우랄을 같은 언어군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웬지 뭉뚱그려 넣은 것 같은 인위적인 분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전통적으로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지금의 시나(sina:新中國)속에 한족어(漢族語)는 왜 우랄알타이어족(Ural-Altaic languages)에 속하지 않고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s, 대부분의 아시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의 언어)에 끼이는가 하는 질문이다.

현재 위치적인 문제에서 알타이 산맥과 동 떨어져 있다고 판단되는 동아시아에 알타이를 묶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다.

그렇지 않는가 한반도 보다 중국이라고 한 동사이아대륙의 한어족이 더 가까울 것인데 그래서 인구이동도 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우랄알타이어족(Ural-Altaic languages)이라 하여 지역적으로 거리가 있다 싶은 한반도는 나누어버리고 오히려 가깝다고 느낄 한어족은 인도유럽어족으로 분류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의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알타이산맥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반도 북쪽 동시베리아나 바이칼 호수(Baikal Lake)를 근거하여 점차 따뜻한 기후에 따라 남쪽방향으로 이동하여 생긴 언어라면 한반도에 근거하는 한글이 퉁구스어족, 또는 바이칼(Baikal Lake)어족이라고 하면 그나마 이해가 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난데없이 우랄, 알타이산맥을 기준으로 하여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환경(역사판짜기)에 따라 뭉뚱구려 분류틀에 넣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가 우랄알타이어족으로 구분하는데 대한 세계 언어학자들의 부정적인 의견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우랄알타이어족(Ural-Altai語族)이라함은‘우랄어족(Ural)’과 ‘알타이어족(Altaic languages)’을 가까운 갈래의 것으로 보고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우랄 알타이어(族)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에 인도(印度indo:india;東西印度)에서 산스크리트어(Sanskrit, 梵語)를 배우던 서양학자들이 이 언어가 그리스어(Greece)와 라틴어(Latin)등 서양 고전 언어(Western Classical Language)와 유사성을 발견하고, 이 언어들이 본래 한(하나)조상언어(proto-language)에서 나왔을 것이란 가설을 제기해 인도유럽어(Indo-European languages)의 개념과 어족의 개념이 생기면서 부터였다.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산스크리트어에는 호남 방언이 섞여 있다는 점도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인도유럽어(Indo-European languages)는 18세기 말, 13개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28개의 언어를 해독 할 줄 알았던 캘커타 고등법원의 판사였던 영국인 월리엄 존스(William Jones, 1746-1794)는 인도인들의 신성한 언어인 산스크리트어(Sanskrit, 梵語)가 라틴어, 그리스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처음 발견했다 한다. 그리고 이 연구는 또 다른 영국인 의사이며 물리학자이고 생리학자, 언어학자인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1829)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그가 1813년에 비로소<인도유럽어족>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그가 판단 한 사실은 이 언어가 하나의 발상지에서 나온 단일민족이 이웃 민족들을 잇달아 침략하여 자기네 언어를 전파했으리라는 어마어마한 가정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뛰어난 하나의 민족이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는 흔적을 언어를 통해 발견한 것이다.

이어 자극을 받은 언어학자들이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큰 어족으로 분류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인도유럽어에 이어 등장한 것이 헝가리, 핀란드에서 터키, 몽고, 퉁구스언어들을 포괄하는 우랄·알타이어족이란 실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어족을 만들면서 한국어는 배제한 상태라고 하였지만 왜 한국어는 배제 되어야 했는가 라는 의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우랄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킨 이유가 잡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시기는 누차 이야기 하고 있지만 서양신진세력이 구세력을 몰아내고 세계역사에서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새 판짜기 하던 과정이었던 것이다.

구세력이 사라지고 신세력들이 전 세계지배질서를 잡았던 깃점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알타이(Altai, 阿爾泰)라는 말이 생긴 것이라는데 1844년으로 우랄(Ural)어족을 주로 연구했던 핀란드의 문헌학자, 비교언어학자인 마티아스 카스트렌(Mattias Aleksanteri CastrAn,1813-1852)에 의해서 란다.

그렇다면 이 알타이(Altai, 阿爾泰)가 처음 사용되었던 시기가 1844년이라는 사실이고 북아메리카 켈리포니아(California)에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goldrush)가 시작되기 4-5년 전 일이라 거의 동시대에 일이라고 해야 맞다.

이런 비유에서도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티아스 카스트렌(Mattias Aleksanteri CastrAn,1813-1852)은 핀란드어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시베리아 여러 언어들을 연구했고 시베리아에서 북유럽 핀란드까지 넓은 지역의 언어들이 한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과정에서 한국어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세계전역을 가름하고 있는 삼한역사를 놓고 볼 때 그의 행위에 많은 의문점을 갖는 것이다.

한간에 들리는 설에서는 그가 이 넓은 지역을 대표해서 지칭할 만한 명칭이 없자 이 전 지역의 대충 가운데쯤 위치한 큰 산맥인 우랄산맥과 알타이산맥의 이름을 따서 어족의 이름을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에서 매우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삼한역사를 덮어버리고 애쓴 흔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알타이어족은 20세기 후반 양심있는 언어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분류의 근원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의 역사언어학자 세르게이 아나톨례비치 스타로스틴(Sergei Anatolyevich Starostin, 1953-2005)은 우랄알타이어족을 “이제는 완전히 버려진 개념”이라고 말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랄어족은 그렇다 치고 알타이어족은 근원자체를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언어분류학을 마치 과학적인 것처럼 표면화 시킨 것은 물어보나마나 일제가 앞장서서 무리하게 계몽(啓蒙)이란 이름으로 강제했을 것이고 그러한 목적은 보나마마 한글과 일본어를 같은 개념에 놓고 그들의 저급한 역사를 짜깁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 세계 많은 언어학자들은 우리나라 언어가 인도유럽어족(印度-語族, Indo-European languages)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랄알타이어의 한갈래인 지금의 터키어 즉 투르크어라고 하는 것도 처음갈래가 아닌 한단계 변형된 언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할 이야기다.

 

인도유럽어족(印度-語族, Indo-European languages)에는 유럽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의 언어가 속하는 어족이라고 한다. 음(音)을 근거로 글자를 빌려오는 한자(漢子)가차(假借)로 인구어족(印歐語族)이라고도 하는데 근세에는 아메리카(America)지역에서도 널리 쓰임에 따라 현존하는 어족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로서 오늘날 인도유럽 공통 조어(祖語)에서 나온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약 30억 명, 즉 전체 인류의 거의 반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어족이다.

인도유럽어족에 제외되는 곳으로서 유럽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인도유럽어족이라면 유럽어디도 제외되지 않아야 하지만 유럽내에 어군분류에 제외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의심스러운 이야기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근세에는 아메리카지역에서도 이 인도유럽어가 널리 쓰였다는 사실인데 널리 쓰였다는 시기가 이태리출신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 발견 이후 인지 아니면 미국이 19세기 북아메리카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고 난 후 일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던 인도유럽공통조어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 

17세기부터 여러 언어 전문가, 특히 네덜란드의 언어학자들이 라틴어,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 그리고 현대 유럽언어들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했다는 것이고 그들은 이 언어들의 공통된 조상이 BC 6세기~BC 3세기경 남부 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최초의 기마유목 민족 스키타이족(Scythian)의 언어라고 생각했었다 한다.

 

스키타이족은 삼한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종족이다.

스키타이족(Scythian)은 유라시아 내륙의 광대한 초원지대에서 활동했던 세계 최초의 기마유목민인데 이란계 언어를 쓰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스키타이, 페르시아인은 사카(Saka)라고 불러 왔지만 그들은 고유 문자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또 스키타이는 흑해 북쪽기슭 일대의 여러 유목민 전체에게 붙여진 이름이며 생활양식·문화에 관해서는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의 기록에 의한 것이 많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예로부터 흑해 북쪽기슭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키타이는 아시아의 유목민으로 BC 8∼BC 7세기에 동방에서 서쪽으로 진출, 볼가강가에 출현하여 원주민 킴메르인(Cimmerians, BC 8세기-BC 7세기)을 내쫓고, 남러시아 초원에 강대한 스키타이국가를 건설했다 한다. 그리고 BC 4세기에는 돈 강 동쪽에서 온 사르마트인(Sarmatians:BC5세기-AD4세기)의 공격을 받아, 북 카프카스(North Caucasus)의 쿠반지방(Kuban)을 포기하고 본거지를 서쪽으로 옮겼다. 스키타이의 세력권은 크림반도와 드네프르강(Dnepr river)·돈강(Don river)하류지역 등 흑해 북쪽 기슭 일대를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다뉴브강(Danube river) 남부, 동쪽으로는 카프카스지방을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BC 3세기 중엽에는 사르마트의 압박을 받아 세력을 잃었던 민족이다.

 

                            Jug with Scenes of Scythians (Greek, ca. 350-325 B.C.)

 

그렇다면 이란계 스키타이족(Scythian)은 삼한에 속하는가?

신라가 이란계 페르시아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에서 이미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삼한역사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이 스키타이족의 전투시 들어난 잔인한 행동이 북유럽전체를 점령하였던 훈족(Hun, 375-469)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맥을 같이 할 수 있다 하겠다.

어쨌던 이 인도유럽어족이라고 처음 불렀던 영국의 언어학자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1829)이 주장한 하나의 발상지에서 나온 단일 민족이 이웃민족들을 잇달아 침략하여 자기네 언어를 전파했으리라는 가정을 내놓았다는 설은 스키타이를 매개로 삼지 않아도 우리의 삼한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은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우리의 글이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 뒤에 두 독일인 인도학(印度學)을 연구한 개척자 독일의 시인이며 철학자,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과 19세기 독일의 언어학자로서 저서《산스크리트, 젠드어, 그리스어, 라틴어, 리투아니아어, 고대슬라브어, 고트어, 독일어의 비교문법》를 집필한 프란츠 보프(Franz Bopp, 1791-186)는 이 연구를 이어받아 이란어, 아프가니스탄어, 벵골어, 라틴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어, 고대 아일랜드어가 인도유럽어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한다.

그러니 이 언어의 시초 민족은 실로 어마어마한 세계전역을 다스렸다는 가정과 그에 대한 뒤받침되는 증명이 이루어진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가 우랄알타이어족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인도유럽어족과 가깝다는 사실에서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것은 19세기 근세기 역사새판짜기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인도유럽어족에서 고의적을 빼 버린 느낌이 있으며 대신 알타이어족이라고 이름을 붙여 따로 떼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유럽어족에 한글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예를 들면 영어와 우리나라 언어가 상당히 비슷한 점이 속속 밝혀진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언어학적인 면에서 의구심을 풀어보았다.

그렇다면 알타이(altai)란 지명은 온전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알타이(altai)는 신라(新羅)와 깊이 연관되고 있으며 또한 금(金, gold)을 매개체로 한다는 것은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문제이고 지금은 알타이와 신라 그리고 금은 분리할 수 없는 역사고리라고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일단 신라(新羅)는 금(金, gold)과 상당히 친밀성 있게 결부된 왕조명이다.

신라는 전통적으로 김(金)씨 왕족이라 하여 금(gold)씨를 나타내는 성씨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면 금을 신성시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때문에 알타이는 예로부터 신성시한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가 알타이지역에 무차별 핵실험을 빈번히 할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어쨌거나 신라의 후예라고 판단되는 금(金:941-1234)나라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 완안함보(完顔函普:941-960)가 역시 신라의 후예 김함보(金函普, 김준:경순왕의 아들)의 증손 아골타(阿骨打,1068-1123)라는 사실도 이론적으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금산(金山)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의 지명역사사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1

 

신라의 왕족 성씨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이미 앞장에서 말하였다.

금(Gold)을 현재처럼 이기(利己)에 도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물건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때문에 알타이가 어디든 간에 금(金)이 오래 동안 보전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 만약 금나라(金:941-1234)를 망하게 한 몽골과 남송의 정체는 무엇인가 물어 본다면 곧 이탈리아 파르마 교회군(Captain General of the Church)과 스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현 서양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앞으로 밝혀나갈 일이다.

신라(新羅)는 유럽에서 당시 교황청을 지배하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황이라는 존재는 근세기에 생성된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고 볼 때 교황이 주는 상징성은 바로 골드(Gold)이다.

 

특히 금(金)은 Gold 라는 귀금속을 말하고 있지만 신라(新羅)는 “샤르”(Шар; 몽골어)라고 하여 “금빛(黃色金光)”을 지칭하기 때문에 신라와 금은 같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알타이 산(金山)이나 신라는 금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도 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금(金)이 많다는 것은 황금기술이 발달하여 상당히 많은 금이 채굴된다는 소문일 수 있고 이런 표현에서 비롯된 상징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신라와 알타이는 금(金)이라는 상징성 만큼은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金)나라가 신라라면 청나라 역시 신라라 할 수 있고 1881년 이후에 태동한 신중국(新中國)“시나(sina)”라고 하고 청나라를 근원으로 하고 있는 현 중공인민공화국 역시 정통성(legitimacy, 正統性)으로 부여 받은 것이라고 할 때 근대 대륙사는 분명 신라(新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 블로그에서는 지진으로 본 삼한영역에서 대부분 지진발상지가 지중해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곳에 있었던 고려(高麗)를 아랍에서 쿠리아(kuriya)라고 하는 것처럼 삼한역사와 아랍은 깊게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 내에 그들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Muḥammad Ibn Aḥmad al-Maqdisῑ) 창세와 역사서(966)에 나오는 글에서"중국(高麗)의 동(東)쪽에 신라(新羅)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이 공기가 맑고 재부(財富)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이 또한 양호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혹은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에서 이 문장을 현대적으로 풀어 보면 아랍여행에서 바닥에는 융단 또는 양탄자라고 하는 카펫(carpet)과 베게로 꾸며 놓아 방으로 들어서는데 황홀한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Idr s , Ab Abd all h Muhammad al. 1100-1166)의 기록에서는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부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金)은 너무나 흔한 바, 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金)으로 만든다"했으며

 

아랍의 지리학자 알 카즈위니(al-Qazwini, 1203-1283)의 글에서"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絶好)의 나라다. 그곳은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장애인)를 볼 수가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Ambergris=西方又稱灰琥珀)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인터넷 동방의 이상향, 신라(울라)인용]

 

위글에서 그들(신라인)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이 풍긴다는 글에서 용연향(龍涎香, ambergris)은 앰버그리스라고도 하는데 사전에 보면 향유고래(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수컷의 창자 속에 생기는 이물(異物)이며, 향료성분을 알코올에 녹여서 추출하여 향수를 만들어 파는데 값비싼 물질이고 향유고래는 오징어류를 주식으로 하고 수컷은 번식기에 투쟁·번식행동을 하므로 창자의 움직임이 약해져서 직장(直腸) 속에 오징어의 구기(口器)등을 함유하는 흑갈색 유지·분비물이 왁스같은 덩어리로 되는 경우가 있어 이것이 배설되어 해상에 떠다니거나 해안으로 밀려온 것이 발견되어 용연향이라 한다라고 정리되어 있다.

 

이 용연향에 얽힌 동양사 이야기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분명 아랍인의 기록에서 이 용연향은 신라에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기한 것은 향유고래(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1758)가 서식한 곳은 지금의 동(東)아시아도 아니며 아시아대륙 해안도 아니다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동아시아에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들어나는 경우이다.

 

향유고래(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 서식지

그 증거로 위 미국자료 Discover Life에 실린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명나라 황제가 이 용연향(龍涎香, ambergris)을 사모하여 찾았다는 것인데 이상한 것은 은상(殷商(BC1600-1046)시대에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은상(殷商)시대는 동이족(東夷族)과도 연결된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아시아대륙에 은상도 없었고 동이족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신라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본 블로그에서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이 신라마(新羅馬)라고 한적이 있으며  밀라노(Milano, Milan)는 신라(新羅)의 성시(聖市)라고 한적도 있고  지진(地震)진앙지로 보아 신라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을뿐만아니라 사산왕조(Sassanid Empire)까지도 신라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밝힌바가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영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좀 더 따져 들어다 볼 필요성이 있어 성급하게 결론내리지는 않겠다.

 

 

 

 

어쨌던 인터넷 자료 "용연향(龍涎香)은 중국에 아편보다 먼저 들어온 춘약[정계진]"글을 인용하면

명나라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 몇몇 방사들이 용연향을 불사약 만세향병의 주요원료로 썼다고 하면서 소위 불사약은 실제로 춘리라 하여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전국에서 이 용연향을 수집하도록 시킨다. 황제가 입을 열자 당연히 수량은 엄청났다. 가정34년(1555)에 호부에 향 백근을 구하도록 시켰다. 용연향은 비록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었고 발견된 시기는 은상시기라고 하지만 이것은 희귀품이었고 국내의 수량은 제한적이었다.

시장을 다 뒤져 이리저리 끌어 모아도 겨우 십여 냥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향유고래가 서식하는 곳을 미국자료에 표시한 지도에 보면 유럽과 북아메리카사이 대서양에 서식하고 북아메리카 서부 켈리포니아(California)주를 표시하고 있으며 나머지 거의 전부가 오스트레일리아 와 남극해사이에 서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향유고래에 의한 용연향(龍涎香, Ambergris=西方又稱灰琥珀)라고 할 때 오래전부터 신라가 있었다고 판단되는 곳은 적어도 금산(金山)이 있는 켈리포니아(Baja California Sur)일 수밖에 없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명나라가 중국이었고 그 명나라가 당시 고려연합이였다면 신라는 콜럼버스의 착각 한 지도를 보더라도 아시아대륙 맨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랍인들이 신라가 있는 곳을 말한 자리이기도 하다.

당시 콜럼버스의 지도를 보면 지금 태평양을 육지로 보았다는 사실과 그것을 맨 끝이라고 보면 북아메리카 영역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시아와 미국대륙은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북아메리카 대륙 동쪽 바다를 동양(東洋)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 대륙은 우리의 역사와 먼곳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 착각지도:세계삼한역사연구]

 

그리고 본 블로그 글

淸이 朝鮮이고 건륭제가 정조대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623

에서

 

조선왕조실록

정조 19권, 9년(1785 을사 / 청 건륭(乾隆) 50년) 2월 14일(갑오)

섬라국의 표문

한자로 쓰여진 섬라국(暹羅國)의 표문(表文)에 이르기를,

暹羅國長鄭華, 叩首叩首, 上貢大皇帝陛下萬歲萬歲萬萬歲。 伏以皇恩浩蕩, 澤及遐荒, 聖德宏敷, 光臨海隅。

“섬라국 장(暹羅國長) 정화(鄭華)는 머리를 조아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대 황제 폐하에게 만세만세 만 만세를 올립니다. 엎드려 황제의 은혜가 커서 은택이 먼 나라에까지 미치고, 성덕(聖德)이 넓고 커서 바다 구석에까지 멀리 미쳤습니다.

玆謹虔備金葉表文。 公象一隻(수코끼리), 母象一隻(암코끼리), 龍涎香外一斤、內八兩, 金剛鑽(다이아몬드)外七兩、內三兩, 沈香外二斤、內一斤, 氷片外三斤、內一斤八兩, 犀角外六介內三介, 孔雀尾外十屛、....
이에 삼가 금박을 칠한 표문을 갖추고, 공상(公象)은 1쌍, 모상(母象)은 1척, 용연향(龍涎香)은 황제에게 1근, 황후에게 8량, 금강찬(金剛鑽)은 황제에게 7량, 황후에게 3량, 침향(沈香)은 황제에게 2근, 황후에게 1근, 빙편(氷片)은 황제에게 3근, 황후에게 1근 8량, 서각(犀角)은 황제에게 6개, 황후에게 3개, 공작미(孔雀尾)는 황제에게 10병,....

 

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섬라국(暹羅國:태국) 왕자 정화가 정조에게 받친 조공물(朝貢物)에서 용연향(龍涎香)을 황제에게 1근, 황후에게 8량을 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 황제가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정조대왕은 섬라국 사람에 의해 일상적으로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을 황제라 칭했으니 명나라 황제와 정조대왕은 같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조대왕은 본 블로그에서 루이16세라고 한 바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긴가?

이렇듯 근대사는 이리저리 갈라놓고 이중 삼중으로 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에게 아버지 부왕대신 와서 조공을 받친 정화가 섬라국의 왕자였으니 섬라가 태국이라고 하면 이 태국은 용연향이 나는 곳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호주나 뉴질랜드 아니면 중앙, 남아메리카 동부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리가 가능하다.

절대 아시아대륙은 아닌 것이다.

지금의 태국 바다 어디에도 용연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없다.

 

다시 이야기는 주 제목인 알타이로 돌아가 지형적인 문제를 따져 보기로 한다.

알타이(Altai, 阿爾泰)는 "금(金)의 산(山)"을 즉 금산(金山)을 의미하는 몽골어에서 유래되었다 하여 원래부터 알타이에서는 황금기술이 만연했다고 하니 그것이 곧 신라라 한다.

어쨌거나 알타이(Altai)산맥은 금산(金山)인 것이다.

이 금산(金山)이 지금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이고 한반도에 김천(金泉)이며 고구려때 부산(釜山)을 금산(金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즉 금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샌프란시스코라 하였고 북아메리카에 알타이(Altai, 阿爾泰)가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阿尔泰”在蒙语中意味“金山”,从汉朝就开始开采金矿,至清朝在山中淘金的人曾多达5万多人。 阿尔泰语系从阿尔泰山得名。

또 윗글은 알타이에 대한 한어(시나)기록인데 알타이산에서 한나라(汉朝)는 금광(金矿)을 채굴하기 시작하였고 청나라(清朝)때는 산중에 금을 일기위해 5만이란 사람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마치 청나라 때는 지금의 샌프란시스코를 모방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이 있다 할지라도 지금의 알타이산맥은 특별한 것이 없다.

지금의 알타이 관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샌프란시스코는 금산(金山)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유명한 곳도 없으며 지금의 러시아 땅 알타이 관문이 어딘지도 분명치 않고 19세기에 샌프란시스코처럼 유명하게 인식되는 곳도 없다.

 

적어도 인간이 경외하고 귀중하게 생각하던 그리고 일확천금을 손에 쥘 수 있는 금(金)이 나는 알타이산맥으로 들어가려면 어딘가에 큰 도시가 있어야 하고 그곳이 관문이 되어야 하며 샌프란시스코처럼 금산이란 지명을 가질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알타이산맥 주위에는 그러한 사실이 전무하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다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위 한어기록에 청나라(청조)때 산중에 금을 케기 위해 5만이란 사람이 동원되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인 19세기(1848-1849) 미국자료에 따르면 1849년에 켈리포니아주(California) 코로마(Coloma), 서터스밀(Sutter's Mill)이란 곳에서 처음으로 금광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몰려든 현상을 골드러시(gold rush)라고 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중남미, 하와이, 중국 등지에서 약 10만 여명의 횡재를 꿈꾸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을 볼 때 매우 흡사하고 청나라를 동아시아에 만들고 모방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기록이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Aleksandr II, 1818-1881)의 갑작스런 암살과 북아메리카 미국 대통령 제임스 카필드(James Abram Garfield, 1831-1881재임:1881-1881) 역시 재임 1년 만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고 또한 대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 부터 갑자기 미대륙내에 있던 중국인 추방령이 내려지고 현 동아시아대륙에 신중국바람이 불어닥치는 것과 함께 신중국만들기 뒤에는 미국의 조력이 만만히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 할 필요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원초적인 질문으로 들어가자.

 

                  왼쪽그림은 현재 알타이 산맥, 오른쪽그림은 록키산맥[세계삼한역사연구:그림]

 

알타이 산맥은 본래 가로로 놓여져 있었을까?

세로로 놓여져 있었을까?

그리고 흐르는 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가 이다.

 

주봉들이 가로로 놓여져 있으면 지금의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이고 세로로 놓여져 있으면 켈리포니아를 관문으로 하는 록키산맥(Rocky Mountains)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강 흐름이면 지금의 알타이 산맥이고 복잡하게 뒤 얽혀 있으면 분명 록키산맥을 말하는 것이다.

어쨌던 지금 알타이는 날고 뛰어보았자 몽골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지형적인 한계가 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당시 기득권을 잡았던 서세들은 왜 이 몽골이란 지역을 알타이 산맥을 한계로 하여 그어놓았을까?

알타이산맥이 있는 곳에 몽골이 있었다는 등식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닐까?

또한 동아시아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는 대강 황하를 북아메리카를 비교한다면 미조리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미조리강은 알타이라고 간주되는 록키산맥을 발원으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황하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미네소타에서 발원하면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모강 대강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과 합류하여 멕시코만드로 흐르는다는 사실이 다르며 이  황하는 곤륜산맥(崑崙山脈)에서 발원하지 알타이산맥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이것과 동시에 볼 것은 알타이에서 발원되는 큰 강의 흐름방향이다.

 

대강인 미시시피강의 발원지인 미네소타(Minnesota)주는 전체가 대륙빙하의 영향을 받아 빙하호, 소택, 하천이 많다. 미국주로 승인받은 1858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1만 2000여(Land of 10,000 Lakes)개에 이르는 호수로 유명했다 한다. 원래 미네소타라는 이름은 다코타족(Dakota language)이 미네소타 강을 mini sota (흰거품 물, 하늘 빛을 띤 물, 하늘색 물, sky-tinted water)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되었다.
한어로는“白烟的水”或“天色的水” 이다.
1763년 프랑스령(領)으로부터 영국 영토로 바뀌었고 1783년 동반(東半)은 미국령이 되었으며 서반(西半)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수(買收)에 의하여 미국으로 편입되었고 1858년에 32번째 주가 되었다는데 프랑스와 영국은 당시 대조선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사실 상 이 미네소타의 어원을 하늘 빛이라 하였는데 영어표현을 sky-tinted 이라 했으니 음영이 들어간 말이라고 볼 때 압록이라는 오리빛과 같다는 것에서 이 명칭이 근세기에 만들어지고 지칭되었다고 본다면 상관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치에도 접근한다.

 

이야기가 벗어나는 것일 수 있지만 이것은 압록과 매우 대비되는 상황이다.

1865년(고종 2) 왕명에 따라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좌의정 김병학(金炳學)등이 편찬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압록(鴨綠)을 물빛이 오리머리의 빛과 같다.(水色如鴨頭)라고 하여 압록강이라 했다 하는데
古称浿水,汉朝称为马訾水,唐朝始称鸭绿江(隋唐时期浿水为大同江),因其江水清澈,
"因其江水清澈" 이것은 너무나도 맑고 투명한 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빙하가 녹아 늪이되고 그것이 모여 강으로 흘러들 때 그 빛을 한번 생각해 보자.
투명한 것은 물론이고 너무 맑아 하늘 빛, 오리머리빛이라고 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대신 이 알록강을 패수라 하였고 마자수라 하여 이것을 당나라 때 압록강이라 했다는 사실과 패수는  대동강이라 하였으니 한반도 평양으로 흐르는 강이 대동강이면 압록강이어야 맞다.

한반도에는 대동강도 있고 압록강도 있다.
이처럼 전부 엉터리가 한반도 지명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압록강 즉 근세기에 야루(Yalu)강이 어딘지도 알 수 없도록 위치를 엉키게 한 역사가 바로 근대사이고 반도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알타이의 위치찾기로 들어와 지금의 러시아령 알타이산맥에서 하류로 흐르는 것은 비야강(Biya River)과 카툰강(Katun River)이 모두 북쪽으로 단순하게 흘러 러시아 북쪽 해안 북해로 들어가는 오비강(Ob river)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강이 남(南)에서 북(北)쪽으로 깨끗하게 흐르는 형태이다.

 

                              록키산맥을 발원으로 하는 북미의 강[세계삼한역사연구:그림]

 

그러나 록키산맥(Rocky Mountains)은 산맥에서 발원되는 강은 복잡하기가 이를 때 없는데 록키산맥을 기준으로 북부에 미주리강(Missouri river)이 서(西)에서 동(東)으로 흘러 다시 남(南)쪽으로 흐르다가 북프래티 강(North platte river)과 합류하여 다시 남(南)쪽으로 흘러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에 모여들고 이어 크게는 알칸사스강과 만나고 다시 남(南)쪽을 크게 흘러 멕시코 만에 도착한다.

미주리강(Missouri river)은 인디어말로 “大獨木舟之河” 큰 카누(canoe獨木舟)의 강이라는 뜻이다.

또 록키산맥(Rocky Mountains) 중부에는 북프래티강(North platte river)이 서(西)에서 동(東)으로 흘러 미조리강(Missouri river)과 합류하며 록키산맥 남(南)부에는 알칸사스 강(Arkansas river)이 서(西)에서 동(東)으로 흘러 대강(大江)이라고 하는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과 합류한다.

 

큰강(大江)이라고 하는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의 칭호가 다양하다.

父河(The Father of Waters)

The Gathering of Waters

The Big Muddy (more commonly associated with the Missouri River)

大河(Big River)

老人河(Old Man River)

偉大之河(The Great River)

國家之體(Body of a Nation)

The Mighty Mississippi

El Grande (de Soto)

The Muddy Mississippi

老藍(Old Blue)

月河(Moon River)

 

록키산맥(Rocky Mountains) 서북(西北)부에서는 콜롬비아 강(Columbia river)이 남(南)쪽으로 흐르는데 서북(西北)쪽으로 흐르는 스네이크강(Snake river)과 만나고 다시 서(西)쪽으로 흘러 큰 맥은 서(西)쪽 태평양으로 흘러든다.

록키산맥(Rocky Mountains)서중(西中)부에는 콜로라도 강(Colorado river)이 서남(西南)쪽으로 흘러 켈리포니아만(Gulf of california)에 도착하는데 이 콜로라도 강은 늘 황(黃)색 빛 강이 흐른다.

콜로라도는 스페인(Spanish word)말로 붉다(colored red)라는 뜻이다.

황과 붉다는 것은 시각차이가 조금있지만 표현하는 어감은 분명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상 크게 세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알타이의 근원적인 위치를 개진해 보았다.

이렇게 보니 록키산맥이 더 가깝게 와 닿는다.

이러한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돌출발언을 하고자 한다.

놀랍게도 콜로라도 강을 대동강(大同江)으로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알라스카 매각사건.

러시아제국이 아닌 러시아아메리카(Russia america)라는 명칭의 회사를 상대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H. 슈어드(William Henry Seward, 1801-1872)가 불과 720만 미국달러로 알래스카를 매입할 것을 조약하던 시기가 1867년이고 그 사건이 발생하기 1년전 1866년에 제너럴셔먼호가 금(金)을 찾아 한반도 대동강으로 들이닥쳤다고 하는 곳은 다름아닌 이 콜로라도강이라고 보며 이 강으로 동쪽에서 흘러드는 지류 길라강(Gila river)과 염하인 소금강(salt river)북쪽강변에 아리조나(Arizona) 피닉스(phoenix, 不死鳥), 즉 봉황성(鳳凰城)이 자리잡고 있어 이 봉황성은 삼한역사에서 평양(平壤)이라고 볼 때 콜로라도 강은 대동강(大同江)이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제너럴셔먼호사건 역시 근대사에서 불명확부분이 많아 우리는 반드시 따져 볼 일이지만 조선과 미국사이에서 일어난 제반의 문제를 다시 재 탐구할 필요성이 있다 할 것이다.

조선과 러시아는 근대사 말미에 이상하게 많이 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알라스카 매각사건과 러시아황제 암살사건, 동년에 일어난 미국 대통령 암살 사건은 모두 한 흐름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 많은 것을 생각해 하는 사건들이다.

솔직히 알래스카 매각사건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또한 미국이 이 시기에 어마어마한 땅을 돈으로 매수하게 되는데 상대 매입처 주체가 분명치 않다는 점에서도 많은 의문이 존재한다.

미국이 갑자기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도 의심이가는 부분이지만 이것은 금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조선에서는 이 금을 이용하지 않았던 반면 미국은 이를 충분히 이용했을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알타이와 연결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답을 할 수가 없다.

근거를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근원을 파고 들고 종합적으로 문제를 볼 때 북아메리카는 삼한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에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록키산맥이 알타리라면 더욱 그러한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내하고 겸손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때까지 그 때가서 비로소 세계인들이 충분히 납득하고 알아 들을 수 있는 입장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길은 말처럼 쉬운 일은 분명아니다.

다 짊어지고 가야 할 힘든 곳이다.

1844년 핀란드 언어학자가 붙였다는 알타이(Altai, 阿爾泰)란 명칭은 역사성이 분명히 있고 신라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명칭이며 더불어 금을 상징으로 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고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이다.

그나마 역사환경, 여건, 조건등에서 알타이가 록키산맥임을 확인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궁금해 하던 알타이의 정 위치가 록키산맥이었음을 알아 정말 기쁘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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