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이리(伊犁, Erie=Ili)는 북아메리카에도 있다.

한부울 2012. 7. 1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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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伊犁, Erie=Ili)는 북아메리카에 있다.

 

글쓴이:한부울

 

청(淸)나라라고 하지만 실제 역사에는 청(淸)나라라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 후반기까지 여진족은 있어도 만주족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함에도 청나라라는 것은 대륙사라 할지라도 그들이 만든 역사에서조차도 어긋나는 것이 된다.

청(淸)나라라가 아니라 서양 모든 자료에는 청 정부(Qing government)라고 묘사하고 기록하고 있다.

 

1866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인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등장하는 청나라를 청나라라고 하지 않고 청 정부(Qing government)라고 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후에 청일전쟁(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해체된 대조선 내에 기존 기득권을 나눠가지려고 한 군벌 간의 대립으로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세력 간 충돌(衝突, collision)로 그려야 마땅하다.

실제 어떤 서세 자료에는 충돌로 묘사하고 있다.

충돌(衝突)은 쌍방(雙方)의 의견(意見)이 맞지 아니하여 서로 맞섬이라고 사전적 의미가 있다.

청일전쟁뿐만 아니라 17세기에 일어난 병인양요 또한 세계전쟁사(War) 사상자리스트에 오르지도 나오지도 않는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이후 약 10년이 지난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등을 합쳐 양대 호란(胡亂)이라 하는데 이것도 근본적으로 따지면 란(亂)이지 전쟁(War)가 아님에도 반도사에는 모두 큰 전쟁처럼 묘사하고 그것도 모자라 조선의 국왕인 인조가 공격을 견디다 못해 항복할 결심까지 하고 1637년 1월 30일에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고 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마구 전개되고 있다.

19세기까지 서양 자료에는 청나라가 아니라 청 정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후금이 청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때문에 당시 이러한 사건을 부풀려 그렸다고 보고 정권 세력 간의 알력 또는 충돌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양대 호란(胡亂)이라고 하는 전쟁에서 양쪽 사상자를 도무지 알 수 없고 있어야 할 사상자의 자료가 없다는 것은 기록을 하는 국가에서는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

전쟁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났는데 기록을 못해 남길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났는지 셈하지 못했다?

이러한 허구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소설을 픽션(fiction)이 아니라 팩트(fact)라고 주장하고 막무가내 이해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정도라면 청나라는 허구이고 대조선내에 청 정부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잘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한 반론, 비평 등 하지 않았다.

바보 멍텅구리라고 소릴 들어도 변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 청 정부(Qing government)가 1881년 이후부터 청나라로 둔갑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이후의 역사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광서제(光緖帝,1871-1908 재위:1874-1908)치세하는 동안 그 유명한 이리사건(伊犁事件:1881)과 청불전쟁(1884-1885), 청일전쟁(1894-1895) 등이 잇달아 일어난다.

사실 따지고 들면 병인양요나 청불전쟁이나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병인양요가 일어날 때 베트남에서도 조선과 똑같은 경우가 발생하는데 결국 프랑스에게 코친을 점령당한다.

 

(1851-1852)사덕제(嗣徳帝, Tự Ðức)가 프랑스인 선교사 2명을 참수하고 1857년에는 스페인인 선교사 2명을 참수한다.

(1858년)프랑스와 스페인연합군이 다낭상륙 점령하면서 불월(프랑스와 베트남)전쟁이 1859년에 일어나며 프랑스군은 사이공을 점령한다.

(1861년)프랑스군이 다시 쟈딘(嘉定), 미트를 점령하고

(1862년)프랑스군이 콘론섬, 비엔호아(Bienhoa), 바리어(Ba Ria), 빈롱(Vinh Long)을 점령한다. 프랑스와 베트남이 제1차 사이공 조약에 조인한다. 베트남은 코친차이나(Cochinchina) 3성을 할양하여 프랑스에 3항을 개항한다. 할 수 없이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인정한다.

(1867년) 프랑스가 코친차이나(Cochinchina) 전역을 병합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조선이 1881년에 어떠한 이유로 해체 또는 붕괴되고 난 후 그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가 태동하기 시작하는데 현재 근대사에서 서세제국들이 그렇다.

그 전까지는 그러한 세력들은 거대한 제국 즉 대조선 내에 독립된 정치세력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도 나폴레옹이 들어서고 난 후 태동된 국가명이라고 보이고 그 프랑스는 대조선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영토를 확장하고 대조선의 심장부를 치려고 끝까지 노력하다가 대조선의 저력에 눌려 끝내 나폴레옹은 아프리카대륙 서쪽 외딴 세인트 헬레나섬(Saint Helena I.1769-1821)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서아프리카의 세인트 헬레나 섬은 아프리카로부터 2,000Km, 브라질로부터는 3,500Km 떨어진 대서양에 위치인데 아마도 대조선이 전통적으로 유배지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고 세계대제국의 유배지로서는 매우 적합 곳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최초의 동전발견이 되었는데 1821년 동인도 회사에 의해 발행되었다는 것인데 이 항목에서도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 1708-1873)란 것도 서세역사가들에 의해 바뀐 칭호로서 대조선이 관할 하는 회사형태 또는 대조선과 연계되는 특수한 권력기관등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한 것이다.

 

[ 위 그림은 동인도회사 본부건물 이미지 인데 사실 이 건물이 지금 런던에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

 

대조선이 나폴레옹을 유배보내지 않으면 프랑스가 유배 보냈다는 것인데 미안하지만 프랑스는 아프리카 서쪽 섬을 지배할 능력이 없었다.

대조선은 아프리카 대륙도 차지하고 식민지화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마땅한 일이다.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코리, 코라이, 코레이 식으로 지명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조선이란 중심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있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제국이 있었으며 또한 러시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명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독립된 정치세력들이라 하여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서론, 시파, 벽파등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너무 많은 것이다.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넘보다 실패하고 반란괴수로 처리되어 죽음을 당한다.

대조선의 유배를 찾으려면 시각을 넓혀할 일이다.

 

대조선이 해체된 1881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 가 그의 궁전 근처에서 암살자에게 폭탄세례를 받고 암살되고 3세(Alexander III of Russia:1881-1894)즉위하며 1873년에 오토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의 중재로 대조선을 적대시하는 프랑스를 고립할 목적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3제동맹(三帝同盟, Three Emperors' Alliance)을 체결하였다가 알렉산드르2세가 사망하자 다시 체결한 것이다.

여기서 아마도 대조선이 흐트러질 수 있는 것을 다잡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또 대조선을 상대로 세르비아인들의 집요한 독립전쟁 끝에 1881년에 독립을 달성하였고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간 비밀 동맹조약 체결을 하였다.

그리고 대조선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프랑스가 튀니지 획득 차지하였고 대조선 영역이었던 이집트에서 아라비파샤(Arabi Pasha, 1839-1911)의 민족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또 북아메리카에서는 1881년 9월 19일 20대 미국대통령 제임스 카필드(James Abram Garfield, 1831-1881재임:1881-1881)가 엽관운동에 실패한 자에게 총탄을 맞고 죽고 체스터 아서(Chester Alan Arthur, 1829-1886 재임:1881-1885)가 취임한다.

 

또 아프리카남부에서는 영국과 보어(Boer:네덜란드계와 후손)간의 1차 보어전쟁(Boer War, Anglo Boer War:1차1881-1881, 2차 1899-1902)이 시작되어 8월 3일 보어인(Boer)과 영국 사이에 프리토리아 협약(Pretoria Convention)을 체결 사인하고 1차 전쟁이 끝나는 시기이다.

북아메리카에 러시아도 있었다고 본다면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암살당하는 것과 북아메리카 미국 대통령 제임스 카필드(James Abram Garfield)가 암살당하는 것이 같다고 볼 수 있다.

 

그해 초 피닉스(봉황성)와 애리조나가 통합 한다는 사실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중요한 사건인데 바로 이리조약(伊犁條約)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기 2년 전 1864년에 신장성에서 발발한 동간혁명(東干, Dungan revolt, 1648-1878)에서 이러한 이슬람교도의 반란을 이용하여 야쿠브베그(阿古柏伯克, Yakub Beg,1820-1877)가 카슈가르(Kashgar)를 점령하고 영국 및 오스만투르크(Osman Turk Empire)와 제휴하려 하였다. 러시아는 병력을 동원하여 이리(伊犁, lli)지방을 점령하고 반환하지 않자 청나라는 숭후(崇厚)를 러시아에 파견하여 1879년 마지막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스 2세와 그의 가족이 머물렀던 여름 피서장소 리바디아(Livadeia)왕궁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리바디아 조약은 청나라에 매우 불리하여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의 중개로 이 조약의 수정을 꾀하여 1881년 주청영국공사 증기택(曾紀澤)을 파견하였고 중앙아시아에 있어서 청, 러 간 국경을 획정(劃定)한 조약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페테르스부르크)조약 또는 이리조약(Treaty of Ili)이라 하는데 이 조약을 맺은 이리(伊犁, lli)라는 위치가 과연 어딘가 하는 문제이다.

 

 

또 감안해야 할 것은 흑해 크림반도 남쪽 하단부에 있었다는 리바디아왕궁을 리바디아라 했는지 아니면 그리스의 리바디아를 리바디아라 했는지 분명치 않다는 것도 있다.

그리스의 리바디아라면 대조선의 영역이 더 넓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와 중국 국경]

 

백과사전에 보면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이리지방(Ili River)의 대부분을 청나라에 반환하고, 청나라는 그 일부와 자이산호(Zaisan湖)주변지역을 러시아에게 할양하면서 배상금 900만 루블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 조약 역시 청나라에게는 불리한 조약이었으며, 이 조약에 의해 오늘의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이리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중국은 이리사건과 이리조약을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고 비난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최두환 박사는 이 이리(伊犁, lli)를 지금의 천산산맥(天山山脈, Tien Shan Mountains)의 서북쪽 발하슈호(Balkhash 湖)남쪽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 이리는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Petrograd)를 고쳐 부른 페테르부르크(Petersburg)라고 하고 페트로그라드(Petrograd)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Petropavlovsk: 북위 55도 동경 70도)라고 하면서 이리(Ili)는 본디 페트로파블로프스크가 되며, 이 이리는 현재의 발하슈호 남쪽으로 이동된 셈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이리(伊犁, lli)조약이 대조선이 망한 시점 1881년과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러시아와 미국이 공통적으로 지탱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등한시한 결과라고 본다는 사실이다.

이리는 우리가 모르는 제삼 위치에 있음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동간(東干)과 서간(西干)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간(干)이 근세기 일제 왜구군벌, 북양군벌에 의하여 간(間)으로 둔갑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 한반도, 열도를 포함하고 간도(間島)라고 표현되는 극동지역은 전역이 대륙조선 함경도, 함길도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干)이 간(間)으로 둔갑함으로 인하여 결국 동양 오리엔트(Orient)가 극동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고 동시에 삼한영역과 역사마저 한반도로 쪼그라든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 오리엔트(Orient)도 실제 태양이 뜨는 곳이라고 하여 북아메리카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앞에서 언급한 로스엔젤레스가 태양의 도시 라성이라는데 우리는 이해를 충분하게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오리엔트(Orient)가 아시아라는 대륙을 한정한 그릇된 지식은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하는 준엄한 메세지인 것이다.

 

칼믹족(와랄족)은 17세기초 이리하(伊犁河,illi강)주변의 신강성서북쪽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다가 후금(만주족, 여진족)에 의해 볼가강에 이주하였으며, 이리하에서는 와랄이라하고, 볼가강에서는 칼믹족(돌궐어로 잔류자)이라 한다 했고 이들은 1771년에 다시 이리하에 귀환하게 된다.

 

따라서 와랄(오이라트)의 거주 지역은 신강성 이리하 주변과 그 하류의 카자흐스탄이고, 올량합(오량해)는 외몽고 서북부 ‘우브스 누우르 염해’와 러시아령 투바 공화국이며 이들 부족과 여진족은 거주지가 겹치기 때문에, 여진족은 신강성 북부 이리티쉬 강변을 따라 카자흐스탄 북부 지역과 러시아령에 산재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까지 추측하고 있다.

 

여진족은 조선 이전에는 만주족으로 불린 적이 없다.

아마도 이 만주는 사람이름이면서 부족이름이고, 일종의 부족장의 이름으로 추정되며 이만주의 부족이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했으므로, 여진족이 만주족으로 바뀌었을 것이고 만주어가 여진어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왕조실록을 보면 여진족은 숲이 우거진 지역이고, 추워서 벼농사가 불가능하고, 밭농사는 가능하지만 목축업이 더 적당한 곳에 살았다. 따라서 동북삼성의 만주는 이러한 조건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만주지역은 벼농사가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어떤 분은 내몽고 오르도스 지역, 거연해 지역을 만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곳은 사막이지 숲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과는 부합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을 토설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여진족이 생존하던 곳 만주 즉 동간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함을 알게 한다.

 

이리하(lli river, 伊犁河)에 있는 리주는 리산군인데, 초산군과 가까운 발하슈호로 들어가는 이리(伊麗/伊犁: Ili)하 유역의 이리천(伊犁川:북위 44.7도 동경72.5도)이며, 옛날에 열수(涅水)니, 열반(涅槃:Nirvana)이 있는 지역이라 한다. 이 열수(涅水)가 곧 조선의 강 열수(洌水)이라고 했으며 이 열반을 요즘엔 알아먹지 못하게 "咽"(열면)으로 바꿔버렸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를 각성케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기록하는 이리조약(Treaty of Ili)이 체결된 이리(lli, 伊犁)는 어딜까?

놀라지 말라.

북아메리카 동북부 오대호에 있다.

이곳에 이리(伊利, Erie)가 있는데 지금의 이리하(Ili River)가 발하슈호(lake Balka-sh)를 근거로 한다면 이곳도 이리호(Lake Erie)를 근거한다는 사실이 같다.

솔직히 발하슈호(Lake Balkash)는 근세기에 벌어진 아시아 와 중앙아시아 발칸화(Balka-nization)의 상징으로 더 깊게 보이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때문에 발하슈호와 연결된 지금의 이리하보다 오대호의 이리호가 더 역사성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다.

그곳을 이리조약이 이루어진 이리하라고 할 만큼 당시 오대호 주위에 갈등하고 충돌하던 세력들이 대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한 개연성이 널려 있다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이리(伊犁)Erie=Ili River

Length 1,001 km

Basin area 140,000 km²

 

북아메리카 동북부

 

 

이리(伊利, Erie)

 

 

 

 

이리군(郡)의 군청소재지이며 이리호(湖) 연안에 있다. 주에서 유일하게 오대호(五大湖, Great Lakes)에 면한 항만도시로서 펄프·철광석·석회암·석탄·곡물·중기계·목재 등의 선적이 활발한 수상교통의 요지이다. 초기에는 주로 농업에 의존했으나, 지금은 전열기·냉장고·건설기계·철도설비·종이·화학·섬유·완구·고무·플라스틱 등 다양한 제조업이 발달하였다. 1844년 이리-피츠버그운하(Erie Canal)가 개통되었고, 1850년대에 철도가 건설되면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753년 프랑스인들의 의해 성채(城砦)가 축조되었으나 1760년 영국인들이 점령하여 재 축조하였으며, 1763년 폰티액반란(pontiac, 1763-1764)때 인디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764년 영국인과 아메리카인디언 사이에 평화협상이 열렸으나, 여의치 못하여 황무지 상태로 있다가 독립전쟁 뒤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가 연방정부로부터 매입했다. 1795년 프레스카일 요새(Fort Presque Isle)가 세워졌고, 윌리엄 어빈 장군(General William Irvine)과 미국 국유지 감독관인 앤드루 엘리컷 장군이 읍을 세웠다[네이버 백과사전]

 

이리호(湖)

 

 

면적은 2만 6,720㎢(길이 약 390km. 최대너비 92km), 수면 해발고도는 175m, 호안선의 길이는 약 1,200km, 최대수심은 64m이다.

 

휴런호(Huron湖)로부터 세인트클레어호(Saint Clair湖)를 거쳐 디트로이트강(Detroit River)이 북서부에서 유입하고 있으며, 북동부에서 나이아가라강(Niagara江)이 유출하여 온타리오호(Ontario湖)로 배수된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이 호수 가운데를 지나고 있으며, 연안에는 클리블랜드 ·털리도 ·이리 ·버펄로 등의 상공업도시가 있고 디트로이트도 가깝다. 이들 도시는 세인트로렌스 수로의 완성(1959) 후 항구도시로서도 급속히 발전하였다. 식민지시대에는 이리 운하를 거쳐 이리호를 건너고, 디트로이트와 털리도 및 시카고 방면까지 수로를 이용하였다. 연안일대에는 별장지대가 있으며 남쪽 연에는 사과 ·포도 등의 과수원이 많다.[네이버 백과사전]

 

발하슈호(Balkhash 湖)

 

 

면적은 1만 8,000∼1만 9,000km2, 동서길이는 605km, 최대너비는 74km의 길쭉한 호수이며, 최심부는 26.5m, 평균수심은 6m이다. 우지나랄 호협(湖峽)에 의하여 담수로 이루어진 서부와 동부의 염호(鹽湖)로 나누어진다. 호수에는 일리 ·카라탈 ·레프사 ·아야구즈강이 흘러들지만, 호수에서 흘러나가는 강은 없다.

 

서식하는 동물은 적으며, 어류와 물새가 있을 뿐이다. 특히 남쪽 연안은 건조도가 심하여 사막 ·관목(灌木) 지대이지만, 관개로 목화 ·포도 등이 재배되고 있다. 결빙기간은 11월부터 4월 중순까지이다. 호수는 항행할 수 있으며, 부루바이탈 ·부률류토베 및 북쪽 연안의 발하슈에는 부두가 있다. 이 지역의 중심도시는 발하슈이며, 부근에 구리 ·텅스텐 광산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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