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삼한(朝鮮)은 만방의 우두머리이다.

한부울 2012. 10. 16. 17:12

***********************************************삼한(朝鮮)은 만방의 우두머리이다. [이 글은 2009.08.14 00:35 에 등록된 글임]

 

글쓴이:한부울

 

三韓者, 爲萬邦酋, ,

삼한(조선)은 만방에 우두머리이고 많은 백성의 영광이다.

 

위 글은 유구국왕(琉球國) 즉 중산부주(中山府主)가 조선국왕도 아닌 일개 조선 예조대신(禮曺大人)에게 전하는 글이 이렇다.

이것은 감히 유구국왕이라고 할지라도 조선국왕(朝鮮國王)에게 함부로 글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조선국왕(朝鮮國王)은 그저 평범한 그리고 중국이란 대국에 끼여 있는 한낱 속국개념의 왕(王)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니 반도역사와 그것을 매개로 하여 기득권을 행사하는 친일사학자들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보면 먼저 삼한인(三韓)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이 삼한은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

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때 대표성은 아마 당시 조선(朝鮮)이라고 보인다. 즉 삼한의 덕택(德澤)은 사이(四夷)에게 두루 미친다고 하면서 조선(朝鮮)은 만방(萬邦)즉 전 세계 많은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酋)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영조민군(榮兆民群)라는 글에서
조민(兆民)이라 함은 천자의 백성, 만백성, 만민이라는 뜻으로서

많은 백성의 영광이라 하고 있다.兆民古称天子之民,后泛指众民,百姓《书·吕刑》:“一人有庆,兆民赖之”《礼记·月令》” 郑玄 注:“天子曰兆民” 南朝 梁 刘勰 《文心雕龙·祝盟》
天子曰兆民:猶言天子統治兆民,天子主有天下,故言「兆民」。

 

德澤遍四夷 仁風齊二儀, 寔大矣哉!

덕택(德澤)은 사이(四夷)에게 두루 미치며...인풍(仁風)은 이의(二儀)와 같으니, 크도다 만복(萬福)이 진중(珍重)함이여!

이것은 조선이 사이에 미치는 영향력이라던가 천자의 권위를 흠모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二儀-指天地, 指日月

만이(蛮夷)의 땅(蛮夷之地)이라 함은 바로 사이(四夷)를 이르는 것인데 옛날 중국(中國) 동서남북쪽에 있는 종족(種族)을 일컫던 말이다.

四夷是華夏民族(指古代)用来区分華夏和夷蠻的名词和称呼

고대중국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포함해 중국대륙을 지배한 왕조는 스스로를 중국(中国) 또는 중화(中華)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또 중화(中華)의 사방으로 거주해 조정에 귀순하지 않는 주변민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蛮), 북적(北狄)이라 불렀고 사이(四夷) 혹은 이적(夷狄), 이만(夷蠻)이라고 총칭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한은 바로 남만(南蛮)은 바로 남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종족(種族)을 말하는 것이란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생물학적으로 따져 밝혀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종족(種族)은 우리가 충분하게 고려하고 해결 할 수있는 부분이다.

 

또 인풍제이의(仁風齊二儀)란 글에서도 이의(二儀)는 하늘과 땅, 태양과 달을 지칭하는 말로서

二儀-指天地, 指日月


어짐이 하늘과 땅과 같고 태양과 달과 같다는 것에서 조선(朝鮮)이 중국변방 속국의 위치에 있었다면 유구국에서 이러한 언사를 할 이유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미쳤다고 소릴 들어야 할 찬사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매우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구국왕이 왜국(대마주)의 간섭과 침입을 받음으로서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다보 볼 때 분명 막강한 조선(朝鮮)의 힘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조선이 나서 그런 짖을 할 수 없도록 제제를 부탁하고 한 것이기 때문에 유구국왕이 조선의 예조대신에게 조심스럽게 글을 써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대조선이 아닌 한반도 조선의 위치였다면 유구국이 아무리 급박한 입장에 있었다 하더라도 대국인 중국에게 할 존칭이나 예를 그렇게 함부로 남발 할 수 없을 터 이러한 표현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 오히려 대국 중국이 취하는 불리함에 놓인 다는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이치라고 할 때 조선의 위치가 중국의 위치에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라 하겠다.

분명 조선(朝鮮)은 한반도에 위치하지도 않았고 또한 반도역사가 말하는 중국의 속국도 아니었으며 그야말로 전세계에 퍼져 있는 사이(四夷)를 완벽하게 통솔하는(

德澤遍四夷 仁風齊二儀)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中國根幹也四夷枝葉也-

中國의 근간이 四夷이다, 라고 한 것처럼 

1494년 조선(朝鮮) 9대 대왕(大王) 성종(成宗)은 당시 사이(四夷)백성 즉 조민(兆民)를 다스리는 중국황제 천자(中國皇帝 天子)였던 것이다. 

중국 천자(中國 天子)가 통치하던 조선(朝鮮)이 그들에게 얼마나 두려웠길래 유구국(琉球國) 국왕이라고 하는 중산부주(中山府主)가 대마주 사람들의 모서(謀書)로 인하여 유구국이 피해를 볼까 놀랍기도 하고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속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모서(謀書)를 만들어 보내는 대마주 왕이나 유구국 중산부주 왕 모두가 대조선의 그늘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기록이고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누가 나서 부정하겠는가? 부정하여 보라!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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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5년(1494 갑인 7년) 5월 11일(무술)
유구국의 사승 천장이 물자를 청하는 편지를 가지고 내빙하다

○戊戌/琉球國中山府主使僧天章等來聘。 其書曰: “琉球國中山府主奉呈朝鮮國禮曺大人足下。 夫惟

三韓者, 萬邦, , 德澤四夷

, 仁風二儀, 寔大矣哉! 萬福珍重, 抑先年以降, 不通音問, 於同盟義, 全非踈略, 渡海遼遠, 不遑羽鱗也。 爰對州人平皮古三甫羅, 自去歲此島下向矣, 聞說彼一族, 世歸貴國, 臣列官位, 依斯爲幸。 奉問陛下袞衣安否之次語曰: ‘近年號此國使者, 渡貢船爲商賣, 是則謀書也。 不知其出處, 傳聞驚畏不少, 仍而謹遣使僧, 以致聘禮, 其謂則新賜別符合契約, 以爲他日使船之誠信者也。 後來吾國之書中, 亦是非此印, 莫敢信焉。 獻禮方物, 其數具在別紙, 伏希頒賜。 孔方一萬緍及緜紬、木綿, 多幸仰蒙, 大國恩露, 潤小島窮竭而已。 報謝期後音, 恐惶頓首。 別幅。 木香苗小桶一箇、椰子苗二本、藤苗小桶一箇、胡椒砂糖付小壺一箇、胡椒三十斤、白檀五十斤、丁子二十斤、藤席大小二枚、桄葉席二枚、菓子盆十枚、南蠻琉璃一箇、靑色白雙一地、華紋一雙、染付一雙合七箇、盃玉琉璃一箇、染付一雙、白色中有紋一雙合五箇、萬年寶數百十五顆、香一本十四斤長八尺、靑瓷嗽器一箇、付嗽茶椀一箇, 以上十六種。”

유구국(琉球國) 중산부주(中山府主) 사승(使僧) 천장(天章) 등이 내빙(來聘)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유구국(琉球國) 중산부주(中山府主)는 조선국(朝鮮國) 예조대인족하(禮曹大人足下)에게 받들어 올립니다. 대체로 삼한(三韓)은 만방(萬邦)의 우두머리이니, 많은 백성들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덕택(德澤)은 사이(四夷)에게 두루 미치며, 인풍(仁風)은 이의(二儀)와 같으니, 크도다 만복(萬福)이 진중(珍重)함이여! 그러나 몇 해 전부터 내려오면서 음문(音問)은 통하지 못했지만 함께 맹세한 의리는 소홀하거나 간략하지 않고 온전했으며, 바다를 건너는 길이 너무 멀어서 찾아뵙는 것을 겨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마주(對馬州) 사람 평피고삼보라(平皮古三甫羅)가 지난해부터 이 섬에 내려왔습니다. 들으니 저들 일족(一族)은 대대로 귀국(貴國)에 귀부(歸付)하여 신하로 벼슬자리에 끼었는데 이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며, 폐하(陛下)와 곤의(袞衣:고관대작)의 안부(安否)를 받들어 물은 다음에 말하기를, ‘근년(近年)에 이 나라의 사자(使者)라고 부르는 자가 공선(貢船)을 타고 건너와서 장사를 한다.’ 하니, 이것은 모서(謀書)입니다. 그것이 어느 곳에서 나왔는가는 모르지만 전해 듣고서 놀랍고 두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인해서 삼가 사승(使僧)을 보내어 빙문(聘問)하는 예(禮)를 이루도록 하였는데, 그 생각은 특별히 부합(符合)하게 하는 계약(契約)을 새로 내려 주셔서 뒷날 사선(使船)의 성신(誠信)을 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로 우리나라에 오는 글 중에도 역시 이 인(印)이 아니면 감히 신임하지 않겠습니다. 예물로 바치는 방물(方物)의 수는 별지(別紙)에 갖추어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공방(孔方)27628) 1만 민(緡)과 면주(緜紬)·목면(木綿)을 내려 주소서. 대국(大國)의 우로(雨露) 같은 은혜를 우러러 입어 소도(小島)의 물자가 떨어진 어려운 상황을 윤택하게 하시면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은혜에 보답하고 사례하는 것은 뒷날 음문(音問)에 기약하게 되니,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립니다.”

 

하였는데, 별폭(別幅)에는 목향묘 소통(木香苗小桶) 1개, 야자묘(椰子苗) 2본(本), 등묘 소통(藤苗小桶) 1개, 호초 사당 부 소호(胡椒砂糖付小壺) 1개, 호초(胡椒) 30근(斤), 백단(白檀) 50근, 정자(丁子) 20근, 등석 대소(藤席大小) 2매(枚), 광엽석(桄葉席) 2매, 과자분(菓子盆) 10매, 남만 유리(南蠻琉璃) 1개, 청색 백쌍(靑色白雙) 1지(地), 화문 일쌍(華紋一雙) 염부 일쌍(染付一雙) 합(合) 7개, 배옥 유리(盃玉琉璃) 1개, 염부 일쌍(染付一雙) 백색중 유문 일쌍(白色中有紋一雙) 합(合) 5개, 만년 보수(萬年寶數) 1백 15과(顆), 향(香) 1본(本) 14근(斤), 장 8척(長八尺) 청자 수기(靑瓷嗽器) 1개, 부수 다완(付嗽茶椀) 1개, 이상 16종(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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