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마상이(馬尙船, 獨木舟)로 본 북아메리카대륙

한부울 2012. 12. 2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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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이(馬尙船 : 獨木舟)

 

글쓴이:한부울

 

가평(嘉平)은 시카고(Chicago)이고 풍성(風城) 또는 지성(芝城)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8

 

마상이(馬尙船 : 獨木舟, 馬尙津)

① 거루 같은 작은 배. <참고> 거룻배.

②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 <동의어> 독목주(獨木舟).

 

콜럼버스는 서부 인디언이 마상이 형태의 그들 배를 'canoa'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초기 형태의 카누는 목제 늑골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에스키모의 카약은 팽팽하게 잡아 편 나무(보통 자작나무, 드물게 느릅나무를 사용함)의 껍질이나 동물의 가죽으로 덮인 고래수염으로 만든 늑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것은 나무껍질 조각을 뿌리로 꿰맨 후 수지로 방수처리해 만들기도 했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는 현재 미국의 북동부와 캐나다 근처에 사는 알공킨 인디언에 의해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곧 서부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카누는 화물을 운송하고 사냥꾼·어부·전사 등이 타고 다녔다. 길이는 4.5~6m가 가장 흔했고, 몇몇의 전투용 카누는 30m에 이르기도 했다(20명 이상이 노를 저었음). 마상이는 아프리카인·뉴질랜드인을 비롯한 태평양에 사는 민족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미국 남동부에 사는 인디언, 태평양 연안을 따라 현재의 캐나다 북쪽 한계선까지 살았던 인디언 등이 사용했다. 외양용(外洋用) 카누는 현외부재(舷外浮材)를 가지거나 둥근 재목에 의해 몇 개가 서로 연결된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봐야저(voyageur : 나무꾼, 뱃사공, 벽지 안내자)와 털가죽 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를 사용했다. 이밖에 북아메리카 북부의 초기 프랑스 선교사와 탐험가들도 이 카누를 사용했다[브리태니커사전]

 

 

 

마상이(馬尙船)으로 본 북아메리카대륙

 

조선(朝鮮)은 북아메리카대륙에 과연 있었는가란 질문은 세계삼한역사관을 단번에 정립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거 영화나 소설 따위에서 각인되어 있는 것들을 우선 정리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특히 편향된 아메리칸인디언의 이미지에서 우린 벗어날 필요성이 있다.

 

마상이란 주제에서도 인디언 역사가 아니라 실제 인간 생활에서 찾아 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마상이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결코 특정된 사람, 인디언이 아닌 어느나라에서든지 서민들이고 일반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이것은 평범한 이동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말해 인디언만 사용하던 개념이라고 하여 낙후되거나 특별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마상이는 독목주(獨木舟) 즉 카누(Canoe, 劃艇)의 우리말이라 한다.

한어로 마상선(馬尙船)이라 하고 마상진(馬尙津), 마상선(麻尙船), 마상선(亇尙船)등으로 불리는데 사전에는 거룻배라고 하는 거루 같은 작은 배이거나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 즉 독목주(獨木舟)를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현대 사람들은 마상이라고 하는 독목주(獨木舟)를 카누(Canoe, 劃艇)라고 알고 있으며 “카누"라는 용어는 배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canoa"에서 온 것이라며 현대 영어로는 캐나디언 카누(Canadian canoe)라고 한다.

왜 캐나다 카누라 하여 캐나다가 붙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작은 선박 역사를 볼 때 먼저 물에 무조건 뜰 수 있는 것을 이용한 부대(艀袋)라는 것이 있었고 다음으로 뗏목배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며 이어 카누처럼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작은 배 즉 마상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며 다음에 대나무, 나뭇가지를 엮어 골격을 만들고, 짐승가죽이나 나무껍질을 붙인 가죽배가 등장한 것이라고 살펴지고 있다.

 

자료에서 카누(Canoe)의 특징은 배의 방향을 돌리는 기구(器具)인 키(舵, rudder)나, 선체(船體)의 중심선을 따라 배 밑을 선수(船首)에서 선미(船尾)까지 꿰뚫은 부재인 용골(龍骨, Carina)등을 쓰지 않고 원시적으로 만든 길쭉한 배를 가르키며 전진하기 위해 노(櫓)를 사용한다고 했고 노(櫓)는 자루가 짧은 것을 패들(paddle), 긴 것을 오어(oar)라고 하며 한자로는 노(櫓), 도(櫂), 도(棹) 등으로 쓰이나 보통 구별없이 사용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노(櫓)는 작은 배에 장비하여 짧은 거리를 저어가는데 사용하는 것이고, 도(棹)는 상앗대로서 강이나 얕은 물에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긴 대나무나 막대를 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리고 카누(Canoe)는 인류의 역사와 깊게 맞물려 있다고 하고 인디언들이 강이나 바다에서 교통수단으로 혹은 수렵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던 작은 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였으며 통나무 내부를 파낸 배는 오래전부터 여러 대륙에서 발전되어 덕아웃(dugout), 마상이(piragua) 등으로 발전되었다고 하면서도 인디언과 카누가 밀접한 냥 혼란을 주고 있다.

대신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은 자작나무나 동물의 가죽을 이용한 카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들이 만든 통나무배의 재료가 자작나무라 하였는데 이 자작나무(白桦 Betula platyphylla)가 단목(檀木)이고 신단수(神壇樹)이며 한국자작나무(corean birch)란 사실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게 하는 점이다.

 

마상이와 형태가 다른 카약(kayak)은 에스키모(Eskimo)인들이 사용하는 소형의 배로서 대개 1인승이며 주로 그린란드(Greenland)에서 수렵에 사용되었지만 캐나다의 일부지방에서도 쓰였다 하고 선체의 뼈대는 나무로 만들어지면서, 거기에 털을 없앤 바다표범 가죽을 붙인 배로서 조종자는 배의 가운데에 있는 동그란 구멍 속에 발을 뻗고 하반신을 파묻듯이 앉아 배를 모는데 조종석 앞에는 작살과 같은 수렵 도구를 놓는 조그만 둥근 대(臺)가 있는 것을 전부 가죽배(皮艇)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통나무 배라고 하는 마상이에 대한 우리나라 사서(史書)기록을 한번보자.

매우 다양하고 자세하게 기술되는데 놀란다.

조선 명종(明宗)때의 기록에 의하면 ‘마상선(麻尙船)은 거목을 파내서 배를 만든 것이다.’ 라고 되어 있고 그 크기는 곡물을 1백 섬 실을 수 있는 비교적 큰 것부터 아주 작은 것까지 있었다고 하며 큰 통나무를 2, 3m 길이로 잘라 속을 파낸 것으로 풀이 하면 뗏목 말고는 가장 원시적인 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北人 皆用麻尙船 滄茫大海 安可以麻尙船濟師哉

성종10년(1479) 8월 30일 기사에 북인(北人)들은 모두 마상선을 사용하는데 그와 같은 배를 가지고 어떻게 망망대해를 건너 군사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 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지난달 28일에 마상선 3척을 결합(結合)해서 상봉도에 보냈는데 풍랑을 만나 돌아왔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朝鮮)의 북인(北人)들은 모두 마상이 즉 마상선(麻尙船)를 이용한 것이다.

북인(北人)을 북쪽사람이라고 해석된다면 조선에 사는 북쪽사람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을 마치 다른 나라의 사람처럼 취급하게 하는 것은 맞지 않고 이해 할 때 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

 

○下書平安道節度使金嶠曰: “沿邊水上、水下麻尙船, 滿浦、理山等處, 急速聚泊, 又令體大多造。”

또 성종10년(1479)10월8일 기사에는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김교(金嶠)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연변(沿邊) 수상(水上), 수하(水下)의 마상선(麻尙船)을 만포(滿浦), 이산(里山)등지에 급속히 모아 정박(停泊)하도록 하고, 또 형체(形體)는 크게 하고 많이 만들도록 하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평안도에 있는 마상선이 평소 작으니 크게 만들어라고 지시하는 기록이다.

 

且江水洪深, 酷旱數三朔內, 猶不涉灘, 況各鎭馬尙船數少, 大軍難涉, 前段之論, 斷不可行也。
연산2년(1496) 8월 19일 기사에 평안도 관찰사 등이 동의한 야인(野人) 대책에서 "강물이 넓고 깊어서 크게 가물어도 두어 달 안에는 오히려 여울을 건너지 못하는데 더구나 각진(各鎭)의 마상선(馬尙船)의 수효가 적어서 대군(大軍)이 건너기 어려울 것이니 전단(前段)의 의논은 단연코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야인(野人)을 대적하기 위해 대군을 건너가게 하는 마상선이 부족함을 의논하고 있다.

야인(野人)이라 함도 조선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一, 寧邊 魚川驛前津、熙川 宋串津、江界 立石津、渭原 馬尙津等處水漲時, 赴防人乘馬尙船過涉, 多致漂沒。 令觀察使, 仍朴船多數造作, 過涉事。

중종23년(1528)4월16일 기사에 순변사 허굉이 사목을 마련한 글을 올리는데 그 내용에서 

1. 영변(寧邊)의 어천역전진(魚川驛前津)과 희천(熙川)의 송관진(宋串津), 강계(江界)의 입석진(立石津)과 위원(渭原)의 마상진(馬尙津)등에 물이 넘칠 때 부방 나간 사람들이 말을 탄 채 배에 올라 건너다가 빠져 죽게 되는 일이 많으니, 관찰사로 하여금 너비가 넓은 배, 잉박선(仍朴船)을 많이 만들어 건너게 하도록 할 것이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여기서 부방(赴防)은 서북 변경(西北邊境)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임무를 맡은 사람들로서 조선 서북쪽 경계로 들어 갈 때 말을 탄채 마상선을 이용하여 강을 건넜음을 알 수 있게 한다.

 

且其濟軍, 必用浮橋, 故雖不形言浮橋之用, 而托以過涉, 已令多造馬尙船, 又令採葛也。
중종23년(1528) 10월 2일 기사에는 야인 정벌에 관해 평안도 관찰사 허굉(平安道觀察使許硡)이 진언하길 "군사를 건네는 데에는 반드시 부교(浮橋)를 쓰게 될 것이므로 부교에 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건널 때에 쓰는 것이라고 칭탁하여 이미 마상선(馬尙船)을 많이 만들게 하고 또 칡을 채집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 페이지 맨 아래 그림 처럼 강을 건널 수 있게 하는 임시다리를 부교(浮橋)라고 하는데 마상선을 줄어 이어 놓고 그위로 나무를 걸쳐 놓은 다리이다.

이렇게 하려면 많은 마상선과 연결하는 줄 즉 칡이 필요함을 진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平安監司吳命恒, 以義州各鎭堡邊將馳報獵胡之數, 逐日增加, 一日所報, 多至三十餘名, 少不下二三十名, 分乘馬尙船, 鴨江一帶, 首尾相續, 似是冒禁往來者。 請馳通鳳城禁止, 以杜後弊事, 馳啓。
경종4년(1724) 6월 2일 기사에서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명항(吳命恒)이, ‘의주(義州) 각 진보(鎭堡)의 변장(邊將)이 치보(馳報)한 사냥하는 오랑캐의 수효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하루 동안에 보고한 바가 많으면 30여 명에 이르고 적을 때에도 2, 30명에서 밑돌지 않으며, 나누어 타고 온 마상선(馬尙船)이 압록강(鴨綠江) 일대(一帶)에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따르니, 이는 금령을 무시하고 왕래하는 자인 듯하므로 봉성(鳳城)에 빨리 통지하여 이를 금지시켜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일’을 치계(馳啓)하였다는데 오랑케들이 마상선을 이용하여 꼬리를 잇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을 달려 알렸다하니 마상선을 이용한 침범무리 즉 오랑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서에서 마상선을 이용한 다양한 사건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조선(朝鮮) 특히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에 마상이 즉 마상선(馬尙船)의 기사가 유독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계수나무가 카누의 노 만드는 재료라는 점 때문에 계수나무의 원산지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즉 록키산맥을 상류로 하고 있는 미주와강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조선 서북변경에서 북인들과 야인들이 마상선을 이용하여 경계를 침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마상이를 이용하여 조선 서북쪽 강을 따라 침범한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때문에 자작나무와 계수나무의 근원지, 즉 원산지 파악으로 확인된 북아메리카대륙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카누, 마상이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과 태생적으로 일치하는 이름이다.

미주리는 인디언 말로 '큰 카누의 마을'을 의미한다 하였으니 마상이 마을이 미주리강 주변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마상이의 노를 만드는 만드는 재료  계수나무 역시 본 블로그 글 "계수나무(Cercidiphyllum)와 카누(canoe)의 노(櫓)"에서 밝혔듯이 북아메라카 서북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한바가 있기 때문에 조선 서북변경과 일치한다.

마상이 배를 만드는 통나무 자작나무 또한 본 블로그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캐나다에 퍼져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도 밝힌바가 있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마상이를 만드는 자작나무가 단목(檀木)이고 신단수(神壇樹)이며 한국자작나무(corean birch)란 사실도 더 할 수가 있다.

 

계수나무(Cercidiphyllum)와 카누(canoe)의 노(櫓) http://blog.daum.net/han0114/17050599

자작나무(自作木, 樺木. 白桦, Korean birch) http://blog.daum.net/han0114/17049402

 

그렇다면 미주리강은 조선(朝鮮)과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평안도(平安道)의 지명 뜻에서 볼 때 대평원이란 의미가 들어가 있는 지명이다.
본 블로그에서 고려때 평안도(平安道) 가산군(嘉山郡)은 가평(嘉平)이라고 한다면 가평(嘉平)은 북아메리카의 대평원과 대초원을 끼고 있는 도시라 생각하여 시카코라고 감히 추측하였다.

그곳이 바로 바람이 많고 대초원과 대평원을 바라 보고 있는 도시이이기 때문이며 바로 미주리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그레이트플레인스(Great Plains) 대평원인 것이다.
그 평원을 평안도(平安道)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계수나무가 난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 역시 미주리강 주변에 "마상이 마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위 기사에 나타나는 북인과 야인은 마상이를 이용하고 조선 서북변경에 침입한 사실과 이 미주리강이 서북부에 위치한 록키산맥을 상류로 동류하는 강의 특성을 고려 할 때 위치상 같을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모든 자료 설명에는 한반도 압록강을 비롯하여 여러 강, 호수, 해안 지대에서 고기잡이는 물론 강을 건너는 교통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하였으나 남한만 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마상이 처럼 생긴 배를 본적이 없다.

이렇게 완벽하게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 마상이는 서민들이 사용하던 배이다.

그렇다면 해방 후 남한 어디에서든 간에 위와 같이 통나무를 파낸 배, 마상이를 구경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실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아야 맞다.

위 조선(朝鮮)사서 기록에서 보듯이 마상이 즉 마상선(馬尙船) 기록이 그렇게 다양하고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반인들 조차 볼 수 없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상이에 대한 사서 기록이 이상한 것이다.

없었던 것을 거짓으로 사서에 기록한 것인가?

아니다.

분명있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한반도에는 이 마상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마상이가 있었다고 하는 한반도 압록강 역시 사서에 등장하는 압록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한반도 역사가 삼한 역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삼한역사관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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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0년(1479) 8월 30일

北人 皆用麻尙船 滄茫大海 安可以麻尙船濟師哉

“북인(北人)들은 모두 마상선을 사용하는데 그와 같은 배를 가지고 어떻게 망망대해를 건너 군사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 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지난달 28일에 마상선 3척을 결합(結合)해서 상봉도에 보냈는데 풍랑을 만나 돌아왔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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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0년(1479)10월8일

○下書平安道節度使金嶠曰: “沿邊水上、水下麻尙船, 滿浦、理山等處, 急速聚泊, 又令體大多造。”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김교(金嶠)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연변(沿邊) 수상(水上)·수하(水下)의 마상선(麻尙船)을 만포(滿浦), 이산(里山)등지에 급속히 모아 정박(停泊)하도록 하고, 또 형체(形體)는 크게 하고 많이 만들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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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2년(1496) 8월 19일
평안도 관찰사 등이 동의한 야인 대책을 의논하다.
且江水洪深, 酷旱數三朔內, 猶不涉灘, 況各鎭馬尙船數少, 大軍難涉, 前段之論, 斷不可行也。
또 강물이 넓고 깊어서 크게 가물어도 두어 달 안에는 오히려 여울을 건너지 못하는데 더구나 각진(各鎭)의 마상선(馬尙船)의 수효가 적어서 대군(大軍)이 건너기 어려울 것이니 전단(前段)의 의논은 단연코 행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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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23년(1528)4월16일

순변사 허굉이 사목을 마련한 글을 올리다

一, 寧邊 魚川驛前津、熙川 宋串津、江界 立石津、渭原 馬尙津等處水漲時, 赴防人乘馬尙船過涉, 多致漂沒。 令觀察使, 仍朴船多數造作, 過涉事。

1. 영변(寧邊)의 어천역전진(魚川驛前津)과 희천(熙川)의 송관진(宋串津), 강계(江界)의 입석진(立石津)과 위원(渭原)의 마상진(馬尙津) 등에 물이 넘칠 때 부방 나간 사람들이 말을 탄 채 배에 올라 건너다가 빠져 죽게 되는 일이 많으니, 관찰사로 하여금 잉박선(仍朴船)을 많이 만들어 건너게 하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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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23년(1528) 10월 2일
平安道觀察使許硡,
야인 정벌 때 필요한 우후·종사관·군사에 관해 평안도 관찰사 허굉이 진언하다
且其濟軍, 必用浮橋, 故雖不形言浮橋之用, 而托以過涉, 已令多造馬尙船, 又令採葛也。
또 군사를 건네는 데에는 반드시 부교(浮橋)를 쓰게 될 것이므로 부교에 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건널 때에 쓰는 것이라고 칭탁하여 이미 마상선(馬尙船)을 많이 만들게 하고 또 칡을 채집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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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4년(1724) 6월 2일
평안 감사 오명항이 변방에서 사냥하는 오랑캐의 수효가 증가하고 있음을 치계하다
○平安監司吳命恒, 以義州各鎭堡邊將馳報獵胡之數, 逐日增加, 一日所報, 多至三十餘名, 少不下二三十名, 分乘馬尙船, 鴨江一帶, 首尾相續, 似是冒禁往來者。 請馳通鳳城禁止, 以杜後弊事, 馳啓。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명항(吳命恒)이, ‘의주(義州) 각 진보(鎭堡)의 변장(邊將)이 치보(馳報)한 사냥하는 오랑캐의 수효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하루 동안에 보고한 바가 많으면 30여 명에 이르고 적을 때에도 2, 30명에서 밑돌지 않으며, 나누어 타고 온 마상선(馬尙船)이 압록강(鴨綠江) 일대(一帶)에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따르니, 이는 금령을 무시하고 왕래하는 자인 듯하므로 봉성(鳳城)에 빨리 통지하여 이를 금지시켜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일’을 치계(馳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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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9년(1733) 11월 10일
제도(諸道)의 한전을 비롯한 기근을 당한 지역에 조세감면을 명하다. 국경 지역에 잡힌 사람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다
興慶又曰: “山羊會鎭被捉淸人, 頃令灣府馳通入送矣。 卽見平安監司權以鎭狀啓, 則乙未年間, 昌城府嘗捉淸人, 自朝廷移咨入送云, 今亦宜遵此例矣。” 上可之曰: “使臣之率去彼人, 事體未安。 令灣府傳送鳳城, 而咨文則付諸使行可也。” 興慶又奏: “平安兵使李遂良啓言: ‘淸人馬尙船十一隻漂流, 來抵於江界境。’ 請一倂打破, 以示禁絶之意。” 從之。
김흥경이 또 말하기를,
“산양회진(山羊會鎭)에서 잡힌 청나라 사람을 잠시 후에 만부(灣府)로 하여금 치통(馳通)하여 들여보내게 하였습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의 장계(狀啓)를 보니, 을미년경에 창성부(昌城府)에서 일찍이 청나라 사람을 잡았는데, 조정(朝廷)에서 이자(移咨)하여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또한 마땅히 이 전례(前例)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청나라 사람은 唐人(중국인)이 아니다.
하자, 임금이 옳게 여기며 말하기를,
“사신(使臣)이 그 사람을 데리고 간다면 사체(事體)에 미안하다. 만부(灣府)로 하여금 봉성(鳳城)에 전송(傳送)하게 하고, 자문(咨文)은 사행(使行) 편에 부치는 것이 좋갰다.”하였다.
김흥경이 또 아뢰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수량(李遂良)의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의 마상선(馬尙船) 11척이 표류해 강계(江界)지경에 왔다.’고 합니다. 청컨대, 한꺼번에 쳐 깨뜨려 금절(禁絶)하는 뜻을 보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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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始的獨木舟幾乎在全世界都有發現

 


1.在英國約克郡一個沼澤里,發掘出了一支公元前7500年的木槳。這支槳一定是用來劃一種中間掏空的獨木舟的。在荷蘭發現了一隻這樣的獨木舟,其年代約為公元前6300年。在英國發現的一隻獨木舟,長達16米,寬1.5米。

2.中國新石器時代遺址浙江湖州錢山漾、浙江餘姚河姆渡、福建連江、廣東化州都出土過獨木舟或船槳的殘骸,這些文物已有5000-9000年的歷史。 

3.埃及, 度等地都發現過考古證據。

4.至今非洲及美洲印第安人的一些部落還在按照古法製作獨木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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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63권, 23년(1528 무자 / 명 가정(嘉靖) 7년) 10월 2일(경자)

야인 정벌 때 필요한 우후·종사관·군사에 관해 평안도 관찰사 허굉이 진언하다

○平安道觀察使許硡, 以虞候及從事官單子【虞候金秀淵, 從事官武臣李長吉、文臣元繼蔡ㆍ尹漑ㆍ李億孫ㆍ梁淵。】啓曰: “前日啓稟之時, 虞候未及啓之, 虞候例爲有之, 故今啓之。 但金秀淵今爲全羅道右水使, 然今乃箇滿, 故欲爲虞候也。 且李億孫今爲持平, 然非長爲喜諫也。 前例雖爲臺諫, 若可當於從事官, 則有遞其臺諫之事, 而右李億孫又爲可當, 故啓之也。 且黃海道守令等, 亦當預抄啓下, 而臨時入送, 故其諸將可當守令, 今竝抄啓。【黃州牧使李誠彦、豊川府使池漢宗、遂安郡守朴繼夏、瓮津縣令郭士複、文化縣令李德純、長連縣監閔崇英、康翎縣監李胤弼、長淵縣監朴有林、松禾縣監任鐵中。】且本道精兵, 雖云有之, 然弓馬之才, 不如京中及下三道之人, 大凡野人之性, 若大軍追入之時, 則例爲散匿, 而其於還軍之時, 衝突犯陣, 乃其常也。 若或據險衝突, 則須用能射之軍, 乃能却逐。 本道之軍, 其山川道路, 則皆能熟習, 而能射之軍不多。 請令兵曹, 行移各道, 使抄其能射有才之人三百餘名, 而啓之, 臨時率去何如? 此非徵兵之例, 三百餘名, 分抄於各道, 則一道抄其幾人, 而足於三百之數也。 大凡成敗未可知, 若勢不可分抄於各道, 乃以內禁衛取才及武科錄名, 相考抄擇何如? 大抵征討之事, 當秘密爲之, 故其大槪止此措置也, 其將士下送之時, 則須待臣啓本而爲之。 且黃海道軍士抄發之事, 臣行忙故, 未及處置, 然方輪及從事官等, 皆在京師, 命與兵曹同議下送, 從事官依前例抄擇也。 本道之軍, 臣亦不可親抄, 必使從事官抄擇也。 臣下去啓聞後, 從事官一員, 請於歲前下送, 且其濟軍, 必用浮橋, 故雖不形言浮橋之用, 而托以過涉, 已令多造馬尙船, 又令採葛也。 然此事若本土守爲之, 則多用人情, 不能董役, 須以事官爲之也。 從事官幷命下送何如?” 傳曰: “李億孫雖爲臺諫, 然或來年臨時下去也。 非今日帶行之事, 依啓爲之。 浮橋及從事官下送事, 當任卿措置。 但能射軍抄發事, 卿前日啓曰: ‘平安道軍六千、黃海道軍一千, 則可用, 若擧大兵之時, 則幷抄下三道也。’ 今則不爲大擧, 雖分三道入擊, 只兩道兵足用也。 今若別抄三百餘名之軍, 則人情必爲騷擾, 只用兩道軍士可也。 予嘗聞, 下三道軍十餘人, 不能當平安道兵一人也。 不必別抄他道之兵也。”

평안도 관찰사 허굉(許硡)이 우후(虞候)와 종사관(從事官)의 단자(單子)【우후는 김수연(金秀淵)이고, 종사관은 무신(武臣) 이장길(李長吉)과 문신(文臣) 원계채(元繼蔡)·윤개(尹漑)·이억손(李億孫)·양연(梁淵)이다.】를 가지고 아뢰기를,

“전일 계품(啓稟)할 때에는 우후를 미처 아뢰지 않았으나, 우후는 으레 있는 것이므로 이제 아룁니다. 다만 김수연은 지금 전라도 우수사(全羅道右水使)이나 이제는 개만(箇滿) 하였으므로 우후로 삼고자 합니다. 또 이억손은 지금 지평(持平)이나 길이 대간(臺諫)으로 있을 것이 아니며, 전례에 대간일지라도 종사관에 합당하면 대간을 간 일이 있는데 이 이억손도 합당하므로 아룁니다. 또 황해도의 수령(守令)들도 미리 뽑아서 계하(啓下)하였다가 임시하여 들여보내야 하므로, 제장(諸將)에 합당한 수령을 지금 아울러 아룁니다.【황주 목사(黃州牧使) 이성언(李誠彦)·풍천 부사(豊川府使) 지한종(池漢宗)·수안 군수(遂安郡守) 박계장(朴繼長)·옹진 현령(甕津縣令) 곽사정(郭士禎)·문화 현령(文化縣令) 이덕순(李德純)·장련 현감(長連縣監) 민숭영(閔崇英)·강령 현감(康翎縣監) 이윤필(李胤弼)·장연 현감(長淵縣監) 박유림(朴有林)·송화 현감(松禾縣監) 임철중(任鐵中)이다.】 또 본도에 정병(精兵)이 있다고는 하나 궁마(弓馬)의 재주가 경중(京中)과 하삼도(下三道)의 사람만 못합니다. 대저 야인(野人)의 습성은 대군(大軍)이 쫓아 들어갈 때에는 으레 흩어져 숨으나, 환군(還軍)할 때에는 충돌하여 군진(軍陣)을 범하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혹 험한 데에 의거하여 충돌한다면 활을 잘 쏘는 군사를 써야 물리칠 수 있을 것인데, 본도의 군사는 그 산천과 도로에는 다 익숙하나 잘 쏘는 군사가 많지 않으니, 병조를 시켜 각도에 행이(行移)하여 잘 쏘고 재주 있는 사람 3백여 명을 뽑아서 아뢰게 하였다가 임시하여 데려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은 군사를 징발하는 예(例)와는 달라서, 3백여 명을 각도에서 나누어 뽑으면 한 도에서 얼마 안 되는 사람을 뽑아도 3백의 수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성패(成敗)는 알 수 없으나 각도에서 나누어 뽑을 수 없는 형세라면, 내금위 취재(內禁衛取才)와 무과(武科)의 녹명(錄名)을 상고하여 뽑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대저 정토(征討)하는 일은 비밀히 해야 하므로 그 대개를 이만큼만 조치하나, 장사(將士)를 내려 보낼 때에는 반드시 신의 계본(啓本)을 기다려서 해야 하겠습니다.

황해도의 군사를 뽑아 보내는 일은 신의 갈 길이 바쁘므로 미처 조처하지 못하였으나 방윤(方輪)과 종사관 등이 다 서울에 있으니, 병조와 함께 의논하여 종사관을 내려 보내어 전례에 따라 뽑도록 명하시고, 본도의 군사도 신이 친히 뽑을 수 없으므로 종사관을 시켜 뽑아야 하니 신이 내려가서 계문(啓聞)한 뒤에 종사관 1원을 세전(歲前)에 내려 보내소서. 또 군사를 건네는 데에는 반드시 부교(浮橋)를 쓰게 될 것이므로 부교에 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건널 때에 쓰는 것이라고 칭탁하여 이미 마상선(馬尙船)을 많이 만들게 하고 또 칡을 채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본도의 수령이 하면 인정을 많이 써서 일을 감독할 수 없을 것이므로 종사관을 시켜서 해야 할 것이니, 종사관은 내려 보내도록 아울러 명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전교하였다.

“이억손은 대간이기는 하나, 내년에야 임시하여 내려갈는지도 모르거니와, 오늘 데려가는 것이 아니니 아뢴 대로 하라. 부교와 종사관을 내려 보내는 일은 경(卿)의 조치에 맡길 것이다. 다만 잘 쏘는 군사를 뽑아 보내는 일을, 경이 전일 ‘평안도의 군사 6천황해도의 군사 1천이면 쓸 수 있다.’고 아뢰었고, 큰 군사를 일으킬 때라면 하삼도에서도 아울러 뽑겠으나, 이번에는 크게 일으키지 않으므로 세 길로 나누어 들어가 치더라도 두 도의 군사만으로 넉넉히 쓸 것이다. 그런데 이제 3백여 명의 군사를 따로 뽑으면 인정이 소요할 것이니 두 도의 군사만을 쓰도록 하라. 내가 전에 듣건대, 하삼도의 군사 10여 명이 평안도 군사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하니 다른 도의 군사를 따로 뽑을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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