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모아이 석상, 제주도 하르방과 같다?

한부울 2011. 8. 21. 12:21

낙타(駱駝, camel)와 양(羊)이 나고 남극성(Canopus)을 볼 수 있는 곳

http://blog.daum.net/han0114/17049918

남극성(南極星Cnopusa)을 한반도 제주에서는 바르게 볼 수가 없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19

홍목(紅木), 소목(蘇木)으로 본 유구와 일본, 남만 위치 http://blog.daum.net/han0114/1705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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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한다.

이스터섬이 있는 곳은 분명 동남해이다.

동남해는 유구가 있는 곳이 고 유구 동쪽에 일본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모아이 석상은 어쩌면 유구문물일 수도 있다.

유구인들이 조선을 시시 때때로 방문하여 조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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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 불가사의 ‘모아이 석상’ 알고보니 제주도 하르방과 같다?

[뉴스엔] 2011년 08월 21일(일) 오전 11:15

 

 

모아이 상에 얽힌 전설이 밝혀졌다.

 

8월 21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태평양 동부 이스터 섬,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모아이 상에 얽힌 전설을 전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된 모아이 석상은 다리가 없고 머리만 있는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무게 90톤 높이 10m로 1722년 네덜란드의 탐험가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모아이 석상은 수많은 전설로 사람들의 입에 입을 통해 회자됐지만 1968년 ‘신들의 전차’라는 한 권의 책은 모아이 석상의 미스터리를 제대로 풀어냈다. 이 책에 쓰여진 첫 번째 가설은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것. 책의 저자 에리히는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로 이스트 섬은 나무가 아예 없는 초원지대였고 완벽한 외딴 섬이라 배가 있어야만 교류가 가능했지만 나무가 없는 상황에서 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 노동력과 도구의 수입 역시 불가능 했다고 주장했다.

 

또 돌을 조각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지만 모아이 석상은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머리에 놓여져 있는 4톤 무대의 붉은 모자 역시 이스트 섬에 있는 돌과는 완전히 다른 재질인데다가 조각된 시기 역시 수백 년씩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모아이 몸통이 먼저 만들어 지고 모자가 씌어졌는데 당시 기술과 사람의 능력으로 이는 불가능 하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이스터 섬에 나무가 없다는 근거에 대해 모아이 석상이 만들어 진 11세기에서 17세기 이스터 섬은 나무가 울창한 지역이었다. 이 나무들은 원주민들의 영토 싸움으로 불타 없어졌다.모아이 석상의 재질은 매우 무른 성질의 화산암으로 알고보니 한국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같은 재질이었던 것. 사람의 능력으로 충분히 제작할 수 있었다.

 

책을 집필한 에리히는 ‘신들의 전차’ 이외에도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저서를 발표했지만 책이 발표 될 때마다 혹평에 시달렸다. 에리히는 자금난에 휩싸이며 파산의 위기를 맞게 됐다. 이에 그는 우연히 신문에서 접한 ‘모아이 상’을 곧바로 외계인의 작품인 양 조작하고 왜곡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거짓말로 인해 불가사의한 존재로 세상을 떠들 석 하게 한 모아이 상.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사람들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모아이 상을 직접 보기 위해 이스트 섬을 찾고 있다.[조연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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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Easter Island)은 태평양에 위치해 있는, 칠레령의 섬이다. 이스터 섬 주민들은 라파 누이(Rapa Nui ‘커다란 땅’)라고 부른다. 수도는 항가로아이다.

 

라파누이 바깥의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섬의 발견은 1722년 4월 5일에 네덜란드의 사령관 야콥 로게벤에 의한 것이다. 오후 5시가 될 무렵이었다. 섬을 발견한 것은 로게벤이 지휘했던 세척의 배 가운데 하나인 아프리카안쉬 갈레이호였다. 이 배의 항해일지는 첫 발견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오후 시계로 모래시계를 열 번째 쟀을 즈음, 앞에서 항해하던 아프라카안쉬 갈레이호가 바람을 가르며 나아갔다.(중략)...육지가 보인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낮고 편평한 섬 하나가.…우리는…그 섬에 파슈 에일란트(Paasch Elyland, 영어: Easter Island)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섬을 발견하고 찾아낸 날이 부활절 날이기 때문이다.

 

 

 

[지리]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이 섬을 라파누이(Rapa Nui)라 부르는 데 커다란 땅이란 뜻이다.

이스터 섬은 태평양의 동부 한 가운데에 있다. 또한 이스터 섬은 폴리네시아에 속해 있다. 이스터 섬은 칠레로부터 약 3,700 km, 핏케언 제도로부터 2,075 km 떨어져 있다.

섬의 전체 모양은 삼각형이고 삼면이 각각 22, 18, 16km로 대략 좌우대칭을 이룬다. 따라서 총 면적은 171km2에 불과하다. 섬에는 두드러진 봉우리가 세 군데에 있는데, 이 세 봉우리가 모두 삼각형 지형의 모서리에 가깝다. 이들 봉우리는 하와이나 타이티 섬에서 보듯이 바위투성이의 험준한 정상과는 다르다. 단단하고 둥그스름한 모양이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헤브리디스 제도에 있고 그 명칭도 적절한 팹스 오브 쥐라와 비슷하다.가장 높은 가슴인 북쪽의 테라바카는 해수면에서 510m높이로 솟아있다. 이보다 작은 동쪽의 봉우리 포이케는 410m정도이고 남서쪽의 라노 카우는 겨우 300m밖에 되지 않는다. 이 라노 카우에는 직경이 1.5km인 원형분화구가 자리잡고 있다.

현재 이스터 섬에서 보이는 암석의 범위는 놀랄 만큼 폭넓은데, 섬에 있는 세 곳의 봉우리는 주로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노 카우 절벽에는 육각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관측된다. 라노 카우 주변과 모투 이티 주변의 지층에는 화산유리인 흑요암이 다수 발견되며, 그 유명한 모아이를 조각한 암석은 라노 라라무의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해안 절벽을 따라 많은 용암 동굴이 관측된다., 테라비카에서는 용암동굴의 천장이 몇 차레 무너져 길이가 10m 이상씩 되는 동굴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지 않고 남아 있는 동굴 가운데는 두께가 30cm 정도까지 얇은 동굴도 있었다. 이렇게 동굴이 풍부하여 빗물의 대부분이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섬의 넓은 지역이 습기 없이 메마른 모습을 띄게 만든다. 실제로 이 섬 어디를 가더라도 지속적으로 땅 위를 흘러가는 시내나 개울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물론 비가 많이 내릴 때에는 테라바카에서 바다 쪽으로 단속적으로 흘러드는 개울물이 있기는 하지만 중앙에 높은 고원이 없기 때문에 침식으로 형성되는 작은 협곡도, 개울이나 계곡도 형성 될 수 없다.

이스터 섬의 해안선은 폴리네시아 제도에 속한 섬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산호초가 적다. 물론 작은 산호충들이 자라긴 하지만 바닷물의 온도가 겨울에는 섭씨 21℃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산호초를 이루는 타입의 산호충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낮은 온도이다. 이는 폭풍우가 몰아치면 해안에 보호벽이 전혀 없다는 의미기이 때문에 포이케, 라노 카우 주변과 테라바카의 북쪽 지역에 300m 높이에 달하는 가파른 절벽이 생겼다. 오직 남쪽 해안만 이런 규모의 침식을 피한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쪽 해안은 부드럽고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해안선이 폭넓게 흩어져 있다.

해안선에는 놀랄 만큼 모래 해변이 드물다. 오직 북쪽 해안에 있는 아나케나에서나, 또는 좀 덜 알려진 라페루즈 만 근처에서만 모래 해변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지역에서 카누보다 큰 선박은 정박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터 섬에 전래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호투 마투아는 아나케아에 정박하기 전에 두 척의 카누에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고 한다.

 

[기후]

섬의 연평균 기온은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섭씨 20.5℃이다. 가장 따뜻한 시기는 1월과 2월이고, 기온이 23.4℃이다. 그리고 가장 서늘한 시기는 7, 8월로서 17.8℃의 기온을 나타낸다. 낮과 밤의 일교차도 심하지 않고 적절하며 서리가 내린다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년 내내 내리는 강우는 다소 불규칙하고 연평균 강우량은 1,198mm이다. 가장 습한 시기는 보통 3월에서 6월에 이르는 때이고 습한 시기인 하지만 가뭄이 여러 달에 걸쳐 나타나기도 한다. 보통 가장 건조한 시기는 9월이다. 강우량 또한 해마다 크게 차이를 보인다. 1948년에는 강우량이 1,550mm였으나, 1953년에는 766mm에 불과했다. 달에 따라서도 강우량의 변동은 심한 편이다. 섬의 크기가 작은데도 섬 전역이 다양한 강우 분포도를 보인다. 섬의 중앙 지역에는 북쪽 해안보다 훨씬 더 많은 비가 내리는데, 이것은 기온과 지형, 그리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상호 작용한 결과이다.

이스터 섬은 바람이 아주 많이 부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바람은 기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바람이 잠잠한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풍향은대체로 9월에서 5월 사이에는 동풍과 남동풍이 불고 나머지 시기 동안에는 북풍과 북서풍이 불어온다. 폭풍우가 심한 것으로 알려저 있는데다 괜찮은 항구가 없기 때문에 배가 오가는데 심각한 문제로 여겨져 왔다. 이스터 섬에는 바람이 완전히 차단되는 지역들이 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지역이 라노 카우 분화구 안이다.

 

[역사와 문화]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약 2,900년 전부터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로 이주하여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터 섬에는 "짧은 귀" 부족과 "긴 귀" 부족이라는 경쟁적인 두 부족이 있었다. 1722년 로헤벤이 이스터 섬을 방문하였을 당시 인구는 5-6천 명 정도였다. 1805년 미국의 노예 상인들이 22명의 원주민을 잡아갔고 1862년 페루의 노예 상인들이 이 섬의 왕과 귀족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1877년 이스터 섬에는 110여 명의 원주민만이 있게 되었다.

 

[모아이(Moai)]

이스터 섬은 거대한 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모아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소재이다. 이들은 이 석상이 외계인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세워졌다고 주장하고는 한다. 그러나 모아이는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11세기에 가장 많이 만들어졌으며 17세기까지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3.5 ~ 5.5m에 이르는 모아이는 약 900여 개가 이스터 섬 곳곳에 놓여 있다. 보통은 무게가 20 톤 정도이나 큰 것은 10m의 높이에 무게도 90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 모아이에 대한 초자연적인 전설은 이 섬을 방문한 로헤벤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이 섬에서 어떻게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울 수 있었는지 놀라워했다. 1968년 스위스인 다니켄은 원주민과 면담결과 모아이가 외계인의 작품이라 주장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과학적 조사 결과 이스터 섬에는 17세기까지도 나무가 무성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석상의 재질이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같은 화산암이어서 조각하기가 쉬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56년 노르웨이의 헤이엘다르는 12톤의 모아이를 나무로 된 도구만을 사용하여 섬 주민 180명과 한 달 만에 바닷가까지 옮겼다. 다시 조사한 이스터 섬의 주민들과의 면담에서 이들은 모아이가 '짧은 귀' 부족과 '긴 귀' 부족에 의해 새워졌다고 말하였다.[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