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항주에 있었던 혜인원(慧因院) 일명 고려사(高麗寺)가 바로 혜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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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정(薊山記程)에서 바로 본 조선
반도사와 중화사에서 연경(燕京)을 현재 베이징 북경이라 한다.
그런데 연경이 북경이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북경역시도 지금 베이징을 가능성이 없다.
연경과 북경은 지금 베이징 아니라 다른 곳에 각각 위치해야 맞다.
그러나 여기서는 각 사전에서 연경을 지금 베이징이라 하였으니 그대로 한번 따져 보자.
계산기정(薊山記程)도 따지고 보면 믿을 바가 못되는 잡서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작자가 불분명하고 노정자체가 신빙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후세 누군가에 의해서 짜집기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계산기정(薊山記程)을 그대로 인용 이상한 점을 지적해 보기로 한다.
아래 계산기정(薊山記程) 돌아오는 길(復路)이라 하는 편에서 작자는 북경을 거쳐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는 길인데 기록 반산(盤山)편에 보면
"혜인사(慧因寺)가 또 이 산에 있는데 구경할 만한 곳이 많다."라는 표현이 있다.
혜인사(慧因寺)는 고려사라고 하는 항주에 있는 사찰이다.
우리는 이 혜인사를 고려사 하였기 때문에 합천 해인사정도로 파악하려 한다.
만약 위 혜인사가 항주(杭州)옥금산(玉岑山)의 혜인사(慧因寺)가 맞다면 노정(路程)구도가 북경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가는 노정이 참으로 이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조선에서 지금의 북경이라고 하는 베이징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다시 돌아오는 여정 길에 대륙항주로 가 고려사인 혜인사(慧因寺)를 보았으며 그곳에서 다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이야긴데 당시 교통상황으로 보아 가능한 노정이 아니며 구도자체가 전혀 맞지 않는다.
이와 같은 노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이 한반도에 있지 않고 항주 남쪽에 조선이 위치하던지 아니면 항주에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지금의 무한(武漢)이 조선의 한성(漢城)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따져 보아도 구도가 맞지 않는 노정이다.
이와 같은 노정이 사실이라면 분명 한반도에 조선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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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정(薊山記程)
조선 순조 때의 문신 장계(長溪) 서장보(徐長輔)가 동지사 서장관이 되어 정사(正使) 민태혁(閔台爀)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의 사행 기록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서장관이었던 서장보의 친구로 영조 51년(1775) 생인 자가 성서(聖瑞), 호(號)가 동화(東華)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서장관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동지사의 사행을 따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노정에서의 견문과 감회를 적은 445수의 한시를 일기체로 편차하였다.
조선 순조(純祖) 3년(1803) 음력 10월 21일에 동지사(冬至使)가 임금께 하직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이때 수행한 한 이름 없는 선비가 연경(燕京)을 왕복하면서 노정(路程)에서의 견문과 감회를 적은 한시를 일기체로 편차한 것이 이 『계산기정(薊山紀程)』이다.
이 연행록은 전 5권으로 되었는데, 제1권부터 제3권까지는 연경까지의 기행시이고, 제4권은 돌아올 때 지은 시이다. 제5권은 부록으로 사행의 제반 절목(節目)을 비롯하여 저자가 목격하거나 조사한 당시 청(淸) 나라의 문물제도ㆍ풍속ㆍ습관ㆍ산천ㆍ도리(道里) 등을 21항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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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정 제4권
돌아오는 길[復路] ○ 갑자년(1804, 순조 4) 2월[2일-29일] 4일(갑자)
맑음. 방균(邦均) 40리 민가 양씨(楊氏)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계주(薊州) 45리 민가 조씨(趙氏)의 집에서 유숙했다.
반산(盤山)
낮에 방균(邦均)에서 점심을 지어 먹고 20리를 가 반산에 이르렀는데 일명은 반룡산(盤龍山)이라 하기도 한다. 이는 곧 이원(李愿)이 숨어 살던 반곡(盤谷)이다. 모든 산봉우리는 깎은 듯이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산허리 흰탑은 우뚝 솟아 송림(松林) 사이로 노출되어 있다. 가장 높은 산정에 있는 것은, 산은 높고 탑이 작아서 겨우 크기가 손가락만 하게 보였다. 산 밑에는 약 5리 둘레나 되는 담장이 둘렸는데, 이는 행궁(行宮)의 내장(內墻)이다. 이 궁장(宮墻)을 따라 서쪽으로 돌며 산에 오르는데 올라갈수록 더욱 높다. 흐르는 샘은 힘차고 암석 또한 우뚝하다. 굽이마다 놀기 좋고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구경거리다. 뭇 봉우리를 쳐다보니 다투어 빼어난 형체가 마치 짐승이나 창, 칼을 세운 듯했다. 이는 대개 돌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먼 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송백이 울창한 것 같다.
담장 수백 보 뒤에 큰 사찰이 산을 등지고 있는데, 단청이 찬란하고 실내가 정결하여 자못 산방(山房)의 정취를 자아낸다. 사찰 밑에 2개의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전면에 새겨진 것은 모두 건륭 황제의 어제시(御製詩)이다. 절 문으로 해서 동쪽으로 한 석탑(石塔)에 이르니 탑은 13층에 8각으로 되었고, 경(磬)을 달았는데 그 소리가 은은하며 높이는 열 길이나 된다. 돌 사다리로 올라가 탑신(塔身) 전면에 서서 보니 밑에는 광야이고, 뒤에 고봉(高峯)을 지고 있어 시야가 더 없이 아득하고 마음은 자연 상쾌하다. 대개 이 산에 3반(盤)이 있는데, 이것이 중반(中盤)이라 한다.
탑면(塔面)에 별실을 만들고 조그마한 금불(金佛) 수십 개를 안치했다. 석문(石門) 안에는 한 쌍의 거인적(巨人蹟)이 있는데 돌에 박혀진 흔적이 1촌(寸)이 넘는다. 물어보았더니 ‘고적(古蹟)이라.’ 하나 자세치 않다. 붓을 뽑아 이 벽상에 이름을 썼다. 다시 사찰로 돌아와 들어가니 승려 한 사람이 있어 매우 친절하게 맞아준다. 그 승려의 이름과 호를 물었더니 ‘이름은 자지(子志), 호는 항의(恒義)이며, 강서 무주부(江西撫州府) 사람이라.’ 한다. 탁상에 청록색 자기(磁器)의 찻종[茶鍾]이 있는데, ‘반산소림사(盤山少林寺)’ 다섯 글자를 넣어서 구운 것이다. 승려는 찻종을 주면서 말하기를,
“귀국에 돌아가 친구들에게 ‘반산에 놀 때 중 아무개를 만났는데 이 찻종을 주더라.’고 하면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하기에 나 또한 ‘반산’ 두 자가 좋아서 그것을 받고 부채[扇], 환약(丸藥) 등을 선물했다. 원굉도(袁宏道)의 ‘반산기(盤山記)’가 있는데 자세하게 나타났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선석대(仙石臺) 서쪽에 있는 만송사(萬松寺)와 운조사(雲照寺) 동쪽에 있는 현공석(縣空石)이다. 날아갈 듯한 처마, 끊어질 듯한 교량이 수십 길 공중에 건너질렀는가 하면, 좌우는 모두 석봉(石峯)이 비동(飛動)하는 것 같다.
천문개(天門開)는 자개(紫蓋) 동쪽에 있고, 등운봉(騰雲峯)은 현공(懸空) 동쪽에 있으며, 투간교(投間橋)는 자개의 허리에 있는데 자연적으로 된 석교(石橋)이다. 처음 들어와서 반천(盤泉)을 보았고, 다음에 현공석을 보았다. 가장 높은 곳은 반정(盤頂)이며, 현공석을 지나면 상방사(上方寺)다. 또 돌층계가 없는 데가 천문개이다.
이 산의 팔경(八景)은 자개(紫蓋), 등운(騰雲), 투간(投間), 선석령(仙石嶺), 낭갑석(狼甲石), 장방석(帳房石), 능각석(菱角石), 환룡지(絙龍池)이다. 승려[僧]에게 묻기를 ‘팔경 중에 오늘 볼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했더니, 승려가 자개ㆍ등운 네 글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은 바라볼 수는 있어도 올라갈 수는 없다.’고 한다. 환룡지는 탑 밑에 있는데 자연적으로 된 석지(石池)이다. 가늘고 긴 이끼가 아롱아롱하게 끼어 있고, 물은 돌 틈으로 흘러나온다. 못 외벽(外壁)에는 ‘환룡지’라 새겼고, 곁에는 ‘영천계(榮川桂)’ 세 글자를 썼다.
이 산의 산세는 우리나라 송악산(松岳山)과 비슷하다. 봉만(峯巒)이 첩첩이 둘러져 있어 원굉도(袁宏道)의 《기문(紀文)》에 이른바 ‘밖에는 뼈요 안은 살졌다.[外骨而中膚]’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상요람(士商要覽)》에 이르기를, ‘반산(盤山)은 여순양(呂純陽)이 칼을 날려 황룡선사(黃龍禪師)를 참(斬)한 곳이라.’ 하였는데, 선검(仙劍)을 그 산 이마에 꽂고 정자를 지어 덮었다.
또 들으니 ‘반산에 불등(佛燈)이 있어, 매년 섣달그믐이면 반산에 있는 운조사(雲照寺) 정광불(定光佛) 사리탑(舍利塔)과 계주(薊州)의 독락사(獨樂寺)ㆍ관음각(觀音閣), 통주(通州)의 고산파탑(孤山破塔) 등이 서로 어울려 등(燈)을 가지고 왕래하다가 경루(更漏)가 다한 뒤에 각각 돌아가는데, 신도들은 항상 양식을 싸 가지고 이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혜인사(慧因寺)가 또 이 산에 있는데 구경할 만한 곳이 많다. 이 밖에도 산곡(山谷)간에 우뚝한 것이 모두 층대(層臺)와 기각(綺閣)인데, 날이 저물어 산간의 아름다운 경치를 다 구경하지 못했다.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석벽 사이에 대망(大蟒)이 나는 듯한 큰 바위가 있는데 이는 대망석(大蟒石)이라 하며, 호랑이가 앉은 것 같은 바위가 있는데 이는 호석(虎石)이라 하며, 연꽃같이 3각형으로 되어 1각은 땅에 묻히고 양각(兩角)은 공중을 향하고 있어 그 크기가 집채만 한 것이 있는데 이는 능각석(菱角石)이라 한다. 사람이 모자를 쓴 것처럼 생겨 석대(石臺) 위에 높이 서 있는 것이 있는데 이는 모석(帽石)이라 한다. 꼽추처럼 구부리고 빗겨 서서 석문(石紋)이 난 것이 있으니 이는 낭갑석(狼甲石)이라 한다.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며 혹은 뾰족하고 혹은 펑퍼짐하여 무슨 모양이라 해야 될지 모르겠다. 모두 각양 각색이다. 원(袁)의 《기문》에 이른바 ‘혜석(慧石)이 살아서 말하려는 것 같다.[慧石生動如欲言]’ 함은 과연 옳은 말이다. 맨 밑에 장방석(帳房石)이 있는데 이 돌은 마치 바둑판 같아 너비와 길이는 모두 두 길이 넘고, 높이는 한 길이나 되며, 석면(石面)은 갈아 놓은 것처럼 판판하다. 그 위 네 귀에는 구멍이 뚫려 장주(帳柱)를 세울 만하기 때문에 장방(帳方)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돌 위에 올라앉아 행궁(行宮)의 전경을 굽어보니, 층마다 나는 것 같다. 그 복판에 정전(正殿)이 있는데 이는 단청을 하지 않았다.
언덕을 따라 점점 올라가니 수십 보 사이에 계속 정자 하나씩을 지었는데, 모두 산을 등지고 광야를 전망하고 있다. 혹은 둥글고 혹은 비스듬히 서서 6모[稜]로 되기도 하고 3층으로 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모두 머물러 쉴 만한 곳으로서 그 제도가 일정치 않다. 또 동쪽에 3층으로 된 채각(彩閣)이 있는데 놀 만한 곳 같다. 한 가닥 시냇길에 감ㆍ배ㆍ사과ㆍ오얏 등의 과일나무가 총총히 숲을 이루고 있어, 만약 꽃이 피거나 과일이 익을 때라면 꽃다운 향기와 붉은 열매ㆍ검은 열매가 한층 더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 대개 과목(果木)은 이곳 토질에 맞고 절의 승려[僧]들은 대부분 이것으로 생계(生計)를 삼는다하며, 황성 시중(皇城市中)의 것이 태반은 반산에서 생산되는 과실이라 한다.
다시 행궁(行宮) 앞에 이르러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했으나, 황제가 계주(薊州)에 행차할 때 필시 이곳에 들르리라 하여, 지금 행궁 7처(處)를 정리하는 사무사(事務使)가 궁을 수리하고 길을 닦는 데 왕래하기 때문에 금혼(禁閽)이 엄밀하다 한다. 또 민정(民丁)이 산 밑에서 길을 닦는 것을 보니 길 좌우에 있는 둥근 돌을 가지고 굴려서 길바닥을 숫돌처럼 만들고 화살처럼 곧게 하는가 하면 길 중앙에는 한 치[寸] 이상 흙을 깔아 어가(御駕)의 길을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이 계주까지 뻗쳤다. 대개 옹정(雍正 청 세종)ㆍ건륭(乾隆 청 고종) 두 황제의 능이 계주 30리 북쪽에 있는데 황제가 오는 28일에 행차한다고 한다. 종일 올라가 구경하고 돌아와도 아쉬운 생각이 있어 지나온 곳을 다시 돌아보았다. 산허리에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 흰 탑이 수십 리를 지나와도 오히려 은연히 보인다.
盤山山勢屹重重 반산 산세가 높고도 첩첩한데
綺閣層臨畫意濃 누각은 층층이 단청이 빛나네
白塔歸雲浮紫蓋 백탑에 가는 구름 자개에 떴고
綠塘春水漾紅龍 녹당의 봄 물은 홍룡에 넘치누나
息勞坐掃千年石 피로를 쉬며 앉아 천년의 돌을 쓸고
耽勝行停萬里節 경치를 탐하여 만 리의 길손이 멈추었네
却見禪家風味厚 문득 선가 풍미 두터움을 보겠노니
少林閑釋捧茶鍾 소림사 도승이 찻잔을 선물 주네
이원(李愿) : 당(唐) 나라 임담(臨潭) 사람으로 반곡(盤谷)에 은거했다. 한유(韓愈)가 이원(李愿)을 반곡에 보내면서 지어 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가 전해진다.[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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