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식물

감자(馬鈴薯:Potato)와 코리아시움(coriaceum)

한부울 2016. 2. 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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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馬鈴薯:Potato)와 코리아시움

 

글쓴이:한부울


감자는 역사를 이야기 하기 전에 이미 인간과의 만남에서 생을 위한 절박함이 묻어 있는 작물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풍요로움과 거리가 있는 것이기에 구황작물(救荒作物)로 꼽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두 말 할 필요없이 인류사와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감자의 역사를 보면 1만 3천 년 전부터 칠레 해안을 따라 자라는 야생감자(Wild Potato)가 안데스산맥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과학자가 존재하고 영어자료에서 보듯이 The Inca Indians in Peru were the first to cultivate potatoes around 8,000 BC to 5,000 B.C.

페루의 잉카인디언들에 의해 BC 5000~BC 8000 경부터 재배되었다고도 알려진다.

Wild species are found from southwestern United States to southern Chile, with most species concentrated in Peru and Bolivia.

야생감자는 북아메리카대륙 남서부에서 칠레남부와 페루와 볼리비아까지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2011년도 본 블로그의 글 "신라산(la sil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455"에서 언급하였던 삼한의 역사 주체 "신라"의 명칭이 산 지명으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멕시코 북부 몬테레이(Monterrey) 실라산, (2)페루 우아누코주(Huanuco, 州)에 있는 실라산, (3)페루 리마(Lima)에 있는 실라산, 그리고 유럽남천천문대(歐洲南天天文台:The European Southern Observatory,ESO)가 있는 (4)칠레 라실라(la silla) 천문대, (5)우루과이에 있는 실라언덕(Cerro de la silla)바로 그것이다.


                                        [2011년도 블로그 글 "신라산(la silla)그림]


감자의 원산지가 아메리카대륙이었다는 사실들은 미국DNA 분포지도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인데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와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나타나 이는 전부 코리아(Corea, Coria)명과도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존재한다.

감자에 대한 서술에서 서양사의 내용을 보면 1536 년 스페인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원주민들이 감자를 재배하고 식용으로 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스페인 작가 페드로 데 시에자 데 레온(Pedro de Ciezade Leon)이 1533년 발간한 '페루 역사'에 따르면 당시 잉카제국은 기근에 대비해서 말린 감자(Chuno)를 공물로 거두어 들여 구황작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실상 이것은 재난을 대비한 것으로 잉카제국의 문화가 서양인들의 판단과 다르게 이미 조직적으로 진보적인 것이었고 발전된 모습을 충분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서양인들은 이를 잉카라고 함축하고 있지만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는 문제이다.

1570년경 비로소 스페인 사람들을 통해서 유럽대륙에 소개되었다 것인데 그들 스스로 인류사에 발전을 도모한 것은 없고 그저 빼앗고 강탈라고 침탈하는 역사말고 그들에게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강탈한 감자를 3년 후 유럽 땅 세비야 병원 환자들에게 급식됨으로써 유럽에서의 첫발을 내딛었다고 한다.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치고 이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바보는 없다.

또는 바스크(Basque)지방이 실제 유럽대륙에 존재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지방 선원의 가족은 북부 스페인의 비스 케이 해안(Biscay coast)을 따라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1589 년 엘비언(Albion) 또는 네덜란인이라고 볼 수 있는 월터 롤리(Walter Raleigh,1552-1618)에 의해 아일랜드 남서부 먼스터(Munster)주(州) 코르크(Cork)에서 40,000 에이커 땅에 감자를 재배했다고 알려지며 이런 식으로 유럽대륙 전역에 확산되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진정한 위치문제도 의심되는 것이 사실인데 실제로 유럽스페인북부 비스케이해안에 걸쳐 재배되었다고 한다면 동쪽 가까이에 프랑스 어깨 위치인 서북부에서 먼저 받아들일 것이고 아일랜드 보다 해상장악력이 뛰어난 잉글랜드 즉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에서 먼저 재배가 가능해야 할 지형임에도 아일랜드라 하니 믿기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독특한 식민지정책적인 문제라고 하지만 잉글랜드인 월터 롤리가 잉글랜드 모든 백성은 먹을 것이 풍족하다고 히겠지만 위기시 구황작물로 사용될 수 있는 감자를 자기 나라가 아닌 아일랜드에 그저 지배영역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자를 재배케 했다고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역사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현재 아일랜드가 본래 근거지라고 할 수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근세기 1869년에 완공된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도 가설공사에서 투입된 수많은 노동자들 중에 중국인을 제하면 거의가 아일랜드인이라는 점도 본래의 아일랜드 위치를 의심케 하는것이다.

이것은 본 블로그 글 "안식향(安息香)으로 본 삼한(三韓)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8871"에서 언급한 사실 중에 변광현 교수의 말을 빌리면 본래 티벳(Tibet)은 고대의 대월씨국(大月氏國, 大月支)으로서 씨(氏)와 지(支)가 통하는데, 이는 다시 월(月, 越)나라를 뜻하는 웨일즈(Wales) 즉 월지국(月支國)과 상통한다고 하였고 웨일즈(Wales)는 이방인을 뜻하는 말로 현재 잉글랜드 브리튼 섬 서부에 있는 웨일즈가 아니었을 것이란 추측을 낳게 하는 것이다.

이런 본 블로그의 글을 상기컨데 아래 지아코모 가스탈디(Giacomo Gastaldi :1500–1566)지도에서 보듯이 실제로 웨일즈는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에 있었을 확율이 높게 나타난다.

                                        flag of Wales(赤龍:the red dragon)


위 월지국이라고 하는 웨일즈의 기발에서 보듯이 적룡을 상징으로 하는 것은 매우 동양역사문화의 표식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광현 교수의 주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웨일즈는 티벳과도 연관된 역사명칭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월지국이라는 사실은 아래 지도에서 충분하게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본래 위치와 관계 없이 웨일즈와 아일랜드는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생성된 역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티벳에 대한 것도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글을 통해 주장하였듯이 히말라야(Himalayas)를 고대 산스크리트(梵語)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place, home, temple)를 뜻하는 알라야(alaya)가 결합된 복합어라는 바탕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알라스카 데날리 국립공원(Denali National Park)내에 '대산(大山)'이란 뜻의 데날리(Denali) 또는 매킨리 산(Mount McKinley:6,144 m)을 중심으로 하는 흰 산이라 하였던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지아코모 가스탈디(Giacomo Gastaldi :1500–1566)가 1546년에 제작한 아래 지도(Universale Cosmographo)에 비록 허리를 꺽어 마치 아시아대륙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따져보면 놀랍게도 티벳이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 위치한 것을 미루어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에 티벳(Tibet)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때 웨일즈(Wales) 즉 월지국(月支國)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형 이치적으로 감자가 전래 또는 이동과정에서 분명 아일랜드가 스페인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스페인을 신라로 보았을 때 신라가 점령한 어떤 곳에 아일랜드족이 거주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은 본 블로그 글 안식향(安息香)에서 따져보았듯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까지 확대가 가능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북아메리카대륙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오레곤, 아이다호, 와이오밍, 몬타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그리고 텍사스주까지 이에 포함된다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지형구도이다.

감자가 남아메리카대륙 칠레와 페루에서 북상하여 스페인으로 들어가 나중에 아일랜드로 넘어간 것이다.

이것들을 서양인들의 본거지가 된 유럽대륙이라고 하면 정말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파악한 바대로 여송연(呂宋煙, Cigar)과 담배(南草, 西草, 煙草, Nicotiana:Tobacco), 고추[고려호초(高麗胡椒)], 고구마(番薯: Ipomoea batatas), 그리고 옥수수(玉米, 玉蜀黍, 粟米, 番黍:Indian corn)까지 전부 삼한역사와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사는 무조건 에스파냐를 스페인 칭하면서 이것에 모두 연결고리를 걸어  만들고 한결같이 유럽대륙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들은 우리를 진실의 역사와 동떨어지는 시각 갖게 하였음도 알 수가 있다.

중요한 요점은 바로 감자의 전래과정으로 볼 때 남아메리카대륙 칠레, 페루, 볼리비아에서 출발하여 북상하였을 것이 틀림없을 것인데 정상이동로를 삼한역사에서 남방감자하였을 것이고 옛 스페인시민지영역으로 확대되었을 가능성과 그곳은 바로 신라 영역이며 고려영역임을 우리가 알 때 해안을 따라 북상한 감자가 다시 북쪽에서 남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는 것으로 이것을 아일랜드 감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감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감자종류와는 다른 이색적인 감자가 전세계에서 작물로 재배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럽대륙 아베리아반도(Iberian Peninsula)의 스페인을 한번보자.

스페인은 사실상 삼각도를 이루는 코리아(Coria)와 실라(Silla)라는 지명에 의해 정확하게 지배되었음을 충분하게 짐작이 가능한 곳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신라는 신성로마제국과 연결되면서 '신성'으로 이름했다는 것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얼마전 완성한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에서도 주장하였듯이 신라(新羅)가 아니라 신라(神羅)는 전통적인 왕조로서 신성로마제국으로 인식되어야 하고 그것이 유럽역사가 가로채었기 때문에 신라와 별개라고 보았지만 실제로 신라를 뜻 풀이하면 뉴스페인(New Spain)이라 해야 맞고 이것을 동양한문으로 역하길 신라(新羅)라 했을 가능성 매우 높은 것이다.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에서 글쓴이가 또한 주장했지만 코리아(CORIA)란 이름의 기원은 스페인어로서 에스파냐 서부 세비야주(Provincia de Sevilla)안달루시아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Andalucía)의 코리아 델 리오(Coria del Río)나 스페인 중서부, 에스트레마두라지방의 이슬람교도인 무어인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전투 역사가 남아있는 카세레스(Cáceres)에서의 코리아 거주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명칭이다.
서두에서 소제로 코리아(CORIA)는 스페인이고 고려라고 못을 박았다.
이것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전제한 것임은 물론이다.
'세 번의 위대한'이란 의미를 가진 트리스메기스토스(Trismegistos.org)란 이름의 학제포털사이트가 제공하는 사실에서보면 우리가 알지못하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에스파니아(Hispania)가 스페인이라고 한 것처럼 코리아(CORIA)가 곧 에스파니아(Hispania)라고 한 사실이다.

실로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꽉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이야기다.

본 블로그에서 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실제로 스페인과 신라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라틴어 카우리움(Caurium)이 코리아(Coria)라고 하였고 민족 전통적인 에스닉(Ethnic)으로 볼 때 “Cauriensis”이라한 존재성에서도 에스파니아가 코리아라는 등식은 Hispanus Cauriensis = of Caurium in Spain 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의심많은 여러분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닌가.
에스파니아(Hispania)의 역사는 기원전3세기(3rd BC)를 말하듯이 이것은 고구려와 역사가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감자에 대한 생물학적 사실을 한번 살펴보자.

서양인들이 만든 생물학적 분류체계에서 감자는 쌍떡잎식물(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로 나누고 가지목(茄目:Solanales) 가지과(茄科:Solanaceae)의 여러해살이풀(多年生植物, perennial plant)로서 마령서(馬鈴薯), 하지감자, 북감저(北甘藷)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하지감자는 한문으로 하지(夏至)라고 풀이되지만 하지(夏地)이어야 하고 하절(夏節)을 뜻하는 것으로 반드시 더운지역의 아열대성 감자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용어이다.


마령서(馬鈴薯)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茄目 Solanales

科: 茄科 Solanaceae

屬: 茄屬 Solanum

種: 馬鈴薯 S. tuberosum

 

이 감자라는 명칭은 역사적으로도 우리에게 혼란이 크다.

때론 감저(甘藷)라 하니 단맛이 나는 사탕수수 또는 고구마와 같이 취급되어 도대체 정리가 되질 않는다.

한어자료에서 마령서(馬鈴薯), 북감저(北甘藷) 또는 하지감자라고 하였으나 그대로 우리나라 사서에 그 명칭을 찾아보면 기록이 아예 나타나질 않는다.

양식으로 대용된 식물로서 대중적으로 상당히 친숙했어야 할 이 감자가 우리사서에는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은 정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것은 명확하게 조선왕조실록이 새롭게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1850년에 편찬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文長箋散稿)에 따르면 “북저(北藷)는 토감저(土甘藷)라 하며, 순조24~25년(1824~1825)에 관북(關北)인 북계(北界)에서 처음 전해진 것으로 청나라 채삼자(採蔘者)가 우리 국경에 몰래 침입하여 산골짜기에 감자를 재배하여 식용하였고 그 사람들이 떠난 후에 이것이 많이 남아 있어 이것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관북이라 함은 만주와 간도지방이 된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따져볼 때 청나라 함은 잉글랜드인도 될 수 있고 스코틀랜드, 또는 웨일즈와 아일랜드라 할 수도 있다.

그만큼 근세기에 만들어진 동양사는 믿을 것이 못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문제이다.

때문에 감자가 분명 아열대지방에서 자란 식물임에도 한반도지형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이상하게 북쪽 추운지방에서 들어온 것처럼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가 있다.

이것을 어찌 정상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감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경로에 대해서는 북방설(北方說)과 남방설(南方說)이 있다 하였으나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어 이것조차 따져 물을 수 조차 없게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일단 모호하게 처리된 사실에서 근원적으로 의혹을 가지기에 충분한 것이다.

명천부(明川府)의 김모(金某)라는 관상쟁이가 경사(京師)에 가서 가져왔거나 청나라의 삼을 캐는 자가 우리의 국경을 몰래 침범하여 심어 먹던 것이 밭에 남아 있다가 전파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역사추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부끄러운 것이 아닐 수 없고 어떻게 만년의 역사 전통을 가진 나라의 역사가 이런 형편이란 말인가.

그외 서경창(徐慶昌)이 1813년에 지은 것으로 기록된 ‘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에 의하면 신종민(申種敏)이 1830년에 북관6진에서 감자 몇 개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고 감자의 북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김창한(金昌漢)의 원저보(圓藷譜)에는 막연하게 북방(北方)으로부터 감자가 들어온 지 7, 8년이 되는 1832년 영국(英國)의 상선이 전라북도(全羅道)해안에서 약 1개월간 머물고 있으면서 배에 타고 있던 선교사가 씨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런 해안상륙한 사실들은 근세기 항해일지가 전부 조작되어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것마저도 뉴욕출판사들에 의해 새롭게 편집된 사실들이 만연했다고 볼 때 이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무조건 선교사이어야 하고 선교사가 아니라면 한반도에 들어올 수도 없는 것처럼 만들어 실제로 미개한 것처럼 호도했다는 사실과 마치 서양인들의 종교가 바탕이 되어 문명전래가 이루어진 것처럼 전부 처리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한반도 역사전체가 선교사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다.

왜, 무엇때문에 한반도에 들어오는 서양인들은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기독교가 아니면 안되는지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오히려 종교적으로 이슬람이 조선인들과 더 밀접했다는 것을 한반도 역사는 감추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한반도 역사의 서글프고 부끄러운 벌거숭이 모습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친일파들이 설치는 것도 알고 보면 전부 친미인사들임을 알 수 있고 이 친미가 오늘날 팍스아메리카를 통해 반도역사가 볼 품없이 쪼그라져 있는 것도 다 마찬가지의 영향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50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한반도 역사라 함에도 서양인들이 한반도에 내방함에 있어 그들 보다 뛰어난 문화가 있었고 또는 엄중한 국가적인 정무(政務)가 있을 법한데도 하나같이 마치 문명전달자로 변신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반도인은 마치 아프리카 미개인처럼 도식된 사실들을 어떻게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일개 경제이익을 위해 자원을 탈취하는 도둑에 불과했을 뿐임에도 마치 그들이 세상에서 최고로 정직하고 선량하며 성스러운 짓을 하는 것처럼 선교사, 선지자, 선지식자가 되어 한반도에 등장하게 된 모든 왜곡된 실들을 우리는 고쳐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그들 주장처럼 낙후되고 미개한 역사가 있는 땅이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는 모순은 언제까지 가져 갈 것인가.

그곳은 결코 한반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한반도 역사 지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6"에서 밝혀본 사실대로 1884년 미국종교 감로교 신자인 김옥균(金玉均)을 대표로 하는 무리들이 서양개가 되어 무력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바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는 사실은 바로 선교사라는 가면 뒤에 역사 훔치기가 도사리고 있었던 사실이다.

이것이 친미세력들의 반동이지 어떻게 친일반동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요지경세상이니 바로 친미세력임에도 한반도 역사에는 친일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 역사가 낙후되었다거나 미개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가 있다면 귀싸대기를 갈기고 싶다.

이런 반도학자들은 한반도에만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조잘될 것임에 틀림없다.

역사학자가 되었다면 적어도 세계역사에도 관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한반도 역사로 세계역사를 운운할 수가 없다.

서양인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 하여도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조차 모른 다는 것이 더 어리석다는 것이다.


어쨌던 한반도역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나라 감자 전래기록들은 모두 불분명하거나 불확실한 것으로서 아예 근거가 없다.

근세기 조선농회보(朝鮮農會報)1912년 7월호에 의거 한 기록이 그나마 근래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알게 모르게 이것은 한반도가 되어 나타나고 여기에도 어김없이 선교사가 등장한다.

이 회보기록에서 서울에 감자가 1879년 선교사에 의해 들여져 왔고 1883년에 재배되었다고 하였으며 1920년경에는 강원도 난곡농장(蘭谷農場)에서 독일산 신품종 감자를 도입하여 난곡1·2·3호라는 신품종을 개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강원도 난곡농장이 어디에 있었을까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는 지명으로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특히 감자가 전국적으로 재배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쌀을 공출해가자 농민들이 이에 부족한 식량을 대체하기 위한 작물로 감자를 경작하면서부터라고 하였다.

아주 그럴 듯하게 맞춘 것으로 이것은 마치 아일랜드에서 영국인들이 식량을 무더기로 각출하자 아일랜드인들은 감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게 맞아 드는 것이다.

아이리쉬(Irish) 즉 아일랜드어 또는 아일랜드 켈트어로 이해되는 것으로 감자를 아이리쉬포테이토(Potato)라고 한다는 것은 아일랜드가 위치한 곳이 서늘한 곳을 상징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감자가 서늘한 곳에 잘 자란다는 뜻이지 추운 곳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되었던 우리나라 한반도의 감자가 들어온 정확한 시기는 1920년 강원도 난곡농장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강원도 위치가 사실상 밝혀져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강원도라 하면 감자가 상징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강원도는 추운 곳일 뿐 서늘하다 할 수 없어 열대성과 아열대성을 갖추고 고지대로 서늘한 기후의 기온이 20℃ 정도를 유지하는 강원도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찾아 보아야 할 이야기다.


감자, 포테이토(Potato)의 어원(語源)은 열대 고지대 서늘한 기후를 가진 페루(Peru)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페루에서 감자를 빠빠‘papa’라 불렀고 이것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파타타(patata)가 되었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감자와 생김새가 비슷했던 고구마를 바타타(batata)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바타타를 이야기 하면 본래 고구마를 우리말로는 "감자마"라고 하였고 이것을 감서(甘薯,Dioscorea esculenta)라 하였는데 일단 단 감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고구마를 번서(番薯: Ipomoea batatas)라 하였는데 여기에 바타타라 한 것이다.

Batata is the word for sweet potato (Latin: Ipomoea batatas)

이것에서도 고구마를 서양인들은 스페인어로 "Batata de china"라 했다는 사실이다.

원산지가 중국인 감자를 바타타라 한 것인데 스페인들이 스페인어로 그렇게 칭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감서(甘薯,Dioscorea esculenta)에 서양인들이 분류한 학명에 디오스코리아가 들어간다.

바로 스페인어로 조선, 인도, 천축을 중국이라 하고 서양인들은 이를 코리아라 했을 공산이 크다.

즉 디오스코리아(Dioscorea)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코리아여!"라고 즉 신(神)의 나라, 고려(高麗)라고 칭했음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마(yam), 디오스코리아(Dioscorea)와 구황작물 http://blog.daum.net/han0114/17049497"에서 밝혔듯이 디오스가 들어간 작물들은 하나같이 구황작물로 인간에게 절박한 궁핍함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감자가 유럽대륙으로 들어가 재배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을 보면 유럽인은 땅 속에서 놀라운 속도로 뻗어나가는 감자줄기와 한 줄기에 50개 이상의 열매가 열려있는 모습을 보고 악마가 농간을 부린 것으로 생각했다 하였다. 
심지어 17세기 초에는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까지 유럽사회에 퍼진 것인데 이는 곡물업자들에 의해 감자소비를 걱정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대목이다.
1770년 대기근(大飢饉)이 닥쳤을 때 나폴리 사람들은 북유럽에서 구호품으로 보내온 감자를 만지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할 정도로 거부감이 강했던 모양이다.

나폴리라 함은 고도의 상업지역임은 물론이다.
1774년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가 기근대책으로 감자를 심을 것을 명령해도 맛없는 감자를 심지 못하겠다 하여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고 콜베르크(Kolberg)지방 사람들은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개조차 맛이 없어 먹으려 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먹어야 한단 말입니까”하고 호소까지 했다고 하니 감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가 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직접 매일감자를 먹음으로써 여론을 무마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18~19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한 인구부양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값이 상대적으로 싸고 실용적인 농작물로 자리 잡으며 재배가 활성화 되었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프랑스에서도 일찍부터 감자를 왕궁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했었고 루이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a Antonia Anna Josepha Joanna:1755-1793)는 감자 꽃을 머리장식으로 사용하였다 사실이 유명하다.

이후 프랑스대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을 겪으면서 왕궁에서만 길러졌던 감자가 본격적으로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아일랜드(Ireland, Eire, Irish)였고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빵을 제치고 주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남자들은 감자 껍질을 좀 더 쉽게 벗기기 위해 일부러 엄지손톱을 길게 길렀다고 하였다.

특히 아일랜드(Ireland)에서는 영국인들의 곡물 수탈로 대신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으며 그러자 이를 영국에서는 혐오했었는데 사람은 밀로 만든 빵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빵 대신에 지저분한 뿌리나 먹어서 게을러지며 간통이나 즐기는 개 같은 족속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이것은 풍족이 낳은 오만이 아닐 수 없다.

거의 식량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감자밭은 단 1에이커만 있어도 아일랜드의 6인 가족이 1년 내내 실컷 먹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농민은 착취를 가하는 영국의 지주들에게서 한껏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들의 인생을 즐기며 아이들도 많이 낳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끝낼 방법이 없을까 하는 궁리까지 하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식민지핍박으로부터 탈출의 기회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니 지배측에서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의 봉건 영주들은 불안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1822년 6월에 발행된 에든버러 리뷰(Edinburgh Review)에 "아일랜드에 단 100만, 아니 150만 명밖에 안 되는 주민이 살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을 때만 해도, 이들을 예속(隸屬)상태로 붙잡아 두는 일은 비교적 쉬웠으나 감자와 소작제도 덕분에 현재 아일랜드 주민 수는 700만 명에 이르며 물리적인 억압도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이 상태가 변고없이 계속되었다면 아일랜드는 일찍 독립을 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순탄할 수 없는 것처럼 감자역병인, 감자마름병(疫病, late blight1845-1846)이 발생하여 2년간 아일랜드 식량의 90%가 먹어보기도 전에 밭에서 썩어나갔고 이어 흉년까지 발생하면서 대기근(大飢饉)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적 불행의 이야기다.

아일랜드의 인구100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했으며 전체인구가 20% 이상 감소하였고 또한 100만 명은 살기위해 조국을 버리고 떠나갔다고 알려진다.

만약 아일랜드가 본래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떠났다면 솔직히 어디에서 어디로 떠난 것인지 정확한 역사장소위치등은 우리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역사찾기의 한계가 분명하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1800년대 후반 아일랜드의 인구는 반으로 줄었다고 정리된다.

그럼에도 아일랜드인들은 북아메리카대륙 횡단 철도에 노동자로 수많은 사람들이 투입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를 떠난 100만 명 안에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조상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아일랜드에서 들오는 감자를 북저(北藷)라 하는 토감저(土甘藷)라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감자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종류가 다양하다.

그렇다면 감자의 DNA 원산지 분포지도는 어떻게 표시되어 있는지 미국자료 Discover Life 를 통해 알아보자.

 

[1]Solanum tuberosum L. POTATO Irish potato(아일랜드 감자)


 

마령서(马铃薯:Solanum tuberosum,英语:Potato),属茄科植物。

분포지는 아메리카대륙 전역

广东大部分地區及港澳稱之為薯仔,高阳片粤语称之为薯菇

广西稱番鬼薯番鬼芋冬芋。名字可能源于第一,此物种由外国传入;第二,南方冬季温暖,马铃薯可以在冬季种植,和芋头一样都是长在地里,所以当地人有称之为冬芋的。

西北、西南、湖廣多直称馬鈴薯

福建、潮州、汕頭則稱之為荷蘭薯kan-tang(来源于马来语kantang)。

大部分地区如華北、东北俗称土豆

山東稱地蛋

山西晋语地區称山药蛋

安徽稱洋地瓜,簡稱地瓜

四川、重庆等地俗称芋薯洋芋。江浙一帶称洋番芋或洋山芋,簡稱洋芋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茄目 Solanales

科: 茄科 Solanaceae

屬: 茄屬 Solanum

種: 馬鈴薯 S. tuberosum

二名法

Solanum tuberosum L.

 

[2]Solanum coriaceum Dunal (CORIACEOUS 에서 coriaceum 로 변함)

분포지
Venezuela Bolivar 1450 m
Suriname 600 m
French Guiana Cayenne
Brazil Amazonas
Brazil Amapa
Brazil Rondonia 270-275 m


[1]첫번째 기재한 학명 "Solanum tuberosum L."은 감자(POTATO)라고 하고 아일랜드 감자(Irish potato)라고 하는 종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다.
분포지도를 보면 노란 점은 거의가 아메리카대륙 그것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넓게 포진하고 집중하고 있는 것에 반해 솔직히 아일랜드에는 노란 점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다.

이것은 지형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서 아일랜드가 본래 역사위치가 아닐 공산이 큰 것이다.
감자의 "DNA" 를 바탕으로 근원지를 따진다면 누가 뭐라해도 아메리카대륙이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됨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
다.
그렇다면 아메리카대륙은 구황작물의 대표적인 감자 전래의 연속성으로 볼 때 분명 아메리카대륙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으로 흘러들어가 자연스럽게 넓게 포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쓴이는 여기서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2]학명에서 종명에 붙어 있는 코리아시움(coriaceum)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우리가 구황작물에 코리아가 붙어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대로 감자 역사를 아무리 따져보아도 전혀 우리 역사에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코리아가 곳곳에 붙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주로 전래되었다는 것도 북감저 즉 북방지역에서 들어온 것이 유일하다 할 정도이며 한반도에 비로서 확실하게 전래된 것은 1920년으로 보고 있을 정도이니 아예 감자역사는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맞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자 종명에 "coria" 가 붙어 라틴어와 합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학명의 분포지도를 보면 특히 남아메리카대륙을 근원으로 하는 학명 "Solanum coriaceum Dunal" 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가지과 (Solanum)식물임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식물인지 잘 알려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다만 아래 그림에도 나오 듯이 노란 열매가 있는 식물의 그림이 전부이다.

숨겼다고 볼 수 있늠 대목이다.
이것의 분포지로 베네주엘라(Venezuela Bolivar), 수리남(Suriname), 프랑스기아나(French Guiana Cayenne), 그리고 브라질의 아마존(Brazil Amazonas), 아마파(Brazil Amapa), 론도니아(Brazil Rondonia)로 분포지가 나타난다.

놀랍게도 남아메리카대륙 동부이다.

과거 마지막 인도왕국이 존재하던 곳이다.
어떤 종류의 가지과 식물인지 알 수 없지만 "coriaceum" 이란 종명이 유별나게 돋보이는 것은 
이 "coriaceum" 은 하나같이 남아메리카를 지정한다는 사실이다.
종명(終名)의 ‘coria-ceum’에서 ‘coria’ 뒤에 붙은 라틴어는 옛 아일랜드(Old Irish)사람들이 ‘걸음걸이, 활보하다’ 란 뜻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아일랜드와 연결된다.


어원(Etymology)

From Old Irish céim (“step, stride”).

Noun ceum m. (genitive ceuma or cèim, plural ceuman or ceumannan)

1.step, pace, footstep

2.step (of a stair)

3.degree (of a university)

 

즉 감자가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재배되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옛 아일랜드인(Old Irish)과 연결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동시에 그것은 "CORIA" 고려(高麗)와 긴밀하게 걸쳐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적인 관점에서 원론적으로 볼 때 종명으로 “coriaceum”를 사용한 것은 바로 고려(高麗)를 암시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또한 고려는 옛 아일랜드와도 연계가 가능한 것으로 풀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스콜틀랜드와 고려가 연결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학명 "Solanum coriaceum Dunal"은 감자와는 별개의 종이기 때문에 본 감자 이야기와는 별개로 취급될 수 있겠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이것 또한 역사찾기에 한 장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서 들어나는 자료로 판단컨대 1831년 전후로 하여 분명 학명에서 속명으로 'CORIACEOUS' 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다시 속명 'coriaceum' 로 변해야만 하는 과정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래 그림처럼 붉은 사각 표시의 글자를 보면 학명이 무슨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속명인 Coriaceous 을-> 종명 coriaceum 으로 속명과 종명을 완전히 바꿔치기 하면서 CORIA 에서 뒤에 붙는 CEOUS 를 ceum 로 다르게 만들어 종명(終名)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자체를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Coriaceous" 를 사전에 찾아보았다.

An adjective termination of Latin origin. See -aceous

'CEOUS' 는 'See-' 보다라는 뜻으로 'acea' 또는 'aceae' 로 끝나는 동식물명의 형용사형을 만들 때 붙인다고 나온다.

cor·i·a·ceous (kôr-shs, kr-) adj.

Of or like leather, especially in texture(피륙, 가죽 같은).

[From Late Latin cori ceus, from Latin corium, leather; see sker-1 in Indo-European roots.]

 

무엇 때문에 CORIACEOUS 를 coriaceum 로 바꾼 것일까?

분명 "ceous" 는 형용사형을 만들때 붙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원래 속명으로 명명했던 'CORIACEOUS' 를 그대로 해석하면 cori, coria 가 독립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그간 서세가 만든 식물분류학체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돌출할 위험성이 있다고보고 그러한 위험성을 제거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여하튼 갑작스럽게 속명을 종명(終名)으로 바꾸면서 코리아시우스"Coriaceous"가 아니라 코리아시움(coriaceum)으로 바꿔 붙여 뜻을 변형시킨 것은 의도적인 그 무엇이 숨어 있을 것이다.

   

 

왜 감자를 설명하다가 'CORIACEOUS' 와 'coriaceum' 를 비교하여 이야기 하는가 하면 이러한 점은 물론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의 고리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CORIACEOUS' 가 종명으로 변한 'coriaceum' 이 종명에 붙어 학명 거의가 남아메리카를 대칭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지역적으로 따진다면 브라질이다.

감자는 어쨌던 우리나라 한반도 역사와는 별개로 나타난다.

때문에 그래서 불명확한 것이고 불분명하다는 것을 더 많이, 더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고구마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마구 흐트려 놓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일찍부터 감자가 인류에게 유용한 구황식물로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한반도에는 마치 미개한 나라, 외 딴 섬처럼 뒤 늦게 전래된 것으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은 누차 이야기 하지만 한반도 역사의 병폐인 것은 틀림없다.

단적으로 이야기 하면 있었던 것은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한반도 역사라 할 수 있다.

실제 조선역사가 그토록 미개하고 외 딴 섬처럼 비문화적이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류역사를 지배하던 유일무일한 역사가 바로 세계삼한역사이다.

늘 상 반도역사의 역류를 보면 선교사가 죄다 가까라는 사실도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현재 우리가 역사트라우마를 심하게 앓게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선교사 역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공격적인 선교를 위한 파견된 일꾼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인류가 아니라 자국 또는 자기 종교에 주안을 둘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겠는가.

선교사는 물질을 모르는 순수한 종교인이던가.

소위 월급쟁이가 대다수다.

즉 보수를 받는 종교단체의 일꾼이다.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면 선교사인 것처럼 반도역사가 그러한 빈약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선교사는 유명한 인도철학자의 이야기를 인용할 것도 없이 서양제국주의 앞잡이로 행세했던 것은 사실이다.

선교사난립상황과, 한반도에 선교사방문의 사실 기록들은 문제가 많은 것들이다.

선교사에 의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선교사들의 난립은 어쩌면 역사짜집기에 종교가 개입하여 역사본질을 망각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감자가 제일 먼저 한반도로 들어온 곳을 관북(關北)이라고 하였는데 앞에서 잠시 언급한 사실이지만 그곳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면 지리적으로 아일랜드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한반도 역사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북방설(北方說)일 뿐이고 대신 남방설(南方說)이 있다 하였지만 무슨 이유인지 자세한 기록자체가 없다.

오히려 남방설이 신빙성이 있을 것이지만 아예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감자의 주산지가 남아메리카이니 남방설은 남아메리카일 가능성이 높아 그것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역사기록에서 일반 서민, 백성들처럼 아일랜드인이 영국인에게 착취당한 것도 비슷한 이야기라고 하였다.

한반도인들이 늘 소작농으로서 배고품이 있었다면서도 재배하기 쉽고 접하기 쉬웠던 구황식물인 감자의 뚜렷한 명칭하나 바르게 정립되지 못하였다는 사실들은 도대체가 우리에게 역사다운 역사가 존재한 것이 사실인지 그 사실 자체를 의심해 볼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한반도 역사는 굳건하다.

속명 "Coriaceous" 가 어느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종명 'coriaceum'으로 바뀌었듯이 그래서 그 종이 실제 어떤 식물인지도 알 수 없도록 만들어진 근세기에 벌어진 역사혼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역사의 비밀을 가진 세계삼한역사를 없애고자 한 세력들이 근세기에 준동했던 것이 사실이고 이들이 세계삼한역사에 비해 결국 보잘 것 없는 한반도 역사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민족에게 노예근성을 심으려 했으니 그들의 지배욕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들이 꺼꾸로 당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세계삼한역사가 올바르게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구질구질한 역사 보다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적어도 희망과 꿈이 있기에 정말 좋은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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