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패권주의, 중국 국익에 이롭지 않다
최근 역사분쟁을 계기로 한국내 반중감정(反中感情)이 악화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고구려사 문제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중화패권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식적 반감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래 한국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특히 6자회담을 주도하면서부터 중국은 노골적인 패권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외세 때문에 근 100년 동안이나 굴절된 민족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이 중국의 패권주의정책에 대해 민족적 반감을 표출하는 것은, 제3자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중감정의 모델을 19세기말 한중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반중감정도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침투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었다. 그 이전이라고 해서 반중감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리적 접촉이 빈번한 인접국가간에 어떤 형태로든 감정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반중감정, 예컨대, 병자호란(1636)를 계기로 생긴 반중감정에는 적어도 경제적 측면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역사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전통적 한중관계에서는 경제적 실리보다 정치적 명분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임오군란(1882) 때부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882년 7월 7일(음력) 청나라 광동수사제독 우창칭의 부대가 정변 진압을 목적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이때 군인들 뒷바라지를 위해 40여 명의 중국상인들도 동행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국상인들의 집단적 한국진출의 첫 사례가 되었다.
중국학자 양쟈오첸·쑨위메이의 연구성과나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내 중국인의 수는 1883년 162명에서 1884년 666명, 1891년 1489명, 1906년 3661명, 1910년 1만1818명 등으로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상인이었다.
1880년대 초반 조선인들의 눈에 비친 중국상인들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중국상인은 일본상인에 비해 신의가 두터울 뿐만 아니라 오만불손하지도 않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바로 중국 패권주의정책이었다. 당시 북양대신 리홍장은 한반도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첸슈탕이나 위안스카이 같은 현지 외교관들을 통해 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침투를 강화하였다.
중국의 패권주의정책은 국제적인 우려를 낳을 정도로 과도하게 진행되었다. 한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국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등, 중국은 한국의 주권을 과도하게 유린하였다. 중국이 자국상인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조선과 체결한 상민수륙무역장정(1882)은 서양자본주의국가의 중국침략방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또한 1883년 중국은 인천에서 조계지를 얻을 목적으로 500명의 군인들까지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리홍장의 대리인인 위안스카이는 평소 고종 앞에서 인사도 제대로 안 했을 뿐만 아니라 1886년에는 고종 폐위까지 획책한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일본상인들 때문에 고통을 겪던 조선상인들은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한층 더한 타격을 입었다. 한국인들은 중국상인들에게 상권만 빼앗긴 게 아니라 고통과 핍박을 받아야 했다. 본국정부의 정치적 보호 속에, 중국상인들은 처음의 그 좋은 이미지를 버리고 전국 곳곳에서 온갖 만행들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여행증명서 및 화폐 위조 같은 사건들도 별 거리낌 없이 벌어졌다.
그리고 중국상인들은 민간인들에 대해서도 핍박을 가했다. 1882년 5월 20일 중국상인들은 광산사업을 해야 한다면서 평안북도 최치묵의 묘지를 훼손한 뒤에, 이를 항의하는 유족 2명을 살해했다. 또 이범진 사건(1884)이 있다. 중국인 30여 명이 땅을 팔라면서 이범진이라는 사람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데, 왜냐하면 이범진의 부친이 전 병조판서 이경하인데다가 이범진 자신도 3품의 관리였기 때문이다. 결국 강제로 땅을 매입한 중국상인들은 지금의 서울 회현동 부근에 중화회관을 건립하였다.
흥미로운 점이 또 하나 있다. 1897년 한성에 거주하던 총 3561명의 외국인 중에서 중국인이 1273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여자는 37명에 불과했고, 가정을 가진 중국상인들은 별로 없었다. 자국정부의 적극적인 보호 속에 중국상인들이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면, 대부분 남자인 이 '외롭고 돈 많은' 중국상인들이 조선의 풍속을 어지럽혔을 것임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기세등등하던 중국상인들은, 청나라가 청일전쟁(1894)에서 패배하자 하루 아침에 움츠려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무 보호도 받을 수 없게 된 중국상인들은 조선인들의 보복과 폭행에 노출되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반중감정이 비로소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유 없이 당하는' 중국상인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1년 9월 1일자 홍콩 <화자일보>(華字日報)에 보도된 '한성사건'이다. 서울 종로의 낙원상가 옆에는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이 있다. 종로3가역 5번 출구 옆에 길다란 골목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이궁가라 한다.
한성사건은 바로 여기서 벌어진 일이었다. 1901년 5월 3일(음력) 이곳 이궁가에서 말다툼을 벌이던 한국군인이 중국상인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런데 도리어 한국군인이 피해자라고 와전되면서, 사태가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분노한 한국인들이 한성 시내의 중국인들을 상대로 대규모 물리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군인들까지 나서서 중국상점들을 약탈하고 마포나루의 중국파출소까지 습격하였다. 파출소는 금세 파괴되고 말았다. 중국상인들뿐만 아니라 중국경찰들까지 곳곳에서 살해되었다. 온 한성 시내가 벌집 쑤신 듯 시끌시끌했다. 그동안의 쌓인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한성판윤과 중국총영사가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중국상인들에게는 공포의 나날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결국 황제가 직접 나서면서부터 사태가 겨우 진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882년 이래 감행된 무리한 중화패권주의 정책은, 청일전쟁 패배뿐만 아니라 위 경우처럼 한국인들의 격렬한 보복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패권주의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패권주의정책은 앞으로 국제적 견제를 초래함은 물론 한국인들의 격렬한 분노만 자초할 뿐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에는 중국의 영향력 강화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한반도에서의 중국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역효과만 낳고 말 것이다.
중국의 국익에 결코 이롭지 않다는 말이다. 특히, 이번 고구려사 문제와 같은 사건이 계속 생긴다면, 중국은 자국 수도 베이징에서 가장 가까운 국가와 더 이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중국은 과거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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