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속에서 끓고만 고구려 열풍
[특별기획-중화패권주의 ⑧] 한국의 미봉책,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8월 24일 국회는 여야 만장일치로 '고구려사 왜곡대책특위 구성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고구려사 왜곡대책특위 구성결의안 통과 때 서로 위원장을 맡겠다고 기싸움까지 벌였다. 그러나 지금은 석달이 다되어가도록 활동은 커녕 특위 구성도 못하고 있다.
국회 홈페이지에는 현재 구성된 정치개혁특위, 규제개혁 특위 등 7개 조직의 위원장과 위원 명단이 나와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고구려사 왜곡대책특위만 위원장도 위원도 없이 비워져 있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여야의 주장은 다르다. 유기홍 열린우리당 의원은 "특위 구성에 한나라당이 응하지않고 있다"며 "여당은 이미 15명의 특위 위원 명단을 확정했지만 한나라당은 자체 인원 구성도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특위 위원장을 맡겠다고 하면서 문제가 된 것인데 민족적 문제를 이런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위원장도 위원도 없는 국회 고구려사왜곡대책특위
그러나 한나라당 쪽에서는 지난 8월 말 고구려사 문제에 관한 중국과의 구두 5개항 합의 뒤 정부와 여당의 태도가 소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있다.
당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방한한 뒤 양 쪽은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간 중대 현안문제로 대두된 데 대해 중국측이 유념하고
△역사 문제로 인해 한·중간 우호협력관계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고 전면적인 협력 동반자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고구려사 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 쪽은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 쪽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감으로써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등에 합의했다.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여당 쪽의 참여가 중요한데 열린우리당은 현재 이 문제에 소극적"이라며 "중국과의 구두 5개항 합의 뒤 정부의 태도가 외교적으로 무마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구려사 왜곡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데 고구려연구재단에 50억원 지원하는 것 등으로 끝내고 민간 부문에 떠넘긴 상태"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여야가 고구려사 왜곡대책 특위가 첫 발도 내딛지 못한데 대해 나름대로 이유를 대고 있지만 외부 시각은 싸늘하다.
서길수 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여야 사이에 처음에는 고구려사 왜곡대책특위 위원장을 서로 맡겠다고 싸우더니 국정감사 거치면서 완전 내팽개쳤다"며 "관심있는 척하고 사진 몇장 찍고와서 난리치더니…국회의 이런 모습은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열기가 오를 때 반짝하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냄비 증후군'은 단지 국회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지난 8월 말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5개항의 구두합의 뒤 한국 정부의 태도가 미온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연구재단이 만들어 일선 학교에 나눠주려했던 '역사를 빼앗기면 미래는 없다'라는 제목의 고구려사 읽기자료를 외교통상부 등이 반대해 배포를 중지시켰던 행위다.
표면적으로는 '정치화 반대'에 양국이 합의했던 만큼 한국이 먼저 이를 위반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중국이 고구려 유적이 있는 집안 시민들에게 지난 3월부터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내용의 소책자를 나눠줬던 것에 대해 한국 정부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구려사를 비롯해 한국 고대 역사를 삭제한 중국 외교부의 홈페이지도 복원되지 않았다.
한 전문가는 "중국과 학술 토의는 이미 끝났다, 이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라며 "중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은 '반중(反中) 국가가 되어 미국과 공조할 수 밖에 없고 이는 중국의 국익에 큰 손해라는 것을 깨닫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0월 15일 국정감사에서 "중국 문화부 잡지 <중외문화교류> 9월호에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 민족정권'이라는 주장이 실려있고 중국 인민교육 출판사 홈페이지에도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기술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이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주도하고 있는 고구려사·발해사 왜곡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고 공식적인 회담에서 역사왜곡 중지 약속을 받아야한다"고 비판했다.
"중국이 한국 모습 보고 비웃을 것"
▲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조선반도 형세변화의 동북지구 안정에 대한 충격'이라는 문건. 한반도 유사시 북한 난민들의 동북지역 유입에 대비한 대책을 수립할 것 등을 명시하고 있다.고구려 열풍이 '찻 잔속의 태풍' 수준도 아닌 '냄비 속의 열기'로 끝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가 된 것은 왜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애초부터 동북공정의 목표가 단지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 정도로 국민들 사이에 잘못 전달된 탓이 크다.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홈페이지(www.chinaborderland.com)에는 지난 7월 9일 선정된 올해의 중점 연구과제 목록이 실려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당대 발해 오경의 연구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연구 △이씨 조선의 북진정책과 간도문제 연구 △청대 동북의 교통과 변경정책 연구 △청대 동북이민정책 연구 △러시아 학계의 발해사적 연구성과의 학술사 및 역사문헌학 연구 등이다.
고구려 관련 연구과제는 단 한개도 없다. 이유는 고구려사 왜곡은 동북공정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의 연구 목표는 고대중국 영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연구, 중·조(中·朝) 관계사연구, 중국 동북변경 및 러시아 원동지구의 정치·경제 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안전 전략연구, 조선반도 형세 변화 및 이의 동북지역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 등 대단히 광범위하다.
고조선·발해 등 한국 고대사 전체를, 더 나아가 동북 지역의 영토·역사 관계·사회 안정·다른 나라와의 관계 등 모든 것을 포괄한다. 따라서 단순히 학술적 차원의 역사 연구가 아니라 '동북아 전략기획서'다.
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에 실린 1998년 9월 작성된 '조선반도 형세 변화의 동북지역 안정에 대한 충격'이라는 문건은 "조선반도의 형세 변화는 특히 연변조선족 자치주와 랴오닝성 단둥 지역에 큰 충격파를 줄 수 있다"며 "연구의 주안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조선반도의 동란과 난민들의 동향, 지린성 중·조 국경의 현황, 동북지역의 종교 및 민족 문제, 조선 난민 유출의 가능성 및 대책 등"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이 북한인권법안을 만들고 탈북자 문제가 국제 문제화 되는 것을 몇년 전에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치 고구려사 빼앗기만이 동북공정의 전체인양 잘못 전달됐다. 따라서 고구려사 왜곡을 중국 교과서에 싣지 않는 등의 조치만 취하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인양 오도됐던 것이다.
고구려가 동북공정의 전부가 아니다
▲ 지난 8월 23일 홍익교사협의회 소속 교사 등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 규탄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2004 오마이뉴스 남소연또
한국은 동북공정만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2003년 11월부터 전설로만 알려졌던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를 모두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작업인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벌이고있다.
중화문명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임을 증명하는 것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 문명의 뿌리가 모두 중국 문명에 있음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당연히 우리 학계에서는 부정하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도 역사적 사실로 만든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후(朝鮮侯)로 봉(封)했다는 기자 동래설에 따르면, 고조선 문명의 시발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사실상 사라지고 기자조선-위만조선-고구려-발해 등이 모두 중국 역사가 되어버린다.
중국은 이미 작업이 끝난 '하상주(夏商周) 단대공정(斷代工程)'을 비롯해 서남공정, 서북공정 등 많은 역사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있다. 그러나 한국은 동북공정에만 관심을 가질 뿐 다른 프로젝트는 관심은 커녕 윤곽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있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일차적으로 중국이 무엇을 노리고있는지, 동북아 정세변화와 세계정세 변화와의 연관성에서 파악해야 한다"며 "그래야 제대로된 장기적인 대책을 수립할텐데 한국은 그때그때 발생하는 사안에 대해 따라잡기식 대처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월 5일 국방부 국정감사 때 한국군은 흥미있는 답변을 했다. 조·중 조약에 따른 유사시 증권군 규모에 대해 군 당국은 "중국은 1961년 체결한 '조·중 상호 원조 조약'에 의해 제한적인 규모의 군사력을 북한에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중국군 18개 사단 40만여명과 항공기 800여대, 함정 150여척이 투입될 것으로 추정한다"고 답변했다.
핵심 전력 44만8000명과 항공기 1000대로 구성된 선양(瀋陽)군구 전력 60%, 25만6000명과 항공기 650대를 갖춘 지난(濟南)군구 전력 50%,함정 518척을 보유하고 있는 북해함대 전력 30% 정도가 증원 전력으로 북한에 투입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유사시 한반도 분쟁 때 한미 연합전력과 북중 연합전력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중국은 지난해 9월 북한과의 국경지대를 관장하던 부대를 무장경찰에서 15만명의 군대로 바꿨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지만 지난 7월 초부터 2주간 중국군이 압록강에서 도하훈련을 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북한정권 붕괴=통일' 가능할까?
▲ 중국 단둥에 있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탐. '항미원조'는 '미국에 대항하고 북조선을 도왔다'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부르는 말이다. 199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끝난지 정확히 50년이 되는 날 완공했으며 기념탑의 글씨는 덩샤오핑이 직접 썼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유사시 조·중 상호원조 조약을 내세워 중국군이 북한에 밀고들어오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는 한국군 당국이 예상한 선양군구와 지난 군구 병력이 될 것이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군사적으로 볼 때 북한군은 평양 이남 휴전선 부근에 집중배치되어있다"며 "중국군이 무단으로 압록강을 건널 때 북한은 이를 막을 방법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작계 5027에서 문제가 되는 사항 가운데 하나도 북한을 한·미 연합군이 군사적으로 점령했을 때 과연 누가 통치권을 행사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 즉 미군이 사실상 통치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상당히 높다.
지난 1905년 미국은 필리핀 식민통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권을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중국은 한반도 북부까지 친미 정권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꺼려한다. 가장 좋은 것은 친중 정권이 수립되는 것이고, 다음은 현 김정일 정권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도 북한을 완충지대로 남겨놓는 것이다.
세번째 시나리오의 경우 중·미 간의 밀약으로 북한을 완충지대로 만들어놓고 유엔의 국제적 관할하에 놓으면 된다.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대로라면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역사적 영토다. 중국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표가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다는 주장은 바로 이것에 근거한다. '북한정권 붕괴=남북 통일'이라는 도식은 반드시 발생하는 도식은 아닌 셈이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 결의 195'의 내용이 "대한민국을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합법 정부라고 인정하고 있을 뿐"으로 "이는 한반도 전역이 아닌 남한 지역 내의 한국 정부만을 유엔이 승인했다"는 학설도 있다.
1950년 10월부터 12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한국 정부나 한국군은 북한 통치권이 없었다. 그 해 10월 30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 방문 때 대통령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북핵 문제를 비롯해 한반도의 안정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 남북 공조 및 남한의 주도적 역할은 필수적이다. 유사시 북한 정권이 갑자기 붕괴되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을 막을 수있다.
동북공정, 간도 문제 등이 불거졌을 때 "북핵 문제에 있어 중국의 역할을 감안할 때 그들을 자극하면 안된다"는 논리가 상당히 많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동안 북핵 문제 등에 있어 중재자 역할을 중국에 맡겨버린 결과 한국의 외교적 카드가 소진된 탓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핵문제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천명했다. 한국이 제대로 된 역할을 찾을 때 동북공정에 맞서는 힘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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