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에서 배운다
[분석] 향후 동북공정 전략 예측... 중, 남북한 단결 원치 않아
[오마이뉴스 2004-08-08 19:10김종성 기자]
▲ 새로 개보수된 고구려의 첫번 째 도읍 환인 오녀산성의 모습 ⓒ2004 고구려연구회
8월 5일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한국사 관련 내용이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향후 어떠한 동북공정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동북공정 그 자체만으로 중국의 한반도전략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중국은 '후진타오 독트린'이라는 대전제 하에 6자회담과 동북공정이라는 두 개의 카드를 적절히 구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동북공정의 향방을 예측함에 있어서는 후진타오 독트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후진타오 독트린은, 'Pax Sinica(중국의 힘에 의한 평화)'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반도와 관련하여서는 이 지역에서의 패권확립을 추상적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 목표는, 19세기처럼 국제질서 변동기를 틈타 외세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을 침략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과, 한반도 통일 이후에 벌어질지 모를 조선족들의 심리적 동요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 등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수도 베이징에 가장 인접해 있는 한반도가 적대세력으로 돌변하는 것은 중국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후진타오 독트린은, 적어도 중국 입장에서는, 자기 방어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는 19세기 말 외세가 중국 주변지역인 티베트-미얀마-베트남-대만-오키나와에 이어 최종적으로 한반도를 장악한 뒤에 만주를 거쳐 중원으로 입성했던 선례를, 중국인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1910)과 청나라(1912)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멸망했다는 사실은, 중국 안보에 있어서 한반도가 가지는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의 행동패턴을 분석함에 있어서 빼놓지 말아야 할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국 위정자들이 항상 과거의 역사적 선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 같은 다른 국가들도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중국인들을 따라잡기 힘들 것이다.
중국인들이 과거 수천 년간의 역사 사료들을 놀라울 정도로 보관하고 있음은, 중국인들이 얼마만큼이나 기록과 선례를 중시하는 국민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지금과 유사한 과거의 선례를 치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일 것이다.
진시황제 이후로 중국의 한반도전략은 대체로 유사한 경향을 띠어 왔다. 그럼, 이 중에서 중국의 한반도전략을 표본적으로 잘 보여주는 7세기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남북조(420~589)의 혼란이 끝나고 나서 얼마 있다가 건국(618)된 당나라는, 초기에는 소극적 대외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625년 신라와 백제가 당나라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했지만, 당나라는 서슬 시퍼런 고구려 앞에서 어찌 해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당나라가 내부적 혼란을 수습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국이 대외관계에서도 자신감을 보인 것이다. 당나라는 628년 서쪽의 강적 돌궐을 격파하였다. 서쪽의 골칫거리를 제압한 당나라는 최종적으로 동쪽의 고구려에게 눈을 돌렸다. 중국의 혼란기를 활용하여 몇 백년간 만주를 지배해온 고구려를 이참에 제거하자는 것이, 당시 당나라 지도부의 확고한 의지였다.
하지만, 당나라는 신중했다. 그 얼마 전에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 실패로 멸망(618)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는 곧바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고 일단 신경전에 착수하기로 했다.
당시 고구려 영토 안에는 경관(京觀)이라는 기념물이 있었다. 경관은 당대 최강 수나라 격파를 기념하는 전승기념물이었다. 그런데, 631년 고구려를 방문한 당나라 사신단이 경관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용납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한편, 고구려의 신경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에 맞선 고구려는 이중전략을 구사하였다. 한편으로는 천리장성을 쌓고, 또 한편으로는 당나라에 조공을 하면서 시간벌기 전략을 구사했다.
당나라의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642년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고구려 정정(政情)이 불안해지자, 이 틈을 타서 645년 당태종은 제1차 고구려 침략을 기습 단행했다. 이 때 당나라 군대는 육·해 양방향으로 진격했는데, 육로의 경우에는 중원에서 만주로, 해로의 경우에는 산둥에서 평양으로 향했다. 이것은 과거 한무제의 고조선 침략경로를 모방한 것이었다(B.C. 109).
하지만 안시성 싸움에서 발이 묶인 당나라는 결국 철수하고 만다. 실패한 당태종은, 몸은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한쪽 눈은 고구려에 남기고 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군인이 쏘아 올린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한족 눈에 박힌 것이다.
복수심에 한쪽 눈이 더욱 불타던 당태종은 2년 뒤인 647년에 제2차고구려 침략을 단행했다. 이번에는 꼭 이겨보고자 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또 지고 말았다. 그는 3수를 포기한 채,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측 사료인 <자치통감>에서 그의 유언을 확인할 수 있다.
당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650)한 고종은 방식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그로 인해 중국의 고구려전략에 두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1)대규모 단기전에서 소규모 장기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장기전을 통해 고구려를 서서히 죽이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2)단독으로 고구려를 침공하기보다는 고구려 배후의 신라를 적극 이용하기로 하였다. 사실, 한무제 때를 빼놓고는 이제까지 한족 정권이 단독으로 한반도를 꺾은 사례가 한번도 없다.
이렇게 지속적인 소규모 전투로 고구려의 힘을 빼던 당나라는, 결국 668년 신라와의 협공에 힘입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수백 년간 만주의 지배자로서 동북아를 호령했던 고구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7세기 중국의 고구려전략에 있어서 3가지 사항이 도출되었다. 첫째, 다른 지역에서의 안보를 확립한 다음에 동쪽(고구려) 공략에 나섰다는 점이다. 둘째, 장기전으로 고구려의 힘을 빼놓은 다음에, 결정타 한방을 날리는 전략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셋째, 한민족 상호간의 분열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었기에, 당나라가 난적 고구려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7세기의 역사적 사실 속에서 우리는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어떠한 시사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중국이 안정적으로 동북공정전략을 구사할 수 있으려면, 티베트 및 대만 문제가 안정되어야 한다. 진시황제·한무제·수양제·당태종은 일반적으로 서쪽 및 남쪽을 평정한 다음에 최종적으로 고조선 혹은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만약 향후 티베트나 대만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중국이 동북공정 공세를 한층 누그러뜨릴 가능성이 높다.
8월 5일 중국외교부의 홈페이지 삭제는, 사실 충분히 계산된 행동이라기보다는 임기응변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7월 한 달 동안 양안문제에서 위기를 겪다가, 갑자기 6자회담 국면이 조성되면서, 급작스레 고구려사 문제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이번과 같은 매끄럽지 못한 조치가 나온 것이다.
8월 5일의 경우처럼, 만약 중국이 앞으로 서쪽 혹은 동남쪽에 전략적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태가 발생한다면, 중국은 동북쪽을 상대로 한 역사전쟁에서 일정 정도 주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둘째, 중국은 앞으로 동북공정을 장기전 양상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사안이 역사전쟁이니 만큼, 또 상대가 한반도이니 만큼 중국은 장기전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또 동북공정 카드를 신중하게 사용하지 못하면 6자회담의 틀에 손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장기적인 전략으로 조용하면서도 신중한 역사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셋째, 중국은 동북공정이 결과적으로 남북단결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맞물려서 한반도 통일이 언제라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남북을 심정적으로 단결시키는 일을 중국 스스로 벌인다면, 이는 자살골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한무제 시기를 빼놓고는, 한족이 단독으로 한민족을 꺾은 경우는 한번도 없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의 협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례를 잘 알고 있는 중국은, 동북공정이 결과적으로 남북단결을 초래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방지하려 할 것이다.
중국은 남북단결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이 나서지 않을 정도로 온건한 동북공정전략을 구사하든가, 아니면 지속적인 대북경제지원을 통해 북한을 묶어두는 전략을 구사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할 때, 앞으로 중국은 한국과의 역사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티베트·양안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는 조건하에서, 조용하고 신중한 장기전을 벌이되, 이로 인해 도리어 남북이 단결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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