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부

중화패권주의의 최신 모델 리홍장

한부울 2006. 8. 31. 16:11
 

중화패권주의의 최신 모델 리홍장

지금은 중화패권 추진 제1단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관련, 한국 언론들은 8월 첫째 주부터 중화패권주의의 위험성에 관한 인식을 보이기 시작했다. 6자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중국이 입김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중국이 어떠한 방법으로 중화패권을 시도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그러한 취지에 입각하여, 동아시아에 지금과 같은 국제정치구도가 출현한 1860년대 이후의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고, 거기서 발견되는 중화패권주의의 한반도 침투방식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1. 중화패권주의의 역사적 모델


역사적으로 볼 때, 중화패권주의를 추진한 인물들은 여럿 있다. 진시황제·한고조·한무제·수양제·당태종·당고종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근대사에서 황제가 아니면서도 중화패권주의를 주도한 인물이 있으니, 19세기말 청나라 북양대신 리홍장(李鴻章, 1823∼1901)이 바로 그 사람이다. 시기상으로 본다면, 이제까지 중화패권을 시도한 인물 가운데에서 리홍장이 오늘날과 가장 가까운 최신 모델이라 할 수 있겠다.


리홍장의 중화패권주의를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여타 모델들과 몇 가지 다른 측면을 갖고 있음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리홍장은 다른 모델들에 비해 신분이 낮았다. 그는 황제가 아닌 북양대신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홍장은 '19세기 후반의 중국'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외교·경제·군사 등 다방면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하면 외교적 성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40여 년간 외교무대에서 활약하였다. 19세기말 청나라가 체결한 대부분의 조약은 모두 그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외국인들의 눈에는 리홍장이 마치 청나라를 대표하는 것처럼 비쳐졌고, 중국 황제보다는 리홍장을 더 만나고 싶어했다. 근현대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가, 그의 저서 <리홍장전>(李鴻章傳)의 별칭을 <중국 근 40년 대사기>(中國近四十年大事記)라 한 것을 보아도 리홍장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황제는 아니었지만 그를 중화패권주의의 한 모델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둘째, 리홍장은 중화패권을 추진한 지역적 범위에서 다른 모델들과 달랐다. 위에 언급한 고대 혹은 중세의 황제들은 보다 넓은 범위에서 중화패권을 추진했지만, 리홍장의 경우에는 한반도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중화패권을 추구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갈수록 중국안보에서 차지하는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되었으므로, 공간적 제약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를 중화패권주의의 모델로 상정하여도 무방한 것이다.


2. 리홍장의 대한정책


태평천국운동(1851~64)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내외적 주목을 받으며 관계(官界)에 진출한 리홍장은, 1862년 7월 장쑤순무(江蘇巡撫)에 취임하면서부터 외교무대에 본격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0년 톈진교안(天津敎案)을 계기로 북양대신이 되어 동북아문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톈진교안이라 함은 톈진에서 발생한 기독교박해로 야기된 국제적 분쟁을 가리키는 것이다.


리홍장의 대한정책은 그것이 중국의 전통적인 한반도정책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역사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한나라 이래 역대 중국왕조의 대한정책은 오랫동안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과거 중국은 한국왕조와의 관계에서 책봉과 조공을 주고받되, 한국왕조의 내정과 외교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취했었다. 한국왕조의 주권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 점은 역사적 사실로도 입증될 수 있다. 한무제가 B.C. 108·107년에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은 고조선 유민들의 극렬한 저항 때문에 오래지 않아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은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 채 눈을 감았는데, 그의 유언은 이후 중국정부의 대한정책에 두고두고 참고가 되었다. 몽골 기마병이 전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원나라 시대에도 고려만큼은 국가주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와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나라 조정에서는 '고려는 문화가 중국과 달라서, 중국의 법률로 다스리게 되면 사납게 저항해서 이길 수 없으니, 고려를 원나라 땅으로 만들려고 해봤자 공연히 경비만 소모한다'면서 고려병합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따르면, 1392년 10월 11일(음력)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고려는 산으로 둘러싸이고 바다로 떨어져 있어 하늘께서 동이(東夷)로 만드신 곳이니, 우리 중국이 다스릴 곳이 아니"라는 내용의 칙지(勅旨)를 내린 바 있다. 이처럼, 중국의 역대왕조들은 한국왕조의 국가적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한국왕조가 중국을 침략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었었다. 극히 예외적인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원칙은 19세기말까지 일관되게 지켜졌다.


이처럼 소극적인 종래의 대한정책에 수정을 가하고 나온 사람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리홍장이었다. 그가 국제무대에 등장한 1860년대에 동아시아에는 이른 바 힘의 공백 상태가 출현하였다. 학계에서 힘의 공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당시 세계의 양대 최강이었던 영국과 러시아가 1860년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상호대결을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틈타 일본·미국·프랑스·독일이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자, 중국의 안보가 중대한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중국 본토를 둘러싸고 있던 미얀마-베트남-대만-오키나와-조선 등은 중국의 지배권 혹은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을 포함한 서구열강들이 주변지역을 하나씩 침탈하면서 중국을 위협하고 들어왔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리훙장은 '중국의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장악해야 하며, 그렇게 하자면 전통적인 대한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리훙장의 결심을 재촉한 것은 1879년 2월(음력) 일본의 오키나와 합병이었다. 조만간 조선마저 일본 수중에 넘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리훙장은 '조선의 내정·외교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조선을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둠으로써 중국의 안보를 유지하자'는 정책을 정부에 건의했다. 1879년 7월 4일(음력) 중국황제 광서제는 이 새로운 대한정책을 승인하는 칙지를 내렸다. <청계중일한관계사료>(淸季中日韓關係史料) 제2권 360면에 나오는 이 칙지에 따르면, "중국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이를 완곡하고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3. 중화패권의 추진 방식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중국이 조선에 대해서 간섭을 하고 싶다고 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애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1)당사자인 조선이 쉽사리 수용할 리도 만무하였고, (2)경쟁자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으며, (3)국제사회가 이를 어떻게 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은 대체로 3단계를 밟아나갔다.


제1단계-조선정부의 동의 획득 : 중국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조선정부로 하여금 중국정부의 간섭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방일(訪日) 때, 주일청국참찬관 황쭌셴(黃遵憲)은 김홍집에게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논문을 건네주었다. 이 논문에서 황쭌셴은 조선에게 서구열강과의 수교를 권고하면서, 중국이 이를 중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특히 미국과의 수교체결을 알선하겠다는 의향을 나타냈다. 오늘날 중국이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한반도 영향력 강화에 나선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당시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조선정부는 1880년 11월 국왕의 윤허에 의해 중국측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정부의 동의를 얻은 중국은 조미간의 수교를 알선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개시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그렇게 해서 체결된 것이다. 그런데, 조미수호조약 협상은 조선이나 미국에서 열린 게 아니라, 중국 베이징 옆의 텐진에서 열렸다. 이는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6자회담을 연상시킬 만한 것이다. 또한, 수교협상은 조선과 미국간에 진행된 게 아니라, 중국측 리홍장과 미국측 슈펠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국제법 지식이 부족한 조선이 중국을 의지한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중국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이 적극 나선 것이다. 그래서 해서, 1882년 4월 6일(음력) 조선과 서구간의 최초의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후 중국은 조선과 영국·독일과의 수교도 알선하였다. 중화패권 확립을 위한 제1단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제2단계-일본에 대한 우위의 확보 : 중국이 조선의 동의를 얻어 조선 외교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중국이 한반도패권을 차지하려면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일본은 이미 1876년에 조선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일본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임오군란(1882)이었다. 중국은 조선정부의 공식 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나아가 일본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는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는 천인공노할 만행까지 저질렀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화패권 확립을 위한 제2단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3단계-국제적 묵인의 확보 : 조선정부의 동의를 얻고 경쟁자 일본에 대한 우위를 확보한 중국에게 있어서 남은 한가지 과제는, 중국의 한반도패권에 대한 국제적 묵인을 얻는 일이었다. 자국의 한반도패권을 무력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은 외교적 명분으로 이를 확인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임오군란 진압 후에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을 막고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을 유지하자면, 중국이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간섭해야 한다.'는 논리로써 영국·미국 등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동아시아에서 당장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을 막자면, 중국의 한반도 간섭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한 러시아도 중국의 조선 간섭을 묵인하였다. 결국 영국·러시아·일본·미국 상호간의 알력을 활용하여 중국의 리홍장은 한반도패권에 대한 국제적 동의를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화패권을 위한 3단계가 모두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리홍장의 중국은 1882~94년의 12년 동안 한반도패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 입장에서는, 바로 이 12년의 시기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확보한 시기였다.


4. 지금은 중화패권 추진의 제1단계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현재에 대입시킬 수는 없겠지만, 지금 중국이 취하는 패권적 태도를 통해 볼 때, 중국의 현 지도부가 19세기말 리홍장을 모델로 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북미간의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나, 최근 공공연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것이나, 또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명분으로 국제여론을 중국 중심으로 모으려 하는 것 등에서, 19세기말 리홍장의 중화패권방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지금 후진타오정권이 밟고 있는 단계는 아직은 제1단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북미관계 중재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단계다.


과거의 역사적 선례대로라면, 중국은 제2단계에 가서는, 비평화적 방법으로 한반도에서의 경쟁자를 제거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경계와 대처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겠다. 한국은 중화패권주의를 경계하는 선상에서 중국과의 역사전쟁을 치밀하고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