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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북쑥과 새발쑥 그리고 대가뭄
글쓴이:한부울
고사(古史)로 본 다북쑥
일본과 다북쑥
열도일본과 다북쑥의 지형모순
조선 삼남지방 대가뭄
다북쑥과 새발쑥의 구분 발견
1809년 대가뭄발생 지역은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마무리
고사(古史)로 본 다북쑥
제목에서 다북쑥과 대가뭄이라 한 것은 서로 상호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제이며 다 아다시피 다북쑥은 구황식물로 유명하고 가뭄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굶주림을 제공하는 무서운 자연재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원초적으로 쑥은 신성한 식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로 단군신화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인간화되는 곰이 쑥 1다발과 마늘 20개를 먹고 사람으로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쑥은 신비스러운 약효를 지닌 식물로 예로부터 귀중히 여겨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쑥은 그렇게 신비스러운 곳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바로 구황(救荒) 즉 자연재해에 의한 기근을 해결해주는 식물로 범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地理志) 황해도(黃海道)편 기록에 지방토산 공물[貢]인 다북쑥을 호초(蒿草)라 하였는데 이것은 [後漢AD25~221]‘蓬蒿草莱 借指草野’<後漢書·文苑傳下·邊讓>의 궁벽한 시골 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써 다북쑥과 무더기로 자란 잡초의 대한 준말이라고 설명되는 것이데 구황에 대한 식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다북쑥은 봉애(蓬艾), 봉호(蓬蒿), 쑥, 애초(艾草)라 하며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특성으로 하는데 봉(蓬)은 무더기를 의미하는 한자이다. 풀 한 포기 먹을 것이 없다는 오매(烏昧)상태에서도 유일하게 무더기로 자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식용할 수 있는 식물로 제공된다는데 옛사람들에게 애용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경오(1450) 10월 10일(경진)
전 현감 이운경이 책지의 폐단에 대해 상서하다
예조에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前縣監李云卿上書曰:乃下傳旨于禮曹曰: "前此一年, 進上各色冊紙, 慶尙道六千五百卷, 全羅道四千五百卷, 忠淸、江原道各二千卷。 自今每年, 慶尙道進麰節、柳木紙各二千卷, 全羅道蒿精、柳木紙各二千卷, 忠淸道麻骨紙一千卷, 江原道柳木紙一千卷, 其餘竝皆蠲減。"
“이 앞서 1년에 진상(進上)하는 각색(各色) 책지(冊紙)는 경상도에서 6천 5백 권, 전라도에서 4천 5백권, 충청도ㆍ강원도에서 각각 2천 권인데, 이제부터 매년 경상도에서 모절지(麰節紙)ㆍ유목지(柳木紙) 각각 2천 권, 전라도에서 호정지(蒿精紙)ㆍ유목지(柳木紙) 각각 2천 권, 충청도에서 마골지(麻骨紙) 1천권, 강원도에서 유목지(柳木紙) 1천 권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아울러 모두 감면하도록 하라.”하였다.
[주]호정지(蒿精紙) : 책지(冊紙)의 하나. 다북쑥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인데, 전라도에서 많이 났음.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의 기사에서 보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 지역에 다북쑥이 많아 다북쑥을 원료로 만든 종이가 바로 호정지(蒿精紙)라 한 것인데 이를 1년에 진상(進上)하는 물목에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세종지리지에는 공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전라도(全羅道)지방에 다북쑥이 상당량이 자생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시경》 소아(小雅)편에, 녹명식평[鹿鳴食苹]라 한 것도“사슴들이 울며 다북쑥을 뜯고 있네”라고 한 것이며 친구와 화락(和樂)하게 지냄에 비유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임금이 신하를 대접함이며 청청자아 재피중아 개견군자 악저유의[菁菁者莪 在彼中阿 旣見君子 樂且有儀]는 “무성하고 무성한 새발쑥이여! 저 언덕에 있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즐겁고 예의(禮儀)가 있도다.” 라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하고 있는 것도 다북쑥과 새발쑥은 공통적으로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다산이 다산시문집에서 말한 새발쑥은 결코 다북쑥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는데 다북쑥과 새발쑥은 비슷하지만 구분이 잘 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구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흰쑥(白艾)이라는 형태적인 문제가 있다.
다북쑥은 일본사람들이 거주하는 땅에서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친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이 그의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라도 강진으로 들어온 서양일본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자라는 다북쑥인줄 알고 캐고 캐지만 그것은 새발쑥이라 한 사실은 일본인들은 새발쑥을 잘 구분할 수 없었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 새발쑥에 대한 기록이 우리에게 남아 전달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한반도 사람역시 열도일본인 상식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왜 다산이 분명코 구별이 필요하다고 한 사실을 우리나라 생물학자들은 간과하고 자료조차 만들지 않는 것일까?
무슨 문제가 분명 존재한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과 다북쑥
일본인들은 새발쑥과 비슷한 다북쑥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일본인들은 이른 봄에 나오는 어린순으로 국을 끓여 먹고 이것에 봄을 느끼기도 하며, 쑥을 덖어 차로 마시기도 하며 떡이나 쑥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생활방식과 다르지 않다.
다북쑥을 다른 명칭으로 이호(伊蒿), 봉애(蓬艾), 괴호(魁蒿)로 불리는데 일본인들은 그냥 봉(蓬) 또는 봉호(蓬蒿)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특성적으로 무더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일본 식물분류체계에 나타나는 다북쑥에 대한 자료이다.
ヨモギ(蓬、学名:Artemisia indica var. maximowiczii)キク科の多年草。 別名モチグサ(餅草)、エモギ、サシモグサ、サセモグサ、サセモ、タレハグサ、モグサ、ヤキクサ、ヤイグサ。 英語ではJapanese mugwortとも呼ばれるが英語のmugwortとは異なることがある。
요모기(蓬;다북쑥)는 다북쑥을 칭하는 일본어이고 국화과의 다년초, 일명 모지구사(병초(餠草), 쑥떡재료) 에모기, 사시모구사, 사세모구사, 사세모, 타레하구사, 모구사, 야키쿠사, 야이구사 등으로 불리며 영어로는 일본쑥(Japanese mugwort)라 하지만 다르게는 쑥(mugwort)이라하고 쓴나무(Wormwood)라고도 한다.
이것을 신중국(新中國)에서는 5월에 자란다고 오월애(五月艾(原变种)라 하고 그냥 보편적으로 애[艾(名医别录、台湾植物志)],야애호[野艾蒿(植物名实图考)],생애(生艾)、닭다리 잎을 가졌다고 계각애[鸡脚艾(福建)],무더기 초봉[草蓬(台湾)],흰쑥이라 하여 백호[白蒿(四川)],흰쑥 백애[白艾(浙江)],검은 쑥 흑호[黑蒿(云南)],좁은 잎의 협엽애[狭叶艾(湖南)],여엽[艾叶(广西)],지엽애[指叶艾(湖北)],가란-가송“卡蘭-加松”(台湾泰雅族语名)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분류(分類)표
階級なし : 被子植物 Angiosperms
階級なし : 真正双子葉類 Eudicots
階級なし : キク類 Asterids
目 : キク目 Asterales
科 : キク科 Asteraceae
亜科 : キク亜科 Asteroideae
属 : ヨモギ属 Artemisia
種 : A. indica
変種 : ヨモギ var. maximowiczii
学名
Artemisia indica Willd.(1809)
놀랍게도 일본쑥이라고 하면서 속명을 인디카(indica)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원래는 위 자료에 보듯이 아르테미시아 인디카(A. indica)는 어딘가 감추어진 것이 아닌가도 한다.
어쨌던 인디카 속명은 위 분포지도에도 인도아대륙과 동아시아대륙 남부를 지정하고 있지만 일본종으로 구분하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고 그 위에 다시 변종(変種)을 Artemisia indica var. maximowiczii 으로 처리하고 있지만 최종학명자는 모두 열도일본인'(Nakai) Hara'들로 도배된다.
위 종명 아르테미시아 인디카(A. indica)학명자가 1809년 독일의 식물학자이며 약사인 칼 루드비히 빌데노브(Carl Ludwig Willdenow:1765–1812)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명확한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다.
이와 다르게 신중국에서는 이를 “Artemisia princeps Pamp” 로 분류하는데 이것의 명명시기가 1930년이니 인디카보다 신뢰성이 떨어지며 이미 역사판짜기가 끝난 시점으로써 전부 동아시아대륙을 분포지로 만들기에 이용된 것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魁蒿(学名:Artemisia princeps)是菊科蒿属的植物。分布在台湾、日本、朝鲜以及中国大陆的云南、广西、安徽、江苏、贵州、湖北、四川、河南、山东、福建、广东、辽宁、湖南、甘肃、山西、河北、陕西、江西、内蒙古等地,生长于海拔200米至2,500米的地区,一般生长在山坡、林缘、灌丛、低海拔、中海拔地区的路旁及沟边,目前尚未由人工引种栽培。
野艾蒿[植物名实图考(部分)],王候蒿(云南植物名录),五月艾(广东),野艾(湖南),艾叶、黄花艾、端午艾(广西),“陶如格-沙里尔日”(蒙语名)
科学分类 编辑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菊类植物 Asterids
目: 菊目 Asterales
科: 菊科 Asteraceae
属: 蒿屬 Artemisia
种: 魁蒿 A. princeps
二名法
Artemisia princeps Pamp in Nuov.
이를 신중국에서는 괴호(魁蒿)라 하고 분포지를 대만, 일본, 조선(한반도)과 중국대륙 운남, 광서, 안휘, 강소, 귀주, 호북, 사천, 하남, 산동, 복건, 광동, 요녕, 호남, 감숙, 산서, 하북, 협서, 강서, 내몽고등 전역을 말하고 있으며 해말 200m~2500m 지역 일반생장은 산야 삼림가장자리, 덤불에서 낮는 고도 중간해발 길옆 도랑가, 아직 인공재배는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위 분포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를 정확하게 지정하는 것이다. 야애호[野艾蒿(植物名实图考)],왕후호[王候蒿(云南植物名录)],5월애[五月艾(广东)],야애[野艾(湖南)],애협(艾叶)、황화애(黄花艾)、단오애[端午艾(广西)]라 다른 명칭이 있다.
다북쑥의 일본백과사전을 보면 번식력이 강해 일본 전국 곳곳에 자생하고 지하줄기는 다소 옆으로 기어서 집단을 만들며 줄기는 일어서서 약간 목질화 된다 하였고 잎은 크게 찢어지고 뒷면에는 흰 털이 밀생 한다고 되어 있으며 7~10월에 분홍색 꽃이 피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다북쑥은 뒷면이 흰색임을 알 수가 있다.
특유의 향기가 있어, 봄에 단 새싹을 데치거나 국으로 먹고, 또 쑥떡[草餅(蓬餅)]으로 해 먹으며 튀김으로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것을 건조하여 건위 복통 설사 빈혈 냉성 등에 사용하며 탕에 넣어 목욕에 사용하고 요통과 치질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며 특히 북해도 아이누(アイヌ)의 사람들은 감기나 폐렴이 걸렸을 시에, 이 쑥의 증기를 흡입하여 치료하였다고 한다.
주로 아시아대륙지역으로 분포지가 지정된 이 다북쑥은 여러 가지 변종들이 난무한다.
南西諸島にはニシヨモギ A. indica Willd. var. orientalis (Pamp.) Haraが自生し、沖縄方言では「フーチバー」と呼ばれる。
일본 최남단 규슈(九州)와 타이완(臺灣) 사이에 있는 1,200㎞에 걸쳐 있는 남서제도(南西諸島)에는 니시 요모기라 하는 변종“A. indica Willd. var. orientalis(Pamp.)Hara”가 자생하고, 오키나와 방언에서는 이를 "후치바"로 불리는데 이것의 표본발행 일자는 1952년 아주 늦은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Published in: Enum. Sperm. Jap. 2: 123 (1952), 123, 1952]
그리고 미국자료 분포지도를 보면 이 변종(變種)의 분포지를 현 동아시아대륙 대만(臺灣)과 해남(海南)을 지정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또 신중국자료에 나타나는 일본 쑥을 학명 “Artemisia princeps.”으로 나타내는 것은 종명 시기가 1930년이라 신빙성이 결여된다는 점이 있고 이 종의 일종이 일본 국토의 햇볕이 잘 드는 산야 길가에 군생한다고 했으며 특히 本州の近畿地方以北~北海道の山地に自生 본주의 근기지방 북쪽으로부터 북해도까지의 산지에 자생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북부 냉한 지역에 종으로 자리잡은 것인데 사실상 일본 본래 위치와 맞지 않는 것이다.
근기(近畿)를 관서(関西)라고 하는데 그 경계 북쪽으로부터 북해도 산지까지라 했으니 혼슈 북부지방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현재 일본열도를 기준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인디카와 마찬가지로 봉애(蓬艾)라 하고 모구사(も‐ぐさ)라 하는데 이것의 의미는 타오르는 풀《燃え草の意》이라는 뜻이라 하여 기후환경을 나타내며 이것은 새잎을 풀떡 재료로 만든다 하여 떡초[草餅(蓬餅)]라고도 불리며, 뜸인 “뜸쑥(も‐ぐさ)"의 원료로도 사용되고, 민간에서는 복통·건위·설사금지에 이용하거나 욕탕용으로도 이용된다고 앞에서도 설명한 것인데 두가지 종명이 모두 일본종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가 있다.
가뭄이나 장마 등 기후의 영향을 적게 받고 비교적 척박한 땅에서도 가꿀 수 있어, 흉년 등으로 기근이 심할 때 농작물 대신으로 대용할 수 있는 구황식물(救荒植物) 또는 비황식물(備荒植物)로 이 다북쑥이 포함되는데 구황식물은 나무껍질(木皮), 쑥(蒿), 아카시아(相思树), 칡뿌리(葛根), 피(稗) 등이 있다.
열도일본과 다북쑥의 지형모순
즉 일본인들이 가뭄이 지속될 때 이를 구황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인들이 “타오르는 풀”이라고 하는 다북쑥은 이 의미와 같이 아열대작물이란 사실이다.
지금은 열도지형적인 조건에 맞춰 대체로 온대지역인 관서(関西)경계 북쪽으로부터 북해도를 다북쑥의 산지(産地)라고 하지만 원래 일본영역에서의 북부지역이라 할지라도 아열대지대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본 블로그 수많은 생물학적 분석에서 밝혀진 명확한 사실이며 이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아열대지역은 위도 25~30° 부근에 중심을 갖는 중위도 고압대(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되어 있다.
일본열도 지형에서 다북쑥이 자란다는 근기지방 이북은 최소한 위도 35°이북(以北)이다.
벗어나도 한참벗어나 있어 이것만 보아도 오늘날 열도를 기준으로 하는 일본역사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蓬蕭艾蒿
科名: キク科
別名: モチグサ
生薬名: ガイヨウ(艾葉)
漢字表記: 蓬
原産: 日本、朝鮮半島
用途: 餅草とも呼ばれ、若葉を草餅の材料にします。お灸の艾「もぐさ」の原料にもしますが、民間では腹痛・健胃・下痢止めに用いたり、浴湯料としても利用されます。
学名: Artemisia princeps Pamp.
よもぎyomogi
蓬蕭艾蒿 Kanji Details
1. (n) Japanese mugwort (Artemisia princeps, Artemisia indica var. maximowiczii)
2. general term for plants in the Artemisia genus; mugwort; sagebrush; wormwood
위 또 다른 일본자료에서 말하고 있는 Artemisia princeps Pamp 1930 년에 명명된 다북쑥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도 보면 ‘일본쑥(Japanese mugwort)’이라고 하지만 원산(原産)은 일본과 조선반도(日本, 朝鮮半島)을 말하고 있다.
조선반도 즉 한반도가 아열대지역인가.
물론 지금 지구 온난화 현상에 의한 최근에 지구의 온도 상승과 기후변화가 있는 현상을 19세기초 기후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
조선반도라 함은 한반도를 말하는 것인데 일본인들의 생물학적 판단에서는 한낱 열도 부속물(식민지역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매우 불쾌한 것이다.
현재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적 기준 모든 것이 이 모양이다.
그 외 명칭을 보면 쑥(mugwort)이라 한 사실과, 특이하게도 북아메리카 서부의 반 건조 기후 지역인 평원과 산 경사면에 자생 하는 세이지브러시(sagebrush)라 했으며, 쑥 속(屬)의 총칭 웜우드(wormwood)라 하고 있는 것은 웜 우드란 의미가 압생트(absinthe)이란 고미(苦味)‘쓴 맛의 나무’라는 의미하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세이지브러시(sagebrush)라는 단어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역사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쑥의 대명사라고 알려진 세이지브러시(sagebrush)는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을 지정한다는데 우리는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다북쑥을 일본 쑥이라 하고 이 학명을 “Artemisia princeps Pamp in Nuov.”라 하는 것도 아마도 동아시아대륙과 열도를 분포지로 만들기 위한 학명정리가 아닌가 한다.
Published in: Nouvo Giorn. Bot. Ital. ser. 2, 36:444. 1930
source: Catalogue of Life
때문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원산지 또는 고유 분포지라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글쓴이가 늘 염려하는 유럽역사가 태동한 후 만들어진 생물체계의 분류학명임을 의심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세종지리지 황해도(黃海道)편 기록에 지방토산 공물[貢]인 다북쑥과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1450) 10월 10일 기사 전라도에서 다북쑥으로 제작되는 호정지(蒿精紙)원료라고 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 쑥 중에 변종학명 “Artemisia indica Willd. var. orientalis(Pamp.)Hara” 역시 1952년에 명명된 변종(變種)일 뿐이다.
또한 일본의 린네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가 명명한 학명 “Artemisia japonica Thunb.”가 있는데 향쑥속(屬)의 자포니카 종명을 붙인 이것은 이를 모호[牡蒿]‘제비쑥’이라 하는 것이어서 다북쑥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아이누 북해도근방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말하고 있는 다북쑥은 어떤 것일까?
[동아시아대륙 분포지 지정, 특징이 없는 다북쑥 사진]
[북아메리카대륙 분포지 지정 새발모양의 새발쑥 사진]
[멕시코 분포지 지정 새발모양의 새발쑥 사진]이를 옛복건성에서는 닭발쑥[雞腳艾(福建)]이라 하였다.
위에서 일본쑥이라고 하는 모든 변종학명의 형태적인 것을 보면 일본인들이 말하고 있는 다북쑥과 속명(屬名), 종명(種名)에서 멕시코(Mexico)지역을 원산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학명(1)Artemisia mexicana Willd, (2)Artemisia ludoviciana Nutt. (3)Artemisia ludoviciana subsp. mexicana 각 학명의 쑥 형태가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다.
Artemisia mexicana Mexican White Sagebrush
(1)Artemisia mexicana Willd. ex Spreng.
Published in: Syst. veg. 3:490. 1826
(2)Artemisia ludoviciana Nutt.
Artemisia ludoviciana subsp. mexicana (Willd. ex Spreng.) D.D.Keck 1946
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Spreng.) A.Gray 1853
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Spreng.) Fern. 1945
결론적으로 다북쑥은 아열대지역이라 할 수 있는 멕시코지역과 캘리포니아에서 자라는 쑥, 그리고 현재 일본열도를 근거로 하는 다북쑥이 다르며 이것은 다산(茶山)이 다산시문집(茶山時文集)에서 말하고 있는 새발쑥과 다북쑥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조선 삼남지방 대가뭄
여기서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다산시문집(茶山時文集)제5권 “채호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다”에서 다산(茶山)이 기록하고 있는 대가뭄이 어떤 것에 대한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산시문집 제5권
시(詩)
채호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釆蒿閔荒也 未秋而饑 野無靑草 婦人釆蒿爲鬻以當食焉] 기사년(己巳年:1809) 내가 다산의 초당에 있을 때인데, 그 해에 크게 가물어 그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였었다. 6월 초가 되자 유랑민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였다.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이몸으로서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기에 오매(烏昧)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도 바칠 길이 없어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가(詩歌)로 엮어보았는데,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슬피 울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른 이성과 감정으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오래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어 이름하여 전가기사(田家紀事)라고 하였다.
釆蒿釆蒿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
匪蒿伊莪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
群行如羊 양떼처럼 떼를 지어 /
遵彼山坡 저 산언덕을 오르네 /
靑裙偊僂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
紅髮俄兮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 /
采蒿何爲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
涕滂沱兮 눈물이 쏟아진다네 /
甁無殘粟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
野無萌芽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
唯蒿生之 다북쑥만이 나서 /
爲毬爲科 무더기를 이뤘기에 /
乾之䕩之 말리고 또 말리고 /
瀹之鹺之 데치고 소금을 쳐 /
我饘我鬻 미음 쑤고 죽 쑤어 먹지 /
庶无他兮 다른 것 아니라네 /
위 시(詩)의 배경장소는 분명 전라도 강진(康津)이다.
다산은 1791년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과 정조(正祖,1752년-1800,재위:1776-1800)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여 서교(西敎:천주교)신자인 그의 두 형과 함께 경상도(慶尙道) 장기현(長鬐縣)에 유배되었다가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그해 11월 유배지가 바뀌면서 유배생활을 18년간 하게 된 곳이다.
거의 18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강진유배생활 중에 집필한 ‘다산시문집 제5권’ 위 시(詩)에 보면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나며 다음해인 기사년(己巳年:1809)에 크게 가물어 그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赤地千里)였고 6월 초가 되자 유랑민(流浪民:nomads)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라고 하고 있다. 그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몸으로서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기에 풀도 먹을 만한 것이 없는 오매(烏昧)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승정원(承政院) 은대(銀臺)의 그림도 바칠 길이 없어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가(詩歌)로 엮어보았다는것인데, 상황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슬피 울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른 이성과 감정으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쳤다고 가뭄으로 인한 참상을 그는 시(詩)에서 그대로 전하고 있다.
이 시(詩)에서 관심을 가질 것은 유랑민(流浪民:nomads)이라 하면서 붉은 머리칼을 한 여자들이 떼를 지어 산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붉은 머리칼을 한 여인들을 다산은 그의 또 다른 시(詩)에서 일본종자(日本種子)라 한 사실이 있다.
이것에 대한 다음 글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일본이 현재 열도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어도 본 블로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를 턱이 없다.
유랑민이라 하였으니 일단 조선 현지인(朝鮮人)이 아니며 당시 조선 땅에는 이민족들의 이동이 빈번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다산을 이들을 마치 조선인과 같이 안타까워했고 범 인류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그도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것에 따른 구원의 말을 잊지 않았는데 ‘천지(天地)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 것에서 풀어 볼 때 하늘과 땅이 닺는 온 세상에서 비록 가뭄이 발생한 상태이고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유랑민이고 이민족이라고 하지만 서로 사이좋게 정다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범 민족적인 사고를 다산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다산의 사고를 전제한 상태에서 조선왕조실록에 그가 시에서 언급한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赤地千里)라 한 사실에서 적어도 1808년 후반부터 1809년 초여름까지의 가뭄 기사가 존재하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1)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9일 무술 3번째기사 1809년
10일 남단에 나아가 친히 기우제를 지내겠다고 하교하다
○敎曰: "見今中庚已近, 一直亢旱, 不得寸雨, 言念民事, 萬萬憂悶。 豈可以向時之得雨, 有所慰三農, 而益於民事乎? 憧憧一念, 宿食靡甘。 圭壁將過九擧。 屢次祈禱, 雖爲煩屑, 其在致誠至虔之道, 何敢不益致菲誠乎? 明日南壇, 當躬行禱雨, 該曹知悉。" 又敎曰: "明日擧動時, 勿治道, 勿撤市, 勿立儀仗, 嚴鼓置之。 隨駕軍兵, 竝爲省約, 一依先朝南壇擧動例爲之。" 又敎曰: "明日當以步輦爲之。 侍臣依已例許令乘馬。" 仍命嚴飭致齋。
하교하기를,
"이제 중경일(中庚日)이 이미 가까워 가는데도 한결같이 모진 가뭄이 계속되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고 있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걱정스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떻게 지난번 내린 비를 가지고 삼농(三農)에 위안이 되고 백성의 일에 보탬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 침식(寢食)이 달갑지가 않다. 규벽(圭壁)을 올리는 기우제를 장차 아홉 번째 거행해야 되겠다. 누차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번독스럽고 설만스럽기는 한 것이지만 정성과 경건함을 극진히 한다는 도리에 있어 어떻게 감히 더욱 비성(菲誠)을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일 남단(南壇)에서 마땅히 몸소 기우제를 지내겠으니, 해조(該曹)에서는 알고 있으라."
(2)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5일 갑오 1번째기사 1809년
구황하는 정사에 대하여 대신들과 논하다
○甲午/次對。 上曰: "六次祈雨, 雨意邈然, 誠甚憫矣。 今若得雨, 則年事庶有可望乎?" 右議政金思穆曰: "趁此時, 如或得雨, 則豐年雖無望矣, 而百姓猶可爲賦稅之資矣。" 上曰: "八道總論, 則年事何如云耶?" 思穆曰: "兩西則稍勝, 而三南則移種者, 不得爲三分之一云矣。" 上曰: "見朴孝成之疏, 言開城府投石之變, 此事未知緣何而作也? 大臣亦或聞之乎?"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섯 번째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내릴 기미가 아득하기만 하니 참으로 매우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비가 내린다면 연사(年事)를 거의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말하기를,
"이때에 혹 비가 내리게 되면 풍년은 비록 바랄 수 없겠습니다만 백성들이 그래도 부세(賦稅)의 밑천은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팔도(八道)를 통틀어 논한다면 연사(年事)가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김사목이 말하기를,
"양서(兩西)는 조금 나으나 삼남(三南)의 경우는 이종(移種)하지 못한 것이 삼분의 일이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효성(朴孝成)의 상소를 보건대, 개성부(開城府)에 돌을 던진 변이 있었다고 말을 했는데, 이 일이 무엇으로 연유하여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대신(大臣)은 혹 들은 일이 있는가?"
1809년 순조9년 기사에서 가뭄에 대한 기록을 무수히 볼 수 있다.
중경일이 가까워지는데도 모진 가뭄이 계속되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다 하고 있으며
임금은 규벽(圭壁)을 올리는 기우제를 장차 아홉 번째 거행해야 되겠다고 신하들에게 뜻을 전하고 있다.
1809년 6월 5일 기사에서는 임금은 9번 지내는 기우제에서 6번 올렸음에도 지속되는 가뭄을 걱정하고 마침내 구황하는 정사에 대하여 대신들과 논하면서 묻길 팔도(八道)를 통틀어 논한다면 연사(年事)가 어떻다고 하던가 하고 임금이 궁금하여 물으니 김사목이 답하길 "양서(兩西)는 조금 나으나 삼남(三南)의 경우는 이종(移種)하지 못한 것이 삼분의 일이 된다고 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종을 못한것이라 함은 모종을 옮기 못한 상태가 33%라는 이야기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양서(兩西)라 하고 삼남(三南)은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말하고 이를 하남도(下南道)라고도 하는데 황해와 평안은 덜하지만 충청,전라, 경상은 심하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한반도 지형사정상 경기도를 제외하고 보는 황해도와 평안도는 사실상 구분하기 조차 어려운 지형이며 더군다나 하남도에서 충청도가 포함되어 삼남(三南)을 이야기 하지만 한반도 지형구분은 무엇때문에 그렇듯 구분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 이상한 지역구분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한반도 팔도 구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혼돈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하남도라 하거나 삼남(三南)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한반도 지형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북쑥과 새발쑥의 구분
(최초로 새발쑥 발견)
다북쑥과 새발쑥의 구분은 오늘 글쓴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포인트이다.
1809년의 대가뭄이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결국 전라도뿐만 아니라 조선 땅 남부지역 전체에 이와 같은 자연재해가 극심했다는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기록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일본이 역사서에 나타나듯이 조선에서 서남부에 존재한 사실을 적용하면 일본은 아마도 더 극심했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
때문에 그나마 생물생성환경이 좀 형편이 났다고 하는 조선(朝鮮)땅 전라도로 먹을 것을 찾아 이민족(異民族)들이 밀려들었을 것이고 다산(茶山)은 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헤매는 상황을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라 한 것은 참상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글쓴이가 비로소 위 시(詩)의 시대적 배경, 자연환경적인 배경을 의심하고 그것을 따져 볼 심산이지만 분명한 것은 서교(西敎)라고 알려진 천주교 신자로 의심되는 다산(茶山)의 범 글로벌적인 인류애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과 가뭄에 따른 이민족들의 이동상황과 무엇보다도 물자가 풍부했던 조선을 향해 무작정 유랑민이 되어 가뭄을 이겨나고자 몰려들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현 우리나라 역사서만 가지고 이를 정확하게 밝혀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솔직히 기존 한반도역사 환경에서 이와 같은 의문투성이의 역사사실을 글쓴이처럼 세부적으로 밝히고자 노력한 역사학자가 존재했었던 것인가.
전부 하나같이 한반도를 벗어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한반도 테두리 내에서만 원인을 찾으려 했으니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기가 아닐 수가 없으며 자체가 식민지사관에 젖어 이와같은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詩)가 말하는 중요한 몇 구절을 인용해 보자.
전라도 강진 유배의 땅에서 이곳에 붉은 머리의 서양여자들이 쑥을 캐러 산위에 떼를 지어 오른다는 사실을 한반도 역사관으로 생각을 좀 해보라.
상상조차 하기 힘든 풍경이다.
다산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가혹한 가뭄이 때문에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쑥을 캐러 산위로 오르는 풍경이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한반도 사관에서는 이러한 풍경을 상상하는 것은 천지개벽할 이야기인 것이다.
왜 조선 전라도 땅에 붉은 머리의 여자들이 유랑민(流浪民)으로 떼 지어 올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 양떼처럼 떼를 지어 / 저 산언덕을 오르네 /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紅髮) /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 눈물이 쏟아진다네 /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 다북쑥만이 나서 / 무더기를 이뤘기에 / 말리고 또 말리고 / 데치고 소금을 쳐 / 미음 쑤고 죽 쑤어 먹지 / 다른 것 아니라네 /
위 시(詩)의 주요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인데 한눈에 보아도 가뭄으로 인해 얼마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고 양떼처럼 떼를 지어 산(山)언덕으로 오르는 붉은 머리털 홍발(紅髮)의 여자들이라 묘사 한 것은 바로 동양계 열도일본인이 아닌 유랑민(流浪民:nomads) 유럽 서양 여자들이 떼를 지어 산(山)을 오르는데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즐겨 먹었던 다북쑥이라는 사실이다.
전라도에도 그들이 먹던 다북쑥이 많이 자란다는 사실이며 그들이 떠나 온 다북쑥만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이러한 상황을 다산이 훤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서양인들이 즐겨먹는 다북쑥이라는 종과 전라도에서 자라는 새발쑥에 대한 명확히 구분을 다산은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먹을 만한 풀은 없지만 유일하게 가뭄에 강한 식물로 무성이 자라는 다북쑥을 캐 입 풀칠하기 위함이라고 당시 가뭄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다북쑥을 우리나라 세종지리지에서는 황해도(黃海道)토산물이라고 하였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다북쑥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 호정지(蒿精紙)가 전라도(全羅道)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전라도(全羅道)에도 다북쑥이 자생했다고 믿을 수 있는 사실이며 특히 강진(康津)에서 다북쑥인줄 알고 일본여인들이 떼를 지어 산위로 올랐지만 실제로 그것은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라 한 사실은 다산이 얼마나 박식한 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다산이 훤히 꿰 뚫고 있는 새발쑥이라는 생물학적 자료가 한국 한반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새발쑥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백과사전에 보면 요아(蓼莪)를 새발쑥이라 했으며 ‘흰쑥(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의 옛말이라했다.
흰쑥이라 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새발이라 하였으니 잎이 새발처럼 생겼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위 새발쑥과 비슷한 그림사진들을 설명과 함께 올린 것도 독자들이 비교할 수 있겠끔 하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새발처럼 생긴 잎사귀를 가진 쑥이 흰색을 하고 있는 것이 이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글쓴이의 판단으로 일본열도를 분포지로 하는 변종들의 원종에 대한 기준이 되는 학명들을 새발쑥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 종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하나같이 새발모양의 쑥 잎사귀를 가진 종이다.
(1)Artemisia mexicana Willd 과 (2)Artemisia ludoviciana Nutt, (3)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Spreng.) A.Gray 1853 로 판명된다.
바로 다북쑥은 한반도나 열도에서 자생하는 다북쑥이 아니라 멕시코를 분포지로 하는 다북쑥과 비슷한 새발쑥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임을 최종 확인할 수가 있다.
새발쑥은 흰쑥이라고 알려지고 북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이 약용식물로 사용하거나, 가정용으로 만드는 섬유 원료 및 종교적 의식 목적으로 사용하였던 학명 Artemisia ludoviciana Nutt. 라 할 수 있다.
Native Americans use the species as a medicinal plant, a source of fiber for crafting household items, and for ceremonial purposes. The Dakotas used this plant to protect against maleficent powers. The Apache, Chiricahua and Mescalero used this plant for spices while Blackfoot tribe used it as a drug for dermatological purposes. Gros Ventre also used it for skin curing as well as medicine against cold, because it also antipyretic.
위 영어자료를 번역해 보면 다코타(Dakota)에서는 액운(厄運)보호하기 위해 사용했고 아파치(Apache), 애리조나주(Arizona)의 치리카후아족(Chiricahua) 그리고 텍사스(Texas)와 뉴멕시코(New Mexico)의 메스칼레로족(族:Mescalero)은 향신로로 사용했으며 블랙풋족(Blackfoot)은 피부병의 치료약으로 이 식물을 이용했고 오늘날 그로 반트(Gros Ventre)라 하고 3000년전부터 5대호 서부에 살았던 아라파호족(族:Arapaho)은 항균성에 의한 피부치료 뿐만아니라 감기치료에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식물은 미국, 캐나다 및 멕시코 대부분에 넓게 퍼져 있는 북아메리카대륙 원산이다.
본래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또는 중부에 서식하던 것이 동부로 이동되었다는 식물학자들의 설명도 부과된다.
그렇다면 세종지리지가 말하는 황해도 다북쑥 역시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를 흰쑥이라 하거나 회색쑥이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이 학명의 종명을 명명한 영국의 식물학자이며 동물학자인 토마스 누탈(Thomas Nuttall:1786–1858)에 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 글 "비타민나무와 산자나무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4"의 견해와 같으나 그가 실제로 지금의 영국인이 아닐 공산이 크다.
1809년 대가뭄발생 지역은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당시 멕시코(Mexico) 기후사정과 가뭄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밖에 없다.
전라도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다산(茶山)이 위 시(詩)를 집필한 기사년(己巳年:1809)에 조선 하남도 즉 삼도에 분명 가뭄이 있었다는데 만약 조선의 다북쑥을 찾아 일본종자라고 하는 붉은 머리의 여자들이 떼를 지어 찾았다면 카리브해에 본거지를 둔 서양일본인들이 들락거릴 수 있는 멕시코에서 과연 1809년에 가뭄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확인 작업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1809년에 멕시코 뿐만아니라 서남부지역에서 가뭄이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캘리포니아지방 가뭄
California Mission Buena Ventura received no rain from November 25, 1808 into April 1809. A completely dry wet season means extreme drought with the onset of the dry season in California. PDSI as low as-5.2(Figure 3.17)
Figure 3.25 Dust storm approaching Spearman, TX, 04.14.1935.(Source:NOAA Central Library)
캘리포니아 미션 부에나벤투라(Buena Ventura)에는 1808년 11월 25일부터 1809년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완전히 건조한 우기는 건기가 시작되면서 극심한 가뭄이 발생한다. 캘리포니아, PDSI는 5.2(그림 3.17)로 낮았다. 그림 3.25 텍사스 주 스피어 맨(Spearman)에 접근하는 먼지 폭풍우, 04.14.1935. (출처 : NOAA 중앙 도서관)
멕시코 독립 전쟁의 원인 분석
The Criollos and the Mestizos blamed the Spanish government for policies that limited their ability to socially advance. The Indians and Blacks blamed the government for the hard life they were forced to live. Another reason was the inability of New Spain to feed its people. In 1808 and 1809, the country suffered severe droughts. The price of corn, which was one of the foods that was affordable to the lower castes, was skyrocketing. People couldn’t afford to buy enough food to feed their families. As a consequence, the poorest were starving. Finally, in the north, the United States had won its independence decades before, and many Mexicans felt they could do it too. In 1808, they saw their chance when Napoleon invaded Spain and imprisoned the king. It is through this background of hatred, dissatisfaction and famine that the Mexican revolt broke out in New Spain.
위 영어자료를 번역해 보면 멕시코독립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말하는 것인데 멕시코독립전쟁의 주체였던 크리오요(Criollos)와 메스티조(Mestizos)는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정책에 대해 스페인 정부를 비난했고 인디언과 흑인들은 정부에게 살기 힘든 생활 상황해결을 요구했으며 뉴 스페인 정부가 국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808년과 1809년에 심각한 가뭄을 겪었고 하류층에 저렴한 음식 중 하나 인 옥수수 가격이 급증했으며 이에 사람들은 가족을 먹일 수 있는 만큼의 음식을 살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결과적으로 북쪽 미국은 수 십 년 전에 이미 독립을 얻었다는 상황에서 수많은 멕시코 인들은 그들 역시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는 사실과 동시에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여 왕을 투옥했을 때 기회를 엿보다가 비로소 불만이 폭발하여 뉴스페인에서 멕시코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원인은 정부에 대한 증오, 불만 및 가뭄에 의한 기근이 배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볼 때 캘리포니아가 양서(兩西)에 들어간다 하면 이곳에서 1808년 11월 25일부터 1809년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캘리포니아 자료는 말하고 있는 것도 다산이 언급한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赤地千里)라 한 사실과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멕시코에는 서양일본인들이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멕시코 인구상황을 보면 1810년에 멕시코 인구가 6,122,354 명에 달했고 유럽인(서양일본인)의 인구수는 1,097,928 명이었다.
전체 인구에 약 18%가 서양유럽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1800년 멕시코에는 15,000명의 스페인사람이 있었고 약 절반은 군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지배할 수 있는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
그럼에도 멕시코인들이 감히 독립을 선언할 수 없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자본을 축적한 일부 부르조아출신들만 불만을 가졌을 뿐이지 기존체제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매우 자연스럽게 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지금의 역사가 그 당시 상황을 붕소침대하여 마치 자연발생적인 반란임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기존 역사에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가장 불만의 불씨가 되었던 당시 멕시코재정을 보면 100년만에 멕시코의 연간수입은 3백만 페소(peso)에서 2천 4백만 페소(peso)로 증가했다는 사실과 이 재정은 지방행정과 방위에 4백만 페소(peso)를 소비했고 4백만 페소(peso)는 다른 미국식민지에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나머지 천6백만 페소(peso)는 마드리드의 왕립재무부에 들어가 제국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했다는 자료가 보인다.
물론 앞에서 전술했듯이 정부에 대한 불신, 증오, 가뭄에 의한 기근 등의 원인이 있었다지만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재정소모에 대한 불만인 것처럼 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이것에 의해 1810년 9월 16일 크리오요(Criollos)와 메스티조(Mestizos)가 주동이 된 멕시코가 독립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은 1821년 8월 24일 코르도바(Córdoba)조약을 체결하면서 멕시코독립이 최종 확정되었다고 정리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때 자본을 축적한 서양일본인들은 상당수가 카리브해 도서((섬)에서 빠져나와 멕시코에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에 따라 그들의 식솔과 그 외 딸린 인원들도 멕시코로 몰려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대혁명(1789-1794)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서교(西敎)가 활성화되면서 일본종자로 알져지는 서양유럽인들 중 붉은 머리칼을 한 여자들은 전라도 강진(康津)까지 들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으며 그들은 프랑스혁명으로부터 급격하게 개방이 시작되면서 조선(朝鮮)으로 유랑민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당시 서양국가들의 인구를 살펴보면 1810년 당시 미국인구가 고작 7,239,900 명이다.
그래봤자 멕시코인구나 비슷하다.
스페인인구가 11,500,000명이며 영국 인구는 11,970,200명이며 프랑스인구가 29,600,000명이다.
프랑스인구가 스페인이나 영국인구에 배가 된다.
반면 인도네시아를 호령하던 네덜란드인구는 2,194,000명에 불과하지만 놀랍게도 그 당시 1810년 일본인구는 25,930,000 명으로 나타나 프랑스인구와 비슷하다.
독일인구 22,110,000명, 이태리인구가 17,943,000으로 나타나며 인도 인구 255,587,000명, 중국 인구 345,717,200명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유럽인이라고 판단되는 러시아 인구는 1810년에 자료가 없으며 한참 후 1897년 67,473,000 명으로 확인되며 그 이전까지 인구자료가 없고 조선인구 역시 그 이전자료는 보이질 않고 조선이 해체된 1881년 16,227,900명으로 나타난다.
본 블로그에서 이미 2009년도에 주장한 사실이지만 미국인 역사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가 그의 저서[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에서 모던조선의 최종 종결시기를 1881년이라 한 사실과 그것을 조선해체시점이라고 볼 때 그 이전 인구자료를 서양학자들이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분명치 않는 일본과 비교할 때 상당한 역사연계성에 맞지 않고 연속성에도 엄청난 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인구자료가 빈약한 러시아나, 고려, 조선, 몽골은 중국인구와 인도인구가 중복되었거나 아마도 하나의 체제를 포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돌아가 지금까지 자료를 살펴본 결과 가뭄에 대한 기록들은 기가 막히게 다산(茶山)이 시(詩)를 집필한 기사년(己巳年:1809)에 가뭄과 일치하며 조선 하남도 즉 삼남지방에 가뭄이 발생하는 시기에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즉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와 남부지역에 가뭄이 심하게 발생했음을 알 수가 있으며 이를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풀어보면 양서와 삼남지방에 가뭄이 발생한 사실은 바로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강진이 있는 전라도는 지금의 멕시코 지역임을 확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무리
상당히 많은 자료를 통해 써 내려오던 이 글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서두에서 의문을 제기한 일본종으로 묶여 있는 아르테미시아 인디카(Artemisia indica)의 실체는 아마도 (1)Artemisia mexicana Willd 과 (2)Artemisia ludoviciana Nutt, (3)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위 세가지 학명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Botanary: ludoviciana, Meaning: Of or from Louisiana (U.S.), Pronunciation: loo-doh-vik-ee-AH-nuh
특히 북아메리카대륙 본토식물로 알려지는 학명 Artemisia ludoviciana 에서 종명인 ludoviciana 는 스페인어로 식물원에서 불리던 칭호가 '루도비기아노(loo-doh-vik-ee-AH-nuh)'라 발음하는데 이것은 바로 미국 대초원이 자리잡은 중부 거대한 땅 루이지애나(Louisiana)를 통칭한 말이다.
때문에 대초원을 뜻하는 ludoviciana의 종명은 서남쪽의 생장되는 '산쑥속의 식물'을 말하고 흰색쑥을 말하며 '떡을 해먹는 쑥' 떡쑥으로 불린다는 것을 찾을 수가 있다.
멕시코라는 명칭은 근세기 서양인들이 만든 명칭이며 인도는 현재 인도아대륙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종으로 굳어진 것들은 모두가 허구의 학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좀 더 역사를 진보적 개념으로 판단하고 생물학과 역사를 융합할 수 있으며 융합된 학문을 양심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생물학자나 식물학자가 나타나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도 한다.
어쨌든 소발의 쥐잡기던 무엇이든 간에 최초로 새발쑥을 발견했다.
하여튼 현 멕시코지역이 조선 땅으로 밝힌 역사사실에서 본 블로그의 글을 참고하면 하나 둘 정도가 아니다.
이미 "순천(順天)과 해남(海南)은 남해바다 가운데 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8"에서 다산(茶山)이 시(詩)를 집필하기 시작하던 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등이 왕명에 의해 찬진(撰進)한 책,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4 해방(海防)편을 바탕으로 당시 남해(南海)지형을 비교하였고 뉴멕시코지역인 텍사스지역과 남쪽으로 둥글게 돌아 순천(順天)의 좌수영(左水營)과 고돌산(古突山), 흥양(興陽)의 현 전부와 발포(鉢浦), 사도(蛇島), 녹도(鹿島), 그리고 장흥(長興)의 회령포(會寧浦), 영암(靈巖)의 갈두(葛頭), 해남(海南)의 오란(於蘭)을 끝으로 이 모든 지명이 들어가야 할 곳이라고 판단하고 주장하였던 바가 있다.
때문에 멕시코 해양도시 마타모로스(Matamoros), 탐피코(Tampico), 베라크루즈(Veragruz)까지 우리는 그러한 영역으로 넣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이미 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에서 테우안테펙지협을 멕시코지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코리아지협이라 하였을 것이라고 보지만 글쓴이는 두 지협을 모두 합해 코리아지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예측했고 코리아지협(Isthmus of Corea)과 해남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을 선으로 그려 후금((喉衿:後金:Narrow Neck)이라 한 사실과 그곳에 위치한 멕시코의 베라크루즈(Veracruz)를 해남이라 하였거나 더 나아가 파나마(Panama)를 해남이라 하였을 가능성까지 이야기 한바가 있다.
이것은 그냥 상상만으로 이렇게 주장한 것이 아님을 위 블로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야심차게 기후학을 바탕으로 하는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에서 기후학적으로 치밀한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당시 일본이란 역사주체가 거주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확인했고 세부적으로도 거의 확신에 있으며 일본해(日本海)를 지금의 카리브해(Caribbean Sea)라고 한 역사사실을 결론까지 감히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본 블로그 글에 의한 것임을 밝혀두는 바도 있을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어디든지 과거 삼한역사가 숨쉬지 않는 곳은 없다고 감히 주장한다.
그러한 사실을 모두가 공감할 때가지 오늘도 찾아 나서야 함을 잊지 않고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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