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식물

단무우라 하는 사탕무(Sugar Beet), 첨채(甜菜)가 재배된 곳

한부울 2017. 8. 1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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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우라 하는 사탕무(Sugar Beet), 첨채(甜菜)가 재배된 곳


글쓴이:한부울


사탕무 필요의 역사
베를린과 제네브라(Genevra)
사탕무(sugar beet)의 생물학적 원산지 파악
조선사서(朝鮮史書)에서 말하는 사탕무
현대자료 동아일보에 나타나는 첨채
마무리


사탕무 필요의 역사


음식은 현재도 그렇지만 그 이전 시기에는 보존이 생명이었다.

인류가 생성되면서부터 발생한 딜레마가 모든 음식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현재 선조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모든 저장식품들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고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오늘날 냉장고라는 문명의 이기(利器)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서양사에서 말하길 설탕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유럽인들은 과일의 과육을 으깨어 설탕을 많이 넣고 졸여 만든 저장 식품인 잼(jam)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로인하여 유럽인들에게 설탕이 널리 알려지면서 수요가 급증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서양사를 가만히 뜯어보면 결국 소비는 유럽인들이 하였다는 이야기다.

무슨 연유로 이런 아집이 존재할까?

그들이 자본주의제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라는 자만일 것이다.

설탕의 소비는 문명의 척도라는 말이 있듯이 일반적으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설탕 소비량이 많아진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는 그들만의 연결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비록 과거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유럽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의문이 드는 것은 서양사말대로 한다면 결국 동양인들은 그런 소비욕도 가지지 않는 무지렁이란 말이다.

아마도 그러한 주장 속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필요에 의해 파생되고 생성되는 모든 것들은 동 서양을 가릴 이유가 없고 아마도 서양인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진 것 중에 어느 하나도 동양문화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역사사실을 조금도 감안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상당히 우스운 이야기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설탕은 사치품으로 남아 있어 설탕은 아주 귀한 의약품이나 향신료로 여겨졌다. 왕은 식탁 위에 설탕 사발을 올려놓는 것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으며 영국에서는 4파운드(1.5kg)의 설탕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하니 설명이 더 이상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설탕의 가치가 굉장했던 것도 알 수가 있다.

모름지기 설탕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전에는 아마도 특별하게 취급되었을 것이란 추측은 가능한 것이다.


              

 

설탕을 만들기 위해 두 가지의 원료가 있는데 사탕수수와 사탕무이다.

사탕수수는 줄기를 세세하게 부스러뜨려 즙을 짜고 그 즙의 불순물을 침전시켜 액체를 꺼내 끓임으로써 결정체를 만들고 사탕무는 뿌리를 채로 썰어서 따뜻한 물에 담그고 당분을 녹여 그 당액을 끓여서 여과하면서 불순물을 없애고 진공상태에서 당액을 농축시켜 결정체를 만든는 것이니 일단 제조방식이 다르다.

1920대의 동아일보의 자료를 보면 사탕무 역사에 대한 자료가 보인다.

사탕수수에서 뽑은 감자당(甘蔗糖)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사치품이라 하여 부자들의 식도락같이 알았기 때문에 사탕수수 즉 감자(甘蔗)를 한냉(寒冷)한 지역에 이식(移植)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자연히 열대지방의 사탕수수에서 생산된 설탕이 독점(獨占)되어 구라파(歐羅巴)까지의 수송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 대한 대안을 찾기 시작했고 17-8세기 차(茶), 커피(珈琲), 코코아와 같은 초콜릿(chocolate)제조에 필요한 설탕 수요가 급증하여 감미제가 차지하는 독점적 위치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당시 상업적으로 설탕의 위치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것에 대안이 바로 사탕무였던 것이다.

참고로 1927-1928년에 설탕소비는 일인당 지나(支那)가 2.2kg 독일(獨逸) 25.5kg 영국(英國) 45.0kg 미국(米國) 49.5kg 통계에 보듯이 엄청난 소비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부유함에 따라 설명소비가 많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디만 영국과 미국이란 국가체제는 상업을 위주로 하는 집단구성체제이었음은 알아야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사람들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첨채(甜菜)의 감미(甘味)성분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 18세기중엽 1709년 베를린궁정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로이센 화학자 마르그라프(A. S. Marggraf)가 이를 발견하여 1747년 학계에 발표하게 되었는데 첨채(甜菜)에는 완벽한 당분(糖分)이 있다 한 것이다.

이것을 첨채당(甜菜糖)이라 하였다.

이것에 대한 추출방법을 그의 제자인 프란츠 칼 아카드(Achard, Franz Karl:1753-1821)가 개발했고 그는 180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1770-1840)의 원조를 받아 프로이센의 실레지아(Silesia)의 슈타이나우(Steinau)근처에서 첫 번째 사탕무정제소를 열었다고 되어 있다.

1802년에 이 정제소에서 4(t)의 효율로 400(t)의 사탕무를 가공했다 하였으니 비율적으로는 1%이다.

그러나 이 정제소는 1806년에 나폴레옹 군대의 침입에 의해 전소되었고 1810년에 재건하였으나 1816년에 재정난으로 파산하고 말았다고 정리되어 있다.


당시 각국의 첨채재배지면적을 보면 독일(獨逸) 약50만(萬)ha(5000km²), 불국(佛國) 약25(萬), 체코 약25(萬), 기타구주(歐洲) 약63(萬), 미국(米國) 약31.5(萬)이라는 면적을 말하면서 이시기에 유럽은 완전히 감자당(甘蔗糖)예속에서 벗어났다는 사실과 동시에 이때부터 설탕은 사치품에서 대중식료품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전자에 기술한 것처럼 사탕무를 이용한 제당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였는데, 그 동안 프랑스의 설탕공급지였던 지금의 아이티(Haiti) 생도맹그(Saint-Domingue)가 1796년에 떨어져 나가고 제해권(制海權)마저 영국에게 빼앗겨 사탕수수 수입길이 막히는 바람에 사탕무 재배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805년 12월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승리하여 정치연방인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게 만들었고 1806년 7월 나폴레옹은 독일 남서부에 있는 16개국을 지원하여 라인동맹이 결성하고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 프로이센(Preussen)을 압박하자 1806년 8월 라인연방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철수를 프로이센이 요구하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는데 프로이센군은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라인연방국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 프랑스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전쟁의 소극적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1770-1840) 의중을 간파한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는 군단을 중심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예나전투(Battle of Jena)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수도 베를린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프로이센(Preussen)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옛 칼리닌그리드이며 프로이센 수도인 폴란드 동북쪽 "왕의 산"이란 의미를 가진 쾨니히스부르크(Königsberg)까지 도망가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꼭 선조의 몽진(蒙塵)같은 느낌이다.

이런 과정에서 프란츠 칼 아카드(Achard, Franz Karl)가 설립한 사탕무정제소가 전소하게 되었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분명한 것은 나폴레옹은 설탕무에서 설탕이 생산된다는 사실에 상당히 고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어찌보면 대단한 장사꾼이었던 같다.

프로이센 실레지안(Silesian)의 사탕무는 곧 프랑스에 소개되었으며 나폴레옹은 이 식물연구를 위해 특별학교를 개설했으며 또한 새로운 사탕무재배에 2만8천ha(280(km²):28,000정보)를 투입 할 것을 명령했다고 알려진다.

물론 이러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기간 동안 영국의 사탕수수설탕 봉쇄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럽설탕 사탕무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도모했고 1840년에 세계설탕의 약5%가 사탕무에서 의존했으며 1880년에는 이 수치가 10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50%차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 알바라도(Alvarado)에 있는 농장에서는 1879년 처음으로 상업적인 생산을 시작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어딘가에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는 유럽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사탕무 설탕의 등장은 왕정과 노예반대 운동가 모두를 고무시켰다고 되어 잇다.

왜냐하면 사탕수수 농장에서 벌어지는 노예수급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며 왕정에서는 서양인들에게 강탈당하지 않는 농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과 사탕무농장을 개설하고 설탕을 충분히 확보 할 수 있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물질적인 차원에서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도 사탕무 설탕생산을 적극 후원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사탕무, 설탕의 급속한 발달에는 나폴레옹의 역할이 컷다는 것이 이와같은 이유가 있다.

전쟁 중의 유럽봉쇄는 사탕무 설탕산업의 발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영국의 유럽봉쇄에 맞서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통하는 대륙의 모든 항구를 폐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영국은 미안스럽게도 미국 대륙에 수출을 하고 있엇다고 하는 사실에서 이러한 봉쇄조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서양사에 몰입된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설탕소비가 많은 유럽은 설탕이 필요했겠지만 서인도제도 설탕의 통로는 영국에 의해 막혀버렸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정치생명을 걸고 사탕무 설탕을 적극 지원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시기에 사탕무 정제기술은 급격히 발달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만약 유럽제국 군집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존재했다면 프랑스가 멕시코 북부와 텍사스만 봉쇄해도 육지로 사탕수수가 들어갈 수가 없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북아메리카대륙 남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 글쓴이의 독특한 생각이다.

글쓴이는 본 블로그 2014년 글 "올방개(荸荠:Eleocharis)와 발해(渤海)

http://blog.daum.net/han0114/17049848"에서 말하길 유럽 베를린의 지명이 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주와 겹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고 특히 학명 "Eleocharis montevidensis"를 명명한 독일식물학자 칼 쿤트(Carl Sigismund Kunth:1788–1850)가 1820년부터 1829년까지 9년간 베를린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후 1829년부터 3년간 유럽대륙에서는 멀고 복잡하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가까운 남아메리카대륙 칠레, 페루, 브라질, 베네수엘라, 중앙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유럽 베를린에서 당시 운송수단이 대양을 횡단하는데 불리한 범선이라는 한계와 거대한 풍랑을 견딜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극복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바다기후환경적인 문제점으로 인하여 섣불리 유럽에서 대양을 횡단하고자 할 수 없다거나 남아메리카대륙으로 갈 수 없었던 점과 캘리포니아에서 가면 가깝지만 남아메리카대륙을 휘돌아 칠레나 페루 그리고 중앙아메리카를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볼 때도 그렇지만 일단 전자와 같은 기록들의 활동범위 내에 캘리포니아주가 주 활동무대라는 점 등에서 베를린은 캘리포니아 어디의 지명임을 추정할 수가 있다고 진단하였던 것인데 그러한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의 주요식물 학명 분포지도에도 캘리포니아주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과 캘리포니아주에 옛 베를린지명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Berlin, California, the former name of Genevra.

Genevra (formerly, Berlin and Genevra Station) is an unincorporated community in Colusa County, California. It lies at an elevation of 98 feet (30 m). The place was named Berlin in the 1870s by officials of the Southern Pacific Railroad on whose tracks it was established. The post office was established in 1876, and renamed from Berlin to Genevra during World War I; the post office closed in 1934.

위 영어자료를 보면 분명 베를린은 캘리포니아의 제네브라의 옛 명칭이라 하였다.

1870년에 남부태평양철도 관리들에 의해 베를린이란 명칭이 생성되었고 우체국 또한 1876년에 설립되었으나 1차대전 중에 베를린이 로만슈어 제네브라(Genevra)로 교체되었다는 것이며 우체국 역시 1934 년에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현재 이 지명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문제는 이러한 글쓴이의 주장을 더욱 신빙성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삼하역사관점으로 이러한 근원적인 역사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글을 읽는 동지들은 이런 사실들을 세세하게 살펴볼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

아래에서 자세하게 생물학적으로 첨채 즉 사탕무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종전에는 사탕무를 가축의 먹이쯤으로 여기던 지역까지 사탕무 설탕이 전해지고 당시 유럽대륙 곳곳의 보편적인 산업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사탕무 설탕산업은 나폴레옹의 정치적인 집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글쓴이는 나폴레옹은 정치인이라기 보단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보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본 블로그 글 “나폴레옹이 주는 단서(端緖) 캘리포니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9”를 감안하더라도 나폴레옹은 결코 유럽대륙에 있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것이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이란 사건이다.

1803년에 미국정부가 프랑스로부터 2,147,000km²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萬)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 아무리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자국이 차지한 귀중한 영토를 헐값에 영구히 팔아 남의 영토가 되게 하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나폴레옹이 정치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1803년이 나폴레옹에게 위기의 시기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프로이센제국을 공격하여 승리는 쟁취하던 때이다.

나폴레옹이 매입대금으로 받은 1500만불이라 하는 것은 요사이 환율로 따져 약 171억원 남짓하는 가격일 것인데 한반도 넓이(228,000km²)의 약 10배에 달하는 땅을 그런 가격에 팔았다고 하는 사실은 미친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이러한 짓은 그가 한 나라의 관리나 장군이라는 사실조차도 의심하게 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을 배반하고 영토를 무단히 팔 수 있는 것은 그가 프랑스국민이 아니거나 프랑스국민이라 할지라도 몇 푼의 그의 가치도 팔 수 있는 천하에 둘도 없는 무도(無道)한자이거나 양심도 없는 양아치같은 장사아치일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다.

솔직히 글쓴이가 나폴레옹이 평안도 출신 평서원수(平西元帥) 홍경래(洪景來,1771-1812)

와 같은 인물이라 하였지만 홍경래가 이러했다면 민중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은 다 허울 좋은 개살구이고 오직 자신의 안위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 수 있는 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미국입장을 놓고도 이러한 문제에서 당치도 않는 사실의 관계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이 나폴레옹에게 매입한 시기가 1803년이라면 1803년부터 1804년까지 본관이 신안동(新安東金氏)인 노론(老論)시파(時派)인 장인 김조순(金祖淳)이 섭정 하던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대이며 오늘날 영국, 즉 잉글랜드라 하는 브리티시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으로부터 독립한지가 겨우 30년 남짓한 시기이다.

생각해보라.

겨우 독립한 세력들이 무슨 자본이 있어 매입을 도모할 것이며 서부개척이라 할지라도 당시는 횡단철도가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냥 줘도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땅이며 미국인자신들이 그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 글쓴이에 판단이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사실은 거짓에 불과한 것으로서 미국(米國)은 영불독(英佛獨)에게 80억(億)불($)의 채무국으로 존재한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미국자체가 국가로서 엄두도 낼 수 없는 이야기임을 우리는 명확히 진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미국(米國)이 남북전쟁과 유럽대전(歐洲大戰)이라 하는 1차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으로 막대한 자본의 이익을 챙기고 해외채권국으로 변모한 것은 무기를 공급하고 남긴 이문이 굉장했다는 것인데 이때 해외채권액만 300억(億)불($)이 넘었다 하였고 이때부터 황금국(黃金國)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 땅을 헐값으로 매입했다는 시기에는 그들이 결코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며 때문에 이러한 주장들은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근세기 역사의 믿을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고도의 프로드 메카니즘(fraud mechanism)에 의한 조작인 것이 틀림없다.

결국 나폴레옹이란 인물은 프랑스란 이름과 함께 프랑스인들의 활동무대였던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심으로 서부지역에 존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의 정확한 신분정체는 정신 나간 장사꾼이거나 게르만일파인 프랑크인(Franks)들이 경영하는 회사(會社)라고 하는 조직체 수장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떻게 유럽국가 프랑스의 영웅이라는 인물이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엄청나게 넓은 광활하고 그야말로 자체가 황금인 귀중한 영토를 일거에 팔아넘길 수 있는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이야기다.

서양역사의 주장들을 그대로 따진다면 나폴레옹은 프랑스인들에게 일고의 가치가 없는 매국노이고 반역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사탕무가 설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사탕무에 집착하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사탕무의 재배지까지도 미국에 헐값으로 팔아 넘겼을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탕무를 사랑한 나폴레옹이라는 것은 장사꾼이란 설명이다. 


사탕무(sugar beet)의 생물학적 원산지 파악



甜菜-비트(beet)(甜菜:Beta vulgaris、英文:Beetroot)又名菾菜或紅菜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未分级) 被子植物 Angiosperms

(未分级) 雙子葉植物 Dicotyledons

目: 石竹目 Caryophyllales

科: 莧科 Amaranthaceae

亞科: 甜菜亚科 Betoideae

族: 甜菜族 Beteae

屬: 甜菜屬 Beta

種: 甜菜 B. vulgaris

二名法

Beta vulgaris L.1753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몸달아 하던 설탕무의 원산지나 근원지가 과연 어디로 나타날까?

학명“Beta vulgaris”가 처음 알려진 것은 1753년 칼 린네(Carl von Linné:1707-1778)의 저서(著書) 식물의 종(種:Species Plantarum)에 의해 발표된 것이며 동시에 베타(Beta) 속명(屬名)이 명명되었다.

당시는 축산사료용으로 사용되던 만젤우르젤(mangelwurzel)은 구분되지 않았고 사탕무(beet), 근대(chard), 붉은 사탕무(red beet)만 구분되었다.

그러다가 1762년 식물의 종(種:Species Plantarum)두 번째 판에서 바다사탕무(sea beet)를 자체적인 종(種)으로 보고 베타 마리티마(Beta maritima)라 하였으며 베타 불가리스(Beta vulgaris)는 재배용 사탕무(cultivated beets)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바다 사탕무(Beta maritima)와 재배용 사탕무(Beta vulgaris)는 잡종과 변종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같은 종(種)이라 간주한다.

위 학명에서 야생(野生)조상(祖上) 종(種)으로 3가지 아종(subspecies)으로 구분된다.

(1)Beta vulgaris ssp. adenensis

(2)Beta vulgaris ssp. maritima,

(3)Beta vulgaris ssp. vulgaris,


                       


ssp.[subspecies]는 아종(亞種)말하는 것이다.[subsp 혹은 ssp.(subspecies)]

이 “vulgaris” 아종(亞種)은 뿌리채소 내지는 잎채소로 수천년(數千年)간 품종(品種)이 개량된 결과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첫째 터키식물학자(Adil Pamukçuoǧlu:1929- )가 명명한 학명 (1)Beta vulgaris subsp. adanensis 는 동남부 유럽(그리스)와 서아시아(키프로스, 이스라엘, 서부 시리아 및 터키)의 교착된 서식지와 대초원에서 자생하며 두 번째는 린네가 일찍이 명명한 학명(2)Beta vulgaris subsp. maritima 는 바다사탕무(Sea beet)라 하고, 모든 재배 한 사탕무(all cultivated beets)의 야생조상으로 그 분포지역은 서유럽과 지중해 연안에서 근동 및 중동까지 이른다. 세 번째는 린네가 명명한 학명 (3)Beta vulgaris subsp. vulgaris는 설탕무(Sugar beet)인데 아종(亞種)이며 이것의 동의어(Syn.), 다른 명칭으로 Beta vulgaris subsp. cicla(L.)Arcang.와 Beta vulgaris subsp. rapacea(Koch)Döll 가 있다.

사탕무의 조상인 바다사탕무(Beta vulgaris subsp. maritima)가 지중해연안을 따라 번식했다고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테베(Thebes)에 있는 제3왕조의 사카라(Saqqara)피라미드에서 사탕무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네덜란드의 아르츠보트(Aartswoud)신석기 지역에서 생육된 4종(種)의 사탕무뿌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사람들에 의해 재배되었거나 야생형이라는 베타 불가리스(B. vulgaris)인지는 확실하게 판명되지 않았고 이슬라엘 식물학자 조하리(Daniel Zohary)와 독일 식물학자 홉프(Maria Hopf)는 사탕무뿌리(beetroot)가 "언어학적으로 일찍이 알려져 있다"라고 언급하였으며 사탕무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8세기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왕국 바빌로니아(Babylonia)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의 소요학파라고 하는 페리파토스학파(Peripatetic)의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BC371~BC 287)는 사탕무를 후에 일반 무와 닮은 것으로 묘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BC384~BC322)역시 이 식물을 언급했다고 알려진다.

이와같은 것은 주로 사탕무의 잎이 많은 품종들만 역사기록에서 재배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소위 잎을 식용으로 하는 근대(chard)라 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시금치가 도입됨에 따라 인기를 잃었다 했다.

고대 로마인은 사탕무를 중요한 건강식품이자 최음제로 간주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나 그렇듯 활성화가 되지 않았음도 알 수가 있다.

백과사전을 보면 사탕수수에 이어 설탕의 원료로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식물인 사탕무(sugar beet)는 쌍떡잎식물 명아주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이라 하였고 감채(甘菜) 또는 첨채(甛菜)라고도 하며 설탕을 만드는 데에는 뿌리를 이용한다고 되어 있고 뿌리의 자당 함량은 15~20%로 10~20%인 사탕수수보다 조금 높은 편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상기에서 알아 본 결과 베타 마리티마(Beta maritima)와 베타 불가리스(Beta vulgaris)는 같은 종으로 취급되고 베타 마리티마(Beta maritima)는 바다사탕무(Sea beet)라 하는데 야생조상 종(種)으로 분포지가 서유럽과 지중해연안 그리고 근동과 중동을 말하고 있다.


5개 그룹(Group)

잎사귀를 이용하는 재배종

B. v. ssp. v. convar. cicla. var. cicla

B. v. ssp. v. convar. cicla. var. flaviscens (근대:莙薘菜)

덩이줄기를 이용하는 재배종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crassa (사료용 비트)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altissima (사탕무:糖用甜菜)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vulgaris (채소용 비트)


B. v. ssp. v. convar. cicla. var. cicla


B. v. ssp. v. convar. cicla. var. flaviscens (근대:莙薘菜)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crassa (사료용 비트)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altissima (사탕무:糖用甜菜)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vulgaris (채소용 비트)



위 학명들은 근대와 첨채를 구분할 수 있는 학명들이다.

5개의 재배종군(cultivar group)중 알티시마 그룹(Altissima Group)에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altissima(사탕무)가 있는데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1747년에 이것 뿌리가 설탕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후 프로이센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A. S. Marggraf)에 의해 고농축(highly enriched)된 사탕무에서 설탕이 분리되면서 1.3~1.6%의 농도로 발견되었으며 이후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이 18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러한 사탕무는 1850년경에 독일 이주민을 통해 칠레에 소개되었다고 하고 있다.


사탕수수가 열대지방에서 잘 자라는 것과 달리 사탕무는 더운 곳에서는 병충해를 입기 쉬워서 온대나 냉대지방 같은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라고 뿌리가 살찌고 설탕을 듬뿍 저장하는데 가장 적합한 온도는 20℃ 정도라 한다.

공식적인 원산지 학명 Beta vulgaris subsp. vulgaris var. altissima 의 원산지동부지중해 연안과 중앙아시아라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근동과 중동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원산지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의 위치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만 현재의 세계생산지가 과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사탕무 재배지역과 일치해야 하지만 현재 생산량으로 따져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그 다음은 프랑스, 3위가 미국이며, 4위가 독일, 5위가 터키, 6위 신중국, 7위 우크라이나, 8위 폴란드, 9위가 이집트이며 10위가 영국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10위 권 내에 중앙아시아의 국가가 나타나질 않는다.

아무리 지형 생태적으로 세월이 흘러 변했다고 하지만 본래의 원산지나 근원지가 한꺼번에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역사의 연속성이라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것은 서양생물학기록들이 모순을 낳고 있고 본래 원산지에 대한 조작까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지중해라 하였지만 지중해에 속한 국가는 위 10권내 프랑스, 터키 그리고 이집트 밖에 없다.

APG II 속씨식물(Angiospermae)분류 체계에 따르면 쌍떡잎식물계(雙子葉植物界:Dicotyledons), 석죽목(石竹目:Caryophyllales), 비름과(莧科:Amaranthaceae)는 명아주과(藜亚科:Chenopodiaceae)를 포함하는데 이 명주과의 첨채속(甜菜屬)에 첨채(甜菜)라 하며 영어로는 비트(Beet)라 하는 식물이 바로 사탕무라 한다.

사실 이와같은 생물학적 분류체계가 서양인들에 의해 체계화가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동양역사에서 이를 동의어로는 첨채(菾菜), 홍채두(紅菜頭), 당라복(糖蘿蔔)등으로도 알려지는 것은 동양에서도 이를 다양한 종류가 존재했음을 알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 당나복에 대한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의심을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나복(蘿葍)이 난 나주(羅州)는 캘리포니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2 "이란 제목에 글에서 우리 사서(史書)에는 그냥 무[蘿葍]라고 하는 것도 정작 알고 보면 나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것은 서양인들이 말하는 정원무(Garden Radish)라 하는 것이며 또는 경작무, 재배무(Cultivated radish)라 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무와는 딴판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원산지가 캘리포니아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적잖게 놀란 적이 있었다.

이처럼 우리의 사서에 등장하는 식물들을 세종지리지에서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자세하지 않고 뭉뚱그려 놓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형태와 성질을 알 수 없을뿐더러 자세하게 알고 보면 모두가 원산지 문제가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것은 일찍이 조상님들이 즐겨 드신 식품들이 분명할 것인데 이렇게 저렇게 오늘날 우리에게 잘못 알려져 어리석게 알지 못하는 잘못이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이다.

이 나복의 토산지를 추적하여 결국 나주(羅州)가 곧 캘리포니아를 말한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역사는 우리스스로를 바보, 천치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도대체 한반도는 우리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한 번 절망감과 함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야기다.

다음에는 실제로 한반도에서 첨채가 재배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조선사서(朝鮮史書)에서 말하는 사탕무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서에는 이 첨채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김시습(金時習)의 梅月堂詩集卷之六 > 詩

甜菜단무우

甜菜滿沮洳。綠莖大如股。春風雨露均。百草含滋煦。奈何山中人。逢春年又老。老大不足道。恨不收功早。朝負巖上薪。暮鋤庭前草。短歌臥蓬廬。我生何潦倒。山僮報我起。美茹已爛熟。淡味愈勵操。一飽萬事足

[번역]단무우가 물기가 많은 늪에 가득하니 푸른 줄기가 큰 것이 넓적다리 같구나. 봄바람에 비와 이슬도 알맞아 온갖 풀이 따습게 풍성하게 자라는데 어찌하여 산중의 사람은 춘년(春年)을 넘어 늙어만 가는가. 늙는 것에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만 후회하지 않게 명예를 얻었다네. 아침엔 가파른 언덕 위에 섶을 지고 해질 무렵 뜰 앞의 풀을 매며 단가로 빈거(蓬廬)에 누웠다 하여 나의 생애가 어찌 초라할 손가. 산 아이(山僮)가 나에게 알려 일어나 맛이 좋게 이미 푹 익은 담담한 맛에 이끌려 한번 배불리 먹으니 만사가 족하도다.[한부울]


상기의 기록은 김시습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권지6(卷之六)의 첨채(甜菜)란 시(詩)다.

첨채를 고전번역원에서 단무우라 번역하였는데 단무우라 하니 당근의 한 종류라 하고 노랑 다광의 단무지가 생각나며 또 단무우라 하니 내복(萊菔), 만청(蔓菁), 나복(蘿蔔)등이라 한다.

혼란인 것이다.

이러하니 어찌 우리가 슈가 비트 즉 사탕무(sugar beet)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지금까지 위 시를 접하면서 위와같은 생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조선 초기의 학자 김시습은 사탕무를 보았고 그 사탕무가 재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본관이 강릉(江陵)이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비극적인 패도정치의 극치를 보고 더 이상 공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김시습은 스님이 되어 방랑길에 올랐으며 서른한 살 되던 해,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에 정착하면서 그는 이곳에서 서른여섯살까지 머물면서[금오신화(金鰲新話)]를 저술했다 한다.

이때가 대략 1471년경임을 알 수가 있다.

공교롭게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이 사탕무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위 북아메리카대륙 사탕무재배지 지도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물론 서부에 대대적인 사탕무의 농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위 지도로 확인할 수가 있다.

어쨌던 1471년경 이미 사탕무라고 하는 소위 단무우, 첨채를 조선(朝鮮)경주에서도 재배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 첨채에 대한 기록은 허균(許筠:1569-1604)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유일한 농서(農書)인 한정록(閑情錄)제16권 치농(治農)편에 “7~8월경에 하종(下種)했다가 9월에 둑을 짓고 나누어 심은 다음 자주 거름물[糞水]을 준다 하면서 서풍(西風)이 부는 날이나 고초일(枯焦日)에는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 하고 이와 같은 농작법의 작물로 갓(芥菜), 배추(白菜), 단무우[甜菜], 오송채(烏松菜), 함채(葴菜)등을 열거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시습의 시나,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첨채를 정작 정확하고 세밀해야 할 한반도 사서 중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는 찾을 수가 없고 더군다나 토산지(土産地)내역이 전무하다는 것이 참으로 한 숨이 나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허균이나 김시습의 기록에 나타나는 첨채라는 채소가 왜 조선대표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을까?

질문하고 또 질문해보지만 허공만 칠뿐이다.

더불어 생각해보면 위 허균의 농사재배방법을 기록한 작물 중에 “갓”이라고 하는 개채(芥菜)역시 위 한반도 사서(史書)어디에도 토산물(土産物)의 기록을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허술한 대표적인 사서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것도 마땅치 않지만 이러한 사서가 현재 당연하게 조선역사를 대표하며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이 더 걱정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과는 관계없이 전라도 음식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특유의 향식품인 갓김치를 애용하는데 이러한 식성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한반도 역사를 바라보는 심각성이 있다.


현대자료 동아일보에 나타나는 첨채



현재 네이버사이트에는 1920년 이후부터 보도된 원본의 동아일보 기사가 있어 누구나 볼 수가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것은 지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등 전반적으로 궁금했던 것이 이를 통해 어느정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하는 글쓴이 입장에서도 적잖게 도움이 된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카테고리(Kategorie)에는 이러한 기사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놀랍게도 1927년부터 조선지역에서 영어로 비트(Beet) 즉 첨채(甜菜)라는 사탕무를 재배한 사실에 대한 기사가 이르게는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 연속해서 보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

일제조선총독부에 의해 1920년부터 조선인이 아닌 한국인의 신문발행이 허가된 3개 일간지 중 동아일보의 기사는 분명 한반도를 근거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이 첨채재배 기사는 참으로 낯선 것이 아닐 수 없다.

신문기사에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현실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생각해 볼 때 과연 이러한 기사보도가 실제로 한반도에서 발생한 이야긴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나 서북부에서 사탕무 즉 슈가비트(Sugar Beet)첨채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해괴한 이야기가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사탕무를 한반도에서도 시험재배를 시도하였지만 경제적인 재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고 첫째 재배지 확보가 곤란하였으며 넓은 적합한 조건의 농장형성이 되지 않으면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후문제도 더우면서 시원하고 건조한 날씨를 요하는 최적의 20℃기온을 유지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여름이 습한 한국의 기후 조건과는 맞지 않는 결과에서 한반도에는 사탕무 재배 역사가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래 동아일보 기사의 보도들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내용을 한 기사 한 기사 분석해 보았다.



[1]西朝鮮(서조선)에 甜菜栽培(첨채재배)

1927.02.16. 동아일보6면 경제기사

擴張(확장)을計劃中(계획중)

二毛作(이모작)으로成績(성적)을擧(거)치못하는西朝鮮主(서조선주)로黃海道平南兩道(황해도평남양도)의甜菜栽培計劃(첨채재배계획)에就(취)하야는曩者平壤(낭자평양)에서道當局當業者(도당국당업자)는勿論總督府(물론총독부)에서도石塚技師其他(석총기사기타)가會合(회합)하야將來(장래)의擴張面積奬勵方法(확장면적장려방법)을頗(파)히權威(권위)잇게?心(?심)으로協議(협의)한바日糖平壤工塲長三浦主計氏(일탕평양공장장삼포주계씨)는數日來入京(수일내입경)하야그促進方法(촉진방법)에對(대)한細目(세목)을協議中(협의중)이더라

1927년에 이미 한반도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에서 첨채재배를 계획했다고 한다.

서조선(西朝鮮)이라 하는 것도 낮선 것이지만 서조선(西朝鮮)에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도 있고 평안북도는 왜 없다는 것일까?

하고 의문도 가져 보지만 한반도의 지형을 대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임을 새삼느끼게 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서쪽을 서조선이라 하였다면 한반도 황해와 맞 닿은 서변 모두가 그러한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황해도,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그리고 평안남도뿐만 아니라 평안북도까지 서쪽 황해에 접(接)해 있기 때문에 서조선(西朝鮮)이라 해야 맞지만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서조선이라 하지 않는다.

서조선(西朝鮮)은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대초원 지대를 비교하면 그야말로 이설을 달 것이 없어진다.

어쨌던 1927년에 이미 황해도와 평안남도에 첨채 즉 비트(사탕무)재배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이야긴가.


               

[2]甜菜(첨채)의 實收量(실수량) 昨年中增加(작년중증가)

1931.03.05. 동아일보8면 경제기사

平南道及黃海道(평남도급황해도)의特用作物(특용작물)이甜菜(첨채)는 年年增收(연연증수)하는바 昨年中(작년중)에는 作付反別887町8反(작부반별팔백팔십칠정팔반)그收穫高1,744萬7,280斤價格408,302圓反當收穫1,955(수확고일천칠백사십사만칠천이백팔십근가격십사만팔천삼백이원반당수확천구백오십오)斤(근)으로 前年(전년)에比(비)하야作付反別(작부반별)은 40町8反(사십정팔반)에减少(감소)이엇스나收穫高(수확고)는4,774,712斤(사백칠십칠만사천칠백십이근) 價格40,585圓反當收穫高(가격사만오백팔십오원반당수확고)는 600斤(육백근)의 各增加(각증가)이다 尙且此道別(상차차도별)은 黃海道作付反別343町3反(황해도작부반별삼백사십삼정삼반)7,096,200斤(칠백구만륙천이백근) 60,318圓反當收穫二千六十七斤(육만삼백십팔원반당수확이천육십칠근) 平南道作付反別544町5反(평남도작부반별오백사십사정오반) 10,351,080斤(일천삼십오만일천팔십근) 87,984圓(팔만칠천구백팔십사원)反當收穫1,901斤(반당수확일천구백일근)인대最近五個年間(최근오개년간)의作付反別及收穫高(작부반별급수확고)는알에와갓다

위 기사는 1931년도 보도인데 평안남도와 황해도의 특용작물이라 한 첨채는 매년 증수(增收)가 되어 계획(計劃)보다 많이 수확했다는 사실을 수치로 알리고 있다.

사탕무를 특용작물로 허용하는 것은 가공과정이 끝나면 부피와 무게가 현저히 적어지거나 가격은 높아지며, 수송력과 저장능력이 좋아진다는 이유에서 보통 특용으로 하는 경우이다.

1927년에 계획한 첨채재배가 시행되었고 비로소 1931년에는 계획보다 많이 수확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咸北平野(함북평야)에 甜菜(첨채)가有望(유망)

1933.07.25. 동아일보4면 사회기사

【나남】함북도당국에서는 소화四(사)년이래 무산(茂山(무산))오지에 잇어 농작물 생육상태 실지조사를하기위하야 무산 三(삼)장면 농사동과 三(삼)사면 신덕동 또는 경성농사시험장에 위택시험소를 설치하야 각종의 작물에 대하야 시험한 결과 이지대는 무엇보담도 첨채(甜菜(첨채))(사탕원료)가 제一(일)유망한것을 발견하엿다 그런데 그시험의내용을보면 현재 서선지방보다단당 三(삼)천五(오)백근에 비하야 약천근을 증산할 수 잇는 사실을 발견한 결과도 당국에서는 벌서부터 증산게획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수립하려고 하는데 이소문을 들은 평양제당회사에서는 벌서부터 이에 착수하려고 획책중이라고 한다.

1933년에의 보도를 보면 함경북도(咸鏡北道)평야에 설탕원료인 첨채(甜菜)가 유망한 것으로 판명하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는 사실과 이와 함께 평양제당회사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을 감안하여 반겨 착수하려고 한다는 보도이다.

함경북도에도 첨채를 재배할 수 있는 여건을 파악한 것이다.


[4]北朝鮮一帶(북조선일대)에 甜菜栽培着手(첨채재배착수)

1936.07.09. 동아일보8면 경제기사

北朝鮮(북조선)에잇어서의 甜菜栽培(첨채재배)는氣候地味共(기후지미공)히 有望(유망)한것이 確認(확인)되엇는데 드디어 北朝鮮開拓地(북조선개척지)의拂下(불하)를受(수)하야 神谷農塲(신곡농장)에서 今年(금년)부터 本格的栽培(본격적재배)에 着手(착수)하기로하엿다 卽(즉) 神谷農塲(신곡농장)에서는 咸北茂山郡(함북무산군)의農事集團地(농사집단지)(面積約五千町步(면적약오천정보))의 開放(개방)을受(수)하야 이中(중) 二千七百町步(이천칠백정보)를 耕地(경지)로 甜菜栽培(첨채재배)에着手(착수)하고自家製糖(자가제당)을 兼營(겸영)할豫定(예정)인데 西朝鮮(서조선)의 甜菜栽培(첨채재배)가 褐班病(갈반병)으로 自然消滅(자연소멸)이엇는바 高地帶(고지대)에는 이念慮(염려)가없으므로 將來(장래)를期待(기대)하고잇다

1933년 앞에서 함경북도에 첨채재배를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 실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첫째 북조선(北朝鮮)의 첨채재배인 경우 기후지의 대한 맛이 월등하여 유망한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며 북조선(北朝鮮)개척지의 불하를 받아 신곡농장(神谷農塲)에서 1936년에 재배에 착수하고 함경북도 무산군 농사집단지 면적 약 5,000정도를 개방하면서 이 중 2,500정보는 경지로 첨채재배에 할당하고 나머지는 제당 즉 설탕제조회사를 만들어 겸영하겠다고 하였으며 때 마침 서조선(西朝鮮)에서의 첨채재배가 갈반병으로 인해 자연 소멸되었다는 사실이 있지만 고지대인 본 농사집단지는 그럴 염려가 없어 장래가 기대된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보도는 이미 서조선(西朝鮮)에서는 첨채재배가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있었으며 갈반병으로 첨채재배농사가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

갈반병은 갈색누늬병이라는 것으로 잎에 흑갈색의 점무늬가 생기고 갈색으로 변하여 조기에 낙엽되거나 병이 진전됨에 따라 병반이 점차 확대되어 서로 합쳐지고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 당시에 조치로 석회유황합제(石灰硫黃合劑)를 살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5]茂山高地帶(무산고지대)에다 甜菜(첨채)를栽培(재배) 

1936.07.25. 동아일보5면 사회기사

【羅南(나남)】신곡(神谷(신곡))농장에서는무산군 농장리 집원리(茂山郡(무산군) 農塲里(농장리) 集園里(집원리))에 약五(오)천정보의 임야와 황무지를 대여받고 그중 二(이)천五(오)백정보에는 비이드(甜菜(첨채))를재배하려고 개간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엿다는바 동 농장에 생산되는 비이(甜菜(첨채))를 원료로 자작제당(自作製糖(자작제당))도 겸하야 경영할예정이라고 하는바 이비이드 재배에 잇어서는 전조선적으로보아 서선지방은 극히 성적이불양한 관게로 함북의 고산지대를 선택하엿는바 이 성적 여하에 잇어서는 함북의 고산지방도 점차 농업과 공업의 병진적으로 개발되리라고 일반은 대단한 관심으로 기대하고 잇다고 한다.

위 기사는 [4]번 기사를 보충하는 기사로 1936년 7월 25일 무산(茂山)고지대의 신곡농장에서 비이드(甜菜(첨채))라 한 것은 즉 첨채 비트(Beet)임을 정확히 알리고 있으며 제당사업을 신곡농장에서 추진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앞 기사에서 보듯이 갈반병으로 서조선(西朝鮮)에서 힘들어 하는 문제에서 북조선은 이러한 병충해의 위험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첨채재배와 더불어 설탕제조공업까지 상당한 기대를 걸 수 있다는 보도이다.


      


[병충해]사탕무根切虫(근절충) 大同郡(대동군)에發生(발생) 

1928.07.12. 동아일보4면 사회기사

當業者焦慮中(당업자초려중) 大同郡古平面文發(대동군고평면문발),上端(상단),中端(중단),下端等各面(하단등각면)에는最近(최근)에"사탕무"의뿌리를잘라먹는根切虫(근절충)이發生(발생)하야被害(피해)가莫大(막대)할뿐만아니라今年度(금년도)부터는"사탕무"의耕作(경작)은此(차)로因(인)하야全然無望(전연무망)함으로一般當業者(일반당업자)들은焦慮中(초려중)에잇다더라 (平壤(평양))

1928년의 뿌리를 잘라먹는 근절충(根切虫)에 기사인데 앞 기사에서 1927년에 이미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에서 첨채재배를 계획을 세워 실시한 것임을 알 수 잇고 평양(平壤) 대동군(大同郡)에서 이 근절충이 발생했다는 기사인데 이로 인해 금년 사탕무의 경작이 기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어 이 때문에 업자들은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는 보도이다.

서조선(西朝鮮)에서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 그리고 평양(平壤) 대동군(大同郡)에서 첨채재배가 성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북조선(北朝鮮)함경북도(咸鏡北道)평야와 무산고지대(茂山高地帶)에서 신곡농장(神谷農塲)이 주도하여 사탕무(甜菜:Sugar beet)재배를 실시하고 설탕제조회사까지 경영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위 북아메리카대륙 원산지와 농장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이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마무리



첨채 즉 사탕무라 하니 언듯 생각나는 것이 동양에도 알려졌다고 하는 음식인 러시안스프(Russian Beet Soup)즉 라송탕(羅宋湯)인데 이를 보르스치(borsch)스프라 하는 것으로 유럽북부지역의 사람들이 우리 김치찌게처럼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이 붉은 색 요리에 사탕무(beet:Beta vulgaris)가 들어가는 모양인데 잎을 먹는 근대임을 알 수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가 확실히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사탕무 즉 슈가비트 첨채를 재배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곳은 한반도가 아니라는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끝까지 바보스럽게 멍청할 필요가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은 이와같은 사실들이 하나둘이 아니라 폭 넓게 정확한 논리 스펙트럼을 북아메리카대륙에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가벼이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첨채의 원산지 또는 근원지 파악에서 소위 서양사에서 유럽남부지역, 그리고 지중해연안, 근동과 중동이라 하였지만 정작 근동이라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세계첨채생산 10위권에 들지도 못했다는 역사연속성, 역사지속성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아이러니 현상이 존재한다.
대신 유럽이라 하고 또는 지중해연안이라 하고 근동, 중동을 말하지만 결국 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할 때 결국 북아메리카대륙을 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위 근원지 파악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첨채 즉 사탕무 재배지 지도를 보면 정확하게 서부라 할 수 있는 곳은 네브라스카(Nebraska), 콜로라도(Colorado), 와이오밍(Wyoming), 아이다호(Idaho), 오리건(Oregon)이 나타나고 북부라 할 수 있는 곳은 , 미네소타(Minnesota), 노스다코다(North Dakorta), 몬태나(Montana), 워싱턴(Washington)이 보인다.
그렇다면 1927년부터 동아일보 기사 보도내용에서 말하는 첨채재배지와 일치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답만 남았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우리에게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서조선(西朝鮮)에서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 그리고 평양(平壤) 대동군(大同郡)에서 첨채재배가 성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북조선(北朝鮮)함경북도(咸鏡北道)평야와 무산고지대(茂山高地帶)에서 신곡농장(神谷農塲)이 주도하여 재배하였음을 정확하게 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글쓴이의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것에는 정확한 생물학적판단과 지리적인 근거, 그리고 확실한 일간지 신문 보도를 합하여 이러한 결과를 돌출한 것이니 만큼 우리에게 뚜렷이 나타난 이러나 이러한 대비상황은 앞으로도 서로가 부정키 어려울 정도로 명확한 분석으로 존재할 것이란 확신이 있다.
특히 우리가 관심있게 보아야 하는 것은 1931년도 보도된 동아일보 내용에서 평안남도와 황해도의 첨채 즉 사탕무가 바로 특용작물이라 한 사실이다.
또한 동서가 좁다란 한반도 지형에 도대체 서조선(西朝鮮)이라 한 것은 무엇이며 1933년에 서조선(西朝鮮)에서 첨채재배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무겁게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첨채에 발생하는 갈반병이나 근절충으로 인해 농작물 전체가 자연 소멸되었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 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신곡농장(神谷農塲)에서 1936년에 재배에 착수하고 함경북도 무산군 농사집단지 면적 약 5,000정도를 개방하면서 이 중 2,500정보는 경지로 첨채재배에 할당했다는 사실 보도와 마찬가지로 서양엥서 사탕무가 프랑스에 소개되고 나폴레옹이 새로운 사탕무재배에 2만8천ha(280(km²):28,000정보)를 투입 할 것을 명령했다는 것과 비교할 때 무산농단지의 신곡농장 한 단위에서 사탕무 첨배 재배지 5,000정보를 투입했다는 것을 작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왜 갈반병과 근절충이 사탕무 재배단지에 발생되었는지 그것에 대한 기후환경문제를 우리는 반드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번 글에서 말하겠다.
조선인이든 아니면 한국인이든 1927년부터 첨채재배를 하기 시작하고 최소한 1938년까지 재배를 했다고 한다면 사탕무 농민들이 주요할 것인데 이쯤에서 궁금하게 생각되는 것은 과연 자본제국국가로 발돋움하던 미국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나 북부에 존재한 농장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 것인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독일로 접어 들어 갔을까 아니면 일본으로 접어 들어 갔을까?
1930년대라면 일단 한반도 역사 기준으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제가 우리 눈 앞에서는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근원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나 중부에서 첨채재배를 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글쓴이는 이를 밝혀 사실을 확인을 하고 있는 중이 아닌가.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영토를 제외하고 나머지 전부가 미국 영토라 하면서도 최초의 사탕무 공장은 1870년에 북아메리카대륙의 동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부도 아닌 서부 캘리포니아주의 알바라도(Alvarado)에서 미국설탕무산업의 아버지란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뉴잉글랜드 메인주 설리번(Sullivan)출신의 정치인이었던 에버니저 다이어(Ebenezer Herrick Dyer:1822-1906)에 의해 스탠다드제당회사(Standard Sugar Manufacturing Company)가 설립된 것이 시초라 하고 있다.
그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성공했다고 하지만 화학자이자 기계공인 그의 아들 에드워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고 독일에서 사탕무공장을 견학하고 기존시설을 개선하면서 다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유타주에 유타제당회사(Utah Sugar Company)를 설립함으로 인해 사탕무업계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1914년까지 미국의 사탕무산업은 유럽의 생산업체와 거의 같은 규모로 변모하여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경쟁했다 한다.
2차세계대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큰 사탕무 생산지는 캘리포니아, 유타, 네브래스카였고 캘리포니아의 많은 사탕무농민들은 일본계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계 일본인(Japanese Americans)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미국시민이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당시 일본인이라고 하지만 조선인이 아니면 한국인 농민일 것이다.
1924년에는 일본인을 혐오하는 배일사상에 의해 모든 일본인의 이주를 금지하였다.
2차세계대전 중일 때 캘리포니아의 사탕무생산은 아이다 호, 몬타나, 노스다코타, 유타와 같은 내륙으로 이동했고 전쟁 중에 새로운 사탕무 농장이 시작된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은 사탕무 재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탕무 생산에 익숙한 억류수용소에 있는 일본 노동자를 고용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위 현 사탕무 생산지 중에 유타가 보이지 않는다.

2차세계대전까지 사탕수수 생산지 중 유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현재 생산지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상함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조선인이나 한국인 사탕무 농민들의 이야기가 지금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다.

유타와 서조선, 황해도(黃海道)와 평남(平南)!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에 입각한 것으로 신중국인이나 열도일본인은 자연스럽게 나타내면서도 조선인과 한국인의 존재를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들어내지 않고 완전히 감추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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