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식물

개나리라고 한 행채(荇菜)

한부울 2017. 6. 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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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라고 한 행채(荇菜)


글쓴이:한부울


1.머리말
2.대전 소제호에서 난 씀바귀처럼 쓴 개나리
3.씀바귀 행채(荇菜)는 노랑어리연꽃
4.우리가 알고 있는 행채란.
5.노랑어리연꽃의 생물학 정체
6.북아메리카대륙의 노랑꽃 행채
7.마무리


1.머리말


본 블로그를 애독하시고 공감하시는 분들께서 걱정하고 염려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세계삼한역사관(世界三韓歷史觀)을 어떻게 설득하고 원만하게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현실적인 당면과제에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것은 역사혼란에 의한 상대적인 괴리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문제에서 글쓴이 역시도 자유스럽지가 못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본다.

정확하게 1945년 미군정으로부터 시작된 서양역사 위주의 교육과 자학적인 사관인 식민지사관이 뿌리가 내리고 그것을 마치 참 역사인 것처럼 신봉하는 한반도 역사풍토는 철벽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거의 70년 넘게 그렇게 길들여지고 철저한 상식이 된 마당에 아무리 논리적이라 한들 세계삼한역사를 이해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은 실제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틀림없다.

그 만큼 굳어져 있는 우월주의의 서양역사가 버티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반도 식민지사관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며 설령 그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치나 논리가 바탕이 된다 할지라도 굳어지고 오랜 시간 동안 특화된 사고방식과 인식의 틀, 페러다임(paradigm)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설령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삼한역사를 부정하고 거부당하고 배척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100년간 진행되면서 강압적으로 주입된 기존 역사상식들이 그만큼 굳건하다는 뜻일게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적으로 거대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뜻있는 분들이 온 정열을 바치고 있는 사실에서 이런 노력 마저 부정당하고 배척당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힘빠지는 일이 틀림없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이 한반도사관과 너무 큰 역사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원리적으로 따진다면 제로섬게임과 같은 것으로써 상대적으로 한쪽의 역사관을 전면 부정하게 하거나 극단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등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쩜 몇 세동안 해결이 불가능한 난제인 것이 틀림없다.

때문에 이러한 논쟁의 해결점은 현실적으로 특별한 방법이 없다.

방법이 있다면 서양세력들이 뿌려놓은 엉터리 역사근거를 자체를 깨부실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하고 그들이 19세기 초부터 열성을 부렸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100년이 안되면 200년을 투자해서라도 공들여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새로운 역사 교육을 통하여 각인시켜 나가는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않겠는가.

급하지만 당장 어떤 성과를 수확하겠다는 것은 무리며 분에 맞지 않게 과욕을 부리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밝힘의 역사작업은 지속되어야 하고 당장은 아니겠지만 설득하고 계몽해 나가면서 올바른 역사정립에 최선을 다할 때 좋은 성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다.

19세기부터 어쩔 수 없게 만들어진 비주류의 역사 멍에는 큰 짐이다.

우리가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현재 재야학자들이 보물처럼 여기며 추종하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예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이야기다.

조선말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으로 사학자로 알려지며 태백교도(단군교)인 계연수(桂延壽, ?-1920)선생이 1898년에 단군세기(檀君世記)와 태백유사(太白遺史)등을 간행하였다.

이어 1911년에 저술한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이러한 세계삼한역사 사실을 토대로 저술하였겠지만 오늘날 역사처지가 바뀌는 바람에 오히려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기존 사학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을 들더라도 암울한 환경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우리는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근세기 한반도 역사에 올라가 있는 사건들에서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사건일 수 있고 사건자체를 왜곡시키거나 과장시켜 한반도 역사에 맞게 조작 편집되었을 가능성과 실제로 발생한 장소가 현재는 우리가 알 수 없도록 변모 되어 알 수 없거나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금성이나 경주와 다른 일본 동경이라고 하는 곳도 뉴욕이라고 할 때 받아들이는 감정들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자본주들이 모여 활동하던 뉴욕에서 30만명의 상비군(常備軍:standing army)을 신설하는 것과 맞물려 그렇게 태동한 세력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 때가 일제 침략기라 하여 우리나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문사의 창간발행한 시기에 맞춰 1920년부터 우리역사에 불리하게 진행된 천동지변이 진행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렇듯 암울했던 시기 그해 공교롭게도 발생한 환단고기 저술자 계연수의 암살사건 전말도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없도록 뒤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무엇이든 진실과 이치에 맞지 않게 변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충분히 예단 할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 "에서 언급한 앞에서 언급한데로 동아일보 창간지에 미국(米國)은 뉴욕시(紐育:紐約,New York)에 육군 상비병원을 300,000명 정하기로 국회에서 결의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성립 조건에서 군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크다 할 때 미국(米國)이 그동안 상비군조차 없어 1920년 비로소 의회에 결의를 거쳐 군대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국가로서의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당시 일제가 조선에서 존재했었다면 이런 형편을 우리가 명확히 감안해야 한다.

1920년 계연수 선생이 만주(滿洲)에서 일제(日帝)의 밀정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는 사실들을 우리가 그대로 믿을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인가는 순전히 우리 몫이지만 결론적으로 들어난 사실 모두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도 만주를 한반도 북쪽 동부삼성이라고 믿는 사람은 각성해야 한다.

잘 생각해보면 이 당시 한반도 역사를 만들려고 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면 한반도 역사를 기존 아시아대륙을 근거해야 할 터인데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서술하고 있는 12연방국의 위치가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한다고 할 때 계연수 선생은 이런 음모세력에게 큰 방해자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주요인물의 암살은 역사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 "에서 적극적으로 풀이한 사실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글쓴이의 세계삼한역사관(世界三韓歷史觀)은 인류사의 시발이 북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사실은 조금도 비켜나갈 틈이 없다.

인류사 태동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에서 유일체제 즉 하나의 체제(One dominant system)가 기반 한다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총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양세력들이 추구한 역사는 오리엔탈문화와 역사를 거점으로 유럽역사를 만들었고 오리엔탈문화와 역사 근거를 현 중동으로 옮겨 놓아 유럽역사가 자연스럽게 이동반경에 접하도록 역사 여건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견주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류사가 시작된 일 만 년의 유구한 역사는 명확히 세계삼한역사를 말하는 것이며 만년(萬年:10,000)이란 역사사실 말고도 더 놀라운 사실이 계연수(桂延壽)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정확히 수록되어 있는데 원동중 삼성기 전 하편(三聖記 全 下扁)과 환국본기(桓國本紀)에 나타나고 이것에 따르면 환국(桓國)은 7세에 전하여 존속기간이 역년 3301년간(年間)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63,182년간(年間)을 말하고 있는 것도 서양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즉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범위에 들어가는 년간(年間)으로서 인류시원(人類始源)역사라고 글쓴이는 감히 주장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실체는 위서라는 논쟁이외 일본인 손에 들어감에 따라 상당히 본질이 훼손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데 일본인들의 열도역사가 존재하려면 아시아대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글쓴이가 현 환단고기가 일본인 손에 들어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계연수 선생에 의해 1911년 출간된 판본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원본이 모든 관련 자료와 함께 유실되었다가 이유립이 기억을 되살려 복원했다고 하는 점, 이유립은 박창암을 통하여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鹿島曻)와 접촉하여 직접 원본을 전달하였다는 점, 그리고 1982년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점과 이어 1985년이란 시기에 뒤늦게 한반도에서 한글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환단고지조차 온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은 계연수 선생의 원문이 일본인에게 전달됨과 함께 본질과 다르게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인데 북아메리카대륙의 근거가 사라졌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본 블로그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에서 세계삼한역사의 강역을 밝혔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이러한 모든 의혹과 사실을 정립시키기 위해서라도 시급하게 “인류시원의 땅”이 어딘가를 확실하게 밝혀볼 예정이니 기대해도 괜찮을 것이다.

조선(朝鮮)에서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밀려들 때 재위기간을 가진 고종(高宗)이 혼혈계인 타타르인(韃靼人:Tatars)을 닮았다든지 아니면 명성황후가 백인으로 백(白)러시아인 즉 벨라루스인(Belarus)을 닮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서양인들이 선교사란 미명아래 대거 조선으로 들어 닥칠 때 코리아(COREA)사회에서는 갓을 쓴 백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등은 현재 한반도인(韓半島人)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한반도에 왠 헛 묘들이 그렇게 많을까?

한반도에 건물들은 왜 200년 이상 된 건물이 없을까?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에 등재된 1만여 명의 조선 유명 인사가 대동보에 수록된 1913년 편집된 시기임을 감안할 때 한반도에 성씨(姓氏)들이 과연 전통적으로 온전한 것이었을까?

알고보면 역사 난제들이 산재되어 있다.

초대인도(印度)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1889-1964)수상이 간디여사에게 써준“세계사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에서 선교사들은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주장한데서 특히 19세기에 한반도라고 하는 코리아 땅에 선교사들이 무수히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고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서양인들이 설치던 시기에 갑자기 대조선의 위세 높은 왕족들 모두 한꺼번에 몰살되는 사실과 함께 철종(哲宗1831-1863,재위:1849-1863)재위가 끝나던 1864년 1월 16일은 인류사의 위대한 역사의 등불이 한꺼번에 꺼지는 날이라고 할 정도로 괴상한 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시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인 금위영(禁衛營)반란이 발생하고 1860년에 경희궁으로 천궁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런 끔직한 역사사건이 발생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가 있다.

먄약 금위영 주축이 서양인이었다고 본다면 어떤 일이 발생되었겠는가.

이러한 역사의 재판이 바로 러시아황제일가족 몰살사건이다.

그 이후의 조선제왕들은 허수아비 노릇을 하던 별 의미가 없는 역사 흐름이 아니었는가 한다.

공교롭게도 철종이 생을 다할 때 그리스의 오톤왕(Otto,1815-1867,재위:1832-1862), 청조의 함풍제(咸豊帝,1831-1861:재위 1850-1861), 인도의 바하두르샤 2 세 (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임종을 맞이 한다.

역사 개연성이 이와 같음에도 한반도인들이 사실을 알려하지 않고 부정만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못해 실로 암담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2.대전 소제호에서 난 씀바귀처럼 쓴 개나리



향토례찬내고을명물(九(구))(四(사)) 湖南要衝(호남요충)의歡樂塲(환락장) 萬病水(만병수)의自由塲(자유장)

1926.12.03. 동아일보 5면 사회 기사(텍스트)

얼마전까지도 우리것의 자유탕이 지금와서는 남주고 비러쓰는 약탕

◇大田名物儒城溫泉(대전명물유성온천)...[생략]

내고을명물투고

이온천은 몇해까지도 자유온천이었으나 어느듯 눈 밝은 일본인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지요. 유성온천을 말하던 끝이니 이와 비슷한 것을 좀 써보겠습니다.

우리고을에서 동으로 약 사오정(町)가량가면 우암(尤菴)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본택이며 회덕송씨(懷德宋氏)의 근거지인 소제(蘇堤)라는 마을이 있다는데 이 마을 앞에는 삼사석직(石直)이 가량 되는 큰 못이 있습니다. 이 못은 곧 소제방죽(蘇堤湖)이라는 곳으로 이 방죽은 경치가 좋으며 지대가 한가함으로 으슥한 달밤에 산보하기 좋기로 둘도 없는 재미있는 곳이지요. 그리고 조선에서 " 개나리" 나는 곳은 이곳 한군데 밖에 없는데 이른 봄에 물이 살을 에이는 듯할 적에 소제근처의 부녀들은 독특한 복장을 입고 "개나리"를 뜯는 모양은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르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지요.

겨드랑이까지나 올라오는 물에 들어가서 발가락으로 떠서 물 위로 띄워서는 손으로 모아가며 덜덜 떤답니다.

"이것도 먹고살려고 하루 몇 십전이나 벌고"싶어서 하는 것이지요.

이 개나리라는 것을 멋 모르고 회덕명물이라고 집어 잡숫다가는 진저리를 칠지니 쓰기가 씀바귀에 비교할바 아니지만 일명 송채(宋菜)라고 해서 송씨는 선천적으로 잘 먹는 모양입니다.

이 방죽은 물천량, 고기천량, 개나리천량이라고 하여 삼천량이라니 땅 값까지 합하면 굉장할 것이외다.

◇投稿者大(투고자대) 田(전) 申(신) 哲(철)

◇薄(박) 謝本報購讀券三個月分(사본보구독권삼개월분)

땅 넓이의 단위. 1정은 1단(段)의 10배, 곧 3,000평으로 약 9,917.4㎡


위는 발행일자 1926.12.03. 동아일보 5면 사회판 기사인데 놀랍게도 대전(大田)에 1926년에 소제호(蘇堤湖) 즉 소제방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고 동시에 그 호수에서 “개나리”라는 수생 침수식물이 자생하였으며 그것을 채취하던 모습이 기사화 되었는데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다.

추위가 가시지 않는 이른 봄에 부녀들이 독특한 복장을 한 체 개나리를 뜯고 있는 모습과 이 개나리란 채소가 씀바귀처럼 쓴 맛의 회덕명물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또한 조선(朝鮮)에서 오직 소제호에만 이 '개나리'가 났다고 한다는 사실 등이다.

도대체 이 개나리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나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전의 경치가 좋고 지대가 낮아 달밤에 산보하기 좋다고 하는 일명 소제방죽이라고 하는 소제호(蘇堤湖)의 정체가 궁금한데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일제강점기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궁금증이 폭발한다.



      


                         [중국 절강성 항주시 서호서부(浙江杭州西湖西部)의 소제(蘇堤)]

        


                                      [대전 소제리의 소제방죽 또는 소제호(蘇堤湖)]


위 오래된 사진 두 장은 대전 소제호의 모습이란다.

소제호(蘇堤湖)라는 명칭을 풀어보면 소주(蘇州)의 방죽 또는 둑이라는 뜻이고 소제가 있는 호수란 이야기다.

홍수로 인해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쌓아올린 방죽이나 둑 형태가 있는 호수일 것 같다.

이 지명은 마치 중국의 옛 지명 오현(吳縣)이라고 하며 곳곳에 호수, 강, 운하가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수향(水鄕)이라고도 불리고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성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도 불렸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를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니면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의 서호(西湖:전장길이2.8km)서부에 있는 소제(蘇堤)를 말하는 것 같은 소제방죽이라 하니 한반도 대전(大田)에 있었던 것이 믿겨지질 않는다.

실제로 위 게시한 두 장의 사진에서 희미하지만 옛 소제호에 대한 사진영상이 남아있다.

하지만 호수 전체를 나타내는 사진은 없고 일부 식별이 정확하지 않는 호수와 맞닿은 불분명한 농지 하천 부지와 같은 명확한 사진 영상뿐이다.

사진들이 왜 이렇듯 명확하지 않을까?

왜 호수 전체의 영상은 없을까?

의문은 쌓여만 간다.

동아일보 기사를 참고하면 이 소제호의 크기가 삼사석직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소제호를 찍은 사진엽서에는 무성한 연꽃이 있는 모습을 식별이 안되지만 대충 볼 수가 있다.

'역사를 찾아(태허)'의 자료를 참고하면 둘레 2,618척(尺)793m, 동서 882척(尺)267m, 남북 850척(尺)257m이라 하였으며, 회덕군(懷德郡)에서 가장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이공갤러리 자료에 의하면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소제호의 둘레가2,618척((尺)793m), 깊이는 5척((尺)1.5m)이라했다 하고 면적으로 계산하면 50m²로 적혀 있는데 너무 작은 숫자에 놀라지만 앞의 기록을 참조하면 꽤 큰 호수였다 하고 넓이를 계산하면 약 20,000평(坪)의 넓이로 추측된다.

그리고 조선환여승람(朝鮮寏輿勝覽)에는 “소제의 물은 깊고 거기서나는 고채(苦菜)는 맛이 아주 좋다”라는 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하는 것은 동아일보 기사와 똑 같다.

‘삼사석직’이라는 단위가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크기를 상상하기가 싶지 않았지만 위 자료에 의해 소제호 넓이가 20,000평정도인 것으로 작지 않는 호수다.

어쨌던 1927년 소제호가 메워지고 대동천(大東川)이라는 인공하천이 생기기 전까지는 대전(大田)의 명소를 소개하는 신문과 잡지에는 ‘소제공원(蘇堤公園)’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하였으며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이라고 표현 하였다.

그 만큼 사랑받던 소제호가 갑자기 일제에 의해 사라지게 된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과연 1927년에 무슨 일이 발생하여 소제호를 매립하고 대동천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가?

바로 일제식민지시대 때인 1927년에 일본인 거주지의 홍수 피해를 막는다는 이유로 대전 동정소제호(東町 蘇堤湖)를 매립하고 철도관사촌(鐵道官舍村)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유는 홍수이다.

즉 일본인들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랑받던 대전명소를 사라지게 했다는 말이다.

얼마나 홍수가 거대하였기에 20,000평 정도의 호수를 매립할 수밖에 없었을까?

1927년에 한반도에 거대한 홍수가 발생했다는 이야긴데 솔직히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현재 대전 상황을 보면 대전을 관류하는 갑천(甲川)은 금강 상류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옛날에는 이를 중류라 한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다가오는 것도 있지만 상류, 중류, 하류가 존재했다면 큰 홍수가 날 수 없는 조건이다.

강수량이 많을 때야 어디든지 범람의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대청호(大淸湖)가 만들어진 것은 대전시에서 비켜나 있고 금강하구의 범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정확한 이야기다.

대전 갑천이 중류에 있었다 하지 않는가.

금강 상류에 위치한 현 대전은 근원적으로 금강에서 역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금강 하구의 범람위험성과는 차별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한반도 금강(錦江)에서 발생한 대홍수에 대해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 바라 볼 때 피해액 4억~10억불이 발생했다고 하는 미시시피주 대홍수(Great Mississippi Flood of 1927)는 1926년 여름부터 미시시피의 중부유역에서 많은 양의 폭우(暴雨)가 내리기 시작하여 9월에는 캔자스(Kansas), 아이오와(Iowa)의 미시시피의 지류(支流)가 범람하였고 1927년 이른 봄까지 진행되면서 피해지역 94%가 아칸소 주(Arkansas), 미시시피 주(Mississippi), 루이지애나 주(Louisiana)에 집중된 대홍수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1927년에 미시시피 강의 다른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긴 제방 및 방수로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1928년 미시시피 강 지류에 대한 홍수대책법령(Flood Control Act)이 발효되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재임:1933-1945)는 1928년부터 시작된 대공황(大恐慌)을 극복을 위하여 취임하지마자 대규모 공공사업인 뉴딜정책(New Deal:1933-1936)으로 경기 부양책까지 마련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한반도 홍수의 기록이 전무한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본 블로그에서 충청도(忠淸道)를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 동부에서 미시시피강(江)유역 중앙부에 이르는 온대 내륙에 넓게 발달한 초원을 프레리, 대초원(prairie)지역이라 한 사실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고 본 블로그 글 "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6"의 소제 4.충청도(忠淸道)참 의미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 중앙에 위치하는 오대호의 빙하물이 수원과 같이 맑고 푸르다는 의미와 그 수원이 스며드는 초(草), 풀과 싹이 융성한 대초원을 이루는 지대를 충청도라 한 것이 틀림없다.[2016.10.31.정리]라고 정리하였던 바와 같이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 동부에서 미시시피 강(江)유역 중부에 이르면서 온대 내륙에 넓게 발달한 초원을 프레리, 대초원(prairie)을 포괄적으로 충청도라 했을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


3.씀바귀 행채(荇菜)는 노랑어리연꽃


지금까지 소제호(蘇堤湖)의 정체를 어느정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소제호에서 생장되었다고 하고 씀바귀처럼 쓴 맛의 침수식물인 개나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볼 차례이다.

1927년 보도된 동아일보에서 말하는 침수식물 개나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다음 2013.04.01.일자의 금강일보 독자위원 칼럼에서 “행채(荇菜)를 아세요?”라는 자료를 참고하여 본다.

“100여년 전 대전에는 풍광이 아름다운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는 중국 ‘소주(蘇州)’의 빼어난 호수와 견줄 만할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웠다 해서는 ‘소제호(蘇堤湖)’라 불렸다. 동방의 공자가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 순조(純祖)임금이 해좌궐리(海左闕里)라는 현판을 내렸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선생이 살았던 곳이며 지금의 대전 소제동 소제마을 앞에 있었던 소제호(蘇堤湖)가 그것이다. 1904년 경부선이 부설되고 대전역일대가 신흥도시로 본격적으로 건설을 시작하면서 유교전통마을인 소제마을에 1907년 식민지 제국주의의 제례공간인 신사(神社) ‘태신궁(太神宮)’이 건립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소제호(蘇堤湖)는 1927년 인공적인 대동천이 건설되면서 매립되었다. 소제호(蘇堤湖)가 매립되면서 함께 사라진 것이 있다. 회덕의 명물이라는 행채(荇菜)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로 전통사회와 함께 사라진 대전의 맛, 행채(荇菜)의 단서는 ‘소재방죽에서 3~4월에 산출되는 약간 쓴 맛이 난다’는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실린 것이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이다.(생략)...행채(荇菜)는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수초인 노랑어리연꽃을 소제마을 사람들이 나물로 해먹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 자료에서는 위 동아일보 기사칼럼에서 알 수 없는 사실들이 많은데 대전의 소제호는 중국 ‘소주(蘇州)’의 빼어난 호수와 견줄 만할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웠다 해서는 ‘소제호(蘇堤湖)’라 불렸다 하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더 나아가 동방(東方)의 공자(孔子)가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임금이 해좌궐리(海左闕里)라는 현판을 내렸던 대유학자 우암(尤菴)송시열(宋時烈:1607-1689)선생이 살았던 곳이라 한 사실이다.

이것은 동아일보에서도 언급한 사실이다.

특히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마을은 궐리촌(闕里村)이라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강좌와 해좌에 대해선 낮선 것이다.

풀어보면 현자들을 칭송할 때 중국에서는 죽림(竹林)을 앞에 붙였지만 고려에서는 강좌(江左)와 해좌(海左)라 하였다는 것이 특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죽림이라면 대나무로 구성된 숲을 말한다.

하지만 강(江)이나 해(海)는 거대한 영토를 전제하는 것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나라 초기에 노장(老莊)의 무위(無爲)사상을 숭상하며 죽림에 모여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를 말했다지만 고려 후기, 청담풍(淸談風)의 일곱 선비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를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 하였는데, 중국자료를 찾아보면 강좌(江左)라 함은 강소(江蘇)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려칠현들이 강소(江蘇)에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 된다.

이것은 즉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와도 관계된다는 이야긴데 어쩌면 대전의 소제는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 있는 호수(湖水)의 제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고려(高麗)와 중국(中國)은 매번 합치되는 경우를 낳고 있다.

물론 강좌칠현(江左七賢)과 해좌칠현(海左七賢)을 우리 역사에서 동일하게 본다지만 해좌(海左)는 강좌(江左)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와 순조임금이 현판을 하사한 해좌궐리(海左闕里)의 뜻은 해석하기에 따라 중국과 버금가는 상당한 의미를 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쨌던 우암 송시열 선생을 동방의 공자라 했던 것인지 아니면 강소성을 전제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현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실제로 동아일보에서도 회덕송씨(懷德宋氏)의 본택이 이 소제호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송씨(宋氏)의 나라를 송나라라 하였던 기존 역사를 빗대은 글쓴이의 냉철한 상상력처럼 동아일보에서도 개나리를 송채(宋菜)라 한 역사는 또 다시 ‘송나라 채소’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싶으나 역사나 혼란스러운 것은 같아 우리가 탐구의 골짜기에 빠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이 자료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동아일본 칼럼에서 대전 소제호(蘇堤湖)에 아낙네들이 살을 에는 듯한 날씨에 발가락으로 떠서 올려 손으로 잡는다는 채소를 '개나리'라 하는 것과 금강일보 독자위원 칼럼에서 이 채소를 행채(荇菜)라 하였고 말미에 이를 노랑어리연꽃이라 한 사실이다.

개나리, 행채, 노랑어리연꽃 이것들이 무슨 연관인가.

행채(荇菜)는 중국사서나 한반도 번역사서에서 곧잘 ‘마름 풀’로 번역되면서 우릴 이해시키는 것인데 한자 행(荇)역시 ‘마름 행’으로 정리된다.


參差荇菜 左右流之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찾네

窈窕淑女 寤寐求之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그리네

求之不得 寤寐思服 구해도 얻을 수 없어 자나깨나 그 생각뿐

悠哉悠哉 輾轉反側 부질없는 이 마음 잠 못 이뤄 뒤척이네


위는 2500년 전의 중국고서인 시경(詩經)에서 찾을 수 있는 기록이다.

‘흰 줄기를 삶아서 식초에 담그면 무르고 맛이 좋아 안주로 삼을 만하고, 어린잎은 국을 끓이기도 하며 민간에서는 열매를 해독제나 위암에 사용한다.’고 하였으며 또 위 시경(時經)첫 장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쓴 한편의 애틋한 사랑의 시에서도 행채(荇菜)를 따며 열심히 일하는 서민 여인의 모습을 시적 분위기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인데 이는 동아일보에서 개나리를 뜯는 모습과 같고 어쨌든지 행채(荇菜)를 마름풀이라 하였다는 사실이다.


홍재전서(1799) 제2권 / 춘저록(春邸錄) 시(詩) 회상전(會祥殿) 춘첩(春帖)

曉日千門綵勝懸 새벽부터 일천 문엔 채승을 달았는데

紅梅初放玉欄前 붉은 매화는 옥 난간 앞에 처음 피었네

齊宮警寢瑤簪脫 제궁에선 잠 경계하여 옥비녀를 벗었고

唐殿觀蠶寶箔宣 당전에선 누에 살피어 잠박을 펼치었도다

髹盤荇菜傳嘉瑞 검은 칠 쟁반의 행채는 상서를 전하고

寶酌椒花祝永年 술잔의 초화송은 장수를 축원하였네

聞道徽音遍八域 듣자하니 훌륭한 명성 팔방에 두루 퍼져서

家家含哺樂堯天 집집마다 배불리 먹고 요임금 성대를 즐긴다네 

 

위 시편은 정조(正祖)의 홍제전서(弘濟全書)에 등장하는 1775년 작품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전(會祥殿) 춘첩(春帖) 즉 ‘봄에 적은 쪽지’란 시다.

휴반행채전가서(髹盤荇菜傳嘉瑞) 검은 칠 쟁반의 행채는 상서(좋은일)를 전하고 /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은 행채(荇菜)를 수초(水草)의 일종으로 식용하는 야채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옛날 입춘일이면 춘병(春餠)과 생채(生菜)를 만들어 먹었던 데서 온 말이라 하였고 춘병(春餠)이라 함은 봄에 나는 채소들이나 고기, 새우 등을 밀전병 등에 싸먹는 중국 음식이라 풀이하였다.

이와 같이 행채를 대체적으로 번역을 마름풀이라 한 것인데 이를 순채라 하는 것도 이상하다.

아래는 신중국자료 식성기(食城記)의 지식(知食)에서 행채를 순채(莼菜)라고 하는 자료이다.


同为水生草本,莼菜的被提及率不及诗经里“参差荇菜,左右采之”里的“ 荇菜(莕菜)”。莼菜多产于中国苏浙一带,是浙江杭州的一道特色菜品,为不少慕名而来的旅者所必点之菜。其常见菜品有:“莼菜羹”、“西湖莼菜汤”等,大多以汤、羹为主。莼菜经春季移栽后,秋季成熟,故又为中秋时令菜。其性甘,有解毒、利水、清热、消肿的功效。口感似蚕菜,滑爽舌尖。


순채는 수생초본이며 시경을 들어 참치행채(参差荇菜) 들쑥날쑥 하는 행채 좌우채지(左右采之) 이리저리 뜯네라 해석하고, 이 채소가 마름 행채라 하고 있는 것이다.

행채라고도 하는데[荇菜(莕菜)]순채가 많이 생산되는 곳은 절강성 일대이고 절강(浙江) 항주(杭州)에 특화채소상품이며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순채갱, 서호순채탕 등 거의 탕과 갱이 주라 하였으며 순채는 봄에 이식하고 가을에 성숙하는 것으로 절기가 가을 채소를 말하고 있다.

성질이 달고, 해열과 이뇨, 해독 등의 효능이 있고 부기를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으며 데치면 혀를 부드럽게 하는 입맛이 있다라고 해석된다.


조선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윤휴(尹稶:1617-1680)의 백호전서(白湖全書)제41권/잡저(雜著) 독서기(讀書記) 고시(古詩)편 관저(關雎) 집전(集傳)에는 하(河)는 북방에 흐르는 물의 통칭이라 하고 참치(參差)는 길고 짧은 것이 가지런하지 않은 모습으로 행(荇)은 접여(接余)이니 뿌리가 물 밑에서 나고, 줄기는 비녀다리와 같고 위는 푸르고 아래는 희며, 잎은 자주 빛 붉은 색이면서 너비는 한 치 남짓하며 물 위에 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꽃의 색깔이 나타나지 않는다.


4.우리가 알고 있는 행채란.


본 블로그 글 "순채(蓴菜, Brasenia)가 우리밥상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6"에서 알아보았지만 순채(蓴菜)를 마름 풀이라고도 하는데 식물분류학체계적으로 1789년 조한 본 슈레버(Johann Christian Daniel von Schrebe:1739-1810)에 의해 명명된 수련목(睡蓮目:Nymphaeales) 순채과(蓴菜科:Cabombaceae) 순채속(蓴菜屬:Brasenia Schreb)으로 분류되며 숙근성 다년초로 수생식물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마름풀 순채(蓴菜)의 꽃잎 색깔이 자주 빛이라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은 동아일보에서 개나리라 한 것을 보면 꽃잎 색깔이 노랑색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 성미(性味)가 동아일보에서는 씀바귀처럼 쓰다(苦)하였고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에는 행채가 약간 쓴 맛이 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이와 다르게 마름풀의 약성(性味)을 전부 하나같이 달다(甘)한 것이다.


이래는 한국에서 다른 식물로 인식되는 중국문학 속의 식물이란 제목의 글인데 참고 할만하다.

중국문학에 등장하는 식물명들이 한국에서는 중국과 다르게 인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관련이 있는 양치류식물 고비 미(薇)를 한국에서는 ‘고사리’ 또는 ‘고비’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 ‘薇’는 사실 중국에서 야완두(野豌豆)라고 부르는 갯완두라 하는 살갈퀴, 콩과의 두해살이 풀이다. 《詩經》에 보이는 행채(荇菜)라는 식물도 한국에서는 ‘마름’ 또는 ‘마름풀’로 알고 있으나, 이 또한 노랑어리연꽃을 오해한 것이다. 그리고 중양절(重陽節)과 관련된 식물인 수유(茱萸)를 한국에서는 산수유(山茱萸)로 간주하지만 이것 역시 중국에서 식수유(食茱萸)라고 부르는 ‘머귀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다. 부추 잎의 이슬이 사라지기 싶다는 의미의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노래 해로가(薤露歌)의 염교 해(薤)를 한국에서는 ‘부추’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락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염교(藠子:Allium chinense)’라는 식물이다. 한국에서 잣나무로 알고 있는 백(柏)도 측백나무 계통의 나무를 오인한 것이다. 한국중국어문학회(수록지정보 : 중국문학.81권.107~123p)


글쓴이가 좀 더 보충하였지만 위자료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핵심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있는 듯하나 어쨌거나 중국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의 사정이나 그 분들이 시답잖아 하는 한반도 사정이나 매 일반 역사 근원적인 뿌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관심있게 보아야 하는 것은 시경《詩經》에 보이는 ‘荇菜’라는 식물도 한국에서는 ‘마름’ 또는 ‘마름풀’로 알고 있으나, 이 또한 노랑어리연꽃을 오해한 것이라고 정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노랑 개나리를 생각하면 일치하는 설명이다.

동아일보에서 말하는 개나리라고 한 것은 노랑 꽃잎에서 노랑어리연꽃이라는 사실이 더 확실해 진다.

일단 잎은 마름모꼴의 삼각형으로 빽빽하게 나와 있는 마름(마름풀)은 도금양목(桃金孃目:Myrtales), 마름과(菱科:Trapaceae), 마름속(菱屬:Trapa)의 능각(菱角)이라고 하는 기괴한 모양의 모서리가 뾰족뾰족한 송곳과도 같다하는 마름(菱)열매가 열린다.

이것은 아니다.

순채는 식물학 분류체계가 수련목(睡蓮目:Nymphaeales) 순채과(蓴菜科:Cabombaceae) 순채속(蓴菜屬:Brasenia Schreb)으로 분류되지만 노랑어리연꽃이라 함은 국화목(菊目:Asterales) 조름나물과(睡菜科:Menyanthaceae)의 행채속(莕菜属:Nymphoides)으로 분류됨을 알 수가 있다.



5.노랑어리연꽃의 생물학 정체


어리연꽃속(Nymphoides)은 조름나물과의 한 속으로 약 50 종(種)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자에서 언급했듯이 국화목(菊目:Asterales) 조름나물과(睡菜科:Menyanthaceae)의 행채속(莕菜属:Nymphoides)으로 분류체계가 나타낸다.


莕菜属(学名:Nymphoides)是睡菜科下的一个属,为浮水草本植物。该属約有50多個种,分布于热带和温带的淡水中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未分级) 被子植物 Angiosperms

(未分级) 真双子叶植物 Eudicots

目: 菊目 Asterales

科: 睡菜科 Menyanthaceae

屬: 莕菜属 Nymphoides(Ség)1754


행채속(莕菜属:Nymphoides)의 학명은 프랑스고고학자, 금석학자, 천문학자 겸 식물학자인 쟝 프랑수아 세귀에(Jean-François Séguier:1703-1784)가 1754년에 명명했다.

꽤 이른 시기이다.

프랑스 파리 식물원(Jardin des Plantes)에서 근무하였다지만 실제로 그의 주거지가 어딘지가 확인되지 않고 그가 미국 미시시피 강 주변에서 연구 활동했다는 글쓴이의 추측과 정황은 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검증이 불가하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대조선(大朝鮮)은 다문화적 체제의 나라였다.

오늘날 대조선 역사가 왜 그토록 초라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주요 원인은 바로 이질적인 다문화적인 요소가 강했고 이것이 근세기에 산업혁명과 함께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분리화가 되면서 역사 모태 겉껍데기가 거추장스럽게 되자 하나같이 스스로 거부하고 부정하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과거 프랑스라 함은 산업혁명전에 대조선(大朝鮮)역사 지류로 보아야 하며 실제로 유럽대륙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과 관계설정은 불분명한 것이어서 근세기에 서양역사가 완성되는 것과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역사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는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다.

프랑스인들은 루이제왕(Louis)의 이름을 딴 미국 루지지애나주(Louisiana)를 거점으로 했다던지 하는 것은 서양위주의 역사가 확실하고 근세기에 거대한 자본가들에 의해 생성된 미국은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적인 면에서 우선하였으며 그 결과 유럽전쟁(European War)이라고 불렸던 1차세계대전(世界大戰)은 넘쳐나던 미국자본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로 충돌한 사태를 관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질 못했다.

때문에 근세기 역사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 열거한 행채속(莕菜属:Nymphoides) 5(種)중 동아일보에서 이야기한 ‘개나리’상징성에 근접한 종(種)은 꽃을 노란색으로 한정지울 수밖에 없을 것인데 첫번째(1)황화행채(黃花莕菜:Nymphoides aurantiaca (Dalzell) Kuntze, 1891)종(種)과 (5)노랑어리연꽃 학명 Nymphoides peltata (S.G. Gmelin) Kuntze Revis. Gen. Pl. 2: 429, 1891의 종(種)을 들 수 있다.

나머지 3종(種)은 꽃의 색이 전부 흰색이다.


(1)황화행채(黃花莕菜:Nymphoides aurantiaca (Dalzell) Kuntze, 1891)는 분포지도에서 오스트레일리아(호주:Australia)에 전부 표식이 나타나 실제로 글쓴이가 찾는 장소가 아니다.


(2)좀어리연꽃(小莕菜:Nymphoides coreana (H. Lev.) H. Hara J. Jap. Bot. 13: 26, 1937)(흰꽃)


하라 히로시(原廣司,Hara Hiroshi:1936-)は、日本の建築家。東京大学名誉教授

위 학명의 종명(種名)이 "coreana"라는 것은 한국의 특성이 강하다는 것인데 꽃의 색깔이 흰색이라는데 제외될 수밖에 없고 또한 정서적으로 거슬리는 것도 일본인 하라 히로시(Hara Hiroshi)가 학명을 명명하였다는데 있고 명명시기 또한 1937년이라면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는 때라 더치 공화국(dutch)네덜란드 계열의 사병과 민병들이 고려(高麗)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라 할 수 있다.

2001년에 시작된 미국 통합 분류학 정보 시스템(Integrated Taxonomic Information System, ITIS)을 매개로한 2000여종의 생명카탈로그(Catalogue of Life)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어쩌면 현 열도일본인들의 작품이 아닐까도 한다.

주로 얕은 연못에 살며 어리연꽃에 비해 전체가 소형이라 ‘작은 행채’라 했다.

잎은 심장형이며 잎자루가 길고 지름 2~6cm이고 6~8월 개화하여 꽃의 지름은 8mm 가량이라고 자료에 나타난다.


(3)龍骨瓣莕菜:Nymphoides hydrophylla (Lour.) O. Kuntze 1891 흰 꽃


이 종(種)은 꽃의 색깔이 흰색이다.

떠 있는 볏 심장(crested floatingheart), 흰어리연꽃(white water snowflake), 흰 눈송이(white snowflake)의 별칭이 있는 아시아 종으로 주로 대만의 메이눙구(美濃區), 가오슝 시(高雄市)에서 야생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관상용 수경 정원에 쓰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플로리다주(Florida)에서는 성가신 잡초(nuisance weeds)로 여기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South Carolina) 매리언 호수(Lake Marion)에서 빙점이 가까운 추운날씨에도 죽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4)印度莕菜:Nymphoides indica (L.) Kuntze Revis. Gen. Pl. 2: 429, 1891 金銀蓮花, 어리연꽃(흰꽃)


역시 꽃의 색상이 흰색이다.

바나나 초목(banana plant), 억센 습지초목(robust marshwort), 물 눈송이(water snowflake)등의 별칭을 가졌으며 못이나 흐름이 느린 물에 나는 여러해살이 수초로서 잎은 심장형이고 물위에 뜨며 지름은 7~20cm이고 8월경 개화가 가능하며 꽃의 지름은 1.5 cm가량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10개 정도의 꽃대가 하루 한 개씩 물속에서 올라와 핀다고 되어 있다.

분포지를 보면 세계 모든 대륙, 곳곳에 퍼져 생장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아래 노랑어리연꽃까지 포함하여 절대적으로 작센왕국의 라이프 치히(Leipzig)출신인 독일 식물학자 오토쿤츠(Otto Carl Ernst Kuntze:1843-1907)의 영향력을 지대했다고 보여진다.

그의 이력을 보면 미국식물학자 알렉산더 브라운(Alexander Brown;1843–1906)과 독일식물학자 폴 아세르슨(Paul Friedrich August Ascherson:1834-1913)과 동행하면서 식물을 채집하고 1867년에 베를린에서 라이프치히의 식물편람(Taschen-Flora von Leipzig)을 출간하였으며 독일의 블랙베리의 품종 개량(Reform deutscher Brombeeren)집필, 산딸기속(Rubus)정의하였고 1867년 정유공장을 설립하고 5년후 은퇴하면서 식물학연구에 전념했다 하였다. 1874년부터 1876년까지 카리브해, 남미,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를 여행하고 7700가지의 표본을 채집하였다. 1881년에 세계일주(Um die Erde)출판하고 1878년 박사학위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에서 취득하였으며 1886년 러시아중부, 1887년 카나리아제도를 방문하고 1891년에 2권의 식물의 종류의 일람(Revisio generum plantarum)과 남아메리카의 식물연구본을 집필 출판하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식물학자들은 그의 분류를 부정하였다.

1894년에 독일 식민지 남아프리카를 여행하였으며 비로소 그의 나이 61세 죽기 3년 전인 1904년에 사모아와 하와이, 미국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의 식물연구서들이 당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아마도 대조선의 생물학과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하며 역설적으로 추리를 하게 한다.

사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사실상 독일이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 북부지방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러시아 중부라는 것은 결코 현 러시아대륙으로 볼 수 없음이고 카나리아제도(Islas Canarias)가 어딘가.

대서양에 있는 군도로, 북서아프리카 본토에서 108㎞ 이상 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휘 돌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마지막으로 (5)노랑어리연꽃(Nymphoides peltata (S.G. Gmelin) Kuntze Revis. Gen. Pl. 2: 429, 1891)은 바로 톱니처럼 째진 수련(fringed water-lily), 떠 있는 노란 심장(yellow floatingheart), 물 술 장식(water fringe)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고 유럽이 원산지며 7~9월 개화하고 물의 흐름이 느린 하천이나 연못에 나는 여러해살이 물풀로 뿌리줄기는 물 밑의 진흙 속에 가로로 뻗고 줄기가 끈 모양으로 길면서 굵다고 설명된다.



이것의 속명 “Nymphoides”의 의미는 그리스어 “nympha”에서 요정(nymph)과 “oides” 뜻 닮다(resembling)란 의미의 ‘요정같다’라는 합성어이다.

종명 펠타타 peltata 는 라틴어 펠타투스(peltátus)반달 모양의 방패로 무장한 방패라는 뜻이 강하다.

이것은 아마도 잎의 모양을 따서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식용식물로서 잎은 줄기, 꽃을 함께 삶아 데쳐 요리에 쓰는데 줄기는 겉을 벗기고 사용하며 씨앗은 다른 요리에 사용하고 신선한 잎은 두통치료에도 쓰이며 일반적으로 장식용으로 정원에서 볼 수 있다 하였으며 특이한 자료가 눈에 보이는데 1920년 설립된 미시간 자연자원국(Michigan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에서는 유해 잡초로서 가장 많이 찾는 수생 침입종(Most Wanted Aquatic Invasive Species)으로 규정하고 씨앗이 물 흐름을 통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물리적으로 손으로 뿌리를 뽑아 제거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1927년 기사 동아일보에서 개나리를 물속에서 아낙네들이 발가락으로 뽑아 올려 손으로 모아 쥐는 것 같은 상황이 그려진다.

이런 설정을 보면 동아일보 기사를 비추어 볼 때 당시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에 물속에 들어가 개나리를 뜯는 작업하는 아낙네들이 먹고살려고 하루 몇 십전이나 벌고 싶어서 하는 짓이라 한 것을 감안하면 당시 대 홍수로 인해 댐, 제방 등 건설기간산업이 늘어나면서 공공근로사업 식으로 이렇게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많은 물’을 뜻하는 인디언 말인 mishi-gami에서 유해한 미시간 주(State of Michigan)가 어딘가

오대호 남부 미시간 지방을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인이 프랑스인 에티엔 브륄(Etienne Brule)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특히 이 종(種)은 신중국(新中國)자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학명들의 근원지를 알기 위해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한 분포지도와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한 분포지도를 동시에 비교하면서 표식이 명확하다고 볼 수 있는 디스커버 라이프 분포지도를 중점적으로 게시한 것을 여러분들은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 1926.12.03 향토례찬내고을명물에서 이야기하길 개나리라는 것을 멋모르고 회덕명물이라고 집어 잡숫다가는 진저리를 칠지니 쓰기가 씀바귀에 비교할 바 아니지만 일명 송채(宋菜)라고 해서 송씨는 선천적으로 이 쓴 것을 잘 먹는 모양이라 한 사실과 최근 보도물인 금강일보 독자위원 칼럼에서 대전의 맛, 행채(荇菜)의 단서는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실린 것이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이라 하면서 ‘소재방죽에서 3~4월에 산출되는 약간 쓴 맛이 난다’는 사실을 뒤 받침 할 수 있는 근거를 아직 찾지를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동아일보에서 이야기 한 조선(朝鮮)에서 "개나리" 나는 곳은 이곳(소제호)한군데 밖에 없다는 사실 등이다.


Nymphoides peltata

Yellow floating heart(노랑 떠 있는 심장)

Synonym(s):Limnanthemum peltatum S.G. Gmel., Menyanthes nymphoides (L.), Nymphoides flava Druce, N. nymphaeoides (L.) Britton, N. orbiculata Druce


위 자료를 보면 노랑어리연꽃(Nymphoides peltata (S.G. Gmelin) Kuntze을 일명 노랑 떠 있는 심장(Yellow floating heart)이라 하고 동일종의 분류에 이명(異名)으로 학명 “Menyanthes nymphoides (L.)”를 꼽고 있다.


                                     Menyanthes trifoliata L. Sp. Pl. 145, 1753 조름나물


여태 우리가 어리연꽃속(Nymphoides)만 살펴보았는데 몰랐던 새로운 종(種)을 발견하였는데 노랑 꽃의 원조는 조름나물속(屬Menyanthes)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조름나물과(Menyanthaceae)에는 이 조름나물속(睡菜屬:Menyanthes)과 전자에 열거한 어리연꽃속(莕菜屬:Nymphoides)으로 나눠지고 조름나물속(屬)의 학명부여 시기가 어리연꽃속보다 1년 빠른 1753년에 생물의 아버지란 린네(Carl Linnaeus:1707–1778)에 의해 명명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이것이 단일종(種)이라는 점과 일생동안 단 1회만 개화하는 단개화식물(單開花植物:monocarphic plant)이라는 사실이다.

속명(屬名)멘얀데스‘Menyanthes’는 그리스어(Greek words), 멘야인menyein(disclosing)과 안도스anthos:άνθος(flower)의 합성어로 꽃이 들어나다. 밝혀지다 등의 의미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종종 M. trifoliata var. minor Michx 라는 종을 볼 수 있으며 이를 영어명이 bogbean수채엽(水菜葉)과 조름나물(buckbean)라 하였다.

조름나물속이라 할지라도 현재 잘 알려진 학명“Menyanthes trifoliata”이 어긋나게 삼출잎을 가진 수평선상의 근경이지만 흰 꽃 직립형 꽃차례인 것이 찝찝하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종명 트리폴리아타 trifoliata 는 삼출잎을 나타내는 명이다.

이것은 아시아, 유럽 및 북아메리카대륙의 습지와 늪지에서 생장하는 것으로 때때로 빽빽한 뿌리와 함께 큰 늪에 생장하며 독특하고 강한 쓴맛이 있기 때문에 독한 술 네덜란드 진(schnapps)에 사용된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 동아일보에서 말하는 씀바귀처럼 쓰다(苦)한 사실과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에 행채가 약간 쓴 맛이 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자료이다.


Accepted M WCSP[World Checklist of Selected Plant Families](in review) 2012-03-23

The Plant List includes 17 scientific plant names of species rank for the genus Menyanthes. Of these 1 are accepted species names.


위 채택된 식물군의 세계점검표(WCSP)에도 제공된 자료에 Menyanthes 속 17종(種) 중 유일하게 승인된 종(種)이 바로 조름나물속(屬)의 종명(種名) “trifoliata”가 붙어있는 학명 멘얀데스 트리폴리아타‘Menyanthes trifoliata L’.라고 하지만 꽃 색상이 흰색이기 때문에 글쓴이가 찾고자 하는 종이 아니며 종명(種名) “trifoliata”는 중국 삼엽 야생 오랜지등에 붙이는 종명인데 여기세 붙어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Trifoliata is derived from the Latin tres meaning ‘three’ and folium meaning ‘leaf’.

종명(種名)트리폴리아타“trifoliata”는 라틴어 트레스"tres"의 의미, 삼(three)과 포리움"folium"뜻 잎(leaf)의 합성어로서 삼출잎을 나타내고 있다.

동양성격이 강하고 무엇인가 종명의 의미가 부족함을 느낀다.

일단 조름나물속(屬)의 다른 종명(種名)을 찾아야 하는 지경에 몰렸다.



[그림]Fringed buckbean, Limnanthemum nymphoides(Menyanthes nymphoides). Handcoloured copperplate engraving after a drawing by James Sowerby for James Smith's English Botany, 1794. (Photo by Florilegius/SSPL/Getty Images)


U.S. Habitat: Slow-moving, still, shallow bodies of water including ponds, lakes, reservoirs, swamps, rivers, and canals, usually at depths of 5 feet (1.5 m) or less. Unlike other species in this genus, which are all tropical/subtropical plants, yellow floating heart occurs in moderately cold temperate areas and has been found in a number of northern states in the U.S. However, this species is restricted to well-buffered, alkaline lakes with sufficient calcium for producing its floating leaves (maximum likelihood of occurrence at 188ppm CaCO3) and grows best in mineral soils (e.g., clay).


놀랍게도 1794년의 동판조각 식물학 채집그림을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노랑색 꽃잎의 린네가 명명한 학명“Limnanthemum nymphaeoides(Linnaeus)”과 동일한 조름나물속(屬)에 종명(種名)“nymphoides”이 붙어 있는 또 다른 학명“Menyanthes nymphoides”을 새롭게 발견한다.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 L”는 정확히 잎 모양이 들쭉날쭉 참치행채(參差荇菜)임을 알 수 있고 생태적인 것은 느리게 움직이는 얕은 물이나 연못, 호수, 저수지, 늪지, 강 및 운하를 포함하여 1.5 피트 (45.72 cm)이하의 깊이에 생장하며 적당히 추운 온대지역에서 자라고 미국 북부 여러 주(州)에서 발견되면서 잘 완충 된 알칼리성 호수(188ppm 탄산칼슘[CaCO3])에 떠다니는 잎을 볼 수 있으며 충분한 칼슘을 가지고 점토 무기질 토양에서 가장 잘 자란다고 되어 있다.


Nymphoides peltata was first named Menyanthes nymphoides by Linnaeus in 1753, revised to Limnanthemum peltatum in 1770 by Gmel., and further revised in 1891 to its current accepted scientific name, Nymphoides peltata (S.G. Gmel.) Kuntze. N.peltata is synonymous with N. flava Druce and N. orbiculata Druce. Limnanthemum cordatum Dunn, described from a specimen collected in northeast Guangdong, China, is probably also synonymous with N. peltata (eFloras, 2009).


최종적으로 위 자료를 참고로 아래와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1754년 프랑스 식물학자인 쟝 프랑수아 세귀에(Jean-François Séguier)의해 흰 꽃의 학명 님포이데스 펠타타“Nymphoides peltata”가 명명되었던 실태를 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처음 1753년에 린네(Linnaeus)가 노랑꽃 조름나물속(睡菜屬:Menyanthes) 학명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를 제일 먼저 명명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조름나물속(屬)의 종(種)이 현재 모든 분류체계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분류체계 상위에 있는 어리연꽃속(莕菜屬:Nymphoides)의 흰 꽃 학명은 1년 늦게 생성된 종(種)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이 실제로 1년인지 그 보다 더 늦은 시기에 명명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Samuel George Gottlieb Gmelin (1744-1774)was a German physician, botanist and explorer.

이어 1771년에 사무엘 그멜린(Gmel)에 의해 1770년에 “Limnanthemum peltatum”으로 개정되었으며, 비로소 1891년에 현재의 학명 Nymphoides peltata (S.G. Gmel.)Kuntze으로 개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N.peltata는 N. flava Druce 및 N. orbiculata Druce와 동일종이며 “Lnnantumum cordatum Dunn”은 광동성(廣東省) 동북부에서 채취 한 표본에 의한 것으로 아마도 님포이데스 펠타타“Nymphoides peltata(eFloras, 2009)”와 동종(同種)으로 별칭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렇게 보자면 원조는 바로 1753년에 린네에 의해 명명된 학명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글에서 처음부터 글쓴이가 찾고자 한 것에 일단 합치된다.

1926년 기사 동아일보에 등장하는 개나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으로서 소위'노랑꽃 행채'라 할 수 있으며 단맛이 아니라 '씀바귀처럼 쓴 맛'의 행채를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종(種)의 정확한 분포지가 모두 멘얀데스 트리폴리아타(Menyanthes trifoliata)에 의해 가려져 찾을 길이 없다.

사라진 것이다.


6.북아메리카대륙의 노랑꽃 행채


                                                 [Menyanthes trifoliata 분포지도]


In some cases, individual species maps will have multiple colors regarding nativity [e.g.,Chenopodium album, dark olive green (native), orange (native historic), teal (adventive), and also dark navy blue (exotic)]. This map suggests that in various U.S. states, at least one infraspecific taxon of the species complex is native, another is exotic, a third is adventive and a fourth show as rare.


다행히 미국 자료에서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의 포괄적 분포지도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지도를 보면 경우에 따라 개별 종(種)지도에 출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며 예를 들어 짙은 올리브 그린(native), 주황색(native historic), 청록색(adventive), 어두운 짙은 파랑(exotic)등으로 나타나는데 미국 각주에 다양한 복합성의 분류체계에서 최소 하나의 종(種)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원산지, 다른 이국종, 토착이 아닌 외래종, 그리고 희귀종까지 볼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1753년 린네가 명명한 조름나물속(屬Menyanthes)의 원조 종명을 정확하게 찾기란 어려운 것 같다.

위 지도를 세부적으로 보면 골드색(species not present in state)주(州)에 존재하지 않는 종(種), 노랑색(species present and rare)희귀종(種), 진초록(species present in state and native)토착종(種), 그린색(species present and not rare)희귀하지 않는 종(種)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에서 노랑색은 본 블로그에서 주장한 소성(蘇城:Sioux city)과 남소성(南蘇城)이라 한 아이오와주(Iowa) 수시티(Sioux City)가 있는 곳에서 네브래스카주(Nebraska)서쪽으로 넓게 퍼져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동아일보에서 조선(朝鮮)에서 나는 곳이 오직 소제호(蘇堤湖)뿐이라 했던 사실에서 이처럼 분포지가 넓게 나타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미시간 자연자원국(Michigan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에서 이 행채가 유해 잡초로서 수생 침입종(Most Wanted Aquatic Invasive Species)으로 규정했던 주 이유가 흐르는 물에 씨앗이 이동할 수 있어 번식이 급속도로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특히 대전이 존재했었다고 믿어지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캔사스주(Kansas) 허친슨(Hutchinson), 일리노이주(Illinois) 토즈 포인트(Todds point), 미주리주(Missouri) 아이론튼(Ironton), 미주리주(Missouri)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 캐나다 온타리오주(Ontario)의 오타와(Ottawa), 뉴욕주(NY) 유티카(Utica), 그리고 올버니(Albany), 코네티컷주(Connecticut)의 하트퍼드(Hartford)등으로 나타나는데 원산을 정확히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A triterpenoid glycoside from Menyanthes trifoliata[1990]Janeczko, Z. Sendra, J. Kmiec, K. Brieskorn, C.H. (Department of Pharmacognosy, Medical Academy of Krakow, 31-065 Krakow (Poland))


또 하나 행채에 대한 성분을 분석한 것을 보면 씀바귀처럼 쓴 맛을 동반하는 것은 도라지나 인삼에도 포함되었다고 하는 트리테르페노이드(Triterpenoids)라는 성분이 학명 “Menyanthes trifoliata”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노랑어리연꽃에 대한 인터넷에서 성분, 기미, 효능, 주치, 용량 등을 나타내고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며 절대적으로 노랑어리연꽃이라 할 수없음도 우리는 주지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7. 마무리


이제 한반도 대전에 1926년까지 존재했다고 하는 소제방죽을 왜 소제호(蘇堤湖)라 했을까 자꾸 원천적인 물음이 생긴다.

옛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와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서호(西湖)가 현 동아시아대륙에 지명되어 있고 서호 서쪽에 있으면서 어중간하게끔 남북으로 이어진 2.8km의 제방을 분명히 소제(蘇堤)라 하고 있는 것과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근세기 적어도 1945년 이후의 역사 농단세력들이 이렇게 만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만화석초(滿花席草,燈心草:Rush)가 난 조선(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5"에서 주장하길 소(蘇)는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 수우족(Sioux)의 음(音)을 딴 것이라고 보이고 로키산맥(Rocky Mountains)에서 발원하여 미 대륙 중북부를 흐르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에서 놀랍게도 소성(蘇城:Sioux city)과 남소성(南蘇城)이란 지명을 찾을 수 있다 하였다.

따져보자면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수 시티(Sioux City)의 서쪽에 맥쿡호수(McCook Lake)가 있고, 남쪽에 크리스탈 호수(Crystal Lake), 크리스털 코브 공원의 호수도 보인다.

만약 도시 소주에서 호수가 있었다면 하나 둘이 아니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 이제는 노랑 개나리라고 하였던 행채(荇菜)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우리가 겪고 듣고 있는 역사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 너무 많다.

한반도 사람들이 노란 개나리라 하던 행채(荇菜)를 낯설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래 노란 꽃의 수생식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혹 흔하게 볼 수 있는 흰색 꽃의 어리연꽃이라 하면서 이를 행채라 하거나 또는 마름풀이라 하고 더욱이 순채라고 하는 것에서 잘못이라고 알기까지 너무 많은 것을 극복해야 했으며 어렵사리 그것을 알기 위해 앞으로도 무수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실이다.

아무리 귀중한 역사사실이라 할지라도 근원적으로 역사가 잘못 기록되면 후세들이 이를 알턱이 없다.

그래서 그러한 논쟁이나 시비가 그렇듯 간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서두에서도 얼핏 이야기 한 것이지만 역사를 바르게 안다는 확실한 체계적인 비판에 의한 역사 프레임이 우리에게 전혀 없었다.

존재했다는 것은 그저 읽고 외우는 것 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혼란에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과거 대전에 소제호(蘇堤湖)를 직접 보았던 사람이 없었으니 알 수 없다 하겠지만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소제호가 틀림없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물론 빛바랜 사진 속에서라도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다 하겠지만 영상이라 해봐자 상태가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다.

지금 서호에 있는 소제(蘇堤)는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항주(杭州) 자사(刺史)로 있을 때 토사를 쌓아 제방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정말 소동파가 만든 소제가 신중국에 존재한 것이 사실일까.

동아일보가 소제호 기사를 쓸 시기 1926년 적어도 기억에 남아 있는 세대를 치자면 최소 7~8살 이후부터 계산하면 지금 나이로 97~8세가 되는 신분의 노인들이다.

실제로 그런 기억을 하고 계신 분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대전에 있었다고 하는 소제호(蘇堤湖)단면 지도의 제방모습 역시 그림에 보듯이 왜 오늘날 항주(杭州) 서호(西湖) 소제(蘇堤)의 제방과 비슷하게 나타날까? 자꾸 의심이 생긴다.

오히려 서호에 있는 소제는 동쪽으로 치우쳐 제방이 되어있는 것이 매우 불안정하지만 대전의 소제호 사진의 모습은 제방 나뉨의 공간은 완전이 균등하다.

그리고 솔직히 한문 명칭의 글자도 똑 같지 않는가.

우리가 눈을 감으면 감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왜 현 대전에 소제호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이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토록 유명하고 풍광이 뛰어나다면 남아 있음직한 사진이 없다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당시 행채를 뜯는 아낙네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추운 겨울 물속에 들어가 발가락으로 뜯어 올리는 수고를 감수했겠는가.

이를 후세인 우리들이 잊어버리다니 말이 될 말인가.

일제라 하지만 일제 정체까지 모호한 것을 감안하고 풍광이 정치성을 가지는 것도 아닐터인데 왜 소제호에 관한 자료들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또한 개나리라고 하는 행채(荇菜)는 정확한 요리방법조차 남아 있지 않은 채 식재료를 구한다 하더라도 당시의 맛대로 다시 맛보기란 쉽지 않다고 하는 유명인의 푸념도 마치 사라진 역사의 운명처럼 받아들여 당연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가 가련하기 그지없다.

역사가 그대로 지속적으로 존속한 것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이런 어처구니의 공백이 존재하지 않아야 맞다.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 전개된 역사사실이 마구 꾸겨진 자락위에 우리는 힘들게 걸터 앉아 있는 것이다.

조선 순조 29년, 기축년(己丑年), 1829년 10월 3일 회상전(會祥殿) 경희궁 차비문(差備門)안의 화재로 융복전(隆福殿), 흥정당(興政堂), 정시합(正始閤), 집경당(集慶堂), 사현합(思賢閤), 월랑(月廊)등 여러 부속건물이 반 이상 소실되었다고 하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April 24, 1829, Great Fire of Bunsei, 文政の大火

하지만 우리 한반도 역사보다 더욱 찌질하고 정확할 수 없다고 하는 일본역사에 놀랍게도 에도시대 문정기(文政:1818-1829)인 1829년에 대화재라는 제목과 함께 조선에서 화재가 난 시기에 똑 같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가 있는데 이 또한 복잡한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가 추측 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의 경성과 같은 지역에 일본의 수도, 애도가 존재했다는 것으로서 일본인자치주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물론 월 까지는 맞지 않겠지만 이러한 역사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풀어보면 희한한 이야기들이 많다.

개나리라고 하는 행채(莕菜)의 꽃잎 생긴 모양을 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면 대다수가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톱니가 있다고 되어 있는 것에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마치 천 조각을 잘라 헤쳐 놓은 듯 너덜거려 보이는 모양을 말한 것인데 실제로 위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노란 꽃을 보면 그렇다.

이를 노랑어리연꽃(荇菜)이라 하고 학명을 님포이데스 펠타타“Nymphoides peltata”로 정리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확히 어리연꽃속(屬)이 아니라 조름나물속(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 식물에 대해 설명을 하여도 부족한 것은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제일 크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도 어림짐작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백과사전에 보면 노랑어리연꽃은 6월부터 늦으면 10월까지도 꽃을 피우는 식물로 번식력도 강해 우리나라가 원산지지만 냉온대와 대륙성아열대를 이야기하거나, 만주, 중국, 혼슈 이남의 일본, 아무르, 우수리, 몽골, 그리고 유럽 등의 유라시아 전역까지 포괄적으로 서식하고 있다 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정립될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알 수가 있고 지금까지 생물학계가 이런 종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평하는 것이 지극히 옳을 것이며 그러니 어쨌거나 본질을 감추려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양심을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의 역사는 한정된 역사가 아님을 알았다.

예를 들어 앞에서 열거한 것 중에 행채속(莕菜属:Nymphoides)(2)좀어리연꽃(小莕菜:Nymphoides coreana (H. Lev.) H. Hara J.1937)(흰꽃)도 일본인 하라 히로시(原廣司,Hara Hiroshi)작품이라는데 일단 놀라지만 종명(種名)이 "coreana"가 붙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한국의 특성이 강하다는 것으로 풀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역시 꽃의 색깔이 흰색이라는데 이미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개나리 행채가 아니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만큼 역사 지식이 진보한 것이다.

즉 이 작은 행채라고도 하는 (2)좀어리연꽃(小莕菜:Nymphoides coreana)은 2001년에 시작된 미국 통합 분류학 정보 시스템(Integrated Taxonomic Information System, ITIS)을 매개로한 2000여종(種)의 생명카탈로그(Catalogue of Life)에 조차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코리아나’라고 종명을 일본인이 명명 하였지만 이미 근거가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의미에 더하여 어쨌던 이 ‘코리아나’의 종명을 사용한 일본인은 한반도 이동 이전에 북아메리카대륙 어디에서 야생한 또 하나의 행채를 표시하고 싶었겠지만 현재 미국에서는 허용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미국인들이 코리아나를 북아메리카대륙에 근거한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이 조치 속에 있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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