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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글쓴이:한부울
[대한제국6편]12). 유학파와 한반도
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지배
나) 한글 보급이 주는 의문
다) 유학파들의 역사탈출
라) 이승만박사의 이상한 행적
마) 정리
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한반도 역사 지배
진보적인 사학자들은 조선의 유학생들에게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고 결론내린다.
조선말엽의 유학파들은 과연 풍전등화격인 대한제국을 지키고 보존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체제무너뜨리기에 나선 세력과 적극적으로 대적하면서 나름대로 투쟁하기 위한 유학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잘난 서세의 개혁, 계몽의 지식에 흠취되어 머리가 한껏 무거워졌던 그들이 서세의 꼭두각시가 되었으며 그나마 명줄을 연명하고 있던 대조선의 마지막 보루(堡壘)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까지 해체하고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유학이던가에 대한 판단이 글쓴이에게는 그저 모호하기만 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이 조선에서의 역할은 반동적인 것으로 개혁과 계몽에 의한 체제 무너뜨리기 서세와 함께 동참했다는 것 이상 다르게 볼 여지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유학으로 인해 접하게 된 이질적이지만 발전된 문화에 흠취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자본주의가 주는 물질문화의 유혹에 한껏 취해 사명감따위는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체제가 유지해야 하는 결속력을 와해시키고 정치력을 약화시켜 군주의 지배력을 떨어뜨리는 수단으로 그것을 개혁(改革)이라고 하면서 미화한 것이며 계몽(啓蒙)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조국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것처럼 만들고 종국에는 서세입장이 되어 멸시하는 것으로 애국심에 의한 사명감대신 체제무너뜨리기에 나섰다는 것은 어찌되었거나 돌연변이된 사상들이 그들을 지배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것을 그들은 근대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세(일제)식민지가 되어 우리역사조차 존재하지 않는 비극적인 상황을 낳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던 역사가 자본제국에게 순식간에 말살되어 우리모두가 그러한 역사가 주는 치욕과 모멸을 참을 수밖에 없는 노예로 살아가더라도 물질풍요만 만끽할 수 있으면 족하다라는 것은 한마디로 괴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선각자들과 지도자들이 애국심과 국가관이 서세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투철했다면 역사가 말살되지 않았을 것이고 기어코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더라도 그래서 나라꼴이 식민지신세가 되지 않게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안타깝지만 물질풍요는 선각자들이 다 차지하고 99% 역사하층민들은 거짓꼴을 못면했다.
무엇이 정당한 것인가?
아무리 미화시키고 정당화하겠지만 조선말엽 선각자들의 사상은 현재 열도일본인들에게 ‘국부(國父)’로 인식되기도 하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1835-1901)의 반란사상인 정한론(征韓論)과 같은 것이며 조선에서 벗어나고자 한 탈아론(脫亞論:1885)과 같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것은 바로 정조론(征朝論)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열도일본인들에게 만연했다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에 동조한 인물들이 따지고보면 조선선각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대조선 반란세력들이 정조론(征朝論)이라 불렀다가 조(朝)가 자신들의 왕을 뜻한다고 오해살 수 있다고 하여 만만한 한(韓)을 붙였다는 것인데 이 의미는 감히 자신들의 조선왕을 정벌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함축될 수 있는 이야기다.
즉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처럼 늘상 반란을 꿈꾸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서 조선선각자들이 이들과 같이 반란자가 되어야 했단 말인가?
여기서 주지해야 할 것은 일본인이라 함은 지금의 열도일본인이 절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조선의 선각자들도 이러한 일본인들 사상과 다르지 않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반도 역사에는 친일파가 수두룩 했던 것이다.
그만큼 서세가 주는 물질에 의해 국가관이나 애국심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논문 <1890년대 후반 도일 유학생들의 현실인식>에서 “박영효의 주도 아래 일본에 보내진 유학생은 3차례에 걸쳐 151명에 달했다”고 하였고 1000 여명이 지원해 시험을 거쳐 100명이 선발된 첫 관비유학생들은 1895년 4월 7일 도쿄에 도착하고 경응의숙(慶應義塾) 즉 게이오대학에 입학하여 6개월에서 1년 반에 걸쳐 보통과 교육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때 이들 유학생들은 바로 일본인들의 선각자라고 알려지는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그의 강연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그러니 충분히 그들이 돌연변이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 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유학생들이 간곳을 지금의 열도일본이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본 블로그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쓴이는 이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또한 동서양분리과정에서 생성된 가공인물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2004년 열도일본은 지난 20년간 사용하던 화폐의 인물들을 바꾸었지만 특이하게 1만엔(1萬円)권 지폐 속의 인물만은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가 바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이다.
이상한 것은 이 인물이 부각된 것은 에도막부(江戶幕府)정권때인 1853년 우라가(浦賀)항에 입항한 미국의 동양함대사령관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가 함포외교(艦砲外交)로 위협(威脅)하고 그에 따른 굴욕(屈辱)에 의한 불평등조약을 맺으며 강제개국한 것으로 알려진 시대의 사람으로 그들 역사에는 도쿠가와 막부가문의 지배를 1868년에 종식시키게 하고 메이지유신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국부로 취급받는 것이다.
하지만 내정하게 따지고 보면 이 사람은 미국이 한반도역사에 처음 등장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생성과 같고 미국상징성과 매우 흡사하게 역사기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에 의도된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미국의 초창기이미지가 경제상징성을 가지고 있듯이 이사람은 근대 일본에 복식부기개념과 보험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라고 하였고 그가 외출한 것을 보면 막부시대때 일본에는 네덜란드인들만 있었고 그는 이들에게 난학(蘭學)을 배웠다 하였으며 다시 영어를 공부하여 막부사절단의 일원으로 처음 미국에 갈 때 신분은 제독시종이었고 유럽에는 통역으로 갔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발전한 서양문물에 충격 받았다는 것이고 그가 쓴 <서양사정>은 일본이 근대국가로 가는 길잡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는 네덜란드인들이 개척이란 이름으로 터전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고 때문에 지금 뉴욕을 뉴네덜란드라 하였다.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는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1621-1790)가 북아메리카 뉴욕 주 동부를 흐르는 허드슨강(Hudson River)하구에 건설한 식민지로서 지금의 뉴욕(New York)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과 네덜란드가 섞여 있고 또한 미국과도 섞여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반도역사는 참으로 수수께끼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상한 이야기를 다 한꺼번에 수용해야 했으니 얼마나 나름대로 벅차겠는가를 알 수가 있다.
열도일본이 대조선을 장악하였다는 자체가 이상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현재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서세들입장에서보면 지금 열도일본 역사주체가 생성된 과정과 한반도역사가 구성된 것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서세가 뿌려놓은 숙명적인 엮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반도가 가짜라면 일본열도역사 가짜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역학적으로도 한반도 구성원들보다 열도구성원들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열도일본인들이 실제로 한반도를 식민지한 사실이 맞다면 당연히 현재 친일파들은 열도일본유학자들이어야 하지만 친일파들이 기록으로는 한반도에서 넘쳐나는 것 같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학을 했다는 사실들이다.
즉 한반도나 일본열도에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미국의 총체적 관리에 있었던 인물들이나 가공된 인사들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덕분에 눈도장 한번 잘찍힌 정치인 모두 대대로 정치인 생활을 보장받으며 잘먹고 잘살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 사정도 다르지 않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일본자체역사가 현재 열도일본을 근거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 블로그에서 여러각도로 밝혀 알아본 결과로서 이를 크게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학한 곳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전부 일본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한반도 역사용으로서 기실 북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이 하나 둘 밝혀지는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도 북아메리카대륙을 이력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열도정치인들도 모두 북아메리카대륙의 유학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사실이지만 일본인의 국부라고 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는 일본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로 알려져 있지만 상징성은 지극히 미국이라는데 있다.
물론 미국을 유학하였고 이 인물역시 개항과 개화를 주장하며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가치관을 확립했다고 알려진다.
제5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858-1936,총독재임:1919-1927)역시 미국을 유학한 인물이다.
물론 일본유학자들도 따지고보면 모두 북아메리카대륙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열도친일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역사에서 수없이 양산되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오히려 친미파 또는 친서파가 민족역사의 지탄을 받아야 하겠지만 엉뚱하게 동양일본이라고 하는 열도일본인들에게 모든 화살이 집중되는 참으로 코메디같은 상황이 지금까지 연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웃지 못할 상황들이 만들어져야했고 생성될 수밖에 없었을까?
솔직하게 세계삼한역사를 농단한 세력을 친일파(親日派)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는 친미파(親美派)나 친서파(親西派)가 되어야 맞다.
하지만 한반도역사로 인해 이들에게 지극히 호의적인 것이 참으로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를 장악한 세력은 누가뭐라해도 미국이다.
현재까지 동아시아대륙뿐만아니라 중앙아시아 더 나아가 오스만을 감히 해체한 세력이 집권한 터어키를 포함한 중동국가들까지 정치적으로 지도자로 행세하던 인물들 중에 생존하거나 생존하지 않거나 간에 모두 미국 또는 영국 유학파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즉 소위 친미파(親美派), 친서파(親西派)들이 세계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과연 친미파(親美派), 친서파(親西派)가 한반도역사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실제 삼한역사관점에서 좋게 볼 수 있는 것인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고종은 어리석게도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기중조정(居中調停)을 철떡같이 믿고 있었다고 하는데 만약 일본과 대립되어 있다면 미국이 부추기고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할 것이 아니라 대립상태에 중간에 들어가서 말리거나 화해를 붙여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1905년에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밀어붙였다.
이것이 현재 역사이다.
한반도역사는 미국을 좋게 볼 수 있도록 하고 대신 열도일본인들을 천하에 몹쓸종자로 만들었지만 기실 같은 것이다.
우리가 현재 역사가 생성된 것에서 그것을 주도한 세력을 밝혀보자면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정세를 장악하고 미래질서까지 좌지우지하던 세력은 결코 열도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며 왜 이러한 현상이 생성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를 의심해 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마치 하나의 체제의 대조선(大朝鮮)의 위상과 같은 것이다.
미국은 본 블로그에서 누차 설명한 것이지만 국가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은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체제의 위상은 아무나 차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아니었다.
예를 들어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대조선의 위상을 그대로 인수받았던 것은 역사적으로 영국 즉 브리티시왕국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는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로서 인도여제라고 하던 빅토리아여왕이 마치 대조선의 제왕처럼 행세한 사실도 이와 같은 것이다.
고려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처럼 서양역사에서 기술된 것은 바로 해가 지지않는 제국(An Empire Under the Sun:1516–1700)스페인왕국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최소한 19세기말엽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던 세력이 우리 역사주체들이라고 단언한다면 분명 그 자리와 위상은 허접한 나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초강대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간결한 이야기가 된다.
아시는 것처럼 현재 초강대국으로 세계경찰국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國家)는 단연 유나이트 스테이트라고 하는 미국(美國)이다.
그렇다면 대조선을 잡을 수 있었던 세력은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를 일본이라고 하여 열도일본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일 뿐이며 오느날 동서양역사를 분리시켜놓고 세계인들을 한껏 속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참으로 궁금한 이야기를 집고 넘어가도록한다.
어쨌거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19세기말엽까지 하나의 체제를 유지하였던 인물들은 대조선의 구성원이라고 할 때 이들이 한꺼번에 떼죽음이라도 당했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조선말엽에 하나의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져버린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문제도 있지만 왜 기어코 한반도 구성원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폭풍같은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좀처럼 글로벌화한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가 하나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현재 미국국가체제와 마찬가지로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를 하나로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대조선이 하나의 체제로 군림한 것이라면 비록 이름은 다를지언정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를 포괄하던 체제임을 전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체제에서 정치체제가 다문화와 다인종, 다종교에 걸맞는 글로벌한 인적구성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시대적으로 볼 때 이 정치체제가 19세기말엽 브리티시(British)내각을 포함한 의회정치체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고 하나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이들 정치주체들이 마치 연기처럼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대신 이를 감추기 위해 어설프게 한반도역사가 만들어지고 한반도 구성원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처리되었지만 이들이 전부 하나같이 가공된 인물이며 이들은 하나같이 감리교신자들로 엮어져 있으며 대다수 북아메리카대륙 유학파출신들이라는 사실임을 알고 적잖게 놀랐던 적이 있다.
물론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열도일본인적 구성원들도 한반도기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결국 이를 가능케 한 세력은 지금 세계를 지배한 세력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글쓴이는 한반도역사 주도한 인적구성원과 열도역사 주도한 인적구성원들은 절대로 실제인물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을 확실하게 진단한다.
사실이 이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가공인물들을 역사인물로 믿거나 추종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어찌 허망하다 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만약 이런 식의 역사가 통째로 농단되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본래의 진실된 역사를 밝힌다는 것은 우리자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조선말 선각자들을 한반도 역사바탕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을 지키지도 못하고 대한제국조차도 보존할 수 없었던 유학자들을 선각자라 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서세의 꼭두각시가 되어 하나같이 체제를 흔들고자 하던 불손한 인물들이 개혁을 주장하고, 스스로 서양노예가 되겠다던 계몽을 부르짖었다는 것은 다분히 역사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초창기 분명 국비장학생 또는 국비유학생신분으로 북아메리카대륙을 찾은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부르짖고 외친 개혁이나 계몽등은 서세들이 하나의 체제 근본을 흔들고 궁극적으로 붕괴시키려 하던 아주 음흉한 것이었으며 당시 세계여론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임에도 그들은 그대로 답습하고 추종했다는 것은 물질문명에 무작정 취해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들 선각자들은 하나같이 공격적인 선교가 지상목표인 미국개신교신자들에 의해 조정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이들이 하나의 체제 즉 대조선에 반기를 들게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돌이켜 보면 한반도 역사에서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 1882년 6월 9일에 발생된 것으로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고 하였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대조선이 해체되면서 구식군대가 와해(瓦解)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하나의 체제는 무너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는 사건이다.
구식군대(대조선군대)와 신식군대(서세군대)의 차별적인 조치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 위급한 상태에서 유학파들의 반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한다.
임오군란이 발생한지 2년이 지난 후인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외 개화당(開化黨)소속인원들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하여 난동을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상황적으로 체제붕괴를 노린 서양인들의 간교한 사주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서양역사학자들이 쿠데타로 평가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단하게 볼 수 없는 것은 임오군란이 발생하기 한달 전 그해 1882년 5월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반도역사에서 이를 고종이 기중조정(居中調停)조항을 매우 신뢰했다는 것이다.
수호는 상호 통상(通商) 즉 상거래를 시행하고 이를 법으로 지키겠다는 조약이지 전쟁을 하지 않거나 체제를 흔들지 않겠다는 조약이 아님을 알 수 있음에도 고종이 신뢰했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한 역사기술인 것이다.
이때부터 미국이란 존재는 대조선에게 국가가 아니라 통상에 주안점을 둔 장사조직체라는 정도로 인식할 수가 있다.
즉 일루미나티(Illuminati)에 의한 자본공여자 역할을 자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이익을 보려면 독점적 위치확보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규제가 심한 눈에 가시같은 체제를 흔들고 붕괴시켜 독점적 체제, 자본제국식민지를 꿈꿀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일루미나티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보면 미국이 상호통상을 하겠다고 하여 조선이 응대하였고 이렇게 수교한 후 오히려 군대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구식군대가 현격하게 차별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이야긴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후 김옥균일파들은 대조선을 완전하게 붕괴시키고 장악하려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세력들이 과연 애국자로서 행동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결국 그들의 기도가 실패했다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글쓴이가 보기에는 대조선은 이런식으로 서세에 의해 충분히 장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이에 역사평론가들은 같은 개화파로서 김옥균은 실패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의문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역사는 갑자기 청나라(고려)가 개입했기때문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그만큼 고려의 전통문화가 뿌리 깊어 순식간에 대조선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반대로 후쿠자와가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페리효과라고 알려진다.
즉 이미 일본은 미국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 속에서도 비록 일본이라고 하였지만 즉 미국임을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대한제국과 일본(Japan)이란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2"에서 말했듯이 일제(日帝)는 제정군주제(帝政君主制)나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일본(Japan)이라고 최종 정리되었던 적이 있다.
대한제국이 생성되기전 1894년에는 김홍집(金弘集:1842-1896)이 주도한 1차갑오개혁, 2차 갑오개혁, 3차 을미개혁으로 이어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고스란히 결국 영국 손아귀에 넘어간 꼴이 됨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영국 브리티시왕국으로 볼 것인가 또는 일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미국상업조직 일루미나티(Illuminati)으로 볼 것인가를 우리가 판단해야 한다.
본 블로그 글 "김홍집(金弘集)과 로버트 케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 http://blog.daum.net/han0114/17050576 "에서 정확하게 영국(British)과 엮인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과 같이 1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5-1886, 2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6-1892, 3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95-1902 로 재임사실이 거의 일치한다
이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은 대동양철도(Great Eastern Railway) 즉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철도의 총재로 재직하였다는 이력까지 있는 인물이며 그는 1903년 73세로 사망하지만 김홍집은 한반도인의 정서에 맞게 반역자로 몰려 몰매를 맞아 처형당했다고 기록된 것에서 다를 뿐이다.
브리티시 또는 브리튼(British)은 대조선의 역사를 통째로 넘겨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살펴보았듯이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를 정치적으로 관리한 것은 바로 브리티시가 했다.
물론 이때까지 미국은 나라,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다만 경제산업금융을 지배하는 조직체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갑신정변(甲申政變)세력에 의해 일본을 개입하게 만들고 정작 고려(타타르)를 내치는 꼴을 만들었으며 일본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서세들을 끌어들여 대조선의 체제자체를 풍지박산 만들었다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가 있다.
이들의 행위를 한반도 역사는 계몽주의, 개혁주의에 앞장서 군주에게 희생당한 인물들이라고 미화하지만 결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이같은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갑신정변의 면면을 보면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김옥균(金玉均:1851-1894), 일본인이라고 판단되는 박영효(朴泳孝:山崎永春1861-1939), 또 미국인이라고 판단되는 대구(大丘)출신 서재필(徐載弼,Philip Jaisohn:1864-1951), 미국인이라고 판단되는 대구(大丘)출신 서광범(徐光範,Kenneth Suh:1859-1897), 남만인이라 판단되는 남양(南陽)출신 홍영식(洪英植,1856-1884)등이다.
본 블로그에서 남만인은 대체로 서양인을 가르킨다는 것을 알았다.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김옥균(金玉均)를 브리티시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남양은 조선남방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중국사서에서는 이를 만기(mangi) 또는 만지라 하였으며 이들은 해상무역을 하는 사람으로 갑신정변에 속한 면면들이 모두 서양인으로 구성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순수한 한반도인이었다면 미국이름이 미국에서 필요했다고 하지만 장기체류자나 이민자들이라 할지라도 성씨 정도는 붙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인들의 정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서재필의 경우 필립제이슨(Philip Jaisohn)이라하여 이런 자그마한 정서조차도 찾을 수가 없는 미국이름이다.
오히려 동시대의 미국인이라고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영문잡지를 창간한 무림길(武林吉:Franklin Ohlinger:1845-1919), 아편설라(亞篇薛羅: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와 한국이름 홀법, 할보(訖法,轄甫: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서재필의 정서는 한국적이지 않다는 것이며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서재필의 진짜 초상을 보고 싶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이름이 이러할 진대 일본이름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는가 회의가 없지 않다.
창씨개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개명을 하라고 강요했는지에 대한 사실에서 의구심이 없지 않다.
만약 미국에서 태어난 한문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시대가 바뀌면서 영어이름이 필요하여 기어코 영어이름을 만들어야 했다면 이러한 조건충족에서 개명이 가능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세계다민족, 다문화의 집합체제 대조선에서 한국계, 일본계와 미국계가 같이 공존할 수 없었다고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한반도 역사사실처럼 조악한 역사사실에서 우리는 분명 한국인이면서 왜 미국이름을 가졌을까 또는 왜 일본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따위의 의문이 생겨나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줏대없는 민족성을 탓할 수밖에 없는 사태까지 진전된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로 인한 모든 것에서 이런 불필요한 오해까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상황적인 것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고 대조선의 이름은 왜 한문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이 팔요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에서 언급하였던 바에 따르면 고종황제가 최후까지 몸부림을 친 것은 군주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한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의 신하들은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 최후까지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전부 하나같이 군주국이 싫다고 뿔뿔이 흩어졌고 외교관이었던 이준(李儁)이 자살했다고도 하지만 실제로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자연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말 인물들을 보면 이상할 정도로 지식자들은 서세의 물든 것으로 나타나고 툭하면 계몽주의나 개혁주의를 앞세우고 또는 사회주의혁명가들임을 알 수가 있다.
모두 자연스러운 인물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맞춘 극단적인 인물 구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극히 보수적인 세력들은 비유학파들이며 못배우고 무식한 백성들이고 비교적 아둔하게 기술되고 엮어져 있다.
물론 진보적인 것이 나라를 발전시킨다는데 문제를 지적할 순 없다.
하지만 이들 선각자들은 진보적인 발전보다는 거의 대조선을 찢어 발겨놓고자 하는 서세의 음흉한 모략에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조선말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주역으로서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우리가 기록으로만 알고 있는 조선말 한반도 출신의 유학파들의 실체를 보면 한마디로 놀라운 것이다.
오늘날 평가에서 이들이 친일파, 친서파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조선역사말엽 전면에 등장하여 활동한 인물들로 충족되고 있으며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거의가 미국개신교신자라는 사실이 참으로 특이한 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미국대표종교라고 할 수 있는 감리교를 짧은 종교전파 기간이라는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선각자들 모두가 독실한 신자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회주의혁명을 하던 사람도 믿는 종교는 개신교이다.
도대체 이렇듯 경쟁적으로 선각자들이 감리교를 종교로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냉정하게 한반도 역사로 따져 무엇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미국과 가깝다는 것과 그로인해 종교확장을 생각할 수 있으나 위기에 봉착한 국가적인 당면문제에서 뚜렷하게 효율성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수가 없다는 문제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당시 조선인 특히 선각자들은 감리교와 깊은 연관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을까?
미국에 살았기 때문이다.
개신교 중 한국에 가장 먼저 들어온 종교는 미국종교로 알려진 감리교(監理敎)인 것이 사실이다.
이 감리교가 한반도에 처음 1884년 6월 27일 미국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1824-1907)에 의해 전파되었다고 하였고 바로 당시 개화파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선교가 이루어지면서 고종의 윤허까지 요청하였다고 알려진다.
김옥균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다고 하는 것은 순수한 애국심에 의한 거국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가 여기서 발생됨을 알 수가 있다.
따지고 보면 갑신정변 역시 서세가 주도한 대조선 붕괴계획의 일환이라고 보는 것이다.
글쓴이는 잠시 생각하길 열도일본이 아니라 미국이 만약 한반도역사를 만들었다면 이때 어떤 인물들을 조선말엽 개혁정치를 주도했다고 만들겠는가?
당연히 미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친미파를 포진시켰을 것이고 실제로 역사를 주도하던 세력이 일본이라면 친일파를 포진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친미파나 친일파나 다른 것 같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데 복합성이 있다.
김옥균(金玉均)·윤치호(尹致昊)·서재필(徐載弼)·김구(金九)·이승만(李承晩)·이준(李儁)·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안창호(安昌浩)·이승훈(李承薰)·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이필주(李弼柱)·최성모(崔聖模)·김진호(金鎭浩)·주시경(周時經)·최남선(崔南善)·장도빈(張道斌)·이필주(李弼柱)·최성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김창준(金昌俊)·박희도(朴熙道)·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정춘수(鄭春洙)등 조선말 역사를 이끈 명실공히 주역들이라고 하는 선각자들 모두가 감리교 신자들임을 알 수가 있다.
이완용의 아들 이승구(李升九:1880-1909)역시 그렇다.
물론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도 역시 감리교신자들이다.
정말 이들을 빼고 나면 한반도 역사에서 변변한 인물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마치 한반도에는 개신교를 종교로 하는 선각자말고는 선각자가 없다는 것 자체가 의아해 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될 수밖에 없었을까?
현재 1945년부터 세계를 미국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담보할 수 있는 이야기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감리교는 엄격하게 말하면 미국 국가적인 종교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지만 미국독립전쟁은 개신교(改新敎:Protestantism)를 믿는 집단과 브리티시(British)의 반 그리스도자들의 전쟁이었다고 할 정도이며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ism)이라는 것은 기존체제에 대한 저항주의적인 사상에 의한 종교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체제인 대조선에게 저항한 개념의식이 그들 저변에 깊숙하게 깔려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상 역사사실에서 일본인이 이렇다는 이야기다.
현재 미국의 종교근본주의가 보수주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한 윤리를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는 뜻이며 이를 그대로 이어 자본제국주의정신과 또한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프론티어정신을 강조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에 의해 순식간에 붕괴되버린 하나의 체제를 생각하면 이러한 사상에 자본공격이 더 했기 때문임을 심각하게 진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상적인 도전이 극히 없었던 하나의 체제에서 이런 저항력을 기를 수 없었다는 점이 취약점이었으며 진보된 사상과 충돌할 때 아무래도 고로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대중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들의 증식이 커지면서 종국에는 사상적으로 체제를 지키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유교사상만으로 자본을 앞세운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를 대적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풀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까지 아니 1907년까지 미국이라는 국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결코 우리역사에서 거부감이 없었던 나라이던가?
아니다.
그들의 역사 한페이지만 넘겨도 프론티어정신을 말하고 실제 인디언들을 학살한 사실들은 그들이 비록 덮어 일부만 공개된 것이라 할지라도 정의가 사라진 참혹한 역사상황임을 적나라하게 알 수가 있다.
오직 그들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현지 원주민들을 참혹하게 살상하고 집단학살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땅을 현격하게 넓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수많은 인명을 희생을 담보로 그들이 구축한 자본제국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서부개척사가 그들의 치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만약 우리가 본래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에 대한 근원적인 증오가 미국인들에게 없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증오의 대상이 미국인들이 아니라 전혀 관계가 없을 열도일본인들에게 통째로 넘어가 있다는 이상한 역사흐름에 때론 글쓴이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지금에 와서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암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다시 유학파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를 짓고 싶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한반도 조선말 선각자들에게 감리교신자들이 많았던 것일까?
감리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가 갑신정변과 같은 시기로서 1884년부터라 한 것을 정확하게 분석하면 한반도의 개신교역사와 갑신정변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갑신정변은 개신교 특히 감리교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체에 의한 쿠테타라는 사실이다.
즉 미국의 종교가 감리교라고 하면 미국계들이 종교를 앞세워 들고 일어난 사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한론이고 정조론이다.
물론 이들 세력은 자본력이 풍부하여 물질적인 것에 힘들어 하던 당시 조선인들을 충분히 회유하고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1884년부터 이미 감리교 신자들 통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세력들은 결코 한반도를 원적으로 하는 한반도인들이 아니라 당시 국가이름 조차도 분명치 않았던 미국계 세력들일 것이며 이들이 대조선의 경제혼란을 야기시키며 온통 체제를 흔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세계를 통제하던 하나의 체제의 세계삼한역사가 한반도에 꾸겨넣어지면서부터 존재도 분명치 않는 미국에 의해 지배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반도역사태동의 발가벗겨짐에 따른 본질이다.
이런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것인가?
한반도에 감리교가 들어온 시기 1884년이라 하였으니 종교역사로 볼 때 참으로 일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면에서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안에 선각자들이 모두 열성적인 감리교 신자로 돌변하고 이들이 조선말엽을 주도했다는 것은 거부하기 싶지 않는 자본의 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반도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열도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지배했다고 하는 한반도인들에게 왜 열도일본인들이 51.8%나 믿는 종교인 다신교 신토(神道Shinto)가 한반도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생소하기 조차한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글쓴이는 일본을 추종하던 친일파들의 종교가 신토라는 소리는 전혀 듣질 못했다.
더군다나 서세와 일찍 교류를 했다고 하는 일본인들에게 기독교(Christianity)신자들이 2.3% 에 불과하다는 것도 솔직히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에서도 해석이 간단치 않다.
이같은 모순점들이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역사를 통하여 친일을 현재 열도일본이라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처럼 조선말엽 선각자들에게 감리교 신자가 많았다는 것은 당시 계몽주의자, 개혁주의자들은 자본을 숭배하는 미국인들이 많았다는 것이며 이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일루미나티의 미국계가 역사전쟁에서 선전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를 한반도 역사에서는 한심하게도 한반도 구성원으로 처리된 문제가 있어 오늘날 극단적인 역사혼란을 발생시킨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글쓴이가 늘 상 가슴에서 내던질 수 없었던 수수께끼같은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틀에 맞춰진 가공된 인물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본 블로그에 의해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충분히 종합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사진에서 불명확한 인물이나 어딘가 모르게 인물상이 만들어졌다고 느껴지는 인물들이 한반도 역사 또는 열도일본역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하나하나 핀센트로 집어 밝혀내지 않으면 안된다.
19세기 초엽부터 시작된 서양인들의 코리아를 방문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한반도인들은 매우 배타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하였다.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개방이 필요하고 그들에 의한 계몽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한반도 역사 근대사에의 핵심적인 용어이다.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 한반도인들의 특성상 1884년 처음 들어온 감리교라 하였다면 어떻게 짧은 시간에 조선말 선각자들 전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감리교 신자로 만들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 뒤 따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논리상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한국인들이 그처럼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때 기본 정서상 서양종교가 한반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을 것이고 거부감이 강했을 것이 뻔한데 아무리 선교사들이 꾀어 공짜밥을 주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더라도 성인이 다 된 선각자들이 서양종교에 거부감도 가지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였다는 것은 참으로 한반도인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역사기술이라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한반도 구성원들은 바보천치로 여겼던 것이다.
다른 각도로 보면 한반도 선각자나 정치인들이 기존 대중성을 무시하고 독불장군식으로 계몽이니 개혁이니 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참으로 독특하게 한반도 정치인들만 한결같이 대중 정서 따위는 무시하면서 기어코 개혁과 개몽을 할 수 있었다고 하니 한심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대조선에서는 종교탄압이 없었는가.
오죽했으면 1866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인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는 것이겠는가.
결론적으로 조선말엽의 유학자이거나 정치인들은 분명 원적(原籍)을 한반도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서양인들의 이력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그들이 태어난 원적(原籍)을 숨기지 않는다.
같은 미국인이라 할지라도 독일계, 프랑스계, 네덜란드계, 유대인계로 나누고 있지 않는가?
태어난 곳과 사망한 곳은 그의 국적과 무관한 필수이력이다.
이승만박사가 한반도에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원적(原籍)을 부정하고 "japan"이라고 공문서에 떳떳이 기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서양인 관념으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승만이 1차세계대전 징집지원서에 "japan"이라고 원적 난에 기재한 것은 그가 "japan"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렵지 않게 북아메리카대륙 역사주체가 "japan" 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의 미국인 것이다.
그가 원적을 japan 이라고 한 것은 서양인관념적 사고에 의한 아주 자연스러운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한반도가 아니라 아메리카대륙 출신이어야 맞다.
물론 이승만 뿐만 아니라 조선말 선각자들 대다수 아메리카대륙 출신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결같이 한반도인들의 정서를 무시할 수 있는 역사기록이 가능한 것이며 미국종교 감리교를 주 종교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인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하면 절대로 안된다.
때문에 이승만의 활동근거지 또한 한반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었다는 사실이 이 유학자들의 실제적인 역사근거를 바탕으로 한 사실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조선말엽 선각자들은 한반도 역사기록에서 지극히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며 있지 않을 역사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 그들의 모든 행동들이 자연적인 흐름에 의한 진실된 역사에서 불청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계속 나) 한글 보급이 주는 의문]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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