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유학파와 한반도(2)-이승만박사의 이상한 행적

한부울 2015. 6. 2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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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글쓴이:한부울

 

[대한제국6편]12). 유학파와 한반도

 

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지배
나) 한글 보급이 주는 의문
다) 유학파들의 역사탈출
라) 이승만박사의 이상한 행적

 

[계속]

 

나) 한글 보급이 주는 의문

 

예를 들어 이런 사실도 감안해 본다.
본래 이승만은 한글을 모른다, 오직 영어만 알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아니다라고 하고 싶다.
물론 어딘지 알 수 없지만 한글을 숙지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고 성인이 되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툴어도 알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미국태생일 수도 있고 북아메리카대륙 어느지역에서 한글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있다.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 :1860-1939)가 1911년에 코리아를 방문하였을 때 한국인들의 쓰는 언어는 알파벳이고, 스물다섯 글자로 구성된 글자라 하여 글쓴이는 이를 "라틴어"라 하였으며 이 라틴어가 한국인에게 몸에 익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본 블로그 글 "흰자작나무(白樺:Betula populifolia)는 박달나무(Korean birch) http://blog.daum.net/han0114/17049402"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강 주위에 자작나무가 많이나고 함경도(咸鏡道)지방에서는 자작나무를 '보티나무'라 한 것을 영어 명 '버치(birch)'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산스크리트어 보치, 보티(भूर्ज:bhUrja)발음에 함경도지방 "보티"가 가깝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아마도 미주리강지역에서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범어(梵語)라고도 하는 산스크리트어(梵語:Sanskrit)가 라틴어(Latin), 그리스어(Greece), 페르시아의 고대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글어휘와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에서도 동시에 이 지역에서 한글사용성을 짐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19세기중엽 코리아를 방문한 기행문을 보면 당시 한글을 서양인들에게도 소개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었으며 이는 북아메리카대륙 한쪽에는 한글이 통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글에 서툰 것은 이승만박사뿐만아니라 한반도인들 전체가 그러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한글이 익숙할 수 없었다는 것도 당시 일제탄압이 전횡되었던 시절 한반도에서 피지배 민족의 차별적인 처지에 맞게 한글은 제외되었다는 핑계가 가능했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일본어만을 정식학교 과목으로 선정하였다 하면서 한반도 학생들에게 한글이 아닌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식민지상태이던가 아니던가 간에 한글이 무엇인지 한반도구성원들이 근본적으로 실제로 알 수 없었다면 일본어를 한반도 언어라고 인식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물론 전통적으로 한반도가 역사근원지 맞다면 1443년 세종대왕께서 한글창제한 후 4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과 존속된 기간도 기간이지만 아무리 식민지상태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한글을 낮설어 했을리가 만무했을 것이란 사실과 놀럽게도 정부가 나서 보급해야 할 정도로 국민들이 생소해 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적인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상하게도 일제식민지기간인 1920년부터 한글보급운동이라고 하여 실행되었다는 것도 희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왜 한글을 보급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가?

보급이라는 단어는 처음이라는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기존 한반도인들이 한글을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어쨌거나 한글이 생소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일제가 고의적으로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근원적으로 한글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설명이 더 신뢰성을 주는 이야기다.

한글은 숨어서 배우는 글로 만들어야 했다는 것이고 이것을 야학(夜學)을 매개로 국권회복을 목적에서 뜻있는 선각자들에 의해 애국계몽(愛國啓蒙), 자강운동(自强運動)이라 하여 한글을 깨우치게 함으로서 원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자는 취지가 강하게 묘사될 수 있는 것으로서 국민전체에게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될 수 있었다고 한글보급의 어려움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억압된 정치적인 면이 상황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야학의 역할은 결과적으로 미미했다는 사실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한반도에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사실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며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이 틀림없다.

 

한글보급운동의 일환인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창립된 시기 1921년 시점에 맞춰 192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야학(夜學)이 확산되었다고 하였고 백과사전에서는 이 야학의 수가 전국적으로 4만 2000여개에 달하였으며 당시 일제 식민지 상태를 감안할 때 한반도 구성원들은 이로인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평등사상을 배우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먀학의 존재때문에 인정될 수밖에 없다.

또 구체적으로 수치까지 나타나는데 백과사전을 보면 1919년 당시 조선인의 인구는 1,700만여 명이었는데, 조선인을 위한 보통학교는 484개교, 학생수는 84,000여 명에 불과했고 반면, 일본인은 33만명만이 조선반도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일본인을 위한 소학교는 393개교의 42,0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고 나타난다.

이것은 일본인 추정학령인구수를 전체인구의 15%를 계산하면 49.500명정도의 계산이 나와 거의 전체 학생이 공부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반면 1920년 한반도의 인구대비 추정학령인구가 2,757,321명임을 알 수 있고 야학수 42,000개x60명(한 학교당인원수)= 하더라도 2,520,000명이 된다.

야학 개당 소화학생수가 많아 좀 무리가 있다 하겠지만 충분하게 추정학령인구 수를 맞출 수 있었다는 사실임을 감안할 수가 있다. 

물론 통계적 추정치로 그렇다는 것이다.

백과사전에서 말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면 1920년 경 야학을 42,000 개를 세웠다는 것은 적어도 20년후에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야 한다는 이야기로 풀어 볼 수가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20년부터 시간 흐름상 예를 들어 미군군정시 시작된 1945년까지를 계산하면 25년이 된다.

1897년 러시아에서는 전체 남성의 29.3%와 여성의 13.1%만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를 많이 세워 가르치자 1920년에 이르러서는 9세에서 49세까지의 사람들 중에 54%가 글자를 알게 되었고, 남자의 70%, 여자의 40%가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고 알려진다.

물론 이것은 레닌정권의 치적인 것처럼 하나 적색정권기간이 불과 2년 남짓하고 로마노프왕가의 니콜라이2세가 재위한 기간인 1894년부터 국민교육에 힘쓴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소요기간이 23년이다.

근세사에서 러시아라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볼 때 본래 대한제국 사람들 문화상태의 질이 이처럼 높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반도에서도 1920년 이런 야학을 세워 노력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25년이 흐른 1945년부터 미군정이 실시한 문맹조사에서 그것에 대한 효과를 크게 나타나거나 개선된 상황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외로 안타깝게도 그러한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는 조각으로 남는다.

그만큼 현재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문맹율이 턱없이 높았다는 사실에서 한반도 문맹율이 높다는 것은 한글에 익숙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로 풀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20년부터 야학을 설립한 이야기는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실효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설명이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일까?

실제로 민족의식을 기록으로 말하면서도 한반도에 좁혀놓고자 함은 한계라는 것이다.

한글보급은 평등사상을 말하면서도 일제가 자국의 언어를 중시하여 한글을 내팽겨치고 일본어만 가르쳤다는 것으로 파급력이 강하다.

또 하나의 큰 의문점은 과연 야학에서 한글을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면 그곳이 정말 한반도인가 하는 점이다.

하나을 믿지 못하니 이렇듯 여러가지가 의문으로 나타나며 쉽게 믿을 수가 없다.

 

놀랍게도 본 블로그 글 "2.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4) 코리언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에서 지적했듯이 1950년 한국전쟁때 한국 군인들의 문맹율이 70% 까지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1920년에 야학 42,000 개를 세웠다면 계산상 이럴 수는 없다.

한반도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타타르(韃靼:Tatar)라고 하고 고려(高麗)가 대한제국으로 존재하면서 2차세계대전까지 완벽하게 보존한 지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비록 1907년부터 한글보급운동이 정상적으로 진행된 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타 언어보다 비교적으로 독해력이 뛰어난 한글형태를 볼 때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처럼 한글을 쓰고 읽을 수도 없는 지경까지 몰려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고 한글보급이 시작된 1920년부터 계산하면 30년이 흐른 1950년에 그처럼 문맹율을 높았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현상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한글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이 된 미국이 주도하는 신세계 질서환경에서 한반도에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고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어딘가에서 완성된 글인 한글을 1945년 군정상태에서 한반도에 도입하여 새롭게 한글보급운동, 한글알리기운동이 시작되었으며 부랴부랴 전파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아마 이러한 추측이 절대로 무리한 것이 아니며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한글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5년 남짓했던 것에 비해 한반도인 모두가 숙지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며 독해할 수 있는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고 남북한 군인들 모두가 한글 문맹율이 그렇게 높았던 것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를 그렸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한반도를 미개한 국가라고 지칭하였고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는 얄타회담에서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이 떨어져 30년간 강대국의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궤변을 늘어놓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글쓴이가 당시 기억하는 것은 어른들께서 한글은 쓰고 읽을 수는 없어도 일본어는 읽고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형태에서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같은 것은 아마도 한반도에서 이거나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는 신중국대륙과 마찬가지로 한글 음과 거의 흡사한 광동어(廣東語:Cantonese)와  화교들이 많았다는 것을 볼 때 객가어(客家語)나 민남어(閩南語:福建語)가 한반도에서 폭넓게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할 수가 있다.

 

다) 유학파들의 역사탈출

 

한반도 역사만을 알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조선말 한반도에서 유학한 유학자들은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횡단하고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무사히 아무런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당연한 듯이 이야기 하는 태평양횡단문제나 또는 대서양횡단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의 문제는 작게 볼 수 없는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만약 이러한 대양 횡단문제가 부정적으로 인식되거나 시기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볼 때 근대사의 모든 역사기술이 엉터리라는 사실이 일거에 밝혀진다는 것은 기존 역사를 불신하는 상황으로 벌어진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밝혀 비로서 언제까지라도 정립시켜야 할 문제이지만 당장에는 기존 세계역사 전반에 걸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기 틀림없다.

지금까지 본 블로그에서 밝혀본 사실에 의하면 결국 일본도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고 중국도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으며 코리아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전반적인 결론이다.

물론 일본이라는 역사주체들은 이렇게 저렇게 분리 또는 합체식으로 나타나지만 거의 아메리카대륙에 기존 거류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명쾌한 것으로는 본 블로그 글 "1차려몽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0"에서 밝혀낸 사실에서 보면 1274년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 새벽 려몽원정시에는 쿠바가 일본본거지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역사찾음을 무시할 수 없다.

 

본 블로그 글 "12). 유학파와 한반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6"에서 잠시 언급한 사실이지만 본 블로그에서 파헤쳐진 역사실체에서 보면 그렇듯 유구한역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던 한반도 조선역사 기록에서 그 많던 역사시간동안 어째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지 않았다는 것인지 늘 의문으로 남아 있던 문제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나타난다는 과학자들은 모두 실학자(實學者)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가려져 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그것을 확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적어도 서양인들이 선교사 신분으로 들어왔을 때 조선에서 학자들을 친분을 가지고 사귀려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한 기록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을 전례했다고 하지만 그들 눈에는 조선인들이 전부 미개인으로 표현될 뿐이다.

너무 편파적이 생각이라 하겠지만 세계 어느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만큼 머리가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세계지능검사통계에서 늘상 한반도인들이 1, 2위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나라 사서에 나타나는 천재학자들은 노벨상을 수상한 흔적이나 기록정도는 나타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학자들을 배출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역사만 있고 실상은 제로에 까운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역사기록만 난무한 것일 뿐 실상은 허깨비라는 이야기다.

5000년 역사가 자리하고 더군다나 명석하고 영민한 민족이었던 한반도 사람들은 왜 노벨상을 탈 수 없었던 것이며 왜 루스벨트는 한반도사람들을 미개인처럼 취급하였을까?

한반도 역사가 기록한 것을 토대로 생각 해볼 때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하겠지만 과학자, 예술가, 음악가, 연구가들은 씨가 말랐을 정도라 할 수밖에 없다.

실학자(實學者)라 함은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대두된 일련의  주기론 현실개혁적 조선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말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이 중 중상학파로서 북학파라고 하여 노론계라 분류되는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가 있어 18세기 실학사상 중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주장하던 학파라는 것이다.

이것만 하여도 한반도는 산업적문물 흔적이나 그것에 의한 발전이 넘쳐나야 맞다.

또한 중농학파라고도 하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는 농업중심의 개혁론을 주장하면서 남인들이 추종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정약용(丁若鏞:1762-1836)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 인물은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로서 그야말로 반도역사에서는 만능재주꾼으로 여기저기 안 쓰인데가 없을 정도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세계적인 인물로 등장하여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고 노벨상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조선은 거짓꼴을 못면했고 세계적인 조선인들은 씨가 말랐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한반도의 역사학계뿐만아니라 과학계에서 모든 생물학적 판단을 일본학계에 의존한다는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이해 되지 않는 사실은 한국생물분류체계를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도맡아 하였고 실존하였는지도 알 수 없는 나카이의 대를 이어 일본학자들이 줄줄이 나서 연구하고 그것을 체계화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웃을수만 없는 역사인 것이다.

왜 이런 엿같은 형상이 발생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모든 근대사자료에서 한반도 풀 한포기라도 한반도 조선인들이 나서 독자적으로 연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은 한반도에 본질의 역사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다.

식민지시대 이전에도 그렇고 식민지시대 이후에도 이러한 사정에는 변함 없었고 한반도가 아닌 다른 역사를 한반도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사실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는 것에서 안도 해야 하겠지만 이러한 역사를 정립시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묶어놓은 듯하다.

이것이 반만년 또는 일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문화단면이다.

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로 변하고 있다.

이것이 비로소 우리가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소임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 한반도 역사는 언제부터 누구로 부터 생성된 것인가?

하나의 체제가 하나의 역사를 구가하던 19세기말엽이전까지 존재하던 역사를 찾아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 역사속에서 뛰어난 정치인, 예술가, 과학자, 문학가, 역사학자, 연구가 등 모두 하나같이 세계적인 인물들이 즐비했을 것이란 사실과 그럼에도 그런 글로벌한 인물들은 한반도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나타날 수 없다는 한계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조선이 1881년 체제가 붕괴되면서 말 그대로 완전하게 해체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즉 한반도 역사가 근세기에 생성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지만 망한 집안에 무엇이 남아나겠는가?

대조선에서 수많은 시간과 세월동안 어마어마한 규모의 역사가 존재했었고 수많은 인재들이 대대손손이어 정성스럽게 가꾸어놓은 문화터전은 해체됨과 동시에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처럼 만들어져야 했고 하나의 체제에서 각 출신지역에 따라 조각조각 나누어진 수많은 국가가 생성되어 세계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결국 한반도 역사에는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정답이다.

마치 제로섬게임(zero-sum game)에서 손실쪽에 제로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한반도역사가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고 접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 역사의 초라할 수밖에 없는 모습인 것이다.

 

유구하고 깊은 역사의 장점이 무엇이던가?

그러한 오랜세월 동안 축적된 역사문화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러한 역사기록은 이미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 "에서 밝혔던 것인데 "해동역사 예문지(藝文志) 경적(經籍) 총론(總論)에 보면 남송(南宋)작가 장단의(張端義)가 쓴 귀이록(貴耳錄)에 전하는데“선화(宣和) 연간에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이서(異書)가 아주 많아서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서책이 모두 있어서, 몇 천 가(家), 몇 천 집(集)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엄청난 서책이 고려에 있었다는 사실 이외 고려가 위, 진, 당, 수, 양을 포괄한 역사주체였음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다."라 하였다.

여러분 생각도 이에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토대로 새롭게 이어가며 수많은 예비과학자들, 중견과학자들이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갔다고 보면 한반도가 기반이라고 한다면 어찌 절멸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2차세계대전을 끝으로 전부 승전국의 전리품이 되어 정작 사라지고 없다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 당연하다.

어쩌면 이것이 역사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잠시언급한 것을 다시 이야기 하자면 하나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조각 조각나고 19세기말엽 거의 백개의 국가가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하나의 체제에서 존재하던 지역별, 인종별, 종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자원들은 각각 생성된 국가로 옮겨지고 그곳 출신으로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대조선에서 활동하던 인물 중에서도 한반도에 본래 원적을 둔 사람이 있었다면 한반도로 당연히 옮겨 원적이라 하겠지만 식민지상태에서 가난만이 있는 한반도에 결코 찾아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아마도 특별한 역사 지식을 가졌거나 특별한 애국심, 또는 독특한 민족적 감정이 그들에게 없다면 새로 생성되어야 했고 본래 역사터전도 아닐뿐만아니라 식민지상태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한반도에 누가 찾아 들어오겠는가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자체가 없었던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지역을 영국으로부터 무조건 공여받고 나라를 세운 시오니즘(Zionism)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역사전쟁에서 서세들에게 패한 세계삼한역사구성원들에게는 처절한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 이야기로서 조선말 유명한 선각자, 정치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일본유학, 혹은 중국유학 혹은 미국유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은 한반도가 그들의 근원지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본래 한반도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태어난 것처럼 꾸며야 했던 것은 역사판짜기를 주도한 큰전쟁의 승전국이다.

세계선각자들이 벌떼처럼 몰려 들어야 할 곳은 큰 전쟁을 승리한 승전국이다.

1.2차 세계대전전 상황이라면 정치주체가 미국이 아니라 대조선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결코 한반도라 할 수 없는 곳에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승전국위치에서 전 세계를 통치했을 것이란 생각은 없지 않다.

하지만 그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미국이 존재한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는 이야기다.

이것을 한반도라 하면 곤란한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은 세계역사주체의 땅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대조선말기에는 물질자본이 모든 인간본능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거대한 유대자본이 생성되면서부터 상황은 과거에 묶여 있지 않고 역전이 되고 만다.

역사자존과 애국관념이 상실되고 함몰되어 그곳은 물질유혹이 자리잡아 군림하였고 물질에 대한 강한 소유욕은 자연스럽게 모든 조선 구성원들에게 전이되어 물질에 항복한 상태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도덕심만으로 모든 것은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며 물질풍요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삶은 본질이라고 할때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체제라 할지라도 거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미국으로 유학간 선각자들은 전부 조선말 유명한 정치인이다.

그러한 인물들이 한반도인이라는 보장이 없고 또한 한반도에 원적으로 두었다고 담보할 수도 없는 것도 분명하다.

그들에게 한반도에서 태어났는가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조선내에 토종 선각자들은 해방후에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반면 미국유학파들은 제 세상 만난듯이 모든 것에서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가 금방 생성된 것이 가장 주요할 것이고 그 만큼 한반도 역사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결과일 것이다.

미국유학자와 일본유학자가 실제로 유학한 곳은 다 같은 동일한 장소, 북아메리카대륙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선말기 공통적인 것은 구국세력이라고 하는 정치인들 모든 인물들의 종교가 미국을 산지로 하는 개신교(改新敎:Protestantism)였다는 사실을 앞에서 개진한 바가 있다.

마치 15세기말엽 서세가 예수회를 앞장세워 일본사람과 접촉한 포르투갈 항해사들의 포교활동과 같은 모양새이다.

포르투갈항해사들이 접촉한 일본인들은 현재 열도일본인들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서세의 기록을 보면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549년으로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1506-1552)가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 처음으로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한 시점으로 보고 있고 당시 일본인들은 막부시대의 화형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현재 프로테스탄트, 카톨릭신자들 모두 합해 열도일본에는 138만명정도라 하였으니 전체 인구대비 1%가 겨우 넘는 통계이다.

이것은 포루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던 브라질의 가톨릭교(73.6%), 개신교(15.4%)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수치라 할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에서 밝혀듯이 15세기 말엽 포르투갈선원들을 따라 예수회들이 간 곳은 남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이라는 것쯤은 이제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며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일본인들을 접촉한 지역도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브라질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이상한 이야기가 더 이상 될 수가 없는 것이다.일본열도의 기독교신자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소수라는 것은 미국역사의 기독교파생력을 감안 할 때이것은 독특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의 자생적인 파급력이 열도일본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근대사가 말하고 있는 일본이 열도존재설을 일축하고도 남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열도일본과는 다르게 이상하게도 유독 한반도에는 기독교신자들이 넘쳐난다.

미국선교인들의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한반도 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1945년 이후 현상이라고 못을 박을 수밖에 없다.

비록 개신교역사가 1884년부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의 설득력은 떨어지는 것으로 자연발생적인 원인도 존재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한반도 역사 시작 구성원들은 전통성이 있거나 말거나 친미적인 것이다.

유학파들이 전부 개신교신자라는 사실과 이치적으로 같은 원인에 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체제라도 저변에서 흔들 수 있는 종교파급력을 방치할 때 지배자들에게 심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것의 무대가 한반도라고 할 수 없지만 결과는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말엽에 선각자들에게 기독교신자가 많았다는 것은 자연파생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개신교 입문은 조선이 본래 가난한 국가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거대한 자본력침투는 모든 것을 흐트러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코리아를 찾았던 서양선교사들은 주제넘게 미개방과 미계몽된 상태에서 깨어나게 해야 한다는 자가당착에서 빠져있었다.

그들이 나서 적극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교만과 아집이 있었고 세계역사관점으로 보면 이 같은 그들의 행위가 그들 비천한 역사에 비해 크게 남용된 것임도 알 수가 있다.

다분히 경제적인 이득을 노려 독점체제를 소유해야 할 목적으로 하나의 체제를 최대한으로 흔들어야 했고 아주 기초적인 것인 대중 저변에서 폭넓은 그들의 종교전파가 필요했을 것이란 생각이 지배한 것이다.

조선에게 문호개방, 개몽이라는 전제는 그들이 들어가 독점적인 활동이 가능하겠금 하고자 한 이유였던 것은 분명하다.

 

한반도 감리교신자들은 하나같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자들을 살펴보면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시기이며 감리교가 처음 한반도에 들어왔던 시기 1884년에 유학최초라고 하는 미국 국비유학생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등장하였고, 그는 이듬해 1885년 5월 2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으며 귀화명인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 하던 서재필(徐載弼:1864-1951)이 있고, 1885년 5월 2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일본국비유학자 박영효(朴泳孝:山崎永春:1861-1939), 그리고 갑신정변의 케네스 서(Kenneth Suh)란 이름을 가진 서광범(徐光範:1859-1897), 일본인 이름을 가지고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영어로 조선인 영어 통역사가 되어 1888년 도미한 윤치호(尹致昊:伊東致昊1865-1945)가 있으며,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고 독립협회, 신민회, 흥사단 등을 조직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가 있으며, 1903년에 하와이에 이민을 가 1909년 네브래스카(Nebraska)의 커니농장(Kearney)에서 무장독립군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朴容萬1881-1928), 1904년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일진회 이승만(李承晩:1875-1965)등 그럴사 한 인물 모두가 여기에 포함되고 언론인, 군의관, 정치인, 의학자라고 하는 안창호는 감리교보다 한 해 늦은 1885년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1859-1916)에 의해 한반도 상륙한 장로교(長老敎)신자로 파악되기도 한다.

또한 1897년 경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 이승구(李升九)는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는 1896년 1월에 설치되었지만 아관파천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가가 다시 1898년 설치되었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후에도 남아 1909년에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이승구가 입학한 캘리포니아 무관학교와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즉 이승수가 무관학교로 유학 간 곳에 무관학교는 바로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라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가 다 이런 식이다.

1911년 서간도(西間島)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이 세워진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캘리포니아에서 폐지되었다면 이어 북아메리카대륙 서관도라는 곳에 새롭게 이어나갔다고 볼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은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문제로 권총자살한 박승환(朴昇煥:1869-1907), 계몽단체 서북학회창설과 북간도사관학교를 설립하려던 김좌진(金佐鎭:1889-1930),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의 신규식(申圭植:1880-1922), 남만(南滿)신팔균(申八均:1882-1924), 중국으로 망명한 이장녕(李章寧:1881-1932), 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의 이항직(李恒稙:1882-1960), 일본육군사관학교 보병과출신 지청천(池靑天:1888-1957)등이 거쳐갔다.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한반도를 태생지로 하였다고 무조건 단정지울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고 활동한 김규식(金奎植:1881-1950)은 장로회신자로서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는데 장로회신자가 사회주의 혁명세력이라는 것도 특별한 이야기다.

이렇게 볼 때 대조선이 1881년에 해체되고 난 후 바로 익년 1882년 부터 시작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라고 하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도착한 곳은 열도일본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의 미국동부일 가능성이 많고 역시 국비유학생이라고 하는 박영효 역시 일본으로 간 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동부로 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뉴네덜란드가 있었던 뉴욕은 역사적으로 일본인(和人)들이 거주한 곳임을 본 블로그로 통해 잘 알여진 사실이다.

 

유학자들이 미국에서 처음 발 내 디딘 곳이 전부 샌프란시스코이다.

마치 식민지기간동안 항일투사들이 한반도에서 신중국에 들어가면 먼저 거치는 곳인 상하이 또는 홍콩과도 같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잘못된 것으로 도대체 한반도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갔다고 하는 발상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1914년 파나마운하가 개통되지 전 상황은 그렇듯 녹녹한 상식이 될 수가 없다.

태평양횡단을 함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3.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5"의 소제 '10)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허구와 대한제국'란 주제에서 1898년에 발생된 미서전쟁은 정상적인 전쟁이라 할 수 없는 기록전쟁이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미서전쟁 스케일자체가 당시로는 전혀 얼토당토하지 않는 엉뚱한 동시전쟁을 치루었다고 하는데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스페인과 해상전쟁만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전쟁은 해상전쟁만 하는것이 아니다.

상륙전과 각개전투가 있어야 하며 이것을 위해 군사물자 공급도 원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동시에 오고가며 전쟁을 했다고 하였지만 당시 청일전쟁을 치루었다고 하던 일본함대수준과 비슷한 규모의 빈약한 미국해군력이라는 것은 곧 일본이 미국이라는 상관관계가 존재하였기 때문으로서 사실상 이를 극복하기란 힘들었을 것이란 전투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무리한 전쟁설정이라는 이야기다.

동시전쟁이 발생했다고 서세 자료들은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만 시간적으로도 불과 4개월 남짓한 전쟁시기에 서인도제도가 있는 카리브해의 쿠바에서 전쟁을 하다가 남아메리카대륙 남쪽 끝 혼곶(Cape Horn)을 장시간 휘 돌아 서태평양 필리핀이란 공간까지 30,000km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해군력을 가진 고려(COREA)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여행객을 상대로 여객선을 띄우고 운항까지 하려면 지금나 그 때나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배를 띄우기 조차 불가능하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때 대양 횡단이 왜 어려운 것인가?

예를 들어 결과적으로 볼 때 1912년 4월 14일에 발생한 타이타닉(ROYAL MAIL SHIP:Titanic)은 태평양횡단 거리도보다 반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인 대서양횡단에서 당시 상선 규모로는 세계1위를 자랑하던 JP모건이 1902년에 설립한 인터내셔널 상선회사(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의 소유선박으로 침몰하자마자 우선주가격이 51달러에서 3달러로 폭락하면서 회사전체가 배처럼 침몰할 지경에까지 간 것을 보더라도 해양 횡단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며 자본주들 입장에서는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태평양횡단을 동네집 건너들 정도의 이야기로 당연시 한다는 것은 태평양횡단이라는 진실속에 숨겨놓은 역사사실을 끝까지 속이고자 하는 것 말고는 다르게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수치적으로 보면 대서양을 횡단하는 거리가 뉴욕에서 리스본까지 직선거리 약 5,500 km 이지만 일본 요코하마에서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까지 도달할 거리는 10,000 km 가 넘는 것이니 거의 배가 된다.

때문에 한반도 유학자들이 19세기말엽 태평양을 마구 횡단한 것처럼 기록한 것은 거짓이라고 단정내릴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예를 보면 1902년 J.P 모건이 영국측의 주주대리인되어 뉴욕센트럴 철도회사의 대표이사가 되었던 이유도 유대계 영국인 너대니얼 로스차일드(Nathaniel Mayer Rothschild:1840-1915)가 대서양을 오가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양횡단할 수 있었던 규모의 선박 톤수로 만톤급 이상 크기가 건조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초부터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때부터 원거리 해양까지 운행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태평양을 횡단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 파나마운하(Panama Canal)가 개통되고 난 후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러한 태평양횡단이 필요했던 시기에 미국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파나마를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내전을 발발하게 한 것이다.

1902년 미국의회는 프랑스가 아직 완성하지 못한 파나마운하(Panama Canal)를 미국 행정부가 매입해 완공할 수 있도록 예산 4천만 달러의지출을 승인했다는 사실도 알려진 것이다.

파나마운하를 먼저 건설을 시작한 주체는 대조선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프랑스라고 현재 근대사는 옮겨 기술하고 있지만 파나마운하는 대조선에 의해 1879년 굴착되었고 안타깝게도 1881년에 조선(朝鮮)이 해체됨과 동시에 1889년에 사업자체가 붕괴되었으며 그 이후 대조선을 이은 콜롬비아를 영역으로 하던 고려가 이를 이어 1894년부터 시작하였겠지만 공황에 의해 자금압박으로 지연되다가 이를 미국이 강탈할 목적으로 스페인(고려)과 충돌한 것이며 결국 미국관리로 넘어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이해할 수 없다면 본 블로그 글을 열심히 정독할 수 있기를 권한다.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태평양을 횡단한다는 자체가 어려웠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먼 거리를 휘돌아 가는 것도 위험했겠지만 운항경비가 만만치 않아 운행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을 모든 면에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1914년 이전 유학파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들의 행동반경이라고 할 수 있다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부와 동부, 남부 카리브해까지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태평양횡단은 코메디같은 이야기다.

때문에 그들이 태어난 곳도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며 북아메리카대륙동부에서 서부 또는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풀어 볼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에서 살펴보았듯이 1848년부터 시작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항로에 따라 여객의 이동을 예상할 수가 있다.
뉴욕(New York)-찰스톤(Charleston)-사바나(Savannah)-하바나(Havana)-킹스톤(Kingston)-뉴 올리언즈(New Orleans)-차그레스 강 입구(Chagres river) 파나마를 여러수단으로 횡단하여 파나마 서쪽입구에서 연안항로 화물선을 다시 갈아타고-아카풀코(Acapulco)-산 블라스(San Blas)-마자트란(Mazatlan)-샌디에이고-산타바바라-몬터리(Monterey)-샌프란시스코-아스토리아(Astoria)까지 이동경로가 확인된다.

물론 이곳의 지명들은 모두 동아시아대륙 지명과 혼용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밝혀나가야 할 문제이다.

 

 

경험적인 이야기라 하겟지만 늘 상 혼돈시대는 실제역사를 숨기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이동이 거의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야 했고 그것을 결국 동서양을 갈라놓게 되면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모순이 생성된 것이다.

여기에 대한 책임도 따지고 보면 서세들의 교활하고 교만함에 돌릴 수밖에 없다.

반도역사에서 말하길 조선말엽 유학생들이 생성된 것은 대조선이 1881년에 해체되고 난 후 부터라고 설정한 것도 사실상 서세가 만든 역사탈출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탈출은 한반도에서 북미대륙이 아니라 북미대륙에서 한반도의 역사탈출이다.

유학생들의 역사탈출을 통계적으로 보면 1882년 조선이 해체되고 조선이란 실체가 없음에도 한반도 역사는 한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맺어졌다고 하는 이상한 구조로부터 출발한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가 바르게 인식해야 할 것은 통상조약이다.

본 블로그 글 "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지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6 "에서 이미 규정한 사실이지만 수호(修好)라는 것은 군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로 통상 즉 무역이나 상업을 위해 상호지켜야 할 조항을 규정해놓은 조약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한반도 역사는 마치 군사, 정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조약한 것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미국은 나라로서의 위치보다 경제상업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대조선 정치체제는 무너진 것이지만 경제적인 문제에서 아직 명백을 유지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때부터 1902년까지 망명 혹은 유학 간 사람들이 40명정도라고 하였고 2차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 1918년까지 8년 동안 망명으로 출국한 사람은 여행권 없이 새로넘어간다는 뜻이 강하지만 신도(新渡)학생이란 이름으로 541명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3차는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 총독부의 여행권을 가지고 도미한 학생들이라고 하는데 그 수는 298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총독부 여행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위 기록만으로도 모든 유학자들이 한반도에서 출발하여 미국에 도착하였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어느나라, 국가를 지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학파들이 3차의 걸쳐(1882, 1910, 1921)한반도를 떠난 시기를 보면 모두 한반도역사에서 큰 변고가 있었던 시기임을 알 수 있으며 마지막 1921년은 대조선 군주제를 복구하려는 세력 로마노프왕조,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로이센,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던 투르크 오스만제국마저 서세에게 손을 들고 역사장에서 사라지고 마는 시점이다.

그런만큼 구세력들이 위기에 있었는 사실이다.

갑신정변이라고 하였지만 대조선이 해체된 1881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얼굴바꾸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한반도에 무슨 놈의 지주들이 그렇게 많아 그토록 수많은 유학자들을 양산할 수가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사실상 의혹이 없지 않다.

가난한 나라가 어마어마한 경비를 지불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한다?

지금이야 배를 수단으로 하는 운행이 일상적인 것이어서 배 삯은 저렴하지만 당시 배를 이용하는 것은 높은 경비를 들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움직이는데 몸만 갈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생각처럼 일반대중들이 여행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국가가 무슨 돈이 있어 유학을 쉽사리 보낼 수 있었겠는가.

국비로 유학가서 친일하고 나라의 해되는 소리, 엉뚱한 소리나 하는 인물을 만드는 것이라면 투자할 가치조차 없다.

그렇다고 밀항이라고 한들 그렇게 수월했을리가 없다.

유학생들이 당시 한반도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가상공간으로 한 역사 탈출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할 때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 "에서 말했듯이 1914년 8월 15일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전까지 절대로 태평양을 횡단할 수 없었다는 것이 결론적인 이야기다.

아래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주관한 운항스케줄표에 1919-1921년까지 일정이 인쇄되어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횡단이 없었다는 명백한 자료인 것으로 적어도 1919년부터 횡단이 가능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라) 이승만박사의 이상한 행적

 

이승만 박사는 1933년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하여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에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비엔나(Vienna) 경유 모스크바(Moscow)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 즉시 쫓겨났다고 하고 있다.

즉시 쫓겨 났으니 그의 정확한 행적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행적은 솔직히 그가 모스크바에 간 사실이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여러차례 본 블로그 글에서 캘리포니아주에 옛 베를린(Berlin)지명을 Berlin, California, the former name of Genevra. 즉 로만슈어(語:Rumantsch) "제네브라"라고 했다는 사실과 이것이 바로 제네바(Geneva)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Vienna)역시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즉 현재 유럽대륙의 지명이 옮겨지지 전에 있었던 위치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보면 유럽대륙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서 이승만박사가 출발한 것이 되고 러시아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지금까지 본 블로그에서 밝혀진 사실이 그렇고 또한 글쓴이 생각에도 이러한 사실을 뒤받침하는 자료 찾기에 바쁠 뿐 기존 판단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2차세계대전은 소위 유럽과 미국을 가르고 아시아를 가르며 질서체계를 완전하게 정리한 사건으로 충분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계역사판짜기의 최종 리허설 같은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승만 박사의 행적 로정을 따져볼 것 같으면 1933년 8월 10일부터 8월 16일까지 프랑스 니스(Nice)를 출발하여 6일만에 미국 뉴욕 주(New York)에 도착했고, 그해 10월에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되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렉스(SS Rex)]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서 절대적으로 의심스럽게 하는것은 그가 처음 출발한 프랑스 니스가 유럽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1차려몽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0"에서 이탈리아란 국가 정체성이 놀랍게도 쿠바에 있었고 이곳을 서세들은 당시 시칠리아(Sicilia)라 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때문에 프랑스 니스라고 하여 기어코 유럽대륙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거리적으로 따져보아도 현재 지형구도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프랑스 니스에서 뉴욕까지 구글어스로 직선거리를 재어보면 약 7500km 로 나타난다.

6일간 항해한 것이니 144시간이다.

그것을 ≒7500km(7572 km) ÷ 144(6일x24시간) = 시간당 52km 로 계산된다.

프랑스에서 출항한 51,000톤급 이태리라인(Italian Line)소속의‘렉스(SS Rex)’호는 기본속력 28.92 knots 로서 이것을 환산하면 53.56 km/h 속도가 되는데 이 배가 낼 수 있는 최고속력으로 거의 쉬지 않고 6일간 지속적으로 항해한 후 뉴욕에 도착했다는 계산이 된다.

생각 해보라.

7500km의 장거리를 항해하는데 한번도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할 수가 없다.

또한 함선의 최상의 상태에서 운행한다고 하지만 고장이나 기후변화에 따른 운행차질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환경적인 유동성이 존재하는 해상운항에 이렇듯 한치의 오차도 없는 계산에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님도 알 수가 있다.

시간당 52km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떤 악조건도 제로로 만들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좋은 선박이라 할지라도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뉴욕에 당도한 이승만박사가 이곳에서 기록하길 원적을 KOREA 라고 적어 1917년때 원적을 JAPAN 이라 기재한 사실과 많은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무엇이 변했을까?

1933년이라는 시점은 대공황(大恐慌:Great Depression)시점으로서 처음 19291024,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이 있었고 이것을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고 하며 이어 192910, 미국뉴욕 주식시장 붕괴되며 전 세계 상품가는 유럽산과 미국산 제품을 대상으로 한 구매력이 감소하게 된다. 

19301211일 뉴욕의 유력한 은행이며 미국의 돈 줄이라고 여겨지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Bank of United States)이 파산해 50만 명이 예금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1931년 한해 동안 2,30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는 것은 거의 미국금융시장을 붕괴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은 잠시라고 할지라도 미국의 붕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 매주 평균 64000명의 실업자가 쏟아져 1933년에는 실업자 총수가 1,6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산업기반이 붕괴된 것이나 다름이 없.

기록에 나타나는 미국은 경제라 할 수밖에 없다.

경제가 이런 지경이라면 미국이라는 주체가 온전할 턱이 없다.

이런 사태를 단순하게 볼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이때 코리아가 등장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처음 출발한 프랑스 리스는 분명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

다시 돌아가 이승만 박사가 그해 10월에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했다는 것도 뉴욕과 지극히 가까운 곳이라고 해야 맞다.

본 블로그 글 "단향산(檀香山)은 호놀룰루(Honolulu)가 아니라 버뮤다(Bermuda)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7"에서 말하길 한어자료에 호놀룰루의 뜻은 火奴魯魯意指 「屏蔽之灣」 或「屏蔽之地」즉 병폐(摒蔽)는 병풍처럼 가리다, 둘러막다, 방비하다의 만(灣) 또는 땅(地)이라 한 사실을 알 수 있어 영어표현 갈고리(hook, gaff, 撓鉤)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섬 전제 지형모양에서 지금의 하와이가 아니라 버뮤다가 틀림없는 것으로 결론내려진 것이다.

또한 승전원일기 고종26년 기축(1889,광서15) 7월 24일 기사를 보면 고종과 박정양의 문답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이미 조선관리들이 자주 찾았던 곳임을 알 수 있는데 당시 미국주재 전권대신이었던 박정양(朴定陽:1841-1904)이 미국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청나라의 방해로 사직하고 1889년 귀국하여 알현(謁見)하는 장면에서 고종이 묻기를 연로(沿路)에 단향산(檀香山)이 있었냐고 하니 박정양은 이를 태평양'하와이의 딸린 섬'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 하였지만 이때 태평양이라고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태평양의 '하와이'가 아니라 대서양의 '버뮤다(Bermuda)'란 사실을 이글에서 명확하게 밝혔던 바가 있다.

즉 병폐란 뜻의 갈구리 모습의 버뮤다에 호놀룰루(Honolulu)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위 버뮤다의 지도 모양을 보라.

갈고리 모양이기도 하지만 동양적 시각에서는 병폐(摒蔽) 즉 병풍이 쳐져 있는 것 같지 않는가.

이승만이 호놀룰루라고 하였다면 그곳은 버뮤다가 확실하고 그곳으로 돌아오다라는 것은 즉 회귀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관리들이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던 곳으로 이승만이 활동한 곳은 하와이가 아니라 버뮤다임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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