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식물

이오지마(いおうじま)가 1816년의 유황섬(硫黄島:Sulphur island)인가?

한부울 2013. 7.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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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いおうじま)는 본래 유황섬(硫黄島:Sulphur island)이 아니다.

 

글쓴이:한부울

 

이오지마(いおうじま)는 본래 1816년 바실 홀이 보았다던 그 유황섬(硫黄島:Sulphur island)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동아시아역사가 허구란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오지마가 본래의 유황섬이 아니라는 것인가?

이미 본 블로그 글에서 유황섬은 카리브해제도에 있는 세인트빈센트(Saint Vincent)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화산역사뿐만 아니라 지질학적으로도 분석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주된 주제는 왜 사실이 아닌 역사가 현재 사실인 것처럼 존재하게 하는가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남미원산 코카나무(Erythroxylum areolatum) 인위적인 이식http://blog.daum.net/han0114/17050652 

硫磺島的產業主要是開採硫磺、種植甘蔗、古柯葉和漁業等。

古柯原生于南美洲的西北部秘鲁一带,叶中含有古柯碱

 

위 한어자료의 내용은 유황섬(硫黄島:Sulphur island)의 주요산업(產業主要)으로는 유황채취이고 재배하거나 심는 식물은 감저(甘蔗)와 고가엽(古柯葉)이라 한 사실이다.

본 블로그의 글에서 1816년 바실 홀이 보았던 유황섬은 카리브해제도에 있는 세인트빈센트(Saint Vincent)섬일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위 한어자료 내용에서 볼 때 분명 이오지마에서 사탕수수와 코카나무가 재배되거나 생산되었다고 하는 내용을 먼저 관찰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세인트빈센트와 다르게 이 이오지마는 이러한 사실을 충분하게 충족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화산섬이라면 유황채취는 기본이라고 보고 대신 감저(甘蔗)라고 하는 사탕수수와 고가엽(古柯葉)이라고 하는 코카나무 잎은 화산섬이라고 하여 아무데서나 나는 식물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 원산지를 밝혀 알아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본 블로그의 글 '남미원산 코카나무(Erythroxylum areolatum) 인위적인 이식' 이란 글을 통하여  면밀하게 근원지까지 자세하게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것에 의해 의문들이 해소되었다.

예상대로 사탕수수는 물론이고 코카나무가 전부 남아에키라대륙을 기준으로 하거나 중앙아메리카, 또는 카리브해 제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어 이오지마는 그 범주에 들엉갈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전혀 원산지와 연관이 없는 지역인 일본 열도 동남쪽에 위치한 이오지마에 코카나무와 사탕수수가 재배되거나 생산되었다고 하여 기어코 유황섬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

이렇게 되 물어 본다.

현재 열도에 일본이란 실제 역사적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열도 남쪽에 있는 오키나와 제도를 유구국(琉球國)이라고 한 사실까지 깔끔하게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열도 동남쪽에 위치한 이오지마가 1816년 영국의 바실 홀이 목격한 그 유황섬이라는 주장도 거의 99%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바로 모순 투성의 근대사의 실제 단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수차례 언급한 것처럼 현재 이오지마라고 알려진 섬을 유황도(硫黄島)라고 하고 현재 필리핀판과 태평양판이 맞대어 있는 지점으로 가잔열도(火山列島)에 속하는 화산섬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유황도(硫黄島) 즉 일본말로 '이오지마'라고 한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문제는 1816년 바실 홀이 목격한 그 유황섬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황은 융해하면 피적색의 액체가 되고 태우면 푸른 불길이 오른다]

 

이렇게 생각해본다.

화산섬치고 유황의 축적물로 덮여 있지 않는 섬이 있을까?
화산이 있는 곳에 유황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용암이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산에서 폭발할 때 누런먼지, 누런돌, 누런 황색액체등이 튀어나와 주위를 뒤 덮는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러니 화산 섬에는 이러한 유황 축적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주 캐스케이트산맥(Cascade Range)에 있는 활화산 종상화산(鐘狀火山) 래슨피크 산(Lassen Peak)도 대단하지만 그 산의 기생화산(寄生火山)인 범패스지옥(Bumpass Hell)이란 명칭의 산 역시 지금도 고온 지열지역으로, 유황호, 진흙화산, 간헐천이 있고 이곳은 아주 화산활동이 활발하며, 달걀 썩는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 주위에 유황축적물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본다면 유황채취로 유명한 인도네시아의 자와섬(Jawa)에 있는 활화산 카와이젠(Kawah Ijen)도 빼놓을 수 없으며 뉴질랜드의 마오리어로 '극적인 화산'을 뜻한 와카아리(Whakaari)명칭의 화이트섬(White Island)도 제외 되어서는 안될 유황섬인 것이다.

화산 군도를 이루고 있는 카리브해 섬들은 어떠한가?

그러나 이것들 모두를 유황섬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이오지마만을 유황섬이라고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여기서의 주제를 정확하게 정한다면 바로 1816년 한반도서해안에 찾아 든 바실 홀이 본 유황섬을 밝히자는 것이다.

 

진짜 유황섬을 밝히려면 이미 본 블로그에서 한 것처럼 지질학적 자료에 의존하거나 화산역사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볼 수밖에 없는데 그 범위를 좁혀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세계지진판(earthquake plate)에 의한 지진대(地震帶:seismic belt) 또는 화산대(火山帶:volcanic zone)가 띠를 이루고 있는 위치에서 이 유황섬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2010년 6월16 부터 6월22일까지 미국지질조사국(USGS) Weekly volcanic activity report 가 관찰한 보고서에 두 곳이 나타났고 하나는 아시아 이오지마의 해발 169m 납발산(摺鉢山)이며 하나는 카리브해 몬트세랫(Montserrat)섬의 915m 수프리에르힐즈 산(Soufriere Hills)을 표시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까지 활동가능한 활화산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할 때 화산역사를 따지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화산역사에서 제일 먼저 파악되는 것은 1816년을 깃점으로 역산하여 찾는다면 단연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의 세인트빈센트(Saint Vincent)섬 북부에 최고봉 해발 1234m 수프리에르(Soufriere)산임을 알 수 있는데 바로 1812년에 화산활동 즉 펠레식분출(Pelean eruption)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프랑스어로 이 산을 설푸르에(Sulfurer)로 유황을 뿌리다(sulphur outlet)란 뜻, 즉 유황산(硫黃山)이라고 했다는 사실은 거의 정답을 말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사실의 중요성과 무작정 퍼나르는 웹사냥꾼을 무시할 수 없어  아직 게시 못하고 있는 글 중 제목 (3)바실 홀(Basil Hall)의 유황섬(硫黄島:Sulphur island)이란 글에서 상세하게 모두 밝힌 내용들이다.

 

전쟁으로 점령한 땅을 다시 반환한 미국과 기억지우기에 열중한 일본

 

그렇다면 누가 현재 이오지마를 유황섬이라고 했는가?

이오지마 명칭의 역사를 알아보자.

바로 미국이 명명했다지만 미국은 과거 영국이 만든 해도(海圖:Sea chart)를 근거한 것이라고 하고 있기때문에 본래 유황섬이란 명칭은 영국이 명명한 것이고 그것은 바로 1816년 영국함장 바질 홀(Basil Hall:1788 -1844)이 코리아 서해안을 탐측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해도인 것이다.

위키자료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1941-1945)말기인 1945년 2월16일부터 3월26일까지 약 40일간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의 이오지마(硫黄島)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이오지마전투(Battle of Iwo Jima)라고 하고 이 전쟁에서 미국병사는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하여 약 26,000명 정도가 희생되었고 일본은 전사자만 21,000정도로 완전히 전멸한 것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

어쨌던 전쟁 결과는 미국이 승리를 했다.

그리고 이 섬을 미국이 유황섬(硫黄島:Sulphur island)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이오지마에대한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상황이 발견되는데 그렇게 힘들게 이오지마를 빼앗은 미국은 끝까지 거머쥐고 있어야 맞는데 패전국인 일본에게 1968년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대로 넘겨주었다.

적어도 26,000명이란 인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점령한 영토라면 분명하게 그에 대한 댓가가 있어야 하겠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그냥 우방이라는 명목하나로 넘겨주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냄새를 풍기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미국의회에서는 심각하게 고민한 것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같은 의혹스러운 조건은 또 다시 반복되는데 1972년에 있었던 오키나와섬(沖縄島:Okinawa Island)반환도 마찬가지다.

유구국(琉球國)이라고 하는 오키나와 섬도 개운찮은 역사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키나와 섬도 미국과 일본이 충돌한 역사가 있는 곳인데 일제가 패망하기 넉달전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83일에 걸쳐 치른 전투에서 미국군 희생은 전사 47,000명에 이르고 일본군은 전사 10만명, 주민사상자 12만명으로 당시 주민전체가 옥쇄(玉碎)란 명목으로 개 죽음을 강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이곳 주민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어쩔 수 없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던 곳이라고도 한다.

한마디로 당시 근세기에 일어난 역사사실을 하나하나 들춰내면 시궁창에 버려야 할 역사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명희생이 존재하였던 두 섬을 미국은 일본에게 자비를 배풀듯 그냥 넘겨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영토반환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지금 일본과 대립되고 있는 독도도 그렇지만 대마도 역시 영토반환문제가 있어 심각한 수준에 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머지 않는 장래에 독도와 대마도로 인한 군사적 충돌은 언제든지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생각해보라.

영토문제는 거주 주민들의 귀속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미국이 점령한 섬을 아무런 댓가도 없이 순순히 그것도 패전국에게 내 주었다는 것은 보통 일반사람들간에 하찮은 선물도 그에 따른 명목이 있어야 하거늘 이런식의 반환방식은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는 사실거래가 있었다는 의혹을 낳게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이고 동시에 주민 몰살이란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의 기억지우기가 필요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근대사가 이러쿵, 저러쿵 하였지만 실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많다.

그렇다면 미국과 일본에 의한 것으로서 당시 우리 한반도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민감한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자.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Katsura-Taft Agreement)의 주요골자로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지배를 확인한다. 한반도를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란 문장에서 마치 영토가 자기네들 것처럼 쌍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서로가 마치 이것은 주고 저것을 얻는다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1905년이라면 반도역사를 따른다 해도 미국의 보호국이란 사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제통감이 부임한 사실말고는 특별할 것이 없다.

어찌생각해 보면 미국이 동아시아전체를 일본에게 능력것 지배할 수 있도록 해놓고 다시 필리핀을 뺏는 것처럼 되니 그 대신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으로 궤를 맞춘다는 의미겠지만 일본이 왜 필리핀과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는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 대목이다.

일본이 필리핀을 선점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근대사에 맞춰 기어코 관계설정을 한다면 1521년 처음 도착한 해적출신이며 포루투갈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와 후에 스페인이 정복한 역사말고는 없다.

 

근세기역사가 어떤 사건에 실체가 없더라도 역사적으로 주고 받고 한 사실 문서만 남겨놓으면 오케이가 된 시절의 이야기니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럽게까지 한다.

이 문제에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1898년 4월 25일에서 8월 12일까지 있었던 전략적 지리적인 모순이 존재하는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에 대한 역사후처리 문제를 생각할 수가 있다.

미서전쟁은 스페인과 미국이 현 서태평양에 있는 필리핀과 카리브해의 푸에르토리코 전혀 위치가 다른 두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전쟁을 수행하였다고 하는 소설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충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지리적 위치상으로 보았을 때 서태평양과 카리브해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 수행할 수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점과 당시 항해, 운송수단이었던 배가 고작 진보된 쾌속 범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황자체가 전혀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송수단이었던 범선의 한계는 1차세계대전 전까지 열악한 형편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생각 해 보면 알 수 있는데 1882년 경 미국뉴욕에서 중국 홍콩까지 거의 7개월이 소요된 시대였다.
1914년에 비로소 파나마운하(Panama Canal)가 완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얼마나 무모한 발상인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동시다발 전은 현대전에서도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전쟁이다.

단언하건데 하나의 전쟁을 두개의 전쟁으로 만든 것으로서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지명 옮기기 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인위적인 것에서의 혼란이고 이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벌어진 얼토당토하지 않는 넌센스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무슨조약 무슨조약 문서남겨 놓으면 오케이 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과거 필리핀이 현 푸에르토리코에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하며 이같은 의혹을 피하기 위하여 미국과 일제가 문서를 만들기 위해 벌렸던 우스광 스러운 것으로서 동양, 즉 아시아지역을 배경으로 한 푸에르토리코를 대칭할 수 있는 어떤 섬을 고르던 중 필리핀이 대상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리핀이 위치한 곳은 신중국을 1881년부터 생성케 한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고 지리적으로 역사생성이 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에 1898년이라면 동아시아대륙을 기준으로 한 역사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he Katsura-Taft Agreement)이 성립될 수 있는 조건에 미서전쟁에 대한 마무리에 의한 역사정리가 필요했던 것 같고 동시에 푸에르토리코와 원 거주지 문제가 볻 더 밀접하게 연결되거나 관계 했을 가능성까지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2009,03.09)-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합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위 사진 자료는 현대조선, 한반도 조선이 망한 년도글 1910년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1881년이라는 사실을 밝힌 자료이다.

1882년에 뉴욕에서 출판되었던 미국인 윌리엄 엘리오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저술(Corea : the Hermit Nation, New York, 1882)에서 캡쳐한 자료인데 2009년 필자가 모던조선 즉 현대조선 최종 년도를 1881년이라고 표기한 사실을 발견하고 한동안 충격이 대단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도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인이 그의 저술에서 현대조선을 1910년에 망한 것이 아니라 1881년까지 년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참고로 하여 2009년부터 본 블로그에서 해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일천한 역사를 가진 미국이 어떻게 부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의 답이 풀리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됨과 동시에 그것을 발판으로 한 미국이 강자로 등장하였고 종전까지 태양이 지지않는 나라라고하는 영국을 미주대륙에서 몰아내면서 실력을 강화시켜 20세기초에는 신생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나 현재 들어나고 있는 미국역사에서 갑자기 이렇게 등장한 배경이나 절차, 과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묻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삼한조선을 한반도에 안착시키는 문제

인도를 동서로 분리시키는 문제

역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시키는 문제는 당시 서세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근대사의 혼란은 여기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지명혼란도 일단 서인도제도와 동인도제도가 분리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이후 동서가 분명하게 나뉘어지면서 지명이 양분되고 역사에 등장하는 국가명까지 하나가 둘씩 나뉘어지는 형태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물론 비약이 클 수 있겠지만 미국은 대조선이란 거대한 바탕에서 생성된 집단이라고 할 수가 있으며  역사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곳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따라 대조선과 영국, 조선과 일본, 미국과 영국이 상대적개념으로 혼재되어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1776년 독립한 미국이 1872년 명치정권 신생국인 일본 눈치까지 보아야 했던 것은 진정 아닐터인데 왜 이처럼 미국이 근세기에 한반도와 필리핀을 놓고 일본과 상대하는 것도 우습지만 빼앗은 영토를 아무런 이득이 없는 상태에서 바보같이 반환하는 짓을 감행했을까 의문을 가져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처럼 근대사의 난맥상은 도처에 깔려 있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유황섬, 오키나와, 필리핀은 다 공통적으로 미국이 일본에게 무엇인가 꿀리는 것이 있어 돌려줘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들만이 아는 역사사실이 분명하게 있었다고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는 당연히 일본이 열도 정해진 것이라면 열도 옆 가까이에 있는 섬들은 일본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도리 없다고 판단된다.

그것을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 근원이 열도에 있지 않고 역시 나그네란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이 승전국이니 잠시 일본 섬들을 역사적으로 빌려 쓴 것 뿐이라는 사실도 감지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공백들은 삼한역사가 모두 포괄하였다는 사실 말고는 그들의 이상한 행태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가 없게 한다.

그래서 빼앗은 것도 빼앗긴것도 없는, 주고 말면 그 뿐인 것이 바로 필리핀, 오키나와, 이오지마란 실체이다.

 

역사이동과 지명이동

 

이러한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그들이 스스로 입을 열지 않으면 알길 힘든 이야기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라면 1816년 바실 홀이 목격한 본래의 유황섬은 이오지마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함을 물론이다.

이오지마는 빌려놓은 지명일 뿐이다.

원래 화산이 많았던 역사기록을 볼 때 일본이 근거하고 존재한 곳 역시 아메리카대륙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대륙 화산대지점을 생각할 수 있고 그곳에서 1872년경이나 아니면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서세와 암약하에 열도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생각 할 수 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일본 정치계 실력자들이 대거 옮겨 그들만의 독특한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다.

렇게 안착하면서 유구라고 하는 오키나와가 필요했고 또한 영국함장인 바실 홀이 1861년 목격했다는 유황섬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힘들게 설파하는 것을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이런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렇다면 본거지에서 열도로 옮겨간 일본은 서세로부터 이동에 대한 댓가를 얻었을 것인데 바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대륙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일본은 이러한 권한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서세의 결정적인 약점까지 얻었다고 볼 수가 있다.

일본은 애초 없었던 역사를 그냥 얻어챙기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이득까지 챙기는 꼴이니 꿩먹고 알먹고가 따로 없다.

때문에 근세기 역사에서 가장 해택을 얻는 것은 바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이고 국명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이 관계될 것 같은 필리핀은 푸에르토리코의 옛 이름이라고 할 수 있고 일본은 푸에르토리코와 역사적으로 관계가 있을 법한 예감도 없지 않다.

결국 유황섬은 일본 열도 아래에 있는 이오지마가 아니라 아메리카대륙 더 세부적으로 들어간다면 카리브해 어디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른 이설이 있을 수가 도저히 없다.

이러한 모든 역사사실에서 일본은 1872년 이후부터 신생국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상당한 위력을 가진나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동아시아대륙의 실력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됨은 분명 서세가 원하던 세계사를 통째로 가질 수 있는 조건에서 출발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미국 또는 영국이 바라는데로 세계역사에서 우월권을 확실하게 득했지만 반면 삼한고려영토 아시아 대륙은 고스란히 신중국이란 신생군벌세력과 일본이란 신생군벌세력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아메리카대륙 전체를 평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신중국과 일본이 빠져 나가 주길 바랬을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기존 역사에서 섞이기 않고 깨끗한 판을 원했다는 것을 읽을 수가 있다.

솔직히 동아시아대륙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1866년에 있었던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은 실제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1881년 시행된 중국인 추방령으로 어쩔 수 없이 추방된 북아메리카대륙 아시아인들이 결집하여 신중국을 만들기에 들어간 것은 처음부터 서세에 의한 것으로 의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것은 어쨌던 신중국이 동아시아대륙에서 완성되기까지 노심초사 한 것이 사실이고 이를 돕기 위해 미국유학파, 영국유학파를 앞세워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행사하는 차원에서 지원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그 때부터 동아시아대륙의 역사가 본래의 역사와 다르게 생성된 것이고 일본역사가 영국이란 세력을 대신하여 새로만들어졌을 확률이 높은 것이며 세계삼한역사를 일제가 관리하에 친일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한반도에 안착하게 만드는 것으로 일본역사가 완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되돌아 볼 때 일만년의 역사를 가진 삼한이 그들이 다 차지하고 남은 지꺼기나 받아먹는 신세로 전락한 사실에서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할 것이다.

 

위의 사실들을 바탕으로 지금의 이오지마를 보아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미국이 지금처럼 일본에게 서태평양 도서들을 죄다 양보하거나 빼앗긴다면 언제라도 미국이 와해되거나 힘을 잃어 사라진다면 보나마나 태평양전체는 일본차지가 될 것이 뻔하다.

지금도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인공섬을 만들어 푯말을 꽂는 그들이다.

조악한 역사를 가진 그들은 이미 벌써 100년을 호의 호식하였다.

이제 또한 100년은 그들의 세상이 될 수 있고 아마도 미국이 사라지고 나길 기다리며 행복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100년을 지배받았고 앞으로 100년도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쉽게 장담 할 수 없게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본 결과 이오지마는 분명 1816년 바실 홀이 본 유황섬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더라도 이오지마는 영화로 등장하여 실제 역사로서 마침표까지 찍어버린 상태다.

시각심리를 이용한 것으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1930-)가 감독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Iwo Jima, 2006)로 인해 더 이상 유황섬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위키자료에 보면 이 섬은 현재 도쿄남쪽의 1,080km, 괌 북쪽 1,130km에 위치하고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硫黄)의 채굴이나 사탕수수(甘蔗:sugar cane)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진짜 그곳에서 유황을 채취하였거나 사탕수수를 재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일치하지 않는 지형 이오지마

 

[자료3: 자료찾기7의 구글 위성으로 살펴본 현재 이오지마]

 

[자료4: 1967년 항공촬영 이오지마와 자료찾기6 현재 이오지마의 169m 납발산(摺鉢山)]

 

 

위 그림들은 모두 현재 일본 열도 동남쪽에 위치한 그리고 유황섬이라고 하는 이오지마의 섬 형체가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 구글에서 그림을 캡쳐하고 구글자료에서 찾아 게시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언급한 1816년에 한국서해안을 방문했다고 하는 영국리라호 함장 바실 홀(Basil Hall:1788 -1844)이 출간한 책에 등장하는 그림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료5]자료찾기 4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drawings by William Havell[1782-1857], London: John Murray, 1818.

 

1816년 바실 홀의 기행문에 실린 위 [자료찾기4]그림의 하단을 보면 "Sulphur island" 즉 유황섬이라고 분명이 적혀있다.

그런데 현재 일본 열도 동남쪽에 있는 이오지마와 비교하면 전혀 맞지 않는다.

비슷하다고 생각되는가?

비슷하지도 않고 전혀 엉뚱한 그림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처럼 영국 함장 바실 홀(Basil Hall:1788 -1844)이 유황도(Sulphur island)를 보고 그렸다는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구글위성이 주는 이오지마의 지형 그림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오지마는 구글 켑쳐 그림에서도 알 수 있지만 섬 전체가 거의 평면이고 산(山)으로 친다면 섬(島, Jima)가장자리 끝 야간 돌출되었다고 싶은 곳에 활화산 스리바치산, 불가(佛家)의 중(스님)이 되는 일을 깨뜨리다, 꺽다란 뜻이 들어 있는 납발산(摺鉢山)이라하는 해발 169m의 아주 낮은 산으로서 그 분화구 속에는 유황이 많다는 정도일뿐이다.

어찌하여 이 섬을 아오지마라고 했을까?

역사성을 보려면 가장 유심하게 관찰해야 할 것은 바로 주민들의 기억을 무시할 수가 없다.

때문에 기억지우기까지 단행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거주한 주민들이 분명코 섬(島, Jima)임에도 한사코 섬(島, Jima)이라고 하지 않겠다 하는 것은 거주한 주민들이 본래 섬 출신이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이 생긴다.

토(to)는 랜드(land), 토(土)로도 불릴 수도 있는데 이 토(to)를 고집한다는 사실은 원래 주민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이동시킨 주민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주민들의 요구로 더 이상 이오지마라 하지 않고 2007년 이후 이오토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결코 주민들 기억에는 이오지마(いおうじま)가 아니라 이오토(いおうとう)란 기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とう(to)를 접미사로 보았을 때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하나는 설탕(糖:sugar)을 뜻하는 것이고 하나는 섬(島:island)이 아니라 오히려 랜드 토(to:土)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상 아모지마는 과거 주민들에게는 생소한 곳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어쨌던 앞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硫黄)의 채굴이나 사탕수수(甘蔗:sugar cane)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들은 본래 고유의 아오지마에 있었던 것이 분명 아닌 것 같다.

원주민이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그 사람들이 원래 있었던 곳에서 억지로 끌려 온 것이라면 과거 있었던 곳에 향수가 분명히 남아 있을 터이고 그곳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이오지마가 아니라 이오토란 지명을 고집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자료8]

조선왕조실록 명종(明宗11年:1556)
○丁亥/禮曹啓曰: “日本國硫黃島、天通島、撰島三島, 在四州, 賊倭往大明、琉球及我國之路。
일본국의 유황도(硫黃島)·천통도(天通島)·찬도(撰島) 세 섬은 사주(四州)에 있으며 적왜(賊倭)가 명(明)과 유구(琉球) 및 우리나라로 통하는 길목입니다.

 

또 위 조선왕조실록 1556년 기록에서 알 수있는 것은 이오지마가 역사기록과 맞지 않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1556년 이라면 임진왜란 발발하기 전 약 40년 조금 못 남긴 시기로서 이 때 일본국 유황도(硫黃島), 천통도(天通島), 찬도(撰島)등이 사주(四州)속해 있었고 여기에 있는 왜구는 명나라, 유구, 그리고 조선을 통할 수 있는 길목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것은 다 무시하더라도 유황도가 어찌하여 조선으로 통할 수 있는 길목이라고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유황도라고 하는 이오지마의 위치가 잘못설정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유황도는 지금 열도 동남쪽에 있는 이오지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살펴보건데 지금의 이오지마는 통로가 아니라 아주 외딴 섬에 불과 할 뿐이임을 알게 한다.

 

마무리

 

유황섬의 이러한 근대역사사실과 지형적 형태 모순을 앞에서 우리는 냉정하고 깨끗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영국 함장 바실 홀(Basil Hall:1788 -1844)이 1816년 목격했다고 하는 유황섬은 현재 열도 동남쪽에 위치한 이오지마가 분명 아니라는 총체적인 사실에서 이제서야 비로소 진실역사의 문을 조금 열 수 있는 냉정함을 찾을 수 있다.

근세기에 벌어졌던 특별한 역사만들기에 따른 기형적인 역사문제가 이렇게 대두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실제로 지형을 밀가루반죽처럼 새롭게 만들 수 없었다면 한눈에 비교하여 보아도 1816년 그림과 현재 이오지마의 형태가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유황섬이라고 고집하는 사실에서 더욱 더한 의혹이 가중되어 파고 든 것이 성과가 있었다.

현재 이오지마가 유황섬이란 전제하에서도 유황채취는 물론이고 사탕수수와 코카나무라는 근원지 한계에 묶여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위치적인 면에서도 위도 10도에서 20도 사이에 있는 본거지를 북회귀선 바로 위, 위도 24.45-24.48에 묶어 놓았다는 이상한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탕수수와 코카나무가 중앙아메리카 또는 카리브해, 남아메리카대륙을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오지마가 유황섬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 시켜주고 있는 사실도 분명하게 들어났다.

이렇듯 역사학자가 아닌 일반인 눈에도 확연히 보이는 문제가 있음에도 현재 이오지마를 1816년 바실 홀이 보았던 유황섬이라고 하는 것은 좀 처럼 이해가 될 수 없는 문제이다.

얼토당토하지 않는 거짓말이라고 하기 전에 이러한 문제가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음에도 그래서 당장에 한반도가 삼한의 근원적인 역사장소가 아닐 수 있다는 문제까지 안고 있음에도 반도역사학자 누구하나 이것을 문제 삼아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꿀먹은 벙어리로 일관한다는 사실은 참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대다수 국민을 위해 진실을 볼 수 있는 양심이 살아있는 사학자들은 우리나라에 없다는 말인가.

어쨌던 현재 세계사는 현실적으로 볼 때 분명 서양세력들이 지배하는 것은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서양세력들이 근대사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양사학자들은 서양사학자들의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날 수가 없고 거의 틀안에서 생각 할 뿐일 것이다.

서세들이 19세기에 역사새판짜기 하면서 결국 동양과 서양을 분리한 것은 동양을 지배하는 구도위에 놓고 그들만의 역사를 꾸미고 싶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현재 세계역사지배세력, 기득권세력들에 의해 이 일본 섬 이오지마가 유황섬(硫黄島:sulfur island)으로 둔갑한 것이라고 보았을 때 근대사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결함도 이 유황섬에서 찾을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왜 이오지마를 기어코 유황섬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의 답은 바로 한반도에 삼한역사를 만들기위한 술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자 이제 정리하자.

이오지마가 유황섬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는 어찌 보면 본래 열도에 일본이 있었는가 또는 없었는가 하는 문제와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중요하면서도 결과에 따라 충격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만약 일본이 실제로 열도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 즉 삼한역사가 한반도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동시에 확인 할 수 있는 문제이다.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일본이란 주체는 과연 어떤 종족이었을까 궁금해진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 역사에서 잉태한 골치거리이다.

일본이란 명칭에서 그래도 역사적인 의미를 찾는다면 삼한역사 주위를 맴돌던 떠돌이들, 난민들, 주거지가 불분명한 거류민들을 규합하여 늘 상 삼한사회를 어지럽히거나 정치적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침략, 노략질등 범죄행위를 일삼던 부류로서 삼한사회를 괴롭히던 종족으로 각인 되어야 한다.

때문에 그들의 역사가 없다고 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옛부터 근본이 없는 종족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종족 그 이상의 역사가치를 전혀 논할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생물학적인 판단에서 논한다면 다른 생물의 내부 혹은 외부에 붙어 살며 그 생물에 해를 입히고 자신은 이득을 취하며 살아가는 형태를 기생(寄生:parasitism)이라고 하는 것처럼 늘 상 기생할 수 있는 조건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을 뿐이고 이러한 습성이 아직까지 남아 걸핏하면 얼토당토하지 않는 논리를 내세우고 어거질 피워 우리의 심정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역사는 기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언제까지라도 엉터리같은 이러한 역사사실을 반드시 밝혀야 하고 지금은 현재 이오지마가 유황섬(硫黄島:sulfur island)에 한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지금 당장 이 이오지마가 유황섬이 아니라 허구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근대사도 그렇지만 근대사에 불안정하게 얹혀있는 반도역사는 실제로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오지마가 유황섬이 아니라는 문제에서 이미 진짜 유황섬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에 대한 답의 글을 올렸는데 본 블로그의 글 '바실 홀(Basil Hall)의 유황섬(硫黄島:Sulphur island)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3 이란 제목아래 이미 지질학적 견해로 궁금증을 해소한바가 있다.

 

1816년 바실 홀이 보았다던 유황섬(硫黄島:sulfur island)은 1812년 화산분출이 있었다던 세인트빈센트(Saint Vincent)섬의 수프리에르(Soufriere:1234m)산에서 화산 발생한 사실과 원인에서 일치하고 유황을 뿌리다(sulphur outlet)란 뜻의 유황산(硫黃山)이라고 했다는 사실도 이 섬을 유황섬이라고 했을 것이란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의 유황섬은 영국 삽화사진 1863년 제목 Sulphur Island, opposite Satzuma's Dominions Japan Ships[Illustrated London News]의 사쓰마섬(薩摩島) 즉 살마도에 화산이 분출하는 모습이 있는데 이 역시 화산재의 분출이 1856년에 심했다고 하는 섬 마르트니크(Martinique)섬에 있는 화산 높이가 1463m나 되는 몽펠레산(Mont Pelée)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외 유황섬(Sulphur Island)으로는 카리브해 섬(Caribbean island)의 세인트루시아(St. Lucia)섬의 남서쪽 수프리에르만(Soufriere bay)쌍봉 그로스피통(Gros Piton)과 프티피통(Petit Piton)의 모습을 바실 홀 유황섬 그림에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유황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렇게 본다면 본래 일본, 유구, 유황섬 모두가 카리브해 제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사쓰마섬인데 이것은 살마(薩摩)라고 하는 일본에 소속된 섬으로서 그곳에 병사들이 전투적이란 사실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또한 카리브해제도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것이 본 블로그에 의해 거의 밝혀 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마르트니크(Martinique)섬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he Katsura-Taft Agreement)에서 일본은 필리핀을 미국으로 넘겨주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반대로 미국은 한반도를 일본에게 넘겨주었다는 알 수 없는 주고 받고식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이 카리브해에 근거하면서 역시 푸에르토리코와 근원적인 영토문제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 유구국(琉球國)도 윈드워드제도란 사실을 본 블로그가 밝혔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살마 역시 카리브해제도에 있는 마르트니크(Martinique)섬일 것이란 사실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근원지 문제에서 일본 주체역시 카리브해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명을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선적으로 정리대상이 되었던 세계삼한역사에 기원하다는 것이며 이렇게 분리하면서 지명들을 이리저리 흩어놓아 바르게 찾을 수 없게 하였다는 사실과 세계삼한역사를 지우고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문서 주고 받고 남기기에 따른 것이라고 총 정리할 수 있다.

물론 현재 유일하게 카리브해 섬들 중에 푸에르토리코는 북아메리카대륙의 영토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서세 특히 미국 네션널리즘 역사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유황섬이라고 하는 이오지마와 유구라고 하는 오키나와, 동아시아의 푸에르토리코라고 판단되는 필리핀까지 지명 이동은 당시로 보았을 때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겁도 없이 덤벼들었던 패전국인 일본에게 수많은 미국인들이 살상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분노없이 그냥 동정하듯 피로 빼앗은 영토를 무의미하게 반환하였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리지가 않는다.

또한 1898년에 있었던 미서전쟁(美西戰爭)이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근대사에서 자꾸 필리핀을 크로즈업시켜 동시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하는 등 전쟁합당성과 이치에 전혀일치 할 수 없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하지만 유황섬이 이오지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구가 오키나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바실 홀 일행이 코리아서해안에 들어왔다고 하는 정확한 장소가 현재 한반도가 아닐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역사반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짧지 않는 글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대입하며 지적한 것처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지형적인 문제, 생물학적인 근원지 문제, 기타 역사기록들을 따져보았을 때도 현재 이오지마가 1816년 영국 함장 바실 홀이 목격한 유황섬이 아니라는데 최종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유황섬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카리브해 제도에 유황산 수프리에르(Soufriere:1234m)산이 있는 세인트빈센트(Saint Vincent)섬일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왔다는 사실도 흘려 들을 수 없게 한다.

그곳에는 이오지마와 다르게 고가엽 즉 코카나무가 자생한 곳이고 사탕수수가 재배되던 곳이며 또한 유황을 채취하던 곳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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