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동물

과하마(果下馬) 삼척마(三尺馬)의 행방?

한부울 2012. 3. 1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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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마(果下馬) 삼척마(三尺馬)의 행방?

 

말(馬, horse, Equus ferus caballus)은 기제목(奇蹄目) 말과(馬科)의 동물이다.

예로부터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온 동물 중 하나로 사람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지금의 말은 모두 길들여진 말이고 지금은 야생상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프셰발스키 말(Przewalski's Horse)이 말의 조상이라는 설이 있다.

프랑스나 스페인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 그려진 말과 거의 흡사한 생김새로 리옹의 북쪽 68km, 손강(Saone river) 우안(右岸)에 위치한 마콩(Mâcon)근처의 솔뤼트레(Solutre)에서 발견된 1헥타르(ha:길이100m)이상이나 되는 말 무덤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삼척마라고 하는 과하마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과하마가 있었던 곳이 삼한의 영토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 나오는 제주마(濟州馬), 과하마(果下馬), 토마(土馬), 삼척마(三尺馬)는 현재 대한민국의 제주특별자치도 에서 자생하는 종말인가 하는 물음이 있다.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 라고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이미 키가 113cm 정도하는 이 말은 삼척마(三尺馬)가 즉 키가 90cm 가 넘어 될 수 없는 조건이다.

과하마(果下馬)는 아주작은 말을 이르는 것인데 옛날 과수(果樹)의 밑을 다니기에 알맞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동사강목 북사(北史) 고구려(高句麗)전에 삼척마(三尺馬)가 생산되는데 본래 주몽(朱蒙)이 타던 말 종자로서 곧 과하마(果下馬)라 하였다.

예(濊)에도 과하마(果下馬)가 있다 하였고

[후한서]원주(原注)에, “키가 3척인 말을 타고서 과수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가 있다.” 하였으며

[조선부]주(注)에, “《일통지(一統志)》에 이르기를, ‘백제국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키가 3척으로 과수나무 아래에서도 말을 탈 수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 백제국(百濟國)의 경계는 바로 양화도(楊花渡)의 남쪽 강안(江岸)에 있는데, 왕경(王京)에서의 거리가 2, 3십 리에 불과하기에 물어보니, ‘오래되어서 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그 나라 도로에서 물건을 싣고 가는 말을 보니, 높이가 3척이 넘기는 하나 중국에서 산출되는 말과 비교해 볼 때 조금 작으니, 과하마의 종류인 듯하다.” 하였다.

물론 3척을 조금 넘길 수도 있겠다 싶다.

[삼국지]에 고구려는 말이 모두 작아서 산을 오르는 데 편리하다 하였으며

[후위서]에 고구려에서는 크기가 3척쯤 되는 말이 산출된다고 하는데, 본래 주몽(朱蒙)이 타던 말로, 그 말의 종자가 바로 과하마이다 하였다.한다.

이상이 과하마(果下馬) 즉 삼척마(三尺馬)란 이름으로 나타난 고서의 기록이다.

척(尺)은 옛날 길이를 측정하는 단위인데 현재 단위로 30.3 cm 이다.

삼척(三尺)이라 했으니 90.9cm 이다.

그러면 현 제주도 말이 아닌 과하마(果下馬) 즉 삼척마(三尺馬)는 어떤 종류일까?

야생마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셰발스키 말(Przewalski horse)과 타르판(Tarpan-Eurasian wild horse)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야생마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군인 니콜라이 프셰발스키(Colonel przewalskii)에 의해 1879년 발견된 프셰발스키 말(Przewalski horse)은 몽골리안 야생마 또는 타키(Takhi)라고 알려져 있고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고비사막(Gobi Desert)을 원산지로 하는데 키가 Typical height is about 13 hands (52 inches, 132 cm), 영어자료에서는 132 cm 라 한다.

또 하나는 멸종이 되었다 하니 현재 본종인지 알 수 없으나 폴란드 비아로에스카(Bialowieza National Park)삼림공원에서 보호되고 있다고 하는 보호종으로서 원래 유라시아에 살던 야생마였으나 1879년에 멸종했다 하는 타르판(Tarpan-Eurasian wild horse)인데 이 역시 키가 130 cm 이다.

 

둘 다 야생마라 하나 키가 일단 삼척이 넘는다.

그렇다면 위 두 종은 일단 삼척마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래서 키가 작은 조랑말(Pony, 果下馬)을 찾아보았는데 종류가 팔라벨라(Falabella), 세틀랜드 포니(Shetland Pony), 웰시(Welsh:영국), 해크니(Hackney:영국), 쾌마러, 제주도말 그렇다.

 

어깨높이 약 78cm의 조랑말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산한 정온(warm blood)의 미니어처 종(種) 팔라벨라(Falabella)와 스코틀랜드 북부의 셰틀랜드제도가 원산지이고 어깨높이 93-103㎝ 인 세틀랜드 포니(Shetland Pony)가 있다.

나머지는 웰시, 해크니, 쾌마러?, 제주도말 있는데 모두 삼척(三尺,90cm)을 뛰어 넘는 것들이다.

 

                                            The Province of Buenos Aires

 

위 두 종 중에서도 아르헨티나 남아메리카 산인 팔라베라는 어깨높이가 78cm 라 하였으니 보통 개키만큼 되는 것이어서 키가 너무 작아 당시 폭넓게 사용했다고 볼 수 없는 신체조건에서 과하마(果下馬)라고 하지만 제외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가 남는데 바로 스코틀랜드(Scotland)산 세틀랜드 포니(Shetland Pony)이다.

키가 93-103cm라 하였으니 삼척(三尺, 90cm) 범위에 일단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키가 작지만 기록에는 77kg 사람을 태우고 180km를 달렸다 한다.

또 자료에는 기원전 2000년부터 1000년 사이에 켈트(celts)족에 의해서 이 세틀랜드(Shetland)섬으로 전해졌으며 이것을 켈틱 포니(Celtic Pony)라 하는데 이것이 세틀랜드 포니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으니 결국 세틀랜드 포니(Shetland Pony)도 켈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앞서 글에서 이 켈트와 삼한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린바 있다.

이것은 삼한역사찾기 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며 과하마, 삼척마를 찾는 문제에서도 연결고리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의 자취를 켈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것읻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과하마(果下馬) 삼척마(三尺馬)를 세틀랜드 포니(Shetland Pony)와 연결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Shetland Isles

 

그렇다면 탐라는 어딜 말하는 것일까?

우린 탐라라 함은 곧 제주와 연결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탐라가 꼭 반드시 제주라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여기서 심각하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도무지 지금의 영국이란 실체가 과연 영국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있고

영토적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서 과거 역사적으로 무슨 역할을 했는지 분명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영국이 근세기 산업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선봉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봉건제도, 국왕제도를 고집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영국은 사라진 삼한의 역사를 그대로 빼기거나 껍데기만 벗기고 알맹이 속을 차지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켈트 운운해도 초라한 그들의 원시역사가 켈트와는 반대되고 근원을 알 수 없도록 만든다는 사실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19세기 초 비로소 그들의 역사가 존재하는데 그들은 지금까지 도도하게 앵글로(Anglo)라 한다.

 

또 자료에는 이 세틀랜드 포니(Shetland Pony)가 미국에 들어온 것은 1885년 엘리 엘리옷(Eli Elliot)에 의해서라는데 미국의 아메리칸 셰틀랜드 포니(American Shetland pony)는 1800년대 중반 광산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에서 스코틀랜드의 셰틀랜드 포니를 수입하고 개량한 종이라 한다.

앵글로라 하는 미국과 영국은 근세기 역사가 마구 섞여 있다.

이렇듯 도무지 알 수 없는 역사가 우리들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American Shetland pony)

 

끝으로 야생마 프셰발스키 말(Przewalski horse)과 타르판(Tarpan-Eurasian wild horse)이 현재 멸종이 되었거나 멸종이 되다시피 한 사실에 대해서 한가지 부첨해야 할 사실은 근세기에 사라진 삼한 역사와 역사판짜기에 따른 영향이라고 보이지만 몽골과 만주지역이 원래 존재하던 곳은 분명 삼한주체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무대였을 것이고 갑자기 근세기에 유럽이란 이름이 생기면서 유럽과 비유럽이 나눠지고 동방과 서양이 나눠지면서 그에 따라 삼한과 동방, 몽골과 만주등이 동쪽으로 현저하게 이동되었고 그것에 맞춰 인위적으로 꾸밀 필요가 있어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동물들이 희생된 것들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프셰발스키 말(Przewalski horse)과 타르판(Tarpan-Eurasian wild horse)말고도 무수히 많은 야생동물들이 이렇게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할 것이다.

호랑이, 늑대, 산돼지, 기타 야생동물, 그리고 특히 말

본래 근원지를 말살시켜버린 후 방목하는 과정에서 자연사하거나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 소멸 또는 멸종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인간들의 경작지확대와 무분별한 사냥 때문에 18세기 이전부터 유럽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원래 18세기 이전에는 유럽이란 별도지칭이 없었던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이 모든 기준이 되는 지금 안목으론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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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말(Wild horse, Equus ferus)의 종류

 

(말)

The Domestic horse (Equus ferus caballus).Equus ferus caballus Linnaeus, 1758

(타르판)

The Tarpan or Eurasian Wild Horse (Equus ferus ferus), once native to Europe and western Asia. The Tarpan became effectively extinct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the last specimen died in captivity in a Ukraine zoo in 1918 or 1919.

(프셰발스키말)

Przewalski's Horse (Equus ferus przewalskii), also known as the Mongolian Wild Horse or Takhi, native to Central Asia and the Gobi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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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quus ferus caballus).

 

原产于中亚草原,4000多年前就被人类驯養,

15世纪后,才被殖民者带到美洲(America)和澳洲(Australia)

 

科學分類

界: 動物界 Animalia

門: 脊索動物門 Chordata

綱: 哺乳綱 Mammalia

目: 奇蹄目 Perissodactyla

科: 馬科 Equidae

屬: 馬屬 Equus

亞屬: 马亚属 E. (Equus)

種: 野馬 E. ferus

二名法

Equus ferus Boddaert, 1785

Pieter Boddaert (1730 or 1733, Middelburg – 6 May 1795, Utrecht)was a Dutch physician and naturalist.

欧洲野马†Equus ferus ferus

普氏野马 Equus ferus przewalskii

家马 Equus ferus caballus

異名

E. caballus Linnaeus, 1758

 

야생말(Equus ferus)는 말과에 속하는 종으로 현재 아시아에만 서식한다. 이들은 무스탕과 같이 야생화된 말이 아닌 진정한 야생의 말이며,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가축화된 적이 없다.

야생말에는 현대에 두 가지 아종이 있었다. 하나는 멸종된 종으로 유럽, 아시아에 살던 타르판(유라시아야생말)(Equus ferus ferus)이며, 다른 하나는 현존하는 프셰발스키 말(Equus ferus przewalskii)이다. 프셰발스키 말이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살며, 한때 멸종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프셰발스키 말이 야생말의 아종인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전 세계의 동물원에 대략 1500마리가 있으며, 최근에는 몽골에 재도입된 바가 있다. 2005년 상황으로는 영국과 몽골의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248마리가 야생에 정착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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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셰발스키 말(Przewalski horse)은 말의 일종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야생종 말이다(얼룩말과 당나귀를 제외했을 때). 학명은 Equus ferus przewalskii이다.

 

 

 

 

이 말은 작은 말로 머리는 크고, 얼굴은 길며, 턱은 힘이 세다. 귀는 상당히 길고 곧게 서 있으며, 소리 나는 쪽으로 움직인다. 귓바퀴는 작다. 눈 사이의 너비가 넓어 넓은 들판을 살피는 데 유리하다. 목은 짧으며, 네 다리는 짧고 통통하다. 갈기는 짧고 곧으며, 꼬리에는 긴 털이 있는데, 밑 부분의 털은 짧다. 여름털은 엷은 붉은빛을 띤 갈색이고, 네 다리는 어두운 색, 입 부근은 흰색, 갈기와 꼬리털은 검은색이며, 등 면의 중앙에 1개의 검은 줄이 있다. 겨울털은 길고 연한 색이다. 개방된 초원과 반사막지대에 서식한다. 10마리 정도가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풀·식물·과일 등을 먹는다. 하루의 반 이상을 먹이를 찾아다니는데, 낮에는 사막에서 지내고 해가 지면 풀과 물을 찾아다니다가 아침에 사막으로 돌아온다.

임신기간은 11∼12개월이며, 4∼5월에 한배에 1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태어난 뒤 1시간이 지나면 서서 걸을 수 있다. 옛날에는 널리 분포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몽골의 알타이산맥에만 분포한다. 몽골에서는 연중 40∼50마리로부터 1,000마리 내외의 무리를 이루며 방목한다. 여름에는 강이나 호수 부근의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겨울에는 먹이가 많고 눈이 쌓인 지역으로 이동시킨다. 몽골 사람은 승마용과 젖을 이용할 목적으로 사육할 뿐 운반용으로는 이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속력이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긴다. 추위와 거친 먹이에 잘 견디며 지구력이 강할 뿐 아니라, 다른 짐승에 대한 저항력도 강하다. 한국·일본·중국의 재래종말은 몽골말에 가깝고 그 혈통이 섞여 있다고 한다. 가축의 말과 쉽게 교잡되어 말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지만, 말과 관계가 없다고 보는 학자도 많아서 정설은 없다. 이 밖에 야생말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두 가축의 말이 야생화된 것이다.[네이버지식]

 

Przewalski's Horse (Equus ferus przewalskii), also known as the Mongolian Wild Horse or Takhi, native to Central Asia and the Gobi Desert.

Typical height is about 13 hands (52 inches, 132 cm),

어깨높이 120∼146㎝

 

Scientific classification

Kingdom: Animalia

Phylum: Chordata

Class: Mammalia

Order: Perissodactyla

Family: Equidae

Genus: Equus

Subgenus: E. (Equus)

Species: E. ferus

Subspecies: E. f. przewalskii

Trinomial name

Equus ferus przewalskii(Poliakov, 1881)

Przewalski's horse range(reintroduced)

Synonyms

hagenbecki Matschie, 1903

prjevalskii Ewart, 1903

typicus Hilzheimer,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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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판(Tarpan-Eurasian wild horse)은 유라시아에 살던 야생마였으나 1879년에 멸종했다.

타르판은 1774년에 J. F. 그멜린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했다.

 

 

Scientific classification

Kingdom: Animalia

Phylum: Chordata

Class: Mammalia

Order: Perissodactyla

Family: Equidae

Genus: Equus

Subgenus: Equus

Species: E. ferus

Subspecies: E. f. ferus

Trinomial name

Equus ferus ferus Boddaert, 1785

Synonyms

Equus equiferus Pallas, 1811

Equus gmelini Antonius, 1912

Equus sylvestris Brincken, 1826

Equus silvaticus Vetulani, 1928

Equus tarpan Pidoplichko, 1951

 

Tarpan(타르판)

歐洲野馬(学名:Equus ferus ferus),

又名泰班野馬

어깨높이 약 130㎝

 

이 말은 아마도 모든 경종 현대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한 때 평원형과 삼림형이 있어서 모두 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공화국에 걸쳐 동유럽에서 야생하고 있었다. 야생마 최후의 한 마리는 암말이었다. 본 종의 유지를 위해 이 암말은 포획되었으나 1879년에 사망하였으며, 사육되고 있던 말의 최후 1두는 1887년 뮌헨 동물원에서 사망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본 종은 농부의 가축으로서 뿐만 아니라, 고기나 가죽을 얻기 위해 수렵대상이 되고 있다.

 

야생의 말과 사육되고 있던 말 모두 멸종되어 폴란드 정부는 본 종의 특질을 갖고 있는 말을 목장으로부터 어렵게 모아다가 자연보호구역내에 풀어 놓았다. 현재의 말은 여기서 생산된 것이다. 이들 Tarpan종의 자손은 뽀삐에르노나 비아로에스카(Bialowieza National Park

)삼림공원에서 보호되고 있고, 평원형인 Tarpan종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있다. 그러나 Tarpan종과 그의 자손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는 의문시 되고 있다. 본 종은 머리가 약간 무겁고 귀는 길고 전방으로 경사져 있다. 목은 짧고 머리모양은 두텁다. 어깨는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등은 길고 둔부는 경사져 있다. 사지는 약간 가늘지만 단단하다. 모색은 회색, 갈색 등으로 일정치 않다.

 

                              The only known photo of a live Tarpan, published in 1884

 

Only known illustration of a Tarpan made from life, depicting a five month old foal. By Borisov,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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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말(Pony, 果下馬)

 

셰틀랜드·웰시·해크니·쾌마러

1274年,耽羅成為元朝的直轄地,蒙古人看中此地,用來牧馬,直到1294年才歸還。蒙古人就在這裡讓蒙古馬與果下馬配種。現在果下馬主要分布在濟州島,在韓國唯一獎勵養馬與食馬肉的地方。朝鮮時代,這裡的果下馬有20000匹。

 

어깨높이 140㎝ 이하이다. 대부분이 각 지방의 재래종이다. 체질이 강건하고 근육질로서 단단하며, 머리는 큰 편이고, 귀는 작다. 등허리가 곧고 길며, 다리는 가늘다. 머리와 목에 갈기가 많고, 꼬리에는 털이 많다. 각 지역의 풍토에 적응하여 거친 먹이에 잘 견디며, 지구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체질에 따라 논갈이의 농마로서, 운반용의 역마(役馬)로서, 어린이를 위한 승마로서 이용되고 있다.

 

영국의 재래마인 셰틀랜드포니(Shettland pony)는 어깨높이 87∼125㎝로 가장 작은 말에 속하며, 유원지나 공원 등에서 어린이를 상대로 한 애완용 승마로서 유명하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에 생존하였던 프셰발스키말(Przewalskii horse)은 조랑말의 야생종으로, 몸길이 220∼180㎝, 어깨높이 120∼146㎝, 몸무게 200∼300㎏이며, 오늘날에는 세계각국의 동물원에 보존되어 있다. 몽골말(Mongolian wild horse)은 프셰발스키말에 고원마계(高原馬系)의 동양종이 섞인 조랑말이다.

 

한국에는 제주마가 있는데, 부여 및 고구려 때부터 사육되어온 말로서 기록상으로 1073년과 1258년에 탐라에서 고려에 제주마를 진상한 사실이 있으며, 1273년에 원나라가 탐라를 침공한 뒤 약 100년간 몽골말이 유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마는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하였다. 과하마란 이름은 제주마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주마는 어깨높이 113㎝, 몸길이 122㎝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으로 다른 말들보다 뚜렷하게 작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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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벨라(Falabella)

 

 

 

 

어깨높이 약 78cm의 조랑말. 팔라벨라(Falabella) 일가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산한 정온[warm blood]의 미니어처 종(種)이다. 아동용 승마에 이용되거나 애완용으로 길러진다. 몸빛은 흑색·흑갈색·밤색·황색·회색·적갈색·팔로미노(palomino, 갈기와 꼬리는 흰색이고 털은 크림색 또는 황금색인 말)·얼룩무늬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The ancestral stock of the horse of South America descended from horses brought to the western hemisphere by the Spanish of Andalusian and other Iberian bloodlines. In the southern part of the continent, significant numbers of these horses developed within geographically isolated conditions and by the mid-nineteenth century, there were any number of smaller, inbred animals in the herds of Mapuche Indians of southern Buenos Aires province in Argentina.

 

원산지: 아르헨티나

키: 65~70cm 정도(세계에서 제일 작음)

성격: 사교적이며 영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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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틀랜드 포니(Shetland Pony)

 

          Two women of the Shetland Isles with ponies: photograph taken about 1900
 


A classic image of an ideal Shetland pony, Nordisk familjebok (Swedish encyclopedia), circa 1904-1926.

 

             An American Shetland, showing finer bone and more of a "horse" phenotype. 

 

Shetland ponies originated in the Shetland Isles, located northeast of mainland Scotland. Small horses have been kept on the Shetland Isles since the Bronze Age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이 세틀랜드 포니는 스코틀랜드 본토 북부 세틀랜드섬을 근원지로 하는 종이다.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시대부터 세틀랜드에서 보존되어 왔다.

 

Shetland ponies also were probably influenced by the Celtic Pony, brought to the islands by the Celts between 2000 and 1000 BCE.기원전 2000년부터 1000년사이에 켈트족에 의해서 이 섬으로 가져왔으며 Celtic Pony에 의해 세틀랜드 포니가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The first Shetland ponies for which there are written records were imported to the United States in 1885 by Eli Elliot. 기록에 있는 이 첫번째 세틀랜드 포니는 1885년에 에리 엘리옷(Eli Elliot)에 의해 미국에 전달되었다.

 

어깨높이 93∼103㎝이다. 제일 작은 말의 하나로, 스코틀랜드 북부의 셰틀랜드제도가 원산지이다. 머리가 크고, 주둥이는 작지만 콧구멍은 뚜렷하며, 귀는 작다. 발은 짧지만 튼튼하다. 몸의 털은 길고 조밀하며, 색깔은 보통 갈색·밤색이 많지만 때로 검은색을 띠는 것도 있다. 또 각각의 털빛깔에 흰 것이 섞인 것도 있다. 

임신기간은 337일 정도이며, 한배에 1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수명은 약 20년이고, 풀·과일·나뭇잎 등을 먹는다. 거친 먹이에 잘 견디며 저항력이 강하고, 어린이들의 승마용이나 운반용으로 쓰인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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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시(Welsh)

웰시 섹션 A 마운틴 포니(Welsh Mountain Pony)

크기 조랑말, 어깨높이 약 122cm

몸의빛깔 흑색·흑갈색·밤색·회색·황색·적갈색·팔로미노

 

웰시 섹션 C 포니(Welsh Pony of Cob Type)

크기 조랑말, 어깨높이 약 134cm

몸의빛깔 흑색·흑갈색·밤색·회색·황색·적갈색·팔로미노

 

웰시 섹션 B 포니(Welsh Pony)

크기 조랑말, 어깨높이 약 134cm

몸의빛깔 흑색·흑갈색·밤색·회색·황색·적갈색·팔로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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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마(濟州馬)(문화어:과하마(果下馬),토마(土馬),삼척마(三尺馬))

대한민국의 제주특별자치도 에서 자생하는 말의 종류

원산지: 대한민국

키: 113cm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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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通典)》에 주몽이 타던 말은 모두 과하마(果下馬)라 하였다.

동국이상국전집 제6권 고율시(古律詩) 92수

십칠일에 대곡사(大谷寺)에 들어가다

한가하게 과하마(果下馬) 타고 채찍질해 간다 / 閑騎果下彈鞭行

성밖을 나와 서서히 조랑말을 모네 / 出郭徐驅果下馬

생구(生口 사람)와 우마(牛馬)로 서로 벌책(罰責)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책화(責禍)’라 하였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엄으로 보상하고, 구도(冦盜)가 적다. 창[矛]은 길이가 3장(丈)이 되게 만들어서 혹 몇 사람이 함께 소지하며, 보전(步戰)을 잘 한다. 낙랑의 단궁(檀弓)이 그곳에서 나며, 또 무늬 있는 표범이 많고, 과하마(果下馬)가 있는데 키가 3자로 과수 아래에서도 타고 다닐 수 있다. 바다에서는 반어피(斑魚皮)가 나는데 한(漢)나라 때에는 항상 이를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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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2하

을축년 신라 눌지왕 9년, 고구려 장수왕 13년, 백제 구이신왕 6년(북위 태무제 시광 2, 425)

고구려가 사신을 위(魏)에 보냈다.

이때에 척발씨(跖跋氏)가 중하(中夏)를 차지해서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천하가 둘로 나뉘니, 송을 남조(南朝)라 하고 위를 북조(北朝)라 하였다. 고구려가 두 나라를 섬기어서 사신을 보내 위에 조공하였다.

【안】 《북사》 고구려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하 건너 2천 리이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1천 리이다.

사람은 모두 토착하여 산골짜기를 의지해 살며 의복은 베와 비단과 가죽을 입었다. 토지가 척박(瘠薄)하여 누에와 농사가 자급 자족(自給自足)하기 어려워서 그 사람들이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궁실을 잘 꾸민다. 평양성에 도읍하니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성은 동쪽으로 6리가량 산을 따라 굴곡(屈曲)하고 남쪽은 패수(浿水)에 임하였다. 성 안에 곡식을 쌓고 무기를 대비하였다가 도적들이 오는 날에는 바야흐로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따로 집을 지으나 항상 거처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도 다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이는 별도(別都)이고, 그 나라에서 합쳐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그리고 또 요동 현도(玄莵) 등 수십 성이 있는데 모두 관사(官司)를 두어 통섭한다. 신라와 더불어 매양서로 치고 빼앗아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관직에는 대대로(大對盧)ㆍ태대형(太大兄)ㆍ대형(大兄)ㆍ소형(小兄)ㆍ경후사(竟候奢)ㆍ오졸(烏拙)ㆍ태대사자(太大使者)ㆍ대사자(大使者)ㆍ소사자(小使者)ㆍ욕사(褥奢)ㆍ예속(翳屬)ㆍ선인(仙人) 등 무릇 12등급이 있어 안 팎의 일을 나누어 맡는다. 그 대대로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뺏어 스스로 되고 왕으로부터 임명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내평(內評)과 오부(五部)의 욕살(褥薩)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으며 선비들은 두 개의 새 깃을 더 꽂는다. 존귀한 이는 그 갓을 소골(蘇骨)이라 하여 자색 깁으로 만들고 금과 은으로 장식하였다. 소매가 큰 적삼과 통이 큰 바지를 입고 흰 가죽 띠와 누른 가죽 신을 신으며 부인은 치마 저고리에 선(襈)을 둘렀다.

서적은 오경(五經)ㆍ삼사(三史)ㆍ《삼국지(三國志)》ㆍ《진양 춘추(晉陽春秋)》가 있고 병기는 대략 중국의 것과 비슷하다. 봄 가을에 사냥할 때는 왕이 친히 임한다. 조세는 베 5필과 곡식 5석이고 유민(遊民)은 3년에 한 번 조세를 바치되 10인이 공동으로 세포(細布) 1필이다. 조(租)는 1호(戶)에 상(上)이 1석이고 다음은 7두(斗)이며 하(下)가 5두이다.

그 형법이 반역을 꾀한 자는 기둥에 묶어 놓고 불태워서 참형에 처하고 그 가산은 몰수하며, 도둑질하면 10배를 배상하는데 만일 가난해서 배상할 수 없는 자와 공채(公債)나 사채(私債)의 빚을 지고 못 갚는 자는, 그 아들 딸로 노비를 삼아 배상하도록 한다. 형법이 너무 엄하여 법을 범하는 자가 드물다.

음악에는 오현금(五絃琴)과 소금(小琴)과 피리[篳篥]와 옆으로 부는 퉁소와 북과 부는 갈대로써 곡조를 창화하는데, 해마다 연초에는 패수에 모여서 유희하면 왕이 요여(腰轝)를 타고 우의(羽儀)를 벌여 세우고 관람한다. 일이 끝나면 왕이 옷입은 채 물에 들어가서 좌우 2부(部)로 나누어 물과 돌을 서로 뿌리고 던지며 떠들고 치닫고 쫓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 풍속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몸가짐[容止]에 마음 써서 추창하는 것을 공경으로 여긴다. 절할 때는 한 다리를 뻗치고 서며, 뒷짐[反拱]을 많이 지고, 다닐 때는 반드시 손을 허리춤에 꽂는다.

성질이 간사하고 숨김이 많고, 언사가 야비해서 친하고 소원한 것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개천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항상 10월에는 하늘을 제사한다. 그 공회(公會)의 의복은 모두 비단옷이며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웅크리고 앉기를 잘하며 음식에는 조두(俎豆)를 쓴다. 삼척마(三尺馬)가 생산되는데 본래 주몽(朱蒙)이 타던 말 종자로서 곧 과하마(果下馬)이다.

풍속이 음란해서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세속에는 놀아나는 여자가 많아 남편으로 일정한 사람이 없다. 밤이면 남녀가 모여 즐기며 귀천의 절도가 없다. 혼인할 적에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즉시 혼인을 하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이고, 재물로 맞는[財聘] 예가 없으니, 혹시 재물을 받는 이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조소하여 팔려온 여종으로 여긴다.

죽은 자는 빈소(殯所)를 집 안에 두고 3년을 지낸 뒤 좋은 날을 가리어 장사한다. 부모와 남편의 상(喪)에는 모두 3년 상을 입고 형제간에는 3개월이다. 초종상(初終喪)에는 곡읍(哭泣)을 하고 장사지낼 때는 노래와 춤으로 풍악을 잡혀 보낸다. 매장(埋葬)을 마치고는 죽은 자의 살았을 적의 복장과 노리개와 수레와 말을 가져다 묘 곁에 놓아 두면 장사에 모였던 자들이 서로 다투어 가져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여 음사(淫祠)가 많다. 신묘(神廟)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扶餘神)이라 하는 것으로 나무를 조각해 부인의 형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이라 하는 것으로 이는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모두 관사를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수호하는데, 이는 하백(河伯)의 딸과 주몽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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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3하

신사년 신라 진평왕 43년, 고구려 영류왕 4년, 백제 무왕 22년(당 고조 무덕 4,621)

추7월신라가 사신을 보내 당(唐)에 조회하였다.

신라의 사신이 당(唐)에 들어가 방물(方物)을 바치니 황제가 몸소 위로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로 내빙(來聘)하게 하고, 새서(璽書) 및 화병(畫屛)ㆍ금채(錦綵) 3백 단(段)을 주었다.

【안】 《당서》신라전(新羅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라는 변한(弁韓)의 묘족(苗族 종족(種族))이다. 한(漢) 낙랑(樂浪) 땅에 있으니 횡(橫)이 1천 리요, 종(縱)이 3천 리나 된다. 동남방은 일본이요, 서쪽은 백제이며, 남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북쪽은 고구려이다. 왕은 금성(金城 경주(慶州)에 거하니 둘레가 8리로 호위하는 군사가 3천이다. 성(城)을 침모라(侵牟羅)라고 하고 안에 있는 읍(邑)을 훼평(喙評), 밖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훼평이 6개이고 읍륵이 52개다.

조복(朝服)은 흰 것을 숭상하고 산신(山神)에 제사하기를 좋아한다. 8월 보름에는 크게 잔치하고 관리들에게 활을 쏘게 한다. 벼슬은 친속(親屬)을 위에 앉히며 그 족명(族名)은 제일골(第一骨) 제이골(第二骨)로 분별하며 형제녀(兄弟女)와 내외종자매(內外從姊妹)를 다 맞이하여 아내로 삼는다. 왕족은 제1골이며 아내 또한 그 족(族)으로 아들을 낳으면 다 제일골이 되며, 제이골의 딸과 혼인하지 않고 비록 혼인을 하더라도 첩잉(妾媵)이 될 뿐이다.

벼슬은 재상(宰相)ㆍ시중(侍中)ㆍ사농경(司農卿)ㆍ태부령(太府令) 등 모두 17등급으로 나뉘어졌으며, 제2골이 그런 벼슬을 하게 된다. 정사(政事)는 반드시 중의(衆議)에 따라 하니 이를 화백(和白)이라 하고, 한 사람이라도 이의(異議)를 제기하면 부결시킨다. 재상의 집은 녹(祿)이 끊어지지 않으며 노비를 3천이나 거느리며, 갑병(甲兵)과 말ㆍ소ㆍ돼지 등도 이 수에 맞추었다. 가축은 바다 가운데의 산에다 길러, 먹을 일이 있으면 쏘아 잡는다. 사람들에 곡미(糓米)를 주고 이식을 붙이되 정한 양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왕의 성씨는 김(金)이요, 귀인(貴人)의 성씨는 박(朴)이요, 백성은 성씨가 없고 이름만이 있다. 식기(食器)는 목기와 놋그릇이나 질그릇을 사용한다. 원일(元日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하하며 이날은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한다. 남자는 굵은 베로 만든 바지를 입고, 부녀는 긴 저고리를 입는다. 사람을 보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집고 예를 한다. 화장을 하지 않으며 좋은 머리털을 땋아 머리에 틀어 얹고 주채(珠綵)로써 장식한다. 남자는 머리를 자르고 흑건(黑巾)을 썼다. 저자[市場]에서는 부녀들이 물건을 사고 판다. 겨울철에는 부엌을 방안에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둔다. 가축에 양(羊)은 없고 나귀가 적으며 말이 많은데 말은 비록 높고 크나 행보를 잘하지 못한다.”

《통전(通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라는 위(魏) 때에 사로(斯盧)라 하였고, 송(宋) 때에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불렀다. 그 사람들은 화하(華夏)ㆍ고구려ㆍ백제의 붙이가 섞여 있으며 옥저(沃沮)ㆍ불내(不耐)ㆍ한(韓)ㆍ예(濊)의 땅을 겸유하여 마침내 강성하게 되매, 가라(加羅)ㆍ임나(任那) 제국(諸國)을 습격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삼한(三韓)의 땅을 병합하여 서쪽과 북쪽의 경계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로 들쭉날쭉하다.”

○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당(唐)에 조회하였다.

동10월백제가 사신을 보내 당에 조회하였다.

과하마(果下馬)를 헌납하였다.

【안】 《당서》 백제전(百濟傳)에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곧 경사(京師)에서 6천 리 떨어진 바닷가에 있다. 서쪽은 월주(越州), 남쪽은 왜(倭)요, 북쪽은 고구려이니, 다 바다를 건너 이르게 되며, 그 동쪽은 신라이다. 왕은 동서 두 성(城)에 거하였고 관직에 내신 좌평(內臣佐平)은 왕의 명령 출납을 맡고, 내두 좌평(內頭佐平)은 재물을 맡고, 내법 좌평(內法佐平)은 의례를 맡고, 위사 좌평(衛士佐平)은 위병(衛兵)을 맡고, 조정 좌평(朝廷佐平)은 형옥(刑獄)을 맡고, 병관 좌평(兵官佐平)은 외방(外方)ㆍ병마(兵馬)를 맡으니, 병마는 6만이며 지방은 10군(郡)으로 통할하였다. 대성(大姓)이 8개가 있으니, 사씨(沙氏)ㆍ연씨(燕氏)ㆍ협씨(劦氏)ㆍ해씨(解氏)ㆍ진씨(眞氏)ㆍ국씨(國氏)ㆍ목씨(木氏)ㆍ백씨(苩氏)이다. 그 형법은 반역자는 베고 그 집은 적몰(籍沒)하며, 사람을 죽인 자는 노비 셋을 들이고 속죄(贖罪)하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을 하면 3배를 배상하고 종신토록 금고에 처한 풍속은 고구려와 같고, 세 섬[三島]이 있어 황칠(黃漆)이 나는데 6월에 나무 껍질을 벗겨 진을 취하여 쓰는데 빛깔이 금과 같다. 왕은 큰 소매의 자색포(袍)와 푸른 비단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를 띠고 검은 가죽신을 신으며 검은 비단관을 쓰는데,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고, 조신들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갓은 은으로 장식하였으며 백성에게는 붉은 비단과 자색 비단 옷을 입지 못하게 한다. 문서에 시월(時月)로 기록하는 것이 중국 사람과 같은 점이 있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이르기를,

“백제의 서남 바다 가운데, 세 섬이 있어 황칠수(黃漆樹)가 나는데 소하수(小榎樹)처럼 크다. 6월에 진액을 취해서 기물(器物)에 칠하는데 황금같이 그 빛이 번쩍번쩍 빛나서 안광을 빼앗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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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과하마(果下馬)

두자미(杜子美) 시에,

좋은 말은 울 때마다 금빛 같은 허리 간들거리고 / 細馬時鳴金腰褭

예쁜 여자는 나올 때마다 동교요처럼 뽐내누나 / 佳人屢出董嬌饒

 

하였다. 나는 상고컨대, “서역(西域) 오차국(烏秅國)이란 나라에 소보마(小步馬)란 말이 생산된다.” 하였는데, 그에 대해 맹강(孟康)은, ‘종자는 작고 걸음을 잘 걷는다.’ 하고, 안사고(顔師古)는, ‘소(小)는 세(細)의 뜻이니 세보(細步)는 살살 가면서도 재빨리 잘 간다는 말인데, 지금 이른바 「백 걸음에 발굽을 천 번 옮긴다.」라는 뜻이다.’ 하였으니, 저 세마(細馬)란 것은 이 소보마를 지칭한 것인 듯한다.

또, “예국(濊國)에 과하마(果下馬)라는 말이 생산되는데, 한(漢) 나라 시대에 늘 공물로 바쳤다. 키가 석 자쯤 되므로 과실나무 밑을 〈마음대로〉 다닌다.” 했는데, 이른바 예국이란 것은 곧 우리나라 지방이다. 북경 사신이 오면, 반드시 걸음 잘 걷는 좋은 말만 가려서 돌려 보내게 되었는데, 이것을 납마(納馬)라 하였다. 저 북경에서는 이 과하마를 부녀자의 승마로 이용했던 까닭에 귀하게 여겼으니, 이러한 예는 대개 옛적부터 그러하였다.

두자미가 일컬은 바 또한 노는 여자들이 서로 자랑하는 일을 모사했을 뿐이니, 세마는 즉 과하마라는 것을 더욱 인증할 만하다.

또 《자서》에 상고하니, “요뇨(腰褭)한 신마(神馬)가 하루에 천리길을 간다.” 하였다. 그러나 요뇨란 또한 세약(細弱)한 모양이니, 비록 하루에 천리를 간다 할지라도 그가 세약한 것만은 틀림없다. 《자서》에 또, “피과하(犤果下)는 작은 소[牛]다.” 하였으니, 아울러 상고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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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양마(養馬)

마정(馬政)은 북쪽 지방의 풍속을 본받아야만 제대로 될 수 있겠다. 변방에서는 말을 기르는 데 콩을 삶아 먹이거나 죽을 끓여 먹이지 않고 제대로 뛰어다니며 풀이나 먹도록 놓아 둔다. 그리고 산과 들에 갈대가 많이 있어도 지붕을 덮거나 자리를 깔지 않고 한 데서 자도록 버려 둔다. 그래서 비록 살찌고 윤택한 모습은 없을지라도,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서 배고픔과 추위를 잘 견디게 되므로 배부르게 먹이지 않아도 멀리 달릴 수 있다.

수컷은 모두 불을 치는 까닭에 길들어 부리기가 쉽고, 굴레를 벗겨 놓아도 도망가거나 서로 물고 차지를 않는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수십 필씩 몰고 다녀도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타고 달릴 때면 재갈을 물리거나 굴레를 씌우지 않아도 사람의 지휘에 따라 달린다. 그리고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 충돌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데에는 따스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이며 거처시키기를 꼭 사람과 같이 하는 까닭에 반나절만 빨리 몰면 입에서 거품을 토하고 전신에는 구슬같은 땀을 흘린다. 그리고 성질이 나빠서 싸우기를 좋아하고, 질서를 어지럽혀 떼를 지어 울부짖되 제어할 방책이 없다. 북쪽 사람들은 일이 없을 때면 완전히 휴양시키는 까닭에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발굽이 이지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말굽에 박는 대갈은 누가 처음 만들어 냈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갈을 사용하지 않은 말이 없다. 이로 인해 발굽이 단단하지 못하여 대갈이 닳아 이지러지면 걸음을 걷지 못하니, 이런 말을 만약 전투[軍旅] 중에서 이용한다면 어느 겨를에 대갈을 박을 수 있겠는가? 이뿐만 아니라 장사치가 부리는 말은 하루도 쉴 새가 없어서 쉽게 늙고 오래 살지 못하며, 귀한 사람의 말은 달리기에 익숙하지 못해서 급한 일이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

제주(濟州)에서 생산되는 말은, 본래 대완(大宛)에서 들어온 것인데, 몸집이 높고 크며 번식도 잘 된다. 지금은 그 중에서 조금 좋은 말은 모두 몰아다가 복역(服役)을 시키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걸음도 잘 못걷고 종자도 잘아서 차츰 나빠진다. 북쪽 저자에서는 암컷이나 불을 치지 않은 수컷은 일체 매매(賣買)를 금한다. 이는 대개 뛰어난 종자를 외방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가끔 사오기도 한다. 서북(西北)의 변계와는 인가(人家)가 서로 접해 있으니 어찌 구해 올 만한 길이 없겠는가?

만약 암컷과 수컷을 몇 필만 사들여서 섬 가운데에서 별도로 기르되 과하마(果下馬)와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면, 십여 년 후에는 반드시 내빈(騋牝일곱 자가 넘는 큰 말)ㆍ경모(駉牡살찐 말)처럼 잘 번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이런 계획을 세우는 이가 없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말도 원(元) 나라 때부터 들어온 것이니, 지금도 만약 이런 이유를 들어서 상국(上國)에 주청(奏請)한다면 반드시 허락해 줄 것이다. 정축년약조(約條)를 지금 와서 고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오직 이것만 고수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축년 : 여기서는 인조 15년 즉 16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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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京都上)

아주 작은 과하마(果下馬)도 키가 3척 되는 것이 없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남자의 건은 당나라의 것과 같다.” 하였다. 지금 남자들은 모두 대모(大帽)를 쓰고, 오직 왕도에서 왕의 가마를 메는 자들만은 육각(六角)으로 된 흰 비단 건을 쓴다. 육각에는 다 흰 솜공을 붙였고, 자색 비단으로 깃이 둥근 옷을 입었는데, 발에는 뾰족한 코의 가죽신을 신었으니, 마치 당 나라 말을 탄 해관(奚官)을 그려 놓은 것과 같다. 생각건대, 그 때의 옷은 모두 그와 같았기 때문에 당 나라와 같다고 말한 것인 듯하다. 또 《일통지》에, “백제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그 키는 석 자로써 과실나무 밑에서도 탈 수 있다.” 하였다. 지금 백제의 국경은 바로 양화도(楊花渡)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니, 왕경에서 2ㆍ30리 밖에 안 된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벌써부터 나지 않는다.” 하였다. 다만 그 나라 길에서 보이는 짐 실은 말이 비록 석 자 이상이긴 하지만 중국말에 비하면 조금 작다. 아마 그 종류일 것이지만 우선 기록하고 다음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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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역대전고(歷代典故)

예국(濊國)

예(濊)는 달리 예(獩)ㆍ예(薉)라고도 쓰며, 또한 예국(蘂國)이라고도 하고, 또 철국(鐵國)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다.

지금 강릉부 동쪽에 예 시대에 쌓은 옛 성터가 있다. 신라 남해왕(南解王) 때에 명주(溟州)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印)을 얻어 바쳤다. 명주는 곧 강릉이다.

○ 동이(東暆)는 예의 도읍이다. 이(暆)의 음은 이(移)이다. 《삼국사》

한 무제 원삭(元朔) 원년 계축(B.C.128)에 예의 임금 남여(南閭) 등이 조선을 배반하고 요동으로 나아가 붙으니 28만 명이 투항하였다.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만들었으나 3년 만에 군을 철폐하였다. 《한서》

○ 남여(南閭)와 우거가 항복해 왔다. 《후한서》

○ 예는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沃沮), 남으로 진한(辰韓)과 접경하고, 동으로는 바다, 서로는 낙랑에 이르렀다. 예와 옥저ㆍ고구려는 원래 모두 조선 땅인데 원봉 3년에 조선을 평정하고 예의 땅을 임둔군(臨芚郡)으로 만들었다. 《후한서》

○ 신라의 북쪽 경계 명주(溟州)는 옛날 예 나라 땅이다. 가탐(賈眈)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

○ 건무(建武) 중에는 그 우두머리를 현후(縣侯)로 봉하였다. 세시 조공(歲時朝貢)은 맥포(貊布)와 과하마(果下馬 작은 말) 등이었다. 그 풍속이 자못 고구려와 같으나 사람의 성품은 우직하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었다. 의복 제도는 달랐고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으며 주옥(珠玉)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읍이나 촌락을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벌로 사람이나 우마(牛馬)를 내놓게 하였다. 고구려가 여러 번 그 병력을 징발하여 한 나라 요동을 침략했고, 또 한 나라 군사를 따라 남으로 신라ㆍ백제를 쳤다. 《동문광고》

○ 대대로 전하는 부여왕(扶餘王)의 인문(印文)은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하고, 또 부여의 장로(長老)는 스스로 ‘망인(亡人)’이라 칭하였으니, 아마 부여가 남여(南閭)의 유종(遺種)인 듯 하다. 《동문광고》

《동국고기(東國古記)》에 부여국은 현도 북쪽 옛 예국에 있고, 그 인문(印文)을 예왕지인이라고 했으며,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예성(濊城)이라 한다. 남여는 곧 부여의 왕(王)이니, 조선 경내에 있는 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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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9권

세기(世紀) 9

백제(百濟)

○ 당(唐)나라 고조 무덕(武德) 4년 무왕 19년 10월에 백제 왕 부여장(夫餘璋)이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백제국은 본디 마한의 옛 땅에 있으며, 경사(京師)에서의 거리가 6천 2백 리이다. 《구당서(舊唐書)》

신라(新羅)

○ 11년에 성덕왕 22년 신라에서 자주 들어와 조회하면서 과하마(果下馬)ㆍ조하주(朝霞紬)ㆍ어아주(魚牙紬)ㆍ해표피(海豹皮)를 바쳤으며, 또 두 여자를 바쳤다. 이에 황제가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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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23권

병지(兵志)

마정(馬政)

○ 부여(夫餘)에서는 명마(名馬)가 산출된다. 《후한서》

○ 예(濊)에는 과하마(果下馬)가 있다. 《상동》

○ 《후한서》 원주(原注)에, “키가 3척인 말을 타고서 과수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가 있다.” 하였다.

○ 《조선부》 주(注)에, “《일통지(一統志)》에 이르기를, ‘백제국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키가 3척으로 과수나무 아래에서도 말을 탈 수가 있다.’고 하였다. 지금 백제국(百濟國)의 경계는 바로 양화도(楊花渡)의 남쪽 강안(江岸)에 있는데, 왕경(王京 한성을 말함)에서의 거리가 2, 3십 리에 불과하기에 물어보니, ‘오래되어서 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그 나라 도로에서 물건을 싣고 가는 말을 보니, 높이가 3척이 넘기는 하나 중국에서 산출되는 말과 비교해 볼 때 조금 작으니, 과하마의 종류인 듯하다.” 하였다.

○ 고구려는 말이 모두 작아서 산을 오르는 데 편리하다. 《삼국지》

○ 고구려에서는 크기가 3척쯤 되는 말이 산출된다고 하는데, 본래 주몽(朱蒙)이 타던 말로, 그 말의 종자가 바로 과하마이다. 《후위서》

○ 신라에는 말이 많은데, 말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잘 달리지는 못한다. 《신당서》

○ 발해 풍속에서 귀한 것은 솔빈부(率賓府)의 말이다. 《상동》

○ 《성경통지(盛京通志)》에, “《당서》 발해열전(渤海列傳)에 솔빈부의 말이라고 하였는데, 솔빈부는 바로 지금의 봉천(奉天) 동남쪽 지방으로, 고려와 더불어 겨우 강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중국 내부의 말은 크고 고려의 말은 작으니, 물산(物産) 역시 강역(疆域)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발해 솔빈부는 바로 지금의 삼수(三水), 갑산(甲山) 등지이다.

○ 고려 땅에는 좋은 말이 많이 생산된다. 《만보전서(萬寶全書)》

○ 《원사》에, “태복시(太僕寺)는 황제가 타는 대알이타마(大斡耳朶馬)를 관장하는데, 14도(道)의 목지(牧地)에는 각각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을 두며, 명목(名目)은 아래와 같은데, 그 가운데 하나는 고려(高麗)와 탐라국(耽羅國)이다.

○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편하다. 또 무거운 것을 끌 수 있는 낙타는 없으며, 사람은 아주 가벼운 것이나 질 수 있으므로 이것저것 싣는 데에 말을 많이 쓴다. 그 쓰임새는 두 개의 그릇을 좌우에 장치하고 말 등에 옆으로 걸쳐 놓은 다음, 물건들을 모두 그 그릇 속에 담는다. 머리를 얽고 가슴을 매는 것은 사람이 타는 말의 제도와 같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모는데, 걸음걸이가 자못 빠르다고 한다. 《고려도경》

신(臣 서긍(徐兢)을 말함)이 듣건대,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가 있는데, 군사는 수레로 운송하고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옛적에 나라를 제정(制定)할 때에 반드시 수레의 수를 보아 그 크고 작음의 차등을 두었으니, 《시경》의 송(頌)에서 노(魯)나라와 위(衞)나라의 부(富)를 칭송한 것도 모두 말의 숫자를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고려는 비록 섬나라지만,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에는 거마(車馬)의 제도를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레의 만듦새와 말을 모는 방법도 또한 다릅니다. 《상동》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마정(馬政)은 본디 풍토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고려조에 이르러서 원나라에서 탐라도(耽羅島)에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고서 호마(胡馬)를 길러 바치게 하였다. 황명(皇明) 이후로 매년 공물로 바친 숫자는, 홍무(洪武) 6년(1373, 공민왕22)에 5천 필의 말을 바쳤고, 17년(1384, 우왕10)에 3천 필을, 18년에 5천 필을, 19년에 1천 필을, 20년에 3천 40필을, 24년(1391, 공양왕3)에 4천 필을 바쳤으며, 본조에 들어와서는 홍무 26년(1393, 태조2)에 9천 8백여 필을, 영락(永樂) 5년(1407, 태종7)에 3천 필을, 8년에 1만 필을, 21년(1423, 세종5)에 1만 필을, 선덕(宣德) 2년(1427, 세종9)에 5천 필을, 경태(景泰) 원년(1450, 세종32)에 1천 필을 바쳤으니, 여기에서 당시에 말이 많이 번식하여 오늘날에는 미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교빙지(交聘志)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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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총론(總論)

○ 조선국의 토산으로는 금(金), 은(銀), 철(鐵), 석등잔(石燈盞), 황칠(黃漆), 과하마(果下馬), 장미계(長尾鷄), 봉밀(蜂蜜), 초피, 예피, 장피(獐皮), 녹비(鹿皮), 해표피(海豹皮), 팔초어(八梢魚), 여방(蠣房), 귀각(龜脚), 죽합(竹蛤), 해조(海藻), 곤포(昆布), 메벼[秔], 기장[黍], 보리, 삼[麻], 송(松), 인삼(人葠), 백부자(白附子), 복령(茯苓), 유황(硫黃), 개암, 배, 밤, 핵도(核桃), 귤, 매(梅), 죽(竹), 차(茶), 목단(牧丹)이 있다. 《대명일통지》

○ 《청일통지》에, “조선의 토산으로는 백저포(白紵布), 면주(綿紬), 목면포(木棉布), 오조룡석(五爪龍席), 잡채화석(雜彩花席), 백추지(白硾紙), 미(米), 녹비(鹿皮), 달피(獺皮), 칼[刀]이 있는데, 이상은 모두 조공(朝貢)으로 바친다. 또 금(金), 은(銀), 철(鐵), 석등잔(石燈盞), 수정(水晶), 소금[鹽], 낭미필(狼尾筆), 유매묵(油煤墨), 접선(摺扇), 황칠(黃漆), 과하마(果下馬), 장미계(長尾鷄), 봉밀(蜂蜜), 초피(貂皮), 예피(皮), 홍표피(紅豹皮), 팔초어(八梢魚), 반어(斑魚), 여방(蠣房), 귀각(龜脚), 죽합(竹蛤), 해조(海藻), 곤포(昆布), 메벼, 기장, 삼, 송(松), 인삼(人葠), 복령(茯苓), 유황(硫黃), 개암, 배, 밤이 있다.” 하였다.

○ 고려의 곡식 이삭은 화홍색(火紅色)으로, 계관화(鷄冠花)와 같다. 《성경통지(盛京通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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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34권 교빙지(交聘志) 2

조공(朝貢)

○ 예(濊)의 사신이 와서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斑魚)를 바쳤다.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지(三國志)》를 보면 환제(桓帝) 때 와서 바쳤다.

○ 4년(621, 무왕22) -신사- 에 백제의 왕 부여장(扶餘璋)이 비로소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구당서(舊唐書)》 ○ 삼가 살펴보건대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4년 10월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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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의 성덕왕(聖德王)이 당(唐)나라 현종(玄宗)에게 진봉(進奉)하면서 올린 표문 개원(開元) 11년(723, 성덕왕22)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과하마(果下馬), 우황(牛黃), 인삼(人葠), 두발(頭髮), 주(紬), 누응령(鏤鷹鈴), 해표피(海豹皮), 금(金), 은(銀) 등을 바치면서 표문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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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대명일통지》에 ‘백제에서는 과하마(果下馬)가 나는데, 그 키는 석 자로서 과실나무 밑에서 탈 수가 있다.’ 하였다. 백제의 국경은 바로 지금의 양화도(楊花渡) 남쪽 언덕에 있었는데, 왕경에서 2, 3십 리 밖에 안된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오래전부터 과하마는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그 나라 길에서 보이는 짐을 실은 말이 비록 석 자는 넘지만 중국 말에 비하면 조금 작은데, 아마도 그 종류일 것이다. 이에 우선 기록하고 후일을 기다린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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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49권 책문(策問) 2

마정(馬政)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추시(秋試)

우리 동방에서도 이 정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감목관을 설치하여 분양하는 제도를 창설하고, 이것으로 잘 다스리는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과 잘 싸우는 군마(軍馬)를 준비하였다. 과하마(果下馬)는 중국에서도 유명하였으며 토산 말이 국내에 성하였다. 그러나 어쩌다 근래에 들어 축산물이 번식하지 않아서 목장의 폐단이 점점 불어나고, 토산 말은 모두가 관단마(款段馬)이며 무역하는 말도 모두가 노태(駑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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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67권 일득록(日得錄) 7

정사(政事) 2

원임 대교 신 윤행임(尹行恁)이 기유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탐라(耽羅)는 예로부터 명마(名馬)가 생산되었는데, 국초(國初)에 또 태조대왕(太祖大王)이 타던 팔준마(八駿馬)를 돌려보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진공(進貢)하는 가운데 팔준마의 종자가 있다. 그러나 종자에서 또 종자를 취하여 이미 수백 년이 되었고, 그 외에 진공하는 것도 모두 한 도(島)에서 생산하는 것을 뒤섞어 모아 구차히 그 수를 채우니, 마정(馬政)이 모양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같은 적이 없었다. 비록 급박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러한 과하마(果下馬)로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지금 만약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에서 좋은 말을 많이 사다가 기른다면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말을 이루 다 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탐라의 수령이 된 자 중에 이 일에 뜻을 두었던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진실로 한탄스럽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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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교직각 신 서영보(徐榮輔)가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 안의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는 동교(東郊)를 제일로 치니, 동교에 목장(牧場)을 설치하여 해마다 공마(貢馬) 약간 필(匹)을 방목하고 있다. 감여가(堪輿家)들은 용마봉(龍馬峯) 및 용담(龍潭)이 있어 그 땅이 말을 기르기에 알맞다고 한다. 내가 이 땅에 대해 크게 널리 개척하여 중국에서 사 온 좋은 말과 탐라(耽羅)에서 생산되는 좋은 말 수천 필을 교배하여 종자를 취하고자 하니, 10년 만에 수만 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각도에서 나누어 기르는 폐단이 해소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약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금방 1만 필을 소집하여 내구(內廐)에서 가져오듯 할 수 있을 것이니, 나라를 위해 도모하는 장구한 계책으로 이 또한 한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유사(有司)의 신하들은 매번 방성(防城)과 거석(拒石)의 비용으로 대사농(大司農)의 공전(工錢)을 쓰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 이는 속담에 이른바 기와 하나를 아껴 큰 집을 썩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듣건대, 태복시(太僕寺)의 하속(下屬)들이 본 목장의 시초(柴草)를 여러 궁가(宮家) 및 경상(卿相)의 집들과 부화뇌동하여 값을 받고 판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에 목장이 설치되면 이 이익을 잃을까 염려하여 갖가지로 막아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한다니 매우 한탄스럽다. 만약 나라를 경영하여 대책을 세우는 자들이 일찌감치 스스로 계책을 세운다면 역사에 어찌 고려(高麗)의 과하마(果下馬)라는 기롱이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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