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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치학(格致學)으로 본 상해(上海)와 원산(元山)

한부울 2012. 3. 7.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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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치학(格致學)으로 본 상해(上海)와 원산(元山)

 

격치학의 격치는 사물의 이치를 바로 잡는다는 뜻으로서 격치학은 때로 '格物學' 또는 '窮理學'이라고도 불렸는데, 오늘날의 물리학에 해당한다. 또 어떤 자료를 보면 근대 철학사상가들이 과학을 '격물학(格物學)' 혹은 '격치학(格致學)'이라고 불렀다 한다.

 

네이버지식을 보면 조선에서 설립한 원산학사는 1880년 4월 원산이 개항하여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시작하자(참고:上海以及1871年以后的日本商) 덕원·원산의 지방민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외국의 도전에 대응하기로 하고, 나름대로 서당을 개량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1883년 1월에 새로 부임해온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 1817-1899)에게 설립기금을 모집할 뜻을 밝히고 근대 학교를 설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邊防軍事長官) 어윤중(魚允中, 1848-1896)과 원산항 통상 담당의 통리기무아문 주사(統理機務衙門主事)인 승지 정헌시(鄭憲時)의 지원을 받으면서 관민이 합심하여 1883년에 원산학사를 설립하였다. 설립기금은 덕원·원산의 주민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정헌석·어윤중·정헌시·외국인 등이 참여해서 모았으며, 1883년 8월에 학교 설립을 정부에 보고하여 정식 승인도 받기에 이르렀다. 설립 초기에는 학교를 문예반과 무예반(武藝班)으로 편성하였는데, 문예반 정원은 없었으나 약 50명의 학생을 뽑았고, 무예반은 정원 200명을 뽑아서 교육·훈련하여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도록 하였다.[네이버지식 중 발췌]

 

여기서 보면 원산학사에서 가르친 교과목에서 격치학(格致學)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고 생뚱맞게도 문예반과 무예반(武藝班)을 가르쳤다 하였는데 한심한 일제의 농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때 나라 정세를 보았을 때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나눠 군사력을 키워야 했다는 당위성을 나타내는 듯한 설명이지만 결국 대조선의 패인은 우수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쇄국정책에 기인 한 것이라 덕원·원산의 지방민들이 이미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민까지 이렇게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원산학사는 우수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학교를 세워야 했다는 논리가 맞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군관민이 거금을 들여 원산학사를 기어코 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일제가 설명하는 군사문제였다면 과학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군병을 키우는 군사학교가 더 타당하다 할 것이다.

원산학사는 군사학교란 사실은 자료 어디에도 없다.

더군다나 반도사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굴욕적인 함포외교 당하고 강화도협약이 7년전 1876년에 있었다 하였는데 문예나 무예보다 우선적으로 서양문물을 식별할 수 있는 민의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도사는 조선인들은 스스로 계속 우물 안에 개구리가 되고자 노력했다는 식으로 날조하여 급변하는 세태를 거슬리는 행위만을 반복한 것처럼 그리고 원산학사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서 이를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하지만 다른 자료를 보면 원산학사에서 가르친 것은 분명 서양신지식학문인 격치학(格致學)을 가르쳤다고 나온다.

근대 교육이 실시되면서 원산학사(元山學舍)에서는 서양의 자연과학격인 격치학(格致學)을 번역해서 가르쳤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林乐知在上海创办中西書院(Anglo-Chinese College)

 

여기서 문제는 당시 영국으로부터 청 정부(淸政府, Qing Government)로 호칭되며 동아시아대륙을 조선으로부터 분리시켜려는  청(淸)은 1882년부터 본격적으로 신 중국에서 신중국운동이 시작되는 때이고 미국의 정책과 맞아 떨어져(zero sum game) 선교사 신분으로

On Dec. 18, 1859 Young and Mary Allen and their infant daughter, Mellie, sailed from New York and on July 13, 1860 reached Shanghai.

1859년 12월 18일에  영(Young)은 아내 앨런과 유아 딸 (Mellie)와 함께 뉴욕에서 항해 출발하여 1860년 7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파견된 미국인 감리교회(Methodist Society)선교사 알렌(Yong John Allen, 1836-1907)은 직접 진보한 서양과학학문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1879년 처음으로 격치계몽《格致启蒙》을 번역하였고 이어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을 신 중국 전역에 보급하기 위하여 미래의 재목이라고 할 수 있는 신중국학생들을 가르치기로 결정한다. 상해(上海, Shanghai)에 손수 땅을 매입하면서 미국정부와 청정부에 협조를 얻어 1882년에 정식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 Anglo-Chinese College)이란 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1년 후 한반도에선 변방국이며 조공국이고 청의 속국이라는 처지에 있던 조선이 대국에게 눈치없이 격치학(格致學)과 기타 의학(醫學, medicine), 지리(地理, geography), 천문(天文, astronomy), 화훼(花卉, flowering plant), 금수(禽獸), 농리(農理), 기기(機器, apparatus)를 가르치기 위해 원산학사(元山學舍)를 그것도 미국인의 도움없이 조선인끼리 합심하여 설립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 할 수가 없다.

 

격치학(格致學)을 미국인 알렌이 처음 번역했다는데 어떻게 조선까지 이 격치학이 흘러 들어왔는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물론 알렌이 조선에 들어와 원산학사에서 이 격치학을 가르쳤다는 사실 또한 나타나는게 없다.

어떻게 조선에서 이렇듯 독자적으로 이 격치학을 가르쳤을까?

정부가 나서 할 수 없는 일을 지방민이 건의하고 군관민이 합심해서 원산학사를 설립했다 하니 대단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미국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대국이라고 하는 신중국보다 비록 1년 늦게 자발적, 합심으로 조선인끼리 세웠다지만 학교 설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의 아이템(item)이 가르치는 교과목이라면  분명코 서양신지식학문인 격치학과 서양과학은 당시 조선 현실문제에서 충분하고 바람직한 교육아이템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격치학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습득한 교사일 것인데 이러한 상황은 알 수가 없다.

한반도 형편상 신중국 상해에 있었던 이 미국인 알렌과 도저히 엮일 수 없는 조공국(朝貢國)이며 청의 속국인 변방 한반도 조선의 처지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데 이것을 뛰어 넘었다 하니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이런 일들이 가능한가?

물론 이 보다 더 세세한 것은 역사학자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치적으로 따져 볼 때 도저히 이런 상황은 당시 조선처지로 보았을 때 행동에 옮기는데 자금문제뿐만 아니라 인프라 구축문제에서도 난망이고 국제적인 도움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격치학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격치학이라면 선진국가의 도움없이는 할 수 없는 교육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다.

즉 미국인 알렌의 도움없이 신지식학문인 격치학(格致學)을 가르쳤던 원산학사가 상해보다 1년 늦은 1883년에 한반도 원산에 설립되었다는 사실과  감리교 선교사 미국인 알렌이 주도하에 동아시아대륙 신중국 청나라 상해에 격치학을 가르칠 수 있는 중서서원을 한반도 조선보다 일년 빠른 1882년에 설립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놓고 보면 분명 하나는 날조되거나 거짓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일까?

동아시아대륙인가?

 

두 가지 다 이야기 소재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당시 역사판짜기에서 이야기를 따로 분리하여 하나는 신중국용 한문역사를 하나는 영어로 또 하나는 한반도용 역사로 나눈 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이 이야기 소재로 꾸며진 역사에서 신중국한문과 영어는 내용이 같을 수밖에 없다.

미국인 알렌이 번역한 격치학(格致學) 격치계몽《格致启蒙》은 사실이며 이어 그는 다시내용을 보충한 것으로 이후1886년에 격치소인《格致小引》과 1889년에 격물입문《格物入门》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다.

당시 알렌은 동아시아대륙상해나 한반도 원산 중 어느 한 곳에서 가르쳤을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인데 그곳은 바로 원산이고 상해이며 원산학사이며 중서서원이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을매(於乙買), 우물군(井泉郡), 선주(宣州), 선성군(宣城郡), 덕원군(徳源郡)으로 지명 변천된 원산(元山)은 바로 신 중국 상해(上海, Shanghai)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도 선주(宣州), 선성(宣城)은 상해 옆에 찰떡같이 붙어 있다.

[세계삼한역사연구: 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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