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조선지진(朝鮮地震)-Ⅰ

한부울 2012. 1. 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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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corea, korai)에서 발생한 지진(地震)지역은 지중해와 중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6

지진기록으로 본 고구려(高句麗)는 그리스(Greece)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5

신라(新羅) 지진(地震)은 바로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4

백제는 시리아, 터어키 남부와 그리스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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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진(朝鮮地震)-

[천명인:한부울]무단복제금지 링크가능

 

 

프랑스 글에서 "La Corée du Choson"이란 단어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풀어보면 조선(朝鮮)의 고려(高麗)라는 말이다.

조선(朝鮮)이 있고 고려(高麗)가 부차적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혼란스럽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선(朝鮮)이 있었으며 동시에 고려(高麗) 또한 동시대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조선(朝鮮)내에 고려(高麗)가 있다 란 해석도 된다.

조선(朝鮮)은 그릇이고 고려(高麗)는 그 그릇 안에 있는 밥이란 비유도 가능하다.

조선 땅에 사는 고려인이라는 말도 된다.

조선영역에 고려문화라는 말도 된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은 조선(朝鮮)은 없고 고려(高麗)만이 남아있는 환경이다.

고려(高麗) Coree, Corea 가 아닌 Korea 란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지 고려, 조선의 진정한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진정한 역사의 고려와 조선(朝鮮, Choson)을 매일 찾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찾지 않으면 누가 찾겠는가?

프랑스인이 "La Corée du Choson"라고 한 고려와 조선(朝鮮)의 상관 관계를 명확하게 살펴 볼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에서 난 지진(地震)

지진 발생에 대한 이력상황을 보니 분명 한반도가 아니다.

서쪽으로 떨어진 지중해연안과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이고 대륙으로 이어진다.

주로 지중해연안, 그리스, 터어키, 북아프리카, 동유럽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발생한 지진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사실 년도가 일치한다.

왜 지중해 연안에 대지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면 위 지진판지도에 보듯이 그곳에는 유라시아지진판과 아프리카지진판, 아라비아판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로 판끼리 충돌하는 표면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중해연한 그리스 터키지역에서 대지진이 몰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유라시아지진판안에 한반도가 안전하게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는 판과 판이 충돌할 여지가 없는 곳이다.

때문에 한반도는 대지진이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적어 안전지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서 대지진 기록이 수백 아니 수천차례 기술해 놓았다는 것은 기록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역사란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중해연안에서 발생한 지진년도와 삼국사기,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지진년도가 일치한다는 것은 한쪽을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느쪽이겠는가?

지진판이 있는 지중해연안인가? 아니면 지진판이 없는 한반도이겠는가?

거짓으로 꾸민곳은 안타깝게도 한반도이다.

 

지진이 발생한 기록이 용케도 조선왕조실록에 자취가 남아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이렇게라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전부 일제총독부에 의해 관리되었고 일본내에 옮겨져 한동안 보관하다가 우리가 건네 받은 시기가 그리 오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인식해야 한다.

무엇때문에 긴 시간 보관하고 관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모든 사서를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도 가능한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도 우리가 짐작한다.

그렇게 관리 된 조선왕조실록이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천치와 같은 것이라고 몇번이고 본 블로그가 강조했다.

그런 조선왕조실록에서 지진 기록이 그나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진짜 다행스럽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진 기록들이 워낙 방대하니까 검색에서 걸려지지 않아 놓치고 일제가 완전하게 없애버리지 못했거나 숨기지 못한 것이라고 할 때 천지신명님께서 다행스럽게 지켜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본 블로그가 명명백백 밝혀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기쁘다.

이런식으로 남은 기록에서 그리스 지진학자가 연구하고 기록한 지진기록을 대조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진 발생상황을 자세히 본 블로그가 정리하여 시리즈별로 밝혀 놓았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본 블로그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한 조선때 지진 발생 사건을 년도별로 나누어 발췌하고 크게 12가지형태로 만들어 건건별로 그리스지진학자가 만든 기록과 대조하여 조사해 보았더니 이 모두가 지중해 연안과 중동지역에서 공히 발생한 지진기록과 거의 일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누구든지 본 블로그에 들어와 편하게 보면서 알 수 있도록 지도와 기사 기록을 병립하여 밝혀놓았다.

그냥 읽어보면 알 수 있고 실감난다.

진짜 지진이 발생한 곳.

아 조선이 여기에 있었다니......깜짝 놀랄 만도 하다.

잡다한 이야기는 잔소리다.

이렇게 일일이 찾아 밝혀놓은 것을 못믿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역사찾기에 본질이다.

한반도 조선은 한반도에도 있었지만 지진을 기록한 조선은 이미 확인한 것처럼 지중해 연안과 그리스, 터어키, 중동, 북아프리카 등지까지 영역이 확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한 것이니 알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면 지진판이 만나지 않아 지진이 발생하지 않는 조선영역은 어디까지 겠는가?

지진발생한 장소를 깃점으로 한다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그리스지진학자가 기록한 지진 발생지 모두가 바로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언급이 필요 없다.

전해오는 속담처럼 "천지가 조선 땅"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근원지는 속일 수 있어도 자연발생적인 엄청난 재해가 있는 대지진의 진원지는 도저히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 블로그가 찾고자 하는 삼한의 역사를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진이 발생한 땅 그곳은 바로 삼한의 땅이었고 고려의 땅이었으며 조선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은 천지신명 하느님의 도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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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태종11년신묘(1411,영락 9)윤 12월4일(경신)경상도 봉화현(奉化縣)에 지진(地震)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85–386p)

1.Antivari AD 1411 July 3 earthquake

 

                                     (Antivari-휴양지로서, 해안, 항구, 항만 港灣 도시)

                                              

2.Bar AD 1411 July 3 earthquake

 

 

바르(세르비아어: Bar, Antivari, Antibari, Antibarium)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 위치한

몬테네그로의 중요한 항구도시이다. 중요한 경제 인프라로 바르(Bar) 항구, 벨그라데-바르(Belgrade–Bar) 철도와 소지나(Sozina) 터널 등이 있다. 항구는 3,100m에 달하는 해안과 5백만 톤에 달하는 물품들을 실을 수 있는 크레인 및 다리 등의 시설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철도는 1976년부터 운행되어 아드리아해와 중부유럽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프리모르카(Primorka)’ 식품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올리브유과 석류주스가 유명하다. 1937년 설립된 아열대식물센터는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기관으로 아열대식물 재배와 환경보호를 위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12세기 비잔티움제국, 15-16세기에 베네치아공화국, 15세기 말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도심 곳곳에서는 일리리아 시대 때부터의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평균 최고기온은 28 °C , 최저기온은 10°C 로 3월부터 12월까지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가 이어진다. 특히, 스카다르스코호(Skadarsko L.)와 타레강(Tare R.) 전경이 아름답고, 삼림과 대초원이 많아 다양한 여가활동 및 일광욕을 즐기기에 좋다. [네이버 백과사전]

 

1411年10月8日(明永乐九年九月十二日,藏历第七绕回 阴铁兔年九月十一日) 西藏当雄西南一带 (30.1°N,90.5°E)M8(震中烈度10-11)

 

                                                       서장성, 당웅(西藏当雄)

 

[2]연산군 6년 경신(1500,홍치 13)

7월28일(경진)평안도의 평양·삼화(三和)·용강(龍岡)·함종(咸從)·순안(順安)·강동(江東)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8월25일 (정미)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415p)

1.Hellenic Arc AD 1500 July 24 earthquake

 

 

                                               헬레닉아크(Hellenic Arc-Central Crete)

 

2.Istanbul AD 1500 earthquake

 

                                                                (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보스포루스해협·골든혼(Golden Horn)·마르마라해(海)에 의하여 베욜루·이스탄불(파티프)·위스퀴다르의 3지구로 대와는 골든혼의 갈라타교와 아타튀르크교로 연결되어 있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역(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외국은행이 많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쉴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고고학박물관·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에 병영(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식품가공·농기구·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하며 매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130척이 넘는다.[네이버 백과사전]

 

1500年1月13日(明弘治十二年十二月己丑)云南宜良(24.9°N,103.1°E)M≥7(震中烈度≥9)

 

                                                       운남성 의량(云南宜良)

 

[3]중종 10년 을해(1515,정덕 10)

8월10일(갑자) 지진(地震)이 있었다.

9월21일(갑진) 경기 파주(坡州)·고양(高陽)·교하(交河)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0월1일(갑인)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근사(金謹思)등이 상소하기를, “이달 21일에 파주(坡州)·교하(交河)에 지진 (地震)이 있었고, 또 듣건대 경상도 함창현(咸昌縣)의 민가에서 발이 셋 달린 닭이 났다고 합니다.

10월11일 (갑자)경기 파주(坡州)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436p)

1.Lefkas AD 1515 April 6 earthquake

 

                                                           레프카스(Lefkas)

 

레프카다(Lefkada, or Leucas or Leucadia)또는 레우카스(이탈리아어: Santa Maura)는 이오니아 해에서 그리스 서부 해안에 있는 그리스의 섬으로 그리스 본토와는 부교나 둑길로 연결되어 있다. 섬 북쪽에 레프카다 시가 있다. 레프카다 섬과 인근 작은 섬(메가니시, 칼라모스, 카스토스, 마두리, 스코르피오스, 스파르티)들은 행정 구역상 레프카다 현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탈리아어로는 산타 마우라(Santa Maura)이다. 그리스 서쪽 이오니아해(海)에 있는 그리스령 섬으로, 레프카다와 메가시니(Meganisi), 칼라모스(Kalamos), 카스토스(Kastos), 마무리(Madouri), 스코르피오스(Skorpios), 스파르티(Sparti) 등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엔 덥고 겨울은 산악 지방을 중심으로 선선하다. 중심 도시 레프카다는 섬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악티온(Aktion) 공항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걸린다.

 

지중해를 면하고 있는 서쪽 해안에는 포르토 카치키(Porto Katsiki)라는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황금색 모래와 세찬 파도가 장관인 해변이 있다.

 

레프카다섬에서 가장 큰 리조트는 북쪽에 있는 니드리(Nidri)이다. 니드리 남쪽 20㎞ 지점에는 윈드서핑의 메카인 바실리키 리조트가 있다. 동부 해안 쪽으로 레프카다, 니키아나(Nikiana)와 페리기알리(Perigiali) 등 소규모 리조트가 있다. 리조트에서는 스코르피오스, 메가니시 등 작은 섬들과 그리스 본토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네이버 백과사전]

 

2.St Maura AD 1515 April 6 earthquake

3.Greece AD 1515 July 31 earthquake

 

1515年6月27日(明正德十年五月壬辰)云南永胜西北(36.7°N,100.7°E)M73/4(震中烈度Ⅹ)

 

                                                        운남성 영성(云南永胜西北)

 

[4]선조 21년 무자(1588,만력 16)

1월1일(을유)전라감사 윤두수(尹斗壽)가 장계(狀啓)하였다.

“용담현(龍潭縣)에서 지난 해 12월 15일에 지진(地震)이 서남방으로 부터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매우 컸습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467-468p)

1.Mecca AD 1588 January 4 earthquake

 

                                                               메카(Mecca)

 

아랍어로는 마카(Makkah) 혹은 마카 알-무카르라마(Makkah al-Mukarramah:고결한 도시)라고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 나라의 종교·행정·상업의 중심지이다. 히자즈(Hejaz)지방의 홍해 연안에서 약 80km 떨어진, 민둥산이 두 줄로 늘어선 계곡에 있다. 고대부터 성지로서 순례자가 많이 모이는 종교 도시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만년에 살았던 곳이라 하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살게 한 곳이라고도 한다. 메카 계곡의 가장 낮은 곳에는 잠잠 우물과 아브라함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카바 신전이 있으며, 카바 신전에는 신성한 검은 돌을 비롯해 아랍 부족민들이 숭배하는 여러 우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한편 메카는 고대부터 인도양과 지중해 연안 및 메소포타미아와 홍해 연안으로 통하는 통상로로 발달하였으며, 2세기 때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책에도 마코라바(Macoraba)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6세기 무렵부터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사산조 간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안전한 아라비아 반도를 통해로로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메카는 무역 중계지로 번창했다. 당시 아랍 부족 중 쿠라이쉬족(族)이 5세기 후반부터 메카의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570년경에 그 지파(支派)인 하쉼가(家)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나 신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을 창시하였다. 여러 우상들이 모셔져 있던 카바 신전은 630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무슬림군을 이끌고 메카를 정복한 뒤 유일신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었으며, 그때부터 메카는 이슬람 세계의 으뜸가는 성지가 되었다.

 

메카를 중심으로 지름 약 100km의 지역이 하람(성역)이며, 13억이 넘는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북위 21도 25분 24초, 동위 49도 24분에 위치한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 예배를 드리며, 이 기도의 방향을 '끼블라(qiblah)'라고 한다. 메카를 비롯하여 이슬람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 '핫지(Hajj)'는 무슬림으로서 지켜야 할 5가지 의무 중 하나이며, 해마다 순례의 달인 '두 알 힛자(Dhu al-Hijja, 이슬람력 12월)에는 약 250만 명의 순례자가 모여든다. 순례자들은 메카의 중심인 카바 신전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7번 도는 의식을 치르며, 가능하다면 신전의 중앙에 위치한 높이 12m의 흑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성묘에 입을 맞추거나 손으로 만지곤 한다.

 

그러나 메카는 이슬람 제국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A.D. 683년 우마이야조의 칼리프 야지드(Yazid)가 칼리프조의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으며, 그 뒤를 이은 아바스조의 수도는 바그다드였다. 1517년 이후 메카를 비롯한 아라비아 반도 전역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지만, 메카는 제 4대 정통칼리프 알리(Ali)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하쉼가(家)의 수장에 의해서 지켜져왔다. 1926년 하쉼가는 사우드가(家)에 의해 메카의 통치권을 빼앗겼으며, 이후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통합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메카 [Mecca ]미국 인디애나주 파크 카운티(Parke County)에 있는 타운.

 

2.Medina AD 1588 January 4 earthquake

 

                                                           메디나(Medina)

 

아랍어로는 알마디나(al-Madinah)라고 한다. 이슬람교 성지이며, 메카 북쪽 약 340km 지점, 와디함두강 상류의 오아시스 지역에 있다. 원래 야스리브(Yathrib)라 불리는 유대인(人) 촌락이었으나, 5세기 말에 아랍인이 정착하였고, 622년 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이곳으로 이주(헤지라)한 후 이슬람의 정치 ·교단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메디나’라는 이름은 본래 ‘예언자의 도시’라는 말의 준말이다.

 

무함마드 사후에도 4대째 칼리프인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이슬람 국가의 수도였다. 농업지역을 배후에 두어 대추야자를 비롯한 과일·곡류의 집산·거래가 활발하다. 남서쪽으로 150km 떨어진 홍해안의 옘보를 외항으로 거느리며, 메카와의 사이에 고속도로가 뻗어 있다. 북동쪽의 성벽을 두른 구시(舊市)는 교조 무함마드와 그 후계자인 아부바크르 및 우마르의 묘가 있는 성역이어서, 메카 참배 후 찾아드는 순례자들로 붐빈다. 1962년 이슬람 대학이 설립되었다.[네이버 백과사전]

 

메디나[Medina]

미국 노스다코타주 스터츠먼카운티에 있는 도시이다.

미국 위스콘신주 우타가미카운티에 있는 자치구이다.

 

3.Red Sea AD 1588 earthquakes

 

 

                                                            홍해(Red Sea)

 

길이 약 2,300km. 남부 너비 약 360km. 북부 너비 약 200km. 면적 약 44만㎢. 부피 22만㎦. 최대수심 2,213m. 인도양과는 바브엘만데브 해협, 지중해와는 수에즈 운하로 이어진다. 투명도 약 30m로서 여러 빛깔의 열대어의 유영이 잘 보인다. 바닷 속에 있는 해조 때문에 물빛이 붉은빛을 띠는 일이 있으므로 ‘홍해’라고 불린다. 동(東)아프리카 대지구대(大地溝帶)의 일부이며 두 개의 대단층(大斷層)으로 이루어진 요지(凹地)에 물이 괴어 형성되었다.

 

건조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해수의 증발도가 대단히 높으며, 와디(乾川: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강) 외에는 항상 유입하는 하천이 없기 때문에 염분이 많다. 표면 염분은 평균 37∼41‰로, 페르시아만(灣)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바다로 알려졌다. 홍해의 염분과 수온(여름철에는 표면 30℃, 겨울철에는 20℃)은 균질하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으나 1948년 스웨덴의 관측선에 의하여, 북위 21°, 동경 38° 부근의 해저에 고온이며 염분이 많은 함수괴(鹹水塊)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64년에는 미국과 독일의 관측단에 의하여 이 함수괴는 심도 2,000m 되는 곳에 있으며, 수온 44℃, 염분 270‰임이 밝혀졌다. 해안선의 대부분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바다에 작은섬 ·산호초 ·바위가 있어 양항(良港)은 적으나 아라비아 반도 연안에서는 아코바 ·지다, 아프리카 연안에서는 수에즈 ·포트수단 ·마사와 등의 항구가 발달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4.Sinai AD 1588 January 4 earthquake

 

                                                           시나이(Sinai)

 

                                                               (시나이 산)

 

이집트의 동북 국경, 홍해와 지중해에 둘러싸인 반도. 이집트와 중동, 그리고 서아시아의 교통로로서 또 고대 이집트에서는 구리, 터키석(石) 등의 공급지로서 요충지임. 고대 이집트 인이 개발한 중요한 광산으로는 고왕국~신왕국 시대(B.C. 2686경~B.C. 1085경)에 활발히 채굴된 와디 마가라(Wadi Maghara), 중왕국~신왕국 시대(B.C. 2050~B.C. 1085경)의 세라비트 ∙ 엘 ∙ 카딤(Serabit el Khadim) 등이 있다. 후자에는 ‘터키석으로 된 땅의 여주인’이라고 불리는 하트호르 여신의 신전도 세워졌다. 이집트 문자와 셈계 알파벳을 잇는 중간 단계인 특수한 알파벳 식의 시나이 문자(B.C. 2000년대 중기경)도 발견되었다. 반도의 중남부 시나이 산(山)이라 불리우는 산악지대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종종 『구약성서』(「출애굽기」등)의 무대로 등장하여 자발 무사(모세의 산), 자발 샤파(호레브의 산) 등의 유서 깊은 산들이 있다. 성 카테리나 수도원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565경)의 창건으로, 토민의 습격에 대비하여 견고한 성벽을 두르고 성모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성당은 다듬은 돌로 건축된 바실리카 건축으로 사각형제실이 좌우에 있는 아프시스는 사각형 플랜을 지녔으며, 아프시스의 반원개(半圓蓋, 그리스도 變容) 및 승리문(모세의 설화 등)에 귀중한 모자이크가 현존한다. 특히 수도원에는 6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이콘, 삽화가 들어 있는 사본이 많이 있고 일부는 키에프(시립미술관)에 옮겨졌다.

 

5.Tabuk AD 1588 January 4 earthquake

 

                                                             타부크(Tabuk)

 

무함마드 때 이 곳 주위에서 타부크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오래된 모스크와 타부크 요새,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설된 헤자즈 철도 등이 있다. 타부크 지구에서는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많은 유적이 발굴된다.

 

6.Batnun, AD 1588 April 7 fissures

 

 

 

 

7.Cairo AD 1588 earthquakes

 

                                                                 (카이로)

 

나일강(江) 삼각주의 남단에서 약 25km 남쪽 나일강 우안에 있다. 시가는 하중도(河中島)인 게지라섬에서 강의 좌안까지 펼쳐지며 아랍권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1월 평균기온 12.7℃, 8월 평균기온 27.7℃, 연평균강수량 25mm이다. 카이로라는 이름은 969년부터 불렸으나 도시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는 현재의 카이로 남쪽 교외, 나일강 좌안에 해당하며, 로마·비잔틴 시대에 형성되었다. 바빌론이라고 하던 도시는 지금의 구(舊)카이로(Old Cairo:Misr al Atika)에 있었다. 또한 아랍인이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 정복자 아므르 이븐 알아스가 바빌론의 동쪽 가까이에 새로운 도시 푸스타트(Fustat)를 건설하고, 9세기에 이집트가 바그다드에 종속하였을 때에는 푸스타트의 북동쪽에 접한 곳에 나중에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 아마드 이븐 툴룬이 새로이 카타이(Katai)를 건설하였다.

 

10세기에 마그레브를 본거지로 하는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였을 때 장군 조하르 알루미가 카타이의 북쪽에 새 수도 카히라(Kahira)를 건설하였는데(969), 카히라는 ‘승리’라는 뜻으로 카이로의 어원이 되었다. 이곳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경제적으로도 다수의 인구를 부양하는 데 적당하였기 때문에 고대부터 도시가 건설된 것이지만 같은 이유로 카히라라는 지명이 되고 나서도 지배자의 변동은 심하였다. 아이유브왕조(1169∼1250) ·맘루크 왕조(1250∼1517)의 지배를 거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통치할 때에는 문화가 정체하였으나, 1798∼1801년 프랑스 점령시대에는 시가가 확장되었고, 영국과 터키의 연합군이 카이로를 프랑스에서 탈환하여 터키의 주권하에 메메드 알리 왕조의 수도가 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882년 반(反)터키·반영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영국군이 진주하고, 이집트의 영국보호령화(1918), 형식적인 독립(1922) 등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1946년까지 카이로를 지배하였다. 오늘날에도 카이로에는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다. 시내는 전통적인 구시가(아랍街)와 신시가(이스마일區)로 나뉘며, 신시가에는 정부청사·회사·은행·호텔 등이 있다. 나일강 서쪽에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고, 시내에는 옛 성채와 아므르사원(642)·알아즈하르 사원(970)을 비롯하여 많은 이슬람 사원과 궁전 등의 건축물·박물관, 그 밖의 문화시설이 있어 관광자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지하철이 건설되었고, 북서쪽 약 180 km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하여 포트사이드·이스마일리아·수에즈·훌완과는 철도와 국도로 연결되며, 카이로-이스마일리아의 운하 등 나일강과 그 삼각주 지대의 수로에 의한 수운도 발달하였다. 교외의 헬리오폴리스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예로부터 정치·군사·무역·학술·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방적·식품가공 등의 경공업도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철강·조선·철도차량·화학비료 등의 중공업, 석유정제·석유화학공업 등도 발달하여 수에즈의 정유공장과 송유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알아즈하르대학은 970년 설립되었으며 그 밖에 카이로대학(1908년 설립)·아메리카대학(1919년 설립)·아인샴스대학(1950년 설립된 옛 이브라힘파샤대학)의 4개 종합대학 외에도 많은 고등교육기관·조사연구기관이 있다. 아랍 연맹의 본부가 있으며, 아프리카와 아랍의 망명정당 사무소도 설치되어 있어 망명 정치가의 활동이 활발하다. [네이버 백과사전]

 

미국-카이로[Cairo]

미국 일리노이주 알렉산더카운티에 있는 도시이다. 일리노이주(州)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이다. 알렉산더 카운티의 행정 중심지이다.

미국 일리노이주(州)의 남서부에 있는 도시. 알렉산더군(郡)의 군청소재지이며 오하이오강(江)과 미시시피강(江)이 합류하는 비옥한 농장 저지대에 있는 선적과 교역, 교통의 중심지이다.

 

8.Eilat AD 1588 January 4 earthquake

 

                                                              에일랏(Eilat)

 

에일랏은 이스라엘 최남단의 항구도시이자 관광지이다. 네게브 사막에 인접한 이 도시는 1949년 정전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영토로 확정되었으며, 동쪽으로는 요르단의 아까바(Aqaba) 항구도시와, 서쪽으로는 이집트의 타바(Taba) 시와 인접해있다.

 

기후가 매우 덥고 토양이 척박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B.C.8000년경부터 인류가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발굴이 1861년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에일랏은 고대부터 유향과 몰약의 교역로 중 한 곳이었으며, 특히 팀나(Timna)의 구리광산에서 채광된 구리를 주변 국가들로 수출하는 상업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도 에일랏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에일랏을 ‘엘바란’ 혹은 ‘엘시온 게벨(Ezion-Geber)’로 언급하고 있다. 출애굽 과정에서 이집트를 떠난 유대인들이 이 곳을 지나갔다고 언급되어 있다(민수기 33:34-35). 또한 에일랏은 다윗 시대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점유하고 솔로몬 시대에 교역항으로 크게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 따르면 솔로몬 왕의 배들이 에시온 게벨을 중심으로 오갔으며, 솔로몬 시대 이후에도 유대왕국의 가장 중요한 항구이자 상업도시로 언급되었다(열왕기상 9:26, 열왕기하 8:17-18, 20:35-37). 고고학적 발굴 결과 에시온 게벨이 오늘날의 에일랏으로 밝혀졌다.

 

로마와 비잔틴 로마 시대에 에일랏은 제국의 남부 국경도시로서 외부의 침입을 막는 병영도시이자 홍해로 나아가는 항구로 성장했다. 중세에는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아라비아 반도로 성지순례를 가는 길에 거쳐가는 중개지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 독립 직후에는 잦은 국경분쟁 등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나 1963년 에일랏-예루살렘간 도로가 개설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도시 뿐만 아니라 관광 도시로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에일랏의 인구는 46,000명이며, 공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홍해에 인접한 호텔 및 휴양지가, 서쪽에는 상업 및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1588年8月9日(明万历十六年闰六月十八日)云南建水曲溪(24.0°N,102.8°E)M≥7(震中烈度≥9)

 

                                                운남성건수곡계(云南建水曲溪)

 

[5]선조 37년 갑진(1604,만력 32)

2월6일(정해)경상감사 이시발(李時發)이 장계하기를, “대구 판관(大丘判官) 조홍립(曺弘立)의 첩정(牒呈)에 ‘이달 4일 축시(丑時)에 지진(地震)이 동북 간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향하였는데 잠시 뒤에 그쳤다. 변이가 비상하다.’ 고 치보(馳報)하였습니다.

2월26일 (정미)경상 감사 이시발(李時發)이 아뢰기를,“예천 군수(醴泉郡守) 이충가(李忠可)의 첩정(牒呈)에 ‘정월 19일 축시(丑時)에 남에서 북으로, 20일 축시에는 서에서 동으로 지진(地震)이 있었으니, 이변이 비상하다.’ 하였으므로, 첩정의 내용이 사실인지 사방 이웃고을에 이문(移文)하여 알아보게 하였습니다.”하였는데, 입계하였다.

6월11일 (경인)충청도 관찰사 이홍로(李弘老)가 장계하였다.

“5월 13일 유시(酉時)에 이산(尼山)에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울려갔습니다. 연기(燕岐)에서도 지진이 있었는데 남쪽에서 동쪽으로 울려갔습니다. 이달 3일 축시(丑時)에 청주(淸州)에 두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울려 갔습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472p)

1.Bekaa Valley AD 1604 earthquake

 

                                                    베카계곡(Beqaa Valley)

 

베카계곡(Beqaa Valley)은 레바논의 계곡으로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에서 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서쪽에 있는 레바논 산맥과 동쪽에 있는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에 위치한다. 레바논의 대표적인 풍요로운 농업 지대로 손꼽히며 북쪽에 있는 오론테스 강과 남쪽에 있는 리타니 강은 이곳을 거쳐 흐른다.

 

1975년 레바논 내전 발발 때부터 2005년까지 이스라엘과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2.Damascus AD 1604 earthquake

 

                                                     다마스쿠스(Damascus)

 

아랍어로는 디마시크(Dimashq)라고 한다. 시리아 사막 중앙부에 있는 오아시스에 자리잡고 있다. 안티레바논 산맥 동쪽 기슭, 시리아 고원을 흐르는 바라다강이 형성한 높이 700m의 선상지에 위치한다.

 

기후는 건조하여 연강수량 234mm 내외이며, 기온은 여름에 높아, 8월 평균기온이 27.6℃이고, 겨울은 온난하여 1월 평균기온이 7.7℃인데, 특히 여름에는 일교차가 크다. 안티레바논산맥에서 발원하는 바라다강을 관개에 이용하여 선상지 일대에는 용수로가 사방으로 뻗어 밀·포도·올리브·채소 등의 재배가 활발하며, 견직물·융단·가죽세공·금은세공·장식품 등의 전통적인 수공업이 활발하다. 식료품·섬유·화학·제당·유리·시멘트 등의 근대공업도 성하다.

 

구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밝혀져 있는 옛 도시로, 바울이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려고 왔다가 이곳에서 성스러운 예수의 모습을 보고 뉘우쳐 독실한 사도가 되었다는 고사(사도 9장)가 말해주듯이 중동의 옛 종교문화를 보호 ·육성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슬람교 제4의 성적(聖蹟)으로 알려져 있는 다마스쿠스 대사원(오미아드모스크)은 705년 건설된 것으로 지금도 시의 중심부에 보존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이기도 하였다. 이 도시는 시가의 중앙을 동서로 흐르는 바라다강에 의하여 남북으로 나뉘어진다. 남쪽은 예로부터 발달된 시가지로 옛 성채·대사원·시장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에 그리스도교도, 남쪽에 유대교도의 거주구가 있고, 다시 그 남쪽 교외까지가 이슬람교도들의 거주지역이다.

 

시의 중심으로부터 북쪽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속히 발전을 보인 곳으로, 고급상점·관청·호텔·병원 등이 많다. 또 시의 서쪽에는 1924년 창설된 시리아대학이 있고, 그 북쪽에는 근대적인 고급주택지가 발전하고 있는데, 이곳은 종교·종파적인 집단거주가 인정되지 않는 순수한 일반 주택지로 되어 있다. 다마스쿠스는 예로부터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隊商)의 통로가 교차되는 육상교통·교역의 요충지 및 순례지로서도 유명하였다. 오늘날에는 교통수단의 변화에 따라 자동차·철도·항공의 요지, 관광의 거점이 되고 있으며, 정치·경제·교육·출판 등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주민은 아랍계(系) 주민 외에 유대인·아르메니아인·페르시아인이 다소 거주하나 약 80%가 이슬람교도이며 그 가운데 수니파(派)가 압도적이다. 약 6만 명의 그리스도교도는 정치·경제·문화면에서도 유력한 세력이다. 시의 서부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에 해마다 인접국가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기원전부터 오리엔트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어, 다마스쿠스의 이름은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비문(碑文)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BC 10세기에는 아랍인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였으나, BC 723년 아시리아에게 멸망하여 쇠퇴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발전을 이루지 못하다가 BC 66년부터 로마제국의 속령으로서 다시 번영하였고, 그리스도교의 부흥과 더불어 교구청이 설치되는 등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635년 아랍인이 침입하고, 7세기 후반부터 이슬람교의 발흥과 함께 번영하여 이슬람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076년 셀주크투르크가 점령하였고, 1148년 십자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12세기 후반에는 아이유브왕조(王朝)가 일어나 살라딘 치하에서 큰 번영을 이루어 종교·문화면에서도 개화기를 맞아 화려하고 장엄한 수많은 모스크가 건축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의 대군이 침입하여 30만의 시민이 학살되는 등 철저히 파괴당하여 그 후 반세기 이상이나 폐허상태에 놓였다가, 1516년 이후 오스만제국의 한 중심지를 이루고, 또다시 예전의 지위와 번영을 되찾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아랍인이 시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할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시리아의 독립과 동시에 수도가 되었다. 시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미국-다마스쿠스 [Damascus]

미국 일리노이주 스티븐슨카운티에 있는 지명이다. 일리노이주(州) 북서부에 위치한다.

다마스쿠스 [Damascus]

미국 버지니아주 워싱턴카운티에 있는 마을이다.

 

3.Lebanon AD 1604 earthquake

 

                                                           레바논(Lebanon)

 

좋은 항구를 가진 혜택으로 레바논은 옛날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여 왔다. 약 5,000년 전 기원전 30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이 해안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티루스(지금의 티레)·시돈 등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그 뒤, 바빌로니아·페르시아 제국·로마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는데, 로마는 기원전 64년에 레바논을 점령했다. 로마시대에는 티루스에 해군기지가 설치되었으며, 서기 300년대에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 395년에 레바논은 비잔틴 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600년대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들에게 정복된 이후부터 아랍화·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대에는 산악지대가 시아파(派)·드루즈파 등의 이슬람교 이단파와 마론파 그리스도 교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1~12세기에는 셀주크 터키와 십자군의 쟁탈장이 되었으며, 1516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어 19세기까지 이 제국의 술탄 밑에서 반독립적인 여러 세력이 레바논을 지배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오스만 제국은 레바논의 직접적인 지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마론파 기독교도와 드루즈파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그리스도 교인들이 살해되었다. 이 분쟁에 프랑스가 개입한 것을 계기로 1861년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함에 따라 1920년 4월 산 레몬 회의에서 베카고원 등의 내륙부도 레바논에 합병되었으며, 1923년에는 시리아 등과 함께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하여 레바논에서의 그리스도 교인과 이슬람 교인의 수가 거의 비슷하게 되어 마론파 그리스도 교인들의 우위는 무너졌으며, 그 뒤 정세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1926년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위임통치 아래 자치국이 되었고, 1944년 1월에 완전독립을 달성했다.[위키]]

 

미국-레바논 [Lebanon]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남동부에 있는 도시. 펜실베이니아주 남동부 해리스버그 동쪽 37km 지점의 레바논계곡에 있으며 레바논군(郡)의 군청 소재지이다.

레바논 [Lebanon]

미국 일리노이주 세인트클레어 카운티(St. Clair County)에 있는 도시.

 

1604年12月29日(明万历三十二年十一月乙酉)福建泉州海外(24.7°N,119.0°E)M71/2

[천명인: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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