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밀라노(Milano, Milan)는 신라(新羅)의 성시(聖市)였다.

한부울 2012. 1. 6. 18:34

***********************************

밀라노(Milano, Milan)와 신라 서란전(瑞蘭殿)

 

그렇다면...

어떻게 근대사가 현재처럼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물을때 이렇게 답하고 싶다.

물론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보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설득력이 있는 것은 시대가 변하기 시작하던 어느 싯점에 즉 세계 소유권과 함께 패러다임(Paradigm)이 뒤 바뀔 때 범 세계적으로 일어난 대질병과 대기근, 대자연재해가 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존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사라지고 소멸되는 싯점에서 잔여세력들이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만들고 새로운 질서가 생성되게끔 유도하고 조작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새롭게 기득권을 차지한 세력들이 구세력과 완전하게 담을 쌓고 그들이 추구하는 사상과 종교, 문화를 구시대의 것을 모방하지만 차별성있게 창조하여 그들의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론적을 범 세계적인 대질병과 대기근 대자연재해에 따른 변괴가 열쇠가 된 것이다.

앞으로도 또 다시 그런 변괴가 있다면 또 그럴 것이다.

 

 

  

 

밀라노(Milano, Milan)가 어딘가?

이곳은 유럽하고도 이태리 북쪽 롬바르디아주(Lombardia)에 제일 큰 도시인 밀라노이다.

포강(Fiume Po, Padus)의 지류인 티치노(Ticino)·아다두(Adadu) 하천 사이의 비옥한 평야부에 자리하고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발달한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이다.

켈트인(Celts)의 취락에서 기원하여 로마시대에는 메디올라눔(Mediolanum)이라고 불리는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374년에 성(聖)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면서부터 밀라노는 북부이탈리아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5~6세기에는 훈족·고트족의 침입으로 시가지가 파괴되고, 다시 고대 게르만족의 한 갈래로서 568년 이탈리아에 왕국을 세워 774년 프랑크 왕국에 멸망될 때까지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한 랑고바르드족(Langobards) 점령 하에 들기도 했다.

밀라노는 콧대 높은 도시라 했다.

누구나 동경하는 명품 1번지이고, 도시의 상징인 피렌체대성당 두오모(Duomo di Firenze)는 웅장함에다 세련미까지 갖춰있다.

그리고 밀라노는 이탈리아내 인구로 수도 로마 다음으로 많으며 금융과 많은 비지니스 사업들이 본사를 두고 있어 유럽에서 손꼽히는 도시이다.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은 바실리카(Basilica)가 포룸(forum)에 인접해 있던 로마 시대 도시인 메디올라눔(Mediolanum)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고 성 암브로시오(Ambrose)의 '새로운 바실리카'가 이 장소에 5세기 초에 지어졌으며, 그 옆에 인접한 바실리카는 836년에 추가되었다 한다. 왠지 모르지만 두 건물이 1075년 화재가 소실되고 두오모, 피렌체대성당로 재건되었다 한다.

사실 역사지우기에 화재설은 대단히 편리한 도구이기도 하다.

반도사를 보라 거의 이 화재설이 받침하고 있다.

바실리카(Basilica)는 원래 고대 로마인들의 그리스경우에는 법정으로 사용된 공공건물을 칭하는 데 사용한 라틴어로 대개 고대 로마마을의 포룸(forum)에 있었다.

켈트인과 고구려를 같이 보지 않으면 안된다.

5-6세기경에 있었던 훈족과 고트족의 침입을 고구려가 신라를 구한 사건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광개토대왕(영락)9년 기해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 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고 신라가 고구려에게 다급하게 구원을 청 하였다.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영락10년(경자)에 보병과 기병(삼국사기에 5만이라 하였는데 파악한 결과 실제50만이란 기록이 있다)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고 왜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되었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

이것을 보면 근대사가 얼마나 혼란스럽게 뒤엉키게 믹스되었는가를 세세하게 알 수가 있다.

 

 

 

 

서란(瑞蘭)은 놀랍게도 밀라노(Milano)를 말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한어사전에서 발견한 것이다.

서란-설란-실란-실라-신라-놀랍게도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서란(瑞蘭)이란 이 단어는 좀 특별한 것이 있는데 서양 즉 유럽에 한문지칭이 모두 이와같은 란(蘭)자를 병용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 뜻 또한 범상치 않다.

그리고 서(瑞)는 서(서)쪽, 서방을 지칭한 글이기도 하지만 서(瑞)는 상서(祥瑞)라 하여 좋은 징조를 나타내는 글이기도 하다.

또 영지(瑞芝), 상서로운 풀을 나타내는 서초(瑞草), 스웨덴(Sweden)를 나타내는 서전(瑞典)처럼 뜻이 범상치 않다.

그러나 북경어로 지금 밀라노를 미란(米蘭)이라고 하는데 소리그대로 읽었다고 보이지만 왜 한낱 쌀 미(米)자를 사용하였을까 의구심이 없지 않다.

서란(瑞蘭)을 반도사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낮추고 진의를 모르게 할 의도였다고 보여진다.

옛날, 천자가 제후에게 내린 옥으로 만든 신물(信物)의 뜻인 서(瑞)를 당연히 사용했어야 했다고 믿는 것이며 상서 즉 좋은 뜻처럼 사용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그래서 밀라노(Milano)는 미란(米蘭)이 아니라 서란(瑞蘭)이라야 하고 그곳에 특별한 서란전(瑞蘭殿)을 두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서란전은 당시 신라의 굉장히 중요한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羅馬人在西元前222年征服該地後,稱它為Mediolanum。米蘭因此成為羅馬帝國最繁榮的地區之一,

並在286年至402年成為西羅馬帝國的首都。

米蘭在中世紀時期則被稱為 Mailand,德語目前依然使用這個名字,

它來自於凱爾特語(켈트어파Celtic languages)的Mid-lan,意為“平原中心”。

拿破崙(Napoleon1804-1814)於1796年佔領米蘭,並於1805年將米蘭當作義大利王國(Kingdom of Italy, Napoleonic)的首都。

米蘭隨後成為受到奧地利帝國所控制的롬바디베네치아(倫巴第-威尼西亞王國, Kingdom of Lombardy–Venetia, 1815–1866)首都,

並於1859年成為사르데냐 왕국(薩丁尼亞王國, Sardegna, 1720-1861)的一部份,

逐漸隸屬於義大利王國。

 

나라

명칭

재위

성별

특징

비잔티움제국

이레네 아테네이아

797-802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 섭정

신라

소성왕(昭聖王)

798-800

母가 성목태후(聖穆太后)

 

그리고 당시 신라와 비잔티움의 지배자들에 대한 일체성이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소성왕의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가 이레네 아테네이아라고 판단된다.

바로 소성왕을 800년에 눈알 뽑아 죽이고 그 이후 제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는 섭정여제이다.

당시 역사상황은 열거한 그대로 일치한다.

신라 소성왕의 출생년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반도사에서 김씨는 콘스탄티누스를 김씨라 했을 가능성도 돌출해 본다.

 

비잔티움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 이사우리왕조(Isaurian dynasty, 717–802)마지막 여제 이레네 아테네이아(Irene of Athens, 755-803, 재위:797-802)는 레오 4세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 6세의 어머니였으나 나중에 폐위되어 레스보스(Lesbos)섬에 유배된다.

한반도의 신라이라면 유배섬은 어디쯤 될까 아마도 거제도 정도일 것이다.

거제도와 생긴 것이 비슷하다.

 

 

신라의 제39대소성왕(昭聖王, ?-800,재위:798-800)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준옹(俊邕)인데 재위 2년 만에 죽어 이후로 신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다고만 하고 있다.

왜 이리 설명이 부족할까?

이것은 왕이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 수수께끼이다.

하지만 서로마 즉 비잔티움 황실과 연계하면 이 수수께끼가 단번에 쉽게 풀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라는 비잔티움제국이라 할 수 있고 비잔티움이 신라 라면 이것을 일제가 근세기에 한반도로 옮겨 반도신라로 만든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제시한 내용과 어느정도 일치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일체성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더불어 소성왕2년(AD800)에 폭풍 또는 태풍이 있어 신라의 건축물 중 서란전(瑞蘭殿)의 발(簾)이 바람에 날라 가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39대 소성왕(AD 798): 소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昭聖或云昭成王立 諱俊邕 元聖王太子仁謙之子也 母金氏 妃金氏桂花夫人 大阿?叔明女也 元聖大王元年 封子仁謙爲太子 至七年卒 元聖養其子於宮中 五年 奉使大唐 受位大阿? 六年 以波珍?爲宰相 七年爲侍中 八年爲兵部1令 十一年爲太子 及元聖薨繼位

 

소성왕(昭聖王)<혹은 소성(昭成)이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준옹(俊邕)으로 원성왕(元聖王)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桂花夫人)인데 대아찬 숙명(叔明)의 딸이다. 원성대왕 원년에 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7년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원성왕이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길렀다. 5년에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갔다 와서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6년에는 파진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년에 시중이 되었고, 8년에는 병부령이 되었다. 11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년(AD799)

元年 春三月 以菁州居老縣爲學生祿邑 冷井縣令廉哲進白鹿 夏五月 追封考惠忠太子爲惠忠大王 牛頭州都督 遣使奏言 “有異獸若牛 身長且高 尾長三尺許 無毛長鼻 自峴城川 向烏食壤去” 秋七月 得人蔘九尺 甚異之 遣使如唐進奉 德宗謂非人蔘 不受 八月 追封母金氏爲聖穆太后 漢山州獻白烏

 

봄 3월에 청주(菁州) 거로현(居老縣)을 학생의 녹읍으로 삼았다.

냉정현령(冷井縣令) 염철(廉哲)이 흰 사슴을 바쳤다.

여름 5월에 죽은 아버지 혜충태자를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우두주(牛頭州) 도독이 사자를 보내 아뢰었다.

“소 같이 생긴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세 자 가량이나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峴城川)으로부터 오식양(烏食壤)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가을 7월에 아홉 자 되는 인삼을 얻었는데, 매우 기이하게 여겨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바쳤더니, 덕종이 인삼이 아니라 하여 받지 않았다.

8월에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聖穆太后)로 추봉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2년(AD800)

二年 春正月 封妃金氏爲王后 以忠芬爲侍中 夏四月 暴風折木蜚2瓦 瑞蘭殿簾 飛不知處 臨海·仁化二門壞 六月 封王子爲太子 王薨 諡曰昭聖

봄 정월에 왕비 김씨를 왕후로 봉하고, 충분(忠芬)을 시중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폭풍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려 보냈으며, 서란전(瑞蘭殿)에 쳤던 발[簾]이 날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

6월에 왕자를 태자로 봉하였다. 왕이 죽어 시호를 소성(昭聖)이라 하였다.

 

 

재위2년 AD800년 기사를 보면

여름 4월에 폭풍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려 보냈으며, 서란전(瑞蘭殿)에 쳤던 발(簾)이 날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있다.

그리고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 하였다.

 

삼국사기에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으로는 궁궐 및 사원·탑·부도 등이 있었다는데 궁궐의 이름으로는 강무전(講武殿:677)·숭례전(崇禮殿:687)·서란전(瑞蘭殿:801)·창신궁(創新宮:717)·영창궁(永昌宮:727)·영명신궁(永明新宮:823)·평의전(平議殿:812)·월지궁(月池宮:823)등이라 하였느나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없다 하였고 다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건축의 공포부재 및 서까래 밑에 달았던 부연과 각종 장식금구만이 전한다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반도사가 말하는 것은 기록에 있으나 실체 증명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

전부이런식이다.

얼마나 무능하고 답답한 변명인가?

그래서 증명 될 만한 것은 유적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기록만 남겨두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일제가 만든 반도사의 실체가 마땅하게 없는 실체들인 것이다.

유령의 역사이다.

당장 무엇으로 지금 한반도에 있는 것이 그 당시의 유적이라고 증명할 것인가? 묻는다.

1940년대에 미국의 물리학자인 리비(Willard Libby)에 의하여 개발 된 방사능연대측정(放射能年代測定, Radiometric dating)으로 한반도 내에 있는 모든 유적들을 새롭게 연대측정하게 되면 그리고 이것을 국민여론을 모아 철저하게 요구하고 감시하면 그날로 반도사는 끝장난다.

이러한 엉터리역사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 영달한 학자 나부랭이들은 모두 사기꾼으로 몰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바른 것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끝장나는 결과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소성왕 재위2년 AD800년 여름 4월에 폭풍이 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라 갈 정도로 심했다면 대단한 자연재해를 말하고 있음이다.

서란전(瑞蘭殿)에 쳤던 발(簾)이 날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였으면 어느정도인가 상상할 수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란 기록이 있다 하였으니 대단한 폭풍이었다는 말이고 당시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는 기록이다.

그래서 찾아보니 당시 유럽에 큰 태풍과 해일이 있었다.

 

렴(簾)(∼兒) 옛날 상점에서 간판 대신으로 단 깃발.

 

800 A.D. [In England] on the 9th of January came a most prodigious hurricane from Africa, with irresistible force. It cast down to the ground and destroyed infinite towns, houses, villages and trees. The same year happened a very great inundation of the sea, which carried away much cattle.

[영국] 800년 1월 9일 불가항력적인 엄청난 허리케인이 아프리카에서 왔다.

그것은 지면 아래로 모든 것은 쓸고 무수한 도시, 집, 마을과 나무를 파괴하였다. 같은 해 바다의 매우 큰 해일이 일어나 많은 가축들을 가져가 버렸다.

 

우선 렴(簾)이라 한 것은 옛 건물의 테라스(terrace)의미가 아니겠는가 추측해본다.

바람에 기발, 헝겊따위가 날려가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보았을 때 이처럼 기사화 된 사건이라면 적어도 건물에 장치한 어떤 햇빛가리개 정도 테라스가 일부 파괴되어 날라 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위 기사를 보면 분명 서기800년 1월이라 했으니 신라의 기록 4월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유럽에서 허리케인 거대한 폭풍이 있었고 해일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여름 4월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중해 연안의 기후를 여름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때문에 유럽 지중해 연안에 신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원래 허리케인(熱帶低氣壓 tropical cyclone)은 대서양 남부에는 잘 발생하지 않는데 비해 대서양 북부(카리브 해, 멕시코 만을 포함한 북대서양)에서는 잘 나타는 현상으로 유럽군에 포함된 태풍(열대성 저기압 바람)은 모두 허리케인이라고 부른다.

 

 

①태풍(Typhoon) : 북태평양 서부에서 발생하는 것

②허리케인(Hurricane) : 북대서양,카리브해,멕시코만,북태평양 동부에서 발생하는 것

③사이클론(Cyclone) : 인도양,아라비아해,벵골만에서 발생하는 것

④윌리윌리(willywilly):오스트레일리아의 북동부 해상에서 발생하는것

 

그러나 위 유럽 허리케인(태풍) 발생기록은 분명 근세기 기록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허리케인이란 명칭을 부여한 것이 1953년부터이니 그렇다.

1953년부터 태풍에 매년 발생순서에 따라 일련번호를 붙여서 제 몇 호 태풍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괌에 있는 미국태풍합동경보센터에서 태풍의 이름을 23개씩 4개조 총 92개로 구성하였다.

 

 

 

 

자료를 보면 허리케인을 싹쓸바람이라고도 한다.

허리케인은 '폭풍의 신' '강대한 바람'을 뜻하는 에스파냐어의 우라칸(huracan)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며 우라칸(huracan)은 카리브해(海)연안에 사는 민족이 사용하던 hunraken(one legged), aracan, urican, huiranvucan 등에서 전화(轉化)된 것이라 한다. 북대서양(North Atlantic Ocean), 카리브해(Caribbean Sea), 멕시코만(Gulf of Mexico)등에 발생하는 허리케인의 연간 평균출현 수는 10개 정도인데 월별 빈도는 태풍과 비슷하며, 8-10월에 가장 많다 한다.

그러나 지중해에서 다습한 태풍이 발생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이상으로 보면 분명 신라의 기록과 비잔티움의 기록이 다르지 않다.

이것으로 신라는 비잔티움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1296년 산타 레파라타 성당(Santa Reparata)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피렌체의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5-1302)가 설계하고 착공을 하였지만 실제 리파라타성당이 성당인지 아니면 성전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신라 서란전(瑞蘭殿)이 레파라타성당인지 성전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공공 바실리카(Basilica)는 기원전 2세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였으니 서란전이 또 바실리카인지도 알 수 없다.

근세기 세계사 전체를 보았을 때 사라진 성전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신라의 제39대소성왕(昭聖王, ?-800, 재위:798-800)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준옹(俊邕)이다.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한다. 원성왕의 장손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인겸(仁謙, 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아버지가 태자로 죽었으므로 궁중에서 자라서 789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후 대아찬이 되고 시중 등을 거쳐 이듬해 병부령이 되었다. 795년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의 덕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2년 만에 죽어 이후로 신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다.

******************************

이레네 또는 이레네 아테나이아(Irene of Athens, 752년경-803)는 797년부터 802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여제였다. 레오 4세의 황후였고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이었다가 아들의 눈알을 뽑고 퇴위시킨 후 단독으로 제위에 올랐다. 성상파괴령을 철회하고 성상공경을 부활시켜 동방정교회의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축일은 8월 9일이다.

 

이레네는 아테네 출신으로 집안과 조상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코프로니무스 황제가 발탁하여 궁정으로 데려와 769년 자신의 아들인 레오와 결혼시켰다. 레오 4세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남편을 통해서만 국정에 개입했고 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가 점점 건강이 나빠지자 그녀는 조금씩 영향력을 키웠으며 780년 남편이 죽자 10살짜리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대신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로서 최초로 제위에 올랐고 성상옹호론자였으므로 성상파괴주의자들이 많은 아나톨리아의 군대는 폭동을 일으키고 레오의 동생을 황제로 추대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이레네는 이를 기회로 군대 내의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러나 이 숙청의 결과 군대는 약해졌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사라졌다. 시칠리아 총독이 독립을 선언하고 제국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결국 무슬림에게 정복되었고 782년 이슬람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값비싼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그리스에서는 슬라브족에게 승리하였다.

 

이레네는 아테네 출신답게 적극적으로 성상을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안정화 되자 그녀는 자신의 신념대로 교회정책을 밀고 나갔다. 784년 성상파괴론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물러나자 자신의 심복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고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고 786년 로마와 동방의 교구들이 모여 공의회를 열었다. 그러나 성상파괴론자들이 이 공의회를 군대를 동원하여 해산시켰다. 이레네는 이듬해 9월 니케아에서 다시 공의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2차 니케아 공의회로 세계공의회로서는 일곱 번째 공의회가 된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상파괴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을 단순한 흠모의 대상에서 경배하는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이레네의 섭정기간 동안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의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이레네는 아들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섭정을 계속하고 권력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아들 황제의 이름 앞에 놓는 법령을 반포하여 아들의 반감을 샀다. 성상파괴론자들은 콘스탄티누스를 중심으로 뭉쳐서 이레네에 대한 반란을 꾀했으나 이레네에게 발각되었고 이레네는 콘스탄티누스를 투옥하고 군대 전체가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그러나 성상파괴론자가 많았던 소아시아의 군대는 이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감옥에 있는 콘스탄티누스를 풀어주고 이레네를 황궁에 감금시켰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잇달은 대외정책의 실패로 인기를 잃었고 792년에 이레네는 다시 복위되었다. 복위된 이후 이레네는 끊임없이 아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797년 봄 콘스탄티누스가 사라센 원정을 떠날 때 이레네는 계략을 세워 사라센군이 철군했다고 황제를 속여 군대를 철수하게 했는데 이로써 황제는 겁쟁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해 6월에 이레네는 황제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황제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간신히 건너 도망쳤다. 그러나 이레네는 결국 아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붙잡아 오는 데 성공하고 8월 15일 오후 3시 황궁에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의 두 눈알을 뽑아버렸다. 콘스탄티누스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많지만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눈을 뽑아버려서 곧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비정한 행위에 신이 분노하여 17일 동안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서방 황제의 등장과 몰락

 

콘스탄티누스가 후계자 없이 폐위되자 이레네는 단독 통치자가 되어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주요 자문관인 두 환관이 서로 다투었고 굴욕적인 대외정책과 아들의 잔인한 살해로 그녀는 백성들의 인기를 잃었다. 세금을 대폭 감면하여 인기를 얻으려했지만 그마져도 실패했다.

 

한편 서방에서는 800년 성탄절에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제관을 수여하고 ‘로마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부터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을 대신할 세력으로 아리우스파가 아닌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크 왕국과 가까이 지냈고 샤를의 아버지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몰아내고 교황에게 영토를 기증하여 그 관계가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차에 교황 레오 3세가 로마에서 정적들에게 피습까지 당하고 권력이 불안해지자 프랑크 왕국의 샤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샤를은 이 로마로 와서 교황을 도와주고 제관을 받은 것이다. 교황은 아들까지 죽인 여제(女帝) 이레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교황의 입장에서 보면 황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중세의 가장 큰 사기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교황청이 만든 조작문서)을 근거로 세우고 교황이 새로운 황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과 비잔티움 황제는 ‘로마 권력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권위와 ‘제1의 기독교 제국’이라는 권위에 손상을 입었다.

 

제위에 오른 샤를은 서방뿐만 아니라 동방 제국의 황제까지 되려는 의도에서 비잔티움의 여제 이레네에게 청혼하였다. 제국 내에서 자심의 지위가 점점 약해지고 있던 이레네는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비잔티움의 시민들은 글자도 모르는 프랑크족 야만인에게 영광스러운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를 수여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레네에 대한 반감은 점점 노골적이 되었고 802년 10월 황궁에서 고위 관리들의 반란이 일어나 이레네는 제위에서 쫓겨나고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레네는 유배지에서 이듬해 죽었다.[위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