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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corea, korai)에서 발생한 지진(地震)지역은 지중해와 중동이다.

한부울 2011. 12. 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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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에서 발생한 지진(地震)지역은 지중해와 중동이다.

 

지진기록으로 본 고구려(高句麗)는 그리스(Greece)?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5

 

고려(高麗, corea, korai)가 있었던 곳은 과거 지진이 굉장했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세기 역사 재판 짜기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중요한 사실은 다 빼버렸다고 생각되는 삼국사기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지진기록을 찾아보면 엄청난 횟수로 나타난다.

아래 본 블로그에서 분석한 자료에서만도 수 십 차례가 넘고 고려시대 전체를 따진다면 아래 표처럼 무려 횟수가 171회나 된다 하였으며 조선시대는 1630횟수이다. 

그곳이 과연 한반도란 말인가?

그러나 지진판 맞물림 경계선이 없는 한반도는 지형적으로 지진 발생조건이 되지 않아 한반도는 근원적으로 지진지대 또는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지진 실체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곧 유라시아(Eurasia) 즉 지중해연안과 중동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임을 쉽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래 분석 자료를 통해 그 사실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지진은 지극히 자연 발생적인 원칙을 근거로 하는 재해인 것이며 그 자체가 역사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과학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바로 지구과학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지질탐사계만 의존하던 것이 이젠 지질관측 위성까지 이용하고 있으니 더 이상 재론할 여지가 없다.

과거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자연적 재해 상황은 저절로 사실을 확인하고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자연 재해가 어느 위치에서 어떤 환경에서 어떤 형태로 일어난 것인가를 세세하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태풍, 홍수, 가뭄, 지진, 물난리, 기근, 충해 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극심하면서 옛날이나 지금 역시 인간들에게 다가서는 엄청난 공포의 지진발생 상황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은 인류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고 이 역사찾기하는 입장에서도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과거 어디서 지진이 발생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확인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러한 명명백백한 과학적인 환경에서 과거 지진이 어디서 일어난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파악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고 정의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그 근거로 바로 지진판(earthquake plate)이론을 들 수 있다.

 

 

지진판(earthquake plate)에 대해서 앞서 본 블로그 "지진기록으로 본 고구려(高句麗)는 그리스(Greece)?http://blog.daum.net/han0114/17050445"페이지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는데 과거 모든 지진이 발생한 상황도 그렇지만 앞으로 일어날 지진 역시 이 지진판(earthquake plate)이론을 기준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명이다.

지진판(earthquake plate)과 판이 밀거나 밀리는 현상에서 돌출되는 에너지가 바로 지진이라면 판과 판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기준으로 하여 발생 확률이 가장 높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다면 과거 지진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근원적인 요소가 있다면 분명 과거에도 지진이 발생했다고 단정을 내려도 무방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제는 지진 발생 장소가 여기다 저기다란 식으로 추측이 아니라 그래서 불확실한 것을 이용하여 엉뚱한 딴전을 피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한다는 사실이 바탕이 된다.

그야말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자연의 이치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지진이 일어난 곳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이치이고 법칙인데도 아직까지 이것을 가지고 어리석게도 지진의 역사를 왜곡하고 장난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반도역사의 지명처럼 아무렇게나 여기심고 저기 심을 수 있는 대상 또한 아님도 우리가 알 수 있다.

때문에 지금은 과거 고려의 지진 발생 현장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저기에서 같은 시간에 발생할 수 없는 진짜 지진이 발생하였던 장소라면 그곳은 지진판과 판 사이에 맞물림이 있는 경계선이 있거나 그 경계로 인하여 발생 요건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환경 속에서 지진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진앙지(震央地)가 바로 역사가 기록한 장소가 되어야 현대 지구과학이론과 일치하는 것이 된다.

고려의 지진기록에서 보면 한반도와 지중해연안 또는 중동에 일어난 지진이 같은 시기 또는 같은 시간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DNA가 똑같은 사람이 여기와 저기 동시에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의 반도역사는 그것을 쉽게 비판없이 용인하고 있다.

말이 되는가?

지중해 지진이 일어나는 시각에 한반도에서도 지진이 일어났다고 강변하는 역사학자들 그리고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지진학자들을 솔직히 어떻게 평가해야만 할까?

평가할 수도 없는 그냥 사이비 학자라고?

바로 과학자이면서도 과학적인 분석을 믿지 못하고 오직 역사기록에만 매달리는 것도 따져 보면 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역시 과학적인 분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스스로 암기한 역사기록 만을 고집하는 것은 고집을 넘어서 아집이고 어리석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진이 발생한 기록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발생한 장소 역시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자꾸 같은 동 시간에 지진이 발생한 곳을 지중해와 한반도 두 군데라고 우기면 그야말로 자연의 이치는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진리를 배척하겠다는 주장이 아닐 수 없고 그래서 난감함이 아닐 수 없다.

고려역사에서 기록된 지진기록은 오직 한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 발생의 원칙에 의한 것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곳이 고려의 고유의 영역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이 뒤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반도사학자들이 있기에 병폐라고 하는 것이다.

고려에서 일어난 지진이 발생한 장소가 고려 땅이지 어디겠는가?

딴 소리는 잡소리에 불과 할 뿐이다.

근세기에 작성되었을 수도 있는 반도역사를 믿겠는가?

아니면 현대 지진학자의 분석을 믿겠는가?

지금 명명백백 밝혀지는 곳은 바로 근원적으로 고려의 땅이 확실한것이다.

 

암브라세이즈(Nicholas Ambraseys, 1929-)라고 하는 그리스(Greece)출신의 지진학자의 저서 자료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에서 발췌하였다.

 

[클릭원본]  

                               [1012부터1343까지 고려지진기록과 일치하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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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2년 현종(顯宗)3년 경오년 3월에 경주에 지진이 있었다.

三月庚午 慶州地震(고려사절요, 현종 3년)

1012년 정축년 12월에 경주에 지진이 있었다.

十二月丁丑 慶州地震(고려사절요, 현종 3년)

1012년 漣州 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고려 현종때 경주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59p)

1).Constantinople AD 1010–1012 earthquakes

콘스탄티노플은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메가라 출신의 비자스(Byzas)라는 사람이 창건했다고 하며, 최소한 기원전 600년경에는 작은 촌락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동방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로마 제국을 놓고 내전을 벌였을 때, 비잔티움은 니게르 편에 서서 세베루스군에 저항했다. 당시 비잔티움에는 천험의 지형과 많은 수의 함대와 프리스쿠스라는 이름의 기술자가 고안한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군사와 백성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려 3년동안이나 농성했다. 때문에 도시가 함락된 후 세베루스 황제의 보복조치로 페린투스(Perinthus)시의 일부로 격하되었다. 이후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메세 가도가 놓였다.

비잔티움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임 이후의 내전에서 처음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만나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는 사이에 리키니우스의 영역으로 쳐들어갔으나 도리어 신속하게 돌아온 리키니우스의 반격을 받아 죽었다. 이때 리키니우스는 11일의 포위공격으로 비잔티움을 점령했다.

내전이 종결되어가는 가운데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게 되었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을 완전히 통일하려는 콘스탄티누스의 맹공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맏아들 크리스푸스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2일간의 전투 끝에 130척의 배와 5천의 병사를 수장시킨 것이 급격히 전세를 반전시켰다. 바다의 장악으로 보급을 원활히 받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비잔티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 결과 선정된 도시가 비잔티움이었다. 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을 통해서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있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으며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또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았다. 당시의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침내 324년부터 330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가 끝나고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한 "새로운 로마(Nova Roma)" 라고 불렀다. 또한 그것이 공식 명칭이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 혹은 애칭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의 황제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로마시에서 완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330년 5월 11일 월요일 이 도시의 이름을 "새로운 로마(Nova Roma)" 로 부르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한 이래, 이슬람화이전까지 기독교(동방정교회)문화의 꽃이 피어서 지금도 정교회 성 소피아 성당에는 화려한 성화(이콘)들이 남아 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는데 이슬람과 불가르족등 여러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천혜의 자연적 조건으로 난공불락인 이 도시는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침공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라틴인들에게 함락되었다가 57년 만인 1261년 미카엘 8세에 의해 탈환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참조) 이 도시를 함락시킨 술탄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오스만투르크 치하에서는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터키어 이름인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되었으나, 서구에선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스탄불은 1930년에 와서야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가 이 도시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강제 접수하려 했으나 후에 터키공화국 초대대통령이 되는 무스타파 케말(케말 아타튀르크)의 방어로 저지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 폴리(i Poli, "도시")라 불렀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존속했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럽 최대의 도시였으며, 제국인들이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2)1025년 현종16년 4월 영남도(嶺南道) 광평(廣平), 하빈(河濱)등10현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경주(慶州), 상주(尙州), 청주(淸州)(중원도), 안동(安東), 밀성 등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고려때 코린토스만은 영남도 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55p)

1).Gulf of Corinth AD 976–1025 earthquake

코린토스 만(The Gulf of Corinth or the Corinthian Gulf)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이다. 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코린토스 지협으로 막혀 있다. 코린토스 지협에는 코린토스 운하가 건설되어 있어 에게 해로도 연결된다.

2).Galaxidi AD 976–1025 earthquake

갈락시디(Galaxidi)마을

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엄청난 양의 밀가루를 던져댄다.

도심은 어느새 전체가 뿌옇게 변해버렸고, 사람들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흡사 눈처럼 변해버렸다.

그리스의 명물 `밀가루 전쟁 축제`이다.

`밀가루 전쟁 축제`는 지난 1801년 갈락시디 주민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해 재를 얼굴에 묻히고 거리를 누비며 춤추는 전통 행사에서 유래됐다.

밀가루 전쟁에 참가하려면, 보호복과 보호 안경은 필수.

축제가 끝난 뒤 청소를 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리지만, 밀가루 전투를 즐기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있을 정도로 이제 밀가루 전쟁축제는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이데일리]

 

(3)1032년 덕종(德宗)원년10월 尙州(영남도)등 10여 현에서 지진이 일어남

 

고려 덕종 때 영남도는 마르마라해 와 콘스탄티노플이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60-261p)

1).Sea of Marmara AD 1032 August 13 earthquake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는 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바다이다. 터키의 아시아 쪽과 유럽 쪽을 가르는 바다이기도 하다. 흑해 쪽은 보스포루스 해협, 에게 해 쪽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면적은 11,350 km²이다.

2).Constantinople AD 1032 August 13 earthquake, damage to aqueduct

 

(4)1033년 덕종(德宗)2년 6월-안동부(安東府) 합주, 협주(峽州)에서 지진

 

고려 덕종 때 안동부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전역이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61, 262, 263, 264p)

1).Constantinople AD 1033 March 6 earthquake

2).Dome of the Rock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는 이슬람의 성지이며 예루살렘의 성전산 위에 있는 랜드마크이다. 691년에 완공되었으며 현존하는 이슬람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마호메트)가 이곳의 큰 바위에서 승천해 천상여행을 했다고 믿고 있다.

3).Fort Dan,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이 지진은 발생 위치가 놀랍게도 인도 남부까지 연결되고 있다. 

Golconda Fort, Dan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州) 북부 중앙 하이데라바드 서부 무시강(江) 남쪽에 있다.

1512∼1687년까지 골콘다 왕조의 수도로 1687년 무굴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번영하였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골콘다 왕조는 데칸고원에 있는 5개의 무슬림 술탄 가운데 하나였다. 5㎞나 되는 돌로 만든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이 성은 코끼리가 진격할 때를 대비하여 끓는 기름과 납덩어리를 떨어뜨리는 장치가 있다. 성 안에는 옛 궁전·회교사원·왕실묘 등이 있다. 예로부터 다이아몬드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다이아몬드는 역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에서 많이 나온다.[네이버 백과사전]

골콘다 왕조-역대 왕의 칭호에서, 쿠트브 샤히왕국이라고도 한다.

바흐마니왕국이 분열하여 성립한 5왕조 중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1512∼1518년 지방관인 쿠트브 샤가 독립 ·창건하였다. 수도는 골콘다에 있었으며, 1589∼1591년 하이데라바드로 옮겼다. 데칸고원의 이슬람국가와 비자야나가르 ·무굴제국과 패권을 다투다가 무굴제국에게 멸망되었다. 농업 ·섬유 ·철강업이 발달하고 다이아몬드로 유명하였으며, 항구 마수리파탐은 17세기에 영국 ·네덜란드인의 거류지였다. 역대 왕들은 시아파(派) 무슬림으로 페르시아화되었으며, 문학과 건축의 후원자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4).Gaza AD 1033 Friday mosque damage

가자는 적어도 약 기원전 15세기에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상 7개의 다른 민족과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고대 이집트가 가자를 약 350년간 지배한 뒤, 팔렌스타인 민족이 그들의 5개의 도시 중 하나로 차지하였다. 가자는 로마 제국과 그 뒤를 이어 비잔틴 제국의 통치 기간 동안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가자의 항구는 번성하였다. 635년 가자는 팔레스타인에서 라쉬둔 군대이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중 점령된 도시가 되었고, 곧 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대가 가자를 침범하면서,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훨씬 뒤에 가자지역은 몽골군의 침범뿐만 아니라, 홍수 등의 시련을 겪게되어, 16세기에 이르러오스만 제국에 흡수 될 때는 작은 마을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 첫 반세기에 리드완 왕조가 가자를 통치하였고, 가자는 상업적으로 크게 발전하는등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가자를 점령하면셔,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령의 일부가 되었다. 1948년 아랍 이스라엘 전쟁의 결과로 이집트가 새로 형성된 가자 지구 영토를 다스렸으며, 여러 가지 개선이 도시 내에서 시행되었다. 1967년 가자는 7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일부로 변모되었다. 2007년에는 하마스가 몇달 간 경쟁관계의 파타와의 충돌 뒤, 가자를 점령하였고, 그 후 가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에 놓이게 되었다. 가자의 주요 경제 활동은 소규모 산업과, 농업과 노동이다. 그러나 봉쇄정책과 쉴쉬없는 충돌로 인해 가자의 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자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인이며, 소수의 기독교인도 존재한다. 가자는 25세 미만의 젊은 층이 총 인구의 약 75 퍼센트를 차지하며, 전 세계상으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이며, 피난민이 주민의 약 반 이상을 차지한다.

역사-가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부터 인류가 가자 시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가자 시는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사이의 지중해 해변로에 위치하며, 역사상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남팔레스타인의 핵심 입구지와 홍해를 가로질러 향신료 교역의 주요 경유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5).Hebron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헤브론은 예루살렘의 남쪽 36km의 지점에 기원전 18세기의 옛날부터 있는 마을. 별명 키리아테 아르바(Kiriatharba), 아브라함, 이삭, 야고보 등 이스라엘의 족장과 관계있는 토지로, 족장과 그 아내들의 묘지가 있는 <막벨라 동굴>은 유대 교도와 이슬람교도 쌍방에게 성지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토를 통일할 때까지 이곳을 거점으로 남부 유다지방을 7년 반 동안 다스렸다. 마을의 아라비아어명 알 할릴은 <벗>이 라는 뜻으로, 경건한 이브라함이 신을 벗으로 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네이버지식]

6).Jericho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예리코(Jericho)는 성경 속 이름은 예리고(여리고, 杰里科或譯耶律哥, 中譯為耶利哥)이며 현지 아랍인들은 아리하라고 부른다.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요르단강과 사해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250m나 낮다. 각종 과실수(특히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로, 예로부터 종려나무 성이라 불러왔다. 본래 요르단 영토인 예리코는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다.

헤로데 대왕 궁전의 유물구약성경에 의하면 BC 14세기경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예리코성이 함락되었다(여호수아 6장). 신약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시대의 예리코보다 남쪽 6km쯤에 있는 툴룰·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이다. 이 곳은 헤로데 대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곳이며,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과 구원(루가 19장)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한다.

현재의 예리코는 비잔틴 시대의 터 위에 재건되었으며, 옛 예리코는 텔 에스술탄으로 20세기 초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에 의해 BC 9000년경으로 측정된 먼 옛날에 중석기의 수렵민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의 후손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정착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BC 8000년경에는 주민들이 마을 주위에 거대한 돌로 벽을 두르거나, 적어도 어느 한 곳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거대한 돌탑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조직된 공동체로 발전해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마을은 도시라는 용어에 걸맞게 규모가 컸으며, 주민은 약 2,000~3,000명에 이른 듯하다. 이 1,000년 동안에 생활방식은 수렵생활에서 완전한 정착생활로 발전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농업이 발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으며, 재배종의 밀과 보리의 낱알들이 발견됨으로써 농업 발달의 증거를 제공하는 장소의 하나가 되었다. 충분한 경작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반드시 관개시설을 고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팔레스타인 최초의 신석기 문화는 순전히 독자적으로 발전한 토착 문화였다고 한다[위키]

7).Jerusalem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예루살렘은 BC 3000년대 말경에 에브스(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그 동부에 성시(城市)를 지어 거주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BC 2000년대 중엽부터 이집트의 파라오(王)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뒤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왕이 에브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지금의 아크사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지점에 궁전을 지었고, 그 북쪽, 지금의 바위사원(쿠바트 앗사흐라)이 있는 곳이며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느님 제단 앞에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新)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바빌론의 포로). 그뒤 페르시아 왕 키루스(고레스)가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뒤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로데스(헤롯)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왕 이래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뒤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로데스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로데스가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 야훼의 성전을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무함마드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7천에 있는 알라의 앞까지 갔다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아크사의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때에는 다윗이 제단을 마련한 곳에 바위사원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편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예외로는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1)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099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聖市)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에서 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땅은 맘루크왕조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다마스쿠스 총독이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투르크령이 되고 난 뒤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 축조된 것인데, 투르크령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1만 1000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이 투르크에 압력을 가하여 이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투르크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뒤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밸푸어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네이버 백과사전]

8).Jund Filistin,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Jund Filastin (Arabic:"the military district of Palestine") was one of several sub-provinces of the Ummayad and Abbasid Caliphate province of Syria, organized soon after the Muslim conquest of Syria in the seventh century.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와 그 주변 지역을 일컫는 여러 역사적인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몇 천 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정의는 여러 번 변화해 왔다. 현대 역사에서 가장 넓은 정의는 영국이 통치할 당시에 쓰였는데 이 당시는 현재 시리아, 요르단과 이라크의 땅 일부를 포함한 트랜스 요르단 역시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구역인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인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현재 이스라엘에 자리잡고 있는 지중해 동안, 즉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시나이반도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면적은 대략 2만 6,000㎢이며, 천연자원은 거의 없다. 요르단강 서안의 동부는 황무지가 전개되어 있지만 서부는 경작지 및 목초지대가 있어 농축산물이 생산된다. 가자지구는 일부 경작지에서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으나 목초나 삼림지대는 거의 없다. 강수량이 매우 부족한데다 그마저 75%가 증발하여 수자원을 이스라엘에 크게 의존한다. 주민은 가자지구의 경우 팔레스타인계가 99.8%로 절대다수이고, 유태인은 극소수이다. 언어로는 아랍어를 사용하며 히브리어와 영어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종교는 이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독교 신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슬람과 기독교 도합 88%, 유태교 등 기타 종교 12%이다.

팔레스타인은 필리스틴이란 단어에서 근원되었다. 미케네 문명 당시 남부 그리스에서 이주했던 필리스틴인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현재의 가자지구 근처에서 살았다. 이 지역은 "성지" (Holy Land)라고도 불린다. 고대 이집트 당시 쓰인 글들은 이 지역을 r-t-n-u (retenu; 레테누)라고 가리킨다.

 

성경에 나타난 팔레스타인

 

히브리 성경은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 전의 팔레스타인을 카난(כּנען)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는 이스라엘이라고 일컬었다. 히브리의 땅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 성지, 주님의 땅, 약속의 땅같은 시적인 묘사들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민수기는 카난의 지리와 국경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민수기 34:1) 여호수아에서는 레바논을 묘사하는 부분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수아 13:5) 히브리 전통에 따르면 카난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어받은 땅 중에 일부였다. 그들이 이어받은 땅은 터키의 일부도 포함되었다. 네 복음서들은 모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꾸르안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선언한 부분부터 성지(아랍어: الأرض المقدس)라는 단어는 대략 일곱 번 나타난다. (수라 5:21: 백성들이여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령한 성역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뒤돌아서지 말라 그리하면 손실자로써 전복되니라)

9).Lake Tiberias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티베리아스 (Tiberias)는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갈릴리 호수서안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서 따왔다.

티베리아스 20년경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새로이 건설하여 그의 갈리리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이도시가 무덤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입주하길 거부했으나 헤로데 안티파스가 강제로 이주시켜 살게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의 반란 이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자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이주하여 유대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를 만들었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중세동안 전쟁과 지진으로 버려졌다가 십자군원정때 다시 예루살렘 왕국에서 갈릴리지방의 중심도시로 되었다. 살라딘이후 십자군이 떠나자 다시 버려졌는데 이후 수세기 동안 버려졌다가 다시 유대인이 몰려들어 살다가를 반복했다.

18세기와 19세기 들어 많은 유대인 랍비들이 몰려들어 티베리아스는 다시 유대교육의 중심지가 되었고 유대인의 4대 성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0).Nablus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나블루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4km 떨어진 비옥한 계곡에 위치하며,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다. 높은 언덕의 중턱에 있는 신(新)시가는 고급 주택가를 이루고 있고, 언덕 기슭의 구(舊)시가에는 시장·회교사원·관공서가 있다. 주요산물은 곡물과 과실이며, 지중해성 과실의 재배가 활발하다.

지명은 로마 시대의 네오폴리스에서 유래되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세겜(Shechem:목덜미)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회교사원으로는 야미알카비르와 야미안나스르 사원을 들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시의 남쪽에는 야곱의 우물과 요셉의 묘가 있다고 한다. 남서쪽의 게리짐산 위에는 사마리아인이 지금도 살고 있다. 게리짐산 맞은 편에는 에발산이 있다. 한편, 성서에서 게리짐산은 축복의 산, 에발산을 저주의 산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에발산은 말라서 나무가 없고, 게리짐산에는 수목이 울창하다. [네이버 백과사전]

11).Palestine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12).Ramla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13).Acre AD 1033 December 5 sea wave

아코 또는 아크레 (Acre, Israel)는 북서 이스라엘의 갈릴레아지구 서쪽의 항구도시이다. 지중해 연안의 하이파 만의 북쪽 끝에 위치한다. 이스라엘 중앙통계국에 따르면 2005년 말 인구는 45,800명이다. 역사상으로 아크레는 레반트 지역과 지중해 연안 및 유럽을 연결하는 항구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14).Aksa mosque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엘 악사 사원(EL Aksa Mosque)은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회교사원이다. 메디나, 메카와 더불어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로 8세기 압델 말릭과 그의 아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엘 악사 사원은 원래 비잔틴 시대의 교회를 모스크로 만든 것인데, 그후 지진 등으로 훼손되어 수차례 수리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066년에 준공되었다. 사원 내부는 7개의 홀로 되어 있고 스테인글래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15).al-Badan,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al-Badhan (official)

al-Badan (unofficial)

16).Asheqelon, AD 1033 Friday mosque damage

이스라엘 남부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아쉬켈론에는 성서에 나오는 역사적 유적들이 아름다운 해안가에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삼손이 30명의 필리스티아인들을 때려 눕히고 그 결혼식에서 제시한 수수께끼를 풀었던 30명의 동료들에게 줄 옷을 가져갔다 (사사기14:11-19). .

다섯 개의 필리스티아 도시들 중 하나인 아쉬켈론은 사울과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찬사 속에도 언급되어 있다 (2 Sam. 1:20). 초창기 아쉬켈론은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연결하는 도로인 비아 마리스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마시대에 성장했고 그 후, 비잔틴 기독교 시대에 곡물 생산의 상업적 중심지로 번창했다. 실지로 ‘파’라는 용어는 처음으로 자란 특이한 양파에서 비롯되었고 그 말이 이 지역에서 퍼져 나갔다. 아쉬켈론 국립공원에는 기원전 1850년 가량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치 건물, 가나안 여신 Ba’al 의 성당 유적지, 로마 시대의 건축물과 입상들, 십자군 성벽 그리고 아름다운 해안과 휴양지가 있다.

17).Balash,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시리아 바라쉬

18).Baniyas AD 1033 December 5 earthquake

시리아 북서쪽 타르투스 주에 속하며, 시리아 제 1의 항구도시 라타키아 (Latakia)에서 남쪽으로 50km, 타르투스(Tartous)에서 북쪽으로 3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중해의 항구 도시이다. 페니키아 시대부터 중요한 항구로 발전했으며, 그리스 시대에는 발레미아(Balemia)로 , 로마 시대에는 발라니아(Balanea)알려 졌다. 바니야스는 십자군 전쟁 당시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다가 1285년에 맘루크왕조에 의해 점령당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성지순례자들이 머무르는 숙소이자 병원 역할을 했던, 현무암으로 건축된 마르가트(Margat) 요새가 바니야스 남쪽 근교에 위치해 있다.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진 바니야스는 오늘날 감귤류 과일과 고급 목재 생산지로 유명하다. 바니야스 산 목재는 대부분 수출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다. 최근 이라크 키르쿠크(Kirkuk)에서 시작한 석유 파이프 라인이 바니야스를 통해 지중해로 이어지며 석유정제시설이 설립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산업지대가 건설되고 인구가 증가하는 등 도시가 발전하고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5)1035년 정종(靖宗) 을해 원년 6월-경성:개성(開京)에서지진이 일어남.

신미에 경성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9월-경주(慶州) 등19주에서 지진이 일어남.

 

고려 정종 때 개성 즉 경성은 부켈라리이 주 앙카라 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64-265p)

1).Voukellari/부켈라리이(bucellarii)Bucellarii was a Byzantine provinceAD 1035 May earthquake

2).Anatolia(터어키반도) AD1035

3).Bolu(Turkey) 1035.5월

 

 

                                Military of ancient Rome (portal)753 BC – AD 476

 

                                                    Byzantine Empire395–1453

 

위 심볼 마크는 근세기에 조작냄새가 풀풀난다.

 

(6)1036년 정종(靖宗)2년 6월-개경 및 동경 및 상주, 광주 등 2개주, 안변부 관내 주현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이 폐허로 변했다. 동경에서는 3일 동안 지속되다가 그쳤다. 동경관내 주 현(州縣), 김주, 밀성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마치 벼락 치는 소리와 같았다.

 

고려 정종때 안변부는 리비아 이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65p)

1).Constantinople AD 1036 December 18 earthquake

2).See also Ptolemais(리비아) AD 1036 earthquake

 

(7)1037년 정종(靖宗)3년 9월-구주(龜州), 삭주(朔州), 박주(博州), 진주(泰州)에서 지진이 일어나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진(鎭)까지 위협했다

 

고려 정종 때 구주(龜州), 삭주(朔州), 박주(博州), 진주(泰州)는 경주 가까이에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65p)

1).Constantinople AD 1037 November earthquake

 

(8)1058년 문종(文宗, 1019년~1083년)은 고려의 제11대 국왕(재위 1046년~1083년)무술 12년 하 4월 임자에 지진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68-269p)

1).Iraq AD 1058 December 8 earthquake

바그다드는 메소포타미아 때 수도로 되었었다.

이라크는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모술, 바그다드 및 바스라의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차 대전 종전 후 영국령이 되었으며, 1932년에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였다.

1958년에 군주제가 쿠데타로 붕괴되고 또한 일련의 쿠데타가 계속된 끝에 1968년 이슬람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7월에 정권을 장악한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1988년)을 일으켰으나,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승부로 끝났다. 1990년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했고, 이라크는 국제 연합의 경제제재를 받게 되었다.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이라크는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였는데, 이미 이라크는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라크에서는 징병제가 강화되었는데, 2004년 6월 29일부터 아랍어와 쿠르드어가 공용어로 취급된다.

쿠르디스탄은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독립'이라는 희망을 얻었으나, 터키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현재로서는 그 미래가 불투명하다.

2).Mosul AD 1058 December 8 earthquake

모술(Mosul)은 이라크 북부에 있는 도시로 고대 니네베 유적(遺跡)과 석유 생산으로 알려진 도시이다. 바그다드에 북서쪽으로 396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도시는 티그리스 강변에 있고 다섯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주민은 아랍인이 많지만 도시 주위에는 쿠르드족이 거주한다. 또 다른 주요 민족으로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파의 아시리아인과 기타 투르크멘족도 거주한다. 1987년의 도시 인구는 66만4,221명이었으나, 2002년에는 173만9,800명으로 추정될 만큼 증가했다[1].

이것은 어쩌면 사담 후세인이 시행한 ‘아랍화 정책’으로 대다수 아랍인이 이주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술은 바그다드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모술 일대는 쿠르드족이 옛부터 살았던 곳으로, 쿠르드족에게는 쿠르디스탄의 주요 도시로 인식된 곳인 만큼, 민족과 정치 문제도 심각하다.

모슬린은 원래 이 도시에서 생산된 직물로, 이름이 모술에서 유래되었다. 그 외에도 이 도시의 유명한 것은 대리석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는 이탈리아인이 ‘무솔리니’(Mussolini)라는 성(姓)이 있는 사람은 모술 상인의 후예라고 말한다. 모술 주변은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평야 지대로, 아랍인은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이곳을 자지라(섬)라고 불러왔다. 이곳은 곡물이나 과일이 풍성하게 자라며, 석유도 많이 매장되어 있다.

3).Tigris River AD 1058 December 8 earthquake

티그리스 강(Tigris river)은 길이 약 1,900km로, 터키 동쪽의 타우루스 산맥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이라크 남부의 알쿠르나(Al Qurna)에서 유프라테스 강과 합류한다. 이렇게 만난 두 강은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샤트알아랍 수로를 형성한다.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가 티그리스 강가에 위치하고 있고, 항구도시인 바스라는 샤트알아랍 강에 걸쳐있다.

티그리스 강은 거대한 사막국가들의 중요한 운송로로 사용되어왔다. 이 강은 바그다드까지는 작은 배로도 운항이 가능하지만, 모술까지의 운항에는 땟목이 적절하다. 이 강을 통한 무역은 20세기 중 바스라-바그다드-모술을 잇는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어 화물운송의 대부분을 전담하면서 그 비중이 감소하였다.

 

(9)1134년 인종 갑인 12년 무인에 지진하였다. 동경에 지진하였다.

 

고려 인종 때 티그리스 강 유역에 동경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94p)

1).Tigris River AD 1134 November earthquake 294

 

(10)1137년 인종 정사 15년 을해에 서경에 지진하였다.

 

고려 인종 때 서경은 디야르바키르 이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94p)

1).디야르바키르(Diyarbakir) AD 1137 November earthquake 294

티그리스강(江)의 상류부에 있으며,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에 가까워 군사상의 요지이다. 이곳은 로마 시대의 주둔지에서 비롯하여, 티그리스강의 도강(渡江) 지점으로서 발전했으나,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쟁탈이 되풀이되었고, 그 후 셀주크투르크 페르시아에 넘어갔다가, 1515년부터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구증가에 따라 발전하였다. 예로부터 견직물과 금은세공의 산지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부근 일대에서 재배되는 밀의 집산지를 이룬다. 앙카라 및 주요도시로 철도·항공로가 통하며, 둘레 5.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의 주위에 신시가가 발달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2).Mesopotamia AD 1137 November 294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부근을 경계로 하여 홍적대지(洪積臺地)인 북부의 아시리아와 충적평야인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누어지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부의 아카드와 남부의 수메르로 나누어진다. 수메르에서 일어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모체로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되었다. 강 유역을 제외한 지역은 사막 또는 반사막이며, 연간 강수량도 200mm 이하로 건조하다. 유역 일대는 연간 300mm 이상의 강우량과 하천 관개에 의하여 쌀 ·밀 ·보리 ·대추야자 등이 산출된다. 북부 및 동부의 습곡(褶谷)산지는 중요한 유전지대이며, 키르쿠크와 모술이 그 중심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고대 그리스어 'Μεσοποταμία'에서 온 말로서 '강들의 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적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지리학상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주변 지역(현재의 이라크)을 일컫는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도시 국가가 나타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3).Mosul AD 1137 November earthquake 294

 

(11)1159년 의종 기묘 13년 을미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14, 315p)

1).Jabalah AD 1158 October-1159 September earthquake

2).Damascus AD 1159 earthquakes

다마스쿠스 또는 디마슈크(Damascus)는 시리아의 수도이다.

앗샴(아랍어: الشام)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7년 현재 인구는 약 555만명에 달한다.

현존하는 도시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이기도 한 다마스쿠스는 이슬람 문화의 4대 도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중의 하나이자 수많은 이슬람 학자들의 수련장이었으며,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이를 저지하는 전략적 요지로 역할하였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대상 무역로, 아라비아 반도와의 통상로 등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볼거리들은 바자르를 둘러싸고 있는 로마 시대의 성벽 안에 밀집해 있다. 눈앞에 높은 미나렛과 함께 우마야드 모스크와 유리로 천장을 만들어 올린 모스크, 로마 시대의 기둥들과 서문들 그리고 사도 바울의 눈을 치료한 의사 아나니아의 교회 등이 길 사이에 뒤섞여 있다

 

(12)1226년 고종 병술 십삼년 계미에 지진이 있었다. 동 십월 기축에 지진하니 지붕의 기왓장이 모두 떨어졌다. 을미에 또 지진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40p)

1).Iraq AD 1226 November 18 earthquake

2).Mosul AD 1226 November 18 earthquake

3).Shahrizur(Kurdistan) AD 1226 November 18 earthquake

쿠르드 자치구 / 이라크령 쿠르디스탄(Iraqi Kurdistan)는

이라크 북부에 있는 쿠르드족의 자치 지역이다.

1970년 3월 11일에 바트당 정부와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이끄는 쿠르드 민주당 사이에서 조인된 협정으로 생겨났다.

이 지역의 영역은 이라크 북동부의 아르빌 주, 다후크 주, 슬라이마니야 주의 3개주가 포함되었고, 정부는 아르빌에 있다. 이라크 북부 최대의 도시인 모술을 포함한 니나와 주나 이라크 최도의 유전 지대인 키르쿠크를 포함한 타밈 주도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인 쿠르디스탄에 속해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곳은 이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1991년, 걸프 전쟁이 일어날때에 쿠르드족 주민들은 사담 후세인에게 대항하는 시위를 하면서, 미국과 영국군이 이라크 북부로 비행하는 것을 금지해서 이 지역을 보호했다. 그 결과 사실상 바그다드의 바아스 당 정부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이 시기에는 자치구가 독자적인 깃발을 가졌고, 독자적인 통화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라크 쿠르드족 세력인 2개의 주요 정당 쿠르드 민주당과 쿠르드 애국 동맹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1994년, 1996년, 1997년에는 수천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면서 자치구는 2개의 정당이 지배하는 2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바트 당 정권이 붕괴하자 연합국편에 가담한 쿠르드 자치구의 독립이 모술, 키르쿠크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이라크의 아랍인이나, 이라크의 같이 쿠르드족 문제가 있는 터키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서 독립은 미지수이다. 2004년 9월에 2,800명 규모의 자이툰 부대가 아르데빌 주에 주둔하였고 2008년 12월까지 이곳에서 평화 유지 및 재건을 하였다.

 

(13)1227년 고종 정해 십사년 무자 십오년 춘 정월 병자 삭에 지진이 있었다.

기해에 선경전에서 삼청51)을 초제하여 써 지진을 가시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40-341p)

1).Cyprus AD 1227 May 12 earthquake

키프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이며, 키뉘라스 왕과 테우크로스, 퓌그말리온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간 활동 흔적이 남은 곳은 남부 해안의 아이토크렘노스(Aetokremnos)로, 기원전 10,000년경에 이 섬에서 사람들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기원전 8200년경에 마을 공동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첫 인간의 등장은 키프로스 난쟁이 하마와 키프로스의 난쟁이 코끼리의 멸종과 서로 관련이 있다.

신석기 시대에 섬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비롯하여, 인구와 정착지의 이동이 몇차례 전개 되었으며, 기원전 3800년경에 지진이 일어나 취락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이 이 섬으로 들어왔는데, 이 시기의 것으로 발견된 유물 가운데는 질 높은 철기가 드물지만, 소아시아에서 온 일부 사람들은 발전된 철기 가공 기술이 있었다. 기원전 2400년경 아나톨리아인들이 키프로스에 오면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600년경에 키프로스에 처음으로 왔는데, 이 시기 정착지는 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다른 그리스인 집단들이 기원전 1100~1050년경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키프로스는 그리스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오늘날 라르나카와 살라미스 근처의 '콰르트-하다쉬트'("새 도시") 등 일부 페니키아 식민시도 들어섰다.

키프로스는 이집트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기원전 709년에 아시리아에 정복되었으며, 기원전 545년에는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다. 오네실로스가 이끄는 키프로스 사람들은 기원전 499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이오니아 도시의 반란에 동참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키프로스 섬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키프로스는 완전히 헬레니즘화되었으나, 기원전 58년 로마에 병합되었다.

45년 예수의 제자 파울루스와 바르나바가 키프로스에 건너와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였다. 키프로스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동맹하여 로마 제국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이 죽고 나머지 유대인은 키프로스에서 추방당하였다.

395년 키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649년 아랍인에 섬을 내어주었고 966년에야 다시 섬을 요구하게 된다. 제3차 십자군 당시 1191년에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여 사라센인에게서 비교적 안전한 주요 보급 기지로 이용하였다. 자신의 왕국을 잃었던 뤼지냥의 기가 성전 기사단에게서 섬을 매입하였다.

카트린느 코르나로 여왕이 퇴위하여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여왕은 자크 2세의 미망인으로, 키프로스 왕국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상업 중개지로 이용하였으며, 오늘날 키프로스의 수도인 레프코시아를 이내 유명한 베네치아 성벽으로 요새화하였다.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키프로스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1539년 오스만 제국은 레메소스를 파괴하고 악명을 떨쳤는데, 베네치아는 암모호스토스와 레프코시아, 키레니아를 요새화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대영 제국의 지배

 

1570년 오스만 제국의 피얄레 파샤가 이끄는 60,000명의 대규모 군대가 레프코시아와 암모호스토스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였다. 레프코시아 사람 20,000명이 처형되었으며, 모든 교회와 공공 건물, 궁궐이 약탈당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 섬에 밀레트 제도를 시행하여, 종교 기관이 非무슬림 소수집단을 다스리도록 허용하였으며, 동방 정교회을 이들 기관과 그리스도 교도 키프로스인의 중개자로 삼아 정치ㆍ경제상의 권력도 부여하였다. 무거운 세금 때문에 1572년에서 1668년까지 대략 28번의 반란이 일어나 술탄이 개입해야 하였다. 1831년 오스만 제국에서 첫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남자의 수만 세었는데, 무슬림은 14,983명, 그리스도교도는 29,190명이었다. 1872년 키프로스의 인구는 144,000명으로 늘었는데, 그 가운데 무슬림은 44,000명이고, 그리스도 교도가 100,000명이었다

터키-러시아 전쟁((1877–1878) 이후 1878년 이 섬의 행정권(주권이 아닌)은 대영제국에 양도되었다. 대영제국에 있어 키프로스는 자국 식민지 통로에 자리잡은 군사 요충지였다. 1906년 암모호스토스항이 완공되자 키프로스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바라보는 해군 요충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편에 서자 영국은 키프로스를 병합하였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신생 터키 공화국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1925년 키프로스는 영국의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 선언되었다.[위키]

2).Paphos AD 1227 May 12 earthquake

파포스(Paphos, 라틴어: Paphus 또는 한때 Augusta)는 키프로스 남서부의 해안 도시로, 파포스 구의 주도이다. 고대에는 "파포스"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이 두 곳이나 있었는데 옛 파포스와 새 파포스라고 불렀다. 오늘날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는 새 파포스이다.

파포스는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여신의 탄생지로, 도시의 창건 신화는 모든 면에서 아프로디테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파포스는 키프로스 섬의 도읍이었으며 로마 속주 총독의 관저 유적으로 유명하며 정교한 모자이크는 관광객의 인기를 얻고 있다. 서기 1세기경 타르소스의 파울로스(성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한 바 있다. 파포스 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14)1231년 고종 신묘 18년 임수에 지진 하였다.

 

여기서 보면 고려 고종때 임수는 경주 부근에 있었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41p)

1).Sea of Marmara AD 1231 March 11 earthquake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는 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바다이다.

동서 약 300km. 면적 약 1만 625km2. 북동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흑해로 통하고, 남서쪽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에게해에 통한다. 수심은 대체로 깊어(평균수심 200m), 최대수심이 1,355m나 된다. 북쪽 해안에는 이스탄불이 있고, 이즈미트만 등이 있다. 프린세스(키질아달라르) 제도와 중서부의 마르마라섬 등은 이스탄불 시민의 휴양 ·피서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2).Constantinople AD 1231 March 11 earthquake

 

삼국사기에 이후부터는 이상하게 지진이 발생한 지명은 언급없이 지진난 사실만 전한다.

 

(15)1246년 고종 병오 33년 동 11월 을축에 지진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42p)

1).Crete AD 1246 earthquake

크레타(Crete) 섬에 최초로 사람이 산 것은 도기 이전(aceramic)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데, 이들은 소, 양, 염소, 개를 키웠고, 곡물과 콩을 재배했다. 고대 크노소스는 신석기(나중에는 미노아 문명) 유적지의 한 곳이다.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이었다. 초기 크레타의 역사는 미노스 왕, 테세우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같은 전설이 서려 있으며, 호메로스같은 시인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레프카 오리(흰산, 2,452m)

이디 산맥(프실로리티스, 2,456m)

딕티 산맥(2,148m)

케드로스(1,777m)

트리프티(1,489m)

 

크레타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휘말려 기원전 71년에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의 침공을 처음에는 물리쳤으나, 뒤이어 삼개 군단을 이끌고 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3년간 악명높은 전쟁을 벌이다 결국 기원전 69년에 로마에 정복되었다. 그리하여 메텔루스는 "크레티쿠스"(Creticus)란 칭호를 얻었다. 고르틴은 이 섬의 수도가 되었으며, 키레나이카와 더불어 크레타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크레타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로 남았다. 그러나 이베리아 무슬림 아부 합스 우마르 알 발로티가 826년 이 곳을 점령하여 크레타에 해적 토후국을 세웠다. 960년 비잔티움의 니케포로스 포카스가 다시 섬을 수복하여 1204년까지 비잔티움 영토로 남았다. 그러다가 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는다. 베네치아는 이 섬을 4백여년간 지배했으며,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이 시기에 예술 작품이 많이 나왔다. 크레타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로는 화가 엘 그레코와 작가 비첸초스 콜나로스가 있다.

피리 레이스의 크레타 고지도.베네치아 시대 칸디아 시는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로 유명했다. 1492년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이 곳으로 와서 살았다. 1627년 칸디아 시에는 800여명의 유대인이 살았으며 도시 인구의 7%를 차지했다.

1669년 오스만 제국이 21년간의 칸디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크레타를 정복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대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모스크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와 권리는 계속 보장되었다. 17세기에 이 도시는 높은 성벽과 능보로 둘러싸여 서쪽과 남쪽까지 뻗어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은 북동쪽 지역으로, 이곳에 모든 상류층이 모여 살았다. 오스만 제국이 칸디아에 편 도시 정책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종교 재산이었다. 이를 통해 오스만의 지도층은 파괴된 도시를 재건할 수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인구를 늘리고 도시 재산을 팔아 도시 수입을 증대하는 것이었다. 몰리 그린(Molly Greene, 2001)에 따르면, 오스만 지배하에서 많은 부동산 계약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파괴된 도시에서 소수자들도 재산을 구매하는 권리를 얻어,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인들도 부동산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었다.

아랍인의 대정복때부터 크레타에 이미 무슬림들이 살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슬림이 더 늘어났다. 대부분의 크레타인 무슬림들은 크레타 그리스어를 쓰던 지역 그리스 개종자들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크레타의 정치 상황에서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들을 터키인으로 치부하게 된다. 그리스 독립전쟁 직전에 크레타 섬 인구의 45%가 무슬림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크레타 그리스도 교도 출신이었다. 나중에 터키, 로도스, 시리아 등지의 사회 불안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섬을 떠나자 남은 자들은 다시 그리스도교로 돌아오게 된다. 1900년에 섬 인구의 11%만이 무슬림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1924년 터키-그리스 인구 교환때 섬을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크레타는 1830년 런던 의정서로 근대 그리스 국가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얼마 안되어 술탄의 이집트가 섬을 침략하여 지배를 받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1840년 6월 3일 런던 회의로 오스만 제국 영토로 돌아온다.

1833년에서 1897년까지 그리스도교도의 반란이 몇몇 일어났다. 1898년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 밑의 자치령으로 있었다. 결국 크레타는 1913년 12월 1일에 그리스 영토가 된다.

세계 제2차 대전 동안 이 섬은 유명한 크레타 전투의 무대였다. 이 전투는 1941년 독일 낙하산 부대가 7,00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지역 주민과 버나드 프레이버그 장군이 지휘하는 영연방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리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당초 대규모 공수 작전을 포기한다.

2).Lake Van AD 1246 earthquake

우라르투(아라랏, Kingdom of Urartu BC860–BC590)왕국은 반호수와 우르미아호수 사이의 광활한 초원에서 군마를 사육하던 강한 민족이었다. 현재 터키 북동쪽 반호수 부근의 완켈리(VAN이 터키어 ‘완’으로 발음되고 켈리는 성을 의미한다)는 우라르투왕국의 궁성과 군사기지(성채)가 있던 곳이다. 우라르투사람들은 반(완)호수 주변에서 농업과 유목업을 하며 주로 산위에 거주하였으며 강성한 기병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은과 동 등 금속공예가 아주 발달되었다.

반호수와 우르미아호수 주변에서 고대 우라르투왕국의 주거지역과 신전터 등이 발굴되고 있다. 훗날 우라르투(아라랏)왕국은 메대의 종속국이 되어 민니왕국, 아스그나스왕국과 함께 바벨론을 심판하기 위해 소집된 나라로 기록되었다(렘 51:27).

염호수인 반호수는 해발 1,700미터 지역에 있다. 서쪽 타트반(Tatvan)에서 동쪽으로 반 市까지는 반경이 약 100킬로미터에 이른다. 그러니까 시속 100킬로미터를 달리는 고속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야 이 호수의 반경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 호수의 물결은 비단결처럼 잔잔하다. 수 천 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온 주변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북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수의 물길은 죽은 듯이 멈추어져 있지 않다. 깊이가 분명치 않은 바닥에서 새로운 물길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수영 실력을 자랑하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다. 처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이것을 알리가 없다. 한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하여 첨벙 물속으로 뛰어들다가 SOS를 날리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페르시아와 우리루트 왕국 등 수많은 고대 왕국들이 이 지역을 소유하기 위해 전쟁을 치렀다. 티그리스 강의 상류에 자리 잡은 반 호수는 인간의 소름끼치는 전쟁의 역사를 감추고 싶은 듯 외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아나톨리아의 동쪽 끝에 외롭게 남아있다.

3).Akhlat AD 1246 earthquake

4).Armenia AD 1246 earthquake

BC 9세기∼BC 6세기에 민족이 성립된 이후 수백 년 동안 주변 지역에서 발흥한 아시리아·페르시아·알렉산드로스·시리아왕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BC 2세기 경에는 제국을 이루어 수백 년간 로마와 파르티아왕조의 완충국으로서 부분적인 독립을 누렸으며, 4세기 초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그후 다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653년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자치가 실질적으로 유지되었다. 11세기 말에 셀주크투르크, 13세기에는 몽골, 15세기에 오스만투르크와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동서양의 교역로 상에 위치한 지리적 관계 때문에 16∼18세기 사이에 들어와서는 오스만투르크와 페르시아 제국 간 이권 다툼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특히 1639년에는 터키·이란 간 영토분쟁으로 국토가 양분되었다. 1828년 터키의 점령으로 다수가 제정러시아로 이주하였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까지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국외로 망명·이주하였다. 1917년 제정러시아가 붕괴된 후 조지아(그루지야) 및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반(反)볼셰비키 트랜스캅카스동맹에 참여하였으나 터키군의 위협으로 붕괴하였다.

1918년 5월 독립을 선포하였으나 터키에 일부 영토를 양도하였다. 오스만투르크의 패배 이후 1920년 세르브조약에 의해 독립이 인정되었다. 1922년 12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강제로 트랜스캅카스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일원이 되었으며, 1936년 12월 구소련을 구성하는 연방공화국의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구소련의 개방과 개혁정책으로 생태환경, 역사 및 정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1988년 2월 아제르바이잔과 민족문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12월 북부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2만 5000명이 사망하였다. 1990년 8월 주권 선언에 이어, 1991년 9월 23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5년 7월부터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이루었으며 의회선거를 실시하여 여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때의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시비로 한동안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1999년 5월 총선을 실시, 야당인 인민당-공화당 연합블록이 승리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16)1254년 고종 갑인 41년 갑수에 지진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42, 343-344p)

1).Erzincan AD 1254 earthquakes

아르메니아 고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프라테스강과 아라스강의 수원에 가까운 에르주룸 (Erzurum)에서 서쪽으로 150km 떨어진 카라수강(유프라테스강의 상류) 연안에 있다. 과수원과 채소밭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평원에 자리한다. 11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또 147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지배되었다. 밀·목화·과일 및 가축을 집산하고, 면직물·견직물·약품·구리제품 등의 생산이 활발하다. 터키군 군사기지의 하나이며, 시바스와 에르주룸을 잇는 철도·도로가 지난다. [네이버 백과사전]

2).North Anatolian fault zone AD 1254 October 11 earthquake

3).Sivas AD 1254 May 2 earthquake

옛 이름은 할리스강(Halys R.)이며, 길이 1,150km, 유역면적 15만km2인 키질이르마크강(Kizil Irmak)의 상류부 해발고도 1,275m, 앙카라의 동쪽 약 350km의 지점에 위치한다. 소아시아 동부의 교통요지로 농산물을 집산하는 중요한 상업중심지이다.

히타이트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하며, 고대명은 세바스티아이다. 셀주크투르크 시대의 사적이 많으며, 15세기 초에는 오스만령(領)이 되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터키 독립전쟁 당시에는 민족항전회의의 개최지였다. 겨울이 춥기 때문에 농업은 발달하지 않았지만 제분·금속·시멘트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4).Suşehri AD 1254 October 11 earthquake

5).Constantinople AD 1254 September 16 earthquake

 

(17)1276년 충렬왕 병자 2년 을사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같았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49p)

1).Akhlat AD 1276 October 3 earthquake

2).Ercis AD 1276 October 3 earthquake

 

(18)1281년 충렬왕 신사 7년 경신에 지진하였다.

계축에 지진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50p)

1).Erzincan AD 1280–1281 earthquake

 

(19)1284년 충렬왕 갑신 10년 계묘에 지진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51p)

1).Barada River, Damascus, AD 1284 flooding

안티레바논 산맥에서 발원하며 다마스쿠스를 거쳐 남쪽으로 84㎞를 흘러 내려와서 알우타이바 호(湖)의 늪지대까지 이른다. 상류에서는 잔잔하게 흐르다가 32㎞ 지점에서는 소용돌이치는 험악한 급류로 돌변한다. 수량은 최근 설치된 송수로를 통해 다마스쿠스에 식수를 공급하는 피자 샘의 거의 2배에 가깝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면 바라다 강은 물줄기 대부분이 흘러가는 다마스쿠스 침식지대를 가로질러 지나면서 깊은 하상(下床)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통해 강의 주류와 평행한 방향으로 높이가 다른 여러 개의 운하를 파는 등 물길을 바꾸려는 작업이 이루어져왔으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바테아·아람 운하, 특히 로마 시대에 설치된 운하들은 다마스쿠스의 언저리에 닿으면서 부채꼴로 퍼져 375㎢가 넘는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러 차례 수리를 하면서 유지되어온 이 관개시설은 구타 오아시스라는 인공 오아시스를 형성했으며 이를 통해 불모지 상태로 남아 있을 뻔했던 지역이 아주 기름진 땅으로 바뀌었다(→ 색인 : 알구타).[브리태니커]

2).Damascus AD 1284 earthquake

아랍어로는 디마시크(Dimashq)라고 한다. 시리아 사막 중앙부에 있는 오아시스에 자리잡고 있다. 안티레바논 산맥 동쪽 기슭, 시리아 고원을 흐르는 바라다강이 형성한 높이 700m의 선상지에 위치한다.

기후는 건조하여 연강수량 234mm 내외이며, 기온은 여름에 높아, 8월 평균기온이 27.6℃이고, 겨울은 온난하여 1월 평균기온이 7.7℃인데, 특히 여름에는 일교차가 크다. 안티레바논산맥에서 발원하는 바라다강을 관개에 이용하여 선상지 일대에는 용수로가 사방으로 뻗어 밀·포도·올리브·채소 등의 재배가 활발하며, 견직물·융단·가죽세공·금은세공·장식품 등의 전통적인 수공업이 활발하다. 식료품·섬유·화학·제당·유리·시멘트 등의 근대공업도 성하다.

구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밝혀져 있는 옛 도시로, 바울이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려고 왔다가 이곳에서 성스러운 예수의 모습을 보고 뉘우쳐 독실한 사도가 되었다는 고사(사도 9장)가 말해주듯이 중동의 옛 종교문화를 보호 ·육성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슬람교 제4의 성적(聖蹟)으로 알려져 있는 다마스쿠스 대사원(오미아드모스크)은 705년 건설된 것으로 지금도 시의 중심부에 보존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이기도 하였다. 이 도시는 시가의 중앙을 동서로 흐르는 바라다강에 의하여 남북으로 나뉘어진다. 남쪽은 예로부터 발달된 시가지로 옛 성채·대사원·시장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에 그리스도교도, 남쪽에 유대교도의 거주구가 있고, 다시 그 남쪽 교외까지가 이슬람교도들의 거주지역이다.

시의 중심으로부터 북쪽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속히 발전을 보인 곳으로, 고급상점·관청·호텔·병원 등이 많다. 또 시의 서쪽에는 1924년 창설된 시리아대학이 있고, 그 북쪽에는 근대적인 고급주택지가 발전하고 있는데, 이곳은 종교·종파적인 집단거주가 인정되지 않는 순수한 일반 주택지로 되어 있다. 다마스쿠스는 예로부터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隊商)의 통로가 교차되는 육상교통·교역의 요충지 및 순례지로서도 유명하였다. 오늘날에는 교통수단의 변화에 따라 자동차·철도·항공의 요지, 관광의 거점이 되고 있으며, 정치·경제·교육·출판 등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주민은 아랍계(系) 주민 외에 유대인·아르메니아인·페르시아인이 다소 거주하나 약 80%가 이슬람교도이며 그 가운데 수니파(派)가 압도적이다. 약 6만 명의 그리스도교도는 정치·경제·문화면에서도 유력한 세력이다. 시의 서부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에 해마다 인접국가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기원전부터 오리엔트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어, 다마스쿠스의 이름은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비문(碑文)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BC 10세기에는 아랍인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였으나, BC 723년 아시리아에게 멸망하여 쇠퇴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발전을 이루지 못하다가 BC 66년부터 로마제국의 속령으로서 다시 번영하였고, 그리스도교의 부흥과 더불어 교구청이 설치되는 등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635년 아랍인이 침입하고, 7세기 후반부터 이슬람교의 발흥과 함께 번영하여 이슬람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076년 셀주크투르크가 점령하였고, 1148년 십자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12세기 후반에는 아이유브왕조(王朝)가 일어나 살라딘 치하에서 큰 번영을 이루어 종교·문화면에서도 개화기를 맞아 화려하고 장엄한 수많은 모스크가 건축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의 대군이 침입하여 30만의 시민이 학살되는 등 철저히 파괴당하여 그 후 반세기 이상이나 폐허상태에 놓였다가, 1516년 이후 오스만제국의 한 중심지를 이루고, 또다시 예전의 지위와 번영을 되찾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아랍인이 시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할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시리아의 독립과 동시에 수도가 되었다. 시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20)1285년 충렬왕 을유 11년 계축에 지진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51p)

1).Mar Barsuma monastery AD 1285 earthquake

말라티주(州, Malatya)의 주도(州都)이다. 아나톨리아 고원 내륙평야에 있다. 유프라테스강(江)과 그 지류가 이루는 평야의 상공업 중심지이다. BC 2000년경부터 히타이트 제국의 중요도시가 되었으며, 그 후 아시리아에 굴복, 예속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소(小)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으나, 12세기에 셀주크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시의 도시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에스키(낡은) 말라티아의 북동쪽에 남아 있다.

현재의 근대적 도시는 1834년에 세워졌다. 과실·야채·목화·사탕무·잎담배·쌀 등을 집산한다. 면직물·제당·담배 등의 농산물 가공을 하는 외에 시멘트 공장도 있다. [네이버사전]

터키, 소아시아 동부의 도시. 근처의 아르슬란 테페(Arslan tepe)는 1932~33년과 1938년에는 프랑스의 들라포르트(L.Delaporte)와 클로드 셰페르, 1961년부터는 이탈리아의 풀리시(Puglisi)에 의해 발굴, 후기 히타이트 시대의 B.C. 11세기의 술루멜리 왕(Sulumeli)의 궁전이 발굴되었다. 사자문(門)의 전면에서 종교의식이나 수렵을 그린 오르토스타트 부조(앙카라, 아나툴리아 문명박물관)가 발견되었다.

2).Anatolia, southeastern AD 1285 earthquake

 

(21)1332년 충혜왕(忠惠王) 임신 2년 신유에 지진하였다. 정묘에 지진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65–366p)

1).Constantinople AD 1332 January 17 earthquake and storms

 

(22)1343년 충혜왕(忠惠王, 1315-1344)은 고려 제28대 국왕(재위:1330-1332,

복위1339-1344)계미 복위4년 계유에 2일간 지진하였다. 계유에 지진하고 정축 무인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366-369, 370p)

1).Constantinople AD 1343 earthquakes

2).Egypt AD 1343 earthquake

3).Ganos castle(Şarköy) AD 1343 October 18a earthquake

4).Marmara Island AD 1343 October 18a earthquake

5).Myriophyto AD 1343 October 18 earthquake

6).Sea of Marmara AD 1343 October 18 earthquakes and sea wave

7).Teichos castle AD 1343 October 18 earthquake

테오도시우스 성벽(Walls of Constantinople)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후 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가장 훌륭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인 민정총독 안테미우스가 섭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안테미우스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더불어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투르크군도 2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제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가능했다.

8).Chora AD 1343 October 18 earthquake [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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