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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지진(地震)은 바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지역이다.
사산왕조(Sassanid Empire)의 두여제와 신라(新羅)의 두여왕?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8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2 백제는 시리아, 터어키 남부와 그리스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2
글쓴이:한부울
얼마전 본 블로그에서
사산왕조(Sassanid Empire, 224–651)말기 푸란도흐트(Purandokht, 630-631)여왕과 아자르미도흐트(Azarmidokht, 631)여왕이 시기적으로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신라말기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과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4)을 닮았다고 하여 같은 인물이라고 했고 이어 사산왕조 이후에 일어난 정통칼리프(The Rightly Guided Caliphs or The Righteous Caliphs 632~661) 중 마지막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ī ibn Abī Ṭālib, 598-661:재위656-661)칼리프가 태종무열왕(654-661)이라하였으며 더불어 우마이야왕조 (Umayyad Caliphate, 661-750) 시조 무아위야1세(Muawiyah I ibn Abi Sufyan, 661 – 680)가 바로 문무왕(661-681)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페르시아나 사산왕조 우마이야왕조 전부가 신라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실체 그러한 주장에 대한 지역적인 문제에서 확실하게 종결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암브라세이즈(Nicholas Ambraseys, 1929-)라고 하는 그리스(Greece)출신의 지진학자의 저서 지중해연안과 중동지역의 지진(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이란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이 자료의 지중해 연안과 중동의 지진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신라에서 발생한 지진을 대비하고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려는 속셈으로 삼국사기 기록 중 고구려, 백제, 신라 지진기록을 뒤졌다.
일차 백제가 북아프리카를 깃 점으로 지중해를 포함하는 해성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고 이제 신라차례가 된 것이다.
신라가 존재하였던 위치가 과연 어딘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과연 어딜까?
솔직히 너무나 긴장되고 흥미롭다.
실제로 페르시아와 사산왕조 그리고 우마이야왕조가 신라인지 아니면 신라가 실제 한반도에 위치한 것인지 확실하게 규명하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1)신라 5대왕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112, 재위80-112)제위 때
93년 겨울 10월 경도에 지진이 났다.
冬十月 京都地震(파시이사금 14년/양력11.07-12.06)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Egypt AD 93 spurious earthquake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Hellespont(헬레스폰트 옛그리스명) AD 93 earthquake
Abydos (Hellespont)
헬레 (Helle, mythology)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보이오티아의 왕 아타마스와 구름의 요정 네펠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프릭소스(Phrixus)와는 쌍둥이 남매지간이다.
아버지 아타마스는 네펠레를 버리고 카드모스(Cadmus)의 딸 이노(Ino)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타마스의 두 번째 아내로 다시 결혼하는데, 의붓어머니인 이노는 전 부인 네펠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계략을 꾸몄다. 이노는 여자들에게 남자들 몰래 밀알 종자를 볶게 했고, 이듬해 남자들은 그 씨를 뿌렸다. 곡식이 전혀 자라지 않게 되자 아타마스는 텔포이로 사람을 보내어 흉년을 벗어날 길을 묻게 하였는데, 이노는 예언자를 미리 매수하여 프릭소스의 목을 희생제물로 바치면 기근이 멈출거라는 신탁을 내리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강요로 아타마스는 프릭소스를 죽이려고 제단에 세웠는데, 생모인 네펠레가 헤르메스(Hermes)에게서 얻은 날개달린 황금 털의 숫양을 보내어 두 남매를 구출하였다.
프릭소스와 헬레는 그 황금털의 양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도망치는데, 도중에 헬레가 그만 기절하고 양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져 죽는다. 헬레가 빠져 죽은 이 바다는 "헬레의 바다"라는 뜻의 헬레스폰토스(Hellespont)라고 불리며, 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이다.
(2)즉위 21년(100년)음력 10월에 서울(경주)에 지진이 일어나 민가가 쓰러지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冬十月 京都地震 倒民屋有死者(파사이사금21년/양력11.20-12.18)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Aunobaris, AD 100–199 earthquake
[튀니지 도시 Aunobaris-Henchir Gern Kebch-Béja]
(3)458년 봄 2월에 지진이 났고, 금성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春二月 地震 金星南門自毁(눌지마립간42년/양력3.1-3.30)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168–171)
Antioch AD 458 September 14 earthquake
안티오케이아(안타키아)
안타키아(Antiochia ad Orontem)는 터키 남부 하타이 주의 중심지로 하타이 주의 주도(州都)이다. 안티오크(영어: Antioch), 안디옥, 안티오키아(라틴어: Antiochia), 안티오케이아(그리스어: Αντιόχεια)라고도 불렸다.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안티오케이아가 건설되어 알렉산드레이아와 함께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5개의 총대주교좌가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안타키아는 터키 남부 오론테스 강 동안에 위치한 도시로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다.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22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농업이 중요한 산물로 근처의 비옥한 아미크 평원에서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관련 산업이 현재 안타크야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 목화, 포도, 올리브 등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고 안티오케이아를 그 왕국의 중심도시로 정했다. 그 후로 이 도시는 계속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알렉산드레이아에 이어 당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원전 64년 로마에 편입되었고 시리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제정 시대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때 선교와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크게 이름을 날렸는데 사도 바울로는 이곳을 중심으로 기독교 전파에 힘썼다. 그 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으며 기독교의 중요한 5개 총대주교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티오케이아의 기독교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레이아의 기독교 학파와는 달리 인성(人性)을 중요시 여겼다. 동방 교회의 교부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도 이 도시 출신의 신학자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안티오케이아는 두 번에 걸쳐 페르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가 637년 이후 아랍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이후부터는 예전의 번영을 잃고 작은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969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2세가 이 도시를 다시 탈환하여 제국의 변경 요새로 삼았다.
1084년에는 당시 소아시아를 휩쓴 셀주크 투르크에 점령되었다가 1098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웠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두 세기에 걸쳐 라틴계 로마 가톨릭 독립국가로 존재했으나 1268년 시리아 및 이집트를 손에 넣은 맘루크 왕조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안티오크는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늘날에는 터키의 도시가 되었다.
(4)478년 겨울10월에 경도에 지진이 났다.
478년 冬十月 京都地震(자비마립간21년/양력11.11-12.09)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174–176)
Bithynia AD 478 September 24 earthquake
비티니아(Bithynia)는 소아시아 북부 흑해에 접한 지역을 부르던 고대의 지명으로, 같은 이름의 왕국이 있었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일개 속주였다. 현재의 터키의 아시아 북부이다.
지역적으로 마르마라 해, 보스포루스 해협, 흑해에 면한 지역으로 예전부터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중요한 도시로는 니코메데이아, 칼케돈, 니케아 등이 있었다.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등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비티니아는 트라케에서 넘어온 부족의 땅이었다고 하며 리디아와 페르시아 제국에게 차례로 복속되었지만 독립성은 보장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세기 니코메데스 1세가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니코메데이아를 세웠고 소아시아의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니코메데스 4세에 이르러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위협을 받고 독립을 지키지 못하였고 결국 로마에 굴복하여 로마에 헌납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속주로 있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시기에 폰토스와 합병되었고 이후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두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5)638년 봄 3월 칠중성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보 옮겨갔다.
가을 9월에 누런 꽃이 비처럼 떨어졌다.
春三月 七重城南大石 自移三十五步 秋九月 雨黃花(선덕왕7년/양력4.20-5.18:10.13-11.10)
639년 가을 7월에 동쪽 바닷물이 붉게 되고 또 더워져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
秋七月 東海水赤且熱 魚鼈死(선덕왕8년/양8.5-9.2)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20)
Aleppo AD >638 earthquake
639 AD - Famine in Arabia during the Caliphate of `Umar ibn Al-Khattab
알레포(Aleppo)는 시리아 북부의 도시로 알레포 주의 주도이다. 주는 도시 주위의 16,000㎢의 면적을 포함한다. 그 인구는 4,393,000명에 달하며 시리아에서 가장 큰 주이다.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는 다마스쿠스 주이다. 알레포는 알카라멜 언덕에서 발견된 주거지를 통해 기원전 7번째 천년에서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에는 칼페, 칼리본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리스인들에게는 베로에아, 투르크인에게는 할렙으로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령이었을 때 알렙이 사용되었다. 그 곳은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강의 사이의 전략적인 지점이다. 초기에는 그곳은 쿠웨이크 강의 양쪽에 넓은 비옥한 계곡의 작은 그룹 위에 건설되었다.
도시의 주요 역할은 교역의 장소이며 그곳이 인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영역 그리고 남쪽의 다마스쿠스에서 오는 교역을 중계한다.
주요 수출품은 이제 주변 영역의 농산물인데 주로 밀, 목화, 피스타치오, 올리브, 양이다.
(6)717년 봄2월에 의박사와 산박사 각각1인을 두었다.
여름4월에 지진이 있었다.
春二月置醫博士算博士各一員(中略)夏四月 地震(성덕왕16년/양력3.18-4.15:5.15-6.13)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25–226)
Mesopotamia AD 717 December 24 earthquake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고대 그리스어 'Μεσοποταμία'에서 온 말로서 '강들의 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적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지리학상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주변 지역(현재의 이라크)을 일컫는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도시 국가가 나타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메소포타미아지역 금속생산지도]
(7)718년 3월에 지진이 났다. 여름6월에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었다. 겨울 10월에 유성이 묘에서 규로 들어가니 여러 작은 별들이 뒤 따랐다. 천구가 동북방에 떨어졌다.
三月 地震 夏六月 震黃龍寺塔 始造漏刻(中略) 冬十月 流星自昴入干奎衆小星隨之 天狗隕艮方(성덕왕17년/양력4.6-5.4:7.3-7.31:10.28-11.26)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26)
Antioch AD 718 September 14 earthquake
안티오케이아(안타키아) 위에 지도가 있음
(8)722년 2월에 경도에 지진이 났다.
二月 京都地震(성덕왕21년/양력02.20-3.21)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26)
Antioch AD 722 June 19 earthquake
안티오케이아(안타키아) 위에 지도가 있음
(9)743년 가을8월에 지진이 났다.
秋八月 地震(경덕왕2년/양력8.24-9.22)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180, 229, 230p)
Caspian Gates AD 743 earthquake
during the third year of the reign of constantine V: In this year 743-744 a sign appeared in the north, and dust fell in various places. there was also an earthquake at the caspian gates
743 A.D. In Britain, there was a great drought with an earthquake
콘스탄티누스5세(Constantine V, 718-775,재위:741, 743-775)의 재위3년 동안, 이 지역의 지진기록: 743-744에서 북쪽에 다양한 장소에서 많은 량의 먼지가 날리면서 신호가 나타났고 카스피 게이트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이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도 큰 지진과 함께 큰 가뭄이 생겼다.
데르벤트(Derbent)
[The Caspian Gates in Derbent, Russia are often identified with the Gates of Alexander]
[마케도니아제국BC 336–BC 323]
Caspian Gates 철문관(鐵門關)
알렉산더게이트(Gates of Alexander)=카스피언게이트(Caspian Gates)는 곧 철문관(鐵門關)이다.
이 철문관은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BC356-BC 323,재위BC 336–BC 323)이 몽골족이라고 하는 마곡족(Magog)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동양사에서는 이 철문관(鐵門關)을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쿠얼러(庫爾勒, Korla, Kurla)라 하면서 철문관을 새롭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동양사에서 철문관이라 하는 쿠얼러에는 실제로 남아 있는 유적이 거의 없고, 성벽의 흔적만 남아 있어 믿을 수 없는 것이며 근세기에 서양사를 창조하기 위해 동방을 동쪽으로 밀어내면서 지명을 이동시킨 가짜 철문관이라 할 수 있다.
진짜 철문관(鐵門關)은 알렉산더케이트라고 해야 맞다.
흉노가 서역을 다스리던 BC 174년에 동복도위(僮僕都尉)가 수비를 했다는 첫 기록이 있다 하였고 또 BC 138-119 장건이 서역을 정벌하기 갈 때도 두 번을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본 블로그는 조작된 것이라고 확신을 할 수 있다.
7세기 중엽 당나라의 고승 현장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여행 진로와 8세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여행 행로는 이 신장위구를자치구에 있는 쿠얼러 철문관(鐵門關)을 거쳐 안국(安國)으로 갔다고 하지만 동에서 서로 간 것이 아니라 서에서 동으로 가는 행로임을 알아야 한다.
13세기 전진파의 도사 장춘진인 구처기가 1220년 제자 18인과 함께 산동성에서 출발하여 철문관(鐵門關) 등지를 거쳤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했지만 이것은 근세기 지명이동하면서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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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지진 발생 위치들을 지도에 전체적으로 표시 해 보았다.
본 블로그가 주장한 것처럼 사산왕조(Sassanid Empire, 224–651)와 정통칼리프왕조(The Rightly Guided Caliphs or The Righteous Caliphs 632~661), 우마이야왕조 (Umayyad Caliphate, 661-750)의 영역과 신라의 지진 발생지역의 위치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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