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백제는 시리아, 터어키 남부와 그리스에 있었다.

한부울 2011. 11. 2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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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시리아, 터어키 남부와 그리스에 있었다.

 

글쓴이:한부울

 

백제는 어디쯤에 있었을까?

물론 신라나 고려처럼 사건 기록이 많으면 더 정확하게 내다 볼 수 있을 터이지만 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근원을 파헤쳐 볼 수가 없다.

근원적인 역사의 흐름은 차치하고서라도 흔적이라도 찾아 볼 요령으로 조그만한 근거에 의거하여 무작정 끌어 당겨보겠다는 심리에 따라 작업하지만 완벽하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이런 식으로 실체를 가늠정도 할 수 있다는데 희망을 가져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국사를 편찬하였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거의 없다.

375년(근초고왕 30년)에 생몰년대도 알 수 없는 고흥(高興, ?-?)이《서기》를 편찬하였다 하였고 또한《일본서기》에 의하면《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혀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일제의 농간이고 장난임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미우나 고우나 삼국사기를 기초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를 뒤져보다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 즉 지진(地震)과 기근(饑饉)에 몰입하여 기사를 찾아 백제와 관계되는 사건을 크게 세 가지 골라 보았다.

백제는 정말 수수께끼 같은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베일에 쌓여있다.

일본이 백제를 근거로 하여 일본사기를 만들었다고 보았을 때 얼마나 그들 나름대로 철저하게 파 해쳤을 것이며 나중에 들통이 나지 않겠금 면밀하고 조심스럽게 작업을 하면서 장래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해도 도저히 우리가 쉽게 밝혀 낼 수 없도록 함정과 늪을 만들고 그곳에다 숨기거나 감추었을 것이란 추측이 보지 않아도 가능하다.

때문에 신라나 고구려의 자료는 조금씩 흘러나오는 면이 있어 짐작 해 볼 수 있지만 백제는 가늠, 짐작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게만 느껴 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끈질기게 파고 들어보았다.

때마침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 조선까지 총 망라하는 작업에서 첫 번째로 백제를 택하고 지진자료를 기본으로 삼아 기근까지 넣어 크다고 생각한 세 가지 정도의 사건을 찾아 서양 기록과 비교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나는 것이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백제 역시 신라와 근접한 역사가 나온다.

그러나 백제는 신라와 다르게 어느 영역에서 나오다가 끊겨버리는 것이 있다.

여기서도 그것을 염려하면서 일단 밝혀 보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백제를 동방의 로마제국이라고 하였다.

최초의 백제의 이름은 십제(十濟)였다.

십은 완벽의 숫자이고 완성의 상징인 숫자이다.

얼마나 완벽했으면 십(十)이라 숫자를 사용하였겠는가 생각해 보게 한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라는 국호가 백가제해(百家濟海)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백제는 해상강국(海上强國)이었다.

해상강국이라 하면 근세기 영국을 비교하면 된다.

진평군(晋平郡)이라는 명칭이 '진(晋)을 평(平)정하고 설치한 군'일 정도이니 당시 식민지강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지금 설치고 있던 왜(倭)의 실체들이 전부 백제노예로 존재하였을 수 있다.

진평군은 468년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진평은 현 이름인데, 진(晉)나라가 설치하여 광주(廣州) 울림군에 소속시켰고, 남송(南宋, 페르시만에 있었다는 것을 본 블로그에서 언급하였다)과 남제(남제)도 그대로 하였다.는 것은 지배권내에 두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대륙 광서(廣西)경계라 하지만 이 사실마저도 고로(古老)한 부분이다.

또 백제는 황제국가였다는 사실이다.

백제는 대왕을 축으로 하여 좌우에는 유목국가처럼 좌현왕(左賢王), 우현왕(右賢王)이 있었고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팔중후(八中候),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불사후(弗斯候),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불중후(弗中侯), 면중후(面中侯)와 같이 8왕과 4후 등를 거느렸다 한다.

굉장한 정치제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조 기사에 "2년, 승려 겸익이 구도에 뜻을 두고 해로로 인도로 가서 5년 동안 체류하여 범어를 익히고 불경을 구해 인도 승려와 함께 들어왔다"라고 되어 있다.

인도(印度) 천축(天竺)국이 어디에 있는 천축국을 말할까?

백제가 한반도에 정말 있었다면 서쪽은 지금의 인도(india)지역이 맞다.

그러나 백제가 페르시아 만이나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라면 서쪽은 바로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가 있는 중앙아메리카지역이다.

아마도 이곳에 있었던 부남(扶南), 곤륜(崑崙)등이 백제식민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본도 그곳에 있어야 맞다.

일본이 그곳에 있으면 유구역시 그곳에 있어야 맞다.

"백제가 부남(扶南)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倭)에 주었다"『일본서기』흠명4년

"백제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倭)와 독자적인 무역을 시도한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황극원년2년“는 기록이다.

백제가 남긴 최고의 유물, 금동대향로에는 코끼리와 악어가 조각되어 있다.

그것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2.5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 잇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 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위키]

백제는 사막 건조지대에 서식하는 낙타와 초원지역의 가축인 양까지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신뢰성이 떨어지지만『일본서기』스이코여왕 7년(599, 법왕 1년) 백제에서 낙타, 당나귀, 양 등을 보냈다는 기록에서 적으나마 확인할 수 있다.

[양서]가 백제의 언어와 복장을 “고구려와 같다”고 했는가 하면, [수서]와[위서]는 “복장이 고구려식”이라고 하고,[북사]는 “음식과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고 했으며 “우리와 고구려는 똑같이 부여계통”이라고 백제개로왕(재위:455-475)이 위나라에 보낸 편지 문장에 부연설명하였다 하였고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종족이었던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백제지배층의 건국신화가 고구려 주몽신화와 연결돼 있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지배층은 그렇게 볼 수 있다 하고 있다.

[북사]에 따르면,"(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倭: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만이 아니라 서양인노예, 식민지인들 모두 포괄적인 지칭)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고려사람)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사][수서][구당서]는 하나같이 신라의 풍속, 형벌, 복식 등을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라고 기술했다.[위키]

그만큼 삼한에서 고구려 또는 고려가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풀이 할 수 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286,재위:234-286)때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특히 소금(Salt)의 산지(절대 한반도 인천이 아님)까지 영향권에 넣었다 하였다.

백제는 마한(馬韓:馬는 상당한 힘, power 의 근원적인 용어라고 판단됨)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한반도 전라도가 절대아님)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카스피해)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하니 상당한 영토를 지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백제파워가 과연 어딜 기준으로 한 것인지 밝혀져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백제사회에서 일어난 중요한 큰 사건으로 들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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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D 37년 11월에 지진이 났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十一月 地震聲如雷(다루왕10년 양력11.27-12.25)

(2)AD 331년 봄, 여름 : 가뭄이 크게 들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음력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春夏 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乃雨 年饑 人相食

(3)AD 552년 겨울10월에 지진이 났다.

冬十月 地震(무령왕22년/ 양력11.0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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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세 가지를 열거하였다.

첫 번째

AD 37년 11월에 지진이 났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十一月 地震聲如雷(다루왕10년 양력11.27-12.25)

 

 

암브라세이즈(Nicholas Ambraseys, 1929-)라고 하는 그리스(Greece)출신의 지진학자의 저서 자료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에서 발췌하였다.

 

Antioch AD 37 earthquake 111–112

 

놀랍게도 안티오크(Antioch)에 기원 37년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다.

년도가 백제 다루왕10년 사건과 놀랍게도 똑 같다.

지진이 얼마나 심했으며 지진이 났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안티오크는 어떤 도시일까?

 

 

 

안티오크(Antioch, Antakya)

 

이 도시는 기원전 4세기 말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장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창건하였으며, 알렉산드레이아와 더불어 근동의 수위 도시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고, 이방인 기독교의 요람이었다.

 

고대시리아의 도시로서 오론테스 강(Orontes River, 터키이름은 Asi)하구에 위치하며 1939년 이래 터키 남부 하타이 주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BC 300년 그리스인이 건설했으며 셀레우코스 왕국(Seleucid Empire, BC312– BC63)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리다가 BC 64년 로마에 넘어가 시리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가장 유서 깊은 그리스도교 신앙전통을 지닌 곳으로 47~55년에는 사도 바울로의 전도근거지였다. 4, 5세기 이후 인근지역에서 재배되는 올리브(olive油橄欖, 齊墩)의 대량생산에 근거하여 크게 번성했다. 6세기부터는 견직산업(silk)이 발달했으나 이 무렵 계속된 지진과 화재로 심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540, 611년 페르시아에 잠시 점령되었다가 637년 이후 아랍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전의 번영을 잃고 소규모 거주지로 위축되어 있다가 969년 비잔틴 제국에 재 편입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변경요새 역할을 하다가 1084년 셀주크 투르크(고려)에 점령되었고 1098년 십자군에, 1268년 맘루크조(朝)에 넘어갔다. 1517년 오스만투르크(고려)가 차지한 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왕국(Seleucid Empire, BC312– BC63)]

 

집중적인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아미크(아무크)평원 등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관련산업이 현재 안티오크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주요농산물은 밀·목화·포도·올리브·쌀·채소류등이다. 비누·올리브유 공장이 있으며 목화 및 기타 농산물 가공시설도 갖추고 있다. 견직·신발·칼 등도 생산된다.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도 많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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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기록은 뭘까?

비류왕(比流王, ?-344년, 재위:304-344)은 백제의 제11대 국왕이다.

이름은 구태(仇台)기록에 따르면, 구수왕(仇首王, 재위:214-234)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汾西王)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이 비류왕(27년)331년 봄,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음력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사이다.

春夏 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乃雨 年饑 人相食

 

 

여기에서도 역시 서양기록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바로 제롬연대기(Jerome, chronicle Helm(AD 333)에 나오는 내용으로서 기원AD 333년에

A countless multitude died from pestilence and famine in Syria and Cilicia.

331년이라고 하기도 333년이라고도 하는 시기에 수많은 무리가 시리아(Syria)킬리키아(Cilicia)에 역병과 기근으로 사망하였다란 내용이다.

때문에 백제 기록처럼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인육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실로 심각한 기근이고 역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끔직한 사건인 것이다.

처참한 역사이기도 하지만 사건의 발생지가 한반도 백제가 아니라 터어키 남부와 시리아란 사실이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 사건과 이 사건이 맞다고 판단 할 수 있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연대가 거의 맞아 들어가는 상황이며 내용이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믿지 않고자 하면 어떻게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백제는 앞에서 사막 건조지대에 서식하는 낙타와 초원지역의 가축인 양까지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는 사실과『일본서기』스이코여왕 7년(599, 법왕1년)에 백제에서 낙타, 당나귀, 양 등을 보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매우 보수적인 입장에서 확인 한 것이다.

 

 

킬리키아(Cilicia) 또는 기뤼시아는 소아시아의 남동쪽 해안, 키프로스 북쪽의 해안지역을 말하는 고대의 지명이다.

 

북쪽과 서쪽은 타우루스 산맥이 아나톨리아의 고원지대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 안티타우루스 산맥이 있다. 남쪽으로는 지중해와 만나는데 고대에는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잇는 유일한 통로, "킬리키아 문" 이 이곳에 있었다.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특히 키루스 2세의 정복 당시 도움을 주어서 키루스로부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킬리키아의 문 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수스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잠시 프톨레마이우스 왕조(Ptolemaic dynasty, BC305-BC30)의 지배를 받다가 곧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Empire, BC323-BC60)로 넘어갔고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106-BC48)의 동방원정때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후로 로마 제국시대에 몇번 속주로 재조정하였다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로 승계되었다.

 

7세기 이슬람교도의 정복전쟁때 이슬람에게 복속되었다가 965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니케포루스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912-969, 재위:963-969)가 다시 복속시켰으며 1080년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킬리키아 왕국(Armenian Kingdom of Cilicia1198–1375)을 세웠다. 1375년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 떨어졌으며 1515년에는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현재는 터키의 영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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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번 째는 어떤 사건인가?

 

(3)AD 552년 겨울10월에 지진이 났다.

冬十月 地震(무령왕22년/ 양력11.05-12.03)

 

 

바로 기원 552년 백제 무령왕 22년 10월에 있었던 지진이다.

여기서도 앞에 지진기록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암브라세이즈(Nicholas Ambraseys, 1929-)라고 하는 그리스(Greece)출신의 지진학자의 저서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지중해연안과 중동지역의 지진)이란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췌하게 된다.

 

Corinth AD 522 earthquake 182

 

바로 코린트(Corinth)라고 하는 지형에 있는 고대 폴리스 및 현대도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백제 무령왕 재위시기에 지진이 난 기록이 그리스 본토 코린트(Corinth)와 똑 같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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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Corinth)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코린트 지협(地峽)에 있었던 고대 폴리스 및 현대도시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으며,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hellas)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고린도書).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현재의 새 코린토스시는 구(舊)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5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현(縣)의 주도(主都)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자원은 거의 없으며, 카란토(Currant, 코린토스의 건포도라는 뜻) ·올리브유 ·견직물 ·펠로폰네소스의 북동부에서 생산되는 곡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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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세 가지 사건으로 본 백제는 먼저 터어키 남부와 시리아, 그리고 그리스 코린트 지협에 잇는 도시까지 확인 할 수 있었다.

모두 해안가까이에 접해 있다.

이것이 백제가 해상강국임을 나타내는 가시적인 신호로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일단은 대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백제가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해상강국이니까 상상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서인도제도인 인도 즉 천축을 왔다 갔다 할 정도면 무리가 아니다.

백제가 터전을 잡고 활약한 근원지를 조금 살펴보았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은 멀고도 멀다.

지금 내가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찾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가능성을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실제 역사는 실증만을 가지고 판단 한다는 것은 기득권을 독식한 반대 입장에서 볼 때 처음부터 시작점이 불리하고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기존 틀을 깨뜨리고 뛰어 넘는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부딪치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길이 열리는 것이다.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모여 나중에는 실증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고민을 하고 고뇌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허무한 작업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희망과 가능성은 우리 편에 있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부족하다 싶으면 더욱더 분발하면 된다.

그렇지 않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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