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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기록으로 본 고구려(高句麗)는 그리스(Greece)?

한부울 2011. 11. 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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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기록으로 본 고구려(高句麗)는 그리스(Greece)?

 

글쓴이:한부울

 

고구려에 과거 지진이 있었다는데 있을 곳에 있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지진이 없을 곳에 있다는 것은 조작이나 왜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밝히는 문제이다.

세계 지진판(earthquake plate)경계를 표시한 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유럽 등 지진판 경계부분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다.

눈을 뜨고 살펴보아도 한반도주위의 이 지진판(地震板) 경계선은 특별한 것이 없다.

또 1963년부터 1998년 사이 지진(地震) 진앙(震央)지역 즉 진원지(震源地)을 검은 점으로 표시한 지도가 함께 제시되었다.

 

[클릭원본]

 

[Global earthquake epicenters, 1963–1998, 위 진앙지를 검은 점으로 표시하였는데 1963년부터 1998년까지 약 35년간 수집한 진앙지 지도]

 

 

결국 한반도 부근은 특히 지중해연안과는 다르게 뚜렷한 지진판 경계선도 없고 진앙 표시점도 거의 없는 최상의 안전지역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유라시아판이 있는 유럽 지중해 연안과 터어키와 중동경계선 그리고 인도판이 있는 이란과 인도 경계선, 그리고 인도 북부지역은 진앙지를 표시한 검은 점이 뭉쳐 검은 색칠을 한 것처럼 까맣게 표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63년에서 1998년까지 35년 동안 크고 작은 지진진앙이 그곳에 무수히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진의 역사를 알아내는 척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 조선까지 발생한 지진 기록은 적어도 한반도가 아니란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어코 따진다면 이 지구상 땅 흔들림으로 무사하다 할 곳은 없다.

하지만 역사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피해주는 지진은 한반도엔 없었다고 단정을 내려도 무리가 없으며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솔직한 답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기어코 반도역사만을 고집하면서 반도역사를 근거로 하여 한반도 과거 에 지진이 무수히 많이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학자나 또는 지리학자들 모두가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지리학자라면 이런 넌센스같은 주장은 하지 않는게 옳다고 본다.

나는 단언코 우리의 역사에 나타나는 지진 기록은 절대로 한반도가 아님을 주장할 수 있다.

같은 년도 그것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중해와 동시에 한반도에서도 지진이 일어 났다고 하는 것은 거의 6,000-7,000km 가 떨어진 거리문제도 있지만 한두 번 정도는 동시에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횟수가 한두 번이 아니라 그 이상 수차례 똑같이 양쪽지역에서 같은 년도 같은 시기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맞다.

때문에 한쪽은 거짓이고 한쪽은 사실인데 한쪽 기록은 가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반도에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근세기에 만들어진 가공의 역사인 것이다.

지진(地震, earthquake)은 자연적, 인공적 원인으로 인해 지구의 표면이 흔들리는 현상이라 했다. 지진기록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연적 원인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자연적인 원인 중 단층면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변위자체를 지진이라고 이해 하고 있는 것이다.

지진은 지각(地殼)내 암석의 파괴로 인하여 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는데 이 파괴가 일어난 장소를 진원(震源)이라 하며, 진원 바로 위의 지표 점을 진앙(震央)이라 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원인으로 대륙이동을 설명하는 지질학이론인 판 구조론

(板構造論, plate tectonics)은 명확한 지구과학인 것이다.

지질학자들이 진앙지를 찾아내는 것은 지각 내 암석 활동이 지속적인 탄성과 복원으로 지진이 발생한다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며 지진판 경계선을 두고 판과 판이 서로 어떤 힘 에너지가 생성하여 밀어내거나 밀리는 형태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것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판구조론이 말하는 자연적인 암석 활동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연적으로 지중해와 한반도를 동시에 건들지는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런 현상이 생기려면 적어도 한반도에도 지중해처럼 지진판(地震板, earthquake plate)이 사이를 가로 질러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다 해도 지중해와 동시에 에너지 활동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말끔할 정도로 한반도 사이를 지르는 지진판 어떤 것도 없다.

이것으로 논란이 많은 과거 지진역사의 진위 판단을 확실하게 종결지울 수 있는 이론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불필요한 논란을 제거하는데 충분한 잣대가 된다는 것이다.

 

위 진앙지 표시지도에서 보다시피 지진 지표면의 진앙(震央)지역 진원지(震源地)는 거의 전부 지진판 경계선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판 구조론(板構造論, plate tectonics)에 따르면 지구내부의 가장 바깥 부분은 암석권(lithosphere)과 연약권(asthenosphere)의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암석권은 지각과 식어서 굳어진 최상부, 지구의 지각과 핵 사이의 부분으로서 깊이 약 30km에서 약 2,900km까지를 가리키는 맨틀(mantle)로 구성되며 그 아래의 연약권은 점성이 있는 맨틀(mantle)로 구성되어 수백만 년 이상의 시간동안 맨틀(mantle)은 극도로 점성이 높은 액체와 비슷한 행동을 보이지만 지진파의 전파와 같이 짧은 시간동안 가해지는 힘(에너지)에 대하여서는 탄성체와 같은 행동을 보인다 하였다.

그리고 암석권은 연약권 위에 떠 있다 한다.

암석권은 판이라고 불리는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진 판이며 세계10개의 주요 판(Plate)으로는 아프리카판, 남극판, 오스트레일리아판, 유라시아판, 북아메리카판, 남아메리카판, 태평양판, 코코스판, 나즈카판, 인도판이 있다.

 

이 정도로 지진에 대하여 설명을 마치고자 한다.

더 이상은 지질학자의 몫이지 역사를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아니다.

이만큼 지진발생에는 지진판 경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상황을 우리의 역사 지진기록에 대입하면 전부가 새롭게 정리될 필요성이 있다는 결론이다.

지질학적 과학에 의거하지 않고 불분명한 반도역사만을 가지고 고집하고 반도역사기록이 오직 지금 우리의 한반도에 대한 기록이라고 믿는 신념이 너무 강하여 우리의 지진역사로 인식하고 오인한다는 것은 점점 더 문제를 난해한 골짜기 속으로 끌고 들어갈 뿐 진실을 밝히는 일하고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질학적인 과학적 근거 속에서 우리의 지진 발생역사를 심층 분석해야 당연히 옳은 역사 통찰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역사 자체도 그러하지만 역사를 분석하거나 따짐에 있어 자연환경과 자연적인 이치의 근원적인 원칙을 벗어나서 생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현대 과학적 분석이 이런 경우에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 지질학자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반도역사만을 근거로 답습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본연의 지질학적, 과학적인 면에서 능동적으로 보고 우리나라 지진역사를 분석해 달라는 부탁이다.

고구려가 그리스란 주장을 처음 나도 믿지 않았다.

반도역사에 너무 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런 자연적인 증명을 밝혀놓는데 부정할 수 있는 재간이 없다.

분명 삼국사기의 기록은 지진기록을 모사한 모양새이지만 이 지진기록도 확실히 들어날 수 밖에 없는 또는 잘 알려진 대사건들을 고의적으로 빼버렸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들은 그들의 지나친 검색과정에서 실수로 누락되거나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철저했던 분류와 검색 또는 엄청난 편집 작업과정에서 그들도 모르게 빠진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나마 남아 있었다는 자체가 다행스럽게 여기며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어 오늘날 역사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천지신명님의 역사 보존의 덕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귀중한 보물을 대하듯 기록을 찾아 분석한다는 자체가 그저 행복하기만 할 뿐이다.

더불어 놀랍게도 그리스 지진학자의 지중해연안과 중동지역의 지진역사 자료를 어렵게 마침내 발견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또한 천지신명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고구려 역사의 대지진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중해 연안과 함께 하였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고구려가 기원(AD)300년까지는 지중해연안에 있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때문에 고구려 지진기록은 그리스의 지중해연안과 합치된다는 점에서 기원300년까지는 그리스가 고구려라는 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명확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로마가 고구려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는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암브라세이즈(Nicholas Ambraseys, 1929-)라고 하는 그리스(Greece)출신의 지진학자의 저서 자료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에서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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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년 가을 9월 환도에 지진이 났다. 

秋九月 丸都地震(태조대왕90년/양력10.8-11.5)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Lycia AD 142 earthquake and sea wave 128–131

 

 

丸[wán] [명] 둥글고 작은 물건. [일반적으로 뒤에 ‘儿’을 붙여 씀].
弹丸。 - (총탄의) 탄환(彈丸).
鱼丸。 - 어단.
肉丸。 - (요리의) 고기 완자.
泥丸。 - 작은 진흙알.
药丸。 - 환약(丸藥). 알약.

 

都 [dōu]  모두-도
① 주어 뒤에서만 쓰이며, 평서문에서 ‘都’가 총괄하는 대상은 반드시 ‘都’ 앞에 쓰여야 함.
[부연설명] ㉠ ‘都’가 포괄하는 대상인 주체는 반드시 둘 이상의 복수이어야 함. ㉡ ‘都’를 경성(輕聲)으로 발음하면 안 됨. =[全]
② 불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의문대명사인 ‘什么’、‘谁’、‘哪(儿)’、‘哪里’、‘怎么’ 등이 쓰일 때는 구절 중에 ‘都’나 ‘也’를 써서 호응하게 하는데, 이때 ‘都’를 반드시 써야 함.
[유의어] 全
[부] 1. 모두. 전부. 다.
首都 shǒu dū   [명] 수도(首都).
大都 dà dōu  [부] 대부분. 대다수.
都市 dū shì   [명] 대도시(大都市). 도시(都市). 도회(都會).都会
全都 quán dōu  [부] 모두. 전부. 

 

위에 환도(丸都) 한어사전에 나온 뜻풀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리키아(Lycia)의 모양을 보라.

지도를 보면 꼭 집단적인 둥근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란 것을 눈치 챌 수 있어진다.

환(丸)은 둥근 것을 의미하면 도(都)는 모두 전부 불특정 대상 전부를 지칭하는 단어라고 볼 때

주, 성, 현, 지방(provinces)성질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둥근 형태를 띤 주, 성, 현이라는 지명이름이다.

환도가 바로 그와 같은 뜻을 내포하였던 것이라고 볼 때 잘 어울리는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바바리안(barbarian)이라고 하면 오랑케를 나타내는 뜻이다.
다시말해 미개민족이라는 것인데 지금 동양사에서 말하는 오랑케나 서양에서 말하는 바바리안은 같은 의미라고 볼 때 한 쪽에서 가져다 쓴 글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세기 들며서 역사재판짜기 할 때 동서양사가 마치 복사한 것처럼 비슷한 면을 많이 보이는데 서양사가 동양사를 빌어 썼는지 아니면 동양사가 서양사를 빌어 썼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그와 같다.
특이한 것은 동양사에서는 중국이란 존재가 나머지 민족을 통칭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고 서양사에서도 그리스나 로마에서 볼 때 타 민족을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이 비슷하다.
동양사의 중국의 주체가 삼한인지 아니면 지금 중공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족인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국 삼한이라면 삼한은 로마와 그리스라고 봄직이 마땅하다.

그러한 애매모호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나타나는 재반적인 문제에서 신라가 로마, 백제가 로마, 고구려가 그리스 로마로 엉겨들어감을 볼 수 있어 하는 말이다.

그러나 결국 서양사가 동양사를 빌어 쓴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리키아(Lycia, 吕基亚)

오늘날 터키의 남동 해안의 안탈리야와 무글라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이다.

로마 제국 성립 후 속주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서는 리키아인을 히타이트 연맹이라고 나온다.

리키아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 아수와 동맹의 구성국가였는데 '루카'(Lukka)로 나타난다.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후, 리키아는 독립 신히타이트 왕국으로 부상하였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리키아는 아테네의 판디온 2세의 아들인 리쿠스의 이름을 따지었다고 한다. 고대에는 이 영역은 한 나라로 통합되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이 굳게 결속한 동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트로이아 전쟁에서 리키아는 두 존경받는 전사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의 지휘 아래 트로이아 편에서 싸웠다고 한다.

 

다른 그리스 신화에는 리키아 왕국은 다른 사르페돈이 지배하였다고 한다.

그는 크레테에서 왔으며 미노스 왕의 형제이다. 사르페돈의 추종자들은 '테르밀라이'라 불리었으며 그들이 밀리안(Milyans)이라 불리는 민족을 정복하고 왕조를 창건하였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는 밀레토스의 창건 이야기와 더불어 크레테가 소아시아에 정착과 관련이 있음을 뜻한다. 리키아는 그리스 신화에 벨레로폰의 이야기에도 나오는데 그는 결국 리키아 왕 이오바테스(또는 암피아낙스)의 왕좌를 계승하였다.

 

리키아는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때 메디아의 하르파구스(Harpagus)는 키루스 대왕의 장군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정복하였다. 하르파구스의 후손이 기원전 468년까지 다스렸는데 그때 아테네가 이들을 무너뜨렸다. 그 후 페르시아는 기원전 387년 다시 점령하였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지배를 유지하였다. 이후 리키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손에 넘어가고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에 정복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4년에 이곳에서 피살되었다. 서기 43년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리키아를 로마제국의 속주로 병합하며 그것을 팜필리아와 통합하였다. 리키아는 결국 그리스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어 터키의 일부가 되었다.

 

20세기 초 그리스-터키 전쟁이 일어난 뒤 이 지역에서도 그리스와 터키의 인구 교환이 시행되었다. 오늘날 리키아는 터키의 국내외 관광객이 몰리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리키아는 트리밀리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그것은 파타라 발굴에서 고대 도로 표지판에 발견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디르밀이라는 터키 마을이 고대의 트리밀리 즉 리키아로 판명되었다.

 

2세기의 대화록 에로테스는 리키아가 그들의 기념비보다는 그들의 이전 영광을 포함하므로 역사가 흥미롭다고 하였지만 리키아의 유적에서 많은 유물들이 특히 그들 특유의 절벽 측면의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리키아는 여신 레토와 그녀의 쌍둥이 아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숭배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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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62년 겨울 11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났다.

冬十一月 雷 地震(중천왕15년/양력11.29-12.28)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Cyrene AD 262 earthquake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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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라고 하는 시리아도 지진발생으로 볼 때 고구려 영역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로마나 그리스 또는 비잔티움시대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키레네(Cyrene)는 고대 그리스 식민지 도시 중 하나로 현재의 리비아의 샤하트(Shahhat) 마을에 위치하였던 고대 도시이다. 키레네는 이 지역의 당시의 다섯 그리스 도시들 중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리비아의 동부 지역을 일컫는 명칭인 "키레나이카"는 키레네를 본 따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다.

 

키레네는 제벨 아크다르 산(Jebel Akhdar)의 고지대의 초목이 많은 골짜기에 위치한다.

키레네라는 도시명은 그리스인들이 아폴론에게 봉헌하였던 "키레(Kyre)"라 불린 샘을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키레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리스티포스(Aristippus: BC435-BC356)가 기원전 4세기에 창시하여 기원전 3세기 동안 융성하였고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그리스 철학 학파인 키레네학파(Cyrenaics)가 있던 곳이었다. 키레네는 당시에 "아프리카의 아테네"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3) 300년 봄 정월에 지진이 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 不雨 年饑 民相食(봉상왕9년/양력2.7-3.6:3.7-8.30)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Tarsus AD 300 May 14 earthquake 139–140

 

 

이 타르수스 역시 로마시대때 상당한 중요도시로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

위 지도를 보면 로마, 이스라엘 타르수스 3대도시가 중요도시로 표시되어 있다.

이 고대도시 또한 고구려 영역이라면 결국 고구려는 시베리아 전역과 북유럽뿐만아니라 지중해 연안 주요도시를 다 점령하였던 그야말로 대제국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반도역사 난맥현상에서 보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인데 일찍부터 지중해를 깃점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영역다툼을 하였다는 것이고 그러한 지역적 환경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지진역사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본 블로그에 실을 고려 조차도 이 지역을 영역범위내에 두고 있었다면 분명 삼한의 역사는 여기에서 노력분투 존재한 것이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삼한이 고려에 이어지고 조선까지 이어졌다고 풀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조차 부정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 역사를 하찮게 보고 처음 부터 스스로 중국이 아닌 하찮고 야만적인 민족군으로 분류 비하하고 어느 민족도 스스로 하지 않는 자학의 역사관을 가짐으로서 타생적 생태만을 믿는 사생아적인 아집만을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만큼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사고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정만 하지말고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좀 자세히 보라는 말이다.

지진의 역사는 과학적으로 분석 할 수 있어야 하고 지구학적 근원을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 이러한 분석을 어찌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하고 비난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고 알고 있지만 반도역사가 가르친대로 습관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부터 달라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가 안고 있는 혼란의 치유법이라고 할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타르수스(Tarsus)는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 이름으로서, 오늘날 터키의 중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지중해로부터 16km 내륙으로 들어와 있다. 한글성서에서는 타르소(공동번역), 다소(개역한글판)으로 음역되어 있다.

 

타르수스는 고대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헤티트 문명의 영향하에 건설된 도시로서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는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지중해의 물물교환과 교통왕래를 통하여 빨리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7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인이 소아시아 지역에 활발히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할 무렵 이들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타르수스는 킬리키아지방의 행정 수도 역할을 하였으며, 도시의 문화적 수준이 심지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갔다고 전해진다 (스트라본, 지리서 14. 673)이 도시는 스토아학파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디오게네스의 후계자인 아르케데무스(Archedemus), 기원전 3세기 초 스토아학파의 수장이던 제논(이 제논은 제논의 역설의 그 제논이 아님), 기원전 2세기 경 스토아 철학의 수장이전 안티파터(Antipater)를 비롯하여 네스토르(Nestor),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 등을 배출하였다. 한 때는 역시 스토아 철학자인 키케로가 총독으로 있기도 하였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배로 지중해를 건너 키드누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타르수스는 또한 사도 바울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실례로 사도행전의 바울로 전승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 자신도 타르수스 출신임을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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