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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이 왜 신라마(新羅馬)인가?

한부울 2011. 10. 27.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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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마(新羅馬)란 무엇인가?

 

글쓴이:한부울

 

신라마가 어디일까?

놀라지 말자.

바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는 터키 옛 수도 이스탄불이다.

본 블로그에서 싱가포르를 신가파(新加坡)라 한 이유를 게시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에 의문을 달고 싶다.

신라마(新羅馬)란 무엇인가?

왜 라마(羅馬)를 로마(Rome)라 했을까?

자료를 보면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

전부 성경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 이외 별 다른 것이 없다.

예수교의 세력(strength, vigor)을 나타내고 거대하다(colossale)란 뜻도 있다.

Roam, 룸(Rûm)은 아랍어로 로마를 뜻한다.

원 뜻은 'Roma로 가다'의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란 말이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

때문에 본 블로그는 로마를 알면 삼한의 역사를 안다.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마야문명(Maya)을 왜 한문으로 마아(馬雅,아름답다-아)라 했을까?

또 하나 한반도 신라(新羅)를 왜 새로운 신(新)을 붙여 신라라 했을까?

결국 의문의 꼬리는 라(羅), 마(馬)이다.

이 라(羅), 마(馬)는 무엇을 상징한 글자일까?

 

우리는 백제(百濟)를 백제라고 쓰고 읽는다.

제(濟)의 한자 뜻은 바로 강물을 건너다-제이다.

그렇다면 백제란 뜻은 백개의 강이나 물을 건넌다는 뜻이다.

어쨌던 백제란 명칭은 물과 상당히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백제를 백제(白帝)로나 백제(白濟)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중해를 옛 터키인들은 백해(白海)라 했다고 한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후자 백제(白濟)는 백해(白海)를 건넜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전자의 백제(白帝)는 백해를 거점으로 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고 보고 있는 근세기 역사, 자료들이 모두 엉터리 소설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진실 앞에 장담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좀 과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이와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아래 글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이스탄불이라고 하고 옛 명칭 라틴어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또는 영어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는 도시가 동지중해와 흑해를 분리하는 거점 정 중앙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천해의 요새로서 요충지 중에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를 정복자들 누구라도 탐내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서로 차지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란 예상을 쉽게 할 수 있다.

이 도시를 동방의 빛이라고 하였다.

 

[클릭하면 더 잘 보임] 

                                                           [Europe topography]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 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위는 다 알다시피 인도시인 타고르의 시고 우리나라와 연결되는 매우 귀중한 글이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인도명문 브라만(사대부양반계급)집안에서 성장하여 전통적인 고유의 종교·문학에 친숙해지면서 동시에 영국문학도 배웠으며 1877년 영국에서 약1년 머물고 돌아온 뒤 1880년 19세 때 시집《아침의 노래(1883)》를 발표하고 예술적 기초를 확립하였고 1913년 52세때 알려진'찬송을 헌정함'이라는 뜻인〈기탄잘리 Gtñjali, 1910)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그 공로로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까지 수여받았던 인물이다.

 

이런 인도 시인 타고르가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라고 구슬프게 읊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인도가 corea 이거나 그래서 타고르 역시 corea 인으로서 타고르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58년에 인도제국이란 국명아래 영국국왕의 통치를 받으며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 코리아에 대한 분노와 혼란, 어딘가 모르게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라고 할 수가 없다.

또 한 가지는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이라는 시 제목이다.

동방의 빛이나 동방의 등불이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동방은 코리아라고 할 때 발생되는 역사는 매우 혼란스럽게 거대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코리아가 주는 의미는 좀처럼 윤곽을 잡울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동방의 빛이라고 하는 이스탄불 옛 라틴어 명칭 콘스탄티노폴리스라 하는 이도시의 한자 명칭이 공교롭게도 바로 신라마(新羅馬)란 사실이다.

싱가포르(Singapore)를 신가파(新加坡)라 한 사실과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를 음차하면 베이징한어(漢子)로 군사탄정보(君士坦丁堡)이다.

그러나 분명 콘스탄티누스1세가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새로운 로마의 뜻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라 하여 이름을 붙였다 하였다.

바로 "새로운 로마(Nova Roma) "New Rome" 란 뜻이란다.

이것이 한자어로 신라마(新羅馬)인 것이다.

이것은 한어자료에 명백하게 나타나는 사실이다.

 

[클릭원본]

 

콘스탄티폴리스(라틴어 Constantinopolis, 영어: Constantinople)는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의 옛 이름으로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꾸었고 그가 바꾸기 전의 원 이름은 비잔티움(Byzantium)이었다 한다.

 

아래는 위키 설명이다.

 

 

 

비잔티움(Byzantium)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Diocletian, Diocletianus 추정245–312, 재위:284-305)퇴임 이후의 내전에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한 로마의 황제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 재위:310-313)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 황제(Licinianus, Licinius, 263-325,재위:308-324)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Constantine the Great, 라틴어: Constantinus, 272-337,재위:306-337)와 만나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 로마 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 밀라노 칙령(313년, Edict of Milan)을 선포하는 사이에 리키니우스의 영역으로 쳐들어갔으나 도리어 신속하게 돌아온 리키니우스의 반격을 받아 죽었다. 이때 리키니우스는 11일의 포위공격으로 비잔티움을 점령했다.

 

내전이 종결되어가는 가운데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게 되었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을 완전히 통일하려는 콘스탄티누스의 맹공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맏아들 크리스푸스(Crispus, ?-326)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의 바다란 헬레스폰토스 해협(Hellespont, Dardanelles)으로 돌진하여 2일간의 전투 끝에 130척의 배와 5천의 병사를 수장시킨 것이 급격히 전세를 반전시켰다. 바다의 장악으로 보급을 원활히 받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비잔티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 결과 선정된 도시가 비잔티움이었다. 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을 통해서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있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으며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또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d Empire 224-651)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았다. 당시의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침내 324년부터 330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가 끝나고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한 "새로운 로마(Nova Roma)" 라고 불렀다. 또한 그것이 공식 명칭이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 혹은 애칭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의 황제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로마시에서 완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게 되었다.[위키]

 

비잔티움(Byzantium)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324년부터 330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가 끝나고 신라마(新羅馬)라 했으니 그 시대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신라마(新羅馬)는 뉴로마(New Rome)이다.

싱가포르(Singapore)을 신가파(新加坡)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라마(羅馬)가 망하고 새롭게 새운 라마(羅馬)란 뜻이다.

라마라 하니 티베트 불교 라마교(喇嘛教)가 갑자기 생각난다.

라마는 원래는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이었다.

라마(喇嘛:Lama)의 한자풀이는 성씨-라, 나팔-라 이치-마, 도리-마, 사실-마이다.

비잔티움(Byzantium)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324년부터 330년까지 대대적인 공사가 끝나고 신라마라 했다 하였으니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는 16대왕 흘해 이사금(訖解泥師今, 250-356, 재위 310-356)시절이고

백제는 제11대 국왕 비류왕(比流王, ?-344, 재위:304-344)시대이다.

비류왕은 분서왕(汾西王(?-304, 재위 :298-304)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를 신하들이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그런데 비류왕(比流王,재위:304-344)의 재위년도와 콘스탄티누스1세 황제(Constantine the Great, 라틴어: Constantinus, 272-337,재위:306-337)가 비슷하게 엮인다.

동일인물 일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동일 인물이라 하지 않고 각자 판단에 맡기고 싶다.

 

일단 애매한 것은 신라가 아니라 백제의 비류왕이니까?

잘못하면 미친 소릴 듣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재야역사학자들 사이에는 백제가 비잔티움이라는 설도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백제가 백제(百濟)가 아니라 백제(白帝)나 백제(白濟)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반도사의 신라(新羅)가 왜 신라마(新羅馬)의 이름 중 마(馬)자만 떼내고 붙였을까 의문이 든다.

일제가 설치던 그 시절 총칼 쥔놈, 엿장수 마음대로이니까 물어보나 마나겠다 싶다.

 

반도사의 신라(新羅) 명칭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때문에 신라(新羅)라 하였을까?

반도사에서 신라는 1,000년을 이어온 왕국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 1,000년 동안 새롭게 태어난 왕국 역시 아니다.

개국 중간에 신라가 큰 위기에 몰려 천지개벽이나 정변(政變)의 역사가 특별하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있어봐야 늘 상 동해 쪽으로 열도 왜구들이 설치고 빠지고 설치고 빠지고 했다는 기록 말고는 특별할 것이 없다.

반도사를 보면 어쨌거나 나라는 천년가까이 존속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새로운(新) 라(羅) 신라(新羅)인가?

반도 신라가 왜 새롭다는 신(新)자를 붙여 “새로운 국가”란 의미를 강하게 나타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의문은 글쓴이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억지로 따져 본다면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을 신라마라고 칭할 시기 서기 330년경에 신라는 석(昔)씨 왕조가 끝나고 김(金)씨 왕조로 넘어가는 시점이며 또 이사금(泥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왕만 바뀌었다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망하거나 새롭게 건립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왜 신라(新羅)라 했는지 근원적으로 이해되질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반도사에서 서양사로 넘어가 로마제국을 들여다보면 분명 근대사에는 395년에 가서 비로소 로마제국이 동서(東西)로 나누어졌다 했다.

그런데 324년부터 330년까지 공사를 마치고 새로운 로마(Nova Roma)" 즉 신라마(新羅馬)라 했다 하니 이것 역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로마가 동서로 분리된 시점인 395년에 가서 신라마(新羅馬)라고 불렀다 하면 이해가 되겠는데 60년 정도 앞서 330년5월11일 로마노바로 천도하고 신라마라 칭 하였으니 서로마가 정확히 언제 무너졌는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근대사가 무엇인가 크게 원초적인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숨기려고 한 것일까?

혹 신라와 백제를 로마로 둔갑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재야사학자들의 의혹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산처럼 높다랗게 쌓여만 간다.

 


어쨌던 근세기에 서세 주도로 근대사를 손 보았다고 여기지만 서양사와 동양사가 따로따로 갈 수 없게 관리하고 그래도 의심을 덜기위해 조금씩 어긋나게 엮어놓았지만 들어날 것은 언제가는 들어 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주지한 것 처럼 로마(Rome)란 뜻도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흔히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란 문장이 로마를 상징하는듯 하다.

또 거대하다, 세력 등으로 의미가 있다 하였다.

아주 오만이 넘쳐나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로마(Rome)라는 한어 라마(羅馬)에 대해선 특별한 설명이 없다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되지만 수수께끼같은 명칭에서 의심만 늘어날 뿐이다.

이것들은 어쩌면 근세기에 탄생된 지칭이나 명칭 일 수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탄불(Istanbul, 伊斯坦堡)은 어떤 뜻이었을까?

 

 

 


엔하위키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1453년에 이 도시를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Mehmed II)는 즉시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Edirne, Adrianople)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옮겼다.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계속해서 동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의 중심지로 남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후 새로운 수도가 되면서 명칭에 혼선이 생기는데, 사실 오스만의 정복 이전부터 투르크인들은 이 도시를 '이스탄불(Istanbul)' 이라 부르고 있었다. 아니, 이미 이것은 10세기 무렵부터 아랍에서 쓰던 명칭이었다. 뜻은 '도시에서', '도시로' 정도로, 서쪽에서 번영하던 대도시라는 이미지를 통해 좀 막연하게 붙인 명칭이었다.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한 전설이 있다.

처음 이스탄불을 방문한 터키인들이 도시에 거주하던 그리스인에게 도시의 이름을 물었는데 당연히 터키인은 터키어로 물었기 때문에 그리스인은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 도시요?" 라고 물었고, 이것을 그대로 도시이름으로 착각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엔하위키]

 

 

 

 

결국 위의 글 처럼 330년5월11일 로마노바(새로운로마, 비잔티움)로 천도한 후 약1160년 동안 존속하다가 1453년5월29일 로마노바, 신라마(新羅馬)가 함락되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흥미 있는 것은 같은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잉글랜드왕국과 프랑스왕국의 백년전쟁(百年戰爭, 1337-1453)이 끝나는 시기이고 또한 한반도에서는 계유정난(癸酉靖難:1453)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참고 할만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1) 음력10월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유정난이라 한다.

 


이스탄불의 어원을 본다

(originally Islamboul, the City of Islam).

원래 이스람불인데 이슬람 도시다.

하지만 이것도 서양 자료에 의존 것이라면 진의를 알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영어자료에는 Constantinople (Oriental West or Western Orient?)이라 하여 콘스탄티노플은 동방의 서쪽인지 혹은 서방의 동쪽인지 그들도 헷갈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분명 믿을 만한 자료에는 동방의 빛(Light of the East)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Istanbul)이라고 했다.

인류사에서 가장 영욕이 교차하는 도시라 일컬었으며 동로마의 수도로 1140년간 영화를 누렸고 몽골제국과 더불어 인류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건설했던 오스만 튀르크와 함께 600년을 함께한 도시라 했다.

위 글에서 보더라도 몽골제국과 더불어 인류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건설했다는 오스만 이란 묘사에 서 고려라는 강한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블로그에서 설파 한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이 콘스탄티노플은 개성(開城, 開平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뉴, 또는 새로운 등은 열 개(開)와 통한다.

새로운 것이니 여는 것이다.

오스만이 고려라면 그렇다.

 

1453년 '그리스의 불'로 철옹성이라 불렸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투르크의 전사들 앞에 철저하게 무너졌고 부패한 팔레올로구스(Constantine XI Palaiologos1405-1453,재위:1448-1453)에게 수탈을 당 할대로 당한 발칸의 농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오스만술탄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1481,재위:1444-1446, 1451-1481)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한다.

팔레올로구스(Palaiologos)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의문의 죽음을 하였으며 그 후 메흐메트 2세(Mehmed II)는 스스로 로마의 황제로 칭하였고 수도를 동방의 빛이라고 하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Istanbul)로 개칭하였다 한다.

서양사는 이를 오스만제국이라고 했다.

 

                                       [Constantinople-Kara-Kevi(Galata bridge)]

 

결국 비잔티움이라는 콘스탄티노플은 신라마(新羅馬)란 그리스의 불이었으며 동방의 빛(Light of the East)이었다.

타고르가 말한 동방의 등불(Lamp of the East)은 바로 신라마(新羅馬)와 연결되고 있었으니 신라(新羅)와 라마(羅馬)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라(羅), 마(馬)의 상징은 로마라고 한다면 그 로마는 신라와 백제와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신라냐 백제냐 이지만 혹자는 신라 백제가 혼입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로마와 동로마를 같이 보면 그럴 것이다.

서양 근대사가 의도적으로 혼합교열(混合校閱)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서양이 만든 근대사는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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